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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1987:권동칠社長
작성자장병창 @ 2009.08.24 06:37:39
  예천의 자랑(1987) : 용문면 상금곡리 출신 권동칠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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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동칠 :


  1955- , 용문면 상금곡리 출신, 용문초등, 대창중, 73년 대창고(18회), 82년 동아대 경제학과 졸업,

  부산시 서구청 수도과 근무, 82년 (주)세원 해외영업부 취업, 88년 동호실업 창립, 91년 부산시 사상구 삼락동의 (주)성호실업 대표이사 사장이다.

  성호실업은 세계 등산화 시장 5대 메이커이다. 94년 OEM(주문자 상표부착) 방식에서 탈피, 브랜드인 ''''트렉스타''''를 개발하여 내수 등산화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이 외의 고유 브랜드는 생활 전반에 이용되는 생활 레포츠화인 ''''레저타임''''과 ''''하이퍼그립''''이다. 하루에 2천 켤레를 생산한다.

  89년 5백만 불 수출탑 수상하였고, 중국 텐진에 공장을 세워 96년도에 2천만 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리고, ''''트렉타''''라는 고유 상표(商標)로 국내외 시장을 개척하였다.

  97년 자랑스런 신한국인상 수상, 97년 트랙스타 설립, 97년 금탑산업훈장 및 5천만 불 수출탑 수상, 99년 7천만 불 수출탑 수상 및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1999년 11월 14일 MBC TV ''''성공시대'''' 프로그램에 소개되었다. 2000년 제36회 무역의 날에 7천만 달러 수출탑을 수상하였다.

  1996년 5,500만 달러 수출에 이어 1997년에는 1억3천만 달러를 기록해 1년만에 100%가 넘는 놀라운 성장을 이룩했고, 최악의 IMF 경기인 1998년에도 15%가 증가한 1억5천만 달러를 무난히 달성하였다.

  이는 인력 양성 및 끊임없는 신기술 개발을 통해 고품질의 신발을 생산한 때문이다. 그 결과 완전 방수가 되면서 흡습 및 투습, 통풍효과가 뛰어난 고어(Gore) 텍스 소재를 사용한 등산화를 개발, 세계 시장에서 바이어들의 찬사를 받았고, 정상급 산악인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1998년 3월에는 무게가 290g에 불과한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등산화 ''''윙''''을 개발, 국내외 시장에 선보이는 저력을 과시했다. 사장실이 따로 없는 회사, 2평 남짓한 고객상당실이 바로 사장실이며 일손이 부족할 때는 사장도 직접 제품을 실어나르며 직원들과 호흡을 같이한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창업 10년만에 (주)성호실업을 세계적인 등산화 메이커로 이끈 원동력이다.

  (每日新聞 1996.6.18, 醴泉新聞 1997.1.3 1999.11.11 2000.1.13 2000.11.9, 每日經濟 20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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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동칠(성호實業 권동칠 社長 : 形形色色 ''''맞춤신발''''로 이끈 신발革命) [記事] : 대표적인 사양업종인 신발산업에 겁없이 뛰어든 중소기업인이 있다. 은행빚 한 푼 얻지 않고 공장을 돌려 1억4000만 달러어치의 신발을 수출한다. ''''신발의 힘''''은 창의력에서 나온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까지는 한국 신발산업의 최고 전성기였다. 당시 신발산업의 메카로 불리던 부산에서는 500여 개에 달하는 신발공장이 엄청난 수출 물량을 소화해 내느라 밤새 불야성을 이뤘고, 각국 바이어들의 발길이 끊어질 날이 없었다. 이들 업체는 해마다 40억 달러어치가 넘는 신발을 해외로 수출, 세계 신발 생산량의 70%를 차지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며 인건비가 급상승하자 OEM(주문자상표 부착생산)에만 의존해왔던 많은 신발업체들이 하나 둘 문을 닫았다. 어렵게 살아남은 기업들도 인건비가 싼 대만이나 중국으로 공장을 옮겨 갔다. 그 결과 현재 부산에 남은 신발업체는 80여 개. 총 수출액은 8억 달러, 세계 신발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0%에 불과하다. 나머지 90% 가운데 대부분을 대만이 생산하고 있다. 이렇 듯 우리 신발산업의 사양화가 극명해진 지금,“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이 바닥에 뛰어든 작은 거인이 있다. (주)성호실업의 권동칠(權東七·44) 사장이다. 권 사장은,“인류가 존재하는 한 신발산업은 사양산업일 수 없다. 신발 수출국의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겠다”며‘21세기 신발혁명’을 야무지게 다짐한다. 부산시 사상구 삼락동 388-2번지 1000여 평 부지에 자리한 성호실업 마당 앞에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데도 수입해온 원단을 하역하거나, 각국으로 실려나갈 수출용 신발을 싣는 컨테이너 차량들로 붐볐다. 사무실이 있는 4층짜리 붉은 벽돌건물의 2층과 4층에선 중국 공장에서 재단해 온 신발 밑창들이 윗부분과 부착돼 완제품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등산화만도 하루에 2000켤레. 같은 크기의 컨테이너에 컬러 TV를 가득 실은 쪽보다 신발을 실은 쪽의 수출 가격이 더 높다고 한다. 신발의 부가가치가 그만큼 높다는 얘기다. 성호실업은 88년 창업이래 신발 외길을 걸었지만 지금껏 실패를 맛보지 않고 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한 푼의 부채도 없이 출발, 설립 첫해에 500만 달러 수출탑을 안았고, 이듬해엔 100% 성장해 1000만 달러 수출탑을 받았다. 그 후 매년 100%를 넘는 성장세를 과시한 성호실업은 누구랄 것 없이 구조 조정에 들어간‘IMF 시절’에도 전과 다름없이 신입 사원을 뽑았다. 그런 때일수록 오히려 훌륭한 인재를 뽑을 수 있는 적기라고 여겨 적극적인 공격 경영을 펼친 것. 성호실업의 지난해(1998년) 수출액은 1억4000만 달러. 회사 규모는 커졌지만 아직도 은행 부채비율은 0%다. 설립 10년 만에 한국 신발업계에서 1, 2위를 다투는 선두 기업으로 부상했다.

  권동칠 사장은 55년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2남 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줄줄이 다섯이고, 그는 여섯 번째다.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한 명씩 있다. 당시 이들 열 식구의‘밥줄’은 논 여섯 마지기가 전부였다.“하루 세 끼를 먹어 본 기억이 없어요. 10시 반쯤 해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지요. 밥도 고구마나 감자가 주였고, 사이사이에 보리나 쌀이 몇 톨씩 섞인 정도였어요.”학교에 도시락을 못 싸가기는 다반사였고, 수학여행도 가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런 가난 속에서도 그의 어머니는 장남만은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그를 대창중학교와 대창고등학교에 보냈다. 대신 딸들은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그나마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해 걸핏하면 집으로 쫓겨오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이집저집을 돌며 돈 빌리기에 바빴다.“수업료를 빌리러 스물여덟 집을 돌아다닌 날도 있어요. 이미 돈을 빌린 적이 있는 집은 아직 갚지 못해 염치가 없어 못 가고, 안 빌린 집만 골라 다녔죠.”가난과 굶주림에 지친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형편을 원망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주어진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권씨는 그렇 듯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일 밖에 몰랐던 20대] : 수업에 자주 빠진 데다 집에서도 차분하게 공부할 여건이 못 된 탓에 기초가 부족했던 그는 삼수 끝에야 어렵사리 동아대 경제학과 야간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겨우 대학에 들어가고 보니 이 번엔 학비가 문제였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다녔는데, 밤에 공부할 시간을 내려면 공무원만한 직업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부산지방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첫 발령지는 부산시 서구청 수도과. 여기서 몇 달 일하다 동사무소로 옮겨 2년 간 근무했다. 그 때 봉급으로 자신의 등록금을 댄 것은 물론, 대학입시에 떨어진 동생을 데려다 재수를 시키기도 했다. 형의 뒷받침 덕분에 동생은 경북대에 진학했다. 그는 3학년을 마치고 입대하면서 사표를 내고 공무원직을 그만뒀다. 말단 공무원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는 데다, 무엇보다 고리타분한 공무원 노릇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대 후 남은 대학생활을 마친 그는 중견 신발업체인 (주)세원에 해외영업 공채 1기생으로 취업을 했다. 신발과는 이렇게 첫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이 곳에서,“정말 후회없이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5분 대기조 돌격대원 같았죠. 자고 나면 총알같이 튀어나와 7시면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근무 시작 전에 외국어도 배우고, 운전도 배우면서 스스로를 계발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근무가 끝난 후에는 거의 매일 바이어를 접대하느라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갔기 때문에 시간을 낼 수가 없었거든요.”그 후 6년 반 동안 그는 일 말고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바깥에서 여자 만날 시간도 없어 구내 식당에서 눈이 맞은 영양사와 결혼했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끌려 결혼을 마음먹었다는 아내 성정임 씨(42)는, 결혼하면서 회사를 그만둔 후 유일한 대화 상대인 남편이‘하숙생’이 돼버리자 말을 잃어버릴까 봐 혼자서 책을 소리내어 읽기까지 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좋아 선택한 남편에게 일 좀 그만하라고 불평을 할 수도 없었다. 권씨는 철저한 영업맨이었다.“업무에 관한 한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고 다그쳐대니까 나 때문에 일 못하겠다고 그만둔 직원도 많았어요.”5%를 더 받아내려고 바이어들과 몇 시간씩 붙어 싸웠다. 회사를 위한 일이라면 매사에 그렇게 최선을 다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사장은 권씨의 능력을 인정, 그가 소신을 펼 수 있도록 누구에게보다도 많은 배려를 해줬다. (주)세원은 그가 입사할 당시 직원 1000명에 수출액이 1000만 달러 정도였지만, 그가 회사를 나올 무렵엔 직원이 4000명, 수출액이 1억2000만 달러에 이르는 큰 회사로 성장해 있었다.

  [외국 업체들, 잇따라 사업 제의] :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서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철저한 그에게 어느 날 거래처였던 영국 등산화 업체 하이텍사(社)가 함께 회사를 설립하자고 제의해 왔다.“일언지하에 거절했어요. 한창 회사도 커나가고 영업 책임자로서 일에 재미를 느끼던 때라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요. 게다가 그 때 거래하던 바이어 중에 하이텍은 그다지 비중 있는 회사도 아니어서 마음을 두지 않았죠.”그러나 하이텍의 권유는 끈질겼다. 한국 업체들의 임금이 상승해서 제대로 신발을 만들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신발에 대한 모든 노하우를 가진 권씨를 붙드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하이텍은 30만 달러를 회사 설립 자금으로 무상 지원하겠다며 더욱 적극적으로 나왔다. 결국 그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거의 떠밀리다시피 독립해 나오게 됐다.“회사를 차린다고 하니까 세원에서 뒷조사를 시켰나봐요. 그 때만 해도 영업하던 사람이 공장을 차려서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혹시 다른 사정이 있나 싶었던 거죠. 뒤에 내가 정말로 회사를 차린다는 걸 알고 나서는‘빨리 망하고 돌아오라’고 하더군요.”그 때껏 모아둔 전재산 3000만 원을 공장 전세금으로 걸었다. 하이텍이 준 자금이 그 때 우리 돈으로 2억 5000만 원쯤 됐는데, 이런저런 생산 설비를 구입하는 데 1억7000만 원을 쓰고, 8000만 원은 은행에 예치했다. 88년 사무직 6명, 생산직 60명의 직원들과 공장문을 열었다. 작은 회사였지만, 처음부터 부채 없이 사업을 시작한 덕분에 물건을 만들어 납품한 만큼 이익금은 그대로 은행계좌에 입금됐다.

  회사는 이후 5년 간 해마다 100%씩 성장했는데, 그 사이에 공장에 세 차례나 불이 났다. 92년의 첫 화재 때는 창고가 불타 2억 원의 피해를 보았고, 그 이듬해엔 쓰레기장에 불이 나면서 건물 일부를 태웠다. 그 몇 달 후에 다시 큰불이 났는데, 이 때 하역을 기다리고 있던 신발들을 고스란히 태워 5억 원이 넘는 손해를 봤다. 권 사장이 유럽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공항에 내려서 회사에 별일 없느냐고 전화를 걸었더니 불이 났다고 해요. 헐레벌떡 뛰어와 보니 공장 2, 3층이 모두 탔는데, 납품할 흰 운동화들이 모두 새카맣게 타 재로 변해 있더군요.”출장길에 동행했던 아내는 타버린 공장이 눈에 들어오자 그 자리에서 두 다리를 뻗고 대성통곡을 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소매를 둥둥 걷고 잿더미가 된 신발들을 치우고 있더란다.“이미‘상황 끝’인데 뭘 어쩌겠습니까. 이럴 때는 지금의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게 빨리 수습하고 새 출발하는 방법 밖엔 없어요.”권 사장의‘성공 비결’가운데 하나는 이처럼 위기와 시련이 닥쳐왔을 때도 절망하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곧바로 이를 뛰어넘을 길을 모색하는 태도에 있다. 매사를 이처럼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헤쳐가는 사람에겐 하늘도 길을 열어주는 모양이다. 그 해(1993년) 5월 스키 전문업체인 미국의 K2사 바이어가 찾아와 자신들이 개발 중인 인라인 스케이트(일자형 롤러스케이트)를 성호실업과 함께 만들고 싶다고 제의했다. K2사가 유수의 신발업체를 제쳐놓고 성호실업을 택한 것은 일찍부터 성호의 등산화 제조 기술을 눈여겨봤기 때문. 권 사장은 그 무렵 시판되던 일자형 롤러스케이트들이 모두 스키 부츠처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딱딱하고 무거운데다 공기도 잘 통하지 않아 발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고, 성호가 만들던 경등산화 재질을 이에 접목시키자고 제안했다. 시험삼아 플라스틱을 경등산화 재질로 바꾸고 내피를 없애니 신발이 훨씬 가벼워진 것은 물론, 통풍도 잘 되고 발이 편했다. 결과에 흡족한 K2는 즉각 권 사장과 계약을 체결했다. 제품은 성호가 독점 공급하기로 했다. 권 사장은 이 기술로 국제특허를 냈고, 그 때껏 꾸준히 성장해온 성호실업은 K2에 인라인 롤러스케이트를 독점 공급하면서‘수직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독자 브랜드‘트렉스타’개발] : 성호의 기술로 만들어진 인라인 스케이트는 생산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국내 공장만으로는 밀려드는 주문량을 제때 대기 어려워지자 95년 중국 톈진(天津)에 대지 8000평, 종업원 2500명 규모의 공장을 세웠다. 현재 K2의 인라인 롤러스케이트는 세계 롤러스케이트 시장 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있다. 공장 곳곳을 구석구석 보여주던 성호실업의 홍보담당자는 단 한 곳만은 외부인 접근 금지 구역이라며 출입을 막았다. 개발실이었다. 인라인 스케이트 기술을 개발, 관리하는 방이라고 했다. 미국의 K2 본사 직원들이 제품의 기술 보안을 위해 그 방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현재 성호실업은 매출의 80%를 K2의 인라인 롤러스케이트로 올리고 있다. 창업 계기가 된 하이텍 제품 생산은 5년만인 93년에 그만뒀다.“노사 분규가 심화되면서 인건비가 해마다 가파르게 올라갔죠. 우리 회사도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이텍 제품은 중급이었는데, 임금이 계속 높아지다 보니 우리도 하이텍도 모두 타산이 맞지 않았어요. 그래서 생산 기지를 인건비가 싼 인도네시아로 옮겨가게 하고, 우리가 지원받았던 장비와 기술도 모두 이전해줬습니다.”하이텍이 철수한 후 성호실업은 새로운 변화를 꾀하게 된다. 자체 브랜드 개발이었다. 94년 권 사장은 자체 브랜드를 선보이면서 OEM에만 의존해왔던 회사 경영 형태를 새로운 생산 체제로 전환시켰다. 이 브랜드가 바로‘트렉스타(TREKSTA)’. 트렉스타는‘TREK(여행)’과‘STAR(별)’의 합성어로,‘험난한 산행을 할 때나 눈 위를 달릴 때 길을 밝혀주는 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당시 인건비 상승으로 외국 기업들이 임금이 싼 대만이나 동남아 국가로 하청생산 공장을 옮기자 신발업체들은 하루에도 몇 개씩 사라져갔다. 이처럼 신발산업은 이제 사양길에 들어섰다고 모두들 물러날 때, 권동칠 사장은 오히려 더 과감한 투자를 통해 한 발 앞으로 나선 것이다. 그는 자체 브랜드를 만들되 특수화 분야를 집중 공략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확신을 갖고 연구 인력을 집중 투입, 질 좋은 등산화와 스노보드화를 만들어냈다. 스노보드화의 경우 그 전까지는 안쪽과 바깥쪽이 분리된 투피스 구조로 되어 있어 신고 벗기가 불편하고 손질과 보관 또한 어려웠다. 권 사장은 이런 단점을 보완, 원피스 형태의 스노보드화를 만들었다. 투피스 형태를 불문율처럼 고수하던 당시 스노보드화업계에선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은 전세계 시장의 60%가 원 피스 형태로 바뀌었다. 성호의 스노보드화는 일본의 스키용품 전문업체인 나라스포츠가 판매를 대행하고 있는데, 일본 시장의 20%를 장악하고 있다. 새로운 개념의 제품 개발을 선도해온 권 사장은 완전 방수가 되는 등산화인 고어텍스도 국내 업계 최초로 만들어냈다. 고어텍스 개발은 중(重)등산화를 경(輕)등산화로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현재 국내 등산화 생산업체는 10여 개사. 그 중 트렉스타의 등산화 점유율은 50% 정도다. 다른 등산화에 비해 값이 비싸다는 소비자들의 불만이 있지만 신어본 사람들은 다시 찾는다고 한다.

  [꿈에도 신발만 생각한다] : 성호에서 생산하고 있는 등산화는 모두 50여 종. 그 중 30여 종이 국내에서 시판된다. 트렉스타라는 이름으로 생산되고 있는 제품은 등산화, 스노보드화, 스케이트화, 샌들 등인데, 수출이 30%, 내수가 70%를 차지한다. 수출국은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일본 등 10여 개국. 앞으로 30여 개국으로 늘려 나갈 계획이다. 1998년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자 성호실업은 금강산 제일봉인 비로봉의 이름을 딴 등산화‘비로봉’을 내놓았다. 가격을 기존 제품들보다 저렴한 6만 원대로 낮추고, 금강산 관광객 중에 고령자가 많다는 사실을 감안해 신발 무게도 켤레당 640g으로 가볍게 만들었다.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아 금강산 관광객의 20%가 이 신발을 신었다고 한다. 권 사장은 트렉스타가 고가여서 중급품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97년에는‘레저타임’이라는 중저가 상품을 개발했다. 권 사장이 여느 중소기업인과 달리 실패를 모르고 성장을 거듭해온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해수욕장에 피서 가도 물에는 들어가지 않고 사람들 발만 살펴보다 오지요. 달리는 기차 바퀴를 보면 저 모양을 어떻게 신발로 옮겨 볼까, 절에 가면 탱화의 색채와 문양을 어떻게 신발에 담아볼까 하고 생각합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물을 신발과 결부시킵니다. 그러다 보니 신발만 잔뜩 나오는 꿈까지 꿔요.”권 사장은,“신발사업의 관건은 창의력인데, 이 창의력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아이디어를 낚아챌 준비가 돼 있을 때 살이 붙는다”고 말한다. 그는 어느 날 세 살짜리 조카의 발이 자라 얼마 전에 새로 산 신발을 신을 수 없게 된 것을 보고 신발도 발에 따라 커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궁리하게 됐다. 신발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에 사이즈를 조절할 수 있는 장치를 달면 가능할 것 같았다. 이 신발은 연구단계에 있는데, 내년(2000년) 봄쯤이면 시판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개발 중인 제품은 왼쪽과 오른쪽 모양이 다른 신발이다. 따로 놓고 보면 전혀 다른 짝 같지만 함께 놓으면 잘 어울리는 한 켤레의 신발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옷은 좌·우가 달라도 전체적으로는 잘 어울려 보이는 데서 착안한 아이디어라고 한다. 권 사장은,“끊임없는 연구와 개발이 뒤따르지 않으면 가뜩이나 여건이 좋지 않은 신발산업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성호실업은 매년 매출액의 5∼10%를 연구개발비로 지출한다. 98년 정식 연구소 등록을 마친 성호실업연구소에서는 40명의 연구원들이 매년 두 종류 안팎의 새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현재 연구 중인 가장 큰 프로젝트는‘맞춤신발’.

  [맞춤신발의 대중화] :“4000만 국민의 발 모양은 모두 다릅니다. 칼처럼 길쭉한 발이 있는가 하면, 마당쇠 발처럼 넓적하고 뭉툭한 발이 있고, 발바닥이 편평한 발이 있는가 하면 오목한 발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팔리는 신발들은 발 모양은 고려하지 않고 단지 사이즈만 달리한 것이에요. 그러니 발이 편할 리 없죠. 이제는 각자 특유의 발 모양에 맞는 신발을 만들어 주자는 겁니다.”맞춤신발이란, 매장에 온 소비자들의 발 모양을 컴퓨터로 스캐닝해서 공장으로 전송하면 24시간 안에 제품을 만들어 48시간 안에 소비자들이 신발을 받아 신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 캐주얼화를 만드는 영국의 클라크사나 골프화를 만드는 풋조이사가 이런 맞춤신발을 생산하고 있지만, 가격이 켤레당 1000달러 정도로 매우 비싼데다, 제작과 배달에 소요되는 기간도 2주일이나 돼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것. 권 사장은 이런 단점을 없애 값은 100달러 미만으로 하되 이틀 안에 소비자에게 택배가 가능한 맞춤신발을 대중화시킬 생각이다. 성호의 현재 기술력으로는 정상적인 발 모양을 가진 사람을 위한 맞춤신발은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사고를 당했거나 날 때부터 기형적인 발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는 아직 연구할 여지가 있다고 한다. 권 사장은 이에 대한 연구가 끝나는 내년(2000년) 상반기에는 소비자들이 자기 발에 맞는 맞춤신발을 신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제품은 등산화에서 평상화까지 어떤 신발이든 다 가능하다는 것. 그는,“맞춤신발의 대중화는 신발산업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 성호실업에는 맞춤 신발 기술과 관련한 계약을 맺으려는 외국 바이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권 사장은 맞춤신발 시대가 열리는 21세기에는 1조 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며, 이에 대비해 중국 톈진에 대지 1만5000평, 직원 2500명 규모의 제2공장을 건립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권 사장은 언제나 자신이 진두에 나서 회사를 이끌었다. 직원들은 그의 뒤를 따라가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큰 방향만 제시하고 직원들이 스스로 힘을 모아 회사를 꾸려가게 유도한다. 그랬더니 혼자 해왔던 과거 10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힘이 느껴진다고 한다.“지금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권 사장. 회사가 성장해도 신발산업 바깥으로는 결코 눈을 돌리지 않겠다는 그는 두 개의 꿈을 갖고 있다. 자식과도 같은 트렉스타를 국제적인 명성의 브랜드로 키워내는 것, 그리고 잃어버린 세계 최대 신발 수출국의 명예를 되찾는 것이다. 꿈을 현실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노력하면 문이 열리고 길이 보인다’는 그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곽희자 自由寄稿家 新東亞 1999-10-01 17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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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동칠(나의 事業이야기 : 권동칠 성호實業 代表) [記事] : 무엇이든 재밌고 즐겁게 하자 나는 경북 예천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시절 모든 가정이 그랬겠지만 특히 우리 집은 끼니를 잇기 어려운 손꼽히는 빈농 중의 하나였다. 학교(대창중)에 수업료를 납부할 때면 모친이 온 동네를 돌며 돈을 꾸러 다니실 정도로 궁핍하고 어려운 생활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굳이 빈농이었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내 성격에 관한 부분을 얘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원래 성격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라 가정이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그늘지게 생활하지는 않았다. 끼니를 거르거나 학비를 늦게 내도 그렇게 기가 죽어지내지는 않았다. 모두들 가는 수학여행에 혼자 빠져도 우울해 하거나 기가 꺾이지 않았다. 그러한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이 사업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런 힘든 시절에도 모든 것이 즐겁고 재미가 있었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 때문에 모든 것들에 항상 재미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20리 길을 걸어 등교를 하다 보니 매번 지각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각을 해서 벌을 받을 때도 그 나름으로 재미를 느낄 정도로 재미있는 유년을 보냈다.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에 나는 별로 특별한 학생이 아니었다. 특징이 있다면 전교생 중에서 지각을 가장 많이 하고, 공부는 중간에서 약간 밑을 맴도는 수준이었다. 특별하게 잘 하는 것도 없고 주목도 받지 못하는 학생이었던 것이다. 특히 수학에는 젬병이어서 시간표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던 수학시간을 아주 어렵게 보냈었다. 매 번 수학 선생님으로부터 매를 맞아야 했 는데 나중에는 너무 맞아서 종아리에 고름이 생길 지경이었다. 매번 맞으면서 배웠지만 맞을수록 성적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수학 과목에 대한 싫증만 늘어갔다. 그렇게 맞으면서도 성적이 향상되지 않았던 것은 내 고집이 너무 세거나 수학 선생님의 교육 방법이 틀렸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또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은 세상에 대한 겁이 별로 없었다. 중3 때 친구 두 명과 무작정 상경한 적이 있었다. 부유한 편이었던 친구의 라디오를 팔아 상경 여비를 마련했지만 말 그대로 `계획없는 상경''''이었기에 서울 생활은 엉망이었다. 좋게 말한다면 그 시절부터 세상 살이에 대해 자신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시공 중이던 제3한강교의 일용 잡부로 일했는데 재밌는 시간을 보냈었다. 당시 시골에서는 먹기 어려웠던 빵으로 끼니를 떼우고, 매일 받는 일당으로 한강의 모터 보트를 타곤 했다. 밤이면 백사장에서 잠을 자다 추워지면 공사장 주변의 굴뚝에 들어가 추위를 피해 잠을 자곤 했다. 그렇게 두 달을 보내고 잡혀서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내려와서는 매일 반성문 쓰는 생활이 이어졌다. 매일 2만 자의 반성문을 써야 했는데 모두 다른 내용으로 쓰자니 여간한 고역이 아니었다. 차라리 맞는 것이 휠씬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고등학교(대창고)에 진학해서도 생활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고 보통의 학생으로 성적은 중위권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예비고사가 있었다. 대입 본고사에 응시하기 위한 관문이었다. 주위에서는 모두들 내가 예비고사에 떨어질 것이라고 했지만 암기 과목을 중심으로 겨우 턱걸이로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비고사 합격 후 2년이 지나서야 동아대학교 경제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에 겪었던 수학 때문에 수학과는 전혀 무관한 과라고 믿고 입학했던 경제학과에서 나는 절망에 빠져버렸다. 달리 경제학에 흥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단지 수학과 관련된 과목이 없다는 생각으로 진학한 학과였는데 경제수학 통계학 등이 떡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수업에 흥미를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수업보다는 학생회 일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됐다. 학생회장을 하며 입대 전까지 놀기에도 바쁜 대학 시절을 보냈다. 이제 와서 회고해 보면 그 시절을 통해서 리더쉽을 길렀던 것 같다. 조금 늦은 시기에 군대에 입대했지만 군생활에 굉장히 적응을 잘 했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 덕택에 군생활을 어렵게 하지 않았다. 단체기합을 받거나 힘든 훈련 속에서도 나는 즐겁고 재미있게 생활했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는 식의 무료하고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활동적으로 군생활에 임했던 것이다. 비록 지나간 시간이고 성격에 따른 문제이기도 하지만 모든 일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재미있고 즐겁게 임하는 방법을 알기에 오늘의 나는 성공을 준비하고 있다 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약력] : △55년 경북 예천 생 △82년 동아대 경제학과 졸업 △82년 세원 입사 △88년 동호실업 창립 △91년∼현재 성호실업 대표이사 △96년 자랑스런 신한국인 표창 △97년 트렉스타 설립 △97년 5000만달러 수출탑 수상 △99년 7000만달러 수출탑 수상(每日經濟 2000-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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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동칠(트렉스타 ''''神話 創造의 秘密'''' 프로그램에 放映, 8月 13日(金) KBS 1TV 午後 7時 30分) [記事] : 등산화 1위 브랜드인 트렉스타(회장 권동칠·용문면 출생)가 기업 성공을 다룬 프로그램 ‘신화 창조의 비밀’에 소개된다. 또 중소기업청이 추진하고 있는 성공 중소기업 홍보 정책인 ‘신 3D''''에도 대상 기업으로 선정돼 겹경사를 맞았다. KBS는 2004년 8월 초부터 부산 사상구 삼락동 트렉스타 본사와 녹산물류센터, 중국 현지 공장, 일본 판매 현장 등을 취재해 트렉스타 브랜드의 급성장 비결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이 번 촬영에서 KBS는 특히 1997년 트렉스타 브랜드를 시장에 내놓은 이후 매년 100% 이상씩 성장한 브랜드 관리 비결과 경영 성과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방송 내용에는 회사의 국내와 해외 시장 개척, 지방에 본사를 둔 기업이 브랜드 파워 국내 1위를 차지하기까지의 노력과 애환 등을 다뤄 감동을 줄 전망이다. 특히 권동칠 회장의 시장을 읽는 안목과 경영 능력, 자기 브랜드에 대한 애착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또 현재 기술이사를 맡고 있는 세계적인 산악인 엄흥길 대장과 함께 한 과정도 소개돼 스타마케팅의 기업 성공 사례로도 감동을 줄 전망이다. 스타마케팅은 지역 기업들이 취약한 부분이어서 남다른 관심을 끌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와 함께 290g의 초경량 등산화를 개발한 기술력, 20개 국에 이르는 해외 수출 전략 등도 회사의 자랑거리로 다뤄졌다. 회사측은 이 번 방송이 회사의 또 한 번의 도약에 구심점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999년 MBC 성공시대 프로그램에 권동칠 회장이 소개된 후 회사의 매출과 브랜드 인지도가 높아져 브랜드파워 1위의 급성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번 KBS 방송은 전국에 방영되는 프로그램이어서 수도권 소비자 저변 확대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회사측은 기대하고 있다. 방송은 2004년 8월 13일(금) 저녁 7시 30분 KBS 1TV를 통해 55분 간 방영된다. 한편 트렉스타는 중소기업청이 역동적으로 꿈을 이뤄낸 중소기업 사장들의 성공기를 소재로 드라마 제작을 추진하고 있는 `신3D''''(다큐멘터리 제작 대상 기업)에 선정됐다.(醴泉新聞 2004-08-12 14: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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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동칠(-世界人의 발에 우리 신발을 신겨라- 土種 登山靴의 大挑戰, 放送日時 : 2004년 8월 13일 (금) 저녁 7시 30분 ∼ 8시 25분, KBS 1TV PD: 김인호 /작가: 조정화) [記事] : 불과 십여 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중소기업에서 만든 신개념 초경량 등산화 트렉스타. 우리 토종 브랜드 트렉스타는 세계 일류 상품이라는 신화를 만들고 한국 등산화의 대명사로서 해외 시장을 제패했다. 잃어버린 신발 수출국의 자존심을 되찾고 무명 중소기업에서 세계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불굴의 도전 정신과 최고의 기술력이 있었다.

   ▶새로운 시도가 시장을 바꾼다 : 1993년 5월 미국의 인라인 스케이트 제작사인 K2에서 신제품을 공동 개발하자며 찾아왔다. K2는 당시 성호실업에게 막대한 물량의 오더를 의뢰한 살로몬의 경쟁사였다. 권동칠(용문면 출신, 용문초등, 대창중, 대창고 졸업) 사장은 과감히 K2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시 인라인 스케이트는 발 보호를 위해 스키부츠처럼 딱딱한 부츠를 쓰고 있었다. 개발팀은 기존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가볍고 편안한 소프트 부츠 연구에 몰두했다. 미국의 인라인 스케이트 전시회까지 남은 기간은 75일. 신기술 연구와 동시에 시간과의 싸움도 해야만 했다. 개발팀은 등산화를 개발했던 노하우와 기술력으로 수 차례의 실험을 통해 마침내 부드러운 인라인 스케이트 개발에 성공한다. 부드러운 인라인 스케이트는 시장에 돌풍을 일으키며 시장의 판세를 뒤집어 놓았다. 시장 점유율이 매년 곱절로 성장하면서 1998년에는 독보적인 존재였던 롤러 블레이드를 제치고 점유율 1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K2에 소유권이 있어 성호는 고생 끝에 개발한 신기술에 대한 권리를 전혀 행사할 수 없었다. 내 브랜드를 붙이지 못하는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 OEM의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자가브랜드와 신개념 등산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라 : 성호실업은 우리 이름으로 세계를 공략하기 위해 자가 브랜드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신생 중소기업의 환경에서 개발팀을 꾸려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권동칠 사장은 K2 본사를 찾아가 자가브랜드 개발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설득한 뒤 1994년 정식 상표 등록을 하고 본격적인 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등산화는 무겁고 투박한 것이라는 고정 관념을 탈피하여 가볍고 편한 신 개념 등산화라는 컨셉으로 경등산화 개발에 착수한다. 주중에는 신제품을 개발하고 주말에는 산에 가서 테스트를 거치며 수 천 수 만 번의 시행 착오가 반복됐다. 중소기업에게는 부담이 될만한 표준 신골 개발에도 20억 원이나 과감히 투자하며 한국인에게 맞는 표준 신골 개발을 완성한다. 1997년 드디어 트렉스타의 본격적인 런칭. 첫 번째 모델 ''''가이드''''는 목표로 했던 290g에는 못 미치쳤만 당시 800g에 달하던 다른 등산화에 비하면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기존 시장의 장벽은 너무 높았고, 회사는 존폐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트렉스타는 현장으로 나가 발로 뛰면서 등산화 홍보에 나섰다. 편하고 가벼운 등산화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트렉스타의 판매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세계 최초의 초경량 등산화 ''''WING''''을 완성, 290g의 초경량 등산화라는 신화를 이뤄낸다.

  ▶기술력으로 세계 시장을 돌파하라 : 국내 시장 제패를 발판으로 일본 시장에 진출한 트렉스타. 일본 최대의 아웃도어 유통업체인 에버뉴와 손을 잡고 일본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악재가 발생. 트렉스타 테스트를 위해 등산에 나선 일본 유통업체 담당자가 미끄러지면서 넘어져 다친 것이다. 이로 인해 미끄럼 방지에 이상이 제기된다. 안전과 직결되는 중요한 조건인 미끄러짐을 해결하기 위해 자체 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 개발에 착수한다. 개발 착수 1년인 2001년에는 미끄러짐 방지 창 개발과 동시에 하이퍼그립이라는 신발창 자가브랜드도 출시하게 된다. 미끄러짐 문제가 개선되면서 일본 시장의 반응도 좋아져 2003년에는 점유율 2위로 수 많은 외국 브랜드를 제치고 일본 시장에서도 인정받게 된다.

  ▶세계 시장으로 진출해라 : 이제 트랙스타는 아시아를 넘어서 더 넓은 시장 개척의 꿈을 키운다. 그 꿈을 위해 세계의 지붕을 넘나들면 대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산악인 엄홍길 대장을 기술 자문으로 영입한다. 엄 대장의 지적으로 수 많은 테스트를 거쳐 단점을 보완한 끝에 신슐레이터라는 신소재를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개발팀과 엄홍길 대장의 노력으로 중등산화 ''''어코드''''가 탄생한다. 전세계 어느 산에서도 기술력으로 빛나는 트렉스타는 일본에 이어 뉴질랜드와 호주에서도 등산화 부분 1위의 위상을 떨치며 현재 세계 22개 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트렉스타는 2003년 세계 유명 브랜드가 장악하고 있는 미국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기술력으로 무장한 우리 토종 등산화 트랙스타의 세계를 향한 발걸음은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이다.(박재석 醴泉郡廳 홈페이지 2004-8-13(2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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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동칠(휴먼奬學金 3億 원 造成 : 권동칠 트렉스타 代表) [記事] : 등산용품업체인 (주)트렉스타의 권동칠(용문면 출생ㆍ대창중고 졸업ㆍ부산) 대표는 히말라야 등반 중 숨진 동료의 시신을 1년만에 수습한 엄홍길 대장의 ''''휴먼원정대'''' 정신을 기리기 위해 ''''휴먼장학금'''' 3억 원을 조성했다"고 2005년 10월 17일 밝혔다. 이 장학금은 히말라야 등반 중 희생된 국내 산악인과 네팔 세르파 유족들에게 지급된다. 트렉스타는 우선 2004년 5월 히말라야에서 숨진 박무택 씨의 유족과 한국원정대를 돕다 희생된 네팔 현지 세르파 6명의 유족을 장학금 수혜 대상자로 선정했다. 장학금은 박씨 유족에게 1백만 원, 세르파 6명의 유족에게도 1백만 원 총 2백만 원이 매월 지급된다.(醴泉新聞 200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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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동칠(권동칠 트렉스타 대표 CEO 포커스 출연) [記事] : 권동칠(용문면 출생) 트렉스타 대표가 2006년 12월 11일 저녁 11시 30분 KBS 1TV CEO 포커스에 출연, 세계적인 등산화 브랜드로 키운 과정과 미래 신발산업에 대한 전망 등을 들려줬다.(醴泉新聞 200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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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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