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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1834) : 예천 충효 33(附 필자가 참여한 예천통명농요 대구 MBC 프로그램이 수상...축하합니다/예천동부초 권현정, 양궁 전국대회 1위...축하합니다/풍양면 흔효2리 출신 유회종, 박사학위 받아...축하합니다/예천 출신 장영기, 새마을지도자 경북협의회장 재추대...축하합니다/예천읍 출신 김상현, 번역서 베스트셀러로...축하합니다/예천방문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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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종산리 안동권씨효부각(醴泉宗山里孝婦閣), 비(碑) [碑] : 호명면 종산리 사월(沙月)에 있는 비각으로, 이진헌(李鎭憲)의 아내 안동 권씨를 위해 세웠다. 비명(碑銘)은, "효부 사인 진성 이진헌 처 안동권씨지 려(孝婦士人眞城李鎭憲妻安東權氏之閭)"인데, 현재 비각은 없고 비석만 노천 밭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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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종산리 평산신씨절부각(平山申氏節婦閣), 예천종산리 절부각(醴泉宗山里節婦閣), 절부각과 비둘기묘(墓) [碑閣] : 호명면 종산리 330번지 고미(古美) 뒷산 너머 재사(齋舍) 건너편 산 밑 사월(沙月)에 남서향으로 세워진 목조와가 비각(木造瓦家碑閣)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이다. 진성인 이복(李宓)의 아내 평산 신씨를 위하여 세웠다. 비명(碑銘)은, "종사랑 진성 이공복 처 절부 평산 신씨지 려(從仕郞眞城李公宓妻節婦平山申氏之閭)"이다. 신씨는 단란한 신혼의 꿈도 잠깐 뿐이었고, 24세 때 남편이 죽게 되었다. 그는 서러움과 슬픔을 평생 동안 간직하여 항상 초상(初喪) 때처럼 흰옷을 입고 육식(肉食)을 하지 아니하여 채소 등 거친 음식으로 연명하다가 일생을 마치게 되어 이 갸륵한 열행(烈行)이 나라에 알려져 1571년(선조 4)에 현 위치에서 남쪽 건너편에 정려(旌閭)되었던 것을 1811년(순조 11)에 중수하였다. 그 후 1949년 2월 6일에 그 후손들이 다시 현 위치에 절부각(節婦閣)을 세웠는데, 현재 비석은 없고 비각만 남아 있다. 이 비각 옆에는 비둘기 묘가 있다.
[傳說] : 이조 성종 때 퇴계 이황(退溪李滉)의 중형(仲兄)인 온계공(溫溪公)이 중국으로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이 때 아들 이복(李宓)이 따라 갔다. 이복(李宓)의 부인 평산 신씨가 어느 날, 베틀에 앉아 배를 짜는데, 난데없이 비둘기 한 마리가 베틀의 용두(龍頭)머리에 앉아서 머리를 두 번 까딱이더니,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에 부인은 불길한 징조임을 짐작하고 고심하고 있는데, 중국에서 돌아오던 이복이 병환으로 죽었다는 부음(訃音)이 왔다. 조정에도 비둘기 사실이 전해져서, 어명(御命)으로 이르기를, "이복과 비둘기를 명당 자리에 성대하게 장례 치르라."라고 하여 국풍(國風)이 내려와 사월(沙月) 땅의 지세를 짚어서 보니, 그 곳이 ''''무자손 백세향지(無子孫百世享地)''''였다. 이 곳에 이복과 비둘기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비석을 세웠다. 지금도 음력 10월에 이 비둘기 묘에도 시사(時祠)를 지내고 있다. 이 때부터 진성 이씨(眞城李氏)들은 비둘기를 잡아먹지 않는다고 한다.(孝烈行誌 1984)
예천종산리 평산신씨 정려현판(醴泉宗山里 平山申氏 旌閭懸板) [彫刻] : 호명면 종산리 601번지(田)에 있는 현판으로, ''''고미(古美)'''' 마을 뒷산 재사 건너편 산 밑에 남서향으로 세워진 목조와가 정려각 안에 유존한다. 진성인 이복(李宓)의 아내 평산 신씨의 열행(烈行)을 기리기 위해 1571년(선조 4)에 현 위치의 남쪽 건너편에 정려되었던 것을 1811년(순조 11)에 중수하였다. 신씨는 단란한 신혼의 꿈도 잠깐뿐이었고, 24세 때 남편이 죽게 되었다. 그는 서러움과 슬픔을 평생동안 간직하여 항상 초상(初喪) 때처럼 흰옷을 입고 육식을 하지 아니하고 채소 등 거친 음시으로 연명하다가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이 갸륵한 열행(烈行)이 나라에 알려져 1571년(선조 4)에 현 위치의 남쪽 건너편에 정려되었던 것을 1811년(순조 11)에 중수하였다. 그 후 1949년 2월 6일에 그 후손들이 다시 현 위치에 절부각을 세웠다. 현재 비석은 없고 비각만 남아 있다. 정려 현판에는 ''''從仕郞眞城李宓妻郞婦平山申氏之閭''''가 음각 주서(朱書)되어 있다. 현판의 크기는 가로 147cm, 세로 23cm, 두께 3cm이고, 자경(字徑)은 5x6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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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직산리 경주최씨정열각(慶州崔氏旌烈閣) [碑閣] : 호명면 직산리 피실에 있는 비각으로, 1937년에 반남 박씨들이 박우양(朴遇陽)의 처를 위하여 세웠다.
예천직산리 경주최씨 열부비(醴泉稷山里 慶州崔氏 烈婦碑) [碑] : 호명면 직산리 202번지(畓)에 있는 정려각 내에 유존하는 비로, 반남인 박우양(朴遇陽)이 죽자, 3일만에 그의 아내 경주 최씨가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했다. 1937년 10월에 향내 유림들이 정려했다. 비석은 월두형(月頭形)의 비신(碑身)과 장방형의 비좌(碑座)로 이루어진 형태이다. 비신 전면에 ''''烈婦朴遇陽妻慶州崔氏之碑''''의 비명과 ''''從曾孫贊周九歲謹書''''라고 음각되어 있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115cm, 폭 40cm, 두께 16cm이다. 비좌의 크기는 가로 64cm, 세로 38cm, 높이 5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예천직산리 정열각(醴泉稷山里旌烈閣), 비(碑) [碑閣] : 호명면직산1리 170번지 피실(稷谷)에 열부 경주 최씨(烈婦慶州崔氏)를 위해 1937년 10월에 향유(鄕儒)가 정려하여 세운 목조 와가(木造瓦家)로, 비명(碑銘)은, "열부 박우양처 경주 최씨지 비(烈婦朴遇陽妻慶州崔氏之碑)"(陰刻)이다. 경주 최씨는 열행(烈行) 이 남달라 남편(男便, 반남인 朴遇陽) 섬기기와 시부모 봉양에 지성을 다하여 오던 중 갑자기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예법에 따라 3일장(三日葬)을 치른 뒤 이 세상에서 못다한 정(情)을 저 세상에서 나누고자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고 말았다. 향내(鄕內)의 유림(儒林)들은 그 열행을 추모하기 위해 1937년 후손들을 독려하여 정열각 (旌烈閣)을 세워서 부도(婦道)를 영원히 기리도록 했는데, 종증손(從曾孫)인 박찬주(朴贊周)가 비명을 쓰고 박준양(朴濬陽)이 기문을 썼다.(孝烈行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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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천향리 남윤선효자비(南胤先孝子碑), 남효자비(南孝子碑), 예천천향리 효자비(醴泉泉香里孝子碑), 비 [碑] : 감천면 천향리 산 3번지 군도(郡道) 364호 변 효자문(孝子門)거리 노천에 있는 비로, 조선 철종 때의 효자 영양인 남윤선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웠다. 비신(碑身) 높이 100cm, 폭(幅) 40cm이다. 남윤선은 홀로 계시는 아버지를 정성껏 봉양하여 의식은 물론 항상 아버지의 거동에 불편이 없도록 정성을 다했다. 90 고령(高齡)의 아버지가 병석에서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딸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딸기를 구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니 지성이 하늘에 통했는지 눈이 쌓인 밭둑에 싱싱한 딸기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 사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지금은 비신(碑身) 만이 외로이 서 있다. 비명(碑銘)은 "효자 남윤선지 비(孝子南胤先之碑)"이다.(孝烈行誌 1984)
남윤선 효자비(南胤先 孝子碑) [碑] : 감천면 천향리 산1번지(林) 도로변 ''''효자문(孝子門)'''' 거리에 있는 영양인 남윤선의 비로, 1895년 경 세웠다. 비신(碑身)은 월두형(月頭形)으로, 비신에는 ''''孝子參奉南胤先之閭''''가 각자(刻字)되어 있다. 비신의 높이는 91cm, 폭은 38cm 두께는 15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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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초적리 최덕수효자각과 함평노씨효열각(崔德秀孝子閣과 咸平魯氏孝烈閣), 예천초적리 효자각(醴泉草笛里孝子閣)과 효열각(孝烈閣) [碑閣] : 유천면 초적리 산 7번지 마을 앞에 있는 목조와가(木造瓦家) 비각으로, 효자비(孝子碑)와 효열비(孝烈碑)가 같은 건물 안에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 건평 3평이다. 비명(碑銘)은, "효자 병절교위 행부사과 최덕수지 비(孝子秉節校尉行副司果崔德秀之碑)"이다. 1928년에 경주인 초려 최덕수(草廬崔德秀, 1732-1772)의 효행과 그의 종현손부(從玄孫婦) 함평 노씨(咸平魯氏)의 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1928년 3월과 1942년에 가각 세웠는데, 이 비각은 1942년에 함평 노씨(咸平魯氏)를 정려(旌閭)할 때 중수하였다. 원래 풋조골 아랫마을에 있었으나, 1975년 2월에 공군부대(空軍部隊) 부지로 편입됨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겼다. 군수 여산인 송문헌(郡守勵山人宋文憲), 제학 안동인 김종한(提學安東人金宗漢)이 기문(記文)을 찬(撰)했고, 항일의사 한양리(抗日義士韓良履)의 서(書)가 있다.(嶠南誌 1937, 醴泉郡誌 1939) →함평노씨효열각
최덕수 효자비(崔德秀 孝子碑) [碑] : 유천면 초적리 산26번지(林)에 있는 비로, 원래 ''''풋조골'''' 마을에 있었으나, 1975년 2월에 현 위치로 옮겼다. 비석은 가첨석(加 石), 비신(碑身), 비좌(碑座)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신 전면에 ''''孝子秉節校尉行副司果崔德秀之碑''''가 각자(刻字)되어 있고, 좌측 하단에 ''''戊辰三月日"의 건비 연대가 새겨져 있다. 가첨석의 크기는 폭 64cm, 높이 25cm, 두께 46cm이고, 비신의 크기는 폭 44cm, 높이 137cm, 두께 19cm이고, 비좌의 크기는 가로 72cm, 세로 48cm, 높이 10cm이며, 자경(字徑) 6.5x8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예천초적리 최덕수 효자비(醴泉草笛里 崔德秀 孝子碑) [碑] : 유천면 초적리 산26번지(林)에 있는 비로, 원래 ''''풋조골'''' 마을에 있었으나, 1975년 2월에 현 위치로 옮겼다. 비석은 가첨석(加 石), 비신(碑身), 비좌(碑座)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신 전면에 ''''孝子秉節校尉行副司果崔德秀之碑''''가 각자(刻字)되어 있고, 좌측 하단에 ''''戊辰三月日"의 건비 연대가 새겨져 있다. 가첨석의 크기는 폭 64cm, 높이 25cm, 두께 46cm이고, 비신의 크기는 폭 44cm, 높이 137cm, 두께 19cm이고, 비좌의 크기는 가로 72cm, 세로 48cm, 높이 10cm이며, 자경(字徑) 6.5x8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예천초적리 최덕수 효자비(醴泉草笛里 崔德秀 孝子碑) : 유천면 초적리 산26번지 마을 앞에 있는 목조와과(木造瓦家) 비각 안에 유존한다. 경주인 초려(草廬) 최덕수의 효행과 그의 종현손부(從玄孫婦) 함평노씨(咸平魯氏)의 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1928년 3월과 1942년에 세웠는데, 이 비각은 1942년에 함평 노씨를 정려(旌閭)할 때 중수하였다. 원래 풋조골 마을에 있었으나, 1975년 2월에 공군부대 부지로 편입됨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겼다. 군수 여산인(廬山人) 송문헌(宋文憲), 제학 안동인 김종한(金宗漢)이 기문을 찬했고, 항일의사 한양리(韓良履)의 서(書)가 있다. 비석은 가첨석(加 石), 비신(碑身), 비좌(碑座)로 구성되어져 있다. 비신 전면에 "孝子秉節校尉行副司果 崔德秀之碑"가 각자되어 있고, 좌측 하단에 "戊辰三月日"의 건비 연대가 새겨져 있다. 가첨석의 크기는 폭 64cm, 높이 25cm, 두께 46cm이고, 비신의 크기는 폭 44cm, 높이 137cm, 두께 19cm이고, 비좌의 크기는 가로 72cm, 세로 48cm, 높이 10cm이며, 자경(字徑) 6.5x8cm이다.
예천초적리 함평노씨 효열부비(醴泉草笛里 咸平魯氏 孝烈婦碑) [碑] : 유천면 초적리 산26번지(林)에 있는 비로, 목조와가 비각 안에 최덕수효자비와 나란히 서있다. 비석은 방형의 비좌 위에 귀접이형의 비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의 전면에 ''''孝烈婦崔元基妻咸平魯氏之碑''''가 각자되어 있고, 좌측 하단에 ''''戊辰三月日立''''의 건비 연대가 새겨져 있다. 비신의 크기는 폭 40cm, 높이 135cm, 두께 21cm이고, 비좌의 크기는 가로 87cm, 세로 67cm, 높이 8cm이며, 자경 7x9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예천초적리 효자각과 효열각(孝子閣과 孝烈閣) [碑閣} : 유천면 초적리(草笛里) 풋적골 입구 앞산에 있는 효자 최덕수(孝子崔德秀, 1732-1772)와 열부 함평 노씨(烈婦咸平魯氏, 1886-1952)의 정문이다. 원래 효자각은 1928년, 효열각은 1942년에 풋적골 입구 길 옆에 세웠는데, 비행장 설치로 1975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예천초적리 함평노씨효열각(咸平魯氏孝烈閣) [碑閣] : 유천면 초적리 산 7번지 마을 앞에 있는 목조와가 비각(木造瓦家碑閣)으로, 1942년에 세웠는데, 1928년에 세운 효자비(孝子碑)와 같은 건물 안에 있다. 노씨(魯氏, 1886-1952)는 최덕수(崔德秀)의 종현손부(從玄孫婦)로, 최원기(崔元基)의 아내이다. 18세에 남편이 병에 걸리더니 정성껏 간호했으나 보람도 없이 사거(死去)하자 평생 남편의 묘 앞에 가서 호곡(號哭)하는 것을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는 한편 시부모의 식탁에는 언제나 고기 반찬이 오르도록 애를 썼고, 병환으로 눕게 되었을 때는 자신의 식사를 잊고 50리 길을 다니면서 약을 구해 시탕(侍湯)했을 뿐더러 시부모가 별세하니 남편 묘 앞에서와 다름없이 매일 묘 앞에서 호곡(號哭)하면서 진심으로 추모하였고, 평생을 소복(素服)과 소식(素食)으로 보냈다.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과부가 된 후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남편에 대한 부도(婦道)와 시부모에의 효도를 다한 노씨는 향토의 유림(儒林)과 군(郡) 당국의 천거로 정려(旌閭)되었는데, 비명(碑銘)에는, "효열부 최원기 처 함평 노씨지 비(孝烈婦崔元基妻咸平魯氏之碑)"라 되어 있다. 1975년 2월에 공군부대 부지로 편입됨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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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풍정리 평해황씨효사각(平海黃氏孝思閣), 예천풍정리 효사각(醴泉楓井里孝思閣), 비(碑) [旌閭閣] : 개포면 풍정리 298번지 풍정(楓井)마을 앞 동구(洞口)에 있는 목조와가 비각(木造瓦家碑閣)으로, 성주인 이정화(李挺華, 1862-1895)의 아내인 평해 황씨(平海黃氏, 1856-1936, 正履의 딸)가 아들 형제를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왔으나 갑자기 가운(家運)이 기울어지고 시아버지(李增日, 1814-1899)와 남편이 한꺼번에 같은 병(中風)으로 앓아 눕자, 두 아들을 거느리고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섬겼기에 사람들이 ''''출천지대효(出天地大孝)''''라고 우러러 보았다. 시아버지의 식성(食性)을 알고 있는 황씨는 스스로 술을 만들어 바치고, 고기를 좁쌀같이 잘게 썰어서 이없는 시아버지께 봉양해 드렸다. 시아버지가 노망하여 자부(子婦)가 시집갈까 두려워하여 가끔 ''''시집 갔지?''''라고 하면, ''''예, 고년 시집 갔니더''''라고 하면서 불평적인 대구(對句) 한 번 하는 일이 없었다. 농사도 스스로 하였다. 논둑을 만들고, 재를 뒤비고, 심지어 똥장구까지 지고서 하루 종일 들일을 하였다. 이러한 소문은 동리 뿐 아니라 이웃 동리로 점차 퍼져 나갔다. 어떤 때는 도적들이 침입해 왔으나 이 효부집 만은 그 정성을 알고서 근접치를 않았다고 한다. 황씨가 죽은 뒤, 후손난수(蘭秀)와 사우(士友)들이 합의하여 그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1943년 3월에 비각을 세웠다. 비명(碑銘)은, "효부 성주 이정화 처 유인 황씨지 비 계미(1943) 3월 일(孝婦星州李挺華妻孺人黃氏之碑 癸未 三月 日"이다.
예천풍정리 평해 황씨 효부비(平海 黃氏 孝婦碑) [碑] : 개포면 풍정리 266번지(田)에 있는 비로, ''''풍정'''' 마을 앞 동구에 있는 목조와가 비각 안에 있다. 성주인 이정화(李挺華)의 아내인 평해 황씨(1856-1936) 정리(正履)의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1942년 3월에 비각을 세웠다. 비석은 비신(碑身)과 비좌(碑座)로 구분되며, 비신은 월두형(月頭形)으로 비신 전면에 ''''孝婦星州李挺華妻孺人平海黃氏之碑''''가 음각되어 있다. 비신의 크기는 폭 44.5cm, 높이 133cm, 두께 17.5cm이고, 비좌의 크기는 가로 77cm, 세로 52cm, 높이 10cm, 자경(字徑) 10x10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예천풍정리 평해황씨 효부비(醴泉楓井里 平海黃氏 孝婦碑) [碑] : 개포면 풍정리 266번지(田)에 있는 비로, ''''풍정'''' 마을 앞 동구에 있는 목조와가 비각 안에 있다. 성주인 이정화(李挺華)의 아내인 평해 황씨(1856-1936) 정리(正履)가 아들 형제를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왔으나 갑자기 가운이 기울어지고 시아버지 이증일(李增日)과 남편이 한꺼번에 같은 병으로 앓아눕자, 두 아들을 거느리고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섬겼기에 사람들이 출천지대효(出天地大孝)라고 우러러 보았다. 시아버지의 식성을 알고 있는 황씨는 스스로 술을 만들어 바치고, 고기를 좁쌀같이 잘게 썰어서 이없는 시아버지께 봉양해 드렸다. 황씨가 죽은 뒤, 후손 난수(蘭秀)와 사우(士友)들이 합의하여 그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1943년 3월에 비각을 세웠다. 비석은 비신(碑身)과 비좌(碑座)로 구분되며, 비신은 월두형(月頭形)으로 비신 전면에 ''''孝婦星州李挺華妻孺人平海黃氏之碑''''가 음각되어 있다. 비신의 크기는 폭 44.5cm, 높이 133cm, 두께 17.5cm이고, 비좌의 크기는 가로 77cm, 세로 52cm, 높이 10cm, 자경(字徑) 10x10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예천풍정리 평해황씨 효사각(醴泉楓井里 平海黃氏孝思閣) [碑閣] : 개포면 풍정리 풍정(楓井)마을 입구에 있는 비각으로, 성주인 이정화(李挺華)의 부인 평해 황씨의 효와 열을 기리기 위해 1943년 후손들이 세웠다. 비에는 ''''孝婦星州李挺華妻孺人黃氏之碑''''라 했다.(龍宮鄕校誌 上卷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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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하금곡리 함양박씨열부각(咸陽朴氏烈婦閣), 예천하금곡리 열부각(醴泉下金谷里烈婦閣), 열부각 [碑閣] : 용문면 하금곡1리 504번지 버들밭(柳田) 여각(閭閣) 마을 앞에 있는 비각으로, 예천인 권국주(權國柱, 1597-1657)의 아내 함양 박씨를 위하여 1706년(숙종 32) 예천 권씨들이 원래 하금곡리 용두 주막(龍頭酒幕)거리에 세웠는데, 1869년(철종 11)에 후손들이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1969년에 중수하였다. 박씨(1601-1683)는 남편이 죽자 3년 간 짚으로 만든 치마를 입고, 옷을 빨아 입지 않고 평생 육식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시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므로 안동도호부사 이만원(安東都護府使李萬元)이 이를 기리며 비문을 찬하였다. 비명(碑銘)은, "열부 처사 예천 권국주 처 유인 함양 박씨지 려(烈婦處士醴泉權國柱妻孺人咸陽朴氏之閭)"이다.
예천하금곡리 함양박씨 열부비(醴泉下金谷里 咸陽朴氏 烈婦碑) [碑] : 용문면 하금곡리 524-1번지(畓)에 있는 비로, 열부비각 안에 있다. 비석은 월두형(月頭形)의 비신(碑身)과 연화문이 장식된 비좌(碑座)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 전면에 ''''烈婦處士醴泉權國柱妻孺人咸陽朴氏之閭''''라 새겨져 있고, 비신 배면에 ''''庚申月日移閭立碑...''''이라 음각되어 있다. 비신의 크기는 폭 53cm, 높이 125cm, 두께 19cm이고, 비좌의 크기는 가로 97cm, 세로 60cm, 높이 19cm, 자경(字徑) 7x7.5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예천하금곡리 함양박씨 열부비(醴泉下金谷里 咸陽朴氏 烈婦碑) [碑] : 용문면 하금곡리 524-1번지(畓)에 있는 비로, 열부비각 안에 있다. 비석은 월두형(月頭形)의 비신(碑身)과 연화문이 장식된 비좌(碑座)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 전면에 ''''烈婦處士醴泉權國柱妻孺人咸陽朴氏之閭''''라 새겨져 있고, 비신 배면에 ''''庚申月日移閭立碑...''''이라 음각되어 있다. 비신의 크기는 폭 53cm, 높이 125cm, 두께 19cm이고, 비좌의 크기는 가로 97cm, 세로 60cm, 높이 19cm, 자경(字徑) 7x7.5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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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화지리 윤필경삼숙질효우각(尹弼敬三叔姪孝友閣), 예천화지리 효우각(醴泉花枝里孝友閣) [碑閣] : 유천면 화지1리 50번지 동구(洞口)에 있는 목조와가 비각(木造瓦家碑閣)으로, 효자 윤필경(尹弼敬, 1810-1855), 큰조카 치각(致珏, 1822-1855), 둘째 조카 치락(致樂, 1833-1855) 등 삼숙질(三叔姪)의 효와 의(義)를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정려(旌閭)하여 1867년(고종 4)에 파평 윤씨들이 세웠다. 비명(碑銘)은 "효우비 증 통훈대부 이조 좌랑 파평 윤공필경 장종자 치각 차종자 치락(孝友碑贈通訓大夫吏曹佐郞坡平尹公弼敬長從子致珏次從子致樂)"이다. 윤필경은 화지리 사람으로 자는 형중(衡中), 호는 신재(信齋)인데, 천부적으로 효우(孝友)가 지극하더니 부모가 병상에 들자, 하늘에 대신 죽기를 빌었으며, 정성껏 봉양하였다. 1855년(철종 5) 음력 7월 3일 폭우가 쏟아져 형과 두 조카와 함께 논물을 보러가던 중 제방이 터져 형이 갑자기 물에 떠내려가자 뛰어들어 형을 언덕까지 구해 놓고 익사했다. 이 때 큰조카 윤치각(尹致珏, 初名 達三, 字敬三)이 3촌을 건지려다 실패, 둘째 조카 윤치락(尹致樂, 字敬七)도 실패하여 숙질 3명이 모두 익사했다. 그리하여 묘지를 화지리 앞에 있는 가산(佳山)에 썼는데, 이 일을 임금이 듣고 1867년(고종 4)에 두 조카와 더불어 모두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증직(贈職)하고 정려하였다. 1977년 3월에 보수하였다.(醴泉郡誌 1939, 嶠南誌 1937, 醴泉新聞)
예천화지리 효우비(醴泉花枝里 孝友碑) [碑] : 유천면 화지리 49-2번지에 있는 비로, 느티나무 옆에 있는 효우비각 안에 유존한다. 비석을 장방형의 비좌(碑座) 위에 가첨석(加 石), 비신(碑身)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비신 전면에 ''''孝友碑'''', ''''贈通訓大夫吏曹佐郞坡平尹公弼敬''''이라 새겨져 있고, 좌측면에 ''''丁卯三月日立''''이라는 건비 연대가 새겨져 있다. 가첨석의 크기는 폭 82cm, 높이 33cm, 두께 52cm이고, 비신의 크기는 폭 43.5cm, 높이 125cm, 두께 19.5cm이고, 비좌의 크기는 가로 75cm, 세로 65cm, 높이 5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예천화지리 효우비(醴泉花枝里 孝友碑) [碑] : 유천면 화지리 49-2번지에 있는 비로, 느티나무 옆에 있는 효우비각 안에 유존한다. 파평인 윤필경(尹弼敬)과 그의 조카 윤치각(尹致珏), 윤치락(尹致樂)을 위해 1867년(고종 4)에 세웠다. 비석은 장방형의 비좌(碑座) 위에 가첨석(加 石), 비신(碑身)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비신 전면에 ''''孝友碑'''', ''''贈通訓大夫吏曹佐郞坡平尹公弼敬''''이라 새겨져 있고, 좌측면에 ''''丁卯三月日立''''이라는 건비 연대가 새겨져 있다. 가첨석의 크기는 폭 82cm, 높이 33cm, 두께 52cm이고, 비신의 크기는 폭 43.5cm, 높이 125cm, 두께 19.5cm이고, 비좌의 크기는 가로 75cm, 세로 65cm, 높이 5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예천화지리 효우각(孝友閣) [碑閣] : 유천면 화지리(花枝里) 느티나무 밑에 있는 정문(旌門)으로, 파평인 윤필경(尹弼敬, 1810-1855)과 그의 조카 윤치각(尹致珏), 윤치락(尹致樂)을 위해 1867년(고종 4)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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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황지리 예천권씨효열각(醴泉權氏孝烈閣), 예천황지리 효열각(醴泉黃池里 孝烈閣), 양양권씨효열각(襄陽權氏孝烈閣) [碑閣] : 호명면 황지리 639번지 논실 입구에 있는 목조와가(木造瓦家) 비각으로, 비명(碑銘)은 "효열부 양양 권씨 정려비(孝烈婦襄陽權氏旌閭碑)"이다. 경주인 김대교(金大敎)의 아내인 예천(襄陽) 권씨(1910-1960, 龍門面 下金谷里人)의 효열을 위하여 1964년 2월에 후손인 경주 김씨들이 세웠다. 김대교가 외동으로서 일제 때 일본군으로 가서 전사(1927)하자 그의 아버지 김두삼(金斗三)이 가문이 끊어졌음을 한탄하여 방문을 닫고 식사를 하지 않았다. 이 때 남편을 잃은 권씨는 슬피 울면서도 시아버지께, "식사하고 잠들기 전에는 결코 자신도 먹고 잠잘 수 없다."하며 방 밖에서 며칠을 움직이지 않았으니, 시아버지는 그 정성에 못이겨 방문을 열고 식사를 했다. 그 후 권씨는 가난한 살림을 맡아서 온갖 고생을 겪었으나 그 지극한 효성은 한결같았기에 1964년 2월 김두삼(金斗三)의 사위인 신홍창(申洪昌)이 효열각을 지었고, 청주인 정상열(鄭尙烈)이 행적을 찬했다.
양양권씨 효열각(襄陽權氏 孝烈閣) [碑閣] : 경주인 김두삼(金斗三)의 자부이고 김대교(金大敎)의 부인인 예천 권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1964년에 후손들이 세웠다.(醴泉郡誌 1988)
예천황지리 효열각 [碑閣] : 호명면 황지리(黃池里) 논실 동구(洞口)에 있는 비각으로, 경주인 김두삼(金斗三)의 아내 예천 권(權)씨의 효열을 기념하여 세웠다. 비명(碑銘)은 <효열부 양양권씨 정려비(孝烈婦襄陽權氏旌閭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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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흔효리 권광윤효자각(權光潤孝子閣) [碑閣] : 풍양면 흔효2리 59번지 효동 마을(孝洞村) 동북쪽 약 500m 떨어진 불상골(佛像谷)에 있는 목조아연가(木造亞鉛家) 비각으로, 효종 때 표창된 안동인 권광윤(1603-1656) 효자를 기리기 위해 감사(監司) 홍만조(洪萬朝)가 세웠다. 비명(碑銘)은, "효자 학생 권광윤지 비(孝子學生權光潤之碑)"이다. 지금은 비문이 마모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朝鮮 輿勝覽 1927)
권광윤 효자비(權光潤 孝子碑) [碑] : 풍양면 흔효리 119-1번지(畓)에 있는효종 때 표창된 권광윤의 효자비로, ''''흔전'''' 마을 입구 ''''효자비들''''에 소재하는 효가비각 내에 유존한다. 1658년에 건비하였고, 1731년에 재건하였다. 비는 월두형(月頭形) 비신과 뒷면을 제외한 전면에 고사리 문양과 가하학적인 문양이 베풀어진 비좌(碑座)가 있는 형식이다. 비신 전면 중앙에 ''''孝子學生權光潤之閭''''가 새겨져 있고, 좌측면에는 ''''擁正辛亥五月日改竪''''가 각자되어 있다. 비좌의 크기는 높이 45cm, 폭 115cm이고, 비신의 크기는 높이 63cm, 폭 31-37cm, 두께 13cm이다. 자경(字徑)은 6x6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권광윤 효자비(權光潤 孝子碑) [碑] : 풍양면 흔효리 효동(孝洞) 불상골에 있는 비로, 권광윤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효종 때에 감사 홍만조(洪萬朝)가 세웠고, ''''孝子學生權光潤之碑''''라고 했다. 1731년 5월에 고쳐 세웠다. 정려비문은, "...자는 경수(景秀), 성은 안동 권인데... 고(考)의 휘(諱)는 여의(汝義)인데 창령 조(曺)씨 응경(應慶)의 따님과 혼인하여 1663년 3월 8일에 공을 낳으셨다.... 나이 열일곱 살에 아버지의 환후로 의원을 찾아다니다가 쑤에 빠져 가지 못하고 울고 있었는데, 스님이 지나다가 그 연유를 물었다. 스님은 손가락 한 쪽을 끊어서 피를 마시게 하면 잘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곧 스님께 절하고 집에 돌아와서 왼손가락을 끊고 나는 피를 두세 방울 약에 타서 아버지에게 드리어 병환이 완치되었다... 3년의 복을 입고... 어머니가 어느 날 학질을 앓고 있을 때 공은 벼락맞은 무덤 흙이 신효한 처방이 된다는 말을 듣고 그런 무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그 무덤은 깊은 산 범의 굴 앞에 있어서 사람이 가까이 가지 못한다고 했으나 공은 어두운 밤에 홀로 가서 그 흙을 가져다 쓰고 효험을 보았다. 어머니가 1716년에 전염병에 걸려서 위독하였는데, 공은 전염병에 감염되지 않았으므로 병시중을 들었다. 초상을 당하여는 몸소 염습을 극진히 하여 정과 예를 다하였다. 병에 감염되어 곧 돌아가니 그 해 5월 23일이고 54세를 누렸다. 조정에서 듣고 공이 살던 고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산소는 알운산 손방에 모셨다..."(龍宮鄕校誌 上卷 2005)
예천흔효리 권광윤 효자비(權光潤 孝子碑) [碑] : 풍양면 흔효리 119-1번지(畓)에 있는효종 때 표창된 권광윤의 효자비로, ''''흔전'''' 마을 입구 ''''효자비들''''에 소재하는 효가비각 내에 유존한다. 효종 때 표창된 권광윤(1603-1653)의 효자비로 현재는 비의 글자가 마모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1658년(효종 9년) 건비하였고, 1731년(영조 7)에 재건하였다. 비는 월두형(月頭形) 비신과 뒷면을 제외한 전면에 고사리 문양과 가하학적인 문양이 베풀어진 비좌(碑座)가 있는 형식이다. 비신 전면 중앙에 ''''孝子學生權光潤之閭''''가 새겨져 있고, 좌측면에는 ''''擁正辛亥五月日改竪''''가 각자되어 있다. 비좌의 크기는 높이 45cm, 폭 115cm이고, 비신의 크기는 높이 63cm, 폭 31-37cm, 두께 13cm이다. 자경(字徑)은 6x6cm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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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용곡리 삼부녀정열비(三婦女貞烈碑), 비 [碑閣] : 예천군 현내면(醴泉郡 縣內面, 現 義城郡 多仁面 龍谷1里) 동동마을 앞 국도변에 있는 비로, 임진왜란(1592) 때 이 동동마을에 살던 감천 문씨(甘泉 文氏) 집안의 3부녀(洪氏, 呂氏, 文氏)가 순절(殉節)하였다. 그 후 1612년(광해군 4)에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렸다. 그들의 절의를 더욱 존경하게 하기 위하여 하마비(下馬碑)도 세워져 현존한다. 그 후 후손들은 모두 떠나서 비석을 보호한 비각이 허물어졌고, 비석만이 초라하게 남아 있다. <예천군읍지>에 의하면, 홍, 여, 문 씨 3부녀인데, 홍씨는 본관이 남양, 십독 문경제의 아내이다. 홍길문의 8세손, 홍여방의 7세손이다. 임진왜란에 그 남편이 왜적에게 살해됨을 보고 자기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몸을 물에 던져 죽었다. 여씨의 본관은 함양, 문응주의 아내이고, 홍씨의 며느리이다. 병조판서 여자신이 증손, 절도사 윤철의 손녀이다. 시부모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여 향리의 칭송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체포될 것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문씨는 문명주의 딸로, 17세 때 임진왜란을 만나서 왜적이 아버지를 먼저 죽여 물에 던지자 통곡하면서 부르짖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사실이 <삼강행록>에 기록되어 있다. 광해군 때 대사헌을 지낸 황섬(黃暹, 下里面 愚谷書院에 祭享)의 <식암선생문집(息菴先生文集)> 제4권에서 이르기를, "내의원 십도 문경제의 아내인 남양 홍씨는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문응주의 아내이다. 함양 여씨(홍씨의 며느리)는 문응주의 아내이고, 처사 문명주의 딸인 처녀 문씨(홍씨의 손녀)는 임진왜란 때 한 가문이 화를 입어 강에서 순절했다"라고 하였다. 난리를 만나서 죽는 것을 예사롭게 여기는 것은 대장부도 어려운 일이거늘 한 집의 셋 부녀가 다투듯이 물에 떨어져 자결하였으니 절의와 정열이 꽃답고 아름답도다. 그 옛날을 더듬어 보아도 이런 일은 흔하지 않을 진저. 다음 황섬의 여찬에 대한 문집 사본을 붙인다. 슬프다. 부녀자는 정도를 지상의 가치로 삼아 그 시대를 규율하는 윤리관 앞에서 살아왔는데, 그 지상의 가치관을 끝내 지니지 못할 위험에 도달하였거나 유린당할 급박한 정황 속에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절의와 정열은 난세의 사표가 될 수 있다고 하겠기에 나라에서 정려를 명한 것이니, 황섬이 찬사를 지어 기린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라 하겠다. 분묘는 <예천군읍지> 분묘조에 기록이 보인다.(my.nerian.com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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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참여한 예천통명농요 대구 MBC 프로그램이 수상...축하합니다.
예천통명농요(大邱MBC "賞福 터졌네") [記事] :
...라디오 특집 다큐멘터리 ''''미스터리 농요 아부레이 수나의 비밀''''(연출 김형출)도 방송통신위원회의 12월의 좋은 프로그램으로 뽑혀 2009년 2월 3일 서울에서 상을 받았다.
이 프로그램은 예천의 통명농요 중 아부레이 수나의 기원과 전승, 문화적 배경을 국내는 물론 몽골과 러시아 바이칼 등지를 취재해 밝혀내 호평받았다...
(김은경 記者 嶺南日報 2009-02-05)
이 프로그램에는 필자도 참여하였다. 어느 날 관계자들이 나의 집을 찾아와서 세 가지 질문을 하였다. 1) 예천통명농요의 ''''아부레이수나'''' ''''도움소''''는 몽고어인데...? =금당실의 북방식지석묘 발견은 예천인은 몽고에서 들어온 증거이다. 2) 예천통명농요와 예천공처농요는 거리가 먼데도 유사점이 많은 이유는? =옛날 지보면이나 용궁면 등은 예천군 소속이 아니었지만(1914년부터 예천군 소속) 그보다 멀리 떨어진 공처는 1274년부터 1906년까지, 1914년부터 현재까지 예천군 소속이었다. 3) 몽고와 예천의 관계는? =광범위한 질문이기에 예천군청홈페이지에 게시하겠다.(게시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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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동부초 권현정, 양궁 전국대회 1위...축하합니다.
권현정 [記事] :
...2008 베이징올림픽 남녀 단체전 금메달리스트로 2008년 12월 화촉을 올린 박경모와 박성현은2009년 2월 5일 한국양궁지도자협회 주최로 충북 괴산에서 열린 제23회 전국 실내양궁대회에 참석, `성(性) 대결''''을 벌였다.
비록 18m 짧은 거리에다 이벤트성 행사로 열린 경기였지만 국내 양궁 대회에서 남녀가 혼성팀을 이뤄 경기를 벌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흥미를 자아냈다.
박경모는 여자초등부 1위를 차지한 권현정(예천동부초) 양과, 박성현은 남자초등부에서 우승한 한재엽(병천초) 군과 각각 한 팀이 돼 시위를 당겼다.
박성현조는 박경모조와 대결에서 222-218로 승리했다.
이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과 경기를 치른 한재엽.권현정 선수는 "처음엔 긴장도 됐지만 재미가 있었다"며 "꼭 국가대표 선수가 돼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김남권 記者 聯合뉴스 2009.2.5, 강신욱 記者 뉴시스 2009.2.5)
(註 : 권현정은 여초부 개인전에서 송정희를 109:106으로 물리치고 1위를 차지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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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면 흔효2리 출신 유회종, 박사학위 받아...축하합니다.
유회종(豊壤面 胎生 유회종 氏 工學博士 學位 받는다) [記事] :
풍양면 흔효2리 태생의 유회종(54) 씨가 2009년 2월 11일 호서대학교 계열 서울벤처정보대학원에서 미디어음향 공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유재달(작고) 김귀순 씨의 4남 중 3남인 유씨는 `디지털콘텐츠의 사운드디자인설계가 커뮤니케이션효과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논문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게 된 것.
풍양초등(33회), 풍양중(18회) 출신인 유씨는 일찍이 문화방송과 현대녹음실에서 TV광고, TV드라마 녹음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해왔다.
현재, 한국방송예술진흥원(4년제 예술학사 대학 교육기관) 방송음향학부 주임교수(학과장)로 재직하고 있으며,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콘텐츠진흥원 심의위원과 게임위원회 음향기술특별위원을 맡고 있다.
부인 송옥숙(52) 씨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장녀(유미)는 공인중개사, 아들(유석)은 게임전문회사 홍보실에 근무하고 있다.
(醴泉新聞 2009년 02월 05일 12: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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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출신 장영기, 새마을지도자 경북협의회장 재추대...축하합니다.
장영기(''''장영기 新任 새마을指導者 慶北協議會長'''' ) [記事] :
장영기(63·예천읍 서본리) 새마을지도자 경상북도협의회장이 임원 개선을 통해 재추대됐다. 장영기 회장은 대창중학교를 졸업했으며, 지난 80년 예천읍 서본리 새마을지도자에 선정됐다.
그동안 예천읍협의회장, 예천군협의회장을 역임했으며, 지난 2006년 경북도협의회장에 선출됐다.
약 29년 동안 새마을운동을 통해 군민 의식화 교육에 앞장서왔으며, 실천하는 새마을정신으로 지역 발전을 위한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
또한 헌신적인 노력봉사에 힘입어 85년 대통령 표창, 98년 새군민상, 2002년 경북도 새마을대상, 2004년 새마을훈장 근면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예천읍 서본리에서 토건업에 종사하고 있다.
(醴泉新聞 2009년 02월 05일 13: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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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읍 출신 김상현, 번역서 베스트셀러로...축하합니다.
김상현(김상현 氏 飜譯 出刊한 冊 : 베스트셀러로 長安의 話題) [記事] :
예천읍 태생의 김상현 씨가 번역 출간한 로버트 톰슨의 「2박3일 만에 리더로 바꿔주는 워크숍」이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
김상현 씨는 예천초등(60회), 예천중(24회), 대창고(23회)를 졸업했으며, 고려대 경영학 석사, 경기대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 86년 한국전력에 입사했으며, 현재 한국전력 중앙교육원 마케팅전략교육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교육마케팅」, 「소비자 만족과 재이용 관계」, 「인간관계」 「생존경영」 등이 있다.
이번에 번역한 로버트 톰슨의 「2박3일 만에 리더로 바꿔주는 워크숍」은 직장 새내기부터 대표이사까지 기업과 개인을 대상으로 리더십 및 커뮤니게이션 능력을 향상 시켜주는 지침서로서 미국에서 1백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다.
(醴泉新聞 2009년 02월 05일 13:4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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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360
학가산 [記事] : 뫼벗 카페/ 안동-예천 학가산/ 글쓴이: 최경수/ 2009.02.05 07:24/
학가산(882m)은 좋겠다. 한국의 100명산에도 끼어들지 못해 늘 아쉬워했는데, 멀지 않는 어느 날 경상북도 도청의 진산으로 새롭게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니 하는 말이다.
대구시 북구 산격동에 자리 잡고 있던 경북도청을 자기 고장으로 끌어오겠다는 유치경쟁을 도내의 쟁쟁한 도시들이 오랫동안 치열하게 펼쳤다.
그런데 2008년 6월 8일 새 도청 청사를 안동시 풍천면과 예천군 호명면 검무산(劍無山·331m) 남쪽 자락에다 짓고 이전하기로 최종 결정이 났다.
새 도청 청사가 들어설 검무산 남쪽 자락은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장풍득수형(藏風得水型) 입지에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로 천년의 도읍지가 된 수도 서울의 지세를 빼닮았다.
새 도청이 들어서면 학가산은 도청의 진산이 된다. 새 도청에는 정산(289m)과 거무산(227m)이 좌청룡 우백호가 되고 남북으로 시루봉(185m)과 검무산이 주작(朱雀)과 현무(玄武)가 된다.
평화를 상징할 현무인 주산 검무산 앞에는 생명의 원천인 여자못(好民池)이 있다. 주작(안산)인 시루봉 앞으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흘러내리고, 강 건너편으로는 조산인 봉화산(400m)이 솟아 있다.
낙동강 왼쪽으로는 안동의 하회마을이 펼쳐져 있는데, 하류쪽 오른쪽에는 예천 내성천의 회룡포가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도 풍수지리적 요소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는데, 산과 강 그리고 동서남북의 방위가 사람과 한 지역의 운명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풍수지리적인 자연관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겠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이런 합리적인 풍수사상이 검무산 자락을 새 도청 후보지로 결정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로 보인다.
새 도청 후보지 안동과 예천에는 중앙고속도로(55번)가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도청의 청룡인 정산에서 서안동 나들목까지는 10분 거리이고, 도청이 들어서면 인접지역인 의성(30km), 상주(35km), 문경(27km), 영주(28km), 봉화(41km)까지도 100리길 안쪽이다.
지금도 예천이나 안동에서 고속도로를 타면 전국 각지의 대도시들과도 그렇게 멀지 않는 거리다. 대구까지가 1시간 남짓, 서울과 부산도 2시간 30분대로 닿을 수 있겠다.
먼 곳으로 치부되는 광주까지도 3시간 반이면 갈 수 있다. 강원도 영월과 경북 봉화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구룡산(1,344m)과 서쪽의 선달산(1,236m) 사이에 옥돌봉(1,244m)이 솟아 있다.
백두대간은 이곳 옥돌봉에서 남쪽으로 가지를 쳐 내려오면서 안동대지맥을 이루는데, 안동땅과 예천땅의 경계지점에 우뚝 솟아난 산이 학가산(鶴駕山·882m)이다.
학가산은 그 산세가 마치 소백산에서 날아와 앉은 학을 사람이 타고 노니는 형국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예천 사람들은 학가산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학가산은 예천쪽에서 보아야만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 중 어떤 분들은 예천군청 뒷산인 흑응산에서 바라다보는 학가산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는 주장까지 했다. 예천에서 학가산을 오르는 코스는 매우 단조롭다. 928번 지방도를 이용, 보문면 산성리 당재에서 느리티 마을을 산행들머리로 하고 하산코스를 보문면 우래리, 우래자연휴양림으로 잡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루트가 되어 있다.
들머리쪽에서는 먹거리집이 없고 휴양림으로 내려서면 휴양림에 매점이 딸린 식당이 있다.
학가산 산행나들목에서 10km 거리, 예천읍내에는 군청소재지답게 여러 종류의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인터넷에다 ‘예천의 명산’을 연재물로 올리고 있는 예천 흑응산악회의 장광현 사무국장을 만났다.
흑응산악회(회장 전재인)는 1988년 창립, 회원 160명, 257회의 산행기록을 자랑하는 20년 전통의 산악회로 등산로 정비와 정상표지석 설치 등의 사업도 펴고 있었다.
장광현 국장께 산악회 회원이 운영하는 업소 한 곳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찾아들어간 집이 군청에서 50m 거리에 있는 보쌈 전문점 ‘청기와’였다.
업주 장덕호씨(40)가 예천 요산회 회원이었다. 예천 토박이인 장덕호씨가 예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가서 외식업계에 뛰어들어 손댄 것이 바로 보쌈이었는데, 서울의 그 보쌈집은 현재 명성을 크게 떨치고 있다.
고향에 돌아와서 식당 문을 열게 되었지만 보수적인 성향의 예천땅, 지역주민들은 외지사람이 와서 낯선(?) 음식을 차려내는 것으로 오해하더라는 것이다.
더욱이 부인 엄순희씨가 충청도 출신이라 고객들이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아 개업 초기에는 고전도 했다지만 이제는 단단히 기틀이 잡혔다고 한다.
먹거리집 식탁에 올라오는 주된 음식의 식자재가 수난을 당한다. 소고기가 그렇고 조류인 닭과 오리가 그렇다. 그런가 하면 여름철에는 물고기류의 식자재들도 수난이다.
말하자면 육수공(陸水空), 어느 한 곳도 온전해 보이는 곳이 없다. 그런데 육(陸)에 속하는 돼지고기만은 무풍지대처럼 보인다. 이 집에서 차려내는 보쌈의 식자재가 돼지고기다.
업주가 처음 대도시에서 음식공부를 제대로 된 집에서 제대로 공부한 것이다. 콩 심은 곳에 콩 나듯, 청기와에서는 제대로 된 음식을 차려내고 있었다.
대도시 보쌈전문업소의 수준을 능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보쌈 20,000~25,000원, 감자탕 15,000~20,000원, 소머리국밥·뼈다귀해장국 5,000원, 삼겹살 6,000원, 냉면 4,000원...
<글·박재곤 대구시산악연맹 고문>(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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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향교(龍宮鄕校 春季 釋奠大祭) [記事] : `향교'''' 하면 유림들만 참석하는 곳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용궁향교 춘추석전 대행사에 새로운 안종건 전교님이 향교의 빗장을 활짝 열었습니다. 감히 여자들은 참석하지 못하던 향교에 많은 여자 분들이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을 택하여 공자님을 비롯한 훌륭한 선현들의 정신을 기리는 날이었습니다. 용궁향교가 도유형문화재 제210호 태조 7년에 창건되었으며, 위패로 공문 5성위 송 4현 우리나라 18현 모두 27현 성현들이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모든 제수 진설이 생식이였고 쌀, 조는 7번 씻어 놓는다고 했습니다. 김수남 군수님의 초헌관 제례로 격식있고 엄숙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고정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듯이 용궁향교 대석전에 많은 일반인과 여자 학생들이 배울 수 있는 인성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안종건 전교님의 배례로 용궁향교 주변 마을 여자분들도 몇 십 년만에 참석하게 되었다면서 모두들 기뻐했습니다. 호주제도 폐지되는 이 시점에 봉건적인 사상에서 벗어나 시대의 흐름과 개방의 시대에 적응하는 용궁향교가 육지 속의 회룡포 마을과 연계해서 새로이 거듭나길 바라며, 전교님, 유도회 지부장님과 원로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용궁향교의 문화가 자손만대에 전승되길 바랍니다. <손명자 용궁농협 농가주부모임회장>(醴泉新聞 2005-03-25 13: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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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