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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1819) : 예천 충효 18(附 정광진, 16일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 표창...축하합니다/예천구계리 어사금, 한국 最古 最短 거문고이다/예천방문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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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의병활동을 한
안직(安직) : 1569(선조 2)-1644(인조 22), 용궁면 월오리 나산(羅山) 사람, 초명은 해(瀣), 자는 청언(淸彦) 또는 호원(浩遠), 호는 나봉(蘿峰), 본관은 순흥, 경빈(敬賓)의 손자, 좌랑 명남(佐郞命男)의 아들, 우복 졍경세(愚伏鄭經世)의 제자, 시(詩)로써 유명하였다. 임진왜란(1592) 때는 의병(義兵)으로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병자호란(1636) 때 개포면 경진리 노포(蘆浦)에서 용궁면 월오리 나산(羅山)으로 이거하여 나현재(奈峴齋)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숨어 산 이후 대대로 살고 있다. 청풍자 정윤목(淸風子鄭允穆)과 친했고,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유집(遺集)이 있고, 묘는 용궁면 송암리 나현산 축좌(奈峴山丑坐)에 있다. 서징(瑞徵), 몽징(夢徵), 도징(道徵), 선징(善徵), 두징(斗徵), 하징(夏徵) 등 6명의 아들이 모두 문학으로 당시에 유명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6룡(六龍)이라고 하였다.(族譜, 朝鮮환輿勝覽 1929, 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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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하다가 투옥 순국한
양혜석(梁惠錫) : 1919-1945, 지보면 지보리 출신, 본관은 남원, 재옥(在沃)의 장자, 안동농림학교와 일본대 법과를 졸업,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전북 군산감옥에 수감된 후 가혹한 고문과 굶주림으로 안변 처가(安邊妻家)에서 27세로 순국하였다. 1999년 5월 8일 지보면 지보리 상락교회(김영규 목사)는 교회 내에 이 교회 출신으로 순교한 양재연 장로, 엄주선 강도사 순교비와 함께 양혜석 순국 열사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知保面誌 1987, 國民日報 1999.4.30 이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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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시정부 요원으로 투옥된
엄태섭(嚴泰燮) : 예천군 봉산(鳳山) 출신,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 요원으로 원산형무소(元山刑務所)에 수감 중 1926년 4월 16일 새벽 2시경에 간수가 교대하는 틈을 타서 탈옥하였는데, 마침 그 곳 형무소 간수 황종률(黃鍾律)도 종적이 없어졌으므로 그 집을 수색하여 본 결과 그도 역시 엄태섭과 같은 단원으로 동지를 구해내기 위하여 일부러 간수가 되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東亞日報 1926.4.21, 獨立有功者功勳錄 5卷 368쪽,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
國史編纂委員會 8卷 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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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하여 애족장에 추서된
오연근(吳連根) : 1926-2007, 풍양면 효갈1리 출신, 1943년 10월 일제에게 강제로 징집 당하여 중국 남경지구(南京地區)의 일본군에 배속되어 있던 중 일본군 병사들로부터 중경(重慶)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다는 정보를 전해 듣고 광복군(光復軍)으로 입대하기 위하여 1944년 3월 경 일본군을 탈출한 후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 후 1945년 1월 중국 중경(重慶)에 도착하여 토교대(土橋隊)에 배속되어 복무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대통령 표창,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 1990)을 추서하였다.(寫眞 1945. 6月 光復軍總司令部 警衛隊 幕舍(中國 土橋)에서 訓練 光景), 抗日獨立運動史 1991, 醴泉新聞 1992.3.12, 大韓民國 獨立有功者功勳錄 第9卷 國家保勳處 1991年 259-260쪽, 韓國獨立史 金承學 上卷 305쪽)
오연근(慶北道, 光復節 第59周年 慶祝 生存 愛國志士 慰問) [記事] : 경상북도(道知事 李義根)에서는 제59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8.13까지 도내 생존 애국지사 15명에 대하여 위문품을 전달하고 애국지사의 숭고한 희생 정신과 독립정신을 높이 기리고, 생존 지사의 자긍심을 고취시킬 계획이다. 생존 애국지사 위문은 이의근(李義根) 도지사(道知事)를 대신해서 도 사회복지 여성국장 및 사회복지과장을 비롯하여 국내(局內) 과장들이 일일이 생존 지사 자택을 방문하여 위문품(반상기세트, 80천 원 상당)을 전달할 계획이다. 도내 최고령 애국지사는 경산시 진량면 평사리 68번지에 거주하는 김종호 선생으로 백수인 99세로 아직 건강하게 농사일를 하고 있으며, 선생께서는 국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쳐 그 공로로 1997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은 애국지사이다. 현재 경북도내 생존 애국지사는 1942년 옛 대구상고 학생독립운동 결사단체인 태극단 출신 봉화의 김정진 선생을 비롯한 포항 이인술, 정기복 선생, 안동 이주헌, 강일원 선생, 영주 김영하, 김승기 선생, 문경 김경화, 박하규 선생, 경산 김선수 선생, 의성 배선두 선생, 예천 오연근 선생, 영양 김필환 선생, 울진 장영인 선생 등 15명이 생존해 있다. 경북도에서는 앞으로도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 정신과 독립 정신을 높이 기리고, 민족 자존을 더 높이기 위해 민족 정기 선양사업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며, 생존 애국지사에 대해서도 후세들의 애국 정신의 사표로 받들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계획이다.(聯合뉴스 2004-08-12 18:30)
오연근(吳連根 愛國志士 別世) [記事] : 독립유공자 오연근(吳連根, 80) 선생이 2007년 7월 18일 낮 12시 38분경 대구보훈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선생은 예천 출신으로 광복군 총사령부 토교대에 편입해 광복에 이르기까지 특수임무를 수행했으며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빈소는 상주적십자병원 영안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7월 20일 국립대전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될 예정이다.(정차모 記者 예천인터넷뉴스 2007-07-18 오후 2:42:06)
오연근 [記事] : 국외항일투쟁 : ... 예천 출신들도 만주지역서 많은 항일활동을 하였다. 대표적으로 정훈모(鄭燻謨)ㆍ황하청(黃河淸)ㆍ박봉필(朴鳳弼) 등이다... 황하청은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활동하다 망명하여 군정서에 입단하였다. 그러나 그는 1923년 3월 12일 봉천성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습격당해 순국하였다.(獨立新聞 1923.4.4)... 이외에도 일본에서 활동한 박주대(朴周大)가 있다. 그는 1940년 4월 일본 나고야 미장(尾張)중학교 재학 중 동경 유학생 20여 명과 함께 문학청년동맹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수필지인 <금강산>을 발간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예천 출신으로 권혁무(權赫武)ㆍ백문기(白文基)ㆍ윤종록(尹鍾祿)ㆍ이종렬(李鍾烈)ㆍ전병림(全炳林)ㆍ조청래(趙淸來)ㆍ오연근(吳連根)ㆍ고형림(高亨林) 등이 광복군 일원으로 대일 항전에 참였하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1944년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로 편입되어 활동하였다. 한편 오연근은 중경의 임시 편성부대인 토교대(土橋隊)에서 활동하였으며, 고형림은 만주에서 고향을 돌아와 광복군을 모집하기도 하였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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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으로 활동한
우경수 : 개포면 출신, 광복군(光復軍)으로 4개월 간 활동하였다. 광복군으로 8개월 이상 활동했어야만 독립유공자협회(獨立有功者協會)에 등록되어 의료보험과 학자금 보조를 받고 있기에 그는 아무런 혜택을 받고 있지 않다.(東大新聞 8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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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전사한
우담(禹澹) : ?-1592(선조 25), 본관은 단양, 선조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냈다. 임진왜란(1592) 때 전사하였다.(朝鮮환輿勝覽 1929, 醴泉郡誌 1939, 竺山勝覽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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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전사한
우첨(禹첨) : 본관은 단양, 무과에 급제하여 수사(水使)가 되고, 임진왜란에 전사하였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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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에 가담한
유근영(柳近永) : 1904-1949, 호는 지운(芝雲), 본관은 진주, <언문지>의 저자 희(僖)의 증손, 서울의 제일고보(第一高普)를 마치고 3.1운동에 가담했다가 만주로 가서 교포를 계몽하다가 귀국, 1925년부터 1935년까지 풍양 우망리의 영신의숙(永信義塾)에서, 1935년부터 1945년까지는 예천의 대창학원(大昌學院)에서 후진을 기르다가 광복이 되자 우망초등학교 교장으로 교육계에 헌신하였다. 저서로 <지운집(芝雲集)>이 있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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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원인
유동시(柳東蓍) : 예천 출신, 광복회원(光復會員)이었다.(獨資 11권 691 722쪽, 獨立有功者功勳錄 8卷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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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낸
유만종(劉萬鍾) : 1895-1942, 자는 성대(聲大), 본관은 강릉, 재양(載陽)의 아들, 강릉 유씨 종손, 3.1운동이 실패하고 중국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1930년대에 많은 가산을 모두 팔아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는데, 매우 치밀한 계획으로 이루어 졌으므로 드러나지 아니했고, 이웃에 주재하는 일본군 수비대가 재산 탕진한 것을 추궁해도 끝내 함구하느라고 고문을 당했으며, 그 후유증으로 수를 누리지 못하였다. 유고가 있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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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에 창의한 유세윤(柳世潤) : 旣載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킨 유휘종(柳暉宗)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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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때 공신인
윤계은(尹季殷) : 이조 태종 때, 예천읍 서본리 별동(別洞) 출신, 자는 문경(文卿), 본관은 예천, 대사성 상(祥)의 4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457년(세조 3) 8월 12일 부승(副丞)으로서 원종공신 3등으로 녹훈되었고, 군위 현감(軍威縣監)을 지냈다. 묘는 예천읍 백전리 능골 성넘 백호등 유좌(白虎嶝酉坐)에 있다.(族譜, 醴泉郡誌 1939, 別洞集, 襄陽誌 1661, 世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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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의 유격장 등으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한 윤국범(尹國範) : 旣載
이인좌의 난에 의병을 일으킨 윤빈(尹嬪) : 旣載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과가 커서 사평을 제수받은 윤섭(尹涉)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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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윤숙(尹潚) : 1553(명종 8)-?, 용궁면 무이리 출신, 자는 사연(士淵),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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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하여 건국공로훈장에 추서된
윤우식(尹雨植) : 1906(광무 10)-1934, 지보면 신풍리 망락당(望洛堂) 출신, 자는 영가(榮可), 호는 남석(南石), 본관은 파평, 종한(宗漢)의 3자, 예천공립보통학교 5학년 때 경성제2고등보통학교(京城第二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항일 운동으로 중퇴하고 귀향하여 권원하(權元河), 박창호(朴昌鎬) 등과 농민소작회(農民小作會)를 조직하였다. 이로써 투옥, 혹독한 고문으로 대구형무소에서 병을 얻어 2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004년
광복절에 건국공로훈장(제3769호)에 추서되었다.(知保面誌 1987, 尹哲在,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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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으로 활동하여 애족장을 받은
윤종록(尹鍾祿) : 1924- , 풍양면 와룡리 출신, 소학교(小學校) 졸업, 기궤수(器机手), 일본군 치중병 일등병(輜重兵一等兵)으로서 중국 호북성 악주(湖北省岳州) 부근에서 동지 7명과 함께 일본군(日本軍)을 탈출하여 중국군 45사단 여성지구(汝城地區) 유격대에 편입되어 작전을 지원하였다. 그 후 광복군(光復軍, 飛虎隊) 제1지대 제3구대에 입대하여 호남성 중국군 4군단(湖南省中國軍四軍團) 산하에서 대적공작 활동을 전개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을 받았다.(抗日獨立運動史 1991 280쪽, 大韓民國 獨立有功者功勳錄 第5卷 國家保勳處 1966年 383쪽 1007-1008쪽, 獨立運動史 國家保勳處 6卷 452 6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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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단원인
윤창하(尹昌夏) : 1883(고종 20)-?, 지보면 신풍리 출신, 광복단원(光復團員)이었다.(豫審終結決定書 1918.10.19 公州地方法院, 高警 182쪽, 獨運 3卷 175쪽, 獨資 1卷 674-714쪽, 獨立有功者功勳錄 8卷 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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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윤탕민(尹湯民) : 1557(명종 12)-?, 감천면 천향리 천전(泉田) 출신, 자는 군거(君擧), 호는 문암(門巖),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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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의병장으로서 왜적을 무찌르다 봉화 노루고개에서 순국하여 정려된 윤흠도(尹欽道) : 旣載
임란 때 의병을 인솔하여 소천전투에서 전공을 수립하고 봉화 노루재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순국하여 정려된 윤흠신(尹欽信)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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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윤흠지(尹欽之) : 1563(명종 18)-?, 감천면 만장(晩場) 출신, 자는 명지(明之),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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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1592) 때 도내 사우(道內士友)들에게 격문을 뛰워 의병을 규합한 이개립(李介立)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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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에 협력한
이건수(李健洙) : 지보면 만화리 출신, 자는 선여(善汝), 본관은 공주, 도사(都事)를 지냈고, 구한 말의 의병으로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에 협력하였다.(獨立運動史資料集 1卷 67 304쪽, 韓國獨立史 金承學 下卷 213쪽, 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3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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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이경남(李慶南)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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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이경립(李景立) : 1553(명종 8)-?, 지보면 대죽리 노현(老峴) 출신, 자는 행중(行中), 본관은 경주, 준(竣)의 아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여 <화왕동고록(火旺同苦錄)>에 실렸다.(倡義錄,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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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창의하여 크게 공을 세운 이광윤(李光胤)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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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때 창의한
이규영(李奎英) : 1610(광해군 2)-1670(현종 11), 보문면 문암(文岩) 출신, 자는 문중(文仲), 호는 읍송헌(읍松軒), 본관은 경주, 참봉 형곤(亨坤)의 장자, 별제(別提)를 지냈다. 15세 때 이괄의 난(1624)을 만나 아버지와 함께 창의하였고, 또 병자호란(1636)이 일어나자, 두문불출(杜門不出) 성리학을 강론하면서 절의(節義)를 지켜 성리학에 잠기었고, 많은 저술을 하였다. 묘는 보문면 문암촌(文岩村) 뒤 유좌(酉坐)에 있다.(族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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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에 의병활동을 하여 건국포장에 추서된
이규홍(李圭洪) : 1851(철종 2)-1918, 개포면 입암리 출신, 이명은 규삼(圭三), 호는 세심(洗心), 본관은 성주, 대사성 문흥(文興)의 후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제자, 고향에서 세심헌(洗心軒)을 짓고,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과 차성충(車晟忠) 의진에 군자금(軍資金)을 제공하는 등 의병 활동을 하였다. 이규홍은 1895년 일제가 국모를 시해하는 천인 공로할 만행을 저지른 변보를 전해 듣고 비분 강개하였는데,
이어서 일제와 친일 정권에 의해 을미개혁으로 단발령(斷髮令)까지 강행되자,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그런데, 1896년 1월 이강년이 의병진을 일으켜 활동하자, 암암리에 내통하여 동지의 의(義)를 맺고, 일제를 구축하는 계획에 적극 가담하여 의병 모집 활동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이강년 의병진이 친일적 행위를 한 안동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을 잡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때때로 사람을 의병진에 보내어 계책을 논의하였다. 이에 따라 이강년은 그와 함께 항상
적을 치고 원수를 갚는 일을 의논하였다. 그 후 그는 1905년 안동의 석주 이상룡(石洲李相龍), 서울의 심연 김현준(心淵金顯峻), 거창의 은표 차성충(隱豹車晟忠), 영춘의 백우 김상태(白愚金尙泰) 등과 혈맹(血盟)으로 뭉쳐 의병 활동을 모의하였다. 특히 그해 11월 을사조약이 강요되자, 그는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임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려고, 그 해 11월 김현준, 차성충이 김천에서 의병 활동을 모의하였을 때, 큰아들 이지선을 보내 도왔다.
그 후 이지선을 이강년 의병진에 보내 활동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1907년 7월 정미7조약에 따라 군대가 해산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다시 의병이 일어나자, 이규홍은 1907년 김현준, 차성충 등과 의병의 계책을 모의하고, 그 해 8월에는 김용사(金龍寺)에 유진하는 이강년을 방문하여 의병 활동의 방향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1908년 이상룡이 사람을 보내어 군자금을 요청하자, 아들 지선과 사위 이세형(李世衡)을 통해 거창의 차성충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차성충으로
하여금 가조산(加祚山)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병기를 구입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차성충 등은 1909년 의병 수 백명을 규합하여 순흥(順興)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차성충을 대장으로 김상태를 중군장올 삼아 풍기, 순흥, 영주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을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1909년 5월 차성충이 순국하면서 의병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한일합방(1910) 이후에도 만주로 망명한 이상룡(李相龍)은 1913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그의 아들 이문극(李文極)을
이규홍에게 파견하였다. 이에 그는 이문극을 만나 국외와 국내 민족 운동 세력의 연합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역대통편(歷代通編)>, <사례의도(四禮儀圖)>, <상변사서강의(常變四書講義)>, <심성정도설(心性情圖說)>을 지었고, <운강창의록(雲崗倡義錄)>을 초안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하였다.(洗心軒集 1935, 大韓民國 獨立有功者功勳錄 第13卷 國家保勳處 1996年 204-205쪽, 石洲 李相龍 遺稿 高麗大學校出版部
1973年 263ㆍ269ㆍ334ㆍ335쪽, 李圭洪의 親筆紀年 作成年代 未詳 2ㆍ16-21ㆍ42-78쪽, 洗心軒集 1935년, 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保勳處 第1輯 229ㆍ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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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의병으로서 많은 공을 세우고, 백의(白衣)로 호가(扈駕)하여 내자시 정에 제수된 이덕창(李德昌)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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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이돈(李敦) : 용궁면 무이리 출신, 자는 백명(伯明),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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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사건을 준비하다가 체포된
이동규(李東圭) : 1893(고종 30)-?, 풍양면 와룡리 출신, 6.10만세사건(1926)의 준비를 하다가 체포되었다. 1926년 6월 5일 서울 종로경찰서 사법계(司法係)에서 경북경찰부(慶北警察部)의 중국 지폐 위조 범인 수사를 의뢰 신청을 받고서, 경성부 도염동(京城府都染洞) 50번지에 머물고 있는 이동규의 집을 수사한 결과 변소 안에서 위조 지폐를 발견하고 외실내(外室內)에 떨어진 재 중에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의 이름이 있는 "격문(檄文)"이라고
제목을 한 선전문 한 매를 발견 즉시 이동규를 체포하였고, 관계자들도 체포당하게 되었다.(高警 289-291쪽, 獨運 9권 349쪽)
이동규 [記事] : 책 제목 : 끝나지 않는 신드롬/ 분야 역사/풍속/신화 > 한국사/ 천정환 지음/ 푸른역사/ 2005.7.20/ ISBN 8991510051/ 403쪽/ A5/ 188쪽에 " ..찾고 있었다. 경북 예천 출신의 이동규라는 사내였다. 형사들이 이동규의 집 문을 박차고 들어갔을 때, 사내는 도렴동 자기집에 있었다. 무방비 상태였다. 그를 포박하고 집을 뒤지기 시작하던 중형사가 재떨이에 구겨서 버린 종이 조각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부주의한 범죄자들은 이런 종이 조각에 중요한 뭔가를 메모.. "가 수록되어 있다.(daum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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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령 반대 상소를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동기(李東基) : 1839(헌종 5)-1898(광무 2), 자는 성예(城豫), 호는 괴암(槐岩), 본관은 성주, 대사성 문흥(文興)의 14세손, 병두(炳斗)의 계자(系子), 1879년(고종 1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1888년(고종 25)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이듬해 장령(掌令)을 지냈다. 단발령(斷髮令, 1895)을 반대하는 상소를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간관(諫官)의 긍지를 지켰고, 어려서부터 뜻이 굳고 학문을 즐겼다.(竺山勝覽 1934, 嶠南誌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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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향토문화를 말살하려 하자 <예천군지>를 편찬한
이동락(李東洛) : 1876(고종 13)-1948, 호명면 종산리 고미(古美) 출신, 자는 맹유(孟維), 본관은 진성, 충(沖)의 13세손, 신옹 종림(愼翁鍾林)의 3자, 일제가 민족 정기와 향토 문화를 말살하려는데 반대하여 고심 끝에 사재(私財)를 털어서 <예천군지(醴泉郡誌)>를 편찬(1937-1939)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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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대판지회장인
이동혁(李東革) : 예천 출신, 신간회 대판지회장(新幹會大阪支會長)이었다.(高警 157 160쪽, 獨立有功者功勳錄 7卷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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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때 군사적 공로가 많았던 이문표(李文標)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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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이미도(李味道) : 1564년(명종 19)-?, 호명면 사월리(沙月里) 신당곡(神堂洞) 진성 이씨 입향조, 자는 중열(仲悅), 온계 해(溫溪瀣)의 손자,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 호군(護軍)을 지냈다. 안동 온혜(溫惠)에서 출생하여 고암 충(古庵沖)과 함께 호명면 사월리로 이거하였다. 그 후손이 현재 호명면 종산리 금산(琴山), 내신리에 집성촌(集姓村)으로
살고 있다. 묘는 호명면 종산 성내(宗山城內)에 있다.(倡義錄, 醴泉郡誌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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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에 나서서 건국포장에 추서된
이범용(李範容) : 1854(철종 5)-1934, 예천 출신, 자는 우서(愚瑞), 호는 담사(潭史), 본관은 가평이다. 1907년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그는 국권 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이강년 의진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에 나섰다. 1986년에 이미 거의(擧義)한 바 있는 이강년 의병장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1907년 3월 충북 제천에서 재봉기하여 경상, 강원, 충청도 일대를 넘나들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원주진위대 해산병이 주축이 된 만긍호(閔肯鎬)
의진과 합세하여 충주성을 공략하였고, 주치전투, 죽령전투, 고리평전투, 백자동전투 등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고종 황제는 밀지를 내려 그를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하여 의병 활동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그 해 12월 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되어 서울 진공작전을 전개할 때에는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이강년 의병장은 특히 지방민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리에 밝은 이점을 이용해 신출귀몰한 유격 전술을 구사하여 의병사에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1908년 2-4월간에 전개된 용소동전투, 갈기동전투, 백담사전투, 안동 서벽전투, 봉화 내성전투, 안동 재산전투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강연 의병대장은 같은 해 6월 청풍 작성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피체되어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이와 같이 후기 의병사에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한 이강년 의진에서 이범용은 좌종사(坐從事)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大韓民國 獨立有功者功勳錄第14卷
國家保勳處 2000년 576쪽, 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保勳處 第1輯 303쪽, 韓國獨立史 金承學 下卷 213쪽, 韓國獨立史 김승학 下卷 213쪽, 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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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에 협력한
이병대(李炳大) :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공주, 구한 말의 의병으로 이강년 의진에 협력하였다.(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國家報勳處 386쪽, 獨資 1卷 271 306쪽, 獨運 4卷 145쪽, 김승학 下卷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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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정의 군자금 모집에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러 애국장에 추서된
이병한(李柄漢, 李炳漢) : 1890(고종 27)-1971, 지보면 매창리 내동(內洞) 출신, 일명 병한(炳漢), 본관은 공주, 현수(顯洙)의 아들, 상하이 임시정부가 군자금(軍資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시언(柳時彦), 유시준(柳時俊), 천영기(千永基), 유성우(柳性佑) 등 동지들과 1920년 2월 22일 밤 문경군 산북면 서중리(聞慶郡山北面書中里)에 사는 장수학(張守學)의 거처에 이르러 그에게, "당신은 누대에 걸쳐 양반이고, 거부(巨富)이기
때문에 조국 광복을 위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자금을 내어놓아야 한다."라고 강조하면서 권총으로 위협하였다. 그러나 신변에 위협을 느낀 장수학은, "지금 수중에는 이 돈 밖에 없으니, 며칠 뒤에 오면 돈을 마련해 놓겠다."라고 현금 110원(圓)을 내놓으면서 다시 기부금 5천 원을 낸다는 계약서를 써 주었다. 그 후 동년 3월 상순 경 장수학의 가사 관리인인 장세명(張世明)으로부터 서중리(書中里)의 우암정(友岩亭)에서 천 원을 수령하였고, 4월 29일에는
경성부 화동 유시언(京城府花洞柳時彦)의 숙소에서 장세명으로부터 다시 천 원을 받았다. 이렇게 모집한 2천 원을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계속하여 동년 6월 상순에는 임석만(林石萬)이라는 가명(假名)으로 유시준(柳時俊)과 함께 문경군 영순면 사근리(聞慶郡永順面沙斤里)의 권영주(權寧周)에게, "나는 상해임시정부에 관계되는 사람인 즉 수 일 안에 그대에게 심방을 할 터이니 좀 잘 도와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는 편지를 우편으로 보내고, 동월
10일 하오 2시경에 니켈로 만든 작난감 육혈포를 가지고 가서 육혈포 끝을 권영주(權寧周)의 이마에다가 대이면서 군자금으로 1,000원의 채용증서를 받고 여비 20원을 가지고 숨은 후일경 부산경찰서(日警釜山警察署)에 탐지되어 피체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1921년 2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5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국가유공자증(제10-13669호, 1996.6.1), 건국훈장 애국장(제1445호, 1994.4.15)을
추서받았다.(判決文 1920.10.19, 大邱地方法院, 判決文 1921.2.28 大邱覆審法院, 獨立有功者功勳錄 7卷(209쪽) 11卷, 高等警察要史 272쪽, 獨立運動史資料集, 大邱每日新聞 1982.7.8, 慶尙北道史 中卷 358쪽, 東亞日報 1921.4.10)
이병한 [記事] : [서명]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6권/ [기사명] 上海 大韓民國臨時政府에 軍資金을/ 년월일 1921-07-03/ 출전 高等警察要史/ 본문 上海 大韓民國臨時政府에 軍資金을 보낸 것이 발각되어 安東署에서 취조를 받고 온 柳時俊 柳時彦 등 6名이 檢事局으로 송치되다. 이들은 聞慶郡 山北面 書中里 張守學으로부터 5,000圓의 寄附契約書를 받고 陰曆3月 上旬과 陰曆4月 29日에 各千圓은 受領 一部를 柳時彦이 大韓民國臨時政府에 보낸 혐의이다. 이의 관련자는 다음과 같다. 本籍 慶尙北道 安東郡 豊南面 廣德洞 132 住所 不定 逮捕 兩班 無職 柳時俊(27歲)/... 本籍 慶尙北道 醴泉郡 龍宮面 內洞 强盜罪로 大邱監獄에 入監中 常民 無職 李炳漢(31歲)/ 本籍 慶尙北道 安東郡 豊北面 玄厓洞 358番地 住所 不定 明治大 法科卒 逮捕 兩班 無職 金始顯(39歲)/ [기관명] 국사편찬위원회(韓國歷史情報統合시스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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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진, 16일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 표창...축하합니다.
예천군재향군인회(醴泉郡 在鄕軍人會 定期總會 開催) [記事] :
예천군재향군인회(회장 김태호) 2009년도 제50차 정기총회가 2009년 1월 16일 오전 10시 광일 컨벤션 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보훈단체장, 향군회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1부 정기총회에서는 2008년 사업보고와 사업결산승인의건과 임원선출을 통해 신태호 회장이 회원들의 만장일치로 유임됐다.
이어 열린 기념식은 황병갑 씨가 향군의 다짐’ 낭독으로 시작됐으며, 정광진 이사가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이종관 예천군재향군인회 하리면 회장이 경북도회장 표창을, 향군회원 자녀인 윤소리(용궁중2) 학생에게 장학금 30만 원과 장학증서를 전달했다.
김태호 회장은 대회사를 통해 “올 한 해 조직의 정예화로 젊은층들이 활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가까운 곳에서부터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데 앞장서겠다”며 “선진향군 건설을 위해 전 회원이 한마음 한뜻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고 당부했다.
이어 참석회원들은 결의문 채택을 통해 국가안보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수호에 앞장서며, 지역발전을 위해 헌신 노력할 것을 다함께 결의했다.
(醴泉인터넷放送 2009-01-16 오후 1:5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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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구계리 어사금, 한국 最古 最短 거문고이다.
어사금(朝鮮 太宗 임금이 下賜한 우리나라에서 第一 오래되고 第一 짧은 거문고 公開) [記事] :
예천문화원(원장 김종배)에서 2009년 4월 중 발간 예정인 "예천문화재대관"에 수록될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거문고 중 제일 오래되고 제일 짧은 거문고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1호 어사금"이 예천인터넷뉴스를 통해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어사금"은 조선 태종 임금이 그의 여섯째 왕자인 희령군에게 하사한 것으로 희령군의 끝집 자손 한 사람이 영남으로 이사올 때 가지고 왔으며 현재 용문면 구계리 전주이씨 희령군파 종중에서 대대로 가보로 소장하고 있다.
"희령군 어사금"이라 불리는 거문고는 현악기로 몸체는 오동나무와 밤나무를 주재료로 생명주실과 소가죽을 부재료로 하여 만든 것으로 조각솜씨가 매우 섬세하며 몸체 위에는 명주실로 꼬아 6현을 장착하고 술대로 쳐서 소리를 내도록 했으며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거문고 중 제일 오래되고 제일 짧은 거문고로 문양과 모양새가 매우 아름답다.
(김상국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01-14 오후 7: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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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금(御賜琴), 옥사금, 희령군 어사금(熙寧君御賜琴) [遺物] : 용문면 구계리 243번지 전주 이씨 희령군 종택(熙寧君宗宅) 이정사(夷靖祠) 안에 소장된 600년 전의 거무고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1호(1989.4.26)로 지정되었다. 이는 조선조 제3대 태종이 애용하던 거문고인데, 태종이 여러 왕자 중에서도 여섯째 아들 희령군 이타(熙寧君李陀)가 가장 음률(音律)에 능통하다 하여 이를 하사했다. 희령군은 시 서 예악(詩書禮樂)에 해박하여 태종의 총애를 받았는데, 특히 예악(禮樂)에 능통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찬진(撰進)하는데 이바지하였다. 희령군은 이를 집안의 가장 소중한 보배로 삼아 ''''내사 희령금(內賜熙寧琴)''''이라고 거문고 뒷판에 손수 음각(陰刻)하고, 평생 소중스레 간수하면서 자오(自娛)했었다. 그 후로 이는 후손에게로 전장(傳藏)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는 길이가 4척(120.3cm), 너비 6촌(15.9cm), 높이 4촌(두꼐 12cm)이고, 몸체는 오동나무와 밤나무를 주재(主材)로, 생사(生絲)와 우피(牛皮)를 부재(副材)로 하여 제작한 것인데, 조각 솜씨가 매우 섬세하다. 몸체 위는 명주실로 꼬아 6현(絃)을 장착(裝着)하고 술대로 쳐서 소리를 내도록 했는데, 모양이 매우 아담하다. 진리(軫裡)에 딸린 6현은 다시 갈아 끼었고, 안족(雁足) 6개 중 4개와 술대를 새로 만들었고, 이(裡) 2개는 원래 대로 남아 있다. 배면에는 음률(音律)을 조화있게 발성토록 3개의 홈을 파 놓았고, 중심에는 ''''태종대왕 소장 금 내사어사금(太宗大王所藏琴內賜御賜琴)''''이라 음각되어 있다. 안단(雁端)에는 용두(龍頭)와 봉미(鳳尾)를 같은 모양으로 마감하였고, 대모(玳瑁)는 부드러운 소가죽으로 바꾸었으나 울림통은 원형 그대로이다. 희령군은 이를 어사금(御賜琴)이라 명명(命名)하고 광주군 대왕면 율현리(廣州郡大王面栗峴里)에 정착하여 누대에 걸쳐 후손들이 가보로 사당에 보관하였으나 임진왜란(1592), 병자호란(1636) 때 사당은 불타고 거문고만 남았는데 4대손 이함(李涵)이 상주군 외서면 풍강(尙州郡外西面風崗) 남적마을로 이주할 때 매고온 것이다. 그 후 5대손 이우춘(李遇春)이 지보면 신풍리(新豊里)로 이 거문고를 가지고 이주했다가 다시 유천면 망정(望亭)으로 옮겨 계속 전승되고 있었는데, 종사(宗嗣)가 끊기자 13대손 이병성(李秉誠)이 봉사손(奉祀孫)으로 구계리(九溪里)에 정착하고, 1792년(정조 16)에 불도묘로 정사를 세우고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이 일을 후세의 사람들이 이르기를, "모두 불타버린 중에서 거문고가 온전한 것은 희령군의 신령이 가호한 덕택이다."라고 감탄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희령군 10세손인 이덕화(李德華) 때에 이르니, 거문고가 낡아서 연주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이덕화는 족질(族侄) 이기완(李基完), 이서완(李瑞完)으로 더불어 이 일을 안타깝게 여기던 중 1768년에 이웃 마을(용문면 성현리)의 선비 정재대(丁載大)가 이 사실을 알고, 장인(匠人)을 시켜 다시 고치어서 완전하게 원형으로 복원하였다. 이 때 희령군(熙寧君)의 11세손인 이기완(李基完)이 정재대(丁載大)의 집에 가서 사례하고 이 거문고를 받들고 돌아와서 이덕화의 집에 거문고를 모시었다. 이 무량한 감회를 인근이 모두 경하하면서 시를 읊은 기록을 <어사금중수록(御賜琴重修錄)>이라고 이름 붙여서 책으로 역어졌다. 그 분량이 수 100편이었고, 근년에 간행된 바가 있다. 이 거문고를 중수한 30년 후인 1797년(정조 21) 이덕화의 증손인 이병성(李秉誠)을 왕명으로 희령군의 봉사손(奉嗣孫)으로 세우고, 이 해 3월 17일에 신주를 봉안하고 고유(告由)할 때 참사(參祠)한 하객이 1천여 명이었고, 당시의 권성(權省) 예천군수가 악사(樂士)를 보내어 제향에 거문고를 타게 했으니, 이 때 척강(陟降)한 정령(精靈)도 일희일비(一喜一悲)했을 것이다. 또 이 거문고는 옛부터 상서로운 조짐이 있을라치면 스스로 소리내었다 하여 일명 자명금(自鳴琴)이라고도 했다.
봉사손(奉嗣孫)을 세우게 하는 왕명이 내리기 직전에 이 거문고가 스스로 소리내었으므로 길조가 있을 줄 짐작되더니 드디어 봉사손(奉嗣孫)을 세우는 왕명이 내렸다. 그로부터 또다시 세월이 흘러 200여 년인데, 열강의 각축으로 새로운 서양 문물이 개화기 이후 잠식해 오면서 생활 양식이 달라지고 문화도 변해서 뜻있는 이들을 애태우던 100년 사이 더욱 산업 사회화하면서 옛 전통이 한꺼번에 자취를 감추려는 즈음인 1988년 희령군 봉사손(熙寧君奉嗣孫)인 이상두(李祥斗)를 중심으로 의령군 후손들이 함께 의론하여 문화공보부에 이 거문고를 문화재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하니, 그 뜻이 받아들여져 거문고를 감정한 결과 진품인 것은 틀림없으나 너무 낡아서 보수가 시급하다고 하면서 문화재 감정 전문위원들이 주선해서 인간문화재인 악기장 이영수(樂器匠李永水)에게 중수를 의뢰하였다. 다시 고치고 나니 맑고 청아(淸雅)한 울림은 옛 소리 그대로 재현되고, 모습도 원형이 되살아났다. 다시 증빙 서류를 갖추어 신청하니 문화재 전문위원들이 신중히 심사한 결과 아주 오래된 진품이고, 증빙 자료와 일치함을 공인하고 드디어 경상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였다. 특히 1867년(고종 4)에 임금이 희령군사당(熙寧君祠堂)에 치제(致祭)한 제문 중에 이 거문고를, "조그맣고 진귀한 거문고가 후손에게 이어 전해지는 오래된 보배 어사금(御賜琴)인데, 술 한 잔에 시 수(首) 읊노라니 거문고 여섯 줄이 스르렁거리며 400여 년의 남은 울림이 여기 있다."라고 한 영광의 거문고이기도 하다. 이 어사금이 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이보향(李輔享, 文公部), 권오성(權五聖, 漢陽大 音大 敎授), 성병희(成炳禧, 安東大 民俗科 敎授) 등 문화재 전문위원과 이영수(李永水, 樂器匠)와 예천군 문화공보실 및 경북도청 당국 등이 노력하였다. [傳說] : 이병성이 소장하고 있을 때인 어느해 가을에 거문고가 갑자기 제홀로 갑 속에서 소리를 내었다. 온 가족들이 이상스럽게 생각하였더니, 며칠 지나서 당시의 임금인 정조가 이병성에게 희령군의 사당을 모시도록 분부했었다. 당시의 사회 제도로 보아 희령군사당(熙寧君祠堂)을 모신다는 것은 여간 명예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명예가 있을 것을 미리 알려준 어사금(御賜琴)의 신비야말로 신비 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병성은 희령군의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을 수축하고 그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이 사당를 모셔 받들게 하였다. 신비스럽게 스스로 소리를 내어 그 후손들의 길조를 알려주는 이 어사금을 지금도 사당 안에 간직하고 있다.(醴泉郡誌 1939, 嶠南誌 1937, 醴泉文化 5輯 1992)
어사금(御賜琴) [文化財] : 용문면 구계리 243번지에 있는 조선 태종의 6남인 희령군 타(陀)에게 하사한 내사금(內賜琴)으로, 희령군은 이를 ''''어사금''''(유형문화재 제241호, 1989.5.29 지정)이라 이름 짓고, 광주군(廣州郡) 대왕면(大王面) 율현리(栗峴里)에 정착하였는데, 그 후로 누대에 걸쳐 가보로 소중히 보관하여 왔다. 13세손 병성(秉誠)이 용문면 구계리에 사당을 짓고, 거문고를 이 곳에 보관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거문고의 길이는 120.3cm, 너비 15.9cm, 두께 12cm로 현재 생산되는 거문고보다 약간 작은 편이며, 용두(龍頭)와 봉미(鳳尾)를 같은 모양으로 마감하고, 대미(玳 )는 부드러운 소가죽을 덮었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어사금(御賜琴) [傳說] : 용문면 구계리에 있는 거문고로, 조선 태종 임금이 그의 여섯째 왕자인 희령군이 음율(音律)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거문고 한 개를 내려준 일이 있었다. 그 후 희령군의 자손들은 이 거문고를 어사금(유형문화재 241호)이라 하여 대대로 가보로 생각하여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와중에 종가 계통의 후손이 끊어져 버리고 경기도 광주에 있던 희령군 사당마저도 불타버리고 말았다. 희령군이 분가할 때 궁중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이라곤 모조리 불타버리고 말았는데, 이상하게도 어사금 한 개만 용케도 남게 되었다. 이 거문고는 희령군의 끝집 자손 한 사람이 영남으로 이사를 올 때 가지고 왔다. 그리고 몇 대를 지나 병성(1771∼1839)의 대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어느 해 가을, 갑 속에 있는 거문고에서 소리가 울렸는데, 그 소리는 깊이 있으면서도 영롱하고 그윽한 소리여서 온 가족이 모두 이상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자 며칠이 지나 당시의 임금인 정조가 병성에게 희령군의 사당을 모시게 하라는 분부의 교지가 내려졌는데, 당시의 사회 제도로 보아 희령군의 사당을 모신다는 것은 여간 명예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명예가 있는 것을 미리 알려준 어사금은 정말로 신비로웠다고 하겠다. 이 후 그는 희령군의 사당을 수축하고 후손들에게 대대로 이 사당을 모셔 받들게 하였는데, 그 후에도 어사금은 후손들에게 스스로 신비로운 소리를 내어 길조를 알려 주었다고 하며 지금도 희령군의 사당에 고이 간직되고 있다.(醴泉新聞 2004.2.13)
어사금(새로 指定된 文化財 御賜琴) [學術저널] : 용문면 구계리 출신인 이영근(李榮根, 凞寧君 18世孫)이 희령군 이타(熙寧君 李陀)가 태종에게서 하사받아 구계리에 소장되어 있는 거문고에 대한 학술저널로, 예천문화원에서 1992년에 발행한 <예천문화> 5호 33-37쪽(5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어사금(御賜琴) [傳說] : 용문면 구계리 희령군사당(熙寧君祠堂)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유물로, 조선시대 태종대왕이 그의 여섯째 왕자인 희령군이 음률을 좋아하는 줄 알고, 거문고 한 개를 내려준 일이 있다. 그 후 희령군의 자손들은 이 거문고를 어사금이라 하여 대대로 둘도 없는 가보(家寶)로 삼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통에 종가 계통의 후손이 끊어져버리고, 경기도 광주에 있던 희령군의 사당 마져 불타버리고 말았다. 희령군이 분가할 때, 궁중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들도 모조리 불타버리고 말았으나 이상하게도 어사금은 용케도 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 후 끝집 자손 한 사람이 영남으로 이사를 올 때 이 어사금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몇 대를 지나 병성(秉誠)이라는 분의 대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어느 해 가을, 거문고가 갑 속에 있는데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깊이 있으면서도 영롱하고 그윽한 소리였다. 온 가족이 모두 이상스럽게 생각하였다. 며칠이 지나서 당시의 임금인 정조께서 병성이라는 분에게 희령군을 사당에 모시라는 분부의 교지가 내려졌다. 당시의 사회제도로 보아 희령군을 사당으로 모신다는 것은 여간 명예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명예가 있을 것을 미리 알려준 어사금은 정말로 신비로웠다. 병성이라는 분은 희령군의 사당을 수축하고, 후손들에게 대대로 이 사당을 모셔 받들게 하였다. 그 후 이 어사금은 후손들에게 스스로 신비로운 소리를 내어 길조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고증 : 예천군향토문화연구원 장병창(경상북도 홈페이지 2000.7.15, http://etmdb.provin.kyongbuk.kr)
어사금중수록(御賜琴重修錄) [冊] : 조선 태종이 아들 희령군(熙寧君)에게 하사한 거문고를 중수할 때의 내력과 그 것을 송축하는 시집으로, 1책, 석판, 1957년에 간행하였다. 16세손 태진(台鎭)의 서문이 있고, 17세손 순화의 발문이 있다. 경축하는 글의 원운은 희령군 11세손인 이기완(李基完)이 서문과 함께 지었다. 용문면 구계리 전주 이씨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금당ㆍ맛질의 역사적 위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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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345
서악사 대웅전 범종(西岳寺大雄殿梵鐘) [鍾] : 예천읍 대심리 560번지(宗) 서악사 내에 유존하는 종으로, 1933년에 주조되었다. 용뉴(龍 )와 용통(龍筒)이 있고, 종신(鐘身)에는 4유곽(乳廓) 내에 9유두(乳頭)씩 장식되어져 있다. 각 유곽 사이에는 보살입상(菩薩立像)이 1구(軀)씩 배치되어 있다. 종신 하단부에 ''''佛紀二九六十年(1933) 癸酉三月日 六十斤 醴泉郡 西岳寺 中鐘施主 張修善草記付美金希主靈駕''''라고 새겨져 있다. 범종 크기는 직경 38cm, 전체 높이 53cm, 종신 43cm, 용통 너비 3.3cm, 용통 길이 11cm이며, 내곽 크기는 11x11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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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