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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1817:예천충효16(祝파라다이스호텔等/예천방문343)
작성자장병창 @ 2009.01.15 08:09:54

  예천의 자랑(1817) : 예천 충효 16(附 파라다이스호텔, 한국관광공사 굿스테이 인증업소로 지정...축하합니다/예천양수건설처 이영국 총무이사, 15일 경북산업평화대상 동상 수상...축하합니다/예천 출신 박창일, 신보 대구경북영업본부장 취임...축하합니다/예천방문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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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때 민단조합에 군자금을 기부한
  박심수(朴尋洙) : 1869(고종 6)-1934, 예천 출신, 자는 치방(穉芳), 호는 양계, 본관은 함양, 한광(漢光)의 현손, 현령(顯寧)의 증손, 서산 김흥락(西山金興洛)의 제자, 1916년 8월에 민단조합(民團組合)에 군자금을 기부하였다. 민단조합은 1915년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 결사였다. 성리학을 연구하는 반면에 실천적인 덕행이 뛰어나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고, 유고가 있다.(慶尙北道史 中卷 345-346쪽, 朝鮮 輿勝覽 1929, 嶠南誌 1937)


  박심수 일기(朴尋洙日記) [古書] : 양계(양溪) 박심수(1860-1933)의 1901년부터 1933년 사이의 일기로, 10책, 예천군 함양 박재묵(朴在默)의 소장본을 촬영한 마이크로필름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청구기호 MF A지수 108)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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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천황을 죽이려다 옥고를 치룬
  박열(朴烈) : 1895(고종 32)-1974, 초명은 준식(準植), 본관은 함양, 용문면 상금곡리에 첫 이거한 박종린(朴從鱗)의 14세손, 의성(義聲)의 손자, 함창(咸昌)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 다닐 때 독립 운동에 관련하여 퇴학을 당하고, 상금곡동에서 항일 투쟁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꾸(正則) 영어학교, 와세다(早稻田)대학과 메이지(明治)대학의 교외생으로 고학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고학생 동우회,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 등에 가입하여 김약수(金若水)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김약수 일파의 지나친 볼세비키적인 경향 때문에 사상적으로 대립하여 흑도회를 버리고 장상중(張祥重) 외 16명으로 된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여 무정부주의 단체의 색채를 띠고 활약하였다. 1923년 9월 1일 정오에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 터지자, 조선인들은 모두 경찰서에 수용하여 고문하였는데, 박열도 이 때 구속되었는데, 마침 이 때가 동년 9월에 예정된 황태자의 결혼식 때 일본 천황 히로히도(裕仁) 부자를 죽이려고 그의 애인 가네꼬 후미꼬(金子文子)의 협조를 얻어 폭탄으로 거사하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다. 1926년 3월 25일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고, 이 해 4월 5일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22년 2개월만에 그 해 10월 23일에 석방되어 1946년 2월 8일에 신조선건설동맹을 조직하여 그 위원장, 10월 3일에 대한민국 재일거류민단 단장이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전에 참석,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國史大事典, 醴泉文化 第2輯, 韓國의 發見 第4輯 152쪽)


  박열(朴烈) [記事] : 박열 의사는 함양 박문(咸陽朴門) 8세 충좌(忠佐)의 7세손인 눌(訥 : 1448~1528)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대과(大科)를 거쳐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에 터를 잡은 막내 종린(從鱗 : 1496~1553)의 셋째아들 운(蕓 : 1535~1596)의 13세손이며 대대로 사대부(士大夫) 명문가의 집안이다. 1880년대에 이르러 가세(家勢)가 기울어 가고 동학을 통해 세상 물정에 밝은 박열의 조부(義聲)는 증조부가 사망하고 아버지 지수(芝洙)를 선동의 경주 정씨(慶州鄭氏)와 결혼을 시키자 예천 금당실 선동을 떠나 함창 인근의 모전(음지마)으로 이주하게 된다. 아버지(족보 : 芝洙, 호적 : 英洙)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독자로 내려 오다 박열 의사는 1녀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02년 3월 12일(음 2월 3일) 문경시 모전동(음지마) 311번지에서 출생,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 98번지(샘골)로 이주하여 성장, ○1905년(4세) 8월 父 사망, 兄 정식 호주 상속, ○1908년(7세)~1910년(9세) 서당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치감강목, 통감6권 수학, ○1909년(8세) 3월 4일 民籍法 시행으로 준식(準植)으로 개명(改名), 一名 열(烈), ○1911년(10세)~1915년(14세) 함창공립보통학교(4년제) 다님, ○1916년(15세) 3월 24일 함창공립보통학교 3회 졸업, ○4월 8일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 입학, ○1919년(18세) 경성고등보통학교 3년 재학 중 3.1독립만세운동 참여―독립신문 발행, 격문 배포, ○1920년~1921년 兄 정식과 두식 등 가족들은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샘골) 98번지에서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 870번지로 이사, ○1919년(18세) 10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 박열은 정칙영어학교에 다녔고 간다(神田)에 있는 세이코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다니면서 신문 배달, 제빙공장 직공, 막노동꾼, 우편 배달부, 인력거 인부, 중국요릿집 배달, 야경수, 점원, 인삼 행상, 조선엿장수 등 온갖 모든 밑바닥의 직업을 두루 겪는 생활을 하였다. 1920년(19세)에는 일본의 사상가이며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와 교유(交遊)를 하였다. 11월 재동경 조선인 학생 15~16명 의거단(義擧團)을 결성하였는데, 이 단체는 의거단(義擧團)→철권단(鐵擧團)→ 혈권단(血拳團), 박살단(撲殺團), 혈거단(血擧團 : 1921년 11월)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계속 활동을 하였으며 11월 29일 동경기독교청년회관 흑도회(黑濤會) 창립대회 개최-박열, 정태신, 김약수, 조봉암, 원종린, 김판국, 정태성, 서상일, 황석우 등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동경 흑도회(黑濤會)를 창립하였다. 그 해 2월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를 만났으며, 7월 10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흑도회(黑濤會) 기관지『黑濤』를 창간하게 된다. 11월, 재경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흑우회(黑友會)를 조직하였으며『후도이 센징(太い鮮人)』을 창간한다. 12월 말에는『후도이 센징(太い鮮人)』제2호를 발간하였다. 1923년 1월 12일 김한이 의열단원 김상옥사건 관계 혐의로 체포되었고 박열의 폭탄 입수 계획은 좌절되고 만다. 그러나 現社會(太い鮮人 改題) 제3호의 발행은 계속되었다. 또 4월에는 불령사(不逞社) 설립하였고, 6월 30일 현사회(現社會) 제4호를 간행하였다. ○1923년(22세) 9월 1일 관동대지진, ○9월 3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보호 검속, ○9월 4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경찰범처벌령 구류 연장, ○9월 하순~10월 상순 불령사(不逞社) 동인 16명 검속 취조, ○10월 20일 동경지방재판소 검사국 치안경찰법위반 용의 기소, ○10월 22일 동경지방재판소 예심 판사, 불령사(不逞社) 전원에 대하여 예심 심문, ○10월 24일 대역죄 혐의로 구속 기소 재판 회부, ○(1925년 6월 6일까지 17회의 동경지방재판소 예심받음), ○1925년(24세) 7월 17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대역죄”폭발물 취체규칙 위반 용의 기소,


  ○대심원 제2특별형사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에 대하여 형법 제73조 대역죄 적용 공판 개시 결정, ○1926년 2월 26일 동경 대심원 대역사건 제1회 공판(박열―조선예복, 金子文子―한복) 4차례에 걸쳐 동경대심원의 공판을 받음. ○3월 23일 우시꼬매(牛?) 區役所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혼인계 제출, ○4월 5일 무기 감형, ○4월 6일 박열, 이치가야(市ヶ谷)형무소→지바(千葉)형무소 이감(移監),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우쓰노미야(宇都宮)형무소 도치기(榜木)지소에서 옥중 자결(향년 23세), ○1926년 11월 5일 박열 兄 정식.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의 유언에 따라 박열의 고향 문경 팔령 선영에 안장, ○1936년(35세) 5월 박열 가족,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 870번지에서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은리 847번지로 이사, ○7월 지바(千葉)형무소에서 코스게(小菅)형무소로 이감(移監), ○1943년(42세) 8월 코스게(小菅)형무소에서 아끼다(秋田)형무소로 이감(移監), ○1944년(43세) 박열 가족,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은리 847번지에서 음성군 금왕면 무극리 118번지로 이사, ○1945년(44세) 8월 15일  한국 해방, ○10월 15일 동경 히비야(日比谷)공회당 "재일조선인연맹 결성대회" 박열 석방 청원 데모, ○1945년(44세) 10월 27일 아키다(秋田)형무소 오오다테(大?)지소에서 석방(22년 3개월 감옥 생활), ○朝鮮人連盟秋田縣本部 주최 大?驛前 廣場에서 박열 출옥 환영회 개최, ○12월 8일 동경 히비야(日比谷)음악당에서“박열환영회”개최, ○1946년(45세) 1월 20일 신조선건설동맹 결성(위원장 박열, 부위원장 이강훈 원심창), ○3월 25일 박열후원회 일본총본부 주최“박열 선생 부인 故 금자문자 여사추도회”, ○동경 神田一橋 공립강당 개최, ○10월 3일 재일조선거류민단 창단(단장 박열. 부단장 이강훈, 사무총장 원심창), ○12월 10일, 1947년 4월 8일 일본 동경을 거쳐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이승만 박사와 동경 제국호텔에서 2차례 회담, ○1947년(46세) 2월 15일 장의숙(동경청산사범학교 속성과 졸업(현 동경학예대학) 동경국제신문 기자 29세)과 결혼, ○6월 30일 박열, 《민단신문》에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발표, ○10월 1일 박열, 민단정기대회에서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적극 지지, ○1948년(47세) 2월 10일 박열, 재일조선인거류민단 단장직 사임 발표, ○4월 박열, 사설기관「박열장학회」「박열문화연구소」설치, ○7월 1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으로부터「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임명 받음, ○8월 10일 『신조선혁명론』저술 출판,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및 광복 축전에 박열 외 13명 참석, ○1949년(48세) 4월 1일 민단 제6회 대회에서 단장 사임, ○5월 4일  영구 귀국 서울 도착. 재단법인 박열장학회 설립, ○8월 대구 방문(2박 3일) 시내 주요 기관 시설 방문, 도청 회의실―관민대간담회(官民大懇談會) 및 기자 회견, ○8월 7일 문경 방문(2박 3일) 함창국민학교 방문 → 점촌역 앞에서 면민환영식 → 모전(음지마) 출생지 방문→ 공평(장승백이) 조부묘 참배 → 오천(샘골) 생가 방문 → 문경 팔령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묘소 및 선영 참배 → 음성 무극 방문,


  ○1950년(49세)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勃發), ○6월 28일 서울 모처에서 피랍(被拉), 납북, ○1973년(72세) 7월 23일 문경읍 팔령리 주흘산 동편자락에서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여사 묘비제막식 거행, ○1974년(73세) 1월 17일 북한에서 사망―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장, ○2월 8일 서울 명동YWCA강당에서 박열의사추도식 거행, ○1989년 3월 1일 대한민국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991년 11월 21일 박열 등 15명 납북독립유공민족지도자추모제 거행(국립묘지 현충관), ○2001년 10월 23일 사단법인 박열의사기념사업회 창립 현창강연회 및 현판식(경북 문경시 점촌동 155-5번지)


  박열의 동경지방재판소 예심법원에서 2년여에 걸친 다테마쓰(立松?淸) 예심판사와의 끈질긴 법정 투쟁은 항일독립운동사에서 또 하나의 역작으로 남아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의 법정 투쟁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직접적이고 폭발적인 강렬한 불굴의 투쟁이었던 것이다. 그는 항상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며 일제의 권력 중심부인 천황과 대치하여 사실에 입각한 논리 정연한 이론을 펼쳐 당시 그 어마어마한 일본 법정에서도 당당한 한국 남아의 기개를 떨쳤던 것이다. 박열은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조선인 보호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검속 당한 이래 일본제국주의를 향한 조선 민족의 철저한 독립 사상으로 시종일관 자신의 신념을 굽힐 줄 모르는 투지로 당시 일본의 사법 당국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면서 자신에게 대역이라는 엄청난 불경죄로 몰고가기까지의 일본 사법부와의 법정 투쟁은 한편의 드라마였던 것이다. 이 때 박열은 다테마스(立松?淸) 판사와의 17회에 걸친 신문 조서에서 대체로 자신의 성장 과정 속에서 조국이 처한 현실을 보고 듣고 깨달은 바 장차 입신(立身)과 제자(弟子) 교육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기를 맹세한 학창 시절에 많은 사상적 변화를 가져 왔음을 밝히며 3.1독립만세운동 참여로 현실 자각과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도일(渡日)하여 사상적으로 일대 변혁기를 맞이한 동경에서의 무정부주의 활동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히 진술하였던 것이다. 특히 박열은 1924년 2월 4일 이치가야(市ヶ谷)형무소에서 있은 제6회 예심 조서에서,“나는 일본에게 억압을 당하고 있는 조선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의 천황, 황태자, 황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증오와 반역의 마음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으며 존경심은 추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본의 천황과 황태자는 하나의 우상(偶像)에 지나지 않는다. 가련한 제분기(製糞機)이자 희생자에 불과하다. 특히 조선의 일반 민중들은 천황과 황태자가 일본의 명실상부한 실권자이며, 한 하늘 밑에서는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존재를 지구로부터 추방해 버리는 것은 조선의 민중들을 감격시키는 일이 될 것이며, 보다 전투적인 기분을 가지게 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실로 가장 의미있는 방법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일본의 천황과 그 황실에 대해서 자신의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나타냈다. 또한 박열은 1923년 가을에 있을 예정인 황태자 결혼식에 폭탄을 사용할 목적과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첫째, 일본 국민에게 있어서 일본의 황실이 얼마나 일본 국민에게 고혈을 갈취하는 권력자의 간판격이고, 또 일본 국민들이 미신처럼 믿고 신성시하는 것, 신격화하는 것의 정체가 사악한 귀신과 같은 존재임을 알리고, 일본 황실의 진상을 밝혀서 그 신성함을 땅에 떨어뜨리기 위함이었다. 둘째, 조선 민족에게 있어서 일반적으로 일본 황실은 모든 것의 실권자이며 민족의 증오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 황실을 무너뜨려서 조선 민족에게 혁명적이고 독립적인 열정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셋째, 침체되어 있는 일본의 사회운동가들에게 혁명적인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일본 천황은 병이 들었지만 황태자와 함께 황실의 표면적이고 대표적인 존재이다. 특히 내가 황태자의 결혼식에 폭탄을 사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조선 민족의 일본에 대한 의지를 세계에 표명하기에 최적의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박열은 일본 사법부의 갖은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조선 청년의 철저한 민족적 독립 의지와 확고한 항일 투쟁 의식을 잃지 않고 끝까지 대항하며 싸웠던 것이다. 1925년 2월 15일 박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김중한은 폭발물취체규칙위반 용의로 기소되고, 7월17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일본 사법사상 4번째의 대역죄 혐의로 추가 기소되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박열은 대심원의 공판 날을 기다리며 일본제국주의와 일대 격전을 벌일 준비에 골몰하고 있었다. 이 때 박열은 변호사 후세 다츠시(布施辰治)를 통하여 일본 사법 당국에 4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첫째, 나 박열은 피고로서 법정에 서는 것이 아니다. 재판관은 일본의 천황을 대표하여 법정에서는 것이므로 나는 조선 민족을 대표하여 법정에서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재판관이 법복을 입고 법정에 나오는 이상 나도 조선의 예복을 입게 할 것. 둘째, 나는 조선 민족을 대표하여 일본이 조선을 강탈한 강도 행위를 규탄하기 위해 법정에서는 것이므로 나의 이러한 취지를 먼저 선언케 할 것. 셋째, 나는 조선말을 쓰겠으니 통역관을 세울 것. 넷째, 일본의 재판관이 일본 천황을 대표하고 나는 조선 민족을 대표하는 것이므로 내가 앉을 자리를 재판관의 앉을 자리와 같게 할 것.(www.maseong.net 2004)


  박열(아나키스트 獨立運動家 박열 日活動寫眞 國內 첫공개) [記事] : 1945년 10월 27일 박열 의사가 아끼다 형무소에서 출옥 후 머물던 재일 한인집에서 찍은 사진. 맨 가운데가 박열 의사이며 뒷줄에 서 있는 사람이 사진 제공자인 재일교포 영화감독 오덕수 씨의 선친이다. 1947년 10월 25일 일본 동경에서 박열 의사가 임시정부격인 대한국민의회의 주일공사를 개설하고 일본 언론계 지도자들과의 간담회 개최를 기념해 찍은 사진이다. 맨 아래줄 가운데 여성 오른쪽이 박열 의사. 일본 천황 부자의 암살을 기도하는 등 조선인의 기개를 드높이고 민족적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였던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가 1950년 북한으로 납북되기 직전 일본에서의 활동을 담은 사진이 국내 최초로 공개됐다. 이 사진은 박 의사가 해방 후 어렵게 살아가는 조선인들의 생활 조건 개선활동을 위해 재일거류민단장을 역임했을 때 비서였던 고 박성진 씨의 아들인 박신충 씨와 재일교포 영화감독인 오덕수 씨가 소장해 오던 것으로 2006년 7월 일본에서 사진을 입수한 문경시 마성면의 박정순 씨(72)가 경북매일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공개됐다. 박열 의사에 대한 연구와 자료수집에 나서고 있는 박정순씨는 “박 의사가 강제 납북되는 바람에 관련 사진이 거의 없는 실정”이라며 “북한에서의 활동 사진은 북한에 있는 걸로 알고 있지만 박 의사가 출옥 후 일본에서 활동한 사진은 아직 국내에 공개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씨는 “현재 박열 의사의 부인인 가네코 여사의 묘소는 일본인인데도 남편의 고향땅에 묻혀 있는데, 의사의 묘소는 북한에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사진은 문경시가 편찬할 예정인 ‘문경 100년사’에 수록할 예정이며 독립기념관과 서대문역사박물관의 지하 광복관 등에 전시될 예정이다. 박열 의사는 1902년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서 태어나 17세 때인 경성고보 학생시절 3.1만세운동에 가장 열성적으로 참가했다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당했고,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저항 운동을 펼치던 중 일본 황태자 결혼식에서 자신의 일본인 부인 가네코 여사와 함께 일왕 부자의 암살을 기도했다. 박 의사는 이로 인해 23년간 옥고를 치뤘으며 해방 후에 풀려나 백범 김구 선생과 더불어 윤봉길, 이봉창 등 열사들의 유해봉안추진위원장을 비롯, 재일거류민단장, 신조선건설동맹위원장을 맡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다가 한국전쟁 3일만에 인민군들에 의해 강제 납북, 1974년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다. 특히 부인 가네코 여사는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의 식민통치와 천황제에 항거해 조선인과 연대했다는 점에서 일본 입장에서 보면 반역자이기도 한데도 2006년 들어 여사를 추모하기 위해 문경을 찾는 일본인들이 부쩍 늘고 있는 등 이들 부부는 최근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혁명가적 사고를 가진 철학가이자 행동가로 재평가받고 있다. 한편 국가보훈처 및 순국선열기념사업회, 독립기념관은 ‘8월의 독립운동가’로 ‘박열 의사’를 선정했다.(고도현 記者 慶北每日新聞 200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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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종 손위 때 벼슬 버리고 상리면에 숨어 산
  박유원(朴由元) : 1435(세조 17)-1514(중종 9), 상리면 도촌리 출신, 초명은 수원(綏遠), 본관은 은풍(殷豊, 密城), 시조 치온(始祖致溫)의 장남,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거쳐 현감(縣監)을 지냈다. 개령 현감(開寧縣監) 때에 단종이 손위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야간에 도주하여 9일만에 현 상리면 도촌리 가재봉(佳哉峰) 아래에 도착하여 숨어사는 곳을 정하고 죽을 때까지 살았는데, 묘는 상리면 도촌리 가재봉 백호록(白虎麓)에 있다. 그 후손은 현재 상리면 도촌(道村)과 호명면 형호리와 인근 안동, 문경, 상주, 영주 등지에서 천여 호가 거주하고 있다(禮鄕醴泉 1994, 族譜 1982).


  [醴泉의 金石文] : 사헌부감찰 치온(致溫)의 맏아들, 순선(順先, 果毅校尉別侍衛)의 양아버지이다. 개령 현감(開寧縣監)으로 지내던 중 단종이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문(東門)에 갓을 걸어 높고, 상리면 가재봉(佳哉峰) 아래로 숨어 임천(林泉)에서 일생을 마쳤다. 묘는 상리면 도촌리 가재봉 선고조(先考兆) 백호록(白虎麓) 자좌(子坐)에 있는데, 묘갈명(墓喝銘)은 1997년 4월에 중화 양홍대(楊鴻大)가 지었다.(醴泉의 金石文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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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박유의(朴惟義) : 예천 신당곡(神堂谷) 출신, 자는 호선(好善),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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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박윤림(朴胤林) : 1576(선조 9)-?, 감천면 출신, 자는 사술(士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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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말 애국지사인 박일수(朴一洙) : 旣載
  1896년 예천의병대장에 추대된 박주대(朴周大) : 旣載
  비호대에서 활약한 박주대(中國 內 朝鮮 秘密結社「飛虎隊」의 숨겨진 活躍相) [記事] : 旣載
  1896년에 의병대장으로서 왜적을 무찌른 박주상(朴周庠)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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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미의병 때 예천 의병부대장인
  박주학(朴周學) : 호는 용계(蓉溪), 본관은 함양, 진사 주대(周大)의 동생, 1895년 을미의병에 창의하여 예천 의병부대장이 되었다. 문집이 있고, <남천창의록(南泉倡義錄)>과 <저상일월(渚上日月)>에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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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량의 변 때 의병을 일으킨
  박중장(朴重章) : 1687(숙종 13)-1752(영조 28), 호명면 형호리 출신, 초명은 중서(重瑞), 자는 여빈(汝彬), 호는 호옹(湖翁), 본관은 밀성, 문도(文道)의 장자, 정희량(鄭希亮)의 변(1728) 때 의병장 박성옥(朴成玉)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면서 싸워 죽기를 맹서한 일이 <창의록>에 실렸다. 묘는 호명면 오천리 방구산 경좌(芳邱山庚坐)에 있다.(族譜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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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박진보(朴震輔) : 1585(선조 18)-1668(현종 9), 호명면 형호리 출신, 자는 공좌(公佐), 본관은 밀성, 기종(起宗)의 장자, 병자호란(1636) 때 양졸 고금소(養拙高金素)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상경하였으나,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으로 화의(和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눈믈을 흘리며 귀향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여생을 마쳤다. 묘는 호명면 오천리 방구산 신좌(芳邱山辛坐)에 있다.(族譜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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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란 때 창의에 협찬한
  박진종(朴鎭宗) : 호명면 형호리 출신, 본관은 밀성, 천록(天祿)의 아들, 효도하고 돈독히 배워 성문(成文)이 되었고, 늦게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서란(徐亂) 때 종씨 기종(從氏起宗)과 더불어 호재 곽수지(浩齋郭守智)에게 가서 창의에 협찬하였다. 묘는 호명면 오천리 방구산 신좌원(芳邱山辛坐原)에 있다.(族譜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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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운동을 한
  박창호(朴漲浩) : 1861(철종 12)-1929, 예천 출신, 호적명은 순경(順敬), 자는 우언(禹彦), 호는 백운(白雲), 본관은 무안, 지수(芝秀)의 아들, 타고난 용모가 비범하고, 골격이 준수하고 생각이 깊었다. 일찍이 학문을 닦아 제자백가(諸子百家)에서 선불병력(仙佛兵曆)에 이르기까지 능하지 않음이 없으니, 사람들이 천재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성격이 소탈하여 일신의 영달에는 전혀 뜻이 없어 과거(科擧)도 보지 않았다. 20세 때 나라꼴이 날로 험악해 짐을 본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원래 풍채가 늠름하고, 하는 말이 이치에 맞으니 가는 곳마다 쉽게 동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일본 관헌(官憲)의 눈초리가 매서운 때라서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남루한 의관을 하고 동분서주(東奔西走), 일본 세력을 꺾기 위해 일어설 준비를 갖추면서도 혹 백성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을 보면, 관을 찾고 부잣집을 찾아가 그들을 구휼하도록 설득했다. 1895년 안동에서 일본군과 크게 싸우다가 사로잡혀 총살형을 당할 뻔하였고, 을사조약(1905)이 체결되자 일본 영사(領事)를 죽이고자 각처의 의병을 동원, 서울을 향해 진격하다가 도중에서 발각되어 좌절되었다. 국권피탈(1910)이 되자 가슴을 찧고 피를 토하며 통분해 하였고, 의병들을 해산, 권영식(權寧植), 우규석(禹奎碩), 소부제(邵釜濟) 등 동지와 더불어 각처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단(壇)을 모아 목욕 재계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기도를 하다가 만년에는 문경(聞慶)에 가서 300여 명의 후진을 가르치고 항일 정신을 고취, 상해임시정부와도 은밀히 내통하였다. 그러다가 일이 발각되자, 왜놈들에게 붙잡혀 몸이 더럽혀질 것을 꺼려 독약을 마시고 조용히 이 세상을 등졌다. 그 후 후진들이 그의 유지를 받들어 조국 광복을 위해 거사를 준비하다가 안동 일파에서 일이 발각되어 1942년에 아들 용익(龍翼), 봉출(鳳出), 괴산사람 신택규(申澤奎) 강병수(姜炳秀) 박동철(朴東哲) 엄양섭(嚴陽燮) 박순옥(朴順玉) 엄명섭(嚴明燮), 문경 사람 이중희(李仲熙) 김인수(金仁守), 안동 사람 안자연(安自然) 김병현(金炳鉉) 이태희(李泰熙), 영주 사람 김정구(金正九) 김득휘(金得輝) 등이 왜경에게 체포되어 반 년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 장독(杖毒)으로 신음 중 광복을 맞았다.(大韓忠義孝烈錄 351쪽, 醴泉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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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때 독립만세운동을 하여 옥고를 치룬 박태원(朴泰元)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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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운동을 하여 애국장을 받은
  박호준(朴祜雋) : 1920-2007, 상리면 출신, 대구사범 심상과(9期) 졸업,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인 1940년 11월 30일에 비밀결사 문예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 문예부는 민족문화 존중과 항일 의식의 고양을 목적한 결사로서, 부원의 비밀 엄수 및 매주 토요일 작품 감상, 비판 등의 운동 방침을 정하고 1940년 11월 말부터 1941년 3월까지 약 9회의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부원 중에 상급생(8회)이 졸업을 하게 됨으로써 그 뒤를 이어 그와 이주호(李柱鎬), 유흥수(柳興洙) 등이 중심이 되어 동지를 규합하고 조직을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1941년 2월 15일 그는 유흥수, 권쾌복(權快福) 등 동교생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시 대봉정(大鳳町) 소재 유흥수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였다. 즉, 이 다혁당은 위의 문예부및 동교의 다른 비밀결사인 연구회의 항일 정신을 계승하여 조직을 확대 개편한 것이다. 그리고 이 결사는 조직을 교내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 인사까지 포섭 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했고, 조직으로는 당수, 부당수 아래 총무, 학술, 문예, 연구, 경기부 등 각부서를 두었는데, 그는 경기부(競技部)의 일을 맡았다. 한편 다혁당은 당원의 비밀엄수 및 절대 복종, 주 2회 회합과 하급생 지도 등을 당 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 차례 모임을 갖고 다음의 활동 상황과 조직 확대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민족 차별 교육에 반대하여 동 교내 연습과(演習科) 학생(主로 日本人)와 심상과(尋常科) 학생(大部分 朝鮮人)에 대한 차별 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에 대구사범학교 윤독회(輪讀會)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日警)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체포되었고, 그 후 2년 여 동안 미결 상태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부산의 동삼(東三), 성지(聖知), 가야(伽倻), 금정(金井)초등 교장을 지냈다. 문교부장관상, 대통령 표창(1963), 건국포장(建國褒章, 1977), 국민훈장 목련장(國民勳章木蓮章), 애국장(愛國章, 1990)을 받았다.(日帝侵略下韓國36年史 12卷 610쪽, 獨立運動史 9卷 國家報勳處 767 770 776쪽, 獨立運動史資料集 13卷 801 805 810 822 823 825 829쪽, 豫審終結決定 1943.2.8 大田地方法院, 韓國獨立史 下卷 152쪽, 獨立有功者功勳錄 6卷 329-310쪽, 每日年鑑 1986, 光復40年史, 抗日獨立運動史 1991 364-366쪽)


  박호준(愛國志士 박호준 先生 別世) [記事] : 애국지사 박호준 선생이 2007년 1월 30일 오후 2시 20분께 삼성서울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항년 87세. 선생은 1920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으며 대구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0년 11월 30일 이 학교의 항일 학생 비밀결사단체인 문예부에 가입해 민족문화 중흥과 항일의식 고취에 힘썼다. 이듬해 8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본 경찰의 손에 들어가면서 비밀결사조직이 드러나 결국 관련자 전원이 체포되었는데 이를 대구사범학교 사건이라고 한다. 고인도 이때 체포돼 2년간 미결수로 고문받다 1943년 11월 대구지법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77년 건국포장, 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아들 인협(파이낸셜뉴스 상무)ㆍ인근(한국원양어업협회 부장)ㆍ인정(자영업) 씨 3형제가 있다. 발인은 1일 오전 5시.(韓國日報 2007년 1월 30일 (화) 22:56)


  박호준(愛國志士 박호준 先生) [記事] : 일제 강점기 학생운동을 통해 조국 독립에 헌신한 애국지사 박호준 선생이 2007년 1월 3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 경북 예천 태생인 박 선생은 대구사범학교 재학 시절인 1940∼41년 비밀결사 조직인 문예부와 다혁당 활동을 통해 민족문화 전파 및 항일의식 등을 고취시켰다. 유족으로는 아들 박인협(파이낸셜뉴스 상무)·인근(한국원양어업협회 부장)·인정 씨 등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2월 1일 오전 5시, 장지는 경북 예천군 상리면 백석동이다.(世界日報 2007년 1월 30일 (화) 22:39)


  박호준(愛國志士 박호준 先生 別世) [記事] : 일제 강점기 학생운동을 통해 조국독립에 헌신한 애국지사 박호준(朴祜雋) 선생이 2007년 1월 30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 예천 태생인 선생은 대구사범학교 재학 시절인 1940~41년 비밀결사 조직인 문예부와 다혁당(茶革黨) 활동을 통해 민족문화 전파와 항일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했다. 문예부는 부원의 비밀엄수와 매주 토요일 작품 감상 및 비판 등 운동방침을 정하고 41년 3월 9일까지 총 9차례의 모임을 가졌고 이후 이주호·유흥수 선생 등과 결성한 다혁당은 당원들의 비밀엄수와 절대복종, 주 2회 모임 및 하급생 지도 등을 당규약으로 정하고 41년 3월부터 5월까지 총 3차례의 모임을 가졌으며 민족차별교육 및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 철폐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제의 손에 들어가면서 다혁당의 정체도 드러났고 이 때문에 선생도 체포됐다. 선생은 2년여 동안 미결수 신분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다 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77년 건국포장을, 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박인협(파이낸셜뉴스 상무)·인근(한국원양어업협회 부장)·인정(자영업) 씨 등이 있다. 발인, 2월 1일 오전 5시 삼성의료원 장례식장. 장지, 예천군 상리면 백석리.(聯合뉴스, 嶺南日報 2007-01-31 07: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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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 때 창의한
  박환(朴환) : 이조 선조 때, 개포면 금리 출신, 자는 사중(士重), 호는 노은(蘆隱), 본관은 함양, 직장 담령(聃齡)의 아들,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음사로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지냈다. 임진왜란(1592) 때 창의하였다. 묘는 개포면 금리 자좌(子坐)에 있다.(族譜, 醴泉郡邑誌 1841, 醴泉郡誌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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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좌 난 때 군량미 운반 임무를 맡았던
  박희렴(朴希濂) : 1671(현종 12)-1730(영조 6), 용문면 상금곡리 출신, 자는 성원(聖源), 본관은 함양, 이인좌(李麟佐)의 난(1728) 때 만헌공 의진(晩軒公義陣)에서 군량미 운반 임무를 맡았다. 이 일이 <창의록(倡義錄)>에 실려 있다. 묘는 용문면 두천리 두내촌 아래 경좌(斗乃村下庚坐)에 있다.(族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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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라다이스호텔, 한국관광공사 굿스테이 인증업소로 지정...축하합니다.


  파라다이스호텔(觀光公社 宿泊業所 ''''모텔의 진화'''') [記事] :


  한국 관광공사가 인증한 중저가 우수 숙박업소 ''''굿스테이''''가 브랜드 표준화 작업에 나섰다. 기존 상호에 ''''굿스테이~''''를 앞세워 브랜드 통일성의 효과를 거두기 위한 것으로 선정 업소에게는 강력 권장 사항이다.


  ''''굿스테이''''는 기존 모텔 등의 저렴한 숙박업소에 ''''청결과 친절''''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국내외 관광객이 편안하게 찾을 수 있도록 한 모범 사례가 되고 있다.


  아울러 지난 2006년 출범 이후 국내 관광 수용태세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평가도 함께 얻고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특히 2009년 들어 자격 요건도 대폭 강화하는 한편 지원사업도 늘려 ''''굿스테이''''를 명실상부한 중저가 숙박업소의 대명사로 자리매김시켜 나간다는 계획이다.



   ▶''''굿스테이'''' 왜 인기인가 : 한국관광공사가 인증한 중저가 숙박브랜드 굿스테이는 우선 여관, 모텔 등 기존 중저가 숙박업소의 부정적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했다.


  선정적 이미지를 벗어나 온 가족이 함께 묵을 수 있는 쾌적한 공간으로 거듭 태어난 것, 특히 굿스테이 인증업체는 숙박시설 및 서비스 표준화로 국내 가족단위 여행객은 물론 외국인 여행객의 숙박 만족도도 크게 높이고 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간단한 아침식사는 물론 언어소통에도 무리가 없어 지방에서도 외국인 여행객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나서게 됐다. 저렴한 숙박료도 매력이다.


  3만~5만 원 대의 일반 여관비용으로 여행객들은 객실 청결, 부대서비스, 친절한 종업원 응대 등 호텔 에 버금갈 정도의 숙박서비스를 제공받게 된다.


  굿스테이 인증제도는 업소 입장에서 보면 숙박시설, 서비스 개선 등을 통해 유수의 숙박업소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특히 한국관광공사의 다양한 협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부가가치 또한 큰 매력이다.


  실제로 관광공사는 굿스테이 인증업소에 대해 이미지 개선, 굿스테이 브랜드화, 네트워크를 통한 마케팅, 다양한 교육-홍보 지원 등을 펼치고 있다.


  이에 따라 굿스테이 인증업체는 숙박시설과 서비스 표준화로 국내외 여행객의 숙박만족도를 높여 나가는 첨병이 되고 있다. 2009년 1월 현재 전국적으로 165개의 굿스테이 업소가 운영중이며, 한국관광공사는 향후 그 숫자를 더 늘려 갈 계획이다.


  2008년 말 한국관광공사가 조사한 굿스테이 이용자 만족도 결과는 고무적이다. 전체 평점 68.1점(100점 만점)으로 국내 평균 숙박업소 만족도 56.5점을 크게 상회하고 있다...


 ◇전국 굿스테이 업소 : 플라워모텔(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 1동 30-6).../ 파라다이스호텔(경북 예천군 예천읍 노하리 24-2).../ ※자료제공=한국관광공사(2009년 1월15일 현재)


  (김형우 記者 스포츠朝鮮 2009-01-14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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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양수건설처 이영국 총무이사, 15일 경북산업평화대상 동상 수상...축하합니다.


  예천양수건설처(慶北道, 第12回 産業平和大賞 施賞式 開催 : 1.15(木) 午後 2時, 道廳講堂에서 受賞業體 等 170餘名 參席) [記事] :


  경상북도(김관용 도지사)는 2009년 1월 15일 오후 2시 도청 강당에서 수상업체 및 중소기업 관련 유관기관장 등 1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2회 경상북도 산업평화대상" 시상식을 개최한다.


  김관용 경상북도지사는 인사말을 통해 "전쟁에 버금가는 오늘의 경제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삼아나가기 위하여 노(勞)와 사(使)가 열린 마음으로 화합하는 동반자적 상생협력 관계를 정착시키는 무 분규, 양보교섭의 신노사문화 확산이 필요하다"고 강조할 예정이다.


  제12회 산업평화대상은 노사화합을 통한 생산성 향상과 산업평화 정착을 목적으로 ''''97년 처음 시행하여 ''''99년부터는 영남일보와 공동 시상을 통해 근로자 80명, 사용자 77명 등 총 157명을 시상하는 등 권위와 명성이 가장 높은 상이다.


  이번 수상업체 선정은 시군, 노동단체, 경영자단체, 유관기관 등으로부터 15명을 추천받아 "산업평화대상 심사위원회"에서 공적에 따른 예비심사와 본 심사를 거쳐 근로자 부문과 사용자 부문에 대한 최종 입상자 10명을 선정하였다.


  이날... 사용자부문... 동상에는 한국남동발전 예천양수건설처 총무이사 이영국 씨가 수상한다...


  경상북도는 무 분규, 양보교섭 타결을 통한 노사화합 등 산업평화 시스템의 확고한 구축이 현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노사평화 비상대책반"을 가동하며, 노사동향, 기업애로 상황을 수시로 점검 중에 있으며, 노동단체 및 경영자 단체 등 유관기관과의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는 등 현장행정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출처 : 경상북도청(聯合뉴스 2009.01.14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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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 출신 박창일, 신보 대구경북영업본부장 취임...축하합니다.


  박창일(地域 所在 企業支援에 最善 다할 것 : 朴昌一 信保 大邱慶北營業本部長 就任) [記事] :


  “지역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본부장으로서 중책을 맡게 된 데 대해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재임동안 당면한 경제난국 극복을 위한 정책당국의 중소기업 시책에 부응해 지역에 소재한 기업에 대한 신용보증지원에 최선을 다겠습니다.”


  신용보증기금 대구경북본부 박창일(朴昌一, 52) 신임 본부장은 2009년 1월 14일 지역기업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취임소감을 밝혔다.


  박 본부장은 1978년 신용보증기금에 입사해 성남지점장, 비서실장, 신용보험부장, 국제업무실장, 인력개발부장, 감사본부장 등 일선 지점장 및 본부 부서장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신용보증기금 내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탁월한 기획력과 리더쉽을 갖추고 있으며 소탈하고 격의 없는 성격으로 상하관계도 원만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업무에 있어서는 치밀한 기획과 합리적인 의사결정, 강한 업무추진력을 바탕으로 업무처리가 깔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57년 경북 예천 출신으로 대구 중앙상고를 나와 미국 St. John’s University MBA를 거쳐 계명대 경영대학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가족은 부인 오영숙 씨와 1녀를 두고 있으며 종교는 기독교이다.


  (박준우 記者 大邱日報 2009-01-14 20:3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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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343


  매봉 [記事] : 우암산우회 카페/ 매봉(단양, 예천)  / 글쓴이: 산소리/ 2009.01.14 11:49/


  경북 예천군 상리면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상의 저수재에서 백두대간은 계속 서쪽 벌재로 뻗어나간다. 저수재에서 벌재쪽으로 불과 약 200m 거리에서 남쪽으로 백두대간을 벗어나 가지를 치는 능선이 있다.


  이 능선은 문경시 동로면과 예천군 용문면, 상리면 경계를 이루며 남진하다가 약 6km 거리에서 봉우리 하나를 빚어놓았는데, 이 산이 매봉(865.3m)이다.


  매봉을 빚어놓은 산릉은 방향을 남서쪽으로 틀어 약 9km 거리에서 국사봉(727.6m)을 들어올리고 나서 다시 남쪽으로 12km 가량 흘러내린 다음, 예천군 용궁면과 개포면 남쪽에 이르러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에다 그 여맥들을 모두 가라앉힌다.


  매봉은 아직 등산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산은 아니다. 이 산은 산행만 하고 귀경길에 오르기보다는 산행 후 서비스 차원에서 볼거리, 먹거리, 온천욕 등으로 산행의 즐거움을 더하기 위해 개발된 산이다.


  매봉 코스는 예천에서 버스로 30분이 조금 더 걸리는 내지2리 용문사 입구 주차장이 시발점이다.


  용문사 - 남서릉 코스 : 주차장에서 왼쪽 협곡 안으로 이어지는 좁은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7~8분 들어서면 용문사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 계류를 건너 100m 가량 오르면 회전문 안으로 들어간다.


  정면 돌계단 위로 ''''소백산 용문사(小白山 龍門寺)'''' 라고 쓰인 현판이 걸린 해운루가 올려다 보인다. 누각 1층 가운데로 통하는 계단길을 통해 널찍한 마당으로 올라서면 정면으로 보광명전, 그 뒤로 극락보전과 산령각 등이, 그리고 오른쪽으로 윤장대가 보관되어 있는 대장전과 범종각, 강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용문사에서 매봉으로 가려면 보광명전 서쪽에 새로 지은 해우소 왼쪽 계곡으로 들어서면 된다. 해우소 왼쪽 상단부에 오래된 축대가 있다. 이 축대 위로 올라가면 왼쪽 계류를 끼고 길이 이어진다.


  옛날 산 너머 동로면 석항리로 넘나들던 길이어서 길이 매우 뚜렷하다. 계곡 안으로 발길을 옮기면 등산인들의 발길이 많지 않음을 증명하듯 깨끗하기 이를 데 없다.


  여름이면 계곡을 뒤덮을 만큼 밀생한 숲 아래로 흘러내리는 맑은 계류를 거슬러 15분 올라가면 합수점에 닿는다. 왼쪽으로 계류를 건너 약 50m 위에서 오른쪽으로 계류를 한번 더 건너면 참나무숲 아래로 올라왔던 길보다도 널찍한 오솔길로 이어진다.


  낙엽들이 수북히 쌓인 오솔길을 따라 15분 가량 올라가면 정면으로 매봉 정상이 보이는 782m봉 남동릉 안부에 닿는다. 782m봉 남동릉 안부에서 왼쪽 능선길로 1분 거리에 이르면 782m봉 북사면을 횡단하는 길로 들어선다.


  북사면 길을 따라 5분 거리에 이르면 매봉 남서릉 사거리 안부(동로면 경계)에 닿는다. 동로 방면 길이 뚜렷하다. 사거리 안부에서 남서릉으로 발길을 옮겨 5분 거리에 이르면 무덤이 있는 작은 봉우리 아래에 닿는다.


  이 봉우리를 왼쪽으로 우회하는 길로 들어가 오래된 무덤 2기를 지나 10분 거리에 이르면 진달래군락이 나타난다. 약 200m 길이로 이어지는 진달래군락을 통과해 20분 가량 올라가면 동쪽 어림산성 방면으로 이어지는 남동릉과 만나는 삼거리에 닿는다.


  삼거리에서 왼쪽 헬기장이 있는 능선을 따라 10분 가량 올라가면 영양 남씨 무덤이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잔디가 잘 조성되어 있는 무덤 뒤쪽으로 10m 올라가면 더 오를 곳이 없는 매봉 정상이다.


  삼각점(302. 78년 재설)이 박혀 있는 정상에서는 사방으로 조망이 막힘없이 펼쳐진다. 북으로는 저수재 부근 백두대간이 하늘금을 이루고, 오른쪽 멀리로는 도솔봉과 묘적봉이 뚜렷하다. 동으로는 어림산성이 있는 822.2m봉 능선이 멀리 학가산과 함께 시원하게 터진다.


  남동으로는 용문면 분지 너머로 예천 일부가 보이고, 남으로는 내지동과 사부동 협곡 건너로 국사봉과 백마봉 줄기가 넘실거린다. 남서쪽으로는 천주봉과 공덕산 위로 운달산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주흘산, 대미산, 포암산, 문수봉이 월악산 정상과 함께 시야에 들어온다.


  북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인 황장산과 벌재가 멀리 용두산과 함께 보인다. 하산은 올랐던 코스를 역으로 다시 헬기장을 지난 삼거리로 내려선 다음 남동릉을 탄다.


  남동릉으로 들어서서 진달래군락 사이로 20분 내려서면 박씨 묘가 있는 안부에 닿는다. 박씨 묘 안부에서 계속 남동릉을 타고 15분 거리인 임도가 지나는 안부에 닿는다.


  임도 안부에서 남쪽 초원을 이룬 분지로 내려서면 외딴 소나무가 있다. 여기서 남쪽 안골 계곡으로 내려서는 산길을 따라 잰걸음으로 1시간 가량 내려서면 용문사 주차장이다.


  용문사 주차장 -   용문사 계곡 - 782m봉 남동릉 안부 - 782m봉 북사면 - 남서릉 경유 - 정상 -   남동릉 - 812m봉 - 임도 안부 - 안골 -   용문사 주차장 (약 11km, 5시간 ) 


  ○본래 예천은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보물 21점에 도지정문화재 44점 등 65점에 달하는 문화재들이 군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 문화재들 중 보물 5점이 매봉 자락에 있고, 동쪽 산자락 끝인 감천면에는 자기 땅을 가지고 있어 세금을 내고 있는 석송령(천연기념물 제294호)과 최근에 개발된 예천온천이 자리하고 있어 산행의 묘미를 더해주고 있다.


  용문사 : 용문사는 신라 경문왕 10년(870년) 예천 출신 두운 선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대장전(보물 제145호)은 고려 명종 3년(1173년)에 팔만대장경 일부를 보존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현재의 건물은 조선 헌종 6년(1665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 규모는 석축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대장전 내부에는 장경판을 넣어두는 팔각형의 회전식 윤장대(보물 제684호) 2좌와 목각탱화(보물 제989호)가 보관되어 있다.


  윤장대는 고려 명종 3년(1173년)에 설치했고, 조선 광해군 13년 (1621년)에 중수했다. 불교 공예품으로는 유일하게 회전식이어서 귀중한 공예품이다. 목각탱화는 조선 숙종 10년(1684년)에 제작된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목각탱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이 탱화는 17세기 후기 불교 조각경향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대장전과 마주보고 있는 자운루(경북 문화재자료 제169호)도 운치가 있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회담장이자 승속들이 승병을 돕기 위해 짚신을 만든 곳이기도 했다. 불사가 있으면 법공양 장소로도 활용됐던 곳이다.


  예천온천 : 예천에서 풍기 방면으로 9km 거리에 있는 감천면 관현리에 있는 예천온천에서 귀경길에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 지하 806m에서 용출되는 중탄산나트륨 단순천인 알칼리성 온천수로, 성인병, 피부병, 노인병 예방에 뛰어나고, 혈액순환, 항진작용, 신진대사 기능활성에 효험이 있다.


  두드러기, 무좀, 비듬 제거에도 효과가 있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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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문사(夢草仁弘) [記事] :


  일제강점기 통도사의 대강백으로 명성을 떨쳤던 몽초인홍(夢草仁弘, 1870~1947) 스님은 후학들을 제도하며 외길을 걸었던 수행자이다.


  속성을 붙여 ‘허몽초’로 널리 알려진 스님의 행장은 그 명성에 비해 전해져 오는 내용은 극히 일부이다... 몽초 스님의 본래 법명은 인홍(仁弘)이다. 은사가 누군지 정확하지 않지만, 주로 주석했던 통도사 자장암과 인연 있는 스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인홍이란 법명은 출가 당시 은사에게 받은 것이며, 몽초(夢草)는 스스로 지은 당호이다. 당호에는 사연이 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불가(佛家)에서는 신년초가 되면 스님들이 영험 있는 도량을 찾아 정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몽초 스님은 1890년 예천 용문사 강원에서 구하(九河) 스님과 함께 공부를 했다.


  당시 용문사는 ‘영남 제일 강원’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곳이다. 한때는 용문사에 500명의 스님이 모여 50일간 담선회(談禪會)를 열었을 정도로 큰 도량이었다.


  하지만 조선후기 용문사의 살림은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곤궁했다.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큰 불공이나 재가 있는 날 나오는 별식(別食)을 손꼽아 기다리며 주린 배를 움켜쥐는 일이 자주 있었다.


  평소에는 구경하기 힘든 특별 공양은 ‘된장’이었다. 얼마나 맛있었는지, 당시 학인들은 “나중에 주지 등 소임을 맡으면 된장을 실컷 먹을 것”이라며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이성수 記者 佛敎新聞 2493號/ 1월17일자/ 2009-01-14 오전 9:46:11 送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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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룡포 [記事] : 여행과 친구들 카페/ 경북) 예천 내륙의 섬마을 ''''회룡포''''  / 글쓴이: 포비와 깨구락지(김한웅)/ 2009.01.14 06:34/ 물도리마을 경북 예천 회룡포/ 육지 속의 섬마을/


  전형적인 물도리마을로 ‘육지 속의 섬’이라 불리는 경북 예천 회룡포. 한눈에 바라본 회룡포의 풍경은 빼어난 장관을 자랑하지만, 마을 주민의 삶은 고달팠다.


  육지 안의 섬이기에 힘들었던 시간이 많았다는 회룡포에서 꽃샘추위보다 더 춥게 수년을 지내야 했던 이들의 사연을 들어보았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마을을 감싸며 S자 모양으로 흐른다.


  강 주위엔 백사장이 길게 펼쳐져 있고, 그 너머에 가파른 경사의 산이 철옹성처럼 마을을 둘러싼다. 산 정상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다 하여 ‘회룡(回龍)’이라 한다.


  경상북도 예천군 회룡포는 내성천이 마을을 휘감아 돌아 만들어진 전형적인 물도리로 강 위에 섬이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350도, 딱 10도가 모자르여. 저기 바위만 읍스면 완전 섬이 돼뿌리지여.” 예천군 문화관광해설사 박용성 씨의 말처럼 회룡포와 이웃 마을이 연결된 곳은 사람이 건널 수 없는 바위뿐이었다.


  회룡포를 ‘육지 속의 섬 아닌 섬이 될 뻔한 곳’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이다.


  아름다운 물도리마을 : 회룡포는 낙동강 상류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갑입곡류(물길이 휘감아 돌아 형성되는 형태의 하천 지형)로 산과 물이 어우러진 빼어난 장관으로 유명하다.


  특히 드라마 <가을동화>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아름다운 물도리 마을인 회룡포를 잘 조망할 수 있는 장소는 비룡산 정상에 세워진 팔각정 모양의 전망대다.


  가장 빠르게 전망대로 가고자 회룡교를 건너 곧바로 우회전해 산길을 넘어 장안사로 들어간다. 장안사에서 종루 옆으로 난 오르막길을 오르면 큰 불상이 서 있고, 오른쪽에 ‘회룡대’라 쓰인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5분 정도 걸으면 전망대에 도착한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회룡포의 풍경은 아름답다. 곱게 S자로 굽어진 내성천은 태극 문양처럼 힘차면서도 부드럽게 이어져 있고, 고운 백사장과 어우러진 마을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전망대 근처의 산책로를 따라 제2전망대와 산성까지 다녀오는 코스(30분 정도 소요)도 괜찮다. 또한 주변의 원산성과 봉산성 등 역사가 깃든 장소가 있어 둘러보는 것도 좋다.


  장안사 역시 스쳐 지나가기에는 아쉽다. 장안사는 통일신라시대 운명선사가 세운 고찰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이를 기리고자 전국 명산 세 곳에 장안사를 세웠는데 위로는 금강산, 아래로는 양산, 중간이 바로 비룡산의 장안사라 한다.


  가깝지만 먼 이웃 마을 : “옛날엔 의성께(의성포)라 했는데, 사람들이 자꾸 자게(저기) 의성으로 가서 회룡포로 바꿨제.” 영남의 강변마을인 회룡포는 원래 의성포로 불렸으나 관광객들이 이웃 고을인 의성군에 가서 회룡포를 찾는 일이 많아지자 얼마 전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그러나 여전히 회룡포 주민들은 이곳을 의성포라 부른다.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대은2리가 회룡포의 주소다. 회룡포는 신당, 고두실, 회룡 이 네 부락이 모여 대은2리라는 한 마을을 이루고 있지만, 다른 마을과 왕래가 적었다 한다.


  회룡포에서 이웃 마을까지 가는 길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회룡포에서 이웃 마을로 가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1996년 개설된 회룡포와 개포면 신음리 간 임도를 따라가는 방법이다.


  그러나 시간이 만만치 않게 걸린다. 건넛마을까지 6km 정도 가야 하니, 걸어서는 엄두가 나질 않는다. 이웃 마을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마을을 감싼 내성천을 직접 건너는 방법이다.


  과거 강이 얕을 땐 마을주민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바지를 걷은 채 물길을 헤쳐 지나갔다. 수심이 깊을 땐 배를 이용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십 년 전만 해도 내성천을 오가던 배가 있었다고 한다.


  건너편에서 부르면 사공이 노를 저어 와 강을 건넜다. 7~8년 전, 내성천에 다리가 하나 생겨 요즘은 다리를 통해 건넛마을로 향한다. 일명 ‘뽕뽕다리’라 불리는 이 다리는 공사장에서 사용되는 철근으로 만들어졌는데, 바닥에 반 뼘 정도의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뽕뽕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흔들리는 것이 바람이 세차게 불면 다리가 뒤집어질 것 같다. 그나마 물이 범람하는 날에는 다리를 통해 건너는 것도 불가능하다.


  장마철, 강을 건너는 배가 없을 땐 내성천을 따라 형성된 약 2km의 오솔길을 따라 이웃 마을인 고두실마을로 향했다. 이 길은 회룡포에서 개포면으로 이어진 도로가 개설되면서 방치됐다가, 작년 겨울에 대은리마을 주민들에 의해 복원이 됐다.


  복원된 옛 오솔길을 걸어보았다. 길 폭이 1m 안팎이다. 어깨너비도 채 안 되는 곳도 있다. 평평한 길인가 싶더니, 이내 가파른 길이 나온다.


  등산로로는 안성맞춤일진 몰라도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라 하기엔 험난하다. 또한 오솔길엔 강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어떠한 보호장비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 한눈을 파는 순간에 위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겠다.


  과거 회룡포 주민은 비가 많이 내려 내성천을 건널 수 없을 때엔 이 오솔길을 통해 물을 이고, 쌀을 사고, 학교에 가야 했을 터. 그래서 회룡포 주민들은 육지에서 철저히 섬 생활을 해야 했다.


  육지에서 섬 생활을 한다는 건 : “그런 고상이 없었지. 말도 못하오.” 열일곱 살에 회룡포에 시집와서 65년을 산 엄재경(82세) 할머니는 이곳을 사람 가두어놓는 동네라 한다.


  “산꼭대기로 가서 아덜 학교 가고 이랬지. 물은 머리에 이고 이러고 댕겼지.” 아이들은 결석하는 날이 많았고, 몸이 아파도 쉽게 병원엘 가지 못해 병이 악화되거나 목숨을 잃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9가구 15명. 현재 회룡포마을 주민 수다. “혼자 사는 데가 서이, 두 사람이 사는 데가 여섯이라.” 대부분의 주민은 70~80세로 고령화가 심각한 농촌이다.


  엄재경 할머니가 집으로 초대한다. 허리가 불편해서 유모차에 의지해 몸의 중심을 잡은 채 이동을 하신다. 점심에 붙인 아궁이 불이 식었는지 구들방엔 온기가 약하다.


  손님이 왔으니 뭐 좀 내와야 한다는 할머니. 끝끝내 사양하던 내게 작년 늦가을에 따다 말린 곶감을 내주신다. 가는 길에 먹으라고 한 주먹 움켜쥐어 주머니에 넣어주신다.


  둘러보니, 집집이 감나무가 서너 그루 이상 자라고 있다. 봄의 기운이 아직 오지 않아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지에 감꼭지만 쓸쓸하게 매달려 있다.


  지금이야 회룡포가 아름다운 마을로 널리 알려져 외지에서 찾아오는 이가 많지만, 과거에는 이곳을 방문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가는 사람도, 오는 사람도 적은 외딴 섬 이야기가 바로 회룡포의 이야기였다.


  소여물을 쑤던 김영수(70세) 할아버지도 회룡포에 살면서 겪었던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신다. “물이 많이 차면 방탱이(고무대야)에 아덜 태우고, 어른들이 (썰매처럼) 끌고 갔지.” 첨벙첨벙 자신은 물에 빠져가며 아이들을 등교시키는 것, 육지이면서 동시에 섬인 회룡포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논하고, 고추하고 그러지.” 회룡포 주민들은 논농사와 고추농사로 생계를 잇는다. 지금은 농한기라 대부분 주민이 집에서 가축을 돌보거나 집안 살림을 정비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 한다.


  김영수 할아버지 역시 집에서 키우는 다섯 마리 소에게 먹이를 주는 일과 땔감을 손질하는 것이 요즘 하루 일과다. 인적이 드문 회룡포는 조용했다.


  9가구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 몇몇은 타지에 사는 아들네와 딸네로 갔기에 마을은 더욱 한적했다. 저녁 준비가 한창인지 몇몇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오른다.


  마을에 들리는 소리라곤 이방인의 발걸음에 반응하는 개 짖는 소리뿐이다. 할아버지가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가라 하신다. 뽕뽕다리가 어둠에 갇혀버리면 건너기가 어려울 것 같아 걸음을 재촉한다.


  Info :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국도 → 점촌·합창IC → 34번 국도 예천 방향 → 용궁면 → 925번 지방도 → 회룡마을(회룡마을의 길이 끝나는 곳 삼거리에 주차를 하고 일명 뽕뽕다리라 불리는 임시 다리를 건너 회룡포로 갈 수 있다)/


  대중교통 동서울터미널에서 예천행 고속버스가 하루에 8차례 운행된다, 예천읍내에서 용궁면 대은리(의성포) 간 용궁행 버스 운행


  회룡포 안에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회룡포 황토민박’이 있지만 봄부터 가을까지만 운영한다. 회룡교를 건너 내성천을 따라 좌회전하면 ‘회룡포쉼터’라는 사계절 운영하는 민박집이 나온다. 4만~6만원(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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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악사(西岳寺 山寺音樂會) [記事] : 서악사 산사음악회가 2005년 8월 24일(수) 오후 7시 서악사 특설무대에서 펼쳐진다고 서악사 측이 밝혔다. 2004년에 이어 2번째로 실시하는 산사음악회에 출연하는 가수는 도일 스님(서악사 주지), 일봉 스님(연방사 주지), 정수라, 해바라기, 김범룡, 조항조, 박경진, 장태민 등 유명 가수와 MC는 박수경(대구 불교방송 아나운서)이다. 2004년에 재미는 있었는데 추워서 애를 먹었는데 2007년에는 무더운 여름밤에 시원하게 즐길 수 있을것 같아 선후배님들!!!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시고 하루의 피로를 산사음악회에서 풀어 보심이 어떨지...(해국

http://blog.daum.net 2005.08.0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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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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