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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 1821:예천충효20(附 예천방문 347)
작성자장병창 @ 2009.01.19 07:10:30

  예천의 자랑(1821) : 예천 충효 20(附 예천방문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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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이주도(李周道) : 1580(선조 13)-?, 감천면 만장(晩場) 출신, 자는 백행(伯行), 호는 국헌(菊軒), 본관은 진성, 온계 해(溫溪瀣)의 손자,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 음사로 참봉(參奉)을 지냈다.(倡義錄, 醴泉郡誌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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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에 참여하여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은
  이준형(醴泉 出身 獨立運動家 6名 光復節 맞아 褒賞) [記事] : 국가보훈처는 광복 61년 광복절을 맞아 항일운동을 전개한 예천 출신 6명을 포함 모두 313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했다. 이번에 포상한 독립유공자의 훈격은 건국훈장 145명(독립장 3, 애국장 43, 애족장 99), 건국포장 47명, 대통령 표창 121명 등이며, 이 중에서 예천군 출신이 6명 포함됐다. 정휘세(1916-1931, 일본방면활동) 선생이 애국장, 황창섭(1896-1949, 국내항일) 선생이 애족장, 박규수(1991-1947, 3.1운동)·이용헌(1880-1934, 3.1운동)·이종협(1895-1929, 3.1운동)·이준형(1883-1940, 3.1운동) 선생이 대통령 표창 포상을 받았다.(醴泉新聞 2006년 08월 17일 11: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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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 때 공신인
  이중양(李仲陽) : 1534(중종 29)-1610(광해군 2), 지보면 신풍리 출신, 자는 명지(明之), 호는 곡강정(曲江亭), 본관은 가평, 장준(長俊)의 손자, 담(聃)의 아들이다. 일찍이 문명(文名)이 있어 1567년(명종 22) 식년 진사시에 3등 35위로 합격하였다. 임진왜란(1592) 때 선무공신(宣武功臣)이었다. 신풍리(新豊里)에 곡강정(曲江亭)을 창건하여 여생을 보냈다. 어느 날, 영의정 유영경(領議政柳永慶)이 이 곡강정을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당신 그렇게 허송 세월하면서 늙지 말고, 세상에 나가서 벼슬함이 어떨고?"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납성개(申城浦) 만호(萬戶)나 해 봤으면..."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유영경이 조정으로 돌아가서 당로자(當路者) 간에 이야기하는 것을 서애 유성룡(西厓柳成龍)이 듣고 이르기를, "이는 우리 이웃 고을에 사는 거사 이모(居士李某)이니 그것이 어디 진정으로 하는 말인가? 납성개란 그 정자 아래 약간 떨어진 곳이니, 그 말이 농담인 것을 공(公)은 정말로 들었단 말인가."라고 했다. 묘는 신풍리 북쪽 직전동 자좌(稷田洞子坐)에 있다.(竺山勝覽 1934, 族譜, 知保面誌 1987, 司馬榜目, 醴泉郡誌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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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년 의진에 협력한
  이중진(李仲鎭) : 용궁군(龍宮郡) 출신, 자는 중민(仲敏), 본관은 공주, 구한 말의 의병으로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에 협력하였다.(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國家報勳處 395쪽, 獨資 1卷 305쪽, 金承學 下卷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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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이증수(李曾壽) : 감천면 만장(晩場) 출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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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년 의진의 좌종사로서 대통령 표창에 추서된
  이지선(李芝璇) : 1876(고종 13)-1918, 용궁면 월오리 나산(蘿山) 출신, 이명은 지원(芝元), 자는 인보(仁甫), 호는 나강(蘿崗), 본관은 성주, 세심헌(洗心軒) 규홍(圭洪)의 장자,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의 좌종사(坐從事)로서 예천, 문경, 충북 제천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지선은 러일전쟁(1905)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체결된 을사조약을 보고,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가 닥쳤음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1907년 8월, 그는 의병 항쟁을 모색하던 아버지 이규홍(李圭洪)의 소개로 거창 출신의 의병장 차성충(車晟忠)과 함께 이강년 의진에 갔다가 의병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08년 정월에 석주 이상룡(石洲李相龍)이 그의 아버지에게 군자금을 요청하자, 그것을 마련하여 그의 매부 이세형(李世衡)과 함께 의병 활동을 모색하고 있던 차성충에게 직접 전달하였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군자금을 전달하여 의병 활동을 도왔다. 이후 그는 을미의병(1895)에 참여했다가 정미7조약 직후 재봉기한 이강년 의병진에 가담하여 좌종사로서 활동하였다. 이강년 의병 부대는 주로 태백산맥을 동서남북으로 오르내리고 넘나들며 정미의병(丁未義兵, 1907)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상을 보였다. 특히 의병장 이강년은 대담한 유도 작전으로 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는 전과를 올렸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 후 1908년 6월 청풍(淸風) 까치재에서 이강년 의병장이 적들에게 피체되었으나, 그의 부장들은 의병 활동을 지속하였다. 한일합방(1910) 이후 국권 회복 의지에 불타는 그는 의병을 재규합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동지인 이승재(李承宰), 장한문(張翰文), 안재극(安在極), 김두활(金斗活), 이긍재(李兢宰), 유시연(柳時淵), 노병대(盧炳大), 김철상(金喆相), 이은화(李殷和), 이명재(李明宰), 이응수(李應洙), 정희섭(丁喜燮), 주구상(周九相) 등의 동지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여, "일본은 임진년 이래로 우리의 원수로서 수 많은 사기와 기만으로서 우롱하더니, 이제는 침략을 자행하고 있다. 특히 국모를 시해하는 등 천인공로할 행위를 서슴없이 행하면서 우리를 금수와 같이 하려는 이 때를 당하여 모든 젊은이들은 의병의 대열에 동참하여 일신을 산화함으로써 의를 행하여 대의를 바로 세우자."라는 취지의 격문(檄文)을 작성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그는 이강년 의병장의 장자 이승재(李承宰)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병을 얻어 객지에서 사망하자, 여러 동지들에게 알려 재물을 마련하여 고향으로 보내는 등 의병의 가족을 돌보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召募檄文 筆寫本, 通告 1917 9月, 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報勳處 395쪽, 同 13卷 359-360쪽, 石洲李相龍遺稿 高麗大出版部 1973年 268ㆍ269ㆍ334ㆍ335쪽, 李圭洪 親筆記年 57ㆍ59ㆍ62쪽, 國譯李康秊全集 淸權祠 1993년 449ㆍ477쪽, 義兵大將 雲崗李康秊 李錫宰 1993年 160쪽, 店村 聞慶鄕土抗日義兵史 刊行年度 未詳 26쪽, 韓國獨立史 金承學 下卷 213쪽, 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保勳處 第1輯 290ㆍ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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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년 의진의 좌종사부로서 애족장에 추서된
  이지한(李芝漢) : 1856(철종 7)-1940, 용궁군(龍宮郡) 출신, 자는 유흥(有興), 호는 연소(蓮昭), 본관은 성주, 1907년 3월 충북 제천에서 이강년 의병장(李康秊義兵將)이 재기의거(再起義擧)하자 입진(入陣)하여 1908년 6월 해진(解陣)할 때까지 좌종사부(坐從事部)에 소속, 1년여에 걸쳐 충청, 경상도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敍)하였다.(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395쪽, 金承學 下卷 213쪽, 大韓民國 獨立有功者功勳錄 第11卷 國家保勳處 1994年 231쪽, 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保勳處 第1輯 303ㆍ7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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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이직도(李直道) : 1575(선조 8)-?, 호명면 신당곡(醴泉神堂谷) 출신, 자는 정행(正行),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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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하여 참봉에 제수된 이진남(李鎭南)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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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 때 왜적을 만나 굴하지 않고 자결한
  이진영(李進英) : 1539(중종 34)-1592(선조 25), 예천읍 왕신리 출신, 자는 응현(應賢), 호는 송파(松坡), 본관은 경주, 도승지 순곤(順坤)의 장자, 청송 성수침(聽松成守琛)의 제자, 1570년(손조 3) 에 정언(正言)을 거쳐 사예, 직제학을 지냈다. 임진왜란(1592) 때 왜적을 만나 굴하지 않고 자결하였다. 묘는 예천읍 왕신리 방화실 동 안산 묘좌(芳花室東案山卯坐)에 있다.(族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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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이찬(李燦) : 1575(선조 8)-1654(효종 5), 용궁면 무이리 출신, 조선 인조 때의 명의(名醫), 자는 중명(仲明), 호는 국창(菊窓), 본관은 여주, 기우자 행(騎牛子行)의 8세손, 입향조 윤수(潤壽)의 2자, 환(煥)의 동생, 장춘(長春)의 아버지, 서애 유성룡(西厓柳成龍)의 외손자 겸 제자이다. 유학자이면서 도연명(陶淵明)의 지조를 지녔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을 하였다. 그가 젊어서 자주 병을 앓았으므로 의술(醫術)을 스스로 공부하였던 바 치료에 능숙해져 원근이 중병과 고질병을 잘 고쳐 반드시 효험을 얻었다. 1632년(인조 10) 왕이 병들어 전의(典醫, 國醫)들의 치료를 받았으나 효험이 없어 그를 불러 병을 고쳤다. 그가 조정에서는 익위사어(翊衛司禦),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공조 좌랑(工曹佐郞)의 벼슬을 하고, 군위 현감(軍威縣監)으로 내려갔다가 병으로 그만 두었다. 내의원(內醫院)에서 다시 어약(御藥)을 맡아보고 또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거쳐 금산(金山, 現 金泉) 현감(縣監)으로 있다가 얼마 후 집에 돌아와 향년 80세로 타계하였다. 저서로 <국창집>이 있다. 묘는 풍양면 청운리 굴미(九美) 큰등 유좌에 있는데 묘갈이 있다(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倡義錄, 龍宮縣邑誌 1780, 醴泉郡誌 1939, 竺山勝覽 1934, 朝鮮 輿勝覽 1929, 嶠南誌 1937, 國史大事典, 驪州李氏先祖由來 2001).


  [王朝實錄] : 1632년(인조 10) 6월 11일 내의원(內醫院)의 요청으로 왕의 부름을 받았고, 1636년(인조 14) 6월 11일 원성군(元城君) 최명길(崔鳴吉)의 추천을 받았고, 1644년(인조 22) 2월 4일 영의정 심열이 차자를 올리기를, "침맞는 것을 중지하고, 이찬을 불러 증세에 맞는 약제를 의논해 정하여 확실한 공을 거두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仁祖實錄), [醴泉의 金石文] : 젊어서는 몸이 약하여 기황가(岐黃家)의 가르침에 따라 병을 치료하더니 점점 다른 사람의 병을 다스렸다. 인조께서 몸이 편치 않아 어의(御醫)들이 방문(方文)을 올리나 효험이 없자, 곧 역마(驛馬)로 그를 부르니 직분에 충실하여 익위사 사어, 종부시 주부, 공조 좌랑을 제수받았고, 군위 현감, 공조 정랑, 금산 군수(金山郡守, 現 金泉市長)를 지냈다. 묘는 풍양면 청운리 청산(靑山) 진향(震向)에 있는데, 묘갈명은 도승지 이민구(李敏求)가 지었다.(醴泉의 金石文 2003)


  이찬(李燦) : 1575(선조 8)∼1654(효종 5), 조선 중기의 의학자, 본관은 용궁(龍宮), 자는 중명(仲明), 고려 태학사(太學士) 행(行)의 8대손이며, 유성룡(柳成龍)이 그의 외숙이다. 젊어서 자주 병을 얻었으므로 스스로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독학으로 의술을 연구하여 명의(名醫)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그는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기 위하여 모든 힘을 기울였다. 한밤중에 환자가 찾아오거나 그를 데리러 와도 조금도 귀찮게 여기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치료도 하고 또한 천리길도 멀다 하지 않고 왕진을 가기도 하였다. 1632년(인조 10) 어의(御醫)의 치료에도 효험을 얻지 못한 인조의 병을 고치니 어의들이 부끄러워하였다. 왕의 특명으로 익위사 사어(翊衛司司御)로 등용되고, 이어서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공조 좌랑·군위 현감을 역임하고 병으로 사임하였다. 다시 왕의 특명으로 내의원(內醫院)에 나가 어약(御藥)을 바치다가 공조 정랑에 기용되고 이어서 김산 현감를 지냈다.(仁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李在範(韓國學中央硏究院))


  이찬 [記事] : 한국문집총간(052_043a) 서애집(西厓集, 1894)에 실린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기사로, 그 내용은, "西厓先生文集卷之二/ 詩/ 十二月十三日。西赴山陵。到龍宮。吟示李甥。,燦/ 病起悤悤束曉裝。驛程千里遡?凉。晴沙晩石相?帶。落日孤雲正杳茫。九死敢忘忠孝願。殘年重別水雲鄕。喬陵松檜風霜苦。半夜寒聲入夢長。"이다.(www.minchu.or.kr 2006)


  이찬 [記事] : 한국문집총간(095_525d) 백헌집(白軒集, 1700)에 실린 이경석(李景奭)의 기사로, 그 내용은, "白軒先生集卷之十一 詩稿/ 散地錄中/ 龍宮李正郞 燦 挽/ 貌如?鶴白而長。徵?非關?後方。玉潤氷淸推學識。水曹花縣屬賢良。禁中趨走依?夢。靜裏光陰八十霜。何處煙波雙劍會。暮雲春樹正茫茫。"이다.(www.minchu.or.kr 2006)


  이찬 [記事] : 한국문집총간(096_201a) 백헌집(白軒集, 1700)에 실린 이경석(李景奭)의 기사로, 그 내용은, "白軒先生集卷之二十九 文稿/ 書牘/ 與遲川以下甲戌居廬時/ 景奭稽?再拜言。頑命不死。又見歲換。罔極何言。且承台問。?切哀感。台之患候。?損良幸。且在?之人。無與於事。而至於君父之疾。乃一國臣民之憂。況如景奭者。?侍最久。受恩最重。區區悶慮之心。當復何如。苟有所懷而一毫或有補益。則何可以在?爲嫌。而自外於執事不爲之一二乎。聖候違豫。今已三年。鍼藥之方。可謂盡矣。以其時則宜已復常。而雖有小效。尙未快愈。小有勞動。輒復添傷。是病根未去也。豈醫治之方。猶有所未盡耶。誠不勝憂懼之至。鍼如麥芒。氣出如輪。雖有補法。補不償瀉。玉體之受鍼。今已幾度。而眞元之耗損。愈往愈甚。於此而不思他方。一委之屢試無大效之鍼手。不亦危乎。用藥亦不爲不多。而未見大效。則無乃所用之藥。亦未得其對證之方而然耶。竊聞龍宮士人李燦。素是儒者而兼通醫術。以近日耳目之所覩記。用其藥而差痼疾者甚多。想內局亦必聞知。而何不爲之上聞。一試其方耶。如曰其術不能則已。如曰能之。則何不召致耶。知之而未知其能。則是知之未明也。知其能而然且不召。則是藥未盡其方也。且召致之擧。有所傷損。則置之可也。無所傷損而或可萬有一益。則何憚而不一召之耶。或以其士人難其召。是不然。當君父病劇之日。欲試其方而召之。則爲臣子者。何敢以非其招而不來哉。況台旣特擧於薦書。上亦嘉奬而優許。是朝廷已以賢士待之也。待之以賢士。召之以君父之議藥。則何不可之有。或以爲病?在邪。藥難得力。專以鍼可也。此又大不然。邪實爲?。則元氣尤不可不顧也。欲補元氣。則舍藥何以哉。或又以爲自上厭苦進藥。自下不敢?請。是又大不然。凡在京之醫。皆已試問之矣。李則未嘗問而試之矣。侍君父之疾。問君父之藥。宜無所不用其極。苟以醫術名者。則雖在他國。猶當迎問。況同國而曾不一問乎。舜之所以爲大知者。以其好問而好察邇言。執兩端而用其中。治病之道。亦何害於好問而用中。問而試之而不效。則固無後悔。曾不一問而試之。則後悔何及。此乃內局之責也。執事之所當憂者也。速圖之。不勝幸甚。昔朱夫子方在憂服中。凡關係國家大事。無不力陳於執政。況關上體者乎。父子兄弟。相對憂悶。不勝區區。玆敢冒達所懷。雖出於至情。不亦僭越之甚乎。惶恐惶恐°"이다.(www.minchu.or.kr 2006)


  이찬 [記事] : 한국문집총간(094_424d) 동주집(東州集)에 실린 이민구(李敏求)의 기사로, 그 내용은, "東州先生文集卷之九/ 碣銘/ 工曹正郞李公墓碣銘 幷序/ 嶺南自六七十年。儒先長者之風益以代?。則?光林泉。藏器以守道。不數數當世者猶間起有聲。近龍宮人李公澯仲明。亦表著於時。驪州李氏在麗末。太學士行自號騎牛子。風流映士林。七傳贈右尹公潤壽。有隱德。余嘗記其牲石。以萬曆乙亥生公。幼鞠於世祖姑。旣亡。致?如通喪。淸明開易。表裏完粹。絶去塵俗態色。矯貌飾行。宗戚化其仁。鄕黨服其義。遠近慕信。相戒不爲非。待賓客一誠無倦。至老不替。蓋王?方,管幼安其人云。西厓柳相國於公爲外舅。特加愛重。每留語款?。西厓公季子袗負重名。起家爲司憲府持平。南士以公比擬。莫能相軒?。少多病。治岐黃家言。善自將理。人以父母妻子有奇疾痼?。必就公問藥何宜。昏夜叩門。不以千里爲遠。公隨病處方。未嘗不驗。及仁廟違豫。國醫奏方率不效。卽驛召起公。公大蹙?。又不得已於義分。?詣京師。時余提調大醫局。甚愧見公。朝廷雅欲屈公以職。至則除翊衛司禦,宗簿主簿,工曹佐郞。旋授軍威縣監。數月病免。內局當再議御藥。公亦再赴闕。拜工曹正郞。又出爲金山縣。未幾又謁病歸家。甲午二月。考終于寢。臨沒。神明不爽如常。公居家孝於親。友於同氣。推?指以業季弟。析土田臧獲。?庶姪遂其生。蓋公之細也。公配令人金氏。考縣監富倫。退陶門人。弟司諫?。余同年及第。以風節獨行名。令人習于家?于從。美行懿範。宜甲於女史。先公卒。合葬縣南先兆。昔余過公廬。蒔菊滿階。園場潔脩。淸晤竟晷。自不覺吏役之在身。目擊神融。實有忘言之契焉。今其繼胤長春以狀徵余文曰。將以刻諸墓?。乃不辭而爲銘。銘曰。/ 自我不見。鄙吝則多。時月爲久。千古奈何。完名令終。旣佚以歸。啓手與足。君子庶幾。無遠先域。夫藏婦隨。嗣事有人。祭以不?。"이다.(www.minchu.or.kr 2006)


  이찬 [記事] : 유교관련도서/ 예천의 금석문 1 | 간행년:2003/ 저자:예천문화원/ 발행처:예천문화원/ 菊? 驪州李公(燦) 墓碣銘/ ...B202_0330.jpg국창 여주이공(찬) 묘갈명육칠십년 전부터 영남에서 長者의 풍모를 갖춘 앞선 선비가 숨...(韓國國學振興院 ugo.net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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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년 의진에서 대일항전에 나서 건국포장에 추서된
  이철원(李喆元) : 1851(철종 2)-1934, 예천군 출신, 일명 희희(希喜), 본관은 전주이다. 1907년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이강년 의진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에 나섰다. 1986년에 이미 거의(擧義)한 바 있는 이강연 의병장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1907년 3월 충북 제천에서 재봉기하여 경상, 강원, 충청도 일대를 넘나들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원주진위대 해산병이 주축이 된 만긍호(閔肯鎬) 의진과 합세하여 충주성을 공략하였고, 주치전투, 죽령전투, 고리평전투, 백자동전투 등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고종 황제는 밀지를 내려 그를 도체찰사에 임명하여 의병 활동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그 해 12월 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되어 서울 진공작전올 전개할 때에는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이강년 의병장은 특히 지방민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리에 밝은 이점을 이용해 신출귀몰한 유격 전술을 구사하여 의병사에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1908년 2-4월간에 전개된 용소동전투, 갈기동전투, 백담사전투, 안동 서벽전투, 봉화 내성전투, 안동 재산전투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강연 의병대장은 같은 해 6월 청풍 작성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피체되어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이와 같이 후기 의병사에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한 이강년 의진에서 이철원은 좌종사(坐從事)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大韓民國 獨立有功者功勳錄第14卷 國家保勳處 2000년 636-637쪽, 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保勳處 第1輯 303쪽, 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3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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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인 이필주(李弼柱)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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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년 의진에 협력한
  이현재(李鉉宰) : 예천 출신, 자는 필문(弼文), 본관은 연안, 구한 말의 의병으로 이강년 의진에 협력하였다.(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398쪽, 獨資 1卷 303쪽, 金承學 下卷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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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이형(李炯) : 1577-1653, 이조 선조 때, 용궁면 무이리 출신, 자는 숙명(叔明), 호는 물헌(勿軒), 본관은 여주, 우윤 윤수(潤壽)의 아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제자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증광 생원시에 3등 4위를 합격하였다. 형제 4명이 모두 문학으로 저명하였다. 선조 때 형 찬(燦)과 동생 환(煥)과 더불어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모두 80수를 누렸고, 문집이 있다.(倡義錄, 醴泉郡誌 1939 2005, 族譜, 朝鮮환輿勝覽 1929, 司馬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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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란과 호란 때 창의한 이형곤(李亨坤)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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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이형남(李亨南) : 1568(선조 1)-?, 호명면 월포리 우리포(愚里浦) 출신, 자는 태주(泰州), 호는 우포(愚浦),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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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이호음(李好音) : 1566(명종 21)-?, 예천 율고개 제정(醴泉栗古介楮井) 출신, 자는 여회(汝懷), 본관은 경주, 재정 달충(霽亭達衷)의 후손, 충좌위 부사과(忠佐衛副司果) 성립(成立)의 장자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 부모 사후(永感下)에 유학(幼學)으로서 1627년(인조 5) 식년 생원시에 3등 66위로 합격하였다. 묘는 호명면 황지리 구실 자좌(鳩室子坐)에 있다.(倡義錄, 襄陽誌 1661, 醴泉郡邑誌 1780 1895, 司馬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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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이홍경(李弘經)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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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이환(李煥) : 1582(선조 15)-1661(현종 2), 용궁면 무이리 출신, 자는 계명(季明), 호는 호우(湖憂), 본관은 여주, 입향조 승사랑(承仕郞) 윤수(潤壽)의 4자, 돈(焞)ㆍ찬(燦)ㆍ형(炯)의 동생, 장발(長發)의 양부, 장생(長生)의 아버지이다. 배우지 않고도 글을 지었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와 외삼촌 유성룡(柳成龍)의 제자이다. 학문에 능하여 외삼촌 유성룡(柳成龍)이 기이하게 여겼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 부모 사후(永感下)에 유학(幼學)으로서 1616년(광해군 8) 증광 생원시에 3등 99위로 합격하였다. 유림의 존경을 받았고, 인조 때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왕자 사부(王子師傅)에 제수되었고, 또 목릉(穆陵) 참봉이었다. 문집이 있다. 묘는 풍양면 청운리 굴미(九美) 재궁 뒤 유좌에 있는데, 묘갈이 있다.(司馬榜目, 醴泉郡誌 1939, 驪州李氏先祖由來 2001, 倡義錄, 竺山勝覽 1934, 嶠南誌 1937, 慶尙道誌(昭和 11年), 龍宮縣邑誌 1780, 朝鮮환輿勝覽 1929)


  이환 [記事] : 한국문집총간(091_157a) 학사집(鶴沙集, 1776)에 실린 학사 김응조(金應祖)의 기사로, 그 내용은, "鶴沙先生文集卷之七/ 墓碣銘/ 王子師傅李公墓碣銘 幷序/ 李氏籍驪州。高麗翰林學士諱璧以下世襲軒冕。至左贊成諱行。以文章鳴世。號騎牛子。入我朝。有諱曾碩。中和郡守。於公爲高祖。曾祖諱?。司導寺副正。祖諱元忠。贈工曹參議。考諱潤壽。贈漢城府右尹。就養於姑。居龍宮。??山柳氏。觀察使贈領議政諱仲?之女。以萬曆壬午生公。諱煥。字季明。少穎秀。不學而能屬文。內舅西厓先生奇愛之。授以古人爲學大方。沈潛墳典。日大以肆。中丙辰司馬。見昏朝政亂。卽廢擧。杜門讀書。聲譽著聞。仁廟朝。拜王子師傅。?除齋郞。皆不就。晩又除穆陵參奉。肅謝未幾辭歸。高蹈林泉。以終老焉。辛丑。感疾卒。明年二月。葬于縣南具美村靑山酉坐之原。嗚呼。公性剛行峻。見識高遠。才調超越。遇事游刃。恢然有餘地。人皆期以大用。惟其簡亢。?視一世。不屑意於進取。坐此齟齬。窮以卒。遠近嗟惜。於爲文。功力兼人。兒時有詠韓信詩。西厓先生大加歎賞。龍洲趙公絅聞之曰。文章手段也。嘗爲人作碣文。人以示澤堂李公植曰。此某人作也。李曰。勿?我。此古之文章大家也。其文藻見推於人如此。晩卜築蕪湖上。風詠自適。就其傍建書院。每杖?來往。展謁祠廟。退而靜坐看書。其自得之樂。人莫得以窺其涯際也。至於?窮恤舊。始終如一。特餘事也。前配東萊鄭氏。高麗僕射穆之後。考諱?。有子女俱夭。生丙戌歿戊申。葬安東松鷹里漆田洞丙向原。後配安東權氏。高麗太師幸之後。考諱克剛。生女。長適李時。生男曰瑄進士。卽壯公之行者。曰琓。次適郡守權搏。次適權。各有二男女。皆幼。生乙未歿壬午。葬尙州紆?谷亥向原。公以伯氏第三子長發後。生男?早夭。?之妻。以從兄萬元之子爲後。側室子曰長命。女適金尙重。銘曰。/ 文學祖述騎牛。德行矜式西厓。惟其行行而寡和。奈何時命之乖。具美山高兮水益淸。遺風剩馥兮垂無涯。/ 鶴沙先生文集卷之七"이다.(www.minchu.or.k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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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 때 왜적과 쌍령에서 싸우다가 순국하여 포상된 이희(李憙) : 旣載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하여 많은 전공 세운 임경국(林擎國)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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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종 때 원종공신이 된
  임계중(林繼仲) : 이조 태종 때, 예천읍 서본리 향사당골(城底里) 출신, 본관은 예천, 효자 즐(즐)의 아들, 자번(自蕃)의 아버지이다. 태종 때에 문과(文科, 혹은 武科)에 올라 주부(主簿)를 거쳐 단종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함안군사(咸安郡事), 영천(榮川, 현 榮州) 군수를 청렴결백하게 지냈고, 아들 자번(自蕃)의 귀(貴)로 형조 판서에 증직되면서 예천군(醴泉君)에 봉해졌다. 묘는 감천면 덕율리 덕율산 남향 신좌(德栗山南向辛坐)에 있고, 용문면 직리의 소원사(昭遠祠)에 제향되었다(襄陽誌 1661, 嶠南誌 1937, 醴泉郡誌 1939, 西河集, 永嘉誌 1602).


  [王朝實錄] : 1450년(문종 즉위년) 7월 27일 충주 판관(忠州判官) 부임 인사차 왕을 알현하였다. 1457년(세조 3) 2월 2일 이조(吏曹)에서 왕에게 함안 군사(咸安郡事) 임계중이 가자(加資)되었다고 왕에게 아뢰기를, "행함안군사(行咸安郡事) 임계중은 정난 3등공신인 임자번(林自蕃)의 아버지로서, 관등을 뛰어 올려 봉의랑(奉議郞)으로 임명하고, 또 봉직랑(奉直郞)으로 가자하여 임자번을 대신하여 아들이 관직을 맡도록 하고는 관등을 뛰어올려 통덕랑(通德郞)으로 임명했다가 또 조봉대부(朝奉大夫)를 가자했는데, 지금 또 조산대부(朝散大夫)를 가자했습니다. 임계중은 이미 임자번의 아버지로서 관등을 뛰어 올려 관직을 임명했는데, 또 임자번의 아들의 관직까지 대신 임명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1457년(세조 3) 8월 12일에는 왕이 의정부에 하교(下敎)하기를, "군사(郡事) 임계중 등은 원종공신 3등으로 녹훈하라."하였다.(文宗實錄, 世祖實錄)


  임계중 [記事] :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 간행년 : 2001/ 저자 : 안동문화원/ 발행처 : 안동문화원/ 1) 총묘(塚墓)/ 판서(判書) 임계중(林繼仲)의 묘 감천현(甘泉縣) 서쪽 덕율촌(德栗村)에 있다. 남향(南向)이다.(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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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민왕 때 탐라 정벌에 승리한 공이 있는
  임난수(林蘭洙) : 고려 공민왕 때, 본관은 예천, 춘(椿)의 증손자, 공종 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공민왕 때 탐라(耽羅) 정벌에 종사하여 승리한 공이 있었는데, 조선 초에 와서 절개를 지켰다. 공주 금강 위쪽 월봉(月峰) 아래쪽에 숨어살면서 독락정(獨樂亭)을 짓고 지내니, 이 태조는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한쪽 모퉁이의 강산을 내려주고 포상(褒賞)하였다. 세종 때 이 곳에 사당(祠堂, 篇額은 林氏家廟)을 세우고 글을 내려 제사지내게 하였다. 이는 <송문정공비기(宋文正公碑記)>에 실려 있다. 그 후에 기호사(岐湖祠)를 세워서 임춘(林椿)을 모시고 난수(蘭秀)를 배향하였다.(西河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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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리공신 전서를 지낸
  임대광(林大光) : 본관은 예천, 춘(椿)의 증손자, 좌리공신 전서(佐理功臣典書)를 지냈다.(西河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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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왕의 즉위를 신씨라고 반대하다가 순절한 임비(林賁)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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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리공신인
  임숙(林淑) : 본관은 예천, 춘(椿)의 손자, 좌리공신(佐理功臣)이었다.(西河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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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숙왕 때 공신인
  임연(林演) : 본관은 예천, 천봉(天鳳)의 2자, 고려 충숙왕 때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 되어 순창군(淳昌君)에 봉해져 순창 임씨(淳昌林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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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6년에 의병을 일으킨 임영창(林永昌)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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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347


  예천군문화회관(김관용 道知事, ''''김쌤'''' 김홍식 ''''오피니언리더 포럼'''' 特講) [記事] :


  경북 예천군(군수 김수남)은 2009년 1월 19일 예천문화회관 대강당에서 ''''Pride경북 실현''''을 위한 포럼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예천군에 따르면 지역 인적자원 개발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로 마련되는 이날 포럼은 김관용 경북도지사와 김수남 예천군수를 비롯해 1000여 명의 공무원과 오피니언리더, 주민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포럼은 김 지사의 도정전반에 대한 특강에 이어 ''''김쌤''''으로 유명한 방송인 김홍식의 ''''시대의 변화와 리더십''''이라는 주제의 강연으로 진행된다.


  아울러 예천군은 새 정부 국정비전과 과제이행 전력에 대한 인식을 공유, 지역발전의 촉매제 역할을 도모하는 방안도 함께 모색하게 된다.


  김수남 군수는 이날 인사말을 통해 참석자들에게 침체된 지역 경제 활성화에 앞장서 줄 것을 당부하게 된다.


  예천군 관계자는 "이번 포럼을 통해 주인의식을 가지고 예천을 꿈과 희망이 가득한 풍요로운 고장으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피재윤 記者 뉴시스 2009.01.19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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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목근(醴泉「稅金내는 나무」/ 天然記念物 400號 指定) [記事] : 자기 명의로 등기된 땅을 소유해 매년 토지세를 내온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문화관광부는 1998년 12월 23일 경북 예천군 용궁면 금원마을의 500년 된 팽나무 황목근을 천연기념물 400호로 지정, 발표했다. 마을 수호목인 이 팽나무가 땅을 갖게된 것은 지난 1948년. 주민들이 쌀을 모아 만든 돈으로 827평의 토지를 마련, 이 나무 앞으로 등기를 함으로써 토지 소유주가 됐다. 1978년과 1983년에도 임야 등을 구입, 이 나무 소유로 해 황목근이 현재 소유한 토지는 모두 1만2,046㎡(3,644평)이다.(신형준 記者 朝鮮日報 199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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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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