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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1846) : 예천읍 우계리 어린촌 입향조 태두남 종부시정(附 예천인터넷뉴스 정차모 대표, 21일 한국지역인터넷언론협회 최우수 보도상 수상...축하합니다/한맥개발 임기주 대표, 예천군민장학회에 10억 원 약정/예천방문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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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두남(太斗南) : 1486(성종 17)-1536(중종 31), 예천읍 우계리 어린촌(愚里村) 영순 태씨(永順太氏)의 입향조(入鄕祖), 자는 망이(望而), 호는 서암(西菴), 본관은 영순(永順, 渤海), 예천군 다인현의 입향조 영길(英吉, 珍原縣監)의 고손, 유광(有光)의 증손, 치생(致生)의 손자, 참봉 효정(參奉孝貞)의 아들, 석룡(錫龍)ㆍ언룡(偃龍)ㆍ명룡(命龍)ㆍ한룡(翰龍)의 아버지이다. 어려서 남달리 총명하여 허백당 김양진(虛白堂金楊震)의 사랑을 받았다. 김양진은 호명면 직산리 한갓(大枝)의 귀양살이하는 집으로 그를 데려다 키우면서 가르쳤다. 1509년(중종 4) 11월 15일에 그가 성균관 유학(成均館幼學)으로서 사정전(思政殿)에서 임금과 재상들 앞에서 <춘추(春秋)>를 강의한 적이 있었다. 유학(幼學)으로서 1513년(중종 8) 식년 생원시에 3등 50위로 합격, 동년 식년 진사시에 3등 93위로 합격, 같은 해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 제1인자로, 용문 사람 변광대(邊光大)와 함께 급제, 형조 좌랑(刑曹佐郞)과 정랑(正郞)에 올랐다. 개령 현감(開寧縣監)으로 나가 향교를 고쳐 세워 학문을 일으켰고, 1525년(중종 20)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에 부임하여 당시의 유명한 선비 회재 이언적(晦齋李彦迪), 충재 권벌(沖齋權벌), 수헌 권오복(睡軒權五福) 등과 양정회(羊汀會)를 조직하여 서로 사귀면서 시(詩)를 주고받았다. 그 후 사도시 첨정(司도寺僉正),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전라도 암행어사(全羅道暗行御史)를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올랐다. 또 남원(南原), 상주(尙州), 선산(善山)의 골원이 되어 모두 청렴결백(淸廉潔白)한 정치를 하여 가는 곳마다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그 후 성균관 직장(成均館直長), 사섬시 정(司贍寺正),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정3품인 종부시 정(宗簿寺正, 1536)에 올랐다. 이는 왕실의 사무와 책, 족보 등을 조사 연구하는 기관의 장관이다. 이때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하였다. 그런데 김안로(金安老)가 정권을 잡자, 그의 스승인 김양진(金楊震)을 시기하여 해치려던 차에, 김양진이 죽자, 사람들이 김안로가 무서워서 감히 장례를 돌보지 못하였으나, 그는 떳떳이 나아가 정성을 다하여 직산리(稷山里) 한갓에 묘지를 정하고 장례를 치루었다. 그로 인하여, 그는 김안로의 미움을 사서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좌천되어 재직 중에 타계하였다. 묘는 예천읍 백전2리 능골 복성동 와우산(福成洞臥牛山)에 있다. 후손들이 그를 위해 우계리(愚溪里)에 쌍암정(雙岩亭)을 지었고, 보문면 옥천리의 옥천서원(玉川書院)에 제향(祭享)하였다. 정묘하게 문장과 시를 지었다. 천성이 강직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하여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저서로는 <당시발문(唐詩跋文)>과 <경언록(瓊言錄)> 2권이 있다.(中宗實錄 1509.11.15, 襄陽誌 1661, 醴泉郡邑誌 1780 1786 1841, 醴泉郡誌 1939, 朝鮮환輿勝覽 1929, 國朝人物考, 龍宮縣邑誌, 族譜, 家牒(咸豊十年), 韓國人名事典, 韓國人의 族譜, 原色世界大百科事典 28卷 53쪽)
[王朝實錄] : 성균관 전적(1517.11),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1518.1), 개령 현감(開寧縣監, 1518.7.22), 봉상시 주부(1525.4), 장례원 사의 (掌隷院司議, 1525.5), 경상도 도사, 공조 정랑(1526.7), 성균관 전적, 경상도 도사, 공조 정랑, 사도시 첨정(1527.8.6), 성균관 사예(1528.1), 남원진관 병마첨절제사(1529.5.15), 선산 도호부사(1532.8), 상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1532.9), 성균관 직강(1535.2), 사첨시 정(1535.3.2), 종부시 정 겸 춘추관 편수관(1535.6.27), 좌사간, 성주 목사(1535.10.28), 암행 어사, 사헌부 장령, 집의를 지냈다. 모습이 헌출할 뿐 아니라 구변이 좋고 시문이 능하다는 명성이 자자하였다. 회재 이언적(晦齋李彦迪)과 수헌 권오복(睡軒權五福)과 도의로써 서로 친히 사귀었고, 소세양(蘇世讓), 황여헌(黃汝獻), 황윤헌(黃允獻)과는 문예로써 서로 사귀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물욕에 병들지 아니하여 당시에 권세를 등에 업은 간사한 무리들에게 물들지 않았고, 그들의 삽작에 발을 들여놓는 일이 없었다. 1509년(중종 4) 11월 15일 유학 태두남이 <춘추>를 강(講)하여 논란하였다. 간사한 김안로(金安老)가 원래 허백당 김양진(虛白堂金楊震)을 미워하여 화를 뒤집어 씌우려할 즈음 두려운 기색없이 달려가 몸이 땅에 닿도록 예(禮)를 올리니 당시의 세도가 김안로가 이 사실을 알고서 성주 목사로 좌천시키고도 분노가 풀리지 않아서 일을 획책하여 꾸미던 중에 그가 죽자 모함을 그치었다. 묘는 예천읍 백전2리 와우산(臥牛山)에 있고, 묘갈명이 있다.
<송눌옹집(宋訥翁集)>에 의한 태두남의 사우(師友)는, 점필재 김종직(점畢齋金宗直), 정랑 권칠림(正郞權七臨), 의암 한백륜(毅庵韓伯倫), 도촌 이수형(桃村李秀亨), 한훤당 김굉필(寒暄堂金宏弼), 일두재 정여창(一두齋鄭汝昌), 눌옹 송석충(訥翁宋碩忠), 추강 남효온(秋江南孝溫), 금남 최부(錦南崔溥), 영천 박담손(靈川朴聃孫), 숭양 심희연(嵩陽沈希演), 망헌 이주(忘軒李胄), 탁영 김일손(濯纓金馹孫), 초당 강경서(草堂姜景敍), 한재 이목(寒齋李穆), 재사당 이원(再思堂李원), 장육당 이별(藏六堂李鼈), 창계 문경동(滄溪文敬仝), 감찰 정응상(監察鄭應祥), 인재 공인달(仁齋孔仁達), 진사 곽승화(進士郭承華), 첨정 금치담(僉正琴致湛), 참봉 우석정(參奉禹錫鼎), 공산인 이자경(公山人李子敬), 졸재 권오기(拙齋權五紀), 수헌 권오복(睡軒權五福), 서암 태두남(西庵太斗南), 야계 송희규(倻溪宋希奎), 진사 이인견(進士李仁堅)이다. 13세 때 보문사(普門寺)에서 글을 읽다가 돌아올 때 벽에 쓴 시가 있다. [內容] 많은(千斛) 공자 학문(洙源)을 담금질로 다했으니/ 보갑 속에 칼날이 서리처럼 늠름하네/ 내일 아침 그 칼로 장경(長鯨 : 貪慾하여 滿足할 줄 모르는 惡人)을 처단할세/ 풍운이 조정을 옹위함을 앉아서 보리로다//(西庵集, 司馬榜目, 文科榜目中宗實錄, 襄陽誌 1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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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두남 [記事] : 한국문집총간(026_290b) 면앙집(?仰集, 1829)에 실린 작자 미상(未詳)의 기사로, "?仰集卷之六/ 附錄/ 正德八年癸酉八月二十日生進榜目。/ 恩門。/ 一所。 禮曹/ 議政府右參贊尹金孫。 漢城府判尹姜渾。漢城府左尹成夢井。 刑曹參判沈貞。繕工監正柳雲。 弘文館直提學尹殷輔。司贍寺副正具之愼。 內資寺正金安國。弘文館副校理蘇世讓。 禮曹正郞金希壽。司憲府監察李貴宗。 司憲府監察曺漢卿。/ 生員試。/ 三等七十人/ 兩試 幼學太斗南。望而。 本 永順。居 醴泉。同年式。父 學生孝貞。// 進士試/ 三等七十人/ 兩試 幼學太斗南。望而。 本 永順。居 醴泉。父 學生孝眞。幼學鄭允?。敬夫。 本 東萊。居 同。父 從仕郞繼俊。"이다.(www.minchu.or.k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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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두남(‘渤海 大祚榮의 後孫 太氏’ 淵源과 現況…東北공정 打開할 重要 史料) [記事] : 우리나라의 태씨는 발해의 전신인 진국(震國)을 세운 대중상을 시조로 한다. 대중상은 고구려 유장으로, 아들 대조영과 함께 고구려가 멸망한 지 28년 후인 696년, 고구려의 고토(故土)였던 지금의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돈화시 현유진 동모산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를 세웠다. 중국의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각각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高麗別種)과 속말말갈부의 고구려인이라고 한 기록이 전한다. 정수일 교수(동국대 사학과)는 "고구려의 별종이란 풀이에 대해 중국 측은 고구려와는 다른 종족이란 뜻으로 해석하지만, 이는 고구려의 다른 한 종으로 해석해야 정확하다"며 "속말말갈이니 백산말갈이니 하는 것도 중국왕조 중심의 역사관에 입각해 당나라 동북방의 이민족을 비하해 불렀던 것으로, 속말말갈은 송화강 지역에 살던 고구려인이었다"고 풀이했다. 대중상이 죽자 대조영은 2년 뒤 국호를 발해로 고쳤다. 발해는 이후 229년간 15대 황제가 재위했으며, 독자적인 연호를 쓴 동방의 대제국으로 군림했다. 926년 발해는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고, 발해의 마지막 왕이었던 대인선(애황)의 세자였던 대광현은 934년 수만 명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했다. 삼국유사,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역사서와 사료 가치가 있는 협계 태씨, 영순 태씨 족보 등에는 고려태조 왕건이 망국의 세자로 망명한 대광현과 발해의 신하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유민들을 고려와 한 뿌리로 여겨 후히 예우했다고 나와 있다. 대씨가 태씨로 바뀐 까닭과 시기는 언제일까. 문헌에 따르면 ''''태조 왕건이 큰 대(大)와 클 태(太)는 통용하는 자로, 동사통감(東史通鑑)에 발해 고황 대조영에 관한 기록을 할 때 태조영이라고 해 태조가 대씨에서 태씨로 사성(賜姓)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를 비롯한 다른 사서에도 고려에 망명한 대씨는 상당수에 이르지만 당시 태씨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 현종 이후 활동했던 인물 가운데 대씨가 아닌 태씨가 등장하는 것으로 미뤄, 대씨가 태씨로 바뀐 시기를 고려 중기라고 짐작할 뿐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이후 조선에 들면서 태씨가 일반화됐다. 태씨의 본관은 크게 협계(陜溪)와 영순(永順) 등으로 나눈다. 남원, 나주, 밀양도 있지만 협계와 영순에서 분가한 것으로 본다. 특히 남원 태씨는 현재 북한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협계 태씨는 현재 전북 임실과 옥구 등지에 집거하고 있으나,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대부분 순절해 그 후손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영순 태씨는 대중상의 31세손인 태순금 일족이 임진왜란을 전후해 문경시 영순면에서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로 이거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영순 태씨 중시조는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을 물리치고 대장군에 오르며 영순군에 봉해진 태금취이고, 이때부터 관향을 영순(용궁현 영순, 1914년부터 문경시 영순면)으로 하고 있다. 송백리 사당에 모신 위패는 조선 중종 때 춘추관 편수관을 역임한 대중상의 29세손인 태두남이다. 태두남은 청백리로 유명하고, 지금은 예천의 옥천서원에 배향돼 있다. 태씨는 1,3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와 선조의 찬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한에 2천여 가구, 6천여 명이 거주한다. 성별 인구 112위의 희성(稀姓)으로 남아 있다. 영순 태씨는 이 가운데 4천여 명으로 추정된다. 협계 태씨와 영순 태씨 족보는 다른 족보와 달리 발해의 기원, 발해 왕세 약사, 지리와 강역, 관제와 문물, 외교문서, 연표, 대씨가 태씨로 변한 사실 등 발해와 태씨의 역사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학계에선 발해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너뜨릴 중요한 사료로 평가하고 있다.(박진관 記者 쿠키뉴스 2006년 10월 3일 (화)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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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두남(渤海國과 太氏) [記事] : 고구려가 멸망한지 28년후인 696년 장군 ‘대중상’은 중국 길림성 연변땅 동모산에서 ‘진국’을 개국했고, 그가 타계하자 아들 ‘대조영’은 국호를 ‘발해’로 고쳤다. 그 후 229년 간 15명의 황제가 이어졌으며, 독자적 연호를 쓴 동방의 대제국이 되었다. 926년 발해는 거란족에 의해 사라지고, 마지막 황제 ‘대인선’의 世子였던 ‘대광현’은 934년 수만 명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망명했다. 태조 왕건은 그들에 벼슬을 내리고, 유민들을 ‘고려와 한 뿌리’라며 잘 돌봐주었다. 그리고 태조는 ‘大’와 ‘太’가 같은 뜻으로 통용된다 해서 ‘太氏’성을 賜姓(사성)하여 그후 大氏가 太氏로 바뀌었다. 太氏 유민 일부는 더 남쪽 경상도로 내려와 문경 영순현에 정착했는데, 임진왜란 때 ‘대중상’의 31세손 ‘태순금’ 일족이 경북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로 이주해 현재까지 살고 있다. 태씨 본관은 대별해 ‘협계태씨’와 ‘영순태씨’로 나누는데, 협계태씨는 전북 임실과 옥구 등지에, 영순태씨는 경산 송백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고려 고종 때 몽고군과 싸워 대승을 거둔 ‘태금취’ 대장군, 조선조 중종 때 춘추관 편수관을 지냈고, 청백리에 오른 ‘태두남’ 대감은 송백리 사당에 위패가 모셔져 있고, 예천 옥천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그 후손으로 70년대 부총리를 지낸 태완선 씨, 60년대 대구시장을 지낸 태종학 씨, 원로 텔런트 태현실 씨 등이 유명인사들이다.‘발해국과 太氏’는 지금 ‘역사논쟁’의 쟁점이 되고 있다. 지금 우리 역사교과서에 ‘발해사’는 빠져 있다. 발해사를 우리역사에 포함시키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보는 역사학자들이 있고, 중국은 발해를 송두리채 중국역사에 포함시키려는 ‘동북공정’에 광분하고 있기 때문. 그러나 太氏들은 단호히 “발해사는 명백한 한국사”라고 단정한다. 중국에는 태씨나 발해의 후손이 없고 한국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씨 족보에는 발해사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수록돼 있다. 발해의 기원, 발해 왕세 약사, 지리와 彊域(강역), 官制와 문물, 외교문서, 연표, 대씨가 태씨로 변한 연유 등이 낱낱이 기록돼 있어서 발해사 연구의 중요 자료가 되고, 중국의 동북공정을 반박한 결정적 사료가 되고 있다.(慶北日報 2007/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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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두남 [記事] : 학사집 (鶴沙集) 11권 6책 중 卷7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墓碣銘 / 通訓大夫行司憲府執義太公墓碣銘(幷序) 40/ 太斗南(1486~1537)의 묘갈명이다. 자는 望而로 永順人이다. 1513년(중종 8)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문과에 급제했다. 형조좌랑·사헌부장령·성주목사를 역임했다. [예천읍 우계리에서 살았고, 무덤이 백전리 능골에 있다.](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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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두남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醴泉 / 人物 / 高麗 林民庇 毅宗朝擢第官至同中書門下平章事爲相挺然有古風好善周急確實無華故武夫悍卒亦知景仰年七十三致仕謚文靖 林宗庇 工於四六 林椿 宗庇從子毅宗時人以文章鳴世屢擧不第鄭仲夫之亂闔門遭禍椿脫身僅免卒窮夭而死號西河先生有集行於世 高麗史云西河人未知何據 林支 漢元宗時以本郡吏從征東都叛將崔宗 崔積 崔思等有功欲賞以職支漢辭請以尙州管內多仁縣移屬本郡元宗許之 林惟正 登第官至祭酒工於集句有百家衣集 本朝權孟孫 登第官至藝文館大提學謚/ <하권0396-4>/ 齊平 尹祥 以縣吏登第學問精深誨人不倦長成均凡十有六年官至藝文館提學年七十八退老于鄕學者集雲八十三卒近代師儒之最 流寓本朝趙庸 洪武壬申謫居詳眞寶縣 孝子本朝林? 仕至監察爲父居廬三年末嘗見齒事聞旌閭 金? 其父早死以?得行喪及壯?歿廬墓年爲父仍居三年事聞拜架閤庫錄事 潘濡 爲父居廬三年事間旌閭 權節山 爲母居廬三年事聞旌閭 尹奕 郡吏也養父母家雖貧未嘗闕酒肉及歿哀毁踰禮事聞旌閭 盧珣 進士也少失父鞠於其祖珍珍年六十居母廬罹疾幾死珣奉藥先嘗禱於北辰求以身代嘗糞味苦疾果愈 烈女權氏 安東權啓生女年二十其夫宋孝從死親自負土葬於家北率五?先兒朝夕不離墓側終三年一曰有虎攬子而去權氏左手扶子右手拒虎呼曰皇天有知乞賜照臨虎乃棄去 新增 人物權五紀 文科以承文副正字選拜藝文館?閱止執義號拙齋 權五福 五紀之弟/ <하권0397-1>/ 文科官至校理早受業於??齋 金宗直門下戊午之禍興金馹孫等同被極刑號睡軒有文集行于世鄕人立祠享之 太斗南 文科官至執義以文章鳴于世 張孟羽 延福君末孫之子文科官至校理 權文海 文科官至左承旨有所撰大東韻玉二十卷號草澗 鄭琢 文科 宣廟朝官至左議政謚貞簡號藥圃鄕人立祠享之 當?丙子 命進?像 御製其銘銘曰筵中偶聞取覽厥像遺像偉然 穆廟名相百年之後入于 楓宸特題其銘以聳嶺人 曹友仁 萬曆乙巳文科昏朝坐詩案??三載酷被?掠癸亥 改玉官至承旨 朴廷薛 孝宗朝登第官至參判 金賓 孝宗朝登第官至參判 李東標 肅廟癸亥擢魁科歷銓卽舍人止參議號懶隱有學行風節 當?辛酉筵臣以力主淸議樹立卓爾建白 特贈吏曹判書 流寓本朝張末孫 天順己卯文科以 世祖朝敵愾功臣封延福君謚安襄 李光胤 益齋 齊賢之後文科官至校理號?西 權檣 忠定 ?之弟正德己卯登/ <하권0397-2>/ 賢良科以南床選入翰苑官至正郞以己卯賢 當?丙寅 贈副提學號霽村 朴從鱗 嘉靖丙辰文科選翰苑歷三司止銓郞 丁允祐 貳相 應斗之子文科官至監司 新增孝子李介立 隆慶丁卯進士以孝行擢授縣監 肅宗朝褒贈參判號省吾 魯瑞麟 郡吏也父病斷指垂口得甦 肅宗朝事 聞旌閭 新增烈女洪氏 習讀 文經濟之妻事在三綱行錄事 聞旌閭 呂氏 文應周之妻卽洪氏之歸事在三綱行錄事 聞旌閭 文氏 命周之女未?遭壬辰亂賊先刃其父?水女呼哭從溺事 聞旌閭 申氏 李宓之妻宓隨父大憲瀣朝京歿于燕訃至忽有白鳩來止于肩貌甚??馴擾異常每申氏號哭鳩輒承淚飮之常不離於側人以爲幽感申氏號哭平生無異袒括白衣疏食以終其身事 聞旌閭 李氏 權尙?之妻年二十八夫歿哀毁過禮冬月不著絮袍年過七?而食素終身 肅宗朝事 聞旌閭 朴氏 權國柱之妻六十偏寡淚盡繼血遂至喪明素食以終八耆事 聞/ <하권0397-3>/ 旌閭(history.go.k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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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두남 [記事] : 중종실록 10권/ 중종 4년(1509 기사 / 명 정덕(正德) 4년) 11월 15일(계유) 2번째 기사/ 《중용》·《상서》·《춘추》를 강하고 논란하다/ 상이 사성전에 나아갔다. 생원 임계중(任繼重)은 《중용(中庸)》을 강하여 통(通)하고 이태(李?)는 《상서(尙書)》를 강하여 조(粗)하고, 유학(幼學) 태두남(太斗南)은 《춘추(春秋)》를 강하여 조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생들이 강을 잘하지 못하였으니, 재상이 서로 더불어 논란하라.”하였다. 재상들이, 임금과 신하는 일체인 것, 군자 소인을 분변하는 일, 정심 성의의 도를 강론하다가, 날이 신시[?]2870) 가 되어서야 그만 두었다./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12장 A면/ 【영인본】 14책 394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註 2870]신시[?] : 오후 4시 경. ☞(history.go.k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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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두남 [記事] : 중종실록 57권/ 중종 21년(1526 병술 / 명 가정(嘉靖) 5년) 5월 12일(갑오) 2번째 기사/ 사헌부에서 지평 태두남을 체직시킬 것을 건의하여 이를 따르다/ 헌부가 아뢰기를, “지평(持平) 태두남(太斗南)은 대간에 합당치 않으니 체직시키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 전교하였다.【이날의 정사(政事)13583) 에서 임명되었는데, 즉시 개정하라는 논박이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29책 57권 7장 B면/ 【영인본】 16책 511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註 13583]정사(政事) : 인사 행정. ☞(history.go.k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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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두남 [記事] : 중종실록 59권/ 중종 22년(1527 정해 / 명 가정(嘉靖) 6년) 6월 27일(임신) 3번째 기사/ 간원이 궐내의 소동 및 원계채·태두남의 일을 아뢰다/ 간원이 아뢰기를, “궐내의 모든 일은 외간 사람으로서는 미처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정원(政院)은 근밀(近密)한 지위이니 의당 먼저 알았어야 할 것입니다. 근일 소동했던 일을 정원에서 만일 그것이 허망한 일임을 알았다면 곧 금지하지 못한 사람을 추문하라고 아뢰었어야 할 것입니다. 어찌 문서만을 출납하는 것이 임무일 뿐이겠습니까? 추문하소서. 장령 원계채는 전에 장령에 임명되었을 때 체모를 잃었다는 것으로 갈렸었습니다. 그때 또 준품(準品)으로 옳게 임명했다는 것으로 논계(論啓)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 다시 장령이 되었으니 말해 뭐하겠습니까? 지평 전한 은 여론(輿論)이 흡족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아울러 체직시키소서. 어제의 정사(政事)14020) 는 원계채 만 잘못 의망(擬望)했을 뿐이 아닙니다. 태두남(太斗南) 도 전에 지평으로 있을 때에 역시 물의 때문에 체직되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근일에 논박받는 사람들입니다. 이조(吏曹)에서 비록 사람이 모자란다고는 하지만 서로 용납하지 못할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경솔히 주의(注擬)하였으니, 공론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조정의 정사(政事)도 장난같이 여긴 처사입니다. 그 날 정청(政廳)에 들어갔던 당상·낭관은 모두 파직시키소서. 그리고 당초에 허사(虛事)로 하여 경동된 일에 대해서는 도총부(都摠府) 또한 궐내에서 군사를 검찰하는 것이 소임인데도 금지하지 못하였으니, 입직(入直)하였던 당상·낭관을 모두 추문하소서. 또 전일에 하옥(下獄)하였던 위부장(衛部將)은 일찍이 정죄(定罪)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래 군율(軍律)이 해이되었으니 청컨대 전례에 의하여 파출시키소서. 사소 위부장(四所衛部將)도 모두 함께 파출시키소서.”하고, 또 전의 일을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서소 위부장(西所衛部將)이 병조에 첩보(牒報)한 일에 대해 정원이 추문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추문을 명한다면 함답(緘答)하는 가운데 반드시 형상(形狀)하는 일이 많을 것이므로 추문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원계채와 전한은 아울러 체직시키도록 명한다. 이조는 사람이 모자라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니, 어찌 사정(私情)을 두었겠는가? 파직은 지나칠 것 같다. 서소의 위부장은 이미 파직시켰다. 사소(四所)의 위부장은 허다한 군졸이 일시에 소동하는데 일시에 금지시킬 수 있었겠는가? 이미 이 율문(律文)에 의거 죄를 정하였으니 파직시키는 것은 불가하다. 도총부 당상·낭관은 아뢴 대로 추문하라.”하고,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30책 59권 21장 B면/ 【영인본】 16책 582면/ 【분류】 *군사-중앙군(中央軍) / *인물(人物)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임면(任免)/ [註 14020]정사(政事) : 인사 행정. ☞(history.go.k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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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두남 [記事] : 중종실록 73권/ 중종 27년(1532 임진 / 명 가정(嘉靖) 11년) 10월 21일(을미) 3번째 기사/ 삼공이 수령 체직의 정지를 아뢰니 전교하다/ 삼공이 아뢰기를, “경주 부윤【 김계우임.】을 까닭없이 체임(遞任)했고 남원(南原) 【부사(府使) 태두남(太斗南)임.】과 영해(寧海) 【부사(府使) 변성(邊成)임.】를 또한 서로 바꾸었습니다. 수령을 맞고 보내는 행사는 평상시에도 백성에게 폐단을 끼치게 되는데, 더구나 이런 흉년에는 백성에게 폐단이 더욱 많게 됩니다. 그대로 맡겨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였다. “부윤(府尹) 중에는 참의에 합당한 사람이 지극히 적다. 그리고 지금은 농시(農時)가 아니니 수령을 체직할 만한 때다. 그래서 외임(外任)인 사람을 주의(注擬)하도록 전교했더니 이조가 부윤을 참의【공조(工曹).】의 망(望)에 주의했기 때문에 낙점하였다. 그러나 남원 과 영해 는 그대로 맡겨 두는 것이 좋겠다.”/ 【태백산사고본】 37책 73권 34장 A면/ 【영인본】 17책 384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농업-농작(農作)(history.go.k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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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두남 [記事] : 한국근현대인물자료 / 이름 태병현 ( 太秉鉉 ) / 민족구분 한국인 / 본관지 永順/ 생년월일 1868-01-28/ 현주소 慶尙北道 慶山郡 南松面 松川洞 一統十戶/ 가족관계 기타 永順君 太金就 二十三世孫, 執義 號西菴 太斗南 十三世孫/ 학력 漢文受學/ 종교 儒敎/ 참고문헌 조선신사대동보, 1133(history.go.k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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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두남 [記事] : 한국근현대인물자료 / 이름 태재선 ( 太在善 ) / 민족구분 한국인 / 본관지 永順/ 생년월일 1875-12-19/ 현주소 京畿道 南陽郡 靈興面 外洞 9의 10/ 가족관계 기타 全羅道 暗行御史와 尙州 牧使를 지낸 太斗南(의 16世孫)/ 학력 漢文을 受學/ 경력및활동 1905년 2월일 中樞院議官을 역임/ 종교 儒敎/ 인물평외모 1913년 현재 농사에 전념/ 참고문헌 조선신사보감, 신사 1010(history.go.k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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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112) : 태두남(어린촌 마을에서 한갓 마을로 가서...)(作成 張炳昌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2002-10-31 照會 137)
→<예천의 자랑> 제1권(張炳昌 著 2004年) =185쪽
→예천이 자랑(1182) : 태두남.태금취(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너뜨릴 중요 사료인 예천의 태씨 이야기)(作成 張炳昌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2006-10-03 照會 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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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인터넷뉴스 정차모 대표, 한국지역인터넷언론협회 최우수 보도상 수상...축하합니다.
정차모 [記事] :
한국지역인터넷언론협회는 2009년 2월 21일 전남 함평군 나비축제 전시 영상실에서 회원사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2008년도를 결산하고 한해를 새롭게 출발하는 정기총회를 열었다.
이곳에서 예천인터넷뉴스 정차모 대표는 최우수 보도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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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맥개발 임기주 대표, 예천군민장학회에 10억 원 약정
한맥개발(한맥開發(株) 임기주 代表, 郡民奬學會 奬學金 10億 원 寄託 約定) [記事] :
예천군민장학회가 2008년 12월 10일에 설립된 이후 예천군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기금조성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지역기업의 대표가 장학기금 10억 원 기탁을 약정하여 큰 미담이 되고 있다.
미담의 주인공은 한맥개발(주) 임기주 대표이사로 임 대표는 5년간 상·하반기 1억 원씩 총 10억 원을 기탁하기로 약정을 했다.
임기주 대표는 이날 약정서를 제출하면서 "경제상황이 좋지 않지만 예천지역에 연고를 가지고 있는 기업 대표로서 예천지역 인재 육성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장학금 기탁을 약정하게 되었다"면서 지역 인재 육성에 소중하게 써 달라고 당부했다.
한맥개발(주)은 지난 2004년에 예천군과 협약을 맺고 개발촉진지구사업으로 골프장과 주거휴양단지를 조성해 현재 18홀 대중골프장인 한맥CC를 운영하고 있으며, 테마형 골프전원마을인 노블리아 전원마을을 조성해 분양하고 있는 업체이다.
한편, 예천군민장학회는 지금까지 1,300여 개인 및 기관단체에서 기금모금에 참여하여 18억 6천만 원의 장학기금을 조성했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02-20 오전 9: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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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372
정사 묘([하국근의 風水기행] 玉女端坐形 醴泉 鄭賜 墓) [記事] :
풍수에선 음양의 조화를 중시한다. 음과 양의 배합으로 천지만물의 순환이 이어진다고 본다. 자연의 순리란 얘기다.
남자와 여자가 배필이 되듯, 땅도 마찬가지다. 남성을 닮은 우람한 산이 있다면 여성을 닮은 부드러운 산이 있어야 조화가 이루어진다.
정사의 묘는 여성을 닮은 산이다. 전체를 아우르는 수려하고 단정한 주산이 그러하며, 묘소가 들어선 혈처가 그러하다.
반대편에 있는 조산인 비봉산(飛鳳山)은 우람한 남성형이다. 마을 주민들은 탕건을 쓰고 버티고 앉은 남정네라 했다.
그렇다고 이 묘의 주산인 옥녀봉(太乙峰)이 나약하다는 말은 아니다. 작지만 들판에 우뚝 선 힘있는 산이다.
주위의 산세가 모두 그러하다. 어디 한군데 험한 곳이 없다. 어머니와 같이 한없이 정겹게 느껴지는, 그런 부드럽고도 강건한 산이다.
남녀가 만나 짝을 짓듯 태을봉과 비봉산의 정기가 합쳐 정씨 가문을 조선조 명문(名門)으로 키운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 묘의 혈장은 여성의 하체를 닮았다. 쭉 뻗은 두 다리며 오목한 혈처가 영락없다. 흘깃 돌아다보는 남정네에게 치부가 보일까 부끄러워 청룡을 길게 끌어 가리기도 한다.
이는 여자에게 필요한 거문고다. 이른바 횡금안(橫琴案), 풍수용어로 청룡장안(靑龍長案)이다.
이런 국세에선 뛰어난 인물들이 속출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오목하게 파인 형태가 모두 혈(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곳은 그저 물길일 뿐이다. 반드시 돌출한 부분이 있어야 한다. 오목함 속의 볼록하게 솟은 곳, 여기서도 적용되는 음과 양의 조화다.
정사의 묘가 그러하다. 전체적으로 오목한 가운데 그 중심, 묘가 들어선 부분은 남성의 하체를 닮았다.
이 묘의 음양배합은 어느 곳보다 긴밀하다 하겠다. 산은 물을 만나야 조화를 이룬다.
그것도 직선으로 흐르거나 치고 들어오면 재미가 없다. 둥글게 감싸 안듯 흘러야 한다. 이 묘의 바깥을 감싸 안는 물은 낙동강이다.
큰 명당에 큰물인 셈이다. 비봉산 아래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은 말 그대로 환포다.
거기에다 단단한 토질에 꿈틀거리는 내룡맥(來龍脈), 청룡과 백호도 두 팔을 벌려 혈장을 잘 감싸고 있다.
이만한 길지(吉地) 조건을 갖춘 곳도 드물다. 그러기에 8대 명당에 든 것일 게다. 이 묘가 위치한 마을의 이름은 지보리다.
조금은 어감이 이상한 이 지명의 유래가 재미있다. 여자의 하체를 닮은 묘 주변의 생김새에 연유한다는 게다.
이것은 풍수학계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얘기다. 땅도 좋은 땅이 있고 나쁜 땅이 있다.
인간은 좋은 기운이 감도는 땅에서 살아야 하고, 죽으면 그런 땅에 묻혀야 한다.
그래야 자연과 인간이 교감이 된다. 발복(發福)은 그 후의 일이다.
하국근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 정사 묘=부산 화지산에 있는 정문도(鄭文道) 묘와 함께 양대 정묘(鄭墓)로 일컬어지는 명묘(名墓).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에 있다. 정사(鄭賜)는 조선 초 예문관 직제학, 진주목사 등을 지냈다.
직계 후손에서 13명의 정승이 난 것으로 유명하다. 풍수에서 옥녀는 젊은 여자, 천상의 여자이며 절세의 미인인 동시에 풍요와 다산을 나타낸다.
옥녀형국은 둥그스름하게 솟은 주산을 가지며, 혈장(穴場)은 여성의 하체형상을 띠는 곳이 많다.
이런 곳은 혈장이 오목한 모습이며, 와혈(窩穴)이나 겸혈(鉗穴)이 이에 속한다.
정사 묘는 통상 와혈로 보지만 주변 정황상 겸혈로 보기도 한다.
(每日新聞 2009-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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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향교지 하권(龍宮鄕校誌 : 1398-2004 / 下) [冊] : 용궁향교(龍宮鄕校)의 편저로, 1177-1463쪽(683쪽 分量), 27cm, 예천(醴泉) 용궁향교에서 2005년에 발행하였다. 부록으로, ''''龍宮鄕校 所臧 資料 影印本''''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일반도서실(B202호)에 소장(청구기호 370.91182 용17ㅇ v.2=2)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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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