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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010:李朝때예천의고씨들(附예천방문505)
작성자장병창 @ 2009.09.28 06:45:57
  예천의 자랑(2010) : 이조 때 예천의 고씨들(附 예천방문 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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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극검(高克儉) : 1471-1512,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개성, 부장 수연(部將壽延)의 아들, 극근(克勤)의 동생,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승의 부위(承義副尉)에 올랐다.(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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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극겸(高克謙) :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개성, 절도사 약회(節度使若淮)의 손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전력 부위(展力副尉)에 올랐다. 형제 5명이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임금이 이르기를, "너희 다섯 호랑이를 얻었으니, 사방에 근심이 없으리라."라고 하더니, 후에 참소를 입어 더 벼슬하지 않았다.(竺山勝覽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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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극공(高克恭) : 1474-1550,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개성, 절도사 약회(節度使若淮)의 손자, 음사(蔭仕)로 충의 교위(忠毅校尉)에 올랐고, 판결사(判決事)에 증직(贈職)되었다.(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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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극근(高克勤) : 1468-1510, 용궁현(龍宮縣) 출신, 호는 송재(松齋), 본관은 개성, 사원(士原)의 증손, 부장 수연(部將壽延)의 아들, 연산군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도총 경력(都摠經歷)에 올랐고, 1537년(중종 32) 4월 11일 사간원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도총부도사 고극근은 나이가 늙어 시위(侍衛)해 합당하지 못하니 체직하소서."하니, 윤허하였고, 군수(郡守)까지 지냈다.(竺山勝覽 1934, 嶠南誌 1937, 中宗實錄,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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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극량(高克良) :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개성, 절도사 약회(節度使若淮)의 손자, 음사(蔭仕)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竺山勝覽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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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극형(高克亨) : 용궁현(龍宮縣) 출신, 호는 계남(溪南), 본관은 개성, 부사 수인(府使壽仁)의 아들, 허백당 홍귀달(虛白堂洪貴達)의 제자, 음사로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에 올랐다.(竺山勝覽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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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명세(高命世) : 1618-1671, 용궁현(龍宮縣) 출신, 자호(自號)는 만수옹(萬樹翁), 본관은 개성, 주암 경복(周菴景福)의 증손, <만수음 2절(萬樹吟二絶)>의 시(詩)가 있고, 참의(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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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몽수(高夢洙) : 1785-1865, 용궁현 출신, 자는 현수(玄叟), 호는 화은(華隱), 본관은 개성, 부정 경복(副正景福)의 후손, 만수옹 명세(萬樹翁命世)의 6세손, 학생 기한(起漢)의 아들, 부모 사후(永感下) 유학(幼學)으로서 1858년(철종 9) 식년 진사시에 2등 17위로 합격하였다. 1858년(철종 9) 9월 22일 왕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친히 진사(進士) 고몽수의 사은(謝恩)을 받으면서 하교하기를, "고몽수를 오위장(五衛將)에 단부(單付)하게 하라."했는데, 나이가 70세이기 때문이었다. 문사(文詞)가 탁월하였고, 3대(三代)가 추증(追贈)되었고, 유집이 있다.(司馬榜目, 哲宗實錄, 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1939,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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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상주(高相柱) : 1725(영조 1)-1788(정조 12), 용궁현(龍宮縣) 출신, 자는 천응(天應), 본관은 개성, 호군 처벽(護軍處壁)의 아들, 음사(蔭仕)로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에 올랐다.(竺山勝覽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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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상훈(高相勳) : 1860-1942, 자는 좌보(佐甫), 호는 노운(孥蕓), 본관은 개성, 퇴인(退人) 사원(士原)의 후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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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희(高聖希) : 1807(순조 7)-1877, 호는 구은재(九隱齋), 본관은 개성, 희윤(希允)의 후손, 정필규(鄭必奎)의 제자, 역학(易學)에 뛰어났으며, <수견록(隨見錄)>을 저술했고, 유고(遺稿)가 있다.(醴泉郡誌 1988,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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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세장(高世章) : 1641-1690, 용궁현 출신, 자는 여함(汝含), 호는 낭옹(浪翁), 본관은 개성, 군수 상안(郡守尙顔)의 손자, 이령(爾齡)의 아들, 세헌(世憲)의 동생이다. 도량이 넓고, 기상이 엄격하였다. 영남 유림(嶺南儒林)의 종장으로, 부모 사후(永感下)에 유학(幼學)으로서 1673년(현종 14) 식년 진사시에 3등 72위로 합격하였다. 1676년(숙종 2) 10월 25일 진사로서 도남서원에 액호(額號, 道南書院의 請額疏)를 내려주기를 진소(陳疏)하여 아뢰기를, "주자(朱子)를 받드는 사당이 30여 개소에 이르는데도 사액(賜額)하지 아니한 것이 없으며, 장정수(張定수)가 주렴계(朱濂溪)와 정호(程顥), 정이(程이)의 사당을 의춘(宜春)에 세웠는데, 이 삼현(三賢)은 그 지방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자는 기(記)를 지어서 이를 아름답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이 도남서원은 의춘서원(宜春書院)과 아울러 아름다운 일인데도, 이지익이 두찬(杜撰)하는 말로 전하를 속이고 많은 선비를 수모(羞侮)하였습니다."하니 윤허하였다. 참봉(參奉)에 올랐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682년(숙종 8) 1월 29일에는 이이(李珥)의 문묘 종향(文廟從享)에 반대하자 벽동군(碧潼郡)에 정배(定配)되었다. 문집(文集)이 있다.(司馬榜目, 肅宗實錄, 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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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수연(高壽延) : 1433(세종 15)-1525(중종 10),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개성, 수군절도사 약회(水軍節度使若淮)의 장자, 극근(克勤, 武科, 經歷)ㆍ극검(克儉)ㆍ극공(克恭)ㆍ극겸(克謙)ㆍ극량(克良)의 아버지이다. 무과(武科)와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부장(部將)으로서 시위(侍衛)하였다. 어모장군(禦侮將軍)이다. 묘는 용궁면 회룡산(回龍山) 갑향(甲向)에 있는데, 묘표(墓表)가 있다.(朝鮮寰輿勝覽 1929, 竺山勝覽 1934, 인터넷 eampas 2001, 醴泉의 金石文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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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수인(高壽仁) :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개성, 절도사 약회(節度使若淮)의 아들, 음사(蔭仕)로 장흥고 직장(長興庫直長)을 지냈으나, 백씨(伯氏)가 화(禍)를 입는 것을 보고, 집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竺山勝覽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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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약하(高若河) :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개성, 직제학 사원(直提學士原)의 맏아들, 절도사 약회(若淮)의 동생, 무과에 급제하였다. 정변에 휘말렸다가 1454년(단종 23) 2월 19일에 왕이 이조(吏曹)에 전지(傳旨)하기를, "고약하의 사령장(告身)을 돌려주라"고 하였다. 그 후 부사(府使)에까지 벼슬이 이르렀다.(端宗實錄, 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193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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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언수(高彦壽) : 본관은 개성, 사원(士原)의 후손, 호군(護軍)을 지냈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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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언엽(高彦燁) : 1802(순조 2)-1860(철종 12), 자는 광언(光彦), 본관은 개성, 몽련(夢鍊)의 손자, 음사(蔭仕)로 오위장(五衛將)에 이르렀다.(醴泉郡誌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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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언욱(高彦旭) : 1850(철종 12)-1903, 자는 춘서(春瑞), 본관은 개성, 음사(蔭仕)로 참봉(參奉)이 되었다.(醴泉郡誌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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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언형(高彦亨) : 1824-1911, 용궁현(龍宮縣) 출신, 호는 태암(泰菴), 본관은 개성, 교관 술겸(敎官述謙)의 아들, 계당 유주목(溪堂柳疇睦)과 긍암 이돈우(肯菴李敦禹)의 제자, 인자한 자태로 신망이 있었고, 병자년(丙子年) 큰 흉년에 논밭을 팔아서 굶주린 백성을 구휼(救恤)하니, 군민들이 그 덕을 칭송하였고, 병신(丙申)의 난에 용궁수성장(龍宮守城將)에 천거되었으나 오르지 않았다. 수(壽)를 누려 3품관(三品官)에 올랐다.(竺山勝覽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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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진(高永鎭) : 1868-1939,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개성, 도사 시항(都事是恒)의 후손, 음사(蔭仕)로 참봉(參奉)을 지냈다.(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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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찬(高永贊) : 1866-1943, 용궁현(龍宮縣) 출신, 자는 숙연(叔淵), 호는 이산(二山), 본관은 개성, 태암 언형(泰菴彦亨)의 아들, 서산 김흥락(西山金興洛)의 제자, 음사(蔭仕)로 목릉 참봉(穆陵參奉)을 지냈다.(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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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윤제(高允梯) : 1861(철종 12)-1938, 용궁현 출신, 자는 치운(致雲), 본관은 개성, 직제학 사원(士原)의 후손, 동몽교관(童夢敎官) 학원(學源)의 아들, 윤모(允模)의 동생이다. 편모 슬하(慈侍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891년(고종 28) 증광 생원시에 3등 69위로 합격하였다. 문장과 시가(詩歌)에 능통하였다. 세인이 이르기를, ‘청민거사(淸閔居士)“라고 하였다.(司馬榜目, 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193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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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윤종(高胤宗) : 1493-1542, 용궁현(龍宮縣) 출신, 호는 삼계(三溪), 본관은 개성, 사원(士原)의 현손, 부장 수연(部將壽延)의 손자, 조선 중종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주부(主簿)에 올랐다. 유집(遺集)이 있고, 상주(尙州)의 죽곡사(竹谷祠)에 제향(祭享)되었다.(竺山勝覽 1934, 嶠南誌 1937,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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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윤주(高允柱) : 1870(고종 7)-?, 용궁현 출신, 자는 사건(四建), 본관은 개성, 유학(幼學) 제원(濟源)의 양자, 유학 봉원(鳳源)의 아들, 윤가(允가)의 형, 조부모와 부모 슬하(重侍下)에서 동몽(童蒙)으로서 1882년(고종 19) 증광 생원시에 3등 147위로 합격하였다.(司馬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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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이견(高爾堅) : 1578-1667,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개성, 성재 상증(省齋尙曾)의 아들, 음사(蔭仕)로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에 올랐다.(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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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달(高仁達) : 1563-1625,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개성, 주암 경복(周菴景福)의 아들, 음사(蔭仕)로 교수(敎授)에 올랐다.(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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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준복(高峻福) : 1541-1582, 조선 선조 때,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개성, 참봉 윤원(參奉 胤元)의 아들, 음사(蔭仕)로 통례원 인의(通禮院 引儀)에 올랐다.(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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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처대(高處大) : 1684-1770, 본관은 개성, 주암(周菴) 경복(景福)의 5세손, 기개와 도량이 넓고 크며 의리에 바르고 구휼(救恤)에 후했다. 1763년(영조 39)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어 1766년(영조 42)에 가선대부 지중추부사(嘉善大夫知中樞府事)에 올랐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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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천우(高天佑) : 1524-1585, 본관은 개성, 판결사 극공(克恭)의 아들, 음사로 좌부장(左部將),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올랐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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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천호(高天祜) :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개성, 판결사 극공(判決事克恭)의 아들, 음사로 좌부장(左部將)에 올랐다. 고려 때 충렬(忠烈)들을 실은 <규장각충렬록 두문동 제선생 실기(奎章閣忠烈錄杜門洞諸先生實記)>에서 이르기를, "시골(田里)에 돌아가기를 원하여 두류산(頭流山)에 숨어살았다."라고 하였다.(竺山勝覽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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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희윤(高希允) : 1477-1548, 용궁현(龍宮縣) 출신, 호는 퇴수옹(退睡翁), 본관은 개성, 참봉 극형(參奉克亨)의 아들, 천거로 참봉(參奉)에 올랐다. 숨어서 살면서 덕을 기르고, 잠암 김의정(潛菴金義貞), 음애 이자(陰厓李자), 귀암 황효공(龜岩黃孝恭)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금수(錦水) 변에 정자를 짓고 소요자적(消遙自適)하였다.(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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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휘세(高徽世) : 1635-1708, 용궁현 출신, 자는 미숙(美叔), 호는 소주(蘇州), 본관은 개성,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의 제자이다. 소주정(蘇州亭)이 있고, 유고(遺稿)가 있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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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505

  삼강주막([冊과 길] 아련히 멀어져가는 것들에 바치는 헌사…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2>) [記事] :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 2-떠나가는 것은 그리움을 남기네/이호준/다할미디어/

  주막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사막을 건너는 나그네에게 오아시스가 그러하듯, 주막 역시 길손들의 허기와 갈증을 해결해줬다.

  그래서 주막이라는 단어는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낭만이나 고독 같은 요소를 공유하기도 했다. 나그네들은 막걸리 한 사발로 마른 목을 축이고 국밥으로 고픈 배를 달랬다.

  이 땅에 아직도 주막이 남아있을까? 이 책은 사라져가는 우리 것에 대한 헌사다. 그 정조(情調)는 아스라하다. 때론 애잔하다. 아무리 부지런히 쫓아다녀도 이 땅 위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모두 기록할 수는 없는 일.

  그만큼 많은 것들이 우리와 이별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래서 더욱 게으름을 피울 수 없다. 주막의 흔적을 찾아 경북 예천에 도착한 건 함박눈 대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겨울 아침이었다.

  예천에는 이 나라의 ''''마지막 주막''''이라 불리는 삼강주막이 있다. 1900년 전후에 세워졌다는 삼강주막의 마지막 주모였던 유옥연 할머니는 2005년 타계했다.

  지금은 관청에서 복원해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수리했지만, 아직도 100년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한 노인이 가져온 쟁반에는 막걸리 반 되, 썬 두부, 김치, 간장이 전부였다.

  저자는 이렇게 붙들 수 없는 것들을 붙들기 위해 지난 1년간 쉴 새 없이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손아귀에 한 줌쯤 잡을 수 있는 옛것의 자취는 곧 스르르 사라질 터이지만, 저자는 얼마 남지 않은 그 소중한 시간을 동시대인들과 공유하려 애쓴다.

  무엇이 그리웠는지도 곧 잊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애틋한 향수의 감성을 일깨워주려 한다... 이 책의 전작으로 2008년 출간된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그때가 더 행복했네''''는 문화체육관광부 ''''올해의 우수교양도서''''에 선정됐었다.

  (김호경 記者 國民日報 2009.09.25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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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송령(''''醴泉 石松靈'''' 스크린 出演한다 : 獨立映畵 ''''나루'''' 主要 背景 舞臺 設定) [記事] :

  경북 예천군이 천연기념물인 석송령을 주무대로 한 독립영화 ''''나루'''' 제작을 위해 군과 영화사와 협약식을 갖는다.

  독립영화 ''''워낭리'''' 촬영지로 전국에 이름을 알린 봉화군에 이어 경북 예천군이 천연기념물인 석송령을 주무대로 한 독립영화 ''''나루'''' 제작을 위해 군과 영화사와의 협약식을 가진 뒤, 2009년 연말 본격 촬영에 들어갈 것으로 알려져 지역의 관광마케팅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예천군과 독립영화제작사인 한 코리아는 2009년 9월 28일 오후 군청 영상회의실에서 독립영화 ''''나루''''의 제작을 위한 협약식을 갖는다.

  이날 협약으로 군에서는 이번 ''''나루''''의 제작비 7천만 원과 영화의 주무대가 될 천연기념물 제 294호로 지정돼 있는 감천면 천향리 석송령에서의 촬영 전반에 대한 행정적 지원을 하고, 한 코리아는 해외영화제 출품을 겨냥한 예술성을 갖춘 독립영화 제작을 위해 오는 11월 말경부터 본격 촬영에 들어간다.

  이번에 제작될 영화는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 마을에 살면서 예천군청 안내실에 근무하는 주인공 강나루와 군의 대표적 서원인 옥천서원을 관리하는 70대 노인의 세대를 초월한 아름다운 사랑 얘기가 석송령을 배경으로 그려질 예정이다.

  특히 동화작가 지망생인 주인공과 서원 관리인인 노인의 고집스런 삶에 대한 갈등과 반전을 그려내며 결국 주인공 나루가 세대간의 벽을 허물며 노인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이를 통해 동화작가로서의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그린 휴먼스토리로 결말을 맺게 된다.

  (張炳喆 記者 慶北日報 2009-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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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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