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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昌德宮의 新 璿源殿
(歷代 임금의 御眞을 모셨던 곳)
1.이곳에는 原來 任辰倭亂 때 軍隊를 보내준 明나라 神宗을 祭祀 지내기 爲해 設置한 大報壇이 있었다.
2.日帝强占期인 1921年에 大報壇을 徹去하고 새로운 璿源殿을 지어 舊 璿源殿에 모셨던 御眞들을 옮겨 왔다.
3.이처럼 後苑 깊숙한 곳으로 璿源殿을 移轉한 까닭은 中國의 影響力을 除去하고 朝鮮 王室의 象徵性을 弱化시키려는 意圖로 보인다.
4.附屬建物인 懿老殿은 原來 慶福宮의 문경전을 德壽宮으로 옮겼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5.이곳에는 11名의 御眞이 있었는데 韓國戰爭 때 부산으로 옮겼다가 大部分 불타고 말았다.
(新 璿源殿 안의 亭子들)
1.現在 新 璿源殿 안에는 두個의 亭子가 있다. 이들은 原來 後苑바깥 領域에 있었다.後苑 北西쪽 境界에 訓練院 軍營이던 北營이 있었는데 1759年 訓練大將 김성응이 軍營의 樓閣으로 夢踏亭을 지었다.
2.軍事用 亭子답게 規模가 크고 堂堂하다.北쪽 언덕에 있는 掛弓亭은 軍營 안의 활터를 내려다보던 亭子이다.
3.掛弓이 활을 걸다라는 뜻이니 그 이름처럼 활쏘기를 感想하던 亭子임을 알 수 있다.
4.現在 掛弓亭 바로 뒤편에는 中央高等學敎 담장이 바싹 붙어 있어 외톨이 亭子가 되었다.
(활쏘기를 못해 北營에 감금당했던 정약용)
1.정조는 奎章閣의 여러 臣下들에게 활쏘기를 시켜 文武를 兼備한 材木으로 키우려 했다.
2.정약용이 奎章閣에 勤務하던 1791年(정조15) 北營에서 활쏘기를 하는데 영 神通치 않았다.
3.平常時에는 활을 제대로 못 쏘면 罰酒를 받았지만 정조는 이것은 罰이 아니라 賞이라며 北營에 정약용을 잡아놓고 五發을 쏠 때마다 一發씩 맞혀야 풀어 주겠다고 하였다.
4.정약용은 활을 망가뜨리고 손이 부르트고 말 타는 法이 서틀러 보는 사람들이 크게 웃을 정도였으나 며칠 지나자 能熟해 지고 열흘이 지나서야 풀려 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대학원 영어과 졸업, 문학석사, 박대업 드림
1.이곳에는 原來 任辰倭亂 때 軍隊를 보내준 明나라 神宗을 祭祀 지내기 爲해 設置한 大報壇이 있었다.
2.日帝强占期인 1921年에 大報壇을 徹去하고 새로운 璿源殿을 지어 舊 璿源殿에 모셨던 御眞들을 옮겨 왔다.
3.이처럼 後苑 깊숙한 곳으로 璿源殿을 移轉한 까닭은 中國의 影響力을 除去하고 朝鮮 王室의 象徵性을 弱化시키려는 意圖로 보인다.
4.附屬建物인 懿老殿은 原來 慶福宮의 문경전을 德壽宮으로 옮겼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5.이곳에는 11名의 御眞이 있었는데 韓國戰爭 때 부산으로 옮겼다가 大部分 불타고 말았다.
(新 璿源殿 안의 亭子들)
1.現在 新 璿源殿 안에는 두個의 亭子가 있다. 이들은 原來 後苑바깥 領域에 있었다.後苑 北西쪽 境界에 訓練院 軍營이던 北營이 있었는데 1759年 訓練大將 김성응이 軍營의 樓閣으로 夢踏亭을 지었다.
2.軍事用 亭子답게 規模가 크고 堂堂하다.北쪽 언덕에 있는 掛弓亭은 軍營 안의 활터를 내려다보던 亭子이다.
3.掛弓이 활을 걸다라는 뜻이니 그 이름처럼 활쏘기를 感想하던 亭子임을 알 수 있다.
4.現在 掛弓亭 바로 뒤편에는 中央高等學敎 담장이 바싹 붙어 있어 외톨이 亭子가 되었다.
(활쏘기를 못해 北營에 감금당했던 정약용)
1.정조는 奎章閣의 여러 臣下들에게 활쏘기를 시켜 文武를 兼備한 材木으로 키우려 했다.
2.정약용이 奎章閣에 勤務하던 1791年(정조15) 北營에서 활쏘기를 하는데 영 神通치 않았다.
3.平常時에는 활을 제대로 못 쏘면 罰酒를 받았지만 정조는 이것은 罰이 아니라 賞이라며 北營에 정약용을 잡아놓고 五發을 쏠 때마다 一發씩 맞혀야 풀어 주겠다고 하였다.
4.정약용은 활을 망가뜨리고 손이 부르트고 말 타는 法이 서틀러 보는 사람들이 크게 웃을 정도였으나 며칠 지나자 能熟해 지고 열흘이 지나서야 풀려 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대학원 영어과 졸업, 문학석사, 박대업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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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