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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092:권맹손判書5(祝권오종/예천방문560)
작성자장병창 @ 2010.01.18 07:06:40
  예천의 자랑(2092) : 용문면 출신 권맹손 이조판서(5)(附 하리면 은산리 출신 권오종, 14일 도교육위원회 의장 당선...축하합니다/예천방문 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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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문종실록 4권/ 문종 즉위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11월 10일(경술) 3번째 기사/ 이조 판서 권맹손이 사헌부에서 논핵한 것을 들어 사직을 청하다/ 이조 판서 권맹손(權孟孫)이 상언(上言)하기를, ꡒ신(臣)이 일찍이 풍습(風濕)을 앓아서 온정(溫井)에 가서 목욕하였는데, 다만 길에서 역관(驛館)을 지나면서 기숙(寄宿)하였으나, 만약 수령(守令)과 더불어 연음(宴飮)하고 뇌물을 받은 일이라면 신은 실로 없었습니다. 이제 헌부(憲府)에서 신(臣)이 본래 병이 없는데 목욕한다고 칭탁하고 오랫동안 머물면서 폐를 일으켰다고 논핵(論?)하여 마지않습니다. 신은 이러한 비방을 당하여 부끄럽기가 그지없으니, 빌건대 신의 직책을 파면하소서.ꡓ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47장 B면/ 【영인본】 6책 316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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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문종실록 5권/ 문종 즉위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12월 17일(정해) 6번째 기사/ 이조 판서 권맹손이 한산관의 거관, 장수로 쓸 인재를 초천하는 일 등을 아뢰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맹손(權孟孫)이 아뢰기를, ꡒ이전(吏典)이 한산관(閑散官)1427) 에 나가는 법을 세운 다음부터 각사(各司)에는 일에 익숙한 이전이 없어서 일이 많이 폐이(廢弛)됩니다. 청컨대 되돌려 출사(出仕)하게 하고, 거관(去官)할 때를 당하여 가자(加資)하게 하소서.ꡓ하니, 의정부와 같이 의논하여 아뢰도록 명하였다. 권맹손 이 또 아뢰기를, ꡒ태종 때에는 상호군(上護軍) 가운데 장수(將帥)를 감당할 만한 자를 가려서 하루에 발탁하여 2품에 임명한 사람이 10인이었습니다. 이제 재추(宰樞) 중에 장수가 될 만한 자가 적으니, 빌건대 초천(超遷)1428) 을 더하소서.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ꡒ재주는 다른 시대(時代)에서 빌릴 것이 못되니, 만약 이를 쓰려고 한다면 어찌 그 알맞은 사람이 없겠느냐?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5권 13장 B면/ 【영인본】 6책 329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註 1427]한산관(閑散官) : 실직(實職)이 아닌 산직(散職)에 처한 관원. ☞ / [註 1428]초천(超遷) : 자품(資品)을 뛰어넘어서 벼슬을 임명하는 것. ☞(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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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문종실록 5권/ 문종 1년(1451 신미 / 명 경태(景泰) 2년) 1월 12일(임자) 6번째 기사/ 세자 빈객 권맹손이 동궁의 병으로 진강을 정지토록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세자 빈객(世子賓客) 권맹손(權孟孫)이 아뢰기를, ꡒ동궁(東宮)이 근일에 편찮으시니, 청컨대 강(講)을 정지하소서.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ꡒ이제 바야흐로 바람이 따뜻한데 어찌 조그마한 질환으로 학업을 폐지할 수 있겠는가?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5권 45장 B면/ 【영인본】 6책 345면/ 【분류】 *왕실-경연(經筵)(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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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단종실록 2권/ 단종 즉위년(1452 임신 / 명 경태(景泰) 3년) 7월 2일(계사) 3번째 기사/ 윤형․이견기․이계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윤형(尹炯)을 의정부 좌참찬으로, 이견기(李堅基)를 호조 판서로, 이계린(李季?)을 형조 판서로, 권맹손(權孟孫)을 판한성 부사(判漢成府事)로, 정창손(鄭昌孫)을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박중림(朴仲林)을 호조 참판으로, 이사순(李師純)을 공조 참판으로, 신처강(辛處康)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성봉조(成奉祖)를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김조(金?)를 인임부 윤(仁臨府尹)으로, 조극관(趙克寬)을 대사헌으로, 이순지(李純之)를 예조 참판으로, 박중손(朴仲孫)을 우승지로, 노숙동(盧叔仝)을 좌승지로, 권준(權?)을 우부승지로, 김유온(金有溫)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홍약치(洪若治)를 사간원 우정언으로 삼고, 임순례(任循禮)를 숭의전 부사(崇義殿副使)로 삼아 반차(班次)를 봉상 소윤(奉常少尹) 아래에 두었다. 이번 정사에서 의정부 당상들이 매일 빈청(賓廳)231) 에 나아가고, 이조․병조의 당상이 의논에 참여하여, 제수(除授)하는 대성(臺省)․정조(政曹)․연변 고을의 장수와 수령은 반드시 3인의 성명을 썼으나, 그 중에 쓸 만한 자 1인을 취하여 황표(黃標)를 붙여서 아뢰면 노산군(魯山君)이 다만 붓으로 낙점(落點)할 뿐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ꡐ황표 정사(黃標政事)ꡑ232) 라고 일컬었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장 A면/ 【영인본】 6책 516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註 231]빈청(賓廳) : 조선 때 의정부의 당상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정무를 맡아보던 곳. ☞ / [註 232]ꡐ황표 정사(黃標政事)ꡑ : 조선조 단종 때 임금이 어렸기 때문에 전조(銓曹)에서 의정부 대신들과 상의하여 3망(三望)을 추천하고, 그 중에 적격자 1인의 이름 밑에 황표를 붙여서 아뢰면 임금이 형식적으로 낙점하던 일을 말함. 이 결과 의정부의 권한이 강화되었음. ☞(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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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단종실록 4권/ 단종 즉위년(1452 임신 / 명 경태(景泰) 3년) 10월 1일(기축) 3번째 기사/ 남지․정분․윤형․허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남지(南智)를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로, 정분(鄭?)을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윤형(尹炯)을 좌참찬(左參贊)으로, 허후(許?)를 우참찬(右參贊)으로, 민신(閔伸)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정인지(鄭麟趾)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이계린(李季?)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사철(李思哲)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조혜(趙惠)․이맹진(李孟畛)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권맹손(權孟孫)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이사임(李思任)․남경우(南景祐)를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이화(李樺)․연경(延慶)․박연(朴堧)을 행 중추원 부사(行中樞院副使)로, 이계전(李季甸)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김조(金?)를 인순부 윤(仁順府尹)으로, 오정(吳靖)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변효경(卞孝敬)을 인수부 윤(仁壽府尹)으로, 이순지(李純之)를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박팽년(朴彭年)을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 지정(池?)을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이호성(李好誠)을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이수희(李守羲)를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정신석(鄭臣碩)을 사간원 우헌납(司諫院右獻納)으로, 정이한(鄭而漢)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김문기(金文起)를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조수량(趙遂良)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김윤수(金允壽)를 경상도 우도 도절제사(慶尙道右道都節制使)로, 하한(河漢)을 경상도 좌도 도절제사(慶尙道左道都節制使)로 각각 임명하였다. 국장(國葬)․산릉(山陵)․빈전(殯殿) 등 3도감(三都監)의 낭청(郞廳)들을 모두 초자(超資)하였다. 남지(南智) 의 좌목(座目)691) 이 김종서(金宗瑞) 의 아래에 있었는데, 좌의정이 되어 신병으로 오랫동안 정사(政事)를 못보게 되자. 김종서 가 비난하여 말하기를, ꡒ정부가 어찌 양병(養病)하는 곳이겠는가?ꡓ하였고, 이에 체직(遞職)하였다. 정인지(鄭麟趾)는 좌목이 정분(鄭?) 의 위에 있었으나, 문종(文宗) 이 정분을 발탁하여 1품(一品)으로 삼았는데, 사람들이 정인지가 뒤졌다 하였다. 이로부터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가 물의(物議)를 싫어하여 또한 1품으로 올렸다. 또 허후(許?) 를 정헌 대부(正憲大夫)692) 로 가자(加資)하고자 하였는데, 허후가 말하기를, ꡒ겸판 이조사(兼判吏曹事)가 된 몸으로서 어찌 감히 함부로 받겠는가?ꡓ하였다. 이에 좌목이 허후의 위에 있는 자들을 모두 품계(品階)를 더하였다. 박연 은 사람됨이 진실하고 정성스러우며 사치스러움이 없었다. 음률(音律)에 정통하여 세종(世宗) 의 인정을 받고 종률(鍾律)을 만들었다. 일대의 음악이 찬연하여 볼만한 것은 모두 박연 의 힘이었다. 이에 이르러 자헌 대부(資憲大夫)693) 로 가자(加資)되니 사람들이 적당하다고 하였다. 노산군(魯山君)이 일찍이 박팽년(朴彭年) 을 칭찬하기를, ꡒ학문이 정연(精硏)하다.ꡓ하고, 매양 경연(經筵)에 진강하게 하여 깨달음을 얻는 바가 많아 당상관(堂上官)이 될만하다 하더니, 이에 승직하여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이사임(李思任)은 파직된 지 얼마 안되었으나, 사람을 잘 섬긴 까닭으로 가자되어 직임(職任)을 받았다. 정이한(鄭而漢)은 황보인을 아첨하여 섬겼고, 김문기(金文起)도 역시 황보인에게 아부한 까닭으로 황보인의 청탁으로써 양계(兩界) 지방의 중책(重責)을 맡았다. 특별히 승급할 때 당상관으로 승계(陞階)한 자가 수십 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황보인 과 김종서 의 수하(手下)에서 나왔고,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였다. 또 도감(都監)의 직임(職任)은 모두 신하의 직분(職分)으로 당연한 것이나, 세종(世宗) 의 국상(國喪) 때부터 비로소 가자(加資)하게 되었고, 이후부터 조신(朝臣)들이 임금의 죽음을 당하면 분주히 권문(權門)에 달려가 도감이 되기를 구하여 이로 인하여 이(利)를 보았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장 A면/ 【영인본】 6책 546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註 691]좌목(座目) : 관리들이 앉는 차례. 즉 서열을 말하는데, 각 관사마다 그 좌목이 있어 본직(本職)에 임명된 날짜와 그 서열을 기록하였음. ☞ / [註 692]정헌 대부(正憲大夫) : 정 2품의 문무관 품계. ☞ / [註 693]자헌 대부(資憲大夫) : 정 2품의 문무관 품계. ☞(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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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단종실록 4권/ 단종 즉위년(1452 임신 / 명 경태(景泰) 3년) 12월 11일(기해) 1번째 기사/ 윤사로․김종서․정분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영천위(鈴川尉) 윤사로(尹師路)에게 숭덕 대부(崇德大夫)808) 를 더하고, 김종서(金宗瑞)를 좌의정(左議政)으로, 정분(鄭?)을 우의정(右議政)으로, 한확(韓確)을 좌찬성(左贊成)으로, 정인지(鄭麟趾)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허후(許?)를 좌참찬(左參贊)으로, 이사철(李思哲)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조극관(趙克寬)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권맹손(權孟孫)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선(李渲)을 중추원 사(中樞院使)로, 윤형(尹炯)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조혜(趙惠)를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민공(閔恭)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박중림(朴仲林)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민건(閔騫)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안완경(安完慶) 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박강(朴薑)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이인손(李仁孫)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신석조(辛碩祖)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이수의(李守義)를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김황(金滉)을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이명겸(李鳴謙)을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이사순(李師純)․하우명(河友明)․변상복(邊尙服)․연경(延慶)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김구(金鉤)를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으로, 박중손(朴仲孫)을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로, 노숙동(盧叔仝)을 우승지(右承旨)로, 권준(權?)을 좌부승지(左副承旨)로, 권자공(權自恭)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최항(崔恒)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황보공(皇甫恭)을 사간원 좌사간(司諫院左司諫)으로, 김자갱(金自?)을 우사간(右司諫)으로, 신자승(申自繩)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최사로(崔士老)를 사간원 우헌납(司諫院右獻納)으로, 홍약치(洪若治)를 좌정언(左正言)으로, 이인전(李仁全)을 우정언(右正言)으로, 이축(李蓄)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삼았다 하우명(河友明)은 하연(河演)의 아들인데, 이때 하연이 늙어서 치사(致仕)하니,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가 아뢰기를, ꡒ늙은 재상(宰相)의 아들은 마땅히 발탁해 써서 그 마음을 위로하여야 합니다.ꡓ하여 드디어 올려서 당상관(堂上官)으로 하였다. 이때 황보인․김종서가 권력을 마음대로 하였으니, 선공감관(繕工監官)을 나누어 영선(營繕)을 오로지 관장하는 것을 도청(都廳)809) 이라 부르고, 정분(鄭?)과 민신(閔伸)을 그 제조(提調)로 삼고, 그 당여(黨與)인 직장(直長) 이명민(李命敏)으로 하여금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명민은 음흉하고 간사하였는데, 과연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정분과 민신에게 아부하였으며, 도청의 전권을 맡아서는 삼군(三軍) 방패(防牌)와 섭육십(攝六十)810) 및 여러 공장(工匠)을 마음대로 부리고 조종하는 권한을 오로지 장악하였다. 일찍이 내불당(內佛堂) 및 여러 왕자의 사제(私第)를 짓는데, 황보인과 정분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사로이 큰집을 지었고 김종서는 별실(別室)을 지었다. 그 재목(材木)과 기와․쇠붙이와 석재(石材)를 모두 이명민에게서 취하였고, 이명민도 몇 년이 안되어 승진하여 부정(副正)이 되었다. 이에 이르러 그는 또 창덕궁(昌德宮) 흥인문(興仁門)의 역사(役事)를 관장하였는데, 방패(防牌)․육십(六十)은 이름은 금군(禁軍)이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도청에 예속시켰고, 병조(兵曹)는 오직 이명민의 지시를 좇을 뿐이었다.

  또 섭육십(攝六十)을 사령(使令)이라 칭하여 의정부(議政府)․승정원(承政院) 및 병조(兵曹)에서 사역하는 자가 거의 3백 명이나 되었다. 정인지(鄭麟趾)가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자, ꡐ방패는 곧 금군(禁軍)이기 때문에 모두 도청(道廳)에 예속시키는 것은 불가하고, 섭육십을 또한 여러 아문(衙門)의 사령으로 삼는 것은 불가하다. 더구나 지금 임금이 나이가 어린데 금병(禁兵)은 실로 마땅히 근엄(謹嚴)하여야 하므로 방패와 육십은 마땅히 모두 숙위(宿衛)하여야 하며, 만약에 부득이한 영선(營繕)의 역사가 있으면 병조가 취지(取旨)811) 하여 조발(調發)812) 하는 것이 옳고, 도청은 감독만 할 뿐인데 어찌 금군을 마음대로 부릴 이치(理致)가 있겠는가?ꡑ라고 하여 이에 의정부에 건의하여 보고하고 계문(啓聞)하여 법을 세워 방패로 하여금 숙위하게 하였다. 도청관(都廳官)이 사사로이 부리는 자가 아직도 기일을 맞추어 입직(入直)하지 않으므로 병조에서 날마다 도청 서원(都廳書員)을 매질하고 독촉하였으나, 그래도 입직하지 않아서 정인지가 이명민을 직접 보고 꾸짖어 말하기를, ꡒ그대는 진신(縉紳)의 후예로서 마땅히 선대(先代)의 업적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서인도(徐仁道) 813) 를 본받는가? 창덕궁(昌德宮)은 그 터가 대단히 좁아서 높은 집을 세우면 모과 열매를 코 끝에 둔 것과 같으니, 보기에 어떻겠는가? 띠 지붕에 흙 섬돌도 만세(萬世)에 우러러보는 바가 되는데, 집이 높다고 하여 덕도 또한 높겠는가? 또 공역(工役)을 좋아하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 아니다. 김사행(金斯幸)의 일은 그대 혼자 못들었는가?ꡓ하였다. 또 〈정인지 가〉 춘추관(春秋館)에 출사(出仕)하여 허후(許?)와 더불어 이야기하면서 말하기를,ꡒ거듭 생각해 보아도 임금이 한번 병권(兵權)을 잃으면 비록 강직하고 밝은 군주(君主)라도 그것을 다시 거두기는 어렵다. 우리나라의 방패와 육십은 본래 금병(禁兵)이므로 비록 혹 역사(役事)에 동원된다 하더라도 2.3백 명을 넘지 않을 뿐이다 세종(世宗) 말년에 공사가 조금 번다하였는데, 한 두 사람이 임금의 뜻에 아부하여 헌의하여서 도청에서 방패를 마음대로 부리게 된 것은 곧 우리들의 목전(目前)의 일이다. 지금 그들로 하여금 입직하게 하고자 하여도 저들은 심장(心藏)의 살이라도 베어내는 것같이 억지로 붙들고 내어놓지 않는다. 지금은 마땅히 가만히 있을 때이지 움직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궁궐과 창고가 모두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 우리 백성들을 괴롭히는가? 흥인문(興仁門) 과 창덕궁(昌德宮) 의 역사(役事)를 나는 사사로이 찬성하지 않는다. 조용히 수성(守城)814) 하다가 주상(主上)의 나이가 20이 넘는 것을 기다려 정사(政事)를 돌려 드리고 물러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영선(營繕)을 그만 두지 않는 것은 도청관(都廳官) 등이 권력을 놓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의정부에서는 어찌 이와 같이 하는가?ꡓ하니, 허후 가 말하기를, ꡒ도청의 폐단은 나도 깊이 우려하고 있다. 무뢰하고 굳센 병졸 수천 명을 한곳에 모아 놓고 만약 계세(季世)815) 에 이르고, 기강(紀綱)이 조금 해이해지면 혹 변란(變亂)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나는 일찍이 문종(文宗) 에게 계청하였으나, 문종 이 한두 공역(工役)을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믿고 윤허(允許)하심을 내리지 않았다. 지금 김 정승(金政丞) 또한 그것이 옳지 않다 하여 영공(令公)816) 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아 이러한 일들을 개정(改正)하고자 하는 것이다.ꡓ하였다.

  이명민(李命敏) 등이 불만을 품고 민신(閔伸) 등과 모의하여 지금 당면한 일은 모름지기 황보인(皇甫仁)을 도청의 제조(提調)로 삼은 후에 그를 의지하여 마음대로 조처하게 하고, 민신(閔伸)이 몰래 아뢰어 황보인에게 영선을 관장하게 하였다. 이에 민신 등이 황보인의 위세에 의지하여 마음대로 방패를 동원하여 사역(使役)하였다. 정인지가 또 의정부에 보고하여 말하기를, ꡒ법을 세운 지 얼마 안되어 분선공감(分繕工監)817) 의 한두 하급 관리가 갑자기 이루어진 법(法)을 무너뜨렸으니, 마땅히 헌부(憲府)로 하여금 추핵하게 하여야 합니다.ꡓ하였는데, 황보인이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ꡒ나도 실제로 참여하여 들었으니, 마땅히 인혐(引嫌)818) 하겠다.ꡓ하였으나, 여러 관료들이 함께 말렸다. 또 섭육십(攝六十)으로 여러 아문에 사령(使令)이 된 자는 마땅히 모두 돌아가서 입직하게 하라고 의정부에 보고하였는데, 그 동료인 참판(參判) 이변(李邊) 이하가 여러 사람의 비방(誹謗)이 두려워서 감히 따르지 못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이를 듣고 또 말하기를, ꡒ정 판서(鄭判書)가 병조(兵曹)에 오래 있겠는가? 지금은 비록 〈방패를 금병으로〉 배치하였지만, 곧 반드시 계달(啓達)하여 돌아가게 할 것이다.ꡓ하였고, 황보인 등이 〈 정인지를〉 미워하여 아뢰기를, ꡒ중추원(中樞院)은 정1품 아문(衙門)으로 관위(官位)가 지극히 중한데도 지금은 1품의 관원이 없습니다.ꡓ 하니, 드디어 정인지를 판원사(判院事)로 삼고, 사이가 두터운 조극관으로서 대신 〈병조 판서로〉 삼았다. 비록 〈 정인지를〉 승직(陞職)시켰으나, 실제로는 권한을 빼앗은 것이다. 뒤에 병조는 과연 의정부의 뜻을 받아 〈 정인지가 앞서 의정부에 올린〉 보고를 도로 거두어서 마침내 일이 실행되지 않았고 도청이 전천(專擅)하는 것은 옛날과 같았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21장 A면/ 【영인본】 6책 556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군사-군정(軍政)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군역(軍役) / *건설(建設)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註 808]숭덕 대부(崇德大夫) : 의빈(儀賓)의 종1품 벼슬. ☞ / [註 809]도청(都廳) : 조선조 초기에 나라의 토목 공사(土木工事)를 전담하던 임시 관청을 말함. ☞ / [註 810]섭육십(攝六十) : 차비군(差備軍)의 하나. 각령(各領)의 위(尉) 20명과 정(正) 40명을 합쳐서 ꡐ육십(六十)ꡑ이라고 지칭하는데, 위(尉)를 대장(隊長), 정(正)을 대부(隊副)라고 개칭한 뒤에도 ꡐ육십ꡑ이라고 하였으므로, 섭대장(攝隊長)․섭대부(攝隊副)를 ꡐ섭육십(攝六十)ꡑ이라고 지칭한 것임. ☞ / [註 811]취지(取旨) : 임금의 허가를 맡음. ☞ / [註 812]조발(調發) : 군사를 불러 모음. ☞ / [註 813] 서인도(徐仁道) : 세종 때 선공감 정(膳工監正). 태종(太宗) 때 토목 역사를 잘 감독한다고 하여 서리(胥吏)에서 뽑혀 선공감의 관원에 임명되었음. ☞ / [註 814]수성(守城) :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일을 지켜 나아감. ☞ / [註 815]계세(季世) : 정치․도덕․풍속 등이 쇠퇴한 시대. ☞ / [註 816]영공(令公) : 정3품과 정2품의 관원을 이르는 말. ☞ / [註 817]분선공감(分繕工監) : 선공감의 일을 나누어 맡아 보던 관청. ☞ / [註 818]인혐(引嫌) : 관리가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일. ☞(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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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단종실록 9권/ 단종 1년(1453 계유 / 명 경태(景泰) 4년) 11월 8일(경신) 2번째 기사/ 정난한 공이 있는 이들에게 동․서반직을 차등있게 올려 제수하다/ 도원군(桃源君) 【 의경왕(懿敬王) 의 휘(諱).】을 올려 흥록 대부(興祿大夫)로 삼고, 박종우(朴從愚)를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으로, 안맹담(安孟聃)을 성록 대부(成祿大夫) 연창위(延昌尉)로, 정종(鄭悰)을 광덕 대부(光德大夫) 영양위(寧陽尉)로, 정인지(鄭麟趾)를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의정부 좌의정(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議政府左議政)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으로, 한확(韓確)을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의정부 우의정 서성 부원군(西城府院君)으로, 이사철(李思哲)을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의정부 좌찬성 견성군(甄城君)으로, 김효성(金孝誠)을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연산군(延山君)으로, 정창손(鄭昌孫)을 이조 판서로, 조혜(趙惠)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이계전(李季甸)을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병조 판서 한산군(韓山君)으로, 이변(李邊)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박중림(朴仲林)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권맹손(權孟孫)을 중추 원사(中樞院事)로, 이견기(李堅基)․홍약(洪約)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김세민(金世敏)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강맹경(姜孟卿)을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신석조(辛碩祖)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노숙동(盧叔仝)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정척(鄭陟)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박중손(朴仲孫)을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병조 참판 응천군(凝川君) 으로, 이인손(李仁孫)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김황(金滉)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신자수(申自守)․연경(延慶)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봉안국(奉安國)․이효정(李孝貞)․박강(朴薑)․맹효증(孟孝曾)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김청(金聽)을 인순부 윤(仁順府尹)으로, 이순지(李純之)․유수강(柳守剛)을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권준(權?)을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사헌부 대사헌 안천군(安川君)으로, 안숭효(安崇孝)를 이조 참의로, 홍원용(洪元用)을 호조 참의로, 어효첨(魚孝瞻)을 예조 참의로, 홍달손(洪達孫)을 수충 위사 협책 정난 공신 병조 참의(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兵曹參議)로, 김순(金淳)을 형조 참의로, 최항(崔恒)을 수충 위사 협찬 정난 공신 승정원 도승지로, 신숙주(申叔舟)를 수충 협책 정난 공신 승정원 좌승지로, 박팽년(朴彭年)을 승정원 우승지로, 박원형(朴元亨)을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권자신(權自愼)을 승정원 우부승지로, 권남(權擥)을 수충 위사 협책 정난 공신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김자갱(金自?)․김혼지(金?之)․박소(朴昭)․홍익성(洪益誠)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이흥상(李興商)을 수충 정난 공신 첨지 중추원사(輸忠靖難功臣僉知中樞院事)로, 양정(楊汀)을 수충 협책 정난 공신 지병조사(知兵曹事)로, 성삼문(成三問)을 수충 정난 공신 사간원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로, 조어(趙?)를 사간원 우사간 대부로 삼았으며, 집의(執義) 이개(李塏)는 중훈(中訓)을 더하고, 김지경(金之慶)․유성원(柳誠源)을 수사헌 장령(守司憲掌令)으로, 윤기견(尹起?)․이극감(李克堪)을 사헌 지평(司憲持平)으로, 성승(成勝)을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忠淸道兵馬都節制使)로, 한명회(韓明澮)를 수충 위사 협책 정난 공신으로, 봉석주(奉石柱)․윤사윤(尹士?)․유하(柳河)․유수(柳洙)․홍윤성(洪允成)․곽연성(郭連城)을 수충 협책 정난 공신으로, 이예장(李禮長)․김처의(金處義)․강곤(康袞)․유숙(柳淑)․유사(柳泗)․권언(權?)․홍순로(洪純老)․안경손(安慶孫)․임자번(林自蕃)․설계조(薛繼祖)․유자황(柳子晃)․권경(權擎)․홍순손(洪順孫)․송익손(宋益孫)․최윤(崔潤)․한서구(韓瑞龜)․이몽가(李蒙哥)․한명진(韓明?)을 추충 정난 공신(推忠靖難功臣)으로 삼고, 아울러 동․서반직(東西班職)을 차등 있게 올려 제수하였다./【태백산사고본】 3책 9권 8장 A면/ 【영인본】 6책 639면/ 【분류】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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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단종실록 12권/ 단종 2년(1454 갑술 / 명 경태(景泰) 5년) 9월 26일(갑술) 2번째 기사/ 함양 윤 이포․화천위 권공 등에게 가자하다/ 함양 윤(咸陽尹) 이포(李?)에게 가덕 대부(嘉德大夫)를 가자(加資)하고, 화천위(花川尉) 권공(權恭)에게 숭덕 대부(崇德大夫)를, 파평위(坡平尉) 윤암(尹巖)에게 숭덕 대부(崇德大夫)를, 이화(李樺)에게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권맹손(權孟孫)에게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이흥상(李興商)에게 계림군(?林君)을, 고득중(高得中)에게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가자(加資)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12권 13장 A면/ 【영인본】 6책 708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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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세조실록 1권/ 세조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윤6월 28일(임신) 2번째 기사/ 황수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황수신(黃守身)을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권맹손(權孟孫)을 예문 대제학(藝文大提學)으로, 노숙동(盧叔仝)을 제학(提學)으로, 김순(金淳)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이호성(李好誠)․유응부(兪應孚)․안숭직(安崇直)․우효강(禹孝剛)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조완벽(趙完璧)․이사명(李思明)․김구(金鉤)를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안숭효(安崇孝)를 덕녕 부윤(德寧府尹)으로, 홍원용(洪元用)을 경창부 윤(慶昌府尹)으로, 유수(柳洙)를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홍윤성(洪允成)을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윤사윤(尹士?)을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김개(金漑)․김억지(金億之)․박거겸(朴居謙)․조어(趙?)를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윤자운(尹子雲)을 지사간원 사(知司諫院事)로, 민건(閔騫)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원효연(元孝然)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이석형(李石亨)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유규(柳規)를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김광수(金光?)를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5장 A면/ 【영인본】 7책 67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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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맹손 [記事] :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9월 20일(임진) 1번째 기사/ 이증 등을 봉작하고 관직을 제수하다/ 이증(李?)을 수충 위사 동덕 좌익 공신(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 계양군(桂陽君)으로, 이관(李?)을 수충 위사 동덕 좌익 공신(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 익현군(翼峴君)으로, 풍녕원군(豊寧原君) 윤사로(尹師路)를 수충 위사 동덕 좌익 공신(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 영천군(鈴川君)으로, 윤암(尹巖)을 수충 경절 좌익 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 파평군(坡平君)으로, 권공(權恭)을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 화천군(花川君)으로, 정인지(鄭麟趾)를 수충 위사 협찬 정란 동덕 좌익 공신(輸忠衛社協贊靖亂同德佐翼功臣) 의정부 영의정(領議政)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으로, 한확(韓確)을 수충 위사 정란 동덕 좌익 공신(輸忠衛社靖亂同德佐翼功臣) 좌의정(左議政) 서원 부원군(西原府院君)으로, 이사철(李思哲)을 수충 위사 협찬 정란 동덕 좌익 공신(輸忠衛社協贊靖亂同德佐翼功臣) 우의정(右議政) 견성 부원군(甄城府院君)으로, 이계린(李季?)을 수충 경절 좌익 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 좌찬성(左贊成) 한산군(韓山君)으로, 정창손(鄭昌孫)을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 우찬성(右贊成) 봉원군(蓬原君)으로, 이징석(李澄石)을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양산군(梁山君)으로, 강맹경(姜孟卿)을 수충 경절 좌익 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 의정부 좌참찬(左參贊) 진산군(晉山君)으로, 황수신(黃守身)을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 우참찬(右參贊) 남원군(南原君)으로, 이인손(李仁孫)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이계전(李季甸)을 수충 위사 협찬 정란 공신(輸忠衛社協贊靖亂功臣) 병조 판서(兵曹判書) 한성군(韓城君)으로, 신숙주(申叔舟)를 수충 협책 정란 동덕 좌익 공신(輸忠協策靖亂同德佐翼功臣)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고령군(高靈君)으로, 권남(權擥)을 수충 위사 협책 정란 동덕 좌익 공신(輸忠衛社協策靖亂同德佐翼功臣) 이조 참판(吏曹參判) 길창군(吉昌君)으로, 권자신(權自愼)을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홍달손(洪達孫)을 수충 위사 협책 정란 좌익 공신(輸忠衛社協策靖亂佐翼功臣) 남양군(南陽君)으로, 권맹손(權孟孫)․성승(成勝)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박강(朴薑)을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금천군(錦川君)으로, 김구(金鉤)를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이예장(李禮長)을 추충 정란 좌익 공신(推忠靖亂佐翼功臣)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윤사윤(尹士?)을 수충 협책 정란 좌익 공신(輸忠協策靖亂佐翼功臣)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박원형(朴元亨)을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로, 구치관(具致寬)을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 좌승지(左承旨)로, 한명회(韓明澮)를 추충 위사 협책 정란 동덕 좌익 공신(推忠衛社協策靖亂同德佐翼功臣) 우승지(右承旨)로, 성삼문(成三問)을 추충 정란 좌익 공신(推忠靖亂佐翼功臣)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조석문(曹錫文)을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이휘(李徽)를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최유(崔濡)를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26장 A면/ 【영인본】 7책 88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변란-정변(政變)(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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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리면 은산리 출신 권오종, 14일 도교육위원회 의장 당선...축하합니다.

  권오종(권오종 慶北道敎育委員 後半期 議長 當選) [記事] :

  2010년 1월 14일 제5대 경북도교육위원회 후반기 의장 보궐선거에서 하리면 태생의 권오종(56) 교육위원이 당선됐다.

  권오종 신임 의장은 "제5대 교육위원회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 동안의 의정경험을 토대로 도교육위원회가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대의기관으로 거듭나 경북교육의 변화와 발전을 촉진하는 견인차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권오종 의장은 제3대, 제4대 교육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경상북도유도회 회장, 대한 유도회 감사, 대창중 20회ㆍ대창고 18회 동창회장 등을 맡고 있다.

  가족으로는 부인 박후남(50) 씨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으며, 하리면 은산리에서 권한약방을 운영하는 권덕수 송경출 씨의 3남 3녀 중 차남이다.

  (권오근 編輯局長 醴泉新聞 2010년 01월 15일 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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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종(第5代 慶尙北道敎育委員會 後半期 議長 권오종 敎育委員 當選) [記事] :

  제5대 경상북도교육위원회 후반기 의장 보궐선거에서 권오종(53세) 교육위원이 당선됐다.

  2010년 1월 14일 제220회 임시회에서 치러진 이번 의장 보궐선거는 사임을 표한 전임 홍광중 의장 사임 동의안이 지난 5일 제219회 임시회에서 무기명 투표로 가결됨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

  이번 의장 보궐선거는 박동건 부의장의 사회로 무기명 투표를 하였으며, 9명의 교육위원 전원이 투표를 한 결과 권오종 위원이 다수표를 얻어 의장으로 당선됐다.

  신임 권오종 의장은 당선 인사를 통해 "의장으로 선출해 준 동료위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책임감을 느낀다"며, "제5대 교육위원회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 동안의 의정경험을 토대로 우리 교육위원회가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대의기관으로 거듭나 경북교육의 변화와 발전을 촉진하는 견인차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권오종 의장은 제3대, 제4대 교육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경상북도유도회 회장 및 대한유도회 감사 등을 맡고 있다.<경북/최현영 기자>

  (醴泉인터넷뉴스 2010-01-15 오전 10:4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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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의 자랑(1129) : 권오종(은산리 출신, 어제 경북교육위원 당선...축하(附 괴물의 양궁장면, 예천서 촬영/이병헌팬클럽 150여명, 3일 예천찾아와)(作成 張炳昌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2006-08-01 照會 1199)

  ->예천의 자랑(2032) : 하리면 은산리 출신 권오종 도교육의원(作成者 張炳昌,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作成日 2009-10-27 (06:34), 照會 30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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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560

  보문사([旅行]醴泉 鶴駕山 普門寺 : 겨울 旅行은 自身과 만날 수 있다) [記事] :

  겨울 여행은 자신과 만날 수 있는 좋은 시간으로 하얀 눈과 찬바람을 맞으면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걸을 수 있다. 겨울 여행은 볼게 없을 것으로 생각하나 사실 풍경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특히 겨울 풍경은 순백의 하얀 눈을 통해 분명한 여백과 하늘과 땅, 비어있는 공간을 보여주므로 해서 일상의 생각들을 털어버릴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봄은 찰나고, 가을은 순간이라고 한다.

  그 찰나와 순간의 아름다움은 스러져가고 순식간에 더운 여름이 오고 불현듯 겨울이 다가온다. 이 긴 겨울을 즐기고 누리는 법을 배운다면 사계절이 다 즐거울 것이다.

  추운 겨울에 따뜻한 실내에서만 보내기 보다는 참 자연 안으로 들어가 있는 시간들을 통해서 자연으로서의 인간을 회복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쉼 없이 자연으로 나가기 위해 이번 주말에는 예천 보문사로 떠났다.

  예천 보문사 초입에는 등 굽은 소나무 군락들이 하얗게 쌓인 눈을 힘겹게 이겨내며 호랑이의 기운을 받은 듯 용맹스러운 품새로 묵묵하게 보문사 길을 관장하고 있었다.

  사찰이 있는 보문사는 학이 타고 노니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학가산(鶴駕山)이라 하고 예천 근방에서는 제일 높은 산으로 이날 보문사(普門寺) 주변 산은 도시에서와 전혀 다른 아름답고 눈부신 하얀 눈을 뒤 덮고 겨울을 나고 있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인 보문사는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 학가산 중턱에 위치하고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한 예천군에서 가장 오랜 된 사찰이다.

  사찰 입구 우측에 하얀 눈 속에 ‘보문사 중흥대덕 보선당대선사송덕지비’가 우뚝 서 있고 초입에 일주문 대신에 연당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옆에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있다.

  그리고 보문사는 보조국사가 3년 동안 정진한 곳으로 ‘선과 교가 둘’이 아니라는 원리를 실증하여 선(禪)에서 심(心)과 성(性)을 내세워 불교의 기본 정신을 일깨웠으며 정약용이 1780년(정조 4년) 반학루에서 1년간 공부한 역사적인 곳이다.(張炳昌 註 : 丁若鏞이 工夫한 伴鶴亭은 醴泉邑內 1780年의 醴泉郡廳 옆 연못에 있었다. 普門寺의 伴鶴樓가 아니다.)

  현재 보문사 극락보전의 현판은 흥선대원군(1820-1898)의 글씨로 현재 극락전(문화재자료 제203호)과 반학루, 그리고 3층 석탑(유형문화재 제186호)과 적묵당과 염불당, 극락보전 동편에 삼성각과 나한전이 있다.

  나한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普門寺三層石塔)은 시도유형문화재 제186호로 자연암반을 지대석으로 삼고 있는 것이 특이하고 삼성각 편액에는 붓을 물고 쓴 동해어부 글씨(口筆)가 눈길을 끈다.

  비워라 <서암(西庵) 스님>//

  많이 아는 것은 귀한 것이나, / 그보다 더 귀한 것은 / 다 털어 버리는 것이다. //

  남을 이기는 것은 용기 있는 것이나, / 그보다 더 큰 용기는 / 남에게 져주는 것이다. //

  가득찬 그릇에는 넘쳐 버리지만, / 비어있는 그릇에는 담아지느니라. //

  넘쳐 버리는 곳에는 착오가 있으나, / 비어있는 곳에는 정확함이 있는 것이다. //

  맑은 아침에 조용히 / 모든 상념想念에서 벗어나라. / 마침내 시공時空을 넘어서 / 참 자기를 만나리라. //

  1914년 경북 영주에서 나신 서암(西庵) 스님은, (張炳昌 註 : 大昌學院을 卒業하고), 1935년 예천 서악사에서 화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8·15광복 전에는 금강산 일대의 제방을 두루 거쳤고, 철원의 심원사에서는 강사 소임을 맡기도 했다.

  이후 조계종 총무원장,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봉암사 조실을 거쳐 조계종 제8대 종정을 지냈다.

  서암 스님은 원적에 들기 하루 전 태고선원을 비롯한 봉암사 대중 1백 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달리 할 말이 없다. 누가(열반송)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그게 내 열반송이다.”라고 말한 뒤 염화실로 돌아와 2003년 3월 29일 오전 7시 50분경 봉암사 염화실에서 세수 87세, 법랍 68세로 열반에 들었다.

  (金泉인터넷뉴스 2010-01-17 오후 1:3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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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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