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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025:김낙준會長(이필주/예천방문517)
예천의 자랑(2025) : 하리면 출신 김낙준 금성출판사 회장(附 예천읍 청복리 출신 이필주,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예천방문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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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준(金洛駿) :
1932- , 하리면 출생, 호는 운평, 은풍(殷豊)초등(16回) 졸업, 61년 대구 문화서점 입사,
65년 서울에서 금성출판사를 설립하여 그 사장, 대표이사 회장으로서 아동 도서와 <세계문학전집>, <국어대사전> 등 굵직한 기획과 특유의 영업 전략으로 입지를 구축, 94년 매출 600억 원 규모의 출판 재벌로 성장했다.
출판계 이력으로는 86년부터 대한출판문화협회 부회장을 맡았고, 89년 한국출판금고 이사장을 역임했고, 93년 책의 해 조직위원장을 지냈다.
독서새물결운동 추진위원장이다. 제41대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으로서 1994년 2월 회장 직선 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는 1947년 출협이 창립된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직선제이었다. 투표권을 가진 1,162사(社) 가운데 82%인 957사가 참여, 직선제의 열기를 실감케 한 선거에서 그가 얻은 표는 527표, 득표율로 따지면 55.18%로 그를 반대한 44.82%의 의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 ''''출협의 개혁''''이 그에게 맡겨진 가장 큰 과제로 떠올랐다.
금성출판문화재단 이사장, 한국출판문화재단 이사장이다.
(國民日報 1994.1.6 1994.2.24, 醴泉文學 24號 2001, 東亞닷컴 人物情報 2004, people.naver.com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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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준(出版界 選擧 熱氣/ 參考書業界 對 單行本業界/ 47年만에 첫 協會長 直選) [記事] : ◎김낙준 현회장/ꡒ개방 대비 뭉치고 사업 계속성 중요ꡓ/ 윤형두 부회장/ꡒ그 동안 참고서측 독식… 새인물 필요ꡓ// 책의 해를 막 넘긴 출판계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제41대 출판협회장 선거전으로 분주하다. 1994년 2월에 있을 회장 선거는 1947년 출협이 창립된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직선제인 데다 현 김낙준 회장(62․금성출판사)과 윤형두 수석부회장(59․범우사)이 나란히 출마를 선언, 경선이 이루어짐으로써 어느 때보다 높은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다. 더욱이 선거의 성격이 우리 출판계를 사실상 양분하고 있는 참고서와 단행본이라는 업계의 대결로 굳어지면서 1993년 말부터 시작된 양측의 득표전이 해가 바뀌면서 더욱 가열되고 있다. 이같은 구도는 일찌감치 출마 의사를 밝힌 윤 부회장에 이어 그 동안 공식적인 의사를 유보해오던 김 회장측이 1993년 말「책의 해」성과보고대회를 끝낸 뒤 측근들에게 재출마 의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본격화됐다. 김 회장측은 책의 해를 치르면서 남겨진 출판계의 과제 해결을 위한 사업의 계속성이 필요하다는 재출마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그는 발등에 떨어진 출판 개방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참고서단행본의 대결 구도가 아니라 범출판계의 결집이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정책 대결을 하겠다는 태세. 이에 비해 윤 부회장측은,『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다』며,「인물론」을 전면에 내세운 뒤, 그 동안 참고서 및 전집 쪽이 회장직을 독식해 온만큼 이 번에는 출판의 본령인 단행본이 맡을 차례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를 위해 범우사 부길만 기획실장을 주축으로한 선거대책본부를 구성, 참신한 선거 전략을 개발하는 한편 책과 어우러진「출판인 윤형두」의 외길 인생을 알리는 신문 광고를 시작, 바람몰이에 나섰다. 한국 출판 발전을 위한 머슴역을 자청하고 나선 두 사람은 역경을 헤쳐나와 일가를 이룬 국내 출판계의 간판임에는 같으나 걸어온 길은 판이한 점에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경북 예천 출생인 김 회장은 61년 대구 문화서점에 입사하면서 책과 인연을 맺은 이래 65년 빈손으로 상경, 금성출판사를 설립한 뒤 아동 도서와 세계문학전집, 국어대사전 등 굵직한 기획과 특유의 영업 전략으로 입지를 구축, 94년 현재 매출 6백억 원 규모의 출판 재벌로 성장했다. 출판계 이력으로는 86년부터 출협 부회장을 맡았으며 89년 출판금고 이사장을 역임했다. 전남 여수가 고향인 윤 부회장 역시 지난 66년 범우사를 창립한 이래 71년 월간 「다리」를 발행하면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등 갖은 어려움 끝에 1천5백여 종의 책을 펴내는 종합 출판사를 일구어 냈다. 수필가로 활동하면서「책의 길 나의 길」등 6권의 저서가 있으며 현재 출판학회 회장으로 있다. 국내 8천여 출판사 중 협회에 가입한 1천30여 회원사의 수장을 뽑는 이 번 선거는 출협 사무국이 1994년 1월 4일 마련한 선거관리규정이 이사회에서 통과되는대로 선거일이 공고되며 선거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2월 하순에 새로운「직선회장」이 탄생할 것으로 보인다.(손수호 記者 國民日報 1994-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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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준(出協 첫 直選 會長 김낙준 氏 : 冊과 사람들) [記事] : ◎ꡒ「출판개혁」더 늦출 수 없다ꡓ/ 개방 원년 살아남기… 공동 전략 급선무/ 독서진흥법 등 새물결 드라이브 선언//『어려운 때에 2년 간 출협의 살림을 맡게돼 어깨가 무겁습니다. 눈앞에 다가온 출판 개방의 파고를 지혜롭게 막아내 개방화 시대의 원년을 열어보일 것입니다』47년의 연륜을 가진 출판협회 사상 첫 직선 회장으로 선출된 김낙준 씨(62․금성출판사 회장)는 치열한 선거에서 어렵게 얻은 승리 때문인지 상기된 표정으로「국제화시대에서 살아 남는 출판」을 일성으로 내세웠다. 투표권을 가진 1,162사 가운데 82%인 957사가 참여, 직선제의 열기를 실감케 한 이 번 선거에서 그가 얻은 표는 527표. 득표율로 따지면 55.18%로 그를 반대한 44.82%의 의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출협의 개혁」이 그에게 맡겨진 가장 큰 과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 번 선거전은 직선제가 가지는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 보완책 마련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대표적인 경우가 무분별한 회원 가입 경쟁으로 선거를 앞두고 모두 202개 출판사가 새로 가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기존 회원사 가운데도 투표권 행사의 전제인 연체 회비를 무더기로 납부, 선거 자금의 유입이라는 의혹을 샀으며, 이 때문에 출협 사무국은 이 번 선거시즌 중 무려 2억 원대의 회비를 거둬들이는「개가」를 올리기도 했다.『직선제의 정신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회원 자격을 제한하는 방안을 찾아보려 합니다. 책을 한 권도 내지 않은 이른 바 무실적 출판사가 투표권을 갖는 것은 곤란한 일이지요. 따라서 다음 선거에는 합리적으로 정관을 다듬어「회원 가입 경쟁」같은 부끄러운 일이 재연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김 회장이 이 번 선거에서 내세운 공약은 모두 10가지.「일하는 출협」이라는 슬로건 아래 제시한 공약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독서진흥법 관철 △20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독서새물결 운동의 전개 △도서유통정보센터 설립 △작은 책 광고운동 등.
그러나 그는 이같은 사업 외에 선거 후유증을 의식, 범출판계의 화합을 외쳤다.『단행본 대 전집이라는 해묵은 대결 구도가 청산돼야 하리라 봅니다. 큰 단행본 회사에서 전집을 내고 전집 회사에서 단행본을 많이 내는 현실에서는 책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하나로 뭉쳐야 1993년「책의 해」행사에서와 같은 큰 힘이 나올 것입니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대구의 서점 점원 생활로 책과 인연을 맺은 그는 제도 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 채 그야말로「주경야독」으로 한문과 일본어를 터득했으며 맨몸으로 상경, 매출 1천억 원대 규모의 출판그룹을 일으킨 입지전적 인물. 선거를 치르면서 그의「2학」이 한 때 쟁점으로 떠오르기도 했으나 자신의 회사에 근무하고 있던 정치범의 아내를 해고하라는 안기부의 압력을 뿌리친 일화 등이 알려져 오히려 단행본 계열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했다.『경제를 움직이는 힘이 문화에서 나오고 그 문화를 담는 그릇이 책인 이상 출판이 국가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이제 출판이 구멍가게 수준에서 벗어나 산업의 단계로 뛰어 올라야 한다고 보며 지금이 중대한 고비라고 봅니다』(손수호 記者 國民日報 1994-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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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준 [記事] : 예천 출신, 1995년에 금성출판사(金星出版社)를 설립한 이래 1980년대에는 이미 한국 굴지의 대출판사로 발전시킨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92년부터 2대에 거쳐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으로 연임하면서 대한민국 출판 문화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뒤, 1998년에는 재단법인 <한국출판금고>의 이사장으로 추대되어 지금까지 출판계의 발전을 위해 재정적 후견인으로, 출판계의 원로로서 오직 출판 한국의 내일을 위해 헌신을 아끼지 않고 있다. 미술 애호가로서 세계적인 명성과 방대한 콜랙션을 남긴 미국의 석유왕 폴 케니는, ‘미술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않은 자는 완전한 문명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10여 년 전부터 그를 미치도록 빠지게 하고 있는 고려와 조선 시대의 각종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대한 무한한 찬미와 애호와 열의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1986년에 금성출판사가 <한국근대회화선집>(전 27권) 출판을 착수하였다. 이에 앞서 한국 및 세계의 문학 전집, 음악 전집에 뒤이어 <현대세계미술대전집>(전 12권, 1973), <원색세계미술문고>(전 50권, 1976) 등을 간행하면서 미술 관련 출판물 보급에 남다른 열의를 쏟은 바 있었다. 그는 초기에 고화(古畵)로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의 화조화(花鳥畵), 산수화 등을 수집하다가 유화(油畵)를 모으기 시작했고, 1990년 무렵에는 나혜석(羅蕙錫), 박수근(朴壽根), 남관(南寬), 김흥수(金興洙) 등의 귀한 작품이 입수되어 있었다. 뒤이어 이중섭(李仲燮), 김환기(金煥基), 장욱진(張旭鎭) 등의 작품도 그의 콜랙션에 들어갔다. 한국화로는 김기창(金基昶), 박래현(朴崍賢), 천경자(千鏡子)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부터 그의 관심과 심취의 수집은 이미 말한 고도자(古陶磁)의 경이로운 미(美)로 기울어져 갔다. 그 콜랙션의 질적 평가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오스트레일리아의 퀸스랜드미술관과 파우어하우스에서 꾸며지는 ‘조선 시대 한국 미술’ 출진 명품으로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선정한 70점 중에 그의 소장품 조선백자가 9점이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수 천 점에 이른 자신의 콜랙션을 장차 어떻게 사회화시킬 것인가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일찌기 중국 용정(龍井)에 대한민국의 민족시인 윤동주기념관(尹東柱記念館)을 건립하여 사유 재산의 사회 환원을 실현시킨 바 있던 그는 금성출판문화재단 명의 미술관을 부설할 계획이다. 본업인 출판사 경영의 새로운 진로도 물론 부단히 추구했던 그는 2000년 4월에 지식 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벤처회사 ‘푸르넷닷컴’을 새로이 설립했다. 이는 금성출판사에서 발행하는 학습지 <푸르넷> 회원에게 교육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각종 지식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사이버 시대에 걸맞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또는 그는 인터넷 미술관 사이트를 통해 천 년의 신비를 간직한 고려, 조선시대 예술 도자의 그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을 전세계인들이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할 계획이라고 한다. 탁월하게 성공한 출판 기업인으로 또 이를 기반으로 한 미술품 콜랙터로서 문화인의 뚜렷한 면모를 아울러 갖추고 있는 그는 오늘도 여전히 미술 작품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채 자신의 꿈을 의욕적으로 실현시켜 가고 있다.(김구일 醴泉文學 26號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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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읍 청복리 출신 이필주,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
이필주(21歲 때 韓國軍 入隊해 陞進 거듭 將校로 8年間 勤務, 敎會서 建立한 상동청년학원서 軍事訓練 等 가르쳐, 정동교회 擔任牧師로 獨立運動 積極 加擔, 2年間 獄苦, 화성 남양교회서 牧會 이끌며 平生 祖國獨立에 獻身) [記事] :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일찍이 초등학교 다닐 때 배우는 ‘3·1절 노래’의 앞부분이다. 이 노래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한민족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아니 도저히 잊혀질 수 없는 노래가 아닐까 싶다.
일제의 총칼 아래 신음하던 우리 민족이 종교·직업·지역을 가리지 않고 하나가 되어 독립을 외쳤던 3·1만세운동. 박은식(朴殷植) 선생은 ‘독립운동지혈사’에서 “1919년 3월 1일은 우리나라 2천만 민족이 정의·인도의 기치를 높이 들고 충(忠)과 신(信)을 갑옷으로 삼고, 붉은 피를 포화(砲火)로 대신하여 창세기 이래 미증유의 맨손혁명으로 세계무대에서 활동한 특기할 만한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기미년 3월1일 이후 3개월 동안 전국 방방곡곡에서 1천542회에 걸쳐 연인원 202만3천98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사망 7천509명, 부상 1만5천961명, 체포 4만6천948명의 인명 피해와, 교회당 47동, 학교 2동, 민가 715호가 소실되는 재산피해를 입었다.
이렇듯 분명 3·1운동은 우리 역사상 최대의 독립운동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3·1운동을 높이 기리는 노래에도 작은 왜곡(?)이 숨어있다. 노랫말에서처럼 밀물처럼 만세소리가 터진 것은 그날 ‘정오’가 아니라 오후 두 시였다.
역사 왜곡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의도적으로 저지르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크지 않은’ 잘못이 그만 5천만을 속이게(?) 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뒤로하고,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명 중 한 분이었던 이필주 선생을 찾아가보자.
이필주(李弼柱)는 1869년 12월 22일(음력 11월 9일)에 태어났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서울 정동, 경기 고양, 경북 예천 등 여러 가지 설이 전한다(張炳昌 註 : 예천읍 청복1리 도리터 출신).
본관은 공주(公州)이며, 아버지는 한학을 한 선비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태어날 당시 집안은 이미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는 5년 동안 한문을 공부하였지만 생활이 빈곤하여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고, 결국 13세의 나이에 제사(製絲) 일을 하며 가정을 돌봐야 했다.
18세 때는 아버지를 여의고 자신도 흑사병으로 죽을 고비를 겪었으며 막노동으로 근근이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21세(1890년) 때 친구의 권유로 구 한국군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농민군 진압에 동원되어 전주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훗날 회고에서는 ‘골육이 서로 싸우는 난리’에서 몹시 괴로워했음을 토로하고 있다. 그는 군대시절 규정을 잘 지키고 운동에도 남달리 노력하여 시험 때마다 승급을 거듭하였다. 말단 사병에서 시작하여 단시일에 참교(參校)·부교(副校)로 진급하였고, 이후 장교로 승진하여 8년간 근무하였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29세(1897) 때 김인숙(金仁淑)과 혼인하여 남매를 두는 등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평범하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1902년에 전염병으로 갑자기 두 자녀를 잃게 되면서 이필주의 삶은 크게 바뀌게 된다.
실의에 빠진 그가 결국 기독교에 귀의하여 새로운 삶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1902년 봄부터 상동교회에 다니던 이필주는 이듬해 세례를 받았으며, 가을에는 군대를 그만두고, 교회에서 운영하는 공옥학교(攻玉學校)의 체육교사로 근무하였다.
이어 교회 안에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이라는 중등교육기관이 건립되자 전덕기(성경), 주시경(국어), 장도빈·최남선(국사), 남궁억·현순(영어), 조성환(한문) 등 기라성 같은 교사들과 함께 청년 교육을 담당하였다.
군인시절 강건한 체력을 연마했던 그는 체육시간에 도수체조·구기운동은 물론 군사훈련도 맡아 가르쳤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덕기·김구·이동녕·신채호·양기탁·이상재·주시경·이필주 등은 상동교회에서 구국기도회를 열면서 늑약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운동을 펼쳐나갔다.
이후 상소운동으로는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진 정국을 바로잡기 어렵다고 판단한 뒤 이들은 각기 교육에 힘을 쏟는 등 장기적인 구국운동을 모색하였다.
1907년 이필주는 청파동 기도방에서 전도에 전념하는가 하면 기독교청년회(YMCA)의 체육교사직도 겸임하였다. 또한 당시 최대의 비밀결사이자 국권회복운동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특히 전덕기 목사가 신민회의 재무 책임을 맡게 되자 이필주는 최성모·김진호와 함께 전덕기를 도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29일 결국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이필주는 통분한 나머지 1주일간 단식하면서 두문불출하였다.
이듬해 불혹의 나이에 그는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고, 2년 뒤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 자격으로 왕십리교회에 파견되었다.
1915년에 목사가 되었으며, 1918년에는 기독교 감리회를 대표하는 정동교회 담임목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즈음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약소국의 독립문제가 크게 대두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우리 민족이 독립을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한편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구상해 나갔다.
때마침 1919년 1월21일 붕어한 고종황제의 독살설이 퍼지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게다가 만주·연해주지역 독립투사들의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과 동경에서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발표되면서 국내에서도 대규모 독립운동 기운이 고조되어 갔다.
이에 따라 거족적인 독립운동 계획이 점점 구체화되던 1919년 2월27일 이필주는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박희도·이갑성·오화영·최성모·김창준·신석구 등과 만나 함태영이 가져온 독립선언서 등 서류를 보고, 민족대표로서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로 하였다.
또한 기독교계 인사들이 모여 ‘민족대표’에 추대할 인물을 선정할 때 이필주는 기독교 감리회 대표로 33인에 참가하였다. 감리교회의 대표격인 정동교회의 담임목사인데다 사실상 감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그가 ‘민족대표’로 추대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거사를 하루 앞두고 손병희의 집에서 마지막 모임을 가진 ‘민족대표’들은 3월1일 오후 2시 탑동공원(塔洞公園=탑골공원, 서울 종로구 종로2가)에서 열기로 한 독립선언 계획을 변경하여 같은 시각 태화관(泰和館, 종로구 인사동)에서 거행하기로 하였다.
갑자기 장소를 바꾼 것은 당일 탑동공원에는 피끓는 학생·시민들이 많이 모일 것인바 행여 희생자가 다수 발생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다음날 오후 2시 길선주·김병조·정춘수·유여대 등을 제외한 29명의 ‘민족대표’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선언식 직후 민족대표들은 미리 연락을 받고 온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필주는 신문과정에서 “조선은 독립국이므로 조선인이 자주민이란 것을 생각하고 어디까지나 그 의사를 발표하려고 한 것”이었음을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결국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11월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이후 선생은 목회활동에 전념하였다.
1922년 9월 장로목사 안수를 받은 후 주로 전도회·부흥회 등을 통하여 활발한 강연활동을 펼쳤다. 그의 강연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선생은 목사로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동시에 젊은이들의 민족의식 고취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934년 65세의 나이로 중앙에서 은퇴한 뒤에는 수원의 남양교회(현재 화성시 남양동 557)를 중심으로 목회활동을 계속하였다.
이처럼 3·1운동 이후 선생은 겉으로 드러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종교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도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몇몇 인사가 나중에 친일(親日)로 돌아섰던 것과는 달리 선생은 끝까지 민족을 위한 지조와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강요 속에서도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했던 선생의 의연함은 이를 잘 대변해 준다.
선생은 1942년 4월21일 그토록 갈망하여 부르짖었던 ‘대한독립’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해방 후 1946년 9월 선생이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남양교회 앞에 선생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23년이 지난 뒤 선생의 발길이 머물렀던 상동·정동·만리현·용두동·창천·서강·미아리·왕십리·청파동·남양 등지 교회에서 뜻을 모아 이전의 비문을 한글로 보충하여 다시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민족대표’로서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갑성은 비문에서 “선생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생사를 불고하고 돌진하는 위대한 애국자”로 평하고 있다. 정부에서도 국권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년)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에서는 2002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피를 흘려가며 외적에게 대항할 줄 아는 민족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3·1운동은 그 좋은 본보기가 되었고,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이필주 선생은 3·1만세운동에 불을 당긴 ‘민족대표’의 한 분이었다.
김명우 경기도도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문학박사(京畿日報 2009-10-16)
->예천의 자랑(179) : 이필주(도리터 출신인 3.1운동의 민족대표)(作成 張炳昌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2003-1-30 照會 116)
-><예천의 자랑> 제2권(張炳昌 著 2004年) =270~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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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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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민제전 2009(2萬餘 名 參與한 가운데 第11回 郡民의 날 記念式 및 第53回 郡民體典 大盛況!) [記事] :
제53회 군민체육대회 및 제11회 군민의 날 기념식이 2009년 10월 16일 10시 30분 공설운동장에서 김수남 군수를 비롯한 각급 기관단체장, 출향인, 자매결연자치단체 인사 및 여성단체, 지역주민 등 2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개최됐다.
이날 선수단 입장식에는 읍·면마다 지역 농·특산물과 상징물을 이용한 독특한 조형물을 선보여 관람객들부터 뜨거운 박수갈채와 함께 탄성을 자아내게 했으며, 지역방송사 및 기자들이 입장식에서 벌어지는 화려하고 독특하고 멋진 장면을 영상으로 담기 위한 취재열기도 뜨거웠다.
김수남 군수는 대회사를 통해 "풍요로움이 가득한 결실의 계절을 맞아 군민 화합과 전진을 다짐하는 ''''제11회 군민의 날'''' 기념 및 ''''제53회 군민체전'''' 을 개최하게 된 것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하고 전국 각지의 출향인 및 군민 2만여 명이 참석해 준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김 군수는 또, "1300년 향토사에 길이 빛날 신 도청 유치를 기념하기 위해 흑응산에 상징누각인 청하루를 세우고 지금까지 닦아온 기반과 역량을 바탕으로 청하루의 꿈, 예천의 대망을 향해 전진할 것을 모든 군민들과 다짐한다"고 말했다.
입장식에 이어 군민의 날 기념식에서는 지난 8일 선정된 2009 예천군민상 수상자 4명에 대한 시상과 예천군의회 정영광 의장이 김수남 군수에게 민선 12년간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감사패를 전달했으며, 체육유공자에 대한 시상이 함께 열렸다.
특히, 28대의 버스를 이용하여 예천을 찾은 자매도시인 서울 마포구, 군포시와 서울 송파구.중랑구.마장동, 안양시, 천안시, 대구 남구.동구의 지역 여성단체 회원 등 방문객 1천200여 명은 입장식의 규모와 다채로움에 놀라워했다.
이어 벌어진 육상, 기마릴레이, 단체줄넘기, 여자 중량들기 등 각종 운동경기에는 지역민들의 열띤 응원 속에 지역과 개인의 명예를 걸고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쳤다.
또한, 대회 틈틈이 건강체조, 예천아리랑 공연, 매구 비보이 공연, 태권도 시범, 브라질 삼바공연 등 다채롭게 펼쳐진 각종 부대행사는 대회분위기 고조는 물론, 참석자들의 어깨을 들썩이게 했다.
번외 경기로는 여성단체 400m 계주와 어르신 공굴리기가 열렸으며 부대행사로 사진무료현상, 건강검진 이동홍보관, 가족사랑 가훈 써주기, 페이스페인팅 및 네일아트, 스포츠마사지 시술 등이 마련되어 주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편, 이날 종합우승은 유천면, 준우승 감천면, 3위 예천서구가 각각 차지했으며 입장상은 종합우승 호명면, 준우승 풍양면, 3위 지보면, 모범선수단상은 용문면 선수단이 차지했다.
군민체전에는 노재영 군포시장, 마포구 채진묵 기획재정국장, 서울 양천구 한정순 회장, 송파구 김옥금 회장, 중량구 권상순 회장, 성동구 이석권 구의회 부의장 및 안인옥 회장, 대구 동구 박태순 회장, 남구 이금명 회장, 안양시 신명숙 회장, 천안시 최경자 회장 등 많은 여성단체 회원들이 행사를 관람했다.
고향축제에 애정을 갖고 해마다 참여하고 있는 출향인 단체로는 재경예천군민회 이원교 회장, 재부산예천향우회 채용태 수석 부회장, 재대구예천향우회 조용래 회장, 재구미예천향우회 송석흠 회장, 재경남예천 향우회 안병중 회장 등 많은 출향인들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장 내빈석에는 반형식 전 국회의원과 17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신영국 전 국회의원이 참석하여 행사를 축하했으며 특히, 공군 제16전투비행단 김도호 단장이 참석하여 군민체전 성공을 기원하는 전투기 편대의 축하비행을 처음으로 펼쳐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김 군수는 "취임 당시 황량하기 그지없던 이곳 공설운동장 주변에 청소년수련관을 건립하고 테니스장과 산책로 등을 조성하여 군민들이 사랑하는 생활체육 공간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감개무량함을 느낀다는 소회를 밝힐 때는 참석자 모두가 숙연한 모습을 보여 모두가 예천을 한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날 행사가 개최된 예천공설운동장은 지난해 경북도청 유치를 계기로 13억여 원을 투입하여 스탠드에 의자와 성화대를 설치하고, 인조잔디 축구장과 육상보조경기장 등을 설치하여 신도청 시대에 걸맞는 체육기반 시설을 두루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9년도 군민제전 마지막을 장식하는 빅 이벤트로 마련된 경품 추첨에서 최고의 행운인 자동차 2대는 박부응(용문면 상금2리) 씨와, 이무희(용궁면 향석1리) 씨 등 70대 할머니들이 당첨되는 행운을 안기도 했다.
공설운동장 곳곳에는 2010년 김수남 군수의 임기 마지막을 아쉬워하는 "그동안 이룩하신 지역발전 곳곳에 베어있습니다(상리면)" , "수고하셨니더 군수님 !(하리면)" , "군수님 보문사랑 고맙습니다(보문면)" , "군수님 정말 애많이 쓰셨습니다. 고맙습니다(호명면)" , "군수님과 함께 3선 기간이 행복했습니다(개포면)" , "군수님 고생많이 하셨습니다(풍양면)" 등 김수남 군수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예천읍 체육회는 "인심좋고 살기좋은 묽 맑은 청정 예천으로 오십시오! 김수남 군수님 고맙습니다" 란 대형 현수막을 크레인에 장착하여 내년이면 군수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이날 예천군민체전 사상 처음 시도된 성화봉송 마지막 주자로는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인 예천군청 양궁팀 소속의 남자 장용호, 여자 윤옥희 선수가 선정되어 성화대에 불을 점화하는 영예를 안았다.
군민체육대회 점심시간에는 임시로 마련된 10여 개의 식당에 2만여 명의 관람객들이 동시에 몰려들어 북세통을 이루며 내년 체전에는 더 많은 식당을 설치해야 한다는 지적과 함께 식당 주인들은 오랜만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한성 국회의원은 이날 부산고등법원 및 부산고등검찰청에 대한 국정감사에 참여하느라 행사에 불참했으나 부인 이은희 여사가 온종일 행사장 곳곳을 돌며 군민들에게 인사했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10-17 오전 9: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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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민제전 2009(郡民祭典 參席 爲해 醴泉 訪問한 出鄕人 및 姉妹團體長 爲한 晩餐行事 開催!) [記事] :
제33회 예천문화재 및 제53회 군민의 날 기념식과 군민체전을 축하하기 위해 예천을 방문한 출향인, 자매단체장들에 대한 환영만찬 행사가 2009년 10월 15일 오후 4시 30분 예천진호국제양궁장 문화체육센터에서 개최됐다.
이날 행사에는 김수남 군수, 이한성 국회의원, 이현준.윤영식 도의원, 예천군 관내 각 기관단체장, 자매단체인 마포구청 노재명 구청장, 12개 읍면 출신의 출향인 등 500여 명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김수남 군수는 환영사를 통해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군민의 날 기념식 하루 전에 예천을 방문한 출향인들을 군민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이번 군민제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한성 의원은 "풍년농사를 이룩하고 모든 군민들이 풍요로운 마음으로 이번 행사에 참가하는 것을 보면서 예천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출향인들의 고향사랑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는 축사를 했다.
한편, 이날 행사에 참석한 석송회 임혜숙 회장과 이한성 국회의원 부인이 한자리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건배를 힘차게 하자 참석자 모두가 박수로 축하, 행사장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10-16 오전 8: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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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준(金洛駿) :
1932- , 하리면 출생, 호는 운평, 은풍(殷豊)초등(16回) 졸업, 61년 대구 문화서점 입사,
65년 서울에서 금성출판사를 설립하여 그 사장, 대표이사 회장으로서 아동 도서와 <세계문학전집>, <국어대사전> 등 굵직한 기획과 특유의 영업 전략으로 입지를 구축, 94년 매출 600억 원 규모의 출판 재벌로 성장했다.
출판계 이력으로는 86년부터 대한출판문화협회 부회장을 맡았고, 89년 한국출판금고 이사장을 역임했고, 93년 책의 해 조직위원장을 지냈다.
독서새물결운동 추진위원장이다. 제41대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으로서 1994년 2월 회장 직선 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는 1947년 출협이 창립된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직선제이었다. 투표권을 가진 1,162사(社) 가운데 82%인 957사가 참여, 직선제의 열기를 실감케 한 선거에서 그가 얻은 표는 527표, 득표율로 따지면 55.18%로 그를 반대한 44.82%의 의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 ''''출협의 개혁''''이 그에게 맡겨진 가장 큰 과제로 떠올랐다.
금성출판문화재단 이사장, 한국출판문화재단 이사장이다.
(國民日報 1994.1.6 1994.2.24, 醴泉文學 24號 2001, 東亞닷컴 人物情報 2004, people.naver.com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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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준(出版界 選擧 熱氣/ 參考書業界 對 單行本業界/ 47年만에 첫 協會長 直選) [記事] : ◎김낙준 현회장/ꡒ개방 대비 뭉치고 사업 계속성 중요ꡓ/ 윤형두 부회장/ꡒ그 동안 참고서측 독식… 새인물 필요ꡓ// 책의 해를 막 넘긴 출판계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제41대 출판협회장 선거전으로 분주하다. 1994년 2월에 있을 회장 선거는 1947년 출협이 창립된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직선제인 데다 현 김낙준 회장(62․금성출판사)과 윤형두 수석부회장(59․범우사)이 나란히 출마를 선언, 경선이 이루어짐으로써 어느 때보다 높은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다. 더욱이 선거의 성격이 우리 출판계를 사실상 양분하고 있는 참고서와 단행본이라는 업계의 대결로 굳어지면서 1993년 말부터 시작된 양측의 득표전이 해가 바뀌면서 더욱 가열되고 있다. 이같은 구도는 일찌감치 출마 의사를 밝힌 윤 부회장에 이어 그 동안 공식적인 의사를 유보해오던 김 회장측이 1993년 말「책의 해」성과보고대회를 끝낸 뒤 측근들에게 재출마 의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본격화됐다. 김 회장측은 책의 해를 치르면서 남겨진 출판계의 과제 해결을 위한 사업의 계속성이 필요하다는 재출마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그는 발등에 떨어진 출판 개방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참고서단행본의 대결 구도가 아니라 범출판계의 결집이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정책 대결을 하겠다는 태세. 이에 비해 윤 부회장측은,『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다』며,「인물론」을 전면에 내세운 뒤, 그 동안 참고서 및 전집 쪽이 회장직을 독식해 온만큼 이 번에는 출판의 본령인 단행본이 맡을 차례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를 위해 범우사 부길만 기획실장을 주축으로한 선거대책본부를 구성, 참신한 선거 전략을 개발하는 한편 책과 어우러진「출판인 윤형두」의 외길 인생을 알리는 신문 광고를 시작, 바람몰이에 나섰다. 한국 출판 발전을 위한 머슴역을 자청하고 나선 두 사람은 역경을 헤쳐나와 일가를 이룬 국내 출판계의 간판임에는 같으나 걸어온 길은 판이한 점에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경북 예천 출생인 김 회장은 61년 대구 문화서점에 입사하면서 책과 인연을 맺은 이래 65년 빈손으로 상경, 금성출판사를 설립한 뒤 아동 도서와 세계문학전집, 국어대사전 등 굵직한 기획과 특유의 영업 전략으로 입지를 구축, 94년 현재 매출 6백억 원 규모의 출판 재벌로 성장했다. 출판계 이력으로는 86년부터 출협 부회장을 맡았으며 89년 출판금고 이사장을 역임했다. 전남 여수가 고향인 윤 부회장 역시 지난 66년 범우사를 창립한 이래 71년 월간 「다리」를 발행하면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등 갖은 어려움 끝에 1천5백여 종의 책을 펴내는 종합 출판사를 일구어 냈다. 수필가로 활동하면서「책의 길 나의 길」등 6권의 저서가 있으며 현재 출판학회 회장으로 있다. 국내 8천여 출판사 중 협회에 가입한 1천30여 회원사의 수장을 뽑는 이 번 선거는 출협 사무국이 1994년 1월 4일 마련한 선거관리규정이 이사회에서 통과되는대로 선거일이 공고되며 선거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2월 하순에 새로운「직선회장」이 탄생할 것으로 보인다.(손수호 記者 國民日報 1994-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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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준(出協 첫 直選 會長 김낙준 氏 : 冊과 사람들) [記事] : ◎ꡒ「출판개혁」더 늦출 수 없다ꡓ/ 개방 원년 살아남기… 공동 전략 급선무/ 독서진흥법 등 새물결 드라이브 선언//『어려운 때에 2년 간 출협의 살림을 맡게돼 어깨가 무겁습니다. 눈앞에 다가온 출판 개방의 파고를 지혜롭게 막아내 개방화 시대의 원년을 열어보일 것입니다』47년의 연륜을 가진 출판협회 사상 첫 직선 회장으로 선출된 김낙준 씨(62․금성출판사 회장)는 치열한 선거에서 어렵게 얻은 승리 때문인지 상기된 표정으로「국제화시대에서 살아 남는 출판」을 일성으로 내세웠다. 투표권을 가진 1,162사 가운데 82%인 957사가 참여, 직선제의 열기를 실감케 한 이 번 선거에서 그가 얻은 표는 527표. 득표율로 따지면 55.18%로 그를 반대한 44.82%의 의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출협의 개혁」이 그에게 맡겨진 가장 큰 과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 번 선거전은 직선제가 가지는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 보완책 마련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대표적인 경우가 무분별한 회원 가입 경쟁으로 선거를 앞두고 모두 202개 출판사가 새로 가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기존 회원사 가운데도 투표권 행사의 전제인 연체 회비를 무더기로 납부, 선거 자금의 유입이라는 의혹을 샀으며, 이 때문에 출협 사무국은 이 번 선거시즌 중 무려 2억 원대의 회비를 거둬들이는「개가」를 올리기도 했다.『직선제의 정신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회원 자격을 제한하는 방안을 찾아보려 합니다. 책을 한 권도 내지 않은 이른 바 무실적 출판사가 투표권을 갖는 것은 곤란한 일이지요. 따라서 다음 선거에는 합리적으로 정관을 다듬어「회원 가입 경쟁」같은 부끄러운 일이 재연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김 회장이 이 번 선거에서 내세운 공약은 모두 10가지.「일하는 출협」이라는 슬로건 아래 제시한 공약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독서진흥법 관철 △20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독서새물결 운동의 전개 △도서유통정보센터 설립 △작은 책 광고운동 등.
그러나 그는 이같은 사업 외에 선거 후유증을 의식, 범출판계의 화합을 외쳤다.『단행본 대 전집이라는 해묵은 대결 구도가 청산돼야 하리라 봅니다. 큰 단행본 회사에서 전집을 내고 전집 회사에서 단행본을 많이 내는 현실에서는 책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하나로 뭉쳐야 1993년「책의 해」행사에서와 같은 큰 힘이 나올 것입니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대구의 서점 점원 생활로 책과 인연을 맺은 그는 제도 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 채 그야말로「주경야독」으로 한문과 일본어를 터득했으며 맨몸으로 상경, 매출 1천억 원대 규모의 출판그룹을 일으킨 입지전적 인물. 선거를 치르면서 그의「2학」이 한 때 쟁점으로 떠오르기도 했으나 자신의 회사에 근무하고 있던 정치범의 아내를 해고하라는 안기부의 압력을 뿌리친 일화 등이 알려져 오히려 단행본 계열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했다.『경제를 움직이는 힘이 문화에서 나오고 그 문화를 담는 그릇이 책인 이상 출판이 국가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이제 출판이 구멍가게 수준에서 벗어나 산업의 단계로 뛰어 올라야 한다고 보며 지금이 중대한 고비라고 봅니다』(손수호 記者 國民日報 1994-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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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준 [記事] : 예천 출신, 1995년에 금성출판사(金星出版社)를 설립한 이래 1980년대에는 이미 한국 굴지의 대출판사로 발전시킨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92년부터 2대에 거쳐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으로 연임하면서 대한민국 출판 문화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뒤, 1998년에는 재단법인 <한국출판금고>의 이사장으로 추대되어 지금까지 출판계의 발전을 위해 재정적 후견인으로, 출판계의 원로로서 오직 출판 한국의 내일을 위해 헌신을 아끼지 않고 있다. 미술 애호가로서 세계적인 명성과 방대한 콜랙션을 남긴 미국의 석유왕 폴 케니는, ‘미술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않은 자는 완전한 문명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10여 년 전부터 그를 미치도록 빠지게 하고 있는 고려와 조선 시대의 각종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대한 무한한 찬미와 애호와 열의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1986년에 금성출판사가 <한국근대회화선집>(전 27권) 출판을 착수하였다. 이에 앞서 한국 및 세계의 문학 전집, 음악 전집에 뒤이어 <현대세계미술대전집>(전 12권, 1973), <원색세계미술문고>(전 50권, 1976) 등을 간행하면서 미술 관련 출판물 보급에 남다른 열의를 쏟은 바 있었다. 그는 초기에 고화(古畵)로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의 화조화(花鳥畵), 산수화 등을 수집하다가 유화(油畵)를 모으기 시작했고, 1990년 무렵에는 나혜석(羅蕙錫), 박수근(朴壽根), 남관(南寬), 김흥수(金興洙) 등의 귀한 작품이 입수되어 있었다. 뒤이어 이중섭(李仲燮), 김환기(金煥基), 장욱진(張旭鎭) 등의 작품도 그의 콜랙션에 들어갔다. 한국화로는 김기창(金基昶), 박래현(朴崍賢), 천경자(千鏡子)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부터 그의 관심과 심취의 수집은 이미 말한 고도자(古陶磁)의 경이로운 미(美)로 기울어져 갔다. 그 콜랙션의 질적 평가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오스트레일리아의 퀸스랜드미술관과 파우어하우스에서 꾸며지는 ‘조선 시대 한국 미술’ 출진 명품으로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선정한 70점 중에 그의 소장품 조선백자가 9점이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수 천 점에 이른 자신의 콜랙션을 장차 어떻게 사회화시킬 것인가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일찌기 중국 용정(龍井)에 대한민국의 민족시인 윤동주기념관(尹東柱記念館)을 건립하여 사유 재산의 사회 환원을 실현시킨 바 있던 그는 금성출판문화재단 명의 미술관을 부설할 계획이다. 본업인 출판사 경영의 새로운 진로도 물론 부단히 추구했던 그는 2000년 4월에 지식 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벤처회사 ‘푸르넷닷컴’을 새로이 설립했다. 이는 금성출판사에서 발행하는 학습지 <푸르넷> 회원에게 교육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각종 지식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사이버 시대에 걸맞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또는 그는 인터넷 미술관 사이트를 통해 천 년의 신비를 간직한 고려, 조선시대 예술 도자의 그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을 전세계인들이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할 계획이라고 한다. 탁월하게 성공한 출판 기업인으로 또 이를 기반으로 한 미술품 콜랙터로서 문화인의 뚜렷한 면모를 아울러 갖추고 있는 그는 오늘도 여전히 미술 작품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채 자신의 꿈을 의욕적으로 실현시켜 가고 있다.(김구일 醴泉文學 26號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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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읍 청복리 출신 이필주,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
이필주(21歲 때 韓國軍 入隊해 陞進 거듭 將校로 8年間 勤務, 敎會서 建立한 상동청년학원서 軍事訓練 等 가르쳐, 정동교회 擔任牧師로 獨立運動 積極 加擔, 2年間 獄苦, 화성 남양교회서 牧會 이끌며 平生 祖國獨立에 獻身) [記事] :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일찍이 초등학교 다닐 때 배우는 ‘3·1절 노래’의 앞부분이다. 이 노래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한민족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아니 도저히 잊혀질 수 없는 노래가 아닐까 싶다.
일제의 총칼 아래 신음하던 우리 민족이 종교·직업·지역을 가리지 않고 하나가 되어 독립을 외쳤던 3·1만세운동. 박은식(朴殷植) 선생은 ‘독립운동지혈사’에서 “1919년 3월 1일은 우리나라 2천만 민족이 정의·인도의 기치를 높이 들고 충(忠)과 신(信)을 갑옷으로 삼고, 붉은 피를 포화(砲火)로 대신하여 창세기 이래 미증유의 맨손혁명으로 세계무대에서 활동한 특기할 만한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기미년 3월1일 이후 3개월 동안 전국 방방곡곡에서 1천542회에 걸쳐 연인원 202만3천98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사망 7천509명, 부상 1만5천961명, 체포 4만6천948명의 인명 피해와, 교회당 47동, 학교 2동, 민가 715호가 소실되는 재산피해를 입었다.
이렇듯 분명 3·1운동은 우리 역사상 최대의 독립운동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3·1운동을 높이 기리는 노래에도 작은 왜곡(?)이 숨어있다. 노랫말에서처럼 밀물처럼 만세소리가 터진 것은 그날 ‘정오’가 아니라 오후 두 시였다.
역사 왜곡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의도적으로 저지르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크지 않은’ 잘못이 그만 5천만을 속이게(?) 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뒤로하고,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명 중 한 분이었던 이필주 선생을 찾아가보자.
이필주(李弼柱)는 1869년 12월 22일(음력 11월 9일)에 태어났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서울 정동, 경기 고양, 경북 예천 등 여러 가지 설이 전한다(張炳昌 註 : 예천읍 청복1리 도리터 출신).
본관은 공주(公州)이며, 아버지는 한학을 한 선비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태어날 당시 집안은 이미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는 5년 동안 한문을 공부하였지만 생활이 빈곤하여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고, 결국 13세의 나이에 제사(製絲) 일을 하며 가정을 돌봐야 했다.
18세 때는 아버지를 여의고 자신도 흑사병으로 죽을 고비를 겪었으며 막노동으로 근근이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21세(1890년) 때 친구의 권유로 구 한국군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농민군 진압에 동원되어 전주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훗날 회고에서는 ‘골육이 서로 싸우는 난리’에서 몹시 괴로워했음을 토로하고 있다. 그는 군대시절 규정을 잘 지키고 운동에도 남달리 노력하여 시험 때마다 승급을 거듭하였다. 말단 사병에서 시작하여 단시일에 참교(參校)·부교(副校)로 진급하였고, 이후 장교로 승진하여 8년간 근무하였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29세(1897) 때 김인숙(金仁淑)과 혼인하여 남매를 두는 등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평범하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1902년에 전염병으로 갑자기 두 자녀를 잃게 되면서 이필주의 삶은 크게 바뀌게 된다.
실의에 빠진 그가 결국 기독교에 귀의하여 새로운 삶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1902년 봄부터 상동교회에 다니던 이필주는 이듬해 세례를 받았으며, 가을에는 군대를 그만두고, 교회에서 운영하는 공옥학교(攻玉學校)의 체육교사로 근무하였다.
이어 교회 안에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이라는 중등교육기관이 건립되자 전덕기(성경), 주시경(국어), 장도빈·최남선(국사), 남궁억·현순(영어), 조성환(한문) 등 기라성 같은 교사들과 함께 청년 교육을 담당하였다.
군인시절 강건한 체력을 연마했던 그는 체육시간에 도수체조·구기운동은 물론 군사훈련도 맡아 가르쳤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덕기·김구·이동녕·신채호·양기탁·이상재·주시경·이필주 등은 상동교회에서 구국기도회를 열면서 늑약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운동을 펼쳐나갔다.
이후 상소운동으로는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진 정국을 바로잡기 어렵다고 판단한 뒤 이들은 각기 교육에 힘을 쏟는 등 장기적인 구국운동을 모색하였다.
1907년 이필주는 청파동 기도방에서 전도에 전념하는가 하면 기독교청년회(YMCA)의 체육교사직도 겸임하였다. 또한 당시 최대의 비밀결사이자 국권회복운동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특히 전덕기 목사가 신민회의 재무 책임을 맡게 되자 이필주는 최성모·김진호와 함께 전덕기를 도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29일 결국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이필주는 통분한 나머지 1주일간 단식하면서 두문불출하였다.
이듬해 불혹의 나이에 그는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고, 2년 뒤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 자격으로 왕십리교회에 파견되었다.
1915년에 목사가 되었으며, 1918년에는 기독교 감리회를 대표하는 정동교회 담임목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즈음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약소국의 독립문제가 크게 대두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우리 민족이 독립을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한편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구상해 나갔다.
때마침 1919년 1월21일 붕어한 고종황제의 독살설이 퍼지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게다가 만주·연해주지역 독립투사들의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과 동경에서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발표되면서 국내에서도 대규모 독립운동 기운이 고조되어 갔다.
이에 따라 거족적인 독립운동 계획이 점점 구체화되던 1919년 2월27일 이필주는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박희도·이갑성·오화영·최성모·김창준·신석구 등과 만나 함태영이 가져온 독립선언서 등 서류를 보고, 민족대표로서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로 하였다.
또한 기독교계 인사들이 모여 ‘민족대표’에 추대할 인물을 선정할 때 이필주는 기독교 감리회 대표로 33인에 참가하였다. 감리교회의 대표격인 정동교회의 담임목사인데다 사실상 감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그가 ‘민족대표’로 추대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거사를 하루 앞두고 손병희의 집에서 마지막 모임을 가진 ‘민족대표’들은 3월1일 오후 2시 탑동공원(塔洞公園=탑골공원, 서울 종로구 종로2가)에서 열기로 한 독립선언 계획을 변경하여 같은 시각 태화관(泰和館, 종로구 인사동)에서 거행하기로 하였다.
갑자기 장소를 바꾼 것은 당일 탑동공원에는 피끓는 학생·시민들이 많이 모일 것인바 행여 희생자가 다수 발생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다음날 오후 2시 길선주·김병조·정춘수·유여대 등을 제외한 29명의 ‘민족대표’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선언식 직후 민족대표들은 미리 연락을 받고 온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필주는 신문과정에서 “조선은 독립국이므로 조선인이 자주민이란 것을 생각하고 어디까지나 그 의사를 발표하려고 한 것”이었음을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결국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11월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이후 선생은 목회활동에 전념하였다.
1922년 9월 장로목사 안수를 받은 후 주로 전도회·부흥회 등을 통하여 활발한 강연활동을 펼쳤다. 그의 강연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선생은 목사로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동시에 젊은이들의 민족의식 고취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934년 65세의 나이로 중앙에서 은퇴한 뒤에는 수원의 남양교회(현재 화성시 남양동 557)를 중심으로 목회활동을 계속하였다.
이처럼 3·1운동 이후 선생은 겉으로 드러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종교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도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몇몇 인사가 나중에 친일(親日)로 돌아섰던 것과는 달리 선생은 끝까지 민족을 위한 지조와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강요 속에서도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했던 선생의 의연함은 이를 잘 대변해 준다.
선생은 1942년 4월21일 그토록 갈망하여 부르짖었던 ‘대한독립’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해방 후 1946년 9월 선생이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남양교회 앞에 선생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23년이 지난 뒤 선생의 발길이 머물렀던 상동·정동·만리현·용두동·창천·서강·미아리·왕십리·청파동·남양 등지 교회에서 뜻을 모아 이전의 비문을 한글로 보충하여 다시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민족대표’로서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갑성은 비문에서 “선생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생사를 불고하고 돌진하는 위대한 애국자”로 평하고 있다. 정부에서도 국권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년)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에서는 2002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피를 흘려가며 외적에게 대항할 줄 아는 민족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3·1운동은 그 좋은 본보기가 되었고,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이필주 선생은 3·1만세운동에 불을 당긴 ‘민족대표’의 한 분이었다.
김명우 경기도도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문학박사(京畿日報 2009-10-16)
->예천의 자랑(179) : 이필주(도리터 출신인 3.1운동의 민족대표)(作成 張炳昌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2003-1-30 照會 116)
-><예천의 자랑> 제2권(張炳昌 著 2004年) =270~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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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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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민제전 2009(2萬餘 名 參與한 가운데 第11回 郡民의 날 記念式 및 第53回 郡民體典 大盛況!) [記事] :
제53회 군민체육대회 및 제11회 군민의 날 기념식이 2009년 10월 16일 10시 30분 공설운동장에서 김수남 군수를 비롯한 각급 기관단체장, 출향인, 자매결연자치단체 인사 및 여성단체, 지역주민 등 2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개최됐다.
이날 선수단 입장식에는 읍·면마다 지역 농·특산물과 상징물을 이용한 독특한 조형물을 선보여 관람객들부터 뜨거운 박수갈채와 함께 탄성을 자아내게 했으며, 지역방송사 및 기자들이 입장식에서 벌어지는 화려하고 독특하고 멋진 장면을 영상으로 담기 위한 취재열기도 뜨거웠다.
김수남 군수는 대회사를 통해 "풍요로움이 가득한 결실의 계절을 맞아 군민 화합과 전진을 다짐하는 ''''제11회 군민의 날'''' 기념 및 ''''제53회 군민체전'''' 을 개최하게 된 것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하고 전국 각지의 출향인 및 군민 2만여 명이 참석해 준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김 군수는 또, "1300년 향토사에 길이 빛날 신 도청 유치를 기념하기 위해 흑응산에 상징누각인 청하루를 세우고 지금까지 닦아온 기반과 역량을 바탕으로 청하루의 꿈, 예천의 대망을 향해 전진할 것을 모든 군민들과 다짐한다"고 말했다.
입장식에 이어 군민의 날 기념식에서는 지난 8일 선정된 2009 예천군민상 수상자 4명에 대한 시상과 예천군의회 정영광 의장이 김수남 군수에게 민선 12년간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감사패를 전달했으며, 체육유공자에 대한 시상이 함께 열렸다.
특히, 28대의 버스를 이용하여 예천을 찾은 자매도시인 서울 마포구, 군포시와 서울 송파구.중랑구.마장동, 안양시, 천안시, 대구 남구.동구의 지역 여성단체 회원 등 방문객 1천200여 명은 입장식의 규모와 다채로움에 놀라워했다.
이어 벌어진 육상, 기마릴레이, 단체줄넘기, 여자 중량들기 등 각종 운동경기에는 지역민들의 열띤 응원 속에 지역과 개인의 명예를 걸고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쳤다.
또한, 대회 틈틈이 건강체조, 예천아리랑 공연, 매구 비보이 공연, 태권도 시범, 브라질 삼바공연 등 다채롭게 펼쳐진 각종 부대행사는 대회분위기 고조는 물론, 참석자들의 어깨을 들썩이게 했다.
번외 경기로는 여성단체 400m 계주와 어르신 공굴리기가 열렸으며 부대행사로 사진무료현상, 건강검진 이동홍보관, 가족사랑 가훈 써주기, 페이스페인팅 및 네일아트, 스포츠마사지 시술 등이 마련되어 주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편, 이날 종합우승은 유천면, 준우승 감천면, 3위 예천서구가 각각 차지했으며 입장상은 종합우승 호명면, 준우승 풍양면, 3위 지보면, 모범선수단상은 용문면 선수단이 차지했다.
군민체전에는 노재영 군포시장, 마포구 채진묵 기획재정국장, 서울 양천구 한정순 회장, 송파구 김옥금 회장, 중량구 권상순 회장, 성동구 이석권 구의회 부의장 및 안인옥 회장, 대구 동구 박태순 회장, 남구 이금명 회장, 안양시 신명숙 회장, 천안시 최경자 회장 등 많은 여성단체 회원들이 행사를 관람했다.
고향축제에 애정을 갖고 해마다 참여하고 있는 출향인 단체로는 재경예천군민회 이원교 회장, 재부산예천향우회 채용태 수석 부회장, 재대구예천향우회 조용래 회장, 재구미예천향우회 송석흠 회장, 재경남예천 향우회 안병중 회장 등 많은 출향인들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장 내빈석에는 반형식 전 국회의원과 17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신영국 전 국회의원이 참석하여 행사를 축하했으며 특히, 공군 제16전투비행단 김도호 단장이 참석하여 군민체전 성공을 기원하는 전투기 편대의 축하비행을 처음으로 펼쳐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김 군수는 "취임 당시 황량하기 그지없던 이곳 공설운동장 주변에 청소년수련관을 건립하고 테니스장과 산책로 등을 조성하여 군민들이 사랑하는 생활체육 공간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감개무량함을 느낀다는 소회를 밝힐 때는 참석자 모두가 숙연한 모습을 보여 모두가 예천을 한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날 행사가 개최된 예천공설운동장은 지난해 경북도청 유치를 계기로 13억여 원을 투입하여 스탠드에 의자와 성화대를 설치하고, 인조잔디 축구장과 육상보조경기장 등을 설치하여 신도청 시대에 걸맞는 체육기반 시설을 두루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9년도 군민제전 마지막을 장식하는 빅 이벤트로 마련된 경품 추첨에서 최고의 행운인 자동차 2대는 박부응(용문면 상금2리) 씨와, 이무희(용궁면 향석1리) 씨 등 70대 할머니들이 당첨되는 행운을 안기도 했다.
공설운동장 곳곳에는 2010년 김수남 군수의 임기 마지막을 아쉬워하는 "그동안 이룩하신 지역발전 곳곳에 베어있습니다(상리면)" , "수고하셨니더 군수님 !(하리면)" , "군수님 보문사랑 고맙습니다(보문면)" , "군수님 정말 애많이 쓰셨습니다. 고맙습니다(호명면)" , "군수님과 함께 3선 기간이 행복했습니다(개포면)" , "군수님 고생많이 하셨습니다(풍양면)" 등 김수남 군수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예천읍 체육회는 "인심좋고 살기좋은 묽 맑은 청정 예천으로 오십시오! 김수남 군수님 고맙습니다" 란 대형 현수막을 크레인에 장착하여 내년이면 군수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이날 예천군민체전 사상 처음 시도된 성화봉송 마지막 주자로는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인 예천군청 양궁팀 소속의 남자 장용호, 여자 윤옥희 선수가 선정되어 성화대에 불을 점화하는 영예를 안았다.
군민체육대회 점심시간에는 임시로 마련된 10여 개의 식당에 2만여 명의 관람객들이 동시에 몰려들어 북세통을 이루며 내년 체전에는 더 많은 식당을 설치해야 한다는 지적과 함께 식당 주인들은 오랜만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한성 국회의원은 이날 부산고등법원 및 부산고등검찰청에 대한 국정감사에 참여하느라 행사에 불참했으나 부인 이은희 여사가 온종일 행사장 곳곳을 돌며 군민들에게 인사했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10-17 오전 9: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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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민제전 2009(郡民祭典 參席 爲해 醴泉 訪問한 出鄕人 및 姉妹團體長 爲한 晩餐行事 開催!) [記事] :
제33회 예천문화재 및 제53회 군민의 날 기념식과 군민체전을 축하하기 위해 예천을 방문한 출향인, 자매단체장들에 대한 환영만찬 행사가 2009년 10월 15일 오후 4시 30분 예천진호국제양궁장 문화체육센터에서 개최됐다.
이날 행사에는 김수남 군수, 이한성 국회의원, 이현준.윤영식 도의원, 예천군 관내 각 기관단체장, 자매단체인 마포구청 노재명 구청장, 12개 읍면 출신의 출향인 등 500여 명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김수남 군수는 환영사를 통해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군민의 날 기념식 하루 전에 예천을 방문한 출향인들을 군민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이번 군민제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한성 의원은 "풍년농사를 이룩하고 모든 군민들이 풍요로운 마음으로 이번 행사에 참가하는 것을 보면서 예천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출향인들의 고향사랑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는 축사를 했다.
한편, 이날 행사에 참석한 석송회 임혜숙 회장과 이한성 국회의원 부인이 한자리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건배를 힘차게 하자 참석자 모두가 박수로 축하, 행사장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10-16 오전 8: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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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