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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022:권덕여都承旨(附예천방문514)
예천의 자랑(2022) : 용문면 출신 권덕여 도승지(附 예천방문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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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여(權德與) :
1518(중종 13)-1592(선조 25), 용문면 출신, 자는 치원(致遠), 본관은 안동, 상주목사 부(溥)의 아들, 송인수(宋麟壽)의 제자이다.
1537년(준종 32) 진사시에 합격, 1562년(명종 17) 별시 문과에 병과 10위로 급제하여 전적, 정언을 거쳐 헌납에 이르렀다.
1570년(선조 3) 동부승지로 특진되고, 이어 좌부승지로 승진되었고, 1573년 성절사로 명 나라에 다녀왔다.
1575년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호조ㆍ병조ㆍ이조의 참의와 도승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579년 동서 분당의 폐단을 지적한 백인걸(白仁傑)의 상소문을 이이(李珥)가 지은 것이 문제되자, 이를 옹호하다가 대사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부제학으로 있던 1583년에는 박근원(朴謹元) 등과 함께 이이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성주 목사로 좌천되었다.
성격이 조용하고 분경을 일삼지 않았다.
(인터넷 야후 2001, 韓國人의 族譜, 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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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 1562년(명종 18) 2월 14일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고, 그 후 병조 좌랑(1562.11.11, 1563.3.12), 사간원 헌납(1563.8.30, 1564.5.8), 장령(1565.5.24, 1565.10.4), 의정부 검상(1566.1.28), 홍문관 부교리(1566.6.24), 장령(1566.6.25)을 지냈다.
[선조실록] : 1568년(선조 1) 5월 2일에는 사간에 제수되어 동년 5월 11일에 유일(遺逸)의 선비로 나이든 사람에게 6품을 주자고 왕에게 청하였고, 사간(1568.10.4), 집의(1570.5.21), 승지(1571.3.6), 대사간(1573.3.22), 좌부승지(1574.3.21)를 지냈다. 1574년(선조 7) 5월 30일에는 대간으로서 왕에게 아뢰기를, "외방의 토호(土豪)들이 부세(賦稅)를 공상(供上)하지 않고 관원을 위협하는데, 수령과 감사가 다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동부승지(1574.7.21), 황해도 관찰사(1575.3.11)를 거쳐, 대사간으로서 백인걸(白仁傑)의 상소에 대해 왕과 의논하였고(1579.6.28), 특지(特旨)로 성주 목사(1583.7.22)에 올랐다. 1585년(선조 18) 2월 20일에는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재임 중이었고, 1589년(선조 22) 4월 1일에는 춘천 부사에 재임 중이었다.(明宗實錄, 宣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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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여 [記事] : 선조수정실록 3권/ 선조 2년(1569 기사 / 명 융경(隆慶) 3년) 3월 1일(을사) 1번째 기사/ 판중추부사 이황이 병을 이유로 귀향하다/ 판중추부사 이황 이 병을 이유로 귀향하였다. 이황 자신이 노병(老病)을 들어 시골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간곡히 청하면서 계속 장소(章疏)를 올리니 상이 인견하고 두세 번 간곡히 만류하였으나, 이황 은 더욱 강력히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경은 지금 돌아갈 것인데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ꡓ하니, 이황이 대답하기를, ꡒ고인(古人)은 ꡐ치세(治世)가 걱정이 되고 명주(明主)가 위태롭다.ꡑ 하였습니다. 이는 명주는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고 치세에는 걱정할 만한 일이 없으므로, 독단적인 슬기로 대중을 제어하면서 여러 신하들을 경시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따라서 교만하고 사치스런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세대가 비록 치평(治平)의 시대인 듯하나 남쪽과 북쪽에 흔단이 있고 민생은 지쳐 있어 걱정할 만한 일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상의 자질이 고명하시어 여러 신하들의 재지(才智)가 성상의 뜻에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일을 논의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독단의 슬기로 세상을 이끌어가려는 조짐이 없지 않으므로, 식자들은 그 점에 대해 미리 염려하고 있습니다. 신이 전일에 《주역》 의 건괘(乾卦)에 ꡐ날으는 용이 하늘에 있다[飛龍在天]ꡑ는 것과, 또 ꡐ높이 오른 용이 후회가 있다[亢龍有悔]ꡑ는 말에 대해 아뢰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임금이 지나치게 스스로 뛰어난 체하여 신하들과 마음을 같이하고 덕을 함께 하지 않으면 어진이들이 아래에 있게 되어 도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이른바 높이 오른 용이 후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학문의 공정을 폐지하지 않아야 사의(私意)를 이겨 낼 수 있어 그러한 병통이 사라질 것입니다. 신이 전일 올렸던 《성학십도(聖學十圖)》 는 그것이 신의 사견(私見)이 아니라 모두가 선현(先賢)들이 했던 것인데, 그에 대한 공부는 신이 올린 차자(箚子)에서 사(思)자와 학(學)자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에 대해 생각을 하신다면 얻음이 더욱 깊어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소신이 충심을 바쳐 회언(誨言)을 올리는 뜻입니다.ꡓ하였다. 상이 다시 하고 싶은 말을 묻자 대답하기를, ꡒ우리나라에 사림(士林)의 화가 중엽부터 일어났는데, 폐조(廢朝)의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중종조(中宗朝)의 기묘사화(己卯士禍)는 현인(賢人) 군자(君子)가 모조리 큰 죄를 당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사(邪)와 정(正)이 뒤섞이게 되었고 간사한 무리들이 득세하였는데, 그들이 개인적으로 원한을 갚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묘의 여습(餘習)이라고 하였으므로 사림의 화가 연속되어 왔던 것입니다. 당시 명종(明宗) 은 어렸으므로 권간(權奸)들이 득세하여 한 사람이 패하고 나면 또 한 사람이 나와 뒤를 이어 용사했기 때문에, 사화가 차마 말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 지난 일들을 앞으로의 경계로 삼으소서. 예로부터 임금의 초정(初政)은 청명(淸明)하게 하여야 정직한 인물이 등용되므로 임금이 과실이 있으면 간쟁하였는데, 임금이 이에 대하여 싫증을 내게 마련입니다. 이때 간사한 무리가 그 기회를 노려 온갖 아양을 부리게 되는데, 그러면 임금은 마음속으로 만약 이런 사람을 임용하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겠다고 여겨 그때부터 소인배와 합하게 되어, 정직한 사람은 손 댈 곳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사태가 이에 이르면 소인배가 득세하여 못하는 짓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신정(新政)의 초기라서 모든 간쟁(諫諍)에 대해 뜻을 굽혀 따르고 있으므로 대과(大過)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러 성상의 마음이 혹시라도 달라진다면 꼭 오늘 같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리 된다면 그때는 간인들이 필시 승세를 타게 되어 초정(初政)과는 크게 상반될 것입니다. 당 현종(唐玄宗)의 개원(開元) 시기에는 어진 신하가 조정에 가득하여 태평을 이루었으나 현종 이 욕심이 많은 것을 기화로 이임보(李林甫)․양국충(楊國忠)이 오직 봉영(逢迎)을 일삼았으므로, 군자는 모두 떠났고 소인배만 남게 되어 끝내 천보(天寶)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똑같은 그 임금이면서 마치 두 사람의 일인 양 달랐던 것은, 처음에는 군자와 마음이 맞았다가 끝에 가서는 소인과 친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상께서는 이 점을 큰 경계로 삼아 선류(善類)를 보호하여 소인배들로 하여금 모함을 못하도록 하소서. 이것이 바로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복이며 신이 계고(戒告)하고 싶은 것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아뢴 바를 내 마땅히 경계로 삼으리라.ꡓ하였다. 또 묻기를, ꡒ경은 조신(朝臣)들 중에 추천할 만한 자가 없겠는가?ꡓ하니, 대답하기를, ꡒ오늘날 대신의 지위에 있는 이들이 모두 청신(淸愼)하고 육경(六卿)도 사특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수상(首相)에 있어서는 위의(危疑)스러운 즈음에 당해서도 음성이나 안색을 동요하지 않고 나라 형세를 태산처럼 안전한 자리에 올려놓았으니, 참으로 주석(柱石)같은 신하로서 의중(倚重)할 만한 사람으로는 그 사람보다 훌륭한 이가 없을 듯싶습니다.ꡓ하였다. 상이 또 학문의 선비로 누가 있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ꡒ그 점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옛날 어느 사람이 정자(程子) 에게 ꡐ문인(門人) 중에 누가 체득함이 있습니까?ꡑ라고 묻자, 정자 는 ꡐ체득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쉽게 말할 수 없다.ꡑ 하였는데, 그 당시 유작(游酢)․양시(楊時)․사양좌(謝良佐)․장역(張繹)․이유(李?)․윤돈(尹焞) 등 상당한 학자들이 있었으나 정자 가 감히 가벼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이 어떻게 감히 천일(天日)을 속여가며 아무가 체득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대승(奇大升) 같은 사람은 문자(文字)를 많이 보았고 또 이학(理學)에 있어서는 소견이 초월한 경지에 도달하여 통유(通儒)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수렴(收斂)의 공부가 좀 부족합니다.ꡓ하였다. 아룀이 끝나자 물러갔다.【 이황이 귀향할 때 명사(名士)들이 서울을 비우다시피 모두 나와 전송을 하면서 시를 읊어 작별의 정을 나누었다.
이황이 기대승(奇大升)․박순(朴淳) 두 사람의 시에 화답하고 여러 사람과 작별을 하면서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ꡐ가련하다 여러 성조에 은총을 받은 몸이 부질없이 일곱 차례나 조정을 오갔네[可憐異代承恩渥空作區區七往還]ꡑ라는 구절이 있었다.】 상이 처음 즉위했을 때는 영명(英明)하고 영오(穎悟)하여 온 나라가 성덕이 성취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시속의 말들이 날마다 탑전에서 떠들어대므로 상의 뜻이 유혹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황이 입조하여 언제나 성현의 학문으로 상을 권면했기 때문에 상이 사랑하고 공경했지만 마음을 비우고 자신에게 반성하는 실행이 없었다. 이리하여 이황은 원래가 겸퇴(謙退)할 마음을 갖고 있는데다 또 도(道)가 행해지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굳이 사양하고 물러가기를 청했는데,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모두 실망하였다. 집의(執義) 권덕여(權德與)가 상소를 올려, 정원이 만류할 것은 청하지 않고 지레 인견(引見)할 것을 청했고 또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기도 전에 지레 역말을 주어 보낼 것을 청한 것을 논하면서, ꡐ그를 만류한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도리어 말을 내주자는 청만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ꡑ고 하였다. 이 때문에 상이 체직(遞職)을 허락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2장 B면/ 【영인본】 25책 414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역사-전사(前史) / *역사-고사(故事) / *왕실-국왕(國王) / *사상-유학(儒學)(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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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여 [記事] : 선조수정실록 17권/ 선조 16년(1583 계미 / 명 만력(萬曆) 11년) 6월 1일(신해) 7번째 기사/ 홍문관 부제학 권덕여 등이 상차하여 이이가 한 일에 대해 논계하다/ 홍문관 부제학 권덕여(權德與), 전한 허봉(許?)․홍진(洪進)․홍적(洪迪)이 상차하기를, ꡒ병조 판서 이이는 학자 출신으로서 순서를 뛰어넘어 숭반(崇班)에 올랐는데, 의리와 충성을 다하여 특별하게 은총을 베푼 대우에 대하여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집요하게 자신의 의견만 내세웠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모의와 계획이 인정에 거슬려서 공론에 죄를 얻었으니, 공론이 어찌 발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선 요즈음의 일로 말하건대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품명(稟命)해야 함은 곧 신하의 직분인데도, 전폐(殿陛)를 지척에 두고서도 말을 바치라는 명령을 먼저 시행하고 나중에 아뢰었으니, 이는 나라의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한 행위에 가까운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출입하며 심한 질병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임금의 명에 교만한 태도를 지니고서 내조(內曹)에까지 왔으면서도 정원에 나가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임금의 명을 무시한 것에 해당됩니다. 이와 같으니 대간이 죄를 청한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이로서는 마땅히 죄를 인정하고 허물을 반성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할 것인데, 거취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면서 필설을 놀려 공론과 대항해 싸우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시론(時論)에 거슬렸다느니 좌우에 자문해 보시라느니 하며, 슬프고 괴로운 언사를 가지고 성상을 감동시켜 반드시 대간에게 죄를 돌리려고 하였으니, 그가 공론을 무시한 것이 어떻다하겠습니까. 공론이 있게 되면 만승 천자라도 오히려 자신을 굽히고 따르는 법인데, 일찍이 재상의 반열에 있었던 자로서 공론을 무시하고 거리낌이 없는 행위를 이렇게까지 한 자가 있었습니까. 이런 풍조가 계속 조장될 경우 그 폐단은 장차 온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게서 분주하게 명을 받게 하며 조금도 어김없이 그의 말대로만 하게 하는 결과를 빚게끔 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범수(范?) 가 이른바 ꡐ아래를 막고 위를 가리워 그 사욕을 성취시킨다.ꡑ273) 라고 한 것과 가깝게 되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습니까. 대체로 대간은 임금의 귀와 눈의 역할을 하면서 한때의 공론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 공론이 통하느냐 막히느냐에 따라서 나라가 다스려지고 혼란스럽게 되는 결과가 빚어지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역사를 탐구하여 전대의 잘잘못을 관찰해 보실 때 어찌 일찍이 재상의 지위에 있는 신분으로서 대간을 모욕하고 나라가 안전하게 된 경우가 있었습니까. 요즈음 말하는 이들은 혹 이이를 왕안석(王安石)에 비교하는데, 왕안석의 문장과 절행이야 어찌 이이가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왕안석이 교만하게 임금의 명을 무시한 것이 이이에게 있고 말하는 자를 배척한 것도 이이에게 있습니다. 명철하신 전하께서 어찌 그런 점을 통촉하지 못하시고 도리어 한 사람을 돌보기 위하여 대간을 억제하십니까. 신들은 뒷날의 화근이 이루 다 말할 수 없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신들이 처음에야 어찌 이이 의 방자스러움이 이렇게까지 심할 줄 알았겠습니까. 오직 그 한 생각에 편벽된 나머지 점점 해(害)가 심해졌는데 심지어는 대간의 입을 막고 온 나라를 자기에게 편하게 몰고 가는 등 못할 바가 없었으니, 이이의 죄가 여기에서 중대하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옛말에 ꡐ한 쪽 말만 들으면 간사함이 생기고 한 사람에게 맡기면 난을 일으킨다.ꡑ고 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공평하게 듣고 아울러 관찰하는 것으로 마음을 쓰시고, 한 사람에게 맡기고 치우치게 듣는 것을 경계하소서. 그리하여 이이만을 신하로 여기고 대간은 의식할 것이 없다고 여기지 마시어 한편으로는 사림(士林)을 보호하시고 한편으로는 처음과 끝이 모두 잘 되도록 하소서.ꡓ하니, 그대들이 진달한 뜻을 알았다고 답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17권 18장 A면/ 【영인본】 25책 518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註 273] 범수(范?) 가 이른바 ꡐ아래를 막고 위를 가리워 그 사욕을 성취시킨다.ꡑ : 범수는 중국 전국 시대의 정치가로 진 소왕(秦昭王)을 도와 나라를 부강하게 했는데, 이 말은 망국적인 행위를 지적하면서 소왕에게 간한 말이다. 《사기(史記)》 권79. ☞(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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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여 [記事] : 선조수정실록 17권/ 선조 16년(1583 계미 / 명 만력(萬曆) 11년) 8월 1일(경술) 1번째 기사/ 이희득․권덕여․홍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희득(李希得)을 사간으로 삼았다. 특지로 권덕여(權德與)를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홍적(洪迪)을 장연 현감(長淵縣監)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4책 17권 32장 B면/ 【영인본】 25책 52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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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514
예천한시회(第4回 醴泉 全國 漢詩大會 열려) [記事] :
제4회 예천전국한시대회가 2009년 10월 13일 오전 10시부터 예천 청소년수련관에서 열렸다.
예천한시회(회장 장병국)가 주관하는 이번 백일장에는 전국의 유림 및 한시회 소속 회원 등 250여 명이 참가해 다섯 자의 운자를 소재로 평소 자신이 갈고 닦은 솜씨를 시로서 마음껏 표현했다.
이날 백일장은 김수남 군수를 비롯한 기관단체장, 도ㆍ군의원, 박약회원, 향교전교를 비롯한 유림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식을 가진 후 고선관 선정 발표 및 위촉장을 수여하고 압운 압첨 발표를 거쳐 본격적인 대회가 시작됐다.
이날의 시제는 축 경북도청 예천ㆍ안동 이전(祝 慶北道廳 醴泉ㆍ安東 移轉)으로 압운은 향(鄕), 장(長), 향(香), 양(揚)이며, 말운 추첨 후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작시를 하고 작시가 끝난 후 관광버스 4대를 이용해 관내 효공원 및 양수발전소, 양궁장 등에 대한 투어를 실시했다.
투어를 마치고 장원 1명에게 100만 원의 상금을 지급하고 차상 2명, 차하 3명, 참방 20명, 가작 30명 등 입상자 56명에 대하여 시상을 했다.
(醴泉인터넷放送 2009-10-13 오후 2: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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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다례원(2009 醴泉단샘茶禮祝祭 열려 : 醴泉珍浩國際洋弓場에서 茶禮侍宴 및 競演) [記事] :
따뜻한 차향이 그리워지는 계절을 맞아 2009 예천단샘다례축제가 2009년 10월 13일 오전 11시부터 예천진호국제양궁장에서 열렸다.
예천다례원과 명원경북다도예술원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이번 다례축제에는 다례시연과 경연, 초청공연 등이 다채롭게 펼쳐져 전통 차의 향기와 예술의 멋스러움을 맛볼 수 있는 행사가 됐다.
이번 축제는 오전 11시 식전행사인 헌다례를 시작으로 김수남 군수와 기관ㆍ단체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식이 있고, 개회식이 끝난 후 명원경북지부의 색동말차 시연과 선은차회에서 채람 시연이 펼쳐졌다.
이어서 안동대 동양철학과와 성심어린이반의 아름다운 우리 절 시연이 있고 중식 후에는 장경자 명창의 예천아리랑 시연과 남기철 선생의 대금 연주가 펼쳐졌다.
이어 이날 행사의 대미를 장식할 두리자회와 말차의 차 경연이 펼쳐졌으며, 경연이 끝나고 함께 어우러지는 대동한마당을 끝으로 행사를 마쳤다.
(醴泉인터넷放送 2009-10-13 午後 2: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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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여(權德與) :
1518(중종 13)-1592(선조 25), 용문면 출신, 자는 치원(致遠), 본관은 안동, 상주목사 부(溥)의 아들, 송인수(宋麟壽)의 제자이다.
1537년(준종 32) 진사시에 합격, 1562년(명종 17) 별시 문과에 병과 10위로 급제하여 전적, 정언을 거쳐 헌납에 이르렀다.
1570년(선조 3) 동부승지로 특진되고, 이어 좌부승지로 승진되었고, 1573년 성절사로 명 나라에 다녀왔다.
1575년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호조ㆍ병조ㆍ이조의 참의와 도승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579년 동서 분당의 폐단을 지적한 백인걸(白仁傑)의 상소문을 이이(李珥)가 지은 것이 문제되자, 이를 옹호하다가 대사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부제학으로 있던 1583년에는 박근원(朴謹元) 등과 함께 이이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성주 목사로 좌천되었다.
성격이 조용하고 분경을 일삼지 않았다.
(인터넷 야후 2001, 韓國人의 族譜, 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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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 1562년(명종 18) 2월 14일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고, 그 후 병조 좌랑(1562.11.11, 1563.3.12), 사간원 헌납(1563.8.30, 1564.5.8), 장령(1565.5.24, 1565.10.4), 의정부 검상(1566.1.28), 홍문관 부교리(1566.6.24), 장령(1566.6.25)을 지냈다.
[선조실록] : 1568년(선조 1) 5월 2일에는 사간에 제수되어 동년 5월 11일에 유일(遺逸)의 선비로 나이든 사람에게 6품을 주자고 왕에게 청하였고, 사간(1568.10.4), 집의(1570.5.21), 승지(1571.3.6), 대사간(1573.3.22), 좌부승지(1574.3.21)를 지냈다. 1574년(선조 7) 5월 30일에는 대간으로서 왕에게 아뢰기를, "외방의 토호(土豪)들이 부세(賦稅)를 공상(供上)하지 않고 관원을 위협하는데, 수령과 감사가 다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동부승지(1574.7.21), 황해도 관찰사(1575.3.11)를 거쳐, 대사간으로서 백인걸(白仁傑)의 상소에 대해 왕과 의논하였고(1579.6.28), 특지(特旨)로 성주 목사(1583.7.22)에 올랐다. 1585년(선조 18) 2월 20일에는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재임 중이었고, 1589년(선조 22) 4월 1일에는 춘천 부사에 재임 중이었다.(明宗實錄, 宣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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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여 [記事] : 선조수정실록 3권/ 선조 2년(1569 기사 / 명 융경(隆慶) 3년) 3월 1일(을사) 1번째 기사/ 판중추부사 이황이 병을 이유로 귀향하다/ 판중추부사 이황 이 병을 이유로 귀향하였다. 이황 자신이 노병(老病)을 들어 시골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간곡히 청하면서 계속 장소(章疏)를 올리니 상이 인견하고 두세 번 간곡히 만류하였으나, 이황 은 더욱 강력히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ꡒ경은 지금 돌아갈 것인데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ꡓ하니, 이황이 대답하기를, ꡒ고인(古人)은 ꡐ치세(治世)가 걱정이 되고 명주(明主)가 위태롭다.ꡑ 하였습니다. 이는 명주는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고 치세에는 걱정할 만한 일이 없으므로, 독단적인 슬기로 대중을 제어하면서 여러 신하들을 경시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따라서 교만하고 사치스런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세대가 비록 치평(治平)의 시대인 듯하나 남쪽과 북쪽에 흔단이 있고 민생은 지쳐 있어 걱정할 만한 일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상의 자질이 고명하시어 여러 신하들의 재지(才智)가 성상의 뜻에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일을 논의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독단의 슬기로 세상을 이끌어가려는 조짐이 없지 않으므로, 식자들은 그 점에 대해 미리 염려하고 있습니다. 신이 전일에 《주역》 의 건괘(乾卦)에 ꡐ날으는 용이 하늘에 있다[飛龍在天]ꡑ는 것과, 또 ꡐ높이 오른 용이 후회가 있다[亢龍有悔]ꡑ는 말에 대해 아뢰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임금이 지나치게 스스로 뛰어난 체하여 신하들과 마음을 같이하고 덕을 함께 하지 않으면 어진이들이 아래에 있게 되어 도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이른바 높이 오른 용이 후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학문의 공정을 폐지하지 않아야 사의(私意)를 이겨 낼 수 있어 그러한 병통이 사라질 것입니다. 신이 전일 올렸던 《성학십도(聖學十圖)》 는 그것이 신의 사견(私見)이 아니라 모두가 선현(先賢)들이 했던 것인데, 그에 대한 공부는 신이 올린 차자(箚子)에서 사(思)자와 학(學)자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에 대해 생각을 하신다면 얻음이 더욱 깊어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소신이 충심을 바쳐 회언(誨言)을 올리는 뜻입니다.ꡓ하였다. 상이 다시 하고 싶은 말을 묻자 대답하기를, ꡒ우리나라에 사림(士林)의 화가 중엽부터 일어났는데, 폐조(廢朝)의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중종조(中宗朝)의 기묘사화(己卯士禍)는 현인(賢人) 군자(君子)가 모조리 큰 죄를 당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사(邪)와 정(正)이 뒤섞이게 되었고 간사한 무리들이 득세하였는데, 그들이 개인적으로 원한을 갚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묘의 여습(餘習)이라고 하였으므로 사림의 화가 연속되어 왔던 것입니다. 당시 명종(明宗) 은 어렸으므로 권간(權奸)들이 득세하여 한 사람이 패하고 나면 또 한 사람이 나와 뒤를 이어 용사했기 때문에, 사화가 차마 말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 지난 일들을 앞으로의 경계로 삼으소서. 예로부터 임금의 초정(初政)은 청명(淸明)하게 하여야 정직한 인물이 등용되므로 임금이 과실이 있으면 간쟁하였는데, 임금이 이에 대하여 싫증을 내게 마련입니다. 이때 간사한 무리가 그 기회를 노려 온갖 아양을 부리게 되는데, 그러면 임금은 마음속으로 만약 이런 사람을 임용하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겠다고 여겨 그때부터 소인배와 합하게 되어, 정직한 사람은 손 댈 곳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사태가 이에 이르면 소인배가 득세하여 못하는 짓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신정(新政)의 초기라서 모든 간쟁(諫諍)에 대해 뜻을 굽혀 따르고 있으므로 대과(大過)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러 성상의 마음이 혹시라도 달라진다면 꼭 오늘 같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리 된다면 그때는 간인들이 필시 승세를 타게 되어 초정(初政)과는 크게 상반될 것입니다. 당 현종(唐玄宗)의 개원(開元) 시기에는 어진 신하가 조정에 가득하여 태평을 이루었으나 현종 이 욕심이 많은 것을 기화로 이임보(李林甫)․양국충(楊國忠)이 오직 봉영(逢迎)을 일삼았으므로, 군자는 모두 떠났고 소인배만 남게 되어 끝내 천보(天寶)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똑같은 그 임금이면서 마치 두 사람의 일인 양 달랐던 것은, 처음에는 군자와 마음이 맞았다가 끝에 가서는 소인과 친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상께서는 이 점을 큰 경계로 삼아 선류(善類)를 보호하여 소인배들로 하여금 모함을 못하도록 하소서. 이것이 바로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복이며 신이 계고(戒告)하고 싶은 것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아뢴 바를 내 마땅히 경계로 삼으리라.ꡓ하였다. 또 묻기를, ꡒ경은 조신(朝臣)들 중에 추천할 만한 자가 없겠는가?ꡓ하니, 대답하기를, ꡒ오늘날 대신의 지위에 있는 이들이 모두 청신(淸愼)하고 육경(六卿)도 사특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수상(首相)에 있어서는 위의(危疑)스러운 즈음에 당해서도 음성이나 안색을 동요하지 않고 나라 형세를 태산처럼 안전한 자리에 올려놓았으니, 참으로 주석(柱石)같은 신하로서 의중(倚重)할 만한 사람으로는 그 사람보다 훌륭한 이가 없을 듯싶습니다.ꡓ하였다. 상이 또 학문의 선비로 누가 있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ꡒ그 점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옛날 어느 사람이 정자(程子) 에게 ꡐ문인(門人) 중에 누가 체득함이 있습니까?ꡑ라고 묻자, 정자 는 ꡐ체득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쉽게 말할 수 없다.ꡑ 하였는데, 그 당시 유작(游酢)․양시(楊時)․사양좌(謝良佐)․장역(張繹)․이유(李?)․윤돈(尹焞) 등 상당한 학자들이 있었으나 정자 가 감히 가벼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이 어떻게 감히 천일(天日)을 속여가며 아무가 체득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대승(奇大升) 같은 사람은 문자(文字)를 많이 보았고 또 이학(理學)에 있어서는 소견이 초월한 경지에 도달하여 통유(通儒)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수렴(收斂)의 공부가 좀 부족합니다.ꡓ하였다. 아룀이 끝나자 물러갔다.【 이황이 귀향할 때 명사(名士)들이 서울을 비우다시피 모두 나와 전송을 하면서 시를 읊어 작별의 정을 나누었다.
이황이 기대승(奇大升)․박순(朴淳) 두 사람의 시에 화답하고 여러 사람과 작별을 하면서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ꡐ가련하다 여러 성조에 은총을 받은 몸이 부질없이 일곱 차례나 조정을 오갔네[可憐異代承恩渥空作區區七往還]ꡑ라는 구절이 있었다.】 상이 처음 즉위했을 때는 영명(英明)하고 영오(穎悟)하여 온 나라가 성덕이 성취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시속의 말들이 날마다 탑전에서 떠들어대므로 상의 뜻이 유혹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황이 입조하여 언제나 성현의 학문으로 상을 권면했기 때문에 상이 사랑하고 공경했지만 마음을 비우고 자신에게 반성하는 실행이 없었다. 이리하여 이황은 원래가 겸퇴(謙退)할 마음을 갖고 있는데다 또 도(道)가 행해지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굳이 사양하고 물러가기를 청했는데,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모두 실망하였다. 집의(執義) 권덕여(權德與)가 상소를 올려, 정원이 만류할 것은 청하지 않고 지레 인견(引見)할 것을 청했고 또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기도 전에 지레 역말을 주어 보낼 것을 청한 것을 논하면서, ꡐ그를 만류한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도리어 말을 내주자는 청만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ꡑ고 하였다. 이 때문에 상이 체직(遞職)을 허락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2장 B면/ 【영인본】 25책 414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역사-전사(前史) / *역사-고사(故事) / *왕실-국왕(國王) / *사상-유학(儒學)(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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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여 [記事] : 선조수정실록 17권/ 선조 16년(1583 계미 / 명 만력(萬曆) 11년) 6월 1일(신해) 7번째 기사/ 홍문관 부제학 권덕여 등이 상차하여 이이가 한 일에 대해 논계하다/ 홍문관 부제학 권덕여(權德與), 전한 허봉(許?)․홍진(洪進)․홍적(洪迪)이 상차하기를, ꡒ병조 판서 이이는 학자 출신으로서 순서를 뛰어넘어 숭반(崇班)에 올랐는데, 의리와 충성을 다하여 특별하게 은총을 베푼 대우에 대하여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집요하게 자신의 의견만 내세웠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모의와 계획이 인정에 거슬려서 공론에 죄를 얻었으니, 공론이 어찌 발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선 요즈음의 일로 말하건대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품명(稟命)해야 함은 곧 신하의 직분인데도, 전폐(殿陛)를 지척에 두고서도 말을 바치라는 명령을 먼저 시행하고 나중에 아뢰었으니, 이는 나라의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한 행위에 가까운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출입하며 심한 질병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임금의 명에 교만한 태도를 지니고서 내조(內曹)에까지 왔으면서도 정원에 나가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임금의 명을 무시한 것에 해당됩니다. 이와 같으니 대간이 죄를 청한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이로서는 마땅히 죄를 인정하고 허물을 반성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할 것인데, 거취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면서 필설을 놀려 공론과 대항해 싸우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시론(時論)에 거슬렸다느니 좌우에 자문해 보시라느니 하며, 슬프고 괴로운 언사를 가지고 성상을 감동시켜 반드시 대간에게 죄를 돌리려고 하였으니, 그가 공론을 무시한 것이 어떻다하겠습니까. 공론이 있게 되면 만승 천자라도 오히려 자신을 굽히고 따르는 법인데, 일찍이 재상의 반열에 있었던 자로서 공론을 무시하고 거리낌이 없는 행위를 이렇게까지 한 자가 있었습니까. 이런 풍조가 계속 조장될 경우 그 폐단은 장차 온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게서 분주하게 명을 받게 하며 조금도 어김없이 그의 말대로만 하게 하는 결과를 빚게끔 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범수(范?) 가 이른바 ꡐ아래를 막고 위를 가리워 그 사욕을 성취시킨다.ꡑ273) 라고 한 것과 가깝게 되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습니까. 대체로 대간은 임금의 귀와 눈의 역할을 하면서 한때의 공론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 공론이 통하느냐 막히느냐에 따라서 나라가 다스려지고 혼란스럽게 되는 결과가 빚어지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역사를 탐구하여 전대의 잘잘못을 관찰해 보실 때 어찌 일찍이 재상의 지위에 있는 신분으로서 대간을 모욕하고 나라가 안전하게 된 경우가 있었습니까. 요즈음 말하는 이들은 혹 이이를 왕안석(王安石)에 비교하는데, 왕안석의 문장과 절행이야 어찌 이이가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왕안석이 교만하게 임금의 명을 무시한 것이 이이에게 있고 말하는 자를 배척한 것도 이이에게 있습니다. 명철하신 전하께서 어찌 그런 점을 통촉하지 못하시고 도리어 한 사람을 돌보기 위하여 대간을 억제하십니까. 신들은 뒷날의 화근이 이루 다 말할 수 없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신들이 처음에야 어찌 이이 의 방자스러움이 이렇게까지 심할 줄 알았겠습니까. 오직 그 한 생각에 편벽된 나머지 점점 해(害)가 심해졌는데 심지어는 대간의 입을 막고 온 나라를 자기에게 편하게 몰고 가는 등 못할 바가 없었으니, 이이의 죄가 여기에서 중대하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옛말에 ꡐ한 쪽 말만 들으면 간사함이 생기고 한 사람에게 맡기면 난을 일으킨다.ꡑ고 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공평하게 듣고 아울러 관찰하는 것으로 마음을 쓰시고, 한 사람에게 맡기고 치우치게 듣는 것을 경계하소서. 그리하여 이이만을 신하로 여기고 대간은 의식할 것이 없다고 여기지 마시어 한편으로는 사림(士林)을 보호하시고 한편으로는 처음과 끝이 모두 잘 되도록 하소서.ꡓ하니, 그대들이 진달한 뜻을 알았다고 답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17권 18장 A면/ 【영인본】 25책 518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註 273] 범수(范?) 가 이른바 ꡐ아래를 막고 위를 가리워 그 사욕을 성취시킨다.ꡑ : 범수는 중국 전국 시대의 정치가로 진 소왕(秦昭王)을 도와 나라를 부강하게 했는데, 이 말은 망국적인 행위를 지적하면서 소왕에게 간한 말이다. 《사기(史記)》 권79. ☞(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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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여 [記事] : 선조수정실록 17권/ 선조 16년(1583 계미 / 명 만력(萬曆) 11년) 8월 1일(경술) 1번째 기사/ 이희득․권덕여․홍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희득(李希得)을 사간으로 삼았다. 특지로 권덕여(權德與)를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홍적(洪迪)을 장연 현감(長淵縣監)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4책 17권 32장 B면/ 【영인본】 25책 52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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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514
예천한시회(第4回 醴泉 全國 漢詩大會 열려) [記事] :
제4회 예천전국한시대회가 2009년 10월 13일 오전 10시부터 예천 청소년수련관에서 열렸다.
예천한시회(회장 장병국)가 주관하는 이번 백일장에는 전국의 유림 및 한시회 소속 회원 등 250여 명이 참가해 다섯 자의 운자를 소재로 평소 자신이 갈고 닦은 솜씨를 시로서 마음껏 표현했다.
이날 백일장은 김수남 군수를 비롯한 기관단체장, 도ㆍ군의원, 박약회원, 향교전교를 비롯한 유림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식을 가진 후 고선관 선정 발표 및 위촉장을 수여하고 압운 압첨 발표를 거쳐 본격적인 대회가 시작됐다.
이날의 시제는 축 경북도청 예천ㆍ안동 이전(祝 慶北道廳 醴泉ㆍ安東 移轉)으로 압운은 향(鄕), 장(長), 향(香), 양(揚)이며, 말운 추첨 후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작시를 하고 작시가 끝난 후 관광버스 4대를 이용해 관내 효공원 및 양수발전소, 양궁장 등에 대한 투어를 실시했다.
투어를 마치고 장원 1명에게 100만 원의 상금을 지급하고 차상 2명, 차하 3명, 참방 20명, 가작 30명 등 입상자 56명에 대하여 시상을 했다.
(醴泉인터넷放送 2009-10-13 오후 2: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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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다례원(2009 醴泉단샘茶禮祝祭 열려 : 醴泉珍浩國際洋弓場에서 茶禮侍宴 및 競演) [記事] :
따뜻한 차향이 그리워지는 계절을 맞아 2009 예천단샘다례축제가 2009년 10월 13일 오전 11시부터 예천진호국제양궁장에서 열렸다.
예천다례원과 명원경북다도예술원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이번 다례축제에는 다례시연과 경연, 초청공연 등이 다채롭게 펼쳐져 전통 차의 향기와 예술의 멋스러움을 맛볼 수 있는 행사가 됐다.
이번 축제는 오전 11시 식전행사인 헌다례를 시작으로 김수남 군수와 기관ㆍ단체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식이 있고, 개회식이 끝난 후 명원경북지부의 색동말차 시연과 선은차회에서 채람 시연이 펼쳐졌다.
이어서 안동대 동양철학과와 성심어린이반의 아름다운 우리 절 시연이 있고 중식 후에는 장경자 명창의 예천아리랑 시연과 남기철 선생의 대금 연주가 펼쳐졌다.
이어 이날 행사의 대미를 장식할 두리자회와 말차의 차 경연이 펼쳐졌으며, 경연이 끝나고 함께 어우러지는 대동한마당을 끝으로 행사를 마쳤다.
(醴泉인터넷放送 2009-10-13 午後 2: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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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