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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1929:강형學長(附예천방문447)
예천의 자랑(1929) : 용문면 출신 강형 學長(附 예천방문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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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형(康泂) : 1938- , 용문면 출신, 58년 안동사범, 65년 경북대 사대 영문과 졸업, 동아대대학원 문학박사, 미국 위스콘신주립대에서 수학, 69년 경북고 교사, 76년 경북여고 교사, 82년 대구한의대 전강(專講), 84년 동 학술정보관(도서관)장, 85년 동 조교수, 동 부교수, 86년 미국 위스콘신주립대 객원교수, 경산대(전 대구학의대) 영어과 교수, 90년 동 교무처장, 94년 동 교수, 94년 동 교수협의회장, 99년 경산대 인문사회대학장, 99년 동 기린인증원장이었다. 경산대는 그 후 대구한의대로 다시 교명을 바꾸었다. 저서로 <Swift 의 풍자 문학>, <현대 영미시 이해> <대학실전영문법>, <대학필수영어>, <영미시작가론(譯)> 등이 있고, 수필집 <용기와 도전의 로고스>가 있다.(每日名鑑 1996 1997 1999 2001, 醴泉文學 22號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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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영작문(實用英作文(最新)) [冊]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저서로, 416쪽, B5, 형설출판사에서 2001년 3월 5일에 출간하였다. [책 소개] : 언어기능 훈련에서 가장 소홀히 하고 있는 4가지 단계 중 쓰기 단계 훈련을 위해 내 놓은 책이다. 우리말의 기본구조를 영어로 작문할 수 있게 하였으며, 단문영작, 장문영작, 실용면의 활용을 다루어 구성하였다. [목차] : 제1장 / 1. 명사 ...9 / 2. 관사 ...29 / 3. 대명사 ...49 / 4. 관계사 ...69 / 5. 형용사 ...89 / 6. 비교 ...111 / 7. 부사 ...129 / 8. 접속사 ...151 / 9. 전치사 ...173 / 제2장 / 10. 동사 ...195 / 11. 시제 ...217 / 12. 조동사 ...239 / 13. 태 ...261 / 14. 가정법 ...283 / 15. 부정사 ...305 / 16. 동명사 ...327 / 17. 분사 ...349 / 18. 주어와 술어의 일치 ...371 / 부록 / 영문서식, 편지 쓰는 법 ...393(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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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영문법(大學英文法) [冊]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저서로, 경산대학교 출판부에서 2003년 2월 25일에 출간하였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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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필수기본영어(大學必修基本英語) [冊]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저서로, 426쪽, B5, 형설출판사에서 1998년 3월 5일에 출간하였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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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밀라』다시 읽기(A Rereading of Pamela)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한국영미어문학회에서 2001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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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걸리버 旅行記』: 常識과 理性의 정치(Gulliver))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신영어영문학회에서 1999년 2월에 발행한 <신영어영문학> 제12집 177~209쪽(33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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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걸리버 旅行記』=Gulliver''''s Travels)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신영어영문학회에서 1999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 요약] : The general evaluations on Gulliver''''s Travels have been limited on the generalization of his literature. For example, his techniques of satire, irony, metaphor, persona, and allegory have been the mainstream of criticisms on Jonathan Swift. As a matter of fact, justification of these tendencies is consistent with the author’s personal history and biographical background.But if you suppose that literature is eventually a product of an age, it cannot be denied that the age and literary trend of Jonathan Swift have an inseparable connection with his works, especially Gulliver''''s Travels. Therefore if we are to understand this work in the light of political context controlling common sense and reason, this work will be able to enjoy more praise and admiration. By depicting political infrastructure of the contemporary England with symbolism, contrast, historical allusion and irony, and satire, he not only pointed out all kinds of evils and contradictions of contemporary society of England but also tried to cure the social diseases and to improve them./ This endeavor can be regarded as his intention to recover the perfection of nature itself form the dehumanization of man caused by individualism based upon the materialistic values, estrangement from pious religion, and addiction to optimism and finally expansion of imperialism of the 18th century in England./ In this respect, the persona of Gulliver''''s Travels is not a misanthropist or pessimist but a philanthropist seeking after transmutation of a destructive force to a creative act.(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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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프트와 오웰의 문학적 관계(스위프트와 오웰의 文學的 關係 =On the Literary Relationship of Jonathan Swift and Gorge Orwell)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慶山大學校에서 1998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 : 목차/ Ⅰ. = 51/ Ⅱ. = 52/ Ⅲ. = 56/ Ⅳ. = 59/ Ⅴ. = 61/ Works Cited = 64/ 영문초록 = 65/
[본문 요약] : Ever since Animal Farm: A Fairy Story was published in 1945, critics repeatedly have seen the hand of Jonathan Swift in Orwell''''s satire of totalitarianism, but comparisons almost always begin and end with Gulliver''''s Travels. What troubles most readers is that Orwell''''s attitude toward Swift seems so ambivalent, If "Politics vs. Literature: An Examination of Gulliver''''s Travels" were Orwell''''s first and last word on Swift, it would be difficult to comprehend why Orwell admired Swift as much as he obviously did. Other than praising Swift''''s artistry, he gave few reasons for ranking him among writers he most enjoyed, In fact he devoted over half the essay to vilifying Swift''''s politics. Orwell called him a "Tory anarchist, despising authority while disbelieving in liberty, and preserving the aristocratic outlook while seeing clearly that the existing aristocracy is degenerate and contemptible". Yet Swift the political gadfly engaged his imagination, In his essay, Orwell said that Swift''''s greatest contribution to political thought..... is his attack, especially in Book Ⅲ, on what would now be called totalitarianism.Northrop Frye once mentioned that Swift''''s A Tale of a Tub is the best example of the classical form after which Animal Farm is modeled. Perhaps we should enlarge upon this thought and pay particular attention to Swifts allegory of the three coats, in order to understand what it was Orwell appreciated about Swift''''s politics. Swift''''s complex satire of Catholicism and Puritanism is told as a fairy story. Furthermore, A Tale of a Tub and Animal Farm treat a common theme, that of revolution gone sour. Swift was a writer concerned with politics in the essential meaning of that word-the life of the polls. Swift saw literature and language as directly connected with the health of the polis. So did Orwell.(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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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프트의 인간혐오 사상(스위프트의 人間嫌惡 思想 =The Nature of Swift)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신영어영문학회에서 1997년 8월에 발행한 <신영어영문학> 제9집 75~93쪽(19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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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프트의 전통적 수사법(Swift''''s Use of Classical Rhetoric =스위프트의 傳統的 修辭法)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慶山大學校에서 1997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 요약] : Sir Henry craik''''s fine biography of Swift is one of the few constructive works done of Swift in the nineteenth century. craik makes no occasion to deal with swift''''s rhetoric. but he does have one perceptive comment which indicates his awareness of this rhetoric in swift. In reference to the Dediction to Prince Posterity in A Tale of a Tub Craik remarksThis is herdly the whole matter of the Dedication. but the comment indicates a greater awareness than do Craik''''s predecessors./ In the present century Quintana''''s large study of Swift has no treatment of this subject. although there are scattered references which indicate Quintana''''s awareness of Swift''''s rhetoric. "An Argument against Abolishing Christanity" he calls "a masterpices of ironic disputation.(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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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th and Ornament in Gullivers''''a Travels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안동대학교 어학연구소에서 1997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 요약] : Gulliver should have known that his attempt to "sally to the extreme" of Houyhnhnm raionality was dangerous to his sanity. From the heights of the imagination to which he has travelled in his attempt to achieve Houyhnhmn rationality, Gulliver drops to the depth of despair and madness, and his misery and delusion foretell Swift''''s own. By flirting with the limits of the imagination, Swift courted the demon he denied. And if Swift''''s last words actually were "I am what I am," then he spoke as a man seeing himself at last not in a mirror(our final view of Gulliver) but from the inside out-unpleasant perhaps, but without reflection and therefore without color.(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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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uldbrugg집단과 Houyhnhnm집단의 미덕(Struldbrugg集團과 Houyhnhnm集團의 美德 =The Virtue of Struldbrugg and Houyhnhnm)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慶山大學校에서 1996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 : 목차/ Ⅰ. Swift의 대표작... = 79/ Ⅱ. Struldbrugg집단... = 80/ Ⅲ. 위에서 묘사한... = 83/ Ⅳ. Struldbrugg Chapter는... = 87/ Ⅴ. Swift는 Book Ⅳ에서... = 89/ List of works Cited = 91/ [본문 요약] : Swift는 Book Ⅳ에서 Gulliver의 반응과 변화를 판단 할 때 독자를 도와주기 위하여 BookⅢ의 끝부분에서 Gulliver의 형식적 기독교 신앙을 특히 강조했다. Gulliver는 Yahoo족이 그 모습에서 인간과 완전히 닮았음을 알고 Houyhnhnm주인과 왜 Yahoo들은 인간보다 더 나쁜지를 토론하고(Chapter 3) 또 뒤에 가서는 왜 인간들이 Yahoo보다 더 나쁜지를 토론한다.(Chapter 7) 그러나 그는 결코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그는 Yahoo의 기원에 대한 Houyhnhnm설명을 듣는데(Chapter 9), 이 이야기들은 창조와 멸망에 대한 성경적 설명을 회상시켜 주는 것들이고 또 인간이 Yahoo로 타락될지도 모른다는 한가지 근본적 이유를 암시해 주는 것이며 또 개화된 인간들이 여러 면에서 Yahoo보다 못한 이유를 제시해주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Gulliver는 그런 암시를 모르고 성서의 배경으로부터 특색 있게 인간을 보지 못한다. 그 대신 그는 인간들은 Houyhnhnm들이 인간을 보고 있는 표현을 다음처럼 서술하고 있다.and multiply those Vices. where of their Brethren in this country had onlythe Share that Nature allotted them.(P.278)/ 아울러 그는 또 크리스찬 배경으로부터 보지를 못하고 있다. 그는 자기의 결점 몇 가지를 알고 있다고 주장 하지만 그는 자기의 나쁜 성향과 예수와 종교에 대한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악의 원천은 자기에게는 외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또 만약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모든 "Example or incitement to Vice"(P.259)에서 분리시키고 Houyhnhnm종족을 경멸하기만 한다면 덕성스럽게 될것이라 생각한다. Gulliver는 Houyhnhnm종족을 "가장 높은 존경과 경외심"을 갖고 바라보게 되고 또 그가 그들을 모방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Yahoo보다 훨씬 더 나빠진다./ 자부심 강한 Houyhnhnm은 미덕의 귀감이 될지는 모르지만 Houyhnhnm종족은 타락한 인간에게는 어떠한 치료법도 제시하지 못한다. 그들을 모방함으로서 Gulliver는 단지 말 (馬)처럼 이야기하고 Yahoo가죽 구두를 신고 말처럼 걷는다. 그리고 극복 당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타락성-즉 이기심, 잔인성 그리고 자만성-을 자기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음을 표명해주는 모든 성향들이 정당화된다. 그러므로 Struldbrugg집단보다 훨씬 더 명확하게 Gulliver는 종교적 희망과 두려움 없이 타락된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상태를 예시해준다./
Book Ⅳ의 마지막 장은 여러 면에서 Gulliver가 주장은 했지만 결코 이해를 하지 못했던 기독교 신앙을 회상시키고 있다. Houyhnhnmland를 떠나야만 했을 때 Gulliver는 자기자신의 생각을 달랠 수 있고 또 자신의 종족의 악과 타락으로 빠질 수 있는 어떤 기회도 없이 그런 비길데 없는 Houyhnhnm종족의 미덕을 즐겁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무인도를 찾는다. 이것은 어쩌면 신을 곰곰히 생각하기 위해서 사막으로 들어가는 은둔자의 욕망과 아이러니가 비교될 수 있는 행위라 할 수 있다. Gulliver가 포르투갈 선원들과 그들의 선장, 즉 이들은 Travels에서 타락된 인간에 대해 쓰여진 모든 것과는 현저히 예외로 보이는 사람들이라 할 구 있는데 바로 이런 이들을 만날 때 그는 그들에 대해서 진정 예외인 젓처럼 즉 위대한 인간성, 인내성, 자비 등을 생각치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희망의 모습으로 보지를 못한다. 그런데 Swift는 그리스도의 재림주간의 시작인 1715년 12월 5일에 그를 영국에 도착하게끔 함으로서 Gulliver의 기독교 신념의 부족함과 희망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Bethelehem의 마굿간에서 태어난 어린애를 축하하는 대신에 Gulliver는 재빨리 재능면이 아니라 모습에서 닮은 타락한 Houyhnhmn종족인 두마리의 어린 "Stonehorses"를 사서 적어도 하루에 4시간이나 그들과 대화를 하는 자기 자신의 마굿간에다 이 두마리의 말(馬)들을 세워 둔다. 첫 세번의 항해에 등장하는 명목상의 크리스찬은 우상 숭배자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교도로서 그는 당연히 그의 가족과 친교에 가담하기를 거절한다. 그때에 그의 가족들도 그의 빵에 감히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고 또 컵의 물을 마시려고 하지도 않는다./ Gulliver는 이때 이 마지막 항해가 있기 전 그가 이야기했던 타락한 인간성을 완전히 믿고는 있지만 인간이 왜 타락하는지에 대해서는 Swift가 Book Ⅲ의 끝부분에서 Gulliver에게 조심스럽게 보여 주었던 것 보다 더 현명하지는 못하다. 인간은 타락되어 있음을 여전히 보지 못하고 또 구원의 십자가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유럽인들은 소수의 진정한 미덕이 있는 존재, 즉 Houyhnhnm집단의 본보기에 의해서 개화되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Struldbrugg 이야기는 Book Ⅳ 전반을 통해서 독자들을 안내하도록 계획이 되어 있다는 이런 논쟁은 물론 Book Ⅳ나 아니면 Guttiver''''s Travels의 완전한 독파의 시초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시초는 무척 유용한 시초로 보인다. 이 이야기는 그 책이 기독교에 대한 주의 깊지만 그러나 간접적인 논쟁인 점을 몇 가지 나타내고 있고 또 어떻게 진정한 기독교 독자가 Gulliver와 같은 형식적 크리스찬보다 그 책을 더 잘 이해한 것 같다는 점을 설명해 준다. 만약 독자로서 우리들이 Gulliver의 배경을 함께 하고서도 그리고 또 그의 속세의 비젼에 대한 근본적인 불완전함을 보지 못한다면 그때는 독자도 요점을 놓치고 말 것이고 또 우리자신도 Swift풍자의 표적이 되고 말 것임을 암시해 준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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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ft의 인지론 연구(A STUDY OF SWIFT'''' THEORY OF KNOWLEDGE =Swift의 認知論 硏究)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慶山大學校에서 1995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 : 목차/ Ⅰ. Swift''''s awareness... = 3/ Ⅱ. In the sermon... = 4/ Ⅲ. The sermon lists... = 6/ Ⅳ. The ironic inversion... = 8/ Ⅴ. For Swift the test... = 10/ List of works cited = 11/
[본문 요약] : For Swift the test of truth is always the Aristotelian-Thomistic "conformance of the thought with the thing." But this "test" undergoes rather peculiar transformations in Swift''''s writing, as it is adjusted ta aesthetic requirements and the specific satiric object. Knowledge is a tool for Swift, not an end in itself, and its value resides in its power to enable man to understand and confront the human, social situation. That opinion is worthless, and not true knowledge at all, which fails to apply to the concrete, individualized experienced world which Swift, of course, accepts as extramental, existing outside of and distinct from the perceiver of that world. When Swift''''s satires distort this perceived world by exaggerating certain aspects, it is always with a view toward testing the validity of a preconceived notion of reality. And the test is designed to permit an observer to distinguish between knowledge and opinion, truth and absurdity.(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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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ft의 풍자 기법 연구(Swift의 諷刺 技法 硏究 =A Study on Swift''''s Techniques of Satire)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慶山大學校에서 1993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 : 목차/Ⅰ. 序論 = 61/ Ⅱ. Persona = 62/ Ⅲ. Parody = 65/ Ⅳ. Metaphor = 69/ Ⅴ. 結論 = 77/ *References = 77/
[본문 요약] : This thesis is to examine various techniques Swift used in his satire. He heightened the effect of his satire through persona, parody, metaphor, and a careful use of specific image patterns, assorting that a satirist should confine his attacks to faults which a person could correct and that he should not mention the names of his literary enemies, lest their memories of his attacks on them be perpetuated.Swift avoided direct expressions of attack in his satire and utilized a persona to convey his feelings, or at least to help a reader infer what those feelings might be. Through the use of persona Swift could explain many difficult aspects in the satirical structure by considering the speaker in the story as the fictitious character with a view different from Swift. Gulliver in Travels and hack writer in Tale are the very persona which Swift proposed as his mouthpiece, and by employing a persona Swift could relieve himself of the burden of his position. This indirect method contains the use of parody and deliberate exaggeration. By metaphors which Swift often employed he made his satirical writings more effective./ These techniques are considered to hav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Swift''''s satire. Since the aim of a satirist is partly to communicate his thoughts to readers and do it effectively, part of the art of a satirist should be that of a rhetorician. Few would disagree with the assertion that Swift was a master of rhetorical skills. Swift also had good commands of creative sentences with careful choice of words, vivid free from the old patterns, and making use of humorous episodes, he used to evoke a lash. By the device of reclassification he picked out an object or group of his satire out of the undesirable social class and reduced it to much the lower class or level to make readers distrust a snobbish affection or intellectual fame of his satirical objects. Besides these techniques, Swift maximized writings of aspire by the use of irony, animal imagery, the examination of which is not made in this study.(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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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lliver''''s Travels의 결론에 나타난 풍자구조 및 논조에 관한 연구(Gulliver''''s Travels의 結論에 나타난 諷刺構造 및 論調에 關한 硏究 =The Structure and Tone of Satire in the Conclusion of Gulliver''''s Travels)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동아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영어영..에서 1994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 : Ⅰ Travels의 Book Ⅳ는 지금까지/ Ⅱ Book Ⅳ의 마지막 2/ Ⅲ Travels의 해석상 하나의 어려운/ Ⅳ Tone이 자주 변화하고 또/ Ⅴ Book Ⅳ는 인간이 먼곳에서 바라보면 /
[본문 요약] : Book IV shows how abominable man appears when viewed from a distance, how beastly man appears when viewed from perfection, what true perfection looks like in serenity and splendid isolation, and how far such perfection is from the possibility of human attainment. The penultimate chapter shows what is available to us and what happens if we, proudly, refuse such alternatives in favor of unreachable ones. The last chapter, with its naive confidence in its own truthfulness, with its simplified patriotism, with its denuncation of pride, concluded all of Gulliver''''s Travel.Gulliver''''s Travel is an especially clear example of the error of modern criticism of satire, which says that in satire "standards of judgment are indubitable" or that in satire the reader is "sure what the author''''s attitude is or what his own is supposed to be." And much of the criticism of Gulliver''''s Travels, which insists that a single meaning be attached to the work, or that it be approached from a single point of view, seems to be an unwitting demonstration of the single vision which Swift denounces. The almost unlimited diversity of the final chapter, the playful variations, the shifts of personality, the alternations of tone, the logical self-contradictions, the images that reveal different meanings to different ages, all demonstrate Swift''''s belief that man and his environment are desperately complicated, and that any attempt to reduce them to simple schemes, whether the reduction be in terms of politics, science, history, psychology, or literary theory, only demonstrate man''''s limitations the more clearly./ The detached, almost gay tone of most of the final chapter presents a problem. When viewed from the eighteenth-century point of view, the chapter is beautifully consistent with the whole work, but when seen as the conclusion of a prophetic satire, it becomes almost anti-climactic. The subject is as broad as mankind, but the tone is generally lighter than the previous chapter''''s or than the whole Fourth Book''''s would lead us to expect. Perhaps we can explain the change in tone as a way to remove us from the intense involvement of the penultimate chapter so that the final chapter refers to all four books. And perhaps we can interpret it as an attempt to lighten some of the pessimism that the earlier parts have been steadly building toward, in order to reveal that Gulliver''''s tragic choice, in the penultimate chapter, is not the only one. For in accepting the "complexity of human existence'''' we can achieve some reconcilement with ''''the due course of thing."(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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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ft 풍자문학에 나타난 풍자동기에 관한 연구(Swift 諷刺文學에 나타난 諷刺動機에 關한 硏究)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동아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에서 1987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 : Ⅰ. 序論/ Ⅱ. 本論/ 1. 諷剌의 動機/ 2. 諷剌의 技巧/ Ⅲ. 結論(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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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650) : 예천 출신 대구한의대 교수(강형)의 논문들(作成 張炳昌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2004-11-18 照會 1017)
→<예천의 자랑> 제5권(張炳昌 著 2005年) =895~8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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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447
초정서예연구원(東洋傳統藝術의 꽃 書藝文化 硏究와 後進 養成 爲한 ''''초정 書藝硏究院'''' 開館!) [記事] :
서예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교육장 및 학술연구의 장으로 활용될 "초정 서예연구원"이 완공되어 2009년 6월 10일 오전 11시 김관용 도지사, 김수남 군수, 정영광 군의장을 비롯한 기관단체장, 경북일보 정정화 사장, 오승우 서양화가, 주민 등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관식을 갖고 일반에 공개됐다.
이날 준공식에 앞서 초정 선생의 후진을 대표해 소운 이송자 회원이 초정선생 부부에게 그동안 후진 양성을 위해 애쓰고 오늘 초정서예관을 개관하게 된 것을 축하하는 감사의 꽃다발을 전달했다.
이어 초정 선생은 "평소 서예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훌륭한 서예연구원이 건설될 수 있도록 물심 양면으로 도움을 준 김수남 군수께 감사패를 전달하고 앞으로도 서예연구원이 제 몫을 다하여 경북의 유교문화권 정착에 기여해 줄 것"을 부탁했다.
초정 권창륜 선생은 인사말에서 "문화 예술을 지극히 사랑하고 서예의 소중함을 후손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연구원을 건설해 준 김수남 군수와 김관용 도지사에게 깊은 감사드리고 초정서예연구원이 대한민국 모든 서예인들의 전당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수남 군수는 격려사를 통해 "오늘 개관되는 초정서예연구원이 예천군을 찾는 많은 방문객들에게 소중한 체험의 장이 되도록 초정 선생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노력"을 당부하고 "서예의 계승과 발전은 물론, 교육의 장소로 자리잡아 군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서 지역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 줄 것"을 당부했다.
김 군수는 이어 "오늘 개관된 초정 서예연구원이 지역 서예인 후진양성과 심신수양의 도장으로 활용됨은 물론, 각종 서예대전을 개최하여 우리지역을 알리는 파수꾼의 역할을 기대하며 다시 한번 개관식을 축하드리고 참석하신 모든 분들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했다.
김관용 도지사는 "영남의 기를 살려줄 초정 서예연구원 개관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평생을 서예를 위해 살아온 초정 선생이 양반의 고장이자 유교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한 축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300만 경북도민과 함께 적극 지원하겠다"는 축사를 했다.
정영광 군의장은 축사에서 "초정 선생은 우리나라 서예의 대가로 서예를 사랑하는 마음과 뜨거운 창작열기로 지역의 서예동호인들을 열과 성을 다해 지도해 왔을 뿐만 아니라 우리고장을 전국에 알리는데도 일익을 담당하여 유교문화가 살아 숨쉬는 충효의 고장 예천에 걸 맞는 서예연구원을 설립했다"며 개관을 축하했다.
이날 준공식을 가진 초정서예연구원은 총 사업비 30억2천100만 원이 투입되었으며 지난 2004년 실시설계 완료 후 2005년 10월 31일 착공, 3년 7개월 간의 대공사를 거쳐 이날 개관식을 갖게 된 것이다.
연구원은 부지 5,019㎡, 연면적 864㎡의 지하 1층, 지상 2층의 철근콘크리트 목조한식기와 건축물로서, 지하 1층은 기계실, 지상 1층은 전시실, 수장고, 지상 2층에는 교육공간인 강의실과 실기체험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서예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교육장 및 학술연구의 장으로 크게 활용될 전망이다.
군 관계자는 "초정서예연구원은 서예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교육장 및 학술연구와 서예인 후진양성과 심신수양의 도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된 시설로 체험장 및 각종 서예대전 및 작품 전시회장으로 이용되어 서예를 통해 예천군을 전국에 알리고 관광인프라 구축으로 지역경기 활성화에 많은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전망했다.
한편, 이날 개관식에는 서양화가 오승우 화백, 한국예문회 규당 조종숙 선생, 경기대학교 난정 이지연 교수, 안병철.김단희.이도익 씨 등 원로 서예가, 국회의원 서예지도교수 청암 고강 선생, 국서원 부이사장 장암 이곤순 선생 등 많은 서예인 및 예술계인사가 참석하여 개관을 축하했다.
김관용 경북도지사, 김수남 군수, 관내 기관단체장 및 초청 인사들은 개관식을 마치고 초정 선생의 안내로 연구원 내부에 전시된 초정 선생의 작품과 멋지게 꾸며진 연구원 내부를 둘러보고 대작과 내부 시설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김관용 도지사는 이상만 기자(전국매일), 장병철 기자(경북일보) 등 관내 기자들에게 초정 서예연구원이 전국의 서예가들과 관광객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얻기 위해서는 김수남 군수와 군민, 그리고 기자들의 홍보가 크게 한 몫을 담당해야 가능하다며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했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06-10 오후 12: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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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실(6월 테마 << 體驗마을을 찾아서 慶尙北道 醴泉郡 龍門面 上金谷里 : 傳統의 멋이 살아 숨쉬는 故庄, 醴泉 金塘室마을) [記事] :
‘물에 떠있는 연꽃’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 금당실. 조선시대 예언서인 정감록에서 십승지지 중 한 곳으로 꼽히는 금당실 마을은 조선의 도읍 후보지로 거론됐을 만큼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금당 맛질 반서울’이란 말도 이런 연유로 생겨난 말이다. 금당실 마을의 가장 큰 자랑은 세월을 비껴간 고택과 돌담들이다. 금당실 마을에는 반송재 고택(문화재자료 제262호)과 사괴당 고택(문화재자료 제337호)을 포함해 10여 채의 고택이 남아있고 이들 고택과 역사를 함께한 정겨운 모습의 돌담도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있다.
볏짚과 황토를 이용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담은 구불구불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마을 깊숙이 이어진다. 네모반듯하게 올라간, 깔끔하지만 삭막한 도시의 그것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그렇게 이어진 돌담을 따라 마을산책을 하다보면 마치 조선시대 선비라도 된 듯 발걸음까지 느긋해 진다.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일대가 금당(金塘)이라 불리게 된 것은 마을 지형이 ‘물에 떠있는 연꽃’을 닮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예언서인 정감록에서 십승지지 중 한 곳으로 꼽는 금당실 마을은 조선의 도읍 후보지로 거론됐을 만큼 명당으로 알려진 곳. ‘금당 맛질 반서울’이란 말도 그런 연유로 생겨났다.
맛질은 금당실 마을인 상금곡리와 붙어있는 대제리, 제곡리, 하학리를 아우르는 옛 지명이다. 금당실 마을에선 최근 고택들에 대한 복원공사가 마무리되었다.
지난 2006년 3월 당시 문화관광부에 (현 문화체육관광부) 의해 ‘생활문화체험마을’로 선정된 후, 보존 가치가 높은 일부 고택들에 대해 실시한 보강공사였다.
이번 보강공사를 통해 마을은 한결 민속마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 뿐 아니라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몇몇 보충되었는데,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금당 주막’이 대표적이다.
아직 온전한 모습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예천의 명물인 삼강주막에 버금가는 명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금당실 마을하면 고택과 돌담을 빼놓을 수 없다] : 금당실 마을에는 반송재 고택(문화재자료 제262호)과 사괴당 고택(문화재자료 제337호)을 포함해 10여 채의 고택이 남아있고 이들 고택과 역사를 함께한 정겨운 모습의 돌담도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켜있다.
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일부 돌담이 헐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대다수의 집들은 옛 모습 그대로의 돌담을 보존하고 있다. 볏짚과 황토를 이용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담은 구불구불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마을 깊숙이 이어진다.
네모반듯하게 올라간, 깔끔하지만 삭막한 도시의 그것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그렇게 이어진 돌담을 따라 마을산책을 하다보면 마치 조선시대 선비라도 된 듯 발걸음까지 느긋해 진다.
재미있는 것은 마을 입구에서 만나는 마을 주민마다 ‘골목에서 길 잃어버리지 마시게’라고 농담을 던진다는 것.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의아스럽지만 막상 7km에 걸쳐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주민들의 말이 농담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마을 구석구석 숨은 옛길찾는 재미 솔솔~] : 키 작은 돌담을 따라 걷다보면 의외의 장소를 만나기도 한다. 바로 흙길. 마을 안 대부분의 도로가 포장되었지만, 아직 마을 곳곳에 옛길이라 불리는 흙길이 조금씩 남아있는데, ‘지게나뭇길’로 불리는 좁은 비포장 골목도 옛길로서의 운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길 중 하나이다.
양옆으로 기와를 얹은 돌담과 이엉을 얹은 돌담이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어 더욱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을 구석구석 보석처럼 숨어있는 옛길을 찾아보는 것도 금당실 마을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재미다.
금당실 마을에서는 ‘양반체험’과 ‘농촌체험’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마을체험센터 증축공사 기간 동안 잠시 중단했던 체험프로그램은 마을체험센터가 재개관하는 오는 6월30일 이후부터 다시 시작할 예정이다.
‘금당실 송림(천연기념물 제469호)’도 금당실 마을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쑤’라고 불리는 이곳은 내륙지방에서는 흔하지 않은 소나무 방풍림이다.
예전에는 그 길이가 2km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800m 정도만이 남아있는데, 방풍림이 이렇게 줄어든 것은 금당리 마을에 숨겨진 슬픈 역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892년 마을 뒷산인 오미봉에서 몰래 금을 채취하던 러시아 광부 두 사람을 마을 주민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조선과 러시아간 외교문제로 비화되어 마을의 존립자체가 위태로워지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고 말았다.
마을주민들은 고심 끝에 마을의 공동재산이었던 이 소나무를 베어 러시아 측에서 요구하는 배상금을 충당하게 되었고, 그렇게 베어내고 남은 것이 지금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오랜 세월 천재(天災)와 인재(人災)로부터 마을을 지켜준 송림에 대한 마을주민들의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금당실 송림 가운데로는 산책로가 나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삼림욕을 즐겨볼 수도 있다.
봄이면 금당실 송림과 어우러진 벚꽃 길도 멋스럽다. 벚꽃 길은 금당실 송림이 시작되는 마을 입구에서 928번 지방도를 따라 용문사 입구까지 8km 정도 이어진다.
[금당실 마을, 영화 촬영지로 유명] : 60~70년대 분위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금당실 마을은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이나영, 장혁 주연의 ‘영어완전정복(2003년)’과 정재영, 수애 주연의 ‘나의 결혼 원정기(2005년)’ 등의 영화가 금당실 마을 고택에서 촬영되었으며, KBS 드라마 ‘황진이(2006년)’의 주요 촬영무대였던 병암정(문화재 자료 제453호)도 금당실 마을에서 지척이다.
특히 병암정에서는 황진이(하지원 분)와 김은호(장근석 분)의 애틋한 사랑을 표현한 명장면들이 많이 촬영되었는데, 김은호와 황진이의 첫 키스 장면과 김은호가 반지를 실에 끼워 황진이에게 전하는 장면 등이 모두 이곳 병암정에서 촬영되었다.
현재 병암정에서 드라마 세트장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 감동만은 아직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다. 병암정에서 차를 돌려 928번 지방도로를 따라 동로 방향으로 조금 가면 금당실 마을을 지나 왼쪽으로 초간정이 보인다.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 위치한 문화재자료 제143호인 초간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지은 초간 권문해(1534~1591)선생이 세운 정자로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모습이 멋스럽다.
보물 제878호인 대동운부군옥 책판(부)고본은 예천권씨 종택에 모셔져 있다. 초간정을 지나 다시 조금 더 차를 몰면 원류 삼거리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우회전하면 예천을 대표하는 사찰, 용문사에 닿을 수 있다.
신라천년 고찰인 소백산 용문사는 그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대장전(보물 제145호)과 윤장대(보물 제684호) 그리고 목각좌상 및 목각탱(보물 제989호)과 교지(보물 제729호) 등 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용문사와 함께 2007년 예천바이오곤충엑스포를 준비하면서 건립한 예천곤충생태체험관과 예천천문과학문화센터 등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들. 특히 예천천문과학문화센터에서는 천문관측은 물론 가변중력체험, 우주자세제어체험, 달중력체험 등 다양한 우주환경을 체험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백미는 예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스페이스타워 전망대에서 체험하는 우주유형체험. 우주유형장치란 우주공간에서 우주인이 작업을 위해 사용하는 근거리 이동수단으로 스페이스타워 전망대 난간에 설치되어 있는 우주유형장치 역시 체험자가 조정 레버를 조작해 상하좌우로 이동시켜볼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최은남 記者 dailysun 2009-06-10 10: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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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룡포와 용궁향교 [記事] : 귀연산우회 카페/ 충효의 고장 예천 기행-회룡대와 용궁향교 / 글쓴이: 靑山/ 2009.06.10 14:25/ 대전-상주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려 북상주를 벗어나면 잘 닦인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문경을 지나 예천으로 향한다.
예천 초입 용궁면소재지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10여분 달리면 회룡교가 나온다. 회룡교를 건너 우측으로 산 중턱 장안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경내를 둘러본 후 조금 오르면 쉼터에 아미타대불이 자리잡고 있다.
비룡산에 있는 장안사는 신라가 삼국통일한 후 국태민안을 염원하면서 전국에 세운 세 개의 절 중 하나다. 북쪽의 금강산과 남쪽의 양산 그리고 이곳 용궁 장안사가 바로 그것이다.
신라 경덕왕 때(759년) 운명대사가 창건하였고, 세월이 지나면서 중창이 거듭되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가 이곳에 머물며 시를 쓰기도 했는데 유구한 역사의 향기와 천혜의 자연 경관이 어우러져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종각을 지나 쉼터의 아미타대불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갈림길이 있는데 좌측에 회룡대가 있다. 회룡포를 조망하는 장소로 제격인 회룡대는 사시사철 변하는 경관을 감상하고 사진 촬영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성능 좋은 카메라로 한창 촬영에 열중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촬영 장소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근사한 모습을 담으려는 분주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카메라에 힘이 들어간다.
내성천을 용이 휘돌듯 한 바퀴 감돌아 금천, 낙동강과 만나는 이곳 지형이 용궁이라 부르는 이유도 회룡대기에 표현된다. 회룡대에 붙어 있는 회룡대기(回龍臺記)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회룡대에서 오솔길 따라 오르면 원산성에 이르는데 이 산성은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에 영웅(英雄)들이 각축하던 용주성(龍州城)이 여기이고 또 바람결에 풍경소리 울리고 독경 소리 은은한 이 언덕의 장안사에 머물던 고려의 대문호인 백운 이규보가 낙동강에서 뱃놀이하고 낙강범주(洛江泛舟)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을 만큼 시인 묵객의 발길이 예부터 이어지는 곳도 바로 여기 회룡포이다.」
또한 회룡포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옛 사람들은 신선이 사는 꽃 피고 새 우는 아름다운 땅에 금은으로 꾸민 궁궐을 이상 세계로 그리며 살았으니 그 곳이 바로 이 고장이라 하여 용궁이라 이름 지었다라고 한다. 이곳은 주흘산, 팔공산, 학가산의 줄기가 한곳이 되는 곳이며, 또한 금천, 내성천, 낙동강이 함께 만나서 흐르는 삼산삼수(三山三水)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회룡포는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용이 비상하는 것처럼 물을 휘감아 돌아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높이 190m의 비룡산을 다시 360도 되돌아서 흘러가는 육지 속의 섬마을이다. 맑은 물과 백사장이 어우러진 천혜의 경관을 가지고 있으며, 비룡산에는 숲속 등산로와 산책 코스가 있다.
회룡대에서 다시 무제봉에 올라 조금 가면 비룡산 봉수대가 있는데 동쪽으로 예천읍의 서암산, 서쪽으로 다인의 소이산, 북쪽은 산양의 가불산 봉수와 연락하였다고 한다.
고려 의종 3년(1149)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1895년 봉수제도의 폐지로 없어진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소나무 숲을 지나 능선을 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종주 산행을 위한 코스와 제2 전망대로 가는 길이 이정표에 표시되어 있다.
우측은 원산성을 지나 삼강앞봉을 거쳐 의자봉, 적석봉, 사림봉을 돌아 사림재를 거쳐 회룡마을로 돌아오는 코스이다. 잠시 제2전망대로 향하여 조망을 본 후 다시 돌아와 원산성을 향한다.
원산성에 대한 기록은 몇 곳에 전하는데 회룡대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이 산에는 신라시대의 고찰인 장안사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비룡산 등산로를 따라 가다 보면 낙동강, 내성천, 금천이 합쳐지는 삼강이 보이는데 깎아지르는 듯 한 이곳에는 삼한시대부터 격전지로 유명한 원산성이 있다.
천혜의 요새로 된 토석혼축으로 된 성 주변에는 많은 고분이 흩어져 있으며 봉수대가 남아 있다. 백제 시조 온조가 남하할 때 마한 최후의 보루인 이곳 원산성을 점령한 후 백제를 세웠다고 전해지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상당 기간 백제의 요새로서 삼국이 충돌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얼마나 격전이 심했던지 지금도 피끝이라는 언덕에는 비가 많이 오면 성 아래 마을인 성저 마을에 아비규환과 원혼의 소리가 들려온다는 전설이 있다. 고구려 온달장군이 이 성을 점령하려고 남하하다가 아차성에서 전사하였다고 하지만 정확한 사실이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원산성은 둘레 920m, 높이 1.5~3m로 흙과 돌로 섞어 쌓은 토석 혼축성이다. 따뷔성, 또아리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은 원형으로 쌓았다하여 삼국사기에 원산성(圓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산성은 문경의 금천, 영주의 내성천, 태백의 낙동강이 합류하는 삼강을 배수진으로 하고 가파른 지형을 이루며 사방을 일목요연하게 조망할 수 있는 천연요새이다.
삼한시대 마한이 이 성에서 백제에 패함으로써 멸망하였다. 그 후로도 신라, 백제, 고구려의 접경지에 위치한 탓에 격전이 잦았으며 성에는 세 곳의 샘과 한 개의 군창이 있으며, 성 주위에는 고분이 많았다고 한다. 원산성을 용주성이라고도 하는데 지명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회룡포가 있는 이곳의 지명이 용궁(龍宮)인데 서라벌의 축산이다가 고려 초에 용주가 되고, 현종 3년인 1012년부터 용궁이 되어 지금까지 천년동안 용궁으로 불리고 있다.
회룡포를 바라보며 뿅뿅 다리를 건너본다. 비가 와서 물살이 세기 때문에 다 건너지 못하지만 갈수기 때에는 마을로 건널 수 있다. 바로 옆 산행 들머리에 있는 용주팔경시비를 본 후 예천 향석리 석조여래좌상과 용궁향교를 들른다.
마을 입구에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수수한 모습으로 삼층석탑과 함께 있다. 오랜 세월 방치되었던 석조여래좌상은 손의 가짐이 항마촉지인이고 무릎은 높고 넓어서 안정감을 준다.
장방형 상대석에 새겨진 화판의 가운데 것이 정면으로 향하고 좌우로 갈수록 비스름히 새겨서 고려 시대 연화문 처리의 특색을 나타낸다. 양식상 고려 초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마을 앞에 서있는 용궁향교 표석을 따라 마을로 접어드니 의외로 거창한 향교와 만난다. 근처 병산서원과 모양과 형식이 비슷한 향교인데 크기와 규모가 상당했다. 잘 보존되고 있으며, 근처에 실제 서당이 운영되고 있는데 병산서원의 크고 길게 만들어진 목조 건축물 세심루(洗心樓)가 시선을 끈다.
이 향교는 옛 용궁현의 뛰어난 인재를 모아서 학문을 강론하고 연구하기 위하여 세워진 교육기관인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세워졌으며,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선조 36년(1603)과 인조 14년(1636)에 새로 지었다.
대성전과 명륜당 그리고 세심루가 있는데 원래 명륜당 앞에 동 서재가 있었는데 동재만 남아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며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향교에서는 공문 5성위와 송4현 및 국내 18현 등 27위의 성현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봄과 가을에 석전제를 올린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하마비가 서 있는데 아마도 용궁향교의 가치와 중요도를 보여주는 징표로 보인다.
장안사와 회룡대, 원산성을 둘러봐서인지 몹시 허기를 느낀다. 유명하다는 삼강주막을 찾아 59번 도로를 달린다. 내성천과 금천이 만나고 낙동강이 만나는 삼강교를 지나니 상감주막이 있는 나루터가 아름답다.
삼강나루에는 회화나무와 초가로 지은 주막이 있는데 예전 뱃사공과 장사꾼들의 쉼터로 유명하다. 삼강주막은 삼강나루의 나들이객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들의 숙식처로, 때론 시인묵객들의 유상처로 이용된 건물인데 1900년경 지어진 주막은 규모는 작지만 그 기능과 충실한 집약적 평면구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역사 자료로 희소가치가 크다고 한다.
또한 옛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의의를 간직하고 있다. 각종 부침개와 묵 그리고 몇 가지 먹을거리가 있지만 손님이 많아 오래 기다려야 한다.
보부상과 사공이 힘자랑하던 들돌이 무척 인상적이다. 당시 삼강은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물류이동이 아주 활발하였고, 장날이면 30여 차례나 나룻배가 오갔다고 한다.
당시 건물은 1934년 갑술 대홍수로 멸실되어 마을 어른들의 증언과 고증으로 복원한 것이다.
용궁 읍내에는 막창순대가 유명한데 박달식당과 바로 앞에 또 하나의 큰 식당이 있다. 고깃살이 풍부한 막창순대와 순대국밥 그리고 막걸리 한사발의 들이킴은 한나절 허기진 점심으로는 풍성하다. 냄새도 별로 없으며 맛 또한 기막힌데 가격도 상당히 저렴해서인지 손님이 많아 약간 기다려야 한다.
용궁 읍내에서 막창순대로 점심을 든 후 금암리 황목근을 찾았다. 느릅나뭇과의 황목근은 줄기둘레가 3.2m, 키가 15m에 이르며 수령은 500년으로 추정된다.
마을의 단합과 안녕을 기구하는 동신목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5월에 나무 전체가 누런 꽃을 피운다하여 황 씨 성을, 근본 있는 나무라 하여 목근(木根)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또한 국내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보유한 담세목(擔稅木)으로 유명하다. 조그만 호수와 잘 가꾸어진 나무들이 울창한 가오실공원을 거쳐 선몽대를 찾는다.
예천 지방도를 따라 차를 달리니 시골 한가한 풍경과 들판 논에 모를 심는 분주함이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밀려온다.
(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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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송령과 초간정 [記事] : 귀연산우회 카페/ 충효의 고장 예천 기행-석송령과 초간정/ 글쓴이: 靑山/ 2009.06.10 14:20/ 충효의 고장 예천 기행 <석송령과 초간정> :
어렵게 길을 찾아 도착한 보문사는 작고 조용하지만 역사의 숨결이 스며있었다. 보문사 3층 석탑의 투박함 아름다움이 학가산 기슭에서 묵묵히 오랜 세월을 지키고 있음에 놀란다. 깊은 산중까지 드나들 수 있는 길이 있어 작고 아담한 절집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하며 서둘러 감천면으로 향한다.
예천에 들러 꼭 봐야 할 천연기념물이기에 서둘러 천향리에 당도하니 너무도 희한하고 기이하여 눈이 확 뜨인다. 예천 석송령은 소나무의 한 품종인데 가슴 높이의 줄기둘레가 4.2m, 키가 10m에 이르는데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일명 반송 또는 부자나무라고도 불리며, 현재도 마을의 단합과 안녕을 기구하는 동신목으로 보호받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약 600년 전 풍기지방에 큰 홍수가 졌을 때 석관천을 따라 떠내려 오던 것을 지나가던 과객이 건져 심었다고 한다.
그 후 1930년경에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이라는 사람이 영험있는 나무라 하여 석송령(石松靈)이라는 이름을 짓고, 자기 소유의 토지 300평을 상속 등기해 주어 이때부터 이 나무는 수목으로서는 드물게 토지를 가진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보은 속리산의 정이품송이나 부인송 보다는 그 모양이 다르지만 형태나 생육 특히 옆으로 뻗힌 나무줄기의 생동감은 그 어떤 소나무와 견주어도 빼어나다.
허약해진 정이품송이 도로변 차량과 사람들에게 시달려 말라죽는 모습이지만 석송령은 아직도 싱싱하게 도도한 기상을 뽐낸다. 주변 정자 옆에는 석송령 2세 나무가 자라고 있어 깊은 감동을 준다.
부디 싱싱하고 올 곧게 자라 마을을 지키고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지켜주길 바래본다. 석송령의 담대하고 아름다운 반송에 취한 예천 여정은 저무는 해를 따라 용문면 죽림리로 향한다.
정자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귀결이어서인지 벚나무 도로 변을 따라 한참을 달린 여정은 노송과 잘 어우러진 풍광과 만난다. 초간정(草澗亭)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郡玉)을 지은 초간 권문해(1534~1591)가 세우고 심신을 수양하던 곳이다.
조선 선조 15년(1582)에 처음 지어졌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중건하였으나, 인조 14년(1636)에 다시 불타는 등 수난을 거듭했는데, 지금의 건물은 초간의 현손이 1870년 중창한 것으로 기암괴석과 주변의 경관이 조화를 이뤄 매우 아름답다.
정자채는 사주문을 통하여 들어가며 뒤쪽과 오른쪽 절벽을 이루고 있다. 자연기단 위에 주초를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다.
정면 3칸 중 앞면의 좌측 2칸은 온돌방을 배치하고 나머지 4칸은 통간의 대청으로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측면은 난간을 설치하였다. 지붕 석가래의 빗살무늬가 특이하고 난간에서 절벽을 바라보는 모습이 일품이다.
난간에 앉으니 찬바람이 겨드랑이에 살랑거려 너무도 시원하다. 절벽 건너에서 바라보면 바위벽에 초간정이라는 각자가 선명하다. 노송과 절벽 그리고 겹처마 팔작지붕의 아름다운 조화가 정자 문화의 수작으로 꼽힐 만큼 우수하다.
특히 옆 한옥에서는 한옥 체험을 할 수 있는 민박이 저렴한 가격에 운영되고 있어 관광객들에게 흥미롭다. 조용하고 아담하며 절벽 옆으로 흐르는 개천 그리고 노송이 어우러진 초간정에서 시를 읊고 심신을 수련했던 권문해 선생의 그윽한 선비적 기풍을 느껴 본다.
경북 예천에 보물처럼 숨겨진 우리 문화의 또 다른 정자 문화의 꽃을 볼 수 있음이 여간 행복한 것이 아니다.
해가 늬엇 늬엇 저무는 석양 무렵 영화 황진이 촬영지인 병암정을 찾았다. 이앙기로 모를 심는 농부들이 분주한데 수련과 연이 아름다운 연못 위에는 너무도 멋스러운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병암정(屛巖亭)은 팔작 기와집으로 정자들 동쪽의 병풍처럼 생긴 큰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건물은 예천 지역의 대표적 독립 운동가인 권원하(權元河)와 관련된 건물로 알려져 있다.
정자의 우측에는 3칸 규모의 맞배기집 별묘(別廟)가 있는데 원래는 인산서원의 사당이었으나 서원이 훼철되자 사당만 이곳으로 이전하여 권맹손, 권오기, 권오복, 권용을 봉사하는 별묘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드넓은 농촌 평야를 바라보며 위치한 병암정은 연못과 바위 절벽 그리고 연못에 드리운 정자의 또 다른 모습으로 사진작가들의 촬영지로 인기가 높다.
석양에 지는 햇살에 아름다운 풍광으로 다가오는 병암정을 찍기 위해 삼삼오오 카메라를 설치하고 포커스를 맞추는 사진 동호인들의 분주함이 연못가에 가득하다.
예천! 양궁 김진호의 고향! 아니 충효와 예의 고장! 멋들어진 영남 예천 권씨와 안동 권씨의 풍류가 묻어 있는 이곳은 정말 많은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갖가지 풍물과 내륙 깊숙이 간직된 조상들의 숨결이 건물과 정자 그리고 석송령과 같은 노송들로 가득히 다가온다.
하루를 꼬박 보아도 다 보지 못한 예천을 기행하며 한참을 굶주렸던 여행의 참맛을 느낌이 너무 행복하다. 여행은 또 다른 삶을 느끼게 하며 만나는 대상 모두가 한없는 즐거움을 줌에 여유와 기쁨이 두 배이다.
(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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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형(康泂) : 1938- , 용문면 출신, 58년 안동사범, 65년 경북대 사대 영문과 졸업, 동아대대학원 문학박사, 미국 위스콘신주립대에서 수학, 69년 경북고 교사, 76년 경북여고 교사, 82년 대구한의대 전강(專講), 84년 동 학술정보관(도서관)장, 85년 동 조교수, 동 부교수, 86년 미국 위스콘신주립대 객원교수, 경산대(전 대구학의대) 영어과 교수, 90년 동 교무처장, 94년 동 교수, 94년 동 교수협의회장, 99년 경산대 인문사회대학장, 99년 동 기린인증원장이었다. 경산대는 그 후 대구한의대로 다시 교명을 바꾸었다. 저서로 <Swift 의 풍자 문학>, <현대 영미시 이해> <대학실전영문법>, <대학필수영어>, <영미시작가론(譯)> 등이 있고, 수필집 <용기와 도전의 로고스>가 있다.(每日名鑑 1996 1997 1999 2001, 醴泉文學 22號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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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영작문(實用英作文(最新)) [冊]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저서로, 416쪽, B5, 형설출판사에서 2001년 3월 5일에 출간하였다. [책 소개] : 언어기능 훈련에서 가장 소홀히 하고 있는 4가지 단계 중 쓰기 단계 훈련을 위해 내 놓은 책이다. 우리말의 기본구조를 영어로 작문할 수 있게 하였으며, 단문영작, 장문영작, 실용면의 활용을 다루어 구성하였다. [목차] : 제1장 / 1. 명사 ...9 / 2. 관사 ...29 / 3. 대명사 ...49 / 4. 관계사 ...69 / 5. 형용사 ...89 / 6. 비교 ...111 / 7. 부사 ...129 / 8. 접속사 ...151 / 9. 전치사 ...173 / 제2장 / 10. 동사 ...195 / 11. 시제 ...217 / 12. 조동사 ...239 / 13. 태 ...261 / 14. 가정법 ...283 / 15. 부정사 ...305 / 16. 동명사 ...327 / 17. 분사 ...349 / 18. 주어와 술어의 일치 ...371 / 부록 / 영문서식, 편지 쓰는 법 ...393(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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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영문법(大學英文法) [冊]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저서로, 경산대학교 출판부에서 2003년 2월 25일에 출간하였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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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필수기본영어(大學必修基本英語) [冊]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저서로, 426쪽, B5, 형설출판사에서 1998년 3월 5일에 출간하였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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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밀라』다시 읽기(A Rereading of Pamela)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한국영미어문학회에서 2001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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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걸리버 旅行記』: 常識과 理性의 정치(Gulliver))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신영어영문학회에서 1999년 2월에 발행한 <신영어영문학> 제12집 177~209쪽(33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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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걸리버 旅行記』=Gulliver''''s Travels)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신영어영문학회에서 1999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 요약] : The general evaluations on Gulliver''''s Travels have been limited on the generalization of his literature. For example, his techniques of satire, irony, metaphor, persona, and allegory have been the mainstream of criticisms on Jonathan Swift. As a matter of fact, justification of these tendencies is consistent with the author’s personal history and biographical background.But if you suppose that literature is eventually a product of an age, it cannot be denied that the age and literary trend of Jonathan Swift have an inseparable connection with his works, especially Gulliver''''s Travels. Therefore if we are to understand this work in the light of political context controlling common sense and reason, this work will be able to enjoy more praise and admiration. By depicting political infrastructure of the contemporary England with symbolism, contrast, historical allusion and irony, and satire, he not only pointed out all kinds of evils and contradictions of contemporary society of England but also tried to cure the social diseases and to improve them./ This endeavor can be regarded as his intention to recover the perfection of nature itself form the dehumanization of man caused by individualism based upon the materialistic values, estrangement from pious religion, and addiction to optimism and finally expansion of imperialism of the 18th century in England./ In this respect, the persona of Gulliver''''s Travels is not a misanthropist or pessimist but a philanthropist seeking after transmutation of a destructive force to a creative act.(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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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프트와 오웰의 문학적 관계(스위프트와 오웰의 文學的 關係 =On the Literary Relationship of Jonathan Swift and Gorge Orwell)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慶山大學校에서 1998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 : 목차/ Ⅰ. = 51/ Ⅱ. = 52/ Ⅲ. = 56/ Ⅳ. = 59/ Ⅴ. = 61/ Works Cited = 64/ 영문초록 = 65/
[본문 요약] : Ever since Animal Farm: A Fairy Story was published in 1945, critics repeatedly have seen the hand of Jonathan Swift in Orwell''''s satire of totalitarianism, but comparisons almost always begin and end with Gulliver''''s Travels. What troubles most readers is that Orwell''''s attitude toward Swift seems so ambivalent, If "Politics vs. Literature: An Examination of Gulliver''''s Travels" were Orwell''''s first and last word on Swift, it would be difficult to comprehend why Orwell admired Swift as much as he obviously did. Other than praising Swift''''s artistry, he gave few reasons for ranking him among writers he most enjoyed, In fact he devoted over half the essay to vilifying Swift''''s politics. Orwell called him a "Tory anarchist, despising authority while disbelieving in liberty, and preserving the aristocratic outlook while seeing clearly that the existing aristocracy is degenerate and contemptible". Yet Swift the political gadfly engaged his imagination, In his essay, Orwell said that Swift''''s greatest contribution to political thought..... is his attack, especially in Book Ⅲ, on what would now be called totalitarianism.Northrop Frye once mentioned that Swift''''s A Tale of a Tub is the best example of the classical form after which Animal Farm is modeled. Perhaps we should enlarge upon this thought and pay particular attention to Swifts allegory of the three coats, in order to understand what it was Orwell appreciated about Swift''''s politics. Swift''''s complex satire of Catholicism and Puritanism is told as a fairy story. Furthermore, A Tale of a Tub and Animal Farm treat a common theme, that of revolution gone sour. Swift was a writer concerned with politics in the essential meaning of that word-the life of the polls. Swift saw literature and language as directly connected with the health of the polis. So did Orwell.(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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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프트의 인간혐오 사상(스위프트의 人間嫌惡 思想 =The Nature of Swift)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신영어영문학회에서 1997년 8월에 발행한 <신영어영문학> 제9집 75~93쪽(19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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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프트의 전통적 수사법(Swift''''s Use of Classical Rhetoric =스위프트의 傳統的 修辭法)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慶山大學校에서 1997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 요약] : Sir Henry craik''''s fine biography of Swift is one of the few constructive works done of Swift in the nineteenth century. craik makes no occasion to deal with swift''''s rhetoric. but he does have one perceptive comment which indicates his awareness of this rhetoric in swift. In reference to the Dediction to Prince Posterity in A Tale of a Tub Craik remarksThis is herdly the whole matter of the Dedication. but the comment indicates a greater awareness than do Craik''''s predecessors./ In the present century Quintana''''s large study of Swift has no treatment of this subject. although there are scattered references which indicate Quintana''''s awareness of Swift''''s rhetoric. "An Argument against Abolishing Christanity" he calls "a masterpices of ironic disputation.(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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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th and Ornament in Gullivers''''a Travels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안동대학교 어학연구소에서 1997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 요약] : Gulliver should have known that his attempt to "sally to the extreme" of Houyhnhnm raionality was dangerous to his sanity. From the heights of the imagination to which he has travelled in his attempt to achieve Houyhnhmn rationality, Gulliver drops to the depth of despair and madness, and his misery and delusion foretell Swift''''s own. By flirting with the limits of the imagination, Swift courted the demon he denied. And if Swift''''s last words actually were "I am what I am," then he spoke as a man seeing himself at last not in a mirror(our final view of Gulliver) but from the inside out-unpleasant perhaps, but without reflection and therefore without color.(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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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uldbrugg집단과 Houyhnhnm집단의 미덕(Struldbrugg集團과 Houyhnhnm集團의 美德 =The Virtue of Struldbrugg and Houyhnhnm)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慶山大學校에서 1996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 : 목차/ Ⅰ. Swift의 대표작... = 79/ Ⅱ. Struldbrugg집단... = 80/ Ⅲ. 위에서 묘사한... = 83/ Ⅳ. Struldbrugg Chapter는... = 87/ Ⅴ. Swift는 Book Ⅳ에서... = 89/ List of works Cited = 91/ [본문 요약] : Swift는 Book Ⅳ에서 Gulliver의 반응과 변화를 판단 할 때 독자를 도와주기 위하여 BookⅢ의 끝부분에서 Gulliver의 형식적 기독교 신앙을 특히 강조했다. Gulliver는 Yahoo족이 그 모습에서 인간과 완전히 닮았음을 알고 Houyhnhnm주인과 왜 Yahoo들은 인간보다 더 나쁜지를 토론하고(Chapter 3) 또 뒤에 가서는 왜 인간들이 Yahoo보다 더 나쁜지를 토론한다.(Chapter 7) 그러나 그는 결코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그는 Yahoo의 기원에 대한 Houyhnhnm설명을 듣는데(Chapter 9), 이 이야기들은 창조와 멸망에 대한 성경적 설명을 회상시켜 주는 것들이고 또 인간이 Yahoo로 타락될지도 모른다는 한가지 근본적 이유를 암시해 주는 것이며 또 개화된 인간들이 여러 면에서 Yahoo보다 못한 이유를 제시해주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Gulliver는 그런 암시를 모르고 성서의 배경으로부터 특색 있게 인간을 보지 못한다. 그 대신 그는 인간들은 Houyhnhnm들이 인간을 보고 있는 표현을 다음처럼 서술하고 있다.and multiply those Vices. where of their Brethren in this country had onlythe Share that Nature allotted them.(P.278)/ 아울러 그는 또 크리스찬 배경으로부터 보지를 못하고 있다. 그는 자기의 결점 몇 가지를 알고 있다고 주장 하지만 그는 자기의 나쁜 성향과 예수와 종교에 대한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악의 원천은 자기에게는 외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또 만약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모든 "Example or incitement to Vice"(P.259)에서 분리시키고 Houyhnhnm종족을 경멸하기만 한다면 덕성스럽게 될것이라 생각한다. Gulliver는 Houyhnhnm종족을 "가장 높은 존경과 경외심"을 갖고 바라보게 되고 또 그가 그들을 모방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Yahoo보다 훨씬 더 나빠진다./ 자부심 강한 Houyhnhnm은 미덕의 귀감이 될지는 모르지만 Houyhnhnm종족은 타락한 인간에게는 어떠한 치료법도 제시하지 못한다. 그들을 모방함으로서 Gulliver는 단지 말 (馬)처럼 이야기하고 Yahoo가죽 구두를 신고 말처럼 걷는다. 그리고 극복 당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타락성-즉 이기심, 잔인성 그리고 자만성-을 자기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음을 표명해주는 모든 성향들이 정당화된다. 그러므로 Struldbrugg집단보다 훨씬 더 명확하게 Gulliver는 종교적 희망과 두려움 없이 타락된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상태를 예시해준다./
Book Ⅳ의 마지막 장은 여러 면에서 Gulliver가 주장은 했지만 결코 이해를 하지 못했던 기독교 신앙을 회상시키고 있다. Houyhnhnmland를 떠나야만 했을 때 Gulliver는 자기자신의 생각을 달랠 수 있고 또 자신의 종족의 악과 타락으로 빠질 수 있는 어떤 기회도 없이 그런 비길데 없는 Houyhnhnm종족의 미덕을 즐겁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무인도를 찾는다. 이것은 어쩌면 신을 곰곰히 생각하기 위해서 사막으로 들어가는 은둔자의 욕망과 아이러니가 비교될 수 있는 행위라 할 수 있다. Gulliver가 포르투갈 선원들과 그들의 선장, 즉 이들은 Travels에서 타락된 인간에 대해 쓰여진 모든 것과는 현저히 예외로 보이는 사람들이라 할 구 있는데 바로 이런 이들을 만날 때 그는 그들에 대해서 진정 예외인 젓처럼 즉 위대한 인간성, 인내성, 자비 등을 생각치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희망의 모습으로 보지를 못한다. 그런데 Swift는 그리스도의 재림주간의 시작인 1715년 12월 5일에 그를 영국에 도착하게끔 함으로서 Gulliver의 기독교 신념의 부족함과 희망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Bethelehem의 마굿간에서 태어난 어린애를 축하하는 대신에 Gulliver는 재빨리 재능면이 아니라 모습에서 닮은 타락한 Houyhnhmn종족인 두마리의 어린 "Stonehorses"를 사서 적어도 하루에 4시간이나 그들과 대화를 하는 자기 자신의 마굿간에다 이 두마리의 말(馬)들을 세워 둔다. 첫 세번의 항해에 등장하는 명목상의 크리스찬은 우상 숭배자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교도로서 그는 당연히 그의 가족과 친교에 가담하기를 거절한다. 그때에 그의 가족들도 그의 빵에 감히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고 또 컵의 물을 마시려고 하지도 않는다./ Gulliver는 이때 이 마지막 항해가 있기 전 그가 이야기했던 타락한 인간성을 완전히 믿고는 있지만 인간이 왜 타락하는지에 대해서는 Swift가 Book Ⅲ의 끝부분에서 Gulliver에게 조심스럽게 보여 주었던 것 보다 더 현명하지는 못하다. 인간은 타락되어 있음을 여전히 보지 못하고 또 구원의 십자가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유럽인들은 소수의 진정한 미덕이 있는 존재, 즉 Houyhnhnm집단의 본보기에 의해서 개화되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Struldbrugg 이야기는 Book Ⅳ 전반을 통해서 독자들을 안내하도록 계획이 되어 있다는 이런 논쟁은 물론 Book Ⅳ나 아니면 Guttiver''''s Travels의 완전한 독파의 시초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시초는 무척 유용한 시초로 보인다. 이 이야기는 그 책이 기독교에 대한 주의 깊지만 그러나 간접적인 논쟁인 점을 몇 가지 나타내고 있고 또 어떻게 진정한 기독교 독자가 Gulliver와 같은 형식적 크리스찬보다 그 책을 더 잘 이해한 것 같다는 점을 설명해 준다. 만약 독자로서 우리들이 Gulliver의 배경을 함께 하고서도 그리고 또 그의 속세의 비젼에 대한 근본적인 불완전함을 보지 못한다면 그때는 독자도 요점을 놓치고 말 것이고 또 우리자신도 Swift풍자의 표적이 되고 말 것임을 암시해 준다.(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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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ft의 인지론 연구(A STUDY OF SWIFT'''' THEORY OF KNOWLEDGE =Swift의 認知論 硏究)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慶山大學校에서 1995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 : 목차/ Ⅰ. Swift''''s awareness... = 3/ Ⅱ. In the sermon... = 4/ Ⅲ. The sermon lists... = 6/ Ⅳ. The ironic inversion... = 8/ Ⅴ. For Swift the test... = 10/ List of works cited = 11/
[본문 요약] : For Swift the test of truth is always the Aristotelian-Thomistic "conformance of the thought with the thing." But this "test" undergoes rather peculiar transformations in Swift''''s writing, as it is adjusted ta aesthetic requirements and the specific satiric object. Knowledge is a tool for Swift, not an end in itself, and its value resides in its power to enable man to understand and confront the human, social situation. That opinion is worthless, and not true knowledge at all, which fails to apply to the concrete, individualized experienced world which Swift, of course, accepts as extramental, existing outside of and distinct from the perceiver of that world. When Swift''''s satires distort this perceived world by exaggerating certain aspects, it is always with a view toward testing the validity of a preconceived notion of reality. And the test is designed to permit an observer to distinguish between knowledge and opinion, truth and absurdity.(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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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ft의 풍자 기법 연구(Swift의 諷刺 技法 硏究 =A Study on Swift''''s Techniques of Satire)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慶山大學校에서 1993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 : 목차/Ⅰ. 序論 = 61/ Ⅱ. Persona = 62/ Ⅲ. Parody = 65/ Ⅳ. Metaphor = 69/ Ⅴ. 結論 = 77/ *References = 77/
[본문 요약] : This thesis is to examine various techniques Swift used in his satire. He heightened the effect of his satire through persona, parody, metaphor, and a careful use of specific image patterns, assorting that a satirist should confine his attacks to faults which a person could correct and that he should not mention the names of his literary enemies, lest their memories of his attacks on them be perpetuated.Swift avoided direct expressions of attack in his satire and utilized a persona to convey his feelings, or at least to help a reader infer what those feelings might be. Through the use of persona Swift could explain many difficult aspects in the satirical structure by considering the speaker in the story as the fictitious character with a view different from Swift. Gulliver in Travels and hack writer in Tale are the very persona which Swift proposed as his mouthpiece, and by employing a persona Swift could relieve himself of the burden of his position. This indirect method contains the use of parody and deliberate exaggeration. By metaphors which Swift often employed he made his satirical writings more effective./ These techniques are considered to hav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Swift''''s satire. Since the aim of a satirist is partly to communicate his thoughts to readers and do it effectively, part of the art of a satirist should be that of a rhetorician. Few would disagree with the assertion that Swift was a master of rhetorical skills. Swift also had good commands of creative sentences with careful choice of words, vivid free from the old patterns, and making use of humorous episodes, he used to evoke a lash. By the device of reclassification he picked out an object or group of his satire out of the undesirable social class and reduced it to much the lower class or level to make readers distrust a snobbish affection or intellectual fame of his satirical objects. Besides these techniques, Swift maximized writings of aspire by the use of irony, animal imagery, the examination of which is not made in this study.(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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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lliver''''s Travels의 결론에 나타난 풍자구조 및 논조에 관한 연구(Gulliver''''s Travels의 結論에 나타난 諷刺構造 및 論調에 關한 硏究 =The Structure and Tone of Satire in the Conclusion of Gulliver''''s Travels)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동아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영어영..에서 1994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 : Ⅰ Travels의 Book Ⅳ는 지금까지/ Ⅱ Book Ⅳ의 마지막 2/ Ⅲ Travels의 해석상 하나의 어려운/ Ⅳ Tone이 자주 변화하고 또/ Ⅴ Book Ⅳ는 인간이 먼곳에서 바라보면 /
[본문 요약] : Book IV shows how abominable man appears when viewed from a distance, how beastly man appears when viewed from perfection, what true perfection looks like in serenity and splendid isolation, and how far such perfection is from the possibility of human attainment. The penultimate chapter shows what is available to us and what happens if we, proudly, refuse such alternatives in favor of unreachable ones. The last chapter, with its naive confidence in its own truthfulness, with its simplified patriotism, with its denuncation of pride, concluded all of Gulliver''''s Travel.Gulliver''''s Travel is an especially clear example of the error of modern criticism of satire, which says that in satire "standards of judgment are indubitable" or that in satire the reader is "sure what the author''''s attitude is or what his own is supposed to be." And much of the criticism of Gulliver''''s Travels, which insists that a single meaning be attached to the work, or that it be approached from a single point of view, seems to be an unwitting demonstration of the single vision which Swift denounces. The almost unlimited diversity of the final chapter, the playful variations, the shifts of personality, the alternations of tone, the logical self-contradictions, the images that reveal different meanings to different ages, all demonstrate Swift''''s belief that man and his environment are desperately complicated, and that any attempt to reduce them to simple schemes, whether the reduction be in terms of politics, science, history, psychology, or literary theory, only demonstrate man''''s limitations the more clearly./ The detached, almost gay tone of most of the final chapter presents a problem. When viewed from the eighteenth-century point of view, the chapter is beautifully consistent with the whole work, but when seen as the conclusion of a prophetic satire, it becomes almost anti-climactic. The subject is as broad as mankind, but the tone is generally lighter than the previous chapter''''s or than the whole Fourth Book''''s would lead us to expect. Perhaps we can explain the change in tone as a way to remove us from the intense involvement of the penultimate chapter so that the final chapter refers to all four books. And perhaps we can interpret it as an attempt to lighten some of the pessimism that the earlier parts have been steadly building toward, in order to reveal that Gulliver''''s tragic choice, in the penultimate chapter, is not the only one. For in accepting the "complexity of human existence'''' we can achieve some reconcilement with ''''the due course of thing."(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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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ft 풍자문학에 나타난 풍자동기에 관한 연구(Swift 諷刺文學에 나타난 諷刺動機에 關한 硏究) [學術저널] : 용문면 출신 강형(康泂, 1938- , 大邱韓醫大 敎授)의 논문으로, 동아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에서 1987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 : Ⅰ. 序論/ Ⅱ. 本論/ 1. 諷剌의 動機/ 2. 諷剌의 技巧/ Ⅲ. 結論(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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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650) : 예천 출신 대구한의대 교수(강형)의 논문들(作成 張炳昌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2004-11-18 照會 1017)
→<예천의 자랑> 제5권(張炳昌 著 2005年) =895~8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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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447
초정서예연구원(東洋傳統藝術의 꽃 書藝文化 硏究와 後進 養成 爲한 ''''초정 書藝硏究院'''' 開館!) [記事] :
서예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교육장 및 학술연구의 장으로 활용될 "초정 서예연구원"이 완공되어 2009년 6월 10일 오전 11시 김관용 도지사, 김수남 군수, 정영광 군의장을 비롯한 기관단체장, 경북일보 정정화 사장, 오승우 서양화가, 주민 등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관식을 갖고 일반에 공개됐다.
이날 준공식에 앞서 초정 선생의 후진을 대표해 소운 이송자 회원이 초정선생 부부에게 그동안 후진 양성을 위해 애쓰고 오늘 초정서예관을 개관하게 된 것을 축하하는 감사의 꽃다발을 전달했다.
이어 초정 선생은 "평소 서예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훌륭한 서예연구원이 건설될 수 있도록 물심 양면으로 도움을 준 김수남 군수께 감사패를 전달하고 앞으로도 서예연구원이 제 몫을 다하여 경북의 유교문화권 정착에 기여해 줄 것"을 부탁했다.
초정 권창륜 선생은 인사말에서 "문화 예술을 지극히 사랑하고 서예의 소중함을 후손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연구원을 건설해 준 김수남 군수와 김관용 도지사에게 깊은 감사드리고 초정서예연구원이 대한민국 모든 서예인들의 전당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수남 군수는 격려사를 통해 "오늘 개관되는 초정서예연구원이 예천군을 찾는 많은 방문객들에게 소중한 체험의 장이 되도록 초정 선생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노력"을 당부하고 "서예의 계승과 발전은 물론, 교육의 장소로 자리잡아 군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서 지역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 줄 것"을 당부했다.
김 군수는 이어 "오늘 개관된 초정 서예연구원이 지역 서예인 후진양성과 심신수양의 도장으로 활용됨은 물론, 각종 서예대전을 개최하여 우리지역을 알리는 파수꾼의 역할을 기대하며 다시 한번 개관식을 축하드리고 참석하신 모든 분들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했다.
김관용 도지사는 "영남의 기를 살려줄 초정 서예연구원 개관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평생을 서예를 위해 살아온 초정 선생이 양반의 고장이자 유교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한 축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300만 경북도민과 함께 적극 지원하겠다"는 축사를 했다.
정영광 군의장은 축사에서 "초정 선생은 우리나라 서예의 대가로 서예를 사랑하는 마음과 뜨거운 창작열기로 지역의 서예동호인들을 열과 성을 다해 지도해 왔을 뿐만 아니라 우리고장을 전국에 알리는데도 일익을 담당하여 유교문화가 살아 숨쉬는 충효의 고장 예천에 걸 맞는 서예연구원을 설립했다"며 개관을 축하했다.
이날 준공식을 가진 초정서예연구원은 총 사업비 30억2천100만 원이 투입되었으며 지난 2004년 실시설계 완료 후 2005년 10월 31일 착공, 3년 7개월 간의 대공사를 거쳐 이날 개관식을 갖게 된 것이다.
연구원은 부지 5,019㎡, 연면적 864㎡의 지하 1층, 지상 2층의 철근콘크리트 목조한식기와 건축물로서, 지하 1층은 기계실, 지상 1층은 전시실, 수장고, 지상 2층에는 교육공간인 강의실과 실기체험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서예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교육장 및 학술연구의 장으로 크게 활용될 전망이다.
군 관계자는 "초정서예연구원은 서예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교육장 및 학술연구와 서예인 후진양성과 심신수양의 도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된 시설로 체험장 및 각종 서예대전 및 작품 전시회장으로 이용되어 서예를 통해 예천군을 전국에 알리고 관광인프라 구축으로 지역경기 활성화에 많은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전망했다.
한편, 이날 개관식에는 서양화가 오승우 화백, 한국예문회 규당 조종숙 선생, 경기대학교 난정 이지연 교수, 안병철.김단희.이도익 씨 등 원로 서예가, 국회의원 서예지도교수 청암 고강 선생, 국서원 부이사장 장암 이곤순 선생 등 많은 서예인 및 예술계인사가 참석하여 개관을 축하했다.
김관용 경북도지사, 김수남 군수, 관내 기관단체장 및 초청 인사들은 개관식을 마치고 초정 선생의 안내로 연구원 내부에 전시된 초정 선생의 작품과 멋지게 꾸며진 연구원 내부를 둘러보고 대작과 내부 시설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김관용 도지사는 이상만 기자(전국매일), 장병철 기자(경북일보) 등 관내 기자들에게 초정 서예연구원이 전국의 서예가들과 관광객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얻기 위해서는 김수남 군수와 군민, 그리고 기자들의 홍보가 크게 한 몫을 담당해야 가능하다며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했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06-10 오후 12: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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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실(6월 테마 << 體驗마을을 찾아서 慶尙北道 醴泉郡 龍門面 上金谷里 : 傳統의 멋이 살아 숨쉬는 故庄, 醴泉 金塘室마을) [記事] :
‘물에 떠있는 연꽃’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 금당실. 조선시대 예언서인 정감록에서 십승지지 중 한 곳으로 꼽히는 금당실 마을은 조선의 도읍 후보지로 거론됐을 만큼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금당 맛질 반서울’이란 말도 이런 연유로 생겨난 말이다. 금당실 마을의 가장 큰 자랑은 세월을 비껴간 고택과 돌담들이다. 금당실 마을에는 반송재 고택(문화재자료 제262호)과 사괴당 고택(문화재자료 제337호)을 포함해 10여 채의 고택이 남아있고 이들 고택과 역사를 함께한 정겨운 모습의 돌담도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있다.
볏짚과 황토를 이용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담은 구불구불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마을 깊숙이 이어진다. 네모반듯하게 올라간, 깔끔하지만 삭막한 도시의 그것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그렇게 이어진 돌담을 따라 마을산책을 하다보면 마치 조선시대 선비라도 된 듯 발걸음까지 느긋해 진다.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일대가 금당(金塘)이라 불리게 된 것은 마을 지형이 ‘물에 떠있는 연꽃’을 닮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예언서인 정감록에서 십승지지 중 한 곳으로 꼽는 금당실 마을은 조선의 도읍 후보지로 거론됐을 만큼 명당으로 알려진 곳. ‘금당 맛질 반서울’이란 말도 그런 연유로 생겨났다.
맛질은 금당실 마을인 상금곡리와 붙어있는 대제리, 제곡리, 하학리를 아우르는 옛 지명이다. 금당실 마을에선 최근 고택들에 대한 복원공사가 마무리되었다.
지난 2006년 3월 당시 문화관광부에 (현 문화체육관광부) 의해 ‘생활문화체험마을’로 선정된 후, 보존 가치가 높은 일부 고택들에 대해 실시한 보강공사였다.
이번 보강공사를 통해 마을은 한결 민속마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 뿐 아니라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몇몇 보충되었는데,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금당 주막’이 대표적이다.
아직 온전한 모습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예천의 명물인 삼강주막에 버금가는 명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금당실 마을하면 고택과 돌담을 빼놓을 수 없다] : 금당실 마을에는 반송재 고택(문화재자료 제262호)과 사괴당 고택(문화재자료 제337호)을 포함해 10여 채의 고택이 남아있고 이들 고택과 역사를 함께한 정겨운 모습의 돌담도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켜있다.
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일부 돌담이 헐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대다수의 집들은 옛 모습 그대로의 돌담을 보존하고 있다. 볏짚과 황토를 이용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담은 구불구불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마을 깊숙이 이어진다.
네모반듯하게 올라간, 깔끔하지만 삭막한 도시의 그것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그렇게 이어진 돌담을 따라 마을산책을 하다보면 마치 조선시대 선비라도 된 듯 발걸음까지 느긋해 진다.
재미있는 것은 마을 입구에서 만나는 마을 주민마다 ‘골목에서 길 잃어버리지 마시게’라고 농담을 던진다는 것.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의아스럽지만 막상 7km에 걸쳐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주민들의 말이 농담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마을 구석구석 숨은 옛길찾는 재미 솔솔~] : 키 작은 돌담을 따라 걷다보면 의외의 장소를 만나기도 한다. 바로 흙길. 마을 안 대부분의 도로가 포장되었지만, 아직 마을 곳곳에 옛길이라 불리는 흙길이 조금씩 남아있는데, ‘지게나뭇길’로 불리는 좁은 비포장 골목도 옛길로서의 운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길 중 하나이다.
양옆으로 기와를 얹은 돌담과 이엉을 얹은 돌담이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어 더욱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을 구석구석 보석처럼 숨어있는 옛길을 찾아보는 것도 금당실 마을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재미다.
금당실 마을에서는 ‘양반체험’과 ‘농촌체험’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마을체험센터 증축공사 기간 동안 잠시 중단했던 체험프로그램은 마을체험센터가 재개관하는 오는 6월30일 이후부터 다시 시작할 예정이다.
‘금당실 송림(천연기념물 제469호)’도 금당실 마을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쑤’라고 불리는 이곳은 내륙지방에서는 흔하지 않은 소나무 방풍림이다.
예전에는 그 길이가 2km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800m 정도만이 남아있는데, 방풍림이 이렇게 줄어든 것은 금당리 마을에 숨겨진 슬픈 역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892년 마을 뒷산인 오미봉에서 몰래 금을 채취하던 러시아 광부 두 사람을 마을 주민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조선과 러시아간 외교문제로 비화되어 마을의 존립자체가 위태로워지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고 말았다.
마을주민들은 고심 끝에 마을의 공동재산이었던 이 소나무를 베어 러시아 측에서 요구하는 배상금을 충당하게 되었고, 그렇게 베어내고 남은 것이 지금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오랜 세월 천재(天災)와 인재(人災)로부터 마을을 지켜준 송림에 대한 마을주민들의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금당실 송림 가운데로는 산책로가 나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삼림욕을 즐겨볼 수도 있다.
봄이면 금당실 송림과 어우러진 벚꽃 길도 멋스럽다. 벚꽃 길은 금당실 송림이 시작되는 마을 입구에서 928번 지방도를 따라 용문사 입구까지 8km 정도 이어진다.
[금당실 마을, 영화 촬영지로 유명] : 60~70년대 분위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금당실 마을은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이나영, 장혁 주연의 ‘영어완전정복(2003년)’과 정재영, 수애 주연의 ‘나의 결혼 원정기(2005년)’ 등의 영화가 금당실 마을 고택에서 촬영되었으며, KBS 드라마 ‘황진이(2006년)’의 주요 촬영무대였던 병암정(문화재 자료 제453호)도 금당실 마을에서 지척이다.
특히 병암정에서는 황진이(하지원 분)와 김은호(장근석 분)의 애틋한 사랑을 표현한 명장면들이 많이 촬영되었는데, 김은호와 황진이의 첫 키스 장면과 김은호가 반지를 실에 끼워 황진이에게 전하는 장면 등이 모두 이곳 병암정에서 촬영되었다.
현재 병암정에서 드라마 세트장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 감동만은 아직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다. 병암정에서 차를 돌려 928번 지방도로를 따라 동로 방향으로 조금 가면 금당실 마을을 지나 왼쪽으로 초간정이 보인다.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 위치한 문화재자료 제143호인 초간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지은 초간 권문해(1534~1591)선생이 세운 정자로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모습이 멋스럽다.
보물 제878호인 대동운부군옥 책판(부)고본은 예천권씨 종택에 모셔져 있다. 초간정을 지나 다시 조금 더 차를 몰면 원류 삼거리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에서 우회전하면 예천을 대표하는 사찰, 용문사에 닿을 수 있다.
신라천년 고찰인 소백산 용문사는 그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대장전(보물 제145호)과 윤장대(보물 제684호) 그리고 목각좌상 및 목각탱(보물 제989호)과 교지(보물 제729호) 등 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용문사와 함께 2007년 예천바이오곤충엑스포를 준비하면서 건립한 예천곤충생태체험관과 예천천문과학문화센터 등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들. 특히 예천천문과학문화센터에서는 천문관측은 물론 가변중력체험, 우주자세제어체험, 달중력체험 등 다양한 우주환경을 체험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백미는 예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스페이스타워 전망대에서 체험하는 우주유형체험. 우주유형장치란 우주공간에서 우주인이 작업을 위해 사용하는 근거리 이동수단으로 스페이스타워 전망대 난간에 설치되어 있는 우주유형장치 역시 체험자가 조정 레버를 조작해 상하좌우로 이동시켜볼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최은남 記者 dailysun 2009-06-10 10: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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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룡포와 용궁향교 [記事] : 귀연산우회 카페/ 충효의 고장 예천 기행-회룡대와 용궁향교 / 글쓴이: 靑山/ 2009.06.10 14:25/ 대전-상주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려 북상주를 벗어나면 잘 닦인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문경을 지나 예천으로 향한다.
예천 초입 용궁면소재지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10여분 달리면 회룡교가 나온다. 회룡교를 건너 우측으로 산 중턱 장안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경내를 둘러본 후 조금 오르면 쉼터에 아미타대불이 자리잡고 있다.
비룡산에 있는 장안사는 신라가 삼국통일한 후 국태민안을 염원하면서 전국에 세운 세 개의 절 중 하나다. 북쪽의 금강산과 남쪽의 양산 그리고 이곳 용궁 장안사가 바로 그것이다.
신라 경덕왕 때(759년) 운명대사가 창건하였고, 세월이 지나면서 중창이 거듭되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가 이곳에 머물며 시를 쓰기도 했는데 유구한 역사의 향기와 천혜의 자연 경관이 어우러져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종각을 지나 쉼터의 아미타대불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갈림길이 있는데 좌측에 회룡대가 있다. 회룡포를 조망하는 장소로 제격인 회룡대는 사시사철 변하는 경관을 감상하고 사진 촬영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성능 좋은 카메라로 한창 촬영에 열중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촬영 장소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근사한 모습을 담으려는 분주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카메라에 힘이 들어간다.
내성천을 용이 휘돌듯 한 바퀴 감돌아 금천, 낙동강과 만나는 이곳 지형이 용궁이라 부르는 이유도 회룡대기에 표현된다. 회룡대에 붙어 있는 회룡대기(回龍臺記)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회룡대에서 오솔길 따라 오르면 원산성에 이르는데 이 산성은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에 영웅(英雄)들이 각축하던 용주성(龍州城)이 여기이고 또 바람결에 풍경소리 울리고 독경 소리 은은한 이 언덕의 장안사에 머물던 고려의 대문호인 백운 이규보가 낙동강에서 뱃놀이하고 낙강범주(洛江泛舟)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을 만큼 시인 묵객의 발길이 예부터 이어지는 곳도 바로 여기 회룡포이다.」
또한 회룡포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옛 사람들은 신선이 사는 꽃 피고 새 우는 아름다운 땅에 금은으로 꾸민 궁궐을 이상 세계로 그리며 살았으니 그 곳이 바로 이 고장이라 하여 용궁이라 이름 지었다라고 한다. 이곳은 주흘산, 팔공산, 학가산의 줄기가 한곳이 되는 곳이며, 또한 금천, 내성천, 낙동강이 함께 만나서 흐르는 삼산삼수(三山三水)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회룡포는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용이 비상하는 것처럼 물을 휘감아 돌아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높이 190m의 비룡산을 다시 360도 되돌아서 흘러가는 육지 속의 섬마을이다. 맑은 물과 백사장이 어우러진 천혜의 경관을 가지고 있으며, 비룡산에는 숲속 등산로와 산책 코스가 있다.
회룡대에서 다시 무제봉에 올라 조금 가면 비룡산 봉수대가 있는데 동쪽으로 예천읍의 서암산, 서쪽으로 다인의 소이산, 북쪽은 산양의 가불산 봉수와 연락하였다고 한다.
고려 의종 3년(1149)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1895년 봉수제도의 폐지로 없어진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소나무 숲을 지나 능선을 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종주 산행을 위한 코스와 제2 전망대로 가는 길이 이정표에 표시되어 있다.
우측은 원산성을 지나 삼강앞봉을 거쳐 의자봉, 적석봉, 사림봉을 돌아 사림재를 거쳐 회룡마을로 돌아오는 코스이다. 잠시 제2전망대로 향하여 조망을 본 후 다시 돌아와 원산성을 향한다.
원산성에 대한 기록은 몇 곳에 전하는데 회룡대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이 산에는 신라시대의 고찰인 장안사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비룡산 등산로를 따라 가다 보면 낙동강, 내성천, 금천이 합쳐지는 삼강이 보이는데 깎아지르는 듯 한 이곳에는 삼한시대부터 격전지로 유명한 원산성이 있다.
천혜의 요새로 된 토석혼축으로 된 성 주변에는 많은 고분이 흩어져 있으며 봉수대가 남아 있다. 백제 시조 온조가 남하할 때 마한 최후의 보루인 이곳 원산성을 점령한 후 백제를 세웠다고 전해지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상당 기간 백제의 요새로서 삼국이 충돌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얼마나 격전이 심했던지 지금도 피끝이라는 언덕에는 비가 많이 오면 성 아래 마을인 성저 마을에 아비규환과 원혼의 소리가 들려온다는 전설이 있다. 고구려 온달장군이 이 성을 점령하려고 남하하다가 아차성에서 전사하였다고 하지만 정확한 사실이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원산성은 둘레 920m, 높이 1.5~3m로 흙과 돌로 섞어 쌓은 토석 혼축성이다. 따뷔성, 또아리성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은 원형으로 쌓았다하여 삼국사기에 원산성(圓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산성은 문경의 금천, 영주의 내성천, 태백의 낙동강이 합류하는 삼강을 배수진으로 하고 가파른 지형을 이루며 사방을 일목요연하게 조망할 수 있는 천연요새이다.
삼한시대 마한이 이 성에서 백제에 패함으로써 멸망하였다. 그 후로도 신라, 백제, 고구려의 접경지에 위치한 탓에 격전이 잦았으며 성에는 세 곳의 샘과 한 개의 군창이 있으며, 성 주위에는 고분이 많았다고 한다. 원산성을 용주성이라고도 하는데 지명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회룡포가 있는 이곳의 지명이 용궁(龍宮)인데 서라벌의 축산이다가 고려 초에 용주가 되고, 현종 3년인 1012년부터 용궁이 되어 지금까지 천년동안 용궁으로 불리고 있다.
회룡포를 바라보며 뿅뿅 다리를 건너본다. 비가 와서 물살이 세기 때문에 다 건너지 못하지만 갈수기 때에는 마을로 건널 수 있다. 바로 옆 산행 들머리에 있는 용주팔경시비를 본 후 예천 향석리 석조여래좌상과 용궁향교를 들른다.
마을 입구에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수수한 모습으로 삼층석탑과 함께 있다. 오랜 세월 방치되었던 석조여래좌상은 손의 가짐이 항마촉지인이고 무릎은 높고 넓어서 안정감을 준다.
장방형 상대석에 새겨진 화판의 가운데 것이 정면으로 향하고 좌우로 갈수록 비스름히 새겨서 고려 시대 연화문 처리의 특색을 나타낸다. 양식상 고려 초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마을 앞에 서있는 용궁향교 표석을 따라 마을로 접어드니 의외로 거창한 향교와 만난다. 근처 병산서원과 모양과 형식이 비슷한 향교인데 크기와 규모가 상당했다. 잘 보존되고 있으며, 근처에 실제 서당이 운영되고 있는데 병산서원의 크고 길게 만들어진 목조 건축물 세심루(洗心樓)가 시선을 끈다.
이 향교는 옛 용궁현의 뛰어난 인재를 모아서 학문을 강론하고 연구하기 위하여 세워진 교육기관인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세워졌으며,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선조 36년(1603)과 인조 14년(1636)에 새로 지었다.
대성전과 명륜당 그리고 세심루가 있는데 원래 명륜당 앞에 동 서재가 있었는데 동재만 남아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며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향교에서는 공문 5성위와 송4현 및 국내 18현 등 27위의 성현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봄과 가을에 석전제를 올린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하마비가 서 있는데 아마도 용궁향교의 가치와 중요도를 보여주는 징표로 보인다.
장안사와 회룡대, 원산성을 둘러봐서인지 몹시 허기를 느낀다. 유명하다는 삼강주막을 찾아 59번 도로를 달린다. 내성천과 금천이 만나고 낙동강이 만나는 삼강교를 지나니 상감주막이 있는 나루터가 아름답다.
삼강나루에는 회화나무와 초가로 지은 주막이 있는데 예전 뱃사공과 장사꾼들의 쉼터로 유명하다. 삼강주막은 삼강나루의 나들이객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들의 숙식처로, 때론 시인묵객들의 유상처로 이용된 건물인데 1900년경 지어진 주막은 규모는 작지만 그 기능과 충실한 집약적 평면구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역사 자료로 희소가치가 크다고 한다.
또한 옛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의의를 간직하고 있다. 각종 부침개와 묵 그리고 몇 가지 먹을거리가 있지만 손님이 많아 오래 기다려야 한다.
보부상과 사공이 힘자랑하던 들돌이 무척 인상적이다. 당시 삼강은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물류이동이 아주 활발하였고, 장날이면 30여 차례나 나룻배가 오갔다고 한다.
당시 건물은 1934년 갑술 대홍수로 멸실되어 마을 어른들의 증언과 고증으로 복원한 것이다.
용궁 읍내에는 막창순대가 유명한데 박달식당과 바로 앞에 또 하나의 큰 식당이 있다. 고깃살이 풍부한 막창순대와 순대국밥 그리고 막걸리 한사발의 들이킴은 한나절 허기진 점심으로는 풍성하다. 냄새도 별로 없으며 맛 또한 기막힌데 가격도 상당히 저렴해서인지 손님이 많아 약간 기다려야 한다.
용궁 읍내에서 막창순대로 점심을 든 후 금암리 황목근을 찾았다. 느릅나뭇과의 황목근은 줄기둘레가 3.2m, 키가 15m에 이르며 수령은 500년으로 추정된다.
마을의 단합과 안녕을 기구하는 동신목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5월에 나무 전체가 누런 꽃을 피운다하여 황 씨 성을, 근본 있는 나무라 하여 목근(木根)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또한 국내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보유한 담세목(擔稅木)으로 유명하다. 조그만 호수와 잘 가꾸어진 나무들이 울창한 가오실공원을 거쳐 선몽대를 찾는다.
예천 지방도를 따라 차를 달리니 시골 한가한 풍경과 들판 논에 모를 심는 분주함이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밀려온다.
(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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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송령과 초간정 [記事] : 귀연산우회 카페/ 충효의 고장 예천 기행-석송령과 초간정/ 글쓴이: 靑山/ 2009.06.10 14:20/ 충효의 고장 예천 기행 <석송령과 초간정> :
어렵게 길을 찾아 도착한 보문사는 작고 조용하지만 역사의 숨결이 스며있었다. 보문사 3층 석탑의 투박함 아름다움이 학가산 기슭에서 묵묵히 오랜 세월을 지키고 있음에 놀란다. 깊은 산중까지 드나들 수 있는 길이 있어 작고 아담한 절집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하며 서둘러 감천면으로 향한다.
예천에 들러 꼭 봐야 할 천연기념물이기에 서둘러 천향리에 당도하니 너무도 희한하고 기이하여 눈이 확 뜨인다. 예천 석송령은 소나무의 한 품종인데 가슴 높이의 줄기둘레가 4.2m, 키가 10m에 이르는데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일명 반송 또는 부자나무라고도 불리며, 현재도 마을의 단합과 안녕을 기구하는 동신목으로 보호받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약 600년 전 풍기지방에 큰 홍수가 졌을 때 석관천을 따라 떠내려 오던 것을 지나가던 과객이 건져 심었다고 한다.
그 후 1930년경에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이라는 사람이 영험있는 나무라 하여 석송령(石松靈)이라는 이름을 짓고, 자기 소유의 토지 300평을 상속 등기해 주어 이때부터 이 나무는 수목으로서는 드물게 토지를 가진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보은 속리산의 정이품송이나 부인송 보다는 그 모양이 다르지만 형태나 생육 특히 옆으로 뻗힌 나무줄기의 생동감은 그 어떤 소나무와 견주어도 빼어나다.
허약해진 정이품송이 도로변 차량과 사람들에게 시달려 말라죽는 모습이지만 석송령은 아직도 싱싱하게 도도한 기상을 뽐낸다. 주변 정자 옆에는 석송령 2세 나무가 자라고 있어 깊은 감동을 준다.
부디 싱싱하고 올 곧게 자라 마을을 지키고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지켜주길 바래본다. 석송령의 담대하고 아름다운 반송에 취한 예천 여정은 저무는 해를 따라 용문면 죽림리로 향한다.
정자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귀결이어서인지 벚나무 도로 변을 따라 한참을 달린 여정은 노송과 잘 어우러진 풍광과 만난다. 초간정(草澗亭)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郡玉)을 지은 초간 권문해(1534~1591)가 세우고 심신을 수양하던 곳이다.
조선 선조 15년(1582)에 처음 지어졌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중건하였으나, 인조 14년(1636)에 다시 불타는 등 수난을 거듭했는데, 지금의 건물은 초간의 현손이 1870년 중창한 것으로 기암괴석과 주변의 경관이 조화를 이뤄 매우 아름답다.
정자채는 사주문을 통하여 들어가며 뒤쪽과 오른쪽 절벽을 이루고 있다. 자연기단 위에 주초를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다.
정면 3칸 중 앞면의 좌측 2칸은 온돌방을 배치하고 나머지 4칸은 통간의 대청으로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측면은 난간을 설치하였다. 지붕 석가래의 빗살무늬가 특이하고 난간에서 절벽을 바라보는 모습이 일품이다.
난간에 앉으니 찬바람이 겨드랑이에 살랑거려 너무도 시원하다. 절벽 건너에서 바라보면 바위벽에 초간정이라는 각자가 선명하다. 노송과 절벽 그리고 겹처마 팔작지붕의 아름다운 조화가 정자 문화의 수작으로 꼽힐 만큼 우수하다.
특히 옆 한옥에서는 한옥 체험을 할 수 있는 민박이 저렴한 가격에 운영되고 있어 관광객들에게 흥미롭다. 조용하고 아담하며 절벽 옆으로 흐르는 개천 그리고 노송이 어우러진 초간정에서 시를 읊고 심신을 수련했던 권문해 선생의 그윽한 선비적 기풍을 느껴 본다.
경북 예천에 보물처럼 숨겨진 우리 문화의 또 다른 정자 문화의 꽃을 볼 수 있음이 여간 행복한 것이 아니다.
해가 늬엇 늬엇 저무는 석양 무렵 영화 황진이 촬영지인 병암정을 찾았다. 이앙기로 모를 심는 농부들이 분주한데 수련과 연이 아름다운 연못 위에는 너무도 멋스러운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병암정(屛巖亭)은 팔작 기와집으로 정자들 동쪽의 병풍처럼 생긴 큰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건물은 예천 지역의 대표적 독립 운동가인 권원하(權元河)와 관련된 건물로 알려져 있다.
정자의 우측에는 3칸 규모의 맞배기집 별묘(別廟)가 있는데 원래는 인산서원의 사당이었으나 서원이 훼철되자 사당만 이곳으로 이전하여 권맹손, 권오기, 권오복, 권용을 봉사하는 별묘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드넓은 농촌 평야를 바라보며 위치한 병암정은 연못과 바위 절벽 그리고 연못에 드리운 정자의 또 다른 모습으로 사진작가들의 촬영지로 인기가 높다.
석양에 지는 햇살에 아름다운 풍광으로 다가오는 병암정을 찍기 위해 삼삼오오 카메라를 설치하고 포커스를 맞추는 사진 동호인들의 분주함이 연못가에 가득하다.
예천! 양궁 김진호의 고향! 아니 충효와 예의 고장! 멋들어진 영남 예천 권씨와 안동 권씨의 풍류가 묻어 있는 이곳은 정말 많은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갖가지 풍물과 내륙 깊숙이 간직된 조상들의 숨결이 건물과 정자 그리고 석송령과 같은 노송들로 가득히 다가온다.
하루를 꼬박 보아도 다 보지 못한 예천을 기행하며 한참을 굶주렸던 여행의 참맛을 느낌이 너무 행복하다. 여행은 또 다른 삶을 느끼게 하며 만나는 대상 모두가 한없는 즐거움을 줌에 여유와 기쁨이 두 배이다.
(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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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