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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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1818) : 예천 충효 17(附 제곡 출신 권재진, 서울고검장 발탁...축하합니다/담암 출생 김태현, 순천향대 부총장 임명...축하합니다/용문 출생 김창균, 신풍제약 부사장 승진...축하합니다/예천 출생 진성진 필맥스 노조위원장, 구미시 노사협력 모범사업장으로 선정...축하합니다/예천읍 출신 권영박, 한국서부발전 전무로 내정...축하합니다/대심2리 출신 황현동, <반짝이는 은빛물결> 펴내...축하합니다/예천방문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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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수문장을 하여 <공훈록>에 실린 반운익(潘雲翼)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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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으로 우정승을 지낸
반익순(潘益淳) : 본관은 거제, 부(阜)의 손자, 좌명보리공신(佐命輔理功臣)으로 우정승(右政丞)을 지냈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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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의병장으로 전공을 세운 반인후(潘仁後) : 旣載
중종, 인종, 명종, 문정왕후의 상을 당했을 때마다 3년 간 육식(肉食)과 여자를 금한 반충(潘沖)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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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에 편입되어 공작반으로 활동한
배선두(裵善斗) : 1924- , 예천 출신, 중국에서 일본군 제8637부대를 동료 3명과 함께 탈출하여, 광복군(光復軍) 제1지대 제3구대에 편입되어 공작반으로 활동하였다.(抗日獨立運動史 1991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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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의 좌종사로서 애족장에 추서된
백남규(白南珪) : 1867(고종 4)-1942, 개포면 황산리 출신, 자는 효원(孝源), 호는 동계(東溪), 본관은 수원, 낙인의 아들, 얼굴이 그림같고 기골이 장대하여 7세 때 학방에 나아가 글을 읽음에 재주가 특출하여 다른 사람이 읽지 못하는 것도 낭랑이 물 흐름같이 읽어 13세에 경사(經史)를 통달하였고 글을 지음에 화려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차게 하였고, 14세에 성시(省試)에서 글씨가 구슬 같음에 보는 사람이 시장터 같았다. 글이 깊고
인륜이 돈독하고 은혜가 많아 모든 사람이 흠모하고 칭송하니 근세에 드문 선비였다. 그러나 시대가 혼미하여 두문(杜門)하고 독학을 하며, 효성이 지극하였고, 농사를 지음에 친척에게 땅을 나누어주어 생활을 도왔고, 그 마음을 오로지 고향에 바쳤다. 1907년 7월 운강 이강년(雲崗李康秊)의 항일 의거소식을 듣고 의병 부대에 가담하여 좌종사(坐從事)로 임명되어 거액의 군자금(軍資金)을 도우는 등의 활동을 하였으니 위국충정(爲國忠情) 또한 짐작케 한다. 국권피탈(1910)
후에는 자정수의(自靖守義)하였다. 묘는 개포면 신음리 우두산 간좌원(牛頭山艮坐原)에 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이 애국 호민의 귀감이 되기에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을 추서하였다. 손자 명흠(明欽)이 그 공훈을 기리고자 비(1963)를 세웠다.(禮鄕醴泉 1994, 韓國獨立史 675쪽, 雲崗先生 倡義錄, 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保勳處 第1輯 304쪽, 獨立有功者功勳錄 9卷 196쪽)
백남규(白南圭) : 1884(고종 21)-1970, 예천 출신, 자는 성옥(成玉), 호는운암(雲庵), 본관은 수원이다. 일찍이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안동진위대 부위를 지냈다. 군대해산(1907) 때, 경북 순흥(順興)에서 의병을 일으켜 부하 800명을 거느리고 항일 투쟁을 전개, 이 때 강원도 횡성(橫城)의 봉복사(鳳復寺)에서 의병대장 이강년을 만난 뒤 그의 인품에 감복하여 이강년 의진의 우선봉장이 되었다. 그 해 7월 제천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려 도선봉장(都先鋒將)이 되었고, 8월에는 모두령(毛頭嶺), 유수산, 문경의 갈평 등지에서 크게 승전하였다. 9월에는 영월 사리치(寺里峙)에서 선유원(宣諭員) 홍우석(洪佑錫)의 100여 명 수비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1908년 6월 이강년이 적에게 붙잡히자, 군사지휘권을 장악한 김상태(金尙台)로부터 의병 1지대를 분급받아 서벽, 내성, 아산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1909년 12월 죽산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받고 8년 간 옥고를 치르다가 출옥하였다. 1918년 상해로 망명하려다가 잡혀 15년 간 옥고를 치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인터넷 야후! 백과사전, 인터넷 Alta vista 2001, 인터넷 hanmir 2002, 인터넷 myhome.dreamx.net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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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비호부대에 편입되어 항일운동을 하여 애족장을 받은
백문기(白文基) : 1924- , 개포면 황산리 출신, 소학교(小學校) 졸업, 일제의 강제 징집으로 일본군에 입대한 후 치중병(輜重兵) 일등병(一等兵)으로 중국 호남성(湖南省) 제8637부대에 배속 중 1944년 완전 무장으로 일본군에서 동료 3명과 함께 탈출하여 중국 중앙군 유격대, 제4군단 제45사단에 편입, 일본군의 전방 보급차량의 기습, 교통로 파괴, 선무 공작(宣撫工作) 등에 활약하였다. 1945년 1월 한국광복군 비호부대(光復軍飛虎部隊) 제1지대(支隊)
제3구대(區隊)에 편입되어 단기 교육을 수료한 후 공작반에 배속되어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동년 2월 다시 중국 중앙군에 배속, 한적 사병(韓籍士兵) 탈출 권유의 전단 살포와 벽보 부착, 정보 수집과 포로 심문, 일본군의 보급 차량 습격 등 다대한 전공을 세웠다. 대통령 표창(1982),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 1990)을 받았다.(獨立運動史 714-715쪽, 抗日獨立運動史 1991 280쪽, 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 第5卷 國家報勳處 1988年 349
962-963쪽, 獨立運動史 國家報勳處 6권 449ㆍ452ㆍ6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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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촌간으로서 박제상을 추천한
벌보말(伐寶靺) : 수주촌(水酒村, 醴泉邑) 출신, 417년(신라 눌지왕 1)에 재임한 수주촌간(水酒村干, 현 예천고을 원)이다. 수주촌은 예천군을 말하고, 간(干)은 <신라 직관지(新羅職官志)> 외관조(外官條)에 의하면, 경관(京官)의 사지(舍知)에 준한다고 하였다. 그런즉 벌보말은 수주촌의 간이라고 하였으므로 경관 사지에 해당되는 예천고을 원이었다. 신라 제19대 눌지왕이 왕위에 오르자, 변사(辯士)를 보내어 왕의 동생들로서 외국에 인질로 잡혀간 미사흔(未斯欣)
과 복호(卜好)를 맞아오려고 했는데, 수주촌(水酒村)의 간 벌보말(干伐寶靺) 등 3명이 현명하고 지혜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불러 묻기를, "내 아우 두 사람이 왜국과 고구려의 두 나라에 볼모로 가서 여러 해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형제의 정으로 생각하여 그칠 수 없으니, 제발 그들을 살아 돌아오도록 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면 되겠소?" 라고 하자. 3명은 같이 대답하기를, "저희들이 듣건대, 삽량주(揷良州)의 간 박제상(干朴堤上)은 강직하고 용감하며
지모(智謀)가 있다 하오니 전하의 근심을 풀어 드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박제상(朴堤上)을 불러 앞으로 오게 하고 3명의 말을 알리고, 왜국과 고구려로 가기를 청하니 박제상은 대답하기를, "신(臣)이 비록 어리석고 불초(不肖)하오나 감히 명령을 받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校正 三國史記 卷 45 列傳 第5 朴堤上條, 韓國의 思想大全集 3卷 金富軾條 118쪽, 韓國史話 李相玉著 東西出版社 61쪽, 慶北道義誌 255쪽)
[인터넷 야후] : 눌지왕이 즉위(417)하자 말 잘 하는 사람을 구해 가서 일찌기 고구려와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 두 아우인 미사흔(未斯欣)과 복호(卜好)를 맞이해 올 것을 생각하고 있던 바 수주촌간 벌보말이 어질고 지혜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불러서 묻기를, "나의 아우 두 사람이 왜와 고구려 두 나라에 볼모가 되어 여러 해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형제이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살아서 돌아오게 하기를 바라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하였다. 벌보말이 대답하기를, "신이 듣건대, 삽량주간(삽良州干) 박제상(朴堤上)이 용감하고 지모(智謀)가 있다 하니, 전하의 근심을 풀 수 있겠습니다."하였다. 이에 박제상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벌보말의 말을 하며 원행(遠行)을 청하였다. 이상의 <삼국사기> 내용을 원담(圓潭) 김광섭(金光燮)이 다음과 같이 희곡화(戱曲化)하였다.
5세기 신라의 수주촌 간(水酒村干, 現 醴泉郡守), 제1막 제1장 신라 왕궁에서 흘리는 눌지마립간의 눈물/ [눌지] : ...바로 그 원수같은 실성왕만 아니었다면 오늘 날 내가 이리도 혈육과 흩어져 사는 단장의 슬픔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요(옛 생각이 떠올라) ...선왕 실성은 즉위하자마자 왜국이 요구한다 하여 겨우 열 살 밖에 안된 막내 미사흔을 왜국으로 볼모로 보내고 어느 듯 17년의 세월이요, 무정한 세월 17년이 흘렀단 말이요! 아! 이 기막힌 짐의 심정을 그 누가 알겠소이까?(두 손으로 가슴을 치며 단장의 앞으로 토해낸다)... 어디 미사흔 아우 뿐이요? 고구려에 잡혀간 큰 아우 복호는 또 어찌 하오?... 그 아우도 선왕 실성이 즉위 11년되는 해에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소. 그리고 어느 듯 7년의 세월이 흘렀소이다... [서불한] 이 나라의 중신 중에 수주촌 간 벌보말 등 촌주(村主) 세 사람이 지혜가 많고 현명하옵니다. 한 번 불러서 하문해 보심이 어떠하올지요? [눌지] : 좋소. 당장 궁으로 부르시요(暗電). 제1막 제2장 : (촌주 세 사람, 왕제 구출 대임을 맡을 적임자로 박제상을 천거, 전장과 동일한 왕궁 후원, 무대 위에 회의용 탁자가 준비되고, 중앙에 눌지마립간의 자리, 양쪽에 촌주 세 사람과 서불한 등 중신 여럿이서 주위에 신경을쓰면서 숙의하고 있다. 이 때는 아직 눌지마립간이 등장하기 전이다. 지금은 사람의 이목을 피해 야외 중궁 모임이 조촐하게 진행되고 있는 분위기, 무대가 밝기 전, 어둠 속에 나타난 해설자에게 조명이 떨어진다) [해설자] : 이렇게 해서 눌지마립간은 촌주 세 사람을 왕궁으로 부릅니다. 걸핏하면 바다 건너에서 아귀같이 쳐들어오는 왜군과 막강한 힘을 배경으로 신라의 땅에까지 군사를 보내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고구려군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도 장소는 은밀한 곳이어야 했습니다. 자! 그럼, 무슨 중대한 이야기가 오가는지 함께 가보실까요.(조명이 꺼지면서 해설자가 사라지면 무대가 밝아온다), [소리] : 마립간 전하! 납시요!(탁자를 둘러싸고 숙의 중이던 중신들 모두 일어나 눌지마립간을 영접한다. 눌지마립간, 시종 없이 홀로 등장하여 읍을 하며 예를 표하는 중신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한다) [눌지] : 자, 자, 모두 앉읍시다.(자리에 앉는다). [서불한] : (선 채로) 상대등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앉으십시요(사이), (상대등이라고 지목된 중신들만 자리에 앉는다). [서불한] : (선 채로) 전하! 소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사이, 호명한다), 수주촌 간 벌모말 촌주! 전하께 인사 여쭈시오. [벌보말] : (읍하며) 예, 전하, 수주촌 간 벌보말, 인사 여쭙니다. [눌지] : 만나서 반갑소! [서불한] : 모두 앉으시요(서불한과 촌주 세 사람 자리에 앉는다), [눌지] : (마음 조리며), 그래, 무슨 묘책이라도 나왔소? [서불한] : 예, 전하께옵서 일구월심,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가 있는 형제분들을 그리위하시는 심정을 설명하고 두 분 왕제님들이 살아서 돌아올 방법이 없겠는지 세 분 촌주와 더불어 의논을 거듭했사옵니다. (촌주들에게) 촌주 어르신들, 여러분의 생각을 전하께 여쭈시지요? [벌보말] : (벌떡 일어나) 수주촌 간 벌보말, 전하께 여쭙겠습니다. [눌지] : 말씀해 보시요! [벌보말] : 신라에서 말로나 글로나 무예로나 적국에 들어가 왕제를 구출해 낼 수 있는 언변이 능한 인물로는 삽량주 간 박제상 태수 이상 가는 적임자가 없는 줄로 아뢰옵니다. [눌지] : 삽량주의 간 박제상 태수가 적임자라? [벌보말] : 예, 전하(벌보말이 앉고 구리내가 일어난다.)... [눌지] : 쉬흔 여섯이라면 상늙은이가 아니요? 중대한 임무를 띄고 적국으로 들어가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소!, [벌보말] (벌떡 일어나) 아닙니다. 전하! 관설당 박 태수는 문무에 뛰어나 중원(中國) 땅의 역사에도 밝을 뿐 아니라 마술이며 활솜씨는 가히 달인의 경지인 줄로 아옵니다. [눌지] : 정녕 적임자다. 이 말이요?(좌중을 둘러본다). [일동] : (모두 일어난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눌지] : 그럽시다. 여러 중신들이 나를 구하시었소. 한시가 급합니다. 당장 삽량주로 왕명을 전하시오. 이제야 십여 년 전 동안 묵은 한을 풀려나 보오! 하하하, 하하하, [일동] : 금상 천하, 천천세! 천천세!(일동이 두 손을 들어 천천세를 외치며 환호한다. 서서히 막이 내린다).(三國史記 卷第45 列傳 第5 朴堤上條, 圓潭 金光燮 第2 戱曲集 帳幕 戱曲 1전 5막 17장 忠節, 인터넷 야후 2001)
벌보말(伐寶靺) : 수주 촌주이다. 신라 눌지마립간 때의 지방 촌주(村主), 눌지마립간은 즉위한 뒤 고구려와 왜국에 각각 볼모로 가있는 동생 복호(卜好)와 미사흔(未斯欣)을 데려오고자 하여 이 일을 맡을 적임자를 물색하였다. 이 때 수주촌(水酒村 : 지금의 예천군)의 촌주 벌보말이 일리촌주(一利村主) 구리내(仇里내) 및 이이촌주(利伊村主) 파로(波老)와 함께 삽량주간(?良州干) 박제상(朴堤上)을 추천하였다. 신라 상대는 아직 중앙관제가 정비되어 있지 않아서 지방 촌주들의 영향력이 강하였는 바, 벌보말 또한 지방 촌주로서 눌지마립간 때에 유력자로서 활약한 듯하다.(三國史記, 三國遺事 南東信(韓國學中央硏究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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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에 항의 상소를 올리고 벼슬을 버린 변규창(邊奎昌)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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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을 하여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은
변두구(邊斗九) : 1896(건양 1)-1967, 용문면 출신, 1919년 4월 2일 용문면 상금곡동(上金谷洞)에서 수 백 명의 군중을 주도하며,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곳의 만세 운동은 권석인(權錫寅)이 고종 인산(高宗因山)에 참례차 상경했다가 서울의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오면서 구체화하였다. 이에 평소 항일 의식이 투철하던 변두구는 권석인, 권석호(權錫虎), 권석효(權錫孝), 변용구(邊用九) 등과 함께 예천읍 장날인
3월 12일에 거사하기로 약정(約定)하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일경(日警)의 삼엄한 경계망으로 인하여 거사를 다음 장날인 3월 17일로 미루었으나, 이 때도 역시 일경의 철통같은 감시로 인하여 사전 탐지되어 중지하고 말았다. 이렇듯 거사가 지연됨에 따라, 변두구 등은 어떠한 일경의 탄압과 경계에도 불구하고 거사를 단행하기로 뜻을 굳히고, 4월 2일 오후 10시에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만세 시위를 단행하였다. 변두구는 수 백여
명의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횃불을 앞세우고 면사무소와 동리 각처에서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身分帳指紋原紙, 受刑人 名簿, 3.1獨立運動實錄 下卷 214-215쪽, 醴泉郡誌 1988 148-149, 大韓獨立抗日鬪爭總史 下卷 592쪽, 獨立運動史
3卷 418-419쪽, 獨立有功者功勳錄 12卷 7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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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손계(孫契) : 1557(명종12)-?, 예천 음산(陰山) 출신, 자는 순경(舜卿), 호는 산음(山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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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용단 재무국장으로 투옥된 손성운(孫聖雲), 손종우(孫鍾禹) : 旣載
의용단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룬 손영기(孫永箕)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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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송니수(宋尼壽) : 1576(선조 9)-?, 감천면 만장(晩場) 출신, 자는 경로(景魯),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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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예천수성장이 된 송복기(宋福基)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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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송사성(宋思誠) : 1557(명종 12)-?, 예천 송천(松川) 출신, 자는 면부(勉夫),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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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때 의병의 참모장을 한 송익룡(宋翼龍) : 旣載
병자호란 때 창의한 송천추(宋天樞) : 旣載
일제 때 중국과 한국에서 항일운동을 한 신욱(申煜) : 旣載
고려가 망하자 예천에 와서 숨은 신유(申維)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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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장군의 죽음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귀향한
신윤공(申允恭) : 하리면 보곡리 출신, 호는 정관(靜觀), 본관은 평산, 은상백 중전(仲全)의 아들, 고려 때 예조 전서(禮曹典書, 或은 禮儀判書), 고려 말 최영 장군의 억울한 죽음을 보다가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곧 냇물로 달려가 귀를 씻었다고 하여 세이천(洗耳川)이란 이름이 지금까지도 보곡리에 전해오고 있다. 묘는 실전(失傳)하여 단비문(壇碑文)을 1994년 10월에 후손 효순(孝淳)이 짓고, 후손 태인(泰仁)이
썼다.(申 墓碑, 醴泉의 金石文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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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때 원종공신인
신응지(申應之) : 이조 세조 때, 호명면 내신리 내동(內洞) 출신, 자는 자흠(子欽), 본관은 평산, 박사 비(賁)의 아들, 명지(命之)의 동생, 원(瑗)의 아버지이다. 1451년(문종 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를 지냈으나 늙은 부모를 섬기기 위해 귀향했지만, 효우(孝友)로 천거되어 의흥 현감(義興縣監)에 이르렀다. 그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형 명지(兄命之)와 더불어 시묘를 하였다. 세조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이었다. 묘는
예천읍 백전2리(栢田2里) 능골 성넘산 능골에 있다. 아들 원(字 伯玉)은 유학(幼學)으로서 1480년(성종 11) 식년 진사시에 3등 88위로 합격하였다.(襄陽誌 1661, 醴泉郡邑誌 1770 1786 1895, 醴泉郡誌 1939, 司馬榜目)
신응지 [記事] : 봉화군사/ 간행년 : 2002/ 저자 : 봉화군/ 발행처 : 봉화군/ 第3章 人物/ 第1節 文科/ 신응지(申應之) : 본관은 平山으로 賁의 아들이다. 문과 급제하여 司諫에 이르렀다.(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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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때 창의하여 <창의록>에 실린 신익도(辛翼道) : 旣載
공민왕 때 왜구가 들끌자, 혁혁한 공을 세워 은산백에 봉해진 신중전(申仲全) : 旣載
호란에 의병장, 유효립옥사에 역적토벌로 영사원종1등공신이 된 신즙(申楫)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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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신현숙(申鉉淑) : 1884(고종 31)-?, 호명면 출신, 일찍이 배일 사상(排日思想)을 품고 1910년대 후반에 중국 유하현(柳河縣)에 이주하여 항상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가 1921년 3월부터 한족회(韓族會)에 가입하여 검찰과 십가장(十家長)이 되어 총관 성태영(總官成泰永), 검독 이우창(檢督李愚昌) 등과 기맥을 통하여 유하현에서 군자금(軍資金)을 모집하며 독립신문과 독립운동 문서를 배부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원조하였다. 비밀히 귀국하다가 신의주경찰서에
체포되어 취조를 마치고 1922년 3월3일에 신의주검사국으로 압송되었다.(東亞日報 19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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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안계(安係) : 1552(명종 7)-1627(인조 5), 개포면 경진리 검암(劒岩, 蘆浦) 출신, 자는 효균(孝均), 호는 포운(浦雲), 본관은 순흥, 노포(蘆浦) 준(俊)의 후손, 학생(學生) 이손(耳孫)의 아들, 임(任)의 형이다. 우(遇)의 아버지이다. 부모 슬하(具慶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582년(선조 15) 식년 진사시에 3등 85위로 합격하였다. 임진왜란(1592)을 만나 그의 동생인 임(任)과 더불어 앞장서 의병을 모집하여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향하다가 상주에 이르러 적을 만났는데,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대적할 수 없어 동생은 북천교(北川橋)에서 전사하였고, 그는 패잔(敗殘)한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곽재우(郭再祐)의 진중에 도착하여 몇 년 사이에 노고와 공적이 자못 많았다. 난이 평정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묘는 개포면 동송리 동송(冬松) 자좌(子坐)에 있는데, 묘갈명(墓喝銘)은 후손 원(愿)이 썼다.(司馬榜目, 襄陽誌 1661, 醴泉郡邑誌 1786 1895, 醴泉郡誌 1939,
醴泉의 金石文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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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때 공신
안극변(安克辨) : 예천 출신, 본관은 광주(廣州), 이조참판 철산(鐵山)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7년(세조 3) 8월 12일 사직(司直)으로서 원종공신 3등으로 녹훈되었고, 벼슬이 호조 참의, 호조 참판에 이르렀다.(世祖實錄, 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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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큰공을 세운 안대윤(安大胤)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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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의 의병인
안두환(安斗煥) : 예천 출신, 자는 상칠(相七), 본관은 순흥, 구한 말의 의병으로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의 협력자였다.(獨立運動史資料集 1卷 303쪽,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108쪽, 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國家保勳處 3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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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복위를 꾀한 안리(安理) : 旣載
이인좌의 난 때 창의한 안성리(安省履)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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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퇴위 후 벼슬버리고 예천에서 숨어산
안수인(安壽仁) : 보문면 간방2리 꼭두바우 순흥 안씨 입향조, 회헌 향(晦軒珦)의 9세손, 호는 사정(思亭), 문과에 급제하여 대정 현감(大靜縣監)에 있을 때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의 복위 운동을 모의하다가 실패로 돌아가서 순흥(順興)이 유혈십리(流血十里)할 때, 직위를 버리고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남하하여 이곳 꼴두바우산(복암산) 아래에 숨어서 살았다. 자손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고 타이르고, 사군(思君), 사국(思國), 사선영(思先瑩)을 명심하는
뜻에서 호를 사정(思亭)이라고 짓고, 꼭두바우에 사정(思亭)이라는 모정(茅亭)을 짓고 살았다. 후손들이 꼭두바우(福岩)에 그를 위해 1966년에 중건한 사정(思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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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안영수(安榮壽) : 1571(선조 4)-?, 예천 신당곡(神堂谷) 출신, 자는 경부(慶夫), 호는 상암(床巖),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倡義錄)
안영수 [記事] : 안동시사 5/ 간행년 : 1999/ 저자 : 안동시/ 발행처 : 안동시청/【順興 安氏】/ 안영수(安榮壽):1571(선조 4, 신미)∼1654(효종 5, 갑오). 본관 順興. 자는 英邵. 호는 床?. 國老의 子. 외조는 寧海 申光渭.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從姪 遇, 申慶會와 더불어 의병을 이끌고 火旺山城 郭再祐 휘하에 들어가 전공을 세움. 醴泉 新塘里로 移居. 壽職:護軍. ▣참고:『古文書集成』 ??집필:이원걸(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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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때 창의한
안이성(安履性) : 1670(현종 11)-1743(영조 19), 용궁면 월오리 출신, 자는 경명(景命), 본관은 순흥, 이인좌의 난(1728) 때 창의한 공으로 장서기(掌書記)를 지냈다. 묘는 용궁면 월오리 거산(巨山)에 있다.(族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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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의 좌종사로서 건국포장에 추서된
안재극(安在極) : 1879(고종 16)-1940, 용궁면 월오리 장평(章坪) 출생, 자는 기오(箕五), 호는 사암(思菴), 본관은 순흥, 고려 충신 준(俊)의 후손, 모봉(慕峰) 우경(禹慶)의 맏아들,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의 제자이다. 항일 의병 활동과 성리학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구한 말의 의병으로 이강년 의병진(李康秊義兵陣) 좌종사로서 협력하여 예천, 문경 일대에서 활약하였고, 한일합방(1910) 후에도 <격문(檄文)>과 <효유문(曉諭文)>을
작성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즉,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우리의 자주적 외교권이 침탈되더니, 이듬해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통치권을 장악함에 따라, 우리나라는 식민지나 다름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안재극은 이 시기가 우리 민족에게 국망(國亡)의 위기임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1907년 7월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에 따른 군대 해산으로, 해산
당한 군인들이 대거 의병 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 전쟁으로 발전되고 있을 무렵, 그는 이강년 의진에 참여하여 좌종사로 활동하였다. 이강년 의병장은 을미의병(1895)을 전개하였다가 고종의 해산 명령으로 물러앉았다가, 1907년 7월 정미7조약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강년 의병 부대는 주로 태백산백을 동서남북으로 오르내리고 넘나들며 정미의병(丁未義兵, 1907)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상을 보였다. 특히
이강년 의병장은 대담한 유도 작전으로 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는 전과를 올렸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후 1908년 6월 청풍(淸風) 까치재에서 이강년 의병장이 적들에게 피체되었어도, 그의 부장들은 의병 활동을 지속하였다. 안재극도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결국 1910년 8월 주권이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합방 이후 국권 회복 의지에 불타는 그는 일제의 주권 강탈의 부당성을 성토하고, "8도의 동포에게
고하여 삼군(三軍)을 규합해 일제를 타도하자." 라는 격문과 효유문을 작성하였다. 또한 그는 의병을 재규합하여 항전하려는 의도에서 동지인 이지원李芝元, 李芝璇), 이승재(李承宰), 한양리(韓良履), 윤태휴(尹泰休) 등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여 일제를 몰아내고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자는 격문(檄文)을 작성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한편 그는 이강년 의병장이 일제에 의해 순국하자. 그의 장자 이승재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병을 얻어 객지에서
사망한 소식을 듣고, 여러 동지들에게 알려 재물을 마련하여 고향으로 보내는 등 운동가의 가족을 돌보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이강년 의병장을 추모하여 1919년 <운강 이공전(雲崗李公傳)>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하였다.(通告 1917, 思菴(安在極) 先生文集 정권, 召募檄文, 討東檄文, 湖西義兵史蹟 李九榮 編譯 1993 273-278쪽, 獨立運動史資料集 1卷 290ㆍ305쪽, 韓國獨立史
金承學著 下卷 180쪽, 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國家報勳處 367쪽, 同 第13卷 53-54쪽)
[功績碑 發起文] : 11세에 남고(南皐) 안훈(安壎)을 따라 함창관(咸昌官)의 백일장에 장원하였고, 13세에 지주(知主) 이만윤(李晩胤)의 도강회(都講會)에서 <중용(中庸)> 비은장(費隱章)을 상밀(詳密)히 논하였다. 16세 때부터 의병대장 운강(雲岡) 이강년(李康秊) 휘하에서 직접 왜적 토벌에 참가하였고, 또는 통문(通文), 격문(檄文)을 지어 적극적인 의병 봉기에 불을 지피기도 하였다. 그는 격문에서 이르기를, "삼천리 강산이 금수에 짓밟히고, 500년 예악지물(禮樂之物)은 격설효수(격舌梟首)되었으니, 듣도보도 못한 광경 어이 차마 두고 보랴. 의기를 높이 들어 용사(勇士)를 소모(召募)하니 풍문 듣고 자래(自來)하여...죽기를 맹서하고 충성을 다 바침은 대장부의 할 일이요 생사를 불구하고 의리를 실천함은 군자의 처신이라."라고 하였다. 이강년이 순국하고 나라가 일본에 침탈된 뒤에도 그의 장남 이승재(李承宰)와 같이 단양, 제천, 이천, 장호원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리고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때 왜경에게 옥고를 치뤘음은 물론이다. 그는 중국의 석학 영봉(靈峰) 하진무(夏震武)와 서신으로 이기(理氣)를 논하였다. 서울대 금장태(琴章泰) 교수는, "안재극은 의당학파(毅堂學派)의 마지막 도학자(道學者)."라고 하였다. 의당 박세화는 도학과 경술(經術)이 당대의 유종(儒宗)이었는데, 경(敬)을 주장하며, 사(私)를 제거하고, 인(仁)을 추구할 것을 제시하고, 이 세 가지가 인(仁)에 귀결되는 것임을 강조하였고, 도(道)를 위해 순도(殉道)한 전통 유학자이다. 의당학파는 회당(晦堂) 신현국(申鉉國), 양암(陽庵) 유지혁(柳芝赫)으로 이어져 다시 그에게 전수되니, 이른바 의당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1903년 박세화의 명을 받아 춘천 가정자(柯亭子)에서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이 설시(設施)한 향음주례(鄕飮酒禮)에 참석하였다. 1904년 9월 박세화가 화양동에 강회(講會)를 설치하여 모인 사람이 많았고, 이 때 사례(司禮)로서 강좌에 들어가 <맹자(孟子)> 거천하광거장(居天下廣居章)을 강하였다. 그 해 겨울에 <서전(書傳)>의 기월 300장(朞月三百章)을 저해(著解)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박세화가 문경 관산(冠山)에 진을 치므로 동문인 신당(愼堂) 채형주(蔡亨周)와 함께 진역(陣役)에 가담하였으나 박세화의 병으로 거사하지 못하고 뒤에 박세화는 피체(被逮)되어 한성옥(漢城獄)으로 수감되었다. 1907년 군대해산 후 세심헌(洗心軒) 이규홍(李圭洪)과 서로 의론, 이강년과 내통하여 재기를 약속하고, 각 읍에 의를 다지는 통문을 작성 배포하였다. 그 해 3월 단양에서 이강년을 주축으로 재기하니, 그는 이강년의 장남 이승재와 함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이강년의 막하에서 작전을 적극 보좌하니, 의병의 전투는 날로 치열하였다. 각지에서 토적(討賊)하던 윤기영(尹基榮), 김상태(金尙台), 하한서(河漢西) 부대 등이 이강년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이강년을 창의대장(倡義大將)으로 추대하고, 삼도(三道) 14읍을 전전(戰轉)하며, 수천의 왜적을 토벌하였다. 1908년 전국의 의병이 규합 13도 창의군을 결성 서울 진공작전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소규모 유격 활동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강년 부대는 회군하여 강원도 인제, 간성, 양양, 횡성 등지를 누비며 적참(賊站)과 수비대를 소탕하고 서벽(西壁)에서 적 수 백을 도륙(屠戮)하고, 말 200필을 노획하였고, 봉화와 재산에서도 적 수 백을 섬멸하였다. 그 해 6월 충주 황강을 거쳐 청풍(淸風)의 금소산을 넘던 중 갑자기 적의 기습을 받아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았으나, 이강년은 부상으로 적에게 체포되었고, 그 해 8월에 순국하였다. 1915년 5월에 창주(蒼洲) 이승재(이강년의 장남)가 내방 인근 동지들과 다시 의거할 것을 다짐하고 인재 선발과 재원 확보 등을 준비키로 하고, 모든 보고는 그에게로 정하였다. 그는 이승재와 함께 중장군인 윤희선(尹喜善)과 교련관인 안춘흥(安春興)과 전 동지 유시연(柳時淵), 노병대(盧炳大), 주시혁(周時赫), 서상업(徐相業), 이응수(李應洙), 정희섭(丁喜燮), 허달(許達) 등을 찾아다니며 기의(起義)할 것을 약속하고, 소모 격문을 작성 배포하였다. 1916년 2월에 단양에서 의기를 높이 드니, 의병의 수는 7,300여 명이었다. 각 참모장들이 50명씩 병력을 거느리고 유격전을 펴는데, 그는 제천, 이천, 장호원, 진천 등지에서 적 14연대 보병 2개 중대를 상대로 접전하여 많은 적을 섬멸하였다. 1917년 충북 진천에서 제천으로 행군하던 중 이승재가 적정(賊偵)인 일진회원(一進會員) 박준호(朴準鎬)에 의해 음독되어 죽사(竹史) 이지선(李芝璇), 석초(石焦) 한양이(韓良履)와 함께 교자에 태워 주야를 달려 대전 유성 참봉(參奉) 박용규(朴龍奎)의 집에 당도하였으나 통탄스럽게도 이승재는 절명하였다. 고향으로 반장(返葬)코저 하나 수중 무일푼으로 그가 국내에 순국 통문을 작성 배포하였다. 1918년 본읍(本邑) 주재 왜경(駐在倭警)에게 체포되었다. 왜경은 그의 치밀한 의병 행적은 눈치 채지 못하고, 1912년 흑복(黑服)과 단발(斷髮)에 복종하지 말 것을 신당(愼堂) 채형주(蔡亨周) 등과 서신 교환한 것을 들어 혹심히 사문(査問)하였다. 그는, "내가 그렇게 했다."하고, "우리는 본시 백의민족으로 검은 옷(黑服)을 꺼려하고, 부모의 유체(遺體)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孝義)이거늘 너희들이 어찌하여 금수(禽獸)와 같이 무례한 행동으로 우리 민족에게 강요하는가?"하고 도리어 호통을 치니 방청자들이 감탄하였다. 시 한 수를 지어 시지(詩志)하니, 시에서 이르기를, "공자의 예의로운 성리학을 배우고파, 다만 공자를 읽을 뿐이지, 살아서는 당연히 공자의 교훈대로 따라 살 것이요, 죽어도 당연히 공자의 도에 따라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태연자약한 모습과 조신행지(操身行止)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음을 보고 저들의 강압에 굴하지 않을 것으로 알고 한 달여 만에 석방하였다. 1923년 ''''''''''''''''예의조선(禮義朝鮮)'''''''''''''''' 4대자(四大字)와 시 2수를 판각(板刻)하여 깊이 소장하여 수시 탁본하여 각 지방에 몰래 배포하고, 우국지사를 양성하는 한편 조국 광복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외교 경로를 통하여 민족의 한을 풀어보고 학문을 강론코자 중국의 석학 영봉 하진무와 서신 왕래를 하게 되었다. 1929년 영봉 하진무에게 글을 보내 이기 선후(理氣先後)의 변(辯)을 논함에 하진무는 답서하기를, "금세의 희소한 석학"이라고 칭하하고, "그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학술을 피력하였다."라고 하였다. 서사(書社)에 5성(五聖 :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유상(遺像)을 봉안(奉安)하고 매 삭망(朔望)에 분향 재배하여 강학도(講學徒)로 존숭(尊崇)케 하였다. 1932년 일제는 그가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중국과 교류함을 알고, 삭발과 창씨(創氏)로 박해를 가하자, 견딜 수 없어 가산(嘉山 : 문경 산북 가재목)으로 들어가 화를 피하니, 그곳의 많은 유생들이 찾아가서 공부하였다. 1934년에는 꽃재 손영조(孫永兆) 집에 들어가 화를 피하니 양홍대(楊鴻大), 안승락(安承珞), 종질 진악(鎭岳), 가손(家孫) 영구(泳龜) 등이 따라가 글을 읽었고, 그곳 많은 유생들이 운집하였다. 1936년 가장(家藏) 오성유상(五聖遺像)의 소지(小識)를 짓고, 가장 <경제잠(敬薺箴)>과 <성학십도(聖學十圖)>의 발문을 썼다. 1938년 <예재문집(藝齋文集)>의 발문을 지었다. 1940년 3월에 제자들이 주선하여 초상화를 모사(模寫)하였다. 1947년 <사암문집(思菴文集)> 6권 4책이 제자들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1995년 광복절을 맞아 나라에서 건국포장을 내렸다.(思菴安在極先生功績碑 建立推進委員會 發起文 2001.9)
안재극(愛國志士 安在極 先生 追慕事業推進委 發足) [記事] : 애국지사 사암(思菴) 안재극 선생 추모사업추진위원회 발족식이 2001년 12월 9일 오후 2시 예천읍 옛고을암소숯불에서 개최됐다. 이날 발족식에는 신영국 국회의원, 황병태 전 국회의원, 권상국 전 군수, 엄대일 예천노인학교장, 정양수 전 대창중고교장, 문병태 안동보훈지청 과장, 후손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후손 안중식(청호그룹 사업본부장) 씨는 인사말을 통해, “선친의 숙원 사업이면서 재작년 작고한 선형의 유언이기도 하여 불민한 저가 오매불망 고심타가 오늘에사 비로소 추모사업회를 결성하게 돼 감개무량하다”며, “앞으로도 더욱 많은 지도 편달을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이 날 황병태 전 국회의원이 추모사업회 회장으로 추대됐다. △대표 고문 : 엄대일, 양홍대, 장용환, 조동한, 안홍식 △회장 : 황병태 △부회장 : 정양수, 안기식, 안종근, 안희식 △총무 : 안용진 △간사 : 안승오, 안중식(醴泉新聞 2001-12-13 15:50:09)
안재극기념관(愛國志士 安在極 先生 紀念館 建立 起工式 開催) [記事] : 예천과 문경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 의병 활동을 전개했던 애국지사 사암(思菴) 안재극 선생의 기념관 건립 기공식이 2003년 12월 13일 오후 1시 생가인 용궁면 월오리 현지에서 열렸다. 이 날 기공식에는 사암선생기념사업회 황병태 회장·정용인 이사장·안영찬 추진위원장과 신영국 국회의원, 김수남 군수, 황주극 안동보훈지청장, 신국환 전 산자부장관, 유족, 문하생, 문중 대표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기념사업회는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2천여 평의 부지에 모두 28억8천여만 원을 들여 2005년까지 기념관과 사당, 정자 등을 건립할 예정이다. 1879년 용궁면에서 출생한 안재극 선생은 16세 때 이강년 의진에 들어가 격문을 지어 배포하는 등 활발한 의병 운동을 펼치다 1940년 서거했다. 안재극 선생은 1995년 건국포장을 받았으며, 2001년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안재극 선생 공훈] : 애국지사 사암 안재극 선생은 예천·문경 일대에서 활약하였으며, 국권피탈 이후에도 격문과 효유문(曉諭文)을 작성해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돼 자주적 외교권이 침탈되더니, 이듬해 통감부가 설치되어 통치권을 장악함에 따라 우리나라는 식민지나 다름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안재극 선생은 이 시기가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임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1907년 7월 광무 황제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에 따른 군대 해산으로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 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 전쟁으로 발전되고 있을 무렵 이강년 의진에 참여해 좌종사로 활동하였다. 안재극 선생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의병 투쟁을 전개했으나 결국 1910년 8월 주권이 상실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권피탈 이후 그는 일제의 주권 강탈의 부당성을 성토하고, `8도의 동포에게 고하여 삼군을 규합해 일제를 타도하자''''''''''''''''는 격문과 효유문을 작성하였다. 또한 그는 의병을 재규합하여 항전하려는 의도에서 동지인 이지원, 이승재, 한양이 등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여 일제를 몰아내고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자는 격문을 작성해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한편 그는 이강년 의병장이 일제에 의해 순국하자 그의 장자 이승재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병을 얻어 객지에서 사망한 소식을 듣고 여러 동지들에게 알려 재물을 마련해 고향으로 보내는 등 운동자의 가족을 돌보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이강년 의병장을 추모해 1919년 `운강이공전''''''''''''''''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懺悔詩] : 애국 지사 사암공 기념관 기공식에서// 그토록 광복 갈망 못 보신 지 육십여 년/ 도(道)와 충(忠)이 머물던 폐허 생가(生家) 옛터에/ 지금(至今)사 터를 다듬어 강호제현(江湖諸賢) 다 모았소.// 때늦은 참회 눈물 가슴 저며 오지만/ 경향(京鄕)의 뜻을 모아 온 힘을 쏟아 부어/ 십 년을 앓아온 정성 이제야 첫 삽 뜨오.// 아, 선조님 거룩하신 애국 애족 정신이여!/ 천만 년 이어나갈 후세들 사표(師表) 전당/ 학문과 도덕 교육장 후학들의 바람이여!// 혼령은 일어나소서! 굽어 보오소서!/ 영명한 할아버님의 숭고한 우국(憂國) 충정/ 읍혈(泣血)로 머리 숙이며 옷깃을 여밉니다.// <안중식, 시조시인, 한국문인협회 예천군지부 시조분과위원장, 안재극 선생 증손>(醴泉新聞 2003-12-20 09: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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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이후 항일운동을 한 안재덕(安在德) : 旣載
고려가 망하자 도롱이와 삿갓으로 몸을 숨기고 평생을 마친 안준(安俊)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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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곡 출신 권재진, 서울고검장 발탁...축하합니다.
권재진(大檢 次長檢事에서 서울高檢長으로 拔擢된 龍門面 出鄕人 권재진 氏) [記事] :
예천군 용문면 제곡리 출신 권재진 대검찰청 차장검사(55,사시 20회)가 서울고등검찰청장에 발탁됐다.
신임 권재진 서울고검장은 연구능력이 탁월하고 정책판단과 기획 분야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로 원리원칙에 충실한 것이 검찰 내부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검찰 및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은 권재진 고검장이 박학다식한 스타일이라 사안의 핵심을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지난 2001년 전주지검 국가배상심의위원장을 맡아 미 공군비행장 인근의 벼 피해와 관련, 국가는 농민에게 배상하라는 판결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친화력이 우수한 성품의 소유자로 알려진 권재진 고검장은 선이 굵고 상황판단이 빠르다.
1983년 서울지검 남부지청 검사를 시작으로 대검 검찰연구관, 서울지검 남부지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바둑과 테니스가 취미다.
주요 경력: 예천군 용문면 제곡리 출신(55, 사시 20회), 경북고(72년 졸업), 서울대 법대, 서울지검 남부지청 검사, 서울지검 검사, 대검 검찰연구관, 대구지검 상주지청장, 수원지검 공안부장, 부산지검 공안부장,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지검 형사3부장, 창원지검 통영지청장, 서울지검 북부지청 차장, 서울지검 남부지청장, 대검 공안부장, 대검찰청 차장검사.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01-15 오후 2:4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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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암 출생 김태현, 순천향대 부총장 임명...축하합니다.
김태현(순천향대 김태현 敎授 : 副總長(任期 2年) 任命돼) [記事] :
순천향대학교 공연영상미디어학부 미디어콘텐츠 전공 김태현(호명면 담암리 출생) 교수가 2009년 1월 1일자로 2년 임기의 부총장으로 임명됐다.
문학평론가인 김 교수는 순천향대학교 인문대학장(2000∼2001), 교무처장(2005∼2006)을 거쳐 이번에 부총장직을 맡게 됐다.
김 교수는 문학전문 계간지 「실천문학」 편집위원을 거쳐 현재 (주)실천문학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리얼리즘의 아름다움’ 등 다수가 있다.
(醴泉新聞 2009년 01월 15일 13: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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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 출생 김창균, 신풍제약 부사장 승진...축하합니다.
김창균 [記事] : 김창균(용문면 출생) 신풍제약(주) 전무가 2009년 1월 1일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김 부사장은 용문초(41회), 예천중(19회), 대구 성광고를 졸업했다.
(醴泉新聞 2009.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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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출생 진성진 필맥스 노조위원장, 구미시 노사협력 모범사업장으로 선정...축하합니다.
진성진(龜尾市 勞使協力 模範事業場 選定 - 진성진 필맥스 勞組委員長 : "未來指向的인 勞使關係 鼎立 앞장") [記事] :
구미시 주최로 2009년 1월 9일 구미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고용안정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구미범시민 협약인 ‘We Together운동 구미선언’을 채택하는 행사에서 모범사업장 사례 기업 발표를 한 전성진 필맥스 노조위원장을 만났다.
■현재 필맥스 노동조합은? =필맥스 전신은 (주)서통이다. 지난 2003년 필맥스 노동조합이 창립됐고, 현재 노조원은 110명이다. 노조원은 모두가 하나돼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 지향적이고 선진 노사관계에 가장 모범적인 노동조합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 더욱더 노사가 함께 발전하는 멋진 필맥스를 만들어 갈 계획이다. 지켜 봐 달라.
■이번에 발표한 필맥스 항구적인 노사 평화 선언문 요지는? =이번 선언은 노동조합이 회사에 제안했고 회사는 존폐를 가름하는 일이 아니라면 모든 직원들이 안정적인 고용을 보장할 수 있도록 인위적 구조조정은 최대한 지양하겠다는 화답이 있었다. 이번에 발표한 노사 평화선언문 요지는 첫째 전세계적으로 불어닥치고 있는 경제 위기에 적극 대응하고자 고용안정을 통한 생산성 향상에 주력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임을 천명하고 ‘작지만 튼튼한 회사’,‘전임직원이 주인의식으로 무장한 초우량 기업’으로 성장하고자 항구적 노사평화를 선언한다. 둘째 회사의 성장이 곧 나의 희망이라는 인식하에 2009년 임·단협을 교섭없이 전적으로 회사에 위임하며, 낭비적 제반비용을 줄이고 원가절감 활동에 매진하는 내실경영에 적극 동참한다. 셋째 이번 항구적 노사평화 선언이 애사심에서 비롯된 우리 모두의 충정임을 재확인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는 필맥스의 전통적 노사문화를 열어간다는 것이다.
■‘We Togerther운동 구미선언’ 채택의 모범사업장으로 선정된 소감은? =부족한 저희 필맥스가 노사 협력 모범사업장으로 선정됨은 큰 영광이요 기쁨이다. 더욱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로 생각하고 전임직원이 뜨거운 열정으로 회사의 이번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 더불어 구미국가산업단지의 고용안정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서도 선도적인 역할을 다하겠다.
■노사 안정을 위한 노조의 장기 방향은? =우리 필맥스 노사는 조금씩 양보하고 배려함으로써 노사 문화가 잘 정착된 사업장이다. 특히 우리 필맥스 노사는 모든 현안문제를 터놓고 대화로써 협의·해결하고 있다. 선진 노사문화를 꽃 피울 때까지 지속적인 노력을 다해 근로자가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사업장을 만들어 가는데 노조원이 하나돼 힘을 모아 나갈 것이다.
[◆프로필] : △1965년 예천 출생 △영주 제일고 졸업 △1989년 (주)서통 입사 △2003년 필맥스 초대 노조위원장, 2005년 필맥스 2대 노조위원장 역임 △2006년 한국노총구미지부 정보지원센터 사무국장(현) △2008년 필맥스 3대 노조위원장(현)
(이승호 記者 慶北每日新聞 2009-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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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읍 출신 권영박, 한국서부발전 전무로 내정...축하합니다.
권영박(醴泉邑 出身 出鄕人 권영박 氏 韓國西部發電(株) 專務로 內定!!) [記事] :
2한국서부발전(주)은 2009년 1월 14일 주주총회를 열어 예천읍 출신의 권영박(58)씨를 전무(기술본부장)로 내정했다.
권영박 내정자는 동부초등(15회), 예천중(15회), 대창고등(14회), 인하대학교(토목공학과)을 졸업했으며 한국전력공사 감사부장, 한국서부발전 태안 건설처장, 서인천 발전본부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역임한 토목분야의 대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발전회사의 기술본부장은 발전분야 출신이 내정되는 것이 관례였으나 권영박 내정자는 토목분야 출신임에도 원만한 인간관계와 탁월한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이번 인사에서 전무로 내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01-15 오후 3:3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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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심2리 출신 황현동, <반짝이는 은빛물결> 펴내...축하합니다.
황현동(황현동 대일초등 校監 : 詩集 ''''''''''''''''반짝이는 銀빛물결'''''''''''''''' 펴내) [記事] :
예천읍 대심2리 태생의 황현동(성남 대일초등 교감·예천중 12회) 씨가 최근 성광사에서 시집 「반짝이는 은빛물결」을 냈다.
황씨는 40여년 동안 교직에 몸담고 있으며, 지난 2007년 한국시사(韓國詩社)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번 시집은 △인생 여로에서 △파도에 실어보는 낭만 △흙속에 바람속에 △계절따라 묻어사는 인생 △사랑을 노래하며 등 5부로 나눠져 있으며 모두 80여 편이 수록됐다.
쉽고 정감 넘치는 언어와 시골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시편들이 눈길을 끈다.
황씨는 “교직을 천직으로 삼고 어린 새싹들을 가르치는 교육자의 길을 걷는 동안 틈틈이 시를 써오다가 늦게 등단하여 시집을 내게 됐다”며 “더 좋은 시를 쓰기 위해 정진하겠다”고 말했다.
(醴泉新聞 2009년 01월 15일 17: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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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344
서악사(혜창 큰스님 招請 大法會 열려) [記事] : 예천불교회관 건립 발원을 위한 ‘혜창 큰스님 초청 대법회’가 2006년 10월 28일 대한불교조계종 천년고찰 서악사 천불전에서 봉행됐다. 이날 법회에는 사암연합회 대덕 스님, 김수남 군수, 남시우 군의장을 비롯한 각급 기관단체장, 지역 불자 등 25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김형섭 예천군불교연합신도회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서악사 합창단의 음성 공양이 있었다. 혜창 큰스님은 초청 대법회를 통해 “나는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으며, 버릴 것을 버렸다.”는 부처님의 행적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행복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다. 나와 너라는 흑백논리보다는 우리라는 공통된 말을 사용해야 한다. 도로써 실천하지 않는 돈, 권력, 명예는 남을 상하게 하고 자신을 불행하게 한다.”는 법어를 통해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삶의 궁극적 이유를 설명했다. 혜창 큰스님은 전 직지사 주지를 지냈으며, 서악사 도일 스님의 은사다.(백승학 記者 醴泉新聞 2006년 11월 02일 14: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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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