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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084:권맹손判書(附예천방문557)
작성자장병창 @ 2010.01.06 07:11:13
  예천의 자랑(2084) : 용문면 출신 권맹손 이조판서(附 예천방문 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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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權孟孫) :


  1390(공양왕 2)-1456(세조 2), 용문면 성현리 중마(睢鳩谷)에서 용문면 대제리 큰맛질로 옮겨 살았다. 자는 효백(孝伯), 호는 송당(松堂), 시호(諡號)는 제평(齊平), 본관은 예천, 득성시조 섬(得姓始祖暹)의 증손, 성주목사 상(詳)의 아들이다.

  1408년(태종 8)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 문과(式年文科) 진사과 24위, 1427년(세종 9)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각각 을2과(乙二科) 7위로 급제하고, 여러 차례 명(明)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국위를 선양했고, 1432년(세종 14) 좌부대언(左副代言)일 때 왕이, 박연이 상소한 ''''문무 무무(文舞武舞)는 마땅히 당세의 일을 노래해야 한다."라는 내용을 들어, "태조와 태종이 문무(文武)를 들어 노래 지으라"함에 악장문학(樂章文學)인 문덕곡(文德曲)과 무공곡(武功曲)을 짓는데 깊이 관여하였고, 1433년(세종 15) 3월에 다시 임금이 그에게 수명명 몽금척(受明命夢金尺)을 악장(樂章)에 올리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악부 제정(樂府制定)에 크게 공헌했다. 이것이 뒷날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가 창제(創製)된 바탕을 이루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 때의 초고본(草稿本)이 해방(1945) 전후까지 후손에게 보존되었는데, 지금은 어느 대학도서관에 소장되었을 듯하다.

  그는 항상 공정하고 청렴했다. 벼슬에 나아가 검열(檢閱), 영해 부사(寧海府使, 1488-1890),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조 판서(吏曹判書), 의정부 찬성 겸 예문각 대제학(議政府贊成兼藝文閣大提學), 함길도(咸吉道) 등 네 곳의 관찰사(觀察使), 아흡 차례의 중시관(重試官)을 겪었으나 언제나 칭송이 높았다.

  1450년(문종 1)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있을 때 의창제도(義倉制度)의 모순과 관리들의 부정을 지적하고, 이의 개혁을 상소했다.

  조선 건국 초부터 관곡(官穀)으로써 의창(義倉)의 양곡을 보충하면서 1417년(태종 17)에는 그 총량이 415만 섬에 이르렀으나 백성의 낭비와 관리의 소홀로 점차 재고량이 줄어서 세종 때에는 세금을 양곡으로 걷우는 등 대책을 세웠으나, 관리들이 아전(衙前)이나 지방 부호들과 결탁하여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취하여 의창(義倉)의 곡식은 거의 바닥이 나고 문서만 남게 된 것을 시정하고자 하는 글을 올렸다.

  그리하여 이 의창제도(義倉制度)를 개혁했다. 그 후 중추원부사(中樞院府事)가 되었고, 그가 지은 시문(詩文)이 <대동시림(大東詩林)>에 많이 실려 있다.

  묘는 예천읍 갈구리 구미산(龜尾山)에 있고, 용문면 하금곡리 유전동 인산서원(柳田洞仁山書院)에 모셔졌다.

  태재 유방선(泰齋柳方善)과 부르고 화답(和答)한 시(詩)가 있고, 또 권맹손(權孟孫)이 꿈속에서 큰 붕(鵬)새를 쏘아서 얻었는데, 이튿날 세종대왕이 친히 성명을 써서 전조(銓曹)에 내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벼슬을 주었으므로, 유방선(柳方善)이 시를 지어 축하하여 이르기를, "진기한 새의 길(吉)한 꿈 응당 알리기를 먼저 하였고, 임금의 붓으로 친히 쓰시니 특별히 영화가 있네"라고 하였다.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를 할 때는 함흥부(咸興府)의 문소루 낙성일(聞韶樓落成日)에 임금으로부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악부(樂府)를 받게 되었는데, 안평대군(安平大君)이 현판(懸板) 글씨 3자를 써서 걸었다.

  정덕 연간(正德年間, 1506-1521)에 삼도 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가 되어 고향 예천에 이르렀는데, 마침 예천군의 객사(客舍)가 새로 이루어져서 낙성연(落成宴)을 베풀었을 적에 시를 지어 이르기를,

  "삼도(三道)를 순선(巡宣)함에 아가위나무 그늘 몇이나 되던고/ 순박한 내 고향은 옛 이제가 한결 같네/ 산은 북에서 내려와서 큰 들에 임했고/ 물은 동으로부터 달려와서 긴 숲을 둘렀네/ 낮고 습한 옛집 고치려 경영한 지 오래더니/ 하여서 성공한 것 어진 원의 지혜로운 생각이 깊어서 일세/ 좋은 계절에 낙성하여 이윽고 늙은이에게 잔치 베푸니/ 사화(使華)도 부질없이 흥 나서 또한 높이 읊었노라."

라고 하였는데, 권별 시대(權鼈時代)까지 도리 위에 걸려 있었다. 지은 바의 시와 글이 <청구풍아(靑丘風雅)>에 많이 실렸다.

  밀양의 소루(召樓)에 권기(權技)의 기문(記文)이 있는데, 그 기문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즉

  "1441년(세종 23) 겨울에 예천 권맹손(權孟孫)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있다가 이 도(道)에 옮겨 임명되어 오는데, 막하(幕下)에 붙어서 이듬해 1442년(세종 24) 봄에 행차가 밀산(密山)에 이르렀다. 공(公)을 따라 누각에 가서 장부하는 여가에 눈을 돌려서 보니..."이다.

  [敬齋 河演의 詩] : 경상 감사 권맹손(慶尙監司權孟孫)에게 하례(賀禮)한다/ 영금(영金)을 물려줌이 글 가르침만 못하노니/ 과거(科擧)에 급제하던 길은 절로 열리는 법/ 삼도(三道)의 감사(監司)를 지나도 머리는 아직 검고/ 한 문중(門中)의 경사(慶事) 눈에 한결 더 뜨이네/ 당음(棠陰)에 교화를 펴니 남방이 안정되고/ 훤실(萱室)에 봄이 드니 백 세로 안녕하다/ 양양(襄陽)의 예언자 말이 그렇게 들어 맞아/ 소를 엿보는 범 새끼 정말 신령하도다/ 묘는 예천읍 갈구리 구미산(龜尾山) 밑 자좌(子坐)에 있는데, 옛 묘비가 퇴색하여 1977년에 선성 김국현(金國鉉)이 짓고, 선성 김성규(金聲奎)가 글씨를 써서 다시 세웠다.

  (世宗 文宗 世祖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密陽都護府 條, 大東韻府群玉, 海東雜錄 6卷, 襄陽誌 1661, 燃黎室記述 第3卷 世宗朝 故事本末 纂述과 判作條, 樗軒集, 敬齋先生文集, 醴泉郡邑誌 1841, 내故庄傳統가꾸기 1981, 原色世界大百科事典 5卷, 眞陽河氏 세 어른 文集 하두철 譯撰 高文社 1972 302쪽, 醴泉의 金石文 2003)

 [인터넷 야후] : 세종의 왕명으로 악부(樂府) 제정에 공헌이 컸으니, ''''문덕곡(文德曲)'''', ''''무공곡(武功曲)'''', ''''수명명(受明命)'''', ''''몽금척(夢金尺)'''' 등 뒷날 ''''용비여천가''''의 창제에 기반이 되는 작업에 참여했다. 벼슬에 나아가 예문관 검열, 공조이조 판서, 대제학, 동부승지를 지냈고, 경상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1441.12-1442.10)를 지냈다. 그 외 3도의 관찰사를 더 역임하면서 항상 공정하고 청렴했다. 특히 의창제도(義倉制度) 개혁 상소와 아흡 번의 시관(試官, 九秉銓衡)으로서 칭송이 드높았고, 여러 번 옮기어 공조판서 숭정 계급에 이르렀는데, 1456년(세조 2) 10월 15일 이 때에 이르러 중추원부사 벼슬로서 죽으니, 나이 67세였다. 왕이 조회(朝會)와 저자(朝市)를 정지하였다. 시호를 제평(齊平)이라 하였다. 용문면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묘는 예천읍 갈구리 구미산(龜尾山)에 있다. ᄋ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길가 언덕 위에 있는 삼구정(三龜亭)은 안동인 김영전(金永銓, 1439-1522), 영수(永銖, 1446-1502) 등 3형제가 1495년(연산군 1)에 88세된 그의 어머니 예천 권씨를 위해 지은 것이다. 권씨는 이조판서 권맹손의 딸로 한성 판관을 지낸 김계권과 결혼 5남 6녀를 두었다. 맏아들은 세조 때 불경 언해 작업을 했고, 해인사 대장경 판당을 중창하고 대장경을 펴낸 학조 대사이다. ᄋ 춘정 변계량(春亭卞季良, 1369-1430)의 제자인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권맹손이 1442년(세종 24)에 밀양에서 <춘정집(春亭集)>을 처음 간행하였다. ᄋ 권상(權詳)의 아들 맹손은 공민왕 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당대의 문장가로 <대동시림(大東詩林)>을 남겨 예천 권씨 가문을 빛냈지만, 그도 후손을 두지 못해 아우 유손(幼孫)의 두 형제가 예천 권씨의 대를 잇는다.(襄陽誌 1661, 嶠南誌 1937, 醴泉郡誌 1939, 慶尙道先生案, 인터넷 야후 2001)

  [世宗實錄] : 1434년(세종 16) 6월 26일 임금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고열(考閱)하게 하여 그 글 뜻의 알기 어려운 구절은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그 해설이 있는 것을 뽑아서 그에 해당한 마디마다 끝에 붙여 편찬하고, 이름을 <통감훈의(通鑑訓義)>라 하였다. 좌승지 권맹손으로 겸하여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ᄋ 1438년(세종 20) 8월 13일 예문관 제학에 오르고, 1440년(세종 22) 1월 19일에는 왕이 최질(衰질) 중에 있는 전 참판 권맹손에게 육식을 권하였다. 1441년(세종 23) 1월 11일에는 중추원 부사가 되고, 1441년(세종 23) 2월 3일에 경기도 관찰사에 올랐고, 옷 1령(領)을 하사받았고(1441.5.5), 경상도 도관찰사(1441.11.14)일 때는 외조모의 상에 대복(代服)을 입고자 왕에게 상언했으나 허락(1442.7.20)받지 못하였다. 이조 참판(1443.2.27)일 때는 중국 북경으로 가서 왕의 예물을 중국 황제에게 전달(1443.2.27)하였고, 왕과 의논(1443.7.22)하여 강권선(康勸善)과 금구랑(金九郞)을 일기루에 사신으로 보내고, 통구랑으로 하여금 소오예(蘇吾預) 등을 만나보게 하였다. 의금부 제조(提調)일 때는 간통한 심선(沈璿)과 이를 고발한 이추(李抽) 등의 처리에 대해 왕과 의논(1443.8.13)하였고, 심선을 석방(1443.8.18)하여 관직에 나아가게 하였다. 1443년(세종 25) 9월 3일에는 동지중추원사가 되었고, 1444년(세종 26) 1월 4일에는 의금부 제조로서 왕과 이정녕(李正寧)의 일을 논의하였다. 사헌부 대사헌(1444.1.12)일 때는 서연 윤참관(書筵輪參官)으로서 평안도의 축성(築城)을 정지할 것을 청(1444.1.23)하였고, 이인(李仁)과 김경재(金敬哉)의 처벌을 두 차례 청(1444.5.11, 1444.5.14)하였고, 의창이 실질적으로 백성을 진휼할 수 있게 할 방도를 왕과 의논(1444.5.21)하였다. 그 후 한성부 윤(1444.7.5), 개성부 유수(1445.1.4)를 지냈다. 1445년(세종 27) 7월 26일에는 의창(義倉)의 폐단과 남수북납(南受北納)의 법에 관한 상서(上書)를 올렸다. 공조 참판(1445.8.6) 때는 소금을 관장하는 의염색 (義鹽色)을 설치하고 재상을 제조(提調)로 삼도록 왕에게 건의(1445.8.16)하였고, 삼척부(三陟府) 바다 가운데 있는 요도(蓼島)에 관해 왕에게 아뢰었고(1445.8.17), 의창염(義倉鹽) 설치의 당위성에 대해 아뢰고, 소금의 필요성과 폐단에 대해 논의(1445.9.6)하였고, 염법(鹽法)을 급히 시행할 것을 아뢰었으나 윤허(1445.9.8)받지 못하였다. 1445년(세종 27) 11월 8일에 세자가 서연(書筵)에서 강의를 듣는데, 윤참관(輪參官) 공조참판 권맹손이 아뢰기를, "금년의 흉년이 병진년(1436)보다 심하온데, 감련관(監鍊官)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태어 총통(銃筒)을 부어 만드니, 민간의 폐단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정파(停罷)하여 내년을 기다리소서."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마땅히 위에 아뢰겠다."라고 하였다. 그 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1446.1.24), 형조 판서(1446.4.25), 동지중추원사(1446.12.2), 종부시 제조(1447.1.24 재임)를 거쳤다. 함길도 관찰사(1447.7.1)일 때는 진명포(鎭溟浦)의 병선(兵船)을 낭성포(浪城浦)에, 임성포(林城浦)의 병선을 조지포(曹至浦)에 이박(移泊)시키도록 건의(1449.9.30)하여 왕의 윤허를 받았다. 예문관 대제학(1449.12.26)이 되었다.

  [文宗實錄] : 1450년(문종 즉위년) 7월 4일 예문관대제학 권맹손(權孟孫) 등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臣) 등의 본관(本貫)인 경상도 예천 옆 기천(基川) 관할 안에 있는 은풍현(殷豊縣)은 곧 주상(主上)의 태(胎)를 봉안한 곳이니, 청컨대 군(郡)으로 승격하여 수(守)를 두소서."하니, 왕이 이조(吏曹)에 내리어 의논하게 하였다. 동년 7월 26일 의정부에서 이조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왕에게 아뢰기를, "경상도 기천(基川) 관할 안의 은풍현은 태를 안치한 곳이니, 청컨대 곤양군(昆陽郡)의 예에 의하여 군으로 승격시키고 기천현을 합속시켜 풍기군(豊基郡)으로 이름하소서."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1450년(문종 즉위년) 7월 6일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 왕세자가 처음으로 서연(書筵)을 열었을 때 우빈객(右賓客)으로서 세자의 시학(1450.9.17)이 되었고, 의창 및 환곡의 폐해에 대해 상언(1450.10.8)하였다. 1451년(문종 1) 5월 19일에는 사헌부에서 이조 판서인 그를 탄핵하였는데, 그 아우 권유손(權幼孫)을 태일전 직(太一殿直)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나 왕이 말하기를, "내가 생각해서 처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端宗實錄] : 1452년(단종 즉위년) 10월 1일에 판한성부사에 오르고, 공조 판서(1452.12.11), 중추원사(中樞院事, 1453.11.8), 예문관 대제학(1454.9.26)을 지냈다. [世祖實錄] : 1455년(세조 1) 9월 20일에 동지중추원사에 오르고, 원종공신 1등(1455.12.27)에 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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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權孟孫) : 태종(太宗) 8년(무자, 1408년) 식년시(式年試) 동진사20(同進士20) 급제, ▲인적사항 : 자(字) 효백(孝伯), 호(號) 송당(松堂), 본관(本貫) 예천(醴泉), 諡號, 封號 제평(齊平), ▲가족사항 : 부(父) 권상(權詳), 조부(祖父) 권군보(權君保), 증조부(曾祖父) 권섬(權暹), 외조부(外祖父) 임경종(任敬宗), 처부(妻父) 남적(南績), ▲이력 및 기타사항 : 소과(小科) 1408(무자) 생원시, 다른문과합격 정미1427(丁未1427), 전력(前歷) 신방생원(新榜生員) 품계(品階) 자헌대부(資憲大夫), 관직(官職)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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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한국문집총간(008_618c) 태재집(泰齋集, 1815)에 실린 유방선(柳方善)의 기사로, 그 내용은, “泰齋先生文集卷之二/ 詩○七言絶句 二百四十四首/ 江原監司權相 孟孫 覲親醴泉。慶尙監司趙相 瑞康 賦詩以送。用其韻却寄趙相。 五首/ 南來使相報徽音。喜聽平安倍得金。夏季擬尋棠?去。半?相話隔年心。// 新詩要妙帶唐音。讀罷如聞擲地金。忽憶富平山墅裏。挑燈數夜細論心。// 嶺外觀風有好音。淸裝敢近?中金。一方民俗歸於變。爭頌甘棠貢赤心。// 少日陪遊仰德音。須知一諾重千金。因風爲寄相思字。字字皆含?望心。// 珍重尊兄每嗣音。淡交元不要黃金。何當鼎坐小樓上。一詠一觴寬我心。”이다.(www.minchu.or.k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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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국학원전 해동잡록(海東雜錄, 1670)에 실린 죽소 권별(權鼈)의 기사로, 그 내용은, “해동잡록 6/ 권맹손(權孟孫)/ 본관은 예천(醴泉)이며 자는 효백(孝伯)이고 호는 송당(松堂)이다. 태종 때에 급제하고, 또 중시(重試)에 장원하였으며, 벼슬은 이조 판서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고, 시호는 제평(齊平)이다./ ○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과 부르고 화답한 시가 있다./ ○ 함흥부(咸興府)에 문소루(聞韶樓)가 있는데, 권송당이 감사가 되어 이 누대를 지었는데 누대를 낙성하던 날에 임금으로부터 〈용비어천가악부(龍飛御天歌樂府)〉를 내리어 마침 이르렀으니, 이석형(李石亨)이 문소로 이름 짓고,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호)이 문소루 세 글자를 큰 글씨로 써서 걸었다. ≪저헌집(樗軒集)≫/ ○ 권송당이 일찍이 꿈속에서 큰 붕(鵬)새를 쏘아서 얻었는데, 이튿날 우리 세종이 친히 성명을 써서 전조(銓曺)에 내려 첨지중추부사 벼슬을 주었으므로, 유방선(柳方喜)이 시를 지어 축하하여 이르기를,/ 진기한 새의 길한 꿈으로 알리기를 먼저 하였고 / 珍禽吉夢應先報/ 임금의 붓으로 친히 쓰시니 특별히 영화가 있네 / 御筆親題別有榮/ 하였다. 본집(本集)/ ○ 정덕(正德) 연간에 삼도 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가 되어 예천에 이르렀는데 마침 본군의 객사(客舍)가 새로 완성되어 낙성연을 베풀었을 적에 시를 지어 이르기를,/ 삼도를 순선(돌아다니며 임금의 덕을 선포함)함에 아가위나무 그늘 몇이나 되던고 / 巡宣三路幾棠陰/ 순박한 내 고향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네 / 淳朴吾鄕亘古今/ 산은 북에서 내려와서 큰 들에 임했고 / 山自北來臨大野/ 물은 동으로부터 달려와서 긴 숲을 둘렀네 / 水從東走綴長林/ 낮고 누추한 옛집 고치려 경영한 지 오래더니 / 卑舊館經營久/ 새로 고친 일은 어진 원님의 지혜로운 생각이 깊어서일세 / 修擧賢侯智慮深/ 좋은 계절에 낙성하여 이윽고 늙은이에게 잔치 베푸니 / 佳節落成仍宴老/ 사화(순찰사는 임금의 사명을 전하는 빛나는 사람이라는 말)도 부질없이 흥이 나서 높이 읊노라 / 使華乘興亦高?/ 하였는데, 지금까지 문미(門楣) 위에 걸려 있다. 지은 시와 글이 ≪청구풍아(靑丘風雅)≫에 많이 실렸다./ [주D-001]아가위나무 그늘 : 주(周) 나라의 소공(召公)이 관내 지방을 순찰할 때 길가의 아가위 밑에서 쉬었는데 그 지방사람들이 소공이 쉬던 나무라 하여 소중히 여기고 자르지 아니하였다. 《시경》에 보임.”이다.(www.minchu.or.k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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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1 刊) 해동잡록(海東雜錄)에 실린 권별(權鼈)의 기사로, 그 내용은, “...권맹손(權孟孫) 본관은 예천(醴泉)이며 자는 효백(孝伯)이고 호는 송당(松堂)이다. 태종 때에 ...”이다.(www.minchu.or.k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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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한국문집총간총목차 008집 태재집(泰齋集)에 실린 유방선(柳方善)의 용문면 출신 권맹손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 作 寄咸吉道金節制使宗瑞/二首 618 江原監司權相孟孫覲親醴泉 慶尙監司趙相瑞康賦詩以送 用...”이다.(www.minchu.or.k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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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慶尙道 / 醴泉 / 人物 / 高麗 林民庇 毅宗朝擢第官至同中書門下平章事爲相挺然有古風好善周急確實無華故武夫悍卒亦知景仰年七十三致仕謚文靖 林宗庇 工於四六 林椿 宗庇從子毅宗時人以文章鳴世屢擧不第鄭仲夫之亂闔門遭禍椿脫身僅免卒窮夭而死號西河先生有集行於世 高麗史云西河人未知何據 林支 漢元宗時以本郡吏從征東都叛將崔宗 崔積 崔思等有功欲賞以職支漢辭請以尙州管內多仁縣移屬本郡元宗許之 林惟正 登第官至祭酒工於集句有百家衣集 本朝權孟孫 登第官至藝文館大提學謚/ <하권0396-4>/ 齊平 尹祥 以縣吏登第學問精深誨人不倦長成均凡十有六年官至藝文館提學年七十八退老于鄕學者集雲八十三卒近代師儒之最 流寓本朝趙庸 洪武壬申謫居詳眞寶縣 孝子本朝林? 仕至監察爲父居廬三年末嘗見齒事聞旌閭 金? 其父早死以?得行喪及壯?歿廬墓年爲父仍居三年事聞拜架閤庫錄事 潘濡 爲父居廬三年事間旌閭 權節山 爲母居廬三年事聞旌閭 尹奕 郡吏也養父母家雖貧未嘗闕酒肉及歿哀毁踰禮事聞旌閭 盧珣 進士也少失父鞠於其祖珍珍年六十居母廬罹疾幾死珣奉藥先嘗禱於北辰求以身代嘗糞味苦疾果愈 烈女權氏 安東權啓生女年二十其夫宋孝從死親自負土葬於家北率五?先兒朝夕不離墓側終三年一曰有虎攬子而去權氏左手扶子右手拒虎呼曰皇天有知乞賜照臨虎乃棄去 新增 人物權五紀 文科以承文副正字選拜藝文館?閱止執義號拙齋 權五福 五紀之弟/ <하권0397-1>/ 文科官至校理早受業於??齋 金宗直門下戊午之禍興金馹孫等同被極刑號睡軒有文集行于世鄕人立祠享之 太斗南 文科官至執義以文章鳴于世 張孟羽 延福君末孫之子文科官至校理 權文海 文科官至左承旨有所撰大東韻玉二十卷號草澗 鄭琢 文科 宣廟朝官至左議政謚貞簡號藥圃鄕人立祠享之 當?丙子 命進?像 御製其銘銘曰筵中偶聞取覽厥像遺像偉然 穆廟名相百年之後入于 楓宸特題其銘以聳嶺人 曹友仁 萬曆乙巳文科昏朝坐詩案??三載酷被?掠癸亥 改玉官至承旨 朴廷薛 孝宗朝登第官至參判 金賓 孝宗朝登第官至參判 李東標 肅廟癸亥擢魁科歷銓卽舍人止參議號懶隱有學行風節 當?辛酉筵臣以力主淸議樹立卓爾建白 特贈吏曹判書 流寓本朝張末孫 天順己卯文科以 世祖朝敵愾功臣封延福君謚安襄 李光胤 益齋 齊賢之後文科官至校理號?西 權檣 忠定 ?之弟正德己卯登/ <하권0397-2>/ 賢良科以南床選入翰苑官至正郞以己卯賢 當?丙寅 贈副提學號霽村 朴從鱗 嘉靖丙辰文科選翰苑歷三司止銓郞 丁允祐 貳相 應斗之子文科官至監司 新增孝子李介立 隆慶丁卯進士以孝行擢授縣監 肅宗朝褒贈參判號省吾 魯瑞麟 郡吏也父病斷指垂口得甦 肅宗朝事 聞旌閭 新增烈女洪氏 習讀 文經濟之妻事在三綱行錄事 聞旌閭 呂氏 文應周之妻卽洪氏之歸事在三綱行錄事 聞旌閭 文氏 命周之女未?遭壬辰亂賊先刃其父?水女呼哭從溺事 聞旌閭 申氏 李宓之妻宓隨父大憲瀣朝京歿于燕訃至忽有白鳩來止于肩貌甚??馴擾異常每申氏號哭鳩輒承淚飮之常不離於側人以爲幽感申氏號哭平生無異袒括白衣疏食以終其身事 聞旌閭 李氏 權尙?之妻年二十八夫歿哀毁過禮冬月不著絮袍年過七?而食素終身 肅宗朝事 聞旌閭 朴氏 權國柱之妻六十偏寡淚盡繼血遂至喪明素食以終八耆事 聞/ <하권0397-3>/ 旌閭(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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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慶尙道 / 尙州 / 題詠 / 地形眞似虎起伏 李奎報詩尙州古者沙伐國王侯第宅無餘基干戈百戰/ <하권0438-2>/ 生死地惟有江山閱盛衰國破爲州州作國古往今來非一時云云繞垣千里何??渴來困臥目正暮未暇著眠窮搜奇天明出遊試?縷魚鱗萬屋龍纏?蛾眉齊拜環?鳴聞有紫雲知是誰 沙伐舊畿猶勝景 河?詩云云徐羅遺俗自淳風 不見龜疇洛水中 鄭潑詩宛聞芝曲商山裏云云沙伐遺?無處問數千年事付詩工 巨邑跨商洛 金?詩云云危樓眺遠明 千年洛水書應出 朴元亨詩云云萬古商山谷自深 閭井千區遠 權孟孫詩云云雲山萬疊晴 新增千林得雨含生意 李彦迪北川詩南來跋?遍山川白首咨詢志未宣世遠軒虞風不復琴希洙泗韻無傳云云四野逢春小惠宣未識化源勞簿領有時臨水靜觀天 一笛西風逈 李荇風詠樓詩孤光如有待望後愈分明云云三盃客興生牧翁文膾灸陶隱句新淸但得悠然趣非關後世名 城郭月猶明 李滉詩我來君不去云云夢裏山重阻愁邊草欲生餘寒春尙?病骨夜/ <하권0438-3>/ 還淸細話州樓句家亭想共名 靑山當檻入 黃俊良詩故國春將暮亭軒景政明云云碧草滿地生瓊句金成響神君水比淸只要隨處樂何必貴虛名(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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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慶尙道 / 彦陽 / 題詠 / 山水盤廻作一鄕 洪汝方詩松篁掩暎藏千戶云云 近郭山高多暮靄 李知命詩云云傍簾?密産秋? 帶雨新荷疊水凉 權孟孫詩含風紅蘂?階?云云 山形北拱羅都去 徐居正詩云云水勢東傾蔚海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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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慶尙道 / 南海 / 題詠 / 雲開鰲背三山近 權孟孫詩云云風捲鯨濤萬里長 鹽店烟靑海草香 朴孝修詩?炎歸路小風光云云 潮聲偏駭客 金?詩云云蜃氣已生洲 異域來朝木道長 前人詩聖澤無涯似望洋島夷懷惠失强梁窮?按堵人煙遍云云太守戒嚴傳劃角使華乘興據胡床良晨勝景知難得?我征?莫使忙(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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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10월 27일(을유) 2번째 기사/ 지난번 임금의 거둥시에 세자가 지송하지 않은 문제로 내시들을 처벌하다/ 세자 우보덕(世子右輔德) 조계생(趙啓生)을 불러, ꡒ거둥하던 날에 세자가 나와서 지송(祗送) 3992) 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ꡓ하니, 조계생은 중문(中門)이 늦게 열렸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ꡒ어째서 저부(儲副)3993) 를 잘 양성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세자를 보듯이 하는가.ꡓ하고, 또 세자전(世子殿) 승전 환자(承傳宦者) 신덕해(辛德海)․소환(小宦) 김순(金淳)․조주(趙珠)․우적(禹迹) 등을 불러 장(杖)을 때려 집으로 보냈는데, 신덕해(辛德海)만은 늙었으므로 장을 면제하였다. 세자에게 전지하기를, ꡒ지난번에 네가 지송(祗送) 을 하지 않았으니, 예(禮)에 잘못이다. 이제부터 6아일(六衙日)에 대궐에 나오라.ꡓ하고, 또 서연 장무(書筵掌務) 사경(司經) 권맹손(權孟孫)을 불러 묻기를, ꡒ서연(書筵) 재상(宰相)은 내가 알지마는, 보덕(輔德) 이하는 누구이냐?ꡓ하였다. 권맹손이 이름을 열거하여 대답하니, 전지하기를, ꡒ세자의 심술(心術)은 바르게 하지 않고, 다만 읽은 책장수와 읽은 차례 수를 써서 아뢰는데, 이제부터 이를 없애라.ꡓ하였다. 전에는 서연관(書筵官)이 매양 아일(衙日)을 당하면 읽은 책장수와 읽은 차례를 써서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빈객(賓客) 변계량(卞季良)․유백순(柳伯淳) 등이 예궐(詣闕)하여 아뢰기를, ꡒ지금 장무를 부르셔서 명하시기를, ꡐ세자의 심술을 바르게 하지 못하였다.ꡑ하였는데, 신 등이 재주가 없어서 훈도(薰陶)를 시키지 못하니, 죄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부(師傅)와 이사(貳師)에게 명하여 혹은 5일 혹은 10일마다 윤차(輪次)로 서연에 나와 효제(孝悌)․충신(忠信)의 말로 세자에게 고하고 서연관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소서.ꡓ하고, 변계량이 또 아뢰기를, ꡒ신이 일찍이 보덕(輔德)이 되어 하루에 두 차례 진강(進講)하였는데, 신이 다른 벼슬로 옮긴 뒤에는 근래 하루에 한 차례 진강하였는데, 이제부터 두 차례 진강하도록 청합니다.ꡓ하였다. 임금이, ꡒ내 자식이 하나가 아니나, 내가 장자(長子)는 장손(長孫)인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인데,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도 또한 부끄럽다. 이것은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ꡓ하니, 변계량이 대답하기를, ꡒ하늘에 다만 맡길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하루에 두 차례 진강(進講)하겠습니다.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ꡒ어린 자식이 아니니, 이 일은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서연관(書筵官)이 스스로 하라.ꡓ하였다. 변계량 등이 주상의 하교(下敎)를 세자에게 고한 뒤에 서연관과 대간이 들어와 《중용(中庸)》을 진강하였는데, 변계량이 말하였다. ꡒ성상께서 일찍이 이학(理學)을 통하게 하라고 명령하였으니, 청컨대, 서연관과 더불어 강론하고 문난(問難)하소서.ꡓ/ 【태백산사고본】 14책 32권 23장 B면/ 【영인본】 2책 137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사법-행형(行刑)/ [註 3992]지송(祗送) : 백관(百官)이 임금의 출가(出駕)를 배송(拜送)함. ☞ / [註 3993]저부(儲副) : 세자(世子). ☞(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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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태종실록 36권/ 태종 18년(1418 무술 / 명 영락(永樂) 16년) 7월 2일(경술) 10번째 기사/ 최사강․권맹손 등이 경상 감사 우균 등의 파직을 진언하다/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최사강(崔士康)․헌납(獻納) 권맹손(權孟孫)․정언(正言) 정재(鄭載) 등이 진언하기를, ꡒ경상 감사(慶尙監司) 우균(禹均)․강원 감사 남금(南琴)은 본래 혹리(酷吏)라 칭하므로 감사의 직임(職任)에 적합하지 않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ꡓ하니, 임금이 조말생(趙末生)에게 전지하였다. ꡒ내가 사람을 등용함은 나의 독전(獨專)이 아니니, 반드시 정조(政曹)5224) 의 의논에 따르는데, 부시(婦寺)5225) 의 족속(族屬)으로 관직(官職)을 함부로 받은 자가 몇 사람인가? 내가 어찌 일호(一毫)의 사정(私情)이 있겠는가? 우균(禹均)과 남금(南琴)이 중외(中外)에 두루 벼슬하여 직질(職秩)이 참의(參議)에 이르렀으나 비방하는 말이 없었다. 다만 우균은 남주(南州)에 수령(守令)으로 재임할 때에 왕형(枉刑)하여 살인한 이름을 얻었으나, 지금은 이미 잘못을 뉘우쳤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금고(禁錮)하여 쓰지 않으려는 것이냐? 위의 사람들이 청(請)할 만한 죄가 있거든 마땅히 무슨무슨 일이라고 모조리 기록하여, 감사의 직임에 적합하지 않다고 분명히 그 죄를 청함이 가하다. 한갖 혹리(酷吏)라고 함부로 칭하나 혹리가 될 만한 사실을 거의 한 마디도 언급(言及)한 것이 없으니, 이것은 명목도 없이 방(榜)을 붙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이 말을 듣게 하면 그 마음이 기쁘겠는가, 원망을 하겠는가? 나의 구언(求言)함은 오로지 이재(?災)인데, 이것이 이재가 되는 말인가? 만일 사건을 말하여 맞지 않아 견책(譴責)을 가하면 구언(求言)의 본의(本意)에 어긋날 것이니, 내 마땅히 우선 그냥 두고 논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광망(狂妄)의 무리가 간원(諫院)에 있음은 이조(吏曹)의 허물이 아니겠는가?ꡓ 조말생이 계문(啓聞)하였다. ꡒ이미 지난 것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구악(舊惡)을 생각하지 아니함은 선성(先聖)의 격언(格言)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사람을 씀은 참으로 옛 성인(聖人)에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간원의 말은 사실로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광망(狂妄)함을 신이 또한 어찌 일찌 일찍이 알았겠습니까? 반드시 일을 주어본 뒤에야 그 사람의 현부(賢否)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ꡐ가(可)함을 시험한 뒤에 그만둘 것이다.ꡑ하였습니다.ꡓ/ 【태백산사고본】 16책 36권 3장 A면/ 【영인본】 2책 238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정론(政論)/ [註 5224]정조(政曹) : 문선(文選)을 맡아보는 이조(吏曹)와 무선(武選)을 맡아보는 병조(兵曹)를 통칭하는 말임. 전조(銓曹). ☞ / [註 5225]부시(婦寺) : 궁중에서 일을 보던 여자와 환관(宦官)을 일컫는 말임. ☞(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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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세종실록 1권/ 세종 즉위년(1418 무술 / 명 영락(永樂) 16년) 8월 27일(갑진) 1번째 기사/ 박자청․조말생․김여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자청(朴子靑)을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조말생을 병조 판서로, 김여지(金汝知)를 형조 판서로, 최윤덕을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로, 마천목(馬天牧)을 장흥군(長興君)으로, 노귀산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이관(李灌)을 이조 참판으로, 이명덕을 병조 참판으로, 심인봉(沈仁鳳)․이식(李植)․김귀보(金貴寶)를 모두 좌군 총제(左軍摠制)로, 하경복(河敬復)을 우군 총제로, 허권(許權)․심청(沈?)을 모두 중군 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로, 성달생을 좌군 동지 총제로, 원윤(元胤)을 우군 동지총제로, 이교(李皎)를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오승(吳陞)을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한상덕(韓尙德)을 인수부 윤(仁壽府尹)으로, 심징(沈澄)을 경창부 윤(慶昌府尹)으로, 정상(鄭尙)을 예조 참의로, 원숙을 병조 참의로, 조치(曹致)를 형조 참의로, 성엄(成?)을 우대언(右代言)으로, 김익정(金益精)을 좌부대언(左副代言)으로, 이수(李隨)를 우부대언으로, 윤회(尹淮)를 동부대언(同副代言)으로, 좌대언(左代言) 김효손(金孝孫)을 지병조사(知兵曹事)로, 최관(崔關)을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로, 김고(金顧)를 사헌 장령(司憲掌令)으로, 김상직(金尙直)․권맹손(權孟孫)․김장(金?) 을 병조 정랑으로, 정재(鄭載)․정인지․유효통(兪孝通)을 병조 좌랑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권은 재주와 행검이 없고 성격이 가혹하고 까다로우며 밖으로는 청렴 공정을 꾸미고, 윤은 성품이 영리함을 좋아하고 또 주색으로써 일을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2장 B면/ 【영인본】 2책 264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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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세종실록 13권/ 세종 3년(1421 신축 / 명 영락(永樂) 19년) 10월 17일(병오) 2번째 기사/ 사헌부 장령 권맹손이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하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다/ 사헌부 장령 권맹손(權孟孫)이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하려 하니, 허락하지 아니하고 의료할 약품과 타고 갈 말을 내려 주었다./ 【태백산사고본】 5책 13권 25장 B면/ 【영인본】 2책 457면/ 【분류】 *외교-명(明) / *교통-육운(陸運) / *무역(貿易)(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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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1422 임인 / 명 영락(永樂) 20년) 10월 3일(정해) 2번째 기사/ 기근을 진무하기 위해 권맹손을 강원도에 이숙치를 평안도에 보내다/ 좌의정 이원이 계하기를, ꡒ강원․평안 두 도에 기근(饑饉)이 더욱 심하여, 혹은 굶어 죽은 사람이 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ꡓ라고 하니, 임금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ꡒ진제 경차관(賑濟敬差官)들이 모두 말하기를, ꡐ지금 비록 굶더라도 사망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ꡑ 하더니, 이제 어찌 이와 같단 말이냐. 이는 나를 속인 것이로다. 마땅히 정직한 사람을 보내어 진심껏 순찰하여 구제하되, 만약에 잘 구휼(救恤)하지 못하여, 굶어 죽는 데 이르게 하는 자가 있으면, 엄중히 법으로 징계하겠다. 만약 기근이 정 심하면, 장정들은 다른 지방으로 옮겨서 먹을 것을 얻게 하고, 곡식을 구하여 옮겨다가 늙은이와 어린이에게 주도록 하라.ꡓ하고, 이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권맹손(權孟孫)을 강원도에 보내고, 한성 소윤(漢城少尹) 이숙치(李叔?)를 평안도에 보냈다./ 【태백산사고본】 6책 18권 4장 B면/ 【영인본】 2책 506면/ 【분류】 *구휼(救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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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7월 30일(정유) 2번째 기사/ 박안신․이숙치․신인손 등을 충청․황해․함경․평안․강원도 찰방으로 보내다/ 각도의 찰방(察訪)으로 충청도에는 상호군(上護軍) 박안신(朴安臣)을, 황해도에는 전농시 윤(典農寺尹) 이숙치(李叔?)를, 함경도에는 사인(舍人) 신인손(辛引孫)을, 평안도에는 군기 감정(軍器監正) 송인산(宋仁山)을, 강원도 에는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권맹손(權孟孫)을 보냈다./ 【태백산사고본】 10책 29권 10장 A면/ 【영인본】 2책 683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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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1426 병오 / 명 선덕(宣德) 1년) 1월 12일(정미) 2번째 기사/ 양주 부사 권맹손․지해풍군사 황득수가 사조하니 인견하다/ 양주 부사(楊州府使) 권맹손(權孟孫)과 지해풍군사(知海豊郡事) 황득수(黃得粹)가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접견하고 이르기를, ꡒ마음이 바르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경기도 가 일이 복잡한 것이 다른 도에 비하여 갑절이나 될 것이니, 마땅히 백성의 폐해를 제거할 것을 언제나 생각하도록 하라.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0책 31권 3장 B면/ 【영인본】 3책 2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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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1427 정미 / 명 선덕(宣德) 2년) 3월 20일(무신) 1번째 기사/ 하경복․안순․박종우․이맹균․황상․안수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하경복(河敬復)으로 참찬(參贊)을, 안순(安純)으로 호조 판서를, 박종우(朴從愚)로 정헌(正憲) 운성군(雲城君)을, 이맹균(李孟畇)으로 참찬을, 황상(黃象)으로 병조 판서를, 안수산(安壽山)으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서선(徐選)으로 형조 판서를, 문효종(文孝宗)으로 우군 도총제(右軍都摠制)를, 유사눌(柳思訥)로 인수부 윤(仁壽府尹)을, 오승(吳陞)으로 예문관 대제학을, 조질(趙秩)로 도총제(都摠制)를, 성엄(成?)으로 병조 참판을, 홍해(洪海)로 가정(嘉靖) 당성군(唐城君)을, 한상덕(韓尙德)으로 호조 참판을, 문귀(文貴)로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홍여방(洪汝方)으로 인순부 윤(仁順府尹)을, 정효문(鄭孝文)으로 경창부 윤(慶昌府尹)을, 성개(成槪)로 동지총제(同知摠制)를, 신개(申槪)로 형조 참판을, 조뇌(趙賚)․최부(崔府)․곽존중(郭存中)․정초(鄭招)를 모두 총제(摠制)로, 이군실(李君實)․김오문(金五文)으로 동지총제(同知摠制)를, 박안신(朴安臣)으로 공조 참의를, 최사의(崔士儀)로 이조 참의를, 양춘무(楊春茂)로 첨총제(僉摠制)를, 김상직(金尙直)으로 집현전 부제학을, 김섭(金涉)으로 좌사간(左司諫)을, 우승범(禹承範)으로 우사간(右司諫)을, 권맹손(權孟孫)으로 과의 상호군(果毅上護軍) 겸 사헌 집의(司憲執義)를, 정인지(鄭麟趾)로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홍사석(洪師錫)으로 상호군(上護軍)을, 유효통(兪孝通)으로 예문 직제학(藝文直提學)을, 이긍(李兢)으로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를, 남계영(南季瑛)으로 승문원 부교리(承文院副校理)를, 박연세(朴延世)로 부사직(副司直)을 삼았으니, 문무과의 중시(重試)한 사람은 모두 관계(官階)를 뛰어넘어 임명하고, 초시(初試)는 그전의 예(例)에 의거하여 제수(除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35권 22장 B면/ 【영인본】 3책 6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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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1430 경술 / 명 선덕(宣德) 5년) 7월 3일(신축) 1번째 기사/ 하경복․이맹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하경복(河敬復)으로 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를, 이맹균(李孟畇)으로 의정부 참찬(參贊)을, 신개(申槪)로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을, 유한(柳漢)․홍연(洪?)으로 중군 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를, 민의생(閔義生)으로 인수부 윤(仁壽府尹)을, 박신생(朴信生)으로 경창부 윤(慶昌府尹)을, 우승범(禹承範)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박곤(朴坤)으로 호조 참의를, 박안신(朴安臣)으로 예조 참의를, 유맹문(柳孟聞)으로 병조 참의를, 신포시(申包翅)로 공조 참의를, 지유용(池有容)으로 우군 첨총제(右軍僉摠制)를, 변계손(卞季孫)으로 좌사간(左司諫)을, 권맹손(權孟孫)으로 우사간(右司諫)을, 조항(曺沆)으로 지평(持平)을, 이장손(李長孫)으로 좌헌납(左獻納)을, 윤미견(尹彌堅)으로 우정언(右正言)을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5책 49권 1장 A면/ 【영인본】 3책 244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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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의 자랑(71) : 권맹손(<용비어천가> 창제의 기반)(作成 張炳昌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2002-08-30 照會 48)

  -><예천의 자랑> 제1권(張炳昌 著 2004年)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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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557

  예천녹색농촌마을(醴泉綠色農村마을 體驗客 ‘북적’ : 지난해 8億9千餘萬 원 農外所得 올려) [記事] :

  예천군이 농정방향을 단순 농업생산 공간에서 생산.정주.휴양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지난 2003년도부터 조성해 온 녹색농촌체험마을이 지역 농가의 농외소득 증대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용궁면 ‘회룡포마을’ 상리면 ‘흰돌마을’ 용문면 ‘출렁다리마을’ 풍양면 ‘삼강주막 마을’ 보문면 ‘문래실마을’ 등 5개 녹색농촌체험마을은 마을마다 특색 있게 조성되어 있어 지난 한 해 마을마다 연일 대도시 체험객들로 붐볐다.

  특히, 일부 마을에서는 마을주민 모두가 대도시 체험객들을 맞이하느라 영농일손이 부족할 지경이라며 즐거운 비명 속에 2009년 한해에만 8억 9천여만 원의 농외소득을 올리며 지역농가의 농외소득에 한 몫을 하고 있다.

  타 자치단체의 체험마을이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것에 비해 예천군내 녹색농촌체험마을이 이와 같이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은 농림수산식품부로부터 지정될 당시 체험마을 조성비로 지원된 2억원 외에 예천군(군수 김수남)에서 마을 특성에 맞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여 경쟁력을 확보하였으며 특히, 2009년 여름에 회룡포와 삼강주막이 KBS-TV 1박2일에 소개되는 등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널리 알려져 연일 대도시 체험객들이 찾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김수남 군수가 체험마을 마을활성화를 위해 직접 각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마을주민들과 심도 있는 대화를 통하여 숙원사업을 해결하여 주민들의 의욕 증진시켰으며, 예천군에서 도시와 농어촌간의 교류 촉진에 관한법률에 근거해 관내 체험마을 5개소 모두 농어촌체험휴양마을로 지정하여 숙박시설 제공, 각종 농업 체험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한 결과이다.

  특히, 예천군은 체험마을을 운영할 수 있는 인적 인프라 구축을 위해 대구대학교에서 실시했던 농민사관학교 1년 과정에 각 체험마을사무장 및 마을리드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매월 정기적으로 각 마을 사무장에 대한 체험마을 운영 교육을 통하여 인적자원의 확보에 매진해 왔다.

  전상학 농업유통과장은 “지금 전국의 일부 체험마을이 운영에 문제점을 드려냈지만 우리 군의 체험마을 5개소는 권역별로 마을 특성에 맞추어 조성하였고 지속적인 지원을 통해 급속히 성장하여 실제적인 마을주민들의 소득과 연계되고 있다”고 말했다.

  예천군은 2010년에도 100명이 넘는 대규모 체험객을 맞이할 수 있도록 경상북도 선도마을로 지정된 출렁다리체험마을 등에 3억 7천여만 원의 사업비를 들여 숙박시설을 증축하고 적극적인 홍보를 위해 체험마을 홈페이지를 구축하는 등 도시민들이 찾아와서 쉬고 체험하고 즐기고 사가는 활력 넘치는 체험 휴양공간으로 조성해 나갈 방침이다.

  (장인철 記者 新亞日報 2010년 01월 05일 (화) 13:3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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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양면의용소방대(庚寅年 새해 豊壤面 新年交禮會 出鄕人 및 面民 等 300餘名 參席 大盛況!) [記事] :

  경인년 풍양면민 신년교례회가 2010년 1월 5일 오전 11시 풍양초등학교 실내체육관에서 남효봉 면장을 비롯한 기관단체장, 남.여 풍양의용소방대원, 주민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4일 내린 폭설로 인해 차량 소통이 어려운 가운데도 불구하고 이날 행사장에는 정영광 군의장, 이영섭.남시우 군의원, 이현준 도의원, 오창근 민주평통협의회장, 최명환 전 교육장, 김학동 재경군민회 부회장, 재부.재구.재경 향우회원 등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풍양의용소방대 강성구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지역발전과 면민의 복지증진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은 남효봉 면장을 비롯한 기관단체장과 면민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드리고 푸른 들판과 낙동강이 감싸안고 있는 풍요의 고장 풍양이 더욱 발전하는 한 해로 만들자"고 말했다.

  강 회장은 또, "풍양면민 모두가 올해는 안목과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사랑과 인정이 샘솟는 건강한 고장으로 만들어 나갈 것"을 제안하고 "남여 의용소방대에 대한 면민들의 애정과 성원을 당부하고 새해에는 면민들이 소망하는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한다"고 인사했다.

  정영광 군의장은 축사에서 "희망찬 2010년 풍양면 신년교례회를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새해에는 여러분 모두 꼭 소원 성취하시고 가정과 직장에 사랑과 행복이 가득하고 지난해 국제적 금융위기와 전 세계적 경제침체 속에서도 풍양면민은 우직하고 믿음직스러운 소처럼 열심히 일해 위기를 극복했다"며 면민들을 위로했다.

  정 의장은 "2010년 경인년은 60년 만에 찾아온 왕중의 왕인 백호의 해 인 만큼, 산야에서 우렁차게 포효하는 호랑이처럼 힘찬 기개로 풍양면이 활짝 웃는 행복한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힘을 합해 열심히 뛰자"고 당부했다.

  남효봉 면장은 신년인사에서 "신년교례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여 준 풍양면 남.여의용소방대장을 비롯한 대원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고 폭설로 차량통행이 불편한 가운데도 풍양을 찾아준 출향인들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남 면장은 "올해는 낙동강 주변지역의 농경지 리모델링 사업, 삼강주막 주변의 공원조성사업, 풍양면 소재지 도시계획정비사업, 청곡~우망간 도로 확포장 사업 등 각종 사업이 추진되어 어느 해보다 많은 일들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새해설계를 밝혔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300여명의 면민들은 풍양면 남.여의용소방대원들이 손수 마련한 푸짐한 음식과 떡국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서로의 가정과 직장에 행복과 큰 발전이 있는 활기찬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며 화이팅을 외쳤다.

  한편, 폭설로 인해 차량통행이 어려운 가운데도 재부산 및 재대구풍양향우회장과 회원, 재서울풍양향우회 양승목 사무국장과 회원, 정석홍 재예천풍양향우회장과 회원 등 300여명이 참석하여 전날 개최된 예천군신년교례회 보다 많은 인사들이 참석 단합된 면민상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0-01-05 오후 4: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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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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