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곳은 군민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게재된 내용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제목자랑1825:예천충효24(祝옹골진잡곡.안영성等/예천방문351)
작성자장병창 @ 2009.01.23 07:34:57

  예천의 자랑(1825) : 예천 충효 24(附 예천농협 옹골진 잡곡, 전국 최초 잡곡 브랜드 사업대상자로 선정...축하합니다/안영성 전국한우협회 예천군지부장, 장관 표창...축하합니다/예천 출신 김수현, 중진공 강원본부장 피임...축하합니다/용문 출신 김정모, <지혜가 세상을 바꾼다> 발간...축하합니다/예천방문 351)


---


  이인좌의 난 때 앞장서 창의한
  정지박(鄭之박) : 1692(숙종 18)-1764(영조 40), 풍양면 포내(浦內) 출신, 자는 성원(聲遠), 호는 행정(杏亭), 본관은 동래, 이인좌의 난(1728) 때 앞장서 창의하였다.


---


  항일운동을 하여 애족장을 받은 정진화(鄭鎭華) : 旣載


---


  정유재란 때 신구차로 이순신을 백의종군케 한
  정탁(鄭琢) : 1526(중종 21)-1605(선조 38), 용문면 하금곡리 버들밭 삼구동제 청주 한씨 외가(三九洞弟淸州韓氏外家)에서 태어나 부친 따라 안동시 와룡면 지내리 가구촌(安東市臥龍面地內里佳丘村)으로 이사(1536), 백담 구봉령(栢潭具鳳齡)과 같이 금사사(金沙寺)에서 배웠고(1538), 중부 삼가현감 이흥(仲父三嘉縣監以興)에게 배웠고(1540), 퇴계 이황(退溪李滉)에게 배웠고(1542), 남명 조식(南溟曺植)에게도 배웠다. 1545년(인종 1) 부친 따라 다시 금당곡(金堂谷)으로 이사, 그 후 예천읍 고평리에서 살았다.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또는 백곡(栢谷), 시호(諡號)는 정간(貞簡), 본관은 청주, 현감 원로(縣監元老)의 증손, 학생 이충(以忠)의 2자, 연(璉)의 동생이다. 1548년(명종 3) 관물당 반충(觀物堂潘沖)의 딸과 결혼, 박학다식(博學多識)하여 경서(經書)는 물론, 역사, 천문, 지리, 병가(兵家), 상수(象數)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고, 특히 팔진육도법(八陣六蹈法) 등을 잘 하였다. 유성룡(柳成龍), 노수신(盧守愼)과 더불어 ''''영남 3대가(嶺南三大家)''''라고 불리어진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써 행하고, 지조가 맑아 50여 년 간의 벼슬길에서 조금의 실수도 없었고, 극심한 당쟁 속에서도 초연(超然)했고, 포용력이 있어 동인(東人)에 속하면서도 서인(西人)의 영수인 오음 윤두수(梧陰尹斗壽)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부모 사후(永感下)에 유학(幼學)으로서 1552년(명종 7) 식년 생원시에 3등 96위로 합격,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윤의정(尹義貞)과 같이 배웠고(1553), 1558년(명종 13)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 24위로 급제하였다. 인품이 유순하고 온후한 사람인데, 등과했을 당시에는 명망이 없어 오랫동안 교서관(校書館)에 머물러 있었다. 일찌기 향실(香室)에 숙직하던 날,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향을 가져다가 불공(佛供)을 드리려고 하자, 정탁이 불가한 일이라고 고집하면서 끝내 향을 올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당세에 중시되고 이어 현로(顯路)에 통하게 되었으며, 뒤에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숭품(崇品)에 오르고, 얼마 후에 재상(宰相)에 발탁되었다. 이에 상소하여 물러가기를 청하였으니 고인들의 치사하던 기풍이 있었다. 작위를 탐하여 늙어도 물러나지 않는 자에 비하면 차이가 크다. 서애 유성룡(西厓柳成龍)과 친하였다. 정탁이 예천으로 돌아와 있다가, 1605년(선조 38) 10월 1일에 집에서 병으로 죽었다. 


  [其他 記錄] : 벼슬길에서 거치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특히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여덟 번,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세 번을 거쳤다. 진하사(進賀使, 1581), 사은사(謝恩使, 1589)로 명(明) 나라에 내왕하면서 불가분의 대명 관계(對明關係)에 힘을 기울였다. 임진왜란(1592) 때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한 공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에 봉(封)해졌고, 우의정(右議政, 1595), 좌의정(左議政, 1600)을 지냈다. 73세에 기로사(耆老社)에 드는 영예를 얻었으나 이내 중앙 정계를 떠나 고향 예천으로 돌아와 고평리(高坪里)에 터를 잡았다. 이 때 그의 심정을 읊은 퇴거시(退去詩)에서 이르기를, "어려울 때를 구제하려고 글 배웠는데/ 이 풍진(風塵) 세상을 분주히 돌아다닌 지 몇 해던가/ 7년 대란(大亂)에 한 가지 계책도 없이/ 백발이 된 몸으로 고향을 찾으니 부끄럼만 남네/"라고 하였다. 고향에 돌아와서 고평동계(高坪洞契)를 만들어 주민을 교도하고 고평들을 개간하여 복지 증진에 힘썼다. 만년(晩年)에 조용한 시간을 얻은 그는 성리학(性理學)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정리할 각오로 <초록주서 (抄錄朱書)>와 <소학연의(小學衍義)>를 집필했으나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700년(肅宗 26) 향내 사림(士林)이 호명면 황지리에 도정서원(道正書院)을 세워 정탁(鄭琢), 정윤목(鄭允穆) 부자를 향사(享祀)하다가 고종 때 서원 철폐령을 받았으나 신기하게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았다. 보물로 지정된 영정(影幀), 용사일기(龍蛇日記) 등 많은 유품(遺品)이 1980년에 고평리에 세워진 약포유물각(藥圃遺物閣)에 보존되어 있다.


  정탁은 분교서관(分校書館, 1559), 보교서 정자(補校書正字, 1560)로 문정왕후(文定王后)의 공불사(供佛事)를 반대하였다. 성천 교수(成川敎授, 1561)가 되어 사제 간 예물주고 받음을 폐지하였고, 진주 교수(晋州敎授)로 옮겨 남명 조식(南冥曺植)에게 벽립천인기상(壁立千인氣像)을 본받았다. 박사(博士, 1564)로 호송관(護送官)에 근무하였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1565)으로 승진하고,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예조 정랑(禮曹正郞, 1566),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 1567), 병조 좌랑(兵曹佐郞), 예조 정랑(禮曹正郞),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동 부교리(副校理), 동 교리(校理)가 되었다. 1568년(선조 1)에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 병조(兵曹) 정랑을 거치고, 홍문관 수찬(1571), 이조(吏曹) 좌랑(1572), 이조 정랑(1573),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과 사인(舍人)으로 승진, 사복시 정(司僕寺正), 사헌부 장령(掌令), 사간원 집의(執義),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1574),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동 도승지(都承旨, 1575)로 올라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修撰官),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 상서원 정(尙瑞院正)을 겸하였다. 승정원 도승지(都承旨, 1576),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1577), 예조 참의(參議), 강원도 관찰사(觀察使), 승정원 도승지(1579)를 거쳐 사헌부 대사헌(1581)으로 정인홍(鄭仁弘), 이경중(李敬中)을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동지경연의금부사(同知經筵義禁府事),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官)이 되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흠경각(欽敬閣)을 감수(監修, 1582)하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을 거쳐, 겨울에 명(明)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명경(明京)에서 돌아와(1583) 대사헌, 공조 판서(工曹判書), 대사헌(大司憲), 예조 판서(禮曹判書, 1585), 대사헌(大司憲), 이조 판서(吏曹判書),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 대사헌(大司憲, 1586), 이조 판서(吏曹 判書, 1588), 병조 판서(兵曹判書, 1589),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겸하고 이 때에 일본 사신이 강화를 청함에 일본의 역적이 있을 것을 경고하고, 국방에 전력하였다.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를 정국(庭鞫)하고 가우의정(假右議政)이 되어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예조 판서(禮曹判書, 1590), 의정부 우찬성 겸 지경연춘추관사(議政府右贊成兼知經筵春秋館事, 1591),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내의원 제조(內醫院提造)로 4월 30일에 왕을 호가(扈駕), 강점(江店)에서 유숙(留宿)하고, 다음날 개성(開城)에 이르러 3일을 지나고 평양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평양 견수(平壤堅守)를 주장했으나, 6월 11일에 영변(寧邊)으로 떠났다. 분조(分朝)의 의(議)로 세자(世子)의 이사(貳師)가 되어 강계(江界)로 갔고, 7월 11일에 이천(伊川)으로 가고, 28일 밤에 풍벽현(風壁峴)을 넘어 성천(成川)으로 갔다. 8월 16일에 명 나라 칙사(勅使)를 맞았고, 23일에 비변사(備邊司)에서 회의하고 세자를 면대(面對)케 하였다. 25일에 안주(安州)로 갔다. 11월 11일에 숙천(肅川), 16일 용강산성(龍岡山城), 29일에 영변(寧邊), 1593년(선조 26) 1월 3일 안주(安州), 20일 정주(定州)에서 왕을 알현(謁見), 4월에 세자 호송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왕을 호가(扈駕), 숙천(肅川)으로 갔다. 6월에 호가(扈駕), 해주(海州)로 갔다.
  8월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지경연사(知經筵事), 세자 이사(世子貳師)가 되었고, 의주(義州)에서 명군(明軍)을 전송하고 명유 호환(明儒胡煥)에게 제왜지책(制倭之策)을 제시하였다. 11월에 임무를 마치고 평산(平山)을 거쳐 토산(兎山)으로, 11월에 환경(還京)하여 <용만견문록(龍灣見聞錄)>을 제출하고, 익일(翌日)에 다시 세자를 배행(陪行), 전주(全州)로 갔다. 1594년(선조 27) 봄부터 7월까지 세자를 모시고, 전주, 공주(公州), 홍주(洪州) 등지에서 군사를 조련(調鍊)하고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하였다. 8월에 공주로부터 환경(還京)하여 비변사(備邊司)에 근무하였다. 9월에 사직단(社稷壇) 수리를 계청(啓請)하고 이 무렵 많은 인재(人材)를 추천하였으니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권인용(權仁勇), 박명현(朴名賢), 홍경신(洪慶臣), 이광윤(李光胤), 성협(成浹), 정기남(鄭基南), 한백겸(韓伯謙), 안숭검(安崇儉), 오장(吳長), 최운우(崔雲遇), 유정(惟政), 이기옥(李璣玉), 양극선(梁克選), 금응훈(琴應壎), 홍춘수(洪春壽), 정경란(丁景蘭), 변홍달(卞弘達), 이영도(李詠道), 안몽설(安夢說), 남서(南瑞), 박이직(朴而直), 정몽헌(鄭夢獻), 박지인(朴至仁) 등이다. 이 때에 일본의 강화설(講和說)을 결사 반대 겁맹(決死反對劫盟)을 막았다. 11월에 경연관(經筵官)으로 입시 강의(入侍講義)하였다. 1595년(선조 28) 1월에 입시 강의(入侍講義)하고 이어 노수신(盧守愼) 정언신(鄭彦信)을 신원(伸寃)하였다. 2월에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자 5차나 사임하였다. 경연 진강(經筵進講)하였다. 황정욱 부자(黃廷彧父子)를 출옥(出獄)시켰다. 4월에 세자 섭정 반대(世子攝政反對)를 당일에 5차, 익일에 3차 또 명일(明日)에 재차하였다. 이항복(李恒福)으로 더불어 벽제관(碧蹄館)에서 사절(使節)을 맞아 설연(說宴)하고 남별관(南別館)에서 호가 다례(扈駕茶禮)를 행하였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596년(선조 29) 2월에 김덕령(金德齡)을 신구(伸救)하였다. 벽제관(碧蹄館)에서 명(明) 나라 사절(使節)을 위로(慰勞)하였다. 이몽학(李夢鶴)의 옥사(獄事)로 연금(軟禁)된 김덕령(金德齡)을 신구(伸救)코져 하였으나, 만시(晩時)로 불가하였다. 1597년(선조 30) 3월에 이순신(李舜臣)을 결사 신구(決死伸救)하였다. 수륙병진 협공지책(水陸竝進協攻之策)을 올렸다. 기로사(耆老社)에 입사(入社, 1598), 1599년(선조 32) 4월에 세자를 배행(陪行), 수안(遂安)에서 왕후(王后)를 모셔 환경(還京)하였다. 1600년 2월에 좌의정(左議政), 1601년(선조 34) 호종공신(扈從功臣) 일품록(一品錄)이 하사(下賜)되었다. 4월에 고평동계약문(高坪洞契約文)을 마련, 호명면 황지리에 읍호정(읍湖亭)을 세우고, 12월에 옥동서원기(玉洞書院記)를 썼다. 1603년(선조 36) 4월에 벼슬에서 사임하기를 청했으나 6월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오르고 허가되었다. 문경시 가은면 아차산(聞慶市加恩面阿次山) 아래 용유동(龍遊洞)에 노닐었다. 1604년 9월에 충훈부(忠勳府)에서 화사(畵師)를 보내어 도상(圖像)하고 11월에 화상축(畵像軸)이 내렸다. 1605년 1월에 하사품(下賜品)을 진사(陳謝)하였고, 5월에 충훈부(忠勳府)에서 당청단 당력(唐靑段唐曆) 등이 내렸다. 9월에 고평리(高坪里)에서 병상(病床)에 눕게 되어 19일에 별세(別世)하니, 왕이 3일 간 철시(撤市)를 지시하였고, 왕은 예조좌랑 조정(禮曹佐郞趙靖)을, 세자는 문학 유성(文學柳惺)을 보내 치제(致祭)케 하고, 귀후서관(歸厚署官)으로 치상(治喪)케 하고, 승문원 관(承文院官)으로 제주(祭主)케 하여 1606년 2월에 예천군 남면 위라곡 곤향지원(南面位羅谷坤向之原)에 안장되었다. 그 후 호종(扈從) 3등, 위성(衛聖) 1등공신에 녹(錄)하고, 증 영의정(贈領議政), 정간(貞簡)의 시호(諡號)와 어제화상찬(御製畵像贊)이 내리고 향현사(鄕賢祠)와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입사(立祠)되었다. 1968년 12월 19일에 영정(影幀)이 보물 제487호, 유고(遺稿)와 문서(文書) 및 유물(遺物)은 보물 제494호로 지정되었고, 사당(祠堂)은 문화재자료(文化財資料)로 지정되었고, 1979년 국가에서 유물각(遺物閣) 및 정충사(靖忠祠)를 세웠다.


  [行蹟] : 처음에 교서관 교서(校書館校書)로 임명되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불우함을 말하였으나, 그는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다. 뒤에 옥당(玉堂)을 거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1566,10.4 1567.5.11), 형조 좌랑(刑曹佐郞, 1567.6.15), 헌납(獻納)을 거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서 지제교(知製敎)와 경연시강관(經筵侍讀官),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직하여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이이(李珥), 이황(李滉), 황윤길(黃允吉), 정철(鄭澈), 유성룡(柳成龍) 등과 함께 참여했다. 이조 좌랑(吏曹佐郞), 동 정랑(正郞), 응교(應敎)를 지내고, 1581년(선조 14)에 대사헌(大司憲) 때 장령 정인홍(掌令鄭仁弘), 지평 박광옥(持平朴光玉) 등과 뜻이 달라, 사간원(司諫院)의 계청(啓請)으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전임(轉任)되었고, 진하사(進賀使)로 명(明) 나라를 다녀왔고, 이듬해 다시 대사헌(大司憲, 1583.윤2.9)에 임명되고, 1587년(선조 20) 12월 9일에 임금이 내의원제조 정탁(內醫院提調鄭琢)에게 아다개(阿多介) 1좌를 하사(下賜)하였다. 1589년 우찬성(右贊成)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다시 명(明) 나라에 다녀오면서 임진왜란(壬辰倭亂) 직전의 외교(外交)에 힘을 썼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중 좌찬성(左贊成)으로 선조(宣祖)를 의주(義州)까지 모셨고, 1593년(선조 26)에 영위사(迎慰使)가 되어 명(明) 나라의 장수(將帥)들을 영접(迎接)했고, 계속 그들과 사귀면서 전란(戰亂) 중의 국교(國交)에 노력하고 명(明) 나라 군사(軍士)의 진중(陣中)을 돌면서 그들의 사기(士氣)를 높이고 독전(督戰)하였다. 우의정(右議政, 1594)이 되어 이순신(李舜臣), 곽재우(郭再祐), 권언호(權彦浩), 김덕령(金德齡), 유정(惟政) 등의 장재(將才)를 천거하였다. 1597년 2월 당쟁의 희생으로 모함에 빠진 이순신이 서울로 잡혀 와 죽음에 직면했을 때 혼자 끝까지 그의 출중(出衆)한 무예(武藝)와 인격을 논하며 다시 종군(從軍)시키라고 역설하며 목숨을 구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시켜 정유재란(丁酉再亂, 명량대첩)에서 큰 공을 세울 수 있게 했으니, 이것이 유명한 신구차(伸救箚)이다. 이보다 한 해 앞서 의병장 김덕령(義兵將金德齡)이 모함에 빠졌을 때도 처형 직전에서 목숨을 구해 주었다. 1600년(선조 33) 좌의정(左議政),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1603)가 되어 전후 수습에 온 힘을 기울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鄕里)로 돌아와서는 고평동계(高坪洞契)를 만들어 사회 풍교(社會風敎)의 확립에 힘을 기울였고, 고평들을 개척하여 향토 주민의 복지 증진에 힘을 쏟았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封)해졌고, 봉조하(奉朝賀)에 이른 후 기사(耆社)에 들었다. 1604년(선조 37) 9월 왕명으로 충훈부(忠勳府)가 화사(畵師)를 보내어 초상화(肖像畵, 影幀)를 그리게 하고, 그 해 11월에 화상축(畵像軸)을 하사했는데, 이 영정(影幀)은 보물 제487호로 지정되어 있다. 1605년 80세로 타계하니, 선조는 3일 간 조회(朝會)를 폐하고 슬퍼하며 제문(祭文)을 내려 애통해 했다. 호명면 황지리의 도정서원(道正書院)과 고평리(高坪里)의 정충사(靖忠祠)에 모시고, 유물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정충사(靖忠祠) 유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613년(광해군 5)에 위성공신(衛聖功臣) 1등에 등록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다. 1635년(인조 13) 8월 1일에는 정간(貞簡)이란 시호(諡號)가 내리어졌다. 1756년(영조 32)에 왕이 약포영정(藥圃影幀)을 보고 약포 정탁(藥圃鄭琢)의 후손인 황해도관찰사 정옥(黃海道觀察使鄭玉)을 입시(入侍)시켜 화상찬(畵像讚)을 내렸다. 저서로 <약포집(藥圃集)>, <용만견문록(龍灣見聞錄)> 등이 있다. 


  [鄭琢의 墓] : 안동시 풍산읍 오미동(安東市豊山邑五美洞) 166번지 위라곡(位羅谷, 옛 醴泉郡 位羅谷面 새랄)에 있는 정탁(鄭琢)의 무덤으로, 1605년(선조 38) 9월, 80세로 천수(天壽)를 다하니, 선조(宣祖)는 부문진도(訃聞震悼)하여 철조 3일(輟朝三日)하고, 도민(都民)이 파시조곡(罷市弔哭)하였다. 왕과 세자는 각각 승지와 궁관(宮官)을 보내 임조(臨弔)하였고, 이어서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치제(致祭)하였다. 승문원 관(承文院官)으로 하여금 제주(祭主)케 하고, 1606년(선조 39) 2월 21일 국장(國葬)의 예(禮)로써 위라곡 간좌(位羅谷艮坐)에 안장(安葬)되었다. 둘레 29.4m, 직경(直徑) 9.52m, 높이 2.55m이다. 묘비(墓碑)의 총 높이는 2.23m, 비신(碑身)의 높이는 1.47m, 가로 0.73m, 두께 0.3m, 비(碑) 머리 높이 0.57m, 가로 1.95m, 두께 0.55m, 기단석(基壇石)은 가로 1.18m, 세로 0.8m이다.


  [壬辰倭亂] : 이순신(李舜臣), 곽재우(郭再祐), 정언신(鄭彦信), 승 유정(僧惟政) 등 탁월한 장재(將才)를 천거하여 뒷날에 나라에 큰공을 세우게 했고, 칠순(七旬)의 늙은 몸으로 좌찬성(左贊成)으로서 몽진(蒙塵)하는 선조(宣祖)를 따라 서울을 등지고 개성(開城)을 거쳐 평양(平壤)으로, 평양에서 다시 영변 철옹(寧邊鐵瓮)까지 호종(扈從)했다. 그리고 철옹(鐵瓮)에서 분조지의(分朝之議)가 결정되어 군국대권(軍國大權)을 세자 광해군(世子光海君)에게 맡기고, 선조(宣祖)는 의주(義州)로, 세자는 강계(江界)로 헤어져 피란하기로 할 때 왕명을 받아 세자의 이사(貳師)로서 초숙우찬(草宿雨餐)으로 강계로(江界路)를 들다가 다시 춘천로(春川路)로 고쳐 이천(伊川), 이천에서 영변(寧邊)으로 임기 처변(處變), 결책 보필(決策輔弼)하면서 전전 피란(轉轉避亂)하여 불측(不側)의 변을 면케 한 피란 중 수훈(垂訓)은, 그의 <용사일기(龍蛇日記)>를 통하여 역역히 알 수 있다. 영위사(迎慰使, 1593)로서 명 나라에 경로 송응창(經略宋應昌), 제독 이여송(提督李如松) 등과 교유(交遊)하여 전시(戰時)의 대명 외교(對明外交)에 노력했고, 때로는 명군 진중(明軍陣中)을 누비며 그들의 사기를 드높여 싸움을 제촉했다. 서울이 수복된 후에는 잔위사(餞慰使)로서 의주(義州)에 나아가 돌아가는 명군(明軍)을 위무(慰撫)했다. 1593년 10월에는 <용만문견(龍灣聞見)>을 왕께 복명(復命)하고 영호남(嶺湖南)에 내려가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여 교련하고 난민을 보살폈다. 1596년에 김덕령(金德齡)이 금부(禁府)에 갇히는 몸이 되었을 때 정탁(鄭琢)은 힘써 구출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이 일어나자 정탁은 다시 싸움터에 나가려 했으나 선조(宣祖)는 그의 연로(年老)함과 중신(重臣)의 위치를 아껴 만류(挽留)했다. 1597년 2월, 원균(元均)의 모함(謀陷)으로 이순신(李舜臣)이 하옥(下獄)되었을 때 7차에 걸친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 치열한 당론이 두려워 중신(重臣)들은 입이 있으되 입을 열지 못하던 그 때 유독 정탁만은 죽음을 무릅쓰고 나서서 신구차(伸救箚)와 의혈상소(義血上疏)를 올려 경각에 달린 이순신의 생명을 살려내어 뒤에 장열한 큰공을 세워 그로 하여금 국가 민족을 구출할 수 있게 했다. ㅇ 그의 나이 72세,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이 일어나자, 다시 몸소 전장(戰場)에 나가 사기(士氣)를 북돋우고자 하였으나, 왕이 그의 연로(年老)함을 들어 만류(挽留)하였다. 그해 가을 중궁전(中宮殿)과 묘사주(廟社主)를 따라 해서(海西)를 향하여 신계현(新溪縣)에 이르렀다. 다시 소명(召命)을 받아 동궁(東宮)과 함께 환경(還京), 이렇게 거의 천리 원정(遠程)의 치구(馳驅)를 불사(不辭)하였다. 그가 이순신을 신구(伸救)한 것도 바로 정유년(丁酉年, 1597) 7월의 일이었다.


  [伸救箚] : 정탁이 이순신의 하옥(下獄) 때 이를 신구(伸救)코자 올린 차자(箚子)이다. [箚文] : 엎드려 아뢰옵니다. 이순신이 대죄를 범하여 죄명이 지엄한 데에도 성상(聖上)께서 즉시 죽이지 않으시고 일단 심문을 마친 후에 다시 엄격히 추궁하기를 허락하시니, 비단 죄수를 다스리는 사체(事體)가 그러할 뿐 아니라, 성상의 인(仁)을 주장하는 생각으로 기어이 실상을 구명하여 혹시 살릴 도리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성상께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택이 죄가 있어 반드시 죽게된 자리에까지 미치시니, 신(臣)은 지극한 감격을 이길 수 없습니다. 신이 일찍 위관(委官) 죄인을 국문(鞫問)하는 관직으로서 죄수를 문초(問招)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오나, 대개 죄인은 한 번 심문을 거치면 쓰러지는 자가 많아 그 간에 무죄한 사실이 발각될지라도 이미 죽은 사람을 다시 어찌할 수 없으므로, 신은 항상 이를 애석히 여기는 바이었습니다. 지금 이순신도 일차의 심문과 형벌을 거쳤으니, 만일 다시 형벌을 더한다면 엄혹(嚴酷)한 형벌로 반드시 살기를 바랄 수 없으므로 성상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본의가 손상될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임진왜란 초에 왜선(倭船)이 바다를 덮고, 적세가 충천하던 날 국토를 수비하던 신하는 성을 버리고 도주한 자가 많았고, 국방을 전담한 장수는 군대를 보전한 이가 적었고, 정부의 명령이 사방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이때 이순신이 주사 해군(舟師海軍)을 거느리고 원균(元均)으로 더불어 적(敵)의 칼날을 꺾어버림으로 해서 국내 인심이 겨우 생기(生氣)를 얻게 되어 의사(義士)들은 용기를 돋구었고, 적에게 붙었던 자도 마음을 돌렸으니 그 공이 실로 거대하였습니다. 정부에서도 이를 가상히 여기어 관위(官位)를 높이고 통제사(統制使)의 칭호를 하사하였으니, 당연한 조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순신은 대장이므로 나아갈 만함을 보고야 나아가므로 시기를 잃지 않고 능히 주사(舟師)를 통솔하여 크게 위세를 떨쳤으니 전쟁에 임하여 피하지 않은 용맹이 원균(元均)에게도 있다고 하나, 필경 적을 함몰(陷沒)한 공은 이순신도 원균에게 그리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때에 원균에게도 그만큼 공이 없지 않았으나 정부의 은전(恩典)이 오로지 이순신에게만 내리고 원균에게는 부족하였으므로 경향간에서 지금껏 칭원하고 있으니 과연 애석한 일입니다. 원균이 주사(舟師)를 통솔하는 재주에 장점이 있고, 천성이 충실하여 일을 당하면 피하지 않고 충돌을 잘 하므로 두 장수가 협력하면 적을 파(破)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매양 어전에서 이 일을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양장(兩將)이 서로 불화한다고 해서 원균을 교채하고 이순신으로 주사(舟師)를 전담케 하였던 바 그는 과연 방비에 능숙하고 부하의 용사가 즐거이 쓰임으로 해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군용(軍容)이 여구하니, 왜적이 우리 주사(舟師)를 겁내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의 변방을 진압한 공이 이와 같은 데에도 혹자는 이순신이 한 번 공을 세운 후에는 다시 내세울 만한 공이 없다고 대단히 여기지 않는 이도 있으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4-5년 래(來)로 중국 장신(將臣)들은 강화를 주장하고, 중국 정부는 동봉(東封, 豊臣秀吉을 日本 王으로 封함)한다는 의론이 다시 일어나 우리나라 대소 제장(大小諸將)은 그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으니 이순신이 다시 힘을 쓰지 못한 것도 그의 죄는 아닙니다. 근일 왜적이 다시 침입할 때 이순신이 미쳐 주선하지 못한 것은 그 간 정세의 변동으로서 왠고하니 지금 일선 장령(將領)의 행동이 반드시 정부의 명령을 기다려야 하였고, 대장이 전단(專斷)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왜적이 바다를 건너오기 전에 정부의 비밀 교서(敎書)가 적당한 시기에 전달된 여부도 알 수 없고, 해상의 풍세 순역(風勢順逆)과 뱃길의 편불편(便不便)도 또한 알 수 없었고, 주사(舟師)의 분번(分番)하는 것도 부득이한 사정은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자효(自效)하는 장계(狀啓)에 자세히 기록되었고, 주사(舟師)가 위급한 시기에 진력하지 못한 것은 그 간 사세(事勢)가 그러하였으니, 모든 책임을 이순신에게만 돌릴 수 없습니다. 전일(前日) 보고에 진술한 사건은 매우 허망하여 극히 해괴한 듯하나 부하의 과장된 말이라면 중간의 불찰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순신이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감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해석할 수 없습니다. 대저 난리 첫 무렵에 군공(軍功)을 기록한 보고가 사실대로 일일이 기록하지 않고, 남의 공을 자신의 공으로 만들어 정부를 기망(欺罔)한 죄를 다스린다면 이순신인들 또한 무슨 변명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 완전 무결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자타가 경쟁하는 마당에 남보다 선등(先登)하려는 마음이 없는 자가 별로 없고, 어름어름하는 사이 잘못되는 일도 있으니, 특히 윗사람이 범법(犯法)의 대소를 살피어 경중을 가려 처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대저 장신(將臣)은 군민(軍民)의 생명과 국가 안위에 중대한 관계가 있으므로 자고로 제왕들은 국방 책임을 위임하게 되면 특별히 은전(恩典)과 신의를 베풀어 중대한 과오가 아니면 절대로 보호하여 임무를 다하게 하는 그 의도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릇 인재는 국가의 보배이므로 비록 통역관이나 산학가(算學家)라 할지라도 기예(技藝)가 있다면 이들을 애중히 여기거던 하물며 대장의 재질을 구비한 자로서 적을 막는데 가장 필요한 인물을 법에만 맡겨 두고 용서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순신은 실로 대장의 자격이 있고, 육해전(陸海戰)에 능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이러한 인물은 쉽사리 얻을 수 없습니다. 전선(戰線) 지대에 있는 백성들의 촉망하는 바요, 왜적의 두려워하는 바임에도 죄명이 지엄(至嚴)하다 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공죄(功罪)의 상쇄(相殺)도 불문에 부치고 능력의 유무도 고려하지 않고 서서히 진상도 구명하지 않고, 덮어 높고 큰 벌을 내리게 되면 유공(有功)한 자와 유능한 자가 더욱 힘을 쓰지 않게 되어, 비록 원균(元均)과 같이 악감(惡憾)을 품은 자도 안심하지 못할 것이고, 내외 인심도 다같이 해이하게 될 것이니, 이는 실로 위험한 현상으로서 한갖 왜적의 다행이 될 뿐입니다. 일개 이순신의 죽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지극히 중대하니, 어찌 큰 걱정이 아니겠습니까? 옛날에도 대장을 교채하지 않고 마침내 대공(大功)을 세우게 한 이는 진목공(秦穆公)이 맹명(孟明)에게 한 바와 같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신은 멀리 인증(認證)할 것이 없고, 다만 성상의 근일 사건으로 볼지라도 박명현(朴名賢)은 일시의 맹장(猛將)으로서 일찍 국법에 저촉된 바 있었으나, 정부에서 특히 그 죄를 용서하였던 바 얼마 안되어 충청도의 변란(李夢鶴 亂)이 일어나 기축년(己丑年, 鄭汝立亂)보다 더 심하였으나 명현(名賢)이 즉시 이를 평정하여 국가에 큰공이 있었으니, 허물을 용서하고 책임을 완수하도록 한 것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순신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빠져 거의 십악(十惡)을 범하였으니, 죄명이 지중(至重)함은 성상의 말씀과 같사옵고, 이순신도 역시 공론이 지엄하고 형벌이 두려워 생명을 보전할 가망이 없음을 알 것입니다.


  비옵건대 은명(恩命)을 내리어 문초와 형벌을 덜어 주시고 공을 세워 보답하게 하시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 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보답할 뜻이 명현(名賢)만 못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 성상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공신각(功臣閣)에 초상(肖像)을 걸 사람이 어찌 오늘 죄수 속에서 일어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성상의 장수를 통솔하고 인재를 등용하는 도리와 공효(功效)를 참작하는 제도와 허물을 고치고 반성하게 하는 길을 열어주는 은전(恩典)이 다같이 이루어지게 되어 성상의 난리를 평하는 정치에 어찌 도움이 적다고 하겠습니까? 신이 금부(禁府)의 수의(收議) 때에 충정(衷情)을 개진(開陳)한 바 있으나, 군신(群臣)의 논의에 부합되지 않을 뿐 아니라, 말로서 의사를 다 표현할 수 없어 우신(愚臣)의 천려일득(千慮一得)이 혹 성상의 채택되시는 바 있을가 하여 감히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지나간 말을 다시 아뢰어 성심을 표하옵고, 성상의 하교(下敎)하심을 기다리오니 만일 신의 어리석은 말이 조금이라도 국가 대사(大事)에 천분지일(千分之一)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신은 만 번 죽더라도 오히려 다행한 일이옵니다. 신이 독감에 걸리어 20일이 경과되었으나 아직 쾌하지 못하여 직접 궐하(闕下)에 나아가 뵈옵지 못하옵고, 삼가 차문(箚文)을 올려 성덕(聖德)을 번거롭게 하오니, 죽을죄를 더한 듯 하옵니다.


  [鄭琢의 高坪洞約] : 정탁이 벼슬길을 물러나 고평리(高坪里)에 돌아와서 만든 향약(鄕約)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힘써 지켜야 할 사항(勤勉條) ① 임금(國家)을 섬김에 애국심을 갖고 충성을 다 합시다(事君盡忠). ② 어버이를 섬김에 지성으로 효도를 다 합시다(至誠事親). ③ 국난이 있으면 내 한몸을 나라와 겨레 위해 바칩시다(忘身殉國). ④ 외적의 침략이 있을 때는 떨쳐 일어나 물리칩시다(倡義復讐). ⑤ 능력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여 예우합시다(貴貴尊尊). ⑥ 나이 많은 분을 어른으로 존경합시다(老老長長). ⑦ 이웃과 다정하고 친척끼리 화목합시다(睦隣和族). ⑧ 공익을 앞세우고 사익(私益)을 뒤로 돌립시다(先公後私). ⑨ 납세의 의의를 바로 알고 자진 납부합시다(伸納賦稅). ⑩ 정의의 실현에는 용감합시다(勇於爲義). ⑪ 남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맙시다(秘發陰私). 2) 행해서는 안될 사항(禁制條). ① 국가시책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함부로 논하지 맙시다(忘議調整是非). ② 지방 행정 시책의 득실(得失)에 대하여 가벼이 논하지 맙시다(輕論州縣得失). ③ 젊은 사람이 어른을 능멸이 얕봐서는 안 됩니다(以少凌長). ④ 권세나 실력이 있다 해서 약자를 능멸이 얕봐서는 안 됩니다(以强凌弱). ⑤ 척당(戚黨) 간에 불목해서는 안 됩니다(親戚不睦). ⑥ 이웃 간에 불화해서는 안 됩니다(隣里不和). ⑦ 모든 행정 법규를 어겨서는 안 됩니다(違犯官令). ⑧ 관(官)의 장을 업수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侮만長上). ⑨ 불우한 사람을 모른 체하여 돌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不救急難). ⑩ 산림을 함부로 벌채해서는 안 됩니다(천伐柴林). ⑪ 남의 묘소가 있는 산야에서 나무를 해서는 안 됩니다(천상近墓). ⑫ 남의 전답에 가축을 방사(放飼)해서는 안 됩니다(放牧禍家). ⑬ 남의 땅을 함부로 침식해서는 안 됩니다(侵占田疆). ⑭ 술에 취해 떠들석하거나 경거망동(輕擧妄動)에서는 안 됩니다(從酒喧競). ⑮ 남과 싸우며 욕지걸이를 해서는 안 됩니다(驅鬪첨言). 16 모임에 늦게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期會晩到). 17 사회 활동에 참여 의식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無緣不參).


  [人品] : 성품과 기절(氣節)이 청명(淸明)하여 신의(信義)를 지켜서 벼슬길 50년에 추호의 차질이 없었던 학덕을 겸비한 대인(大人)이었다. 성실과 신뢰로서 공사(公事)를 처리했고, 국사(國事)를 논할 때에는 매양 원리와 대체(大體)를 견지하여 당파를 초월했고, 언제나 멀리보는 눈으로 근공소리(近功小利)를 구하지 않았다. 당적(黨籍)은 동인(東人)면서도 서인(西人)의 영수 오음 윤두수(梧陰尹斗壽)와는 매우 친분이 두터웠으니 그의 원만한 대인 관계를 알 수 있다.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오는 정탁을 한강변에서 전송하는 윤두수의 송별시(送別詩)가 남아 있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날 밤 산방(山房)에서 정탁이 시로써 이르기를, "북두칠성이 하늘에 있음으로 천하가 우러른다"라고 하니, 그와 친근한 설월당(雪月堂)이, "파도가 바다를 몰아치니 바다 속이 놀란다"라고 하였는데, 이 시에서 정탁의 그릇과 포부를 짐작할 수 있다. 정탁이 교서 정자(敎書正字)로 있을 때 섭정하던 문정왕후(文貞王后)가 불공을 위해 궁중의 향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림에 궁중에서 쓰는 향을 궁 밖으로 가져갈 수 없다 면서 그 명령을 거절하여 물의를 빚을 정도로 부조리에 냉엄했다.


  [詩] : 정탁의 시론(詩論)과 시 작품은 <약포유고(藥圃遺稿)>에 있는데, 권(卷)1의 ''''난전습유록(亂前拾遺錄)''''에 시 85수(首), ''''난후습유록(亂後拾遺錄)''''에 시 24수가 있다. 권2는 ''''병신잡고(丙申雜稿)''''의 편명(篇名)으로 시 133수, ''''난후도망록(亂後悼亡錄)''''의 편명으로 만시 50수, 권3은 ''''송도잡영(松都雜詠)''''의 편명으로 시 47수, 권5,6은 잡저(雜著)로 서(序), 발(跋), 묘갈명(墓碣銘) 각 1편, 제문(祭文) 6편, 계(啓) 2편, 서(書) 6편, 찬(贊) 잔(盞) 각 1편, 권7은 부록으로 만사(輓詞), 제문(祭文), 가장(家狀),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묘지(墓誌), 유사(遺事)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난전습유록(亂前拾遺錄)''''의 시는 임진왜란(1592) 전에 지은 것들이다. 호당(湖堂)에 있을 때 고봉 기대승(高峰奇大升), 율곡 이이(栗谷李珥), 송강 정철(松江鄭澈) 등과 교유하면서 수창(首唱)한 시가 많다. 그밖에 연안제영(延安題詠), 백마강(白馬江), 석성제영(石城題詠) 등 지방장관을 지낼 때 지은 서경시(敍景詩)가 대부분이다. ''''난후습유록(亂後拾遺錄)''''의 시 중에는 왜군에게 점령 당하였던 삼경(三京)이 수복(1592)되어 그 기쁨을 시화(詩化)한 것도 있다. ''''난후도망록(亂後悼亡錄)''''의 만시(輓詩)에는 송상현(宋象賢), 유팽로(柳彭老), 영규(靈珪), 변응정(邊應井) 등 임진왜란 때에 전사(戰死)한 충신들에 대한 것이 많다.
  [書] :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과 주고받은 것이 대부분인데, 대개 짤막한 안부 내용이다. 연세대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밖에 <용사일기(龍蛇日記)> 등 보물로 지정된 것들도 있다.


  [鄭琢에 對한 傳說] : 1) 불을 켜지 않는 밤에도 편지를 쓰던 시력 : 약포 대감(藥圃大監)의 어린 시절, 겸암 유운룡(謙岩柳雲龍) 선생은 일찍부터 정탁이 국가에 크게 공헌할 인물임을 알았다. 유운룡 선생의 아우인 서애 유성룡(西厓柳成龍) 대감은 정탁보다는 16년이나 손아래이어서 정탁의 인물됨을 잘 알아보지 못하였다. 유운룡 선생은 아우에게 정탁의 비범함을 알려 주기 위하여 어느 날 오후, 늦게 아우인 유성룡이 보는 앞에서 밝은 낮에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가늘고 잔 글씨로 편지를 써서 하인에게 주면서, "이 편지를 예천 고평에 있는 정탁에게 갖다 드리고 그 답장을 받아서 오늘밤까지 돌아오너라." 라고 일렀다. "형님, 그렇게 가는 글씨로 된 편지를 등촉을 아무리 밝혀도 읽기조차 힘들텐데, 그 답장까지 받아오라고 하시니, 이상한 분부십니다."라고 하며, 유성룡이 그 형님 유운룡에게 말하였다. "정탁은 밤중이라도 그 편지를 알아볼 것이고, 답장도 쓸 것일세." 라고 하며, 빙그레 웃었다. 과연, 밤중이 될 무렵 고평에 갔던 하인이 정탁의 답장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돌아온 하인에게 유운룡은, "정탁이 네 편지 받아 어떻게 하더냐?" 라고 물으니, "고평에 도착하니, 해가 넘어가서 어두운데 방 가운데서 촛불도 켜지 않고 편지를 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이 답장을 써 줍디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유성룡은 정탁이 초인적인 인재임을 깨닫고, 더욱 친분을 두텁게 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의 그 어려운 시기를 같이 손잡고 헤쳐나갔다고 한다.


  2) 도량이 넓은 시에 콧대 꺽인 맏동서 : 정탁이 젊었던 시절, 그 맏동서되는 사람이 아우 동서인 정탁이 몸집이 작음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이 눈치를 안 그들의 장인되는 십독 반사형(習讀潘士泂)이라는 분은 지혜롭고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다. 둘째 사위인 정탁의 큰그릇임을 알고 있는 터이기 때문에 맏사위에게 정탁이 큰그릇임을 알려주기 위하여, 짐짓 모른 채하고 있다가, 하루는 갑자기 두 사위를 불러 앉히고, 등잔불을 보고 일곱 글자의 시를 지으라고 했다. 당시의 등잔불은 산초 기름을 접시에 붓고 심지를 만들어 불을 켰을 때이다. 맏사위는, "흰 용이 구슬을 몰고 강을 건너온다(白龍含珠渡江來)"라는 시를 지었다. 흰 용은 솜으로 된 심지요, 구슬은 불꽃이며, 접시를 강에 비유하여 지었다. 정탁은, "모든 나라의 성안에는 한 나라의 깃발이 꽂혔다.(萬國城中 揷漢熾)"라는 시를 지었다. 모든 나라 성안은 기름이 담긴 접시 속이며, 깃발은 심지에 불이 펄럭이는 모습이다. 이렇게 배포가 큰 시를 지었다. 이윽고, 아우 동서가 지은 시를 들여다보던 맏동서는 깜짝 놀랐다. 기름이 담겨진 조그만 접시를 자신은 강으로 밖에 못 보는데, 정탁은 천하로 보는 데는 그 도량과 포부가 얼마나 크고 넓은 지 그만 질려 버려서 그 다음으론 정탁을 마음 속으로 존경하며 따랐다고 한다.


  3) 큰 인물임을 알아맞춘 명 나라 관상쟁이 : 정탁이 체약(體弱)하고 키도 매우 작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이런 일화가 있다.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 나라 천자를 만나러 궁중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키가 너무 작아서 초라하게 보일까 염려가 되어, 신을 한 치 정도 높여서 본래의 키보다 한 치가 높게 만들어 신고서 궁중으로 들어갔다. 이 때, 천자를 호위하고 있던 한 사람이 정탁을 얼핏 곁눈질하여 보더니, "조선에서 사신으로 온 저 사람은 키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재상 감인데 아깝구나." 라고 하였다. 이 말을 귓전으로 엿들은 정탁은 다음 날, 명 나라 궁중에 들어갈 때는 높였던 신을 다시 낮추어 본래의 키대로 들어갔다. 어제 호위하고 있던 그 사람이 무릎을 탁 치면서, "그러면 그렇지! 과연 조선 사신 정탁은 큰 인재임에 틀림없구나." 라고 하더라는 얘기가 전하고 있다.


  4) 초립동을 업어 건네 준 정탁 : 그가 낙향(落鄕)하여 고평(高坪)에 살던 말년의 이야기이다. 그는 가끔 내성천(乃城川)에서 낚시를 즐기곤 했었다. 그 날도 저녁 해가 넘어갈 무렵 내성천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어디서 온 초립동이 그를 몰라보고 그를 불렀다. "저기 낚시하는 노옹(老翁)! 저 건너에 정탁 선생이 사는가?" 라고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그의 대답. "내가 정탁 선생에게 볼 일이 있어 가는데, 나를 좀 업고 건네 주게나."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검소하기 이를 데 없는 그는 그 날도 허름한 촌로(村老)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는 어처구니없었지만 태연하게 그 초립동을 등에 업고 물을 건너기 시작했다. 내성천을 거의 다 건너갈 무렵 초립동은 다시 그에게 물었다. "요새, 정탁 선생은 무슨 일로 소일하던가?" 그는 다시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요사이는 낚시를 즐기다가 초립동도 업어서 물을 건네 준답니다." 하고는 초립동을 강기슭에 내려놓는 게 아닌가! 초립동은 그만 아연하여 죽을죄를 지었다고 사죄했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


  5) 정탁의 체온(體溫) : 정탁은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냉방에서 이불을 덮지 않고 잤다고 한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유성룡(柳成龍)이 정탁과 하룻밤 함께 잘 기회를 만들었다. 한겨울, 불끼라곤 전혀 없는 냉방에 더구나 이불도 없이 누었으니 춥다기 보다 이가 덜덜 떨려서 한참도 배기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정탁은 유성룡에게 자기와 자리를 바꾸자고 하였다. 유성룡은 정탁의 누었던 자리에 바꾸어 누으니, 그 자리엔 불을 땐 방보다 더 뜻뜻하였다. 얼마 후 유성룡이 누은 자리가 되 식을 무렵이 되면 정탁은 또 자리를 바꾸자고 하였다. 번번이 정탁이 누었던 자리는 따뜻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자리를 세 번씩이나 바꾸어가며, 길고 긴 겨울밤을 이불도 없는 냉방에서 따뜻하게 새웠다고 한다.


  6) 전화(戰禍)를 피하기 위해 부모를 베로 묶어 생명을 구한 정탁의 효 : 정탁이 충주 현감(忠州縣監)으로 있을 때였다. 11월 어느 날, 정탁은 천기(天氣)를 보며 깜짝 놀랐다. ''''아뿔사, 큰 일이 날 징조로구나!'''' 그는 곧 동헌(東軒) 마당에 나졸들을 불러 시립(侍立)시킨 다음 엄명(嚴命)을 내렸다. "오늘밤 자정(子正)을 기해 큰 변이 있을 것이니,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경거망동(輕擧妄動)함이 없도록 하라. 특히 자기의 근무지를 이탈하는 자는 죽음을 자초할 뿐임을 명심하라. 다만 나의 명령이 있을 때 한해서 불화살만 쏠 뿐 진격도 후퇴도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엄명을 내린 정탁은 태연히 퇴청(退廳)하여 해저문 거리로 나서자, 며칠 간 못 들어간 자기 자택으로 돌아왔다. 오동지 섣달이라 날씨는 매우 추웠다. 그러나 구름도 바람도 없지만 벌써 동산(東山)에는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담. 왜놈들이 남해안에 상륙했다고는 하지만 설마 여기까지야 처들어올라고..." 명령을 받은 병졸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수군거릴 뿐이었다. 정탁은 집에 돌아오자, 우선 부모님에게 문안드리고 정사(政事)에 바빠 며칠 간 집에 못 들른 것을 자세히 사뢰었다. 그런 후 뜰로 나와 하늘을 다시 쳐다보았다. 둥근 달은 벌써 중천(中天)에 떠 차가운데 달무늬가 화관(花冠)처럼 에워져 있었다. "음! 도리 없지..." 정탁은 깊은 신음을 토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온 가족들을 불러모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 밤에는 반드시 큰 난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난리보다는 오늘밤에 내릴 눈이 더 무서울 것이니, 조심해야 될 줄 안다. 아무도 불평 말고 내가 하는 대로만 보고 있거라. 그러면 오늘밤의 불행을 막을 수가 있을 것이니라." 정탁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베 한 필을 아내에게 가져오게 한 다음 손수 아내부터 차례차례로 전신을 묶어 놓은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하는 가족들의 항의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이 정탁은 부모님 방으로 갔다. "아버님! 어머님! 죄송하오나 이 베로 좀 묶어 드려야 되겠습니다." 역시 부모도 사정없이 꼼짝 할 수 없게 묶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런 괴이한 놈을 봤나." 부모는 하도 어이가 없어 호통을 쳤지만 정탁은, "죄송합니다. 오늘밤만 참고 계십시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이렇게 온 가족들을 포박지워 놓은 정탁은 다시 동헌으로 나갔다. 그렇게 휘황히 쏟던 달빛도 회색빛 구름에 가려 밤만 깊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콩튀는 소리와 함께 사방은 화광(火光)으로 밤을 밝히고, 함성은 천지를 진동시키는 것이었다. "아무도 경거망동하지 말고, 불화살만 쏘아라. 자기 위치를 이동해서는 안 된다." 정탁의 명령은 살얼음처럼 차갑고 무거웠다. 왜놈이 드디어 쳐들어온 것이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드디어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쌓이고 쌓이는 눈발은 순식간에 처마 끝까지 차올라 왔다. 이렇게 되자, 적군도 아군도 쥐죽은 듯 고요해지고 말았다. 그 날 새벽녘에 정탁은 미리 새끼줄로 연결한 통신망을 이용해서 새끼줄을 흔들어서 각 병사간에 연락을 할 수 있었고, 정탁의 가정에도 눈굴을 뚫었다. 이렇게 해서 정탁의 가족만은 그래도 살아 남았지만, 이웃 사람들은 집에 없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전쟁에 공포를 느껴 밤길을 떠나다가 눈속에 대부분 파묻혀 죽고 만 것이다. 결국 정탁이 부모와 가족을 묶어 급해도 도망가지 못하게 한 것은 부모를 구한 효성이요, 형제 간의 우애(友愛)가 깊은 표본이 아닐 수 없다.


  7) 신묘한 꾀로 증조부를 구한 정탁의 효 : 정탁의 나이 8세 때(1534), 증조부 정원로(鄭元老)가 청주 현감(淸州縣監)으로 재직할 때 항상 증손자 탁을 사랑해서 그를 곁에 두고 정무가 한가한 틈이 있을 때마다 바둑두기를 즐겼다. 그런 원로도 기묘사화(己卯士禍) 등 어지러운 난국의 세력 다툼으로 집권자 이항(李沆)이 보낸 자객(刺客) 김자성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목숨 내기 바둑을 두었다. 원로(元老)가 매우 불리하였다. 이자성은 회심의 미소(微笑)를 띠며 소변을 보기 위해 잠시 자리를 떴다. 이 때 탁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아무 말없이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어 보이고는 종전과 같이 누워 버리는 것이었다. 원로는, 증손자가 손가락으로 짚은 곳에 눈길을 모아보니 과연 수가 있었다. 순식간에 땀이 개였다. 잠시 후 김자성이 돌아와 좌정하자 바둑돌을 가만히 놓았다. 그 순간 김자성은 사색(死色)이 되어 바둑돌을 던지며 황망히 일어나서 바람처럼 달아나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때서야 탁은 눈을 비비며 증조부 곁에 정좌(定坐)하며 말했다. "할아버지! 너무 무리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김자성이 가만 있지 않을 테니, 또 한 수를 써야 할아버지께서 목숨을 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며칠 후 탁은 10척(尺)이 넘는 대나무를 급히 구해다가 속을 뚫은 다음 밑을 막아 그 속에 물을 채운 다음 청주를 지나 흐르는 무심천 강가의 백사장에 나가 증조부를 눕게 한 다음 그의 가슴에다 그 10척이 넘는 대나무를 세웠다. "오늘밤만 참으시면 화를 면합니다." 그래서 원로는 증손자 탁의 말대로 그 날 밤을 무심천 변의 백사장에서 새웠다. 아니나 다를가, 김자성이 상경하여 이항(李沆)에게 자초지종(自初至終)을 고했다. 이에 이항은 대노(大怒)하여 점을 쳐보았다. "으흠, 별로 걱정할 건 없어, 정원로는 이미 죽었어, 배 위에 물깊이가 10척이 넘었으니, 천하없는 정원로라도 살아 남진 못했을 것이니까" 이항은 정원로가 물에 투신 자살한 줄로만 여겼다. 그리하여 정원로는 정탁의 영특한 재주로 살아남게 되었고, 그 후 벼슬도 버리고 충주로 나와 살았다. 그래서 부친 때에도 벼슬 한 번 하지 않았다.


  8) 명 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모사(謀士)인 복야(僕射) 두사충이 실수하여 이여송이 그를 죽이고자 할 때 마침 탁이 이여송을 찾아보고, "죽이느니 차라리 나에게 달라."라고 하여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고, 두사충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감여요람(堪輿要覽)>이라는 풍수지리서를 지어 예천 지방의 명당 묘터 10곳을 적어주었다. 그 뒤로 예천 지방에는 많은 풍수들이 이 명당 자리를 찾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한다.


  9) 정탁이 안동인 권기(權紀)를 참봉(參奉)으로 천거하여 주었다. 권기는 <영가지(永嘉誌)> 8권 4책을 1602년(선조 35)에 서애 유성룡(西厓柳成龍)의 명으로 편술하였다.


  [燃黎室記述 13卷] : 처음 과거(科擧)했을 때에, 이준경(李浚慶)이 한 번 보고 큰 그릇이라 생각하여 말하기를, "용모가 자룡(雌龍)같이 되어 후일에 반드시 크게 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ㅇ 영변(寧邊)으로 향할 때에, 동행하던 사람들의 논의가 서로 맞지 않았다. 그가 말하기를, "국사(國事)가 위급한 날을 당하여 마땅히 마음을 합하여 국난을 구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당파로 갈려 다르니 같으니 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ㅇ 임진왜란 직전에 임금의 명에 따라 각기 아는 인물을 천거하였는데, 그가 곽재우(郭再祐), 이순신(李舜臣), 김덕령(金德齡) 등을 가히 장수가 될만한 인물이라고 천거하였다. 덕령이 형을 받게 되자, 그가 적을 앞에 두고 명장(名將)을 죽임으로써 스스로를 약화시키는 것은 도저히 되지 않는 일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필경에는 죽이고 말았다. 적들이 과연 술을 들며 서로 축하하였다. ㅇ 그가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남명 조식(南冥曺植)을 뵈었는데, 작별에 임하여 조식(曺植)이 홀연히 말씀하기를, "내 집에 소 한 마리가 있는데, 군(君)이 끌고 가게"라고 하므로, 내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몰랐더니, 조식이 웃으며 말하기를, "군의 언어와 의기가 너무 민첩하고 날카로우니, 날랜 말이 넘어지기 쉬운 지라. 더디고 둔한 것을 참작하여야 비로소 능히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므로, 내가 소를 준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그는, "수 10년을 다행이 대과(大過)없이 지냈음은 선생이 주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ㅇ 탁이 시골에서 일어나서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가 되어 향실(香室)에서 숙직하고 있을 때에, 문정대비(文定大妃)가 부처에게 바치기 위하여 향실에 있는 향을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이것은 교사(郊社)에 바치는 물품이므로 안 된다."라고 거절하였다. 문정대비가 크게 노하여 법정에 내려 다스리도록 명하였으나, 이름이 크게 떨쳤고, 청직 요직(淸職要職)을 역임하였다. 사람됨이 온공(溫恭)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공손하다는 기롱을 들었는데, 비록 노복(奴僕)이라 할지라도 일찍이 악한 말로 꾸짖는 법이 없었으니, 그 후 덕함이 족히 높은 지위에 오를 만 하였다. ㅇ 어릴 때에 부친을 잃었으나, 뜻이 독실하여 학문이 정수(精粹)하였다. 오건(吳健)이 말하기를, "정탁이 노년(老年)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조정에 있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연려실기술 17권] : 처음부터 끝까지 무룻 180년 동안에 사신이 열한 번 가서 비로소 청하던 대로 되었다. 곧 우의정 대리(右議政代理) 정탁 등을 보내어 사은(謝恩)하고 증광시(增廣試)를 시행하였다.


  [연려실기술 18권] : 1594년(선조 27)에 대사헌 김우옹(大司憲金宇옹) 등이 정철(鄭澈)의 최영경(崔永慶)을 죽인 죄를 탄핵하자, 사간 정엽(司諫鄭曄) 등이 논의의 불합(不合)을 이유로 피렴(避嫌)하니 홍문관(弘文館)에서 처치하여 정엽 등의 체직(遞職)을 청하였고, 시론(時論)이 변하여 정탁 등이 차레로 정승(政丞)이 되었다. ㅇ 1595년(선조 28) 봄에 정탁이 이산해(李山海)의 석방을 청하니, 임금이 그 말을 좇았다. 얼마 안 되어 대간(臺諫)들이, "정탁은 정승 자리에 맞지 않는다."라고 논계(論啓)하여 체직시키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정탁이 이산해를 석방하자고 청하였기 때문에, 대간이 정탁을 탄핵하는 것은 성룡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여 남북(南北) 간의 원한은 더욱 깊어갔다. 이원익(李元翼)이 정탁의 후임으로 우의정이 되니, 남이공(南以恭) 등이 이경전(李慶全, 山海의 아들)에게 통청(通請)시켜 주려고 하였으나 정경세(鄭經世)가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있으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ㅇ 1603년(선조 36) 여름에 정탁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할 것을 원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제 탁이 그의 시골로 물러가서 이내 치사를 바라니, 그 원을 풀어주는 것이 아마도 안 될 것이 없을 것 같다."라고 말하고, 드디어 대신에게 의론토록 하여 필경에는 그 청에 좇았다.


  [明宗實錄] : 1567년(명종 22) 6월 12일에 임금이 태묘(太廟)에서 환궁(還宮)할 때 유생(儒生), 노인, 기녀(妓女)들이 각기 길가에 채붕(綵棚)을 설치하여 놓고, 가요를 바쳤는데, 교방가요(敎坊歌謠)를 봉축한 곳에 이르러 얼마 동안 연(輦)을 멈추고 계시니, 정언 정탁(正言鄭琢) 등이 연(輦) 앞에서 아뢰기를, "이런 것이 비록 예사(例事)이기는 하지만, 연을 너무 오래 멈추시면 일국의 신민(臣民)들이 매우 미안하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온 나라가 우러러 보는 자리에서 미안할 뿐 아니라, 제사를 지낸 후여서 옥체가 수고로우신데 더위를 무릅쓰고 연을 멈추시니 더욱 미안합니다."라고 하였다.(明宗實錄 1567.6.14 1537.6.15,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西原府院君鄭公行狀考稿, 練藜室記述 15卷(壬辰倭亂) 18卷(1592 1596, 李敏求諡狀, 墓誌, 李滉) 別集 7卷(承文院), 大東野乘 50卷(1635.8.1) 51卷(1591.4.29 1591.5.15), 淡水 6輯 1977, 西厓集 2輯(1593.1 黃廷彧事件), 오늘의 忠孝敎育 趙鎭泰編著 219-221쪽, 忠武公의 生涯와 思想 175-176쪽, 襄陽誌 1661, 醴泉郡邑誌 1770 1786 1841, 醴泉郡誌 1939, 龍宮縣邑誌 1780, 竺山勝覽 1934, 大邱每日新聞 1983.3.9, 韓國人의 族譜, 醴泉敎育 11號 214-218쪽, 韓國醫學文化大年表 299쪽, 慶尙北道史 上卷 696쪽, 安東文化 創刊號 75쪽, 趙靖先生文集 101쪽)


  [明宗實錄] : 1566년(명종 21) 10월 4일 사간원 정언에 올랐는데, 왕이 환궁할 때(1567.6.12) 교방가요(敎坊歌謠)를 봉축(奉軸)한 곳에서 연(輦)을 멈추니, 정언 정탁이 연 앞에서 아뢰기를, "연을 오래 멈추시면 신민(臣民)들이 매우 미안합니다."하니, "곧 거둥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튿 날, 이 일과 관련하여 체직(遞職)을 자청하니, 윤허치 않았다. 그 후 형조 좌랑(1567.6.15)이 되었다.


  [宣祖實錄] : 1569년(선조 2) 5월 21일에 경연관(經筵官)으로서 진주 유생의 옥사를 아뢰었고, 지평(1571.11.9)에 제수되었다. 1571년(선조 4) 4월 20일에 편찬된 <명종실록>의 편수관 중에 봉정대부 행 홍문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奉正大夫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 정탁의 이름이 있다. 그 후 이조 좌랑(1573.8.26), 사인(舍人, 1574.1.5), 집의(1574.2.17), 부응교(1574.2.29), 집의(1574.5.6)를 거쳤다. 응교(1574.6.12)일 때는 왕에게 아뢰기를, "이황은 경연에서 정성을 다했으니, 포장(褒章)하여 그의 자질(子姪)을 임용하소서."라고 하였다(1574.7.6). 승지(574.7.29)를 거쳐 1579년(선조 13) 5월 25일에는 부제학 겸 간의대 수개도감 부제조 부제학(簡儀臺修改都監副提調副提學) 정탁에게 숙마(熟馬) 1필을 하사하였다. 대사헌(1579.12.5)일 때는 박민헌의 일을 임금과 의논하였다(1580.2.23). 그 후 이조 참판(1580.4.1), 사헌부 대사헌(1582.4.9), 예조 판서(1586.11.6)를 거쳤다. 1587년(선조 20) 12월 9일 왕의 건강이 정상으로 돌아와서 이조판서 겸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 정탁에게 아다개(阿多介) 1좌(座)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1589년(선조 22) 8월 19일에 병조판서 정탁이 사직을 청하었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동년 11월 18일에 병조판서 겸 좌참찬(左參贊) 정탁을 사은사(謝恩使)로 차출하여 숭정(崇政) 품계를 가하였다. 동년 12월 26일 왕이 사인(舍人) 정탁 등에게 사은표(謝恩表)를 손수 전하고 명 나라로 출발시켰다. 1591년(선조 24) 4월 16일에 정탁이 예조 판서에 올랐고, 동년 12월 9일에 우찬성 정탁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부호군(副戶軍) 권문해(龍門人)가 경가(京家)에서 객사(客死)했습니다. 권문해는 시종(侍從)을 이미 역임했으니, 상여를 고향까지 일로(一路)에서 호송하도록 예조가 공사(公事)를 만들어 행이(行移)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1592년(선조 25) 5월 17일 약방 부제조(藥房副提調) 정탁 등이 왕의 진찰을 청하였고, 동년 5월 28일에 약방부제조 정탁 등이 의관과 함께 입시하기를 청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 15일 의정부 좌찬성 정탁 등이 동궁(東宮)을 모시고 있으면서 명군(明軍)과 합동 작전을 편 내용을 치계하였다. 동년 1월 22일에는 좌찬성 정탁 등이 왕세자와 대가(大駕)를 분리하지 말라고 청하였다. 동년 4월 26일에는 좌찬성 정탁이 유 원외(劉員外)를 문안하고 임금이 접견하는 일을 아뢰었다. 동년 4월 28일에는 좌찬성 정탁 등이 정릉(貞陵)을 옛 능으로 안장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아뢰었다. 동년 5월 12일에는 왕이 우찬성 정탁 등을 인견(引見)하여 왜적의 추격, 군량 조달, 경성 진무 등을 의논하였다. 동년 5월 29일에는 왕이 좌찬성 정탁 등과 중국 남병의 주둔, 경성 이어(移御) 등을 논의하였다. 동년 7월 16일에는 왕이 좌찬성 정탁 등과 진주 방어, 주청사(奏請使) 파견, 환도, 채은(採銀), 포상 등을 의논하였다. 1594년(선조 27) 9월 10일에는 좌찬성 정탁이 사단(社壇)의 수리에 대해 아뢰었다. 그 후 의정부 우의정(右議政, 1595.2.1),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1596.6.3), 의정부 좌의정(左相, 1600.2.20)에 올랐다. 1600년(선조 33) 4월 5일에는 좌의정을 사직하고 예천에 와서 머물었는데, 동년 12월 13일에 왕이 전교하기를, "행 판중추부사 정탁이 대신으로서 외방에서 퇴로(退老)하여 은거하고 있으니, 세시(歲時)에 수령을 보내어 존문(存問)하고 음식물을 제급(題給)하도록 경상도 감사에게 하유하라"라고 하였다. 1601년(선조 34) 2월 3일에는 정탁이 임금에게 전(箋)을 올려 명절에 사람을 보내 위문하고 음식물을 제급한데 대해 진사(陳謝)하였다. 1603년(선조 36) 5월 7일 왕이 예천에 있는 정탁을 영중추부사로 삼았는데, 정탁은 사람됨이 청렴하고 소탈하여 욕심이 적어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상신(相臣)으로 있다가 물러나 예천에서 늙어도 사람들이 그가 그 전의 상공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1603년(선조 36) 5월 6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탁의 사직을 예조(禮曹)로 하여금 의논케 하였다. 정탁이 상소하여 치사하기를 원하자(告老한 것이다. 임금이 환도한 뒤에 정탁이 노쇠하고 병이 있음을 들어 정승의 자리를 해면하였다. 예천 땅으로 물러갔는데, 이 때에 이르러 치사하기를 청한 것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정탁은 원로 대신으로 나이를 들어 청로(請老)한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의 소원대로 치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 하다."라고 하였다. 동년 7월 13일 사간원이 왕에게 아뢰기를, "치사한 정탁이 예천 땅에 살고 있는데, 군수 이형욱(李馨郁)이 접대할 때에 체면을 많이 잃어서 소문이 몹시 해괴하니, 파직시키소서."하니, 왕이 답하기를, "아뢴대로 하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이 병조와 의논(1603.5.25)하였고, 사흘 뒤에도 의논(1603.5.28)하였다. 1603년(선조 36) 6월 7일에는 예조(禮曹)가 치사(致仕)한 영중추부사 정탁에게 달마다 음식을 하사할 것을 청하였다. 1604년(선조 37) 6월 25일 왕이 정탁을 호성공신 3등(忠勤貞亮扈聖功臣) 작위를 내리고 군(君)으로 봉하였다. 동년 9월 14일에는 정탁을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으로 삼았는데, 이미 치사(致仕)했지만, 새로 녹훈 (錄勳)되었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동년 10월 29일에는 왕이 이르기를, "정탁 등을 호성공신 3등에 책훈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품계와 관작을 한 자급(資級) 초천한다. 그의 부모와 처자도 한 자급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가계(加階)하라. 적장은 세습케 하여 녹봉을 잃지 않게 할 것이며, 대대로 영원히 사유를 받게 하라. 이에 반당 4인, 노비 7구, 구사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라고 하였다. 1605년(선조 38) 10월 1일 서원부원군 정탁(西原府院君鄭琢)이 졸하였다. 동년 10월 3일 승정원이 왕에게 아뢰기를, "지금 정탁이 밖에서 졸하였으니, 조의를 표함이 성복하는 날에는 미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대신을 중히 대우하는 일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이 예를 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승지를 보내어 조문하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하니, 왕이 동부승지를 보내라고 전교하였다. 동년 10월 9일 예조(禮曹)가 왕에게 아뢰기를, "지금 정탁이 예천 땅 본가에서 졸하였는데, 그는 일찌기 이사(貳師)를 지냈습니다. 왕세자가 마땅히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함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 의하여 거행함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왕이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諡號를 請하는 글] : 1605년 9월 19일에 충근정량 호성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감 춘추관사 서원부원군(忠勤貞亮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西原府院君)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집에 계시다가 돌아갔다. 상감(宣祖)께서 공의 죽음을 듣고 매우 애도하여 사흘을 조정 회의를 거두고 승지를 보내어 조문하고 부의를 내리고 예조좌랑(趙靖)을 보내어 장사를 마쳤다. 이듬해 1606년 2월 21일 예천군 남면 위라곡 간좌(南面位羅谷艮坐, 안동군 풍산읍 오미리 새랄)에 장사지냈다. 상감께서는 유사(有司)를 명하여 장례비용을 내리게 하고 귀후서(歸厚署) 관원으로 하여금 상을 다스리게 하고 승문원 관원으로 하여금 위패에 글씨를 쓰게 하니, 이 모두는 특별한 예우였다... 공은 어릴 적부터 뛰어나게 총명해서 글을 배우면 금방 그 뜻을 깨우쳐서 스승의 노고를 덜었다... 1589년(선조 22) 9월 병조 판서일 적에 일본의 사신이 왔다. 이 때 그 답례로 우리도 사신을 보내느냐? 마느냐?로 조정의 공론이 갈팡질팡하니, 공이 의연히 말씀하되, ''''일본의 침략할 단서가 분명하다. 아침에는 사신을 보냈지만 저녁에는 싸울 군사를 보내어 올 것이니, 지금 떠들썩할 것이 없다.''''하니, 공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많았다(9월에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내기로 결정하였고, 다음 해 3월 출발해서 1591년 정월에 돌아옴). 1590년(선조 23)에 중국에 사신갔다가 아직 돌아오기 전에 최영경(崔永慶)이 무고를 입어 죽었는데, 언관(言官)들이 공이 최영경의 동생 여경(餘慶)을 벼슬길에 추천했다고 꾸며대서 공을 파직시켰다. 그 해 겨울에 다시 예조 판서가 되고, 좌우찬성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군이 서울 근방을 핍박하므로 상감께서 피난을 결심했다. 이 때(4월 30일) 공은 내의제조(內醫提調)로서 내의원에 기거하다가 창졸간에 호가(扈駕)하느라고 집안 형편이 어찌된 것도 헤아리지 못했다. 평양에 도착하여 선조 임금께서 철옹(鐵瓮, 평남 맹산군)으로 다시 옮기려고 할 때 공이, "대동강은 저절로 이루어진 천혜의 요충지인데, 여기서 적병을 이길 계책을 세우지 않고 암벽 깊숙한 험한 곳으로 가다가는 적병들에게 틈을 주어 허를 찔릴 터이니, 안됩니다"라고 울면서 간하여도 이루지 못하더니 이 소문이 퍼지자 상하가 모두 당황하여 동요하니, 어쩔 수 없이 조정을 두 곳으로 나누자는 공론이 결정되었다. 세자는 광해군(光海君)이고 공은 이사(貳師)로서 급히 달려 이천(利川)에 다다르니 그 곳의 적병들이 더욱 강성하여 길이 막혀 의주로 돌아갈 때 일행이 두려워하면서 변장을 하거나 가만가만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공이 앞뒤를 넌지시 살피다가 웃으면서 말씀하되, "하늘이 우리나라를 보우할 것이니 걱정할 것 없고, 만약 불행하게도 하늘이 돕지 않으면 이런 계책으로는 이 일을 면할 수 없다."라고 했다. 다음 해 정월에 정주(定州)에 이르러서 상감과 회동하게 되었다. 이 때 제독 이여송이 평양을 공격했다. 공에게는 경략(송응창) 이하 군관들의 위문 접대 등 여러 가지 일이 밀려서 거의 쉴 틈이 없었다. 중국 칙사의 수행을 맡아 평산(平山)에 이르러 세자를 호위하여 남하하라는 왕명을 받들고 충청도에 이르렀을 때 내륙 지역은 겨우 안정되었으나 바닷가에서는 왜적이 여전히 둔거하고 있었다. 이 무렵의 시의(時議) 가 ''''어찌 할 수 없으니, 왜적을 거기에 얽어매어 주자''''라고 했다. 이에 공은 ''''왜적은 반드시 패망한다''''라고 늠연히 주장했다.


  상감께서 재위하신 지 오래되어 공의 뜻이 깨끗하고 발라서 급한 일을 만나도 당황함이 없이 차분히 치루어냄을 아시며 더구나 정성을 다하여 어지러운 시국을 수습하고 기울어져 가는 국가 운명을 바로잡자면 모름지기 유신(儒臣)을 등용해야 되겠다는 사실을 더욱 믿게 되어 1595년(선조 28) 2월에 공이 우의정이 되었다. 우의정이 된 지 얼마 안되어 황정욱(黃廷彧) 부자가 죄를 지어 심문할 적에 상감께서 ''''정욱은 본디 훈공이 있고 또 늙었으니 고문을 면제하고 귀양만 보내고 싶다''''라고 대신들에게 물으셨다. 이에 공이 대답하기를, "형장을 조심스레 다루고 공신을 보전하는 것이 모두 성덕이옵니다."라고 했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이 일로 추관(推官)들의 허물을 논했다. 이에 공이 글월로써 사직할 것을 고집하니 상감께서 공의 뜻을 굽힐 수 없음을 알고, 지중추부사로 바꾸었다. 당초에 공이 이순신과 김덕령이 장수가 될 재목이라고 추천했는데, 임진왜란을 당하여 이순신이 해상 방어에 전공을 세웠으나 모함에 들었고, 김덕령은 용감하게 잘 싸웠으나 살인죄로 몰렸다. 이에 공이 이르되, "왜적이 아직 우리 국토을 점거하고 있는데, 그것을 막지 않고 먼저 장사(壯士)를 죽이는 것은 왜적이 들어서 안될 일입니다.''''라고 하여 상감께서 그들을 용서하여 풀어주라고 명령했다. 1596년(선조 29) 여름에 주상께서 임금이 친히 왕릉에 나아갈 날을 점칠 적에 우뢰소리가 대궐 안을 진동했다. 이에 공이 상감께 진언하되, ''''노(魯) 나라에서는 생쥐가 재앙을 암시하여 들에 나가 지내는 제사를 중지했다고 합니다. 지금 하늘이 비상한 꾸짖음을 보이시니, 상감마마께서 왕릉에 나아가실 때가 아닙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그것이 중지되었는데 그해 가을(1596)에 전라도의 역적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났다. 그 잔당을 사로잡아 문초하니, ''''임금이 왕릉에 갈 때 가만히 치려고 했는데, 그것이 중지되어 이루지 못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모두 가슴이 섬득하게 놀랬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왜적이 호남을 유린하여 매우 어수선하다는 급보를 받고 공은 두 차례 상소하여 변방에 달려가기를 청했다. 그 글에, ''''백성들이 전쟁에 시달려서 도탄에 빠졌고, 그 정세가 흙더미 무너지듯 하려는데, 조정의 명령은 거리가 멀거나 가깝거나 통하지 아니합니다. 어찌 조정의 200년 기업을 하루아침에 포기하고 속수무책으로 망하기를 기다리기만 하겠습니까? 저는 슬퍼하시는 윤음(綸音)을 받들고 가서 널리 펴면서 임금과 백성과 부로(父老)들을 위유(慰諭)하고 젊은이들을 이끌고 왜적이 다니는 길목의 요충을 쳐서 부수면 다행이요 또 저는 늙어서 진실로 스스로 돌격하기는 어려우나 사졸(士卒)들보다 먼저 한 번의 죽음으로서 평소의 성은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했으나, 조정에서는 공이 늙었음을 딱하게 여겨 허락하지 아니했다. 그러나 뜻 있는 이들은 모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발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599년(선조 32) 세자 광해군을 따라 수안(遂安)에 가서 중전(中殿)을 문안하고 모시고 돌아오니, ''''지난 날 위급할 때 처자를 보전하려고 가족이 편의를 먼저 도모한 사람들의 성명을 게시하여 모든 관원들에게 보이고자 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왜적들이 다시 쳐들어와서 어수선한 인정이 사소한 데로 끌려갑니다. 진작에 적발하여 중치하지 못한 것은 일찍이 그러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리들이 진실로 죄를 지은 것은 분명하나 나라에 큰 경사가 있으면 은혜를 널리 베풀어 구제해 주고 묵은 허물을 뉘우쳐 고치게 하는 것이 왕정(王政)이니, 허물을 용서하는 큰 뜻입니다."라고 아뢰어, 상감께서 마침내 이들을 모두 용서했다. 공이 주장하는 법의 지론은 반드시 너그럽게 용납하라는 주장이 거의 이와 같았다. 공이 처음 정승이 되던 해(1599) 벌써 74세 고령이므로 일을 감내할찌 두려워하면서 나라의 어지러움이 채 가시지도 아니했으므로 물러갈 수 없었다. 이 때에 이르러 시국이 점차 안정되고 신민(臣民)이 바른 뜻을 펼 수 있는 때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 때(1599.9)에 드디어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성묘하고 사직하고 여생을 마치고자 했다. 그 이듬해 봄(1600.2)에 나라에서 좌의정을 삼으시고 속히 조정에 들어오라고 명했으나 공은 스스로 늙고 병들어 성은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라고 사직하겠다는 글을 올리고 부임하지 아니 하니 상감께서 공의 뜻을 용납하여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4년 후(1603)인 78세(4월)에 이르러 치사하고자 상소를 올리니, 상감께서 거듭 공의 뜻을 수용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어 선유하시기를, ''''육정(六丁)으로도 공의 뜻을 굽힐 수 없으니 이 세상에서 이런 일은 일찍 듣지 못했다.''''라고 했다 하고, 영중추에 오르고 치사가 허락되었다. 그 해 겨울 호성공신에 책훈되고 서원부원군을 봉하고 경상도에 명하여 봉조하(奉朝賀)의 녹을 지급하게 했다. 이에 이르러 공이 또 ''''늙은 신하는 때맞추어 조회를 참여하지도 못했으며 공신을 책록할 때 군신이 모여 맹세하던 일에도 참여하지도 못했는데 굳이 나라의 관례에 따라 은총이 넘치는 녹봉을 부질없이 주고받은 일이야말로 국가와 이 늙은 신하 서로의 허물이 될 뿐입니다.''''라고 사양했다. 그러자 상감께서는 답지(答旨)를 내리되, "원훈 대신으로서 시골에 물러가 살면서 이제 또 녹봉을 사양하는 것은 매우 예도에 어긋난다. 그리고 본도에서 녹봉을 주는 것은 진실로 훈구 대신을 우대하고자 하는 나라의 뜻에서 우러나온 바이니 어찌 굳이 사양해서 스스로는 결백하고 나라의 성의는 받들지 아니하려는가? 공의 집안의 생계가 매우 넉넉하지 못해서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사방에 벽만 덩그러이 들러있어 두 접시의 반찬도 갖추지 못할 만큼 가난하면서 끝내 녹봉 받기를 구차하게 사양하지 말라."라고 했다. 상감께서 공을 예우함이 이처럼 한결같았으니, 그 임금에 그 신하가 있음을 보여 주었도다. 공이 평소에 건강하고 잔병이 없어서 춘추의 명절에는 반드시 묘소 선산(先山)에 나아가 성묘를 하되 발걸음이 청장년 때와 같았고, 산수간에서 자연을 즐길 때도 문중의 두 세 노인들과 더불어 지팡이를 짚고 종일 소요할 뿐이니 들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지난날의 정승인 줄 몰라볼 만큼 검박했다. 그리고 고향의 친구들과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면서 근심 걱정 잊고 흥취를 돋우지 아니함이 없었다. 여씨향약(呂氏鄕約)에서 당시에 준행할 만한 내용을 가려서 존비 관계의 분수를 정하고(貴貴尊尊), 나아가고 물러섬에 예절과 양보하여야 하고(進退禮讓), 장례 때 서로 도와주고(死喪相恤), 급한 환난 때 서로 구조(急難相救助)하는 조목들을 마련해서(이는 지금까지 전하는 高坪洞約 約文임) 봄가을에 강회(講會)를 할 때 백성들이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우리말로 풀이해서 깨우쳤고, 예천 사람들이 이제껏 그대로 따르고 폐하지 아니한다. <중략> 돌아가신 이듬해 2월에 장사지내고 고을 사람들이 향현사(鄕賢祠)에 추가로 배향(配享)하고 제향(祭享)을 받든다. 공은 맑은 기상과 단아한 모습으로 즐거워하고 타고난 자질을 스스로 삼가서 지키고 도에 가까움이 정련한 금(精金)이나 좋은 옥(良玉)과 같아서 한 번 보고도 지니고 있는 바를 알만 했었다. 일찍이 퇴계(李滉) 선생 문하에서 공부해서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며 수양하는데 법도가 있었다. 곁들여서 천문, 지리, 상수(象數, 易學과 數理), 병법까지도 훤히 꿰뚫었다. <중용>과 <대학>을 더욱 좋아해서 늙어서도 밤에 홀로 앉아 조용히 외우기를 힘썼다.


  그리고 공이 항상 말하기를, "원(元) 나라의 큰 학자 허노재(許魯齋)의 말에, ''''나는 소학(小學)을 신명처럼 공경하고 부모같이 존경한다''''라고 했으니 사람들이 진실로 허노재와 같이 공경하고 믿는다면 어찌 성현의 도에 이르지 못할까봐 근심하겠는가"하고 공은 여러 책에서 가려뽑아 입교(立敎), 명륜(明倫), 경신(敬身)의 조목으로 소학 연의(小學衍義)를 만들고자 했으나 이루지는 못했다. 공이 처음 벼슬길에 나서니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의정이던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이 공을 처음 보자 큰그릇이라고 하면서, ''''얼굴이 암 용(龍)과 같으니 뒷날 반드시 크게 귀히 되리라''''라고 했다. 중국에 갔을 때 관상가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당신은 참으로 어진 사람이니, 만 백성의 생명을 구제할 것이며, 키나 얼굴 모습이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아니하나 그 우뚝함이야말로 많은 무리 중에 야학(野鶴)이 뛰어남과 같으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우러르며 친압하지 못하리라.''''라고 했다. 공의 마음가짐이 충신(忠信), 관평(寬平), 비겸(卑謙)으로 자처하고 너와 나를 생각함에 있어서 미물에게도 그러했으며 미천한 사람에게도 오만하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옷, 갓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으며 비단옷을 입지 아니하며 광대들의 노래와 진기한 물건을 한 번도 이목(耳目)에 가까이하거나 입으로 말한 적도 없으며 가산(家産)의 경영을 도모한 적도 없어서 공이 돌아가시자 여러 아들들이 하나같이 살림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공이 청환과 고관의 자리를 두루 거치면서도 권세를 피하기를 마치 더러운 것 보듯하고 항상 미관 말직에도 있지 아니하는 사람같이 처신했으며 이익보다 의리를 앞세워 거센 물결에도 휩쓸리지 아니하고 우뚝했다. 기쁜 일이 있을 때 훼방을 놓는 것을 매우 싫어해서 가차(假借)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혹 뜻하지 않게 죄를 지었을 때는 비록 소원(疏遠)한 사이라도 달려와서 오직 약포 공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고 했으며 공도 또한 그들을 위하여 살릴 수 있는 방도를 찾아서 구제해 주었다. 국사를 논함에 이르러서는 먼저 대체(大體)를 살피고 명분을 중히 여기며 반드시 원대한 계획에 힘쓰고, 눈앞의 공리에 휩쓸리지 아니했다. 그 때 널리 군대를 모집하느라고 사천(私賤)도 군에 입대하면 속량(贖良)되게 하고, 또 군량이 모자람을 걱정하여 공명(空名) 사령장을 발급하였다. 공은 이 때 그것이 절대로 옳지 못한 일이라 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기자(箕子)께서 법률을 마련한 이래로 종과 주인의 관계는 임금과 신하의 분수와 같으니 어찌 주인을 배반하고 나라에 충성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상전을 배반하라고 유도해서 나라를 나라답지 아니하게 하는 바이요, 벼슬을 파는 것은 한(漢) 나라의 악습인데, 지금 공훈의 서열을 무너뜨리고 편안히 앉아서 곡식을 파는 무리와 화살과 돌 사이에서 죽음을 무릅쓴 사람을 같은 자리에 놓고 공신(功臣)이라고 한다면 어찌 군사를 격려하여 적장의 목을 베라 하고 적진의 깃발을 뭉게 버리라고 명령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논난하는 사람이 없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을 때는 모든 일을 사절했지마는 정치의 잘 잘못을 들으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족들에게 이르되, ''''내가 성은을 입고도 보답하지 못하여 죽더라도 눈을 감을 수 없으니, 나의 자손들이 내가 임금을 사랑하고 국가를 생각하던 정성을 알고 나의 뜻을 계속해 준다면 나는 유감이 없겠다.''''라고 했다. <중략> 이제 공이 돌아간 적이 30년이 지났고 또 공의 사적을 소상히 알릴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이에 공의 손자 시형(時亨)이 이 일을 나에게 청하므로 삼가 그 사적의 줄거리를 이와 같이 적어서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청하노라. 이민구(李敏求, 1589-1670) 근찬", 묘는 안동시 풍산읍 오미동 새랄 위라곡(位羅谷)에 있고, 신도비(神道碑)가 있다.(司馬榜目, 文科榜目, 襄陽誌 1661, 醴泉郡誌 1939)


  정탁(醴泉의 人物 藥圃 鄭琢 先生) [記事] : 감천면 증거리 출신인 조동윤(예천군 문화관광과장)의 기사로, 예천군의회에서 2004년 7월에 발행한 <의회보> 제5호 144-156쪽(13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는, 1) 머리말, 2) 약포 정탁의 생애, 3) 학문과 교유 관계, 4) 임란 극복과 역할, 5) 고평동 향약 실시로 민심 교화, 6) 문인, 7) 유적 및 저서이다.


  정탁(藥圃 大監의 얼을 찾아서) [記事] : 정충사(靖忠祠, 예천읍 고평리 466)는 임진왜란을 수습한 예천 출신 명재상인 약포(藥圃) 정탁(鄭琢) 대감의 영정을 비롯, 연적, 벼루, 용사일기, 문집, 기로연도, 갓, 용사잡록, 교지 등 많은 유품이 보물로 지정되어 전시되고 있다. 약포 대감은 임진왜란(1592년~1597년)중에 선조 임금과 왕세자(광해군)를 모셨으며 난이 끝나자 좌의정, 영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여 난후 수습에 온 힘을 기울인 재상이다. 공은 난중에 곽재우(홍의장군), 이순신, 김덕령 등을 천거했으며, 그들이 당쟁의 희생으로 죽음에 직면했을 때 빠른 판단과 상소로써 그들을 구해낸 것은 역사에 길이 전해져 오고 있다. 1526년(중종21) 예천군 용문면 버들밭(하금곡리)에서 이충(以忠)의 아들로 태어나 본관은 청주요, 자는 자정(子精)이며 호는 약포(藥圃)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어려서부터 총명이 남달라 여덟 살에 벌써 글을 깨쳤으며 경사(經史), 지리(地理), 병서(兵書) 등에 두루 통해 믿음으로써 행하고 지조가 맑아 50년 간의 벼슬길에서 조금의 실수도 없었으며 극심한 당쟁 속에서도 초연했고 포용성이 있어 대인 관계가 원만해서 동인(東人)에 속했지만 서인의 영수인 오음, 윤두수와 교분이 두터웠다. 교서 정자(校書正字)라는 최 말단 종9품이 당시 수렴 청정하던 문정왕후 윤씨가 어느 절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 궁중에 있는 향을 가져오게 했으나 향의 출납을 맡아보던 약포가 단호히,“궁중의 향은 종묘사직의 제사에 쓰일 뿐이요 궁외로 가져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일화는 약포대감의 강직한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명 나라 장수 이여송의 모사인 두(杜) 복야가 실수하여 이여송이 그를 죽이고자 할 때 마침 약포가 이여송을 찾아보고 죽이느니 차라리 나에게 달라고 해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며 두사충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감여요람(堪輿要覽)이라는 풍수지리서를 지어 예천 지방의 명당 묘터를 10곳을 적어 주었다. 그 뒤 예천 지방에는 많은 풍수들이 이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몰려들어 지금까지 500년을 헤매고 있다. 1552년(명종7)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1566년 정언(正言)이 되고 1568년(선조1) 교리(校理)로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을 겸직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581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정인홍, 박광옥 등과 뜻이 달라 이조 참판으로 전임되고 이 해에 진하사로 명 나라를 다녀왔었고 이듬해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1589년 우찬성으로 사은사가 되어 다시 명 나라에 다녀오면서 임란 직전의 명 나라와의 외교에 힘을 썼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모셨다. 이어 우의정이 된 그는 장재(將才)를 찾으라는 어명을 받들어 이순신, 곽재우, 권인호, 유정, 김덕령 등을 천거했다. 1593년(선조26) 영위사(迎慰使)가 되어 명 나라의 장수들을 영접했으며 계속 그들과 사귀면서 전란중의 국교에 노력하고 명 나라 군사의 진중을 돌면서 그들의 사기를 높이고 독전했다. 왕세자 광해군의 스승으로 임란 중에는 평북, 강원, 함경도 등을 전전하면서 세자를 보필했고, 서울 수복 후에는 기위사(饑慰使)로 철수하는 명 나라 군사를 의주까지 가서 전송했으며, 그 해 10월 <용만문견록>을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


  <용만문견록>은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의 상황과 명 나라 장군의 내왕을 맞고 보낸 일이며 그들과 주고받은 문서 등을 기록해 선조가 사정을 알도록 한 기록으로 당시의 군사, 정치, 외교, 사회상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약포는 세자와 함께 영남과 호남 등지에서 근왕병을 모집, 훈련시키면서 난민 구제에 힘썼으며 1594년 우의정이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싸움터에 나가 군사들을 독전하려 했으나 선조 임금은 연로(年老)하다고 만류했다. 그 해 2월 원균의 모함을 받은 이순신이 서울로 잡혀왔을 때 재상들은 이순신이 무고한 줄 알면서도 변호하지 못하고 6,7차에 걸친 중신회의에서 이순신을 비호하던 중신들마저 반대파의 집요한 모함을 두려워해 입을 다물었을 때 약포 혼자 끝까지 이순신의 출중한 무예와 인격을 논해 다시 종군시키라고 역설해 처형 직전에 목숨을 구하여 백의종군케 하고 명량대첩의 큰공을 세울 수 있게 했으니 이 것이 저 유명한 신구차(伸球箚)다. 이보다 한해 앞선 선조 29년(1596년) 1월 의병장 김덕령이 모함에 빠졌을 때 처형 직전에서 김덕령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며 선조 임금으로부터 말 1필까지 하사받게 했다. 이와 같이 약포는 사물의 판단이 공정했으며 조금의 착오도 없었다. 1600년(선조33) 좌의정 3년 후 영중추부사로 난 후 수습에 온 힘을 기울이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 예천으로 돌아와 예천읍 고평리에 터를 잡았다. 약포는 여기서 고평동계(향약)를 만들어 백성을 교도했으며 사회 풍교의 확립에 힘을 기울였고 고평들을 개척해 향토 주민의 복지 증진에 정성을 쏟기도 했다. 1604년 선조는 약포의 공을 기려 호성공신으로 서원부원군을 봉하고 충훈부에 하교해 영정을 그려 하사했고 1605년 80세를 일기로 서거하니 선조 임금은 3일 간 조회를 폐하고 슬퍼했으며 제문(祭文)을 내렸고 서울 백성들은 철시(撤市)하고 통곡했다. 정충사(靖忠祠)는 약포 정탁 대감의 영정과 유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1976년 12월에 착공해 1980년 12월 준공했다. 부지 4,110평에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겹처마의 영정각과 정면 3칸, 측면 1칸, 겹처마 맞배 지붕의 유물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 지붕의 관리사 및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집인 신삼문을 비롯해 주소, 담장 197m, 안내판, 변소 등을 세웠고 유물관에는 김석종 당시 예천군수의 준공기문이 있다. 약포 대감의 영정과 유물은 원래 고평리 89번지에 있던 것을 현재의 정충사(고평리 466번지, 고평역전 안골 뒷산)로 옮겼다.(윤현숙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5-06-11 오전 11:49:43)


  정탁(鄭琢) [記事] : 1526-1605, 용문면 하금곡리에서 출생하여 예천읍 고평리로 옮겨 살았다. 호는 약포(藥圃), 17세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의 참된 뜻을 배우고, 뒷날 진주 교수로 있으면서 남명 조식(曺植)으로부터 강직한 선비 정신을 배웠다. 대사헌과 좌찬성을 거쳐 좌의정에까지 벼슬이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선조를 의주(義州)까지 호종했던 정탁은 1594년에는 김덕령(金德齡), 곽재우 등의 명장을 천거했고, 이순신 장군이 옥에 갇히자 무고함을 극력 주장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하도록 하는 등 뛰어난 학문과 강직한 인품으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70세의 거유(巨儒)인 정탁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했으나 역모의 누명을 쓰고 옥사했던 29세의 광주(光州) 출신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억울함을 선조에게 주청하여 석방을 탄원했던 정탁의 상소문 초고본(51x69cm)이 남아있다. 이 상소문은 1596년(선조 29)에 임금에게 올려졌다. 이 상소문에서 정탁은, "김덕령의 명성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면서, "그가 역모에 가담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데다 왜적들이 퍼뜨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상소문은 이어, "아직도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이 때 한 이름 난 장수를 죽인다면 남쪽 지방이 장군과 장수들은 불안에 떨게 되어 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적고 있어 김덕령의 죽음이 의병과 관군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 상소문의 초본은 고서화 연구가인 최효상(서울 거주)이 최근 안동에서 발굴해 공개해 낸 것이다. 최씨는, "당시 명당있던 정탁과 같은 선비들이 김덕령 구명에 적극 나섰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중요한 문헌"이라고 하였다. 정탁은 말년에 ''''송죽음(松竹吟)''''이란 시에서 이를기를, "송죽은 정기(正氣)를 갖추었으니/ 식물 중에 어진 군자(君子)네/ 모든 풍상 다 겪은 뒤에/ 바야흐로 굳은 절개 알 수 있다네"라고 하였다.(www.kwangsankim.or.kr 2002)


  정탁 [記事] : 안동하회마을/ 간행년 : 1996/ 저자 : 서수용/ 발행처 : 안동문화원/ 3. 누대(樓臺)와 정사(精舍)/ 14) 삼인석(三印石) :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 서애 류성룡(柳成龍:1542~1607) 선생이 정승의 인끈을 풀어놓고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을 지닌 바위를 말한다. 능파대(凌波臺) 위의 넓은 바위가 바로 ‘삼인석’이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정승에 오른 이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좀더 구체적인 관련이 있다. 첫째, 이들은 모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문인(門人)이라는 점이다. 다만 소재 노수신의 경우는 본가에서는, ‘제자의 예를 행하지는 않았다’는 입장도 있으나 제자명단인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수록되어 있기에 넓은 의미로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보며, 영남 일대에서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둘째,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영남인(嶺南人)이라는 점이다. 소재는 상주 화령(化寧), 약포는 예천 고평(高坪)이 고향이다. 지금도 두 곳 모두에는 종택과 사당 그리고 전시관이 있어 유물과 유품을 수호하고 있다. 이들 세 분 정승들의 이력을 조사해보면, 연장자인 소재는 1573년에 우의정을 거쳐 1585년에 영의정이 되었고, 약포는 1595년 우의정이 되고 1600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서애는 1590년 우의정이 되고 1592년 영의정에 올랐다. 소재는 서애에 있어서는 부집(父執, 아버지 뻘)이었다. 특히 서애의 부친인 입암(立巖)이 돌아가셨을 때, 소재는 동갑인 벗을 그리며 간절한 제문을 지어 보내기까지 했고, 그런 평소의 친분으로 인해 삭탈관직 상태로 상주 화령 고향에서 세상을 떠난 소재에게 달려간 몇 안 되는 조정의 현직 관리 중 의한 사람이 바로 서애였다. 서애와 약포와의 끈도 그리 단순치 않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함께 정승 지위에 있었으며 앞뒤로 이순신을 발굴하고 죽음에서 구해준 분이 바로 서애와 약포였다. 두 분은 우리 역사에서 임진왜란을 극복한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러한 인연과 관계가 이들 세분을 ‘삼인석 전설’이라는 고리로 연결된 것이다. 다만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동일한 싯점에 정승 인끈을 풀어버린 세 분이 한 자리에 모여 풍류를 즐겼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보아 다소 어려웠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가 있다. 200여년 전까지 서낭당 너머 동네에 노씨(盧氏)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하회마을 사랑방이나 안방 모두에서 확인되는 이야기다. 노씨가 산 것이 사실이라면 소재 노수신의 후손인 광산(光山) 노씨(盧氏)였을 것이다. ‘노가리(盧哥里)’라는 마을 이름은 노씨들이 사는 마을이란 비칭(卑稱)일까?(www.koreastudy.or.kr 2007)


  정탁 [記事] : 안동의 지명유래/ 간행년 : 2002/ 저자 : 안동민속박물관/ 발행처 : 민속박물관/ 17. 池內里 : 지내리는 구한말 안동군 동선면의 지역으로서 큰 못 안쪽이 되므로 못안, 또는 지내(池內), 변하여 모산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 때 약포(藥圃) 정탁(鄭琢),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등이 생장한 유서 깊은 곳이다. 왜정초인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수곡, 먹골, 오리원재, 모사곡, 나죽골을 병합하여 지내동(리)이라 하여 안동군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시군 통폐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지내리는 1리와 2리로 구분하는데 지내 1리에는 소장골, 양지마, 먹골, 오리온 등이 속하며, 지내 2리에는 모사골, 나죽골, 건능골 등이 포함된다. 특히 지내 1리의 소장골, 양지마, 먹골 등을 합해 장수곡이라 부르는데 장수곡은 지내리 150여 가구에서 90여 가구가 살고 있을 정도로 지내리에서 큰 마을이다./ 먹골샘, 묵동정(墨洞井):먹골에 있는 샘으로 홍응수 선생의 부인이 임진왜란을 피하여 이곳에 왔다가 샘을 파니 먹물이 나왔다고 전한다. 특히 이 마을은 약포(藥圃) 정탁(鄭琢),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등이 생장한 유서 깊은 곳이다./ ... 정상(鄭相):조선 선조 때 영중추(領中樞)를 지낸 청주인(淸洲人) 약포(藥圃) 정탁(鄭?, 1526~1605) 선생의 태지(胎地)라 하여 이 골을 정상이라 부른다. 그러나 정탁 선생의 연보에 따르면 선생은 예천 금당실(金谷)에서 나서 10세에서 20세까지 이곳에서 살았다고 되어있다...(www.koreastudy.or.kr 2007)


  정탁 [記事] :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 간행년 : 2001/ 저자 : 안동문화원/ 발행처 : 안동문화원/ 2) 인물(人物)/ .../ 정탁(鄭琢) 자(字)는 자정(子精)이요, 호는 약포(藥圃)이다. 청주의 이름난 성씨인 의(의)의 후예이다. 젊어서 고아가 되었으나 뜻을 돈독히 가졌다. 퇴도의 문하에 유학하였다. 가정 임자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무오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대각(臺閣)을 두루 거치고 나서 좌의정(左議政) 서원군(西原君)으로써 벼슬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www.koreastudy.or.kr 2007)


  정탁 [記事] : 안동인물초색인/ 간행년 : 2000/ 저자 : 권오신 외/ 발행처 : 안동문화원/ 정탁(鄭琢) : 1526(중종 21, 병술) ~ 1605(선조 38, 을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ㆍ백곡(佰谷). 시호는 정간(貞簡). 이충(以忠)의 자. 이황(李滉)의 문인.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ㆍ헌납(獻納)을 거쳐 1568년(선조 1)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겸 춘추관기주관(校理兼春秋館記注官)이 되어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이조좌랑(吏曹佐郞)ㆍ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등을 지냈다. 1581년 대사헌(大司憲) 때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정인홍(鄭仁弘)과의 불화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전직되었다. 1589년 우찬성(右贊成)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좌찬성(左贊成)으로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했다. 이듬해 영위사(迎慰使)로 명 나라 송응창(宋應昌)을 영접하고, 1594년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노령으로 전장에 나가 독려하려는 것을 왕이 말렸다. 1599년 사퇴했다가 이듬해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를 거쳐 1603년(선조 36)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고,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지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ㆍ곽재우(郭再祐)ㆍ김덕령(金德齡) 등 명장을 발탁하였다. 안동(安東) 와룡(臥龍)에서 태어났으나(張炳昌 註 이는 잘못 : 예천군 용문면 하금곡리 외가에서 태어남) 예천(醴泉) 고평(高坪)으로 이거하여 그곳에서 향년 80세로 몰했다. 부음을 들은 조정에서 3일간 휴무를 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상구(喪具)를 내려 장례를 치르게 했다, 예천(醴泉) 도정서원(道正書院)에 배향(配享)되었고, 문집에 『약포집(藥圃集)』, 저서에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이 있다. ◎참고문헌 : 明宗ㆍ宣祖實錄ㆍ醴泉郡誌ㆍ陶山及門諸賢錄(www.koreastudy.or.kr 2007)


  정탁 [記事] : 안동하회마을/ 간행년 : 1996/ 저자 : 서수용/ 발행처 : 안동문화원/ 3. 누대(樓臺)와 정사(精舍)/ 14) 삼인석(三印石) :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1590),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 서애 류성룡(柳成龍:1542~1607) 선생이 정승의 인끈을 풀어 놓고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을 지닌 바위를 말한다. 능파대(凌波臺) 위의 넓은 바위가 바로 ‘삼인석’이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정승에 오른 이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좀더 구체적인 관련이 있다. 첫째, 이들은 모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문인(門人)이라는 점이다. 다만 소재 노수신의 경우는 본가에서는, ‘제자의 예를 행하지는 않았다’는 입장도 있으나 제자명단인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수록되어 있기에 넓은 의미로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보며, 영남 일대에서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둘째,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영남인(嶺南人)이라는 점이다. 소재는 상주 화령(化寧), 약포는 예천 고평(高坪)이 고향이다. 지금도 두 곳 모두에는 종택과 사당 그리고 전시관이 있어 유물과 유품을 수호하고 있다. 이들 세 분 정승들의 이력을 조사해보면, 연장자인 소재는 1573년에 우의정을 거쳐 1585년에 영의정이 되었고, 약포는 1595년 우의정이 되고 1600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서애는 1590년 우의정이 되고 1592년 영의정에 올랐다. 소재는 서애에 있어서는 부집(父執, 아버지 뻘)이었다. 특히 서애의 부친인 입암(立巖)이 돌아가셨을 때, 소재는 동갑인 벗을 그리며 간절한 제문을 지어 보내기까지 했고, 그런 평소의 친분으로 인해 삭탈관직 상태로 상주 화령 고향에서 세상을 떠난 소재에게 달려간 몇 안 되는 조정의 현직 관리 중 의한 사람이 바로 서애였다. 서애와 약포와의 끈도 그리 단순치 않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함께 정승 지위에 있었으며 앞뒤로 이순신을 발굴하고 죽음에서 구해준 분이 바로 서애와 약포였다. 두 분은 우리 역사에서 임진왜란을 극복한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러한 인연과 관계가 이들 세분을 ‘삼인석 전설’이라는 고리로 연결된 것이다. 다만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동일한 싯점에 정승 인끈을 풀어버린 세 분이 한 자리에 모여 풍류를 즐겼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보아 다소 어려웠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가 있다. 200여년 전까지 서낭당 너머 동네에 노씨(盧氏)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하회마을 사랑방이나 안방 모두에서 확인되는 이야기다. 노씨가 산 것이 사실이라면 소재 노수신의 후손인 광산(光山) 노씨(盧氏)였을 것이다. ‘노가리(盧哥里)’라는 마을 이름은 노씨들이 사는 마을이란 비칭(卑稱)일까?(www.koreastudy.or.kr 2007)


  정탁 [記事] : 안동하회마을/ 간행년 : 1996/ 저자 : 서수용/ 발행처 : 안동문화원/ 8. 신부름으로 상대의 인물을 알게 함 : ...가지고 가 회답을 받아오게 시켰다. 안동 하회에서 약포(정탁)가 살던 예천 고평은 이웃 고을로서 그렇게 멀지 않다...(www.koreastudy.or.kr 2007)


  정탁 [記事] : 약포집(藥圃集) 11권 6책 중 卷1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 書 / [上退溪先生 36] : 퇴계 이황에게 올린 편지이다. 文昭殿의 位次문제에 대한 견해를 퇴계 이황에게 진달한 것이다. 문소전은 세종이 漢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문소전을 세우고 태조와 四親의 신주를 모셨는데, 태조가 중앙에 있으면서 남쪽으로 향하고, 高祖·曾祖·祖·考 사친의 신주는 동서로 진열하였다. 명종이 죽고 문소전에 위패를 안치하려 하니 공간이 부족하였다. 이에 이황은 전전의 제도가 동서는 길고 남북은 짧습니다. 만약 옛사람의 제도대로 태조는 동향의 位에 정해 놓고, 二昭와 二穆은 차례대로 남과 북으로 마주 향하게 한다면, 전각 안이 넉넉하게 되어 새로 고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건의했었다. 저자의 견해는 그렇게 하더라도 협소하니 넓게 고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與趙士敬(1563) 37] : 조목에게 보낸 편지이다. 세 편의 편지가 묶여져 있다. 첫 번째 편지에서는, 자신은 벼슬길에 나선 이후 번뇌가 겹치고 病魔도 끊이지 않고 있으니 산림에 은거하여 선생님을 모시고 도학을 공부하는 조목이 부럽다고 하였다. 보내 준 두 시는 게으른 사람을 일깨워줘서 감사하다고 하였으며, 서울의 동문들의 동향을 적어 보냈다. 두 번째 편지는 1566년(명종 21)에 보낸 편지로, 월천이 조정으로부터 관직이 제수된 것을 축하하면서 時宜에 따라 관직에 나가기를 권한 것이다. 노모가 계시니 경주 근처로 임지가 바뀔 것이라고 하였다. 퇴계 선생이 다시 관직에 나가는 것은 본의가 아니라 임금의 뜻이 간절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노정이 염려된다고 하였다. 세 번째 편지는 1576년(선조 9)에 보낸 편지로, 조목의 사직소를 읽어보니 선비의 初心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칭찬하고, 벼슬길에 나오기를 당부하면서도 험한 世路에 잘 적응해 나갈까하는 우려의 말을 전했다. [答趙士敬(1577) 39] : 월천 조목에게 답한 편지로 두 편이 묶여져 있다. 관직 생활하는 것이 집에 있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수령의 일이 光風霽月의 멋 가운데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것을 통해 다스리면 오래지 않아 완악한 백성이 절로 순해지고 마음의 병도 사라질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조정에서는 乙巳士禍로 희생된 선비의 신원을 위한 논쟁이 일어 분주하며, 전제법에 대한 분쟁으로 백성들의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개탄하였다. 조목의 목민관으로서의 재미를 물어보고 자신도 고향과 가까운 고을의 수령을 지내면서 중앙 관료로 분주한 생활을 청산하고 싶은 심경을 토로하였다. [與趙士敬(1578) 40] : 월천 조목에게 보낸 편지이다. 저자가 原城에 있을 때 서울 본가로 전해진 두 편의 편지를 받았는데, 내용이 절실하여 상자 속에 넣어 놓고 때때로 꺼내 본다고 하였다. 저자는 당시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있었는데, 함께 금강산 제일봉에 오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다. 가을 성묘 길에 찾아 뵐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答趙士敬(1583) 40] : 월천 조목에게 답한 편지이다. 선비들의 기풍이 위축되고 풍속이 문란해진 현실에 대해 개탄한 내용이다. 조목의 편지 가운데 몇 조목은 의론이 순수하고 곧아서 술 취한 사람을 깨우는 듯하다고 하면서 가슴에 새기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근래 선비들의 기풍이 위축되고 공론이 제대로 세워지지 못한다고 하였다. 外孫을 자기의 손으로 삼아서 본 조상의 제사를 모시게 하는 풍속은 춘추대의에 어긋나는 일이고 인륜을 어지럽히는 행위이니 시정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與趙士敬 42] : 월천 조목에게 보낸 편지이다. 저자가 장인의 초상을 당하여 예천에 머물 때 보낸 것으로 두 편이다. 한 편은, 편지의 내용 중의 의문점에 한 설명과 조목이 올린 상소에 관한 내용이다. 遺稿를 서원에 보관했다고 들었고, 서울에 유고를 올려 보내면 즉시 간행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는데 이에 대해 조목의 의향을 물었다. 저자가 보낸 편지 내용 중에 ‘遙向鵝湖思二陸’이란 말 때문에 조목에게 陸學을 존숭한다는 의미가 아닌지 의심을 받았는데, 이에 대해 해명한 것이다.


  鵝湖는 河回를 가리키는 것이고, 二陸은 형제를 가리키는 말고 선인들의 문장에서 차용한 것이지 절대로 육학을 숭상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조정에 있을 때, 조목이 올린 疏章을 보았는데 충성과 분노가 절실하여 초야의 올곧을 말을 비로소 보게 되었지만 시행되지 못하였으나 강폭한 사람들의 뜻과 다르니 매우 다행이라고 하였다. [答趙士敬 43] : 월천 조목에게 답한 편지로 세 편이 묶여져 있다. 첫 번째 편지는 長子가 요절한 애통한 심정을 기록하였으며, 이런 와중에 조목의 편지를 받으니 매우 위로가 된다고 하였다. 참혹한 일을 당하니 만사가 시들하여 오직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하였다. 두 번째 편지는 시대가 변하고 人事가 날로 변하여 오래 누리는 것이 없으니 한심스럽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당시의 폐단을 진달한다는 상소를 의탁해서 권신들의 마음을 저촉하여 인심이 흩어져서 편안하게 모으기 어려움을 개탄하였다. 조목은 외직에 있기 때문에 강호에 마음대로 거처하며 도를 닦고 時事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부럽다고 하였다. 세 번째 편지는 퇴계 선생의 문집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듣고 매우 감사함을 표하였다. 여러 동문들과 함께 도산서원을 참배하고픈 바람이 있으나 뜻밖에 조정에서 召命이 내렸고, 두 번이나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아 출입에 매우 조심스러워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참석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與柳而見 44] : 西厓 柳成龍에게 보낸 편지로 세 편이 묶여 있다. 첫 번째 편지에서는 유성룡의 안부를 묻는 내용과 자신은 몸에 병이 많은데 더운 여름이 되어 좁은 방안에 있는 것이 마치 솥 안에 앉아 있는 것 같아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얼마 전 만났을 때, 옛날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고 매우 기뻤는데 나라를 위해 몸을 잘 보전하라고 하였다. 두 번째 편지는 영의정이 돌아와서 그대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 줘서 기뻤다는 내용과 자신도 세자를 모시고 무사하다고 하였다. 유성룡의 일가가 풍기로 가고 있고, 자신의 가족들도 따라서 풍기로 가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 후로 소식이 없어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세 번째 편지는 黃家의 옥사를 다스리고 있는데, 情理나 法律로 볼 때 처리하지 않을 수 없는데, 父子를 모두 杖殺시키는 것은 미안함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臺諫들의 논의가 확고하니, 빨리 임금께 啓辭를 올리라는 가르침이 있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별지에 계사의 초안을 적어 보내니 가르침을 달라고 하였다. [與金士純(誠一) 45] : 鶴峯 金誠一에게 보낸 편지이다.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니 빨리 명을 받들어 조정에 서서 時事를 바로 잡기 바란다고 하였다. 조아무개가 올린 疏章으로 인하여 인심이 흩어져서 모으기 어렵게 되었으니 時事의 불행이라고 하였다. 消長하고 安危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지 조아무개의 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자신은 심신이 지쳐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아직도 관직에 매어 있으니 한탄스럽다고 하였다. [答金彦遇(富弼)趙士敬金愼仲(富儀)琴夾之(應夾)金惇敍(1571) 46] :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고향의 동문들이 몇 가지 사안에 대해 저자에게 부탁하자 거기에 대해 답한 편지이다. 追贈 등의 일은 임금의 뜻에서 나온 것이니 슬픔이 끝이 없다고 하였다. 禮葬에 관한 일은 사양해야 할 일이고, 퇴계 선생이 살아 계실 때 가르침도 있으니 상주를 보내 한 번 정도 상소해야 한다고 하였다. 行狀과 墓誌 등의 글은 급한 것이니 奇大升이나 盧守愼에게 맡겨도 괜찮을 것 같고, 碑文은 급한 일이 아니니 장례가 끝난 후에 대제학에게 청하는 것이 늦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www.koreastudy.or.kr 2007)


  정탁 [記事] : 약포집 (藥圃集) 11권 6책 중 藥圃續集 卷2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啓 / [辭右議政啓 6] : 우의정을 사양하는 계문이다. 소명을 받았지만 병이 깊어 나갈 수 없다고 하였다. 병이 심해서 人事를 돌볼 수도 없고 출입도 할 수 없으니 한 번 나가서 謝恩하려고 하나 또한 때에 미치지 못하니 계를 올려 죄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再啓 6] : 우의정을 사양하는 두 번째 계문이다. 사직을 청하는 계에 은근한 비답을 내리니 황공함을 이길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70이 넘고 전쟁을 겪은 후로는 혼미함이 심하고 병도 이어지니 관직에 나갈 수 없다고 하였다. / [三啓 7] : 우의정을 사양하는 세 번째 계문이다. 번번이 글을 올려 임금의 눈을 더럽히게 되어 황공하다고 하였다. 늙고 병이 깊음과 정승의 자질이 없음을 들어 사직을 청하였다. / 四啓 8/ 우의정을 사양하는 네 번째 계문이다. 앞의 글과 마찬가지로 병이 깊어 나갈 수 없음과 정승의 자질이 없음을 들어 사직을 청하였다. [辭判中樞府事啓 8] : 판중추부사의 직을 사양하는 계문이다. 병이 깊어서 정승의 직을 수차의 상소 끝에 윤허를 받았는데, 다시 판중추부사의 직을 제수하니 역시 병이 들어 나갈 수 없고 자질이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請歸省父母墳墓啓 9] : 부모의 묘소를 살피기 위해 예천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계문이다. 저자의 나이 금년 74세이니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 성묘를 하지 못하면 살아서는 다시 성묘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社稷壇奉審後啓 10] :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을 사직단을 둘러보고 그 상태를 보고한 계문이다. 무너져서 보수해야 할 곳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였고, 대신들과 해당 관청에 명하여 다시 봉심하도록 해서 보수하는 일을 잘 처리할 것을 청하였다. [辭本職兼帶奉常寺都提調啓 11] : 본직 및 봉상시도제조의 직을 사양하는 계문이다. 성은으로 예천에 가서 부모의 묘소를 살필 수 있었다고 하였다. 안동 종가로 가서 선조들에 대한 追贈의 告由祭를 지내고 예천으로 돌아오다가 말에서 떨어져 왼쪽 옆구리와 다리뼈를 다쳐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갈 수 없으니 현재의 직책을 면해 달라고 청하였다. [再啓 12] : 본직 및 봉상시도제조의 직을 사양하는 두 번째 계문이다. 날이 따뜻해 졌으니 병을 조리해서 올라오라고 승지에게 전교하였다고 들었는데, 말에서 떨어진 이후로 병이 차도가 없어서 서울로 갈 수 없으니 현재의 직책을 면해 달라고 청하였다. [病未赴中宮殿昇遐哭班啓 12] : 고향으로 성묘 왔다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고, 또 병이 들었기 때문에 중전이 죽었지만 서울로 올라가 곡을 하지 못하였고 奉慰(왕이나 왕비의 제삿날에 백관들이 모여 왕과 왕후를 뵙고 위문 인사 올리는 일)의 대열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연유를 고한 것이다.(www.koreastudy.or.kr 2007)


  정탁 [記事] : 책 제목 : 난중일기(중학생독후감필독선 45)/ 분야 청소년 > 청소년 고전/ 이순신 지음/ 신원문화사/ 2002.7.30/ ISBN 8935910392/ 414쪽/ A5/ 385쪽에 " ..발탁하였습니다. 죽은 뒤 예천의 도정서원에 모셔졌습니다. 문집에《약포 문집》, 저서에《용만 문견록》이 있습니다./ 자는 조작, 호는 용애로, 명나라 광동 사람입니다. 1597년 구원군으로 전선 500여 척을 거느리고 당진에 들어와 이순신과 해상을 담당한 장군이었습니다. 진린은 왜적의 뇌물 공세에 퇴로를 열어 .. "가 수록되어 있다.(daum 2007)


  정탁 [記事] : 유교관련도서/ 예천의 금석문 1 | 간행년:2003/ 저자:예천문화원/ 발행처:예천문화원 / 藥圃 鄭先生 神道碑銘/ ...지 아니하였으니 감히 休暇를 請하지 못하였다. 己亥秋에 드디어 休暇를 받아 남쪽으로 醴泉 故鄕 마을에 돌아왔...(韓國國學振興院 ugo.net 2008)


  정탁 [記事] : 유교관련도서/ 예천의 금석문 1 | 간행년:2003/ 저자:예천문화원/ 발행처:예천문화원 / 貞簡公 西原鄭公(琢) 墓碣銘/ ... 給錄을 주어서 그의 一世紀를 마치도록 청탁하였다. 乙巳(1605)年 9月 19日에 醴泉의 마을 집에서 考終...(韓國國學振興院 ugo.net 2008)


--


  정탁 서간(鄭琢書簡) [個人古文書] : 예천읍 고평리 입향조인 약포 정탁(鄭琢, 1526-1605, 左議政)이 아들에게 보낸 서간으로, 1매, 초서(草書), 45.7x29.2cm, 상태가 양호하고, ''''사자 2060''''과 중복된다. 조선 선조 때의 호성공신(扈聖功臣)이었던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정탁이, 그의 아들이 새로이 임직에 나아가는 것에 즈음하여 당부하는 내용이다. 보문면 고평리 정남섭(鄭南燮)의 소장본인 <약포선생간첩(藥圃先生簡帖)>에서 소수(所收)한 것을 촬영한 필름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청구기호 GF 4603 33-295-4)되어 있다.


  정탁 서간(鄭琢書簡) [個人古文書] : 예천읍 고평리 입향조인 약포 정탁(鄭琢, 1526-1605, 左議政)이 아들에게 보낸 서간으로, 1(2)매, 초서(草書), 45.7x29.2cm, 상태가 양호하다. 조선 선조 때의 호성공신(扈聖功臣)이었던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정탁이, 그의 아들이 새로이 임직에 나아가는 것에 즈음하여 당부하는 내용이다. 보문면(現 醴泉邑) 고평리 정남섭(鄭南燮)의 소장본인 <약포선생간첩(藥圃先生簡帖)>에서 소수(所收)한 것을 촬영한 필름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청구기호 사자 2060)되어 있다.


  정탁 서간(寫眞 유리필름 目錄) [古文書] : 예천읍 고평리 입향조인 좌의정 정탁의 서간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목 鄭琢書簡(2)/ 분류 古文書 私人文書 書簡/ 등록번호 사자 2060/ 본문 조선 선조 때 忠勤貞亮扈聖功臣이었던 西原府院君 貞簡公 鄭琢(1526∼1605)이 아들이 새로이 임직에 나아가는 것에 즈음하여 당부하는 내용의 서간./ 설명 (발급) 鄭琢 (수급) 아들/ 6月 29日/ 1(2), 초서, 45.7×29.2cm/ 藥圃先生簡帖 所收/ 소장:慶北 醴泉郡 普內面 高坪里 鄭南燮"(history.go.kr 2005)


  정탁 서간(鄭琢書簡(2)) [寫眞資料] : 조선 선조 때 6월 29일 충근정량 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이었던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정간공(貞簡公) 정탁(1526-1605)이, 아들이 새로이 임직에 나아가는 것에 즈음하여 당부하는 내용의 서간으로, 초서(草書), 45.7x19.2cm이다. 보문면 고평리 후손 정남섭(鄭南燮)이 소장하고 있는 <약포선생간첩(藥圃先生簡帖)>에서 소수(所收)하여 국사편찬위원회(寫資 2060)에서 그 사진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인터넷 야후 2001)


  정탁 필적(鄭琢筆蹟) [個人古文書] : 예천읍 고평리 입향조인 약포(藥圃) 정탁(1526-1605, 左議政)이 1599년 9월에 홍법사(洪法寺) 벽에 씌어진 시를 평하면서 제3구의 압운(押韻)이 잘못된 것을 밝히고 고쳐 쓴 시초(詩草)로, 2(4)매, 초서, 27.5x105.5cm이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소수(所收)한 <조선사료집>(眞 續2, 1931)에 수록되어 있다. 예천군 정남섭(鄭南燮)의 소장본을 촬영한 필름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청구번호 사자 2150)되어 있다.


  정탁 필적(鄭琢筆蹟) [寫眞資料] : 조선 중기의 문신 약포(藥圃) 정탁(1526-1605)이 1599년(선조 32) 9월 7일에 홍법사(洪法寺) 벽에 씌어진 시를 평하면서 제3구(句) 압운(押韻)이 잘못된 것을 밝히고 고쳐쓴 시초(詩草)로, 초서로 쓴 서화(書畵) 필적이다. 27.5x105.5cm이고, 예천읍 고평리 후손 정남섭(鄭南燮)이 소장하고 있으나, 이는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료집 진 속2(朝鮮史料集眞續二)>(1931)에서 소수(所收)한 사진 자료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寫資 2150901, 寫資 2150-02)하고 있다.(인터넷 야후 2001)


  정탁 필적(寫眞 유리필름 目錄) [筆跡] : 예천읍 고평리 입향조인 좌의정 정탁의 1599년 필적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목 鄭琢筆蹟/ 분류 書畵 筆蹟/ 등록번호 사자 2150/ 본문 조선 중기의 문신 藥圃 정탁(1526∼1605)이 洪法寺 벽에 씌어진 시를 평하면서 제 3句의 押韻이 잘못된 것을 밝히고 고쳐 쓴 詩草./ 설명 鄭琢, 萬曆 27年 9月 初7日 (1599)/ 2(4), 초서, 27.5×105.5cm/朝鮮史編修會, 朝鮮史料集眞 續2(1931) 所收/ 소장:경북 예천군 鄭南燮"(history.go.kr 2005)


  호종공신 교서(扈從功臣敎書) [文化財] : 예천읍 고평리 466번지에 있는 교지류 1축으로, 국가 보물 제494-2호(1968.12.19)이다. 정완진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약포 정탁(鄭琢 : 1526-1605)의 얼을 추모하고 그가 남긴 유물을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해 지은 유물각(遺物閣)에 전해오는 ''''약포 유고와 문서''''(보물 494호)들 가운데 하나이다. 정탁은 이황의 문인이었다. 1558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헌에까지 올랐으며, 임진왜란이 터지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다. 천문, 지리, 군사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며, 임진왜란 중에는 곽재우, 김덕령 등의 뛰어난 장수들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1597년 3월에 이순신이 옥중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되자 적극 말려 그를 구했다. 저서로 <약포집(藥圃集)>,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공신록권''''이란 나라에서 공이 있는 신하를 공신으로 임명한다는 증서인데, 이 녹권은 1613년(광해군 5) 정탁에게 그가 죽은 후 위성공신으로 높여 봉한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文化財廳 홈페이지 2002, www.ocp.go.kr 2002)


  →자랑 1639 : 정탁 左議政(祝 윤옥희.신창규/예천방문 165)(이름 장병창, 날짜 2008-05-06 (08:11), 조회 405회)


---


  ▲예천농협 옹골진 잡곡, 전국 최초 잡곡 브랜드 사업대상자로 선정...축하합니다.


  옹골진 잡곡(醴泉郡 全國 最初 雜穀 브랜드 事業對象者로 選定 : 醴泉農協 옹골진 雜穀, 事業費 10億 원 支援받아) [記事] :


  예천군은 DDA/FTA등 시장개방에 대응하고 전작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농림수산식품부에서 실시한 잡곡브랜드 사업 대상자로 예천농협 옹골진 잡곡이 전국 최초로 선정되었다고 2009년 1월 21일 밝혔다.


  이번에 선정된 예천농협 옹골진 잡곡 브랜드는 1992년부터 잡곡사업을 실시하여 2008년도에는 48억 원의 매출을 올렸으며, 2009년도 잡곡브랜드 사업대상자로 선정되어 10억 원의 사업비를 지원받게 되었다.


  군에서는 10억 원의 사업비로 시설기반 구축을 위하여 GAP시설 보완, 색채 선별기 구입, 저온저장고를 신축하고, 생산기반 조성을 위하여 작목반 조직을 규모화하고 계약재배를 통한 최저가 보장제도를 실시하여 농가의 경영안정을 도모하고, 유통 체계구축을 위하여 매스미디어를 통한 홍보를 강화하고 판매 대리점을 확대하여 안정적인 판매를 구축할 계획이다.


  특히, 브랜드 관리체계 구축을 위해 매뉴얼을 개발하여 현재의 생산ㆍ유통구조를 비용절감, 고품질화, 마케팅 경쟁력을 높이는 구조로 전환하여 생산에서부터 유통까지 패키지 사업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예천군 관계자는 옹골진 잡곡 브랜드육성 사업이 유통구조 개선을 통한 경영안정화와 브랜드가치 상승으로 농가소득을 높혀 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황성한 記者 醴泉인터넷放送 2009-01-22 오후 1:43:19)


---


  ▲안영성 전국한우협회 예천군지부장, 장관 표창...축하합니다.


  안영성(안영성 全國韓牛協會 郡支部長 長官 表彰) [記事] :


  (사)전국한우협회 안영성(57) 예천군지부장이 2009년 1월 16일 예천농업인회관 3층 회의실에서 농림수산식품부장관 표창장을 전수받았다.


  이 자리에서 “대내외적인 어려움에 처한 우리 축산인들을 위해 더 힘써 일하라는 채찍으로 알고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안영성 지부장은 (사)전국한우협회 군지부 창립 부지부장을 맡아 전국 최초의 생균제사업장을 만들어 예천참우의 고급화를 통한 대외경쟁력확보에 앞장서 왔다.


  지난 2007년 지부장으로 취임해 생균제사업장 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하는데 일익을 담당, 생산·판매의 일원화를 구축해 축산농가의 안정적 소득기반을 조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예천축협 이사, 한우자조금관리위원, 농축산물 감시위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며, 미국산 수입우 저지와 지역 축산인들의 권익신장을 위해 앞장서 왔다.


  현재 풍양 흔효리에서 대성농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가족으로는 부인 금명숙(53) 씨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본관은 순흥.


  (백승학 記者 醴泉新聞 2009년 01월 22일 10:57:02)


---


  ▲예천 출신 김수현, 중진공 강원본부장 피임...축하합니다.


  김수현(中振公 江原本部長 김수현 氏 任命) [記事] :


  중소기업진흥공단은 2009년 1월 22일 강원지역본부장에 김수현 본사 경영혁신실 부장을 임명하는 등 강원본부 직원 13명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신임 김 본부장은 경북 예천 출신으로 기금운용실장과 국방대학원 등에서 교수생활을 한 중소기업 자금운용 전문가로 평가를 받고 있다.


  김영춘 강원지역본부장은 강원지역본부 수석지도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수혁 江原道民日報 2009년 01월 23일)


---


  ▲용문 출신 김정모, <지혜가 세상을 바꾼다> 발간...축하합니다.


  김정모(時事評論家 김정모 氏 칼럼集 出刊) [記事] :


  용문면 태생의 시사평론가,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는 중견언론인 김정모 씨가 시사칼럼집 「지혜가 세상을 바꾼다」(부제 저널리스트 김정모의 시사논리 길잡이)를 출간했다.


  2004년 당시 대구지역 최연소 논설위원으로 서정적인 소재와 감동을 주기로 유명한 그의 칼럼은 자유언론클럽이 선정한 ‘2008 명칼럼’에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예천에 대한 소재를 한 칼럼을 자주 쓰기도 해 향토출신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박재규 경남대학교 총장, 미 하버드대 교수 출신 정태동 전 태국 대사, 윤덕홍 전 부총리, 서상호 전 매일신문 주필 등 각계 저명인사가 학생들의 논술 길잡이 등으로 추천하는 추천사를 썼다.


  2004년 영남대학교가 출판한 대학 교재 「화법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의 저자로 명강사로 꼽히고 있기도 하다.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영남대 강사와 영남대 평생교육원 교수를 역임했다.


  (醴泉新聞 2009년 01월 22일 10:52:16)


---


  ▲예천방문 351


  예천군 방문(<洛東江은 다시 흐른다> ⑥醴泉 : "맑은 물, 白沙場" 사람들 쉬고 가게...) [記事] :


  예천군은 소백준령의 높은 줄기가 감싸고 낙동강, 내성천(乃城川)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으로 은근과 끈기가 스며있는 충효의 고장이다.


  경북 최북단에 위치해 동쪽은 안동, 서쪽은 문경, 남쪽은 상주와 의성, 북쪽은 영주와 충북 단양군과 접하고 있으며, 예천(醴泉)이라는 유래는 단술 ‘예(醴)’자, 샘 ‘천(泉)’자로 삼국시대 수주(水酒)에서 유래됐다.


  이는 물맛이 좋고 단술과 같다 해서 ‘예천(醴泉)’이 됐으며, 지명 유래와 밀접한 ‘주천(酒泉)’이라는 샘이 예천읍 노하리에 있다.


  낙동강은 안동 구담습지를 휘돌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서 내성천, 금천과 만난다.


  이곳에 있는 삼강주막은 예전에 남쪽에서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가든 나그네들이 꼭 삼강 나루터를 거쳐가면서 머무르던 곳으로 유명하다.


  경북도와 예천군은 낙동강 주변 어메니티(지역가치) 창출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삼강(三江)이 만나는 이곳을 중심으로 나루터 및 주막촌 복원과 회룡포 자연경관체험마을, 백두대간 곤충생태원 조성 등 낙동강프로젝트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1천억 투자 삼강주막 주변 관광지 개발 : 초가지붕.사공.보부상 숙소 복원...수변 생태공원 조성, 회룡포 도로 확포장.캠프장 등 자연경관 체험마을 추진] :


  삼강은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이라서 붙은 이름으로 주변경관이 아름답고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져 있다.


  예로부터 이곳은 서울로 가는 길목으로 장사하던 배들이 낙동강을 오르내렸고, 문경새재를 가기 전에는 이곳 삼강 나루터를 꼭 거쳐갔으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주막 등에서 상거래가 번성했다.


  그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주막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 옆에는 500년이 넘은 회화나무가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이 회화나무에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 상주군에 있는 한 목수가 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면 사고도 나지 않고 큰돈을 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장을 가지고 나무를 베려하자 주민들은 마을을 지키는 영험한 나무라며 베지 못하게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목수는 나무그늘이 좋아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백발을 날리는 노인이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서 “만약 이 나무를 해치면 네가 먼저 죽으리라”고 했다는 것.


  목수는 꿈에서 깨어나니 하도 생생해 식은땀을 흘리며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혼비백산 달아났다고 한다.


  회화나무 아래에 있는 삼강주막은 최근 초가지붕과 사공·보부상 숙소를 복원하고, 진입도로 확·포장 공사가 진행 중이다. 주막은 현재 삼강리 노인회에서 운영하며, 보부상 숙소에서는 마을부녀회가 팥죽과 전통식으로 떡을 빚어 판매하고 있다.


  이 주막을 지켜오던 주모 유옥련 할머니가 3년전에 작고한 후 현재는 주모는 없고 주막방과 마루에서 막걸리와 두부, 부침개 등을 주문해 맛볼 수 있다.


  삼강마을부녀회 권정복(60) 회장은 “주막 운영을 오는 2월부터 마을부녀회가 모두 맡아 운영하게 된다”며 “주모 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직 주모는 없지만 앞으로 부녀회원 중에서 누군가가 맡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주막의 지붕이 초가에서 스레트로 개량됐던 것을 다시 초가로 복원했다”며 “갑술년 홍수 때 넘어져 없어졌던 사공·보부상숙소도 최근 복원되는 등 개발이 시작되면서 휴일에는 하루 1천여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관광객이 몰리자 예천군은 삼강주막 주변 개발을 오는 2012년까지 삼강리 156일원 2.83㎢에 1천6억 원(민자포함)을 투자, 지역 거점관광지로 정착시킨다는 계획이다.


  우선 단기적으로는 200억 원을 들여 주막 주변에 저자거리, 객주, 전통놀이체험, 생태연못 등 전통마을 조성과 삼강·백포나루를 복원해 사라져가는 옛 정취를 되살리고, 5억 원으로 전통배를 타보고 체험할 수 있는 관광자원을 개발키로 했다.


  이어서 490억 원을 투자해 대규모 수변 생태공원을 조성하며, 40억 원으로 풍양면 삼강리와 지보면 마산리를 잇는 구름다리를 놓을 예정이다.


  또 삼강주막 일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설치도 계획하고 있다.


  특히 민자유치 등 206억6천만원을 투자해 삼강주막에서 회룡대까지 한번에 갈 수 있는 케이블카 설치와 물놀이 공간 등을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강이 산을 부둥켜안고 용틀임을 하는 듯한 특이한 지형의 회룡포는 한 삽만 뜨면 섬이 되어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물도리마을로서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육지 속의 섬마을이다.


  이곳은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인근 비룡산에는 숲속 등산로와 원산성, 봉수대 등 역사적 정취가 숨쉬는 자연공원으로 산책과 등산코스로 적합하다.


  또한 이산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운명선사가 세운 천년고찰 장안사가 산중턱에 있으며 사찰의 뒷산에 올라가면 팔각정의 전망대가 있어 의성포(회룡포)마을의 절경이 한눈에 들여다보인다.


  2000년도에 방영되었던 KBS 인기드라마 ‘가을동화’의 초기배경이 이곳 회룡포와 용궁면 소재지로 한 관계로 지금도 많은 이들이 찾아오고 있다.


  회룡마을에는 현재 경주김씨 9세대가 20만㎡의 농경지에 농사를 지으면서 마을을 지키고 있다.


  마을 주민들이 내성천을 겨울에 건너다니는 폭 80㎝정도 길이 50m의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 이름이 ‘뿅뿅다리’로 불러진다.


  뿅뿅다리로 불러진 내력에 대해 예천군 문화관광해설사 박용성(69·용궁면 향석리)씨는 “서울에 있는 모 신문사 기자가 회룡마을에 취재차 왔다가 마을로 가는 좁은 다리의 이름을 마을 주민 조모(94) 할아버지에게 물었고, 이 할아버지는 다리상판이 아르망 철판(군사용)으로 돼 있는 것을 표현한다는 말이 구멍이 뽕뽕 뚫린 다리라고 했다”는 것.


  “그 후 신문에 ‘뿅뿅다리’로 기사가 나는 바람에 지역민들이 마땅한 이름이 없던 이 다리를 ‘뿅뿅다리’로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천군은 천혜의 자연경관 명승지인 회룡포에도 103억원을 투자해 개발사업을 벌이고 있다.


  2004년부터 작년까지 43억 원을 투자해 회룡포 제방보강과 도로 확·포장, 캠프촌 및 소나무 숲 조성 설계를 마무리하고, 2009년에는 제2전망대 설치와 비룡산 일대 등산로 정비, 주차장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또 낙동강프로젝트사업으로 용궁면 대은리, 지보면 마산리, 보문면 미호리 일원에 250억 원을 투입하는 회룡포 자연경관 체험마을 조성도 추진되고 있다.


  [◆청소년 체험·수련 공간 조성] :


  경북도는 예천읍 생천리, 용문면 상금곡리, 능천리에 150억 원을 들여 청소년을 위한 심신수련공간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13년까지 청소년수련과, 궁도장 등 체육시설과 한시와 붓글씨 학습 공간 등을 조성하며, 농촌체험과 누정체험지구 조성, 금당실마을 전통한옥 숙박단지 조성에는 12억 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또한 자연환경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고유의 생물종 분포가 다양한 청정지역인 상리면 고항리 일원에 4억 원(도비 1억2천, 시군비 8천, 균특 2억)을 들여 올해 백두대간 생태공원을 조성한다.


  예천군은 또 오는 2012년까지 1천470억 원(민자포함)을 투자해 약 318만4천700㎡에 야외 곤충생태관찰 체험지구와 백두대간 생태숲 체험탐방지구, 곤충생태학습 및 휴양지구 조성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는 청소년수련원과 유리온실, 곤충목석조각 공간, 수변생태관찰 친수휴양시설, 곤충박물관, 연구실, 산림테라피 체험단지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러한 사업이 마무리되면 지난 2007년 이용객 29만7천 명이던 것이 2020년에는 90만8천 명, 2030년 124만 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경북도는 전망했다.


  (이종훈 記者 大邱新聞 2009-01-22 10:35:45)


---


  낙동강(洛東江, 慶北道의 새로운 成長動力이 되다 : 公企業-地方自治團體 相生 네트워크) [記事] :


  낙동강은 1300만 영남인의 젖줄이다. 역사적으로 옛 가야와 신라의 문화를 피웠으며 산업화 시대를 맞이하면서 대한민국 산업발전의 대동맥으로 경제발전의 기틀을 제공한 곳이기도 하다.


  1970년대 산업화에 이어 2000년대 재도약의 동력을 다시 낙동강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낙동강은 수도권의 한강과 달리 대규모 투자가 이뤄진 적이 없어 매년 수해와 가뭄 피해의 온상이자 오염된 강으로 전락하고 있다.


  최근 정부가 낙동강 물길 정비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홍수예방은 물론 물 확보, 수질개선 등으로 지속가능한 영남인의 젖줄로 다시 태어나려는 시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대문화의 발상지에서 산업발전의 대동맥으로, 다시 새로운 미래성장동력으로 거듭나는 낙동강의 현황을 알아보고 낙동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수자원공사 경북지역본부와 기초지방자치단체장들을 통해 물을 활용한 지역경제발전방안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 낙동강의 ‘낙동’이라는 이름은 가락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가락은 삼국시대에 가락국의 땅이었던 상주시를 말한다.


  조선시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낙동은 상주의 동쪽을 말한다”라고 기술돼 있다. 낙동강의 발원지는 ‘대동지지’ 및 ‘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상에서는 태백의 황지라고 통칭하고 있다.


  태백문화원은 태백 황지못을 발원지로 주장하며 기념석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조사결과, 총 1634개의 발원지가 있으며 이들 가운데 태백의 천의봉 너덜샘이 최장거리 차수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낙동강은 태백의 황백산을 거쳐 영주 소백산, 문경 곶갑천, 청송 보현산에서 발원한 세 갈래 지류로 구성되어 상주 낙동에 이르러 거대한 강을 형성한다.


  낙동강의 주요 지류는 영양 일월산을 발원지로 하는 반변천, 봉화군 선달산에서 시작되는 내성천, 상주시 은척면에서 출발하는 병성천, 군위군 고로면에서 발원한 위천, 김천 수도산과 포항 죽장면에서 시작되는 감천과 감호강 등이다.


  낙동강은 총길이 521.5km, 유역면적 2만3860㎢로 4개 광역지방자치단체와 32개시군구의 1037만4000여며의 인구가 주면에 살고 있다.


  낙동강은 크게 태백∼군위의 상류권, 김천∼청도의 중류권, 합천∼부산의 하류권 등으로 나눠진다. 낙동강의 경북 구간은 282.1km에 이른다.


  낙동강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칠곡군 석적면 중동일대의 돌망치 등 구석기 시대 유물이 다량 발견되고 있다. 삼한시대에는 진한과 변한이 낙동강을 중심으로 자리잡아 철기와 농경문화를 발달시켰다.


  삼국시대에는 일본과 신라, 백제 등 세 나라의 각축장이었으며 6세게 중엽을 전후해 신라가 낙동강 유역일대를 바탕으로 삼국통일을 달성, 영주 부석사, 구미 도리상 등과 같은 신라문화의 꽃을 피웠다.


  소수서원과 병산서원, 도동서원 등은 고려와 조선시대 유학을 번성시킨 역사적 자산들이다. 또 조선시대 말에는 낙동강은 조세로 바치던 세미(稅米)의 운송로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일본과 무역을 하던 뱃길로 이용되기도 했다.


  근대에는 한국전쟁의 최후 방어선이었으며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대동맥 역할로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곳이 낙동강이기도 하다...


  [“노후시설 교체 안정적 수돗물 공급”: 지방상수도 위탁관리 시행한 김수남 예천 군수] :


  “물관리 전문기관인 한국수자원공사에 상수도 운영을 위탁관리 한 후 시설과 운영방법개선 및 체계적인 행정지원 등으로 깨끗하고 안정적으로 수돗물을 공급하여 최상의 상수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습니다.”


  김수남 예천군수는 “1974년에 설치된 예천상수도와 20년이 경과된 면 지역(5개면) 상수도의 시설 노후화, 취정수체계 미흡, 관로 부식 등으로 시설에 대한 전면 교체 및 정수방법 전환이 필요했으나, 예천군은 재정부족으로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며 상수도 위탁관리 배경을 설명했다.


  예천군은 지난 2005년 11월 물관리전문기업인 한국수자원 공사에 상수도 관로 283km를 비롯 상수도관련 시설을 위탁하기로 협약을 체결하고 요금 및 고객관리, 시설개선, 시설운영을 맡겼다. 위탁기간은 2035년 10월 30일까지 30년간으로 정했다.


  예천군은 상수도 민간위탁 후 상수도 관련 시설 전반을 보수할 수 있었다. 우수기 탁수유입으로 식수공급에 애로가 있던 예천·용문정수장에 전처리 시설을 설치한 것을 비롯 감천상수도 이물질 여과장치설치, 6개정수장에 대한 자동수질계측기와 소독설비 자동화 등이 가능해졌다.


  특히 정수장 통합관리시스템을 구축, 면단위 정수장을 무인관리하고 있으며 노후관 교체와 계량기 교체를 단행했다.


  (최세호 記者 來日新聞 2009-01-21)


---


  예천공설운동장(公設運動場 等 管內 一圓 陸上 꿈나무 轉地訓鍊場 脚光) [記事] :


  예천공설운동장 및 관내 일원이 육상 꿈나무들의 전지훈련장으로 자리잡고 있다.


  현재 대구 경명여중고 10명, 대구체고 16명, 대구서부고 12명 등 38명의 선수 및 감독들이 예천군 일원에서 맹연습 중이며, 한체대 육상선수들이 전지훈련을 올 예정에 있다.


  최인해 예천육상감독은 “예천의 좋은 이미지를 가져 갈 수 있도록 최선의 지원을 다하고 있다”며 “보다 많은 선수들이 전지훈련을 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백승학 記者 醴泉新聞 2009년 01월 22일 11:02:00)


---


  예천읍상설시장(慶北道 道廳職員과 家族들 傳統市場 설 場보기 同參) [記事] :


  경북 여성단체들이 2009년 1월 22일 설맞이 범도민 복지투게더 주간에 맞춰, 최근 경기불황으로 그 어느 해보다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저소득 취약계층을 위문하고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장보기 활동을 펼쳤다...


  도 문화체육국 직원 및 가족 50여 명은 최근 경기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전통시장 상인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예천군에 위치한 전통시장인 예천시장을 오늘 오전 방문, 설 장보기 행사를 가졌다.


  문화체육국 직원 및 가족 50여 명이 참가한 이날 행사에서 설 제수용품과 생필품을 현장에서 구입하였으며, 예천군 문화관광과 직원 10여 명도 동참하여 상인들의 애로를 청취하고 지속적으로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노력키로 했다...


  이번 설맞이 재래시장 장보기 행사는 최근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재래시장 상인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기 위한 행사로 도청 비상경제상황실 총괄책임자인 이주석 기획조정실장은 일일이 상인들을 만나 경제살리기를 위한 도정의 노력을 설명하고 어려운 경제의 슬기로운 극복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또한, 직원 및 가족들도 서민경제의 현장인 재래시장에서 점심식사로 시장국밥을 먹으며 도정시책을 홍보하고, 주민들에 대한 재래시장 이용 캠페인도 함께 함으로써 재래시장 장보기 붐을 일으키는데 한 몫을 했다.


  (황경호 記者 韓國디지털뉴스 2009-01-22 17:16:39)


---


  황목근(나무 속에 숨겨진 歷史와 文化 .39 :  팽나무, 醴泉 ''''黃木根'''' 有名) [記事] : 맹자는 키 큰 나무가 있는 곳을 고국(故國)이라 부르지 않았지만, 나는 천 년 동안 나무가 살고 있는 곳을 고국이라 부르고 싶은 사람이다. 맹자는 세신(世臣) 없이 키 큰 나무만 살고 있는 게 못마땅했던 모양이지만, 한 그루의 나무가 세신보다 못할 이유도 없다. 만약 맹자가 경북 예천군 용궁면 금남리의 ''''황목근(黃木根: 천연기념물 제400호)''''를 보았다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팽나무는 이 나무의 열매와 관련해서 생긴 이름이다. 이 나무의 열매를 작은 대나무 대롱에 넣고 대나무 꼬챙이를 꽂아 공기 압축을 이용해서 탁 치면 팽하고 날아가는 것을 ''''팽총''''이라 한다. 이 나무의 열매가 여기에 쓰인다고 팽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학명에서도 팽나무의 열매를 강조하고 있다. 간혹 영어권에서 이 나무를 일본 원산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학명에는 중국 원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나무의 한자 이름인 박수(朴樹), 박수(樸樹), 박유(樸楡) 등은 모두 질박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런 한자는 주로 한방에서 사용한다. 이는 이 나무의 껍질을 강조한 이름이다. 팽나무는 껍질만 아니라 느티나무처럼 부모인 느릅나무를 닮아 재질도 좋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나무로 통나무배인 ''''마상이''''를 만들었다. 마상이는 조선시대의 중요한 물길 운송 수단이었다. 일본에서도 이 나무를 소중하게 여겼다. 우리나라에서 5리마다 오리나무를 심었던 것처럼 일본에서는 이 나무를 1리마다 심어 이정표로 삼았다. 일본에서 팽나무를 이정표로 삼은 것은 중국 한 나라 때 가로수로 사용한 회화나무가 자생하지 않은데다가 진 나라 때 가로수로 삼은 소나무가 개미로 잘 죽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나무는 신령스럽지만 나이 많은 나무일수록 영검한 기운을 갖고 있다.(강판권 啓明大 史學科 敎授·''''나무세기'''' 代表 嶺南日報 2005.09.29 (목) 음 (08.26))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페이지만족도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성에 만족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