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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1826:예천충효25(祝장만석/예천방문352)
작성자장병창 @ 2009.01.28 06:40:15


  예천의 자랑(1826) : 예천 충효 25(附 예천 출신 장만석, 22일 부산국토관리청장에 취임...축하합니다/예천방문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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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협회에 가담한
  정항모(鄭恒謨) : 1868(고종 5)-1933, 용궁현 출신, 자는 여현(汝現), 호는 석초(石樵), 본관은 동래, 호군 지(沚)의 후손, 참봉 인창(寅昶)의 장자, 음사로 1895년(고종 32) 중주원 찬의(贊議)를 지냈다. 서재필(徐載弼)과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담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시대를 한탄하다가 일생을 마쳤다.(竺山勝覽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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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한
  정헌모(鄭憲謨) : 1871(고종 8)-1956, 풍양면 우망리 출신, 자는 세여(世汝), 본관은 동래, 인언(寅彦)의 아들, 국권피탈(1910)을 통분히 여겨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친척 정진화(鄭鎭華) 등과 단합하여 왜적에 항거하기로 모의하여 1913년 비밀리에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조직하여 항일 구국에 나섰다. 1927년 정진화 등이 고향에서 체포되자, 그는 즉시 상주(喪主)의 차림으로 변장하고 영동(永東), 강릉 지방을 방황하다가 6년만에 고향에 돌아왔으나 객지에서 얻은 신병으로 고생하다가 타계하였다.(大韓忠義孝烈錄 3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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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 관리도 그의 충절을 꺽지 못한
  정현모(鄭玄謨) : 1850(철종 1)-1923, 풍양면 우망리 출신, 자는 국빈(國賓), 호는 낙은(洛隱), 본관은 동래, 장령 중대(掌令重岱)의 7세손, 함당 진화(涵堂鎭華)의 아버지, 1879년(고종 16)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첫 부임한 후 홍문관, 사헌부, 각 조(曹), 대성(臺省) 등을 두루 거치는 동안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지평(持平), 정랑(正郞), 장령(掌令), 사간(司諫) 등을 지냈다. 갑오경장(1894) 이후에는 의리를 지키고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 선전관(宣傳官)일 때 열성으로 직무에 임하여 그 공로가 두드러져서 고종으로부터 새서표리(璽書表裏)의 은전(恩典)을 입고 총애(寵愛)를 받았다. 국권피탈(庚戌國恥, 1910)을 당하여서는 더욱 문을 굳게 잠그고 통분(痛憤)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일본인 관리가 찾아와 거금으로 매수하려 함에 거절하였더니, 그들은 그를 연금하고 더욱 괴롭혔으나 끝내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6글자를 써보일 뿐이었는데, 간교하고 흉악한 그들도 그의 굳은 충절을 꺽지는 못하였다. 이 정신이 아들 진화(鎭華)에게 이어졌고, 문집이 있다.(竺山勝覽 1934, 朝鮮환輿勝覽 1929, 大韓忠義孝烈錄 370쪽, 醴泉郡誌 2005)


  정현모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청우일록 / 己卯(高宗一六年·1879) / 二月 /二十七日 辛丑晴。 / 世子平復慶科日 / , 看朝報, 上曰, 明日日次儒生殿講, 仁政殿親臨磨鍊, 上曰, 再明日三日製, 通方外爲之, 試紙用大戶紙, 春塘臺親臨磨鍊, 試官仍用矣, 慶科及第取十五人, 而進士南廷澔, 朴泳薰, 黃學秀, 李重德, 李禧戇, 幼學閔泳序, 任百彦, 朱洛珪, 趙鍾?, / <62>/ 尹昌洙, 鄭承漢, 韓景爀, 朴台淳, 鄭玄謨, 洪學周矣。(www.history.go.kr 2007)


  정현모 [記事] : 각사등록 근대편/ 제목 선대로부터 내려온 묘 位土가 역토의 일부로 편입됨이 부당하다는 정국영의 소장과 처분 / 문서번호 京居 前監役 鄭國容等 單子 / 발송일 建陽元年十二月 日(1896년 12월 99일)  / 발송자 前監役 鄭國容/ 前監役 鄭晩容/ .../ 前參奉 鄭元謨/ 前正言 鄭玄謨/ 進士 鄭翼謨/ 前校理 鄭永謨/ 前主事 鄭恒謨/ 前注書 鄭漢鎭 / 접수일 接受建陽元年十二月七日 第 號 / 수신자 配附 驛遞所 局課/ 農商工部大臣 閣下 / 右謹言 生等의 屢世先山이 慶尙北道龍宮郡內下面知保等地에 在?온? 位土四十二斗落을 買置?지 四五百年인? 買賣? 文券이 昭然?온바 該畓이 知保驛에 附近? 故로 結稅을 每年 該驛으로 應給?온직 該驛이 此結稅을 收捧?야 中馬立馬之資에 需用?? 故로 此等畓을 長位土라 名稱?옵더니 昨年該驛을 革罷? 時에 査辦官이 諸般驛土을 査實? 境遇에 該驛所付土實數가 五百二十四斗落인 故로 成冊을 修正?야 舍音의게 付給?야 如例히 賭地을 收捧?야 農商工部에 上納?게?고 其外民畓結稅? 本官으로 應納?야 該驛에 相關이 無?옵더니 忽然今秋에 該舍音 權處夏가 憑藉肥已? 譎計을 暗生?와 抑勒?야 執言?되 前日에 長位土라 名稱?고 該驛에 應稅?던 民畓三四百斗落이 幷爲該驛土라?야 勒奪?기로 爲主?? 中에 生等傳來 四五百年墓位土가 其中에 混入?야 坐失?게 되오니 ?測? 人心이 極히 痛歎?오며 大抵 査辦官行査? 時에 此土? 本是民畓이요 驛土에 無關?은 的認?왓기 驛土査櫛成冊時에 一言半辭도 疑眩詰問?미 初無?엿거? 巧?? 該舍音이 本邑吏屬으로 乘機?奸?야 外樣으로? 驛土라 藉托?고 其實은 騙財로 爲主?야 一邊으로 勒執?고 一邊으로 討索?온니 苟若畓?도 査究치 아니?고 券蹟도 憑準치 아니?고 前日應稅로만 藉口?야 驛土에 勒付?량이면 査辦? 擧措도 宜無? 거시오 又?査辦官下來時에? 엇지 査付치 아니?고 追後로 舍音이 執責??지 非但生等의 先墓位土을 坐失?미 悶歎? ?아니라 該舍音에 憑公挾私?야 抑勒攘奪?미 尤極痛駭??기 生等鄕宗中으로 本官에 呈訴卞明?자?온즉 吏輩의 阻??야 民情이 官府에 上達치 못? 故로 據實齊??오니 詳細洞燭後에 嚴明題下?오셔 該舍音에 理外橫侵?? 惡習을 嚴懲?와 四五百年傳來墓位土後弊을 永杜?심을 千萬伏望홈. / 百六十四度 / 文書課長 / 大臣 協辦 起案 農務局長 / 參互狀辭?면 該舍音의 藉口行悖가 殊涉可駭?지라 該道觀察使의게 現將訓飭?야 ?査報明?라?얏스니 準報措辦?을 佇俟?이 可홈. / 前監役 鄭國容/ 前監役 鄭晩容/ .../ 前參奉 鄭元謨/ 前正言 鄭玄謨/ 進士 鄭翼謨/ 前校理 鄭永謨/ 前主事 鄭恒謨/ 前注書 鄭漢鎭 配附 驛遞所 局課/ 農商工部大臣 閣下 建陽元年十二月 日 接受建陽元年十二月七日 第 號 四百六十四度(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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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괄의 난 때 적장을 죽인 공을 세워 황해도 병사를 지낸
  정호서(丁好恕) ; 용문면 성현리 복천(福泉) 사람, 자는 사초(士樵), 호는 남애(南崖), 본관은 나주, 이조 참의와 대사헌을 지낸 윤복(胤福)의 4자, 언원(彦瑗)의 아버지, 호공(好恭, 1565生, 字希溫, 進士, 文科)ㆍ호관(好寬)ㆍ호선(好善)의 동생, 호제(好悌, 1576生, 字士順, 進士)의 형이다. 1609년(광해군 1)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지냈고,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지낼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적장(敵將)을 죽이는 공을 세워 황해도 병사(兵使)를 지냈다. 그 후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韓國人의 姓譜). [王朝實錄] : 1609년(광해군 1) 11월 21일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고, 정언으로서 사정(私情)이 행해진 과거 응시자의 명단을 늦게 올린 잘못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1610.11.20, 1610.11.22, 1610.11.23). 1614년(광해군 6) 7월 3일에 해운 판관(海運判官)에 제수되었고, 병조좌랑 지제교로서 1616년(광해군 8) 11월에 편찬된 <선조실록> 의 편수관이었다. 1619년(광해군 11) 3월 14일 강홍립(姜弘立)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패전의 전말을 치계(馳啓)하였다. 1624년(인조 2) 1월 28일에 이괄의 난 때 서로(西路)의 수령(定州牧使)으로서 잘하여 비변사의 포상 신청으로 상을 받았고, 동년 4월 8일 정주 목사로서 통정대부의 자계(資階)를 받았는데 역적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킨 초기에 맨 먼저 적의 사자를 베고, 근왕(勤王)하기를 자청하였기 때문이었다. 1625년(인조 3) 10월 20일 체찰사 장만(張晩)이 왕에게 아뢰기를, "정주목사 정호서가 ''''''''''''''''선천(宣川)ㆍ곽산(郭山)의 군사를 자기에게 붙여준다면 능한산성(凌漢山城)을 사수하겠다''''''''''''''''라고 하므로, 그 말대로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영변(寧邊)의 본성(本城)은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려운데 판관 홍호(洪鎬, 龍宮縣人)가 다시 수축해서 성이 매우 견고합니다. 그리고 3-4천의 군사가 있으니 적(이괄)이 반드시 침범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백성들이 모두 그 성에 들어가 지키기를 원하고 있고, 사졸들 또한 격려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홍호의 재량과 국량이 이러하니, 매우 가상합니다."라고 하였다. 1627년(인조 5) 1월 24일 황해도 병사(黃海道兵使)로서 비국에서 아뢰어 활, 화살 등을 지원받았으나 그 이튿날 황주(黃州)가 무너져 산산(蒜山)에 주둔하고 있는데, 적진(女眞族)의 유격 기병대가 이미 산산까지 들어왔다고 장만(張晩)에게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고(1627.1.28), 북쪽 변방으로 귀양을 갔다가(1627.5.15) 영일(迎日)로 옮겼다. 1631년(인조 9) 6월 20일 황주의 백성들이 상소하여 신원하니 의금부가 회계하기를, "정호서는 정묘호란 때에 한 도의 주장으로서 성을 버리고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주(安州)가 무너지고 평양이 무너져서 적들이 파죽지세로 몰려오자 황주성을 지키던 군사들이 소문만 듣고도 기가 죽어 한꺼번에 무너져 흩어졌으니, 백면서생인 정호서가 어떻게 고립된 성을 지키면서 기세가 등등한 적과 대항할 수 있었겠습니까? 죄는 면하기 어려우나 정상은 용서할 만합니다."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638년(인조 16) 2월 28일 태안 군수로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1640년(인조 18) 10월 7일 인동 부사로서 특지(特旨)로 동래 부사를 제수받았고, 1642년(인조 20) 1월 8일에 동래 부사로서 왜차(倭差)의 말을 치계(馳啓)하였다. 병조 정랑, 목사를 지냈다.(司馬榜目,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備邊司謄錄] : 1624년(인조 2) 1월 27일 비변사가 왕에게 아뢰기를, "평안도에 변이 생겼을 때 정주목사(定州牧使) 정호서는 인정이 흉흉하고 평정이 되지 않은 초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적을 박차고 돌아섰으니 반드시 서둘러 시상하여 다른 사람을 격려 권장해야 합니다. 정호서는 순역(順逆)이 구분되지 않고 향배(向背)가 결정되지 않는 때에 능히 흉계를 알아 먼저 적의 사신(使臣)을 베고 도주(道主)에게 알려서 임금을 위하여 힘쓸 것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자청하였으니 더욱 그 공이 드러납니다."하였다. 동년 4월 8일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능히 흉계를 꿰뚫어 보고, 먼저 적사(賊使)를 베고 도주(道主)에게 전보(轉報)하고, 근왕(謹王)을 자청하였으니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당초 비변사에서 논상할 것을 입계(入啓)하였으나 임금의 답에 남이흥(南以興)을 성공한 뒤에 논상하라고 판하(判下)하셨습니다. 정호서는 백면서생으로 비록 전투한 공은 없으나 앞서 적을 벤 의리가 있고, 뒤에는 근왕한 노고가 있음에도 은전(恩典)을 입지 못하였으니 물정이 칭원(稱怨)합니다. 현재 곽산(郭山)의 능한대장(凌漢大將)으로 있으나 본군의 수령은 곧 당상(堂上)의 관원입니다. 정호서는 당하관(堂下官)으로서 절제와 호령에 있어 많은 미편한 점이 있습니다. 마땅히 별도의 처치가 있어야 하나 은명(恩命)에 관계되므로 감히 여쭙니다."하니, 왕이 "가자(加資)하라."라고 하였다. 1638년(인조 16) 1월 20일 온성 부사(穩城府使)를 이임하였고, 동년 3월 14일에는 태안 군수(泰安郡守)를 이임하였고, 1642년(인조 20) 1월 9일 동래 부사를 이임하였고, 그 후 목사를 지냈다.(備邊司謄錄)


  정호서 [記事] : 국역비변사등록 새창/ 기사제목 當此人情洶洶, 不定之初, 決死背賊 ./ 왕 재위년도  인조 2년  / 월일  인조 2년(1624) 1월 27일 / 아뢰기를,  "인정(人情)이 흉흉(洶洶)하고 평정이 되지 않은 초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적(賊)을 박차고 돌아선 정충신(鄭忠信)·남이흥(南以興)·정호서(丁好恕)·안몽윤(安夢尹) 등과 같은 사람은 반드시 정문익(鄭文翼)의 예(例)에 의하여 서둘러 시상(施賞)하여 다른 사람을 격려·권장해야 할 일임에도 연신(筵臣)이 이는 분내사(分內事 : 본분(本分)으로서의 일 )이므로 굳이 시상할 것이 없다하여 공사(公事)가 유보(留保)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신 등은 이 일이 매우 긴급한 일이라 생각되므로 감히 번거롭게 아룁니다. 유효걸(柳孝傑)이 남이홍(南以興)·정충신(鄭忠信) 등 여러 사람과 협력하여 적을 토벌(討伐)하고, 정두원(鄭斗源)은 적변(賊變)이 있음을 들었을 때 곧 병사를 거느리고 수부(帥府)로 먼저 달려왔으니 모두 아름다운 일입니다. 공효(功效)를 이루기를 기다려서 큰 상(賞)을 내리도록 특별히 논의하라고 도원수에게 하유(下諭)하소서. 또 구성(龜城)의 장전(長典)은 명련(明璉)이 병사를 동원하여 적을 따른 뒤 곧 사람을 달려보내 변(變)을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였으나, 역시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아울러 보고를 들고 달려간 사람도 감사로 하여금 특별히 상전(賞典)을 베풀게 하는 것이 의당하옵니다. 또 정호서(丁好恕)는 순·역(順逆)이 구분되지 않고 향배(向背)가 결정되지 않은 때에 능히 흉계(兇計)를 알아 먼저 적의 사신을 베고 도주(道主)에게 전보(轉報)하여 임금을 위하여 힘쓸 것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자청(自請)하였으니 더욱 드러납니다. 그 형 호선(好善)은 처음 일이 긴박하지 않을 때 적구(賊口)에서 나왔음에도 일반적으로 나수(拏囚)를 청하였었습니다. 지금 호선(好恕)의 서계(書啓)를 보니 그 형의 억울함을 알 수 있습니다. 흉적(兇賦)들이 항상 중요하다는 말을 빌어 사람의 귀를 현혹되게 하려는 꾀가 대부분 이런 유(類)입니다. 정호선(丁好善)도 마땅히 분간(分揀)되어 석방되어야 하나 은명(恩命)에 관계된 일이므로 황공하오나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대로 하라. 남이흥 등은 성공(成功)한 뒤 논상(論賞)하는 것이 좋겠다. 정호선(丁好善) 문제는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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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호서 [記事] : 국역비변사등록 새창/ 기사제목 賊使先斬 ./ 왕 재위년도  인조 2년  / 월일  인조 2년(1624) 4월 8일 / 아뢰기를,  "평안도에 변이 생겼을 때, 정주목사(定州牧使) 정호서(丁好恕)는 능히 흉계를 꿰뚫어 보고, 먼저 적사(賊使)를 베고 도주(道主)에게 전보하고, 근왕(勤王)을 자청하였으니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당초 본사(本司)에서 남이흥(南以興)·정충신(鄭忠信)·안몽윤(安夢尹) 등과 같이 정문익(鄭文翼)의 예에 의하여 논상할 것을 입계하였으나 성비(聖批)에 남이흥(南以興) 등을 성공한 뒤에 논상하라고 판하(判下)하셨습니다. 호서는 백면서생으로 비록 전투한 공은 없으나 앞서 적을 벤 의리가 있고, 뒤에는 근왕한 노고가 있음에도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물정이 칭굴(稱屈 : 칭원 )합니다. 현재 곽산(郭山)의 능한대장(凌漢大將)으로 있으나 본군의 수령은 곧 당상(堂上)의 관원입니다. 호서는 당하관으로서 절제와 호령에 있어 많은 미편한 점이 있습니다. 마땅히 별도의 처치가 있어야 하나 은명에 관계되므로 감히 이를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가자하라. 이 외에 논상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초계(抄啓 : 뽑아서 아룀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www.history.go.kr 2008)


  정호서 [記事] : 국역비변사등록 새창/ 기사제목 南漢修治之役 ./ 왕 재위년도  인조 16년  / 월일  인조 16년(1638년) 1월 20일 / 아뢰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축하는 것은 매우 긴요하고 중대한 일이니, 광주부윤(廣州府尹)은 반드시 재능이 있고 젊어서 일을 부지런히 할 수 있는 사람을 얻어야 그 사무를 맡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의 부윤 허휘(許徽)는 본래 잘 다스린 성과와 부지런히 애쓴 공로가 있지만 나이가 70세가 넘어서 근력이 부족할 것이며, 게다가 몸에 질병까지 있어서 오랫동안 직무를 폐하고 있다 하니 허휘를 바꾸어 임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 대임(代任)에 있어서는 문무(文武) 품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각별히 선발하는 것이 온당할 것입니다. 또 온성부사(穩城府使) 정호서(丁好恕)도 일찍이 재능과 국량이 있다고 일컬어진 자였으나 지금 나이가 70세에 박두하여 쇠병(衰病)이 이미 길어져 있으니 외딴 지방의 중요한 진(鎭)을 다스리는 임무를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호서를 바꾸어 임명하고 그 대임을 각별히 뽑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www.history.go.kr 2008)


  정호서 [記事] : 국역비변사등록 새창/ 기사제목 武藝勸奬 ./ 왕 재위년도  인조 16년  / 월일  인조 16년(1638년) 3월 14일 / 아뢰기를  "태안군수(泰安郡守) 정호서(丁好恕)가 몸에 질병이 있는 까닭에 오랫동안 부임하지 못하여 관소를 비워 둔 지 오래 되었으니 매우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정호서를 면직하고 합당한 다른 인물이 있으면 문·무·음관(蔭官)을 가리지 말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잘 뽑아서 임명하게 하여 서둘러 내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www.history.go.kr 2008)


  정호서 [記事] : 국역비변사등록 새창/ 기사제목 東萊府使爲任 ./ 왕 재위년도  인조 20년  / 월일  인조 20년(1642) 1월 9일 / 아뢰기를  "''''''''''''''''동래부사(東萊府使)는 임무가 매우 무겁고 앞으로의 사태도 염려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새로 제수된 부사 윤득열(尹得悅)은 사람됨이 자상하기는 하지만 위엄과 명망이 부족하여 사람들이 모두 합당치 못하다고 합니다. 이 사람을 바꾸어 임명하고 후임에는 질직(秩職)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재망(才望)과 계려(計慮)가 있는 사람으로 각별히 가려보냄이 마땅할 듯하여 감히 아룁니다''''''''''''''''하니 답하기를 ''''''''''''''''전의 부사를 우선 그대로 두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전 부사 정호서(丁好恕)는 나이가 70세가 넘었으니 비록 재국(才局)은 있으나 정신과 근력(筋力)이 국경의 일을 감당치 못할 것이며, 또 왜인들의 습성은 늙은 이는 얕보고 젊은이는 어렵게 대하는 경향이 있으니 앞으로 그들을 대하는데에도 염려스러운 바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바꿨는데 다시 그대로 두는 것도 어색할 듯하여 감히 여쭙니다." 하였다.(www.history.go.k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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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운동을 하여 애국장을 받은 정훈모(鄭燻謨)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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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한일운동을 전개하여 애국장에 추서된
  정휘세(鄭輝世) : 1905(광무 9)-1931, 지보면 도장리 익장(益庄) 출신, 자는 보현(寶顯), 본관은 동래, 희모(熺模)의 5남, 어려서부터 항일운동의 선봉에서 일가인 추산(秋山) 정훈모(鄭燻模) 의사와 더불어 뜻을 함께 하다가 왜경의 요시찰 대상이 되어 행동에 제약을 받자, 약관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려공산청년회원으로 신호(神戶), 대판(大阪)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1930년 일본 경찰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9개월간 경도(京都)재판소에 규류, 1931년 3년형을 받고, 그해 6월 19일 나량(奈良)형무소에 수감,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동년 11월 24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獨立運動史資料集 別集 3卷, 在日本韓國人民族運動資料集, 知保面誌 1987, 정성수, 醴泉郡誌 2005)


  정휘세(醴泉 出身 獨立運動家 6名 光復節 맞아 褒賞) [記事] : 국가보훈처는 광복 61년 광복절을 맞아 항일운동을 전개한 예천 출신 6명을 포함 모두 313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했다. 이번에 포상한 독립유공자의 훈격은 건국훈장 145명(독립장 3, 애국장 43, 애족장 99), 건국포장 47명, 대통령 표창 121명 등이며, 이 중에서 예천군 출신이 6명 포함됐다. 정휘세(1916-1931, 일본방면활동) 선생이 애국장, 황창섭(1896-1949, 국내항일) 선생이 애족장, 박규수(1991-1947, 3.1운동)·이용헌(1880-1934, 3.1운동)·이종협(1895-1929, 3.1운동)·이준형(1883-1940, 3.1운동) 선생이 대통령 표창 포상을 받았다.(醴泉新聞 2006년 08월 17일 11: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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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 때 온 집안 장정들을 이끌고 솔선하여 의병으로 나아가 싸운 정희지(鄭希智) : 旣載
  항일운동을 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조용구(趙鏞九) : 旣載
  항일운동을 하여 애족장이 추서된 조용필(趙鏞弼)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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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임정의 군자금 모금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룬
  조해제(趙海濟) : 1885(고종 22)-?, 지보면 지보리 출신, 농업에 종사하다가 중국 상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자금모집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1920년 2월 하순에 주동자 김연환(金璉煥)이 체포되면서 일본 경찰의 수사가 강화되어 그는 3원을 내었다는 죄목으로 1920년 5월 16일에 대구로 송치되었다. 당시 35세였다.(慶尙北道史 中卷 352-353쪽, 慶北義兵史 504쪽, 高警 268 269쪽, 獨立有功者功勳錄 7卷 274쪽)


  조해제 [記事] :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제목 大韓民國臨時政府의 資金募集을 하다  / 년월일 1920-05-16 / 주제분류 민족해방운동,대중운동 > 민족주의운동 > 대한민국임시정부 > 기타국내활동/ 출전 高等警察要史/ 내용 : 大韓民國臨時政府의 資金募集을 하다가 2月 29日 慶尙北道 尙州邑에서 不審 檢問으로 피체 되었던 金璉煥이 關聯者와 함께 送致되다. 관련된 자의 주소와 성명은 다음과 같다./ 本籍 慶尙北道 安東郡 西後面 金漢洞  / 住所 中國 奉天 西塔橫街  / 寫寄 鍊煥 器重 / 無職 金璉煥(40歲) / 本籍 忠淸南道 禮山郡 邑內 / 住所 中國 上海  / 無職 金法(33歲) / 本籍 慶尙北道 星州郡 大家面 七峰洞  / 住所 中國 上海  / 無職 金昌淑(43歲) / 本籍 慶尙北道 英陽郡  / 住所 不定 / 無職 權泰馹(31歲) / 本籍 慶尙北道 英陽郡 石保面 菊山洞  / 住所 中國 奉天  / 李運衡(39歲) / 本籍 慶尙北道 安東郡 豊西面 素山洞  / 住所 中國 奉天  / 農業 金炳河(50歲) / 本籍 慶尙北道 醴川郡 知保面 知保里  / 住所 中國 奉天  / 農業 趙海濟(35歲) 高等警察要史(www.history.go.kr 2008)


  조해제 [記事] : 한국근현대인물자료/ 이름 김동환 ( 金?煥 )  / 민족구분 한국인 / 이명 晩雲, 金器仲(출전 왜정인물 2권)/ 생년월일 1881-99-99(출전 왜정인물 2권)/ 출신지 慶尙北道 安東郡 西後面 金湲洞 852(원적)(출전 왜정인물 2권)/ 현주소 京城府 通洞 14(출전 왜정인물 2권)/ 가족관계 부 金翊模(출전 왜정인물 2권)/ 학력 15세까지 자택에서 한문을 배움(출전 왜정인물 2권)/ 경력및활동 : 1912년 봄 奉天으로 이주한 이래 不逞한 무리와 사귀고, 독립운동에 분주함/ 1920년 1월 경성에 와서 上海 임시정부 내무부에 근무하는 金法와 만나 독립자금 모집에 관한 협의를 함/ 愛國金納入通知書 및 재무총장 李始榮의 명의를 사용한 불온 문서를 교부받고 대구로 가서 徐健洙에 대해 대한민족은 그 역사를 잊지 않고 조국의 회복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취지의 불온한 언동을 함/ 1920년 중 金炳河 외 3명에게 上海 임시정부의 정황을 과대 吹廳하고 독립운동자금의 모집을 했음/ 1920년 9월 제령 제7호 위반 사건으로 징역 1년에 처해짐(출전 왜정인물 2권)/ 재산 : 본인은 자산이 없고, 친아버지는 1만5천 엔을 소유함(출전 왜정인물 2권)/ 인물평외모 : 키 5척 4촌, 얼굴이 둥글고 넓적하며 눈이 큼, 배일사상이 농후하여 間島, 滿州 쪽의 불령한 무리들과 결탁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자(출전 왜정인물 2권)/ 사회관계 : 李昌求, 金法, 金昌淑, 權泰馹, 李運衝, 金炳河, 趙海濟(출전 왜정인물 2권)/ 참고문헌 왜정시대인물사료(www.history.go.kr 2008)


  조해제 [記事] : 시대별연표/ 날짜 1920년 05월 16일 / 제목 大韓民國臨時政府 자금모집 중 慶北尙州邑에서 피체된 / 출전 高等警察要史 일제침략하 36년사-5 p.288 / 내용 : 大韓民國臨時政府 자금모집 중 慶北尙州邑에서 피체된 金璉煥 관련자와 함께 송치. 관련자는 金法(33), 金昌淑(43), 權泰馹(31), 李運衡(39), 金炳河(50), 趙海濟(35)이다/ 高等警察要史 일제침략하 36년사-5 p.288(www.history.go.k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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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년 의진에 협력한
  주취규(朱聚奎) : 예천 출신, 일명 문오(文五), 본관은 신안, 구한 말의 의병으로 이강년 의진에 협력하였다.(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415쪽, 獨資 1권 3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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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채동진(第61周年 光復節 慶祝式 : 獨立有功者 褒賞) [記事] : 경북도는 2006년 8월 15일 오전 의성문화체육회관에서 김관용 도지사와 이상천 도의회의장을 비롯한 기관단체장, 보훈단체장, 생존애국지사 및 유족, 시민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61주년 광복절 경축식''''''''''''''''을 갖고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17명의 유족들에게 훈·포장과 대통령표창 등을 전달했다. 이인술(81·포항) 애국지사 등 14명에게는 기념품을 전달했다. ◇예천군 독립유공자 및 포상자 : ▷김태성 손 김백이(예천읍 대심리) ▷채동진 증손 채춘석(예천 하리면 금곡리)(황재성 記者 每日新聞 2006년 0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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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임정의 조사원인
  천용덕(川龍德) : 1919년 11월 전후 예천 지방의 유력자, 재산가, 학교, 종교 등을 조사하여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고하는 조사원이었다.(大韓民國 元年 11月 各道 調査員 名簿, 臨時政府 제5부 獨立運動年鑑 吳始林 譯 大衆實話社 서울 1970 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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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년 의병에 가담한
   최봉래(崔鳳來) : 1882(고종 19)-?, 용궁현 출신, 1908년에 의병에 가담하였다.(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419쪽, 獨資 別1卷 463쪽, 梅泉野錄 4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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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숙왕 때 1등공신인
  최안도(崔安道) : 1294(충렬왕 20)-1340(충혜왕 복위1), 아명(兒名)은 나해(那海), 그 선조(先祖)는 해주(海州) 사람으로 용주(龍州, 龍宮)에 이주하여 살았다. 본관은 용궁(龍宮), 용주 최씨(龍州崔氏)의 시조 광(光)의 증손, 용궁 최씨(龍宮崔氏)의 시조 현(玄)의 아들, 안도(安道)의 어머니는 궁비(宮碑)였다. 안도(安道)는 내료(內僚)로서 충선왕을 연경 행저(燕京行邸)에서 섬겼고, 이로 하여 몽고어와 중국어에 통하게 되었다. 후에 충숙왕의 요속(僚屬)으로 되었고, 그 공로가 인정되어 토지와 노비를 받았다. 이의풍(李宜風)과 다 같이 충숙왕의 페행이었는데, 조적(曺적)과 허경(許慶) 사이에 재물로 인한 분쟁이 있었을 때 최안도와 이의풍이 허경의 편에 서서 조적을 참소했다. 그런데 조적은 한창 충선왕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때라 조적은 안도를 참소하여 장형(杖刑)을 가하여서 섬으로 귀향보냈다. 얼마 후에 다시 소환되어 총애를 받았고, 이의풍과 함께 늘 왕의 곁에 있으면서 조적에 대한 보복에만 전심하였다. 충숙왕이 참소를 당하여 원(元) 나라에 체류할 때 최안도를 시종으로 삼았던 바 공로가 있었으므로 전민(田民)을 더 받았다. 즉 1327년(충숙왕 14) 11월 무자일(戊子日)에 왕이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내가 원 나라 서울에 체류한 지 5년 간 간신(奸臣)들이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려고 음모할 때 시종하던 신하들이 시종일관(始終一貫) 절개를 지켜 나를 도왔다. 그 공로를 기록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상호군 최안도(上護軍崔安道) 등을 1등공신으로 삼고, 토지와 노비를 줄 것이고, 그 부모와 처자들에게도 차등있게 작위(爵位)를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은 연경(燕京)에 5년 간 머무는 기간에 우울과 근심으로 상심한 나머지 귀국한 후에도 늘 후면 궁전에만 들어앉아서 희망을 잃은 사람처럼 즐거워하지 않았고, 정사(政事)도 친히 보지 않았다. 어떤 때에 최안도는 김지경(金之鏡), 신시용(申時用), 승려 조륜(趙倫) 등과 더불어 정권을 제 마음대로 행사하면서 뇌물에 의하여 벼슬을 팔고 송사(訟事)를 좌우하는 등 못하는 것이 없고, 대간(臺諫)들이 탄핵 상소(彈劾上疏)해도 중간에서 알고 왕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당시 원(元) 나라 조정에서는 우리나라에 성(省)을 설치하려 하였는데, 최안도와 김이(金怡) 등이 극력 변론하여 그 문제가 중지되었다. 그 공으로 또 전민(田民)을 받았다. 최안도가 여러 관직을 거쳐서 상호군(上護軍)으로 승진되었을 때에 원 나라 사신 매로(買로)가 왔었다. 최안도와 김지경(金之鏡)은 자기들이 제 멋 대로 행동한 것을 생각하고 자기에게 화가 치밀까 두려워서 밤낮 근심으로 지내다가 매로(買로)가 귀국한 후는 기뻐하고 더욱 교만해졌다. 왕이 최안도를 평양으로 보내서 매로에게 금, 은, 비단, 모시를 선물하였으나 매로가 받지 않았다. 즉 1328년(충숙왕 15) 7월 병자일(丙子日) 매로와 역륵미실불화가 원 나라로 돌아가므로, 왕이 최안도를 평양까지 보내어 금은, 비단, 모시 등을 선물로 주었으나 매로는 받지 않았다(高麗史 35卷). 최안도는 그것을 자기것으로 만들었다. 최안도는 김지경(金之鏡), 이인길(李仁吉), 신정(辛貞), 이중양(李仲陽), 배전(裵佺), 이길상(李吉祥), 정도적불화(鄭都赤不花) 등과 함께 왕궁에서 사용할 말 300필(匹)을 강화에서 목축(牧畜)했는데, 주민들의 재물을 횡포하게 약탈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거의 다 유리 해산(流離解散)되었다. 왕이 평주(平州)에서 사냥하였을 때에 최안도가 행재(行在)로 왕을 찾아왔는데, 안도의 추종이 어찌나 많았던지 왕이 바라보고 원 나라 사신이 오는 줄로 생각하고 깜짝 놀랐다. 최안도가 당도하니 왕이 노하여 그를 섬으로 귀양가라 명령했다. 그러나 최안도는 10여 일을 머물다가 출발하였다는데, 그의 추종은 더욱 많았고, 유형지(流刑地)로는 가지 않고 양광도(楊廣道)를 유람하고 돌아다녔다. 당시 안렴사 마계량(按廉使馬季良)은 탐욕스러웠고, 소(牛)의 내장(內臟)을 잘 먹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조소(嘲笑)하여, "말이 소를 먹는다"라고 말했다.


  최안도가 왔을 때에는 마계량과 고을 원들이 다투어 위로해 주었는데 그 대우가 좀 박하면 최안도는 곧 매를 휘둘렀다. 충혜왕 초엽에 최안도를 소환하여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임명했다. 좨주 김우류(祭酒金右류)가 과거(科擧)의 감시(監試)로 있을 때 10여 세에 불과한 최안도의 아들 최경(崔璟)이 학문도 모르는데, 시험에 합격시켰다. 또 제학 한종유(提學韓宗愈), 대언 이군해(代言李君해)가 공거(貢擧)로 시험을 주관했을 때에도 최경이 또 합격하였다. 이에 헌납 허옹(獻納許웅), 정언 조렴(正言趙廉), 정천유(鄭天濡) 등이 글을 올리기를, "최안도는 외람히도 법도로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직무에 있으면서 젖내나는 어린 아이인 그의 아들 최경을 과거에 합격시켰으니, 그를 처벌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은 허락치 않고 그 글을 최안도에게 보여 주었다. 대관(臺官)들은 최경이 차작(借作)해서 합격된 것과 그 조모(祖母)가 천인이라는 이유로 9년 간이나 의첩(依牒)에 서명하지 않았던 바 왕이 성관(省官)을 독촉하여 서명케 하였다. 왕이 동지 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벼슬을 고쳐주고 협모동덕공신(協謀同德功臣) 칭호를 주었고, 원 나라에서도 정동행성 좌우사 원외랑(征東行省左右司員外郞) 벼슬을 주었다. 이윽고 원 나라에 들어가서 숙위(宿衛)하였는 바 원 나라가 그에게 중상감승(中尙監丞) 벼슬을 주었다가 태부 태감(太府太監)으로 전직시켰다. 이어 원 나라 황제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귀국했다. 남씨(南氏)란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충숙왕이 사랑하는 여자였다. 그런데 최안도와 김지경은 그 여자를 간통했다. 최안도는 충혜왕 후원년(後元年)에 47세로 죽었다. 아들은 유(濡), 원(原, 一名 璟), 숙신(淑臣), 문구(文丘)이다.(高麗史 124卷 列傳 37 崔安道傳, 韓國人의 姓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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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 출신 장만석, 22일 부산국토관리청장에 취임...축하합니다.


  장만석(장만석 釜山國土管理廳長 就任) [記事] :


  장만석(55) 전 국토해양부 교통정책관이 2009년 1월 22일 부산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취임했다.


  장 청장은 경북 예천 출신으로 연세대 토목공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기술고시 16회다.


  건설교통부에서 도로건설과장 도로정책과장 정보화국제협력관 교통정책관 등을 역임했다.


  장 청장은 취임사에서 "녹색뉴딜사업인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모든 역량을 다하고, 국가경제 활성화를 위한 재정 조기집행에도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김용호 記者 國際新聞 200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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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352


  황목근 동제 [記事] : 용군면 금남리 금원마을에는 황목근이라는 이름을 가진 팽나무가 천연기념물(용궁면 금남리 600번지)로 지정되어 있다. 마을 주민들은 옛부터 무병장수와 주민 화합,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 제사를 이 나무에서 지내왔다. 이 마을에서는 100여년 전부터 마을 주민들이 쌀(白米)을 모아 저축한 것을 1914년 마을 공동 재산으로 임야를 구입하였다. 1939년 금원마을 사람들이 마을 수호신인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재산을 나무 앞으로 등기하기로 하면서 이름을 황목근(黃木根)으로 지었다. 나무가 5월이면 누런 꽃이 피어서 누런 황(黃) 자와 나무를 의미하는 목근(木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나무 앞으로 세금도 나오고 금원마을에선 이 황목근과 관련한 기록이 1903년부터 전해오는데, 1903년의 회의록 금원계안, 1922년의 저축구조계안, 임원록 등이 모두 전하고 있다. 이 황목근은 마을의 당산목이기도 하지만, 칠월 칠석 백중에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서 제사는 안 지내고 잔만 올리고 난 뒤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서 놀면서 쉬기도 한다. 매년 정월대보름 자시(12시 30분)에 보호수이자 당산목인 황목근에 당제를 지낸다. 정월 초하루에서 보름까지 혹 마을에 상을 당하거나 나쁜 일이 있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다음 달로 넘겨서 좋은 날을 다시 택하여 제를 올리지만 만약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다음 해로 돌리기도 한다. 동제를 담당하는 제관은 동제를 지내기 3일 전에 생기가 맞고 깨끗한 사람을 택한다. 또 부부가 함께하고 자녀 중에 불길함이 없는 덕망있는 사람으로 선정된다. 제관을 선출하는 사람들은 황목근회 회장과 총무, 동네 어른신들이 모여서 선출하는데 특별한 일이 없으면 동네 사람들도 모인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의 집 앞에는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리며 3일 동안 집밖에 나가는 것을 삼가고 몸을 항상 깨끗하게 한다. 집밖을 나가는 것을 삼가는 것은 험한 것이나 부정한 것, 그리고 더러운 것을 보지 않기 위해서이다. 혹여나 집밖을 나가서 그런 것을 보게 되면 부정 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금기는 제관으로 뽑힌 당사자뿐 아니라 그 집안 사람들 모두 지켜야 하는 금기 사항이다. 제관은 매년마다 생기복덕에 맞추어서 새로 뽑고, 유사는 그 기간이 3년이다. 지금은 제관으로 된 사람이나 유사를 할 사람이 잘 없기 때문에 제관으로 뽑힌 사람은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계속적으로 제관을 하고 유사로 뽑힌 사람도 3년 뒤라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유임된다. 선출된 사람은 거부할 수 없으며 아무 말 없이 제관을 해야 한다.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축관(1명), 제관(1명), 유사(1명)이다. 제관을 뽑게 되면 금줄을 꼬아서 황목근에도 금줄을 치고, 마을의 입구에도 금줄을 친다. 금줄은 왼새끼를 꼬아서 창호지를 꽂는다. 그리고 깨끗한 소나무를 꺾어서 황목근 앞의 제당에 세우고 이 위에 다시 금줄을 돌돌 돌린다. 금줄은 제삿날 하루 전에 치며, 황토를 뿌린다. 과거에는 마을 어귀에도 금줄을 치고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으나, 지금은 하지 않는다. 제물은 제삿날 2일 전쯤에 총무와 유사가 용궁장에서 준비한다. 제물도 깨끗한 집을 골라 장만하며, 가격도 깎지 않는다. 제물은 떡, 돼지머리, 막걸리, 족, 과일(사과, 밤, 대추, 곶감)과 채전을 준비하며, 떡은 떡시루를 그대로 올려놓는다. 제기는 한번 사용한 것은 다시 사용하지 않고, 다시 구입하여 사용한다. 현재의 동제는 동내돈과 황목근회의 돈으로 하고 있지만 이전에는 동내돈이 없을 때에는 각 호당 쌀 한 되씩을 거둬서 했다고 한다. 제사 음식은 백설기(3되), 쇠고기(삶은 것), 나물(시금치, 도라지, 콩나물), 곶감, 사과, 대추(배와 밤은 하지 않는다), 술(막걸리), 탕(고기미역국)과 밥은 각각 한 그릇씩을 준비한다. 2003년 동신제 제물 구입 내역이 적힌 장부가 있다. 제를 지내는 당일 제관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목욕을 하고 몸을 깨끗하게 한다. 유사를 담당한 집에서는 음식을 준비한다. 제를 지내기 1시간 전에 만든 음식을 싣고 황목근에 간다. 참기름을 담은 종지에 불을 붙이고 음식을 차려놓고 제를 지낸다. 제사의 순서는 초헌과 아헌, 종헌 순으로 진행되고, 축문을 읽는다. 축문도 과거에는 한문으로 된 것을 읽었으나 올해는 한글로 된 축문을 읽었다. 이는 축관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漢文 洞神祝文 : 維歲次 正月 朔十五日 敢昭告于/ 里社之神 神靈在上 福祿是荷 明佑律多 黎情久賴 澤斯吉日/ 行此祀事 略需菲薄 微誠告禱 昭示勿秘 訴願惟格 福祿川臻/ 災殃雪消 萬事順迪 四境淸淨 田野豊登 邑村咸寧 人心和樂 / 官厄消滅 家有倉  民無疾病 伏惟尊靈 庶遂所望/ 尙饗/


  한글 축문 : 유세차 무인 정월 갑인삭 십오일 을축 감소고우/ 동신을 섬기고 신령을 뫼시니 복록과 제물이 많으며 밝은/ 도움이 오래도록 힘을 입게 길일날 정월대보름을 택하여/ 제사를 지내옵니다. 간단한 음식과 주과포로 적은 정성을 드리니/ 동민의 소원 성취를 원하오며 복과 녹은 강물과 같고 동민의 제앙은/ 눈과 같이 사라지고 만사가 순탄하고 들에는 풍년이 들고 마을이 편안하며/ 동민의 인심은 화목하고 집집마다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하고 동민들의 건강과 / 행운을 엎드려 비오니 모든 소망이 어루어지게 하여 주소서/ 상 향/


  제를 지낸 후 소지는 제일 처음 황목근에 산다고 하는 두들신에게 올린다. 그리고 올 한해도 동네를 안정과 풍년을 비는 소지를 올리며 다음으로 제관은 마을의 각 호당 호주 이름을 부르며 마을의 각 집의 안녕을 빈다. 제사가 끝나고 나면, 아침에 마을 주민들이 동신목거리(황목근 앞)에 모여 음복을 한다. 그러나 현재는 제관집에서 이장과 보존회 회원들이 모여 간단히 한다. 한편 금남리 1반 사람들은 2반을 지나 논길을 문경 방향으로 계속 가다보면 논길의 옆에 큰 버드나무 한 그루와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몇 개의 나무들이 있다. 그리고 큰 버드나무 앞에 단상이 마련되어 있다. 금남리 1반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동제를 지낸다. 원래 금남리 전체적으로 황목근에서 함께 지냈지만 10여년 전부터 이곳에서 1반 사람들은 따로 제사를 지낸다. 그래서 1반에 살고있는 금남리 이장은 황목근 제사에 참석했다가 다시 1반의 동제에 참석하기도 한다.(제보자 강희석 37 남 2004년 제관, 엄영우 65 남 보존회장)(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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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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