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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1831) : 예천 충효 30(附 예천 출신 이도식, 한국전력고사 전무로 내정...축하합니다/예천방문 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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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신풍리 정충각(醴泉新豊里旌忠閣), 예천신풍리 충신각(醴泉新豊里忠臣閣), 권산해 충신각(權山海忠臣閣), 비(碑) [碑閣] : 지보면 신풍2리 뒷산 절골에 있는 비각으로, 안동인 죽림 권산해(竹林權山海, 1403-1456)의 불사이군(不事二君)한 충성심을 기려 1791년(정조 15) 조정에서 정려(旌閭)하였다. 처음에는 대죽리(大竹里)에 세운 것을 1862년(철종 13)에 후손들이 현 위치로 옮겼다. 이의 우측 약 100m 쯤에는 절동재(節洞齋)가 있는데, 이곳에는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하나, 가람 터는 보이지 않는다. 단종의 이모부인 권산해가 대죽리에서 피신 중 단종의 죽음 소식을 듣고 지붕 위에서 떨어져 자결하였다고 한다.
정충각(旌忠閣) [碑閣} : 지보면 신풍2리(新豊二里)에 있는 비각으로, 단각(單閣)이다. 조선 단종의 이숙(姨叔)인 죽림 권산해(竹林權山海)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1456년에 단종이 퇴위 당하자 권산해는 관직을 사퇴하고 집에 와 있다가, 사육신(死六臣)이 참사(慘死)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보면 대죽리 자택 옥상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정충각 현판(旌忠閣 懸板) [彫刻] : 호명면 내신리 340-1번지 노봉서원(魯峰書院) 옆 정충각 내에 있는 조각으로,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의 불사이군(不事二君)한 충성심을 기려 1791년(정조 15) 조정에서 지보면 신풍2리 951번지에 정려하였다. 1862년(철종 13) 지보면 신풍2리 뒷산 ''''절골''''로 옮겼으나, 2004년 다시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판이 크기는 가로 157cm, 세로 39.5cm이며, 자경(字徑)은 5x5.4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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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읍부리 독립운동기념비(醴泉龍宮獨立運動記念碑) [碑] : 만파루복원사업추진위원회가 1988년 6월 30일에 용궁면 읍부리 만파루 옆에 세운 비로, 높이 1.38m이고, 용궁면유족회가 관리하고 있다. 용궁 출신 독립운동가 장진우(1866-1945, 대통령표창, 의병활동, 3.1운동, 해외 군자금조달), 장진성(국내 의병활동), 김철상(의병활동), 한양이(애국장), 이봉래(해외 독립운동), 권혁무(애족장, 광복군 활동) 등 6인과 용궁공립보통학교 학생 정진완, 김칠종, 이구성의 3.1운동에서 보여준 희생과 애국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인터넷 獨立記念館 2002)
예천용궁독립운동기념비(醴泉龍宮獨立運動紀念碑) [記事] : 저편자 : 만파루복원사업추진위원회/ 날짜 : 1988.6.30/ 소재지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만파루 옆)/ 관리기관 : 용궁면유족회/ 시설 규모 : 높이 1.38m/ 내용 : 예천 용궁 출신 독립운동가 장진우(대통령표창·의병활동·3·1운동·해외군자금조달), 장성진(국내의병활동), 김철상(의병활동), 한양이(애국장), 이봉래(해외독립운동), 권혁무(애족장, 광복군활동) 등 6인과 용궁공립보통학교 학생 정진완·김철종·이구성의 3·1운동에서 보여준 희생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정보제공기관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제공기관 : 독립기념관(www.knowledge.go.kr 2006)
예천읍부리 독립운동기념비(醴泉邑部里獨立碑), 예천읍부리 독립비, 독립운동 기념비(獨立運動記念碑), 비 [碑] : 용궁면 읍부리에 1988년 7월 9일에 용궁 면민들이 세운 비로, 폭 2.6m, 높이 3.3m이다. 독립투사비(獨立鬪士碑)는 이 곳의 3.1운동을 주도했던 지사(志士)와 한국독립운동사에 이름이 길이 남을 지사들의 장한 뜻을 함께 담았다. 비명(碑銘)은 전면에, "여기 피끓는 선열들의 단성(丹誠)이 있으니 숭고한 애국심과 기개를 받들어 이 비를 세우다"라고 하였고, 뒷면에는 의병들인 장진성(張鎭聖, 산택), 한양리(韓良履, 송암), 김철상(金喆相, 산택), 권복술(權福述), 안재덕(安在德), 이지한(李芝漢), 이범용(李範容), 김규홍(金圭鴻), 백남규(白南珪), 권태선(權泰宣), 이건수(李健洙), 이지벽(李芝壁), 안재극(安在極), 권용태(權龍泰), 이중진(李仲鎭), 이실현(李實鉉), 이병대(李炳大), 김영상(金泳相), 김두상(金斗相)과 3.1운동 때의 정진완(鄭鎭琬, 풍양 우망), 김칠종(金七鍾, 읍부), 이구성(李九成, 무이), 김국경(金國經, 풍양 하풍), 임우경(林遇慶, 읍부), 정규원(丁奎源, 지보 매창), 권오정(權五丁, 향석), 기성룡(奇聖龍, 읍부), 이순성(李舜成, 무이), 이병태(李炳泰, 무이), 이준형(李俊衡, 무이), 광복군(光復軍)인 권혁무(權赫武, 향석) 등의 공적이 기록되어 있다.(醴泉文化 4輯 1990)
예천읍부리 독립운동기념비(醴泉邑部里 獨立運動紀念碑) [인터넷] : 건립일자 1988.6.30/ 소재지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만파루 옆)/ 건립기관 만파루복원사업추진위원회/ 관리기관 용궁면유족회/ 시설규모 높이 1.38m/ 예천 용궁 출신 독립운동가 장진우(대통령표창·의병활동·3·1운동·해외군자금조달), 장진성(국내 의병활동), 김철상(의병활동), 한양이(애국장), 이봉래(해외독립운동), 권혁무(애족장, 광복군 활동) 등 6인과 용궁공립보통학교 학생 정진완·김철종·이구성의 3·1운동에서 보여준 희생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http://www.independence.or.kr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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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읍부리 장진우선생기념비(張鎭瑀先生記念碑) [碑] : 장진우선생기념사업회가 1971년 5월 21일에 용궁면 읍부리 용궁초등학교 내에 세운 비로, 높이 2.1m이고, 장석대가 관리하고 있다. 장진우(1866-1945)는 용궁면 출신으로 서로군정서와 기맥을 통하는 의용단에 가입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인터넷 獨立紀念館 2002)
장진우선생기념비(張進瑀先生紀念碑) [獨立運動 遺蹟地] : 작성자 장진우선생기념사업회/ 날짜 1971. 5. 21/ 소재지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용궁초등학교 내) / 건립기관 장진우선생기념사업회 / 관리 장석대 / 시설규모 높이 2.1m / 장진우(1866~1945)는 경북 예천 출신으로 서로군정서와 기맥을 통하는 의용단에 가입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3·1운동에 참여하여 4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12월 서로군정서와 기맥을 통하고 있던 의용단에 가입하여 경상북도단(慶尙北道團)의 집사로 임명되어 1922년 10월부터 군자금 및 의병모집 활동 중 11월 하순 일경에 체포되어 9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獨立記念館 2006)
장진우선생기념비(張進瑀先生紀念碑) [韓國學資料] : 장진우선생기념사업회에서 1971년 5월 21일에 세운 비로,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용궁초등학교 내)에 있다.(daum 2008)
장진우 의사기념비(張進瑀 義士記念碑) [碑] : 용궁초등학교 경내 동쪽 송림(松林) 중에 있는 비로, 비양(碑陽)에 ''''義士淸雲先生張公記念碑''''라 음각하였고, 비음에 비문이 있다. 1971년 5월 21일에 장진우선생기념사업회에서 세웠다. 기념비문은 증손 석대(錫大)가 썼는데, <용궁향교지> 상권 1014-1015쪽에 수록되어 있다.
장진우 의사비(張進瑀義士碑) [碑] : 용궁면 읍부리 용궁초등학교 교정 내 동쪽 송림에 있는 비로, 1971년 5월 21일 잔징우선생기념사업회에 의하여 세워져,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당시는 용궁중학교 교정이었으나, 그 후 용궁초등학교와 서로 교정(校庭)을 바꾸었다. 시멘트로 2층 기단을 조성, 그 위에 화강석의 3층 기단, 여기에 화강석의 비로 되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95cm, 폭 74cm, 두께 36cm이다. 장진우는 을사조약을 반대하여 의병에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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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지보리 유공자3인기념비(醴泉有功者三人紀念碑) [碑] : 지보면 지보2리 신촌마을 입구에 있는 비로, 전 계명대 총장 김태한(金泰漢) 등이 2002년 10월 26일에 세웠다. 지보면 지보리 출신으로 국문학계에 빛나는 위업을 남긴 도남 조윤제 박사와 독립 유공자 2명에 대한 기념비이다. 1) 이관 조용구(趙鏞九, 1860-1925)는 고종 24년 중추원 의관에 제수되어 국정에 참여했고, 을미조약이 체결되자 고향으로 낙향, 서당을 세워 후학 육성에 힘쓰며 문경, 의성, 예천, 영주와 충북 제천 등을 무대로 조국 광복을 위해 여생을 바쳤다. 2) 직강(直講) 조용필(趙鏞弼, 1867-1946)은 평생을 항일 투쟁에 헌신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도남(陶南) 조윤제(趙潤濟, 1904-1976)는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우고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제대에서 조선어문을 전공했다. 당시 학교 과목에서 조선어를 줄여가고 국민 스스로도 조선어문을 소홀히 할 때 경성사범에서 조선어를 강의하는가 하면 국문학 연구에 정진했으며, 4.19 때는 교수협의회 의장을 맡아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서기도 했다(iew.php?id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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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하금곡리 권원하기념비(權元河記念碑) [碑] : 용문면 하금곡리 용두 도로(龍頭道路) 변에 있는 비로,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던 중산 권원하(重山權元河)를 위하여 1979년에 기념사업회에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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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烈 記念施設物
예천가리 강신구효행각(姜信句孝行閣), 효행각 [碑閣] : 유천면 가리 산 26번지에 있는 비각으로, 진주인 강신구(姜信句, 1901-1967)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진주 강씨 문중(晋州姜氏門中)에서 1969년에 세웠다.
예천가리 강신구효행각(醴泉佳里 姜信句 孝行閣) [碑閣] : 유천면 가2리 산26-2번지 접시골에 있는 목조와가로, 비명은 ''''樵隱處士姜孝子旌閭碑''''이다. 진주인 초은 강신구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969년에 후손들이 세웠다. 정면 1칸, 측면 2칸, 건평 1.5평의 건물이다. 1901년에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나 태성이 온순하고, 착한 마음으로 자랐다. 일찍이 숙부모에게 출계(出系)했는데, 항상 생가(生家)와 양가(養家)의 부모를 똑같이 정성껏 섬겼다. 매일의 식탁에 맛있는 것을 올리는 것은 물론, 여름의 더위, 겨울의 추위를 모르게 해 드리는데 성의를 다했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효도가 지극하여 칭찬이 자자했고, 또 생모 경주 최씨가 반신불구의 몸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16년 간 모친의 대소변을 받아내었고, 항상 모친의 곁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효성이 지극하였다. 1954년 5월 25일 예천경찰서장, 1956년 3월 1일 경상북도 명륜회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았고, 생가와 양가 두 집의 친상을 당하자, 생전의 효성 못지 않게 3년 복상을 깍듯이 하니 인근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1974년에 뒷담을 보수하였다.(醴泉郡誌 2005)
예천가리 효행각(醴泉佳里孝行閣), 비(碑) [碑閣] : 유천면 가2리 산 26-2번지 접시골에 있는 목조와가(木造瓦家)로, 비명(碑銘)은, "초은처사 강효자 정려비(樵隱處士姜孝子旌閭碑)"이다. 진주인 초은 강신구(樵隱姜信句, 1901-1967)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969년에 후손들이 세웠다. 정면 1칸, 측면 2칸, 건평 1.5평의 건물이다. 1901년에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나 태성이 온순하고, 착한 마음으로 자랐다. 일찌기 숙부모에게 출계(出系)했는데 항상 생가(生家)와 양가(養家)의 부모를 똑같이 정성껏 섬겼다. 매일의 식탁에 맛있는 것을 올리는 것은 물론, 여름의 더위, 겨울의 추위를 모르게 해드리는데 성의를 다 했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효도가 지극하여 칭찬이 자자했고, 또 생모 경주 최씨가 반신불구의 몸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16년 간 모친의 대소변을 받아내었고, 항상 모친의 곁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효성이 지극하였다. 1954년 5월 25일 예천경찰서장, 1956년 3월 1일 경상북도 명륜회장(明倫會長)으로부터 표창을 받았고, 생가(生家)와 양가(養家) 두 집의 친상(親喪)을 당하자, 생전(生前)의 효성 못지 않게 3년 복상을 깍듯이 하니 인근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1974년에 뒷담을 보수하였다.(孝行列傳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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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가리 경주최씨열행각(慶州崔氏烈行閣), 열행각 [碑閣] : 유천면 가리 346번지에 있는 비각으로, 지의수의 아내인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열행(烈行)을 위하여 1966년에 세웠다.
예천가리 경주최씨 효자각(醴泉佳里 慶州崔氏 孝子閣) [孝子閣] : 유천면 가리 소재, 단각으로 경주 최씨 효행을 정려, 지의수(池의수)의 아내인 경주최씨의 열행을 위하여 1966년에 세웠다.(醴泉郡誌 2005)
예천가리 열행각(醴泉佳里烈行閣), 비(碑) [碑閣] : 유천면 가리346번지에 있는 비각으로, 1966년에 세웠다. 정면 1칸, 측면 2칸, 건평 2평인 목조와가(木造瓦家)이다. 지의수(池儀洙)의 아내인 경주 최씨가 어릴 때부터 정숙하였고, 17세에 결혼, 시부모를 지극히 봉양하였다. 남편을 극진히 섬겼다. 1927년에 남편의 병환에 구약(求藥) 차 들에 나가니 매가 홀킨 꿩을 얻고, 시냇가에 나가니 자라 등을 얻어 어려운 보약을 만들어 봉양했고, 그래도 남편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남편의 입에 마시게 하여 생명을 연장시키고 남편을 지극히 간호하였다. 표창문(表彰文) 1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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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가리 지윤락효자비(池潤洛孝子碑), 효자비 [碑] : 유천면 가리 철도 변에 있는 비로, 충주인 지윤락(1862-1939)의 효행을 위해 지씨(池氏)들이 1969년에 세웠다.
예천가리 효자비(醴泉佳里孝子碑), 비 [碑] : 유천면 가2리(佳2里) 331-2번지 가동역두(佳洞驛頭) 음지(陰地)마을 대나무 밭에 둘러쌓여 있는 비로, 충주인 두봉 지윤락(斗峰池潤洛, 1862-1939)을 위해 1969년에 세웠다. 지윤락(池潤洛)은 지의수(池儀洙)와 경주 최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나 9세 때 아버지를 여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한 어머니마저 그 후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는 산에서 꿩을 잡고,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드리는 한편 단지(斷指)하여 그 선혈(鮮血)을 바쳤지만 그토록 지극히 간병한 보람도 없이 기어이 운명했다. 그는 시체를 거두는 염습(殮襲)을 할 때 어머니의 얼굴을 자신의 혀로 핥아 때를 씻었고, 3년 시묘는 호곡(號哭)을 하면서 잠시도 떠나지 않아 호랑이의 위로를 받아 곁에서 보는 사람들을 감탄케 했다. 그리고 시병(侍病) 때에 입던 옷을 한 평생 몸에 걸치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다가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비명에서 이르기를, "효자 충주 지공윤락지비(忠州池公潤洛之碑)"라고 새겨진 이 비는 1969년 김문규(金文圭) 목사를 건립위원장으로 한 면내 유지들과 후손들에 의하여 세워졌다. 지금도 가리에는 그 효자가 3년 동안 질러 놓은 머리털이 남아 있다(孝烈行誌 1984).
[傳說] : 옛날 흉년이 들어 인심이 야박해질 때 지씨 성(池氏姓)을 가진 어떤 사람이 집 뒤에 있는 대나무로 죽을 써서 부모님을 봉양하다가 그나마도 차츰 말라죽게 되어 애처로와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우연히 대나무 밭에서 허기져 쓰러져 있는 호랑이를 발견하여 부모님께 드릴 죽을 호랑이에게 주어 살려 보냈는데, 그 후로 이 호랑이가 매일 같이 짐승을 물어다 주어서 흉년을 모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효자가 죽자 이 호랑이는 그의 제사 날만 되면 나타나 눈물을 흘리다가 요즘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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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갈마리 효자유허각(醴泉葛麻里孝子遺墟閣), 비 [碑閣] : 유천면 갈마리(蓮泉里)에 있는 효자각으로, 효자 고유완(高有完)의 유허지(遺墟地)에 1879년(고종 16)에 세웠다. 비명(碑銘)은, "효자 행가의대부 고유완지 유허비(孝子行嘉義大夫高有完之遺墟碑)"라고 하였고, 기문은 1879년에 연안인 이성수(李聲秀)가 지었다. 1940년경에 중수하였고, 고유완의 묘는 유천면 갈마리 뒷산 비석골에 있는데, 1974년 비행장 부지로 편입되어 묘와 비각을 주위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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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산리 효부비(醴泉高山里孝婦碑), 비 [碑] : 풍양면 고산2리 터골과 장천리 사이에 있는 비로, 1730년경 이곳에 시집 온 순흥 안씨가 남편을 극진히 공경하다 혼자된 후로는 늙은 시어른을 업고 다니며 효성을 다하여 세웠다.
예천고산리 효부비(孝婦碑), 순흥안씨효부비(順興安氏孝婦碑) [碑] : 풍양면 고산리(高山里)에 있는 비로, 장천리(長川里)고개로 올라가는 좌측에 있다. 구한 말 고천리로 시집 온 순흥 안씨가, 집은 가난했지만 남편 정선인 전재휘(全在휘)를 극진히 공경하다 혼자된 후로는 늙은 시어른을 업고 다니며 효성을 다 했다. 1936년에 동래인 정승모(鄭升謨)가 찬(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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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고평리 반유정려각(潘濡旌閭閣) [閭閣] : 예천읍 고평리 47번지 역전(驛前)에 있는 비각으로, 1418년(태종 18)에 효자 반유(潘濡, 1374-1437)를 위해 국가에서 세웠다. "父湧貴卒 哀毁伏塚 泣血三年 未現齒 嘗事聞旌閭"라는 명문(銘文)이 게재(揭載)되어 있다. 원래 고평리(高坪里) 가시내에 세웠으나, 옛날 홍수로 인하여 천방이 터져서 보문면 신월리 독제이(讀亭)로 옮겼다가 다시 1976년에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
예천고평리 반유 정려비(醴泉高坪里 潘濡 旌閭碑) [碑] : 예천읍 고평리에 있는 효자 반유(1374-1437)의 정려각 안에 유존한다. 1418년(태종 18)에 효자 반유를 위해 국가에서 세웠다. "父湧貴卒 哀毁伏塚 泣血三年 未見齒 嘗事聞旌閭"라는 명문이 게재되어 있다. 원래 고평리 가시내에 세웠으나 홍수로 인하여 천방이 터져서 보문면 신월리 돌제이(讀亭)로 옮겼다가 다시 1976년에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 비석은 시멘트 기단 위에 비신(碑身)과 화관(花冠), 비좌(碑座)로 구분되어 있다. 비신 전면에 "孝子潘濡之碑"라고 주칠(朱漆)로 음각되어 있다. 화관의 크기는 가로 47cm, 높이 26cm, 두께 17cm이고, 비신의 크기는 폭 38cm, 높이 56cm, 두께 15cm, 비좌는 가로 57cm, 세로 23cm, 높이 29cm이다. 정려각 중수기에는 "乙卯九月"로 적혀 있다.(醴泉郡誌 2005)
예천고평리 효자각(醴泉新月里孝子閣), 비(碑) [碑閣] : 예천읍 고평리(高坪里) 가시내에 있는 비각으로, 홍수로 인하여 천방이 터지게 되자, 한때 보문면 신월리 독제이로 옮겼다가, 1976년에 다시 원래 자리인 현 위치로 옮겼다. 비명(碑銘)은, "효자 반유지 비(孝子潘濡之碑)"이고, 비문은, "아버지 용귀(湧貴)가 죽자 무덤 앞에 엎드려 슬피 울면서 3년 간 남과 웃지 않았다. 이 일을 임금이 듣고 정려(旌閭)하였다.(父湧貴卒 哀毁伏塚泣血 三年 未嘗現齒事 聞旌閭)"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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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관현리 효자비(醴泉官峴里孝子碑), 비 [碑] : 감천면 관현1리 홍고개와 천향리(泉香里) 사이에 있는 비로, 1680년 경 감천면 천향리 샘밭에 사는 남 효자(南孝子)가 겨울에 얻기 어려운 딸기를 구하여 아버지의 병환을 봉양하여서 마을 사람들이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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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남본리 단양장씨정려각(丹陽張氏旌閭閣), 예천남본리 정려각(醴泉南本里旌閭閣), 단양장씨 효열각(丹陽張氏孝烈閣) [碑閣] : 예천읍 남본2리(南本二里) 136번지 외남본(外南本) 남산(南山)마을 앞 안동통로(安東通路) 도로변에 있는 비각으로, 조선 고종 때 명릉 참봉 평해인 황위진(明陵參奉平海人黃瑋鎭)의 아내인 단양장씨(丹陽張氏)의 정려각(旌閭閣)이다. 비명(碑銘)은 "정부인 단양장씨 효열비(貞夫人 丹陽張氏 孝烈碑)"라 했고, 중앙유도회(中央儒道會)가 열녀(烈女)로 표창하여, 1932년 3월에 아들 황학수(黃學洙)가 42평의 대지(垈地) 위에 세웠다. 비의 총 높이는 165cm, 비신(碑身) 높이 130cm, 폭 55cm, 두께 21cm이고, 정면 2칸, 측면 1칸의 목조 다포식(木造多包式) 八作(팔작) 기와집, 합문(閣門)이 떨어져 없어졌다. 단양 장씨(1843-1901)는 윤택(潤宅)의 딸로, 어릴 때부터 부모의 말씀을 거역한 바 없었다. 15세 때 어머니가 병환이 있어서 장씨는 매일 저녁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하늘에 기도하니 지성이 감천하여 하룻밤은 온 집안에 서광이 비취더니 어머니의 병도 차차 쾌유되었다. 18세 때 예천읍 황위진(黃瑋鎭)에게 시집가니 역시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부부가 의좋게 극진히 시어머니를 봉양했다. 그러나 얼마 뒤 남편이 몹쓸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러니 시어머님 봉양과 남편 병시중을 혼자 힘으로 감내(堪耐)해야만 했다. 남편의 병이 낫기를 하늘에 빌면서 온갖 약초를 구해다가 치료했고, 어느 날 한천 물이 건너다닐 수 없을 만큼 불어났으되 필사의 각오로 냇물을 건너가 동편 산에 올라 약초를 구해 오기도 했으므로 지금도 촌로(村老)들은 장씨가 다니는 길목에는 신의 가호가 있었다고 믿고 남편을 구하겠다는 집념은 초인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보람도 없이 남편이 죽자, 그 슬픔을 자녀 교육으로 달래며 시어머니를 더욱 극진히 모셨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중앙유도회(中央儒道會)에서 효열 표창을 하였고, 1901년 단양 장씨가 운명하려 할 때 그 아들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했으니,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고 세인들은 입을 모았다고 한다. 장씨의 무덤은 예천읍 서본리 봉덕산(鳳德山) 오향(午向)에 있다.(醴泉郡誌 1939, 孝烈行誌 1984)
예천남본리 단양장씨 효열비(丹陽張氏 孝烈碑) [碑] : 예천읍 남본리 178-3번지(垈) 예천삼거리로 가는 국도변에 있는 평해인 황위진(黃瑋眞)의 처 단양 장씨의 정려비로, 비석은 대좌(臺座)와 비신(碑身), 가첨석(加 石)이 있는 형태이다. 비의 전면에는, ''''貞夫人丹陽張氏孝烈碑''''라는 비명과 ''''不肖子學洙泣血謹書''''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측면에는 ''''昭和十五年庚辰三月''''(1940)이라는 건비년대(建碑年代)가 새겨져 있다. 비좌의 크기는 가로 85cm, 세로 54cm, 높이 10cm이고, 비신의 크기는 너비 50cm, 두께 21cm, 높이 128cm이다. 가첨석의 너비는 83cm, 두께는 53cm, 높이는 40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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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담암리 체효각(체孝閣), 예천담암리 쌍효각(醴泉淡岩里 雙孝閣) [碑閣] : 호명면 담암리 담바우에 있는 비각으로, 담바우 입향조인 만재(晩齋) 장진창(張震昌)의 9세손인 검암(儉岩) 장세현(張世賢)과 동생 세인(世仁)의 효성이 출천(出天)하였는데, 어머니가 생선 고기를 원하기에 엄동설한이지만 동생과 함께 개울에 가서 울며 호소하였더니, 월척(越尺)의 이어(鯉魚)가 어름 구멍에서 솟아 나왔고, 또 오리 고기를 원하니, 오리가 스스로 날아와서 봉친(奉親)한 일이 있어서 향내 사림(鄕內士林)이 관청에 알려 철종 때 영릉 참봉의 증직이 내렸고, 1883년(고종 20)에 형제의 쌍효각을 세우고 전 홍문관시강 비서감랑 문소인 김흥락이 축문을 지었다.(大宗譜, www.uniontoy.com 2002)
체효각(체孝閣) [碑閣] : 호명면 담암리 담바우 동구(洞口)에 있는 비각으로, 인동 장씨들이 영릉 참봉 검암 장세현(永陵參奉儉岩張世賢)과 그 아우인 서암 장인현(徐岩 張仁賢)의 효성을 기려서 1940년에 세운 정려각(旌閭閣)이다. 부용봉(芙蓉峰)의 한 줄기가 남쪽으로 40리를 꿈틀꿈틀 힘차게 굽이쳐 달려와 이 마을 앞에 와서 용이 따비를 튼 것 같고 내성천(乃城川)의 물줄기에 한천(漢川)이 합수(合水)되어서 밤낮으로 흘려 쉬지않고 구비구비 쏘를 이루며 마을을 안고 흘러간다. 시루봉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는 울창하여 그늘이 짙으니 옛 성인이(曾子) 목욕하고 쉬면서 자연을 즐기던 곳과 방불하여 산천이 빼어나게 맑고 지형이 명당(明堂)이다. 그들은 성품이 남다르고 생각을 일찍 깨우쳐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스스로 먹지 않고 반드시 부모께 드리되 받으시면 기뻐하고 도로 물러주시면 꼭 아우에게 나누어주니 집안 어른들 모두가 기특히 여기고 심히 사랑하였다. 아버지 병환에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짐작하였고 아버지 대신에 이 몸이 앓게 해달라고 후원(後園)에 단(壇)을 모아 노암수(蘆岩水)를 길러다가 빌었으며, 친상(親喪)을 당하여서는 시묘살이 3년에 삽짝 밖을 나간 일이 없으며, 초상(初喪) 때와 같이 슬퍼하여 목이 잠겨 울지도 못하고 항쇄암(項鎖岩)이란 바위가 지금도 확실히 전하고 있다. 어머니의 연세가 80 중에 병들어 누어서 생선이 먹고 싶다 하므로 그가 앞 냇가에 오르내리니, 용추(龍湫, 개포면 동송리에 있는 쏘이름, 혹은 龍入쏘라고도 함)에서 얼음이 깨어지면서 잉어 한 마리가 뛰어나오거늘 달이어서 드리니 효험을 보았고, 또 물오리를 원하심에 아우와 더불어 들판(쇠짐개, 牛荷浦)에 나갔더니 오리 한 마리가 아우의 품속으로 날아들어서 약으로 드시고 몸이 회복되었다. 호명면 오천장에 광대놀이가 있는 것을 어머니를 위하여 집마당에 불러다 놀게 하고 품을 후히 주어 보냈다. 효성이 이와 같았으므로 군내(郡內)는 물론, 사림(士林)들까지 관청에 아뢰어 가상히 포상(褒賞)이 내리게 하였고, 또 관청에서 나라에 품하니 조정에서 특히 영릉 참봉을 제수하였으니 또한 특별한 왕의 은총이다. 관찰사가 정려하라고 했으되 각(閣)을 세우지 못하여 당시의 많은 선비들이 안타까워함이 오래더니, 그의 현손인 재국(在國)이 문중과 의논하여 재목을 구하고 목수를 모아서 순식간에 이 각을 낙성함에 이르렀다.
예천담암리 장세현장세인효자비(醴泉淡岩里 張世賢 張世仁 孝子碑) [碑] : 호명면 담암리 238번지에 있는 정효비각 안에 있는 비로, 인동인 장세현(1792-1865), 장세인(1799-1870)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40년에 후손들이 세웠다. 형제는 평소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부모에게 드렸고, 부친이 중병에 신음할 땐 자신이 대신 앓기를 하늘에 빌었으나 기어이 부상(父喪)을 당하자 3년 동안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고, 팔순노모가 병환을 또 앓게 되었을 때는 겨울에 얼어붙은 개포면 동송리 용입쏘에서 잉어를 잡아 드렸고, 여름에는 물오리를 구해 왔고, 또 집으로 광대놀이를 불러 위안케 하였고, 도둑골이라는 산에 가서 수박을 구하여 드렸고, 꿩이 스스로 날아드는 등 효성이 지극했으므로 조정에서 영릉참봉(永陵參奉)을 내렸다. 비석은 비좌(碑座)와 가첨석(加 石)이 있는 형태이다. 비신 전면에 ''''孝子參奉仁同張世賢處士仁同張世仁兄弟之閭''''의 비명이 적혀 있고, 좌측 하단에는 ''''宗後八大湜書''''라 음각되어 있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122cm, 폭 41cm, 두께 12.5cm이다. 가첨석의 크기는 폭 62cm, 높이 37cm, 두께 33cm이다. 비좌는 폭 67x44cm, 높이 14cm, 자경(字徑) 8x10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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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대죽리 쌍효각(醴泉大竹里 雙孝閣) [碑閣] : 지보면 대죽리 입구에 있는 비각으로, 경주인 최영학(崔英鶴)과 최영중(崔英重) 형제의 효를 기리기 위해 1999년에 아들들이 세웠다. 기문은 용궁향교 전(前) 전교 죽계(竹溪) 안승락(安承洛)이 지었는데, <용궁향교지>(2005) 상권 1013쪽에 수록되어 있다.(龍宮鄕校誌 上卷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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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덕계리 쌍효각(雙孝閣), 예천덕계리 쌍효각(醴泉德溪里 雙孝閣) [碑閣] : 용궁면 덕계리 499번지 덕봉(德峰) 남단에 있는 목조와가(木造瓦家) 비각으로, 성주인 송재 도명천(松齋都命天, 1762-1835)과 서산 도명찬(書山都命燦, 1804-1873)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87년(고종 24)에 성주 도씨(星州都氏)들이 세웠다. 도씨 형제의 집은 매우 가난했는데,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정성껏 모셨으나 천명을 다하니, 3년 시묘하고 정조가 승하하니 통곡 설단(設壇)하고 매일 통곡하고 술과 육식(肉食)을 3년 간 금하였다. 그 후 도명천이 죽고 동생 도명찬은 철종이 승하하니, 역시 왕의산(王衣山) 아래에 설단하여 통곡하여 분향 3년 하였고, 60년 동안 부모의 묘를 하루도 빠짐없이 손질하였다. 이런 효행을 임금이 듣고 형제가 동몽교관 조봉대부(童蒙敎官朝奉大夫)에 증직되고 1887년(고종 24) 12월 정문(旌門)이 내렸다. 현재 비는 없어지고 각(閣)만이 남아있다. 비명(閣銘)은, "충효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성주 도명찬지 각(忠孝贈童蒙敎官朝奉大夫星州都命燦之閣)"과 "충효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성주 도명천지 각(忠孝贈童蒙敎官朝奉大夫星州都命天之閣)"이다.(孝烈行誌 1984)
예천덕계리 쌍효각(醴泉德溪里 雙孝閣) [碑閣] : 용궁면 덕계리 있는 비각으로, 성주인 도명천(都命天)과 도명찬(都命燦) 형제의 효행을 기려 1887년(고종 24)에 세웠다. 나라에서 충효정신을 기려 정려하고 조봉대부 동몽교관을 증하였다. 자주 중수했다.(龍宮鄕校誌 上卷 2005)
예천덕계리 도명찬정려현판(醴泉德溪里 都命燦 旌閭懸板) : 용궁면 덕계리 산14번지의 쌍효각(雙孝閣) 안에 유존한다. 성주인 송재(松齋) 도명천(都命天)과 서산(書山) 도명찬(都命燦)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도씨 형제의 집은 매우 가난했는데,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정성껏 모셨으나 천명을 다하니 3년 시묘(侍墓)하고 정조가 승하(昇遐)하니 통곡 설단(痛哭設壇)하고 매일 통곡하고 술과 육식을 3년을 금하였다. 그 후 도명천이 죽고 동생 도명찬은 철종이 승하하니 역시 통곡 설단 왕의산하(王衣山下)하여 분향(焚香) 3년하였고, 부모의 묘를 하루도 빠짐없이 손질하였다. 이런 효행이 상문(上聞)되어 형제가 동몽교관 조봉대부(童蒙敎官 朝奉大夫)에 증직되고 고종 24년(1887) 12월 정문(旌門)이 내렸다. 현판의 크기는 가로 78cm, 세로 29cm이다. 글자는 음각으로 "光緖十三年丁亥十二月日 忠孝贈童蒙敎官朝奉大夫星州 都命燦之閭"라고 새겨져 있다.(醴泉郡誌 2005)
예천덕계리 도명천정려현판(醴泉德溪里 都命天 旌閭懸板) : 용궁면 덕계리 산14번지의 쌍효각(雙孝閣) 안에 유존한다. 성주인 송재(松齋) 도명천(都命天)과 서산(書山) 도명찬(都命燦)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도씨 형제의 집은 매우 가난했는데,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정성껏 모셨으나 천명을 다하니 3년 시묘(侍墓)하고 정조가 승하(昇遐)하니 통곡설단(痛哭設壇)하고 매일 통곡하고 술과 육식을 3년을 금하였다. 그 후 도명천이 죽고 동생 도명찬은 철종이 승하하니 역시 통곡 설단 왕의산하(王衣山下)하여 분향(焚香) 3년 하였고, 부모의 묘를 하루도 빠짐없이 손질하였다. 이런 효행이 상문(上聞)되어 형제가 동몽교관 조봉대부(童蒙敎官 朝奉大夫)에 증직되고 고종 24년(1887) 12월에 정문(旌門)이 내렸다. 현판의 크기는 가로 78cm, 세로 29cm이다. 글자는 음각으로 "光緖十三年丁亥十二月日 忠孝贈童蒙敎官朝奉大夫星州都命天之閭"라고 새겨져 있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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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출신 이도식, 한국전력고사 전무로 내정...축하합니다.
이도식(出鄕人 이도식 氏, 韓國電力公社 專務로 內定!) [記事] :
우리나라 대표공기업인 한국전력공사는 2009년 1월 23일 긴급 이사회를 열어 예천 출신 출향인 이도식(58) 씨를 신임 상임이사에 내정하고 2월 12일 주주총회에서 상임이사로 선임할 예정이다.
예천초등학교(50회), 예천중학교(14회), 예천농업고등학교(35회), 건국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한 이도식 내정자는 한국전력공사 재무처장, 경영혁신실장, 중앙교육원장 등 한전의 주요보직을 두루거친 실무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영혁신실장으로 재직하는 동안(2005~2007) 기획재정부에서 주관하는 공공기관 혁신평가 부문 3년 연속 최고수준인 6단계를 달성했으며, 중앙교육원장 재직 시에는 전직원을 대상으로 혁신교육을 실시하는 등 혁신에 대해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어 한전 내부에서는 혁신전도사로 통한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01-30 오후 4: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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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357
예천군 방문(‘博物館 文化學校’文化遺産 所重함 일깨워 : 現場踏査로 傳統文化에 對한 認識 提高) [記事] :
안동민속박물관(관장 박동균)에서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전통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강의와 심도 있는 문화유적 답사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2009년 2월 2일부터 11일까지 안동민속박물관 문화학교 제6기 박물관 대학 수강생 90명을 모집합니다.
이번에 개강하는 박물관대학은 3월부터 12월까지 안동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문화유산을 통해 “한국정신문화의 수도이며 세계역사도시인 안동”의 우수한 문화를 시민들이 직접 배우고 확인할 수 있는 강의와 현장답사로 진행될 계획이다.
박물관대학은 매월 둘째 주와 넷째 주 금요일 개최되며, 둘째 주는 전통문화에 대한 깊이 있고 다양한 강의로, 넷째 주에는 안동문화권ㆍ신라문화권ㆍ백제문화권의 문화유적지 현장답사로 진행되어 있어 수강생들은 우리 전통문화를 배우고 직접 답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될 것으로 기대된다.
안동민속박물관은 1993년 문화관광부로부터 <박물관 문화학교>로 지정받아 지역민들에게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그동안 문화학교는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어린이민속교실 1,374명, 전통문화교실 8,731명, 박물관대학에 2008년까지 543명이 수료하였다...
3월 13일 : 제6기 박물관대학 개강식(10:00-10:20)/ 강의 : 안동문화의 특징(10:30-12:00, 강사 김휘동 안동시장)
3월 27일 : 안동문화권(예천지역) 답사(09:00-18:00) 1) 금당실마을의 삶과 문화/ 동성마을 들여다보기(금당실/박일윤), - 예천권씨종가와 별당/살림집의 공간구성(종택/권영기), - 예천 초간정 답사/ 산수간에 집을 짓고(초강정/권영일)...
(安東넷 2009-02-02 오전 9:3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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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향교(龍宮鄕校 耆老宴 再現 行事 가져) [記事] : 용궁면 향석리 용궁향교(전교 이세호)에서는 2004년 11월 15일 오전 10시 유림,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로연 재현 행사를 가졌다.(醴泉新聞 2004-11-19 14:2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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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