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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1956:강사필監司2(附예천방문470)
작성자장병창 @ 2009.07.16 06:47:15
  예천의 자랑(1956) : 예천 사람 강사필 감사(2)(附 예천방문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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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사필 [記事] : 명종실록 25권/ 명종 14년(1559 기미 / 명 가정(嘉靖) 38년) 7월 13일(임오) 1번째 기사/ 홍문록의 간택이 정밀하지 못하다고 정원에 전교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요사이 홍문록(弘文錄)의 간택(揀擇)을 보니, 내 생각에는 정밀하지 못한 것 같다. 지제교(知製敎)는 책임이 막중한데 뽑힌 사람이 또한 9명【 강사상(姜士尙)·신여종(申汝悰)·강사필(姜士弼)·홍인경(洪仁慶)·유홍(兪泓)·이식(李拭)·최옹(崔?)·강극성(姜克誠)·조희문(趙希文) .】이나 되니, 그들이 과연 모두 합당한 자들인가? 그리고 서당(書堂)2390) 은 매우 엄밀하게 인물을 뽑아야 하는 곳인데, 이민각(李民覺)이 용방(龍榜)2391) 의 수석을 차지하여 비록 글재주는 있다 하나, 어떻게 사가 독서(賜暇讀書)에 참여할 수까지야 있겠는가. 이 세 가지 일은 내 마음에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는 듯하였는데, 지금 또 공론에서 거론되니, 나의 생각에 부합됨을 알 수 있다. 정원은 그리 알라.”【이에 앞서 간원이 이민각에 대하여 논계하였었다.】/ 사신은 논한다. 경악(經幄)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직책은, 반드시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훌륭한 사람을 얻어야만 고문(顧問)에 대비하여 임금의 덕을 보좌할 수 있기 때문에, 선택을 반드시 정밀하게 하고 임명도 반드시 신중히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 선발에 참여된 사람은 모두 명망이 있는 인물로서 당대의 최고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지금 홍문록에 간택된 수효가 10여 명이나 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모두 그 선발에 들었으니, 명기(名器)를 더럽힘이 매우 심하다./ 【태백산사고본】 16책 25권 56장 B면/ 【영인본】 20책 523면/ 【분류】 *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註 2390]서당(書堂) : 독서당(讀書堂). ☞ / [註 2391]용방(龍榜) : 문과(文科)의 별칭. ☞(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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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사필 [記事] : 명종실록 26권/ 명종 15년(1560 경신 / 명 가정(嘉靖) 39년) 6월 11일(병오) 1번째 기사/ 친정이 있었는데, 이준경·심통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상이 사정전에 나아갔다. 친정(親政)이 있었는데, 이준경을 의정부 좌의정으로, 심통원을 의정부 우의정으로, 김명윤을 숭정 대부 이조 판서 겸 판의금부사로,【특가(特加)이다. 그때 정승 자리가 오래 비어 있어서 외부 사람들이 모두 심통원을 정승으로 삼고 김명윤 을 이조 판서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때에 와서 과연 말한 대로 되었다. 김명윤 은 상의 은총이 이양에게 있음을 알고 깊이 교제를 맺어서 드디어 전형(銓衡)의 중한 지위를 얻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침뱉으며 더럽게 여겼다.】 안위를 병조 판서로, 이윤경을 형조 판서로, 성세장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어계선(魚季瑄)을 가선대부 형조 참판으로,【특가(特加)이다.】 박응남(朴應男)을 의정부 검상으로 삼았다. 이윽고 전교하기를, “승지는 이미 동벽(東壁)을 지냈던 자로 의망하라.”【우승지 이상을 동벽이라 이른다.】하고, 이양을 승정원 도승지로, 강사상을 병조 참의로, 성의국(成義國)을 사간원 사간으로 삼았다. 그때에 장령에 결원이 있었으므로 전교하기를, “일찍이 장령·헌납을 지냈던 자로 의망하라.”하고, 권신을 사헌부 장령으로, 김백균을 홍문관 응교로, 조광언(趙光彦)을 세자 시강원 필선으로, 유종선을 홍문관 부응교로, 강사필(姜士弼)을 이조 정랑으로, 이영(李翎)을 사간원 헌납으로,【특명(特命)이다.】 박근원(朴謹元)·장사중(張士重)을 홍문관 교리로, 황서(黃瑞)·정척(鄭?)을 부교리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사람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은 혹 정사(政事)에서 볼 수도 있고 혹 언사에서 알 수도 있다. 친정(親政)하는 날 제배(除拜)된 사람 중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 많으니 어찌 예전의 ‘어진이에게 맡기되 의심하지 말고, 간사한 사람을 물리치되 의심하지 말라.’는 뜻이겠는가. 간사한 사람이 상의 마음을 제멋대로 헤아려서 조정의 근심거리를 만들까봐 염려된다./ 사신은 논한다. 친정하는 것은 정사 중에서도 중대한 것이다. 그런데 첫째로 탐독스럽고 무식한 심통원을 정승으로 삼고, 다음으로 거칠고 비루하며 지위를 잃을까 근심하는 김명윤 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아첨하는 사람이 논사(論思)하는 지위에 섞여 있기도 하고 남을 붙좆는 사람이 풍헌(風憲)의 관직을 더럽히기도 하니, 곧은 사람을 들어 굽은 사람을 물리치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사신은 논한다. 상은 어진이를 가려 정승을 삼고자 한다고 하였다. 당시 정승이 늙은 간흉 윤원형과 묵은 장리(贓吏) 심통원을 서계하자 상은 갑자기 친정하여 심통원을 우의정으로 삼았으니, 상하가 다 잘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김명윤 이 전형을 맡게 되고 이양 이 후설(喉舌)의 장관이 된 것도 이 날의 정사에서 있은 일이니, 외척이 전권(專權)하고 조정(朝政)이 날로 잘못되어 끝내 사림이 화를 당하게 된 것이 당연하다./

  사신은 논한다. 인주의 직분은 정승을 논하는 데 있다. 그런데 흉특하고 탐독스러운 심통원 이 외척으로 정승이 되었으니 국사를 그르칠 일에 대해서는 어찌해야 하는가. 아, 통탄스럽다. 김명윤은 음흉하고 반복 무상한 자이다. 권간을 번갈아 섬겨 병조 판서가 되더니 오래지 않아서 곧 승서되어 총재가 되었으니 이는 모두 이양 의 힘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침뱉으며 더럽게 여기는데도 우쭐대고 있었으니 매우 형편없는 자이다. 권신(權信)은 음험하고 탐욕스럽고 외람되며, 김백균은 사악하고 아첨을 잘하며, 이영(李翎)은 음흉하고 올바른 행실이 없다. 이들은 모두 양을 위해 죽기로 맹세한 벗들이다./ 【태백산사고본】 16책 26권 38장 B면/ 【영인본】 20책 558면/【분류】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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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사필 [記事] : 명종실록 27권/ 명종 16년(1561 신유 / 명 가정(嘉靖) 40년) 4월 2일(신묘) 1번째 기사/ 권신·박응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권신(權信)을 종부시 정(宗簿寺正)으로, 박응남(朴應男)을 사복시 부정(司僕寺副正)으로, 강사필(姜士弼)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7책 27권 11장 B면/ 【영인본】 20책 58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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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사필 [記事] : 명종실록 27권/ 명종 16년(1561 신유 / 명 가정(嘉靖) 40년) 5월 27일(병술) 3번째 기사/ 정응두·이문형·권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응두(鄭應斗)를 병조 판서로【특지(特旨)이다. 위인이 음험하고 이끗을 즐겨 이양 에 대한 상의 권우(眷遇)가 극진한 것을 알고 마음을 바쳐 이양에게 빌붙었는데 특지가 내린 것도 그 덕분이었다. 얼마 안 되어 찬성(贊成)에 올랐는데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이문형(李文馨)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권신(權信)을 집의로, 황서(黃瑞)와 강사필(姜士弼)을 장령으로, 김억령(金億齡)과 고경명(高敬命)을 지평으로, 유강(兪絳)을 함경도 관찰사로, 이선(李選)을 사간원 헌납으로【특지(特志)이다.】, 조광언(趙光彦)을 홍문관 부교리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7책 27권 35장 A면/ 【영인본】 20책 593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비빈(妃嬪) / *사법-탄핵(彈劾)(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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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사필 [記事] : 명종실록 28권/ 명종 17년(1562 임술 / 명 가정(嘉靖) 41년) 1월 14일(기해) 1번째 기사/ 지의금·형조 참판·공조 참판 등에 의망할 사람을 전교하다/ 정청(政廳)에 전교하였다. “지의금(知義禁)에 동지돈령(同知敦寧)【 윤옥(尹玉) .】을 아울러 의망하고, 비어있는 홍문 제학(弘文提學)에는 경력 있는 자[曾經人]【 이양(李樑) 을 가리킨다.】를 아울러 의망하고, 형조 참판에는 공조 참판 【 이탁(李鐸) .】을 아울러 의망하고,【 이양 을 공조 참판에 임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같이 전교한 것이다.】 공조 참판에는 평안 감사 【 이양 .】를 아울러 의망하라.”/ 사신은 논한다. 이를 보건대, 상이 이양 을 총애하여 급히 소환해 들이려는 뜻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윤옥도 빈(嬪)의 아비가 되기 때문에 이렇게 총애를 받았다. 그러니 정사가 한쪽으로 치우쳤음이 드러났다. 원계검(元繼儉)을 판의금부사로,【이것은 특지이다. 원계검이 궁중을 잘 섬겨 궁인(宮人)들이 ‘우리 영공(令公)'''' 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으므로 이토록 총애를 입게 된 것이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그의 문에 글을 써서 붙여놓기를 ‘12칸 높은 집을 가득 채우고는 비로소 초순(初旬)을 바치더니, 3백 명 노비를 얻고 나서 갑자기 숭품(崇品)에 오르더라.[十二間之高樓已盈始呈初旬 三百口之奴婢旣得遽陞崇品]’라고 하였다.】 이윤경(李潤慶) 【 이준경의 형이다. 근후 심중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다.】을 평안도 관찰사로, 윤옥을 동지의금부사로, 강사상(姜士尙)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양 【허황되고 탐욕스러웠으며 권세를 좋아했다. 초친(椒親)으로서 매우 총애를 받아 등제(登第)한 지 8년 만에 갑자기 2품에 뛰어올라 그 위세가 조야(朝野)를 흔들었다. 윤원형과 권력 싸움을 벌여 각각 자기 당파를 세웠는데, 조정의 인사 가운데 염치없이 이욕을 탐하는 자들이 다투어 빌붙어 임금은 고립되고 나랏일은 날로 그러쳐지게 되었다. ○이에 앞서 이양 이 평안도에 지방장관으로 나가기를 청했을 때, 그의 당파 사람들은 그에 대한 임금의 총애가 쇠미해질 것이라고 염려하여 배반하고 떠나는 자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임금의 두터운 총애는 조정에 있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이윽고 그가 다시 조정에 돌아오고 싶다고 청하여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을 공조 참판 겸 홍문관 제학으로,【 이양은 원래 정사룡(鄭士龍)의 문하 출신이다. 정사룡이 문형(文衡)을 맡고 있을 때에 사가(賜暇)의 선발에 외람되이 끼었다가 사람들의 탄핵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자 이양 은 방자하게도 욕설을 하고 성을 내며 그에 대해 철저하게 보복을 했는데, 이렇게 되자 그가 재차 선발 인원에 끼었을 때에는 아무도 감히 힐문하는 자가 없었다. 정유길(鄭惟吉)은 늘 말하기를, ‘문형을 맡을 사람은 따로 있다. 우리들 따위야 당연히 피해 물러나야 한다.’라고 했는데, 그 아첨을 떠는 것이 이러했다.】 이탁을 형조 참판으로, 기대항(奇大恒)을 상호군(上護軍)으로, 이인(李?)을 사헌부 장령으로, 강사필(姜士弼)을 홍문관 교리로, 박근원(朴謹元)을 의정부 검상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7책 28권 5장 A면/ 【영인본】 20책 613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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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사필 [記事] : 명종실록 28권/ 명종 17년(1562 임술 / 명 가정(嘉靖) 41년) 2월 4일(무오) 1번째 기사/ 권철·이몽량·성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상이 어필(御筆)로 권철(權轍)을 의정부 우찬성에 특별히 제수했다.【 권철은 이양(李樑)에게 빌붙은 것을 계기로 단시일 내에 임금의 총애를 얻었기 때문에 이런 임명이 있게 된 것이다.】 이몽량(李夢亮)을 형조 판서로, 원계검(元繼儉)을 지중추부사로, 유창문(柳昌門)을 호조 참의로, 성순(成詢)을 강원도 관찰사로, 고맹영(高孟英) 【얼굴빛이 푸르고 귀기(鬼氣)가 있으며 여우처럼 의심 많은 성격에 시랑 같은 심보를 가진 인물인데, 이양에게 아첨하여 이와 같이 높은 반열(班列)에 발탁된 것이다.】을 첨지중추부사로, 강극성(姜克誠) 【경박하고 강퍅하였다. 재주만 믿고 오만을 떨었으며 주색(酒色)을 좋아하였다. 명절과 조행이 조금도 없었으며 이양 을 노예처럼 섬겨 사류(士類)에선 그를 끼워주지 않았다.】을 사헌부 장령으로, 강사필(姜士弼)을 홍문관 부응교로, 박근원(朴謹元)을 의정부 사인으로,【처음에 박근원 이 홍문관 부응교로 있을 때 응교인 박순(朴淳) 과 함께 임백령(林百齡)의 시호(諡號) 문제를 논의했는데, 이 때문에 장차 극죄(極罪)를 입게 되었다. 그러자 사림(士林)이 떠들썩해지면서 걱정들을 했는데, 박순 은 태연히 동요되지 않고 문을 닫아 걸고 명을 기다렸고, 박근원은 크게 두려워하여 외척과 권귀(權貴)들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형태를 면치 못했다. 조신(朝臣) 가운데 두 사람을 아끼는 자들이 남모르게 찾아와 시호를 다시 고쳐보라고 권하고, 박근원 역시 고치고자 하였으나 박순 은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중서(中書)가 감정하여 ‘충(忠)’의 글자가 안 들어 있다고 고치라고 하자 끝내 어쩔 수 없이 고쳐 ‘충헌(忠憲)’이라고 하여 입계하였다. 상이 전번 시호를 보고는 크게 노하여 중한 형벌로 처리하려고 했는데, 심강(沈鋼)과 이양(李樑)이 그들을 구하고자 손을 써서 단지 파출을 시키도록 명령이 내려졌다. 당초에 심강과 이양이 박순의 고명(高名)을 중히 여겨 그를 강제로 초치하고자 했으나 박순 이 끝내 한번도 가지 않으니 사론(士論)이 흡연히 그를 칭찬했었다. 그러나 심강은 그 사람됨을 중히 여기고 있었던 데다가 박근원이 그를 무척 잘 섬겼던 까닭에 늘 상에게 밀계(密啓)하여 두 사람의 무죄를 강력히 주장했고 상도 또한 윤원형(尹元衡)에게 기만당한 사실을 깨닫게 되어 얼마 안 있어 다시 그들을 거두어 서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박근원은 이양에게 애원하여 이양 이 극력 그를 구했기 때문에 곧바로 높은 관직에 들어가게 되었고, 박순 은 이양 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비록 박근원과 함께 구함을 받았다고는 하나 상이 그가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내보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두 사람의 우열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조덕원(趙德源) 【조잡 비루하며 조행이 없어 사론에서도 치지도외했다. 다만 이양에게 아부하여 단시일 내에 청현직에 올랐다.】을 홍문관 교리로, 구사맹(具思孟)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여 한때의 명성을 얻었으나 식자들은 그가 아름다운 선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7책 28권 9장 B면/ 【영인본】 20책 61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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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470

  예천군 육상인의 집(醴泉郡 陸上人들의 宿願이었던 ''''醴泉 陸上人의 집'''' 竣工 및 入宅式 消息!) [記事] :

  도민체전 및 전국체전 등에서 체육 웅군의 명예를 드높여 온 예천군 육상인들의 숙원사업이었던 "예천군 육상인의 집" 이 완공되어 2009년 7월 15일 정오 동본리 종합운동장 옆 현지에서 입택식을 갖고 육상선수들에게 개방됐다.

  이날 입택식에는 김수남 군수, 최명환 교육장, 정종복 농협군지부장을 비롯한 기관단체장, 관내 각급 학교장을 비롯한 체육교사, 정후섭 예천군육상경기연맹 회장을 비롯한 육상인 등이 참석, 입택을 축하했다.

  김수남 군수는 입택을 축하하는 고사를 지낸 뒤 "어려운 군 재정에도 불구하고 체육웅군의 명예를 대내외에 널리 알려온 예천육상인들의 노고와 앞으로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육상인의 집을 건립하게 됐다"며 "편안하고 안락한 가운데 성적 향상에 최선을 다해 줄 것"을 당부했다.

  왕년의 육상선수 장재근 씨와 대한육상연맹 관계자들이 예천을 방문 입택을 축하했다.

  예천 육상인의 숙원이던 육상인의 집은 김수남 군수가 6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연건평 120평의 현대식 건물을 2008년 7월 착공하여 이날 준공하게 됐다.

  최인해 교사(예천여고)는 "앞으로 육상인들은 육상인의 집 숙소 건립을 계기로 예천 육상이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힘을 모으고 매진할 것을 다짐하고 어려운 재정에도 훌륭한 숙소를 건립토록 지원해 준 김수남 군수께 모든 육상인을 대신 깊은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날 준공된 "예천 육상인의 집"은 세탁과 샤워실 등 각종 편의 시설이 고루 갖추어져 앞으로 육상 꿈나무들의 성적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07-15 오후 1:3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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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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