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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108:권오복史官1
작성자장병창 @ 2010.02.08 07:01:05
  예천의 자랑(2108) : 용문면 하금곡리 출신 권오복 사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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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복(權五福) :


  1467(세조 13)-1498(연산군 4), 용문면 하금곡리 오룡곡(五龍谷) 출신, 자는 향지(嚮之), 호는 소유(小游), 또는 수헌(睡軒), 본관은 예천, 별제 선(別提善)의 3자,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이다.

  1486년(성종 17) 식년 생원시에 2위로 합격, 1486년(성종 17) 식년 문과에 병과 21위로 급제하였다.

  1492년(성종 23) 약관(弱冠)으로 문장이 탁월하여 예문관(藝文館, 翰林)에 뽑혀 사가 독서(賜暇讀書)했고, 벼슬이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이르러 사관(史官)이 되었다.

  이때 사초(史草)를 쓰면서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과 김종직의 사전(史傳)을 적어 넣었다.

  1495년(연산군 1) 6월 29일 병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을 청하니, 가까운 고을인 영덕(盈德, 野城) 군수(1495-1498)를 왕이 제수(除授)하여 나갔다.

  문장과 바른 행실로 이름이 당대에 높았다. 탁영 김일손(濯纓金馹孫)과는 점필재 김종직(점畢齋金宗直)에게서 동문수학(同門修學)하여 막역지간(莫逆之間)이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7)가 일어나자 가장 참람한 처형을 당하였는데, 향년이 겨우 33세였다.

  본래 김종직과 사이가 나쁘던 유자광(柳子光) 윤필상(尹弼商) 등이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다가, 김종직의 제자였던 권오복이 사관(史官) 시절 단종(端宗)을 감싸 보호한 김종직(金宗直)의 사전(史傳)을 써넣었다고 무고하여 영덕 군수 3년만에 사형 당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 후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고, 예천군 다인현(醴泉郡多仁縣)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배향되었다.

  글씨, 시문이 뛰어났고, 특히 문장이 맑고 진실하여 필법(筆法)이 힘찼다. 그러나 유고(遺稿)가 흩어져 거의 없어졌는데, 그의 종손 초간 권문해(從孫草簡權文海, 1534-1591)가 주어 모아 <수헌집(睡軒集)>을 출판하고, 또 당시에 화를 입은 이의 명부를 책 뒤에 붙였다.

  소고 박승임(嘯皐朴承任)이 1585년(선조 18) 10월 초순에 그 문집 서문(序文)에서 이르기를, "권오복은 무오사화(戊午士禍)의 그물에 걸린 한 사람으로, 흉악하고 망극지변(罔極之變)을 당함에 삼엄한 형기(刑器) 앞에서도 태연하여 흔들림이 없었고, 조용히 나아가 생을 마치니, 이것은 진실로 조정이 양사(養士)한 일에 대한 선왕(先王)의 은혜를 갚음을 영광으로 여김이었다."라고 하였다.

  ᄋ 1495년(연산군 1) 3월 11일(禮節)과 23일(廟號), 5월 14일(敎育), 6월 26일(抑佛)과 29일(臺諫)에 권오복 등이 왕에게 아뢰었다(燕山君日記 4卷 5卷 6卷).

  ᄋ 1498년(연산군 4) 7월 12일에 홍사호(洪士灝) 등이 김일손(金馹孫)의 집에서 수색해 낸 잡문서(雜文書)를 올리므로 왕은 추관(推官)에게 명하여 피열(披閱)하게 했는데, 권오복이 김일손에게 준 편지를 발견했다. 권오복의 편지에 이르기를 "두 번이나 편지를 받아 헌납하기에 빈 날이 없으므로 살폈으니, 벗의 기쁨을 가히 알지로다. 다만 듣건대, 그대들이 법도(法度)를 개혁하기에 급하여 만 가지 일을 모두 일신(一新)하게 하려고 함으로써 뭇 비방을 샀으니, 이는 바로 통곡하고 유제(流涕)함이 저 낙양(洛陽) 소년의 행위와 같은데, 도리어 강후(絳侯)와 관영(灌纓) 등에게 단척(短斥)하는 바 되는 것이 아닌가? 몸이 먼 지역에 있으나 일찌기 그대들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기지 않을 적이 없노라. 또 듣자니, ''''상재(祥齋)를 간(諫)하다가 허락을 얻지 못하고 호부(戶部)로 체임(遞任)되었다''''하는데, 과연 그런가? 이 해도 거의 다 갔으니, 이별의 그리움이 더욱 괴롭구려!"라고 하였다.

  ᄋ 1498년(연산군 4) 7월 14일에 이목(李穆)의 집을 수색하여 임희재(任熙載)가 이목(李穆)에게 준 편지를 발견했는데, 그 편지에서 이르기를, "권오복도 장차 사직을 올려 수령이나 도사(都事)가 될 모양이고...윤필상(尹弼商) 등이 권오복이 김일손에게 준 서간에서 ''''...그대들이 개혁하기에 급하여 만사를 일신(一新)하게 하려고 하다가 뭇 비방을 샀다니, 통곡하고 ...'''' 등의 말이 있었다 하여, 잡아다 국문할 것을 청하니, 노사신(盧思愼)은 말하기를, "불가하오, 옛날 송(宋) 나라에서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기롱(奇弄)과 풍자가 있다 하여, 그 죄를 파내서 마침내 폄축(貶逐)했으므로, 그것이 지금까지 청의(淸議)에 비방거리가 되었는데, 우리들이 어찌 그 실책(失策)을 다시 되풀이하겠는가?"라고 하였으나, 좌중이 듣지 않고 마침내 잡아올 것을 청하였다(燕山君日記 第30卷). 1498년 7월 17일에 윤필상 등이 물으니, 김일손(金馹孫)이 대답하기를 "권오복은 김종직(金宗直)이 동지성균관(同知成均館) 시절에 관에 거접하였고, 박한주(朴漢柱, 前醴泉郡守)는 경상도 유생(儒生)으로써 수업하였고..."라고 하였다. ᄋ 1498년 7월 19일에 윤필상 등이 왕께 아뢰기를, "그윽히 듣자오니, 권오복의 사초(史草)도 역시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것과 같다 하온데, 어제는 단지 권경유(權景裕, ?-1498)의 사초(史草)만을 내렸으니, 신(臣) 등은 모르겠습니다만, 권오복의 사초(史草)를 당초에 초계(抄啓)하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이미 초계(抄啓)했는데도 미처 내려주지 못하셨습니까?"라고 하니, 임금은 명하여 사초(史草) 네 폭(幅)을 보여 주었는데, 모두가 긴관(緊關)한 일이 아니었다. 오직 권오복의 사초에서 이르기를, ''''김종직이 일찌기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는데, 간곡하고 측은하고 침착하고 비통하여 남이 말 못하던 데를 말하였으므로 사람 간에서 전해 외었다. 식자(識者)는 말하기를, 제(帝)의 복(服)이 구장(九章)이라 하였는데, 지금 칠장(七章)이라 이른 것은 무슨 까닭이냐? 이는 반드시 뜻이 있어 지은 것이니, 크게 세교(世敎)에 관계되므로 썩지 않게 남겨 볼만하다.''''라고 하였고, ''''또 <청구풍아(靑丘風雅)>를 편찬하면서 인물 성씨 아래에 주(註)하기를, 성삼문(成三問)은 이개 등과 더불어 단종을 복위시킬 것을 꾀했다''''하였고, 또 이르기를 ''''권람(權擥)은 세조를 추대했다 하였으니, 직필(直筆)이 늠름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윤필상 등이 낭청(郎廳)을 보내어 잡아오고 가사(家舍)를 밀봉(密封)할 것을 청하니, 왕은 "가하다"라는 전교(傳敎)를 내렸다.

  ᄋ 1498년 7월 20일 이수공(李守恭)이, 권경유(權景裕), 권오복의 사초(史草)를 기재한 것은 반드시 속셈이 있다 하여, 한 차례 형장(刑場) 심문을 했으나 불복하였다. ᄋ 1498년 7월 22일 권오복은 공초하기를, "지난 을묘년(乙卯年, 1495)에 김일손(金馹孫)이 충청도 도사(都事)가 되어, 공사(公事)로 인하여 서울에 왔으므로 신(臣)은 그 집을 찾아가 함께 자면서 이야기하였사온데, 김일손이 김종직(金宗直)의 문집(文集)을 보여주기에 서로 더불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논했습니다. 신의 원정(原情)은 다 사초에 있사옵니다."라고 하였다. 권오복을 현장 심문하니, 권오복이 공초하기를, "김종직이 의제(義帝)로써 단종에게 비하여 조문(弔文)을 지었기 때문에 신도 사초에 그렇게 기재하였던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ᄋ 1498년 7월 26일에 윤필상(尹弼商) 등이 같이 의론하여 서계(書啓)하기를,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는 대역(大逆)의 죄에 해당하니, 능지처사(凌遲處死)하고, 박한주(朴漢柱)는 붕당(朋黨)을 지었으니, 곤장 80대를 때려 먼 지방으로 부처하고..."라고 청하였다. 왕이 전교(傳敎)하기를, "김일손 등을 벨 적에는 백관으로 하여금 가보게 하라. 근일 경상도와 제천 등지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도 바로 이 무리들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신(史臣)은 아뢰기를, "김일손 등이 시문을 자작(自作)한 것이 아니옵고 단지 김종직만 찬양하였사온즉 그 죄가 마땅히 가벼워야 하옵니다."라고 하였다. ᄋ 1498년 7월 27일에 김일손 등을 벤 것을 종묘 사직(宗廟社稷)에 고유(告由)하고, 백관(百官)의 하례(賀禮)를 받고 중외에 사령(赦令)을 반포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데, 우리 세조 대왕께서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이 우뚝 백왕의 으뜸이었다... 뜻밖에 간신 김종직이 화심(禍心)을 내포하고, 음(陰)으로 당류(黨類)를 결탁하여 흉악한 꾀를 행하려고 한 지가 날이 오랬노라. 그래서 그는 항우(項羽)가 의제(義帝)를 죽인 일을 가탁하여 문자에 나타내서 선왕(先王, 世祖)을 헐뜯었으니, 그 하늘에 넘실대는 악은 불사(不赦)의 죄에 해당하므로 대역(大逆)으로서 논단(論斷)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였고, 그 도당(徒黨)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가 간악한 붕당을 지어 동성상제(同聲相濟)하여 그 글을 칭찬하되, 충분(忠憤)이 경동한 바라 하여 사초에 써서 불후의 문자로 남기려고 하였으니, 그 죄가 김종직과 더불어 과(科)가 같으므로 아울러 능지처사(凌遲處死)하게 하였노라,,,"라고 하였다. ᄋ 1498년 7월 28일에 실록청(實錄廳)에 전교(傳敎)하기를, "김종직, 권오복, 김일손, 권경유 등의 사초는 다 곧 불살라 버려라."라고 하였다.

  ᄋ 노사신(盧思愼) 등이 아뢰기를, "권오복은 늙은 어미가 있다 하오니, 법에 비추어 마땅히 교형(絞刑)에 처해야 하옵니다마는 그러하오나 권오복 등은 단지 화심(禍心)을 내포하여 문자에 나타냈을 따름이오니, 그 거사한 반역자와는 거리가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대역(大逆)으로서 논하였으나, 바로 대역이라고는 아니하였사온데, 지금 부자(父子)가 연좌(連坐)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까 하옵니다."라고 하자, 윤필상(尹弼商)이 아뢰기를, "신(臣)의 생각은 법에 의하여 시행되었으면 하옵니다."라고 하였고, 사신(史臣) 등이 아뢰기를, "제왕이 죄수를 논단(論斷)함에 있어서 조금만 가엾은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살릴 길을 구하는 것이온데, 이 무리는 대역(大逆)이라 할지라도 거사한 자에 비할 것은 아니오니, 그 애비나 그 자식은 죽음을 감해 주는 것이 실로 정과 사리에 합당할 것이옵니다."라고 하니, 왕이 전교하기를, "그렇다면 사형은 감해 주고 곤장 100대를 때려 종을 만들어 고역(苦役)에 배정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연산군일기 제30권).

  ᄋ 1504년(연산군 10) 3월 4일에 전교하기를, "권오복의 두 딸을 모두 용서해 주라."라고 하였다(燕山君日記 第52卷).

  ᄋ 1507년(명종 2) 6월 18일 임금이 전교하기를, "지난 무오년(戊午年, 1498)에 죄를 입은 권오복 등의 적몰된 가산을 돌려주고...(中宗實錄 3卷)"라고 하였다.

  ᄋ <소고집 서문(嘯皐集序文)>에서 이르기를, "흉악하고 망극한 변을 만나 도끼 사형에 쓰는 도구가 앞에 있어도 굳게 버티고 어지러운 모습이 없이 조용히 죽임을 당하였으니, 그 의기와 절개의 굳셈은 천성임을 어찌하랴. 아! 만사가 끝났고, 땅속 황천(黃泉)은 닫혔다. 홀로 그 시나 글의 가작(假作)까지도 다 훌륭히 빛나서 발해내는 것이 하늘에 비치면 북두칠성을 쏘고 땅에 던지면 쇳소리를 내는 것은 오히려 넉넉히 작은 데에서도 모습을 방불하게 나마 남기고 무궁한 먼 생각을 붙였거니와, 책 가운데의 여러 작품은 하나하나가 마음의 깊은 속에서 흘러 나와서 임금을 그리워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깊은 생각에 정성있게 삼가고 사랑하여 어버이를 생각하고 아우를 생각하는 절실함이 간절하여 한 조각 마음의 정성이 어구 곁에 섞여 엉키었으니, 저 무도(無道)한 그릇된 형벌이 또한 어찌 백세에 없어지지 않고 흘러 내려가는 꽃다운 이름을 끊을 수 있으랴. 교리(校理)로서 어버이를 공양하기를 빌어서 야성(野城)에 나와 원이 된 지 3년 만에 잡혀가서 나이 겨우 32세에 죽었는데, 그 글의 맑기가 짝이 없음과 기질의 엄숙함은 글을 보는 사람이 스스로 마땅히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ᄋ 1494년(성종 25) 겨울에 성종이 돌아가셨는데, 1496년(연산군 2)에 권오복이 시를 지어 김일손의 아들에게 보내기를, "어쩌면 이렇게도 상기(祥期)가 한 번 번개치 듯 빠를까. 선릉(宣陵, 成宗의 陵)에 소나무의 달이 정말 거칠고 쓸쓸한데 하늘가에 통곡하는 외로운 신하의 눈물, 하물며 벼슬 동료 떨어져서 흰옷으로 가는 것이랴."라고 하였다. 1496년 11월 초6일 밤 꿈에 천사(天使)가 우리나라에 왔는데, 따라온 사람 가운데 점치는 종이 있어서, 어머니의 사주 조화(四柱造化)를 물었더니, 점쟁이가 이르기를, "마땅히 120세를 사실 것입니다."라고 하여, 깨어서 미칠 듯 좋아하고, 벽 위에 써서 기록했다. 아! 병진년(丙辰年, 1436)은 바로 어머님의 나신 해인데, 병진년(丙辰年, 1496)에 이런 꿈이 있음은 어찌 신인(神人)이 모르는 가운데에 잠잠히 돕는 것이 아니랴. 또 시편(詩篇)을 지어서 오래 사시도록 비는 도움으로 하였다. ᄋ 권오복이 야성(野城)으로 부임하려 할 적에 이목(李穆)이 시를 지어 주기를, "원이 되기를 빌은 것은/ 다름이 아니고 어버이를 위함일세/ 옥당(玉堂)의 학사(學士)요, 귀양 내려온 신선이었네/ 10년 동안의 요순(堯舜)같은 임금과 백성을 만들려던 계획/ 넉넉히 남쪽 고을의 봄을 이루리라/"라고 하였다.

  ᄋ 예전에 창려(昌黎)가 나이 40에 머리가 희고, 이충(李沖)이 나이 40에 수염과 머리가 반이 희고, 안회(顔回)가 나이 29에 머리가 아주 희고, 범진(范鎭)이 40일 사이에 수염과 머리가 다 희어졌다지만, 내 나이가 그 몇 군자(君子)를 따르지 못하고 또 그 몇 군자가 학문을 좋아하는 버릇과 시국을 걱정하는 근심을 따르지 못하는데, 머리의 검은 것이 날로 희기를 더하니, 어찌 어버이와 떨어지고 나라를 떠나 오랜 해를 나그네가 되어서 고달프고 군색하고 몹시 울적하여 마음에 흔들림이 없으랴마는 나를 재촉하여 일찍 머리 희게 함은 옛사람이 이른 바, "백발이 사람을 속여 짐짓짐짓 생기는 것이 아니드냐."함이가(白髮을 읊은 글의 序文).

  ᄋ 일전(日前)에 내려 주신 아름다운 시편(詩篇)을 상자에 감추어 두고 보배에 비교하기를, 수주(隋珠) 같이 하였는데, 한 번 본 뒤에 문득 잃어 자취가 없으니 귀신이 빼앗은 바가 되었나 봅니다. 요사이 흥 보내는 일이 반드시 많으시리니, 먼저 내리셨던 시를 아울러 꼭 써서 보여 주시어, 나를 신나게 하심이 어떻습니까. 또한 이 못난 사람의 초고(草稿)를 본래 차마 보실 것은 못되지만, 다행히 얼핏 보시고 하나하나 고쳐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옛 사람에 소군(蕭君)이 한 글자를 내려 준 것을 스스로 다행히 여긴다는 자가 있었는데 하물며 내 나쁜 시의 글자와 뜻을 아직 고퇴(鼓堆)하지 못한 것이겠습니까(金馹孫에게 올린 詩의 序文).

  ᄋ 9월 어느 날 밤 자리에서 간재(簡齋)의 운(韻)을 차(次)하기를, "밤비는 쓸쓸히 내리고, 싸늘한 등불 밝게 빛나는데, 서풍(西風)이 잎에 불어 다 떨어지니, 가을 소리 들리는 곳이 없네."라고 하였다.

  ᄋ 손순효(孫舜孝)가 서읍령(西泣嶺)에 올라서 파괴령(破怪嶺)이라고 고쳐 불렀는데, 권오복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탐천(貪泉)이 반드시 은지(隱之)를 그르치지는 않을 것이니, 이름 자(字)를 가지고 무지(無知)한 사람 놀래 주지 마오. 구구히 파괴(破怪)한다는 것 도리어 괴상하구려. 읍령(泣嶺)에는 모름지기 타루비(墮淚碑)를 새기게 할 것일세"라고 하였다.(동국여지승람).

  ᄋ 권오복이 지은 바의 시고(詩稿)를 가지고 김일손에게 고쳐주기를 구할 적에 시를 지어 보내기를, "뱀을 그려 발을 붙였으니 졸열한 것 꺼리지 마시고, 바람 같은 도끼 잡고서 막히고 넘친 것을 깎아 주시요."라고 하여서, 김일손이 글로 답하여 이르기를, "나에게 바람같은 도끼가 없으니 어떻게 권오복의 막힌 것을 깎겠오."라고 하였다.

  ᄋ 한 수재(秀才)가 권오복에게 시학대성(詩學大成)을 빌려 달라고 하였더니, 권오복이 시로써 보내어 이르기를, "동한 헌제(東漢헌帝)와 중국 남조(南朝)의 여섯 나라는 문장의 수풀이지만, 만약에 성인 문하(聖人門下)에 비한다면 참으로 개미의 무덤일세. 주공 공자(周公孔子)의 문장이 해와 달 같이 걸렸으니 한우 천권(汗牛千卷)은 장독 덮기에 알맞네."라고 하였다.

  ᄋ 천계 연간(天啓年間, 1621-1627)에 어떤 사람이 상(喪)을 만나서 과천(果川) 땅에 산소(山所)를 정하였는데, 곁에 옛 무덤이 있었으니, 곧 권오복의 산소였다. 일이 시작한 지 며칠 되어 그 아들 한 사람을 시켜 일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일이 끝날 적에 잘못하여 무덤 앞의 섬돌 몇 조각을 뽑았더니, 그 날 밤 꿈에 붉은 도포를 입은 점잖은 이가 옛 무덤으로부터 나왔는데 노여운 빛이 있는 듯 하였다. 그 사람이 얼떨결에 그 앞에 절하고 성명을 물었더니, 점잖은 이가 답하기를, "나는 바로 한림 권(翰林權) 아무개이다."하고, 이어서 옛 무덤을 가리키며, "저것이 내 집인데, 요사이 일꾼이 내 집에 올라가 밟고 내 섬돌을 캐어 뽑아서, 나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거늘, 자네가 어찌하여 꾸짖어 금하지 않았는가?"라고 하매, 그 사람이 또한 선비라, 본래 공(公)의 사적을 알므로, "공이 바로, ''''항우(項羽)가 오강(烏江)을 건너지 않는다.''''라는 부(賦)를 지은 분이 아닙니까?"라고 하니, 점잖은 이가, "그렇다."하매, 그 사람이, ''''예! 예!''''하면서 물러났다. 인하여 놀라 깨어 온몸에 땀이 흘렀다. 이튿날 몸소 옛 무덤 앞에 가서 그 섬돌 몇 조각이 과연 뽑힌 것을 보고 크게 기이하게 여기고, 곧 일꾼을 시켜 도로 빠진 곳을 고치고, 글을 지어 제사 지내면서 이르기를, "철인(哲人)의 정(精)한 신령(神靈)이 한줌 흙에 의지하여 백년 뒤에도 능히 사람을 감동시키니, 이러한 것은 죽었어도 죽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1625년(인조 3) 가을에 진사 이발곤(進士李發坤) 씨가 성균관(成均館)에 있었는데, 함께 성균관에 있던 서울에 사는 사람이 이런 일을 전하였고, 상(喪)을 만났다는 사람이란 곧 그 사람의 4촌이라 한다. [연려실기술 6권] : 문장이 맑고 건실하며 필법(筆法)이 굳세고 힘이 있어 당시의 선비들이 칭도(稱道)하였다. 김일손(金馹孫)과는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ᄋ 손순효(孫舜孝)가 읍령(泣嶺)에 올라서 파괴령(破괴嶺)이라 이름을 고쳤더니, 공이 시를 지어, "반드시 탐천(貪泉)이 은지(隱之)를 그르친 것이 아니니 공연히 재 이름자 가지고 무지한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말라. 구구하게 파괴(破괴)라는 이름이 도리어 괴이(怪異)하게 생각되니 읍령(泣嶺)에다 타루비(墮淚碑)나 새기게 하소"라고 하였다.

  ᄋ 공이 자작 시고(詩稿)를 김일손에게 고쳐달라 하고, 시 한 수(首)도 지어 같이 보냈다. 그 시에, "뱀을 그리면서 발을 붙인 것이 졸(拙)하다 말고, 까뀌를 둘러 콧등에 붙은 흙 깎아 떼어주오."라고 하였다. 김일손은 글로 답하기를, "내개 영인의 자귀가 없는데 어찌 권오복의 콧등에 붙은 흙을 깎아 땔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ᄋ 흉하고 포학(暴虐)하고 망극(罔極)한 변을 당하여 죽음의 형틀이 앞에 있어도 꿋꿋이 정신 차려 조용히 죽음에 나갔다. 그 기절의 강하고 굳셈은 천품으로 타고났으니 과연 어떠한가. 아아, 만사가 끝나고 무덤은 닫혀 말이 없다. 오직 그 남기고 간 문장이 하늘에 빛나매, 두우성(斗牛星)을 쓰고 땅에 던지면 쇳소리를 내는 것이 오히려 그의 전형(典型)을 방불케 하고 무궁한 먼 생각을 자아내게 하니 그 무도(無道)한 처형(刑罰)인들 어떻게 백세에 끼친 향기를 없앨 수가 있으랴. 교리(校理) 벼슬로 있다가, 노친(老親)을 봉양하기 위하여 빌어 얻은 외임(外任) 3년 만에 잡혀죽으니, 그 때 나이 32세였다.

  ᄋ 유고(遺稿)는 흩어져 거의 없어졌는데, 그의 종손 달성 부백 권모(從孫達城府伯權某)가 주워 모아 출판하고 또 당시에 화를 입은 이의 명부를 책 뒤에 붙였다.(海東雜錄 6卷, 襄陽誌 1661, 醴泉郡邑誌 1770 1780 1786 1841 1895, 醴泉郡誌 1939, 海東野言 2卷, 燃黎室記述, 戊午名賢錄, 戊午士禍事蹟, 原色世界大百科事典 5卷 236쪽)

  [醴泉郡誌] : 예문관과 홍문관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했고, 문장과 필법이 탁월하여 20세의 나이로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이극돈(李克燉), 유자광(柳子光)이 <성종실록>을 편찬하다가 김종직의 사전(史傳)을 보고 연산군에게 무고하여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1498년(연산군 4) 7월 17일에 김일손(金馹孫)이 김종직(金宗直) 제자들의 명단을 말하기를, "권오복은 김종직의 동지성균(同知成均) 시절에 관에 거접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동년 7월 26일에 윤필상이 아뢰기를, 사초 사건(史草事件)의 관련자 권오복 등은 대역의 죄에 해당되니, 능지처사(凌遲處死)해야 합니다."하니, 왕이, "아뢴 바에 의해 처치하라."라고 하였다. 1498년(연산군 4) 7월 27일에는 왕이 권오복 등을 벤 것을 종묘사직에 알렸다. 이 때 김일손(金馹孫), 권경유(權景裕) 등도 극형을 당했다. 중종반정 때 도승지에 추증되고,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되고, 유집이 있고, 문장이 <동문선>, <대동시림(大東詩林)>에 실려있고, 당시 선비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司馬榜目, 文科榜目, 燕山君日記, 醴泉郡誌 1939)

  [성종실록] : 1489년(성종 20) 11월 12일에 기사관(記事官) 권오복이 밀양부사 허혼(許混)의 탐오(貪傲)를 왕에게 고하였다. 그리고 이틀 후 관미(官米)를 도둑질하던 허혼의 배를 붙잡고 힐문하던 만호(萬戶)의 이름을 종이에 써서 봉함하여 왕에게 올렸다. 동년 12월 6일에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문신들에게 전경 강독(專經講讀)을 시켰는데, 이 때 영의정 윤필상(尹弼商)이 왕에게 아뢰기를, "봉교(奉敎) 권오복이 중국말의 질정(質正)으로 요동으로 가게 되니, 청컨대 권오복으로 하여금 중국 문신 소규(邵奎)에게 질정하여 <직해소학(直解小學)>을 번역하게 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1490년(성종 21) 1월 16일 장령 민효증(閔孝曾)이 왕에게 아뢰기를, "이 번 질정관(質正官) 권오복은 겨우 의주에 이르렀으니, 청컨대 불러서 돌아오게 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동년 3월 9일 좌부승지 이종호(李宗顥)가 밀양부사 허혼에 대해 왕에게 아뢰기를, "한림(翰林) 권오복이 김일손(金馹孫)에게서 들은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허혼이 둔전(屯田)을 위해서 한 것이다. 밀양 사람들이 허혼을 미워하여 헛된 말을 꾸민 것이다."라고 하였다. 1491년(성종 22) 9월 12일 명하여 문신을 인정전(仁政殿)에 모아서 제술(製述)하게 하니, 홍문관 부수찬 권오복이 3등이었다. 명하여 활 1장을 내려주게 하였다. 검토관으로서 1492년(성종 23) 2월 2일 왕에게 아뢰기를, "임금은 형제를 예우로서 대우해야 합니다."하였고, 동년 2월 11일에는 도승법(度僧法)을 개혁할 것을 청하였고, 동년 3월 19일에는 대제학에 적합한 인물을 왕과 의논하여 홍귀달(洪貴達, 龍宮縣人)을 정하였다. 1492년(성종 23) 6월 26일에는 수찬 권오복이 거짓말을 만들어 내었다 하여 추국하게 하였고, 동년 7월 4일 장령 양희지(楊熙止)가 권오복의 추국 중지를 왕에게 청하였으나 윤허치 않았고, 동년 8월 8일에도 양희지가 다시 권오복의 사면을 청했는데, 윤허하였다. 1492년(성종 23) 10월 18일에 명하여 문신으로 근밀(謹密)한 자를 선택하여 천문과 산학(算學)을 익히도록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권오복 등을 뽑아서 아뢰었다. 동년 11월 11일에는 도승지 정경조(鄭敬祖)가 아뢰기를, "듣건대, 수령이 토지 측량(量田)을 빙자하여 백성에게 강제로 세금을 거둬들이므로 백성이 폐단을 받음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청컨대, 조정의 관리를 보내어 규찰하게 하소서."하니, 왕이 이르기를, "권오복과 강혼(姜渾)을 나누어 보내는 것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동년 11월 21일에는 인수대비(仁粹大妃)와 인혜대비(仁惠大妃)가 내린 언문(諺文)에 대해 왕이 권오복 등과 의논하였고, 동년 12월 3일에 법을 반포하였다가 다시 폐지함과 대비의 정사(政事) 간여에 대해 검토관 권오복과 논의하였다. 1493년(성종 24) 윤 5월 12일 검토관 권오복이 조정의 고자질 버릇에 대해 의논하였고, 동년 11월 3일에는 대간(臺諫)의 임무에 대해 의논하였다. 1493년(성종 24) 11월 6일 승정원에서 문신으로서 율문(律文)에 밝은 권오복 등을 뽑아 아뢰니, 전교하기를, "사율원(司律院)에서 항상 근무하면서 율문을 헤아려 정하여 율관(律官)을 가르치게 하라."라고 하였다. 동년 11월 10일에는 검토관 권오복이 <사기(史記)> 태창공전(太倉公傳)의 귀절을 왕에게 부연 설명하였다. 1494년(성종 25) 1월 6일에는 승정원에서 홍문관의 선비인 권오복 등을 대간에만 서용할 것을 아뢰었고, 동년 4월 2일에는 왕이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중국 의서인 <안기집(安驥集)>의 수우경(水牛經)을 번역하는 일을 이미 권오복 등으로 하여금 하도록 하였다.

  산골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1494년(성종 25) 4월 13일에 왜인이 수군(水軍)을 죽인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만호(萬戶) 이극검(李克儉)을 홍문관교리 권오복에게 명하여 가서 국문하게 하였다. 동년 4월 29일에 수군이 왜인에게 살해된 것을 뒤늦게 보고한 경상도 수군절도사 변수(邊脩)를 경차관(敬差官) 권오복으로 하여금 이를 국문하게 하였다. 무오사화(1498)가 일어나자 가장 먼저 처형을 당하니, 향년이 겨우 33세이다. 문집 <수헌집(睡軒集)>이 있는데, 소고 박승임(嘯皐朴承任)이 그 서문에서 이르기를, "공의 중형 권오기(權五紀)가 먼저 여기에 착안하여 힘써 자료를 모았으나, 환란 중에 거의 산실(散失)되어서 겨우 5언(五言), 7언(七言)의 율(律)과 절구(絶句)들 백여 수와 부(賦), 표(表), 기(記), 명(銘) 등 잡문 약간을 모아서 한 질을 엮어 간행코저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죽으매 여러 해를 한으로만 남아 있었는데, 지금의 달성부백(達城府伯) 권문해(權文海)는 공의 종손이니, 개연히 이에 뜻을 두었다. 지난 공주 목사일 때 간행하려다가 벼슬자리가 바뀌었다. 그것을 거울 삼아 부임하자 서둘러 두어 달이 지나 정본(定本)을 마련하고 인쇄하면서 그 책 한 부를 나에게 보냈으니, 이것은 권문해가 일찍 서문을 나에게 부탁함이나 내 감히 승낙 못했더니 권문해의 독촉이 심하다. 아! 슬프다. 내 필력이 쇠락하니 어찌 붓을 들어 공을 어떻게 나타내어야 되랴. 책의 내용을 살펴보니, 모든 시문이 가슴 속 깊이에서 우러나왔고 임금을 그리워하고 나라를 근심하고 어버이를 생각하며 형제를 그리워하는 간절한 일편단심이 어구 표현에 넘처 흘렀고, 창주한 분들이 당대의 일류 명사이니, 탁영자 김일손과는 가장 친한 사이로 즐기어 상대하여 수작함이 백아와 종자기가 지기지우(知己之友)인 것처럼 완연히 눈에 보이는 듯 하니, 아! 슬프다. 공은 죽지 아니하였도다. 무도한 악형에 피참되었으나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할 꽃다움이로다. 아! 슬픈 것으로 또한 그 위로를 삼는도다. 1585년(선조 18) 10월 초순에 박승임이 짓다"하였다.(成宗實錄, 襄陽誌 1661, 醴泉郡誌 1939)

  [醴泉의 金石文] : 용문면 하금곡리 유전촌(柳田村)에서 태어나, 1486년에 성균관에 입학, 같은 해 과거에 병과로 급제하여 즉시 예문관 관원으로 선발되었고, 병조 낭청을 거쳐 옥당(玉堂)으로 옮겨졌다가 강원 어사로 나갔다. 1496년(연산군 2)에 어버이의 봉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니. 영덕 수령으로 부임하여 임기 중인 1498년(연산군 4)에 체포되어 죽임(戊午士禍, 1498)을 당했으나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리고 <대동시림(大東詩林)>이나 <동문선(東文選)>에 그 글이 실렸다. 중형인 졸재(拙齋) 오기(五紀)와 종손인 초간(草澗) 문해(文海)가 서로 이어서 그 남은 글들을 모아서 문집을 간행하였고, 묘소는 실전(失傳)되었으나, 유허비명(遺墟碑銘)은 대사간 완산 유치명(柳致明)이 썼다.(醴泉의 金石文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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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복(權五福) [古典] : 권오복의 자는 향지(嚮之)이고, 호는 수헌(睡軒)인데, 예천인(醴泉人)이다. 성종(成宗) 병오년에 과거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선보(選補)되었다가 옥당(玉堂)에 전임되어 김탁영 등 제공(諸公)과 막역(莫逆)의 친교를 맺었다. 그러다 무오년의 사화가 일어남에 미쳐 선생의 문도(門徒)라는 이유로 탁영과 함께 극화(極禍)를 당하였다.(CD-ROM 고전국역총서 2 : 국역 점필재집 문집 부록≫ 문인록을 첨부함[附門人錄]≫ 권오복(權五福)(C) 民族文化推進會,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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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복(항우는 오강을 건너지 않는다는 睡軒 權五福) [記事] : 권오복(1467~1498)은 용문면 하금골리 출신이고, 본관이 예천이고 오기의 아우이며, 자는 향지, 호는 수헌 또는 소유이다.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홍문관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했으며 문장 필법이 탁월하여 한원에 뽑혀 옥당에 들어갔다. 사관이 되어 사초를 쓸 때「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의 글을 김일손이 삽입하고 그는 사전을 적어 넣었는데, 그 뒤 이극돈, 유자광이 성종실록을 편찬하다가 이 사초를 보고 연산군에게 보고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일손 등과 같이 극형을 받았다. 그는 죽음의 형틀 앞에서고 꿋꿋이 기개를 버리지 않은 충신이요 열사였다. 이 때가 노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교리로 있다가 외임 3년째인 32세 때이며, 중종 때 도승지에 추증되고 예천 봉산서원에 모셨다. 그의 유고는 종손 달성부백이던 초간 권문해가 주워 모아 출판하고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사람들의 이름을 책 뒤에 붙였다. 특히 김일손과 교분이 두터워 시고를 고쳐달라고 시 한 수를 지어 같이 보냈는데「뱀을 그리면서 발을 붙인 것을 졸하다 말고, 까뀌를 둘러 콧등에 붙은 흙 깎아 뗄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내게 영인의 자귀가 없는데 어찌 향지의 콧등에 붙은 흙을 깎아 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죽고 난 후 천계 연간에 어떤 이가 상을 당하여 묘지를 과천에 정하였더니 그 곁에 고분 하나가 있었는데 그 자제되는 사람이 역사 감독을 하는데 역군의 잘못으로 고분 앞에 계절돌 몇 조각을 빼내어 버렸더니 그 날 밤 꿈에 홍포를 입은 장자가 고분에서 나오더니 몹시 화난 듯한 표정을 띄우므로 절을 하며, "누구냐?" 물었더니, "나는 한림 권 수헌이다."하고 무덤을 가리키며, "저게 나의 집인데 근자에 역군들이 와서 내 집을 짓밟고 뜰돌을 빼내어 심히 불안케 하거늘 그대가 어찌 금하지 않느냐?"하였다. 그 사람 역시 선비이므로 공에게 청하여 묻기를, "선생이 항우는 오강을 건너지 않는다는 부(賦)를 지으신 분이 아니요?"하니 "그렇다."하였다. 그 선비는 "예, 그러십니까? 빨리 고쳐드리겠습니다." 하고 꿈을 깨니 땀이 흘러 온몸을 흥건히 적셨다. 이튿날 고분 앞에 가서 깨진 곳을 고치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練藜室記述, 戊午名賢錄, (yongmun.narae.com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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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복(權五福) : 성종(成宗) 17년(병오, 1486년) 식년시(式年試) 병과4(丙科4) 급제, ▲인적사항 : 생년(生年) 정해1467(丁亥1467), 자(字) 향지(嚮之), 호(號) 수헌(睡軒), 본관(本貫) 예천(醴泉), ▲가족사항 : 부(父) 권선(權善), 조부(祖父) 권유손(權幼孫), 증조부(曾祖父) 권상(權詳), 외조부(外祖父) 이계전(李季甸), 처부(妻父) 오천정 이사종(烏川正 李嗣宗), ▲이력 및 기타사항 : 소과(小科) 1486(병오) 생원시, 전력(前歷) 생원(生員), 관직(官職) 교리(校理)(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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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복 [記事] : 한국문집총간(011_135d) 사가집(四佳集, 1705)에 실린 사가 서거정(徐居正)의 기사로, 그 내용은, “四佳詩集卷之五十二 第二十五/ 詩類/ 送權翰林 五福 榮親之醴川。 二首。/ 早登龍榜入金?。今復榮親衣錦還。綺席爲開樽北海。瑤觴更獻壽南山。鄕閭聳見挑燈話。親戚齊聲滿坐歡。聖代崇文更崇孝。一時佳氣?門?。/ 紫宸闕下荷恩綸。具慶堂前一笑春。物色淨兼秋色好。斑衣交映繡衣新。少年擢第多揚尹。?節誇鄕笑賈臣。爲報聲名當自惜。更將忠孝答君親。”이다.(www.minchu.or.k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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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복 [記事] : 국학원전 해동잡록(海東雜錄, 1670)에 실린 죽소 권별(權鼈)의 기사로, 그 내용은, “海東雜錄[六]/ 權五福/ 본관은 예천이며 자는 향지(嚮之)이며, 호는 수헌(睡軒)이다. 문장이 맑고 건실하며 필법에 힘이 있었다. 성종 병오년 사마시(司馬試)와, 같은 해의 병과(丙科)에 잇달아 장원하여 당시의 동료들이 추종하며 중하게 여기었다. 김일손(金馹孫)과 막역한 교우이기에 연산군 무오년에 사화가 일어나자 김일손과 함께 죽었다. 벼슬은 홍문관 교리에 이르렀고, 문집이 있어서 전한다./ ○ 흉악하고 망극한 변을 만나, 사형에 쓰는 도구가 앞에 있어도 굳게 버티고 어지러운 모습이 없이 조용히 죽임을 당하였으니, 그 의기와 절개의 굳셈은 천성임을 어찌하랴. 아! 만사가 끝났고 구원(九原 황천(黃泉))은 닫혔다. 홀로 그 기침과 침의 작은 방울과 정하게 빛나서 발해 내는 것이 하늘에 비치면 북두성을 쏘고, 땅에 던지면 쇳소리를 내는 것은 오히려 전형(典形)을 방불하게 남기고 무궁한 먼 생각을 붙였다. 책 가운데의 여러 작품은 하나하나가 마음의 깊은 속에서 흘러 나와서 정성스럽게 임금을 그리워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깊은 생각과 간절하게 어버이를 그리워하고 아우를 생각하는 절실한 심정이 있다. 한 조각 정성이 어구(語句) 곁에 섞여 엉키었으니, 저 무도한 그릇된 형벌이 또한 어찌 백세에 없어지지 않고 흘러 내려가는 꽃다운 이름을 끊을 수 있으랴. 교리(校理)로서 어버이를 공양하려고 외직을 요청하여 야성(野城 지명)에 나왔는데, 원이 된 지 3년 만에 잡혀가서 나이 겨우 32에 죽었다. 그 글의 문체가 매우 맑고 기격(氣格)이 삼엄(森嚴)하니, 글을 보는 사람이 스스로 마땅히 알 것이다. 〈소고집서(嘯皐集序)〉/ ○ 우리 성종이 인재를 아끼고 기르며 풍절(風節 풍도(風度)와 기절(氣節))을 격려하여, 선비의 잘나고 뛰어난 사람이 많이 아울러 나왔으니 성대(盛大)하다고 하겠는데, 액운의 기회를 만나 한 번 패하여 땅에 떨어지니 비교하건대 봄바람이 바야흐로 이르러 초목이 무성하다가 갑자기 얼음ㆍ서리의 참혹함과 비바람의 재앙을 만나서 부서지고 꺾어진 것 같아서 쓸쓸히 남은 것이 없으니, 또 매우 슬픈 일이다. 집에 간직한 유고(遺稿)가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는데, 달성부 수령[達城府伯] 권후(權侯 후는 지방 수령이라는 뜻) 아무개는 바로 수헌 선생의 종손(從孫)으로 곧 뜻을 다하여 모아서 재(梓) 나무로 판을 새기고 또 당시의 죄적(罪籍)을 뒤에 붙였으니, 백년 뒤에 수헌의 문장과 기절(氣節)을 사라지는 데에 이르지 않게 한 것은 아무개의 힘이다.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의 호)의 무오당적(戊午黨籍) 발문(跋文)/ ○ 선비의 삶은 그 평생에 세운 것이 어떠한가일 뿐이며, 오래 살고 일찍 죽고 재앙을 입고 복 받은 것은 말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만약 이유고가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는다면 향지(嚮之)의 이름이 천지간에 길이 보존되리니, 이는 충분히 향지의 불행을 위안하리라. 강혼(姜渾)의 발문/

  ○ 갑인년 겨울에 성종이 돌아가셨는데, 병진년에 시를 지었는데,/ 어쩌면 이렇게도 상기(祥期)가 번개 치듯 빠를까 / 如許祥期一電忙/ 선릉(성종의 능)에 소나무의 달빛이 정히 거칠고 쓸쓸한데 / 宣陵松月政荒?/ 하늘가에 통곡하는 외로운 신하의 눈물 / 天涯痛哭孤臣淚/ 하물며 동료와 떨어져서 흰옷으로 가는 것이랴 / 況隔官僚縞素行/ 하였다. 탁영자(濯纓子)에게 붙인시/ ○ 병진년 11월 6일 기유날 밤 꿈에 천사(天使 중국 사신)가 우리나라에 왔는데, 따라온 사람 가운데 점치는 종이 있었는데, 어머니의 사주조화(四柱造化)를 물었더니, 점쟁이가, ꡒ마땅히 1백 20세를 사실 것입니다.ꡓ하여, 깨어서 미칠 듯 좋아하고, 벽 위에 써서 기록했다. 아! 병진년은 바로 어머님의 나신 해인데 병진년에 이런 꿈이 있음은 어찌 신과 사람이 모르는 가운데에 잠잠히 돕는 것이 아니랴. 또 시편(詩篇)을 지어서 오래 사시도록 비는 도움으로 하였다. 문집의 주(註)/ ○ 수헌이 야성(野城)으로 부임하려 할 적에 이목(李穆)이 시를 지어 주기를,/ 지방관이 되기를 요청한 것은 단지 어버이를 위함일세 / 乞郡無他只爲親/ 옥당의 학사는 귀양으로 이 세상에 내려온 신선이었네 / 玉堂學士謫仙人/ 10년 동안 요순 같은 임금과 그 혜택을 받은 백성을 이루려던 계획 / 十年堯舜君民計/ 충분히 남쪽 고을의 봄을 이루리라 / 剩作南州百里春/ 하였다. 본집(本集)/ ○ 예전에 창려(昌黎)는 나이 40에 머리가 희고, 이충(李沖)은 나이 40에 수염과 머리가 반이나 희고, 안회(顔回)는 나이 29에 머리가 희고, 범진(范鎭)은 40일 사이에 수염과 머리가 다 희어졌다지만, 내 나이가 그 몇 군자(君子)보다 못하고 또 그 몇 군자가 학문을 좋아하는 버릇과 시국을 걱정하는 근심을 따르지 못하는데, 검은 머리가 날로 희어지니, 어버이와 이별하고 나라를 떠나 오랜 세월을 나그네가 되어서 곤궁하고 몹시 울적하여 마음에 흔들려 나를 재촉하여 일찍 머리 희게 함은 옛사람이 이른바, 백발이 사람을 속여 짐짓짐짓 생긴다는 것이 아닌가. 백발을 읊은 글의 서문/ ○ 일전에 내려 주신 아름다운 시편(詩篇)을 상자에 보관하여 보배인 수주(隋珠)처럼 여겼더니, 한 번 본 뒤에 문득 잃어 자취가 없으니 아마도 귀신이 빼앗아 갔나 봅니다. 요사이 흥 보내는 일이 반드시 많으시리니, 먼저 보여준 시를 아울러 꼭 써서 보여 주시어, 저를 흥기시킴이 어떻습니까. 또 이 못난 사람의 초고(草稿)를 본래 차마 보실 것은 못 되지만, 다행히 얼핏보시고 하나하나 고쳐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옛사람에 소군(蕭君)이 한 글자를 내려 준 것을 스스로 다행히 여긴다는 자가 있었는데, 하물며 내 나쁜 시의 글자와 뜻을 아직 퇴고하지 못한 것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김계운(金季雲 계운은 일손(馹孫)의 자)에게 올린 시의 서문/ ○ 9월 어느 날 밤 자리에서 간재(簡齋)의 시에 차운하기를,/ 밤비는 쓸쓸히 내리고 / 夜雨鳴蕭蕭/ 싸늘한 등불 밝게 빛나는데 / 寒燈耿耿明/ 서풍이 불어 잎이 다 떨어지니 / 西風吹葉盡/ 가을소리 들리는 곳이 없네 / 無處聞秋聲/하였다. 본집/

  ○ 손순효(孫舜孝)가 서읍령(西泣嶺)에 올라서 파괴령(破怪嶺)이라고 고쳐 불렀는데, 수헌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탐천이 반드시 은지를 그르치지는 않았으니 / 不必貪泉誤隱之/ 이름 글자를 가지고 무지한 사람 놀래 주지 마오 / 休將名字駭無知/ 구구히 파괴한다는 것 도리어 괴상하구려 / 區區破怪還堪怪/ 읍령에는 모름지기 타루비를 새기게 할 것일세 / 泣嶺須?墮淚碑/ 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수헌이 지은 시고(詩稿)를 가지고 김탁영(金濯纓 김일손의 호)에게 고쳐 주기를 구할 적에 시를 지어 보내기를,/ 뱀을 그려 발을 붙였으니 졸렬한 것 꺼리지 마시고 / ?蛇着足休嫌拙/ 바람 같은 도끼 잡고서 코등의 흙을 깎아 주시오 / 須把風斤??漫/ 하여서, 탁영이 글로 답하여 이르기를, ꡒ나에게 바람 같은 도끼가 없으니 어떻게 향지의 흙을 깎겠소.ꡓ 하였다. 본집/ ○ 한 수재(秀才)가 수헌에게 ≪시학대성(詩學大成)≫을 빌려 달라고 하였더니, 수헌이 시로써 보내어 이르기를,/ 건안(동한의 헌제의 연호)과 육대(중국 남조의 여섯 나라)는 문장의 수풀이지만 / 建安六代詞章藪/ 만약 성인의 문하에 비한다면 참으로 개미의 무덤일세 / 若比聖門眞培?/ 주공 공자의 문장이 해와 달같이 걸렸으니 / 周孔文章懸日月/ 한우 천 권은 장독 덮기에 알맞네 / 汗牛千券堪覆?/ 하였다. 본집/ ○ 천계(天啓) 연간에 어떤 사람이 상(喪)을 만나서 과천(果川) 땅에 산소를 정하였는데, 곁에 옛 무덤이 있었으니 바로 수헌공의 산소였다. 일을 시작한 지 며칠 되어 그 아들 한 사람을 시켜 일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일이 끝날 적에 잘못하여 무덤 앞의 섬돌 몇 조각을 뽑았더니, 그날 밤 꿈에 붉은 도포를 입은 점잖은 이가 옛 무덤으로부터 나왔는데 노여운 빛이 있는 듯하였다. 그 사람이 얼떨결에 그 앞에 절하고 성명을 물었더니, 점잖은 이가 답하기를, ꡒ나는 바로 한림(翰林) 권 아무개이다.ꡓ 하고, 이어서 옛 무덤을 가리키며, ꡒ저것이 내 집인데, 요사이 일꾼들이 내 집에 올라가 밟고 내 섬돌을 캐어 뽑아서, 나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거늘, 자네가 어찌하여 꾸짖어 금하지 않았는가?ꡓ 하니, 그 사람이 역시 선비이기에, 본래 공의 사적을 알고 있으므로, ꡒ공이 바로, ꡐ항우(項羽)가 오강(烏江)을 건너지 않는다.ꡑ란 부(賦)를 지은 분이 아닙니까?ꡓ 하니, 점잖은 이가 ꡒ그렇다.ꡓ 하자, 그 사람이 ꡐ예예ꡑ 하면서 물러났다. 놀라 깨어보니 온몸에 땀이 흘렀다. 이튿날 몸소 옛 무덤 앞에 가서 그 섬돌 몇 조각이 과연 뽑힌 것을 보고 크게 기이하게 여기고, 곧 일꾼을 시켜 도로 빠진 곳을 고치고, 글을 지어 제사지내면서, 이르기를, ꡒ철인(哲人 명철한 사람)의 정(精)한 신령이 한줌 흙에 의지하여 백년 뒤에도 능히 사람을 감동시키니, 이러한 것은 죽었어도 죽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ꡓ 하였다. 을축년 가을에 진사(進士) 이발곤(李發坤) 씨가 성균관에 있었는데, 함께 성균관에 있던 서울에 사는 사람이 이런 일을 전하였으며, 상(喪)을 만났다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의 사촌이라고 하였다./ [주D-001]기침과 침의 작은 방울 : 《진서(晉書)》에, ꡒ기침과 침이 구슬이 된다.ꡓ 하였는데, 곧 시나 글까지도 다 훌륭하다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주D-002]귀양으로 이 세상에 내려온 신선이었네 : 신선이 죄를 지어 지상으로 귀양오는 것. 뛰어난 시인 등이 세상에 있음을 비유./ [주D-003]수주(隋珠) : 수(隋) 나라의 임금이 뱀을 살려주었으며 그 뱀이 물어왔다는 보석은 후세에 천하의 보배라고 일컫는다./ [주D-004]소군(蕭君) : 당나라의 소영사(蕭潁士)라는 선비가 당시에 큰 인망을 가졌으므로 사람들은 소영사의 글자 하나라도 얻으면 큰 행복으로 여겼다 한다./ [주D-005]서읍령(西泣嶺) : 경상도 영해(寧海)로 가는 고개는 감사와 또는 나라의 사명 가진 사람이 넘으면 큰 재변이 생기고 넘는 사람이 죽는다는 전설이 있어서 아무도 넘지 못하였는데 손순효가 경상 감사로 그 고개를 넘고 고개 이름으로 서읍령을 파괴령이라고 고쳤다./ [주D-006]은지(隱之) : 중국 광주(廣州)에 있는 샘은 누구든지 이 물을 한 번 마시면 그 자리에서 탐욕(貪慾)이 생긴다고 하여 탐천(貪泉)이라고 부르는데 오은지(吳隱之)가 광주 태수로 가서 그 샘물을 마시고 시를 짓고 더욱 청렴하였으므로 염천이라 고쳤다./ [주D-007]타루비(墮淚碑) : 진(晉)의 양호(羊祜)가 양양(襄陽)의 총독으로 있을 제 선정을 하였으므로 양양(襄陽) 사람들이 양호가 생전에 잘 가던 현산(峴山) 위에 비를 세웠는데, 지나는 사람이 읽을 제마다 눈물을 흘렸으므로 후임자인 두예(杜預)가 이렇게 이름 지었다./ [주D-008]한우(汗牛) : 책이 많음을 뜻하는데, 집에 쌓으면 들보에까지 가득하고, 수레에 실으면 소말이 땀 흘릴 만큼 많다 하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이다.(www.minchu.or.kr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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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의 자랑(194) : 권오복(형틀 앞에서도 굳게 버티어...)(作成 張炳昌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2003-2-21 照會 121)

  -><예천의 자랑> 제2권(張炳昌 著 2004年) =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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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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