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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1832:예천충효31(祝김수현/예천방문358)
작성자장병창 @ 2009.02.04 06:58:02

  예천의 자랑(1832) : 예천 충효 31(附 예천 출신 김수현, 중소기업진흥공단 강원본부장...축하합니다/예천방문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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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덕계리 반충충효각(潘忠忠孝閣), 예천덕계리 충효각 [碑閣] : 용궁면 덕계리 264번지 달계(達溪)에 있는 목조와가(木造瓦家) 비각으로, 1887년(고종 24)에 국가에서 효자 반충(潘忠, 1503-1584)을 위해 세웠다. 현판명은, "忠孝潘先生之閣"이다.


  반충 충효비(潘沖 忠孝碑) [碑] : 용궁면 덕계리 264번지에 있는 비로, 비석은 비신(碑身), 이수( 首), 구부(龜趺)가 있는 형태로, 비신 전면에 ''''忠孝潘沖之碑'''', 우측에 ''''康熙二十年辛酉十月日 五世宗孫參奉 立''''(1681)가 음각되어 있다. 배면에 비 연혁이 기록된 듯하나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렵고, 귀부의 등 윗쪽은 귀갑문(龜甲文)이 장식되어 있다. 이수의 크기는 폭 75cm, 높이 46cm, 두께 19cm이고, 비신은 폭 67.5cm, 높이 132cm, 두께 14cm이고, 귀부의 크기는 가로 125cm, 세로 113cm, 높이 30cm이다. 자경(字徑) 6x7.5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예천덕계리 반충 충효비(醴泉德溪里 潘沖 忠孝碑) [碑] : 용궁면 덕계리 264번지 정려각 안에 있는 비로, 비석은 비신(碑身), 이수( 首), 구부(龜趺)가 있는 형태로, 비신 전면에 ''''忠孝潘沖之碑'''', 우측에 ''''康熙二十年辛酉十月日 五世宗孫參奉 立''''(1681)가 음각되어져 있다. 배면에 비 연혁이 기록된 듯하나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렵고, 귀부의 등 윗쪽은 귀갑문(龜甲文)이 장식되어 있고, 앞쪽은 마모되었다. 이수의 크기는 폭 75cm, 높이 46cm, 두께 19cm이고, 비신은 폭 67.5cm, 높이 132cm, 두께 14cm이고, 귀부의 크기는 가로 125cm, 세로 113cm, 높이 30cm이다. 자경(字徑) 6x7.5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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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독양리 열부비(醴泉篤陽里烈婦碑), 비 [碑] : 보문면 독양1리 569번지 진양(眞陽)에 있는 비로, 원래 진양 안고개(烈女峴)에 성명 미상의 열부를 위해 1871년(고종 8) 5월에 지역 주민이 세웠다. 폭 40cm, 비신 높이 90cm이다. 1964년 경북선철도 시설 부지로 편입되어 현 평지로 이건하였다. 그 전에는 어등역(漁登驛)에서 영주 방면으로 800m 지점에 그다지 높지 않은 고개가 있었는데, 그 고개 마루에 초가 단간방 살이의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무식하고 가난한 이들 부부는 이 곳이 타향이고, 거기다가 남편은 장님이면서 절름발이였다. 아내는 남편 섬기기가 힘에 겨웠지만 온 정성을 다했다. 세월이 흘러 불구인 남편은 원인 모를 병으로 죽었다. 남편만을 의지하며 살아온 아내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참지 못해 부엌칼로 자신의 유방을 찔러 자결하고 남편의 뒤를 따라 이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향내 유림들과 지역 주민들은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비를 세워주고 ''''무명 열부비(無名烈婦碑)''''라고 이름했다. 강옹 장성정(江翁 張星井)이 비문을 찬하고, 석당 김종호(石堂金宗鎬)가 글을 쓴 이 비는 현재 약 15 인의 인근 마을 유지들이 계(契)를 모아 매년 가을에 제사를 드리고 보호하고 있다(孝烈行誌 1984). [傳說] : 옛날 끼니를 구하러 다니는 떠돌이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은 안질 병으로 눈봉사이어서 홀로 걷지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부인은 남편을 인도하며 끼니를 구하러 다녔다. 이 부부가 어느 날 이곳 안고개를 지나다가 부인이 이르기를, "여보! 이곳에다 움막이나 치고 살다가 내년 봄이나 딴 곳으로 떠납시다."라고 하였다. 남편도, "그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그 부인은 그 곳에다가 천막을 치고 겨울에는 나무를 해다가 모닥불을 피우면서 살았다. 그 부인은 성심껏 남편을 모시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남편이 그 이듬해 죽게 되었다. 그런데 남편은 평소에 그의 아내의 유방을 매우 좋아하였기에 그의 아내는 울면서 이르기를, "여보! 당신이 미리 가시면 나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당신이 평소에 내 젖을 좋아하였으니 드릴 것은 없으니, 이 젖을 가져 가시요."라고 하면서 자기 젖을 베어서 남편의 관 안에 넣어서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그 아내도 얼마 못가서 유방의 상처 때문에 남편의 무덤 앞에서 죽었다. 이 후부터 이 안고개를 열녀고개라고 불렀다.


  예천독양리 열부비(醴泉篤陽里 烈婦碑) [碑] : 보문면 독양리 584-2번지에 있는 비로, ''''앙고개(雁峴)'''' 마을에 이름도 알 수 없는 한 부부가 움막을 치고 이 곳에 살았는데, 앞 못보는 앉은뱅이인지라 부인이 정성으로 남편을 섬겼으므로 그 움막이 있던 자리에 1871년에 유림들이 열녀비를 세웠다. 원래의 비는 도괴되고 비각도 소실되어 1980년 경 새로 비를 세웠다. 비신(碑身)은 월두형(月頭形)으로 비신의 높이는 70cm, 폭은 30cm, 두께는 13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예천독양리 열부비(無名 烈婦碑 - 普門面 篤陽里) [傳說] : 독양리 앙고개에는 이름 없는 열부비가 있다. 1964년 경북선 철도시설 부지로 편입되어 철도가 놓여있지만 그 전에는 지금의 어등역에서 영주 방면으로 약 8백 미터의 지점에 그리 높지 않은 앙고개가 있었다. 그 고갯마루에는 초가 단 칸을 짓고 사는 가난한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젊은 부부는 타향 사람이고 게다가 남편은 장님에 절뚝발이어서 아내는 몸이 성치 않은 남편을 섬기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동네의 힘들고 거북한 일은 도맡아하면서 살림을 꾸려나가 나름대로 그날그날을 안락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중병으로 눕게 되자 백방으로 약을 써 보았으나 정성을 다한 보람도 없이 죽고 말았다. 아내는 몇 날 며칠을 통곡한 끝에 남편이 평소 그녀의 가슴 만지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가슴을 칼로 베어 남편 손에 쥐어주고는 남편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가련하게 여겨 조선 고종(1871) 8년 5월에 이 고장 유림들과 유지들은 이 이름 없고 가난한 아내의 갸륵한 마음씨를 기리기 위해 열부비를 세우고 살았던 이 고개를 열부고개라 부르며, 매년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후손도 없고 이름도 없는 열부를 추모하는 동네 사람들의 마음씨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醴泉新聞 2005-09-02 11:04:26 조회수 8)


  예천독양리 열녀비(烈女碑) [碑] : 보문면 독양1리(篤陽一里) 앙고개마을에 있는 비석으로, 옛날 이름도 알 수 없는 극빈한 어느 부부가 움막을 치고 이 곳에 오순도순 살았다. 남편은 앞을 못 보는 앉은뱅이로서, 부인의 젖을 만지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부인은 정성으로 남편을 섬겼다. 남편이 병으로 죽게 되자, 비통해진 아내가 자기의 젖을 베어 남편의 손에 쥐어주고 남편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후세 사람들이 이를 가련히 여겨 이 젊은 부부가 살던 고개를 열녀고개라고 하고, 그 움막이 있던 자리에 1872년 봄에 장성정(張星井) 등 유림(儒林)들이 열녀비를 세워 현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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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돈산리 경주김씨열녀비각(慶州金氏烈女碑閣) [碑閣] : 감천면 돈산리 산곡동(山谷洞)에 있는 비각으로, 김씨가 18세에 한양 조태후(趙泰후)에게 출가하여 홀로 계신 시어머니를 잘 모시고, 부도(婦道)를 다하니 이웃에서 모두 칭송하였다. 남편이 우연히 병을 얻게 되자 백방으로 치료에 정성을 다하고, 자기가 대신할 것을 하늘에 빌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시집온 지 5년만에 남편과 사별(死別)하게 되니 슬퍼함이 이를 데 없었으며, 졸곡(卒哭) 후 3일만에 뒤따라 자결하니 그 열행(烈行)을 가상하여 열녀각을 세웠다. 열녀전 문집(烈女傳文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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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매산리 박제정정려문(朴齊政 旌閭門) [旌閭] : 유천면 매산리 316-1번지(垈)에 있는 효자 정려문으로, 정려 현판의 크기는 가로 195cm, 세로 18cm로, ''''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朴齊政之門'''', ''''壁上郞祚三十年癸巳十二月十六日命旌''''(1893)이 각자되어 있다. 반남인 효자 박제정을 위해 국가에서 세웠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박제정 효자각(朴齊政 孝子閣), 박제정효자문(孝子門), 효자각 [碑閣] ; 유천면 매산리 316번지 매산(梅山) 앞 매화봉(梅花峰)의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 자리에 있는 비각으로, 1893년(고종 30)에 반남인 효자 박제정(朴齊政)을 위해 국가에서 세웠다.


  예천매산리 박제정 정려문(醴泉梅山里 朴齊政 旌閭門) : 유천면 매산리 316-1번지에 소재하는 효자 정려문이다. 정려 현판의 가로는 195cm, 세로는 18cm로 음각하여 "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朴齊政之門" "聖上郞祚三十年癸巳十二月十六日命旌"(고종 30년(1893))이 각자되어 있다. 반남인 효자 박제정을 위해 국가에서 세웠다.(醴泉郡誌 2005)


  예천매산리 효자각(醴泉梅山里孝子閣), 비(碑) [碑閣] : 유천면매산리 316-1번지에 있는 비각으로, 효자 반남인 매괴당 박제정(梅槐堂朴齊政)을 위해 1893년(고종 30)에 정려하여 나라에서 세운 건평 15평, 정면 3칸의 목조와가(木造瓦家) 비각이다. 박제정(朴齊政)은 매산(梅山)에서 태어나 64세로 일생을 마친 효(孝)의 으뜸으로 보였다. 40여 세 때 연로한 모친이 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선혈을 입에 흘려 넣었으나 보람없이 모친은 세상을 떠났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 그는 모친의 산소 옆에 여막을 치고 거친 음식을 들면서 3년 간극진히도 시묘했다. 이런 효행이 향내 유림에 알려지고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니 고종께서는 1893년 정려를 명하고 이조판서 심상훈(吏曹判書沈相勳), 예조판서 민영달(禮曹判書閔泳達), 동부승지 이석영(同副承旨李石榮)으로 하여금 효자문(孝子門)을 세우게 했고, 조봉대부 동몽교관(朝奉大夫童蒙敎官)을 증직(贈職)했다. 유물로는 문집(孝行實記) 1권, 표주박 1개, 교지(敎旨, 光緖十九年 十月 一日) 1매, 교지봉(敎旨棒) 1개가 있고, 1976년에 후손들이 모금하여 개수하였다. 군수 김근연(郡守金近淵)의 기문(記文)이 있다.(孝烈行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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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미석리 정도창효자비(鄭道昌孝子碑) [碑閣] : 감천면 미석3리 145-1번지 선둣골 입구에 있는 비각으로, 1630년(인조 8)에 연일인 정도창(鄭道昌)을 위해 후손들이 세운 정면 1칸, 측면 1칸의 목조와가(木造瓦家) 맞배지붕이다. 1704년에 그의 제3자 정휘(鄭曦)가 개축하고, 또 1965년에 이 지방 사림의 박승화(朴勝華), 정우택(鄭禹澤) 등이 주동하여 이 비각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비명(碑銘)은, "효자 유학 정도창지 려(孝子幼學鄭道昌之閭)"이다. 지평 이적의(持平李適意, 1644)와 학사 김응조(鶴沙金應祖)가 찬기(撰記)하였다.(醴泉郡誌 1939)


  예천미석리 효자비(醴泉美石里孝子碑), 비 [碑閣] : 감천면 미석3리 145-1번지 선둣골에 있는 비로, 영일인 정도창(鄭道昌)의 효행을 위해 1630년(인조 8) 경 후손들이 세운 목조와가(木造瓦家)의 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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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백송리 열녀비(醴泉白松里烈女碑), 비 [터] : 호명면 백송리에 있던 비로, 1774년경에 세웠다. 진성인 이원윤(李遠胤)이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왔다. 성년이 되어 곽씨(郭氏) 부인과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고 살던 중 남편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곽씨 부인은 백방으로 남편의 병을 구완하였으나 보람도 없이 세상을 뜨자 곽씨 부인은 3개월이나 식음을 전폐하다가 남편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나자 친지와 동민들이 열녀비를 세워 곽씨 부인을 추모하였으나, 지금은 비각은 없어지고 그 터만 있어 어린이 놀이터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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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백석리 효열각(孝烈閣) [碑閣] : 상리면 백석리(白石里)에 있는 비각으로, 예천-고항선 도로 변(醴泉-古項線道路邊)에 있다. 전의 이(李)씨에게 어린 나이로 시집간 창원 황씨가 일찍이 남편을 여이고, 늙은 조부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공을 기리어 그의 손자가 1988년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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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백전리 임즐효자각(林즐孝子閣), 성은각(城隱閣) [碑閣] : 예천읍 백전리 106번지 국도변에 있는 효자 성은 임즐(城隱林즐)의 비각으로, 임즐이 1408년(태종 8)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하여 1412(태종 12)에 왕명으로 정려되어 나라에서 1477년(성종 8)에 서본리 성저리(城底里)에 건립하였는데, 김기응(金箕應) 군수가 1802년(순조 2)에 중수, 1856년(철종 7)에 현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다. 군수 유서(柳恕)가 기문(記文)을 짓고, 비명(碑銘)은, "효자 임즐지 비(孝子林즐之碑)"이다. 효자각 뒷면에는 나무에 음각하기를, "효자 통정대부 공조 참의 행 조봉대부 지영천군사 임즐지 각 을사 윤 3월 진성 후인 이박(孝子通政大夫工曹參議行朝奉大夫知榮川郡事林 之閣 乙巳閏三月 眞城後人 李박)"이라고 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칸, 목조 맞배지붕이다.


  임즐 효자비(林즐 孝子碑) [碑] : 예천읍 백전리 106번지(雜) 도로변에 효자 임즐을 위해 세운 비각 안에 유존하는 비로, 1412년에 왕명으로 정려되어 1477년에 서본리 성저리(城底里)에 건립하였고, 1856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비신(碑身)과 비좌(碑座)가 있는 형태로, 비신은 월두형(月頭形)으로 비신 전면에 ''''孝子林 之碑''''가 음각되어 있고, 비신 우측면에 ''''癸酉五月日''''이라는 건비년대(建碑年代)가 적혀있다. 비신의 크기는 폭 31.5cm, 높이 90cm, 두께 12.5cm이고, 비좌의 크기는 가로 70cm, 세로 63cm, 높이 14cm, 자경(字徑) 10x12.5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예천백전리 임즐 효자비(醴泉栢田里 林즐孝子碑) [碑] : 예천읍 백전리 106번지(雜) 도로변에 효자 임즐을 위해 세운 비각 안에 유존하는 비로, 1412년에 왕명으로 정려되어 1477년에 서본리 성저리(城底里)에 건립하였고, 1856년에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비신(碑身)과 비좌(碑座)가 있는 형태로, 비신은 월두형(月頭形)으로 비신 전면에 ''''孝子林즐之碑''''가 음각되어 있고, 비신 우측면에 ''''癸酉五月日''''이라는 건비년대(建碑年代)가 적혀있다. 비신의 크기는 폭 31.5cm, 높이 90cm, 두께 12.5cm이고, 비좌의 크기는 가로 70cm, 세로 63cm, 높이 14cm, 자경(字徑) 10x12.5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예천백전리 임즐 효자비(醴泉栢田里 林즐 孝子碑) [碑] : 예천읍 백전리  106번지 도로변에 유존한다. 여말선초의 효자 임즐을 위해 세운 비각 안에 있다. 임즐의 본관은 예천이며, 현재의 서본2리인 성저리(城底里)에 살았다. 1412년(태종 12)에 왕명으로 정려되어 나라에서 1477년(성종 8)에 서본리 성저리에 건립하였는데, 김기응(金箕應) 군수가 1802년(순조 2)에 중수, 1856년(철종 7)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군수 유서(柳恕)가 기문(記文)을 지었다. 비석은 비신(碑身)과 비좌(碑座)로 구분되어 있다. 비신은 월두형(月頭形)으로 비신 전면에 "孝子林 之碑"가 음각되어 있고, 비신 우측면에 "癸酉五月日"이라는 건비 연대가 적혀 있다. 비좌 밑에는 벽돌시멘트 2단으로 기단부를 조성하고 있다. 비신의 크기는 폭 31.5cm, 높이 90cm, 두께 12.5cm이고, 비좌의 크기는 가로 70cm, 세로 63cm,  높이 14cm, 자경(字徑) 10x12.5cm이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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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백전리 황계옹효자비(黃啓翁孝子碑) [碑] : 예천읍 백전2리 271번지 구마이에 있는 비로, 창원인 황계옹(昌原人黃啓翁, 1756-1835)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1892년(고종 29)에 국가에서 세웠다. 원래 비각과 함께 잣밭고개에 있었는데, 당시일본인 지주 현판(脇阪, 와끼사까, 썩백이)의 대지(垈地) 소유권 강제 발동으로 현 위치로 옮겼다. 구마이에서 용문통로 노변의 집 뒷산 도덕산(導德山) 산록 노천에 있는데, 순찰사 이경(巡察使李景)의 상소(上疏)에 따라 정려(旌閭)되고, 황계옹(黃啓翁)은 통정대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황 효자는 평소에 남달리 효성이 지극했을 뿐더러 양친이 중환으로 목숨을 다하려 할 때 손가락을 끊어 선혈을 마시게 하여 정성껏 간호하여 아버지는 5년, 어머니는 10년의 수명을 연장케 했고 부모가 돌아간 후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같이 시묘하고 묘소 주위를 깨끗이 했다. 비의 좌대(座臺)는 20cm, 비신(碑身) 높이는 80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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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부초리 가평이씨열부비(嘉平李氏烈婦碑), 가평이씨 정려각(旌閭閣), 예천부초리 효열각(醴泉芙草里孝烈閣), 예천부초리 열부각(烈婦閣), 예천부초리 열부비, 예천부초리 정열각(貞烈閣), 비 [碑閣] : 하리면 부초리 산 1번지 하리통로(下里通路) 변 함포재사(咸浦齋舍) 앞에 있는 비각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 맞배지붕, 건평 2평이다. 비명(碑銘)은, "열부 유인 가평 이씨 정려비(烈婦孺人嘉平李氏旌閭碑)"이다. 용문면 하학리(下鶴里) 둑안에 살던 안동인 권상근(權尙謹)의 아내 가평 이씨(嘉平李氏)의 효행을 위해 조선 선조 때 세운 목조 와가(瓦家)이다. 원래 현 위치에서 하리(下里) 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1960년경에 현 위치로 옮겼다. 가평 이씨는 병상에 시달리는 시아버지(權承吉)를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1626년(인조 4) 9월 9일 밤 3경(三更)에 호환(虎患)을 두렵게 생각지 않고 캄캄칠야 호랑이를 쫓아 옥봉 정상(玉峰頂上)까지 따라가 남편의 유해(遺骸)를 수습하였다. 또한 어느 날, 옴봉산 꼭대기 속칭 늑대굴이라는 굴속에 여인의 시아버지의 병을 낳게 할 수 있는 약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죽음을 각오한 가평 이씨는 굴속으로 들어가 그 약을 찾아 나오려는 순간 수많은 늑대의 무리가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그 여인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터라 수많은 늑대의 무리를 빠져 나와서 그 여인의 집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여인의 시아버지는 그 약을 먹고 완쾌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위하여 열녀각(烈女閣)을 지어 이 여인의 높은 뜻을 추모하였다.(孝烈行誌 1984)


  예천부초리 가평이씨정려비 [碑] : 하리면 부초리 505번지에 있는 비로, 원래 부초(芙草)마을 입구에 있던 것을 용문면과 하리면의 경계 부근 지방도 변인 현 위치에 옮겨 놓았는데, 그 비에는 가평 이씨(嘉平李氏)가 남편과 사별(死別)하고 시아버지 약을 얻기 위해 늑대굴 속으로 들어가 위험을 무릅쓰고 약을 구해 왔다고도 하고, 한편으로는 시집 온 첫날 밤 호랑이에게 몰려가는 남편을 찾으려고 호랑이 꼬리를 잡고 따라가다가 결국 죽게 되었다고도 한다. 비문은, "열부 유인 가평 이씨 정려비(烈婦孺人嘉平李氏旌閭碑)"라고 각자(刻字)되어 있다. 3) 호명면 백송리(白松里)에 있던 비이다.


  예천부초리 열부가평이씨정려비(醴泉芙草里 烈婦 嘉平李氏 旌閭碑) [碑] : 하리면 부초리 475-1번지(田)에 있는 정려비각 안에 있는 비로, 조선 선조 때 용문면 하학리 둑안에 살던 안동인 권상근(權尙謹)의 아내 가평 이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때 비각을 세웠다. 원래는 현위치에서 하리면 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1960년 경에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비석은 비신과 장방형의 비좌로 구분되어 있다. 비신은 월두형(月頭形)으로 비신 전면에 ''''烈婦孺人嘉平李氏旌閭碑''''가 새겨져 있으며, 비신 좌측에는 ''''乙巳二月日''''의 건비 연대가 새겨져 있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118cm, 폭 42cm, 두께 15cm이고, 비좌의 크기는 가로 73cm, 세로 46cm, 높이 13cm이고, 자경(字徑)은 7.5x8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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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사곡리 진주강씨효열비(醴泉沙谷里 晋州姜氏 孝烈碑) [碑] : 유천면 사곡리 101번지(垈)에 있는 비로, 사곡리 입구 우측에 효열각 안에 유존한다. 보문면 간방리 간실(澗室)에서 출생하여 1830년경 17세에 경주 최씨 문중에 시집온 진주인 강현랑(姜賢娘)이 19세에 과부가 되어 수절하였고, 80세인 시아버지 최근주(崔瑾柱)의 병환을 돌보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하였고, 눈먼 시부모를 업고 다녔으므로 그 정성이 지극하여 문중에서 세웠다. 비석은 월두형(月頭形)의 비신에 장방형의 비좌(碑座)가 있는 형태이다. 비신 전면에 ''''孝婦慶州崔瑾柱之配 孺人晋州姜氏善行碑'''', 좌측면에 ''''壬寅十月日"이라는 건비 연대가 음각되어 있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131cm, 폭 50cm, 두께 21.5cm이다. 비좌는 폭 84x54cm, 높이 3cm, 자경(字徑) 10x10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예천사곡리 효부비(醴泉沙谷里孝婦碑), 예천사곡리 효열각(孝烈閣), 비 [碑] : 유천면 사곡리 입구 우곡에 있는 비각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 건평 4평이다. 보문면 간방리 간실(澗室)에서 출생하여 1830년 경 17세에 경주 최씨 문중에 시집온 진주인 강현랑(姜賢娘)이 19세에 과부가 되어 수절하였고, 80세인 시아버지 최근주(崔瑾柱)의 병환을 돌보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하였고, 눈먼 시부모를 업고 다녔으므로 그 정성이 지극하여 문중에서 임인년(壬寅年) 10월에 세웠다.


  예천사곡리 효열각 [碑閣] : 유천면 사곡리(沙谷里) 사곡 입구에 있는 비각으로, 최 효자(崔孝子)와 그의 자부(子婦)인 열부 강씨(烈婦姜氏)의 정문(旌門)인데, 1963년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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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산택리 개성고씨열부비(開城高氏烈婦碑), 예천산택리(醴泉山澤里) 열부비, 비 [碑] : 용궁면 산택리에 있는 비로, 1942년에 울진 장씨(張氏)들이 장영철(張永哲)의 처 개성 고씨를 위하여 세웠다. 고씨는 더없이 외롭고 고통스러운 환경속에서도 끝까지 부도(婦道)에 어긋남이 없이 바르게 일생을 마쳤다. 고씨는 1864년(고종 1)에 매우 가난한 오요(五謠)의 무남독녀(無男獨女)로 태어나 13세 때 역시 가난한 장영철의 아내가 되었는데, 23세가 되자 남편은 임신 4개월이 되는 유복녀(遺腹女)를 남긴 채 별세했다. 의지할 이 없는 고씨의 고생은 딸을 출산한 후부터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고씨는 감당하기 힘들 온갖 쓰라림을 감수하면서 어엿이 외딸을 출가시켰다. 고씨는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할 일은 일단 마쳤지만, 홀로 살아가는 여인의 길은 여전히 험했다. 1946년 향년 83세로 일생을 마쳤다. 이 비석은 고씨가 운명하기 4년 전인 1942년에 외손 이경흠(外孫李景欽) 등이 세웠다.


  예천산택리 개성고씨열부비(醴泉山澤里 開城高氏烈婦碑) [碑] : 용궁면 산택리에 있는 비로, 울진인 장영철(張永哲)의 부인 개성 고씨(후손들이 북실할매라고 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1942년에 세웠다. 비문은 참봉 고영찬이 지었다.(龍宮鄕校誌 上卷 2005)


  예천산택리 열부비(醴泉山澤里烈婦碑), 비 [碑] : 용궁면 산택리 산 11-1번지에 있는 비로, 개성 고씨(高氏, 1864-1946)를 위해 1942년에 외손이 세웠다. 폭은 44cm, 비신(碑身)은 110cm이다. 개성 고씨는 고오요(高五搖)의 무남독녀(無男獨女)로 13세에 이 곳 마을 울진인 장영철(張永哲)에게 시집가서 23세 때 임신 4개월의 몸으로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러나 태중의 아기가 아들이기를 바라던 그는 유복녀을 낳았으나 가난한 살림에도 꾸김없이 키워 내어 시집보낸 뒤 외로이 살아가면서 덕과 열(烈)을 보였다. 그 일생은 눈물과 가시밭길의 일생이었으되 조금도 원망하거나 탓함이 없었고, 조용히 속으로 눈물을 삼키면서 83세의 짧지 않은 일생을 꿋꿋이 부덕(婦德)을 지키며 살아간 전형적 한국 여성의 본보기였다. 이 비는 고열부(高烈婦)의 생시(生時)인 1942년에 외손 이경흠(李景欽) 형제가 향내 유지들의 힘을 빌어 세웠다(효행열지 1984). →개성고씨 열부비


  예천산택리 열부비 [碑] : 용궁면 산택리 368번지 화미마을 노천에 있는 비로, 1942년에 세웠는데, 울진인 장영철(張永哲)의 부인 개성 고씨(高氏)의 열행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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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상월리 효자비(醴泉上月里孝子碑), 최진봉 효자비(崔鎭奉孝子碑), 비 [碑] : 지보면 상월리 동구(洞口) 우편 밭에 있는 비로, 1986년에 효자 최진봉(崔鎭奉)을 기념하여 최씨 문중(崔氏門中)에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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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선리 분성김씨효부각(盆城金氏孝婦閣), 비 [碑閣] : 용문면 선2리 222번지 한밭(大田)에 있는 비각으로, 경주인 정동엽(鄭東燁)의 아내인 분성(金海) 김씨를 위해 1928년 11월에 후손 정백문이 세웠다. 비명(碑銘)은 "효부정동엽처분성김씨지비(孝婦鄭東燁妻盆城金氏之碑)"이고, 비각은 건평 2평이다. 분성 김씨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늙은 시부모를 위하여 식미에 맞도록 떡을 해드리는 등 극진한 정성으로 효도하였다.


  예천선리 분성김씨 효부각(醴泉仙里 盆城金氏 孝婦閣) [碑閣] : 용문면 선리 한밭 마을 산기슭에 있는 효부각으로, 1928년에 건립하였다. 사방 1칸의 단각으로, 비각 내부에 1기의 비석이 유존한다.(醴泉郡誌 2005)


  예천선리 분성김씨 효부비(醴泉仙里 盆城金氏孝婦碑) [碑] : 용문면 선리 229번지(垈)에 있는 비로, ''''한밭'''' 마을 산기슭에 있다. 사방 1칸의 단각 비각 안에 있다. 비석은 자연석을 다듬어 비좌(碑座)를 만들고 그 위에 가첨석(加 石), 비신(碑身)이 있는 형태이다. 비에는 ''''孝婦鄭東燁妻盆城金氏之碑''''라 새겨져 있고, 비신 좌측에 ''''戊辰十一月日立''''이라 새겨져 있다. 가첨석의 크기는 폭 61cm, 높이 34cm, 두께 47.5cm이고, 비신의 크기는 폭 38.5cm, 높이 108cm, 두께 13.5cm이다. 비좌의 크기는 가로 66cm, 세로 54cm, 높이 10cm이며, 자경은 6.5x7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효부각(孝婦閣) [碑閣] : 용문면 선리(仙里) 한밭에 있는 비각으로, 경주인 정동엽(鄭東燁)의 아내인 분성 김(金)씨를 위해 그의 아들 정백문이 1928년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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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성평리 경주최씨효열각(慶州崔氏孝烈閣), 예천성평리 효열각(醴泉星坪里孝烈閣) [碑閣] : 유천면 성평리 451번지 덕달리(德達里)에 있는 비각으로, 1884년(고종 21) 5월에 경주 이씨(慶州李氏)들이 이장서(李章瑞)의 처 경주 최씨(慶州崔氏)를 위하여 목조와가로 세웠다. 비명(碑銘)은, "효열부 증 통정대부 사헌부 감찰 이장서 처 증 숙인 경주 최씨지려(孝烈婦贈通政大夫司憲府監察李章瑞妻贈淑人慶州崔氏之閭)"이다. 경주 최씨는 최명홍(崔命弘)의 딸로서 21세의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되어 독자를 양육하며 시부모(李隱) 섬기기에 지성을 다했다. 어느 날, 갑자기 시아버지가 중풍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좋은 약을 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정화수를 떠놓고 밤마다 기원을 드린 결과 하늘이 도왔는지 때아닌 뱀 두 마리와 거북이 한 마리가 마을 앞 냇물에 나타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을 잡아다가 정성껏 따려 드렸더니 병은 완쾌하여졌다. 또 성평리(星坪里) 앞개울에서 이은(李隱)의 세 며느리가 빨래를 하다가 맏이와 둘째는 먼저 귀가하고, 셋째인 최씨의 빨래터 위에 2척(尺)이 넘는 잉어가 뛰어올라와 그것으로 시아버지를 봉양하였고, 하루는 복숭아를 먹고 싶다는 시아버지의 청으로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다래끼를 메고 집을 나서 산으로 가던 중 덕고개(德峴)에서 복숭아를 찾아 봉양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를 위해 산신령이 내린 복숭아라고 한다. 그 후 그는 천수(天壽)를 다하고 절명(絶命)하던 날 자식을 불러 놓고 이르기를, "나는 하고 싶은 일을 다하고 간다. 너도 효(孝)를 다하라."라고 유언을 남기며 조용히 눈을 감으니, 이웃은 물론 향내 유림(鄕內儒林)이 그 효행을 감탄해 하고 관아(官衙)에 알려 조정에서 정려(旌閭)를 내리게 했다.


  예천성평리 경주최씨 정려비(醴泉星坪里 慶州崔氏 旌閭碑) [碑] : 유천면 성평리 451번지(林)에 있는 비로, 정려비각 안에 있다. 1884년(고종 21) 5월에 경주 이씨들이 이장서(李章瑞)의 처 경주 최씨를 위하여 세웠다. 비명은 ''''孝烈婦贈通政大夫司憲府監察李章瑞妻慶州崔氏之閭''''이고, 좌측면에 ''''光緖十年甲申四月日立''''의 건비 연대가 적혀있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92cm, 폭 35cm, 두께 14.5cm이다. 가첨석(加 石)의 크기는 폭 50cm, 높이 25cm, 두께 33cm이며, 비좌는 가로 80cm, 세로 40cm, 높이 10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예천성평리 효열각(孝烈閣), 최씨 효열각(崔氏孝烈閣) [碑閣] : 유천면 성평리(星坪里) 덕다리 입구 앞산 아래에 있는 비각으로, 경주인 이장서(李章瑞)와 그 부인 최(崔)씨의 효열을 기념하기 위해 1884년(고종 21)에 세웠다.


  예천성평리 효열각(孝烈閣) [傳說] : 유천면 성평리에 있는 비각으로, 성평리는 경주 이씨 집성촌이다. 경주 이씨 이은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셋째 아들이 이장서이며, 셋째 며느리는 경주 최씨이다. 셋째 며느리는 스물 한 살에 남편을 잃고 외아들을 기르면서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셨는데, 시아버지께서 중병으로 수 삼 년을 눕게 되자 매일 병간호를 하면서 영혐이 있는 약을 구해달라고 지성으로 하늘에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서들과 앞개울에 빨래를 하러 갔다가 두 동서가 먼저 집에 들어가고 효성이 지극한 셋째 며느리만 남아서 빨래를 계속하던 중 갑자기 2척이 넘는 잉어가 치마폭 안으로 올라오기에 잡아서 병으로 누워 계신 시아버지를 봉양하였고, 엄동설한에 복숭아가 먹고 싶다는 시아버지의 청을 들어드리기 위해 망태기를 메고 산으로 가던 중 덕고개에서 복숭아를 얻었으니,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를 위해 산신령이 내린 복숭아라 했다. 1884년 성균진사 이씨가 이를 임금께 고하여 어명으로 마을 입구에 효열각을 세우게 하여 정려되었으며, 지금도 그 단청이 선명하다.(醴泉新聞 200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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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송암리 3대충효정려각(醴泉松岩里 三代忠孝旌閭閣) [碑閣] : 용궁면 송암리 인암(印岩)마을 앞에 있는 각으로, 인동장씨 병자호란 충신 장립(張립), 장립의 아들 효자 계인(啓寅), 또 계인의 아들 효자 진한(晋漢)인 3대의 충효를 기리는 정려각이고, 실기(實記)는 1939년 4월 27일에 안동인 권상규(權相圭)가 지었다. "계인은 입(입)의 아들이라 병자호란을 만나... 아버지 입이 군병을 거느리고 쌍령에 이르러 오래지 않아 순국하니, 그 때 계인의 나이 겨우 12세라. 변을 듣고 달려가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유사(遺死)를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의복으로 초혼을 하고 돌아와 선산에 안장하고 그 곁에 여막을 하여 신석(晨夕)으로 눈비를 쓸고 하더니 제규(制규) 후에도 애모가 불애하여 신물(新物)이 있으면 반드시 묘소에 정성들여 올리더라. 후에 어떤 사람이 묘 부근에 근장(勤葬)을 하려고 하니 계인이 금하다 당하지 못하여 광중(壙中)에 투신하여 졸도하니 아들 진한이 지혈(脂血)을 주입하여 소생케 하고 마침 비조(飛鳥)가 인삼을 물어다주어 그 것을 전복(煎服)하고 겨우 3일 간 연명하였으나 끝내 세상을 떠나니 진한이... 예천으로 옮겨와서 세상을 마쳤으니 이 것이 할아버지와 아들과 손자의 충효 실적이라. 향리와 도에서 조정에 천문(薦聞)하여 1681년에 특히 계인을 위하여 작설지전(綽楔之典)을 갖게 하고, 1706년에 또 복호(復戶)를 하게 하고, 1734년에 3세 증작(贈爵)을 하여 할아버지 입으로 호조참판, 아들 계인으로 이조참의, 손자 진한으로 좌승지를 추증하니 그 어포(於褒)에 융성함 환연(煥然)하더라..."


  예천송암리 장계인정효각(張啓寅旌孝閣) [碑閣] : 용궁면 송암리 산 14번지 대가산록(大駕山麓)에 있는 목조와가(木造瓦家) 비각으로, 효자 장계인(孝子 張啓寅, 1625-1709)을 위해 1637년(인조 15)에 국가에서 세웠다. 비명(碑銘)은, "효자 증 통정대부 이조 참의 인동 장공 휘 계인지 려(孝子贈通政大夫吏曹參議仁同張公諱啓寅之閭)"이다.


  장계인 효자비(張啓寅 孝子碑) [碑] : 용궁면 송암리 산14번지(林)에 있는 비로, ''''인바우'''' 앞 길가 산록에 있다. 조선 인조 때에 정려되어 1700년 후손들이 세운 비각 안에 있다. 비석은 월두형(月頭形)의 비신(碑身)에 장방형의 비좌(碑座)가 있는 형태이다. 비신 전면에 ''''孝子贈通政大夫吏曹參議仁同張公諱啓寅之閭'''', 좌측면에 ''''崇禎百四十年丁亥立'''', 우측면에 ''''戊戌仲春七代孫通仕郞行義??''''라 음각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90cm, 폭 43-47cm, 두께 13cm이다. 비좌는 폭 86x50cm, 높이 33cm, 자경(字徑) 8x8cm이다. 현판 가로 81x세로 28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예천송암리 장계인 효자비(醴泉松岩里 張啓寅 孝子碑) [碑] : 용궁면 송암리 산14번지(林)에 있는 비로, ''''인바우'''' 앞 길가 산록에 있다. 조선 인조 때에 정려되어 1700년 후손들이 세운 비각 안에 있다. 비석은 월두형(月頭形)의 비신(碑身)에 장방형의 비좌(碑座)가 있는 형태이다. 비신 전면에 ''''孝子贈通政大夫吏曹參議仁同張公諱啓寅之閭'''', 좌측면에 ''''崇禎百四十年丁亥立'''', 우측면에 ''''戊戌仲春七代孫通仕郞行義??''''라 음각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90cm, 폭 43-47cm, 두께 13cm이다. 비좌는 폭 86x50cm, 높이 33cm, 자경(字徑) 8x8cm이다. 현판 가로 81x세로 28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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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 출신 김수현, 중소기업진흥공단 강원본부장...축하합니다.


  김수현(김수현 中小企業振興公團 江原本部長) [記事] :


  김수현(51) 중소기업진흥공단 강원지역본부장은 “올해 도내 중소기업을 위해 쓸 수 있는 예산이 430억 원으로 큰 폭으로 늘어난 만큼 수출업체와 지방특화산업 업체에 중점적으로 자금을 지원해 나가겠다”고 강조.


  경북 예천 출신. 대일고와 안동대 경영학과, 서강대 경영대학원 졸업,


  1985년 입사. 경영지도실, 자금지원팀, 벤처창업팀, 조사연구실 등을 거쳐 기금운용실장과 경영혁신실장 등을 역임.


  가족은 부인 권광희 씨와 1남 1녀. 취미는 등산.


  (江原日報 2009-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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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358


  용궁향교(儒敎聖賢 遺德과 가르침 기려) [記事] : 상주를 비롯한 경북지역 곳곳에서 2월 첫 번째 丁일인 2005년 3월 14일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들의 유덕을 기리는 춘계 석전대제가 봉행된다. 석전대제는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에 지내는 제사를 말하는 것으로 석전은 앞선 성인들과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기 위해 올리던 제사로 매년 봄, 가을에 올렸는데 공자를 중심으로 공자의 제자와 우리 나라 명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그의 학문을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석전대제라 한다. 예천군은 2005년 3월 14일 오전 10시 용궁향교 대성전에서 자치단체장을 비롯한 유관 기관단체장, 유림, 학생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춘계 석전대제를 올린다. 용궁향교에서는 공문 5성 위를 비롯한 송 4현 및 국내 18현 등 27위를 봉향하고 있으며, 매년 전통 방법에 의해 대제를 지내고 있어 그 동안 일반 주민들과 청소년들이 쉽게 접할 수 없었고 내용도 어려워 전통이 단절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특히 금년에 새로 임명된 안종건 전교는 향교 운영을 혁신하기 위해 향교운영방안을 새롭게 설정하고 6부장제도를 도입해 향교관리담당제를 신설하고 전교가 직접 향교에 상주해 향교를 연중 개방하는 등 내방자에게 문묘배알 인도 및 향교설명 등 친절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금년 대제는 제례의 차례를 알리는 홀기가 한문으로 돼있던 것을 한글 해석문을 작성하는 한편 향교운영지침과 윤리선언문을 새로 마련해 학생들을 참여시켜 청소년들에게 유교사상을 전수하고 지역 주민들도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할 계획이다.(정안진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慶北每日新聞 2005-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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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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