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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1829) : 예천 충효 28(附 예천 출신 김영학, 30일 지식경제부 제2차관에 내정...축하합니다/예천방문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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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내신리 권산해정려현판(醴泉內新里 權山海 旌閭懸板) [遺物] : 호명면 내신리 노봉서원 옆 정려각(旌忠閣) 내에 유존한다. 죽림(竹林) 권산해의 불사이군(不事二君)한 충성심을 기려 1791년(정조 15) 조정에서 정려(旌閭)하였다. 원래 대죽리에 세운 것을 1862년 지보면 신풍2리 뒷산 절골로 옮겼으나 2004년 다시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판의 크기는 가로 157cm, 세로 39.5cm이며, 자경(字徑)은 5x5.4cm이다.(醴泉郡誌 2005)
예천내신리 죽림선생 신도비(醴泉內新里 竹林先生 神道碑) [碑] : 호명면 내신리 340-1번지에 있는 비로, 원래 지보면 신풍리 죽림공 권산해(權山海)의 묘전(墓前)에 있던 것을 2004년에 호명면 내신리에 위치한 노봉서원 입구로 정충각(旌忠閣)과 함께 이건하였다. 1885년에 건비(建碑)하였고, 1894년 추기하였다. 비는 구부(龜趺)와 비신(碑身), 이수( 首)가 있는 형태로, 비신의 정면에 ''''''''''''''''竹林權先生神道碑''''''''''''''''라 음각되어 있다. 구부의 크기는 길이 160cm, 너비 100cm, 높이 61cm이고, 비신의 크기는 높이 145cm, 너비 52.5cm, 두께 22cm이며, 이수의 크기는 높이 58cm, 너비 80cm, 두께 46cm이다. 자경(字徑)은 13.5x12.5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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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노상리 의충사(毅忠祠), 임장군 묘(林將軍廟) [터] : 예천읍 노상리 58번지 대창중고등학교(大昌中高等學校) 서남쪽 언덕 위에 있던 사당으로, 처음에는 객사(客舍) 동쪽(現 邑事務所 자리)에 ''''''''''''''''상원사(上院祠)''''''''''''''''로 창건하여 고려 원종 때 원수 임지한(元帥林支漢)과 조선 때의 창원부사 황사성(昌原府使黃士誠)을 제사지내다가, 1715년(숙종 41)에 재건하여 1868년(고종 5)에 헐리고, 1898년(광무 2)에 고을 사람들이 예천읍 노상리 58번지에 다시 세워 조선 말 의사(義士)이며 군 관리(郡官吏)였던 정대일(鄭戴一)을 추가로 제향하여 보존해 오다가, 1978년에 집중 폭우로 도괴되고 터만 남아 있다. 사당 오른편에 있던 두 그루의 큰 감나무와 왼쪽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 그리고 그 옆에 조그만 대나무 몇 그루는 지금도 서 있다. 사당 벽에는 아주 오래된 벽화가 있었는데, 커다란 노송(老松)과 큰 호랑이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임진왜란(1592) 때 왜군의 장수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가 예천을 점령하여 향교에 거처하려 하자, 사방에 먼지가 일어나며, 한낮인 데도 그믐밤처럼 어두워지자 겁을 먹고 떨면서 감히 향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도로 나와서 말하기를, "이 곳에 옛날 명장(名將)의 사당이 있느냐?"라고 물으니, 고을 사람들이, "고려 때 나라에 큰공을 세운 임 장군(林將軍)의 사당이 바로 곁에 있다."라고 했다. 수가(秀家)가 곧 그 곳으로 가서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면서 축문을 지어 사과한 뒤 무리에게, "이 고을은 옛날의 유명한 장군의 신령이 깃든 곳이므로 조심하고 함부로 날뛰지 말 것이며, 살인을 하거나 방화를 해서는 안 된다."라고 명령하였으므로 예천군내에서는 큰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1698년(숙종 24)에 전국에서 3만여 명이 죽는 전염병이 한창 번질 때도 이 곳에서 임 장군에게 빌었더니, 이 고을에는 죽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醴泉郡邑誌 1780 1841 1895, 醴泉郡誌 1939, 朝鮮 輿勝覽 1929)
예천노상리 임장군묘(醴泉路上里廟), 임장군묘(林將軍廟), 사당(祠堂) [터] : 예천읍 노상리 객사(客舍) 동쪽에 있던 사당으로, 예천인 임지한(林支漢) 장군을 제향하였다.(醴泉郡邑誌 1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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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덕계리 충효각(忠孝閣), 충효사우(忠孝祠宇), 충효사(忠孝社, 忠孝祠) [碑閣] : 용궁면 덕계리(德溪里) 달계마을 앞에 있는 단간(單間) 비각으로, 원래 1710년(숙종 36)에 충효사우(忠孝祠宇, 忠孝祠)로 창건하여 찰방 반유(察訪潘濡)를 주향(主享), 십독 반충(習讀潘沖)를 배향(配享)하였다.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받드는데 정성을 다했고, 어머니가 별세하니, 3년을 죽을 먹어가며 묘 옆에 시묘하였고, 1544년 중종(中宗)과 1565년 문정왕후의 국상(國喪) 때는 내실(內室) 출입을 금하고, 3년을 소식(素食)으로 지낸 거제인 관물당 반충(觀物堂潘沖)의 충효를 기려서 효종 때 정문이 내려지고 국명(國命)으로 영의정 이경흥(領議政李慶興)이 1887년에 달계(達溪)마을에 충효각(忠孝閣)을 다시 세웠다.(練藜室記述 別集, 龍宮縣邑誌 1780, 竺山勝覽 1934, 嶠南誌 1937, 醴泉郡誌 1939, 俎豆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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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도장리 석문강당(石門 講堂) [書院] : 지보면 도장리 산378-4번지(垈)에 있는 석문 정영방(鄭榮邦)이 후진을 기르던 곳으로, ''''''''''''''''지포서당(芝圃書堂)''''''''''''''''이라고도 한다.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강당의 주위에는 방형(方形)의 토담을 둘렀으며, 담장의 좌측면에는 사주문을 세워 출입케 하였다. 시멘트로 상면을 마감한 다소 높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은 후 각주를 세웠으며, 평면은 어칸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다. 가구(架構)는 종량(宗樑) 위에 동자주형(童子柱形)의 대공(臺工)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받게 한 오량가(五樑架)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석문강당(石門講堂) [講堂] : 지보면 도장리 산38번지 소재, 석문 정영방(鄭榮邦)이 조선 중기에 후진을 기르던 강당으로, 지포강당(芝圃講堂)이라고도 한다.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어칸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며, 가구는 오량가(五樑架)의 홑처마집이다.(醴泉郡誌 2005)
석문묘(石門廟) [祠堂] : 지보면 도장리 익장(益庄) 마을의 지포서당(芝圃書堂) 곁에 있는 동래인 석문 정영방(鄭榮邦)의 사당으로, 1764년(영조 40) 유림에서 천거하여 정영방을 완담서원에 추향하고 불천위(不遷位)로 제향하기 위해 위패를 모셨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기와지붕이다.(龍宮鄕校誌 上卷 2005)
석문별묘(石門別廟) [祠堂] : 지보면 도장리 익장(益庄)의 지포서당(芝圃書堂) 곁에 있는 사우(祠宇)로, 석문 정영방(石門鄭榮邦)을 제사한다.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집이고, 목조 기와집이다.
석문 별묘(石門 別廟) [祠宇] : 지보면 도장리 378-1번지(垈)에 석문 정영방(鄭榮邦)을 봉향하기 위해 조선 중기에 건립한 사당으로,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데, 사당의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담장의 정면과 우측면에는 사주문을 세워 출입케 하였다. 시멘트로 마감한 기단 위에 큼지막한 자연석 주초를 놓은 후 기둥을 세웠는데, 전면의 기둥은 원주를 팔각형으로 다듬었다. 간살은 어칸을 양 협칸보다 조금 넓게 잡아 어칸에는 2짝의 세살문을 달았으며, 양 협칸에는 외짝의 세살문을 달았다. 가구는 삼량가(三樑架)의 홑처마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석문선생문집(石門先生文集) [冊] : 풍양면 청곡리 포내(浦內) 출신인 석문 정영방(鄭榮邦, 1577-1650, 進士)의 시문집(奎 12286)으로, 7권 3책(4권 부록 각 3책), 목판본, 32x21.5cm,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은 19.2x16cm, 유계(有界), 10행 20자, 주쌍행(註雙行), 판심(版心)은 상하 내향 이엽 화문 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이다. 정언사(鄭彦思)가 편집하여 1821년(순조 21)에 간행된 책이다. 1802년(순조 2)과 1821년(순조 21, 柳尋春)에 된 서문과 1732년(영조 8)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서문은 정언충(鄭彦忠)과 1802년(순조 2)에 정술도(鄭述道)가 썼고, 발문은 1732년(?)에 김래주(金來周)와 1821년(순조 21)에 유심춘(柳尋春)이 썼다. ''''''''''''''''금계서재(金溪西齋)''''''''''''''''라는 인기(印記)가 있다. 정영방의 자는 응보(應輔), 호는 석문, 본관은 동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제자, 일찍이 학문과 시가 자못 출중한 인물이었다 한다.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합격, 뒤미쳐 광해군의 난정이 계속되고 또 자신 역시 세상일에 절실한 생각이 없어 여생을 오직 학문과 시로 소일하였다 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시는 그가 가장 득의로 하던 것이어서, 이 문집에 수록된 것을 봐도 전체 3책 중 2책이 모두 시로 되어 있을 만큼 그 비중이 크다. 목차는, 책천(冊天)에 서(序), 목록, 권1이고, 책지(冊地)에 권2, 권3이고, 책인(冊人)에 권4, 권5, 권6, 발(跋)이다. 즉, 권수(卷首)에 정언충(鄭彦忠)과 조술도(趙述道)의 서(序)가 있다. 권1에 사(辭) 2편(日晩歌寄柳德茂 等), 부(賦, 鄭瓜亭賦竝序 等 2首), 오언절구(五言絶句, 英陽書堂題壁上 2絶 等 105首), 오언율시(五言律詩, 詠雪 等 94首), 오언배율(五言排律, 奉別晩山西行 等 5首), 권2에 오언고시(五言古詩, 龍宮學堂懷朴士虎世雄 等 23首), 육언(六言, 祥離節二墓 等 2首), 칠언절구(七言絶句, 二月見梅有感 二絶 等 163首), 권3에 일언율시(一言律詩, 題浪裏船歌曲後 等 88首), 일언배율(一言排律, 臺城柳十六韻), 칠언고시(七言古詩, 庚子臘月子老峴向松村馬上ㅇ占 等 10首), 잡시(雜詩, 敬亭吟 等 3首), 만사(輓詞, 愚伏先生輓詞 等 40首), 권4에 소(疏, 龍宮士民請견減昏朝所加下中之稅疏 및 英陽士民請復顯疏 等 2篇, 前者는 龍宮 地方에서 光海君 때 加徵되었던 下中稅를 減해 달라고 請한 上疏이다). 서(書, 上愚伏先生問目 等 7篇 : 주로 예설(禮說)에 관한 글이다). 기(記, 遺種亭記, 夢賚庵記 等 2篇), 제문(祭文, 三江書院 奉安 文忠公圃隱鄭先生 文純公退陶李先生 文忠公 西厓柳先生文 等 9篇), 지갈(誌喝, 知事趙公墓誌 等 2篇), 행록(行錄, 先生梅塢公行錄), 유사(遺事, 愚伏先生遺事 1篇), 잡저(雜著, 壬辰遭變事蹟), 마지막으로 권말(卷末)에 정래주(鄭來周), 정필규(鄭必奎), 유심춘(柳尋春)의 발(跋)이 있다. 위 시들은 또한 당대 평론가들에게 상당히 호평으로 받았던 것이 사실인 듯 하다. 우선 당대 문장으로 이름이 높던 몽예(夢예) 남극관(南克寬, 1689-1714)도 그의 시의 성격을 가리켜, ''''''''''''''''체기고묘(體氣高妙), 흥기심원(興寄深遠)''''''''''''''''이란 평을 하였다는 말이 서문에 나오는데, 이 평론의 말은 그 뒤 여러 사람의 문장 가운데 자주 인용된 구절이기도 하다. 한편 이 문집의 서문을 쓴 또 하나의 평론가인 정언충(鄭彦忠)은 역시 그의 본령(本領)은 문(文)보다도 시(詩)가 더욱 장점인 것임을 지적한 바가 있다. 시 가운데서도 더욱이 오언근체(五言近體)가 뛰어났는데, 부록에 실린 ''''''''''''''''십유(拾遺)''''''''''''''''에도 ''''''''''''''''그의 시 가운데 오언절구가 제일 좋다''''''''''''''''라 하고있다. 사적(事蹟)은 주로 임진왜란 때 정영방 일족이 당했던 고난과 그 지방의 형편을 서술한 기록이다. 부록에는 정영방 본인과 관계되는 자료가 망라되어 있고, 곧 묘지명병서(墓誌銘竝序), 묘갈명병서(墓喝銘竝序), 가장(家狀), 제문, 만사, 완담향사(浣潭鄕社) 추향(追享) 때의 고유문(告由文), 봉안문, 십유 등 8편의 문장이다. 국립중앙도서관 고전운영실에 소장(청구기호 한古朝46-가1723)되어 있고, 경북대학교 도서관 중앙고서실에 소장(청구기호 중앙고 811.9 정64ㅅ)되어 있고, 성균관대 중앙도서관 존경각(尊經閣)에 소장(분류기호 D03B-2014)되어 있고, 안동대학교 도서관 중앙한적실에 소장(청구기호 古枕 810.819 정64ㅅ)되어 있다.(인터넷 야후 2001)
석문선생문집(石文先生文集(幷)附) [冊] : 풍양면 청곡리 포내(浦內) 출신인 석문 정영방(鄭榮邦, 1577-1650, 進士, 德行, 文章, 孝友 等이 매우 敦篤)의 문집으로, 4권 부록 합(合) 3책, 31.9×21.2cm,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廓)은 19.4×16.1cm, 유계(有界), 10행(行) 20자(字), 판심(版心)은 내향 이엽 화문 어미(內向二葉花紋魚尾)이다. 1821년(純祖 21)에 간행하였다. 발문(跋文)은 1821년(上之二十一年辛巳) 유심춘(柳尋春)이 썼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경북대, 고려대, 단국대(천안), 부산대, 조선대이다.(keris 2003 2005)
석문선생문집(石門先生文集 幷附) [冊] : 풍양면 청곡리 포내(浦內) 출신인 석문 정영방(鄭榮邦, 1577-1650, 進士, 德行 文章 孝友 等이 매우 敦篤)의 문집으로, 한국문집편찬위원회에서 편집하여 서울 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에서 1997년에 출판한 <한국역대문집총서> 2223권(411쪽, 影印本, 23cm)에 수록되어 있다. DDC 895.7 20이고, 국립중앙도서관 문학실에 소장(청구기호 810.819-정357ㅅ=2)되어 있고, 경북대학교 도서관 중앙국학자료실에 소장(청구기호 중앙811.8 한17-2223)되어 있고, 안동대학교 도서관 중앙대출실에 소장(청구기호 810.829 한17경 2223)되어 있고, 그 외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강원대, 경상대, 계명대(동산), 고려대, 동국대(경주), 부경대, 상명대(서울), 성균관대(중앙), 순천향대, 신라대, 영남대, 원광대, 인하대, 전남대, 중앙대(제1캠퍼스), 충북대, 한국외대(서울, 용인), 한양대(백남), 홍익대이다.(keris 200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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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독양리 지산별묘(芝山別廟) [祠堂] : 보문면 독양1리(篤陽一里)에 있는 사당으로, 강릉인 지산 김팔원(芝山金八元)을 제향키 위해 1968년에 중건하였다.
지산별묘(芝山別廟) [祠堂] : 보문면 독양리 544번지에 있는 사당으로, 강릉인 지산 김팔원(金八元)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이 1968년 8월 15일에 세웠다. 원래 인계서원(仁溪書院)에 봉향하였으나 대원군 때 훼철되어 재산 인곡(才山仁谷)에 8칸 묘우를 건축하여 제향하다가 현 위치로 이건하여 별묘로 건축하였다.(醴泉鄕校誌 2004)
지산별묘(芝山別廟) [祠堂] : 보문면 독양2리 소재, 강릉인 김팔원(金八元)을 제향하기 위하여 1968년에 중건한 별묘로, 들미고개의 산허리에 자리잡고 있다. 별묘는 단 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데, 전면의 반 칸에는 마루를 깔아 툇간을 이루게 하였으며, 가구는 삼량가(三樑架)의 홑처마집이다.(醴泉郡誌 2005
지산선생문집(芝山先生文集) [冊] : 감천면 미석리 상석남(上石南) 출신 지산 김팔원(金八元, 1524-1569))의 문집으로, 2권 1책, 목활자판(木活字版), 31.5x20.7cm, 반곽(半郭)은 21x15.5cm, 10행(行) 18자(字), 사주쌍변(四周雙邊), 유계(有界), 주쌍행(註雙行), 판심은 내향 이엽 화문 어미(內向二葉花紋魚尾)이다. 1826년(순조 26) 김시찬(金是瓚)의 글이 있다. 1920년 경 간행되었다. 성균관대 중앙도서관 존경각(尊經閣)에 소장(분류기호 D03B-2164)되어 있다.(인터넷 야후 2001)
지산선생문집(芝山先生文集) [冊] : 감천면 미석리 출신 지산 김팔원(金八元, 1524-1569)의 문집으로, 한국문집편찬위원회에서 편집하여 서울 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에서 1997년에 출판한 <한국역대문집총서> 2295권에 수록되어 있는데, 447쪽, 영인본(影印本), 23cm이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성균관대(서울)이다.(인터넷 야후 2001)
지산선생문집(芝山先生文集) [冊] : 조선 명종 때의 예천 출신 지산 김팔원(金八元, 1524-1569)의 시문집으로, 서(序), 부(賦), 시(詩), 서(書), 찬(贊), 지(識), 설(說), 기우(祈雨), 제문(祭文), 부록에는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묘지명(墓誌銘), 제문(祭文), 만사(挽詞), 옥계서원봉안문(玉溪書院奉安文), 인계리사(仁溪里祠), 복향시봉안문(復享時奉安文), 상향축문(常享祝文), 인계리사 승원 이건보구봉안문(陞院移建洑邱奉安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禮鄕醴泉 1994)
지산선생문집(芝山先生文集) [冊] : 감천면 미석리 상석남(上石南) 출신인 지산 김팔원(金八元, 1524-1569, 禮曹佐郞)의 문집으로, 447쪽, 영인본(影印本), 23cm, 서울 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에서 1997년에 발행한 <한국역대문집총서> 2295권에 <우암선생문집(寓庵先生文集)>(金澍) 등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안동대학교도서관 중앙대출실에 소장(청구기호 810.829 한17경 2295)되어 있다.
지산선생문집(芝山先生文集) [冊] : 예천 출신인 안기룡(安麒龍, 純祖 때, 司馬試) 등의 저서로, 549쪽, 23x16cm, 한국문집편찬위원회에서 편집하여 서울 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에서 1994년에 인쇄한 <한국역대문집총서(韓國歷代文集叢書)> 1185권에 <난포선생문집(蘭圃先生文集)>(이대형 著)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강원대, 광주교대, 국민대, 동국대(경주), 호원대, 홍익대이다.(keris 2003)
지산선생문집(芝山先生文集, 芝山集) [冊] : 감천면 미석리 상석남(上石南) 출신인 지산(芝山) 김팔원(金八元, 1524-1569, 生員, 進士, 文科 及第, 禮曹 佐郞, 龍宮 縣監, 後孫은 普門面 篤竹里 等)의 문집으로, 한국문집편찬위원회에서 편집하여 서울 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에서 1997년에 발행한 <한국역대문집총서(韓國歷代文集叢書)> 2295권(447쪽, 23cm)에 <우암선생문집(寓庵先生文集)>(김주), <희암선생문집(希庵先生文集)>(박치준)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KDC 810.829 4, DDC 811.08 20이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강원대, 경북대, 경상대, 계명대(동산), 고려대, 성균관대(중앙), 순천향대, 신라대, 영남대, 원광대, 전남대, 중앙대(제1캠퍼스), 충북대, 한국외대(서울, 용인), 한양대(백남), 홍익대이다.(keris 2003 2005)
지산선생문집(芝山先生文集 幷附) [冊] : 감천면 미석리 상석남(上石南) 출신인 지산 김팔원(金八元, 1524-1569, 文科, 禮曹佐郞)의 문집으로, 2권 1책, 31.8x20.8cm, 1826년(순조 26)에 발행되었다.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廓)은 20.5x15.4cm, 유계(有界), 10행(行) 18자(字), 소자쌍행(小字雙行), 내향 이엽 화문 어미(內向二葉花紋魚尾)이다. 서문(序文)은 1826년에 광산 김시찬(金是瓚)이 썼다. 권1에 부(賦), 시(詩), 권2에 시(詩), 서(書), 찬(贊), 지(識), 설(說), 제문(祭文), 부록에 사우증유(師友贈遺)가 실려있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고려대이다.(keris 2003)
지산선생문집(芝山先生文集) [冊] : 감천면 미석리 상석남(上石南) 출신인 지산(芝山) 김팔원(金八元, 1524-1569, 生員, 進士, 文科 及第, 禮曹 佐郞, 龍宮 縣監, 後孫은 普門面 篤竹里 等)의 문집으로, 2권 1책, 31.8×20.8cm, 사주단변(四周單邊), 반곽(半廓)은 20.5×15.4cm, 유계(有界), 10행(行) 18자(字), 판심(版心)은 상하백구(上下白口) 상하 내양 화문 어미(上下內向花紋魚尾)이다. 서문에 의하면, 1826년(純祖 26)에 간행하였다. 내용은, 권1(卷之一)에 賦·詩. 권2(卷之二)에 詩·書·贊·識·說·祭文·附錄·師友贈遺이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고려대이다.(keris 2005)
지산세고(芝山世稿) [冊] : 예천 출신인 안기룡(安麒龍, 純祖 때, 司馬試) 등의 저서로, 3권 1책, 목활자본(木活字本), 27.5x20cm, 1948년에 출판하였다.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은 21x16cm, 유계(有界), 반엽(半葉), 10행(行) 20자(字)이다. 소장 대학 도서관은 동국대(중앙)이다.(keris 2003)
지산정(芝山亭) [터] : 감천면 미석리 이곡동(耳谷洞, 龜谷)에 있는 송림 터로, 감릉인 지산 김팔원(金八元)의 장리지소(杖履之所)이다. 노송이 10여 본이 있어 지산정터라 전하고 있다.(醴泉鄕校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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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마산리 완담사(浣潭祠, 浣潭社), 완담향사(浣潭鄕社, 浣潭鄕祠), 마산리사(馬山里社), 완담향현사(浣潭鄕賢祠) [祠堂] : 지보면 마산리 완담(浣潭)에 있는 동래 정씨(鄭氏)들의 사우(祠宇)로, 원래 1568년(선조 1)에 임당 정유길(林塘鄭惟吉)이 경상도 관찰사 재임 중에 고향의 옛 집터인 지금의 풍양면 청곡리 198번지 별실(別室) 삼수정(三樹亭) 곁에 용궁현(龍宮縣)의 사림과 더불어 정유길의 5대조 판서 정구령(判書鄭龜齡)과 종고조 수찬 정옹(從高祖修撰鄭雍), 고조 증 좌찬성 정사(高祖贈左贊成鄭賜)인 3부자(三父子)를 모시는 삼수리사(三樹里社)를 세웠다. 그러나 임진왜란(1592)에 소실되었는데, 정면 3칸, 측면 1.5칸의 건물이었음을 현존하는 주춧돌로 짐작할 수 있다. 1606년(선조 39)에 현 위치인 정구령(鄭龜齡)의 묘 아래에 재사(齋舍, 浣潭鄕祠)를 중건하고, 1678년(肅宗 4)에 같은 곳에 묘우(廟宇)를 복원하여 완담향사(浣潭鄕社)라 하여 정구령(鄭龜齡), 정옹(鄭雍), 정사(鄭賜)를 다시 제향(祭享)하니, 사우의 현판을 상덕사(尙德祠)라 하고 정환(鄭渙), 정광필(鄭光弼)을 추향(追享)하였다. 그 후 정영후(鄭榮後), 정영방(鄭榮邦)을 추향하였다. 대원군 때(1868) 훼철되었다.
[進士 滄皐 鄭仁卓의 詩] : 호탕한 봄바람에 호탕하게 놀자꾸나/ 좌중의 선비들은 모두 현류(賢流)들이지/ 은하수 글이 되니 비단과 같고/ 배 안에 기생 타니 향기가 진동한다/ 퉁소로 흥 도꾸며 아래로 내려가니/ 연하(烟霞)는 병이 들어 귀찬은 듯 머리 돌린다/ 세간에 고기잡이 없음을 알아치리고/ 복숭아꽃 아무 데나 버리고 고의로 거두지 않네/(練藜室記述 別集, 龍宮縣邑誌 1780, 朝鮮 輿勝覽 1929, 竺山勝覽 1934, 嶠南誌 1937, 醴泉郡誌 1939, 俎豆錄, 知保面誌 1987)
완담서원(浣潭書院) [書院] : 지보면 마산리 629-2번지(垈)에 있는 동래 정씨의 서원으로, 1569년에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606년에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1869년에 훼철시 사당만 철거하였는데, 1998년에 사당을 중건하고, 경역 전체를 정비하였다. 배치는 동서재(東西齋)의 기능을 하는 ┗┛자형의 건물과 강당, 내삼문, 사당을 동일축 선상에 놓고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다. 강당은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의 평면을 한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며, 사당은 전면에 개방된 툇간(退間)을 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완담서원(浣潭書院) [書院] : 지보면 마산리 완담에 있는 서원으로, 1568년(선조 1)에 풍양면의 삼수정(三樹亭) 곁에 창건하여 정구령, 정옹, 정사 3부자를 모시다가 임진왜란에 불탄 것을 다시 지보면 마산리에 세우고 정환 정광필을 추향, 다시 영조 때 정영후 정영방 형제를 추향하여 오다가, 1868년 훼철되어 정면 3칸, 측면 1.5칸의 주춧돌만 남았었는데, 1998년 4월에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 사당은 상덕사(尙德祠)이고, 해마다 3월 중해일(中亥日)에 향사를 지낸다. 봉안 위차(位次)는, 정위(正位)에 증이조판서 정구령(鄭龜齡), 동배위(東配位)에 홍문수찬 정옹(鄭雍), 홍문수찬 정환(鄭渙), 참봉 매오(梅塢) 정영후(鄭榮後), 서배위에 증좌찬성 정사(鄭賜), 영의정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진사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이다.(龍宮鄕校誌 上卷 2005)
완담서원 [記事] : 유교관련도서/ 예천의 금석문 1 | 간행년:2003/ 저자:예천문화원/ 발행처:예천문화원 / 浣潭書院 尙德祠配享東萊鄭氏一門四世七賢 事蹟碑銘/ B202_0336.jpg(韓國國學振興院 ugo.net 2008)
완담재(浣潭齋) [齋舍] : 지보면 마산리 산45번지에 있는 재사로, 동래인 삼수정(三樹亭) 정구령(鄭龜齡)의 분영(墳塋)을 수호하기 위해 15세기 중엽에 묘승암(墓僧庵)으로 세워 ''''''''''''''''송계암(松溪庵)"이라 현액(懸額)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인근의 완담향사(浣潭鄕社), 낙포정사(洛浦精舍) 등과 함께 소실되어 1606년(선조 29)에 묘장동(墓藏洞)에 중건하였으나 병자호란 등으로 퇴락하여 현 위치에 중건하여 ''''''''''''''''완서루(浣西樓)''''''''''''''''라 편액하고, 보전하던 ''''''''''''''''송계암'''''''''''''''' 현판을 함께 걸었다. 목조와가 팔작지붕 전침후랑(前寢後廊) 좌우협익(左右狹翼) 형식으로 총 22칸의 재실이다. 기묘년(上之 16年) 9월에 13대손 진사 원석(元錫)이 쓴 ''''''''''''''''완서루 중건기'''''''''''''''', ''''''''''''''''송계암 중건 사적'''''''''''''''', 후손 중대(重岱, 郡守)가 쓴 ''''''''''''''''송계암 중건기'''''''''''''''', 후손 지집(之鏶)이 쓴 ''''''''''''''''송계암 상량문''''''''''''''''이 <용궁향교지>(2005) 상권 1109-1112쪽에 수록되어 있다.
완담지(浣潭誌) [冊] : 지보면 마산리 예천완담종중소(醴泉浣潭宗中所)에서 번역한 책으로, 916쪽, 4.6배판이다. 1992년 1월에 발행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인터넷 야후 2001)
완담 7현 사적비(浣潭七賢事蹟碑) [碑] : 풍양면 청곡리 817번지에 있는 비로, 1993년 9월 26일에 완담향사 상덕사 배향 동래 정씨 일문(浣潭鄕祠尙德祠配享東萊鄭氏一門) 4세 7현(四世七賢)을 위해 세웠다.(浣潭七賢尙德錄 1993)
완담칠현 상덕록(浣潭七賢尙德錄) [冊] : 동래정씨 완담향종약소에서 출판한 책으로, 1993년 9월 16일에 안동 영남사에서 인쇄하였다. 가로 19cm, 세로 27cm, 172쪽이다. 풍양면 청곡리 817번지에 세워진 비에 대한 기록이다.
완담7현 상덕록을 꾸미면서(浣潭七賢 尙德錄을 꾸미면서) [記事] : 지보면 도장리 익장(益庄) 출신인 정양수(鄭亮秀, 1932- , 大昌中高 校長)의 지보면 마산리 완담향사(浣潭鄕社) 상덕사(尙德祠)에 제향된 동래 정씨 7현에 대한 기사로, 정양수선생재직기념회에서 1998년에 발행한 <송대의 40년(松臺의 四十年)> 392-393쪽(2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완담향사 : →완담사
완담향사 사적(浣潭鄕社事蹟) [冊] : 지보면 마산리 완담(浣潭)에 있는 향사(鄕社)의 사적을 기록한 책으로, 1700년 대에 편집되었으나, 향사 훼철(1868) 후 사라졌다가, 1994년 후손 정화영(鄭華永)이 서울에서 발건하고, 정재기(鄭載基)가 복사하였다. 완담향사는 원래 임당 정유길(林塘鄭惟吉)이 경상도관찰사재임 중에 고향의 옛 집터인 풍양면 청곡리 별실 삼수정(三樹亭) 곁에 삼수리사(三樹里社)를 세우고, 정구령(鄭龜齡), 정옹(鄭雍), 정사(鄭賜) 3부자를 모시었다. 이 삼수리사(三樹里社)가 임진왜란(1592) 때 불타자, 자리를 현 위치로 옮기면서 완담향사라 이름하고, 동래 정씨 7현을 모셨다. 1868년 국령으로 훼철되었다.
완담향사 사적 해제(浣潭鄕社 事蹟 解題) [記事] : 지보면 도장리 익장(益庄) 출신인 정양수(鄭亮秀, 1932- , 大昌中高 校長)의 지보면 마산리 완담 소재 완담향사에 대한 기사로, 정양수선생재직기념회에서 1998년에 발행한 <송대의 40년(松臺의 四十年)> 404-405쪽(2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완담향사 사적 해제(浣潭鄕社 事蹟 解題) [記事] : 지보면 도장리 출신인 정양수(鄭亮秀, 1932- , 大昌高 校監)가 지보면 마산리 완담에 자리한 완담향사에 소장된 그 사적과 해제를 수록한 기사로, 예천문화원에서 1994년에 발행한 <예천문화(醴泉文化)> 7호 305-335쪽(31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완담 향현사 : →완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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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마산리 용포리사(龍浦里祠) [祠宇] : 지보면 마산리 용포(龍浦)에 있는 사우로, 1896년에 장신립(張信立), 장원립(張元立)을 위해 창건되었다. 1965년에 남오정(南塢亭) 곁으로 이건하여 현존한다.
용포리사(龍浦里社) [祠堂] : 지보면 마산리 용포에 있는 안동 장씨 문중의 사당으로, 1896년에 세웠다. 1965년 현 위치인 남오정(南塢亭) 곁으로 옮겼고, 남오 장신립(張信立)과 그 종씨(從氏)인 원립(元立)을 배향하며, 이준구(李濬九)의 별묘기(別廟記) 등 4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홀기(笏記)가 <용궁향교지>(2005) 상권 931-932쪽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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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만화리 대동향사(大洞鄕祠) [터] : 지보면 만화리 사당골(祠堂谷)에 있던 사우(祠宇)로, 1545년에 이말손(李末孫), 이의(李誼)를 위해 세웠으나 훼철되었다.
대동향사(大洞鄕祠) [터] : 지보면 만화리 사당골에 있던 사당으로, 1545년에 공주 이씨들이 세워서 방산재(方山齋) 이말손(李末孫)과 만강(晩岡) 이의(李誼) 양대의 조두지소(俎豆之所)였으나 훼철되었다.(龍宮鄕校誌 上卷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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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무이리 무이사(武夷祠) [祠堂] : 용궁면 무이리 서당마에 있는 무이서당의 별묘로, 1690년(숙종 16)에 세웠고, 여주이씨 입향조인 창암 이윤수 내외분을 모신다. 이 사당의 홀기가 <용궁향교지> 상권 918-1923쪽에 국역되어 있다.
무이사 : →예천무이리 사지, →무이사우
무이사우(武夷祠宇), 무이사(武夷祠, 武夷社) [祠堂] : 용궁면 무이리 내무(內武)에 있는 사당으로, 이윤수(李潤壽)를 위해 1656년(효종 7)에 창건되었고, 5세손 장령 이유(掌令李유)와 11세손 준구(濬九)의 기(記)가 있다. 정면 3칸, 측면1.5칸 맞배지붕이다.(朝鮮 輿勝覽 1929, 竺山勝覽 1934, 嶠南誌 1937, 醴泉郡誌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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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미호리 광호사(光湖社, 光湖祠) [祠宇] : 보문면 미호리(眉湖里) 미울 서쪽마에 있는 사우(祠宇)로, 김해인 미산 김이도(眉山金以道), 매죽헌 김영진(梅竹軒金英震)을 제향하기 위해 세웠다. 훼철되었다가 재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기와지붕이다.(醴泉郡邑誌 1895, 醴泉郡誌 1939, 嶠南誌 1937)
광호사(光湖社) [精舍] : 보문면 미호리 내성천 강안(江岸)에 있는 정사로, 김해인 미산(眉山) 김이도(金以道)와 그 아들 매죽헌(梅竹軒) 김영진(金英震)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유림에서 세웠다.(醴泉鄕校誌 2004)
광호사(光湖祠) [祠堂] : 보문면 미호1리 123-1번지 소재, 김해인 미산(眉山) 김이도(金以道)와 매죽헌(梅竹軒) 김영진(金英震)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사당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기와집인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개방된 툇간을 두고 내부는 통칸으로 처리하였다.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은 전면에만 원주를 사용하였다. 가구는 삼량가(三樑架)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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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미호리 표절사(表節祠) [祠宇] : 보문면 미호리 미울 서쪽마에 있는 사우(祠宇)로, 원래 미호리 보성초등학교(普城初等學校) 근처에 조선 중종 때 율은 김손(栗隱金遜), 계절당 김전(繼節堂金鈿), 퇴신재 김두(退愼齋金두)를 위해 조령(朝令)에 따라 세웠으나, 1864년에 소실되었다. 1993년에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朝鮮 輿勝覽 1929, 嶠南誌 1937, 醴泉郡誌 1939)
표절사(表節祀) [祠堂] : 보문면 미호리 후록에 있는 사당으로, 김해인 풍성군(豊城君) 김손(金遜), 아들 계절당(繼節堂) 전(鈿), 손자 퇴신재(退愼齋) 두(두) 3대의 충절을 제향키 위하여 1508년에 조명(朝命)으로 창건되었으나 1864년에 소실되고, 미호리 분동(芬洞)에 설단 수비(設壇竪碑)하여 향사를 지내오다가 후손들이 1993년에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 사당 6칸, 동재(東齋, 宣德齋) 6칸, 서재(西齋, 弘仁齋) 6칸, 내삼문(內三門, 忠義門) 3칸, 외삼문(外三門, 明道門) 3칸이고, 앞 광장 좌측에는 ''''''''''''''''風城君栗隱神道碑''''''''''''''''가 서 있다.(醴泉鄕校誌 2004)
표절사(表節祠) [祠堂] : 보문면 미호1리 31-1번지(田)에 있는 사당으로, 고려조의 충신인 율은(栗隱) 김손(金遜), 계절당(繼節堂) 김전(金鈿), 퇴신재(退愼齋) 김두(金두) 3대를 제사하기 위해 1508년에 조령(朝令)으로 건립한 사당이다. 1864년에 소실된 것을 1987년에 복원하기 시작하여 1993년에 중건하였다. 명도문(明道門)이라 편액한 산형(山形) 대문인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면 단(壇)을 달리하여 좌우에 홍인재(弘仁齋)와 선덕재(宣德齋)가 자리잡고 있다. 양재의 뒤에는 다시 단을 달리하여 충의문(忠義門)이라 편액한 내삼문(內三門)인 산형 대문을 세웠고, 대문의 안쪽 가장 깊은 곳에 사당인 표절사가 자리잡고 있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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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출신 김영학, 30일 지식경제부 제2차관에 내정...축하합니다.
김영학(知經部 2次官 김영학) [記事] :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1월 30일 지식경제부 제2차관에 김영학 지식경제부 산업경제실장을 내정했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오후 브리핑에서 "지경부 2차관에는 김영학 실장이 내정됐다"고 밝혔다.
김 내정자는 경북 예천 출신으로 대광고,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핀란드 헬싱키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행시 24시에 합격한 후 산업자원부 무역투자실 투자정책과장, 감사관, 에너지자원개발본부장, 기간제조산업본부장, 정책홍보관리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김성곤 記者 아시아經濟 2009-01-30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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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355
용궁향교(龍宮鄕校) [略史] : 1398년(태조 7)에 창건하였는데, 현 위치보다 약 150보(步) 동쪽에 세워졌다. 6개 문중에서 세웠다고 한다. 1400년에 소실되었는데, 즉시 재건하였다가 1512년(중종 7)에 4월에 현 위치인 용궁면 향석리 266번지(보호구역 894평)로 옮겼는데, 임진왜란(1592) 때에 불탔다. 1599년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이 47세 때 현감과 유림들과 의논하여 향교를 다시 짓자고 하였다. 1603년에 문묘(文廟)를 중건하여 향사(享祀)를 의식대로 치루었으니 대성전(大成殿)과 주소(廚所) 동서재(東西齋)만 세우고, 묘우(廟宇)의 남쪽과 동서재의 북쪽은 명륜당(明倫堂) 자리로 60년 동안을 비워두었다. 유풍(儒風)이 땅에 떨어지고 향할 곳이 없을까 걱정하여 정매오(鄭梅塢), 정석문(鄭石門), 이국창(李菊窓), 장월송(張月松), 정청풍(鄭淸風), 전운계(全雲溪) 등과 더불어 제생들을 모아 대학(大學), 소학(小學) 등을 강했고, 위패봉안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섬오랑캐가 독을 품어 나라가 유린 당하고 혁혁한 성묘(聖廟) 또한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7년 동안 난리가 이어져 엎어지고 자빠지는 화를 당했는데, 어느 겨를에 예의를 다스리겠습니까? 사당의 모습이 오래도록 갖추어지지 못했습니다. 비록 도적은 물러갔다고 하나 변방의 경비는 쉬지 않고 수자리를 풀지 않았으니 부역이 오히려 가시와 같아서 담장과 집을 수리하고 옛 제도를 회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신주와 위패를 고성(告成)하고 편히 모실 곳이 없어 고작 고을 학교를 수리하여 위패를 모시오니 사당이라고는 말할 수도 없으나 우선 예절이 급하오니 그 것이 옳은 일인데 어찌 누추하다 하리이까 길이 그르침이 없게 하리이다."(泰村集). 1660년에 현감 이형식(李馨植)이 도임하자 명륜당이 없는 것을 보고 개연히 여겨 헌성금(獻誠金)을 내고 교임(校任) 어주(漁洲) 전오륜(全五倫, 1631-1720) 등과 수의(酬議)하고 1662년에 명륜당 창건을 발의하여 유사(儒士) 안서징(安瑞徵)으로 하여금 이를 감동(監董)케 하여 수 개월만에 준공을 보았으나 물력소구(物力所拘)로 문루(門樓)는 짓지 못한 일이 1689년에 지은 전오륜의 ''''''''''''''''명륜당 기문''''''''''''''''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거기에 명륜당 창건 후 25년만인 1662년에 내가 교임일 적에 명륜당 설립을 발의하여 당은 세웠으나 문루를 세울 겨를이 없었음은 재력이 면박(綿薄)하여 일시 아울러 세우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많은 선비들이 차탄(嗟歎)한지 오래였더니 1686년에 향교에서 유회(儒會)를 열었는데 내가 우연히 참석하였다가 좌우를 돌아보고 말해 가로되 우리 용궁이 비록 작은 고울이지마는 실로 많은 선비가 사는 고장이다. 향사 때나 문회 날에는 매양 재실(齋室)이 비좁아서 병으로 여겨왔는데, 근년에는 잇달아 흉년이 들어 비록 가볍게 거창한 일을 거론하여서는 안되지만 적임자를 얻어서 맡기면 무난하게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제군(諸君)들은 그 것을 생각해 보라 하였더니 좌우(左右)가 모두 그렇게 여기고 이지흥(李之興)을 선택하여 먼저 경리를 맡기고 자금이 어느 정도 마련되었으므로 드디어 공사를 시작한 수 개월 만에 준공하였는데, 명륜당이나 문루나 전후 창안(創案)이 모두 나를 거쳤기 때문에 기문을 부탁함에 감히 문장이 졸열하다고 사양할 수 없었으며 문은 입덕문(入德門)이라 하였고, 누(樓)는 세심루(洗心樓)라 하였는데, 세심이라 함은 주역 계사(周易 繫辭)에서 감(敢)하였다."고 썼다.
이 기문은 1689년 10월 하순인 전오륜 59세 때의 글이다. 1860년에 현감 이교영(李喬榮)이 도임(到任)한 지 3일만에 대성전에 알묘(謁廟)를 하고 전사청(典祀廳)을 돌아보니 위로는 비바람이 새고 동서로는 퇴사(頹舍)하여 곧 엎어질 듯함을 보고 향중 제원(諸員)을 모아 수의하여 보았으나 감동(監董)할 사람을 구하자니 모두 말하기를 연전(年前)에 중수할 때는 정승락(鄭承洛)이 일을 잘 하였으나 다시 부를 수도 없고 자금 계책이 막연하다고 하더니 그 해 가을 향사를 치르고 나서 다시 상의하고 한산인 이연춘(李淵春)을 천거받아 정사문(鄭斯文) 못지 않게 정신(挺身) 담당하여 노고가 많았다는 사실이 현감 이교영(1860-1862) 기문에 보인다. 1858년 봄에 관민이 협모하여 대성전은 수리를 마쳤으나 명륜당은 재력이 미체(未逮)하여 걱정만 했다. 1863년 봄의 재회(齋會) 때에 수즙(修葺)하자는 발론은 있었으나 획책이 없더니 대죽(大竹)에 사는 김병규(金炳圭)의 아들이 향교 재석(齋席)을 맡은 바 있었는데, 자원하여 150민(緡)을 헌성(獻誠)하여 40여 일 동안 수리를 하여 급한 곳은 면하였는데, 완전치는 못하지만 김씨의 공이 컸으며 현감 신석유(申錫游, 1862-1865) 때에 장의(掌議)인 무이(武夷)의 이진구(李鎭九)와 장주병(張周炳)이 함께 일하였음이 장주병의 중수 사실에 기록되었음을 본다. 1871년에는 현감 유교목(柳敎睦)이 내임(來任)하여 성금 200민을 내놓으므로 동서재(東西齋)를 대폭 중수하였는데, 그 때 장의는 이동우(李東佑)였다. 1887년에 수소(需所)을 크게 중수하여 그 면모를 일신하였는데, 그 때 현감 김승규(金勝圭)과 도임한지 1년 후이고 관고(官庫)를 다 털어 천여 금(金)을 변주(辨晝)하였는데, 장의 장영주(張永柱)가 주선하고 도감(都監) 3원(員)을 정하니 정경락(鄭經洛) 윤하봉(尹夏鳳) 이동욱(李東旭)이요, 서역(書役)은 권증운(權曾雲)이 맡고, 호군(護軍) 최일옥(崔一玉)이 백 민(緡)을 헌성(獻誠)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준공을 한 뒤 크게 연석(宴席)을 벌리고 백일장을 보였다. 중수 기문은 이준구(李濬九) 장영주(張永柱)가 하였다. 용궁현 고을이 작은 데다가 교궁(校宮)은 오래되고 낡아서 현감이 갈릴 때마다 졸라서 수리는 계속하였지만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1893년에 현감 정인량(鄭寅亮)이 도임한 지 3일만에 알묘(謁廟)를 하고 돌아보니 하도 허술하여 이동욱(李東旭)으로 하여금 구재(鳩財) 감동(監董)을 맡게 하여 중수하였음이 전한영(全漢永)이 기문에 있다. 1897년에는 당시 현감 권병직(權秉稷)과 교장(校長) 장영주 등이 재임할 때이다. 군 서쪽 퇴동인(退洞人) 김구식(金龜植) 김현수(金顯洙) 김현호(金顯浩) 김현주(金顯周) 4인이 자진하여 200금(金)을 헌납하였는데, 이 때 현감 권공이 감사에게 고하고, 교임 장공으로 하여금 각 문중에 배정을 하려하니 각 문중이 감당할 수 없던 중이라 이 4인의 헌성이 더욱 돋보였다. 교장(只今의 典校) 장영주의 기문이 있다. 이로써 새는 곳은 도개(塗改)하고 퇴폐(頹廢)한 곳을 수복(修復)하엿으며 전복(顚覆)한 곳을 갈아세워서 개연(開然) 일신하였다.
1903년의 교궁중수기에는 존성 흥학(尊聖興學)을 국가의 대경(大經)으로 삼아서 향교는 백성을 교도하는데 도덕의 문이요 인의(仁義)의 방(方)으로 춘추 향사날을 성묘(聖廟)에 들어가는 이는 승강(陞降)하는 예모(禮貌)가 엄숙하고 동하(冬夏)로 강학(講學)할 때 명륜당에 오르면 진퇴(進退)하는 위의(威儀)가 엄중하여 화행속미(化行俗美)가 정주(程朱)의 고규(古規)에 못지 않아서 소화(小華)란 소리를 듣더니 만근(挽近)에 와서는 예전 행적의 강성함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 고을의 일은 더욱 안타까운 것이 막중한 위토(位土)를 앞서 권력있는 이가 슬적슬적 사사로이 팔아먹어서 향사(享祀)할 제물이 부족할 뿐 아니라 존성하는 예법과 강학하던 풍속이 원만(湲 )하여 기예(技藝)가 소지무여(掃地無餘)하며 하물며 교궁(校宮)의 각 무(무)가 안 새는 곳이 없으며 창벽(窓壁)이 퇴파(頹破)하고 계단이 무너져서 전복할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만정(滿庭)한 추초(秋草)가 적적함이 무인지경 같더니 다행하게도 현감 장용환(張龍煥, 1902-1906)이 도임한 지 3일에 알묘하고 이를 돌아보고 사정을 물어서 사매(私賣)한 토지를 조사하고 도조(賭租)를 공정하게 매기고 허비를 줄여서 절약하여 여유가 생기게 하니 그 때가 흉년이었으나 택일하여 대폭 수리할 일을 정하니 월여만에 준공을 하였다. 대성전, 명륜당, 문루, 동서재(東西齋), 주소(廚所) 등 거개를 개와(蓋瓦)하고 중선(重繕)하여 단청 분장하였는데 안재로(安在魯), 정인소(鄭寅昭)가 감역(監役)을 맡고 전동순(全銅淳)이 심부름을 잘 하였다 함이 안재로의 기문에 실렸다. 1914년에 합군(合郡)을 하므로 용궁현은 분산하여 향교는 폐새(廢塞)되었으니 위전(位田)은 신학교(新學校)로 들어가고 산림은 국유화하여 교임(校任)은 직원(直員)으로 개칭되었는데, 용궁향교는 직원을 둘 수 없었다. 용궁 사림에서 향회(鄕會)를 열어 유지할 것을 결의하고 각 문중에서 약간의 경비를 갹출하여 춘추 향례(春秋享禮)에 쓰기로 하였다. 용궁향교에서는 예전에 경로답(敬老畓) 9두락이 있었는데, 이 것마저 향교의 위답과 함께 학교로 혼입(混入)하였다. 이에 향토 정학모(鄭學模), 윤기동(尹基東), 현구상(玄龜祥), 이규홍(李圭洪), 전도현(全道鉉), 고영석(高永錫) 이윤구(李奫九), 안재복(安在復) 등이 이태용(李泰容)을 대표로 하여 여러 차례 당시 예천군수 이명원(李命源, 1911-1916)에게 청원하여 건물, 제기(祭器), 위패(位牌)는 승인을 받았으나 경로답과 교궁 산림은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군수가 갈려 이범익(李範益, 1916-1919)이 예천 군수로 취임하자 이태용이 교임을 맡고, 장의(掌議) 이수홍(李守弘)과 함께 공문과 면담으로 여러 차례 접촉한 나머지 경로답과 원림(園林)은 대부 형식으로 허락을 받아 교토(校土) 10여 두락을 마련하였는데, 고직(庫直)이 경작하던 전토를 타인들이 빼앗아 거의 위토서 쓸 수 없게 되었던 것을 군수의 힘으로 다시 찾게 되었다 함이 1917년에 이태용이 쓴 중설기(重設記)에 보인다. 겨우 용궁향교로서 승인은 받았으나 퇴폐한 곳을 수즙(修葺)할 길이 막연하여 1924년 봄에 김병태(金秉泰, 1921-1924) 군수 재임 때 직원 안재영(安在永)이 향원(鄕員)에게 물어 의연금 500원과 용궁향교 교전(校錢) 100여 원으로 중수할 일을 건의하였는데, 당시 이돈영(李敦英) 윤정희(尹政熙)가 간무(幹務)로 성책(成策)하여 정원조(鄭元朝) 이규헌(李圭憲) 고운해(高運海) 이수일(李守馹) 전병윤(全炳胤) 등으로 각기 유사(有司)를 정하여 수 개월만에 중수를 마쳤음이 이동석(李東錫)의 중수기문에 보인다. 1933년 10월에 소진하(蘇鎭夏) 군수 재임 때에 고영진(高永鎭) 직원, 권영수(權寧壽) 장의가 주선하여 대폭 수리하였는데, 고영진 직원의 중수기가 있다.
1938년에 이수일 직원이 향속(鄕俗)이 일추(日墜)하고 사습(士習)이 점강(漸降)하였을 뿐 아니라 군을 폐합하는 바람에 이에 따라 향교도 존폐의 기로에 섰던 관계로 퇴락하기만 한 향교를 돌아 볼 사이가 없었다고 하면서 박제륜(朴濟輪) 군수에게 졸라 장의 권영수 안재형(安在亨) 고봉림(高鳳林) 등과 함께 대성전을 중수하고 직원 이수일이 기문을 찬하였다. 1942년에는 세계제2차대전의 와중에 직원 권영수, 장의 이규상(李圭祥) 장성명(張性命) 현종화(玄鍾和) 등의 명륜당 수선은 그 공이 돋보일 뿐 아니라 제수(祭需)도 대폭 감품(減品)하였음이 전 직원 이수일의 기문에 보인다. 대개 해방을 전후하고 한국전쟁을 겪는 어려운 시기에도 년 1차례 씩이나마 향례를 치루었는데, 음력 8월 16일에 향사한 적이 일시나마 있었다. 해방 후로는 직원을 전교(典校)라 하였는데, 1962년 3월에 전교 이만성(李萬成)이 찬한 중수기에는 전년에 어려운 가운데에도 불구하고 전상갑(全相甲) 정창수(鄭昌壽) 이진형(李璡衡) 현석기(玄奭基) 안재식(安在軾) 정우진(丁佑鎭) 고덕환(高德煥) 이수찬(李壽贊) 한욱교(韓郁敎) 등이 합모하여 중수하였다. 1967년 8월에 고영익(高永翼)이 찬한 기문에는 한국전쟁을 겪은 뒤에 각 군마다 향교가 황폐하였지마는 용궁향교는 더욱 심하여 향안(鄕案)과 청금록(靑衿錄)은 유실되었고, 교중(校中) 구채(舊債)를 갚지 못한 체 내려왔는데 그 때 향론(鄕論)이 고부림(高富林)을 전교로 추천하였더니 여러 차례 사양하다가 이에 제안하기를 창호(窓戶)의 파손, 단벽(丹碧)의 매암(昧暗)은 모두 전재(錢財)가 있은 뒤라야 수리를 하겠는데, 전향(全鄕)이 각 문중에서 부담하겠느냐 하거늘 전향이 회의를 열고 자금을 비축하여 성묘(聖廟)를 수선하고 구채를 상환하고 청금록을 경정하고 향안을 마련하여 면모를 일신하였는데, 1963년에 경상북도 향교재단 이사회에서 전란 후 유공한 전교를 포상한다 하므로 용궁향교에서는 고부림을 보고하였더니 본인을 모일(某日)까지 예천군청으로 필히 출석하여 달라는 기별을 받고 수상한 물품 중에 작은 것 몇 가지만 취하고 관복 일습(一襲)을 향교로 증정하여 후임이 사용토록 하였다. 당시이 교임(校任)은 다음과 같다. 전교 고부림, 장의 정용섭(鄭龍燮) 김영희(金榮禧) 이세환(李世煥) 도준희(都俊熙) 이항성(李恒成) 이병인(李柄寅)이다. 1967년 6월에 국비 485,000원으로 보수하였는데 어느 정도는 면모를 일신하였지만 단청(丹靑)은 못했다. 1975년 2월 5일자로 지정 외 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되었다. 이어서 1985년 10월 25일에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제210호가 된다. 1978년 8월에 국비 500만 원, 지방비 500만 원, 합계 1,000만 원으로 대성전과 명륜당 등 건물을 삼성건축이 설계하고 서한건설이 시공을 완료하였다. 용궁향교의 담당 구역은 용궁면, 풍양면, 지보면, 개포면 일부(立岩, 佳五, 新陰, 蠅洞), 문경시 영순면 일부(旺泰, 錦林, 五龍, 三仁, 末應, 遠枝)이다. 옛날에는 24문중이었는데, 지금은 70여 문중으로 늘어났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 6동(건평 221평)이다. 세심루(洗心樓)는 맞배지붕, 정면 17.5m(7間), 측면 4.1m(2間)로 세워져 있고, 동재(東齋, 건평 12평)는 맞배지붕, 정면 11.7m(5間), 측면 3.35m(1간)의 규모로 남아있고, 서재(西齋)는 2004년 다시 지었다. 명륜당(明倫堂, 건평 19평)은 팔작지붕으로, 정면 12.15m(5間), 측면 5m(2칸)이다. 대성전(大成殿, 건평 20평)은 맞배지붕으로, 정면 10m(4間), 측면 6.15m(3間)인데, 주춧돌은 윗면에 지름 0.45m 내외의 원좌(圓座)가 세겨 나왔다. 신도문(神道門, 건평 0.5평)은 맞배지붕으로, 정면 1.4m, 측면 1.4m이며, 주소(廚所, 건평 34평)는 맞배지붕으로, 정면 12m, 측면 9.25m이다. 향교 앞 도로변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위판(位版)은 공문오성위(孔門五聖位) 즉 중앙 정면에 대성지성문선왕(大聖至聖文宣王), 중앙 동편에 서향으로 안자(?國復成公顔子), 자사(?國述成公子思)가 있고, 서편에 동향으로 증자( 國宗聖公曾子), 맹자(鄒國亞聖公孟子)가 있고, 그 뒤로 동편 서향으로 공문십철(孔門十哲)과 송 나라 사현(四賢) 중에 민연(費公閔捐), ?옹(薛公?雍), 단목사(黎公端木賜), 중유(衛公仲由), 복상(魏公卜商), 주돈이(道國公周惇 ), 정이(洛國公程 )가 있고, 증자와 맹자의 뒤편 즉 서편에 동향으로 북쪽부터 ?경(?公?耕), 재자(齊公宰子), ?구(徐公?求), 언언(吳公言偃), 정호(豫國公程顥), 주희(徽國公朱熹) 이렇게 자리하고, 뒤편 즉 동편 서향ㆍ북쪽부터 우리 나라 18현 중에 설총(弘儒侯薛聰), 안유(文成公安裕), 김굉필(文敬公金宏弼), 조광조(文正公趙光祖), 이황(文純公李滉), 이이(文成公李珥), 김장생(文元公金長生), 김집(文敬公金集), 송준길(文正公宋浚吉)이 있고, 서편 동향으로 북쪽부터 최치원(文昌侯崔致遠), 정몽주(文忠公鄭夢周), 정여창(文獻公鄭汝昌), 이언적(文元公李彦迪), 김인후(文正公金麟厚), 성혼(文簡公成渾), 조헌(文烈公趙憲), 송시열(文正公宋時烈), 박세채(文純公朴世采) 이렇게 봉안되어 있다. 상기한 이외에도 현감 송계수(宋啓洙, 1812-1817)의 공적을 기린 송후수보학전기(宋侯修補學田記)가 있고, 1879년 11월에 장주병(張周炳)의 향교전토사정기(鄕校田土査正記)가 있는데, 내용에는 현감 이경로(李敬老, 1865-1868)와 교임(校任) 정창한(鄭昌翰) 안재성(安在成)과 별임(別任)으로 신면혁(申冕赫), 이원섭(李元燮), 장광규(張光奎)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1873년 10월에는 향교절목(鄕校節目)을 판각(板刻)하였고, 1884년 7월에 고언수(高彦洙)의 상사양토기(庠舍養土記)에는 현감 한진규(韓鎭奎, 1883-1884)의 공을 기록한 것이고, 1982년에 고언형(高彦亨)의 기문이 있는데, 현감 이만윤(李晩胤, 1891-1892)의 공을 기린 글이다. 1893년에 이준구(李濬九)의 기문은 현감 정인량(鄭寅亮, 1893-1894)의 공을 기록한 것이다. 1898년에 안기경(安祺慶)이찬한 강학서(講學序)는 현감 권병직(權秉稷, 1896-1899) 때에 쓴 것이다. 그 이듬해인 1899년에는 장영주(張永柱)의 강학서문(講學序文)이 있다. 1903년에 고언형이 찬한 것은 현감 장용환(張龍煥) 때의 글이다. 명륜당에는 상기(上記)한 것을 합하여 현판 28개가 걸려있다. 이 밖에 태조에서 효종 때까지의 국기일(國忌日)을 판각(板刻)하여 명륜당에 걸어 놓았다.
광복 후의 보수 내역은 1985년 경북도지정문화재 제210호가 되었고, 1986년 명륜당 번와와 고색가칠, 연목 교체에 총 공사비 1,500만 원(국비 750만 원, 도비 375만 원, 군비 375만 원)이 소용되었고, 1989년 외삼문, 담장 보수에 총 공사비 5,500만 원(도비 3,000만 원, 군비 2,500만 원)이 소용되었고, 1990년 대성전 보수에 총공사비 2,500만 원(국비 1,260만 원, 도비 650만 원, 군비 650만 원)이 소요되었고, 1991년 담장, 축대, 기단 보수에 총 공사비 5,410만 원(국비 2,660만 원, 도비 1,375만 원, 군비 1,375만 원)이 소요되었다. 1992년 방연방충제 도포에 총 공사비 1,500만 원(도비 1,000만 원, 군비 500만 원)이 소요되었고, 1998년 세심루 보수에 총공사비 9,360만 원(국비 4,680만 원, 도비 2,340만 원, 군비 2,340만 원)이 소용되었고, 2001년에 동재 보수에 총공사비 5,600만 원(국비 2,800만 원, 도비 840만 원, 군비 1,960만 원)이 소용되었고, 2004년에 서재가 재건되었다.(龍宮鄕校誌 上卷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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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