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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1827) : 예천 충효 26(附 예천방문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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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때 왜구 격파로 공신이 된
최원(崔源, 崔原) : ?-1354(공민왕 3), 용궁현(龍宮縣) 출신, 일명 경(璟), 본관은 용궁, 안도(安道)의 아들, 1349년(충정황 1)에 좌대언(左代言), 개성 윤(開城尹)에 이어 판도사 판서(版圖司判書)를 지냈고, 1352년(공민왕 1) 왜구를 격파하여 진력협모공신(陳力協謀功臣)이 되고, 밀직사 부사(密直司副使)가 되었다, 이 해에 안우(安祐), 최영(崔瑩) 등과 함께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를 시기하던 재상
김보(金普)의 무고로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가 광양감무(光陽監務)로 좌천되었다. 1354년 원(元) 나라가 장사성(張士誠)의 토벌을 위해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진 후 출정, 원 나라 고우성(高郵城), 팔리장(八里莊), 사주(四州), 화주(和州) 등지에서 수 십회에 걸쳐 싸우다가 회안로(淮安路)에서 전사했다(韓國人의 姓譜). [高麗史] : 최원(崔原)이 즉 최경(崔璟)인데 충정왕 때에 대언(代言)으로 임명되고 판도 판서(版圖判書)로
전직(轉職)되었다. 공민왕 때에 왜적이 교동 갑산창(喬洞甲山倉)을 불살랐다. 이때 최원(崔原)이 교전하여 적의 병선(兵船) 2척을 노획하고 밀직 부사(密直副事) 벼슬과 진력협모공신(陳力協謀功臣) 칭호를 받았다. 그 후 조일신(趙日新)이 처단되자 왕의 총애는 더욱 두터워져서 항상 왕의 곁에서 시종했다. 최원이 일찍이 어떤 일로 하여 공주 궁(公主宮)의 옹인 팔사불화(甕人八思不花)를 곤장친 일이 있었는데, 팔사불화(八思不花)는 왕 앞에 호소하기를, "최원이
나를 때려서 공주가 놀래어 낙태케 하였으니 큰 불경(不敬)이외다"라고 하였다. 왕이 최원을 순군(巡軍)에 가두고 찬성(贊成) 유탁을 시켜 엄하게 국문했으나 불복하였으므로 광양 감무(光陽監務)로 강직(降職)시켰는데, 그 때 재상 김보(宰相金普)가 최원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질투하여 이 일을 날조(捏造)하였다고 말하였다. 원(元) 나라가 고우(高郵)의 적을 토벌하려 하였을 때 고려에 장졸(將卒)을 초모(招募)해 달라고 했는데, 왕이 최원을 소환하여 용성군(龍城君)으로
봉하여 파견하였다. 당시 남방의 적세가 나날이 왕성하여 갔는데, 아군(我軍)이 6합(六合)을 함락시키고 회안로(淮安路)로 이동하여 방어 전투로 들어갔는데 최원과 이권(李權) 등 6명이 싸우다가 전사(戰死)했다.(高麗史 124卷 列傳 37 崔安道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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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 때 1등공신인
최유(崔濡) : ?-1364(공민완 13), 용궁현(龍宮縣) 출신, 몽고명(蒙古名)은 티무르부카(沾木兒不花), 자는 원택(元澤), 본관은 용궁, 시조 현(玄)의 손자, 동지밀직 안도(同知密直安道)의 아들, 원(源)의 형이다. 충혜왕 때 군부사 판서(軍簿司判書)로 1339년(충숙왕 복위8) 조적(曹적)의 난에 충숙왕을 호종(扈從)하여 성근익재협찬보정 1등공신(誠勤翊載協贊保定一等功臣)에 책록(策錄)되고, 1349년(忠定王 1) 2월 원(元) 나라의 순제(順帝)가
충혜왕의 아들 왕저(王저, 忠定王)에게 입소(入所)하도록 하여 그가 왕저를 받들고 원 나라에 갔다. 이 공로로 충정왕이 즉위하자 취성군(鷲城君)에 봉해졌고, 뒤에 참리(參理, 1350.5)가 되었다. 공민왕 때 삼사사(三司使)로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해졌으나, 관작에 불만을 품고 동생 최원(崔源)과 함께 원 나라로 망명(1350.6), 원 나라의 중상감승(中尙監丞)에 올랐다. 1364년(恭愍王 13) 1월 공민왕을 폐위시키기 위해 원병(元兵)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다가 고려군(高麗軍)에 패퇴했다. 묘는 경기도 개성에 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의 분포 상황에 대하여는 상고(詳考)할 길이 없다.(高麗史, 高麗史節要 25卷(1343.4 1346.9) 26卷(1350.5 1350.6 1352.3) 28卷 (1362.3 1362.5 1364.1 1364.6), 韓國史 中世篇 660-661쪽, 國史大事典 1905쪽, 사랑의 王道 恭愍王(金哲埈), 韓國의 人間像 1卷 1965 134쪽, 韓國人의 姓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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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에 창의하여 영천에서 대첩한 공으로 첨정에 제수된 최의(崔儀) : 旣載
항일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최정희(崔鼎喜)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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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독립군에서 활동한
최흥렬(“先親 獨立運動 資料 찾아요”: 醴泉 開浦 新陰里 최흥렬 씨 子 재옥 氏) [記事] : 일제 치하에서 일본군의 징집을 피해 만주로 달아난 뒤 독립운동을 하다가 숨진 아버지의 당시 독립운동 자료를 찾고 있는 칠순의 아들이 있어 화제다. 예천군 개포면 신음리 최재옥 씨(70)의 부친 흥렬 씨는 1921년 지보면 상월리에서 태어나 지보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6세 때 결혼 슬하에 재옥 씨를 비롯한 아들 3형제를 두었다. 그러나 최씨는 만 19세 때인 1940년
일본군으로의 징집명령이 떨어지자 소 한 마리 판돈을 여비로 만주로 달아나 독립군에 입대했다는 것. 최씨의 가족들은 만주로 간 흥렬 씨가 독립군에서 자금 조달을 담당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었으나 1942년 12월 12일 원인을 알 수 없이 그냥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흥렬 씨의 부친 승일 씨가 만주로 출발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병일 씨는 봉천에 채 도착하지도 못해 당시 지명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상하이와 접경한 독립군 부대에서 이미
아들 흥렬 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이후 병일 씨는 아들의 시신을 현지에서 화장을 한 뒤 유골함만 갖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봉천역에서 일본군에게 잡혀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가 재판까지 받고 간신히 흥렬 씨의 유골을 수습해 고향으로 돌아와 선산에 묻어주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재옥 씨는,“아무 것도 바라는 것은 없고 아버지의 무덤 앞에 독립운동을 하셨던 사실만이라도 비석으로 남겨주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張炳喆 記者 慶北日報 200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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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몽고의 침입 때 전공으로 대장군에 승격된 태금취(太金就) : 旣載
임란 때 자기 딸보다 상전의 아이들을 구한 팔금(八今) : 旣載
주인의 젖먹이 아기를 젖먹이면서 키웠고, 상전의 상제에 정성을 다한 풍월(風月) : 旣載
항일운동을 하여 애국장을 받은 한양리(韓良履)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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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 말의 의병인
한영만(韓寧滿) : 예천 출신, 구한 말의 의병(義兵)이었다.(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424쪽, 매천야록 5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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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찰에게 강제로 상투를 잘리고 울화로 운명한
한일하(韓一河) : 1882-1936, 자는 운초(運初), 호는 일주(一州), 본관은 청주, 택현(宅鉉)의 아들, 많은 후진을 길렀고, 특히 성리학에 밝았으며 일본 경찰에게 강제로 상투를 잘리고 울화로 운명하였다. 문집이 있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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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의 좌종사로 항일활동을 하여 건국포장에 추서된
한장리(韓將履) : 1882(고종 19)-1977, 용궁면 송암리 398번지 출신, 일명한덕문(韓德文), 본관은 청주, 1907년 7월 5일 제천(堤川)에서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에 참가, 좌종사(坐從事)로 임명되어 충청, 강원, 경북 일대에서 이강년 의병장이 순국할 때까지 1년여 동안에 걸쳐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하였다.(獨立有功者功勳錄 1卷(425쪽) 10卷(383쪽), 獨立運動史資料集
1卷 306쪽, 醴泉文化 2輯, 醴泉新聞 199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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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의병활동을 하다가 순국하여 애족장이 추서된 한태섭(韓台燮)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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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학생으로서 항일운동을 한
한택교(韓宅敎) : 1920- , 예천 출신, 일본 대판시립상과대(大阪市立商科大) 재학생, 1940년의 학생운동가였다.(獨資(13) 1269쪽, 獨資(別3) 631 633 6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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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 창의한 한형진(韓亨進) : 旣載
인란 때 왜적과 싸우다가 예천으로 입향한 한호(韓顥) : 旣載
이시애 난에 창의하여 전사한 현득리(玄得利) : 旣載
이시애 난 때 의거 순국하여 원종훈이 된 현득형(玄得亨)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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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애의 난 때 공을 세워 이조정랑에 승진된
홍귀달(洪貴達) : 1438(세종 20)-1504(연산군 10), 용궁현(龍宮縣) 출신, 자는 겸선(兼善), 호는 함허정(涵虛亭) 또는 허백당(虛白堂), 시호(諡號)는 문광(文匡), 본관은 부계(缶溪, 缶林), 언충(彦忠)ㆍ언방(彦邦)의 아버지이다. 1461년(세조 6) 강릉 별시 문과(江陵別試文科)에 을과 3위로 급제, 겸예문(兼藝文, 1464)을 거쳐 예문관 봉교가 되었다. 세자시강원 설서(1466)로서 문무를 겸했으므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고,
이시애의 난(1467) 때 공을 세워 이조 정랑에 승진되고, 이어 장령으로 춘추관 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국자 좨주(國子祭酒, 1491), 오랫동안 문형(文衡, 大提學)을 지냈고, 성종이 승하하자 호조 판서(戶曹 判書)로서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 1494.12.25)를 겸하였다. 무오사화(1498) 때는 좌참찬(左參贊)으로서 10여 조에 달하는 왕의 난정(亂政)을 들어 간하다가 좌천되었다. 1500년
왕명으로 <속국조보감>, <역대명감>을 편찬하고,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1504년(연산군 10) 자기의 손녀(洪彦國의 딸)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어겨 경원(慶源)으로 귀양을 갔다가 다시 서울로 호송되던 중 단천에서 뒤따라온 승명관(承命官)에 의해 교살되었다. 문장이 뛰어나 아담하고도 꿋꿋하고 진실하고 옛스러웠다. 글씨도 잘 썼고, 성격이 강직하여 부정에 끝까지 항거하였고, 성품이 원만하여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중종반정 후 복관되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어 숙종 때 함창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 때 저술한 <구급이해방(救急易解方)> 1권이 있는데, 1498년(연산군 4) 가을에 찬집 언해(撰集諺解)하여 교서관(校書館)을 시켜 다음해 3월에 인출 광포(印出廣布)하였고, 1500년(연산군 6) 9월에는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을 찬진하였다. 그의 작품들이 <국역동문선(國譯東文選)> 10권(67 177-178 262-264 346-348 458-460 582-
583 689-691 718쪽) 11권(350- 352 397-404 481-485쪽)에 실려 있다.
[海東雜錄 1卷] : 강원도 감사(監司)로 만기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용궁을 지나던 차 객사(客舍)에서 지은 시(詩)에, "앞마을 연기가 어두워 까마귀를 감췄는데, 객사는 침침하여 밤이 시끄럽지 않다. 깊은 숲 달 밝은데 두견새는 울고, 넓은 뜰엔 봄이 다하여 배꽃이 떨어지도다. 늙어가는 용모를 거울에 대하니 해마다 바꿔지고, 병든 눈으로 글자를 보니 글자마다 빗나간다. 꿈속에 그리던 산천을 내일은 밟으리니, 문 앞에 흐르는 물 있는 곳이 바로 내 집이로세."라고 하였다.(燕山君日記 1495.1.4 1495.1.14 1495.2.2 1495.3.9, 國史大事典 1932-1933쪽)
[國史大事典] : 국자좨주(國子祭酒, 1491)를 거쳐 오랫동안 문형(文衡, 大提學)을 지냈고, 성종이 승하하자 호조 판서(戶曹判書)로서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 1494.12.25)를 겸하였다. 그 후 좌참찬(左參贊)에까지 벼슬이 이르렀다. 연산군 때 죄를 입어 경원(慶源)으로 귀양을 갔다가, 귀양간 땅에서 죽었다. 문장이 아담하고도 꿋꿋하고 진실하고 옛스러웠다. 저서로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 때 저술한 <구급이해방(救急易解方)> 1권이 있는데, 1498년(연산군 4) 가을에 찬집 언해(撰集諺解)하여 교서관(校書館)을 시켜 다음해 3월에 인출 광포(印出廣布)하였고, 1500년(연산군 6) 9월에는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을 찬진하였다. 그의 작품들이 <국역동문선(國譯東文選)> 10권(67 177-178 262-264 346-348 458-460 582- 583 689-691 718쪽) 11권(350 -352 397-404 481-485쪽)에 실려 있다.
[海東雜錄 1卷] : 강원도 감사(監司)로 만기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용궁을 지나던 차 객사(客舍)에서 지은 시(詩)에, "앞마을 연기가 어두워 까마귀를 감췄는데, 객사는 침침하여 밤이 시끄럽지 않다. 깊은 숲 달 밝은데 두견새는 울고, 넓은 뜰엔 봄이 다하여 배꽃이 떨어지도다. 늙어가는 용모를 거울에 대하니 해마다 바꿔지고, 병든 눈으로 글자를 보니 글자마다 빗나간다. 꿈속에 그리던 산천을 내일은 밟으리니, 문 앞에 흐르는 물 있는 곳이 바로 내 집이로세."라고 하였다.(燕山君日記 1495.1.4 1495.1.14 1495.2.2 1495.3.9, 國史大事典 1932-1933쪽)
[世祖實錄] : 1464년(세조 10) 7월 6일 겸예문(兼藝文, 集賢殿의 後身)에 제수되어 학업을 닦게 되었다. 저작(著作)으로서 정인지(鄭麟趾)가 실시하는 대책 고과(考課)에서 2등을 하였고(1464.7.23), 학문을 나뉘어 나이 어린 문신 6명씩을 배정할 때 음양문(陰陽門)에 배정되었고(1464.7.27), 겸예문으로서 <주역구결(周易口訣)>과 권근(權近)의 구결에 대해 왕과 의논하였고(1465.10.9), 시강원 설서로서 무(武)를 겸하였다 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고(1466.9.15), <대명률(大明律)>을 읽으라는 왕명을 받았고(1466.12.23), 선전관으로서 격일 숙직하였다(1467.5.12). 1467년(세조 13) 5월 17일 평사(評事)에 제수되었다. [예종실록] : 1468년(예종 즉위) 9월 9일 사과(司果)로서 태상왕의 장례 담당인 대전관(大奠官)에 제수되었다.
[성종실록] : 1470년(성종 1) 4월 5일 겸예문에 제수되었고, 영안남도(永安南道) 구황경차관(救荒敬差官)으로 떠났고(1470.8.4), 동년 8월 8일 구황경차관으로서 왕명으로 영안북도 절도사 어유소(魚有沼)에게 옷 2벌을 하사하고 잔치를 베풀었고, 영남도 관찰사 이계손(李繼孫)에게로 가서 하사술을 전하였다(1470.8.8). 사헌부 장령(1471.6.30)으로서 감찰 민오(閔晤)의 임명 철회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고(1491.7.14), 급제 이한을 투옥 국문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고(1471.7.17), 원상(院相) 김국광(金國光)의 파면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고(1471.7.26), 조지당(趙之唐)의 누이를 연좌하도록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고(1471.7.28), 김국광(金國光)의 원상직(院相職) 파면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고(1471.8.11), 절에 토지 노비들을 시납한 광평대군(廣平大君, 世宗의 5子)의 부인 신씨(申氏)의 국문을 청하였고(1471.8.12), 경주부윤 전동생(田동生)의 파직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고(1471.8.23), 경기도의 실농(失農)으로 인한 부역 정지와 경주부윤 정종(鄭種)의 교체를 청하였고(1471.9.4), 예조판서 김겸광(金謙光)과 동지중추부사 이영은(李永垠)의 첩다툼에 대하여 간쟁치 않도록 전지를 받았으나(1471.9.25), 그들의 처벌을 청하였지만윤허받지 못하였고(1471.9.28), 신면(申면)의 적개공신 추록과 강효문의 사면 불가를 청하였고(1471.윤9.6), 야대를 행할 것과 대소 거둥 때 경연관의 호종을 청하였고(1471.윤9.25), <중용> 30장의 심오한 뜻을 깨닫도록 청하여 윤허를 받았고(1471.윤9.25), <대전(大典)> 모친상에 관한 규정의 문제점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고(1471.윤9.29), 청송부원군 심회(沈澮)의 상주(尙州) 행차를 정지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1471.10.25), 개성군(開城君) 최유(崔濡)를 이시애의 난에 연좌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고(1471.11.8), 김지경의 탄핵에 대해 상언한 오의손(吳義孫)의 국문을 청하여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1471.12.11), 1471년(성종 2) 12월에 편찬된 <세조실록>의 기주관이 되었고, 그리하여 아마(兒馬) 1필, 향표리(鄕表裏) 1습(襲)을 하사받았고(1471.12.18), 연분(年分) 심사의 불가함을 청하였고(1472.1.6), 권한ㆍ성계증(成繼曾)의 탄핵을 받았으나 오히려 그들이 유배되었고(1472.1.27), 그러나 자신도 좌천되었다(1472.3.14). 그러나 사간 김영견(金永堅)과 대사헌 김지경(金之慶)의 변호를 받았다(1472.3.15). 그 후 전한(典翰)으로서 예문록(藝文錄)의 간택에 대하여 아뢰었고(1472.9.28), 시강관(侍講官)으로서 승 설준(僧雪俊)의 사령장(告身)을 추탈할 것을 청하였고(1473.8.8), 승지로 제수된 박시형(朴始亨)이 이르기를, "전한 홍귀달은 직위가 신의 위인데, 신이 어찌 외람되게 받겠습니까?"라고 하였다(1473.8.8). 시강관(侍講官)으로서 조왕(趙王)이 조괄(趙括)을 등용한 것에 대해 아뢰었고(1474.7.22), 예문관 직제학으로서 개성부의 양로연에 기생을 쓰는 것은 마당치 않다고 아뢰었다(1474.9.21). 1474년(성종 5) 10월 20일 왕이 영안북도관찰사 어유소(魚有沼)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경이 적을 잡아 머리를 베어다가 바치니, 내가 매우 이를 가상히 여긴다. 예문관 직제학 홍귀달을 일부러 보내어 특히 경에게 필단유철릭(匹段유帖裏) 1벌을, 부위(部尉) 권자선(權自善)에게 주유철릭(紬유帖裏) 1벌을 내려주게 하고, 또 잔치를 베풀어 적을 잡은 군사를 위로하게 하니, 또한 그 공을 적어서 아뢰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날 영안도 경차관으로서 홍귀달이 왕의 사목(事目)을 갖고 떠났고, 동년 11월 13일에는 훈춘(訓春)의 합살합(哈撒哈) 마을이 올적합(兀狄哈)에게 침략을 당하였으니 도움을 주라는 왕의 유시를 받았다.
그 후 시강관으로서 훈춘 침략 건에 대해 보고하였고(1474.12.24), 강원도의 역로(驛路)를 소복(蘇復)시킬 방책을 건의하였고(1474.12.26), 초피(貂皮) 바치는 문제와 내수사(內需司) 노비 문제 등을 아뢰었고(1475.2.2), <진서(晋書)>를 해마다 인쇄하도록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1475.2.7). 예문관 직제학으로서 야대에서의 일이 발설된 것에 대해 의논하였고(1475.2.8), 야대의 일을 발설한 자를 가리자고 상소를 하였고(1475.2.10), 목우(木牛)ㆍ유마(流馬)의 제조에 대해 의논하였고(1475.5.25), <강목(綱目)>의 내용을 논의하였고(1475.6.16), 회간왕(懷簡王)의 부묘(부廟)에 대한 가부를 의논하였고(1475.9.16), 같은 일을 대왕대비와 의논하였고(1475.9.19), 같은 일로 지사(知事) 임원준(任元濬)과 논쟁도 하였고(1475.9.20), 회간왕의 부묘의 불가를 청하였고(1475.9.21), 불교 숭상의 폐단을 논하였고(1475.10.16), 한림(翰林) 등의 발언으로 피혐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고(1476.2.7), 요동(遼東)의 자문(咨文)을 갖고온 두목(頭目) 왕새(王璽)의 대객(對客)이 되었고(1476.2.21), 중시(重試)의 정지를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1476.3.11). 동부승지(1476.3.18)로서 사정전(思政殿)의 철망 설치 중지를 청하였고(1476.4.2), 영응대군의 사위 구수영이 담제를 마쳤기에 하사술(宣온)을 갖고 갔고(1476.4.26), 문소전(文昭殿)에서의 단오제(端午祭)에 참석하였고(1476.5.5), 석강(夕講)에서 <강목(綱目)>을 강(講)하면서 불교의 폐단을 의논하였고(1476.5.12), 남방 군사들의 허약성에 대해 논의하였고(1476.6.4), 강관(講官)의 특기에 따라 강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고(1476.10.8), 제순도(帝舜圖)의 내용을 설명하였고(1476.10.21), 전날 밤 원자의 탄생으로 대사령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고(1476.11.7), 능을 보수할 때 정자각에 이안하는 문제를 논하였고(1477.1.13), 참찬관으로서 사(紗) 1필을 하사받았고(1477.윤2.16), 왕명으로 승(僧) 옥봉(玉峯)을 추국하였고(1477.윤2.19), 승 옥봉의 위서(僞書)를 자복받았다고 아뢰었고(1477.윤2.20), 중궁(中宮)을 빈(嬪)으로 강등함이 부당하다고 아뢰었고(1477.3.30), 창원군(昌原君) 이성(李晟)을 접대한 충청도의 수령과 찰방의 용서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고(1477.4.2), 간관(諫官)의 국문이 미편함을 청하였다(1477.4.22). 그 후 형조 참의(1478.1.21)를 거쳐 승정원 좌부승지 (1478.4.8)로서 창평현(昌平縣)의 재설치에 대해 왕과 의논하였고(1478.4.24), 우승지(1478.4.30)로서 표연말(表沿沫)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고(1478.5.5), 임사홍(任士洪)의 처벌에 대해 의논하였고(1478.5.6), 제서유위율의 설립에 대해 의논하였고(1478.5.15), 수령의 잘못을 소홀히 처리한 윤효손(尹孝孫)의 가자(加資) 명령의 철회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고(1478.6.20), 임금이 친히 경작하는 토지의 일에 대해 상고하라는 왕명을 받았고(1478.7.21), 아마(兒馬) 1필을 하사받았고(1478.8.6), 이시애의 난에 대한 왕의 질문에 대답하였고(1478.8.10), 요괴한 물건의 처리를 논하였고(1476.8.19), 효자에게 벼슬을 제수하여 효행을 권면하게 하기를 청하였고(1478.8.21), 중국에서 청병하려 하는 문제에 대비하여 미리 군사를 선발할 것을 청하였다(1478.8.21). 1478년(성종 9) 9월 6일 좌승지에 제수되었고, 곧 이어 도승지(1478. 11.4)가 되었다. 1478년(성종 9) 11월 18일 왕이 이르기를, "대사간 안관후(安寬厚)는 내가 그의 어진 바를 알기 때문에 도승지로 삼으려 했는데, 마침 지금의 도승지 홍귀달과 동서인 관계로 인하여 결정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홍귀달은 도승지로서 종친(宗親)이 기첩(妓妾)을 데리고 사는 폐해를 아뢰었고(1478.11.22), 가뭄에 따라 하늘의 경계를 삼가기를 청하였고(1479.7.5), 향온(香온)을 삼전(三殿)에 올리기를 청하였다(1479.7.7). 충청도 관찰사(1479.9.24)로서 왕을 사조(辭朝)하니, 왕이 수령 다스리는 일에 대해 말하였다(1479.10.25).
그러나 중풍(中風)으로 인하여 경직(京職)으로 옮겼다(1480.1.10). 형조 참판(1480.10.19)을 거쳐 한성부 우윤으로서 철거시켜야 할 가옥이 199동, 가묘(家廟)가 31동이라고 보고하였고(1481.1.19), 천추사(千秋使)로 임명되니,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병이 나은 지 오래지 않으나 죽더라도 감히 사피할 수 없습니다마는 늙은 어머니가 남방에 계시는데 멀리 연경 (燕京)에 가는 것이 마음에 매우 미안합니다."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에게 형제가 있는가?"하였는데, 대답하기를, "신에게 한 형이 있었으나 이미 죽었고, 형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또한 어립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이미 형의 아들이 있으니 사피하지 말고 가라."하였다. 그러나 한성부 우윤은 의원 사직되었다. 동지중추부사(1481.3.18)일 때 천추사(千秋使)로서 북경에 가서 천추절(千秋節)에 하례하였고(1481.4.11), 중국에서 보(堡)를 설치하려는 것에 대해 알아보라는 왕의 글을 받았고(1481.4.28), 모상으로 인하여 미리 귀국하여 갖고온 중국 병부(兵部)의 자문(咨文)을 정랑 지달하(池達河)가 대신 올렸고(1481.8.26), 뒤에 귀국한 서장관(書狀官) 신종호(申從濩)가 이 때 도착하여 문견 사건(聞見事件)을 바쳤다(1486.9.2). 1483년(성종 14) 12월 12일에는 <오례의(五禮儀)>의 주(註)를 개정하라는 왕명을 받았고, 이조 참판(1484.4.14)으로서 평안도와 황해도의 역로(驛路) 운용 방식에 대해 의논하였고(1484.5.21), 평안도에서 담당하는 짐바리 운반을 다른 도에 분담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1484.5.29). 강원도 관찰사(1484.10.26)로서 사조(辭朝)하였고(1484.11.21), 동지중추부사(1485.9.29)를 거쳐 형조 참판(1485.11.12)으로서 시관(試官)이 되어 문신 시험을 보였다(1486.1.11). 경주 부윤(1486.7.29)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로서 춘궁도감(春窮都監)의 공사가 끝나 비단 한 필을 하사받았고(1487.7.4), 사헌부 대사헌(1489.2.28)으로서 부상(父喪)을 당하자, 왕이 경상도 관찰사에게 부의(賻儀)하라고 명하였고(1489.3.16), 대사성(1491.8.22), 지중추부사 겸 예문관 대제학(1492.3.22)을 거쳐 의정부 우참찬(1492.4.27)으로서 대례에 다사례가 빠졌다고 차자(箚子)를 올렸고(1492.7.21), 문과의 전시(殿試) 시험관(讀卷官)에 제수되었고(1492.6.6), 이조 판서(1492.11.4)로서 이목(李穆)의 죄를 참작하기를 청하였고(1492.12.11), 진폐작주관(進幣爵酒官)으로서 말 1필을 하사받았고(1493.3.10), 최부(崔溥)의 국문을 청하였고(1493.4.23), 유생들의 제술시(製述試)에서 차례를 매겼고(1493.윤5.2), 유구국왕(琉球國王)의 서계(書契)에 답하는 일에 대해 왕과 논의하였고(1493.6.27), 설순조(薛順祖)의 일과 김해부사 임명에 대해 논의하였고(1493.7.27), 대간(臺諫)을 국문하지 말기를 청하였다(1493.7.30). 1493년(성종 24) 8월 19일 왕에게 아뢰기를, "이제 신을 정조사 (正朝使)로 삼았으나, 신은 옛부터 풍질(風疾)이 있어서 병 증세가 하나만이 아니고, 치료하여도 큰 효력이 없으며 어렵게 직무에 종사하므로 북경으로 가는(朝京) 먼 길에는 명을 받들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개차(改差)되었다. 1493년(성종 24) 10월 6일에 이조 판서에서 면직되었고, 그 후 상호군(上護軍, 1494.1.7), 지중추부사(1494.3.18)를 거쳐 호조 판서(1494.6.23)로서 정조사로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고, 수세(收稅)와 사복시(司僕寺) 등에 납부하는 곡초(穀草)를 감할 것을 청하여 수세 문제는 윤허를 받았다(1494.9.28).
[연산군일기] : 1494년(연산군 즉위) 12월 25일 호조 판서로서 국장도감 제조(國葬圖鑑提調)가 되었고, 황해ㆍ충청ㆍ경기의 실농(失農)으로 경비를 절약하기를 아뢰었고(1495.1.4), 성종(成宗)의 시호(諡號), 묘호(廟號) 등을 왕과 의논하였고(1495.1.14), 시호를 성종으로 정하였고(1495.1.15), 유생(儒生)을 풀어주기를 아뢰었고(1495.1.30), 대간(臺諫)의 말을 따르기를 청하고 언로(言路)를 열도록 아뢰었고(1495.2.2), 왜인(倭人)들의 어망 쟁탈 사건(漁網爭奪事件)에 대해 의논하였고(1495.3.9), 상중(喪中)에는 길복(吉服)을 씀이 예(禮)라고 아뢰었고(1495.3.11), 묘호를 칭함에 전례를 상고하기를 의논드렸다(1495.3.27). 1495년(연산군 1) 4월 20일 지춘추관사에 제수되었고, 원접사(遠接使)로서 의주에서 중국 사신을 맞은 후 치계(馳啓하였고(1495.6.2), 반송사(伴送使)로서 돌아와 복명하고 <논간집(論諫集)>을 바쳤고(1495.7.9), 지중추부사로서 노사신의 죄를 왕과 의논하였다(1495.9.5). 1495년(연산군 1) 10월 14일 윤필상이 정승 후보로 어세겸을 추천하자, 왕이 어필(御筆)로 홍귀달을 썼다. 지중추부사로서 승(僧)ㆍ니(尼)의 서울 대문안 거처를 금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고(1495.11.12), 폐비 묘의 천장(遷葬)에 대해 아뢰었고(1496.윤3.14), 원각사(圓覺寺)의 조라치(照刺赤)에 관한 일을 논하였고(1496.4.23), 폐비의 사당과 신주 문제를 의논하였고(1496.6.7), 공정대왕묘(恭靖大王廟)의 배향 공신(配享功臣)의 일을 의논하였고(1496.7.2), 여진족에게 청례(淸禮)를 보내지 말도록 아뢰었고(1496.7.28), 입묘(立廟)ㆍ입주(立主)의 일을 의논하였고(1496.9.29), 가자(加資)ㆍ김효강 등의 일을 의논하였고(1496.12.9), 녹색 명주 1필을 하사받았고(1497.1.14), 유치연(劉致淵)의 피살 사건 등의 일에 대해 논의하였다(1497.1.26, 1497.2.3). 예문관 제학(1497.4.20)으로서 양희지의 일 등에 대해 아뢰었고(1497.6.29), 언로(言路)의 보장, 불교 배척을 아뢰었다(1497.7.16). 동지중추부사로서 사찰 건립의 불가를 논하였고(1497.7.19), 경연(經筵)에서 강(講)한 내용을 논하였고(1497.7.26), <한명제기(漢明帝紀)>를 강하고 그 내용에 대해 왕과 의논하였고(1497.8.2), 경연에서 강한 내용을 의논하였고(1497.8.9), 활쏘기 시험에 대해 의논하였다(1497.8.17). 약방 제조로서 물품을 하사받았고(1497.9.8), 동지중추부사로서 역로(驛路) 등의 피폐한 정황에 대해 논의하기를, "신이 지난 번에 영릉(英陵)의 헌관(獻官)이 되어 여주(驪州)ㆍ광주(廣州) 각 역으로 갔다가 돌아왔는데, 그 조잔하고 피폐하여 하루도 휴식을 얻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고(1497.11.9), 왕에게 주강(晝講)에 나오기를 청하였고(1497.11.10), 군액(軍額)의 감(減)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였다(1497.11.12). 그 후 공조 판서(1497.11.14, 1497.12.11)로서 과부 재가 허용 상소에 대해 의논하였고(1497.12.12), 당상(堂上)으로서 원자의 탄생으로 안장 갖춘 말 1필과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받았고(1497.12.21), 또한 한 자급(資級) 올려받았다(1497.12.25). 공조 판서(1497.12.27)를 거쳐 동지중추부사로서 지진의 일과 야대의 일을 의논하였고(1498.2.20), 효행을 논하였고(1498.2.25), 경연에서 <강목(綱目)>의 내용 중 사냥에 대해 의논하였고(1498.3.10), 북쪽 변방 지역의 일에 대해 논의하였고(1498.4.21), 요동 지역 해랑도에 도망하여 사는 백성들의 소란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고(1498.4.21), 평안도절도사 이조양 등의 일에 대해 논의하였고(1498.4. 21), 사치 금제(奢侈禁制)에 대해 논의하였고(1498.6.15), 아내의 정부를 죽인 김중부의 죄에 대해 논의하였다(1498.6.15, 1498.6.18).
공조 판서(1498.7.2)로서 실록청 당상을 겸하여 <실록> 중 세조 때 사건의 누락 여부를 상고하게 되었다(1498.7.19).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좌천되었고(1498.7.27), 곧 동지중추부사(1498.7.28)로서 경연의 중요성을 의논하였고(1498.9.26), 의정부 우참찬(1498.10.30)으로서 죄인 이부(李富)의 형량에 대해 의논하였고(1498.12.12), 의정부 좌참찬(1498.12.22)으로서 왕후의 상제에 대해 의논하였고(1498.12.28), 왕에게 육선(肉膳)을 둘 것을 청하였고(1498.12.28), 나라에서 금하는 구리와 철을 무역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였고(1499.1.15), 대행대비의 신릉에 정자각을 세울 것을 청하고, 시호에 대해 의논하였고(1499.1.22, 1499.1.24), 홍문관에 실록청의 남은 종이로 <국조보감>을 속편하게 할 것을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고(1499.2.22), 의정부 좌참찬 겸 지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로서 1499년(연산군 5) 2월 22일에 편찬된 <성종실록>의 편수관이 되었고, <성종실록>을 외방 사고에 봉안하였고(1499.3.15), 임금이 내리는 술의 답으로 얼언율시(一言律詩)를 올렸고(1499.5.27), 금년에 여진족을 토벌하는 일의 불가함을 아뢰었고(1499.8.1), 덕을 닦고 인재를 등용하고 형벌을 정도에 맞게 할 것을 청하였고(1499.8.18), <소학>을 간행하여 그 전파를 넓히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고(1499.8.21), 우뢰와 번개의 재변과 변방의 적변은 군주의 치덕과 관계있다고 아뢰었다(1499.9.16). 대제학으로서 제왕과 후비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이를 분류하여 책을 만드라는 왕명을 받았고(1499.12.1), 사치하는 혼례 풍습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아뢰었고(1500.5.20), 지중추부사로서 <역대명감(歷代明鑑)>을 찬술하여 올렸고(1500.7.28),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을 찬술하여 올렸다(1500.9.27). 동지중추부사(1501.8.8)를 거쳐 경기도 관찰사(1503.3.8)로서 백성들의 흉년 구제를 아뢰었고(1503.4.4), 기근 구제를 청하여 윤허받았고(1503.5.3), 도적을 잡도록 청하였고(1503.5.8), 포도장(捕盜將)은 일이 많아 보낼 수 없다는 전교를 받았고(1503.5.9), 기우제를 청하여 윤허받았고(1503.5.22), 백성의 빚을 2.3년 기한으로 나누어 받도록 아뢰어 윤허를 받았고(1503.10.5), 이세좌(李世佐)의 죄를 의논하였다(1504.3.11). 1504년(연산군 10) 3월 12일 탄핵을 받았고, 이튿날 귀양을 출발했고, 동년 3월 16일에는 양근까지 갔는데, 이 때 아들로서 겸춘추(兼春秋)가 된 자는 모두 체임(遞任)하라는 왕명이 있었고, 속전(贖錢)을 돌려 주었다. 1504년(연산군 10) 윤 4월 28일 궁궐 기둥에 있던 홍귀달의 시를 깎아내었고, 동년 5월 27일에 홍귀달의 아들 언충(彦忠)을 외방으로 보냈고, 1504년(연산군 10) 6월 16일 전 이조판서 홍귀달이 교형에 처해졌다.
사관(史官)이 기록하기를, "홍귀달은 힘써 배워서 급제하여 벼슬이 재상(宰相)에 이르렀다. 성품이 평탄하고 너그러워 평생에 남을 거스르는 빛을 가진 적이 없으며, 남이 자기를 헐뜯음을 들어도 성내지 않으니, 그의 아량에 감복하는 사람이 많았다. 문장에 있어서는 곱고도 굳세고, 법도가 있었으며, 서사(敍事)를 더욱 잘하여 한 때의 비명(碑銘), 묘지(墓誌)가 다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 정자에 편액하기를 ''''허백(虛白)''''이라 하고, 날마다 경서(經書), 사서(史書), 기타 서적 읽기를 스스로 즐겼다. 시정(時政)이 날로 거칠어지매 여러 번 경연(經筵)에서 옛 일에 따라 간언(諫言)을 진술하니 이로 말미암아, 뜻을 거슬리더니, 경기도 관찰사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 때 왕이 바야흐로 장록수(張綠水)를 좋아하는데, 경영(京營)의 고지기(庫直)가 되고자 하는 어떤 사람이 장녹수를 인연하여 왕에게 청하매, 왕이 몰래 신수근(愼守勤)을 시켜서 자기 뜻을 부탁하였으나 홍귀달이 듣지 않으므로 왕이 언짢아 하여 어느 일로 외방으로 귀양보냈다가 이에 이르러 죽이니, 사람들이 다 그 허물없이 당함을슬퍼하였다."라고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8월 17일 의금부 당상 김감(金勘)이 왕에게 아뢰기를, "전일 하교에, ''''죄인의 시신은 매장하지 말고 들판에 버리도록 하라.''''하였습니다."하니, 왕이 다시 전교하기를, "홍귀달은 평평하게 매장하라."하였다. (中宗反正으로 燕山君은 쫓겨나고 中宗이 王이 되었다)
[중종실록] : 1506년(중종 1) 10월 2일 왕이 전교하기를, "홍귀달의 아들은 관작을 주라."라고 하였다. 1509년(중종 4) 11월 10일 장령 서후(徐厚)가 왕에게 아뢰기를, "전에 홍귀달이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날마다 출사하였기 때문에, 그 때 선비의 기풍이 크게 떨쳤으며, 한 유생이 글을 잘 짓게 되면 모두들 본받아 따르려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1510년(중종 5) 1월 20일 전 참봉 홍언국이 상소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신의 아버지 좌찬성 홍귀달은 세조 때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종 때에 벼슬하면서 특별히 비상한 은총을 입어 대간, 시종(侍從)이 되기 20여 년에, 알면 말하지 않음이 없고, 말하면 들어주지 않음이 없었으며, 성종이 충직하다고 인정하시었습니다. 1492년(성종 23) 봄에 또 대제학을 삼아 대우가 더욱 융숭하니, 충심으로 더욱 감격하여 정성을 다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폐주(廢主, 燕山君)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한결같이 성종을 섬기던 그대로 섬기며, 생각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하고,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간(諫)하자, 폐주가 그 곧은 말을 매우 꺼렸습니다. 그러다가 1504년(연산군 10) 3월에 와서는 허물이 아닌 것을가지고 얽어 큰 죄를 만들어서, 형장을 때려 서울에서 2천여 리나 되는 함경도 경원부(慶源府)로 유배하고, 신(臣)을 곽산군(郭山郡)으로 유배하였습니다. 신의 어머니는 이 일 때문에 근심하고 놀라 병을 얻어 그 해 4월 서울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6월에 또 신의 아버지를 서울의 감옥으로 잡아오다가 단천(端川) 길 위에서 사사(賜死)하였습니다. 몇 달 사이에 부모가 다 제 명에 죽지 못하니, 한 집안의 화는 참혹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스스로 죽지 못하고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왔는데, 1505년(연산군 11) 정월에 또 신을 의금부에 잡아가두었다가, 4월에 바다위 거제현(巨濟縣)으로 이배(移配)하여 종으로 삼았으며, 8월에 또 의금부에 잡아왔다가, 1506년(연산군 12) 2월에 거제 구금장(拘禁場)으로 도로 귀양보내니, 괴롭고 참독(慘毒)한 상황은 형용하여 말하기 어렵습니다. 폐주 말년에는 주륙(誅戮)이 더욱 심하므로 신은 거제도의 귀양살이(竄逐)하는 곳에서 밤낮으로 죽기만 가다리고 있는데, 비록 부모 상복(喪服)을 함께 입는 것(重服)은 벗었다 할지라도, 무슨 즐거운 마음이 있어서 방종하게 음욕(淫慾)을 행하겠습니까? 전번에 사간원이, "신이 부상(父喪) 3년 안에 적소(謫所)에서 음란한 행동을 하고, 방면(放免)된 뒤에는 매와 개를 데리고 사냥하는 것을 즐겼다 하여 사헌부로 하여금 추고(推考)하게 하였으며, 사헌부가 세 번이나 형추하기를 청하였으나, 성상께서 특별히 신의 애매한 정상을 살피사, 명하여 먼저 관련자를 심문하여 잘못한 단서가 있는 뒤에 신을 심문하라 하시니, 성은(聖恩)이 하늘같아서 거의 신원(伸寃)할 수 있을까 하였습니다. 신과 귀양살이하던 사람들이 모두 신의 방종 음란한 일이 전혀 없다는 것으로 두 번이나 회답 통지를 하였습니다. 신이 사실로 윤리(綱常)를 어지럽힌 일이 있었다면, 하루 안에도 여러 사람의 입에 전파될 것이요, 형제 친척에라도 형편상 서로 숨길 수 없을 것입니다. 김세필(金世弼), 박수위(朴守緯)는 신과 울타리를 두고 서로 이웃하고 조석으로 상종하였으며 신의 하는 일은 비록 음식같은 작은 일이라도 서로 알지 못함이 없습니다. 하물며 이런 윤리를 어지럽히는 큰 일로 세상의 이목을 놀라게 하는 일이겠습니까? 사냥에 관한 연루자도 경차관(敬差官)을 추고(推考)하게 하여 두 차례나 형문하였으나, 가까운 이웃 사람들이 모두 ''''전혀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매와 개로 사냥하는 것은 반드시 여러 사람들이 보는 데서 길들이고 놓고 하는 일이지, 방안에 숨겨두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면, 한 고을 사람들이 모두 듣고 보고하였을 것인데, 하물며 가까운 이웃 사람이겠습니까?
가까운 이웃 사람들이 자기가 범한 일이 아닌 것을 가지고, 또 신의 노복이 아닌데도, 재차 형장을 참아가면서 끝내 승복하지 아니하였으니, 신이 사냥을 즐기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또한 명백합니다. 지금 이 두 일에 관련된 사람들이 밝힌 답장이 한 입에서 나온 것처럼 털끝만한 서로 다른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헌부도 다만 사간원이 아뢴 것에 따라 신을 심문하기를 청하니, 이것은 반드시 형장으로 자복을 받아서, 신의 애매한 정상을 끝내 성명하신 앞에 드러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니, 신은 실로 원통합니다." 이상의 소장(疏狀)이 임금에게 올라가니, 사헌부로 하여금 상소 내용의 사연에 의거하여 분간하게 하였다. 1512년(중종 7) 8월 24일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하여 왕에게 아뢰기를, "성종 때에 홍귀달을 대제학에 천망하는 일을, 문신 당하관(文臣堂下官)도 역시 모두 참여하여 의논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큰 일이 아닌데도 이렇게 한 것은, 널리 여러 의논을 채택하려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517년(중종 12) 9월 26일 홍언방(洪彦邦)이 사헌부의 탄택을 받았는데, 사관(史官)이 기록하기를, "홍언방은 죽은 재상 홍귀달의 아들이며 문과 출신이다. 그 아버지가 폐조(燕山君)에게 죽으매, 홍언방도 감옥에 갇혔다. 중종반정 뒤에 봉상시 주부가 되매 사헌부가 논박하였다."하였다. 1536년(중종 31) 7월 27일 영의정 김근사(金謹思)가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홍문관에 있을 때에는 홍귀달을 사장(師長)으로 삼아 유생들을 권면 장려하였기 때문에 그 때에는 유생들이 구름같이 많이 모였었으니, 유생들의 추향은 사장이 힘을 쓰는가 힘을 쓰지 않는가의 여하에 달려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653년(효종 4) 7월 3일 승지 김좌명(金佐明)이 왕에게 아뢰기를, "<성종실록>을 찬수한 뒤에는 대제학 홍귀달이 서문(序文)을 지었습니다."라고 하였다.(司馬榜目,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孝宗實錄)
홍귀달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1 刊) 해동잡록(海東雜錄 1) 본조(本朝)에 실린 용문면 죽림리 출신인 권별(權鼈)의 기사로, 그 내용은, "홍귀달(洪貴達)/ 본관은 의흥(義興)의 부계(缶溪)로서 자는 겸선(兼善)이요, 호는 함허정(涵虛亭)인데 또한 허백정(虛白亭)이라고도 한다. 세조조에 급제하여 벼슬은 좌참찬에 이르렀다. 연산조(燕山朝)에 죄를 입어 경원(慶源)으로 귀양을 갔다가, 귀양간 땅에서 죽었다. 문장은 아담하고도 꿋꿋하고 전실하고 예스러웠다. 오랫동안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 강원 감사(江原監司)가 되었을 때, 〈유삼일포(遊三日浦)〉라는 글의 서문에, “자고로 신선은 죽지 않아서 혹 이름을 바꾸고 형용을 고쳐 다시 천 년 후에 노는 것이나 사람은 알지 못하나니, 영랑(永郞)의 무리가 오늘 이 자리에도 있지 않다는 것을 어찌 장담할 수 있으랴.” 하였고, 시에 이르기를, 삼일포의 명성을 옛날에 들었더니 (昔聞三日浦)/ 이제야 사선정에 올랐네(今上四仙亭)/ 물은 흰 소반 같은 바위에 부딪치고(水拍白銀盤)/ 산은 푸른 옥 병풍을 두른 듯하여라(山圍蒼玉屛)/ 하늘이 공허하니 채색 구름이 아롱졌고(天空彩雲濕)/ 돌이 늙었으니 가을빛이 맑도다(石老秋光淸)/ 신선 간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仙人去己遠)/ 옛 정자에는 기둥도 남아 있지 않구나(古亭今無楹)/ 그 당시 놀이터로 되었던 곳(當時遊戱處)/ 구름 밖에서 생황과 퉁소소리 들리네(雲外笙簫聲)/ 천년 만에 다시 내가 오니(千載復吾人)/ 여섯 글자(永郞徒遊賞地)가 오히려 선명하게 보이네(六字看猶明)/ 바람은 영랑호에 높고(風高永郞湖)/ 달은 안상정에서 떠오른다(月出安商汀)/ 외로운 술잔 배를 대는 곳(孤尊泊舟處)/ 여기가 바로 봉래 영주라오(此固云蓬瀛)/ 하였다. 본집(本集)/ ○ 경원(慶源)으로 귀양가서, 성남루(城南樓)에 올라가 시를 짓기를/ 서울을 떠난 한 몸이 절역에 던져져서(去國一身投絶域)/ 높은 성 오월에 남루에 올랐도다(高城五月上南樓)/ 하늘과 땅은 들어어고 들어와 두 눈에 남아 있는데(乾坤納納存雙眼)/ 연회석상은 시끄럽고 시끄러워 백 가지 근심을 잊겠구나(尊俎喧喧失百憂)/ 가생은 왕의 사부였음을 슬퍼한들 쓸데없고(賈生不用傷王傳)/ 유자후는 어찌 유주 고을만 한탄하는고(子厚何須恨柳州)/ 어느 강산이 나의 있을 곳 아니랴(底處江山非我有)/ 옛이나 이제나 사람의 세상은 본래부터 떠 있는 것임을(古今人世本來浮)/ 하였다. 본집(本集)/ ○ 강원감사로 만기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예천(醴泉)을 지나던 차 객사(客舍)에서 지은 시에/ 앞 마을 저녁 연기 속에 까마귀 깃들었는데(前村煙瞑己臧鴉)/ 객사는 침침하여 밤이 시끄럽지 않다(客舍沈沈夜不譁)/ 길은 숲 달 밝은데 두견새는 울고(深樹月明啼杜宇)/ 넓은 뜰엔 봄이 다하여 배꽃이 떨어지네(廣庭春盡落梨花)/ 노쇠한 얼굴을 거울에 대하니 해마다 다르고(衰容對鏡年年換)/ 병든 눈으로 글자를 보니 글자마다 빗나가네(病眼看書字字斜)/ 꿈속에 그리던 산천을 내일은 밟으리니(夢裏溪山明日去)/ 문 앞에 흐르는 물 있는 곳이 바로 내 집이로세(門前流水是吾家)/ 하였다. 동상/ [주D-001]가생 …… 한탄하는고 : 가생은 한 문제(漢文帝) 때의 유명한 학자 가의(賈誼)의 별칭으로, 가의는 황제의 작은 아들인 양왕(梁王)의 스승인 태부(太傅)가 되었는데 양왕이 말타고 사냥갔다가 말에 떨어져 죽었으므로 스승인 자기가 보도를 잘못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자책한 것이 병이 되어 죽게 되었다. 유자후는 정치적으로 실패하여 지금의 광서성(廣西省)유주로 귀양 갔었는데 그것을 매우 슬퍼하다가 바로 변으로 죽었다."이다.(www.minchu.or.kr 2006)
홍귀달 [記事] : 한국문집총간(014_210a) 허백정집(虛白亭集, 1843)에 실린 작자 미상(未詳)의 기사로, 그 내용은, "虛白亭集續集虛白亭年譜/ 年譜/ 虛白先生年譜/ ...二年 世宗大王二十九年。丁卯。 先生十歲。受魯論于監司朱公之門。 朱公名伯孫。時爲龍宮敎授。訓誨後學。以... "이다.
홍귀달 신도비(洪貴達 神道碑) [碑] : 용궁현(現 聞慶市 永順面)에 있는 비로, 비명(碑銘)은 ''''文匡公 缶林 洪先生 神道碑''''이고, 비문은 남곤(南袞)이 짓고, 1537년(중종 32) 4월에 아들 진사 언국(彦國)이 글씨를 썼다. 비문의 원문과 국역문이 <용궁향교지>(2005) 상권 989-998쪽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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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353
예천온천(血液循環에 좋은 醴泉溫泉 利用하세요 : 醴泉溫泉 사랑運動을 持續的으로 推進) [記事] :
전국 최고의 수질을 자랑하는 예천온천이 농촌지역 인구감소와 인근지역 대형 온천장 개장 등의 원인으로 이용객이 감소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공직자와 군민 모두 혼연일체가 되어 예천온천 사랑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예천온천은 예천군에서 직영하는 온천으로 2000년 3월 개장이래 2008년 말까지 304만 명이 이용하여 111억 원의 수입을 올려 군 재정확충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군은 예천온천 이용객을 확보하기 위하여 온천입욕권을 소속직원들의 축하선물이나 각종 시상품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으며 각종 단체의 온천욕 효사랑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고 있다.
또한 2009년 1월 13일부터 국가유공자 및 참전유공자에게 온천사용료를 할인해 주어 국가를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분들에 대한 합당한 예우를 하고, 경상북도에 거주하고 있는 1995년 이후 셋째이상 자녀를 출산한 가정 구성원에 대해서도 온천사용료를 할인해 줌으로써 경상북도의 다복가정희망카드 시행에 적극 참여하여 출산장려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또한 온천을 자주 찾는 이용객에게 혜택을 주고 새로운 이용객을 유치하기 위해 월정기권을 발행하여 온천의 우수성을 알리고 온천이용객 증대에 앞장서고 있다.
이미 물 좋기로 소문난 예천온천은 한국자원연구소 수질 검사 결과 pH 9.52∼10.25의 강알칼리인 중탄산나트륨(HCO3-Na) 단순천으로 수질이 매우 부드러운 것이 특징으로 수량이 매우 풍부하고, 지하 800m 이상에서 용출되는 원천수를 100% 그대로 온탕·열탕·냉탕을 비롯한 샤워기의 물까지도 모두 온천수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수질이 부드러워서 인체 표피 지방분을 제거하여 청량감을 주고 피부를 윤택하게 하여 여성의 미용에 아주 좋으며, 피로회복이 빠르고, 혈액순환, 항진작용, 진정작용, 신진대사를 도와 신경기능의 활성화, 신경통 등에도 효험이 뛰어나고 성인병, 부인병, 노인병 예방에도 매우 좋으며 염소, 규산, 칼슘 등 인체에 유익한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전국에서 많은 온천 마니아들이 찾아오고 있는 곳이다.
한편, 고객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예천군에서는 온천 직원들에게 친절교육은 물론 화재예방 및 응급조치요령 교육을 자체적으로 실시하여 예천온천을 찾아오는 이용객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이용객을 증가시키기 위한 예천온천 사랑운동에 공무원들과 지역 기관단체 및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했다.
(醴泉인터넷放送 2009-01-28 오전 7:5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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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충효테마파크(慶北道, 洛東江 流域을 歷史文化 觀光地로 開發 : 洛東江 流域 10個 市ㆍ郡 283㎞) [記事] :
경상북도(도지사 김관용)에서는 "낙동강 물길 살리기 사업"의 추진과 함께 낙동강 유역 10개 시군 283㎞를 역사문화 관광지로 개발해 나갈 계획이다.
낙동강 유역 경북 구간에는 국가지정, 도지정, 문화재자료 등 신라ㆍ가야ㆍ유교 등 3대 문화권의 소중한 문화유산 836점(도내문화재 전체 1768점의 47%)이 분포되어 있어 역사문화를 소재로 한 관광개발이 절실한 곳으로 "4대강 물길살리기 사업"으로 추진하는 "낙동강 물길살리기 사업"과 함께 추진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경북도에 따르면 낙동강 유역 역사문화 관광개발 사업으로 안동에는 유교문화의 삶이 배여있는 전통한옥 마을을 조성하고, 엘리자베스영국 여왕이 다녀갔던 하회마을에서 봉정사까지의 길 주변을 유교문화유산 90여 점을 활용한 퀸-로드(Queen''''s-Road, 18㎞)로 조성하며, 봉화에는 춘향전 이몽룡의 실제 인물로 알려진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의 유적을 중심으로 "이몽룡 테마파크"를 조성하고,
예천에는 유교문화의 중심사상인 충효를 테마로 한 "충효테마파크"를 조성하며,
문경에는 "한류문화 영상테마 클러스트"를 조성한다는 것. 그리고, 상주에는 "경상감영 테마파크"를, 의성에는 원 삼국시대에 번창했던 읍성국가 "조문국 문화권 개발"을, 구미에는 "해평 금호리 연지 생태공원"을, 칠곡에는 "산성체험촌"을, 성주에는 "동락골 생태공원", "성주호 모험-레프츠 타운"을, 고령에는 "대가야 고대촌"과 "대가야 옛 뱃길 재현사업"을 각각 추진한다는 것이다.
경북도는 낙동강 유역 3대 문화권 역사문화 관광지 조성을 경북이 친환경 녹생성장을 선도해 나갈 수 있는 미래 전략사업으로 정하고, 국토해양부의 "4대 강 물길살리기 기본계획"과 문화체육관광부의 "4대 강 유역 문화ㆍ관광발전 계획"에 반영해 줄 것을 건의했다.
출처 : 경상북도청(聯合뉴스 2009.01.28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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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한농원 [記事] : 잘 배워서 잘 살자 블로그/ 예천 참한농원 귀농 체험담 - 종산댁 (직거래 성공)/ 2009/01/28 오전 11:35 | 아름다운 생활 -- 주말농장/ 친환경대학에서 발표했던 원고입니다/ 글쓴이: ok목장(나옥주) / 조회수 : 111 / 07.05.16 19:54 /
파란하늘 따뜻한 태양아래 새싹들이 함차게 돋아나는 신록의 계절 오월입니다. 들판은 점점 더 진한 초록으로 물들어가고 이제 막 꽃잎을 떨어뜨린 복숭아나무와 배나무에 콩알만한 열매들이 하루가 다르게 굵어지기 시작하는 걸 바라보면 신기함과 대견함으로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오래 전 농사일을 처음시작 할 때에는 농한기인 겨울날이 참 좋았고 찬란한 새봄이 되어도 밀려오는 농사일이 겁이나 봄날의 포근한 햇살도, 돋아나는 초록의 눈부신 잎새들도 반갑지 않았더랬습니다.
그런 봄을 몇 번이나 보내고 어느 날부터인가 일을 하지 않으면 왠지 마음이 불안해지고 몸을 놀리는 날은 죄 짓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마음이 농사꾼의 마음이었습니다.
17년 전 두 아이들이 유치원을 다닐 때 도시생활을 접고 부모님들이 계시는 ‘종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집안의 맏이인 남편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어릴 적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되면서 서울에서 공부를 마치고 결혼하고 작은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20년이 넘도록 도시생활을 하면서 마음은 언제나 고향을 향해있는 남편이 각박한 도시생활을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고 늘 고향에 내려가 나무 키우면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두 아이들이 태어나고 유치원 다닐 무렵 그야말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덜컥 귀농이라는 걸 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귀농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능력 없는 사람이 도시생활에 실패하고 마지막 수단으로 농사를 택해 고향으로 내려오는 거라 못 박아 생각하고 주위에선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남들이 보는 시선이 이럴진데 부모님들의 심정이야 오죽하셨겠습니까! 외동으로 자라셔서 그 옛날 대학까지 나오셨던 아버님이 자식에 대한 욕심 또한 유난하셨습니다.
맏이인 남편을 어린 나이에 서울로 유학까지 보내시면서 커다란 기대를 안고 공부시켜 놓았는데 농사꾼이 되겠다고 고향으로 내려왔으니 부모님의 실망은 정도를 넘어 한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가운데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년 전부터 묵고 있는 동네 앞산의 비탈지고 척박한 밭 3,000평을 (말이 밭이지 산이 되어버린) 일구어 사과나무를 심고 이듬해에 배나무도 3,000평 정도 심었습니다.
과일농사가 다른 농사와 달리 나무를 키우는 몇 년 동안은 한 푼의 수입도 없고 농비 또한 예상보다 엄청나게 들어가서 생각지 못한 어려움들이 닥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재배기술 역시도 책으로만 익히고 실제경험이 없는 과수농사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습니다. 농사 역시도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기술이 먼저 라는 걸 모르고 열심히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과일에 매달렸습니다.
4년차가 되던 해 아직은 어린 배나무에 처음으로 열매를 한두 개씩 달고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가을을 기다려 감격스러운 수확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정성스런 손길과 피땀으로 키워낸 탐스런 배를 처음 수확 하던 날의 감격스러움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앞이 흐려집니다.
우리 부부에게는 살점과 같은 배 몇 박스를 손이 떨리도록 고이고이 포장을 해서 공판장엘 가지고 나갔습니다. 생전처음 가보는 공판장이 꼭 돗떼기 시장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다리는 동안 우리 배 경매를 했는데 15kg 배 한 상자에 4.500원씩 나왔더군요.
몇 년 동안 어린 나무를 키우며 생전처음 농사지어 수확한 배 10상자, 수수료 떼고 4만 원도 채 되지 않는 돈을 받아오면서 너무나 큰 충격과 실망에 우리 부부는 서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의 허탈함과 좌절감은 지금생각해도 아찔하기만 합니다. 전체적인 배 시세가 그런 건 아니고 비슷비슷한 물건들이 가격은 천차만별이었습니다.
화학농약을 되도록 사용하지 않고 자연자재들로 친환경 농사를 지어보려는 우리의 농사방법이 색깔 좋고 모양 좋은 과일을 생산하지 못 한 게 제값을 받지 못한 이유였습니다.
농비는 커녕 봉지 값 박스 값도 안 되는 첫해 수확은 지금도 가슴 아픈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듬해부터는 사과도 수확에 들어갔고 배도 제법 양이 늘어났지만 수입은 여전히 형편없었고 농비는 점점 더 많이 들어갔습니다.
기계도 구입해야 하고 과수원에 관수시설. 콘테이너박스 구입 등등 예상하지 못했던 크고 작은 지출들이 끝이 없어서 농사의 어려움은 날로 심각해 져갔습니다.
게다가 그때는 사과 값 폭락으로 사과농가 전체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농사 시작부터 농약을 되도록 쓰지 않고 자연농법을 시도하다보니 수확이 형편없고 품질 좋은 과일을 생산해 내지도 못했기에 날이 갈수록 어려움은 더해만 갔습니다.
귀농하면서 서울서 세 들어 살고 있던 작은 아파트와 하던 일을 정리해 가지고 내려온 얼마 되지 않는 돈이 농사 몇 년만에 바닥이 나고 부채까지 안게 되고는 심각한 고민과 좌절에 빠졌습니다.
일단은 면적에 비해 수확도 적고 약을 치지 않고는 재배도 어렵고 값도 형편없어 적자에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사과농사는 포기하기로 하고 미련 없이 많은 사과나무를 캐내고 그 자리에 복숭아나무를 심고 배나무도 2.000평정도 더 늘렸습니다.
그리고는 소비자 값의 삼분지 일도 안 되는 공판장으로는 도저히 물건을 낼 수가 없어 생각해 낸 것이 소비자와 직거래였습니다. 저온저장고가 없으니 수확철 홍수출하로 가격이 형편없어도 모두 팔아야 했습니다.
요즘이야 도농 직거래가 활성화되고 도시소비자들이 어려운 우리 농촌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바라보지만 당시만 해도 직거래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우선은 서울에 살고 있는 가족들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시동생도 시누이도 친정 5남매도 그리고 직장에서, 더러는 학교에서 잘 있는 남편 친구들도 모두가 나의 일 같이 팔 걷어 부치고 판매에 나서주셨습니다.
살고 있는 아파트에 직접 전단지를 만들어 주문을 받아주고 아는 곳 어디든 전화를 해서 주문을 받고 배달할 때도 함께 다니며 커다란 도움들을 주셨습니다.
서울에서 큰 중학교 선생님이신 남편 친구 분은 교장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100여 분이나 되는 선생님들 한분한분에게 직접 주문을 받아주시기도 했습니다.
이토록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소비자와 직거래가 시작되었습니다. 택배가 발달되지 않을 때라 직접 차에 싫고 올라가서 서울시내 여기저기를 돌며 배달해야 할 뿐 아니라 주문과 수금은 도움을 받아야 하니 직거래도 차차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가족이고 친구지만 도움 받는 것도 한계가 있지 일일이 주문받고 수금해서 전해주는 어려운 일을 3년을 도움 받고 나니 너무 미안해서 더 이상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무리를 해서 그 당시 거금을 들여 저온저장고를 지었습니다. 저온저장고만 지어놓으면 판매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배 재배농가가 급증하고 기술 또한 날로 발전하면서 수확량이 급격이 많아져서 해마다 배 가격이 하락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장고를 짓고 첫해 수확한 배 모두를 저장고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홍수출하를 피해 가격이 오를 때를 기다리다 보니 여름이 되었습니다. 배 가격은 점점 더 내려가고 결국은 반 정도는 억지로 팔고 나머지는 배 한 상자가 박스값과 공판장 수수료도 안 되는 가격이라 눈물을 머금고 버려야했습니다.
일 년 내내 모든 농자재와 농비를 외상으로 쓰고 나면 수확한 과일 모두를 팔아도 외상값 갚기가 바쁘고 다음해 생활비와 농비는 또 빚이 되는 악순환이 이어졌습니다.
7년 전입니다. 인터넷이 농촌에까지 보급되어 더러는 개인 홈피를 만들어 운영하는 시람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할 무렵 홈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처음 시작은 꼭 농산물 판매가 목적은 아니었고 떨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이 이 공간에서 서로 소식도 전하고 삭막한 도시에서 고향의 향수를 그리는 이들과 농촌을 그리워하는 도시사람들에게 사진이나 글로나마 자연의 신선함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농촌 생활을 글로 쓰고 사진으로 올려놓으면 얼굴도 모르는 도시사람들이 하나둘 꼬리글도 달고 글도 올리고 그렇게 소중한 인연들이 생겨났습니다.
복잡한 도시에서 잠시나마 저희 홈피에 들려 농사짓는 이야기와 사진을 보면 하루가 즐거워진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아 저희 또한 이분들의 고마움에 힘입어 농사짓는 일이, 시골에 사는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우리가 짓는 농산물을 드시고 싶다는 분들이 판매를 권하시고 우리 역시도 상품성이 조금 떨어져도 정직하게 유기농사 지어서 이분들과 나누어 보리라 마음먹고 전농사인 배 5000평, 논 8000평, 복숭아 3000평을 본격적으로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유기농사를 지었습니다.
농사짓는 과정들을 사진과 글로 상세하게 올려서 도시의 소비자분들이 농사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가를 진정 가슴으로 알게 하고 우리 농산물의 소중함도 심어주고 싶었고 누구든지 오셔서 직접 같이 일하고 싶었습니다.
홈피 운영 첫해에 생산물의 반 이상을 홈피를 통해 판매를 할 수 있었습니다. 판매에 자신이 생기니 농사일도 자신이 생겼습니다. 나날이 판매량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쌀 생산량 50%는 생명의 공동체 소비자와 직거래를 하고 너머지 50%와 복숭아와 배 산수유와 호두 모두 인터넷 직거래로 제가 원하는 가격을 받고 판매를 하고 있습니다.
갈수록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건강에 관심이 깊어지고 따라서 유기농산물에 눈길을 돌리시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소비자뿐만 아니라 우리 농민들 역시도 유기농에 주목하시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농산물수입 개방에 대한 대안 중 하나가 유기농이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지만 쉽사리 실천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 판매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유기농사에 있어서는 온라인 판매가 충분히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이유는 지금 소비자들이 유기농 농산물을 많이 불신하는 게 사실입니다. 유기농산물 전문 판매 회사들이 있고 백화점이나 마트에 유기농 코너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지만 이따금씩 화학농약 검출이 되어 메스컴에 오르내리는 일이 발생하면서 아예 수입 유기농산물을 애용하는 소비자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터넷 판매의 가장 중점은 정직하게 농사지어 소비자가 충분히 믿을 수 있게끔 전달을 잘 해야 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판매회사 농산물들이야 여러 농가가 지은 것들을 모아 판매하고 가공하고 하는데 농가 하나하나 일년 내내 농사짓는 걸 감시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농가들을 믿고 애용하는 수밖에 없는데 믿지 못하면 사 드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온라인을 통해서건 아니건 꼭 물건을 사고파는 관계를 넘어 정말 마음을 나누는 좋은 관계가 되면 가격은 얼마가 되든지 정직하게 정성 들여 지었다는 것만으로도 소비자들은 정말 고마워하면서 사서 드십니다.
저희 홈피에서는 상품을 사진으로 화려하게 올려 선전하지 않았습니다. 판매에 목적을 두기보다는 삭막한 도시에서 자연을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다정스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단지 생산물의 판매는 부수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지나친 욕심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도시 소비자분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인연들을 소중히 여기며 진정한 마음을 나눈다면 그 뒤에 생산물 판매는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주 농사인 쌀 .배. 복숭아. 산수유. 호두 외에 곡식이나 채소 등등....조금씩 짓고 있는 여러 가지 농산물은 가족처럼 그냥 나누어 먹습니다.
농촌에서는 흔한 것들이지만 도시에서 받으시는 분들은 대단한 기쁨으로 저희부부의 정성으로 깨끗하게 지은 것이라는 것만으로도 무척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제가 드리는 것 보다 몆 배는 더 저희에게 주십니다. 서울에 계시는 분들은 생활용품이며. 화장품. 속옷. 부산이나 바닷가에 계시는 분들은 생선이며 건어물들을 일 년 내 내 보내 주시며 서로 많은 것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농번기 날마다 무더위에 농사일 하는 글을 올리면 안타까움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시고 싶은 분들이 직접 반찬까지 만들어서 보내주시기도 합니다.
‘회원’이라는 말 대신 ‘가족’이란 말을 쓰고 있고 정말 가족처럼 지내는 분들이 많습니다. 체험행사 역시도 ‘종산가족 모임’이라 하고 있으며 일년 내내 많은 가족분들이 수시로 다녀가시고 농사일도 이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년에 서너 번 정도 하는 체험행사 때에도 도시의 종산가족 분들이 종산에서 나지 않는 모든 것들을 각자 한가지씩 분담하여 준비해 주셔서 큰 행사를 별 부담 없이 치룰 수 있도록 도움들을 주시기도 합니다.
홈피를 운영한지 올해로 7년째가 되었습니다. 화학농약과 화학비료를 멀리하고 짓는 농사가 수확은 턱없이 적지만 무엇보다 저희를 믿고 격려를 주시는 종산가족 여러분들께 건강한 먹을거리를 드릴 수 있다는 점에 자부심을 갖게 되고 많든 적든 지금은 생산물 모두를 제가 원하는 값을 받고 판매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홈피를 시작하기 전만 해도 농삿일이라는 것이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농사도 너무 힘들고 재미없었고 농사의 즐거움을 모르니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시골문화 앞에서 며느리라는 이름 때문에 모든걸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것도 너무나 숨막히고 힘들어서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심하게 한 적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어려움을 잘 이겨냈기에 지금 당당한 농사꾼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 개인 홈피를 통해 종산가족 좋은 님들과의 소중한 만남이 있고 이분들이 진정 저희와 함께 농사의 즐거움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커다란 힘을 주시고 몸으로 마음으로 많은 도움들을 주십니다.
마음이 즐겁고 행복하면 몸이 좀 고달파도 힘든 줄 모릅니다. 농사의 즐거움을 알게 되면서 자연의 고마움을 알게 되고 땅의 숨소리 꽃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렸습니다.
농사일이야 말로 곧 수행이고 감사하는 마음과 커다란 가르침으로 정신을 채울 수 있고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 제가 바라는 욕심이 있다면 도시의 종산가족 많은 분들께 나의 삶 속에서 온 몸으로 깨우친 자연의 힘과 아름다움을 전해드리고 소중한 인연의 끈을 더욱 단단하게 다지며 자연 속에서의 즐거움과 행복을 함께 나누는 일을 오래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고맙고 감사한 건 지난날 많은 우여곡절을 격으면서도 지금 농촌에 살고 농사일하는 것에 진정 후회가 없고 많이많이 행복하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더 행복해지기를 바래서 끝없이 노력하고 자신을 발전시켜 나아가고 있다고 봅니다. 어느 자리에서 무엇을 하며 사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자신의 자리를 분명하게 찾는다면 충분히 아름다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질이 아무리 풍부해도 누군가와 나눔이 없으면 외롭고 불행합니다.
삶은 정해진 것이 아니고 만들어가는 거라 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의 삶을 더욱 이쁘고 고운 삶으로 만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집니다. 이것도 욕심이라면 더 큰 욕심을 부려 보고 싶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종교를 묻는다면 나의 생활터전인 땅과 각종 식물들 그리고 가을에 탐스럽게 열리는 열매들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2007년 5월 11일 경북 예천군 개포면 가곡리 종산 (참한농원) 종산댁 씀(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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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향교(龍宮鄕校) [敎育] : 용궁면 향석1리 266번지 옛 용궁현(龍宮縣)의 치소(治所)였던 구읍 교동(舊邑校洞)에 남향으로 있는 건물로, 지정문화재 이외 문화재 건조물(指定文化財以外文化財建造物) 제60호(1975.2.5 지정)였다가, 경북유형문화재(慶北有形文化財) 제210호(1985.10.15 指定)가 되었다. 경북향교재단(慶北鄕校財團)의 소유이다. 원래 현 위치에서 동편 100m 지점에 초건(初建)했으나, 1400년(定宗 2)에 소실(燒失)되었고, 1512년(中宗 7) 4월에 현 위치로 옮겨 세웠는데, 임진왜란(1592) 때 다시 불탔다. 목재 홍여하(木齋洪汝河)의 기문(記文)에 의하면, 1603년(宣祖 36)에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을 세웠고, 1636년(仁祖 14)에 세심루(洗心樓)를 중건한 것인데, 여러 차례 보수하여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1848년(헌종 14) 봄에 중수, 1863년(철종 14) 7월 하순에 명륜당(明倫堂)을 중수하였다. 1873년(고종 10) 대성전(大聖殿)을 중수, 그 해 10월에 서재(西齋)를 중수하였으나 현재는 없어졌다. 1967년 6월과 1978년에 건물을 보수하였다. 건물 6동(建坪 105坪)은 모두 목조와가(木造瓦家)이다. 이 향교의 관할 지역은 구 용궁군(舊龍宮郡) 지역인 용궁면, 풍양면, 지보면, 개포면 일부와 문경시 영순면(永順面)의 일부 지역인데, 40개 문중이 참여하고 있는 중설위(中設位)로 공자(孔子)를 비롯한 27위의 성현(聖賢)을 모신다. 책임의 폐가 근래 간혹 있는데, 혹 모록(冒錄)하고 혹 평민을 재임(齋任)으로 망(望)해서 도감(都監)으로 임명하여 하여금 성묘(聖廟)에 배알(拜謁)하고 명륜당(明倫堂)을 밟아 감히 원경대부(元卿大夫)와 더불어 평등해 구별이 없고, 또 임록(任錄)과 향록(享錄)에 평행(平行)히 열서(列書)하여 도할 묵삭(刀割墨削)하는 거(擧)에 이름이 있어 크게 사체가 없다. 이 폐는 더욱 막지 않을 수 없다(龍宮鄕校 節目). [風水說] : 향교터가 옥녀탄금(玉女彈琴)의 지형이라 하여, 이를 기준으로 격에 맞추어 실음실(瑟音室), 금산(琴山, 飛龍山), 동동바위, 무동(舞童, 舞紙里), 별락(別樂, 月梧里 벼락고개)를 정했다고 하며, 옥녀(玉女)가 거문고를 타면 실음실에서 소리가 나고, 비룡산(飛龍山)은 거문고 줄이며, 동동바위가 장단을 맞추고, 무동(舞童)의 어린이가 크게 즐겨 춤을 춘다는 전설이 있다. [定員] : 교생 수(校生數)는 세종 때 15명이었으나,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따라 30명으로 배로 증가되었다. 태종 때 지급된 학전(學田)과 학노비(學奴婢)의 수효는 예천향교(醴泉鄕校)와 같다. [大成殿] : 건평 20평, 정면 4칸(10m), 측면 3칸(6.45m), 단층 맞배지붕이고, 막돌 기단 위에 갑석(甲石)을 두르고 전돌을 깔았고, 초석(礎石)은 둥근 호박주초(柱礎)를 사용했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원주(圓柱)를 세웠다. 주초석(柱礎石)은 상면(上面)에 경(徑) 45cm 내외의 원좌(圓座)를 조출(彫出)하였다. 문비(門扉)는 어간(御間)에 쌍여닫이를 달고, 좌우측 면에는 안기둥을 붙여 외여닫이를 달았고, 중깃이 노출되어 있다. 측면에는 막돌과 기와를 사용하여 부벽(附壁)을 쌓았고, 부벽 상부에 기와를 얹은 것이 이채로우나 수법으로 보아 후대에 쌓은 듯하고,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의 초익공(初翼工)으로 건물 규모에 비하여 기둥 높이가 비교적 높다. [明倫堂] : 건평 18평, 정면 5칸(12.5m), 측면 2칸(5m), 팔작(八作)지붕이고, 석축 기단(石築基壇) 위에 호박 주초(柱礎)를 놓고 배흘림이 완연한 원주(圓柱)를 사용했고,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의 이익공(二翼工)이다. 접시 대공(臺工)과 양봉이 종량(宗樑)를 받고 파련대공(波蓮臺工)이 마루대를 받고 있다. 대청(大廳)의 중앙 3칸을 우물마루를 깔았고, 측면 통간(通間)의 온돌방을 꾸몄는데, 앞에는 퇴(退)를 놓아 난간을 달고 헌함을 돌렸다. 현판 3자는 신안 주희(新安朱熹)가 썼고, 그 외에는 많은 기록들이 걸려 있다. [洗心樓] : 정면 7칸(17.15m), 측면 2칸(4.1m) 맞배지붕이고, 규모가 비교적 큰 건평 21평 2층 누각이다. 하층(下層)은 통로로 사용되고, 상층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상층 전면의 문비(門扉)는 각 칸마다 쌍여닫이의 판문을 달고, 널판을 붙였고, 나머지 3칸은 난간을 돌렸다. [東齋] : 정면 5칸(11.7m), 측면 1칸(3.35m), 맞배지붕이다. 서재(西齋)는 없어졌다. [神道門] : 건평 0.5평, 정면 1칸(1.4m), 측면 1칸(1.4m), 단층 맞배지붕이다. [廚所] : 건평 34평, 단층 맞배지붕, 외부 정면 12m, 측면 9.25m, 내부 정면6.9m, 측면 4.35m이다. [位牌] : 중설위(中設位)로 27현(賢)이 봉향(奉享)되었는데, 공문 5성위(孔門五聖位 : 孔子, 曾子, 顔子, 孟子, 子思), 송(宋) 나라 4현(四賢 :周敦이, 程顥, 程이, 朱熹), 우리나라 18현(崔致遠, 鄭夢周, 鄭汝昌, 金麟厚, 成渾, 趙憲, 宋時烈, 朴世采, 薛聰, 安裕, 金宏弼, 李滉, 李珥, 金長生, 金集, 安浚吉)이 봉안(奉安)되어 있다. 예천향교보다 2위가 더 많은데, 그 2위는 주돈이(周敦이), 정이(程이)이다. 즉 동편에는 공문 10철(孔門十哲)을 봉안하고, 서편에 최치원(崔致遠) 외 11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下馬碑] : 향교 앞 큰길가에 하마비가 있는데, 이 앞을 지나는 길손님들은 예의를 갖추고 지났다. 또 한 기(基)는 예천 방면에 있었는데, 어느 사람이 자기 가정에 옮겨 놓아 신(神)의 저주를 받아 망가(亡家)했다고 한다.(朝鮮환輿勝覽 1939, 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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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