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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1856) : 용궁현 출신 홍여하 사간원 사간(附 호명면 황지리 출신 안도현,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출판...축하합니다/예천방문 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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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洪汝河) : 1621(광해군 13)-1678(숙종 4), 용궁현(龍宮縣) 율곡(栗谷) 출신, 한때 용문면(龍門面)에 살았다. 자는 백원(伯源, 百源)ㆍ도견(圖見)ㆍ일청, 호는 목재(木齋) 또는 산택재(山澤齋), 본관은 부림(缶林, 缶溪), 대사간 호(大司諫鎬)의 아들, 여렴(汝濂)의 동생, 여잠(汝潛)의 형, 우복 정경세(愚伏鄭經世)의 제자이다.
편모 슬하(慈侍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654년(효종 5) 식년 진사시에 2등 23위로 합격, 동년 식년 문과에 을과 5위로 급제하였다.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다. 이어 설서(說書), 전적(典籍), 대교(待敎), 봉교(奉敎) 등을 역임하고,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이르러 효종에게 충언(忠言)의 소(疏)를 올려 왕의 가납(嘉納)을 받았으나 당로자의 배척을 받아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1년 만에 사퇴하였다.
1658년(효종 9) 다시 나아가 경성 판관(鏡城判官)이 되었고, 왕의 하문(下問)에 의하여 소(疏)를 올렸는데, 상소(上疏)의 내용 중에 완남부원군 이후원(完南府院君李厚源)을 논박한 구절로 말미암아 조정에서 이조 판서 송시열(吏曹判書宋時烈)이 사직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황간(黃澗)에 귀양갔다가 이듬해 사면(赦免)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그 뒤 숙종이 즉위하여 복제 문제(服制問題)로 송시열(宋時烈) 등을 추방, 다시 등용되어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고, 이어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에 특명되었으나 숙환으로 인하여 타계하였다.
전고(典故)에 밝고 문장에도 능해 당시 많은 학자들이 그의 문하(門下)에서 나왔다.
주자학(朱子學)에 밝아 당시 사림(士林)들의 종사(宗師)로 일컬어졌고, 상주(尙州)의 근암서원(近岩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부제학(副提學)에 추증(追贈)되었고, 저서로 <사서발범구결(四書發凡口訣)>, <주역구결(周易口訣)>, <의례고증(儀禮考證)>, <여사휘찬(麗史彙纂)>, <동사제강(東史提綱)>, <용학구의(庸學口義)>, <해동성원(海東姓苑)>, <경서해의(經書解義)>가 있다.
후손은 풍양면 구룡동(九龍洞)에 산다.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龍宮縣邑誌 1780, 韓國人의 族譜, 醴泉郡誌 1939, 竺山勝覽 1934)
[王朝實錄] : 1655년(효종 6) 4월 9일 검열(檢閱)에 임명되었고, 1656년(효종 7) 봉교(奉敎)를 이임하였다. 정언(1656.9.18, 1656.11.3)일 때는 임금의 마음 수양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왕이 이르기를, "그대가 진언한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라고 하였다. 1659년(현종 즉위년) 6월 2일 경성 판관 홍여하가 상소를 올렸는데, 처음에는 변방의 소활한 걱정과 상벌이 알맞지 못한 폐단을 기술하고, 이어 시비가 공평하지 못한 폐단을 진술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조판서 송시열이 상소(1659.6.4)를 올리면서 체직을 청하니, 윤허치 않았다. 그 상소에서 이르기를, "지금 승정원이 아뢴 판관 홍여하의 상소 내용을 들으면, 그 중 한 대목은 바로 신을 배척하는 내용이라고 봅니다."라고 하였고, 영의정 정태화 등이 입진하여 홍여하의 상소 등에 대해 논의하였고(1659.6.7), 우의정 정유성이 홍여하의 상소문에 관해 차자를 올렸고(1659.6.12), 정언 여성제도 상소를 올렸고(1659.6.13), 연양부원군 이시백이 홍여하를 공박 배척하는 차자를 올렸다(1659.6.16). 결국 이조 판서 송시열이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1659.6.22). 1660년(현종 1) 1월 28일 전 판관 홍여하가 황간 신풍역(黃澗新豊驛)에 정배되었는데, 홍여하가 상소문에서 글자의 뜻을 고르지도 않고 추천하는 폐단에 대하여 언급했다가 송시열로부터 크게 노여움을 사고 있었는데, 송시열에게 빌붙은 자들이면 모두 이를 갈고 있었으므로 결국 죄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1679년(숙종 5) 12월 28일 권유(權愈)가 고(故) 사간 홍여하가 평상시에 예론(禮論)에 새로운 의논을 세웠다고 하여 포증(褒贈)을 청하였고, 1689년(숙종 15) 10월 5일 대사헌 이현일(李玄逸)이 왕에게 아뢰기를, "고 사간 홍여하는 경학이 있고, 행실이 단정하였으므로 영남 선비의 영수(領袖)가 되었는데,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하다가 좌폐(坐廢)된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시어 일찌기 사간으로 불렀으나 미쳐 명령을 받들지 못하고서 죽었습니다마는 저술한 <여사휘찬(麗史彙纂)>은 자못 사법(史法)을 얻었으므로 조경(趙絅)이 일찌기 칭찬하였으니 민몰(泯沒)시킬 수 없습니다. 포증(褒贈)을 더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 드디어 부제학(副提學)에 추증하였다. ㅇ 교지(敎旨)가 문경새재박물관 제3전시실(鳥嶺室)에 소장되어 있다. ㅇ 전 예천군수 유진(柳袗)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ㅇ 홍여하의 <휘찬려사(彙纂麗史)>는 이정상(李楨相)의 <삼현기년(三賢紀年)>(1920)에 많이 인용되고 있다. ㅇ 기자(箕子)ㆍ마한(馬韓)으로 이어지는 정통론(正統論)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강목체(綱目體)로 쓰여진 홍여하(洪汝河)의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등의 사찬 사서(私撰史書)가 나오면서 그 이론이 다양해지고 심화된다. 성호 이익의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 순암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등에 나타나는 정통론 체계는 이를 반영한 것이었다. ㅇ 홍여하는 <동국통감제강>에서 진번(眞番)을 요양(遼陽)에 비정하고, 패수(浿水)는 요하(遼河)로 비정하여 고조선의 요동중심설(遼東中心說)을 주장하였다(司馬榜目, 文科榜目,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醴泉郡誌 1939, 인터넷 Alta Vista 2001, 인터넷 야후 2001).
[承政院日記] :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除授 1654.12.11)를 거쳐 1655년(효종 6) 4월 5일 의정부의 한림 천거 취재(翰林薦擧取材) 때 1위(左傳略)를 하였고, 검열(檢閱, 除授 1655.4.9) 때는 사관(史官)으로서 입시(入侍, 晝講 1655.4.23, 1655.4.24, 1655.4.25, 1655.4.27, 1655.4.28, 1655.5.1, 1655.5.2, 1655.5.14, 1655.5.15, 1655.5.16, 1655.5.27, 1655.5.28, 1655.5.29, 1655.10.16, 1655.10.17, 1655.10.20, 1655.10.21, 1655.10.26, 1655.10.27, 1655.11.1, 1655.11.24, 1655.12.2, 1655.12.3, 1655.12.4, 夕講 1655.4.23, 1655.5.1)하였고,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서 입시(引見 1655.5.19, 晝講 1655.6.1, 熙政堂 1655.6.3, 1655.6.6, 1655.6.21, 1655.6.25, 1655.7.4, 1655.7.23, 1655.7.27)하였고, 1655년(효종 6) 7월 29일에는 대교(待敎)로서 상소를 하였고, 1655년(효종 6) 12월 26일과 1656(효종7) 1월 3일에는 봉교(奉敎)로서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다가, 동년 1월 4일에 가서야 윤허되었다. 그 후 봉교(除授 1656.1.22) 때 1656년(효종 7) 1월 22일에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봉교 홍여하가 현재 경상도 땅에 있으니, 빨리 상경하도록 하유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동년 2월 25일에 경상 감사의 서목(書目)에, 경상도에서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봉교 홍여하가 병 때문에 사직 상소를 올렸습니다."하니, 해당 관서에서 처리하라고 하였다. 동년 2월 26일에는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봉교 홍여하가 상소...하였으나, 속히 상경토록 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동년 4월 22일에 경상 감사의 서목에, "함창에서 올린 보고에 의하면, 봉교 홍여하가 상소를 올렸습니다."하였다. 동년 5월 23일에 봉교로서 상경하였다. 그리고 사관(史官)으로서 입시(入侍, 晝講 1656.5.26, 1656.윤5.21, 1656.윤5.22, 1656.7.19, 1656.7.20, 熙政殿 1656.7.6),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서 입시(尙州營將引見時 1656.6.12, 宣政殿 1656.3.17, 1656.7.21, 1656.7.22, 1656.7.28, 熙政堂 1656.6.22, 1656.7.6, 1656.7.15, 1656.7.18, 1656.7.27)하였다. 그 후 설서(說書, 除授, 牌招肅拜, 上疏 1656.8.14), 전적(典籍, 除授 1656.8.29)을 거쳐 감찰(監察, 除授 1656.9.2) 때인 1656년(효종 7) 9월 8일과 9일에 입계(入啓)하여 풍재(風災)에 대하여 상소를 하였다. 정언(正言, 除授 1656.9.18, 1656.11.3),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 除授 1657.2.13, 離任 1657.11.1)을 지냈다. 1674년(숙종 즉위) 11월 25일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새로 사간(司諫)에 제수된 홍여하가 현재 경상도에 있으니, 속히 상경토록 하유하소서"라고 하였고, 동년 12월 9일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현궁 봉쇄관(玄宮封鎖官)에 제수될 홍여하가 외방(外方)에서 올라오지 않고 있으니 잠시 개차(改差)하고, 후임을 차출하시기를 청합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 12월 23일 경상 감사의 서목(書目)에 함창에서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그 곳에 살고 있는 사간 홍여하가 이 달 15일에 죽었습니다."라고 하였다. 1689년(숙종 15) 10월 5일 이현일(李玄逸)이 아뢰기를, 고(故) 사간 홍여하는 홍호(洪鎬)의 아들이고, 홍귀달(洪貴達)의 후손입니다. 증직하소서"하니, 임금이, "특별히 증직하라"고 하였다.(承政院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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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尙州 / 壇廟 / 社稷壇 在州西五里 文廟 在鄕校 城隍祠 在州北七里 ?壇 在州北五里 新增纛祠 在州西北三里 道南書院 在州東二十里萬曆丙午創建列享文忠公 鄭夢周 文敬公 金宏弼 文憲公 鄭汝昌 文元公李彦迪文純公 李滉配享文簡公 盧守愼 文忠公 柳成龍 文莊公 鄭經世 肅廟朝丁巳 賜額 興巖書院 在州西六里 肅廟朝壬午創建享文正公 宋浚吉丙申宣額同年又 賜 御書揭額 玉城書院 在州南二十五里崇禎壬申創建享政堂文學 金得培 牧使 申潛 縣監 金範 縣監 李? 副提學 李埈 近?書院 在州北六十里 顯廟朝甲辰創建享校理 洪彦忠 文翼公 李德馨 典翰 金弘敏 司諫 洪汝河 鳳山書院 在州西五十里 肅廟朝戊子創建享文簡公 盧守愼 文靖公 沈喜(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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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咸昌 / 古跡 / 利安部曲 在縣西五里新增利安卽嶺中八名基之一名人顯官多出於此至今指點謂三判書六承旨舊里 德峯部曲 在縣東十里 金川所 在縣東五里 南山古城 在縣南十里內有一井今廢上有烽燧周四千五百三十尺 新增伽倻王墓 在縣南二里也傳本縣金氏爲其裔立碑守護歲祭之 鳳鳳臺 在縣東十里高十餘丈上有臺串川猪谷川合流彎廻于其下案峙三峯昔人取李白三山二水之句以名之其北有倉庫遺址新羅時近邑收稅自此漕運云 稼亭 在縣西二十里高麗 文孝公 李穀舊居洪汝河 / <하권0688-2> 所撰遺墟碑記李文孝公稼亭在咸寧西村監巖距縣治十里所公自韓山贅于縣人金氏故宅于玆溪壑深遂林■茂美有碑田數百畝躬?其中築壇種樹號曰稼亭旣登第及中大元制科皆授翰院檢閱文章著稱海內草疏建明有仁人之利朝之耆碩若虞揭奚歐陽諸先生交重公輒稱爲高麗 李稼亭由是天下遂知東國有稼亭焉亭雖在遐荒萬里僻縣奧區而一日名聞九州公之處乎斯也豈惟衣??帶茅蒲枷葬繫巢是務哉歿勉夫學也學之旣種而勤於稼蒙以致獲富而積崇猶用於旣足之餘則野處不?必足賴也後孫仁同府使 興祿 開寧縣監 海寬相興謀?石于遺墟屬余撰辭汝河縣人也不敢辭旅軒 張顯光從報恩罷歸道西村訪遺墟其時尙有大木離立云 懶翁亭 在縣西二十里有古槐世普濟所植與傳麗僧李穀常往來遊詠云 政承臺 在檢湖東岸世傳故相尙震 丁玉亨以安胎使過縣登覽因以爲名云(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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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효종실록 14권/ 효종 6년(1655 을미 / 청 순치(順治) 12년) 4월 9일(계해) 1번째 기사/ 김휘·윤집·홍여하·조사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휘(金徽)를 겸보덕으로, 윤집(尹鏶)을 사인으로, 홍여하(洪汝河)를 검열로 삼고, 조사기(趙嗣基)를 특제(特除)하여 지평으로 삼았다. 조사기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네 죄가 무겁기는 하나 홍우원(洪宇遠)에게 견줄 만하지는 않으니, 빨리 나와 직무를 보살피라.”하였다. 조사기는 일찍이 조석윤(趙錫胤)이 귀양갈 때에 때를 타서 힘껏 공박하여 상의 뜻에 맞추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 벼슬에 특제하고 상소에 대한 비답이 이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19장 A면/ 【영인본】 36책 10면/ 【분류】 *인사-임면(任免)(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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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효종실록 16권/ 효종 7년(1656 병신 / 청 순치(順治) 13년) 1월 3일(임오) 2번째 기사/ 새로운 천거가 맞지 않다고 사직소를 낸 봉교 홍여하와 검열 송규림이 파직되다/ 봉교 홍여하(洪汝河)와 검열 송규렴(宋奎濂)이 파직되었다.【 여하 등이 신천(新薦)이 맞지 않는다고 논의하고서 잇따라 사직소를 던지고 나갔다. 정원이 패초할 것을 청하였는데 모두 나오지 않으니,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1장 A면/ 【영인본】 36책 3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사법-탄핵(彈劾)(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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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효종실록 17권/ 효종 7년(1656 병신 / 청 순치(順治) 13년) 9월 18일(계해) 1번째 기사/ 채충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채충원(蔡忠元) 을 승지로, 민응형(閔應亨) 을 대사간으로, 오정원(吳挺垣) 을 집의로, 홍주삼(洪柱三) · 권격(權格) 을 지평으로, 곽제화(郭齊華) · 홍여하(洪汝河) 를 정언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10장 B면/ 【영인본】 36책 6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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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효종실록 17권/ 효종 7년(1656 병신 / 청 순치(順治) 13년) 11월 3일(정미) 1번째 기사/ 이응시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이응시(李應蓍)를 도승지로, 정유성(鄭維城)을 대사헌으로, 남노성(南老星)을 대사간으로, 오두인(吳斗寅)·홍여하(洪汝河)를 정언으로, 이재(李梓)를 보덕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21장 A면/ 【영인본】 36책 70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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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효종실록 17권/ 효종 7년(1656 병신 / 청 순치(順治) 13년) 12월 4일(정축) 3번째 기사/ 임금의 마음 수양을 청하는 정언 홍여하의 상소문/ 정언 홍여하(洪汝河)가 구언(求言)하는 전지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말하거나 행동하는 즈음은 군자가 신중히 하는 바이니 길흉과 화복의 조짐이 여기에서 먼저 나타나는 것입니다. 더구나 임금은 한번 말하면 법이 되고 한번 행동하면 준칙이 되니 그 관계되는 바가 어떻겠습니까. 신이 지난번에 대신들에게 내린 비답을 보건대 말씀하는 사이에 억양(抑揚)이 중도를 잃음이 어찌 그리도 심합니까. 준엄한데 관계되지도 않고 겸양하는 데 가깝지도 않으며, 단지 한 때의 분노를 통쾌하게는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스스로를 경망한 곳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시니, 위중함을 손상시킴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사신이 그것을 적고 사방이 전파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전하께서 평소 함양한 공부가 지극하지 못한 곳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신이 듣건대 희로(喜怒)가 절제를 잃어버리면 혈기(血氣)가 궤도를 따르지 않아 병이 생기게 된다고 하니, 크게 우려해야 할 만한 것으로, 일을 해칠 뿐만이 아닙니다. 옛날 사람이 학문을 논하면서 마음 수양하는 것을 주장으로 삼았는데 마음을 수양하는 법은 이치를 밝히는 것일 뿐입니다. 이치에 밝으면 마음이 텅비어 아무런 일이 없어서 일을 만나도 저절로 동요되지 않고 일을 처리할 경우 저절로 이치에 맞게 되니, 마음을 보존하고 정치를 잘하는 요체는 이것을 극진히 할 뿐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이치를 밝히는 데 우선하지 않으시고 사무에만 힘을 쓰시니, 온갖 정무가 외면에서 수고롭게 하고 갖가지 염려가 내면에 모여들어 본심의 주체가 사무에 사역을 당해서 잠시라도 쉴 수 없는 데다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용감히 나아가는 기상을 돕고 계시니, 물욕(物慾)에 가리고 고질화됨이 날마다 더 심해져 허명(虛明)하고 침정(沈靜)한 자연의 본체(本體)가 끝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고서야 일을 만나게 되면 막힘이 없을 수가 없고 마음이 동요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또 그 마음을 극력 억제하여 동요되지 않게 하지만 그 동요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 더욱 동요되어 본체는 더욱 어둡게 되는 것을 모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미워함이 마음을 따라서 일어나고 노여워함이 환경에 접촉되어 움직이니, 시행과 조처가 어긋나고 정령이 어지러워 미혹(迷惑)되는데 이르렀는데도 돌아올 줄 모르는 것은 모두 이치를 밝히지 아니하고 억지로 그 마음을 제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학문은 이치를 밝히는 것으로 주장을 삼고 마음가짐은 공경을 생활화하는 것으로 요점을 삼아, 익히고 추구하는 여가에 조용히 정신을 모으고 대수롭지 않은 수작과 응답에는 마음을 써가며 처리하려 하지 마시어, 흐트러진 마음을 수습하고 발하기 전에 침착하게 생각하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이와 같이 하기를 더러는 열흘 더러는 한달을 하여도 얻어짐이 없을 경우 게을리하지 말고 더욱 그 공부를 하여 동정(動靜)이 번갈아 수양이 되고 표리(表裏)가 간격이 없게 되면 본심의 주체를 알 수 있게 되며 함양하는 공부도 바야흐로 착수할 곳이 있게 될 것입니다. 옛날 사람이 학문을 논한 요점이 여기에 벗어나지 않으니, 기질을 변화시키는 방법 또한 어찌 여기를 벗어나서 별도로 오묘한 법칙이 있겠습니까. 장사숙(張思叔)이 하인을 욕하며 꾸짖자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어찌 마음을 움직여 성질을 참지 않는가?’ 하였으며, 여조겸(呂祖謙)은 성품이 조급하고 화를 잘 내었는데 《논어》를 읽음으로 인하여 그 병통을 제거하자 주자(朱子)가 본받을 만하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더욱 학문을 하는 데 친절한 공정(功程)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성품이 치우쳐 극복하기 어려운 곳에 마음을 더 쓰시고 쉽게 발하고 억제하기 어려운 곳에 힘을 쓰시어, 지난날의 습관을 용감하게 개혁해서 변화하여 도에 이르게 되면 기타 여러 가지 병통의 뿌리는 저절로 점점 없어질 것이니, 노여워하던 하늘을 감동시켜 돌리게 하고 치란의 기틀을 알선하는 것도 여기를 벗어나서 다른 방법을 구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하니,
답하기를, “그대가 진언한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25장 B면/ 【영인본】 36책 72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과학-천기(天氣) / *왕실-국왕(國王)(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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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현종실록 1권/ 현종 즉위년(1659 기해 / 청 순치(順治) 16년) 6월 2일(신묘) 5번째 기사/ 경성 판관 홍여하의 상소문/ 경성 판관(鏡城判官) 홍여하(洪汝河)가 임지에서 교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다시 북새(北塞)에 와서 산과 물을 우러러 보니, 여기가 바로 성조께서 발상(發祥)하신 곳이었습니다. 조종께서 어렵게 창업하셨던 일들을 생각해 보고 오늘의 나라 형세가 이렇게 흔들리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예와 오늘을 굽어볼 때 슬픈 생각에 눈물이 흐릅니다. 신이 북을 향하여 오던 그 날보다도 시대를 개탄하는 감회가 더욱 절실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북방에 대체로 걱정스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신이 남쪽에 있을 때는 북방의 사마(士馬)가 정예하고 세다고 들었는데 막상 와서 눈으로 보니, 단소하고 용렬하고 지치고 게을러서 기예를 익히지 않기는 남쪽 군대와 비슷하고, 춥고 굶주리고 야위어 있기는 오히려 더 심한 편입니다. 성이나 못이나 망루 같은 것은 허술하기가 더더욱 심하여 함흥(咸興) 이북에서 육진(六鎭)까지 모두가 다 그 모양이어서 믿을 곳이라곤 한 곳도 없었습니다. 더욱이나 땅은 넓고 사람은 희소하여 물력(物力)이 태부족이고, 천 리를 가도 쓸쓸하기만 하여 눈에 보이는 게 쑥대뿐입니다. 몇 십 년 동안 변방이 잠잠했던 관계로 군정(軍政)은 힘쓰지 않고 갉아먹기만을 일삼아, 그나마 남아 있는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원한에 차 배반할 뜻만 품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두만강 건너편은 땅이 비옥하여 종락(種落)12) 이 날로 번지고 있는데, 그들 모두가 북경(北京) 의 약속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에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지, 가령 북경 의 호령이 하루아침에라도 그 땅에서 행해지지 않는 날이면 북진(北鎭) 일대는 우리 소유가 못될 것이 뻔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낭묘(廊廟)의 자문을 구하시고 변방 문제를 신중히 다루셔서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할 대책을 강구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백성의 뜻을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중주(中主)라도 노력하면 되는 일이지만, 풍속을 바꾸어놓는 일은 상지(上智)라도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풍속은 질(質)이 유약하면서 게으르고 기(氣)는 경조하고도 부박하여, 좋아하는 것이 문사(文詞)이고 싫어하는 것이 무예(武藝)여서, 2백 년을 두고 배양했다는 것이 무예를 기른 것이 아니고 나라 전체가 오직 문사만을 전공하기 때문에, 변방에 틈이 생기려고 하면 너도나도 일어나 주모를 하고 대적병이 가까이 처들어와서야 비로소 허둥지둥 무예를 논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군이라는 자가 기·정(奇正)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군사는 격·자(擊刺)가 무엇인지 깜깜합니다. 그리고 전공을 세워도 군대에게 상이라는 것이 없고 싸움에 패하여도 장군의 목이 여전한데, 이는 바로 이 나라 습속으로서 고려 시대부터 이미 그래 왔습니다. 지금 만약 그게 걱정이 되어 갑자기 그 정책을 바꿔보려고 솜씨가 서투른 장군에게 그 일을 맡겨 짧은 시간에 효과를 거두려고 한다면, 어벌쩡하기만 하지 중요한 건 잘 안되고 힘만 들지 공로는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해마다 기근이 겹쳐 재력도 넉넉하지 못하므로 군대와 백성이 함께 술렁이어 원망이 나라에 가득 찰 것이니, 그 방법은 현 실정에 알맞지 않은 방법입니다. 아, 전쟁을 잊었다가는 반드시 위기를 맞게 되고 사전 대비가 있으면 후환이 없는 것이므로, 대비와 방어 대책도 소홀히 생각할 일은 물론 아니지만, 변방 백성을 어루만지고 달래는 정책이 더욱 더 필요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민간 풍속을 굽어살피시고 시기와 형세도 널리 참작하시어, 정책 수립과 난국 타개에 있어서는 오직 인재를 얻기에 주력하실 것이며, 군대 훈련이나 병기 제작 같은 것은 풍년이 들었을 때 실시하여, 늦추고 서둘고를 모두가 상황에 알맞고 시기에 적절하게 처리하소서.”하고, 또 아뢰기를, “형과 상은 임금이 쓰는 큰 권리로서 꼭 맞게 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옛 어진 임금들은 형은 되도록 적게 쓰면서도 장물을 취득한 탐관오리에게는 매우 준엄하였고, 상은 넉넉히 써 청렴 결백한 자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한(漢) 의 선제(宣帝) , 당(唐) 의 태종(太宗) , 송(宋) 의 태조(太祖) 가 나라를 잘 다스렸던 것이 모두 그 방법을 썼는데, 참으로 그 요령을 알았던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수령을 고르기에 힘쓰지 않아, 잘 다스리는 효과가 나오면 혹시 그가 명예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가 하면, 장물을 받은 사실이 분명한 사람에게도 오히려 은혜와 용서를 베풀고 계십니다. 게다가 공평한 여론마저 들을 수가 없고 위아래가 꽉 막혀 있어, 최고의 치적을 남기고도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을 전하로서는 들을 길이 없고 악이 쌓인 사람이라도 힘만 있으면 유사가 규명할 수 없으며, 대신 중신과 결탁하여 왕래가 끊기지 않고 중대한 외직을 맡으면 제멋대로 주구(誅求)를 일삼아, 맑고 아름다운 기상은 모조리 없어지고 흐리고 더러운 물결만 넘쳐흐르고 있으니, 백성이 어떻게 보존하며 나라가 어떻게 견뎌나겠습니까. 청렴 근간하고 치적을 남긴 관리에 있어서는, 옛 제왕들은 그에게 글월을 내려 장려하기도 하고 혹은 질(秩)을 높여주면서 그 직에 그대로 있게도 했는데, 지금은 다만 승서(陞敍)로 한계를 삼고 준직을 중히 여기고만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승서와 준직에 관한 권한도 임금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전조에 있어, 청탁에 따라 실시하고 청탁이 없으면 폐기되니 그러고서야 어떻게 남의 귀와 눈을 솟구치게 만들어 한 시대를 격려하고 권장하겠습니까. 그러나 형과 상이 그렇게 틀리게 적용되는 원인은, 사실 전하께서 백성을 사랑하심이 성실하지 못하고 격려와 권장의 요령을 잘 모르시기 때문입니다. 시비란 공평한 여론을 만들어내는 근원지로서 시비가 제대로 가려지면 속임수는 자취를 감추고 바른 선비가 쓰여지는 것이고, 시비가 제대로 가려지지 않으면 흑백이 뒤섞여 부정한 무리들이 나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비가 혼동되고 있는 것이 어찌 나라를 가진 자의 깊은 걱정거리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항상 경연에 하교하시기를, ‘우리나라 사대부들은 한 가지 병통이 있다. 서쪽을 가리켜 일단 동쪽이라고 했으면, 그것이 비록 동쪽이 아님을 알면서도 계속 고집을 하는 것이다.’ 하셨는데, 그게 바로 자신이 옳기 위하여 그름을 꾸민 병으로서 시비가 혼동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근래 들어서는 그 폐습이 더욱 성행하고 한 시대를 풍미하는 바람에 위아래가 똑같아, 비록 하늘과 같은 성상의 도량이지만 꼭 그렇지 않으시리라고 신이 감히 보장을 못하겠고, 사대부 중에서는 강팍하고 자기가 제일이며 그름을 알고서도 반드시 꾸미는 자로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 이 가장 심합니다. 논의는 편벽되고 험한 것이 주장이고 일처리는 가파른 것을 숭상하며, 자기 소견을 고집했다 하면 반드시 꾸며대고 한 번도 마음을 비워 어디가 지당한가를 찾은 적이 없으니, 그러고서야 거의 나라를 망치는 정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나머지 재신들도 거의가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 병통들이 있고, 나라 전체가 모두 이기기 좋아하는 쪽으로만 몰려가고 있으니, 시비가 어떻게 제대로 가려지겠습니까. 사람이 상대방을 보는 데는 밝고 자신을 보는 데는 어두운 것이니, 전하께서도 뭇 신하들이 동을 가리켜 서라고 하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무슨 일을 당하여는 전하 자신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하들 역시 전하의 이기기 좋아하는 병에 대하여는 간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하는 일은 도리어 더 심한 데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당연히 먼저 자신을 반성하여 이기기 좋아하는 마음을 제거하시고, 신하들도 제 버릇만 제일로 아는 편벽된 생각을 바로잡도록 깊은 경계를 가하시어, 각자가 모두 편견을 버리고 원대한 계획을 세우기에 힘쓰고 위아래가 서로 노력하여 다함께 대중 지정의 길을 걷는다면, 시비가 혼동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가리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신이 엎드려 보건대, 전하께서 정직한 선비를 우대하시고 좋은 교훈이면 그것을 채택하시어, 좌우에 관계없이 귀담아듣기를 게을리 않으시고 심지어 초야에까지 도움을 청하시니, 말길이 막힐 걱정은 없을 듯합니다. 신은 ‘간하는 사람에게 상을 내리는 자는 흥하고, 간하는 사람을 죽이는 자는 망한다.’고 들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독단을 좋아하시고 자신감에 넘쳐 있어, 간언을 굳이 막으려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 스스로가 간하는 것을 포기하니, 간하는 자를 죽인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사실은 선비를 죽인 셈입니다. 그 때문에 바른 말하는 선비들이 맥이 풀리고 있는 것입니다. 홍우원(洪宇遠)의 상소만 하더라도 그가 비록 끌어댄 비유는 맞지 않은 것이지만, 그러나 뜻만은 임금을 사랑하는 충심에서 나온 것이니, 전하께서는 그를 포상도 할 만한 일이요 용서해도 되는 일입니다. 그 후 재변을 당했을 때 전하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세 아이의 친속을 모두 서울로 들어오게 하였는데, 신은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감격에 젖어 눈물이 나옵니다. 그 일이 비록 우원 의 말을 채택하여 그리하신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그 말과 맞지 않았습니까. 신이 생각하기에는 전하께서 우원에 대하여 따뜻한 유시를 특별히 내리시고 예전처럼 대우를 하면, 그게 바로 성인의 도량이며 미래를 격려하고 권장하는 훌륭한 뜻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물리침을 당했던 다른 신하들은 모두 다시 기용하여 청반(淸班)에다 두시면서 유독 우원에게만은 아직도 석연찮게 여기시는 것입니까? 그러고서야 말길이 막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대각이 혹 글월을 올려도, 번번이 사를 끼고 한 말들이 많아 연일 시끄럽기만 하지 모두가 형식에 지나지 않은 것들이고, 정작 위로 국가 흥망에 관계된 일이나 아래로 자기 일신의 화복에 영향을 끼칠 말을 감히 입 밖에 내지도 않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정직한 선비를 예우하시고 좋은 말 듣기를 즐기시어, 풀어주기만 할 것이 아니라 뒤이어 상을 내림으로써 격려와 권장의 뜻을 나타내시고, 간하는 자들도 저들끼리 서로 권면하게 하소서.”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향곡에서 생장하고 벼슬한 지도 오래지 않아 서울 물정은 사실 잘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 쓰는 법에 대하여 살펴보면, 청류의 진퇴는 일정한 격식이 있어 이력이 있어야만 현양 발탁이 되고 자기가 잘못하면 앞길이 당연히 막히며, 후보 추천을 할 때 이조에서도 자기들 뜻대로는 잘 안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일반 음직을 뽑는 데 있어서는 사를 쓰는 일이 절반도 넘고 공정한 길이라곤 거의 없어, 후원자가 없으면 되지 않고 촉탁이 아니면 길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벼슬길이 너무 문란하고 명기(名器)가 혼돈 상태에 있는 것이 극에 달했습니다. 지금 다행히 전형을 발탁 제수하여 해묵은 폐단을 점점 바로잡아 가리라는 기대는 있지마는, 춘방(春坊)을 더 둔 목적은 세자를 보도하기 위한 좋은 뜻에서 한 것으로서 진선(進善) 이상을 제수할 때는 모름지기 오랜 명망을 갖춘 자로 해야 할 것입니다. 참하에서 뽑는 별도로 둔 자의(諮議)만 하더라도, 문관(文官) 인망을 갖춘 자로서도 도리어 그 자격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다면 온 세상을 통틀어 두세 명만 있다고 하여도 오히려 많은 편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디에다도 시험해본 사실이 없는 나이 적은 음관을 곧 자의에 추천하여, 평상시 노성한 사람도 회피하고 감당 못하는 예를 하루아침에 신진 인사에게다 쓰고 있으니, 다만 보기에나 좋을 뿐 보탬이 되는 실효는 없을 것이며, 또 현자를 우대하고 선비를 사랑하며 염치를 배양하는 방도도 아닐 것입니다.
아, 인재가 등용되면 기강도 진작되어 형과 상이 옳게 시행이 되고, 공도(公道)가 행해지면 말길도 열리어 시비가 자연 분명해지는 것인데, 이상 네 가지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어진 인재를 발탁하고 공도를 넓히는 두 가지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재가 나오기 어려운 원인과 공도가 행해지기 어려운 이유를 따져보면 거기에는 까닭이 있는데, 그것은 붕당이 남긴 화가 오늘의 나라를 병들게 하는 뿌리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 학술이 분열된 것은 중국 도 마찬가지여서 가정(嘉靖) 13) 융경(隆慶)14) 이후로 사론(士論)이 팽팽히 맞서 1백 년을 두고 서로 버티어 왔으나, 그들은 화가 위로 조정에까지 미치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렇지가 못하여 기치를 세운 것은 비록 의견을 달리한 때문이었지만 마음 쓰는 것은 사실 명예나 이해에 좌우되어, 별로 다르거나 같을 것도 없는 문제들을 가지고 터놓고 배제도 하고 응원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경박한 무리들은 용기를 뽐내며 먼저 기어오르고 편협한 무리들은 죽음을 각오한 채 막무가내이며, 질탕한 풍류 속에 너도나도 서로 자랑하다가 오늘에 와서는 그것이 고질로 변하여 당혹감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분풀이라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면 오직 자기 속만 시원하면 그만이고, 임금의 안위와 종묘 사직의 존망은 치지도외한 채 생각에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야말로 본심을 잃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하였다. 이 상소문이 4월 그믐 경에 현과 도를 거쳐 올라왔는데, 때마침 선대왕이 병환 중이어서 받아들이지 못했다가 곧 국상을 당하여, 아직까지 승정원에 유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승지 유계가 상께 아뢰기를, “ 여하의 상소가 명칭은 응지이온데, 내용이 처음에는 본도의 사정을 말하였고 이어 오늘의 폐단을 언급했으며, 위로 성상의 학문과 공부 과정 그리고 하신 일의 잘잘못을 논하였고, 또 완남 부원군 이후원에 대하여 논하면서 그의 논의가 편파적이고 간험하여 그러다가는 나라를 망치는 데 이르지 않겠느냐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전조가 음관을 자의로 추천한 것이 잘못임을 논하기도 했는데, 이 상소가 진언 형식으로 올라온 것이어서 받아들이기는 들여야 할 것 같으나, 그 내용들이 간혹 대행왕과 직접 관계가 되는 것들도 있어 오늘에는 해당 사항이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냥 받아들일 것입니까, 아니면 다시 써 올리도록 합니까?”하니, 상이 원상 정태화와 논의하라고 하였는데, 태화 가 다시 써서 올리도록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 후 논의들이 여하 의 뜻은 송시열 을 헐뜯기 위한 것이라 하여 그를 맹공하였기 때문에, 상도 그렇게 음험 간특하고 질투가 심한 여하 의 상소문을 구언의 범주에 넣어 다시 써서 올리게 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1장 A면/ 【영인본】 36책 210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사법-재판(裁判) / *인사-임면(任免)/ [註 12]종락(種落) : 같은 종족끼리 모여 사는 곳. ☞ / [註 13] 가정(嘉靖) : 명 세종(世宗)의 연호. ☞ / [註 14]융경(隆慶) : 명 목종(穆宗)의 연호. ☞(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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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현종실록 1권/ 현종 즉위년(1659 기해 / 청 순치(順治) 16년) 6월 7일(병신) 1번째 기사/ 정태화 등이 입진하여 상의 병증을 논의한 후 홍여하의 상소 등에 대해 논의하다/ 상의 병세가 오래도록 차도가 없자 약방 도제조인 영의정 정태화 가 두서너 의관과 함께 입진할 것을 청하였고 좌의정 심지원도 함께 들어갔는데, 상이 보고는 통곡하였다. 영상이 병증을 논의한 후 이어 아뢰기를, “ 홍여하 의 상소가 비록 백성들의 병막과 시정의 폐단에 관하여 논하였으나, 이후원을 꼬집어 나무란 말은 너무 근거가 없는 말이었습니다. 후원 이 일찍이 무엇을 담당하여 한 일이 없는데 무슨 나라를 그르칠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는 이어 전주(銓注)가 공정하지 못하고 자의(諮議) 의망이 너무 함부로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송시열 이 그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누차 사직소를 올렸지만, 어찌 여하 의 말 한 마디로 인하여 동요가 있을 수야 있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보기에는 그 상소가 과연 어떻던가?”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상소 내용에 이미 폐단에 관하여 말하였고 또 언로와 관계가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다시 써서 올리라고는 하였으나, 가령 규례에 따라 재가를 받는다고 하여도 채택할 만한 것이라곤 없습니다. 이판(吏判)의 생각에는, 이미 다시 쓰라고 했으니 그러면 그 일이 결말이 된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행공(行公)을 않으려는 것이지만, 그러나, 조정이 예우하는 도리로서는 여하 의 망령된 말로 인하여 쉽게 총재(?宰)를 갈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이후로도 혹시 동요를 일으키고 싶어하는 자가 있어 또 다시 운운한다면 그 폐단 역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판은 내가 의지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데 어찌 그 때문에 갈아낼 이치가 있겠는가.”하였다. 태화 가 또 아뢰기를, “제왕은 효도의 법이 필부와는 다릅니다. 모름지기 감정을 억제하고 예제를 따라 몸을 보호하는 데 깊은 배려를 하시어 후회스러운 일이 있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옛날 소신이 초토(草土)에 있을 때 병이 매우 중했는데, 선왕께서 중사 이엽(李曄)을 특별히 보내시어 권도를 따르도록 권하시고 나라를 위해 몸을 보호하라는 뜻으로 타이르셨습니다. 신은 그때 성상의 하교에 감격하여 울면서 그 명령을 따랐었는데, 그 심정으로 상상해 보자면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령이 지금 전하를 얼마나 못잊어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는 거기까지 생각지 않으시는 것입니까.”하였고, 심지원도 뒤이어 성궁을 보호해야 한다는 뜻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이 시기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하면서, 이어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상이 승지 김수항에게 이르기를, “대사헌의 차자 내용 중에, 현준을 널리 초치하라고 한 문제는 정원이 되도록 빨리 거행하되, 내가 말한 것으로 내용을 꾸며서 유시하는 것이 좋겠다.”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전 찬선 권시(權?), 전 진선 윤선거(尹宣擧)를 당연히 먼저 징소해야겠지만, 그 밖의 재야 인사들도 신이 물러가 일일이 찾아보고 똑같이 불러일으키겠습니다.”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상이 영상에게 이르기를, “대간이 유후성 ·조징규 사건을 놓고 논집한 지 이미 오래이나, 내 생각은 그렇지 않은 바가 있다. 후성 이 종전에는 약을 쓸 때 그 마음씀이 측량키 어렵다는 것을 볼 수가 없었는데, 어찌하여 지금 와서 그러한 점이 있다는 것인가? 뿐만 아니라 자전의 병증이 때없이 발작하곤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후성 을 따를만한 의관이 없고 또 설사 있다고 하여도 전후 증세를 자세히 알기로는 이 두 의관 만한 자가 없다. 죽음을 면제하여 유배로 처리했다가 급하면 불러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그렇게 처리하시는 것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박군(朴?) 무리들의 고신(告身)을 추탈하는 일에 있어서는 군중들 생각이 모두 너무 가볍다고 하오니, 도배(徒配)가 맞을 것 같습니다.”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고 그날로 대계에 의하여 제조 등의 직을 파하고 박군 등을 도배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5장 B면/ 【영인본】 36책 212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의약-의학(醫學)(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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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현종실록 1권/ 현종 즉위년(1659 기해 / 청 순치(順治) 16년) 6월 12일(신축) 5번째 기사/ 우의정 정유성이 홍여하의 상소문에 관해 상차하다/ 우의정 정유성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 홍여하 상소문은 응지를 핑계로 대신과 총재를 제멋대로 공박한 것으로, 선류(善類)들을 해치고 이간질한 그의 정태야말로 고약한 일입니다. 조정으로서는 의당 시비를 분명히 가려내어 사특한 말이면 호되게 응징하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신이 어제 경연 석상에서 총재를 가벼이 갈아서는 안 된다는 뜻을 누누이 아뢰었던 것인데, 파하고 나온 후 곧바로 이판 송시열 을 체직하는 명령을 내리셨다니, 성상의 뜻이야 비록 그를 강박하고 싶지 않아서 하신 일이겠으나 선대왕이 의지하고 신임하던 신하를 일개 요사스런 말로 금새 면직을 허락한다면, 중외가 놀라고 의혹할 뿐만 아니라 차후 그를 본받아 일어나는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내려진 명령을 다시 거두기는 물론 어렵겠지만 며칠 기다렸다가 신명(新命)을 특별히 내리시면, 중외의 의혹도 틀림없이 풀릴 것이고 선대왕의 은총과 예우도 그대로 지속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오직 성상의 재처를 바랄 뿐입니다.”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 내용이야말로 지당한 말이다. 내 마땅히 깊이 생각하리라.”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0장 A면/ 【영인본】 36책 214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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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현종실록 1권/ 현종 즉위년(1659 기해 / 청 순치(順治) 16년) 6월 13일(임인) 4번째 기사/ 정언 여성제가 홍여하의 상소문에 관해 상소하다/ 정언 여성제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대강 듣건대, 홍여하 상소가 오로지 이후원이 나라를 그르친 죄를 공박하고 또 송시열 이 전형을 쥐고 인재 등용을 잘못했음을 논하였는데, 전하께서 분명한 교지를 내려 그 괴이하고도 망령된 말을 깨버리지 않으신 것을 신은 저으기 애석하게 여깁니다. 여하의 뜻은 후원 이 시열과 서로 가까운 사이임을 기화로 이쪽을 공격하면 저쪽까지 미쳐갈 것이라는 계산에서 한 짓이지만 사실은 오로지 시열을 겨낭한 것이었으므로, 시열의 직을 가벼이 갈지 말았어야 됨이 분명합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이렇게 공과 사 모두가 바닥이 난 때이면 비록 제향에 쓸 것이라도 덜만큼 덜어 백성을 돌보시던 선왕의 높은 덕을 따르셔야 할 것인데, 신이 듣기에 소채 중에서 들깨가 한 달이면 8석씩이나 된다니, 일은 비록 대단찮은 일이지만 쓰기를 너무 많이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에 사화(絲花)18) 를 쓰는 것이 원래 정례(正禮)가 아닐 뿐만 아니라 불사(佛事)에 가까운 일로 잘못 전래된 규례이니, 구습을 그대로 따를 것이 없습니다.”하니, 상이 좋은 뜻으로 비답하고, 또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0장 B면/ 【영인본】 36책 214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재정-상공(上供)/ [註 18]사화(絲花) : 조화. ☞(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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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현종개수실록 1권/ 현종 즉위년(1659 기해 / 청 순치(順治) 16년) 6월 7일(병신) 1번째 기사/ 정태화가 입진을 마치고 홍여하의 상소 등을 가지고 아뢰다/ 상의 병세가 오래도록 차도가 없어 약방 도제조 정태화가 2, 3명의 의관과 입진(入診)할 것을 청하고, 좌의정 심지원 또한 함께 입시하였는데, 상이 만나 보고 통곡하였다. 태화가 증세를 논란한 후 곧 나아가 아뢰기를, “ 홍여하의 상소가 비록 백성들의 고통과 당시의 폐단을 진술하였으나, 이후원을 지적해 공격한 말은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후원 이 일을 담당하여 시행한 것이 없는데 무슨 나라를 그르친 일이 있겠습니까. 이어 전조의 주의가 불공평하여 자의(諮議)의 의망이 지나치게 참람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송시열 이 이로 인해 불안하여 여러 차례 사직소를 올렸습니다. 어찌 여하 의 한마디 말로 동요하는 바가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그 소를 보기에 과연 어떠하던가?”하였다. 이에 태화가 아뢰기를, “소 중에 이미 폐단되는 일을 진술하고 또 언로(言路)를 이어 말하였으므로 다시 써서 드리게 하였습니다. 설사 전례대로 계하한다 하더라도 모두 채택할 만한 말이 없는데, 이판(吏判)은, ‘이미 다시 쓰게 하였다면 일이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무를 집행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조정이 예우하는 도리에 있어 여하의 망녕된 말로 인하여 경솔히 총재를 체직할 수 없습니다. 이후에 혹시라도 동요시키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다시 이를 들먹일 것인즉, 그 폐단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판은 내가 몹시 믿는 바이다. 어찌 이로 인하여 체직할 리가 있겠는가.”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제왕의 효가 필부와 다르므로 반드시 감정을 억제하고 예를 따르며 깊이 보호를 생각하여 후회가 있지 않게 합니다. 소신이 옛날에 거상 중에 있을 때 질병이 극심하므로 선왕께서 특별히 중사(中使) 이엽(李曄)을 보내 임시 권도를 따를 것을 권유하고 나라를 위해 힘써 보호하라는 뜻으로 회유하였습니다. 신은 성상의 분부에 감격하여 울면서 그 하명을 받들었습니다. 이로 생각할 때, 하늘에 계시는 선왕의 영령이 전하를 돌보심이 의당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어찌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십니까?”하고, 심지원 또한 이어 보호의 뜻으로 진수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이때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고 하면서 통곡하여 그치지 않았다. 상이 승지 김수항에게 일러 말하기를, “대사헌의 차자 중 널리 현준(賢俊)을 불러들이라는 한 가지 일을 정원이 속히 거행하여 나의 말로 말을 만들어 하유하는 것이 좋겠다.”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전 찬선(贊善) 권시(權?), 전 진선(進善) 윤선거(尹宣擧)를 의당 먼저 불러들이고, 이 밖의 재야인 또한 마땅히 방문하여 모두 불러들여야 하겠습니다.”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답하였다. 상이 태화에게 일러 말하기를, “대간이 유후성·조징규의 일로 논집한 지 오래나, 내 생각에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것은 후성이 전에 약을 의논할 때 성심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와서 어찌 감히 그를 소홀히 하겠는가. 또 자전의 증세가 수시로 일어나는데, 지금의 의관으로는 후성 과 징규 에 미칠 자가 없고 전후 증세를 잘 아는 자 또한 두 의관 같은 자가 없다. 죽임을 용서하여 유배하였다가 급하면 소환하여 약을 의논하는 것이 어떠한가?”하니,
태화가 아뢰기를,“이와 같이 처치하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그러나 박군(朴?) 등의 탈고신(奪告身)에 이르러는 중의가 모두 너무 경하다 하니 도배(徒配)로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날 대간의 아룀으로 인하여 제조 등의 직을 파하고 박군 등을 도배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A면/ 【영인본】 37책 105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의약(醫藥) / *인사(人事)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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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숙종실록 21권/ 숙종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10월 5일(무진) 2번째 기사/ 윤휴·홍여하를 포증하고, 의원군 이혁을 다시 이정의 아들로 삼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대사헌(大司憲) 이현일(李玄逸)이 말하기를, “ 윤휴(尹?)는 대의(大義)를 천하에 밝히려고 하였는데, 간인(奸人)이 얽어 무고(誣告)하여 억울함을 품고 죽었으니, 복관(復官)·사제(賜祭)하는 것은 실로 성상의 덕에 빛납니다. 특별히 근시(近侍)를 보내어 포증(褒贈)하는 은혜를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도 이와 같다. 의정(議政)을 추증하고, 근시(近侍)를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라.”하였다. 이현일이 또 말하기를, “고(故) 사간(司諫) 홍여하(洪汝河)는 경학(經學)이 있고 행실이 단정하였으므로 영남 선비의 영수(領袖)가 되었는데,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하다가 좌폐(坐廢)된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시어 일찍이 사간으로 불렀으나 미쳐 배명(拜命)하지 못하고서 죽었습니다마는, 저술한 《여사휘찬(麗史彙纂)》은 자못 사법(史法)을 얻었으므로 조경(趙絅)이 일찍이 칭찬하였으니, 민몰(泯沒)시킬 수 없습니다. 포증(褒贈)을 더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 드디어 부제학(副提學)을 추증하였다. 또 말하기를, “종실(宗室) 이정(李楨)은 흉인(凶人)에 모함을 받아 경신년 옥사(獄事) 때 죽었는데, 조정으로부터 그 소후자(所後子)6926) 를 파하였으므로, 지금 이미 신원(伸?)·복작(復爵)하였으나, 제사를 맡을 이가 없으니, 친족에게 돈목(敦睦)하고 죽은 이를 위로하는 의리를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 그 소후자를 파한 것은 그를 연좌시키지 아니하려고 한 것인데,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또한 따르겠다.”하였다. 이에 의원군(義原君) 이혁(李爀)을 다시 정(楨)의 아들로 삼았다. 이때 이현일이 오랫동안 서울 집에 있었는데, 무릇 당인(黨人)이 스스로 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서도 오히려 공의(公議)를 두려워하여 감히 청하지 못하는 것은 반드시 이현일에게 아뢸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현일 은 우매하여 분변하지 못한 채 곧 임금에게 아뢰었던 것이고, 모두 시행될 수 있었다. 이현일은 먼바다 촌사람으로써 갑자기 경렬(卿列)6927) 에 참여하게 되자, 사사로운 마음으로 영화롭고 다행스레 생각하였다. 초거(?車)를 타고 매양 다리를 지나갈 때마다 가마꾼이 반드시 가마를 들고 천천히 한 소리를 지르니, 이현일 이 이를 좋게 여겨 매양 혼자서 그 소리를 본받았다. 하루는 다리를 지나면서 가마꾼이 미처 소리를 지르지 못하자, 이현일이 부지불각 중에 스스로 그 소리를 지르니, 길가는 사람들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김몽신(金夢臣) 이 무주 부사(茂州府使)로서 전례를 따라 이현일 에게 가서 하직 인사를 하였는데, 이현일이 김덕원(金德遠)의 아들 김몽양(金夢陽)의 동생으로 잘못 알고 관곡(款曲)하게 말하기를, “지금 이 조국(朝局)6928) 이 일신(一新)한 것은 오로지 존대야(尊大爺)6929) 가 장내승(張內乘)에게 주선한 힘이다. 감사하고 감사하다.”하였는데, 장내승은 바로 장희재(張希載)이다. 처음에 부름을 받고 올라오는 길에 여러 고을에서 관기(官妓)로 모시게 하니, 이현일이 침혹(?惑)하여 심지(心志)를 잃었다. 추문(醜聞)이 널리 전파되고, 음패(淫悖)한 행동까지 있어 일세(一世)의 언요(諺謠)가 되었으니, 비록 그의 당류라 하더라도 모두 비웃었다./
【태백산사고본】 23책 21권 37장 A면/ 【영인본】 39책 203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풍속-예속(禮俗)/ [註 6926]소후자(所後子) : 양자. ☞ / [註 6927]경렬(卿列) : 재상. ☞ / [註 6928]조국(朝局) : 정국. ☞ / [註 6929]존대야(尊大爺) : 남의 아버지의 존칭. ☞(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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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승정원일기/ 효종 5년 12월 11일 (정묘) 원본133책/탈초본7책 (6/7) 1654년 順治(淸/世祖) 11년/ 權知承文院副正字에 李東老 등을 口傳으로 시행할 것을 청하는 吏曹의 계목/ ○ 吏曹啓目, 權知承文院副正字, 新及第李東老·李□·洪汝河·宋奎濂·沈?·安□·孟胄瑞·卞榥·李亨長·姜汝□·梁徵·安汝止等, 口傳施行, 何如? 啓依允。以上朝報(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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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승정원일기/ 효종 6년 4월 5일 (기미) 원본135책/탈초본7책 (2/9) 1655년 順治(淸/世祖) 12년/ 議政府 翰林薦의 성적/ ○ 議政府, 翰林薦取才, 洪汝河·宋奎濂, 左傳略。(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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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승정원일기/ 효종 6년 4월 9일 (계해) 원본135책/탈초본7책 (6/8) 1655년 順治(淸/世祖) 12년/ 金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有政。以金徽爲輔德, 曺漢英爲兵曹參議, 尹鏶爲舍人, 柳志立爲奉常僉正, 檢閱單, 洪汝河。出吏曹政軸(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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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승정원일기/ 효종 6년 5월 19일 (임인) 원본135책/탈초본7책 (8/11) 1655년 順治(淸/世祖) 12년/ 糾正하는 논의를 당하였으므로 遞免을 청하는 洪汝河의 상소/ ○ 檢閱洪汝河上疏。大槪, 旣被糾正之論, 不可晏然在職, 乞賜遞免事。答曰, 省疏具悉。旣過之事, 不必提起, 爾其勿辭察職。(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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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승정원일기/ 효종 6년 7월 29일 (신해) 원본136책/탈초본7책 (14/14) 1655년 順治(淸/世祖) 12년/ 소원대로 하라고 洪汝河의 상소에 대해 내린 비답/ ○ 答待敎洪汝河疏曰, 省疏具悉。爾其依願焉。出內下記草 郞廳 申命佐 校正。日記郞廳 李聖運 書。(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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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승정원일기/ 효종 6년 12월 26일 (병자) 원본137책/탈초본7책 (4/6) 1655년 順治(淸/世祖) 12년/ 鐫職을 청하는 洪汝河의 상소/ ○ 奉敎洪汝河上疏。大槪, 史局百年舊例, 不容一朝頓墜, 冀蒙鐫削, 以整頹綱事。答曰, 省疏具悉。爾其勿辭察職。出春坊朝報(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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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승정원일기/ 효종 7년 1월 22일 (신축) 원본138책/탈초본7책 (8/10) 1656년 順治(淸/世祖) 13년/ 洪汝河에게 속히 올라오라고 하유할 것, 宋奎濂의 牌招를 청하는 承政院의 계/ ○ 政院啓曰, 史官二員, 今日政已爲付職矣, 奉敎洪汝河, 時在慶尙道咸昌地, 斯速乘馹上來事, 下諭, 待敎宋奎濂, 牌招肅拜, 使之察任, 何如? 傳曰, 允。(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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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하 [記事] : 승정원일기/ 효종 7년 1월 22일 (신축) 원본138책/탈초본7책 (10/10) 1656년 順治(淸/世祖) 13년/ 康大立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有政。吏批, 以康大立爲平安道審藥, 金相潤加通政, 韓德及加嘉善, 鄭震遠加嘉善, 郭希泰加嘉善, 李重信爲安邊府使, 趙惟新爲寶城縣監, 沈譜爲光陽縣監, 李宇柱爲安東判官, 梁?爲古阜郡守, 姜鎬爲仁同府使, 李?爲尙州牧使, 李晶爲南學敎授, 洪汝河爲奉敎, 宋奎濂爲待敎, 鄭慶演爲監察, 洪南立爲兵曹佐郞, 金壽弘爲刑曹正郞。已上朝報(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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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면 황지리 출신 안도현,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출판...축하합니다.
안도현(쓰고 또 쓰라…시는 온몸이요 목숨이니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 안도현 지음/한겨레출판/
시에도 마성이 있다면, 그걸 일러 시마(詩魔)라 할 것이다. 안도현 시인의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는 30년 동안 시마와 동숙한 자가 체험으로 터득해 쓴 ‘시마 길들이는 법’이다.
시마의 습격을 받고 시마의 횡포에 시달린 자의 육성 고백이다. 그 시달림에는 기이하고도 특별한 쾌락이 함께했으니, 그의 고백은 시마와 교접하여 절정을 만끽한 자가 내뱉는 탄성의 기록이기도 하다.
지난해 여섯 달 동안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 속에 <한겨레>에 연재된 글들이 더 많은 전거와 예증의 살을 입고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은 시를 어떻게 쓰는지 알려주는 시작법이고 시가 도대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시론이다.
그러나 외국의 이론을 빌려다 모호한 개념으로 채운 통상의 시론서와는 아주 다르다. 지은이 자신을 포함한 우리 시대 시인들의 시가 사례가 되고 그들의 체험이 바탕을 이룬다.
우리 고전을 빛냈던 1급 문장가들의 글을 앞세우고 한자 문화권의 시학을 끌어들인다. 그리하여 이 책은 추상적 이론세계가 아닌 체험적 생활세계에서 추출된 시론이 되고 그 시론의 뒷받침을 받는 시작법이 됐다.
이렇게 살갑고도 생생한 말로써 지은이는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감별하는 법을 들려주고 어떻게 하면 시와 친해질 수 있는지 알려준다.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이 책은 시작법 안내서다.
좋은 시를 쓰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건들이 스물여섯 꼭지에 나뉘어 실렸다. 그 스물여섯 꼭지를 통과하는 과정은 그대로 아름다운 시 한 편의 탄생기를 이룬다.
시를 쓰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지은이가 가장 먼저 권하는 것이 ‘겪음’이다. 많이 겪어라. 많이 만나고 많이 마시고 많이 사랑하라. 그리고 이 겪음은 읽기, 곧 글을 통한 겪음으로 수렴한다.
“시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시쓰기도 다른 모든 일과 다르지 않아서, 먼저 학습이다. “시집을 백 권 읽은 사람, 열 권 읽은 사람,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 중에 시를 가장 잘 쓸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학습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 모방이다. 모방이 창조를 낳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시적 영감이 번개치듯 심장으로 날아오기를 기대하지 마라. 차라리 흠모하는 시인의 시를 한 줄이라도 더 읽어라.”
모방을 잘하려면 ‘지독히 짝사랑하는 시인’을 얻어야 한다. 혹독한 짝사랑의 열병에 걸려 시인의 말투며 표정까지 베끼고 외울 때, 그 끝에서 창조의 꽃봉오리가 가까스로 열린다.
시쓰기는 몰입이고 열정이다. 지은이는 천재시인이란 없다고, 천재란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의 다른 말이라고 말한다.
이광웅 시인이 <목숨을 걸고>라는 시에서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고 주문했음을 지은이는 상기시킨다. 이 목숨 거는 자세가 열정이고 그 열정의 흐름이 몰입이다.
시는 몰입의 산물이며 열정의 열매다. “열정의 노예가 되어 열정에 복무할 때” 거기서 시적 재능이 비로소 싹튼다.
시인에게 불구대천의 원수가 있다면, 그것은 상투성이다. 지은이는 롤랑 바르트의 말을 빌려 상투성이란 “어떤 마력도 어떤 열광도 없이 반복되는 단어”를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지적한다.
상투성이라는 적을 제압한 자만이 시인의 왕국으로 들어설 수 있다. 그 입장권을 얻으려고 분투하는 자는 이 세상을 낯설게 보아야 한다.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발견해야 한다.
세계와 불화해야 한다. 이문재 시인이 스무 살 시절에 “우리에게는 파격이 필요했다”고 털어놓은 것은 일상이 전쟁터였음을 증언하는 말이다.
“우리는 수업시간에 벌떡 일어나 노래를 불렀고, 본관 앞에서 막걸리에 도시락을 말아먹었다. 글씨를 왼손으로 썼고, 담뱃갑을 거꾸로 뜯었다.”
상투성과 싸우는 자는 관념어와 싸우는 자이기도 하다. 시의 나라에서 관념어는 죽은 말이다. 말의 주검에서는 삶이 나올 수 없다. 시는 몸을, 육질을 더듬고 탐하는 일이지, 추상세계를 고공비행하는 일이 아니다.
죽은 언어는 죽은 인식을 낳고, 진부한 말은 진부한 생각을 만든다. ‘애수’(유치환)도 ‘애증’(박인환)도 ‘견고한 고독’(김현승)도 시의 세계에선 사어다.
“시간의 무덤에서 하얗게 풍화된 죽은 말들이다.” 그러므로 지은이는 말한다.
“진정한 사랑은 개념으로 말하는 순간 지겨워진다. 당신의 습작노트를 수색해 관념어를 색출하라. 그것을 발견하는 즉시 체포하여 처단하라. 암세포와 같은 관념어를 죽이지 않으면 시가 병들어 죽는다.”
관념어만 시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시는 감정의 과잉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 지은이는 말한다. “감정을 쏟아붓지 말고 감정을 묘사하라.”
감정의 홍수가 넘실대는 곳이야말로 시의 금지구역이다. 넘쳐흐르는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은 시가 아니다. 차라리 시는 감정의 홍수에 떠밀려 익사 직전에 이른 자의 그 위태로움을 냉정하게 묘사하는 일이다.
지은이는 가차없이 말한다. “제발 시를 쓸 때만 그리운 척하지 마라. 혼자서 외로운 척하지 마라. 당신만 아름다운 것을 다 본 척하지 마라. 이 세상 모든 슬픔을 혼자 짊어진 척하지 마라. 유식한 척하지 마라.”
이 ‘척’이야말로 시의 독이다. 과잉 감정은 가짜 감정이다. 시쓰기는 가짜를, 껍데기를 뚫고 진짜 속으로, 진실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시는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쓴다.
그러나 시는 가슴으로만 쓰는 것도 아니고 손끝으로만 쓰는 것도 아니다. 지은이는 여기서 김수영의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를 불러들인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온몸으로 온몸을 밀어 마침내 만나는 것이 ‘사랑’이라고 김수영은 말한다.
지은이는 이 온몸의 시학, 온몸의 사랑을 두고 “시를 창작하는 일은 온몸으로 하는 반성의 과정이며, 현재형의 사랑이며 고투”라고 다시 새긴다. 이 온몸의 사랑에서 시가 태어난다.
그렇다면 시의 세계는 삶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시는 삶이다. 지은이는 말한다. “아, 당신도 시를 쓰라.”
■ 안도현의 시 이력은 :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는 지은이 안도현 시인의 시적 체험이 뿌리를 이루는 책이어서, 곳곳에 그의 시 이력이 솔직하게 소개돼 있다.
그 이력을 따라 밟으면 한 소박한 문학청년이 시인으로 서기까지의 경로가 드러난다.
경북 예천의 시골에서 태어난 지은이는 초등학생 때 벌써 시를 썼다. 학교 백일장이 열리면 시를 써냈는데 “시가 좋아서가 아니라 길이가 짧기 때문에 빨리 쓰고 뛰어놀기 위한 속셈”이었다.
시에 자의식이 싹튼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교지에 처음으로 투고한 시는 심혈을 기울여 썼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실리지 않았다.” 뭔가 억울했던 그는 고등학생이 돼 학교 문예반에 들어갔다.
그는 “이른바 고등학생 문단을 들락거리며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문학소년”이 됐다. 어른들 입맛에 맞는 시를 척척 써냈는데, 그 기술을 전수해준 것이 ‘모더니즘’이었다.
말들을 골라 손끝으로 기교를 부리던 시절이었다. “생명이 요동치는 계절이면/ 넌/ 하나씩 육신의 향기를 벗는다”로 시작하는 <개화>라는 시를 썼다.
“명사들, 용언들의 매혹에 빠져 미궁을 헤매듯 어지럽던” 그때 시마가 처음 찾아들었던 모양이다. “어쩌다 새로이 하나의 단어와 문장을 만나면 그것들이 주는 울림 때문에 몇 날 며칠을 아팠다. 어떤 단어는 환각제 같았고 어떤 단어는 하느님 같았다.”
경북 소년은 전북 원광대 국문과에 들어갔는데, 그때가 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1980년대 초입이었다. 그 어두운 시대를 응시하려면 손끝의 시쓰기를 넘어 가슴의 시쓰기가 필요했다.
대학 1학년 때 만난 것이 일제강점기 시인 백석의 시 <모닥불>이었다. 그때 백석과 사랑에 빠졌다. “백석이라는 낯선 시인의 시 한 편은 스무 살 문학청년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나는 캄캄해졌다. 그만 눈이 멀어버린 것이다.”
백석의 시를 필사적으로 필사하면서 시의 새로운 경지를 넘보았다. 그 시절의 짝사랑은 나중에 그가 낸 시집의 제목으로 이어졌다. <모닥불>(1989), <외롭고 높고 쓸쓸한>(1994).
이 두 번째 시집 제목은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라는 백석의 시구에서 따왔다.
대학 4학년 겨울 신춘문예를 준비하면서 “나는 혁명에 실패하고 서울로 잡혀가는 전봉준을 그리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80년대라는 시대와 시를 어떻게 결합할 수 없나, 하는 것이었다.”
그 고심 끝에 “학교 앞 자취방에서 엎드려” 출산한 것이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었다. 그는 시의 배경에다 눈을 퍼부어댔다.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이 시로 한 명의 시인이 문단에 자립했다.
그 뒤 지금까지 아홉 권의 시집을 낸 그는 전봉준의 시인보다는 연애시의 시인으로 더 알려져 있고, 항간에는 ‘연탄시인’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시를 사람들이 애송하기 때문이다.
(고명섭 記者 한겨레신문 20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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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382
예천군테니스협회(테니스同好人들의 잔치 ''''''''''''''''第3回 4個 市.郡 協會長盃 클럽對抗 테니스大會'''''''''''''''' 消息) [記事] :
제3회 4개 시.군(문경, 상주시, 의성, 예천군) 테니스 협회장배 클럽대항 테니스대회가 2009년 3월 8일 오전 9시부터 예천공설테니스장에서 4개 시.군 33개 클럽 소속 임원 및 선수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1회 의성군, 2회 상주시 개최에 이어 예천군테니스협회가 3회 대회를 주관한 이날 대회에는 상주, 문경시와 의성, 예천군 테니스 협회장과 선수및 가족 등이 참석하여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심두보 예천군테니스협회장은 대회사를 통해 "4개 시.군에서 가장 많은 테니스동호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땀흘리면서 친목과 우의를 다질 수 있는 아주 뜻깊은 대회로, 승부보다는 좋은 플레이가 나올 때마다 아낌없는 박수를, 아쉬운 실수가 나왔을 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 테니스동호인들의 화합의 한마당 잔치가 되도록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심 회장은 "예천군테니스협회는 4개 시.군에서 참가한 테니스동호인들이 즐겁게 운동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예천군에서 개최된 이번 대회가 어느 대회보다 추억에 남는 대회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는 상주시 하나클럽 등 12개 팀, 문경시 그린클럽 등 9개 팀, 의성군 안계정우회 A.B팀 등 6개 팀, 예천군 에이스클럽 등 5개 팀 등 총 32개 팀이 참가했다.
한편, 이날 대회장에는 바쁜 국정에도 불구하고 이한성 국회의원이 참석하여 행사관계자 및 참가 임원.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예천군 방문을 환영하고 "양궁 및 천문우주체험, 용문사~회룡포~예천온천 등 관광지를 찾아 즐거운 하루를 보내며 예천의 추억을 안고 돌아가 달라"고 주문했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03-08 오후 3: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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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청소년수련관(2009年度 地方稅 擔當公務員 業務 硏鑽會 醴泉 開催) [記事] :
재산세ㆍ도시계획세 통합, 농업소득세 및 도축세 폐지 등 지방세제 개편이 예상됨에 따라 입법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합리적이고 공정한 지방자치 세정 구현을 위한 시ㆍ군 지방세 담당공무원 연찬회가 2009년 3월 5일부터 6일까지 양일간 예천군 청소년수련관에서 개최된다.
경상북도가 주관하는 이번 연찬회에는 도와 시ㆍ군 지방세 업무 담당공무원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군세 실무, 이의신청, 심사청구, 개별주택가격조사 업무, 과표 및 과세전적부심사 등에 대한 교육과 질의 및 토론을 벌이게 된다.
5일 오후 1시 30분부터 열린 개회식에서는 김상준 예천군 부군수의 환영사, 박종철 도 세정과장의 격려사가 있었으며 이어서 오후 2시부터 교육과 토론이 열리고 6일에는 오전 9시부터 교육이 있게 된다.
특히, 이번 연찬회에서는 재산세ㆍ도시계획세 통합과 농업소득세 및 도축세 폐지에 따른 지방세 실무와 과표 및 개별 주택가격 조사업무, 과세전적부심사ㆍ이의신청ㆍ심사청구 등 구제업무에 대한 교육과 시군별로 토론주제를 정해 발표와 함께 토론을 벌이게 된다.
한편, 예천군 관계자는 “최근 세계적인 경제침체로 인해 지역경기가 어려운 이때에 조금이나마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번 연찬회를 우리 군에 어렵게 유치하게 되었다”면서 “연찬회에 참석한 도와 시ㆍ군 공무원들에게 물 맑고 인정이 넘치는 우리고장의 체험관광지와 함께 발전상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醴泉인터넷放送 2009-03-05 오후 2:3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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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봉 [記事] : 안동오두막 카페/ 예천 매봉산을 댕겨 와서~ / 글쓴이: 블루/ 2009.03.07 20:43 /
2009년 3월 7일, 아직 3월 초순이라 아침기온은 아직까지 영하로 떨어져서 쌀쌀함이 느껴졌고, 하늘은 블루색을 띠고 있어 오늘 날씨는 화창해서 산정상에서의 조망을 기대하는 산행이 될 꺼라고 예감했다.
안동 옥동 양반탈 뒷편에 도착하니 미리 나오신 회원님들도 계셨고, 회원님들 한분두분 모이기 시작했다. 서로 반갑게 인사도 나누고, 이방인 님의 사과쥬스를 하나씩 마시고, 차량 5대에 나누어 타고 예천 용문사 주차장으로 출발했다.
내가 탔는 차량 운전하신 은빛사랑 님, 산행부대장 님, 심현 님, 가을 님, 그리고 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니까 어느덧 예천 용문사 들어가는 입구에서 예천팀이랑 합류해서 출발했다. 예천 용문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오두막의 구호처럼 "지요량 지가 하기" 각자의 산행준비를 하고, 부회장이신 미소 님의 지도 하에 간단한 산행 준비운동을 했다.
그리고 즐거운 산행을 시작했다. 산세가 험하지 않고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게 느껴지는 산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산행 코스가 인공구조물이 없는 등산로 길이었다.
중턱까지 올라가는데 오랫만에 나오신 다우리 님과 제시카 님이 많이 힘들어했다. 산의 중턱에 이르렀을 때 발에 밟히는 낙엽소리는 정겹게 들려왔고, 낙엽이 여러 층으로 쌓여있어 부드러운 쿠션을 밟는 느낌과 발목의 무리가 전혀 가지 않았고, 나무들이 옷을 벗어버리고 앙상한 나무 가지 사이로 멀리 천주산(?)과 멀리 여러 산들이 눈에 들어왔다.
산에는 참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고, 진달래나무도 많았다. 나무의 새순은 추워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산등성이를 따라 낙엽을 밟으면서 매봉으로 향했고, 산의 높낮이는 심하지 않아 봄햇살 아래 산보를 하는 기분이었고, 매봉의 근처에 다다랗을 때 약간의 경사가 있었고, 매봉에 도착했을 때 사방팔방을 돌아봤을 때 앞쪽에는 조망이 괜찮은 편이었고, 뒷편에는 나무 때문에 시야를 가렸다.
매봉 정상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한 장의 추억을 남기려고 독사진 또는 여럿이서 카메라에 담았고, 정상에서 보이는 조망도 같이 카메라에 담았다.
지금 이 시간은 언제 다시 되돌아오지 않기에 고통과 시련이 있어도 정상에 선 느낌은 가장 행복하고 보람차고 뿌듯한 마음이 가슴에 가득 담았으리라 믿는다.
점심시간, 준비해 온 도시락과 반찬을 꺼내서 삼삼오오 모여서 점심들 먹었고, 카페를 잘 지켜주는 은빛사랑 님이 정성스럽게 담았다는 정상주 3세트, 과메기 안주, 야채김밥, 과일.. 정상주 3세트(여자에게 좋다는 오디주, 남자에게 좋다는 마주, 어느 누구에게다 다 좋은 오미자주) 덕분에 맛있게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다.
"은빛사랑 님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있기에 점심식사를 같이한 팀별 노래자랑이 이어졌고, 오늘 처음 나온 회원님들 신고식을 시작으로 돌아가면서 재밌는 시간을 가졌다. 유쾌, 통쾌, 상쾌하게 웃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올라올 때와 내려갈 때는 마음의 차이는 많다. 올라올 때는 정상이 어떨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올라오고, 내려갈 때는 반대로 힘이 좀 빠지는 시간, 내려오는 등산로 길옆에는 키가 큰 나무들이 많기에 조망을 많이 가렸고, 멀리까지 조망이 가능하기에 멀리 보이는 소백산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지금 저 산을 등산하는 산꾼이 많겠지 하는 생각에 조금 부러운 마음도 생겼지만, 현재 이 시간, 이 장소를 같이 해주는 울 회원님들이 계시기에 그런 마음은 잠시 뿐....
어느 정도 내려와 임도를 따라 길을 재촉했고, 지금은 임도로 사용하지 않는 폐도라서 나무와 억새들이 방해를 했고, 급경사가 이루어진 코스를 힘들어하는 여성회원님도 계셨다.
거의 막바지인 고로쇠단풍나무길 옆에는 맑은 물이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간간히 보이는 봄의 전령사인 버들강아지가 복스럽게 피어나 있었다.
조금 더 걸어서 내려오니 몇 가구가 살고 있는 마을을 지나니 날머리인 용문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산행부대장님의 인솔하에 산행은 무사히 마쳤지만, 뜻밖에 예천에 살고 있는 다우리님의 차량이 고장이 났다.
큰 탈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예천읍내로 내려왔다. 예천읍내 식당에 들어가서 하산주를 마시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산행 출발지점인 안동 옥동으로 와서 다음 산행을 기약하면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나의 애마를 타고 청송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산행시간이 5시간 정도였는데 무사히 산행을 마친 데 대하여 회원님들께 감사드리며, 항상 건강하시고 하시는 모든 일들이 잘되시기를 빕니다.
(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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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제16전투비행단 [記事] : 자랑스런공군가족모임 카페/ 예천에 첫발을~~~/ 글쓴이: 671 윤호맘/ 2009.03.07 23:06/
난생 처음 가본 예천... 아들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더 정겨웠어요. 고기 구워 먹는다고 준비물 잔뜩 챙기고 새벽에 김밥도 싸고... 에고, 지금까지 남편한테는 이런 정성 못 보여준 듯...ㅎ
사실, 집 가까이에 성남비행장이 있는데 못가서 좀 안타까워했는데 오늘 가보니 잘 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떨어져 있어야 왔다갔다 하며 보고 배우는 것도 있고 공기 좋고 한적한 마을에 있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되겠더라구요.
그런데, 공군들은 왜 그렇게 다들 잘 생겼는지... 입구 헌병에서부터 면회실에 있는 일등병, 그리고 면회 나와 있는 공군들 모두가 잘 생겼더라구요. 물론, 우리 아들도 잘 생겼지요..ㅋㅋ
예천한우가 유명하다기에 한우를 사가지고 갔지요. 호수가에서 고기 구워먹는데 한적하게 나들이 나온 느낌이었어요. 간만에 공기 좋은 시골에서 행복을 느끼고 왔지요. 잠시 면회간 사실을 잊고, 마치 여행 온 기분이랄까...ㅎㅎ
예천에는 고등비행교육대대가 함께 있더군요. 윤호는 비행교육대대 행정계에 있는데 다행히도 회계장교인 사촌형의 동기가 계신 곳에 함께 있어서 마음이 놓였어요.
이등병이라 눈치도 보이고 긴장도 되지만, 우리 윤호는 좋답니다. 부대의 시설도 좋고 분위기도 좋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지요. 5시가 되어서 나오는데 아들은 다시 좀 긴장하는 눈치긴 했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들어갔고 저 역시 이젠 눈물이 안 나더라구요.
즐겁고 행복한 하루였어요~~~(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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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慶北道 洛東江 安東∼醴泉 뱃길 67㎞ 復元 推進 : 김관용 知事, 한승수 總理에 懸案 建議) [記事] :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2009년 3월 6일 ‘지방공무원과의 대화’ 행사 참석차 대구를 방문한 한승수 총리에게 낙동강 수자원 확보 대책 등 현안을 건의했다.
김 지사는 “국무총리의 지역 방문은 정부의 지역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방문 때마다 동서 6축, 독도대책 등 굵직굵직한 현안사업들이 해결됐다"면서 "이번에도 지역현안들이 정부정책에 반영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날 김 지사가 총리에게 건의한 것은 크게 세 분류. 낙동강 만성적 물 부족 해결 위한 소수력 발전 및 관광 뱃길 복원, 포항, 경주, 대구(경산·영천)권 국제 과학비즈니스 벨트 조성, 동해안 POST교토체제 전초기지 위한 수소연료전지 파워밸리 구축 등이다.
특히 김 지사는 이번 총리 방문이 만성적인 낙동강 물 부족 문제의 기회라고 보고, 그동안 구상해 온 ´낙동강 소수력 발전 및 관광뱃길 복원 사업´을 정부의 낙동강 물길 살리기 사업에 포함하여 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도가 계획하고 있는 것은 낙동강 뱃길은 안동시내 안동대교에서 경북도청을 이전할 신도시 예정지로 안동.예천 접경지역인 예천 삼강주막까지 67㎞다.
이곳에 수중보를 시범 설치한다면 현재의 0.5m에도 미치지 못하는 하상의 깊이를 최저 6m까지 확보할 수 있다.
김 지사의 이 같은 요청은 해마다 홍수가 반복되고 갈수기 때는 물 부족이 심각한 점을 감안해 낙동강 퇴적토를 파낸 뒤 수중보를 설치하고 또한 이를 활용해 소수력 발전을 하는 한편, 옛 뱃길을 복원해 관광산업을 더욱 활성화하겠다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겨냥한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이는 정부의 물길살리기 사업에도 부합하는 것으로, 물의 흐름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생태계의 복원을 이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녹색성장 시대에 맞는 소규모의 소수력 발전까지 가능한 사업으로 정부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으로 도는 예상하고 있다...
(류진환 記者 데일리안 2009-03-06 2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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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