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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1849) : 용궁면 출신 정춘모 갓명장(附 상리면 용두리 출신 도희섭, 박사학위 취득...축하합니다/예천방문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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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모(鄭春模) : 1940- , 용궁면 출신, 8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인간문화재 후보 지정(候補指定),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 초청 특별전시회(特別展示會) 제작시범, 91년 통영갓의 명장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기능보유자 지정(技能保有者指定, 現), 한국무형문화제 기능보존협회 이사장이다.
예천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독학을 한다고 대구에서 하숙할 때, 그 집이 갓집이었다. 그 곳엔 인간문화재였던 고재구, 전덕기, 김봉주 옹을 비롯한 경남 충무(慶南忠武)의 대가(大家)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 속에서 틈틈이 심부름하여 잔일 거든 게 한 평생의 붙임이 되고 말았다. 갓의 원형과 제조 기술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계승하고 있는 그는, "70년 대에 들어서면서 아무도 갓 제작에 관심을 안 갖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하든 갓의 전통을 계승해야겠다는 집념으로 배우게 되었다."라는 그는, "갓에 미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통영(統營) 갓"하면 예로부터 우리나라 갓의 대명사로 불리었다. 임금이 쓰는 어립(御笠), 국상(國喪) 때면 누구나 써야 했던 백립(白笠), 명주를 입힌 최고급품인 진사립(眞絲笠)은 모두 이 곳에서 제작되었다. 갓은 언뜻 보기엔 대나무와 말총으로 얼기설기 엮으면 될 것 같지만, 피나는 훈련과 오랜 경험에서 생기는 일종의 영감이 있어야 한다.
말총을 촘촘히 엮어 모자를 만들고, 대나무를 머리카락의 절반 굵기만큼 가늘게 클로 다듬어 차양을 만들고, 이 둘을 한데 맞추면서 구멍이 막히지 않도록 엷게 먹과 옻칠을 수 십 번 거듭하는 그 과정은 무려 50여 단계나 된다.
따라서 예전에는 작업이 각기 다른 세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정춘모 혼자서 세 가지 일을 해나가고 있다. 열심히 작업하면 한 달에 두서너 개의 갓을 만들 수 있으나, 실용성이 없는 물건이기 때문에 요즘엔 한 달에 한 개 정도 갓을 만든다고 한다.
1982년 후반기에는 갓을 사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 옛 것에 대한 일반인의 무관심이 야속하게 느껴진다는 그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갓의 명맥을 잇는 일인데, 30년 전부터 갓 일을 배우려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고 말한다.(每日名鑑 1997)
[國民日報] : 예천에도 갓 만드는 곳이 있었는데, 60년대 예천에는 입자장(笠子匠)만 있었다. 입자장이란 총모자와 양태를 결합하여 갓을 완성하는 조립 작업을 말하는데, 인두로 다리고 옷칠을 하는 일이 주업무이다. 그는 예천에 있을 때 이에 갓을 완성하는 조립 작업을 배운 적 있다.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갓 배우는 일과 인연을 맺어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 계기는 20세 무렵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하숙을 할 때이다. 그가 하숙하던 집이 바로 명장 고재구, 전덕기 등을 비롯한 통영의 입자 장인들이 총집결하여 갓을 만드는 집이었던 것이다. 이 때 그가 배운 것은 갓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하던 이른바 ''''통영갓''''이다. 그는 스승들을 따라 통영으로 가서 1974년 전수장학생이 된다. 입자 기능과 모자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본래 갓은 입자장(金鳳珠에게 배움), 총모자(高在九에게 배움), 양태장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는 모두 익혀 혼자서도 통영갓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하였다. 66년 갓공장을 경영하였다. 7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笠子) 기능보유자인 김봉주와 고재구의 전수자로 등록, 80년 김봉주의 이수자가 되었고, 82년 중요무형문화재 4호 인간문화재 후보로 지정되었다. 그 뒤 한미수교백주년기념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초청 특별전시회 제작 시범, 해외공보관 주관 캐나다 순회 전시회를 가졌으며, 인간문화재 전시회 및 전승공예전 등에서 여러 차례 수상하였다.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기능보유자로 선정되었다. 96년 한국중요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협회 이사장(현)이다(야후! 百科事典, 每日名鑑 1999, 김기형 덕성여대 교수, 인터넷 每日名鑑 2001, people.chol.com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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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모(粒子匠部門 1人者 정춘모 氏 : 우리 時代의 匠人 : 14) [記事] : ◎400년「통영 갓」 맥잇기 35년/ 하숙집이 갓만드는 집 약관 나이에 우연히 입문// 짬짬이 심부름 거들던 일이 한평 생업 될 줄이야…// 옛 선비의 상징 갓. 양반가의 체면과 자존심의 대명사이자 나들이나 손님맞이의 필수 의관이었던 갓 또한 귀중한 우리 문화 유산의 하나다. 서울 대치동 중요무형문화재 전수회관(임시건물)에서 갓 만드는 일에 진력하고 있는 정춘모 씨(55·인간문화재 제4호)는 우리 나라에서 손꼽히는 갓장인이다.『갓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와 조선조 때 꽃을 피웠던 우리 민족의 귀한 생활 문화 유산입니다. 그러나 개화기 이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서리를 맞아 지금은 제대로 된 갓을 찾아보기조차 어려운 현실입니다』정씨가 만들고 있는 갓은 수 많은 갓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쳤던「통영갓」이다. 그는 총모자(위꼭지부분)와 양태(아래 테두리부분)를 합쳐 완성된 갓을 만드는 입자장 부문에서 국내 유일의 제작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총모자와 양태는 제주도에 사는 김인(75) 장순자(55) 씨가 각각 보유자와 보유자 후보로 지정돼 있다. [조선 중엽 두용포에 설치] : 통영갓은 조선조 중엽(1593년) 지금의 해군본부 격인 삼도수군통제영이 두용포(지금의 통영시 일원)에 설치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해 400년 동안 이어져 왔다. 공방의 기원은 초대 통제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이 통영 앞바다의 한산도 영내에 공고를 설치함으로써 비롯됐다. 이후 1604년(선조 37년)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이를 육지(통영 시내)로 옮겨 영내에 13공방을 두고 관급으로 기능공을 양성, 군수품과 영민의 생활 용품, 대궐 진상품 등 특산품을 만들도록 했다. 그 후 국운이 기울던 구한말(1900년) 통제영이 폐쇄되면서 공방도 훼철, 생산 기능 또한 두절되고 쇠퇴하였으나 입자방 소목방 상하칠방 주석방 등 4가지 기능만은 민간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1964년 말 각기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경북 예천이 고향인 정씨가 갓일을 배우게 된 것은 약관 20세때.『중학 졸업 후 독학하며 대구에서 하숙을 하던 시절이었지요. 묘하게도 하숙집이 바로 갓 만드는 집이었습니다. 그 곳엔 명장 고재구, 전덕기 옹을 비롯,통영의 입자장인들이 총집결돼 있었는데 짬짬이 심부름을 하며 잔일을 거든 것이 그만 평생의 업이 되고 말았지요』물론 당시엔「인간문화재」란 말조차 없었다. 갓장인은 한갓「손재주꾼」으로 천시됐음에도 정씨는 갓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입문 20년만에 완숙 경지] : 그는 한 때 스승들과 함께 전국을 돌며 갓장사도 해보았다. 그러나 70년대 들어 시골에서조차 갓이 사라지자 대구에 있던 김봉주(입자장), 고재구(총모자장), 모만환(양태장) 등 3명은 다시 고향 통영으로 내려갔다. 정씨는 모옹이 별세한 얼마 후인 75년 통영으로 가 본격적으로 갓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77년 김봉주 옹이 별세(당시 77세)할 때까지 입자 기능을 새로이 전수받았고, 모자 만드는 기술은 78년 사망한 소문도 옹(당시 84세)에게서 따로 배웠다. 남다른 집념을 갖고 20년을 공들인 끝에 그는 세 사람이 각기 따로 만들어 왔던 통영갓을 혼자서도 만들 수 있게 됐다.『작업 자체가 극도로 섬세하고 힘들지만 통영갓의 명맥을 이어나간다는 데 보람을 찾고 있습니다. 고가인데다 소용되는 곳도 드물어 사려는 이가 뜸하지만 한복이 사라지지 않는 한 갓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 겁니다』실제로 갓일은 고도의 집념과 섬세함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그의 표현대로「사람 손의 한계」라고 할만하다. 갓은 세 가지 공정을 거쳐야 완성된다. 우선 말총으로 총모자를 엮고 머리칼 같은 가는 대(죽사)로 양태를 엮어야 한다. 마지막「갓모으기」는 이 두 가지를 결합하여 잇는 작업으로 다시「양각짓기」「수장하기」「버럼일」등 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전체적으로는 양태 만들기 24과정, 총모자 만들기 17과정, 갓 모으기 10과정 등 모두 51개 과정을 거쳐야만 하나의 갓이 완성된다는 게 정씨의 설명이다.『어느 것 하나 힘들지 않은 게 없지만 그 중에서도 양태 만들기가 가장 까다롭다고 할 수 있지요』경남 하동지방 특산인 분죽을 가늘디 가는 죽사로 풀어내는 꼼꼼함은 그만두고라도 이를 엮어가는 과정은 현기증이 날 정도다. 양태의 올(세로)이 될「살대」는 조금 굵은 편이고 날(가로)이 될「절대」와 엇비슷이 돌아가는「빗대」는 가장 가는 것을 쓴다. 대를 실처럼 쪼개는 일부터가 아무나 할 수 없는 비기라 할 만하다. 양태 하나엔 가늘디 가는 절대와 빗대가 각 360여 개, 날대가 또 100여 개나 들어간다. 특히 절대와 날대 사이로 비스듬히 끼워넣는「빗대넣기」는 작업의 고난도 때문에 갓일 가운데서도 단연 백미로 꼽힌다. [영감에 가까운 육감으로] : 장인의 세기가 요구되는 또 다른 공정은 판판한 양태를 인두로 휘는 일(버럼일)이다. 인두가 너무 달면 대가 타서 꺾어지고, 달지 않으면 아예 휘질 않아 불기운 맞추기가 보통 어렵지 않다. 정씨는 이 부분을,『영감에 가까운 육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5평짜리 공방에서 혼자 일하는 정씨는 하루 7∼8시간씩 매달려도 한 달에 한두 개의 갓밖에 만들어내지 못함을 무척 아쉬워 한다.『정말 운치 있고 멋있는 게 통영갓인데 맥이라도 안 끊겨야 할 텐데』아직 정식 후계자조차 없는 그의 한숨 섞인 걱정이다.(김종구 國民日報 1995-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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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모(갓으로 짜온 人生 38年 ; 統營갓 4百 年 傳統의 脈 이어온 最後의 갓 匠人 정춘모 氏) [記事] : 제대로 만든 통영갓 한 개 값은 얼마쯤 할까. 정답은 3백만 원이다. 물론 1∼2만 원짜리 플라스틱 모조갓도 있다. 그러나 요즘 제대로 만든 통영갓을 한 개 구입하려면 티코 한 대 값을 주어야 한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갓 가격은 왜 이렇게 비싼가. 그렇게 비싼 갓을 예전 사람들은 어떻게 쓰고 다녔을까. 도대체 갓이 그만큼 가치가 있는 물건인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지금은 수요가 거의 없어 제품의 비용 부담이 크고, 한 개 만드는데 5∼6개월이나 걸리는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통영갓 완성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나라에 단 한 사람 밖에 없다. 정춘모 씨(56)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하필 왜 갓 일을 하게 됐느냐}는 질문을 수 없이 받았다는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저도 가끔 왜 내가 갓 일을 시작했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운명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제 의지 탓도 좀 있는 것 같고….}. [머리카락 굵기의 죽사와 말총이 갓의 재료] : 갓 만드는 일은 상상을 넘어서는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갓 만드는 일이 철저하게 분업화하여 있었다. 기술자의 이름도 원통형의 위꼭지 부분을 만드는 [총모자장], 도너츠 모양의 둥근 테두리를 만드는 [양태장], 그리고 이 둘을 결합, 그 위에 천을 대고 마무리하는 [입자장]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총모자장은 말총을 이용해서 [총모자]만 짜고, 양태장은 대나무를 머리카락 굵기의 가는 실(죽사)로 만들어 창을 짜는 일만 한다. 서로의 영역을넘보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돼 있었다. 정씨는 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로 저정된 유일한 입자장이면서도 갓 완성품을 만들고 있다. [총모자장]은 85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제주도의 김인 옹(76)이 있으나, 통영갓 완성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는 정씨가 유일하다. 정씨는 갓의 부품이라고 할 수 있는 양태 총모자도 직접 만드는데, 양태한 개 만드는데 두 달, 총모자 한 개 만드는데 최소 한달이 걸린다고 한다. 양태는 머리카락 굵기의 죽사를 네 가닥으로 엇갈려 꼬면서 만든다. 죽사 이음매가 손에 만져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함의 극치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갓 한 개를 만드려면 평균 5∼6개월이 소요된다. 특히 진사립이란 고급품은 한 개 만드는데 일년 가량 걸린다. 갓은 일년에 3∼4개쯤 팔린다. 통영갓은 4백 년 전 이순신 장군이 통영의 삼도수군통제영 내에 만들었던 13공방 중 10번째 공방이었던 입자장에서 출발했다. 그 후 임금이 쓰는 어립을 만들 정도로 기술이 뛰어났던 통영갓은 조선 팔도에서 최고로 꼽히던 갓이었다. {3백 년 전 당시 최고의 장인이 3년 동안 만들었다는 어립은 지금도모방할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기술입니다. 신기라는 표현이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장인의 혼이 들어 있습니다.}. 과거에는 수요가 많고 분업이 잘 돼 있었기 때문에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았지만 지금은 정씨 혼자서 다 만들어야 하고 수요도 없기 때문에 값이 비쌀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요즘 정씨가 만드는 갓은 최하 3백만 원 선이고,정성들여 만든 갓은 5백만∼1천만 원까지 호가한다. 그러나 돈을 아무리 줘도 갓을 쓸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한다. 운명과 의지. 이 두 가지는 씨줄과 날줄처럼 정씨의 갓 인생을 짜 왔다. 1940년 경북 예천에서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난 정씨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대개 그랬 듯이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마치고 농사일을 돕다 고향을 떠나 도회지인 김천으로 향하게 된다. 그의 나이 18살 때였다. 그러나 시골 소년을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막노동도 해보고 점원도 해보았지만 밥도 제대로 얻어먹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갓 만드는 집을 지나치게 된다. 어릴 때 고향 마을에 있던 갓 만드는 집에 가끔 구경을 다녔기 때문에 생소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길로 갓 공방에 취직했다. {눈썰미와 끈기가 있었던 탓인지 남보다 빨리 기술을 배웠습니다. 노력도 곱절로 했지요. 남들이 사흘 동안 할 일을 저는 하룻만에 해치웠습니다.}. 남들보다 두세 배 일을 더한 만큼 돈벌이도 괜찮았다. [25세 때 갓 공방 차릴 정도로 성공] : 이 곳에서 자신감을 얻은 정씨는 대처인 대구로 진출, 규모가 꽤 큰 갓 공방에 일자리를 얻는다. 여기서 그는 자신을 갓 장인으로 이끄는 첫 번째 운명과 만난다. 그 공방에는 당시 통영갓의 3대 기술자로 손꼽히던 김봉주, 고재구, 모만환 세 사람이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이 60을 넘은 노인들이었만 64년 모두가 갓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던 탁월한 장인들이었다. 20대 초반의 정씨는 할아버지뻘인 이들 세 사람으로부터 통영갓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 전에 갓 일을 배웠지만 통영갓은 완전히 새로 시작하듯이 배웠습니다. 보통 갓과는 차원이 다른 갓이었습니다.}. 4년여 동안 번 돈으로 그는 25세 때 대구 달성공원 앞에 [입자공업사]란 갓 공방을 차리면서 독립한다. 기술자들을 박절하게 대하던 주인에게 환멸을 느낀 그의 스승들이 정씨에게 {자네가 공방을 차리면 우리가 옮겨가서 일해 주겠다}는 제의, 이에 힘을 얻고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최고의 기술자를 확보한 그의 갓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에서 중간 상인들이 찾아올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다른 운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70년대 들어 근대화 바람이 시골에까지 본격적으로 불어 들면서 갓의 수요가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도시 지역부터 갓의 수요가 뜸해지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으로 경북 안동, 예천에서도 갓을 사가는 촌로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그의 나이 32살 나던 해에 결국 갓방은 문을 닫았고, 그의 스승들은 고향인 통영으로 발길을 돌렸다. 정씨의 인생은 또 하나의 갈래길을 만난다. {서울에 와서 보석감정원에서 6개월 간 보석감정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막상 보석감정원을 내려고 하니 어쩐지 내키지가 않아요. 그래서 포기하고 다시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통영에 계신 선생님들께 편지를 썼더니 [아무도 갓 일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다. 자네가 제자가 되는 게 어떠냐]는 답장이 왔더군요. 꼭 그러겠다는 결심은 없었지만 발길이 통영으로 향했습니다.}. 통영에서 얼마 간 머물던 그는 74년 {일단 갓 기술은 다 배우자. 비록 갓일로 돈을 벌지는 못하겠지만 나이들어 한 가지 할 일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전수장학생으로 공식 등록했다. 공식적으로 갓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한 달에 고작 수당 1만 원 받는 문화 후계자 생활은 고달팠다. 갓을 만들어 봤자 일 년에 겨우 서너 개 팔릴 정도여서 아예 돈벌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는 스승들이 작고하면 갓 기술을 배울래야 배울 수가 없다는 절박한 심정 때문에 기를 써서 기술을 배웠다. 79년 고재구 옹이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면서 전수장학생 정씨 한 명만 달랑 남고 400년을 이어온 통영갓 기술자는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 때 정씨는 또 한번 운명과 부딪히게 된다. {정말 암담하더군요. 갓 일은 계속해 보았자 입에 풀칠도 하기 힘들 것은 뻔한 일이었죠. 당연히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대구에 떼놓고 온 처자식을 생각해서라도 돈벌이를 시작해야 되는 처지였습니다. 더욱이 통영 사람들은 통영갓 기술자들이 다 사망하고 난 뒤 외지 사람이 통영갓 기술을 전수 받은데 대해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고 노골적으로 배척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돈을 벌러 서울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다 보면 어느 새 마음 한 구석에서 [네가 떠나면 누가 갓의 명맥을 이을 것이냐]는 목소리가 자꾸 들려와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고민하는 동안 세월은 4년이 흘렀다.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운 나날들을 대구와 통영을 오가며 낚시를 하면서 달랬다. 84년 그는 오랜 고민을 끝내고 갓 일에 인생을 걸기로 최종 결심을 하고 서울로 향했다. [의지]가 [운명]으로부터 정씨 인생의 방향타를 넘겨받은 셈이었다. 서울에 온 정씨는 자수 금속공예 등 민속공예가 12명과 공동 출연, 강남구 삼성동에 문화재 전수회관 부지에 가건물을 짓고 갓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91년 그는 중요무형문화제 제4호로 지정받는다. 79년 고재구 옹이 별세한 이후 12년만에 갓 무형문화재가 대를 잇게 된 것이다. [갓 판 돈으로 사둔 땅이 갓 인생의 밑천] : 그러나 그는 자신도 미처 모르는 사이에 또다른 운명이 그의 뒤를 따라왔다는 사실을 50세 넘어서 알게 된다. 그는 갓 일로 번 돈으로 27살 되던 해 대구 변두리에 과수원 2,500평을 샀다. 그 후 다른 곳에 땅을 좀 샀다가 얼마 후 생계를 위해 팔아버렸으나 이 땅은 가치가 없어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부동산 붐을 타고 땅값이 꽤 올랐다. 87년 이 땅을 팔아 서울 논현동에 100여 평의 땅을 구입, 상가 건물을 하나 지을 수 있었다. 여기서 나오는 수입이 한 달에 몇 백만 원에 달했고,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생활의 바탕이 돼주었다. {운명이 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갓만 만들어서 팔았다면 지금쯤 굶어죽었거나, 아니면 포기하고 일찌감치 다른 직업을 찾았을 겁니다. 또 땅값이 좀 더 일찍 올랐으면 아마 땅을 팔아서 다른 장사를 했을 겁니다. 그런데 젊어서 갓을 팔아서 번 돈으로 사두었던 땅이 나도 모르는새 값어치가 올라 지금까지 갓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묘한 기분이 듭니다. 부동산 붐이 통영갓의 맥을 잇게 해준 공신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나온 삶을 회고하면 운명과 의지가 교차되는 인생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면서 미소를 짓던 그도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갓 일의 대를 이을 후계자가 아직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은 갓을 자신의 명예처럼 소중히 다뤘습니다. 그래서 가난해도 갓은 귀한 것을 사 썼지요. 갓에는 조선조 선비들의 예의 범절, 줏대와 체면, 꼿꼿했던 자존심과 같은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술과 함께 그 정신이 맥을 누군가는 이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무형문화재인 제가 매달 정부에서 65만 원씩을 받습니다. 갓은 일 년에 서너 개쯤 팔릴까 말까한데 남는 것은 없습니다. 전수장학생이 되면 한 달 수당을 10만 원씩 받습니다. 그런 사정을 알면서 대를 잇겠다고 나설 젊은이가 있을지….}. 그러면서 {언제쯤 갓 일을 배우겠다는 젊은이가 저 문을 밀고 들어올 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문쪽을 바라보는 정씨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얼핏 스쳤다. <임형균 주간부 기자>. [정춘모 씨 약력] : 1940년 경북 예천에서 출생, 1953년 예천서북국민학교 졸업, 1958년 갓 일 배우기 시작, 197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갓) 전수장학생 등록,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지정, 1994년∼ 한국전통공예가협회 초대 회장이다.(週刊朝鮮 72-74쪽 1996.02.22 임형균 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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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모(文化藝術 지킴이/ 갓의 名匠 정춘모 先生의 외길 人生, 匠人의 無數한 손길을 거쳐 完成된 統營갓) [記事] : 옛말에“갓 쓰고 망신”이라거나“갓 쓰고 자전거 탄다”는 말이 있다. 본래 갓은 햇빛을 가리려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출발하였지만, 후대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갓은 신분과 체면을 나타내 주는 사회적 징표로서의 상징성을 더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 그러니 갓을 쓰고 당한 망신은 더 무참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이 시점에 있어서 갓은 전통 사회의 상징이기도 하다. 갓을 쓰고 자전거를 타는 일은 전통과 근대의 부조화를 뜻하는 것이니, 어울리지 않아 어색한 상황을 이를 때 쓰는 말이다. 시대적 효용성이 다하여 알아 주는 이가 별로 없는 갓을 만든다는 것이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9월 18일 오전 무형문화재전수회관 정춘모 선생 작업실을 찾았다. 평생을 갓 만드는 일에 전념하였다는 사실 자체에 일종의 경이로움을 느끼면서 이것저것 여쭈어 보았는데, 정춘모 선생은 자신이 살아온 과정과 갓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겪는 어려움 내지는 고뇌를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다. ■스무살 무렵 갓 배우는 일과 인연을 맺어 : 정춘모 선생은 1940년 경북 예천군 용궁면에서 태어났다.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갓은 여전히 쓸모있는 의관이었으며, 그래서 갓을 만드는 곳이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정 선생이 태어난 예천에도 갓 만드는 곳이 있었는데, 당시 예천에는 입자장만 있었다. 입자장이란 총모자와 양태를 결합하여 갓을 완성하는 조립 작업을 말하는데, 인두로 다리고 옷칠을 하는 일이 주 업무이다. 선생은 예천에 있을 때 이미 갓 조립하는 일을 배운 적이 있다. 그렇지만 선생이 본격적으로 갓 배우는 일과 인연을 맺어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 계기는 스무 살 무렵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하숙을 할 때이다. 선생은 대구에 일정한 토지를 소유한 상황에서 농장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하숙하던 집이 바로 명장(名匠) 고재구, 전덕기 옹을 비롯한 통영의 입자(笠子) 장인들이 총집결하여 갓을 만드는 집이었던 것이다. 주변에 갓 장인들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잔심부름도 하게 되면서 갓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게 되고, 이 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갓 장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 때 그가 배운 것은 갓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치던 이른 바‘통영갓''''이다. 여기서 잠깐 통영갓의 역사에 대해 얘기해 두는 것이 좋겠다. 통영갓은 조선조 중엽(1593년) 지금의 해군본부 격인 삼도수군 통제영이 두룡포(頭龍浦, 지금의 통영시 일대)에 설치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해 400여 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공방의 기원은 초대 통제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이 통영 앞바다의 한산도 영내에 공고(工庫)를 설치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 후 1604년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이를 통영 시내로 옮겨 영내에 13공방을 두고 관급(官給)으로 기능공을 양성하여 군수품과 영민(營民)의 생활 용품 그리고 대궐 진상품 등을 만들도록 하였다. 이렇게 내려오다가 국운이 기울던 구한말(1900년) 통제영이 폐쇄되면서 공방도 훼철되어 더 이상 생산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는데 입자방, 소목방, 상하칠방, 주석방 등 4가지 기능만은 민간 전승으로 명맥을 유지하다 1964년에 이르러 중요무형문화재 4호로 지정되어 제도적 장치의 보호를 받게 된다. 이 때 입자장에 전덕기, 총모자장에 고재구, 양태장에 모만환 옹이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 한 몸 바쳐 지켜내… : 정춘모 선생이 처음 갓 만드는 일과 인연을 맺은 시기가 1960년 초니까 아직 인간문화재 제도는 생겨나지 않은 때이다. 갓 만드는 일이 사회적으로 존중을 받느냐 하면 그 것도 아니었다. 존중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갓 장인은 손재주꾼으로 천시받을 따름이었다. 게다가 의례를 중시하는 전통 사회에서는 갓이 신분과 체면의 상징으로 나들이나 손님맞이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의관(衣冠)이었지만, 시대가 바뀌어 일상 생활의 복장이 한복에서 양복으로 대체되면서 갓은 그 실용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이 갓 만드는 일에 빠져 든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하숙집에서 갓의 명인들을 만난 것이 갓 만드는 일에 뛰어들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고는 하나, 이는 필요 조건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충분 조건은 아니라는 생각에 그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 보았다. 선생은 이에 대해 명쾌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하긴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운명처럼 겪게 되는 일에 대해 당시 왜 어떤 이유로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 모든 것을 풀어서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선생이 아무 이유 없이 갓 만드는 일에 뛰어들게 된 것은 아니다. 그 것을 꼭 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희소성에 대한 애착''''과 더불어 한 세상 사는 인생인데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남겨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존재론적인 고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갓 만드는 일은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는 일이어서 누군가 하지 않으면 전승이 끊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것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 유산의 일부로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한 몸 바쳐서 갓을 지켜낸다면 그 것은 곧 이 세상에 자신의 족적을 남기는 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 이르러 선생은 갓 만드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자 단단히 결심하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초 전덕기 옹이 세상을 떠나자 김봉주 옹이 입자장을 잇게 되는데, 당시 대구에서 활동하던 스승 김봉주(입자장), 고재구(총모자장), 모만환(양태장) 등은 시골에서조차 갓이 사라지게 되자 다시 통영으로 내려가게 된다. 그러자 정춘모 선생 또한 이들 스승을 따라 통영으로 내려가 본격적으로 갓 만드는 일을 배우게 되며 1974년 전수장학생이 된다. 여기서 선생은 1977년 스승 김봉주 옹이 7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입자(笠子) 기능을 새로이 전수받았으며, 모자 만드는 기술은 1978년 84세로 세상을 떠난 소문도(蘇文道) 옹으로부터 배웠다. 본래 갓은 입자장, 총모자, 양태장,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그 동안 통영갓은 세 사람이 각각의 부분을 따로 만들어 온 것이며, 인간문화재가 세 분야로 나뉘어 지정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1970년대 말에 이르러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분들이 모두 돌아가시게 되자 통영갓의 전승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참으로 다행스럽게 정춘모 선생이 세 가지 기술을 모두 익혀 혼자서도 통영갓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하여 통영갓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갓 만드는 일은 고도의 집중력과 섬세한 감각을 요구한다. 이것을 선생은,“사람 손의 한계”라고 설명하는데, 20여 년 간에 걸친 수련 끝에 정춘모 선생은 스승이 모두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통영갓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남게 된 것이다. ■양태만들기 24과정, 총모자 만들기 17과정, 갓모으기 10과정 등 모두 51개 과정 :갓은 세 가지 공정을 거쳐 완성된다. 우선 말총으로 총모자를 엮고 머리칼 같이 가느다란 대(竹絲)로 양태를 엮는다. 마지막으로 ''''갓 모으기''''는 이 두 가지를 결합하여 잇는 작업으로 다시 ''''양각짓기'''', ''''수장하기'''', ''''버럼일'''' 등 세 과정을 거친다. 전체적으로는 양태만들기 24과정, 총모자 만들기 17과정, 갓모으기 10과정 등 모두 51개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갓이 완성된다. 갓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공이 많이 드는 일은 무엇이냐고 하자, 어느 것 하나 힘들지 않은 일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양태만들기가 가장 힘들고 공이 많이 들어간다고 한다.경남 하동지방 특산인 분죽(粉竹)을 가늘디 가는 죽사(竹絲)로 풀어낸 다음 이를 엮어나가는데, 양태의 올(세로)이 될‘살대''''는 조금 굵은 편이고 날(가로)이 될‘절대''''와 엇비슷이 돌아가는‘빗대''''는 가장 가는 것을 쓴다. 양태 하나엔 가늘디 가는‘절대''''와‘빗대''''가 약 360여 개 들어가고,‘날대''''는 100여 개가 소요된다. 특히‘절대''''와‘날대'''' 사이로 비스듬히 끼워넣는‘빗대넣기''''는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갓 만드는 일 가운데서도 가장 섬세한 장인적 역량이 요구된다. 판판한 양태를 인두로 휘는‘버럼일'''' 또한 장인의 세기(細技)가 요구되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인두가 너무 달면 대가 타서 꺾어지고 달지 않으면 아예 휘지를 않아 적정한 상태를 맞추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갓을 완성해 내는 장인의 기술은 그 자체가 신기(神技)이다.“갓 중에도 특수한 갓이 있어요. 양반들이 쓰는 그런 걸 보면 이 걸 손으로 했는지 신이 했는지 그런 것도 있죠. 공이 원체 많이 드니까. 일종의 사치면서도 예의와 만물의 영장이라카는 인간의 존엄성을, 거기다 갓에 대해, 우리 조상들이 총매진을 갓에 했더라고. 옷은 떨어진 걸 입어도 갓은 떨어진 걸 안쓰더라고요.” 생각해 보니 그렇다. 하긴 신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머리에 쓰는 것이 갓 아닌가. 이렇게 고도의 장인 정신이 필요한 갓 만드는 기술을 모두 익힌 정춘모 선생은 1984년 통영에서 서울로 활동 공간을 옮기게 된다.
■“왜 통영에서 계속 활동하시지 않고 서울로 오시게 되었나요?”“정부 대책이 있고 지방 호응도가 좋고 이러면, 내가 과연 어떻게 하면 이 걸 후세대에 가서 내가 해논 일이 좋다 카는 걸 할 수 있겠는가, 통영갓이 끊어졌을 때 경상도 사람이 와서 배와서 이렇게 해서 지금도 이렇게 전수되고 있다 카는 그런 내가 해논 업적이 상당히 좋고 하는 게 아니겠나 생각을 했는데, 막상 지금도 마찬가지지마는 내 혼자 생각이지, 지방 사람들이 관심도도 그렇고 다른 지역 사람들에 대한 배타성이 너무나 강하고. 그러나 막상 끊어지는 데는 그럴 수 없지 않느냐 나는 그런 생각이지만, 그 건 쉬운 게 아니고.”예천이 고향인 선생을 통영에서 객지 사람 취급한 데다 통영갓 전승자에 제도적인 뒷받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 현실이 무척 서운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서울에 올라온 후로도 세상에 대한 선생의 서운함은 여전한 것 같다. 말로는 우리의 소중한 전통 문화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현실 세계는 냉엄하기 짝이 없어서 실용성이 담보되지 않거나 상품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풍토에 대해 선생은 강한 톤으로 비판한다. 그래서 선생은 현실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화 정책 담당 기관 내지는 공무원 나아가 일부 경직된 학자들의 편협한 태도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여러 차례에 걸쳐 피력하였다. 선생은 1991년에야 인간문화재로 지정받게 되는데, 이렇게 늦어지게 된 이유도 현실과 쉽게 타협하지 않으려는 선생의 강직한 성품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져 가는 소중한 가치를 지켜내야겠다는 선생의 소명 의식이 워낙 강했기에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결코 쉽지 않은 외길 인생을 꿋꿋하게 걸어 올 수 있었지만, 탄탄한 경제력이 뒷받침된 것 또한 삶을 지탱해 나가는 데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선생이 대구에 사두었던 농장의 땅값이 크게 상승하여 상당한 재산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대구의 땅을 팔아 서울 강남에 건물을 사서 이 것으로 경제적 기반을 삼으며, 전혀 수익성이 없는 그러나 우리의 혼과 자존심이 서려있는 갓 만드는 일을 본업으로 하고 있다. ■대를 이어 가업을 지켜나가는 일이 아름다운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 이제 갓을 실용적인 목적에서 구하려는 사람은 없다. 박물관 같은 곳에서 주문하여 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아주 가끔 지방에서 제사 지낼 때 쓰려고 한다면서 주문하는 사람이 있다. 워낙 공이 많이 들어야 하는 데다 수요도 많은 편은 아니어서 일 년에 갓을 만드는 수는 10개 미만이다.“갓을 필요로 하여 찾아 온 사람 중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습니까?”“어떤 사람이 갓을 유리관 안에 보관해서 아이들 교육용으로 쓰려고 한다는 사람을 딱 한 사람 봤어요.”지금은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갓 만드는 일에 일생을 거는 이는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선생의 업을 잇는 제자가 있는지 여쭈어 보았다. 처음에는,“이수자 두 명이 있는데 배워 놓고두 안하려고 해요. 다른 직업이 있지요.”라고만 하신다. 제자 이름을 물으니, 그제야 정한성(32살), 정한신(29살)이라고 하면서 사실은 아들이라고 말씀해 주신다. 대를 이어 가업을 지켜나가는 일이 아름다운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이면에 놓여있는 인간적인 고뇌를 누가 알아주고 이해해 줄 것인가. 어쩌면 아들들은 배워놓은 기술을 세상에 내놓지 않으려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사라져가는 전통 문화를 지켜갈 수 있도록 세심하게 정책적인 배려를 해주지 않는다면 통영갓은 아버지대에서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다. 본업과 생업이 분리된 상태에서 어떻게 문화가 지켜질 수 있겠는가. 사라져 가는 것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선생의 정신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전승되길 바라면서 문을 나섰다.(김기형 덕성여대 敎授 www.kcaf.or.kr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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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모(傳統工藝의 香, 갓일 無形文化財‘입자장’정춘모) [記事] : 갓은 모양에 따라 삿갓이나 방갓 같은 방립형과 패랭이·초립·전립 등의 평량자형이 있다. 삼국시대로 거슬러오를 만큼 오랜 역사를 지녔다. 요즘은 좁은 의미로 조선시대 양반이 쓰던 갓을 가리킨다. 갓은 선비정신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귀하게 다뤄졌다.‘입자장(笠子匠)’정춘모 씨(64)는 1991년 갓일 중요무형문화재가 됐다. 갓 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통영갓을 만든다. 통영갓은 조선조 중엽 삼도수군통제영이 두용포(통영시 일원)에 설치되면서 만들기 시작해 400여 년의 전통을 지녔다. 경북 예천이 고향이지만 스승을 쫓아 10여년 간 통영에서 살았다.“갓 만드는 작업을‘갓일’이라고 합니다. 갓일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 수 있는 한계에 도전한다고 할 만큼 초정밀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인내심과 끈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죠.”갓일은 각기 다른 분야를 담당하는 세 명의 장인이 있어야 한다. 갓의 테두리 부분을 만드는‘양태장’, 모자 부분을 만드는‘총모자장’, 양태와 총모자를 연결해 갓으로 완성하는‘입자장’등이다. 한 분야만 완전한 기술을 익히는 데 10년 이상이 걸린다. 정 입자장은 작고한 스승 김봉주, 고재구 선생 등으로부터 모든 분야를 배웠다. 갓일 기술을 갖고 있는 노구의 스승을 찾아내 끝까지 설득해 배우기도 했다. 갓일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완성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인이다.“고향을 떠나 스무 살 무렵 대구에서 생활할 때였어요. 근처에 갓일 장인이 살고 있어 우연히 배우게 됐습니다. 그 때는 직업이 되겠구나 싶어 별 생각없이 익혔는데 나중에는 갓일 맥이 끊기는 게 아닌가 위기감을 느껴 매달리게 됐죠.”한 개의 갓을 만들기 위해 대오리 만들기, 운기·운각·대우 모으기, 수장하기, 버렁잡기, 갓 모으기, 칠하기 등 50여 개의 공정을 거쳐야 한다. 말총, 소꼬리털, 대나무, 명주실, 베, 옻, 먹, 풀, 아교, 한지 등이 재료로 쓰인다. 지금도 전통 방식 그대로 만들고 있다. 갓일 중 가장 까다로운 것은‘버렁잡기’. 갓의 테두리 부분인 양태에 곡선을 넣는 일이다. 대나무를 쪼개 머리카락보다 더 가느다란 실처럼 만드는 것도 힘들다.“인두 불이 너무 세면 대나무와 실이 타버리고, 약하면 곡선이 만들어지지 않아 어렵습니다. 오랜 숙련으로만 가능하죠. 가느다란 말총과 대나무를 갖고 한올한올 교차시키며 모양을 만들어 나갈 때면 도(道) 닦는다는 생각마저 들어요.”70년대 후반까지는 갓을 찾는 이가 많았다. 혼례와 장의 등 대소사에 예를 갖추는 최고 필수품이 갓이었다. 그러나 작업의 어려움으로 고가인 데다가 한복과 함께 쓰임이 적어져 점차 사라지고 있다. 선비의 올곧은 품성처럼 꼿꼿하고 단아한 멋을 지닌 갓을 지켜낼 생각이다.(김희연 京鄕新聞 記者 매거진X 2004년 06월 27일 15시 48분 2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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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리면 용두리 출신 도희섭, 박사학위 취득...축하합니다.
도희섭(上里 龍頭 골짜기 出身 도희섭 氏 : 淸州大學 大學院 法學博士 學位 取得!) [記事] :
"공부에 나이가 있습니까"
상리면 용두리 출신 도희섭(48.은풍중학교 총동창회장) 씨가 2009년 2월 20일 청주대학교 대학원에서 "부동산양도담보 이론의 재구성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아 화제가 되고 있다.
도씨는 상리초등학교(37회), 은풍중학교(8회), 예천농업고등학교(30회), 청주대학교(법과대학) 법학사, 동국대학교(부동산학 전공) 경영학석사, 청주대학교 대학원(사법전공)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는 등 사업과 공부를 병행하여 주위로부터 끝없이 노력하는 젊은이로 통한다.
특히, 도희섭 씨가 쓴 "부동산공법(형설출판사)"은 현재 많은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으며, 예천을 사랑하는 문화기행 수필집 "어매예천-예천의 아름다움과 희망을 찾아서(정우서적)" 과 부동산투자회사 활성화 방안에 관한 연구 등 10여 편의 연구논문이 그의 공부에 대한 열정을 증명한다.
도씨는 지난 1987년 예천군의료보험조합에 근무하던 중 평소 자신이 꿈꾸었던 인생 목표가 아니라고 판단, 1992년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무작정 상경, 중국집, 신문, 연탄배달원, 세차장 종업원 등의 고된 일을 하면서 오직 공부에 전념하여 16년만에 법학사, 경영학사, 박사학위 등 힘든 공부를 해 왔다.
평소 정치에도 관심이 많은 도씨는 이명박 대통령의 친이계 대부로 통하는 이재오 국회의원과의 오랜 친분으로 "재오사랑 카페" 초대회장을 역임했으며 동국대 대학원 부동산학과 총동문회 초대회장, 이회창 대통령후보 정책위원(2002년), 서울 백상라이온스클럽 회장, 한국.일본 부동산교류회 한국측 대표, 대한부동산학회 상임총무 및 연구위원 등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명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도씨는 서일대 부동산과 겸임교수, 청주대학교 법학연구소 연구원, 대한부동산학회 감사, 세계부동산연맹 한국대표부 국제이사, 재경예천군민회 부회장, 예천경제인포럼 정회원, 성주도씨 중앙종친회 이사, 서울 강북희망포럼 공동대표 겸 사무총장, 동국대학교 경영대학원 총동문회 부회장, 은풍중학교 총동창회장 등의 왕성한 활동도 겸하고 있다.
지체장애1급 어머니와 고교 때 아버지를 여의는 아픔 속에서도 예천농고를 온실당번과 예천상설시장에서 과일 장사를 하며 학교를 마치고...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고향사랑과 봉사정신이 남다른...
상리면 용두리 도효자 생가마을에 사는 몸이 불편한 어머님을 매주 찾고 있는 효자인 도희섭 씨는 지난 2006년 5.31지방선거 당시 예천군수 예비후보로 출사표를 던지기도 했던 예천발전을 위해 항상 고민하는 젊은이로 평가받고 있다.
가족으로는 부인 이정주(예천읍 용산리 출신, 사회복지학 전공) 씨와 장남 상기(원광대 한의대 재학 중) 군, 차남 민기(세화고 입학) 군 등 2남을 둔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도희섭 씨의 박사학위 논문이 단행본 책(세종기획)으로 출간되어 각 대학의 강의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도씨는 이 책에서 10여 년 동안 쌓은 법학연구와 부동산 실무를 바탕으로 "오늘날 거래관계에서 채권자의 일방적 폭리를 취하는 것을 방지하고 경제적 약자인 채무자의 보호를 위해 "부동산양도담보 법리구성"을 심층 분석한 것이 특징"이라는 전문가 의견이다.
한편, "이 책은 논리적인 타당성과 새롭게 이론을 재구성하였으며, 오랜만에 전면 개편되는 민법전에 양도 담보가 법조문으로 신설되기를 주장하는 국내 최초 논문으로 효용가치가 매우 높아 앞으로 학계에서 꼭 활용해야 할 필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02-25 오전 10: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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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375
예천군 방문 [記事] : 首邱初心 블로그/ 예천 보문사 외/ 보낸날짜 2009년 2월 25일 수요일, 오전 09시 53분 33초/ 보낸이 "이종원"/
볼거리가 많은 예천 : 어제는 친구 네 명이 동부인해서 예천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제일 먼저 보고 싶은 곳이 용문사입니다. 제 기억에는 세 째인 것 같은데 그래도 1순위에 올렸답니다.
그리고 보문사, 학가산우래휴양림, 초간정, 금당실 전통마을, 예천권씨종택 등을 둘러보고 예천읍에 자리한 청포정식으로 점심을, 의성도리원의 한우작목반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등심구이로 저녁을 먹고 귀가했습니다.
오늘은 보지 못했지만 회룡포와 삼강주막, 용궁의 순대집 등도 한번 둘러보고 맛을 볼만한 곳입니다. 감사합니다.
(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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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봉사 [記事] : 예천 명봉사 부도 갤러리 - 부도/ 2009/02/16 20:49/
명봉사는 예천군 상리면에 있는 사찰입니다. 헌강왕 원년(875년)에 두운 스님이 창건했다고 하지요. 네 해 전 명봉사를 찾았을 때 이 부도는 마당 한 가운데 덩그마니 앉아 있었습니다.
명봉사에는 나말여초의 선승인 자적 홍준(慈寂 洪俊) 스님의 탑비인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鳴鳳寺境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가 남아있습니다.
스님은 고려 태조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태조는 스님이 939년 10월 구산선원(龜山禪院) 법당에서 입적하자 ''''자적선사''''라는 시호와 ''''능운(凌雲)''''이라는 탑호를 내렸다고 합니다.
현재 명봉사에는 스님의 탑비만 남아있을 뿐 부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중대석과 상대석, 상륜부를 잃은 채 마당 가운데 쓸쓸히 앉아 있는 부도를 보며 ''''혹시 자적 선사의 부도는 아닐까?''''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 2004. 2./ [출처] 예천 명봉사 부도|작성자 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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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온천 [記事] :
예천온천은 영주 풍기온천, 문경온천과 더불어 경북 북부내륙지역의 세 번째 온천이다.
특히 예천, 영주, 봉화 지역의 북부 산간지역 관광지와 연계하여 찾아볼 수 있는 좋은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예천온천은 지난 1998년 1,925,216㎡(582.../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
교통편 : 대중교통:(항공)제주공항-예천공항 1일 1회 왕복 운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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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온천(週末農場 觀心이 있는 住民들 많이 參與해 주세요!! 醴泉溫泉 週末農場 分讓) [記事] :
예천군이 전국 최고의 수질을 자랑하는 예천온천을 중심으로 충효테마공원, 석송령, 천문관 등 문화재와 자연관광자원을 연계해 볼거리·즐길거리의 테마제공을 위해 예천온천 주변에 주말농장을 조성해 분양에 나섰다.
온천장이 위치해 있는 감천면 관현리에 3,000㎡의 농장을 조성하고 40세대에 75㎡정도를 분양할 계획으로 2009년 3월 13일까지 분양신청을 받고 있다.
신청자격은 예천온천 주말농장 분양기준에 동의하고 농장을 선량하게 관리할 수 있는 자이며, 주말농장 이용기간은 4월부터 11월까지이고 분양비용은 온천입욕권 50매(20만원)을 구매하면 된다.
이번에 조성·분양되는 주말농장은 온천장 윗편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 뛰어나고 온천주변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작물경작에 필요한 관수시설을 보유하고 있으며 농장작업 후 뛰어난 수질을 자랑하는 온천으로 건강증진을 도모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예천온천 관계자는 "주말농장을 통해 땀과 흙,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온천이용 활성화를 위해 이번 사업을 시행하게 되었다"면서 "주말농장에 관심이 많은 주민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고 말했다.
예천온천 주말농장과 관련한 문의는 예천온천관리사무소로 하면 된다.
(김상국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02-25 오후 6: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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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천문과학문하센터(“醴泉에 가면 宇宙가 있다”: 醴泉天文科學文化센터, 宇宙環境體驗館 竣工, 宇宙人 作業-映像物 體驗 可能… 天體觀測도) [記事] :
우주체험을 할 수 있는 시설이 경북 예천에 들어섰다. 예천군 감천면 덕율리에 있는 예천천문과학문화센터(이사장 박홍서·전 국립천문대장)는 2008년 11월 5일 ‘우주환경체험관’을 준공하고 운영에 들어갔다.
‘예천 스페이스타워’로 이름 붙인 이 체험관은 높이가 70m로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는 순간부터 로켓을 타고 지구 밖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는다.
체험관에 도착하면 중력을 조절해 달에서 우주인이 공중에서 작업을 하는 것과 거의 같은 체험을 할 수 있다.
또 우주에 관한 다양한 영상물을 감상할 수 있으며 밤낮으로 천체를 관측하는 시설도 갖췄다.
센터 측은 개관 기념으로 8일까지 우주과학체험전을 연다. 이용료는 스페이스타워 체험이 1인당 1만 원, 천체 관측은 5000원. 월요일은 휴관하며, 밤에 천체 관측을 하고 싶으면 예약해야 한다.
(이권효 記者 東亞日報 2008년 11월 07일(금) 오전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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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지체장애인협회 예천군지회(社會活動 機會 더욱 擴大되기를.. 慶北肢體障碍人協會 醴泉郡支會 事務室 開所式) [記事] :
사단법인 경북지체장애인협회 예천군지회(지회장 이성일) 사무실 개소식과 자활자립 실천대회가 예천읍 백전리 소재 사무실과 예천군청소년수련관에서 2009년 2월 25일 오전 11시부터 개최됐다.
이날 개소식과 실천대회에는 김수남 군수, 최명환 교육장, 이현준.윤영식 도의원, 각급 기관단체장, 장재권 경상북도지체장애인협회장 등 200여 명이 참석했으며, 먼저 탤런트 윤용현의 사회로 유공자 표창 등 개회식을 가진 후 현판식과 함께 사무실 개소식을 가졌다.
이날 개소한 사무실은 예천읍 백전리 144-4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앞으로 지역 지체장애인들의 보금자리로 활용될 전망이다.
이날 김수남 군수는 격려사를 통해 "우리 군에서는 장애우들의 복지증진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다양한 시책을 마련하여 지원해 나가도록 하겠다"면서 "오늘 사무실 개소식 및 자립실천대회를 계기로 장애인 여러분들의 사회활동 기회가 더욱 확대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예천군 관내에는 현재 2,289명(2008.12월기준)의 지체장애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김상국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02-25 오전 11: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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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