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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 1835:예천의 정씨CEO들(附 예천방문 361)
작성자장병창 @ 2009.02.07 06:58:14


  예천의 자랑(1835) : 예천의 정씨 CEO들(附 예천방문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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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강열(顧客을 먼저 生覺하는 企業 : 정강열 光明시스템 社長) [記事] : 처음 가졌던 마음가짐을 항상 간직하기란 쉽지 않다. 사무용 가구를 제작하는 광명시스템(본사 공장 :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식사동)이 장기 불황으로 바닥을 치고 있는 가구업계에서 오랜 시간 정상을 유지하는 이유에는 초심을 잃지 않은 정강열(58·호명면 직산리 출생) 사장의 노력과 신용이 존재한다. 광고는 제품으로 하는 것이며, 최고의 마케팅은 소비자들이 직접 제품을 써보는 것이라는 경영 철학으로 35명의 종업원에게 항상 최고의 품질 생산을 강조한다. 정강열 사장은 1968년 먹고살기 위해 단신 상경했다. 처음에는 허기를 채우고자 남대문시장 바닥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일을 했다. 남대문시장에서 뼈저리게 배운 교훈은 장사꾼의 `신용''''''''''''''''이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용의 가치를 남대문시장에서 자연스럽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금전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신용이란 말은 그래서 진리입니다. 신용있는 사람으로 평가되면 돈이 없어도 반드시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신용은 불변의 자본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신용을 획득하는 데에는 긴 세월과 인내를 요한다. 반면 그 것을 잃는 것은 한 순간이다. 신용을 끝까지 지키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정 사장 자신의 경영 철학을 이렇게 함축했다. 1977년 신용 하나만 밑천 삼고 창업하여 오늘 1천3백 평 자신의 생산 공장에서 연매출 20억 원을 이루기까지 정강열 사장은 절대 속임수를 쓰지 않고 좋은 품질의 제품만을 생산해 왔다. 이 결과 광명시스템의 정강열 사장을 믿는 거래처가 날로 늘게 되었고 돈도 벌기 시작했다. 장사술이 뛰어 나서가 아니라 정직과 신용이 가져다 준 대가였을 뿐이었다는 것이 정 사장의 설명이다. 말하자면 사업 인생 30년 동안 오직 신용 하나로 부침이 심한 가구업계에서 장기간 존속하고 성장한 것이다. 정 사장은 자기 자신의 경영에 있어서도 기본을 중시한다, 성공만을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질주만 하는 인생이 아니라 지킬 것은 지키며 삶의 소중한 가치들을 추구한다고 한다. 그는 일 만큼이나 가정에도 충실한 사람이다. 가족은 은행보다 더 확실한 행복 투자 기관이다. 그래서 삶에 있어서 가족에게 많은 투자를 하는 편이라고 한다.(醴泉新聞 2004-06-12 10: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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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규섭(鄭圭燮) : 풍양초등 졸업, 삼진직물 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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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대수(鄭大壽) : 1935- , 지보면 도장리 출신, 본관은 동래, 휘수(輝洙)의 아들, 지보초등(知保初等), 지보중(知保中), 한영고, 건국대 정외과(政外科) 졸업, 고려대 경영대학원 수료, 교통부에 근무, 60년 차관 비서관(次官秘書官), 대영기업(株) 설립 대표이사, 동도산업(株) 설립 대표이사, 대한종합설비(大韓綜合設備, 株) 대표이사, 천호기업 CO 사장, 고려대경영대학원(高麗大經營大學院) 교우회(校友會) 감사(監事), 민권당 성북지구위원장(民權黨城北地區委員長), 동 중앙당(同中央黨) 경과위원장, 동 중앙정치훈련원장(中央政治訓練院長), 동 정무위원(政務委員), 동 정책심의회(政策審議會) 의장, 제11대 국회의원 출마(城北),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선거대책(大統領選擧對策) 위원(1988), 예천관광친목회(醴泉觀光親睦會) 창설(副會長), 예천새마을금고 창설, 민주당(民主黨) 예천지구당 위원장(醴泉地區黨 委員長, 1990), 백운교회(白雲敎會) 집사(執事)를 지냈다.(嶺友俱樂部 99號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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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영(鄭棹永) : 1935- , 풍양면 우망리 출신, 본관은 동래, 초퍙초등, 문경고 졸업, 58년 육사 14기, 74년 육군대, 82년 한양대 행정대학원 졸업, 85년 국방대학원 경영관리과정 수료, 90년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이다. 79년 보안사령부 1처장, 80년 보안사 참모장, 85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 85년 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 86-89년 사회정화위원장, 91년 부동산신탁주식회사 사장, 자유총연맹 사무총장이다.(csoh.pe.kr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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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호(鄭柄祜) : 1939- , 감천면 진평리 출신, 본관은 봉화, 양경군의 25세손, 삼천초등(3回), 감천중(甘泉中), 대창고, 영남대 법정대, 동 대학원 졸업, 내무부장관실(內務部長官室)  근무, 청와대 정무비시설(靑瓦臺政務秘書室) 근무, 동 정무제2비서실에 근무하면서 지방 행정 및 서울시 행정을 관장하였다. 청와대 민원실(靑瓦臺民願室)에서 근무를 하다가 부산시 산업국장(釜山市産業局長), 부산시 도시개발공사 사장이다.(嶺友俱樂部 99號 1982, 朝鮮日報 DB 2003)
 정병호(鄭炳祜) : 1939- , 감천면 진평리 출신, 감천초등, 감천중(甘泉中), 대창고, 62년 영남대 법정대, 72년 동 경영대학원 석사, 부산대 행정대학원 최고관리자과정 수료, 동 환경대학원 졸업, 청와대 정무비서실(政務秘書室) 지방행정 비서관(16年 間), 부산시 교통관광과장, 동 산업보건사회 국장, 동 교통관광국장, 동 환경녹지국장(環境綠地局長), 동 상수도사업본부장, 동 남구청장, 동 동구 청장, 동 북구청장, 96년 동 기획관리실장(企劃管理室長), 98년 부산도시개발공사 사장을 지냈다. (在釜鄕友會報 1991, 醴泉新聞 1996.2.8, 每日名鑑 1999, 인터넷 每日名鑑 2001, people.chol.com 2004, people.naver.com 2004)


  정병호(정병호 氏 釜山商工會議所 常勤副會長 就任) [記事] : 정병호 전 재부예천향우회장이 2004년 12월 10일 부산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에서 취임했다. 정병호(65) 신임 상근부회장은 감천면 진평리 태생으로 감천삼천초등, 감천중, 대창고를 거쳐 영남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지난 65년 총무처 공채로 공직에 입문했다. 내무부장관실,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에서 공무를 수행했으며, 부산시 남구·수영구·동구·북구·사상구 구청장을 역임했다. 또한 부산시 산업·보건사회·교통관광국장, 상수도본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뒤 부산광역시 도시개발공사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다. 정 상근부회장은,“부산 경제가 새로운 활력을 되찾기 위해 노력 하겠다”고 취임 소감을 말했다.(醴泉新聞 2004-12-31 14:46:05)


  정병호(정병호 甘泉中 總同窓會長) [記事] : 2005년 11월 6일 감천중 강당에서 열린 제3회 감천중 총동창회에서 정병호(1회) 고문이 회원 만장일치로 신임 회장에 추대됐다. "동문 회원들의 화합과 친목을 도모하고 후배 재학생들의 학업 증진을 위해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취임 소감을 밝혔다. 정병호(67) 신임 회장은 감천면 진평3리 태생으로 감천 삼천초, 감천중, 대창고, 영남대를 졸업했다. 지난 65년 총무처 공채로 공직에 들어가 내무부장관실, 대통령비서실 부산시 구청장, 부산광역시청 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쳐 지난 2001년 부산광역시 도시개발공사 사장을 끝으로 공직 생활을 마감했다. 지난 2002년 재부예천향우회장을 맡아 재부 출향인들의 구심점으로 회의 활성화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부산검도회 고문, 부산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醴泉新聞 200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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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식 : 1961- , 예천 출신, 대신공업사 대표이사 사장이다.(朝鮮日報 DB 2003, people.chol.com 2004, people.naver.com 2004, 엠파스 人物檢索 2004, paran 人物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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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봉진(鄭鳳鎭) : 1946- , 예천 출신, 광운대 경영대학원 졸업, 섬유 공업사인 문경 산양농공단지의 (주)상운 대표이사이고, 문경시 페러글라이딩협회장이다.(每日新聞 199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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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모(鄭湘模) : 1952- , 예천 출신, 한양대 경영대학원 수료, 경영소프트 대표이사 사장이고, 한남대 경영학 객원교수이다.(朝鮮日報 DB 2003, people.chol.com 2004, people.naver.com 2004, 다음 百科事典 2004, 엠파스 人物檢索 2004, paran 人物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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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연수(鄭淵壽) : 1935- , 예천 출신, 본관은 동래, 한양대 경영대학원 졸업, 단양에 있는 봉양단양탄광(鳳陽丹陽炭鑛)을 개발, 경영한다. 제13대 대한탄광협동조합 이사장이다.(光復40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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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영명 : 1938- , 예천읍 노하리 출신, 예천초등, 예천중, 예천농고(醴泉農高), 영남대 섬유과 졸업, 코오롱 입사(1965), 동 복장사업본부장(服裝事業本部長), 외지부장를 거쳐 수출담당 이사로 있을 때는 코오롱양단을 개발 1개 디자인으로 40억 원의 수익을 내게 하였다. 대구 성서의 광림섬유를 창설하여 사장으로 취임(1983), 제2공장을 설립(1990)하였다.(醴泉新聞 199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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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완수 : 풍양면 출신, 디스코통상(株) 전무이사, 96년 디스코투가리스시계(株)를 창립 대표이사이다. 재경풍양면민회(在京豊壤面民會) 회장이다.(醴泉新聞 1996.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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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용팔(鄭鏞八) : 1926- , 지보면 도장리 익장(益庄) 출신, 자는 도여(道余), 호는 동원(東原), 본관은 동래, 창수(昌壽)의 장자, 상주농잠학교(尙州農蠶學校), 고려대 경영대학원 졸업, 옥천원료공장장(沃川原料工場長), 안동전매지청장(安東專賣支廳長), 안동엽연초재건조장장(安東葉煙草再乾燥場長)이다. 저서로는 <인삼재배사(人蔘栽培史)>가 있다.(每日年鑑 1987 1988, 知保面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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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운(鄭雲) : 1929- , 유천면 광전리 출신, 일찌기 일본 동경 목배상업학교를 다니다가 귀국하여 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 단국대 법률학부(檀國大法律學部)를 졸업, 군(軍)에 입대하여 10년 간을 복무하다가 4.19의거(1960) 당시에 퇴역(退役), 팔금기업(八金企業, 株) 전무이사, 조일교역상사(朝日交易商社) 대표이사를 역임한 후, 1980년 (株)대훈물산(大焄物産) 대표이사(社長)로 취임하였다. 대훈물산은 봉제(縫製), 원단 가공업체(原緞加工業體)로서 연간 수출 실적이 150만불에 달하였으며, 수출 지역은 미국과 구미(歐美) 지역이 주대상이었다. 그는 면민회(面民會) 회장으로서 부락의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그들의 노후를 위로하기도 하고, 고향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慶北年鑑 1975, 嶺友俱樂部 99號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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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오(監事 任命狀 받아) [記事] : 정원오(풍양면·재부향우회 감사) 생활체육 부산등산연합회장은 2003년 5월 21일 서울롯데호텔에서 전국등산연합회 감사 임명장을 받았다.(醴泉新聞 2003-05-22 13: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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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윤호(鄭允鎬) : 1954- , 감천면 덕율리 출신, 감천초(36회), 감천중(16회), 대구 경상공고, 영남대, 부산대 경영대학원 졸업, 88년 부산 부산진구 양정1동 397-19번지에 있는 주식회사 동남산업(東南産業) 대표이사 회장이다. 재부예천향우회 부회장, 감천중 제16회동창회장이다.(醴泉新聞 2001.7.26, 醴泉文學 제29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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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일영 : 보문면 출생, 대구 중구 남산3동 2114-10번지에 있는 대양인쇄포장 대표이다.(醴泉文學 第29卷 2004)


  정일영(앞서 가는 技術, 硏究하는 會社, 정일영 大洋印刷包裝公社長) [記事] : 세계는 무한 경쟁 시대로 끊임없는 기술 개발 투자가 뒤따라야 국제 경쟁력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으며 최고의 품질만이 회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에 돌입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기업들이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술 개발에 적극 투자해야 한다. 대구는 물론 전국 인쇄 박스포장 업계에 특수한 기술, 좋은 품질을 만들어 내는 회사가 있다. 바로 대구 중구 남산동 인쇄골목에 위치하고 있는 대양인쇄포장공사다. 정일영(보문면 출생) 사장을 만나 회사 소개와 그의 경영 철학을 들어 본다. “대양인쇄포장공사는 15년 전 창사이래 투철한 사명감과 끊임없는 기술 개발로 제품 하나하나에 열과 성을 다해 보다 좋은 제품(상품)을 만드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라는 정일영 사장은 현대 인쇄 산업이 고도로 발전해 나감에 따라 기계의 자동화  추세에 맞춰 무한한 연구와 투자를 한다고 한다. 특히 문학 작품집 인쇄가 아니라 상업 인쇄와 제품을 넣을 수 있는 박스를 가공 제작하는 일이니까 수준 높은 기술과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좋은 아이디어로 기술 개발에 몰두함으로써 다른 회사 어느 제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깔끔하고 질 좋고 탄탄함을 정일영 사장은 자랑한다. 또한 선명하고 깨끗한 상업 인쇄와 튼튼하고 보기 좋은 박스 포장을 위하여 지속적인 연구 개발로 전력을 다하고 있으며 대구는 물론 국내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고 강조한다. “앞으로 저희 회사는 기계의 자동화에 더 많은 노력과 끊임없는 연구, 창의적인 기술에 자금을 투자함으로써 기술 혁신을 이루고자 하는 소신으로 기술 연구를 거듭함을 사명으로 삼고자 합니다”라는 정일영 사장은 `하면 된다''''''''''''''''라는 끊임없는 자세로 소신 있게 성장 발전해 나갈 것을 다짐한다. 정일영 사장은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에서 정해명(64) 씨와 황계순(64) 씨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보문초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간 시골에서 가사를 돌보다가 16세에 대구로 왔다. 낮에는 인쇄소에 취직하여 기술을 익혔고 밤에는 책과 씨름하여 독학으로 중등검정고시 고등검정고시를 합격했다. 밤낮 열심히 인쇄 기술을 익혀 이론과 실습을 겸비하여 널리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어렵고 힘들 때도 많았습니다. 배고픈 것 추운 것 모두 참았습니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남에게도 진다는 생각으로 참았습니다. 참는 것도 인생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러가자 모든 것을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제 삶을 지탱해 왔습니다. 저는 지금도 인쇄 포장하는 일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낍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평소에 하찮는 것이라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절대 금물로 생각할 만큼 남에 대한 배려를 철칙으로 삼고 있단다. 인쇄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를 좋아하고 따르는 이유도 한 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해온 그의 참다운 인간애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요즘 기업인들이 어려움을 지난 IMF보다 더 겪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부단히 기술 개발을 해야 하며, 안으로 내실을 기해야 합니다. 한편으로 제품(상품)에 자신이 있는 업체는 경제가 아무리 침체되어도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중소기업의 취약점은 `믿음''''''''''''''''입니다. 고객들에게 완벽한 제품을 만들고, 만든 제품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고향에서도 상업 광고 인쇄나 사과 박스 제작을 맡겨 보세요. 완전하고 깔끔하고 튼튼하게 생산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정일영 사장은 고도 정보화 사회 속에서도 고객들을 위한 총체적 정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신속하게 전달, 고객이 필요로 하는 문제 늘 적극적으로 동참 해결하려는 자세로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하며, 고객에게 최고의 만족을 약속한다. `원칙을 기준으로 생활하라.'''''''''''''''' 그는 직원들에게 항상 이 점을 강조한다. 뿐 아니라 영업에도 직접 나서서 몸으로 실천한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끈기와 인내를 가져라''''''''''''''''란다. 부인 이옥희 씨와 사이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醴泉新聞 2001-11-09 10: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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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균(鄭在均) : 1945- , 풍양면 하풍리 346번지 출신, 초명은 재윤(載潤), 본관은 청주, 우망초등(憂忘初等), 풍양중(豊壤中), 경북대 경영대학원 졸업, 삼진직물 입사(入社), 82년 대구 이현동 (株)경남섬유(京南纖維) 대표이사 겸 사장이다. 대구시 중소기업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대구 달서라이온스 회장이다.(醴泉文學 20號(1999) 21號(2000) 22號(2000) 23號(2001) 24號(2001) 26號(2002) 27輯(2003) 28輯(가을겨울號 2003), 29輯(2004), 醴泉新聞 1998.9.17 199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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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명(鄭載明) : 1958- , 예천읍 백전리 출생, 동부초등, 예천중, 안동공고 토목과, 경북과학대 사회복지학과, 경운대 아동복지학과 졸업, 구미시 선산읍 교리 1166번지에 있는 성일토건(주) 대표이사 사장이다. 제3630지구 선산로타리클럽 제31대 회장, 재구미 안동공고동창회 회장, 재구미예천향우회 수석부회장이다.(醴泉新聞 2004.3.18, 醴泉文學 제29권 2004)


  정재명(信賴를 바탕으로 앞장, 성일土建(株) 정재명 社長) [記事] : IMF 때보다 경기 불안에 대한 우려가 더 높아지고 있는 지금 경기 불황의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이 바로 건설업이다. 구미 선산 지역에서도 지역을 대표하는 건설 회사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 동종 업계의 모범을 보이면서 1998년부터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는 성일토건(주) 정재명(46) 사장. 성일토건 건축 전기공사는 토건공사 및 건축 전기공사업을 시공하는 업체로 우수한 인력과 축적된 전문 기술로 책임 시공은 물론 최신 중장비를 보유하고 있는 전문 건축 전기 토건 회사이다. 또한 성실 시공을 바탕으로 정직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앞세워 구미 선산 지역에서 떠오르는 기업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종업원들의 복지 향상에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 정 사장은, “성일토건이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직원들의 땀과 노력, 맡은 바 책임을 다 하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사람한사람의 기운이 모여 진정한 성일토건의 힘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라고 성장의 비결을 털어놨다. 정 사장은 토목이나 전기 공사 현장 밑바닥부터 다져온 튼튼한 현장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직원들에게 믿음과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며 성일토건을 이끌어왔다.“최고 경영자로서 단순히 직원들 위에서 군림하기보다는 직원들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더욱이 외부에서 인재를 등용하는데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있으며 내부적으로 인재가 이탈하는 일이 없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하는 일이 중요하다”며, “인재의 중요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영 방침과 그들에게 고객 서비스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직원들과 신뢰를 쌓고, 고객과 신뢰를 쌓는 큰 밑거름이 된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정재명 사장은 예천읍 백전리 태생으로 동부초등, 예천중, 안동공고 토목과, 경북과학대학 사회복지학과, 경운대 아동복지학과를 졸업했다. 제3630지구 선산로타리클럽 31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재구미안동공고동창회 회장과 재구미예천향우회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다. 정 사장은, “눈을 속이면서 공사하려면 눈 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나중에는 큰 화를 당하게 된다. 성일토건이 시공한 작품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진가를 발휘한다”며 공사 하나하나가 작품이라고 말한다. 정 사장은 모든 입찰에 참가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며, 항상 고향의 무궁한 발전을 기대하면서 최대한 고향 일에 관심을 가지겠다고 말했다.(醴泉新聞 2004-03-19 17:26:03)


  정재명(國際로타리 3630地區 12地域, 總裁 地域代表 醴泉出身 정재명氏) [記事] : 선산로타리클럽 31대 회장을 지낸 정재명(48) 씨가 선산지역 1개 클럽, 김천지역 4개 클럽으로 구성된 국제로타리 3630지구 12지역, 총재 지역대표를 맡게 됐다. 국제로타리클럽 3630지구 12지역 로타리클럽은 선산읍 교리에서 (주)성일건설을 경영해 오면서 평소 지역 노인과 불우학생 등 소외계층을 돌봐 주는 등 남다른 봉사활동과 지역 발전에 앞장서온 정씨를 선산로타리클럽 31대 회장에 이어 12지역 총재 지역대표로 선출했다. 2006년 7월부터 12지역, 총재 지역대표를 맞을 정씨는 지난 1958년 예천군 백전1동(잣밭고개) 가난한 농부의 맏아들로 태어나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안동공고(토목과)를 졸업한 후 선산 교리에서 건설업을 경영해오면서 남다른 지역 사랑과 봉사를 펼쳐왔다. 평소 소외계층 복지 증진에 많은 애착을 가진 정씨는 바쁜 생활속에서도 사회복지 전문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만학의 의지로 경북과학대학 아동복지학과에서 2년 동안 공부한 후 경운대학교 사회복지학과로 편입학 졸업한 후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석사다. 특히 정씨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복지실현을 위하여 틈틈이 마련해온 토지 가운데 선산읍 무을면 무등1리에 1만2000㎡ 정도의 농지와 일부 택지를 개발해 공동체 마을 “두레마을”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공동체 마을(두레마을) 입주 대상자는 노동력은 있으나, 의지할 곳이 없는 노인들로 자급자족으로 생활할 수 있는 가옥과 농지, 돈ㆍ축사 등을 건립해 무료로 제공한다. 현재 복지전문가에 설계와 프로그램 용역을 의뢰한 상태로 빠르면 2006년 하반기에 기반조성 공사가 진행돼 2007년 상반기에 완성되면 곧 바로 입주자를 추전받아 간단한 적응력을 심사한 후 공동체마을을 구성한다. 정씨는,“지역 로타리클럽 회원들과 함께 나눈 봉사활동도 매우 값진 것이지만, 저의 작은 힘이지만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 마을을 만들겠다.”며,“어렵게 생활하는 이웃과 함께 더불어 잘 살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정씨는 무을 공동체 마을 건설에 이어 전국 최고 청정지역 영양 일월산 인근에 도시생활 속에서 공해에 찌든 근로자들의 쉼터와 지역 중소기업 근로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웰빙 연수원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6-06-28 오후 1:2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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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설(鄭載卨) : 1915- , 풍양면 삼강리 출신, 호는 아연(亞淵), 일본 동경 동아상업고등학교(東亞商業高等學校) 졸업, 귀국하여 광일화섬(光一化纖) 사장, 대운산업(大運産業, 株) 사장, 미성산업(美星産業, 株) 상무 취체역(常務取締役), 제일화재해상보험(第一火災海上保險) 취체역, 제일은행(第一銀行) 상무 취체역(常務取締役), 삼호무역(三頀貿易) 상무 취체역, 삼호방직(三頀紡織) 상임감사역, 대전방직(大田紡織) 상임감사역, 조선방직(朝鮮紡織) 상임감사역(常任監事役)을 거쳤다. 그 후 삼호무역(三頀貿易, 株) 대표이사 사장, 이 외에 대양수산상사(大洋水産商社, 株) 사장으로서 수산물 개발 및 수출에도 물론 유창물산(裕昌物産, 株) 이사로서도 광산 개발과 수출에 공헌이 다대하였다. 1963년과 1964년에 수출 실적이 국내에서 제1위로서 대통령상(大統領賞)을 받기도 하였고, 그의 의욕은 삼호무역(三頀貿易)을 불과 몇 년만에 한국 제일의 방대한 회사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우리나라 산업 경제계에서 굴지의 실업가였다. 그리고 한국 뿐 아니라 외국 무역회사에 비견(比肩)할 수 있는 기업체로서 그 질과 양을 향상 확장함에 성공시킨다는 자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그 외 경북염색가공(慶北染色加工) 이사, 방협(紡協) 이사, 기능올림픽한위(韓委) 부회장이기도 하였다. 산업훈장(産業勳章)을 받았다. 그는 탁월한 역량과 풍부한 식견을 소유하였다.(慶北年鑑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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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성(鄭載晟) : 감천면 진평1리 출신, 본관은 고령, 시조의 32세손, 삼천초등(三泉初等, 1回) 졸업, 일신양조(株) 상무(常務), 제일상사(第一商社)를 발족하여 가방 수출업을 하는 한편 건설 면허를 취득, 서만건업사(瑞滿建業社)를 친구와 합자(合資)하여 연립 주택과 아파트를 건립하여 주택난 해소에 커다란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고향의 산이름을 따서 부용주택(芙蓉住宅)이라 이름붙인 주택을 연간 1백 세대 정도 건립하였다. 서만건설(瑞滿建設, 株) 대표이다.(嶺友俱樂部 99號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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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호(鄭載頀) : 1913-2005, 풍양면 삼강리 출신, 본관은 청주, 효섭의 장자, 산북공립보통학교(山北公立普通學校), 일본 동경 무장야고등공고(武藏野高等工高) 기계과 졸업, 경영학 명예박사(啓明大), 대판신막대소공업(大阪神莫大小工業, 株) 입사, 35년 귀국하여 대구에서 양잠공장(養蠶工場) 창설, 41년 양잠공장을 삼호막대소공장(三頀莫大小工場)으로 개칭하고, 한편 철공장(鐵工場), 제재공장(製材工場)을 병설하여 삼호공업사(三頀工業社)로 발족, 49년 삼호무역(三頀貿易, 株)을 창설하여 사장으로서 무역업에도 손을 대었고, 그 시절 방직업이 황무지 상태였던 것을 개탄하여 연구 끝에 국내 방직업계에선 처음으로 51년 삼호방직(三頀紡織, 株)을 창설하여 그 사장으로서 방직업계에 일익을 담당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동사(同社)에는 방적부(紡績部), 직포부(織布部), 메리야스부, 어망부(漁網部), 철공부(鐵工部)의 5개 부서가 있었다. 어느 분야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미개척 분야를 처음 시도할 때는 기계 시설과 원자재(原資材)부터 일체를 구입해야 하는 고충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도전했던 그의 집념으로 인해 우리 나라 섬유업계의 발전이 빠를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말을 주위에서 말할 정도로 섬유업계에선 지보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53년 대전방직(大田紡織) 사장, 56년 동화통신(同和通信) 사장, 59년 제일화재해상보험(第一火災海上保險, 株) 사장, 60년 대한상의(大韓商議) 부회장, 61년 삼호방직(三頀紡織) 회장, 61년 신문연(新聞硏) 이사, 66년 의양언론문화재단(義洋言論文化財團) 창설 감사 겸 이사장, 66년 전경련(全經聯) 이사, 67년 한국개발금융(韓國開發金融) 이사를 지냈다. 평생 사업을 위해 살았던 그는 68년 제주축산개발(濟州畜産開發, 株)을 발족하여 그 대표이사 사장으로서 대지(垈地) 3만 평에 종업원 15명을 두고 육우(肉牛)를 주로 키우고, 연간 총 생산량이 700두(頭)나 되어 국민 건강에 이바지하였다. 74년 (株)동화전통사(同和電通社) 회장, 74년 대한와사산업(大韓瓦斯産業) 회장, 74년 경북염색가공(慶北染色加工) 회장, 75년 한국연구원(韓國硏究院) 이사, 78년 계명대 이사였다. 보통학교(普通學校)를 간신히 졸업하고 향학열에 불타 도일(渡日)하여 신문 배달, 점원(店員), 급사(給仕) 등으로 갖은 신산(辛酸)을 겪은 일도 있었으나 그로부터 30년 후에는 재벌로서 인정을 받고 삼호왕국(三頀王國)의 군주(君主)로 군림하였다. 그가 대성(大成)한 것은 20세 때에 대구로 들어가 남산동(南山洞) 어느 셋방에서 수직(手織)양말기(機)로부터 출발하여 토대를 쌓았고, 일제 패망과 더불어 침산동(砧山洞)의 일인 어망회사(日人漁網會社, 現 三頀紡織)를 불하(拂下)받아 최신 방직기(紡織機)를 설치하여 칠전팔기(七顚八起) 성의있는 노력으로 신용있는 물건을 만들자는 사업 정신으로 꾸준한 노력을 계속하였기 때문이다.(慶北大觀 1958, 東亞年鑑 1973, 慶北年鑑 1975 1978, 嶺友俱樂部 99號 1982, 每日年鑑 1984 1985 1986 1988, 每日名鑑 1996 1997, 慶尙北道史 下卷 246쪽, 韓國人物史 737쪽, 韓國을 움직이는 人物들 1997, people.chol.com 2004, people.naver.com 2004, 東亞닷컴 人物情報 2004, 엠파스 人物檢索 2004)


  정재호(前 동화通信 정재호 社長 別世) [記事] : 동화통신 창립 사장을 지낸 정재호 전 계명대 이사장이 2005년 1월 21일 0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경북 예천 출신인 고인은 1949년 삼호무역을 비롯, 삼호방직, 조선방직, 삼호공업사 등을 세웠으며, 60년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을 역임했다. 61년 이병철 씨 등과 함께 전국경제인연합회 설립에 참여,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언론에 뜻이 있던 고인은 56년 동화통신사를 세웠으나 73년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66년에는 의양언론문화재단을 설립했으며, 계명대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명교 씨와 규진(제주축산개발 사장), 영진(재미), 대진(동화전통사 사장) 씨 등 4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2005년 1월 24일 오전 7시 30분(京鄕新聞 2005.1.21 (금) 18:20)


  정재호 : 1913- , 예천 태생, 산북공립보통학교 졸업, 90년 계명대 경영학 명예박사, 상호무역ㆍ삼호방직ㆍ조선방직ㆍ동화통신사ㆍ제일화재해상보험(주) 사장, 대한상의 부회장, 삼호방직 회장, 의양언론문화재단 창설, 제주축산개발(주) 사장, 대구계명대 이사, 동화전통사 회장이다. [프로필] :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자신의 일은 스스로 판단하고 행할 것이며, 또한 그 결과도 스스로 책임질 것이며, 매사를 남에게 의지하지 말 것이며, 대의정도를 위해서는 개인의 사사로움을 떠나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이며, 세상을 넓고 크고 깊게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나가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삶을 영위하여온 기업계의 원로인사. 일제 치하에 경북 예천의 정통유문에서 정효섭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유교적인 가정환경 안에서 ''''''''''''''''조국의 독립에 기여하는 인물이 되라''''''''''''''''는 기르침을 엄친으로부터 받으며 곧은 심덕으로 성장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불타는 투지로써 기업활동을 하였는 바, 삼호무역의 사장을 위시하여 삼호방직 회장 등을 두루 역임하며 국가산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자''''''''''''''''는 철학을 좌우명으로 삼아, 삶을 영위하여 왔다는 그는 현재 동화전통사의 회장으로 재직하며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고 있으며, 가훈은 ''''''''''''''''근면 정직 화목''''''''''''''''이다.(大韓民國 5000年 韓國人物史 7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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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수 : 1960- , 유천면 송전리 출신, 화남(花南)초등(25회), 유천중(柳川中, 4회), 대창고(大昌高, 25회), 88년 계명대 건축공학과 졸업, (株)건원종합건축사사무소 등에서 8년 간 근무, 96년 제32회 건축사시험(建築士試驗)에 합격하여 면허를 취득하였다. 97년 경기도 일산에 장터건축사사무소(場터建築士事務所) 소장이다.(醴泉新聞 199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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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익(在京龍門事務局長 社長으로 陞進) [記事] : 재경용문면민회 사무국장이신 정주익 님이 (주)세종파마택 사장으로 승진하심을 예천 출향인 22만 회원이축하드리옵고 12개 읍면민회 사무국장들도 아울러 축하하오며 앞으로의 건승을 빕니다(도토리남 cafe.daum.net/woruddPcjsrns 2005.07.09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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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순 [記事] : 예천중 14회 졸업, 보람항공사 부사장이 2005년 1월 1일 사장으로 임명됐다.(醴泉新聞 2005-01-28 13:4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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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채(鄭鎭采) : 1903- , 풍양면 우망리 출신, 호는 남강(南崗), 본관은 동래, 연세대 상대 졸업, 조선식산은행장, 경북도 재무국장(미군정청), 경북도 관재처장(管財處長), 국정교과서관리주식회사 사장을 지냈다.(醴泉郡誌 2005)


  정진채(韓國近現代人物資料) : 예천 출신, 경상북도 재무관리처 처장으로, <민국인사> 153에 수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름 정진채(鄭鎭采)/ 나이 45세(1949년 현재)/ 출신지 慶尙北道 醴泉郡/ 현직업 公吏/ 학력 延禧專門學校를 卒業했다./ 경력및활동 殖?銀行에서 勤務했다. 大邱紙物工場을 自營하고,/ 解放後 慶尙北道 財務部長을 거쳐/ 現在 慶尙北道 道財?管理處處長이다./ 출전 민국인사 153, 대한민국인사록"(history.go.kr 2005)


  정진채(鄭鎭采) : 1905-?,  출신지는 慶尙北道 醴泉郡, 현직업은 公吏, 학력은 延禧專門學校 卒業, 경력 및 활동은 殖?銀行에서 勤務했다. 大邱紙物工場을 自營하고, 解放 後 慶尙北道 財務部長을 거쳐 現在 慶尙北道 道財?管理處 處長이다.(대한민국인사록 153, www.history.go.k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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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섭(鄭泰燮) : 1942- , 보문면 옥천리 209번지 출신, 감천초등(23回), 감천중(2回), 상고(商高), 영남대 건축과, 동 환경대학원 졸업, 대구시청 공무원, 동 건축과장, 계명대, 경북대 건축학과 강사, 대구 북구 칠성동에서 미도건축사무소 대표이다. 대표적 건축 설계는 대구시립도서관이다. 1998년 대구 칠성동새마을금고 이사장이다.(慶北年鑑 1979 1980, 醴泉新聞 1993.6.24 2002.9.26)


  정태섭("地域 住民들과 함께 한 透明 經營" : 정태섭 大邱 七星洞새마을金庫理事長) [記事] : 제1금융권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으로 합병 반대를 위한 양금융 노조측의 반발과 금융지주회사 설립에 따른 부실 은행들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처절할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2금융권의 대표적인 서민들의 금고인 새마을금고 역시 수익 증대를 위해 증권 투자와 수익 증권의 무분별한 투자로 인해 많은 새마을금고가 자산 잠식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그런 여러 새마을금고들의 투자 분위기 속에서 묵묵히 고객들의 소중한 자금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대구시 칠성동새마을금고 정태섭 이사장을 만나 보았다. 정태섭 이사장은 1998년 칠성동새마을금고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취임하기 전 미도건축사무소를 운영하였으며, 북구 자치단체 여러 기구의 이사를 역임하고 있으며, 새마을금고 이사로 지내왔다. 그는 이사로 재직할 때 전임 이사장의 경영 방침과 여러 이사들의 경영 방침이 자신의 소신과 맞지 않을 경우에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관철시키곤 했다. 그러한 그의 강한 소신과 추진력을 높이 산 여러 이사들이 그를 1998년 정기 주주총회에서 칠성동새마을금고 이사장으로 추천하게 되었다. 정태섭 이사장은 다년 간 이사 생활에서 쌓았던 경험과 칠성동에서 생활의 터를 닦아 다른 단체장의 경험을 토대로 그가 취임할 당시의 금고 자산보다 두 배까지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수익을 올리기 어려운 금융 현실에서도, 현재 칠성동새마을금고는 이익을 올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는 금고를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경영 철학을 소신껏 추진하여, 그 결과는 언제나 주민들과 금고 직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정태섭 이사장은, “새마을금고는 서민을 위해서 운영되어져야 되고, 서민들이 운영하는 금고이며, 서민의 금고가 되어야 한다”며 평소 그가 칠성동새마을금고를 경영하는 마음 자세를 피력했다. 그리고 그는 회원들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서 그들의 작은 불편까지 모두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하고 있다. 정태섭 이사장은 취임 이후 칠성동새마을금고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면서 철저한 경영 분석을 통해 새마을금고 임원들과 회원, 그리고 직원들이 모두 공감을 할 수 있는 구조 조정을 통해 지역 주민들의 유휴 자금을 가장 안전하고 공신력있는 금고로 신뢰를 쌓아 대출이 쉽고 빠른 새마을금고를 만들어 회원들이 편안하고 믿음이 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 때 새마을금고 뿐 아니라 국내 경제 주체들은 대부분 수익 증권과 채권 및 펀드 시장에 뛰어 들었다. 결과 대우 사태와 증시의 몰락으로 인해 모든 자금들이 휴지 조각이 되었고, 타 새마을금고들은 그 자금 운영에 있어 엄청난 애로 사항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칠성동새마을금고는 회원들의 예금 적금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게 지켜져야 되고 또한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어야 된다는 정태섭 이사장의 평소 소신으로 인해 그러한 투자를 하지 않아 현재는 아주 건실한 금고가 되어 있다. 정태섭 이사장은 안전과 수익의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믿을 수 있는 수익형 신탁과 은행의 확정 금리 상품을 이용하여 회원들의 예금 적금의 유휴 자금을 증대시키고 있다. 정태섭 이사장은 보문면 옥천리에서 태어났고 영남대 공대 건축과와 영남대 환경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대구시청 공무원으로서 건축과장을 역임한 후 북구 칠성동에서 미도건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1998년 칠성동새마을금고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태섭 이사장은 칠성동새마을금고 직원들을 언제나 식구처럼 따뜻하게 대하고 그들의 애로 사항을 면담을 통해 항상 해결해 주려고 노력한다. 그러한 노력에 직원들 역시 자발적으로 업무에 충실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친절한 서비스를 하고 있다. 현재 국내 금융 시장은 시장 개방에 맞춰 대형화 추세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부실 채권과 대출이 줄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각종 서비스와 친절로서 국내 금융들은 다가오지만 지역 주민들은 서민들이 체감으로 느끼는 금융 문턱은 여전히 높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에서도 칠성동새마을금고는 주민들과 가장 가깝고 친근한 새마을금고로 튼튼히 자리 매김하고 있다.(醴泉新聞 2002-09-26 15: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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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명(鄭夏明) : 1939- , 지보면 도장리 구촌(九村) 출신, 호는 동송(東松), 본관은 동래, 탁수(卓秀)의 장자, 경북고(慶北高), 성균관대 법과 졸업, 경산교통(慶山交通, 株) 전무, 대구건설산업(大地建設産業) 대표, 합자회사 칠성상가(七星商街)아파트 대표, 삼천리(三千里)버스(株) 대표이사, 광림교통(廣林交通, 株) 대표이사이다.(知保面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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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화영(鄭華永) : 1949- , 예천 출신, 67년 대륜고, 69년 경북대 정외과 4년 제적, 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 만 6년 수감, 83년 민주화운동 청년연합발기 중앙위원, 90년 한겨레문고(주) 대표이사 사장(현), 94년 5.18특별법 제정 인천시민대책위 운영위원, 94년 북구청 세무비리규탄 시민대책위 운영위원, 95년 서해광장회장, 95년 인천앞바다 핵폐기장 대책범시민협 운영위원(현), 96년 민주당 인천부평을지구당 위원장, 이회창 총재 특보를 거쳐 2000년 한나라당 인천부평을지구당 위원장(현)이다.(每日名鑑 1999, 인터넷 每日名鑑 2001, people.chol.com 2004, people.naver.com 2004, 다음 百科事典 2004, 엠파스 人物檢索 2004)


  정화영(정화영 : 競選 候補者 紹介(한나라당 부평乙) 記號-나) [記事] : ▲본관 : 청주, ▲생년월일 : 49년 3월 19일생(만 54세), ▲출신지 및 주요 성장지역 : 경북 예천군 풍양면, ▲가족관계 : 부인과 2남, ▲병역 관계 : 육군 병장 제대, ▲종교 : 기독교, ▲주요 학력 : 우망초등학교 졸업, 용궁중학교 졸업, 대륜고등학교 졸업,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주요 경력 : 유신 반대 투쟁으로(민청학련사건)으로 제적됐으며 이로 인해 15년형 선고 받음(만 6년 복역), 서해광장(인천지역 재야민주인사 노동 종교 개혁적인 지도자 모임) 대표, 부평시민모임 집행위원장(공직자비리척결), 부평미군부대 공원화 시민협의회 고문, 인천시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 연합회 고문 ▲출마의 변 : 젊은 시절 저는 민주주의라는 큰 틀 아래 국민이 자유와 권리를 누리면서 일한만큼 대가를 받고 사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 틀에 어긋나는 정치가 펼쳐질 때 국민들과 함께 열혈청년으로 3선 개현에 반대하여 강제입영 당하기도 하였고,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학생시위에 참여하여(민청학련) 15년에 징역형을 선고받고, 두 차례에 걸쳐 만 6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 감옥에서 저는 독서를 계속했고 세상에 나가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각오를 다지기도 했습니다. 1981년 석방된 뒤 나는 다시 민주화운동단체를 만들었으며(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이후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민주화가 완성하면 국민이 마음놓고 잘사는 사회, 남북이 합쳐지는 사회, 동북아 공영의 시대를 열고 싶습니다. 동북아경제공동체(남북한, 중국, 러시아, 몽골)를 만들어 동북아와 공동 번영하고, 통일도 이루어지는 사회를 실현하고 싶습니다. 나의 꿈은 우리 경제가 완숙한 경제로 발전하고,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또 평화적으로 민족통일을 이룩하고 동북아가 하나가 되어 아시아의 발전과 통합을 목표로 하고 싶습니다. 이 것이 제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이유입니다.  ▲정치 입문 배경 : 학생시절 민주화 투쟁과 이후 재야 활동을 하면서 사회의 모순점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가졌슴. 이후 이들 문제들을 해결하고 민주주의 발전에 일조하고자 정치에 관심을 가졌으며, 지난 90년대 초 통합민주당때 현 노무현 대통령과 유인태 제정구 이부영 씨 등과 함께 정치에 입문. ▲정치자금 공개 행사 참여 여부 : 참여(仁川日報 2004-03-04)


  정화영(緊措 9號世代 秘話 (39) : 재판받으며 다져진 우정) [記事] : 긴급조치 9호 시대 첫 ''''''''''''''''편지 사건''''''''''''''''으로 꼽히는 ''''''''''''''''김영준 편지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연세대 민청학련 세대인 김영준(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장)이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소에서 까닭 모르게 연행된 것은 1976년 10월 25일 즈음이었다. 1966년 용산고를 졸업하고 68년 경제학과에 입학한 그는 연세대 학생운동의 본진인 한국문제연구회(한연회)의 핵심 멤버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는 15년형을 선고받았고, 이듬해 2-15석방조치에 따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가 연행된 것은 이 때 함께 재판을 받았던 경북대 정화영(현 부평 한겨레문고 대표)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다. 전부터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재판을 함께 받으며 의기투합했다. 이들은 안양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같이 했는데, 정화영은 이 때 폐가 좋지 않아 병사에 따로 수용됐다. 그러나 마음이 통하면 몸이 떨어져 있어도 상관없었다. 우정은 더욱 깊어졌다. 이들은 석방된 뒤에도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소통했다. 물론 편지는 보는 즉시 없애기로 하고. 두 사람은 노동자적 삶을 살기로 맹세했다. 다시 말하면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 결단을 내리면 당연히 집회-시위에는 얼굴을 내밀지 말아야 한다. 김영준은 그렇게 했다. 학생운동 언저리에 얼씬거리지 않고 노동 현장에 진입하기 위한 준비에만 전력투구했다. 그는 이재오(현 한나라당 의원)가 사무국장으로 있는 앰네스티 주관 직업 교육을 받았다. 당시 앰네스티는 위장 취업할 사람들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은밀히 실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화영은 문제가 있었다. 폐결핵이 완전히 낫지 않아 위장 취업 준비를 할 수 없었다. 그는 고향인 경북 예천으로 내려갔다. 빨리 낫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요양에 전념하는 것이 새로운 생활을 위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준비 작업이었다. 1976년 6월 마침내 김영준에게 기회가 왔다. 현대중공업 사내직업훈련소 입소자로 선발된 것이다. 물론 학력이나 전력을 감췄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주변에도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았다. 2~3명에게만 ''''''''''''''''잠수''''''''''''''''하겠다고 말했을 뿐 울산으로 간다는 내용도 알려주지 않았다. 정화영에게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새로운 세계''''''''''''''''에 임하는 자신의 기대와 심경을 전했다. [앰네스티의 위장 취업 지원] : 문제가 된 편지는 바로 이 것이었다. 정화영이 이 편지를 폐기하지 않고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정화영도 고향에서 요양하며 은인자중했다. 하루 빨리 건강을 되찾아 앰네스티가 지원하는 직업 훈련을 받고 현장으로 들어가려는 생각뿐이었다. 시빗거리가 될 만한 어떤 일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사건의 발단은 다른 데 있었다. 그는 뭔가 하려고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 있는 대로 의심을 받았다. 관내 형사들은 그가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으면 더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만큼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있었던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경북대 정외과 67학번인 그는 ''''''''''''''''경북대의 민비연''''''''''''''''이라고 불린 정사회(正思會)의 핵심 멤버였다. 정사회는 1964년 6-3사태 때부터 경북대 학생운동을 주도한 이념 서클로, 학생운동사상 단일 서클로는 가장 혹심한 탄압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중 유일하게 사형이 집행된 여정남이 이 서클의 초기 멤버다. 정사회 출신 가운데 이재형(현 영천에서 과수원 경영)-이강철(현 열린우리당 국민참여운동본부장)-임구호(현 포항 금산삼계탕 경영, 전 대구-경북민통련 상임위원) 등은 8년여 수형 생활을 하는데, 정화영도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그 일원이 된다. 그는 3학년 때인 1969년 3선개헌반대운동을 주도하다 강제 징집됐다.


  당시 정사회 회장은 유정선(현 경찰대 교수부장)이었다. 정사회는 3선개헌반대운동 이후 해체돼 정진회(正進會)로 이어지다 그가 복학한 1973년에는 한국풍토연구회(한풍회)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1973년 서울대 10-2데모 후 소강 상태에 빠진 대학가의 반유신 투쟁을 재점화한 경북대 11-5데모는 그가 한풍회를 기반으로 총력전을 펼친 시위였다. 당시 한풍회의 실질적 리더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복역한 뒤 남민전 사건에도 연루되는 임규영(현 구미 신평중 교사)이었고, 이강철이 학생운동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 때였다. 이런 배경과 전력 때문에 정화영은 요양 중에도 심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1976년 9월 어느 날이었다. 동네 4H클럽 회장 선거가 있었다. 그가 5년 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사건은 사소한 시비에서 비롯됐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나를 감시하는 경찰 끄나풀이 동네에 두 명 있었다. 그들이 와서 자꾸 시비를 걸었다. 뭘 했느니 말았느니 하면서 싸움을 붙였다. 경찰은 내가 고향에 내려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까 뭔가 준비를 하거나 농민운동을 하려는 거 아니냐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뒤에 들은 얘기인데 지서에서 방위 복무를 하던 동생 친구가 그 전부터 내가 구속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했다. 싹을 잘라버리려고 사건을 만든 것이다." 사소한 시비로 지서에 가서 말도 안 되는 조사를 받게 되면 결과는 뻔하다. ''''''''''''''''뚜껑''''''''''''''''이 열려 김지하의 [비어]에서처럼 "에잇 개 같은..."이라고 하면 ''''''''''''''''축생적조국비유죄''''''''''''''''라는 죄목이 붙을 판이고,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조목조목 따지다 보면 경찰의 처사나 제도를 비판하는 꼴이 되어 긴급조치 9호, 심지어 반공법을 위반하는 결과가 된다. 정화영이 그랬다. 그는 폭행 건으로 조사받는 과정에서 반체제 발언을 한 것이 긴급조치 9호에 저촉돼 구속 수감됐다. 이 무렵 김영준은 현대중공업 배관반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침 6시 10분에 기숙사를 나서서 저녁에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 골아떨어지는 생활을 4개월째 하고 있었다. 위장 취업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다. 학출(대학생 출신 노동자)은 아무래도 일하는 품이 어설프기 마련이다. 이를 감추려면 남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 그는 조급하게 생각해서 뭔가 해보려고 움직이지 않았다. 동료나 주변에서 눈치 챌 일이나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찍히면 반드시 죽는다] : 그 날 그는 30만 톤급 유조선에서 배관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창 일을 하고 있는데 작업반장이 그를 불렀다. 누군가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배에서 내려왔다. 배가 워낙 커서 내려오는 데만도 한참 걸렸다. 경비실에 이르니 지프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그 길로 연행돼 영등포경찰서로 압송됐다. 정보과에서 조사가 시작될 때에야 그는 까닭을 알았다. 울산에 내려가기 전 정화영에게 보낸 편지를 내놓는 게 아닌가. 그는 안도했다. 그 편지라면 전혀 문제될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조사하던 정보과 주임도 마찬가지였다. 문제 삼을 내용이 없으니 맥이 빠질 수밖에. 조사는 이런저런 사담(私談)이나 하는 자리가 됐다. 김영준의 최근 회고. "그는 내가 왜 울산에 있는지 궁금해 했다. 나는 ''''''''''''''''나이 30이 다 돼가는데 복학은 물론 취직도 안 되고 부모님도 안 계시니 먹여주고 재워주고 기술도 가르쳐주는 그 곳으로 가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까지 다닌 사람이 대단하다''''''''''''''''며 감탄했다. 설렁탕과 소주를 시켜주면서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걱정마라, 별거 아니니까''''''''''''''''라며..." 그런데 3~4일 후 정보과 주임이 떫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왔다.


  그는 "이상하다"며 "다시 조사해야겠다"고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군데군데 빨간 밑줄을 친 편지 사본을 내놓았다. 중앙정보부에서 재조사를 지시한 것이다. 밑줄을 친 부분은 이를테면 ''''''''''''''''빌붙어 살지 말고 제대로 살자''''''''''''''''라는 등 친구끼리 나눌 수 있는 막연한 표현이었다. ''''''''''''''''빌붙어 산다''''''''''''''''는 것은 ''''''''''''''''식민지''''''''''''''''를 의미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추궁하라는 주문이었던 것이다. 찍히면 반드시 죽는다. ''''''''''''''''막걸리 긴급조치'''''''''''''''' 시대에 일단 잡히면 풀려나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한밤중에 갑자기 동이 트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허황하다. 정화영의 가택을 수색해 김영준의 편지를 찾아냈듯이 이 번에는 그의 울산 기숙사를 이잡듯 뒤졌다. 물론 더 이상 나올 게 없었다. 1973년 서울대 10-2데모 때 일기장 때문에 고생한 경험이 있어 그와 그의 주변에서 이런 경우에 늘 대비했기 때문이다. 김영준은 편지 사건으로 1심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2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이듬해 4월 말 경에 풀려난다. 그는 석방 후 다시 울산에 내려가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직원 신분으로 전에 하던 일을 계속한다. 그의 ''''''''''''''''노동자적 삶''''''''''''''''은 1년 남짓 이어지지만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만다. 정화영은 3년형이 확정돼 복역한 뒤 민청학련 사건으로 받은 형집행정지 처분까지 취소돼 수형생활을 계속하다가 1981년에야 석방된다. 출소 후 그는 민청련 조직 작업에 앞장서고, 한겨레민주당 등 진보정치 진영에 참여한다.(신동호 編輯委員 뉴스메이커 2004.10.15 (금)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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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휘원(鄭輝元) : 풍양초등 졸업, 비파제지회사(琵琶製紙會社) 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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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흔교 : 1956- , 하리면 오류리 출신, 본관은 연일, 응상의 3자이다. 은풍초등, 운봉고 졸업, 중앙전자 사장이다. 운봉고총동창회장이다.(醴泉新聞 1999.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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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361


  용궁향교(龍宮鄕校 耆老宴 行事 開催) [記事] : 예천군 용궁향교에서는 2007년 9월 10일 오전 11시 용궁향교에서 김수남 군수를 비롯해 기관단체장과 지역 유림 1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로연 행사를 가졌다. 기로연은 선현들의 훌륭한 정신을 기리는 자랑스러운 유교문화이며, 조선시대 70세 이상의 원로 문신들을 위로하고 공경하기 위해 춘추로 조정에서 배풀던 행사로 지방 유림들의 유교문화와 경로효친 사상 등을 계승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행사다. 이날 행사는 세심루에서 기로연 행사를 가지게 되며, 투호놀이와 농악, 영시, 시조창 발표 등 다채로운 여흥 시간을 가지게 된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전통유교문화의 계승 발전과 올바른 정신 문화 파급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醴泉인터넷放送 2007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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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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