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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055:김약구僉樞(附예천방문539)
예천의 자랑(2055) : 보문면 미호리 출신 김약구 첨지중추부사(附 예천방문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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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구(金若龜) :
1702(숙종 28)-1776(영조 52), 보문면 미호리 서쪽마 출신, 일명 약룡(若龍), 자는 순칙(順則), 호는 사옹(思翁), 본관은 김해, 현감 화중(縣監華重)의 4자,
1765년(영조 41)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 23위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현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묘는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 금령곡 석사현 중등 경좌(文殊面助梯里金寧谷碩寺峴中嶝庚坐)에 있다.
(文科榜目, 醴泉郡邑誌 1770 1786 1841, 醴泉郡誌 1939, 族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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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朝實錄] : 1764년(영조 40) 6월 16일 임금이 관학 유생들에게 친히 시험을 치뤘는데, 수석을 차지한 김약구에게 회시(會試)에 직부(直赴)하라고 명하였다.(英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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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구 [記事] : 영조실록 103권/ 영조 40년(1764 갑신 / 청 건륭(乾隆) 29년) 6월 16일(병신) 1번째 기사/ 유생의 전강에 친림하다/ 임금이 유생(儒生)의 전강(殿講)에 친림하여 수석을 차지한 김약구(金若龜)에게 회시(會試)에 직부(直赴)하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44책 170면/ 【분류】 *인사-선발(選拔)(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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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구 [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39년 3월 19일 (병자) 원본1216책/탈초본68책 (13/15) 1763년 乾隆(淸/高宗) 28년/ ○ 成均館生員臣朴徽鎭․李商夢, 進士臣李鳳彬․具文漢, 生員臣朴弼淳, 進士臣洪相憲․任時習․李養遂․趙鎭寬, 生員臣李會遂․金淑鳴․李夢相․黃杓, 進士臣李濟恒․李泰岳․李聖源, 生員臣柳榮復․魚必溟, 進士臣李憲國․南奎彦, 生員臣具性玉․李尙範, 進士臣李台秉, 生員臣李期壽, 進士臣姜宅齊․李民秀․徐就修․李光復, 生員臣朴良翰․吳祖先․具宗燁, 進士臣韓德九․金?, 生員臣元景翼, 進士臣宋?, 生員臣曺命玉․韓秉成, 進士臣南宮?․洪日弁․李明弼, 進士臣李壽仁․李昌遇․朴泰儉, 生員臣尹晦, 進士臣尹弼正․閔瑜, 生員臣吳光源, 進士臣崔受復․李後軾․李龍翰․李存謙․林光岳, 生員臣朴東楫, 進士臣任柱元, 生員臣承正孝, 進士臣洪彦喆, 生員臣鄭義健․李好讓, 進士臣金聲國․李?祥, 生員臣朴行淳, 進士臣柳學中, 生員臣張胤載, 進士臣權枰, 生員臣崔翼運, 進士臣田遂亨, 生員臣李仁實․尹?․南溟學․尹光鐸, 進士臣李鳳禎․李奎會, 進士臣柳煥, 幼學臣宋文奎․徐有孫․李?․徐有隣․沈炯之․洪相益․洪文榮․洪相卨․李羽逵․李克生․全百齡․姜一輔․方大昇․姜齊興․洪啓澤․朴東煥․李德峻․金夏璉․白相晉․鄭再春․李箕輔․金台鉉․安?․金良玉․金履甲․具粹溫․玄在杰․金尙坤․車方淑․崔述觀․李世?․金星河․宋德輝․宋益采․李東益․朴德新․沈?․金應國․文錫龜․鄭成人․金若龜․羅?․鄭復煥․金珍?․李鎭復․林胤復․李龍正․李敏?․宋鎭運․李省存等, 誠惶誠恐, 頓首頓首, 謹百拜上言于至行純德英謨懿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主上殿下。伏以, 臣等竊伏惟念重道崇儒, 盡禮招賢, 卽我列聖朝家法也。?在我孝廟時, 則有若先正臣文正公宋時烈, 文正公宋浚吉, 上下同德, 際遇昭融, 屢膺旌招, 協贊鴻猷, 經幄啓沃之效, 冑筵輔導之益, 不但開泰平於當時, 亦足垂徽範於後世, 而時或復修初服, 乍出都門, 則搢紳章甫, 交章請留, 輒降召還之命, 而至于我肅廟朝, 繼述之道, 招徠之誠, 終始不替, 克配前休, 至今朝野, 欽誦感歎, 傳以爲盛事。?歟我殿下, 聖學高明, 治化休暢, 衛道尊賢, 一以聖朝文考爲準則, 及今復正之初, 懋邵德輔沖儲者, 靡不用極, 敦召恩禮, 遍及山林養德之賢。於是, 多士想望其庶幾彙征, 以裨我聖上作人之化, 而何幸? 前贊善臣宋明欽, 以溫潤之姿, 精粹之學, 感激殊遇, 首先造朝, 三登筵席, 屢陳嘉猷, 虛心之誠, 握手之眷, 禮旣摯矣, 國其庶乎。不意?者, 未展素?, 徑尋鄕路, 我聖上禮之待之者, 未克有終。乃至於進善臣洪啓能之疏批, 屢日乃下, 祭酒臣金元行之偕來, 仍命撤還, 此非特有關於一士之進退, 亦恐有汚於群賢之來章。朝紳之?望, 士林之興嗟, 當如何哉? 夫所以致其賢者, 將以用其言也, 及其一言出口, 未槪於聖心, 則遽下過中之敎, 終欠包容之量。雖有下敎旋寢之命, 而苟無至誠招還之擧, 則從前優禮, 恐歸虛文, 而未盡其致賢用言之實矣, 此豈非有?於聖德者乎? ?今聖上, 鎭日開筵, 方懋秉燭之志, 春宮沖年典學, 政急琢玉之工, 其所以裨補聖治, 薰陶睿德之責, 顧不在於林下讀書之士歟。惟彼二三山野之賢, 淵源有自, 充養有素, 處可以模楷士類, 出可以陶鎔世道, 蔚然爲當世之望, 而況乎先正遺孫, 克紹家學, 又當盛際, 則此豈偶然也哉? 伏願?降溫諭, 益盡禮招, 使前贊善臣宋明欽, 克回遐心, 賁然復來, 以卒我殿下禮遇之隆, 以輔我邸下溫文之姿, 則豈不休哉, 豈不盛哉? 至於在野未進之諸賢, 亦勤旁招之禮, ?得以于于咸造, 濟濟以寧則, 億萬年無疆之休, 尤有光於前烈矣。臣等?在賢關, 化沾菁莪, 不勝愛君之?, 尙賢之誠, 敢依先輩故事, 相率呼?, 臣等無任祈懇屛營之至, 謹昧死以聞。答曰, 省疏具悉。噫, 今番之事, 專由否德, 亦由誠淺, 寔予之愆, 而但所執者, 君臣之分義, 四十年苦心。噫, 旌招禮遇, 儒賢造朝, 我朝盛事, 其雖昔年, 亦有先正, 何只擧兩先正? 今番在近畿禮招之人, 其亦有矣, 則末端泛稱, 其曰, 誠乎? 噫, 事君之道, 卽一誠字也, 今者之章, 亦可謂不先不後, 是誰之過? 卽位在君師者也, 此亦漫諭, 所重在所守固, 玉堂․銀臺, 猶可謂令前。噫, 雖不能君師之道, 正士習抑浮文, 雖衰, 焉敢?舊習於今日? 敬守聖廟, 尊仰聖賢。(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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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구 [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40년 6월 16일 (병신) 원본1231책/탈초본69책 (18/18) 1764년 乾隆(淸/高宗) 29년/ ○ 甲申六月十六日辰時, 上御景賢堂。親臨儒生殿講, 按?御史追後入侍時, 試官領議政洪鳳漢, 行司直韓翼?, 大司成趙明鼎, 吏曹參議鄭尙淳, 副護軍金應淳, 校理朴聖源, 修撰李在簡, 同副承旨趙榮順, 記事官金容, 事變假注書金文鐸, 記事官朴師崙, 記事官李延伋, 以次進伏訖。領議政洪鳳漢曰, 聖體若何? 上曰, 一樣矣。上命進御湯劑曰, 已煎故進御後, 欲下敎矣。有暑氣, 入香?, 好矣。首醫曰, 入一錢五分, 爲好矣。上曰, 依爲之。理中建功湯前方中, 加香?一錢五分。出榻敎 上曰, 注書傳命, 駭然爲之, 禁推。出擧條 注書金容, 先退詣臺, 臺臣入侍事。出榻敎 掌令邊得讓曰, 物故罪人得與, 以告者徑斃杖下, 則東呂․址淳之窮?, 自是次第事, 而酌處之命, 雖出於聖上好生之德意, 其在鞫體, 不可不嚴?。請還寢東呂․址淳等還配之命, 更令王府, 嚴鞫得情。上曰, 勿煩。出擧條 得讓曰, 太丁凶逆, 前古所無, 今旣正法, 少洩輿憤, 而罪人者斤萬․李尙黙, 旣聞太丁陰慘?測之說, 不卽發告, 私相傳說, 知情不告, 自有其律。今此酌處之命, 雖出於聖上好生之德意, 而其在鞫體, 不可不嚴?, 請還寢定配罪人者斤萬․李尙黙等酌處之命, 更令王府, 嚴鞫得情, ?伸王章。上曰, 勿煩。出擧條 正言李得一曰, 罪人得輿, 終不承款而徑斃, 則東呂․址淳等, 固宜窮?, 而酌處之命, 遽下意外, 此雖出於好生之盛德, 而揆以鞫體, 不可不嚴?。請寢東呂․址淳等還配之命, 更加嚴鞫得情。上曰, 勿煩。出擧條 得一曰, 罪人天大之窮凶情節, 昭載於乙亥鞫案, 至今全保首領, 終是失刑之大者。旣拿旋配, 雖出於聖上好生之德, 此等凶徒, 決不容一向涵貸。請鍾城府爲奴罪人天大, 還收酌處之命, 依律處斷。上曰, 勿煩。出擧條 上命臺臣先退, 儒生始講。鳳漢曰, 向者朴弼渭處分, 實仰聖意之攸在, 而聞其父泰晦, 尙在定配未放中云矣。上曰, 朴泰晦, 一體施行, 可也。鳳漢曰, 其時傳敎中, 泰晦姓名添書, 則可以擧行, 依此爲之乎? 上曰, 依爲之。出擧條 儒生十四人應講後, 命少退後命入侍。畢講後, 命御史入侍。上進湯劑, 藥房提調, 持湯劑入侍事。出榻敎 上曰, 殿最見之乎? 鳳漢曰, 見之矣。鳳漢曰, 方伯責任, 莫先於嚴考績之政。雖以今番事言之, 嶺南道臣, 任怨秉公, 不負朝家委寄之意, 至於湖西伯, 初當殿最, 異於他道之再考三考, 而失之太寬, 大違所望, 誠不勝其未安矣。上曰, 卿旣奏, 忠淸監司尹東昇, 從重推考, 可也。出擧條 上顧兵曹參判李?曰, 彼宰臣, 於海西, 多書下考矣。鳳漢曰, 海西守令少, 而多書之矣。上命書頃日處分人不得??傳敎曰, 其時入直儒臣, 必先爲之矣。上曰, 金載順, 何以處分? 李在簡曰, 削板放逐矣。上曰, 欲爲下敎, 而尙無實職人故不爲, 今日以試官觀之, 可見矣, 若此, 其他可知。其影則雖一事, 其時非徒陳箚而然, 況十八日前事, 旣付先天, 同事者, 焉敢同去就爲耶? 今日以試官, 意蓋在也, 一試官之入侍, 分義當然, 此後不敢以此更爲??事嚴飭, 旣下敎之後, 人君使臣亦四維, 與李晉圭․朴志源有異, 王者處分, 求其心求其貌, 非裕昆之道。旣示予意, 金載順, 放其放逐, 與李商芝, 竝給牒敍用。出傳敎 上曰, 李聖圭, 究其心則殘忍, 下番爲之, 故隨爲之矣。命試官先退, 命御史朴師海, 讀書啓。上曰, 有圖形乎? 師海曰, 有圖形矣。上命書啓更讀。上曰, 道臣誰也? 師海曰, 趙暾也。上曰, 本?誰也? 師海曰, 崔晸也。復讀書啓訖。上曰, 以此觀之, 趙鎰似不可禁之, 而山則趙鎰之山也, 洪量海之掘塚則非矣。鳳漢曰, 然矣。上曰, 洪量海, 果是學者, 有聚學徒之事乎? 師海曰, 無聚徒敎授之事矣。上曰, 將來洪重海[洪量海]必蠶食, 有賊反荷杖之慮矣。鳳漢曰, 例於旣入葬之後, 則其近處, 自然爲其物矣, 百步內則洪量海, 當用之矣。師海曰, 百步內則洪量海, 不可用矣。
上曰, 今覽結城按?御史書啓與圖形, 於今洪量海之用山處, 旣非靑龍內, 亦百步之外, 則趙鎰之供雖過, 以田畓圖形觀之, 洪量海之葬於趙鎰之田中, 若百畝中公田, 今不禁斷, 日後豈無呼賓作主, 稍蠶食之弊乎? 以人子言之, 此塚仍而置之, 雖禁繼葬, 世間事, 難以測度, 日後焉知無賊反荷杖, 專呑龍虎之弊乎? 洪量海入葬處, 卽趙鎰之田也, 田旣趙鎰之田, 則山非趙鎰之山乎? 決給於趙鎰處。以量海言之, 葬其父於田疇之中, 毋論田之陳不陳, 其父爲趙鎰之田夫乎, 爲趙鎰之墓直乎? 爲其父體魄之道, 雖一刻, 不可仍置, 以此分付, 定日區處後, 令道臣狀聞。噫, 凡疏決與放未放時, 此等之事, 不爲一放, 則身爲士子, 爲秦皇之事, 所謂支乃木所傷云者, 亦涉窘遁, 世間焉有此等殘忍之事乎? 見棺自有其律, 況此乎? 嚴刑一次後, 道內舒川郡, 勿限年定配。噫, 道內定配, 爲其區處, 可謂曲盡, 其若海東臣子, 何敢拒逆? 若不擧行, 自官擧行, 三水府, 限己身定配, 前道臣則適値罷職, 雖不捧議送, 趙鎰未還家之前, 鎰之兩子奴婢, 竝爲囚禁云, 不捧何意, 囚禁亦何意? 此非罷職道臣所可爲, 非民事則此公乎, 私乎? 其後道臣, 雖處分而敍用, 今覽啓目, 隣配徑放之說, 又謄啓本, 前道臣, 今方下敎, 則不可異同, 過爲順便, 亦非公也。囚禁趙鎰之子前道臣, 竝罷職不敍, 其後道臣, 其已勘, 不敢疊施, 前道臣未敍用前, 廉隅難以行公, 特解見任。噫, 抑强扶弱, 雖衰予心, 旣爲道臣, 左右顧瞻, 其若不卽擧行, 方施投?之典, 以此嚴飭, 今月內擧行, 其令狀聞, 特命差遣意若何, 而覽書啓聞, 所奏亦不無因緣彌縫之意。嗚呼, 三尺惟在其君, 焉敢若此? 御史朴師海罷職。以趙鎰言之, 若有人理, 九年泯黙, 兒塚尙今不葬乎? 此非人情所可忍也。王者治國惟在仁, 亦令道臣, 刑推一次後放送。出傳敎 御史師海先退, 藥房提調, 持湯劑入侍事。出榻敎 上曰, 王孫封爵者, 冠禮然後可以謝恩, 冠禮與吉禮前例, 令該曹, 詳考前例以稟, 若無其例, 令弘文館, 博求古禮以稟。出傳敎 上曰, 都目不可踰月, 吏判有闕, 政事, 明日擧行。出傳敎 上曰, 噫, 今予一心, 惟在追慕, 秋展謁, 勿爲擇日, 以初七日擧行, 當省牲省器, 而來回時, 當展禮於昌德, 以此分付。出傳敎 上曰, 再揀擇, 以御正殿後爲之, 爲擇日事, 分付。出傳敎 上曰, 不過申飭, 昨日禁推諸人, 以不應爲公律勘處, 拿處人, 以制書有違公律勘處, 放送事, 分付。出傳敎 上曰, 居首儒生金若龜, 直赴會試, 幼學朴載厚․洪啓漢, 各給二分, 李益權給一分。出傳敎 諸臣以次退出。(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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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구 [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41년 3월 13일 (무자) 원본1241책/탈초본69책 (13/20) 1765년 乾隆(淸/高宗) 30년/ ○ 兵批, 判書沈?進, 參判尹得養病, 參議鄭純儉病, 參知洪樂仁入直, 左副承旨具顯謙進。兵批啓曰, 黃海水使, 今當差出, 而擬望之人乏少, 他道守令竝擬, 何如? 傳曰, 允。又啓曰, 新除授全羅右水虞候趙惠慶呈狀內, 素患痰癖之證, 近又越添, 無望赴任云。病狀旣如此, 則不可等待其差復, 依例罷職, 何如? 傳曰, 允。以金勉行爲曹司衛將, 以黃仁儉爲副摠管, 以韓光德爲忠壯將, 以田昌雨爲忠翊將, 以兪應基爲僉知, 以洪啓?爲訓鍊副正, 以金由澤爲武兼, 以李匡運爲部將, 以李仁康爲黃海水使, 以韓有大爲昌德將, 副護軍李明運, 副司直洪麟漢․金華鎭․李鉉玉, 副司果全栢齡․金若龜, 副司正洪龍漢․金觀柱․李長玉。(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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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구 [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43년 9월 22일 (계축) 원본1272책/탈초본71책 (15/24) 1767년 乾隆(淸/高宗) 32년/ ○ 以徐命臣爲吏曹參判, 朴師崙爲持平, 金尙黙爲應敎, 尹承烈爲兼輔德, 李景祜爲判尹, 趙雲逵爲知經筵, 李得宗爲知義禁, 黃?爲監察, 兪漢吉爲全州判官, 呂龜周爲校書校理, 金若龜爲典籍, 待敎單洪相簡, 折衡吳漢迪, 今加嘉善加資事, 承傳。(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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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구 [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44년 2월 22일 (경진) 원본1277책/탈초본71책 (10/12) 1768년 乾隆(淸/高宗) 33년/ ○ 吏曹判書洪樂性進, 參議洪趾海進, 同副承旨李之晦進。以洪檢爲副修撰, 以洪良漢爲工曹參議, 以洪相聖爲吏曹佐郞, 宋翼彦爲掌樂僉正, 金若龜爲監察, 姜?福․白師殷爲典籍, 申晦爲典牲提調, 任?爲安岳郡守, 石物重修都監堂上李昌誼․黃?, 郞廳慶再觀․曺允亨。(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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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구 [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45년 10월 20일 (무진) 원본1297책/탈초본72책 (10/15) 1769년 乾隆(淸/高宗) 34년/ ○ 兵曹口傳政事, 副護軍南泰普, 副司直兪彦述, 副司果李顯祚․鄭枋․鄭恒齡․李弘稷․南鶴宗․尹在謙․南彦彧․權穎․金?․朴宗亮․成胤儉․安正仁․李宇喆․李廷烈․愼爾復․韓宗濟․李奎徽․李益普․安致宅․元啓英․李仁黙․鄭景瑞․金瑋․宋德基․李益炡․宋淳明․李思質․李命賢․金仁大․徐日修․金漢房․朴載天․鄭游良․尹心宰․金光遂․安商楫․李蓍延․吳道源․金時訥․李龜應․趙恒彦․申?․李龜老․辛宅寧․宋龜明․李明吾․尹得宣․尹得勳․呂冕周․李黃中․李彦濟․李顯白․崔守誠․尹?․郭鎭億․鄭翼祥․鄭錫長․李萬協․權燧․金厚澤․金楗․金若龜․鄭弘德․徐道賢․金應遜․洪應辰․金應漢․李宗漢․崔弘輔․李光紹․張爾良․權德性․安渶․韓弼冑․申大規․崔昌世, 副司猛趙顯宇․黃?, 副司勇李宜楫․李宜業․徐命哲․徐尙修。(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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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539
용문사(醴泉 龍門寺, ''''마음으로 돌리는 佛經'''' 티베트 것만 알았더니 韓國에도 있었네) [記事] :
추수가 끝난 들녘은 황량하다. 나락이 사라진 빈 들판엔 찬 바람만 불어 댄다. 단풍도 이제 거의 다 졌다. 들과 산은 이제 잿빛으로만 치닫는다. 맨 몸을 드러낸 가냘픈 가지들이 처량해 보이기 시작한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의 경천호를 스쳐 용문사 쪽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호수의 물이 잔뜩 말랐다. 2, 3m 깊이의 호수가 ''''맨흙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그 위로 가을비가 흩뿌렸다.
차창 밖을 스치는 건 무상함이 느껴지는 무채색의 풍경이다. 세월이란, 시간이란. 괜한 상념이 쏟아진다. 경천호를 지나 고개를 넘으면 예천군 용문면이다.
산 깊고 외진 이곳은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 중 하나로 불려지던 곳이다. 고개마루 주변에 여러 저수지들이 들어앉았다. 비만 오지 않았으면 이른 아침 새하얀 물안개를 토해 냈을 예쁘장한 저수지들이다.
용문사 입구에 거의 다다를 때였다. 주변의 색이 갑자기 달라졌다. 잿빛은 사라졌고 짙붉은 황토색이 사방을 감쌌다. 주위를 가득 덮고 있는 낙엽 때문이다. 낙엽의 바다 위에 기품 있어 보이는 일주문이 오롯이 솟았다.
산속에 어찌 이런 넓은 자리가 있었을까? 갑자기 하늘이 열리는 듯 나타난 넓은 터에 가람이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다. 고운사의 말사인 용문사는 신라 870년 두운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낙엽 쌓인 긴 돌계단을 오르면 여느 절의 천왕문에 해당하는 회전문이다. 해운루를 통과해 만난 절 마당은 무슨 공사를 하는지 어수선했다. 정면으로 1984년 화재로 불탔다가 복원된 보광명전이 서 있다.
그 옆에는 용문사의 보물 중의 보물인 대장전이 있다. 용케도 사찰을 휘감았던 화마를 피한,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고려 명종 3년(1173)에 세워진 건물이다.
대장전이 불을 피할 수 있었던 건 외벽에 치장된 귀면(鬼面)과 물고기 조각, 용 조각 등이 불 막이를 제대로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장전을 찾는 이들이 빼놓지 않고 쳐다보는 것도 왼쪽 문 위에 있는 조각이다.
도깨비가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양이다. 대장전 안을 둘러보다 티베트의 마니차를 닮은 듯한 윤장대(보물 684호)를 봤다. 경전을 놓은 책장 가운데 축을 달아 회전토록 한 것이다.
티베트 사람들은 내부에 불교 경전을 넣거나 겉면에 불경을 새긴 마니차를 돌린다. 마니차를 돌릴 때마다 경문을 한 번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았다고 여긴다. 글을 읽지 못하는 민중들을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이 마니차와 같은 기능을 하는 물건이 한국에도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최근 들어 마니차를 들여 놓는 사찰들이 많다. 그런 것을 보며 불전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 내겠다고 외국의 문물까지 수입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 왔던 터였다.
그런데 그 윤장대가 버젓이 한국에도 있었던 것이다. 사찰의 설명문에는 금강산 장안사에 3층 윤장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회암사터와 혜음원터에 윤장대 축의 받침돌 유구가 있지만 현존하는 것은 용문사 윤장대가 유일하다고 적혀 있다.
왼쪽 윤장대의 8면에는 각기 다른 꽃살문이 새겨져 있다. 꽃살문의 아름다움만 놓고 보면 전국의 모든 사찰과 견줘도 손색이 없다. 윤장대는 보존을 위해 쇠줄에 묶여 있어 돌려 볼 순 없다. 대신 몸으로 윤장대를 돌았다.
아름다운 꽃살문 하나하나를 감상하며 마음 속 윤장대를 돌려봤다. 대장전의 정면에 있는 삼존불 뒤에는 금칠을 한 목각탱(보물 989호)이 있다. 조선 숙종 때 대추나무로 새긴 이 목각탱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가로 세로 2m가 넘는 크기의 이 조각은 화려한 금빛 도금이 돼 있다. 대장전 내부를 환하게 밝히기 위한 것이다. 조용하던 사찰이 북적거렸다. 부산의 어느 사찰에서 온 신도들이 대장전으로 몰려들었다.
어떻게 들어섰는지 좁은 대장전 안에 모두 자리를 잡고는 불공을 드리기 시작했다. 대장전 처마에선 가을비가 투둑투둑 떨어졌다. 대장전 계단 아래에는 자운루라는 2층 누각이 있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회의를 하고, 짚신을 만들어 조달했던 호국의 장소이다. 사찰 마당 왼쪽에는 사찰의 유물들을 모은 박물관이 있다. 윤장대를 모사해 놓은 것이 있어 직접 돌려 볼 수 있다. 박물관에선 아름다운 빛깔의 탱화와 조선시대 유명 선사들의 초상화도 볼 수 있다.
■ 예천군 용문면, 그림같은 초간정·황진이의 병암정… 타임머신 탄 듯 : 용문사에서 내려와 용문면사무소가 있는 금당실마을로 가는 길이었다. 지방도 928호선을 만난 지 얼마 안돼 오른쪽으로 아름다운 정자가 눈에 띄었다.
초간정이다. 금곡천이란 넓지 않은 개울이 큰 바위를 만나 크게 휘돌아 가는 모퉁이 절벽 위에 들어선 정자다. 정갈한 그 모양이 한 폭의 멋진 그림을 보는 듯했다. 주변 나무들이 옷을 벗어서인지 정자는 더욱 또렷이 자태를 드러냈다.
솔향 그윽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드리워 정자의 운치를 더욱 빛내 줬다. 이 정자는 조선 중기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지은 초간 권문해가 심신을 수양하기 지었다고 한다. <대동운부군옥>은 단군 이래 선조 때까지 역사 인문 지리 등을 총망라한 책으로 초간이 중국의 백과사전인 <운부군옥>을 읽고 힌트를 얻어 편찬한 한국형 백과사전이다.
그림 같은 초간정을 자세히 보고 싶어 정자를 품은 집의 대문을 두드렸는데 아쉽게도 반응이 없었다. 저 집의 주인과 어떻게든 연을 만들어 하룻밤 꼭 묵어 봤으면 좋으련만….
처마에서 떨어지는 찰진 빗소리만 듣다가 자리를 떴다. 초간정에서 금당실마을 가는 길 중간쯤 ''''예천 감로루''''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감로루가 뭘까 궁금해 차를 돌렸다.
농로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 만난 건 특이하게 생긴 고택이다. 세월의 까만 때가 묻은 건물은 함양 박씨 예천 입향조의 묘를 지키기 위해 세운 재실이었다. 재실 한쪽에 누각을 세워 멋을 낸 것이 참 특이했다.
누각의 아래는 마구간으로 썼다고 한다. 비안개에 젖은 감로루의 풍경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금당실마을은 1960,70년대 우리 옛 농촌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간 듯한 분위기다.
입구의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 마을로 들어갔다. 옛 모습의 고택들과 구불구불 얽혀 있는 돌담길이 정겹다. 허리춤 높이의 돌담길은 곡선을 그리며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활짝 열린 대문과 낮은 담장으로 서로에게 툭 터놓고 사는, 그런 마을이다.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금당실마을은 영화의 배경으로도 많이 등장했다. ''''나의 결혼 원정기'''' ''''영어 완전 정복'''' 등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금당실마을에서 1km 떨어진 곳에 드라마 ''''황진이''''의 무대가 됐던 병암정이 있다.
병풍 같은 큰 바위에 정자가 올라서선 굽은 노송 두어 그루와 어울려 너른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다. 바로 앞에는 연못이 있고 가운데 앙증맞은 인공섬도 있다.
■ 여행수첩 : 호산춘이 있는 문경시 산북면까지는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게 좋다. 점촌ㆍ함창IC에서 나와 예천 방향으로 국도 34호선을 타고 가다 산양에서 좌회전한 뒤 산북, 동로 쪽으로 향한다.
산북면사무소 소재지를 지나 조금만 가면 길가에 호산춘 간판이 보인다. 산북에서 경천호를 끼고 달리면 용문사 금당실마을이 있는 예천군 용문면으로 향한다. 용문에서 수도권으로 귀가할 때는 예천IC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금당실마을 장거리에는 음식점들이 여럿 있다. 이중 안동식당은 두부가 주 메뉴다. 칼칼하게 끓여 내는 두부찌개가 5,000원이고 손두부는 4,000원, 칼국수는 4,000원이다. 주인이 직접 만든 두부 맛이 일품이다.
(이성원 記者 韓國日報 200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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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주막(親舊와의 旅行, 醴泉이 딱이다) [記事] :
‘친구야. 주막에서 한잔 할까나.’ 남자들이라면 꼭 이맘 때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기 마련이다.
까까머리 시절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노상 함께 쏘다녔고. 어른 대접받을 무렵 갓 배운 술잔을 채워 준 친구. 군입대를 앞두고 모여앉아 밤을 지새운 그 깊은 술자리. 그리고 불쑥 찾아와 머릴 긁적이며 청첩장을 내밀던 그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생활에 쫓겨 가끔 얼굴 보기도 힘든 친구. 근 십년간 수많은 휴가와 여행을 떠났지만. 친구와 제대로 막걸리 한 잔을 기울여 본 적이 없다.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가 그립다.
◇ 삼수삼산이 모이는 삼강나루 : 친구와의 여행이라면 예천이 딱이다. 대학가 흔한 ‘주점’이 아닌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진짜 주막’이 있기 때문이다.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주막(三江酒幕). 길손도 모이고 강물도 모여드는 곳이다. 태백 황지에서 내려온 낙동강. 안동 내성천. 문경 금천이 서로 만나는 자리에 바로 삼강주막이 서있다.
물길 뿐 아니라 학가·팔공·주흘산맥 등이 모이는 곳이기도 해. 사람 또한 아니 모일 수 없다. 영남대로의 딱 중간지점인 이곳은 낙동강을 건너던 나루가 있던 곳으로. 과거보러가는 선비와 보부상 등 길손들이 찾아들어 주막이 번성했다.
또 부산 구포에서 소금을 실어나르던 배가 들르던 곳도 삼강나루다. 삼강주막은 1930년 나루터(예전에는 주막 바로 앞까지 물이 들어왔다) 앞에 문을 열었다.
주막이 있으면 당연히 주모도 있는 법. 지난 2005년 사망한 고 유옥연 할머니가 서른살부터 무려 60년간을 지켜온 주막이다. 실제 삼강주막은 사극에서 본 주막과 조금은 다르다.
어른 몇 명이 앉기에는 다소 비좁은 방 두 칸이라 좁은 툇마루에까지 상을 차렸다. 바로 음식을 낼 수 있도록 모든 방은 쪽문이 부엌으로 터있다. 군불을 때던 아궁이가 있는 부엌 흙벽에는 금을 그어 외상장부로 사용했다.
글을 몰랐던 주모는 주막손님 중 가장 단골이었을 사공의 외상을 나루터 쪽에 긋고. 다른 벽에는 외상손님이 온 방향으로 금을 그어 표시했다. 짧은 금은 막걸리 반 되. 긴 금은 한 되를 뜻하고 외상값을 갚고 나면 가로로 그어 정리했다.
초가 주막 곁에는 수령 450년도 넘은 홰나무가 서 있어 분위기를 더 한다. 난데없이 큰 바위가 있어 들여다보니 ‘들돌’이란다. 옛날 머슴들이 주인 앞에서 돌을 들어보이며 새경(품삯)을 흥정하던 일종의 연봉 고과 시험대다.
‘피식’ 웃음이 난다. 현대인들만 힘들게 사는 줄 알았더니 예전에도 그랬다. 돌을 들어보지 않고도 넉넉한 위안을 받았다.
◇친구야. 올 한해 고생했다 : “주모. 여기 술상 좀 차려오게”. 마지막 주모는 생을 떠났고 부엌도 텅텅 비었다. 대신 바로 옆 마을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술상을 받아왔다.
손두부. 도토리묵에다 경북에서 즐겨먹는 배추 찌짐(전). 그리고 동동주 한 되. 1만2000원에 차려오는 한상이다. 잔에 술을 따랐다. 시원하고 칼칼한 맛이 난다.
방은 일어서기도 힘들만큼 좁아 터졌지만. 방문객들의 낙서는 일일이 읽어볼 수도 없을 만큼 빽빽하다. 킬킬거리며 보니 별의별 사연이 다 적혀있다.
비록 짧지만 그 상황이 훤히 보인다. 주전자가 비어갈수록 정은 넘쳐나고. 좁은 방은 금세 운치로 가득 채워졌다. 배불리 먹고 평상에 나란히 누워 차가운 바람을 맞는다.
잔뜩 찌푸린 겨울 하늘은 언젠가 둘이 나란히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 봤을 때의 것과 닮았다. 아니. 딱 그것이다. 무슨 영화 ‘브로큰 백 마운틴’의 한 장면도 아니고….
답을 바라지 않는 질문만이 허공에 메아리친다. “야~! 즐겁냐?”
‘여행정보’ :
●맛 집=예천 용궁면은 예로부터 큰장이 섰던 곳이라 이름난 국밥집이 많다. 특히 순대국밥은 멀리서도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 정도로 맛있기로 소문났다. 30년 넘도록 장사를 해온 단골식당은 원래 오징어 불고기로 유명하지만. 깔끔한 국물에 구수한 순대와 머릿고기가 잔뜩 들어간 순대국밥도 일품이다. 뽀얗게 우린 국물이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 단지만 봐도 이집의 내공을 실감할 수 있다. 단돈 3500원짜리 국밥 한 그릇에 몸도 마음도 뿌듯해 진다.
●둘러볼 만한 곳=국내에는 물길이 휘돌아나가며 육지 속 섬의 비경을 만드는 곳이 많다. 안동 하회. 영월 선암. 청령포 등이 그렇다. 그 중에서도 예천 용궁면 회룡포는 정확한 오메가 모양의 물돌이 지형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름처럼 내성천 강물이 용틀임하듯 휘돌아간다. 가운데는 비룡산(190m)이 서있고 일명 ‘뿅뿅다리’라 불리는 철판다리가 놓여있다. 회룡포가 관광지로 각광을 받는 것은 바로 회룡대에 올라 전경을 굽어 볼 수 있어서다. 승용차로 전망대 바로 밑까지 오를 수 있다.
자신의 명의로 된 토지를 가지고 있어 매년 세금을 내는 나무로 주목받은 석송령(石松靈). 초간정 등이 볼거리로 유명하며 윤장대(보물 제684호)가 있는 용문사도 이름난 고찰이다.
2008년 1월 예천군에 의해 수리·복원된 삼강주막은 현재 마을 부녀회가 공동운영하고 있다. 예천군은 향후 삼강주막을 문화·체험마을로 운영할 계획이다.
(이우석 記者 스포츠서울 2009/11/25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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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구(金若龜) :
1702(숙종 28)-1776(영조 52), 보문면 미호리 서쪽마 출신, 일명 약룡(若龍), 자는 순칙(順則), 호는 사옹(思翁), 본관은 김해, 현감 화중(縣監華重)의 4자,
1765년(영조 41)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 23위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현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묘는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 금령곡 석사현 중등 경좌(文殊面助梯里金寧谷碩寺峴中嶝庚坐)에 있다.
(文科榜目, 醴泉郡邑誌 1770 1786 1841, 醴泉郡誌 1939, 族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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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朝實錄] : 1764년(영조 40) 6월 16일 임금이 관학 유생들에게 친히 시험을 치뤘는데, 수석을 차지한 김약구에게 회시(會試)에 직부(直赴)하라고 명하였다.(英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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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구 [記事] : 영조실록 103권/ 영조 40년(1764 갑신 / 청 건륭(乾隆) 29년) 6월 16일(병신) 1번째 기사/ 유생의 전강에 친림하다/ 임금이 유생(儒生)의 전강(殿講)에 친림하여 수석을 차지한 김약구(金若龜)에게 회시(會試)에 직부(直赴)하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44책 170면/ 【분류】 *인사-선발(選拔)(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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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구 [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39년 3월 19일 (병자) 원본1216책/탈초본68책 (13/15) 1763년 乾隆(淸/高宗) 28년/ ○ 成均館生員臣朴徽鎭․李商夢, 進士臣李鳳彬․具文漢, 生員臣朴弼淳, 進士臣洪相憲․任時習․李養遂․趙鎭寬, 生員臣李會遂․金淑鳴․李夢相․黃杓, 進士臣李濟恒․李泰岳․李聖源, 生員臣柳榮復․魚必溟, 進士臣李憲國․南奎彦, 生員臣具性玉․李尙範, 進士臣李台秉, 生員臣李期壽, 進士臣姜宅齊․李民秀․徐就修․李光復, 生員臣朴良翰․吳祖先․具宗燁, 進士臣韓德九․金?, 生員臣元景翼, 進士臣宋?, 生員臣曺命玉․韓秉成, 進士臣南宮?․洪日弁․李明弼, 進士臣李壽仁․李昌遇․朴泰儉, 生員臣尹晦, 進士臣尹弼正․閔瑜, 生員臣吳光源, 進士臣崔受復․李後軾․李龍翰․李存謙․林光岳, 生員臣朴東楫, 進士臣任柱元, 生員臣承正孝, 進士臣洪彦喆, 生員臣鄭義健․李好讓, 進士臣金聲國․李?祥, 生員臣朴行淳, 進士臣柳學中, 生員臣張胤載, 進士臣權枰, 生員臣崔翼運, 進士臣田遂亨, 生員臣李仁實․尹?․南溟學․尹光鐸, 進士臣李鳳禎․李奎會, 進士臣柳煥, 幼學臣宋文奎․徐有孫․李?․徐有隣․沈炯之․洪相益․洪文榮․洪相卨․李羽逵․李克生․全百齡․姜一輔․方大昇․姜齊興․洪啓澤․朴東煥․李德峻․金夏璉․白相晉․鄭再春․李箕輔․金台鉉․安?․金良玉․金履甲․具粹溫․玄在杰․金尙坤․車方淑․崔述觀․李世?․金星河․宋德輝․宋益采․李東益․朴德新․沈?․金應國․文錫龜․鄭成人․金若龜․羅?․鄭復煥․金珍?․李鎭復․林胤復․李龍正․李敏?․宋鎭運․李省存等, 誠惶誠恐, 頓首頓首, 謹百拜上言于至行純德英謨懿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主上殿下。伏以, 臣等竊伏惟念重道崇儒, 盡禮招賢, 卽我列聖朝家法也。?在我孝廟時, 則有若先正臣文正公宋時烈, 文正公宋浚吉, 上下同德, 際遇昭融, 屢膺旌招, 協贊鴻猷, 經幄啓沃之效, 冑筵輔導之益, 不但開泰平於當時, 亦足垂徽範於後世, 而時或復修初服, 乍出都門, 則搢紳章甫, 交章請留, 輒降召還之命, 而至于我肅廟朝, 繼述之道, 招徠之誠, 終始不替, 克配前休, 至今朝野, 欽誦感歎, 傳以爲盛事。?歟我殿下, 聖學高明, 治化休暢, 衛道尊賢, 一以聖朝文考爲準則, 及今復正之初, 懋邵德輔沖儲者, 靡不用極, 敦召恩禮, 遍及山林養德之賢。於是, 多士想望其庶幾彙征, 以裨我聖上作人之化, 而何幸? 前贊善臣宋明欽, 以溫潤之姿, 精粹之學, 感激殊遇, 首先造朝, 三登筵席, 屢陳嘉猷, 虛心之誠, 握手之眷, 禮旣摯矣, 國其庶乎。不意?者, 未展素?, 徑尋鄕路, 我聖上禮之待之者, 未克有終。乃至於進善臣洪啓能之疏批, 屢日乃下, 祭酒臣金元行之偕來, 仍命撤還, 此非特有關於一士之進退, 亦恐有汚於群賢之來章。朝紳之?望, 士林之興嗟, 當如何哉? 夫所以致其賢者, 將以用其言也, 及其一言出口, 未槪於聖心, 則遽下過中之敎, 終欠包容之量。雖有下敎旋寢之命, 而苟無至誠招還之擧, 則從前優禮, 恐歸虛文, 而未盡其致賢用言之實矣, 此豈非有?於聖德者乎? ?今聖上, 鎭日開筵, 方懋秉燭之志, 春宮沖年典學, 政急琢玉之工, 其所以裨補聖治, 薰陶睿德之責, 顧不在於林下讀書之士歟。惟彼二三山野之賢, 淵源有自, 充養有素, 處可以模楷士類, 出可以陶鎔世道, 蔚然爲當世之望, 而況乎先正遺孫, 克紹家學, 又當盛際, 則此豈偶然也哉? 伏願?降溫諭, 益盡禮招, 使前贊善臣宋明欽, 克回遐心, 賁然復來, 以卒我殿下禮遇之隆, 以輔我邸下溫文之姿, 則豈不休哉, 豈不盛哉? 至於在野未進之諸賢, 亦勤旁招之禮, ?得以于于咸造, 濟濟以寧則, 億萬年無疆之休, 尤有光於前烈矣。臣等?在賢關, 化沾菁莪, 不勝愛君之?, 尙賢之誠, 敢依先輩故事, 相率呼?, 臣等無任祈懇屛營之至, 謹昧死以聞。答曰, 省疏具悉。噫, 今番之事, 專由否德, 亦由誠淺, 寔予之愆, 而但所執者, 君臣之分義, 四十年苦心。噫, 旌招禮遇, 儒賢造朝, 我朝盛事, 其雖昔年, 亦有先正, 何只擧兩先正? 今番在近畿禮招之人, 其亦有矣, 則末端泛稱, 其曰, 誠乎? 噫, 事君之道, 卽一誠字也, 今者之章, 亦可謂不先不後, 是誰之過? 卽位在君師者也, 此亦漫諭, 所重在所守固, 玉堂․銀臺, 猶可謂令前。噫, 雖不能君師之道, 正士習抑浮文, 雖衰, 焉敢?舊習於今日? 敬守聖廟, 尊仰聖賢。(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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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구 [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40년 6월 16일 (병신) 원본1231책/탈초본69책 (18/18) 1764년 乾隆(淸/高宗) 29년/ ○ 甲申六月十六日辰時, 上御景賢堂。親臨儒生殿講, 按?御史追後入侍時, 試官領議政洪鳳漢, 行司直韓翼?, 大司成趙明鼎, 吏曹參議鄭尙淳, 副護軍金應淳, 校理朴聖源, 修撰李在簡, 同副承旨趙榮順, 記事官金容, 事變假注書金文鐸, 記事官朴師崙, 記事官李延伋, 以次進伏訖。領議政洪鳳漢曰, 聖體若何? 上曰, 一樣矣。上命進御湯劑曰, 已煎故進御後, 欲下敎矣。有暑氣, 入香?, 好矣。首醫曰, 入一錢五分, 爲好矣。上曰, 依爲之。理中建功湯前方中, 加香?一錢五分。出榻敎 上曰, 注書傳命, 駭然爲之, 禁推。出擧條 注書金容, 先退詣臺, 臺臣入侍事。出榻敎 掌令邊得讓曰, 物故罪人得與, 以告者徑斃杖下, 則東呂․址淳之窮?, 自是次第事, 而酌處之命, 雖出於聖上好生之德意, 其在鞫體, 不可不嚴?。請還寢東呂․址淳等還配之命, 更令王府, 嚴鞫得情。上曰, 勿煩。出擧條 得讓曰, 太丁凶逆, 前古所無, 今旣正法, 少洩輿憤, 而罪人者斤萬․李尙黙, 旣聞太丁陰慘?測之說, 不卽發告, 私相傳說, 知情不告, 自有其律。今此酌處之命, 雖出於聖上好生之德意, 而其在鞫體, 不可不嚴?, 請還寢定配罪人者斤萬․李尙黙等酌處之命, 更令王府, 嚴鞫得情, ?伸王章。上曰, 勿煩。出擧條 正言李得一曰, 罪人得輿, 終不承款而徑斃, 則東呂․址淳等, 固宜窮?, 而酌處之命, 遽下意外, 此雖出於好生之盛德, 而揆以鞫體, 不可不嚴?。請寢東呂․址淳等還配之命, 更加嚴鞫得情。上曰, 勿煩。出擧條 得一曰, 罪人天大之窮凶情節, 昭載於乙亥鞫案, 至今全保首領, 終是失刑之大者。旣拿旋配, 雖出於聖上好生之德, 此等凶徒, 決不容一向涵貸。請鍾城府爲奴罪人天大, 還收酌處之命, 依律處斷。上曰, 勿煩。出擧條 上命臺臣先退, 儒生始講。鳳漢曰, 向者朴弼渭處分, 實仰聖意之攸在, 而聞其父泰晦, 尙在定配未放中云矣。上曰, 朴泰晦, 一體施行, 可也。鳳漢曰, 其時傳敎中, 泰晦姓名添書, 則可以擧行, 依此爲之乎? 上曰, 依爲之。出擧條 儒生十四人應講後, 命少退後命入侍。畢講後, 命御史入侍。上進湯劑, 藥房提調, 持湯劑入侍事。出榻敎 上曰, 殿最見之乎? 鳳漢曰, 見之矣。鳳漢曰, 方伯責任, 莫先於嚴考績之政。雖以今番事言之, 嶺南道臣, 任怨秉公, 不負朝家委寄之意, 至於湖西伯, 初當殿最, 異於他道之再考三考, 而失之太寬, 大違所望, 誠不勝其未安矣。上曰, 卿旣奏, 忠淸監司尹東昇, 從重推考, 可也。出擧條 上顧兵曹參判李?曰, 彼宰臣, 於海西, 多書下考矣。鳳漢曰, 海西守令少, 而多書之矣。上命書頃日處分人不得??傳敎曰, 其時入直儒臣, 必先爲之矣。上曰, 金載順, 何以處分? 李在簡曰, 削板放逐矣。上曰, 欲爲下敎, 而尙無實職人故不爲, 今日以試官觀之, 可見矣, 若此, 其他可知。其影則雖一事, 其時非徒陳箚而然, 況十八日前事, 旣付先天, 同事者, 焉敢同去就爲耶? 今日以試官, 意蓋在也, 一試官之入侍, 分義當然, 此後不敢以此更爲??事嚴飭, 旣下敎之後, 人君使臣亦四維, 與李晉圭․朴志源有異, 王者處分, 求其心求其貌, 非裕昆之道。旣示予意, 金載順, 放其放逐, 與李商芝, 竝給牒敍用。出傳敎 上曰, 李聖圭, 究其心則殘忍, 下番爲之, 故隨爲之矣。命試官先退, 命御史朴師海, 讀書啓。上曰, 有圖形乎? 師海曰, 有圖形矣。上命書啓更讀。上曰, 道臣誰也? 師海曰, 趙暾也。上曰, 本?誰也? 師海曰, 崔晸也。復讀書啓訖。上曰, 以此觀之, 趙鎰似不可禁之, 而山則趙鎰之山也, 洪量海之掘塚則非矣。鳳漢曰, 然矣。上曰, 洪量海, 果是學者, 有聚學徒之事乎? 師海曰, 無聚徒敎授之事矣。上曰, 將來洪重海[洪量海]必蠶食, 有賊反荷杖之慮矣。鳳漢曰, 例於旣入葬之後, 則其近處, 自然爲其物矣, 百步內則洪量海, 當用之矣。師海曰, 百步內則洪量海, 不可用矣。
上曰, 今覽結城按?御史書啓與圖形, 於今洪量海之用山處, 旣非靑龍內, 亦百步之外, 則趙鎰之供雖過, 以田畓圖形觀之, 洪量海之葬於趙鎰之田中, 若百畝中公田, 今不禁斷, 日後豈無呼賓作主, 稍蠶食之弊乎? 以人子言之, 此塚仍而置之, 雖禁繼葬, 世間事, 難以測度, 日後焉知無賊反荷杖, 專呑龍虎之弊乎? 洪量海入葬處, 卽趙鎰之田也, 田旣趙鎰之田, 則山非趙鎰之山乎? 決給於趙鎰處。以量海言之, 葬其父於田疇之中, 毋論田之陳不陳, 其父爲趙鎰之田夫乎, 爲趙鎰之墓直乎? 爲其父體魄之道, 雖一刻, 不可仍置, 以此分付, 定日區處後, 令道臣狀聞。噫, 凡疏決與放未放時, 此等之事, 不爲一放, 則身爲士子, 爲秦皇之事, 所謂支乃木所傷云者, 亦涉窘遁, 世間焉有此等殘忍之事乎? 見棺自有其律, 況此乎? 嚴刑一次後, 道內舒川郡, 勿限年定配。噫, 道內定配, 爲其區處, 可謂曲盡, 其若海東臣子, 何敢拒逆? 若不擧行, 自官擧行, 三水府, 限己身定配, 前道臣則適値罷職, 雖不捧議送, 趙鎰未還家之前, 鎰之兩子奴婢, 竝爲囚禁云, 不捧何意, 囚禁亦何意? 此非罷職道臣所可爲, 非民事則此公乎, 私乎? 其後道臣, 雖處分而敍用, 今覽啓目, 隣配徑放之說, 又謄啓本, 前道臣, 今方下敎, 則不可異同, 過爲順便, 亦非公也。囚禁趙鎰之子前道臣, 竝罷職不敍, 其後道臣, 其已勘, 不敢疊施, 前道臣未敍用前, 廉隅難以行公, 特解見任。噫, 抑强扶弱, 雖衰予心, 旣爲道臣, 左右顧瞻, 其若不卽擧行, 方施投?之典, 以此嚴飭, 今月內擧行, 其令狀聞, 特命差遣意若何, 而覽書啓聞, 所奏亦不無因緣彌縫之意。嗚呼, 三尺惟在其君, 焉敢若此? 御史朴師海罷職。以趙鎰言之, 若有人理, 九年泯黙, 兒塚尙今不葬乎? 此非人情所可忍也。王者治國惟在仁, 亦令道臣, 刑推一次後放送。出傳敎 御史師海先退, 藥房提調, 持湯劑入侍事。出榻敎 上曰, 王孫封爵者, 冠禮然後可以謝恩, 冠禮與吉禮前例, 令該曹, 詳考前例以稟, 若無其例, 令弘文館, 博求古禮以稟。出傳敎 上曰, 都目不可踰月, 吏判有闕, 政事, 明日擧行。出傳敎 上曰, 噫, 今予一心, 惟在追慕, 秋展謁, 勿爲擇日, 以初七日擧行, 當省牲省器, 而來回時, 當展禮於昌德, 以此分付。出傳敎 上曰, 再揀擇, 以御正殿後爲之, 爲擇日事, 分付。出傳敎 上曰, 不過申飭, 昨日禁推諸人, 以不應爲公律勘處, 拿處人, 以制書有違公律勘處, 放送事, 分付。出傳敎 上曰, 居首儒生金若龜, 直赴會試, 幼學朴載厚․洪啓漢, 各給二分, 李益權給一分。出傳敎 諸臣以次退出。(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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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구 [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41년 3월 13일 (무자) 원본1241책/탈초본69책 (13/20) 1765년 乾隆(淸/高宗) 30년/ ○ 兵批, 判書沈?進, 參判尹得養病, 參議鄭純儉病, 參知洪樂仁入直, 左副承旨具顯謙進。兵批啓曰, 黃海水使, 今當差出, 而擬望之人乏少, 他道守令竝擬, 何如? 傳曰, 允。又啓曰, 新除授全羅右水虞候趙惠慶呈狀內, 素患痰癖之證, 近又越添, 無望赴任云。病狀旣如此, 則不可等待其差復, 依例罷職, 何如? 傳曰, 允。以金勉行爲曹司衛將, 以黃仁儉爲副摠管, 以韓光德爲忠壯將, 以田昌雨爲忠翊將, 以兪應基爲僉知, 以洪啓?爲訓鍊副正, 以金由澤爲武兼, 以李匡運爲部將, 以李仁康爲黃海水使, 以韓有大爲昌德將, 副護軍李明運, 副司直洪麟漢․金華鎭․李鉉玉, 副司果全栢齡․金若龜, 副司正洪龍漢․金觀柱․李長玉。(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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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구 [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43년 9월 22일 (계축) 원본1272책/탈초본71책 (15/24) 1767년 乾隆(淸/高宗) 32년/ ○ 以徐命臣爲吏曹參判, 朴師崙爲持平, 金尙黙爲應敎, 尹承烈爲兼輔德, 李景祜爲判尹, 趙雲逵爲知經筵, 李得宗爲知義禁, 黃?爲監察, 兪漢吉爲全州判官, 呂龜周爲校書校理, 金若龜爲典籍, 待敎單洪相簡, 折衡吳漢迪, 今加嘉善加資事, 承傳。(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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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구 [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44년 2월 22일 (경진) 원본1277책/탈초본71책 (10/12) 1768년 乾隆(淸/高宗) 33년/ ○ 吏曹判書洪樂性進, 參議洪趾海進, 同副承旨李之晦進。以洪檢爲副修撰, 以洪良漢爲工曹參議, 以洪相聖爲吏曹佐郞, 宋翼彦爲掌樂僉正, 金若龜爲監察, 姜?福․白師殷爲典籍, 申晦爲典牲提調, 任?爲安岳郡守, 石物重修都監堂上李昌誼․黃?, 郞廳慶再觀․曺允亨。(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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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구 [記事] : 승정원일기/ 영조 45년 10월 20일 (무진) 원본1297책/탈초본72책 (10/15) 1769년 乾隆(淸/高宗) 34년/ ○ 兵曹口傳政事, 副護軍南泰普, 副司直兪彦述, 副司果李顯祚․鄭枋․鄭恒齡․李弘稷․南鶴宗․尹在謙․南彦彧․權穎․金?․朴宗亮․成胤儉․安正仁․李宇喆․李廷烈․愼爾復․韓宗濟․李奎徽․李益普․安致宅․元啓英․李仁黙․鄭景瑞․金瑋․宋德基․李益炡․宋淳明․李思質․李命賢․金仁大․徐日修․金漢房․朴載天․鄭游良․尹心宰․金光遂․安商楫․李蓍延․吳道源․金時訥․李龜應․趙恒彦․申?․李龜老․辛宅寧․宋龜明․李明吾․尹得宣․尹得勳․呂冕周․李黃中․李彦濟․李顯白․崔守誠․尹?․郭鎭億․鄭翼祥․鄭錫長․李萬協․權燧․金厚澤․金楗․金若龜․鄭弘德․徐道賢․金應遜․洪應辰․金應漢․李宗漢․崔弘輔․李光紹․張爾良․權德性․安渶․韓弼冑․申大規․崔昌世, 副司猛趙顯宇․黃?, 副司勇李宜楫․李宜業․徐命哲․徐尙修。(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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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539
용문사(醴泉 龍門寺, ''''마음으로 돌리는 佛經'''' 티베트 것만 알았더니 韓國에도 있었네) [記事] :
추수가 끝난 들녘은 황량하다. 나락이 사라진 빈 들판엔 찬 바람만 불어 댄다. 단풍도 이제 거의 다 졌다. 들과 산은 이제 잿빛으로만 치닫는다. 맨 몸을 드러낸 가냘픈 가지들이 처량해 보이기 시작한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의 경천호를 스쳐 용문사 쪽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호수의 물이 잔뜩 말랐다. 2, 3m 깊이의 호수가 ''''맨흙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그 위로 가을비가 흩뿌렸다.
차창 밖을 스치는 건 무상함이 느껴지는 무채색의 풍경이다. 세월이란, 시간이란. 괜한 상념이 쏟아진다. 경천호를 지나 고개를 넘으면 예천군 용문면이다.
산 깊고 외진 이곳은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 중 하나로 불려지던 곳이다. 고개마루 주변에 여러 저수지들이 들어앉았다. 비만 오지 않았으면 이른 아침 새하얀 물안개를 토해 냈을 예쁘장한 저수지들이다.
용문사 입구에 거의 다다를 때였다. 주변의 색이 갑자기 달라졌다. 잿빛은 사라졌고 짙붉은 황토색이 사방을 감쌌다. 주위를 가득 덮고 있는 낙엽 때문이다. 낙엽의 바다 위에 기품 있어 보이는 일주문이 오롯이 솟았다.
산속에 어찌 이런 넓은 자리가 있었을까? 갑자기 하늘이 열리는 듯 나타난 넓은 터에 가람이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다. 고운사의 말사인 용문사는 신라 870년 두운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낙엽 쌓인 긴 돌계단을 오르면 여느 절의 천왕문에 해당하는 회전문이다. 해운루를 통과해 만난 절 마당은 무슨 공사를 하는지 어수선했다. 정면으로 1984년 화재로 불탔다가 복원된 보광명전이 서 있다.
그 옆에는 용문사의 보물 중의 보물인 대장전이 있다. 용케도 사찰을 휘감았던 화마를 피한,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고려 명종 3년(1173)에 세워진 건물이다.
대장전이 불을 피할 수 있었던 건 외벽에 치장된 귀면(鬼面)과 물고기 조각, 용 조각 등이 불 막이를 제대로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장전을 찾는 이들이 빼놓지 않고 쳐다보는 것도 왼쪽 문 위에 있는 조각이다.
도깨비가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양이다. 대장전 안을 둘러보다 티베트의 마니차를 닮은 듯한 윤장대(보물 684호)를 봤다. 경전을 놓은 책장 가운데 축을 달아 회전토록 한 것이다.
티베트 사람들은 내부에 불교 경전을 넣거나 겉면에 불경을 새긴 마니차를 돌린다. 마니차를 돌릴 때마다 경문을 한 번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았다고 여긴다. 글을 읽지 못하는 민중들을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이 마니차와 같은 기능을 하는 물건이 한국에도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최근 들어 마니차를 들여 놓는 사찰들이 많다. 그런 것을 보며 불전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 내겠다고 외국의 문물까지 수입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 왔던 터였다.
그런데 그 윤장대가 버젓이 한국에도 있었던 것이다. 사찰의 설명문에는 금강산 장안사에 3층 윤장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회암사터와 혜음원터에 윤장대 축의 받침돌 유구가 있지만 현존하는 것은 용문사 윤장대가 유일하다고 적혀 있다.
왼쪽 윤장대의 8면에는 각기 다른 꽃살문이 새겨져 있다. 꽃살문의 아름다움만 놓고 보면 전국의 모든 사찰과 견줘도 손색이 없다. 윤장대는 보존을 위해 쇠줄에 묶여 있어 돌려 볼 순 없다. 대신 몸으로 윤장대를 돌았다.
아름다운 꽃살문 하나하나를 감상하며 마음 속 윤장대를 돌려봤다. 대장전의 정면에 있는 삼존불 뒤에는 금칠을 한 목각탱(보물 989호)이 있다. 조선 숙종 때 대추나무로 새긴 이 목각탱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가로 세로 2m가 넘는 크기의 이 조각은 화려한 금빛 도금이 돼 있다. 대장전 내부를 환하게 밝히기 위한 것이다. 조용하던 사찰이 북적거렸다. 부산의 어느 사찰에서 온 신도들이 대장전으로 몰려들었다.
어떻게 들어섰는지 좁은 대장전 안에 모두 자리를 잡고는 불공을 드리기 시작했다. 대장전 처마에선 가을비가 투둑투둑 떨어졌다. 대장전 계단 아래에는 자운루라는 2층 누각이 있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회의를 하고, 짚신을 만들어 조달했던 호국의 장소이다. 사찰 마당 왼쪽에는 사찰의 유물들을 모은 박물관이 있다. 윤장대를 모사해 놓은 것이 있어 직접 돌려 볼 수 있다. 박물관에선 아름다운 빛깔의 탱화와 조선시대 유명 선사들의 초상화도 볼 수 있다.
■ 예천군 용문면, 그림같은 초간정·황진이의 병암정… 타임머신 탄 듯 : 용문사에서 내려와 용문면사무소가 있는 금당실마을로 가는 길이었다. 지방도 928호선을 만난 지 얼마 안돼 오른쪽으로 아름다운 정자가 눈에 띄었다.
초간정이다. 금곡천이란 넓지 않은 개울이 큰 바위를 만나 크게 휘돌아 가는 모퉁이 절벽 위에 들어선 정자다. 정갈한 그 모양이 한 폭의 멋진 그림을 보는 듯했다. 주변 나무들이 옷을 벗어서인지 정자는 더욱 또렷이 자태를 드러냈다.
솔향 그윽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드리워 정자의 운치를 더욱 빛내 줬다. 이 정자는 조선 중기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지은 초간 권문해가 심신을 수양하기 지었다고 한다. <대동운부군옥>은 단군 이래 선조 때까지 역사 인문 지리 등을 총망라한 책으로 초간이 중국의 백과사전인 <운부군옥>을 읽고 힌트를 얻어 편찬한 한국형 백과사전이다.
그림 같은 초간정을 자세히 보고 싶어 정자를 품은 집의 대문을 두드렸는데 아쉽게도 반응이 없었다. 저 집의 주인과 어떻게든 연을 만들어 하룻밤 꼭 묵어 봤으면 좋으련만….
처마에서 떨어지는 찰진 빗소리만 듣다가 자리를 떴다. 초간정에서 금당실마을 가는 길 중간쯤 ''''예천 감로루''''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감로루가 뭘까 궁금해 차를 돌렸다.
농로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 만난 건 특이하게 생긴 고택이다. 세월의 까만 때가 묻은 건물은 함양 박씨 예천 입향조의 묘를 지키기 위해 세운 재실이었다. 재실 한쪽에 누각을 세워 멋을 낸 것이 참 특이했다.
누각의 아래는 마구간으로 썼다고 한다. 비안개에 젖은 감로루의 풍경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금당실마을은 1960,70년대 우리 옛 농촌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간 듯한 분위기다.
입구의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 마을로 들어갔다. 옛 모습의 고택들과 구불구불 얽혀 있는 돌담길이 정겹다. 허리춤 높이의 돌담길은 곡선을 그리며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활짝 열린 대문과 낮은 담장으로 서로에게 툭 터놓고 사는, 그런 마을이다.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금당실마을은 영화의 배경으로도 많이 등장했다. ''''나의 결혼 원정기'''' ''''영어 완전 정복'''' 등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금당실마을에서 1km 떨어진 곳에 드라마 ''''황진이''''의 무대가 됐던 병암정이 있다.
병풍 같은 큰 바위에 정자가 올라서선 굽은 노송 두어 그루와 어울려 너른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다. 바로 앞에는 연못이 있고 가운데 앙증맞은 인공섬도 있다.
■ 여행수첩 : 호산춘이 있는 문경시 산북면까지는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게 좋다. 점촌ㆍ함창IC에서 나와 예천 방향으로 국도 34호선을 타고 가다 산양에서 좌회전한 뒤 산북, 동로 쪽으로 향한다.
산북면사무소 소재지를 지나 조금만 가면 길가에 호산춘 간판이 보인다. 산북에서 경천호를 끼고 달리면 용문사 금당실마을이 있는 예천군 용문면으로 향한다. 용문에서 수도권으로 귀가할 때는 예천IC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금당실마을 장거리에는 음식점들이 여럿 있다. 이중 안동식당은 두부가 주 메뉴다. 칼칼하게 끓여 내는 두부찌개가 5,000원이고 손두부는 4,000원, 칼국수는 4,000원이다. 주인이 직접 만든 두부 맛이 일품이다.
(이성원 記者 韓國日報 200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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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주막(親舊와의 旅行, 醴泉이 딱이다) [記事] :
‘친구야. 주막에서 한잔 할까나.’ 남자들이라면 꼭 이맘 때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기 마련이다.
까까머리 시절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노상 함께 쏘다녔고. 어른 대접받을 무렵 갓 배운 술잔을 채워 준 친구. 군입대를 앞두고 모여앉아 밤을 지새운 그 깊은 술자리. 그리고 불쑥 찾아와 머릴 긁적이며 청첩장을 내밀던 그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생활에 쫓겨 가끔 얼굴 보기도 힘든 친구. 근 십년간 수많은 휴가와 여행을 떠났지만. 친구와 제대로 막걸리 한 잔을 기울여 본 적이 없다.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가 그립다.
◇ 삼수삼산이 모이는 삼강나루 : 친구와의 여행이라면 예천이 딱이다. 대학가 흔한 ‘주점’이 아닌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진짜 주막’이 있기 때문이다.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주막(三江酒幕). 길손도 모이고 강물도 모여드는 곳이다. 태백 황지에서 내려온 낙동강. 안동 내성천. 문경 금천이 서로 만나는 자리에 바로 삼강주막이 서있다.
물길 뿐 아니라 학가·팔공·주흘산맥 등이 모이는 곳이기도 해. 사람 또한 아니 모일 수 없다. 영남대로의 딱 중간지점인 이곳은 낙동강을 건너던 나루가 있던 곳으로. 과거보러가는 선비와 보부상 등 길손들이 찾아들어 주막이 번성했다.
또 부산 구포에서 소금을 실어나르던 배가 들르던 곳도 삼강나루다. 삼강주막은 1930년 나루터(예전에는 주막 바로 앞까지 물이 들어왔다) 앞에 문을 열었다.
주막이 있으면 당연히 주모도 있는 법. 지난 2005년 사망한 고 유옥연 할머니가 서른살부터 무려 60년간을 지켜온 주막이다. 실제 삼강주막은 사극에서 본 주막과 조금은 다르다.
어른 몇 명이 앉기에는 다소 비좁은 방 두 칸이라 좁은 툇마루에까지 상을 차렸다. 바로 음식을 낼 수 있도록 모든 방은 쪽문이 부엌으로 터있다. 군불을 때던 아궁이가 있는 부엌 흙벽에는 금을 그어 외상장부로 사용했다.
글을 몰랐던 주모는 주막손님 중 가장 단골이었을 사공의 외상을 나루터 쪽에 긋고. 다른 벽에는 외상손님이 온 방향으로 금을 그어 표시했다. 짧은 금은 막걸리 반 되. 긴 금은 한 되를 뜻하고 외상값을 갚고 나면 가로로 그어 정리했다.
초가 주막 곁에는 수령 450년도 넘은 홰나무가 서 있어 분위기를 더 한다. 난데없이 큰 바위가 있어 들여다보니 ‘들돌’이란다. 옛날 머슴들이 주인 앞에서 돌을 들어보이며 새경(품삯)을 흥정하던 일종의 연봉 고과 시험대다.
‘피식’ 웃음이 난다. 현대인들만 힘들게 사는 줄 알았더니 예전에도 그랬다. 돌을 들어보지 않고도 넉넉한 위안을 받았다.
◇친구야. 올 한해 고생했다 : “주모. 여기 술상 좀 차려오게”. 마지막 주모는 생을 떠났고 부엌도 텅텅 비었다. 대신 바로 옆 마을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술상을 받아왔다.
손두부. 도토리묵에다 경북에서 즐겨먹는 배추 찌짐(전). 그리고 동동주 한 되. 1만2000원에 차려오는 한상이다. 잔에 술을 따랐다. 시원하고 칼칼한 맛이 난다.
방은 일어서기도 힘들만큼 좁아 터졌지만. 방문객들의 낙서는 일일이 읽어볼 수도 없을 만큼 빽빽하다. 킬킬거리며 보니 별의별 사연이 다 적혀있다.
비록 짧지만 그 상황이 훤히 보인다. 주전자가 비어갈수록 정은 넘쳐나고. 좁은 방은 금세 운치로 가득 채워졌다. 배불리 먹고 평상에 나란히 누워 차가운 바람을 맞는다.
잔뜩 찌푸린 겨울 하늘은 언젠가 둘이 나란히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 봤을 때의 것과 닮았다. 아니. 딱 그것이다. 무슨 영화 ‘브로큰 백 마운틴’의 한 장면도 아니고….
답을 바라지 않는 질문만이 허공에 메아리친다. “야~! 즐겁냐?”
‘여행정보’ :
●맛 집=예천 용궁면은 예로부터 큰장이 섰던 곳이라 이름난 국밥집이 많다. 특히 순대국밥은 멀리서도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 정도로 맛있기로 소문났다. 30년 넘도록 장사를 해온 단골식당은 원래 오징어 불고기로 유명하지만. 깔끔한 국물에 구수한 순대와 머릿고기가 잔뜩 들어간 순대국밥도 일품이다. 뽀얗게 우린 국물이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 단지만 봐도 이집의 내공을 실감할 수 있다. 단돈 3500원짜리 국밥 한 그릇에 몸도 마음도 뿌듯해 진다.
●둘러볼 만한 곳=국내에는 물길이 휘돌아나가며 육지 속 섬의 비경을 만드는 곳이 많다. 안동 하회. 영월 선암. 청령포 등이 그렇다. 그 중에서도 예천 용궁면 회룡포는 정확한 오메가 모양의 물돌이 지형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름처럼 내성천 강물이 용틀임하듯 휘돌아간다. 가운데는 비룡산(190m)이 서있고 일명 ‘뿅뿅다리’라 불리는 철판다리가 놓여있다. 회룡포가 관광지로 각광을 받는 것은 바로 회룡대에 올라 전경을 굽어 볼 수 있어서다. 승용차로 전망대 바로 밑까지 오를 수 있다.
자신의 명의로 된 토지를 가지고 있어 매년 세금을 내는 나무로 주목받은 석송령(石松靈). 초간정 등이 볼거리로 유명하며 윤장대(보물 제684호)가 있는 용문사도 이름난 고찰이다.
2008년 1월 예천군에 의해 수리·복원된 삼강주막은 현재 마을 부녀회가 공동운영하고 있다. 예천군은 향후 삼강주막을 문화·체험마을로 운영할 계획이다.
(이우석 記者 스포츠서울 2009/11/25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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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