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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 1816:예천충효15(祝윤옥희/예천방문 342)
작성자장병창 @ 2009.01.14 06:51:27

  예천의 자랑(1816) : 예천 충효 15(附 예천군청 윤옥희, 13일 한국양궁 최우수선수로 선정... 축하합니다/예천방문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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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종 때 여진족을 토벌한
  박수우(朴守愚) : 1420(세종 2)-1510(중종 5), 호명면 백송리 함양 박씨 입향조(咸陽朴氏入鄕祖), 자는 유안(幼安), 본관은 함양, 치암 충좌(恥菴忠佐)의 후손, 1491년(성종 22) 5월 북변(北邊)에서 진장(陣將)으로서 6도(道)의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같은 해 8월 여진족 니료차(尼了車)를 죽이고 돌아왔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무반(武班)의 대경(大卿)에 이르렀다. 호명면 백송리(白松里)로 이거하여 대대로 살다가 그 후손은 다시 개포면 금리(琴里)로 옮겨서 살고 있다. 묘는 백송리자좌(子坐)에 있다(醴泉郡邑誌 1841, 醴泉郡誌 1939, 族譜). [醴泉의 金石文] : 선산에서 호명면 백송리 백송(白松)으로 옮겨 살았다. 자는 희안(希顔), 사과(司果) 귀손(貴孫)의 아들, 승안(承安, 係子)ㆍ연(演)ㆍ응린(應麟)ㆍ수(洙)ㆍ홍(洪)ㆍ준(浚)ㆍ형(泂)의 아버지이다. 병조 참판을 지냈다. 가승(家乘)의 북정일록(北征日錄)에서 이르기를, "1491년 8월에 군을 거느리고 나가서 온성(穩城)에 이르러 교전하여 모든 나머지 적을 참수하고 중위(中衛)는 니마거족(尼麻車族)을 패주시키고 돌아왔다."라고 하였다. 묘는 호명면 백송리 건지산(乾芝山) 자좌(子坐)에 있는데, 묘비문(墓碑文)은 1995년 1월 방후손(傍後孫) 경식(暻植)이 찬하였다.(醴泉의 金石文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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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괄의 난 때 창의한 박수의(朴守誼)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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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 때의 공신
  박승임 [記事] : 한국문집총간(036_403b) 소고집(嘯皐集, 1600)에 실린 소고 박승임(朴承任)의 기사로, 그 내용은, "嘯皐先生文集附錄下/ 記聞錄/ 先生在銀臺時曰。晦齋先生李某。篤信性理之學。沈潛積累。工夫至到。可以追配古人。當時人才。誰出其右。而論相之際。時議反謂才不逮於柳仁淑。竟以仁淑爲先。其一時之公議不公。如此。家藏日記/ 又曰。李?平生。不見齒於士林。含憤久矣。晦齋先生學問操行。爲士林之冠。此?之所以最忌嫉。而欲中以危禍也。輔養東宮。乃古聖賢明法。非晦齋創見而言之也。且所以輔養者。果專爲東宮之不安歟。大小尹交鬪之際。不無虞疑。故持正論者爲之憂慮。乃指爲阿附而懷二心。不亦甚哉。欲推失火之由。非謀害也。乃正論也。十條陳戒之辭。當幼沖在位。朝政未孚。賢否邪正之進退。不可不謹。封還內降。乃前史之美談。?欲加罪於無罪之正士。?拾而極言之。殊不知削名兇徒之勳籍。乃實晦齋之大幸。抑亦士林之大幸。同上/ 退溪李先生除工曹判書。召命再下。自鄕發來。因病滯于醴泉。又上辭狀。深陳擢拜未安之意。請退處養病。以保餘生。先生曰。進退惟義所在。不以世俗所謂富貴者動其心。此豈後世之人哉。同上/ 嘉靖壬戌二月日。經筵命講論古今於前席。日暮乃罷。先生曰。所貴乎講論治道者。遵古訓而遷善。鑑往跡而遠奸。此古人所以有不問蒼生問鬼神之歎也歟。同上/ 先生嘗曰。過而能改。可謂善矣。然孰若以義裁之於始。而無過可言。無過可改乎。同上/ 萬曆乙卯。鄕人張丹丘汝, 吳敬庵汝?。與士林?建精舍於山泉。金柏巖諸賢曰。我先師道德文章。不可屈於里社。事遂寢。門人全景迪錄/ 嘯皐先生文章德望。冠冕一世。餘澤及於鄕黨。好學讀書之功。暮年益篤。誘掖訓誨。成就後進。風聲如昨。山仰至今。而尙欠廟享之儀。責在吾黨云云。吳竹?澐集鄕人張汝等稟議于金柏巖, 吳竹?。?立鄕賢祠于鄕序堂之右。爲先生奉安之地。廟旣成。柏巖下世。遂爲幷享焉。榮州誌○金鶴沙應祖撰/ 退溪李先生與榮川?安?論紹修書院事書曰。榮有朴重甫。?有黃仲擧。先達者。後進之望也。而一境之倡也。城主誠能躬駕於此兩人而懇起之。士必雲集。而無敢後之者。退溪先生文集/ 又與?基?金慶言書曰。爲足下計。莫若先自咎。以責金仲文。又躬駕?榮二郡先達之鄕居者如朴重甫, 黃仲擧而懇起之。令約期詣院。而招諸生以入院。宜無不至者。同上/ 嘯皐朴先生諱承任。字重甫。自其大人參判公。自京移居於榮川。先生風範峻偉。器量寬敞。凝然寡言。未嘗有疾聲遽色。常?掃?案。焚香讀周易一編。少無怠慢之容。望之儼毅。就之溫潤。人不敢窺其涯?之萬一矣。李淸江濟臣漫錄/ 公平生。以忠孝自期。其愛君孝親之誠。自然溢出於言語動靜之間。道德文章。爲當世第一。而自幼勵志讀書。至忘寢食。遂成東國之君子。同上/ 隆慶己巳秋。赴天朝。先生爲副使。余爲書狀。同行萬里。觀其處己行事。待人接物。必以誠信交孚。前後使行中大爲中朝所欽服而嘉賞也。同上/ 先生之學問工夫。爲一國之所敬慕。而星象曆數之法。又極高明。槪見其用力之精深。不專於句讀記覽而止耳。同上/ 聖賢性理之書及星緯之學。無不融會貫通。而羲易, 論語, 程朱之書。尤致力精察。沈潛反復焉。自少時。門下樞衣之士四方雲集。所在?滿。各隨人才質之高下。而諄諄誘掖。成就人才。靡不用極。斯可謂誨人不倦也。世稱吾東方小退溪云耳。同上/ 先生歷事三朝。當乙巳己卯之歲。?少[小]釀禍。互相傾軋。淸班縉紳之家。盡入於網打之中。而先生獨免慘禍者。蓋一生淸愼謹飭之力也。門人金中淸日錄/ 朴承任字重甫。居榮川。號嘯皐。官至大司諫。當隆慶己巳。以冬至副使赴京。在往年間。朴謹元以千秋使赴京。鴻?寺仍私憾。乃退班降立我國使臣於生員雜類之下。厥后我國使臣。例立爲常。嘯皐乃慨然上書于禮部主事。主事彈指良久。卽白尙書復舊班。其時上使柳從善。先生爲副使。書狀官李濟臣也。先生在我國。以道德文章名。返命之日。當錄日記以上。而降班事。若上聞。則謹元以下逐年諸使臣。皆受罪貶。故闕錄而遂致上不得聞。史不書冊。而往者榮川門生等。修遺藁。失其本草。反索於?之私記。?卽傳而送之。厥后。史官黃汝一。索嘯皐上書於嘯皐子家而取去。?第未知編史與否也。南甁菴野史/ 先生之道德文章。固非屹之所能彷彿摹?。且牘帖散逸。聞見不慣。而?欲狀焉。如人行於雲霧隱見之中。所見者只是山嶽之??。江海之汪洋而已。其如窈窕洞壑。淸?溪澗。一切遮掩。莫之或窺也。非但此然。其所謂??汪洋者。僅得其一。不得其二者有之。良足憾歎也。狀之規制。略倣黃勉齋所撰朱子行狀。而其間或有用俗規者。?以此爲可用。而欲穢寫於遺稿之末端。則須與諸丈。百分詳議刪潤。然後乃可。門人任龍潭屹手錄/ 柳西厓自慰詩末句曰。人間何事勝無事。一曲滄浪弄明月。註曰。朴嘯皐先生詩云。何事勝無事。晴雲在谷中。急收塵土跡。歸對舊山容。余嘗愛其意趣。故用之。西厓文集/ 先生道德文章。蔚然爲百世師表。沈潛乎性理。硏究乎蘊奧。天行之健。?數之妙。亦皆洞澈。自少到老。至忘寢食。其仕宦之時。有片隙則必讀易。素無營進之意。而必務自?晦。淸選高爵。非其志也。在朝也。洛中人士。無不挾冊在門生之列。雖高官之人。亦皆爲束脩之禮。下鄕也。遠近老少。亦常盈門而學。至於?滿?家而讀。?歟盛矣哉。剛州一境之內。洋洋絃誦之聲。四時不絶。以耳目之所睹記。家家禮讓。戶戶講?。誠所謂鄒魯古邦者非虛語也。嘗?集禮經餘意。而纂次四禮辨解二編。又致詳於喪祭。箚記其疑晦處。就質於退溪。仍成一?。名之曰疑禮講錄。自幼時。最積精會神於周易一部。推演卦象爻辭及洛書之數。而各成一編。皆先生手錄者。退溪亦嘗參玩而歎賞焉。右等諸篇。皆不免散失。可勝惜哉。惟我先生學問造詣之妙。有非後生末學之所可?測。而泯滅無傳焉。其爲師門之慨恨。烏得已也。況余自兒就學。受先生誘掖。至矣切矣。追思?日。淚在言前。竊念大人君子之手澤。自古有遺失。而或掘坎得露者。或神龍負出者。此後數百載之下。安知使先生一生精力所致之若干編什。復出於世。而不爲大有益於斯文也耶。聊書以識之。門人琴松陰復古筆說/ 當代文章之士。盧守愼, 金貴榮, 尹鉉, 李後白, 朴承任, 奇大升最著云。柳眉巖希春日記/ 嘯皐先生德業文章。在人耳目。而昔吾先君。每爲景慕。以爲吾鄕間世之賢。今日祭社之擧。實爲先君之倡。吳敬庵汝?書/ 先生性沈重。文章雄渾。滔滔不渴。庚子。司馬兩事及文科俱中。姓名藉甚。入槐院及讀書堂。踐歷淸要。久掌絲綸。不喜進趨。晩多補外。公以誨人爲己任。至老猶不倦。李炊沙汝?師友錄/ 溪門諸子錄略曰。公凝重寡言。喜怒不形。爲文。操筆立成。二十四。擢第。以弘文正字。賜暇東湖。蓋極選也。先生少時。往來草谷公遊從焉。明廟朝。許草堂, 奇高峯諸賢。爭薦先生。期於出用。而公則的知先生之意。終不强勸其出。其在銀臺記事曰。某之學問由天德。達於王道。豈果於忘世者。若君心誠於取善。而樂於見賢。則雖欲退安一方。其於師民之責。何。今也玉貂?則假威權。溺左道則護沙門。惑淫祠則拿章甫。耽私畜則縱宮奴。沈痼之症若是。而辭令之間。徒以予無好賢之誠。有若逼而來之者。果可以起?畝幡然之心乎。公務自?晦。不樂進趨。早以文章伏一世。又沈潛性理之學。專精講究。星緯?數。亦無不理會精熟。尤用力於論, 易學, 禮經及朱子書。反復紬繹。以質於退溪。多印可焉。與李黃江希顔, 盧蘇齋守愼, 盧玉溪?, 李龜巖楨, 金甁山鸞祥相友善。所著孔門心法, 綱目心法等書藏于家。文集若干卷行于世。李翊贊守淵所撰/ 先生天姿純厚。溫然如玉。瀅然若氷。元非一點塵埃中氣象。學問眞積。剛毅凝重。雖處危機之逼迫。而堅確不屈。有古人不可奪之操也。從子?所錄/ 嘗守?基郡簿牒之暇。以一馬一童。或?佯於山水之間。每遇奇勝處。則嘯傲歌詠。至忘還官。飄然若忘世機者也。從子?日錄/ 每侍坐於?丈。從容問酬之際。如入春風之室。孫檜茂記/ 嘗語門生子弟曰。吾平生。沒頭役志於爵祿之中。不得專心致力於自家工夫。未死之前。爲一大恐懼處也。同上/ 閔興建嘗受綱目於先生。而一日所學。多至累冊。先生曰。君之聰明雖絶人。而學者之要。在沈潛玩味。積久講習。可以利於身心。可以措諸事業云。家藏日記/ 嘯皐先生文集附錄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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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승임 [記事] : 영주금석문전집Ⅰ/ 간행년 : 1999/ 저자 : 영주문화원/ 발행처 : 영주문화원/ 嘯皐 朴承任 墓碑/ 嘯皐 朴承任 墓碣銘幷序 : 經世少從故敎官田公受漢書 授讀餘間 吃吃說故大司諫嘯皐公事不厭 其言曰 外舅爲人 ?精恬曠 於物無所好 獨好書如耆欲 晷刻不去手 凡買書 或得宣賜 輒硏朱點句 一一勘過 雖如儀禮綱目朱子大全語類等書 卷帙浩穰 而率不過數旬而卒業焉 田公素不爲苟言者 余聞而歆艶之 重歎先輩用力之精勤 非後學之所及也 後與故學諭金君天英 論易學啓蒙當朞章 見其讀難書甚易 而布?乘除 手口相應 無不如法 ?其來歷則曰 嘗得之於嘯皐先生 先生之於此 蓋所謂精通而妙悟者也 於是 益知公所以?精於簡編者 不專於詞章記覽 而以未及及門 爲平生不幸也 ?者公之嗣子都事君 以書及金君中淸狀來 屬余爲墓銘 嗚呼 此豈余之所及邪 然而終不敢固辭者 不徒以見屬之甚勤 蓋欲以自償其平日慕用之心也 謹按公姓朴氏 諱承任 字重甫 其先羅州人 高麗右文館直提學尙衷之後 本朝佐命功臣左議政平度公?之五世孫也 曾祖諱秉鈞 司?署令 贈左通禮 祖諱? 副司直 贈左承旨 考諱珩 成均館進士 贈吏曹參判 ?禮安金氏 贈貞夫人 皆以公貴也 公生而秀異 幼穉時受史略 問曰 武王旣爲天下伐暴 則何不擇商宗室賢如微子者立之 而乃自取邪 參判公大奇之 未成童 詞藻已渙發 欲赴鄕解 參判公慮太驟 不許公作騈儷文五十餘句述其懷 見者皆驚歎 自是聲譽蔚然 累冠解圍 年二十四 陞上庠取巍科 選補承文院 數年間 遷藝文館承政院 凡參下望職 無不歷敭 至以正字賜暇湖堂 則又世之所罕也 嘉靖乙巳 仁廟以聖德出震 玉堂上箚萬餘言 極論出治之本 正始之道 更化改紀之務 公所草也 陞修撰 尋遷吏曹佐郞 同僚欲引進匪人于銓地 公以爲不可 則遷公正言 而以其人代之 先是 陳復昌以公有重名 欲籠絡之 要請甚勤 公終不見 至是 復昌爲大司憲 勢?薰灼 公欲劾之 同席愕貽不從 翌日 呈覲南歸 尋遞職 復昌嗾李? 將?置重律 李元祿力解之 止罷公禮曹正郞 戊申 丁內艱 明年 ?外憂 服除 除玄風縣監 歲饑而疫 民多札? 監司以公有愛物心 委以諸邑賑恤事 出入??中 盡心拯濟 所全活甚衆 丁巳 由直講遷司藝 時尹元衡方擅柄 公棲遲散秩 杜門讀書 不爲所濡染 明年 出爲?基郡 郡甚?弊 倉實空虛 或勸公宜申使臺 徵欠於前承 公義不可爲之 薄自奉 縮浮費以充之 遂焚其逋券 秩滿 授校勘不就 尋拜軍資正 轉判校 乙丑 陞兵曹參議 丙寅 遷同副承旨 居半歲 俄拜晉州牧 淸淨爲治 不煩?楚 而豪猾畏? 隆慶己巳 賀至于京師 故事使臣於禮部 有見堂禮 於鴻?則無之 穆宗初 始以文官爲鴻?卿 以重其任 則禮應相見 而使臣只依舊例 鴻?怒貶使臣班 令序於僧道雜流之下 使臣?首就列 不辨而還 公至則呈文禮部 往復論辨 遂得立班如初 後 上見中朝朝報 有朝鮮使臣失禮序班越祿等語 命廉問于前後譯官 則皆以爲事在後行 而公終不自明 上考據歲月 遂罪前使一行 人皆大先王之明 而服公之雅量 辛未 觀察黃海道 壬申入爲左承旨 萬曆癸酉 轉都承旨 甲戌 出尹慶州府 府有集慶殿 奉安太祖影 人無大小 欲見輒開 公謂不宜若此褻 乃令奉審外 毋得擅開 新羅廢苑甚廣 可種粟數十斛 藝蔬其中 以供官用 爪果狼戾而役民不? 公捐其地什九以爲屯田 民甚便之 丙子 復拜都承旨 丁丑 授江華府 以事遞 尋拜驪州牧 創置書院 立廟祀慕齋金公 民有厚儲 而薄母者 公?致而譬曉之 其人頓?服罪 自是事母謹 以孝聞 辛巳 除春川府 明年 謝病歸 癸未 自工曹參議 拜大司諫 是時 朝論分門 各爲?援 公坐言事?旨 左遷爲昌原府使 未滿瓜 許令解歸 皆特命也 明年丙戌 年七十 以病卒于家 葬所居永川郡東林丘村震向之原 乃公外祖考金公萬鎰之兆次也 後鄕人慕其德 立祠于社而俎豆之 公風儀俊偉 宇量恢弘 凝重寡言 喜怒不形 非疾病則未嘗有惰容 人與之處 久而不見涯? 於書無所不讀 而尤用力於論語及朱子書 有疑輒記 反覆紬繹 必求通透 嘗以質於退溪李先生 多印可焉 李先生所編啓蒙傳疑 ?次象數諸家 微?難曉 而能一一硏究 各極其趣 至於星緯?數等事 亦無不理會而精熟 蓋其不局於一藝如此 性好淡泊 衣食取足溫飽 所居環堵蕭然 在都下 賃人屋以處 夷然不以爲意 平生不喜交遊 不輕論議 雖仕宦時 公退輒歸 輒閉戶沈潛 子弟或問以時事則曰 非汝輩所當與 後進請業則雖?蒙 皆爲之傾倒提誨 爲文章 不爲?銶 下筆滔滔 如不經意 而精建典實 自然人不能及 亦未嘗以是自多 少時 爲遠接從事 所過亭館 不爲題詠 時或發於酬和 而禁不懸板 不欲衒其能也 中年以後益不喜賦詩曰 詩令人浮薄 不可留意也 所著有孔門心法類聚綱目心法等書未脫稿 只有文集四卷行于世 公配貞夫人醴泉權氏執義五紀之女 孝順儉謹 甚得婦道 哭母 哀毁成疾 年五十三而逝 葬于他所 公歿移?焉 男長曰漁 夭 次曰? 義禁府都事 曰? 進士 曰漑 側室出也 女長適贈判決事李復元 季適田克禮 旣說公事不厭者 都事有男二 檜茂義禁府都事 ?茂進士 女一 適察訪金幾善 進士有男?茂 女適主簿李慶胤 判決有男五 曰遲 同知中樞府事 曰遵適 皆參奉 曰逈 曰建 僉正 女三 長適贈都承旨高從厚 次適李根坤 季適金克銓 敎官有男見龍 夭 女二 長適士人洪處約 季適宣傳官金起先 內外曾玄孫 又一百四十餘人 銘曰 大雅云邈 文弊而工 不蓄其有 纂組爲功 剽竊見聞 詞不己出 或奇而晦 或華而薄 惟公積學 日大以肆 上窮灝靈 旁搜百氏 發爲文章 渾厚而光 譬彼河江 源遠流長 有大於此 文藝其末 孝悌于家 辭修行潔 覃思大源 靡?不探 有來求我 如車指南 ?專皐比 或掌絲綸 必煥皇猷 施及于人 蹇于明時 匪公無祿 來者有考 請視斯刻/ 正憲大夫 禮曹判書 兼同知經筵事 藝文館提學 世子左副賓客 鄭經世撰/


  소고 박승임 묘갈명(嘯皐 朴承任 墓碣銘)서문을 병기함 : 내가 소싯적 전교관(田敎官)공에게 한서(漢書)를 배웠더니 가르치는 여가에 웃으시면서 대사간(大司諫) 박소고(朴嘯皐)공의 이야기를 자주 하시었다. 장인(丈人)의 사람됨은 침착하고 고요하며 담박해 물질에는 좋아하는 바가 없어도 유독 서적만은 매우 좋아해서 잠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으며 무릇 책을 사거나 혹은 하사를 받으면 문득 붉은 먹물로 일일이 점을 찍어 내려가니 비록 의례, 강목, 주자대전, 어류 등 같이 권질이 방대한 것도 모두 불과 수순(數旬)만에 다 마치었다고 했다. 전공(田公)은 본래 무책임한 말씀은 하지 않으시기에 나는 듣고 좋아하면서 거듭 선배의 근실한 노력이 후학으로서는 미칠 바가 아님을 감탄하였다. 그 후 고인이 된 학유(學諭) 김천영(金天英)군과 함께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논하다가 기삼백장에 이르러 그 어려운 글을 매우 쉽게 읽고 그 승제(乘除)를 계산함에 있어 말하는대로 손을 놀려 모두 법에 맞게 하였다. 그 내력을 물어보자 소고(嘯皐)선생에게 배운거라 했으니 선생은 이에 이른바 정통해서 묘오한 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당시 공은 서적에 정통했어도 작문과 암송을 전문으로 하지는 않으셨으니 그의 문하에 들지 못했음이 평생의 불행이었다. 그런데 근래에 공의 사자(嗣子) 도사군(都事君)이 편지와 김중청(金中淸)군이 지은 행장(行狀)을 보내어 내게 비문을 부탁했다. 아아! 이것이 어찌 나의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끝내 거절하지 못한 것은 그 부탁이 몹시 간절할 뿐 아니라 대개 평일에 경모하던 마음을 표현하려하기 때문이다. 삼가 상고하니 공의 성은 박씨(朴氏)요, 이름은 승임(承任)이며, 자(宇)는 중보(重甫)이다. 선조는 나주인(羅州人)이니 고려 우문관 직제학 상충(尙衷)의 후예며, 본조에 좌명공신으로 좌의정을 지낸 평도공(平度公) 은(?)의 6세손이다. 증조의 이름은 병균(秉鈞)이니 사온서령(司酪署令)으로 증좌통례(贈左通禮)요, 조의 이름은 숙(숙)이니 부사직(副司直)으로 증좌승지(贈左承旨)며, 아버지의 이름은 형(珩)이니 성균관진사로서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이다. 어머니는 예안김씨(禮安金氏)니 증정부인(贈貞夫人)인데 모두 공으로 인해서 증직된 것이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남달라서 어릴 때 사략(史略)을 배울 적에 “무왕이 기왕에 천하를 위해 폭군을 정벌했다면 어째서 상(商)나라 왕실의 미자(微子)같은 현자를 왕으로 세우지 않고 스스로 취했습니까?”라고 물으니, 참판공(參判公)이 기이하게 여겼다. 아직 15세도 안되어서 문장이 이미 원숙했는데 향시에 응시하고자 하자 참판공이 너무 이르다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공이 변려문(騈儷文) 50여 구를 지어서 그 회포를 서술하니 보는 자가 모두 경탄하였으며 이로부터 명성이 크게 나고 여러번 향시에 장원을 하였다. 24세에 진사가 되었고 또 문과에 급제해서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었다. 이후 수년 사이에 예문관, 승정원, 홍문관에 천거되었거니와 무릇 7품 이하의 관직에서 명망을 드날리지 아니함이 없었으며 정자(正字)로서 호당(湖堂)에 사가(賜暇)되었음은 또한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가정(嘉靖) 을사(1545)에 인종(仁宗)께서 성덕으로 왕위에 오르자 옥당에서 만여언의 차자(箚子)를 올려 정치의 근본과 시작을 바르게 하는 대도와 교화하고 연호를 고치는 요무(要務)를 극론한 것은 공이 초안한 것이었다. 그리고 수찬으로 승진해서 조금 있다가 이조좌랑으로 전임되었는데 동료가 전형직(銓衡職)에 소인을 등용하려 하기에 공이 그것을 반대하니 공을 정언으로 전임시키고 그 사람을 대신 좌랑에 선임했다. 그 먼저 진복창(陳復昌)이 공의 명망이 높은 것을 알고 농락을 하고자 자주 요청을 했는데 공은 끝내 만나 보지 않았다. 그때에 이르러 복창은 지평이 되어 세력이 켰다. 공이 그를 탄핵하려고 하였으나 동석한 자가 따르지 않으매 이듬해 귀향해서 부모님을 뵈었다. 조금 뒤에 직책이 바뀌더니 복창이 이기(李?)를 시켜서 장차 무거운 형률을 가하려고 도모했으나 이원록(李元祿)이 힘써 해명하여 예조정랑의 벼슬을 파면함에 그쳤다. 무신(1548)에 모친상을 당하고 그 이듬해에 부친상을 또 당하였다. 탈상한 뒤에 현풍현감으로 임명되었는데 흉년이 들고 전염병으로 백성이 많이 죽었다. 감사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공을 여러 고을에 진휼하는 일을 위임하니 굶어 죽은 자들 사이를 출입하면서 마음을 다해서 구제하여 목숨을 건진 자가 심히 많았다. 정사년에 직강에서 사예로 전임되었다. 그때 윤원형(尹元衡)이 전권을 쥐고 있었는데 공은 직위에 마음이 없어서 문을 닫고 독서만 하고 절대로 그에 감염되지 아니하였다. 그 이듬해에 풍기군수로 나갔더니 군에 폐해가 심해서 창고가 텅비어 있었다. 그래서 어떤 자가 공에게 재정이 전임에서 결손되었음을 신고하라고 권했으나 공은 그것이 옳지 않다 하고는 자신의 봉록을 박하게 하고 쓸데 없는 소비는 줄여 이에 충당하였으며 드디어 그 포탈한 문서는 태워버렸다. 만기가 되어 교감(敎勘)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조금 뒤에 군자정(軍資正)이 되었다가 판교(判校)로 전임하였다. 을축년에는 병조참의로 승진하고 병인년에는 동부승지로 옮겨서 반년을 지낸 뒤에 체임되어 바로 진주 목사로 부임했는데 정치를 깨끗하게 하자 번잡하게 태형을 쓰지 않아도 간악한 자들이 두려워하였다. 선조 2년 기사(1569)에 하사(賀使)로 명나라 서울에 갔다. 고사에 사신은 예부에서는 현당례(見堂禮)가 있고 홍려(鴻?)에는 없었다. 목종(穆宗) 초에 비로소 문관으로 홍려경(鴻?卿)을 삼아 그 직임을 높혔기에 예의상 응당 상견(相見)을 해야 할 것이나 사신은 다만 구례에 따랐다. 홍려가 노하여 사신을 격하해서 서열을 승도(僧道) 잡류(雜流)의 아래로 내리니 사신은 머리를 꾸부리고 그 서열에 나아가서 분변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었다. 공이 이르러서 예부에 글을 올려 논변을 왕복하여 드디어 서열을 처음대로 하게 되었다. 그 후 왕이 중국의 조보(朝報)를 보니 조선 사신이 실례해서 서열이 내려졌다는 말이 있기에 전후의 역관에게 자세하게 물었다. 모두 그 일이 있기 전에 다녀왔다고 하고 공은 끝내 스스로 밝히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왕은 시일을 상고해서 마침내 그전에 갔던 사신 일행을 처벌하자 사람들은 모두 왕의 현명함을 존중하고 공의 아량에 감복하였다. 신미(1571)에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고 임신에 좌승지로 입직하였다. 선조 6년에는 도승지로 전임되고 갑술년에는 경주부윤으로 나갔다 그 부에는 집경전이 있어서 태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대소인을 물론하고 보고자하는 자에게는 모두 열어 보였다. 공이 이와 같이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참배하는 외에는 임의대로 열지 못하게 하였다. 신라의 폐원(廢苑)이 심히 넓어서 서속(黍粟) 수 십 섬을 심을 만하였다. 소채 등을 그곳에 재배해서 관용으로 썼는데 관리의 수탈이 심해 백성들에게 도움이 안되었다. 공이 그 토지의 10분의 9를 둔전(屯田)으로 하자 백성들이 심히 펀리하게 되었다. 병자(1576)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정축(1577)에 강화부사가 되었다가 어떤 일로 교체되었다 뒤에 바로 여주 목사가 되어서 서원을 창설하고 묘우를 세워 김모재공(金慕齋公)을 받들어 제사 지냈다. 백성 중에 재물은 많이 모았으면서도 모친을 박대하는 자가 있기에 공이 잡아다가 타이르자 그 자가 절을 하면서 그 죄를 자복하고 그 후로는 모친을 삼가 섬겨서 효자로 소문이 났다. 신사(1581)에 춘천부사로 나갔다가 그 이듬해에 병으로 사양하고 돌아왔다. 계미년에는 공조참의에서 대사간이 되었는데 그 때 조정의 의논이 분열되어 각각 파당을 지었다. 공의 언사가 왕의 뜻에 거슬려 창원부사로 좌천이 되었으나 임기 미만에 해제되어 귀향했는데 이것은 모두 특명이었다. 그 이듬해 병술(1586)에 노병으로 70세의 나이로 본가에서 돌아가셔서 거처하던 영주 고을 동쪽 임구촌 진향(震向)의 산에다 장사지냈으니 외조고 김만일(金萬鎰)공의 묘 아래이다. 그 후 고을 사람들이 그의 덕을 추모해서 사당을 세워줬으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공의 풍채는 준수했고 도량은 넓고 컸다. 중후해서 말수가 적고 희노를 나타내지 않았으며 병들지 않은 경우에는 게으른 얼굴을 하지 않았고 사람과 오래 사귀어도 한도를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서적은 읽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더욱이 논어와 주자서에 힘을 줬다. 의문이 있으면 문득 기록하여 거듭거듭 연구해서 반드시 통하기를 구하였으니 일찍이 퇴계 선생에게 질의하여 많은 인정을 받았다. 이 선생이 편찬한 계몽전의(啓蒙傳疑)에서 상수(象數)에 대한 제가의 난해한 발을 모아 일일이 연구해서 각각 그 뜻을 통하였다. 산수(算數) 같은 서적도 또한 이해해서 정통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대개 한가지 기예에만 국한하지 않았음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성품은 담박한 것을 좋아했으며 입고 먹는 것은 따뜻하고 배부르기만 하면 되었다. 사는 집은 담장이 허술했으며 서울에서는 남의 집을 빌려 살아도 전혀 개의하지 않았다. 평생에 교제를 즐기지 아니하고 경솔하게 논쟁하지도 않았다. 비록 벼슬살이를 할 때에도 공은 퇴근 후에는 바로 귀가하고 귀가하면 문득 문을 닫고 연구를 하였다. 자제들이 혹 시사를 물으면 너희들이 간여할 바는 아니라고 했으며 후진들이 수업을 청하면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마음을 다해 가르쳤다. 글을 쓰는 데는 남의 눈을 끌거나 마음을 맞추는 것을 구하지 않았으나 붓을 들면 도도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 해도 건실하고 전아한 글이 되니 자연히 남들은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도 자만하지는 아니하였다. 소시에 원접(遠接)하는데 종사하여도 지나가는 누정에는 시를 짓지 아니하고 때로 혹 타인과 수창해도 현판에 새기지는 못하게 하였으니 그것은 능함을 자랑하고자 아니한 때문이다. 중년 이후로는 더욱 시짓기를 즐기지 아니하였다. “시는 사람을 부박하게 만드니 유의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저술로 공문심법유취(孔門心法類聚), 강목심법유취(剛目心法類聚) 등이 있으나 미탈고로 있고 문집 4권만이 세상에 행한다. 공의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예천 권씨(醴泉權氏)니 집의(執義) 오기(五紀)의 따님으로 효순하고 근검하여 부녀자의 도리에 극진하였다. 모친상을 당해서는 너무 애통해하다가 병이 나서 향년 53세로 서거하니 다른 곳에 장사지냈다가 공의 사후에 옮겨서 부장하였다. 아들로 맏은 어(漁)니 일찍 죽고 차(次)는 록(?)이니 의금부 도사이며 차자는 조(?)이니 진사(進士)요 차자는 개(漑)니 측실의 소생이다. 딸로 맏은 증판결사 이복원(李復元)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전극례(田克禮)에게 출가했는데 바로 공의 사적을 즐겨 말했던 분이다. 록의 장남은 회무(檜茂)니 의금부도사이며, 차남은 종무(?茂)이니 진사요, 딸은 찰방 김기선(金幾善)에게 출가하였다. 조(?)의 맏은 재무(梓茂)며 딸은 주부 이경윤(李慶胤)에게 출가했다. 이복원은 아들이 다섯인데 지(遲)는 동지중추부사요, 준(遵)과 적(適)은 참봉이며 형(逈)과 건(建)은 첨정이다. 딸은 셋인데 증도승지 고임후(高任厚), 이근곤(李根坤), 김극전(金克銓)에 출가했으며, 전극례의 아들은 견룡(見龍)인데 일찍 죽었고 딸은 사인 홍처약(洪處約), 선전관 김기선(金起先)에게 출가하였다. 내외 증현손이 140여 인이다. 명하노니/ 대아(大雅)가 멀어질수록 글은 교묘함을 일삼아/ 가진 것은 안 기르고 사장(詞章)으로 공을 삼는다./ 보고 듣고 표절(剽竊)함은 그 문장이 남의 것인데/ 기발해도 어두운거요 화려해도 경박하지만/ 오직 공은 학문 쌓아 날로 장대 하시었네./ 위로 서경(書經) 연구하고 널리 백가(百家) 고루 찾아/ 문장으로 발휘되니 혼후하고 광채났네./ 저 강하에 비유하면 근원이 멀고 긴 것 같은데/ 보다 더 큰 것 있으니 문예는 그 말단이었다./ 가정에선 효제하니 수행함이 깨끗했고/ 큰 근원을 사색하니 깊은 이치를 탐지했네./ 내게 와서 구하면 지남거(指南車)와 같으며/ 강석에서 가르치고 혹 왕명을 맡으셨네./ 왕의 계책 빛을 내서 만인에게 시행하니/ 밝은 세상에 불우함은 공의 복없음 아니로다./ 후인이 상고 하려거든 이 비석을 볼지니라./ 정헌대부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사, 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을 겸임한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지음.(www.koreastudy.or.kr 2007)


  박승임(朴承任) [記事] : 생애이야기/ 성명 : 박승임(朴承任)(1517년(중종 12) ~ 1586년(선조 19))/ 본관 : 반남 (潘南)/ 자 : 중보 (重甫)/ 출생지 : 영천군(榮川郡) 두서리(杜西里, 斗西里)/ 출신지 : 영천군(榮川郡) 원당리(圓塘里)/ 분묘지 : 영천군 임구촌(林丘村)/ 입사경로 : 문과(1540년)/ 외관직 : 현풍 현감(玄風縣監), 풍기 군수(豊基郡守), 진주 목사(晉州牧使),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경주 부윤(慶州府尹), 강화 부사(江華府使), 여주 목사(驪州牧使), 춘천 부사(春川府使), 창원 부사(昌原府使)/ 문과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하다 : 박승임은 1517년(중종 12) 경상도 영천에서 아버지 박형(朴珩)과 어머니 예안김씨(禮安金氏) 사이의 7남 중 6남으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도량이 중후하였다. 어린 시절 놀이를 할 때에도 이미 대인(大人)의 기상을 지녔다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크게 촉망받았다. 20세가 되던 1536년(중종 31) 예천권씨(醴泉權氏) 집안 졸헌(拙軒) 권오기(權五紀)의 딸과 혼인하였고, 4년 뒤인 1540년(중종 35) 24세의 나이로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셋째형 박승간(朴承侃)을 비롯하여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일계(逸溪) 채무일(蔡無逸), 입암(立巖) 유중영(柳仲?) 등 인근의 뛰어난 학자들 역시 함께 급제하여 박승임과 동방(同榜)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한 박승임은 이후 예문관 검열과 승정원 주서를 거쳐 홍문관 정자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1544년(중종 39)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비롯하여 홍섬(洪暹)·정유길(鄭惟吉)·유희춘(柳希春)·김인후(金麟厚)·노수신(盧守愼)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과 함께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의 영예를 누렸다./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 고향에 머물며 절의를 지키다 : 박승임은 1545년 인종 즉위 직후 홍문관 박사·수찬 및 이조 좌랑 등의 요직에 올라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희생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을 청하는 계(啓)를 올리는 등 사림의 일원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명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을 관장하는 홍문관 교리와 시강원 문학을 역임하였고, 다시 이조 좌랑을 비롯하여 성균관 전적·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홍문관 응교 등 이조(吏曹)와 관각(館閣)의 주요 관직들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1547년(명종 2) 일어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인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충재(?載) 권벌(權?)이 유배를 가게 되자, 윤원형(尹元衡)을 비롯한 권간(權奸)들을 비난하는 시를 지어 그들을 송별한 뒤 사직서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온 박승임은 4년 동안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스승인 퇴계를 모시고 단양(丹陽) 등지를 유람하며 오로지 학문에만 힘을 기울이다가 은거 4년만인 1551년(명종 6) 현풍 현감으로 부임하여 고을 유생들을 모아 향약(鄕約)을 실시하고 향교에서 『심경(心經)』을 강론하는 등 백성들의 교화에 온 힘을 다하였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그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석을 세우려 하기도 하였다. 1557년(명종 12)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직강과 사헌부 장령 등의 관직을 제수하였지만, 그는 국정을 농단하던 윤원형의 전횡을 꺼려 조정에 나아가지 않은 채 고향에서 독서에 열중하였다. 1558년(명종 13) 풍기 군수에 제수된 박승임은 기쁜 마음으로 풍기에 부임하여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경감해 주어 민생을 안정시키고,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자주 들러 유생들과 강학하며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영정을 새로 제작하는 등 치적을 남기고 5년 만에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힘쓰며 취향정(翠香亭)과 동리서재(東里書齋)·소고대(嘯皐臺) 등을 짓고 은자(隱者)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다시 조정에 나아가 ‘치행제일(治行第一)’이라는 칭송을 얻다 :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승하하고 윤원형이 제거되자 다시 조정에 나아간 박승임은 이후 병조 참지와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진주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고을의 부로(父老)들을 모아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향약을 실시하며 백성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1568년(선조 1) 병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였지만, 이듬해 동지부사(冬至副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박승임은 1570년(선조 3) 승정원 좌승지에 오른 뒤 을사사화의 거짓 공훈을 없앨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며 명종 연간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으려 노력하였고, 병조 참의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1571년(선조 4)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가 곧 조정으로 돌아와 홍문관 부제학과 도승지에 올라 임금의 근신으로 활약하였다. 1574년(선조 7) 경주 부윤, 1577년(선조 10) 강화 부사, 1578년(선조 11) 여주 목사 등 지방관을 역임하는 동안, 박승임은 세금을 가벼이 하고 진휼을 실시하여 민폐를 제거하였다. 한편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제향한 기천서원(沂川書院)을 건립하는 등 민생의 안정과 교화의 보급에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이에 어사(御史) 정이주(鄭以周)는 박승임의 치적이 가장 뛰어나다는 ‘치행제일(治行第一)’이라는 계를 올렸고, 선조는 박승임의 공로를 치하하여 특별히 옷을 하사하였다. 이듬해 박승임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려 하자 백성들은 그가 가는 길을 막고서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였다. 이후 박승임은 춘천 부사와 병조 참의·공조 참의 등의 요직을 거쳐 1583년(선조 16)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으나, 당시 서인의 영수이던 박순(朴淳)과 이이(李珥)의 당론을 비난하는 간언을 올렸다가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좌천되고 말았다. 그리고 1585년(선조 18)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한 뒤 이듬해 병을 얻어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www.koreastudy.or.kr 2007)


  박승임(朴承任) [記事] : 가족이야기/ 조 : 박숙(朴[孰+石])/ 생부 : 박형(朴珩)/ 모 : 예안김씨(禮安金氏) 김만일(金萬鎰)의 딸/ 처 : 예천권씨/ 형제 : 박승문(朴承文), 박승건(朴承健), 박승간(朴承侃), 박승준(朴承俊), 박승인(朴承仁), 박승임, 박승륜(朴承倫)/ 좌명공신(佐命功臣) 박은(朴?)의 후예 : 박승임의 집안은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이후 고려 초 반남현(潘南縣)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박응주(朴應珠)를 중시조로 삼는다. 7대조는 고려 말 밀직 부사(密直副使)를 지낸 박수(朴秀)이며, 6대조는 공민왕대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을 지내고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여말 선초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활약했던 박상충(朴尙衷)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5대조 박은이 개국 초반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태종을 보필한 공로로 좌명공신에 오르고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집안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명문가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고조부 박규(朴葵)는 음직(蔭職)으로 출사(出仕)하여 황해도·평안도·경상도의 관찰사를 지냈으며, 증조부 박병균(朴秉鈞)은 사온서령(司?署令)에 올랐다. 조부 박숙은 충의위(忠義衛)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는데, 서울에서 안동(安東) 가구촌(柯丘村)으로 옮겨 머물렀으며, 아버지 박형이 성균 진사로 안동을 떠나 영천(榮川)으로 터전을 옮겼는데, 그로부터 대대로 살아오게 되었다./ 엄격한 어머니, 예안김씨(禮安金氏) : 어머니는 영천의 명문 가문이었던 예안김씨 출신으로, 김만일(金萬鎰)의 딸이다. 자식을 교육함에 올바름을 다하여, 의관이 반듯하지 못하거나 말씨가 불소한 경우 엄하게 꾸짖어 법도를 따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또한 학식이 깊어서 『천자문(千字文)』과 『효경(孝經)』을 입으로 외워서 가르쳤고, 밤에 누워서도 그치지 않았으므로, 박승임의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공부하는 일을 습관으로 삼을 수 있었다. 자식들이 조금 자란 뒤에는 장난질로 공부를 소홀히 할까 두려워하여 늘 감독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며, 처신을 올바로 하고 주색을 멀리 하라고 늘 간절히 훈계하던 엄한 어머니였다. 박승임은 7형제 가운데 6남이었는데, 맏형 박승문은 훈도(訓導)를 지냈고, 둘째형 박승건은 생원(生員)이었다. 셋째형 인암(忍菴) 박승간은 1600년(선조 33) 박승임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과 예문관 그리고 사간원 등 주요 관직에 올랐다. 넷째형 박승준은 진사(進士)를 지냈다. 또한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었던 야천(冶川) 박소(朴紹)는 박승임에게 삼종형(三從兄)의 관계였다. 박승임은 부인인 예천권씨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박어(朴漁)는 요절하였고, 2남 박록(朴?)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3남 박조(朴?)는 진사였는데, 박승임보다 1년 앞서 세상을 떠났고, 사위는 충의위(忠義衛) 이복원(李復元)이다.(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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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육신과 뜻을 함께 한 충신인 박심문(朴審問)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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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청 윤옥희, 13일 한국양궁 최우수선수로 선정... 축하합니다.


  윤옥희(‘베이징 金’ 尹玉姬, 洋弓 最優秀選手) [記事] :


  2008 베이징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 금메달리스트인 윤옥희(24.예천군청)가 한국 양궁 최고의 선수로 뽑혔다.


  대한양궁협회는 2009년 1월 13일 송파구 방이동의 한 식당에서 정기이사회를 열어 이같이 결정했다.


  윤옥희는 2008년 4월 터키 안탈리아에서 끝난 2008년 제3차 양궁 월드컵 여자부 개인전 결승에서 우승한 데 이어 8월 베이징올림픽에서는 단체전 금메달과 개인전 동메달을 따내면서 한국 여자양궁의 기둥 역할을 했다.


  지도자상은 임동일 순천시청 감독과 국가대표 상비군 코치인 최승실 광주체고 코치가 수상자로 선정됐다.


  시상식은 21일 논현동 임페리얼 팰리스호텔에서 정기 대의원총회와 함께 개최된다.


  (KBS뉴스 2009.01.13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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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342


  삼강주막 [記事] :  여행과 친구들 카페/ 경북) 예천 추억의 삼강주막/ 글쓴이: 포비와 깨구락지(김한웅)/ 2009.01.10 05:25/


  다시 문을 연 삼강주막/ 막걸리 한잔하고 가이소/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의 세 강줄기가 몸을 섞는 삼강. 과거 이곳을 오가는 나그네들이 잠시 쉬어 허기를 채우고 잠을 청했던 삼강주막이 올초 문을 다시 열었다.


  시원한 강줄기를 내다보며 배추전과 막걸리 한잔으로 여독을 풀던 주막은 오랜만에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100여 곳에서 배가 오갔던 곳, 낙동강 1300리 물길.


  그러나 물길 따라 오가던 배들은 하나둘씩 사라져갔고, 사공과 나그네가 쉬어 가던 주막 역시 덩달아 자취를 감췄다. 삼강주막은 고 유옥련(2005년 90세의 나이로 별세) 할머니가 운영하던 낙동강 1300리 물길의 마지막 주막이었다.


  한때 이곳은 낙동강 하구에서 싣고 온 소금과 내륙의 쌀을 교환하던 상인과 보부상, 그리고 시인 묵객들로 들끓었다. 하지만 유 할머니가 주막을 떠난 후 주막은 지키는 이도 찾는 이도 없는 황량한 초가가 되었다.


  한동안 그렇게 방치되다가 최근 찾아오는 길손들로 인해 주막이 예전의 활기를 되찾고 있다. 바로 헐벗었던 주막 곳곳을 삼강리 마을 주민들이 복원한 후, 유 할머니를 이을 새로운 주모까지 뽑으면서 주막을 다시 운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마침 주막을 찾은 날은 삼강주막의 개업식이었다. 인근 마을 주민들로 시끌벅적하다. 아낙네들은 마당에서 배추전과 김치전을 지지느라 바빴고, 남정네들은 막걸리를 나르고 불을 지피느라 손길이 분주하다.


  먼 타지에서 온 객도 많다. 인근 장수나 문경은 물론 대구,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새롭게 문을 연 주막을 보러 온 사람들로 주막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마땅히 앉을 자리가 없어 마당을 서성이다 부엌으로 향했다. 마침 유옥련 할머니를 이어 새롭게 삼강주막을 이끌어갈 새 주모 권태순(70세) 할머니가 솥에 물을 붓고 있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온화한 미소, 그리고 무엇보다 술을 잘 빚어 주모로 뽑히게 됐다는 권 할머니. 바쁘지 않냐는 질문에 먼 길에서 온 손님들이 자리가 없어 기다리다 그냥 가는 경우가 많아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권 할머니가 검게 그을린 부엌 벽면을 손으로 가리킨다. 자세히 보니 벽에는 위에서 아래로 그어진 금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무슨 암호 같기도 한 이 금은 유옥련 할머니의 외상장부라 한다.


  유 할머니는 글과 숫자를 몰랐기 때문이 이렇게 금으로 외상을 표기했다고. 긴 금은 막걸리 1말, 작은 금은 막걸리 반 말을 의미하고 금의 위치는 사람을 나타낸다 한다.


  7~8명이 앉을 수 있는 방 두 개와 부엌 하나, 그리고 다락과 툇마루, 마당에 세워진 원두막(정자) 2채가 전부인 삼강주막 한편에서 풍양면 공처농요 앞소리꾼인 조홍래 씨가 ‘삼강 뱃사공의 노래’를 부른다.


  “…삼강의 나루터라 / 저 건너 저 주막의 텁텁한 막걸리가 / 사공의 몫일세….”  구성진 뱃노래 소리에 동동주 한 모금 머금으니, 애수와 취기가 함께 올라온다.


  Info :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국도 → 점촌·합창IC, 문경 방향 → 윤직 교차로 → 영순교 → 오룡삼거리 좌회전 → 삼강교 건너 바로 좌측/


  대중교통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 점촌행 버스를 하루 8회 운행, 점촌에서 영순면 달지리행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인 삼강교에서 하차한 후, 도보로 삼강교 건너 바로 좌측/


  삼강주막에서 파는 묵과 두부는 2000원, 배추전은 3000원, 주모가 담근 동동주는 1.8ℓ에 5000원이다. 


  사공도, 나루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인적 끊긴 이 곳을 외로이 지켜 왔던 주모마저 세상을 뜬 후, 허물어지는 주막에는 지나가던 바람만이 가끔씩 기웃거릴 뿐이었다.


  200년 넘는 세월 동안 이 자리에 선 채로 주막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지켜봤던 고목은 이즈음 요지경같은 세상을 또 한 번 경험하고 있다.


  적막강산이던 이곳에 그 옛날 흥청이던 장날처럼 다시 손님들이 몰려들고 있다. 허리를 바로 펴고 설 수 없을 만큼 낮고 비좁은 방에 엉덩이를 비비고 들어앉아 꼬릿꼬릿한 발냄새를 풍기며 육담과 희떠운 소리들을 해대던 장꾼들은 아니지만, 번듯한 차림새에 승용차를 끌고 온 그들은 무슨 희한한 구경거리를 만난 듯하다.


  바로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복원된 삼강주막의 요즘 풍경이다.


  이제는 이름만 남은 나루터 : 1,300리 낙동강 물길이 내성천과 금천을 만나 어우러지는 곳이라 해서 삼강(三江)리라 불리는 이 곳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상인이 흥청대는 요충지였다.


  대구와 서울을 잇는 단거리 뱃길로,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소금배와 집산된 농산물이 모두 이 곳으로 모였다. 바로 그곳에 위치한 주막은 자연 봇짐장수, 방물장수 등이며, 사당패며 시인묵객으로 붐볐다.


  때론 그들의 숙식처로, 때론 쉼터로 고단한 몸을 뉘기도 했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도 했다. 장날이면 강 이 쪽과 저 쪽을 오가는 배가 하루에도 20~30번씩이었고, 점심때면 주막의 술이 동났다.


  배를 기다리던 행인들은 봉당마루에 앉아 이 동네 소문과 저 동네 소식을 풀어놓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나 1970년대에 도로가 뚫리고 낙동강 물줄기 위로 다리가 가로질러 놓이면서 이 곳은 점차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주막도, 주모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갔다.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노를 젓던 뱃사공이 어느 날 떠나고, 동네사람들끼리 돌아가면서 사공을 맡아 배를 움직이다가 그 것마저 여의치 않게 되자 나루는 완전히 제 기능을 잃고 말았다.


  흙벽에 그은 외상 칼자국 :


  하지만 주모는 마지막까지 주막을 지켰다. 2005년 90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이곳을 지킨 마지막 주모 유옥련 할머니는 1917년에 태어나 네 살 위인 뱃사공 배소봉 씨와 1932년 혼인해 주막을 맡아 세상을 뜰 때까지 약 70년간 주막과 함께 살았다.


  글도, 숫자도 알지 못했던 할머니는 외상을 주면서 부엌 벽에다 칼금을 그었다. 한 잔을 외상하면 짧은 금을, 한 주전자를 외상하면 긴 금을 세로로 그어 놓았다가 외상값을 죄다 갚으면 옆으로 길게 금을 그어 외상을 지운 흔적이 지금도 주막 흙벽에 그을음과 함께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삼강나루터에 복원된 주막 :


  할머니가 세상을 뜬 후 주막은 한동안 방치됐다가 경상북도가 그 문화·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민속자료 134호로 지정한 후 2007년 1억5,000만 원의 예산으로 옛 모습 그대로 복원시켰다.


  허물어지는 슬레이트 지붕 대신 짚단을 얹은 원래 모습에 진흙을 바른 담장, 구들장, 아궁이도 그대로고, 할머니가 쓰던 토끼굴같은 부엌도 고스란히 살렸다.


  방 2개와 다락, 툇마루에 원두막(정자) 2채가 더해졌다. 삼강주막의 새 주모는 이 마을 권태순(70) 할머니가 맡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막걸리와 안주거리를 내놓고 있다.


  주막이 복원됐다는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로 주말이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찾아오는 손님을 모두 맞이할 만큼 방이 넓지 않아 주막 앞에는 비닐하우스가 급하게 만들어졌다.


  그냥 돌아가기 아쉬운 사람들은 이곳에서 옛 정취를 되살리며 막걸리잔을 비우기도 한다.


  *주막 먹거리 :


  권태순 할머니가 여럿 경쟁자를 물리치고 삼강주막의 새 주모로 뽑힌 이유는 무엇보다 술을 잘 빚어서였다고 한다. 스물한 살에 시집와 술을 빚기 시작해 50년 넘는 세월 손맛이 곰삭은 막걸리는 솔향기가 은은하다.


  여기에 경북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배추전을 안주로 마시는 맛이 별미다. 배가 불룩한 술단지가 주말이면 금세 홀쭉해진다. 이 밖에 묵·두부 등은 모두 할머니가 집에서 직접 만들고 쑨 음식들이다.


  *가는 요령 :


  중부내륙고속도로 점촌·함창IC를 빠져나가 문경시(옛 점촌시)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예천방면으로 가다 보면 산양면 소재지에서 59번 지방도(풍양방면)를 만난다. 지방도로 갈아타서 10분 정도 가면 새로 건설한 큰 다리(삼강교)를 건너자마자 삼강주막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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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간정(우리나라 첫 百科事典의 産室, 草澗亭) [記事] :


  경북 예천군 용문면 개울가에 자리한 초간정이란 작은 정자가 2008년 12월 26일 국가 명승지(51호)로 지정됐다.


  초간정은 국내 여행에 어지간한 조예가 있는 마니아에게도 생소한 이름이다.


  자료를 뒤져도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해’를 집필한 권문해가 세운 정자’ 정도의 설명이 전부다.


  이 책은 단군이래 선조 때까지 역사·인문·지리 등을 총망라, 총 20권 20책으로 구성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제878호)로 지정됐다. 조선 선조 때 만들었으니 400년을 넘겼다.


  이 역작의 주인공인 권문해는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이 정자를 왜 지었을까. 모든 것이 궁금했다. 초간정을 이해하려면 이를 세웠던 권문해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 선조 때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 관찰사·좌부승지 등을 지낸 학자다. 권씨의 본은 안동과 예천 두 개 뿐이다. 권문해는 조선시대 세도를 과시했던 안동 권씨가 아니다.


  안동 권씨에 비해 세가 훨씬 적었던 예천 권씨다. 이 때문에 퇴계 이황에 사사했고, 8년 후배 서애 유성룡 등과 교분이 깊었을 만큼 인품과 학문의 조예가 깊었으나 소위 ‘연줄’이 없어 입신출세에는 한계가 있었다.


  유성룡이 판서를 지내며 ‘잘 나갈 때’ 자신은 좌부승지에 그쳤으니 오죽했을까. 이를 절감한 그는 고향 예천으로 낙향을 결심한다. 이 때 찾은 곳이 종가가 있는 용문면 죽림리.


  이곳에서 그는 1334년 중국의 음시부가 지은 백과사전 ‘운부군옥’을 읽고 또 읽었다.  여기서 힌트를 얻은 그는 한국의 백과사전 편찬을 결심한다.


  그리고 역사·인문·지리 외에 국명·성씨·인명·효자·열녀·수령·신선·나무·금수 등으로 나눠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을 완성했다. 낙향 10년만이다.


  필생의 역작을 탈고한 권문해는 기력이 다한 탓인지 2년만에 세상을 뜨고 만다. 향년 58세였다.


  초간은 권문해의 호다. 풀(草)과 산골의 물(澗)이란 뜻이다. 초간정은 권문해가 낙향 3년 후 지은 정자다. 예천권씨종택에서 10리도 떨어지지 않은 조용한 곳이다.


  그렇다고 흔히 볼 수 있는 정자처럼 높은 곳에 ‘군림’하고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는 곳도 아니다. 오직 정자 바로 아래 개울만 시야에 들어올 뿐이다.


  지금은 바로 옆에 도로가 뚫려 소음이 심하지만 당시에는 물소리·새소리 외엔 달리 들을 만한 소음은 없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작품을 집필하는데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주차장에서 내려다보면 위치가 절묘하다. 금곡천이라 불리는 작은 개울이 큰 바위를 만나 ‘ㄱ’자로 휘돌아가는 모퉁이 작은 절벽 위에 아담하게 서 있는 것이다.


  절벽 위에 돌을 쌓아 축대를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정자는 주변의 아름드리 소나무숲과 어울려 멋진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초간정의 원래 이름은 초간정사. 초간이 학문을 가르치고 정신을 수양하는 집이란 의미다. 깊은 뜻을 가진 건물은 그러나 이후 여러 차례 수난을 당한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에서 발견된 대동운부군옥을 불사른 왜군은 초간정마저 불태웠던 것이다. 광해군 때 다시 세웠으나 인조 14년(1636년) 또다시 화마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지금의 건물은 초간의 8대손이 1870년 중창한 것이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던 지난 주말. 정자에 앉아 안빈낙도는 아니더라도 초간의 세계를 좇아보려 했으나 허사였다.


  절벽을 기어오를 수 없으니 사주문을 통해 들어가야 하는데 굳게 잠겨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멋진 자태만으로도 초간에게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는 듯했다.


  (박상언 記者 日刊스포츠 2009.01.13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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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악사(西岳寺 山寺音樂會, 珠玉같은 音樂 2千餘 名 마음 촉촉히 적셔) [記事] :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열린 서악사 산사음악회가 2천여 명의 지역민이 발산하는 열기로 늦여름밤을 뜨겁게 달구었다. 2005년 8월 24일 오후 7시 대구 BBS 불교특집 공개방송으로 진행된 예천읍 서악사 산사음악회는 코리아 팝스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춘 인기가수들의 주옥같은 명곡과 장대비의 화음이 하나로 어우러진 환상의 무대를 연출했다. 이 날 음악회에는 정수라, 김범룡, 해바라기, 조항조, 장태민, 박태민, 최석준 등 인기가수들이 출연했으며, 김일수 교수의 섹스폰 연주와 찬불가수인 도일 스님(서악사 주지), 일봉 스님(연방사 주지)의 열창이 한여름밤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한편‘가족과 함께하는 제2회 서악사 산사음악회’는 2005년 8월 28일 대구BBS불교방송을 통해 오후 3시 5분부터 약 1시간 40분 동안 대구 경북 전역에 방송됐다.(醴泉新聞 2005-09-02 10:5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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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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