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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 1830:예천충효29(附 예천방문 356)
작성자장병창 @ 2009.02.02 06:51:18

  예천의 자랑(1830) : 예천 충효 29(附 예천방문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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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상금곡리 회산사(晦山社), 회산서원(晦山書院) [터] : 용문면 상금곡리(上金谷里) 금당실에 있는 사당으로, 함양인 남야 박손경(南野朴孫慶, 敎官)을 모셨으나,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醴泉郡邑誌 1841 1895, 醴泉郡誌 1939, 嶠南誌 1937, 朝鮮 輿勝覽 1929)


  회산사(晦山社) [터] : 용문면 상금곡리에 있던 사당으로, 함양인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사림들이 세우고 제향해오다가 훼철되었는데, 1984년 4월 13일 금곡서원(金谷書院)을 세울 때 숭덕사(崇德祀)에 종배(從配)하였다.(醴泉鄕校誌 2004) 


 회산서원 : →회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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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서본리 향사당(鄕射堂), 향사우(鄕祠宇), 항현사(鄕賢祠), 향현사 강당(鄕賢祠講堂), 향청(鄕廳), 유향소(留鄕所), 사당(祠堂) [터] : 1) 예천읍 서본2리 향사당골에 있던 사우로, 상시당 공동샘 서쪽에 있었다. 처음에는 향사당이라고 하다가 향현사 강당으로 고쳤으나, 없어졌다. 원래 고려 때 수령(守令)을 자문하던 유향소(留鄕所)의 후신이다. 유향소는 성리학적 향촌(鄕村) 교화의 한 방편인 <소학(小學)> 교육 장려와 향사(鄕射), 향음례(鄕飮禮)의 실행을 통해 재지 사족(在地士族) 중심의 향촌자치체제 확립을 목표로 하였다. 고려의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가 조선 초에 유향소와 경재소(京在所)로 분화 발전하였다. 고을 풍속을 규찰하고 백성을 예절과 풍속으로 인도하며, 술을 마시고 활을 쏘며 무예를 익히는 관아(官衙)였다. 그러나 1467년(세조 13)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함경도내 각 읍 유향소 품관(品官)들이 조직적으로 가담한 데 대한 응징으로서 세조가 전국의 유향소를 혁파해 버렸던 것이다. 그 후 성종 때 사림파(士林派)의 중앙 진출이 활발하여 그들의 위치가 어느 정도 확립되던 성종 중기에 유향소의 복립 운동이 벌어져 전국적으로 실시될 때 예천군에서도 1488년(성종 19)부터 복립(復立)을 준비하여, 1492년(성종 23)에 착공하여 이듬해(1493) 준공되었고, 좌ㆍ우동(左右棟)과 주소(廚所) 등 20칸의 건물이 있었고, 임원은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을 두었다. 그리고 송정 조용(松亭趙庸, ?-1424), 별동 윤상(別洞尹祥, 1373-1455), 수헌 권오복(睡軒權五福, 1467-1498), 약포 정탁(藥圃鄭琢, 1526-1605)의 위패를 모셨다. 그 후 감역 권문계(監役權文啓), 군수 홍사고(郡守洪思古), 판교 정언굉(判校 鄭彦宏), 현감 박수의(縣監朴守誼), 생원 권연(生員權연), 유학 박수약(幼學朴守約), 박수검(朴守儉), 생원 이홍경(生員李弘經), 유학 박정시(幼學朴廷蓍), 권선(權銑) 등 예천 사림이 향현사(鄕賢祠)를 세우자고 1633년(인조 11) 5월에 발의하였으나 병자호란(1636)을 거쳐 1640년(인조 18) 9월 29일에 그 유지(遺址)에 향현사로 재건하여 위의 4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봉안할 때 통문(通文)을 함께 낸 사람은 현감 김영(縣監金영), 참봉 김호(參奉金頀), 직강 김업(直講金업), 유학 권상건(幼學權尙健) 권진영(權震英) 박섭(朴燮) 송천기(宋天機) 반진해(潘振海) 권선(權銑) 김만구(金萬具) 이장영(李張英)이다. 봉안문(奉安文)과 상향축문(常享祝文)은 불구당 김주(不求堂金주)와 통례 김업(通禮金업)이 지었다. 그러나 이도 대원군 때(1868) 훼철되었다.


  [退溪 李滉의 詩] : 性理淵源未易明/ 襄陽稱道二公名/ 如何製述無傳後/ 景仰高山獨感情/ [睡軒 權五福의 記] : 영(嶺)의 남쪽 60여 주(州)는 고려가 삼국을 통일한 때로부터는 합하여 한 도(道)를 두었으므로 조선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크게 인재와 물산의 부고(府庫)가 되었으니, 우리 예천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에천은 본래 신라의 수주현(水酒縣)이다. 신라 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후 수 천 년 동안에 고을의 수령(守令)은 몇 사람이었고, 공경대부(公卿大夫)는 몇 사람이었던가. 그 중에서 옛 도(道)에 뜻을 두고, 옛 예(禮)를 회복하여 능히 백성을 예속(禮俗)으로 인도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고을의 수령(守令)은 장부의 처리와 받아들이는 일에 바빠서, 시설하는 데에는 겨를이 없었고,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은 비록 세속을 교화시킬 방법이 있었으나, 한 고을에서는 관리하는 바가 없었다. 소위 지위가 높지 않은 자는 비록 착하더라도, 지위가 높지 않으면 사람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식자(識者)들은 이 일을 병되게 여기었다. 우리 전하(殿下)가 즉위하신 무신년(戊申年)에, 옛날에 있었던 곳에 다시 유향소(留鄕所)를 두게 하였으니, 좌수(座首)가 있고 별감(別監)이 있다. 나이와 덕망이 높은 자를 추대하여 좌수라고 일컫고, 그 다음을 별감이라고 일컬었다. 그들이 한 고을의 풍속을 규찰하고 관리하였다.


  유향소의 임원은 부(府)는 4명, 군(郡)은 3명, 현(縣)은 2명이었다. 우리 고을은 군(郡)이다. 윤후 계은(尹侯季殷)과 권후 추(權侯推)가 별감이 되고 나의 아버지가 좌수(座首)가 되었다. 계은(季殷) 씨는 바로 제학 윤상(提學尹祥)의 아들이다. 집안의 대대가 문헌(文獻)이므로 백성을 예속에 인도할 것을 생각하였다. 이것이 향사당(鄕射堂)을 짓게 한 유래이다. 향사당은 좌우 채와 주방(廚房) 등 모두 20칸이다. 향부로(鄕父老)들이 함께 돈을 내어서 기와를 굽고 재목을 모았고, 군수 이잠(李箴) 공도 또한 재목을 도와 주었다. 임자년(壬子年, 1492년, 성종 23)에 마치었다. 그 공사를 감독한 자는 고을 사람 누구누구이고, 그 공사를 집행한 자는 고을의 아전(衙前) 누구누구이다. 지난 해 가을에 오복(五福)이 휴가를 얻어 금당곡(金堂谷)에 귀성(歸省)하였더니,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나를 향사당으로 납치하였다가, 술이 반쯤 취했을 때에 윤후(尹侯)가 잔을 잡고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서 이 향사당을 열려고 한 것이 오래 되었으나, 그 적당한 터를 잡지 못하여 어떤 이는 북정(北亭)을 훼손하고, 그 자리에 향사당(鄕射堂)을 세우자고 하는 이도 있었다. 끝없는 여러 사람의 논의가 대개 또한 몇 해를 끌었다. 하루는 군(郡)의 치소(治所) 서쪽 2리 남짓한 곳에 가보게 되었다. 거친 언덕 개암나무, 망초대 우거진 사이로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다가, 기이한 곳을 발견하였다. 모든 그 눈에 보이는 것, 마음에 꾀하는 것이 뛰어난 경지 아닌 것이 없었다. 여러 산은 푸른 것으로 둘러싸고, 한천(漢川)은 옥(玉) 같은 물결을 쏟고 있는데, 수풀은 무성하고 대나무들은 길며, 집은 그윽하고 지세는 막히어서 마치 하늘아버지와 땅어머니가 감춰두고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여기에 당을 짓기로 결의하여서 향사당이 이미 이루어지자, 그대가 마침 왔으니 한 말씀 기(記)가 없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무릇 제사(題詞)나 기(記)를 짓는 것은, 반드시 대가(大家)의 손에 얻어야 하는 것인데, 지금 문장(文章)에 이름 높은 대가들이 우뚝우뚝하여 서로 바라다 볼 만큼 많으니, 요구하여 좋지 않을 이가 없을 것인데, 버선의 실같은 보잘 것 없는 내가 도리어 어찌 능히 할 수 있겠습니까?"하였으나, 후(侯)가 굳이 명령하므로 나는 사양하다가 할 수 없게 되었다. 곧 말하기를, "당(堂)을 개설(開設)하는 것이 어찌 한갓 당(堂)을 세우는 일에 허튼 일이겠는가. 고대(古代)의 성스러운 황제와 밝은 임금은 몸소 인(仁)과 의(義)를 실행하여 써 백성을 인도함이 두터웠으나, 그것만으로는 오히려 부족하다고 하여 또 향관(鄕官)을 설치하여 가르쳤으니, 여서(閭胥)니, 족사(族師)니, 비장(比長)이니, 당정(黨正)이니 하는 등속(等屬)과 같은 것이 있어서, 각기 계령(戒令), 정사(政事), 백성 모으는 일, 법령(法令)을 읽어 듣기는 일 등을 맡았으며 봄, 가을에는 예(禮)로써 모여서 고을의 학교에서 술마시고 쏘게 하고, 그들의 덕(德)과 행(行)과 도(道)와 예(藝)를 기록하고, 그들의 과오를 규찰하여 권장하고 징계하였다. 풍속이 순후하고 아름다워져서 한 세상을 인(仁). 의(義) 경역(境域)에 올려놓았었다. 지금의 유향소(留鄕所)라는 것은 즉 옛날 당정(黨正)의 남긴 뜻이다. 고을에 완악(頑惡)하고 간특하여 제 멋대로 방자하는 자, 효도하고 우애하지 아니하는 자, 친족간에 화목하지 아니한 자, 인척간에 친애하지 아니한 자, 친신(親信)하지 아니하며 진휼(賑恤)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이 당(堂)에서 그에 대한 징계를 의논할 수 있고, 아전(衙前)으로서 간특한 마음을 남몰래 품고 있어서, 성(城)과 사(社)를 의지하고 백성의 재물을 침탈(侵奪)하는 자가 있으면 이 당에서 징계를 의론할 수 있는 것이다.


  주관향삼물(周官鄕三物)의 가르침을 미루어 행(行)하고 여남(汝南)의 월단평(月旦評)을 실시하여 한 고을의 풍속을 격려하는 것도, 또한 이 당에서 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이 당의 임무에 포함된 사항은 광범위하다. 그런데 홀로 사(射)로써 편액(扁額)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말하기를 향사(鄕祠)의 예(禮)는 오래된 옛 풍속이다. 공자가 확상(攫相)의 포전(圃田)에서 활을 쏘니 구경하는 자가 담처럼 둘러섰었다. 술잔을 들게 하고 말하기를, "어릴 때와 장년기에는 효제(孝悌)하고, 늙어서는 예(禮)를 좋아하여 유행하는 풍속에 좇지 아니하며, 몸을 닦으면서 죽기를 기다리는 자가 이 자리에 없습니까" 하니, 대체로 가는 자가 반(半)이나 되고 있는 자가 반이나 되었다. 또 술잔을 들고 말하기를,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고 예(禮)를 좋아하여 어지럽지 않으며, 노년이 되어서는 도(道)에 알맞게 하여, 변하지 아니하는 자는 이 자리에 없습니까." 하니, 겨우 남아 있는 자가 한 사람이었다. 술잔을 드는 사이에 그 착한 자를 골라서 머무르게 하면, 그에 해당하지 아니한 사람은 스스로 물러가는 것이다. 이것은 시경(詩經)에서 말하는 바 손님의 차례를 현명함의 정도로써 한다는 것으로서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바, "고을에 가보아서 왕도(王道)의 쉽게 실행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국가가 옛법을 좇아서 예교(禮敎)를 숭상하여 향사(鄕祠)의 예의를 마련하였다. 무릇 활 쏜다는 것은 한 무예(武藝)이지만, 손님을 차례있게 하고 벌배(罰杯)를 드는 예가 이 의식에서 거행된다. 그리하여 한 고을의 숙덕(淑德)함과 사특함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향부로(鄕父老)들이 오직 향사당(鄕射堂)이라고 현판을 걸었으나, 권장하고 징계하는 모든 뜻이 실로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활 쏘는 것은 마땅히 단(壇)에서 해야 하는 것인데, 이제 당(堂)이라 함은 무엇인가? 말하기를, 활쏘는 것은 단(壇)에서 하고, 향빈(鄕賓)의 숙계(宿戒)는 당(堂)에서 한다. 옛날의 향당(鄕堂)의 선생들은 살아서는 당(堂)에 모이고, 죽어서는 사(社)에 제사되는 것이었다. 아, 이 당(堂)은 그 사(社)와 같은 것이다. 오복(五福)이 다른 날, 벼슬에서 물러나와 이 당(堂)에 결사(結社)하여, 봄가을의 좋은 말에 닭, 돼지의 안주로 한가하게 부로(父老)들을 따라 다니게 하면, 그 때에 다시 술마시고 활쏘고 하는 예절을 강론하리라."하였다.


  [奉安文] : 땅은 영혼을 밝히고 하늘은 모든 명예를 드러낸다. 문정 조 선생(文貞趙先生)이 먼저 창도하시고, 별동(別洞) 선생이 후세를 울렸도다, 박문약례(博文約禮)의 공(功)이 가세(加勢)하여 고명(高名)한 학풍(學風)이 조성되어 진실로 군자(君子)로구나. 참으로 대성(大成)하여 제자를 가르친 스승으로 한 시대를 빛냈으나 그 빛이 드러나지 아니하셨도다. 나라 위한 움직임에 태산처럼 숭배하고 많은 선비 의지하니 선비의 길 잃지 않으셨네. 수헌(睡軒) 선생 계승으로 문장이 세상을 상서롭게 하고 하늘에서 충효내어 경연(經筵)에서 임금 앞에 경서(經書)를 강론하며 충성된 마음으로 임금님께 사뢰면서 정성과 고요 속에 과실을 바로 잡으셨네. 소문을 들으면 감동하여 분발(奮發)하고 이욕(利慾)을 탐하는 자도 청렴하게 되며 나약한 자도 분기(奮起)하니 유교에 충실한 순수한 학자로 대신 태어나도다. 약포(藥圃) 선생이 유적을 이어 말씀 듣던 옛 스승의 진실을 실천하였고, 두 임금께 진심 다해 한 마음으로 순국하여 사직(社稷)에 공을 남겼고, 기둥 같은 인물에다 주초(柱礎) 같은 인물인데, 고향에서 늙으시며 시종이 좋았구나. 평생토록 벼슬하다 물러났지만 하늘을 우러러보나 세상을 굽어보나 양심에 부끄러움 없으니 이리하여 풍성함과 흥성함을 겸하셨구나. 향기 이은 전후로 우리들을 이끄시고 불변하는 하나의 법도가 있는 듯 난초 향기 사라지지 않으리. 저승길 따르기 어려워서 스승 따라 감화 받을 인연이 없구나. 사모와 그리움이 갈수록 새로우니 사당이 없다한들 정성이 없을소냐. 수백 년 지난 후에 극진한 예절의 때 있으면 삼가 공경하며 제사를 받드오리. 조심스런 거동으로 유림의 경사되어 한 나라의 빛이 되면 신께서는 그 격식을 생각하사 이 마음의 향기를 흠향(欽香)할진저. 정랑 문소 김주(正郞聞韶金주) 지음.(新增東國輿地勝覽 24卷 1530, 襄陽耆舊錄 1792, 別洞先生文集, 醴泉郡邑誌 1780 1786 1841 1895, 醴泉郡誌 1939, 朝鮮 輿勝覽 1929, 嶠南誌 1937, 慶尙道 醴泉郡 樓亭鄕射堂條, 別洞集). →상시당. 2) 龍宮縣에 있던 建物이다.(龍宮縣邑誌 1780, 嶠南誌 1937)


  향사당(鄕射堂) [터] : 예천읍 서본2리 향사당골에 있던 사당으로, 1492년(성종 23)에 착공하여 이듬해 준공되었고, 좌우 동(棟)과 주소(廚所) 등 20칸의 건물이 있었고, 임원은 좌수(座首) 1인, 별감(別監) 2인을 두었다. 뒷날 그 자리에 향현사(鄕賢祀)를 세웠다가 없어졌다.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의 기문이 <동문선(東文選)>에 남아있다.(醴泉鄕校誌 2004)


 향사당골 : →산수당


  향현사(鄕賢祠) [터] : 예천읍 서본2리 향사당 자리에 있던 사당으로, 1650년에 세웠졌고, 송정(松亭) 조용(趙庸), 별동(別洞) 윤상(尹祥),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 약포(藥圃) 정탁(鄭琢) 등 4위를 봉안해 오다가 1868년에 훼철되었다.(醴泉鄕校誌 2004)


 향현사 : →사당, →향사당
 향현사 강당 : →향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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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신풍리 죽고서당(竹皐書堂), 죽고사(竹皐社), 죽고향사(竹皐鄕社), 죽고각(竹皐閣) [터] : 지보면 신풍리 272번지에 있는 서당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누각식 목조 팔작지붕이다. 원래 1771년(영조 47)에 신풍리 132번지에 파평인 만둔암 윤사석(晩遯菴尹師晳, 1417-?)과 죽호 윤섭(竹湖尹涉, 1550-1624)을 봉향(奉享)하고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하여 반몽와 윤비(伴蒙窩尹備, 1723-1806)가 도내 유림(儒林)과 상의하여 죽고사(竹皐社, 竹皐鄕社)로 창건하였으나 칙명으로 훼철(毁撤, 1868)되고, 1902년(광무 6)에 후손들이 위패를 매장하고 분봉(分封)하고, 그 옆에 "죽고향사 유허비(竹皐鄕社遺墟碑)"를 세웠다. 이 비를 동리 사람들은, "어사터 비"라고도 한다. 현 건물은 1920년에 현 위치로 그 동재(東齋)를 옮겨지어 죽고서당(竹皐書堂)으로 개칭하였고, 전기(前記) 2명의 위패(位牌)를 봉안하였는데, 윤사석(尹師晳), 윤섭(尹涉)의 남긴 뜻을 추모하고 경서(經書)를 가르치는 곳으로 삼았다. 1971년에 유태혁(尹泰赫)이 중수하여 경로당(敬老堂)으로 쓰고 있다. 1977년 5월에 신풍리 132번지 유허비(遺虛碑)의 바로 앞에 새로운 비(碑銘은 同一)를 다시 세우고, 죽고각(竹皐閣)도 재건하였다.(朝鮮환輿勝覽 1929, 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1939)


  죽고서당(竹皐書堂) [書堂] : 지보면 신풍리 133번지에 있는 파평윤씨 신풍문중의 서당으로, 죽고향사(竹皐鄕祠, 竹皐書院)가 무진년 방금(邦禁)에 의하여 훼철되자 만둔암(晩遯庵) 윤사석(尹師晳)과 죽호(竹湖) 윤섭(尹涉)의 유덕을 기리고 자손들의 학궁(學宮)으로 죽고향사 재목의 일부를 이용하여 건립하였고, 퇴락함에 15세손 경상북도 도의회의원 태혁(泰赫)의 연출(捐出)로 중수하여 현존하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목조와가 누대형(樓臺形) 집이다. ''''죽고서당 중수기''''는 후손 한오(漢五)가 썼는데, <용궁향교지> 상권 1025쪽에 수록되어 있다.


  죽고서당(竹皐書堂) [書堂] : 지보면 신풍리 272-8번지 소재, 파평인 만둔암(晩遯菴)의 강학지소로, 1771년(영조 47)에 건립하여 근년에 중건하였다. 서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주위에는 철조망을 둘러 담장으로 삼았으며, 정면에는 철대문을 설치하였다. 기둥은 전면에만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전면 기둥의 하부에는 하층주를 세워 전면의 툇간은 누마루를 이루게 하였고, 툇간의 주위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다. 좌측 2칸을 마루방으로 꾸민 후 우측 칸에는 온돌방을 둔 편방식(偏房式)의 평면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가구는 오량가(五樑架)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醴泉郡誌 2005)


  죽고서원(竹皐書院, 竹皐鄕社) [터] 지보면 신풍리에 있던 서원으로, 1771년(영조 47)에 창립하여 만둔암(晩遯庵) 윤사석(尹師晳, 司憲府執義)과 죽호(竹湖) 윤섭(尹涉, 掌隷院司評)을 추모 제향하기 위해 반몽와(伴蒙窩) 윤비(尹備)가 사림과 상의하여 도유림(道儒林)의 발의로 건립하였다가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봉안문은 풍산 유규(柳규)가 지었다. 죽고비(竹皐碑)는 그 유허지인 지보면 신풍리 133번지에 1902년(광무 6)에 건립하여 포산(苞山) 곽종석(郭鍾錫)이 지은 기문이 있고, 1975년에 후손들이 바각을 세워 죽고각(竹皐閣)이라 하였다. 파평윤씨 문중 소유이다. 서원은 2001년 복설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복원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龍宮鄕校誌 上卷 2005)


  죽고서원 유허비(竹皐書院遺墟碑) [碑] : 지보면 신풍리 낙동강 가에 있는 죽고서원의 터에 있는 비로, 이 서원에는 만둔암(晩遯庵) 윤사석(尹師晳)을 주향(主享), 죽호(竹湖) 윤섭(尹涉)을 종향(從享)하였다. 비명은 포산(苞山) 곽종석(郭鍾錫)이 지었다.(醴泉의 金石文 2003) 


  죽고향사 : →죽고서당


  죽고향사 유허비각(竹皐鄕社遺墟碑閣) [碑閣] : 이는 지보면 신풍리 132번지에 있는 비각으로, 사헌부 집의 윤사석(尹師晳), 장례원 사평 윤섭(尹涉)을 배향(配享)하기 위하여 후손과 용궁 사림(龍宮士林)의 주선으로 도 유림(道 儒林)이 발의(發議)하여 1771년(영조 47)에 건립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나삼령(那森令)에 의거 훼철되었다. 그 후 1902년에 후손이 그 터에 유허비와 비각을 세워 현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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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우곡리 우곡서원(愚谷書院), 우곡사(愚谷祠, 愚谷社), 세덕사(世德祠), 우곡서당(愚谷書堂) [터] : 하리면 우곡리 430번지 안마(內洞)에 있던 서원으로, 1708년(숙종 34)에 창건하여 겸암 유운룡(謙庵柳雲龍), 식암 황섬(息庵黃暹), 창석 이준(蒼石李埈), 죽일 김광엽(竹日金光燁)을 제향하였다. 1868년(高宗 5)에 훼철되어 1876년(고종 13)에 자손들이 세덕사와 우곡서숙(愚谷書塾, 書堂)을 건립하였으나, 한국전쟁(1950) 때 소실되었고, 세덕사만 남은 것을 1967년에 별묘(別廟 : 正面 3칸, 側面 2칸, 建坪 5坪)만 우곡리 442번지에 중수하여 죽일 김광엽(竹日金光燁)과 월담 김승주(月潭金承주)의 위패만을 모시고 있다.(朝鮮환輿勝覽 1929, 嶠南誌 1937, 醴泉郡誌 1939, 俎豆錄)


  우곡서원(愚谷書院) [터] : 하리면 우곡리 30번지에 있던 서원으로,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 豊山人), 식암(息菴) 황섬(黃暹, 昌原人), 창석(蒼石) 이준(李埈, 興陽人), 죽일(竹日) 김광엽(金光燁, 順天人) 등 4위를 배향코자 1708년(숙종 34)에 사림들이 세웠다. 훼철 이후에 우곡서당(愚谷書堂)으로 재건하여 월담(月潭) 김승주(金承주)와 죽일 김광엽 등 2위만을 배향했다. 한국전쟁(1950) 때 이 서당마저 소실되었고, 사당만 남아있다.(醴泉鄕校誌 2004)


  우곡서원 [記事] : 안동하회마을/ 간행년 : 1996/ 저자 : 서수용/ 발행처 : 안동문화원/ 2. 형제분을 모신 서원들/ 1) 우곡서원(愚谷書院) : 예천군 하리면 우곡리 430번지에 있었던 서원으로, 당시는 은풍현(殷豊縣)에 속했다. 숙종34년(1708) 11월에 창설하여 류운룡(柳雲龍)ㆍ황섬(黃暹)ㆍ이준(李埈)ㆍ김광엽(金光燁) 등 네 분의 위패를 봉안했다. 대원군 서원폐폐령 이후 우곡서당으로 재건하여 김승주와 김광엽 등 두 분의 위패를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0년 6.25 당시 이 서당건물은 다시 소실되었고 지금은 사당만 남아 있다.(www.koreastudy.or.kr 2007)


  우곡서원 [記事] : 안동하회마을/ 간행년 : 1996/ 저자 : 서수용/ 발행처 : 안동문화원/ 2. 형제분(겸암 유운룡, 서애 유성룡)을 모신 서원들 : ...1) 우곡서원(愚谷書院)예천군 하리면 우곡리 430번지에 있었던 서원으로, 당시는 은풍현(殷豊縣)에 속했다...(http://www.koreastudy.or.kr 2007)


  우곡서원 [記事] : [서명] 여지도서  / [기사명] 壇廟  / [저자] 미상 / 慶尙道 / 豊基/  壇廟  / 社稷壇 在郡西五里 文廟 在鄕校 城隍祠 移設郡東三里 ?壇 在郡北三里 新增郁陽書院 在郡北十里郁錦洞壬寅創建祀文純公 李滉郡人追祀門人黃俊良號錦溪 愚谷書院 在殷豊縣西五里甲申創建祀牧使 柳雲龍號謙菴 副提學 李埈號蒼石 大司憲 黃暹號息菴 應敎 金光燁號竹日 / [기관명] 국사편찬위원회(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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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율현리 상덕사(尙德祠) [터] : 유천면 율현리 동산(東山)에 있던 사우(祠宇)로, 장흥인 판서 임득이(判書林得荑), 목사 임우소(牧使林雨所), 삼송 임귀지(三松林貴枝)를 제향하기 위해 세웠으나, 1981년에 도괴되었다.(朝鮮환輿勝覽 1929, 醴泉郡誌 1939)


  상덕사(尙德祀) [터] : 유천면 율현리 동산(東山)마을에 있던 사당으로, 목조와가였으나 1981년에 도괴되었다. 태종 때의 장흥인 공조판서 임득이(林得荑)와 상주목사 임우소(林雨所), 홍산현감 임귀지(林貴枝) 등을 배향했었다.(醴泉鄕校誌 2004)


  상덕사(尙德祠) [祠堂] : 유천면 율현리 594번지 소재, 장흥인 임득이(林得荑), 임우소(林雨所), 임귀지(林貴枝)를 모신 사당으로, 단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시멘트로 마감한 얕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 4본을 세웠다. 정면에는 장혀와 하방 사이에 문얼굴을 내고 판문 1짝을 달았으며 나머지 면에는 모두 벽체를 설치하였다. 가구는 대량(大樑)위에 제형판대공(梯形板臺工)을 세워 삼량가(三樑架)의 가구를 결조하였으며, 처마는 홑처마를 사용하였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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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직리 소원사(昭遠祠) [祠宇] : 용문면 직리(直里) 곧은골 서쪽에 있는 사당으로, 1830년(순조 30)에 예천인 서하 임춘(西河林椿), 성은 임즐(城隱林즐, 孝子), 예천군 임계중(醴泉君林繼仲)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예천 임씨(林氏)들이 세웠다. 곁에 직산재(直山齋)가 있다.(醴泉郡誌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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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청곡리 포내사(浦內祠), 포내사우(浦內祠宇) [祠堂] : 풍양면 청곡1리 별실(別谷)에 있는 사당으로, 동래인 매오 정영후(梅塢鄭榮後)를 제향하기 위해 완담사(浣潭社)를 훼철한 후 건립하였다.(醴泉郡誌 1939, 竺山勝覽 1934)


  포내사(浦內祠) [祠堂] : 풍양면 별곡(別谷)에 있는 동래 정씨 매오(梅塢) 정영후(鄭榮後)의 사당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기와지붕이다. 완담사가 훼철되자 정영후의 위패를 봉안한 별묘이다. 주사 상량문은 1901년 9대손 호(浩)가 썼다.(龍宮鄕校誌 上卷 2005)


 포내사우 : →포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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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忠 記念施設物


  예천가리 한양리기념비(韓良履記念碑) [碑] : 유천면 가리 유천중학교 교정에 있는 비로, 1971년 4월 25일에 기념사업회에서 세웠다. 한양리(韓良履)는 구한 말 의병장이다.


  석초한양리의사기념비(石樵韓良履義士紀念碑) [獨立運動 遺蹟地] : 한양리(1883~1946)는 이강년의진과 의용단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강년 의진에 참가하고, 농토 6,700여평을 매각하여 군자금으로 희사하였으며, 원주, 단양, 제천, 문경, 안동, 내성, 재산, 경기도 등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세웠다. 1919년 의용단을 조직하여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2년 이응수, 이대기 등과 대구 계림여관에 비밀사무실을 열어 연락서신을 작성하던 중 적의 밀정에 탐지되어 50여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으며, 1924년 출옥 후에 다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옥고의 여독이 재발하여 1939년까지 입산 정양한 후 1940년에 예천군 유천면에 사숙을 열고 문인을 모아 배일사상 고취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獨立記念館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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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남본리 김순흠기념비(金舜欽記念碑), 비 [碑] : 예천읍 남본2리 남산공원(南山公園) 동록에 있는 비로, 풍산인 죽포(竹圃) 김순흠(金舜欽)을 위해 1971년 4월18일 죽포김순흠선생기념사업회에서 세웠다. 김순흠은 왜적이 소위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국내외 통치권을 빼앗고, 조세는 왜놈 창고에 들어갔으니, 비분을 못이겨 왜놈의 백성은 될 수 없다 하여 단식 23일 만인 1908년 9월 28일 순절(殉節)했다. 비양(碑陽)에는 "순국열사 죽포 김순흠 선생 기념비(殉國烈士竹圃金舜欽先生記念碑)"라 음각했고, 비음(碑陰)과 양측면(兩側面)에 비문이 있다. 하층 기단을 화강석으로 쌓아올리고 2층 기단은 화강석, 3층 기단도 화강석으로 하고, 비신 높이 193cm, 폭 70cm, 두께 35cm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후학 김성균(後學金聲均)이 근찬(謹撰)하였는데,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아! 슬프다. 선생의 강명(剛明)한 기품(氣稟)과 해박한 학문으로 승평 세월(昇平歲月)에 나셨던들 의당 묘당(廟堂)에 올라 이 나라 이 민족으로 가장 행복된 군민(君民)이 되게 하였을 것인데, 천운(天運)이 불행하여 선생으로 하여금 의기(義旗)를 들고 초택(草澤)에 분몰(奔沒)하다가 망국한(亡國恨)의 제단 위에 역사의 제물이 되셨으니 누구인들 통석치 않으랴. 그러나 그 송백(松柏)같은 절조(節操)와 일월 같은 충의는 서산의 이제(夷齊)인들 더할 수 없고 동해의 노연(魯連)과 동괘일철(同괘一轍)이라 하겠다. 다만 문사(文辭)가 졸눌(拙訥)하여 그 탁행고절(卓行高節)을 원만하게 현양하지 못한 것을 송구히 여기면서 관수(관手)하고 삼가 쓴다."라고 하였다. 1977년 12월 13일 정부로부터 건국포장(建國褒章)을 다시 받았다.


  [自作 西山歌] : 용산(蓉山, 芙蓉山)에 올라가서/ 고사리나 케어 볼까/ 왜놈을 끌어 들여/ 이 나라를 망치누나/ 옛님이 그립구나/ 나는 뒤따라 가리/ 아- 하늘이 시킴인가/ 운수가 끝남인가/


  [郭鍾錫에게 보낸 詩] : 다난한 이 난국에/ 나라 위한 마음에 집볼 여가 바이 없네/ 새도 오즉 전일 앉은 나무를 알며/ 나비도 어리석게 다음 춘화(春畵)를 안 기다리는데/ 글만 읽으면 무엇하랴/ 나는 뜻을 정하였도다/ 죽은 듯이 살면 무엇하랴/ 가련타 웃으며 뜻을 따라 가련다/


  김순흠기념비(金舜欽記念碑) [碑] : 예천읍 남본2리 남산공원에 있는 비로, 죽포(竹圃) 김순흠 기념사업회에서 1971년 4월 18일에 세웠다. 전면에는 ''''殉國烈士竹圃金舜欽先生記念碑''''라 음각했고, 비음(碑陰)과 양측면에는 비문이 있다. 대한민국포장 추서 제1197호이다.(醴泉鄕校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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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덕계리 반충충효비(醴泉德溪里 潘沖 忠孝碑) [碑] : 용궁면 덕계리 264번지 정려각 안에 있는 비로, 비석은 비신(碑身), 이수(이首), 구부(龜趺)가 있는 형태로, 비신 전면에 ''''忠孝潘沖之碑'''', 우측에 ''''康熙二十年辛酉十月日 五世宗孫參奉 立''''(1681)가 음각되어져 있다. 배면에 비 연혁이 기록된 듯하나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렵고, 귀부의 등 윗쪽은 귀갑문(龜甲文)이 장식되어 있고, 앞쪽은 마모되었다. 이수의 크기는 폭 75cm, 높이 46cm, 두께 19cm이고, 비신은 폭 67.5cm, 높이 132cm, 두께 14cm이고, 귀부의 크기는 가로 125cm, 세로 113cm, 높이 30cm이다. 자경(字徑) 6x7.5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예천덕계리 충효각(醴泉德溪里 忠孝閣) [碑閣] : 용궁면 덕계리에 있는 비각으로, 거제인 반충(潘沖)의 충과 효를 기려서 국명으로 영의정 이경흥(李慶興)이 1887년에 세웠다.(龍宮鄕校誌 上卷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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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미호리 반공비(醴泉眉湖里反共碑), 반공애국유적기념비(反共愛國遺蹟記念碑), 비 [碑] : 보문면 미호리(眉湖里)에 있는 기념비로, 경찰보문파출소 곁의 길 오른쪽 바위 위에 있다. 한국전쟁 때 전사한 경찰들의 비이다. 1966년 10월 21일에 예천경찰서장 엄동열이 세웠다. 비 높이 163cm, 폭 44.5cm, 두께 17.3cm, 글씨의 크기 9.3cmx10cm, 재료는 화강석이다. 한국전쟁 때인 1950년 7월 12일에 소백산맥을 따라 상리면 용두리로 넘어 온 북한 공산군의 대부대는 이내 하리면 오류리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 국군과 UN군의 저항에 부딛히게 되었는데, 10여 일 동안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끝에 북한 공산군은 기어이 용문면 대제리까지 다가와 여기에서 더욱 강력한 국군의 저지를 받게 되자, 그들은 예천읍 진격을 포기한 듯 그 주력 부대를 돌려 감천면 천향리를 넘어 마촌리에 이르렀다. 7월 28일 밤 공산군은 1천여 명의 큰 병력으로 보문면 소재지인 미호리를 완전 포위하여 다음날 새벽 보문지서(普門支署)에 집중 공격을 퍼부어 마침내 그 곳을 지키던 경위(警衛) 홍종관(洪鍾寬)외 7명의 우리 경찰관이 나라를 위하여 고귀한 목숨을 바쳤다. 당시 보문지서(普門支署) 안에는 경비전화가 불통이 되어 예천경찰서에서는 하는 수 없이 보문지서를 그대로 남겨둔 채 국군의 후퇴 명령에 따라 풍양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때 이미 적의 2개 연대 병력이 보문지구에 들어 왔으나 보문지서에서는 이러한 적정(敵情)도 아랑곳없이 남우락 지서장(支署長) 이하 경찰관 15명과 의용 경찰 30명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다음날 새벽 6시 경에 보문지서에서 약 200m 떨어진 앞산까지 침입해 온 적 척후병은 경찰관들이 아직 초소에 있는 것을 보고 사격을 가해 왔다. 그때서야 우리 경찰 대원들은 적이 침입한 것을 알고 철수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은 곧이어 수백 명이 보문지서를 향해 공격해 옴으로써 근처에서 잠복 근무 중이던 경찰관 34명이 적탄에 맞아 전사하고 나머지 경찰관과 의용경찰은 빗발치는 듯 날아오는 적탄을 피하며 탈출을 기도했으나 지서 주임을 비롯한 5명의 경찰관이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서도 감시 초소에서 경계 근무에 임하였던 최유석 경사(警査)는 적의 기습 사격에 대응하여 용감하게 응전하다가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탈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보문지서를 공격했던 적군은 예천 방면으로 빠져나가자 곧이어 주민들은 아군의 전사자 8구를 거두어 부근 야산에 가매장하기도 했다. 보문지서를 빼앗긴 국군은 그 이튿날인 7월30일 밤 탈환 작전을 벌여 많은 성과를 올리기는 하였으나 며칠 후 다시 후퇴 명령으로 공산군에게 비워 주었다. 그 후 1950년 9월 28일 수복 후 예천경찰대원들은, 빈약한 장비와 인원으로 적의 대병력과 용감히 싸우다가 전몰한 경찰관들의 위령제(慰靈祭)를 성대하게 거행하고, 그들의 거룩한 호국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웠다. 이 비석의 앞면에는, "반공 애국 유적 기념비(反共愛國遺蹟記念碑)"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고 경위 홍종관 33년(故警衛洪鍾寬33年), 고 경사 권태원 29년(故警査權泰元29年), 고 경사 이종업 27년(故警査李鍾業27年), 고 경사 박종선 26년(故警査朴鍾善26年), 고 경사 백운한 26년(故警査白雲漢26年), 고 경사 백승만 24년(故警査白承萬24年), 고 경사 강호득 24년(故警査姜虎得24年), 고 경사 김대년 23년(故警査金大年23년), 1950년 7월 29일 새벽 예천-안동간 군 보급로 확보의 중대 사명을 부(負)하고 보문지서를 사수(死守)코저 천여 명의 공산군과 싸우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 호국의 신으로 화하도다. 아! 이 나라 이 겨레 오늘의 영광은 가신 님의 고귀한 희생의 결과로다. 반공비 건립 예천군위원회 경찰서장 엄동열 지음. 서기 1966년 10월 21일" 이라고 음각되어 있다.(내 故庄의 對共鬪爭史 韓國反共聯盟 慶尙北道支部 1987)


  [인터넷] : 보문면 미호리 예천경찰서 보문파출소 곁의 길 오른 쪽 바위 위에 있는 비로, 1966년 10월 21일에 예천경찰서장 엄동열이 세웠다. 1950년 6월 25일 기습 남침을 감행해 온 북한군은 마침내 동년 7월 12일에 소백산맥을 따라 예천군 상리면까지 침입해왔다. 그리하여 우리 군경 작전부대와 미 제25사단 선발대는 무려 20여 일 간이나 예천에서 적과 대결하여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렸고, 이 작전이 용문면 제곡리전투의 최후 저지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한국전쟁 이래 중부 전선에서의 최초의 지연 작전이었으며 이 작전으로 우리 국군은 낙동강 전선에서의 방어 구축에 많은 시간을 번 작전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예천경찰서 보문지서에서는 작전 명령에 따라 경찰관 15명과 의용 경찰 30명이 관내의 경비 업무를 담당하여 북한군의 침임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7월 31일 예천읍이 적의 대병력에 완전 포위되자, 치열한 공방전이 방방곡곡에서 벌어지면서 예천 경찰부대도 현지 주둔 국군의 후퇴 명령에 따라 밤 12시를 기해 예천읍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다음날 새벽 6시경에 보문지서에서 약 200m 떨어진 앞산까지 침입해 온 적 척후병은 경찰관들이 아직 초소에 있는 것을 보고 사격을 가해 왔다. 그 때서야 우리 경찰대원들은 적이 침입한 것을 알고 철수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은 곧이어 수 백 명이 보문지서를 향해 공격해 옴으로써 근처에서 잠복 근무 중이던 경찰관 3명이 적탄에 맞아 전사하고, 나머지 경찰관과 의용 경찰은 빗발치는 듯 날아오는 적탄을 피하여 탈출을 기도했으나 지서 주임을 비롯한 5명의 경찰관이 행방 불명이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서도 감시 초소에서 경계 근무에 임하였던 최유석 경사는 적의 기습 사격에 대응하여 용감하게 응전하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보문지서를 공격했던 적군은 예천방면으로 빠져나가자 곧이어 주민들은 경찰관의 전사자 8구를 거두어 부근 야산에 가매장하기도 했다. 그 후 1950년 9월 28일 수복 후 예천 경찰대원들은 비약한 장비와 인원으로 적의 대병력과 용감히 싸우다가 전몰한 경찰관들의 위령제를 성대하게 거행하고 1962년 10월 21일 제16회 경찰의 날에 이 곳 격전지에 반공애국유적기념비를 건립, 고인들의 영원한 충혼의 얼을 길이 보존하기로 군민들과 같이 결의하기도 했다.(인터넷 korea.dnz 2001)


  예천미호리 호국경찰유적기념비(護國警察遺蹟紀念 慰靈祭 가져) [記事] : 예천경찰서(서장 오창근)는 제50주년 현충일을 맞아 2005년 6월 6일 오전 11시 호국경찰유적기념비(보문면 미호리 소재)에서 오창근 서장, 김수남 군수, 조경섭 의장, 박영순 경우회장, 경우회원, 자율방범대원, 경찰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나라를 위해 몸바친 경찰 선배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를 가졌다. 호국경찰 유적기념비는 1950년 6월 25일 북괴의 남침으로 인해 7월 12일 북괴군 제8사단 병력이 예천까지 내려와 군.경 및 미 제25사단 선발부대와 접전 중 7월31일 적의 기습으로 인해 숨진 보문지서장을 비롯 8명의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89년 9월 8일 보문지서 마당에 세워졌다. 오창근 서장은, "그 동안 기념비만 세워 놓고 제대로 참배조차 하지 않은 것이 안타까워 오늘 이같은 위령제를 마련했다."고 밝히고, "위령제를 통해 희생한 호국 경찰들의 애국애족정신을 더욱 깊이 새겨 나라와 민족과 지역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경찰이 되자."고 했다.(윤현숙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5-06-06 오후 12:03:43)


  예천미호리 호국경찰유적기념비(“護國英靈 뵐 낯이 없습니다”: 醴泉, 警察官들만 초라한 追念式 擧行) [記事] : 예천군이 매년 현충일을 맞아 예천읍 남산에 위치한 충혼탑에서 지역 기관단체장 및 보훈 단체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념식을 거행하고 있으나, 한국전쟁 당시 적의 기습으로 전사한 경찰관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호국경찰유적기념비에는 경찰관들만의 참배에 그치며 초라한 추념 행사로 진행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 보문치안센터 내에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보문지서 기습으로 전사, 행방불명된 당시 지서장 및 8명의 경찰관들의 호국영령들을 기리는 호국경찰유적기념비가 서있다. 호국경찰유적기념비는 지난 1962년 10월 21일 건립한 뒤 1989년 김석우 당시 예천경찰서장이 파출소 청사 이전과 동시에 호국경찰유적기념비로 명칭을 바꿔 중수한 것이다. 예천경찰서(서장 이상정)는 매년 1월 1일과 현충일, 경찰의 날인 10월 21일에는 서장을 비롯한 경찰서 간부들과 직원들이 이곳을 참배, 분향하고 선배 호국경찰들의 뜻을 새기며 경찰관으로서의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다. 그런데 한때는 경찰 가족들은 물론 기관단체장과 주민들이 참석했던 호국경찰유적기념비에서 거행되는 현충일 추념행사에 시간이 지날수록 주민들의 관심이 멀어지면서 2006년에는 이 서장을 비롯한 경찰 간부들과 일부 직원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치러져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 비는 1950년 7월 31일 당시 인민군 대병력의 침공으로 국군과 함께 후퇴 명령을 받고 경찰 부대가 예천읍으로 철수를 하기 시작했으나 전화 두절로 연락을 받지 못해 적의 기습을 받고 산화한 당시 보문지서 소속 호국경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張炳喆 記者 慶北日報 2006/06/08)


  예천호국경찰유적기념비(醴泉護國警察遺蹟記念碑) [碑] : 보문면 미호리 98-2번지 보문파출소 내에 있는 비로, 1962년 10월 21일에 세웠고, 1989년 9월 8일 중수하였다. 경역 면적은 2.6평, 제원은 가로 2.9cm, 세로 2.94cm, 높이 2.7m이다. 1950년 7월 12일 북한군 제8사단 병력이 예천읍에 대규모로 침공해오자, 방어 부대인 군ㆍ경 및 미 25사단 선발 부대가 국군의 후퇴 명령을 같은 날 24시를 기해 철수하였으나 통신 두절로 후퇴 명령을 받지 못하고, 적의 침공을 대비하고 있던 보문지서는 적의 기습을 받아 경찰관 3명 전사, 지서장 등 6명 행방불명 등 참사를 당한 바 있어 이곳 전적지에 유적기념비를 건립하였다.(인터넷 한미르 2002)


  호국 경찰관 유적비(護國警察官遺蹟碑), 비 [碑] : 보문면 미호리 98-2번지 보문파출소(普門支署) 옆 바위 위에 있는 비로, 한국전쟁(1950) 때 공산군 제8사단 병력이 예천까지 내려와 군경 및 미 제25사단 선발부대와 접전, 이 때 보문지서(普門支署)는 본서 작전 명령(本署作戰命令)에 따라 북한군침공에 대비하였다. 그러던 중 7월 29일 예천-안동간 군 보급로 확보의 중대한 사명을 띄고 보문지서를 사수하던 지서장 홍종관 경위 등 7명이 보문면소재지를 포위 경찰지서를 집중 공격하려는 1천여 명의 공산군과 싸우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3명이 전사하고 홍종관 지서장 및 4명은 행방불명 참사를 당했다. 이들의 고귀한 뜻을 기려 1962년 10월 21일 제17주년 경찰의 날을 맞아 당시 엄동렬 서장이 이 반공유적비를 세웠다. 부지 30평에 높이 163cm, 폭 44.5cm, 두께 17cm로 된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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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356


  명봉사 [記事] : 전국기행문화클럽 산따라 물따라 카페/ 명봉사 (경북 예천) / 글쓴이: 기행대장/ 2009.02.02 00:33/


  개요 : 소백산맥의 깊은 산기슭에 위치한 명봉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875) 두운대사가 창건하였다.


  문화재로는 고려 태조 24년에 세운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鏡淸禪院慈寂禪 師凌雲塔碑-유형문화재 제3호)는 이두문으로 된 비석으로 국문학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최언위(崔彦僞)가 지은것으로 판독됐으며, 문종대왕태실비(유형문화재 제197호)도 있다.


  대웅전 안에는 한국전쟁 때에 유일하게 소실되지 않은 대세지보살상이 보안돼 있다.


  절 입구의 숲과 계곡이 빼어나며 경내에는 소나무, 전나무, 느티나무 등 큰 느티나무가 해를 가려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끼게 한다.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흘러 여름 철 피서지, 산책로로 각광받고 있다.


  [길안내] : * 서울에서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신갈JC에서 빠져나와 다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원주 방면으로 가다가 남원주IC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제천을 지나 단양 IC로 빠져나온다. 국도를 이용해서 단양 방면으로 조금만 가다보면 왼쪽으로 예천으로 빠지는 삼거리에 도착하고 여기서 좌회전하여 927번 지방도로를 타고 소백산관광 목장을 지나 재를 하나 넘어 내리막을 내려간다. 왼쪽에 용두리 휴게공원을 지나 내리막을 계속 내려가다가 오른쪽에 파출소가 보이는 작은 삼거리에 도착하면 우회전하여 도로를 따라가면 명봉사에 도착한다./


  * 서울에서 가는 또 다른 방법으로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해서 청주 방면으로 가다가 음성IC 에서 빠져나와 국도를 이용해서 충주, 수안보, 문경(점촌)을 거쳐 예천으로 간다. 예천읍에서 영주로 가는 28번 국도를 타고 조금만 가다보면 우계삼거리에 도착하고 여기서 좌회전하여 927번 지방도로를 타고 상리, 단양방면으로 간다. 하리면을 지나 왼쪽에 파출소가 보이는 작은 삼거리에 도착하면 좌회전해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명봉사에 도착한다./


  * 대전에서는 국도를 이용해서 상주, 문경(점촌)을 거쳐 예천으로 간다. 예천읍에서 영주로 가는 28번 국도를 타고 조금만 가다 보면 우계삼거리에 도착하고 여기서 좌회전하여 927번 지방도로를 타고 상리, 단양 방면으로 간다. 하리면을 지나 왼쪽에 파출소가 보이는 작은 삼거리에 도착하면 좌회전해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명봉사에 도착한다./


  * 부산에서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구로 와서 서대구, 금호jc에서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서 예천IC로 빠져나온다. 예천IC에서 예천읍 방향으로 가다가 28번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도착해서 우회전하여 영주 방면으로 조금 가다보면 우계삼거리에 도착하고 여기서 좌회전하여 927번 지방도로를 타고 상리, 단양 방면으로 간다. 하리면을 지나 왼쪽에 파출소가 보이는 작은 삼거리에 도착하면 좌회전해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명봉사에 도착한다./


  * 광주에서는 88고속도로를 타고 서대구IC로 온 다음 다시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서 예천IC로 빠져나온다. 예천IC에서 예천읍 방향으로 가다가 28번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에 도착해서 우회전하여 영주 방면으로 조금 가다보면 우계삼거리에 도착하고 오기서 좌회전하여 927번 지방도로를 타고 상리, 단양방면으로 간다. 하리면을 지나 왼쪽에 파출소가 보이는 작은 삼거리에 도착하면 좌회전해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명봉사에 도착한다./


  * 대구에서는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해서 서안동을 지나 예천IC로 빠져나온다. 예천IC에서 예천읍 방향으로 가다가 28번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도착해서 우회전하여 영주 방면으로 조금 가다보면 우계삼거리에 도착하고 여기서 좌회전하여 927번 지방도로를 타고 상리, 단양 방면으로 간다. 하리면을 지나 왼쪽에 파출소가 보이는 작은 삼거리에 도착하면 좌회전해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명봉사에 도착한다. 


  [주변 숙박지] : 이름 유형 객실수 조회의 순서이다. 1) 두메산장 펜션 5실 1056, 2) 문곡 포밀레(formilre) 리조트 펜션 펜션 12실 871, 


  [주변 관광지] : 이름 유형 조회의 순서이다. 1) 용문사 사찰 용문사 2323, 2)  청룡사 사찰 청룡사 201, <정보제공 예천군청> (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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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나루(醴泉 三江나루와 浦港 부조장) [記事] :


  조선조 말엽은 농업경제에서 상업경제로 전환돼가던 시대였고, 대표적 ''''장터''''가 예천 삼강나루와 포항 부조장이다.


  이 두 곳은 물류의 집결지였으니, 자연히 상인들이 모이고 여각들이 들어서 장터가 형성됐다.


  예천 삼강은 낙동강, 내성천, 금천이 합류하던 곳이어서 강(江)을 따라 황포돗배들이 내왕하던 물류중심지였고, 형산강 하구에 형성된 포항 부조장에는 영일만을 통행하던 화물선들이 들어왔다.


  삼강나루에 집결된 소금 등 물품들은 경북 서부 내륙 각지로 수송됐고, 부조장에 모인 해산물 등은 경주, 영천 등지를 거쳐 전국으로 운송되었다.


  근래에 들어 "잃어버린 옛정취를 되찾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되살려보자''''는 취지이고, 21세기에 19세기 적 모습을 보는 것도 멋스러운 일이다.


  모든 것이 기계화된 현실에서 옛정취를 살려내는 것도 ''''새로운 관광자원''''이 되므로 삼강나무 복원이나, 부조장 재조명 또한 의미있는 일이다.


  최근 이한성 국회의원이 ''''삼강 소금배 나루 주막촌'''' 건설을 제안하면서 "이곳은 옛날 소금배와 달구지, 마차가 북적이며, 주막들이 강 양편에 즐비했고, 상인과 방물장수의 왕래가 빈번해 서민문화가 꽃피웠던 유서깊은 곳"라 했다.


  이 의원의 이같은 제안은 경북도의 낙동강프로젝트와 맥을 같이한다. 완벽하게 19세기 적 모습을 복원할 수는 없지만, 황포돗배가 떠다니고, 관광객들이 뱃놀이를 하고, 주막집에서 목을 추기고, 각설이 공연을 감상하는 멋 또한 특별하다.


  18세기 무렵 영일만으로 들어온 화물선이 형산강을 따라 들어와 물품을 풀어놓은 곳이 ''''국당리 윗부조장''''과 그 옆의 ''''중명리 아랫부조장''''이었다. 이곳에는 보부상 접장들의 유공비가 여럿 있는 것으로 보아 큰 장터였고, 지금의 죽도시장은 부조장의 후신이다. 지난해부터 연일향토청년회(회장 정창용)가 부조장 재현에 나서면서 ''''연일부조장터 문화축제''''를 열기도 했다. 중요성으로 보면 부조장이 삼강장에 못지 않은데, 부조장이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는 것은 서운한 일이다. 포항시와 경북도가 이에 더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慶北日報 2009-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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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궁향교(龍宮鄕校 秋季 釋奠祭 奉行) [記事] : 용궁향교(전교 이세호)에서는 2003년 9월 1일 지보·풍양·개포·용궁·문경시 영순 등 5개 면 유림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숭유 사상을 기리기 위한 추계 석전제를 봉행했다. 이 날 추계 석전제를 거행한 용궁향교는 용궁면 향석리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 태조 7년에 창건됐다. 공자 등 27위의 성현 위패를 봉안하고 청소년 예절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0호로 지정돼 있다. 석전제는 음력 2월과 8월의 첫 정일(上丁日)에 각 향교에서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지내는 큰 제사를 일컫는 말로 이를 달리 석채(釋菜) 또는 석전대제라고 부른다. 또한 봄(2월)에 지내는 것을 춘계 석전제, 가을(8월)에 지내는 것을 추계 석전제라고 한다. 이 석전제는 전형적인 유교 행사의 하나다.(醴泉新聞 2003-09-05 1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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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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