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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1970:강해원小說家(附예천방문481)
작성자장병창 @ 2009.08.02 07:22:54
  예천의 자랑(1970) : 보문면 간방리 출신 강해원 소설가(附 예천방문 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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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해원(姜海遠) :


  1961- , 보문면 간방리 출신으로 감천면 포리로 옮겨 살았다. 보성(普城)초등, 감천중(甘泉中), 대창고(大昌高), 계명대 졸업, 대창고등학교 수학 교사,

  89년 매일신문사 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96년 영남일보사 제6회 영일문학상 단편소설부문에 작품 <이화령>이 당선되었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이 이르기를, "농촌 청년이 겪는 각박한 현실과 성적(性的), 무속적(巫俗的) 분위기의 교묘한 배합을 통하여 인생사의 한 단면이 거의 신비스럽도록 부각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한내 회원, 예천문화예술단체협의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다.

  (漢川新聞 199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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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해원(姜海遠) [인터넷] : 1961년 10월 23일(양력) 생, 감천면 포리 사람, 소설가 겸 대창고등학교 교사이다.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다. 1979년 대창고등학교 졸업, 1983년 계명대 수학 학사, 경북대 대학원 석사, 1987년 대창고 교사, 1989년 1월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문단 데뷔, 영남일보사 영일문학상(1997)을 수상하였다. 작품으로, 소설 ''''미지의 새''''(1989), ''''영가''''(1991), ''''안개 혹은 그리움에 관하여''''(1994), ''''어떤 생태''''(1994), ''''이화령''''(1997), ''''지나간 시절의 연가''''(1998)가 있다.(jokbo.naver.com 2001-04-25 11: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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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해원(小說家 姜海遠 氏 첫 小說集 ''''이화령'''' 出刊) [記事] : 소설가 강해원(대창고 교사) 씨가 첫 소설집 「이화령」을 도서출판 한빛에서 냈다. 2006년 11월 10일 오후 7시 예천청소년수련관 극장에서 열린 출판 기념회에는 가족, 문우, 지인 등 3백여 명이 참석해 축하했다. 강해원 씨는 대구 매일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으며, 제6회 영남일보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민족작가회의, 한내글모임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예천 `학원사'''', 안동시 각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 신국판 335쪽, 값 1만 원.(醴泉新聞 2006년 11월 14일 21:3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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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해원(逸脫과 回歸의 均衡感 維持 : 小說家 姜海遠(大昌高 敎師) 氏 첫 小說集 ''''梨花嶺'''' 내놔) [記事] : 소설가 강해원(46) 씨가 첫 소설집 「이화령」을 냈다. 고시보다 어렵다는 신춘문예 당선 이후 무려 17년 만에 출산한 자식이다. 이번 소설집에는 신춘문예 당선작을 비롯 탄탄한 구성과 유려한 문체로 짠 7편의 단편이 담겨있다. 2006년 11월 10일엔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이날 강씨를 격려하기 위해 부모님(강대익·신귀분)을 비롯한 가족과 문우, 지인, 지역민들이 행사장(예천청소년극장)을 가득 메웠다. 강씨는 지난 87년부터 모교인 대창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담당과목은 수학. 비논리적인 문학과 논리적인 수학을 상극처럼 여기는 보통사람들에겐 그의 이런 이력이 자못 흥미를 느끼게 한다. 여기에다 유려한 문체가 도드라지는 그의 소설 앞에서 독자들은 또 한번 놀라게 된다. 그러나 그의 유장한 문장은 우리나라의 저명한 작가나 평론가들도 한결같이 인정하는 부분이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제 시간에 출퇴근 하는 (얽매인) 직장생활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게 작가가 되고 싶은 한 이유이기도 했지요.”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작가의 꿈을 키웠다. 대학에 입학해선 도서관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그곳의 책을 몽땅 읽을 요량으로 속독법까지 배웠다. 강씨는 독학(?)으로 소설가가 되었다. 오로지 저명한 작가의 작품이나 각종 문학상 수상작을 섭렵하며 실력을 다졌다. 군 복무 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구 팔공산의 한 암자에서 머리카락이 빠질만큼 글쓰기에 용맹정진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 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분단의 아픔과 치유라는 주제를 다룬 중편소설을 응모, 최종심까지 오르는 저력을 보였다. 그로부터 이태 뒤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미지의 새''''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했다.“사람들과의 어울림 속에서 시(詩)와 소설이 나온다고 봅니다. 학생들 가르치는 보람도 크고…, 제가 몸 담은 한내글모임, 민족작가회의, 예천군배드민턴연합회 등의 소중한 사람들과 숨결을 나누며 사는 게 참 좋습니다.”강씨는 매일신춘문예 당선 후 8년이 흐른 지난 97년 `이화령''''으로 다시 한번 신춘문예(영남일보) 관문을 뚫었다. 이유를 묻자 `나태해지려는 자신을 가다듬으려는 몸짓이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남에게 드러내지 않으려는 조용한 성품 탓에 주위에서조차 그가 소설가란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만큼 그의 소설이 흡인력이 있기 때문이다.“지금의 삶에 충실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는 이야기꾼으로 남고 싶습니다.” 그의 바람은 너무나 소박했다.(醴泉新聞 2006년 11월 23일 15: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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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의 자랑(1214) : 예천 출신 임휘하 초등교장(附 간방 출신 강해원 이화령 출판(2)...축하)(作成 張炳昌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2006-11-15 照會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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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481

  예천군산업곤충연구소(신나는 放學 昆蟲과 함께 즐기자! 醴泉郡昆蟲硏究所 여름放學 昆蟲올림픽 開催) [記事] :

  예천군이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개최하는 "여름방학 곤충올림픽"은 2009년 8월 1일 오전 11시 개막식을 갖고 앞으로 9일까지 곤충연구소 일원에서 체험행사, 부대행사 등으로 나누어 실시되고 있다.

  이날 개막식에는 김수남 군수, 정영광 군의장을 비롯한 군의원, 최명환 교육장, 이현준.윤영식 도의원, 주민 및 관람객 등이 참석하여 김수남 군수 개회사에 이어 참석 내빈들의 개장테이프 커팅 순으로 진행됐다.

  김수남 군수는 개회사를 통해 "여름방학 곤충올림픽은 지난 2007년도에 관람객 62만여 명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면서 막을 내린 곤충엑스포를 기념하고, 새로운 엑스포를 준비하기 위해 개최하게 됐으며 규모면에서는 엑스포에 비해 작지만 내용면에서는 살아있는 곤충을 주제로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알차게 준비했다"며 많은 관람을 당부했다.

  이번 곤충올림픽의 주요 행사로는 8마리의 물방개들이 벌이는 물방개 레이싱,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들이 대결하는 곤충격투대회와 곤충 나무 오르기 대회, 메뚜기들의 멀리뛰기대회 등이 이어진다.

  또, 장수풍뎅이들의 젤리 빨리 먹기, 다트를 던져 숫자의 합산으로 순위를 매기는 곤충 다트, 곤충문제나 난센스 퀴즈를 알아 맞추는 곤충 퀴즈 달인, 생태관 전시곤충을 사진을 이용해 이름을 맞추는 내가 곤충왕 등의 종목이 어린이들의 함성 속에 흥미롭게 진행된다.

  체험행사로는 물을 이용해 곤충판박이를 얼굴이나 팔에 붙여주는 물판박이 붙이기, 양봉 부산물인 왁스를 이용한 왁스양초 만들기, 나무곤충 만들기, 균형 잠자리·균형나비 만들기, 초콜릿과 모양틀을 이용한 곤충 초콜릿 만들기, 바람개비 만들기, 곤충탈 체험 등이 매일 진행되고 있다.

  부대행사로는 제1회 곤충사진촬영대회 입선작이 전시되고, 전국 유치원과 초중학교 재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곤충그림그리기 대회, 코니·페디탈을 쓰고 아이들과 놀아주는 코니·페디탈, 어린이 입장객에게 유충과 수벌 무료배부(매일 500수), 경품추첨, 폰카와 디카 사진촬영 콘테스트가 펼쳐진다.

  곤충연구소 관계자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이번 여름방학 곤충올림픽을 개최하게 됐다"고 설명하고 "어린이들과 온 가족이 함께 신나게 즐길 수 있는 곤충관련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준비한 만큼, 많은 관람"을 당부했다.

  군은 공무원으로 구성된 주차장 안내요원들이 행사장을 순회하며 안내를 맡고 있으며 행사장 곳곳에 각종 편의시설을 설치해 관람객들이 불편함 없이 곤충올림픽을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도록 도모하고 있다.

  한편, 행사장 주변에는 농촌의 싱그러운 자연과 따뜻한 정을 체험으로 느낄 수 있도록 예천농촌교육장(신라식물원.봉서농원.석송골농원.물래실농원 공동)을 운영하여 도시에서 온 어린이들에게 갖가지 농촌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여 인기를 얻고 있다.

  김수남 군수는 행사가 끝난 뒤 관람객들에게 "가족 및 동행들과 추억에 남는 즐거운 시간을 갖고 회룡포, 삼강주막, 천문과학공원, 도효자 생가 등 체험거리와 볼거리가 많은 예천군 관내를 한번 여행해 달라"고 주문했다.

  상리면 고항리 부녀회는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의 식사 불편 해소를 위해 주차장 부근에 식당을 마련하고 산채비빕밤 등 토속 음식을 판매하고 있다.

  (정차모 記者 예천인터넷뉴스 2009-08-01 오후 1:14:51)



  * 2009년 8월 1일 곤충연구소를 가족 8명(炳昌, 春雨, 惠媛, 惠瓊, 東勳, 西永, 晸岸, 勝勳)이 다녀왔다. 동훈(서울 잠실 신촌초등학교 2학년)이 이르기를, "참 재미있었어요"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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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주막(선비들의 숨결이 넘치는 慶北 醴泉 三江酒幕거리 觀光名所로 자리잡아 : 마음의 故鄕, 우리의 情趣를 찾아서) [記事] :

  경북 예천 삼강주막마을 옛 선비들이 과거를 보려 한양을 갈 때 이곳 “삼강주막”들려 술 한 잔에 회포를 풀며 쉬어가던 곳.

  예로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풍류와 멋을 알며 지냈다. 자연이 아무리 험난하고 생활이 고단하더라도 이를 극복하고 만족하며 풍류를 즐겼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고귀한 정신과 삶의 가치를 갖고 있다. 아무리 지금 첨단의 기술과 과학이 발전했다고 해도 삶의 풍요는 과거 선조들보다 반드시 좋다고 할 수 없다.

  선조들은 풍류를 즐기고 현실 생활에 대해 감사 할 줄 알았다. 이에 선조들의 흔적이 자연과 함께 진하게 배어 있는 곳을 찾아본다.

  그 첫 번째로 도란도란 모여앉아 가슴 한 켠에 따뜻한 함이 채워져 있는 그리움의 고향, 경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주막마을을 지난주 돌아봤다.

  이곳은 아직도 전통의 예절과 풍습이 숨쉬고 있는 천혜의 고장이다. 삼강주막마을은 칠백리 낙동강 물결이 내성천과 금천이 만나 어우러지는 곳이다.

  삼강나루 길목을 지켜 앉고 있는 곳이 삼강나루이다. 옛 그 시절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선비들과 지연 속에 쉬어가는 장사꾼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던 그리운 곳이다.

  어떻게 보면 영남지역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다. 당시에는 뱃길을 건너려면 이곳에 머물다가 뱃사공을 통해 낙동강을 건너 한양으로 가야 했다.

  지금이야 왕복 4차선 다리가 놓여져 있어 쉽게 낙동강을 건널 수 있었으나 당시에는 험난한 지역 이였을 것이다. 이곳 삼강주막 마을은 2008년 마을주민들이 힘을 합해 관광지로 탈바꿈시켰다.

  따뜻한 정취가 가득한 곳으로 찾는 사람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요즘도 평일에는 하루 평균 200~300명,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400~500명이 찾고 있다.

  서울, 부산, 충청권 등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오고 있다. 이곳에 오면 선조들이 머물며 지내온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세월의 흐름을 잊을 수 있는 것이다.

  초가삼간 집에서 선조들의 생활 모습 그대로 앉아서 빈대떡에 막걸리를 마실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이곳을 관광지로 만든 이유는 이렇다. 이곳이 낙동강 나루터 옆으로 우리나라 마지막 주모가 있던 곳이다.

  이를 모태삼아 소위 주막거리를 복원 한 것이다. 낙동강 삼강에는 1934년까지 보부상과 사공들의 숙소가 있다. 당시 삼강은 서울로 통하는 길목으로 사람과 물류의 이동이 활발했다.

  안동과 예천, 봉화, 영주, 청송, 영양 등 경북 북부지방은 물론 영월 등 강원도 남부지방의 길손과 보부상까지 삼강을 찾았다. 장날이면 나룻배가 30여 차례나 오갈 만큼 분주했다.

  밤이 되면 서로 얼굴은 모르지만 호롱불 아래에서 길과 마을 정보, 상거래 정보를 주고받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삼강나루의 옛 모습은 1934년 대홍수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2008년 지금의 삼강문화마을로 다시 태어났다.

  주막 바로 뒤뜰에는 회나무가 있다. 바로 장터다. 소금, 쌀, 잡곡 등의 물물교환이 회나무 아래에서 이뤄졌다. 나루에는 나룻배와 농선이 운행됐다.

  나룻배는 길손과 보부상이, 농선은 쌀, 잡곡, 소 등 가축이 단골이다.

  회나무 바로 옆에는 단단한 돌덩어리가 있다. 무게가 120kg나 되는 들돌이다. 나루터에는 짐을 싣고 내리는 인부가 필요한데, 이 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품값이 정해졌다.

  힘이 장사급은 돼야 배에 짐을 나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옛 낙동강 소금배는 삼강이 주 종착지가 아닐까 여겨진다. 강의 수량이 풍부하면 안동이나 내성천을 거쳐 영주에까지 소금배가 운행했지만 강의 수량이 적었을 때는 안동이나 영주 땅에서 내려온 나룻배가 삼강에 정박 중인 소금배에서 물물교환을 했을 것이다.

  요즘 삼강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한다. 막걸리도 한 사발할 겸 삼강에서 선조들의 정취를 느껴보기 위함일 것이다. 삼강마을은 1300리 낙동강 물길이 내성천과 금천을 만나 어우러진 곳이라 해서 삼강이라 불리어 졌다.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져 예로부터 이곳은 서울로 가는 길목으로 문경새재를 가기 전에 이곳 삼강나루터를 꼭 거쳐갔으며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소금배와 집산된 농산물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 삼강주막은 봇짐장수, 방울장수로 붐볐다 한다.

  1970년대에 도로가 발달하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고 주막과 주모는 기억에 멀어져 갔지만 주모는 2005년 90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70년 간 주막을 지켰다. 마지막 주모였던 것이다.

  주모였던 유옥년 할머니가 세상을 뜬 후 주막은 한동안 주인을 찾지 못하다가 경상북도가 그 문화·역사적인 가치를 인정하여 2005년에 민속자료 134호로 지정하였으며, 2007년에 1억 5000만 원의 예산으로 허물어지던 스레이트 지붕 대신 짚단을 얹은 초가지붕으로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이와 함께 보부상 및 사공숙소를 복원했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우리나라 마지막 주모가 생활하던 주막이다. 완전 해체 복원을 했는데 당시 쓰던 목재 등을 가능한 사용해 원형에 가깝도록 했다.

  이곳 주막을 보면 가치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툇마루에다 부엌, 다락 등 작지만 아기자기한 주막이 감탄을 짓게 한다. 부엌에는 모두 4개의 문이 있는데 이는 어디서든지 쉽게 술상을 내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특히 부엌 벽에는 당시 주모가 술손님들에게 외상을 주던 장부가 새겨져 있다. 흙벽돌에 선을 그어 외상값을 표시했는데 이곳에는 일반 손님과 뱃사공 등으로 나눠 표시했다.

  벽이 모자라 집 벽에도 표시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복원을 하면서 당시 벽에 그어진 외상값 표시를 원형을 훼손하지 않은 상태로 복원, 눈길을 끈다.

  이 주막 바로 옆 수령 500년이 넘은 회화나무(보호수 제11-27-12-23호)가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노인들의 얘기로는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 낙동강의 범람으로 이 나무 중간, 구멍이 뚫린 곳까지 물이 차올랐다는 증언이 있다.

  또 다른 나무에 관한 얘기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상주군에 있는 한 목수가 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면 사고도 나지 않고 큰돈을 번다하여 연장을 가지고 이 나무를 베려하므로 사람들은 마을을 지키는 영험스러운 나무라 하여 베지 못하게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나무그늘이 좋아 잠시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백발을 날리는 노인이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서 “만약 이 나무를 해치면 네가 먼저 죽으리라” 하므로 꿈에서 깨어나니 하도 생생하여 식은땀을 흘리며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혼비백산 달아났다고 한다.

  2008년 삼강마을 복원을 하면서 단순히 주막만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 당시 보부상숙소와 사공숙소 등도 함께 만들었다. 넓은 주차장, 화장실 등 편의시설도 갖췄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불편이 없도록 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옛날 그대로 막걸리 5000냥, 지짐이 3,000냥, 두부 2,000냥, 주모 한 상 주이소는 12000냥으로 표시돼 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정취를 함께 느끼게 한다. 가족과 함께, 아니면 친구와 함께, 연인과 함께 편안하게 이곳을 찾아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볼 만하다.

  시대를 초월해 당시 모습을 잠시나마 생생하게 다가온다. "한양을 가기 위해서는 이곳 낙동강을 배로 건너야 했는데 당시 우리 선조들의 삶의 모습을 지금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217번지 삼강마을 정재윤(58) 이장은 이곳에 대한 자랑이 대단하다. 삼강주막을 전국의 최고 관광지로 성공시킨 정재윤 이장이 향후 발전계획을 말하고 있다.

  그럴 것이 이곳은 100여 년 전 선조들의 숨결이 생생하게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주막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정 이장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주는 문화관광해설사, 녹색농촌체험마을 추진위원장도 맡고 있다. 고향이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정취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기 때문이라는 표현이다.

  정 이장은 “주민들과 행정기관의 도움으로 우리나라 마지막 주막이 있던 것을 자산으로 집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고 옛 정취를 살려 관광자원화 했다”고 말했다.

  물론 여기에는 고귀한 문화자산을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널리 알리고 느껴보도록 하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2008년 복원을 하면서 어려움도 있었으나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노력한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고 강조 했다.

  정 이장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흐뭇해 하고 있다”며 “과거의 모습을 통해 지금을 돌아보는 기회가 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 이장은 “이곳이 고향으로 귀중한 자산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보람을 느낀다”며 “새로운 시각, 새로운 생각은 과거를 오늘에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이곳 삼강마을을 조성하는데 어려움도 많았으나 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의식이 오늘을 있게 했다고 말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며 더 변화된 삼강마을이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정 이장은 대학시절을 외지에서 보내다가 20여년 전 고향으로 돌아와 생활하고 있다. 오는 9월 처음으로 주민과 관광객들이 참여하는 삼강주막축제를 계획하고 있는 정 이장은 오늘도 바쁘게 곳곳을 누비고 있다.

  (김석쇠 記者 韓國디지털뉴스 2009-07-31 11:4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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