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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113:권오복史官3(附예천방문573)
작성자장병창 @ 2010.02.16 08:38:32



  예천의 자랑(2113) : 용문면 하금곡리 출신 권오복 사관(3)(附 예천방문 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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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복 [記事] : 성종실록 234권/ 성종 20년(1489 기유 / 명 홍치(弘治) 2년) 11월 14일(무진) 4번째 기사/ 권오복이 관미를 도둑질하던 허혼의 배를 붙잡고 힐문하던 만호의 이름을 종이에 써서 봉합하여 올리다/ 사예(司藝) 정석견(鄭錫堅)이 와서 아뢰기를, ?밀양(密陽)에서 곤양(昆陽)까지의 해로(海路)에 지나게 되는 만호(萬戶)가 하나만이 아니어서, 허혼(許混)의 배를 붙잡고 힐문(詰問)한 사람이 누구였는가 하는 일은, 이는 사헌부(司憲府)에서 풍문(風聞)만 듣고 허물을 들어 탄핵할 예의 것이 아니었으니, 만호의 이름을 권오복(權五福)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하니,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 권오복을 불러 물어보라.?하였다. 권오복이 아뢰기를, ?정석견을 보내 안문(案問)21653) 한다면 그 일이 스스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말의 소종래(所從來)를 묻기로 한다면 언로(言路)에 방해가 될 것이어서, 대체(大體)를 손상하게 될까 싶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대저 말의 소종래를 물을 수 없다는 것은, 지난번에 권건(權健) 도 역시 말을 했었으니, 그대의 말이 옳기는 하다. 그러나 내가 듣건대, 지나게 되는 만호가 또한 많다니, 만일 단서(端緖)를 물어보지도 않고 갑자기 국문(鞫問)을 한다면 죄도 없는 사람들이 엉뚱하게 형장(刑杖)을 맞게 될 것이니, 이는 경솔하게 할 일이 아니다. 그대들처럼 한다면 어찌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하게 되겠느냐? 네가 이미 비밀로 하고 말을 하지 않으니 마땅히 그 일을 글로 써서 봉함하여 들여오는 것이 가하겠다.?하였다. 이에 권오복(權五福)이 종이에다 써서 봉함하여 입계(入啓)하니, 전교하기를, ?비밀히 정석견에게 주라.?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6책 234권 16장 B면/ 【영인본】 11책 540면/ 【분류】 *사법(司法) / *군사-지방군(地方軍)/ [註 21653]안문(案問) : 심문. ☞(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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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복 [記事] : 성종실록 235권/ 성종 20년(1489 기유 / 명 홍치(弘治) 2년) 12월 6일(기축) 1번째 기사/ 선정전에 나아가 문신들에게 전경 강독을 시키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문신(文臣)에게 전경(專經) 강독(講讀)을 시켰다. 전적(典籍) 이달선(李達善)이 《주역(周易)》을 강하였는데 의리(義理)에 밝게 통하여 응답하기를 메아리처럼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서 말하기를, ?좌우로 어려움을 질문하는데 뜻에 따라 대답함에 있어 각각 정밀함을 다하였으니, 이같은 자는 쉽게 얻을 수 없다.?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윤필상(尹弼商)이 아뢰기를, ?이달선은 학문을 연구함이 정밀하여 종횡(縱橫)으로 질문하고 논난(論難)하는데 모두 관통(貫通)함을 얻었으니, 진실로 쉽지 아니합니다.?하였다. 사서(司書) 민수복(閔壽福)이 《시경(詩經)》의 수장(首章)인 《관저장(關雎章)》을 강하는데, 두려워하고 겁내어 ?군자호구(君子好逑)? 네 글자를 잘못 해석하니, 좌우에서 모두 웃으면서 인해 아뢰기를, ?《시경》의 수장은 비록 어린아이라도 능히 해석하는데, 이제 이와 같으니, 죄주기를 청합니다.?하니, 임금이 응하지 아니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우찬성(右贊成) 손순효(孫舜孝)가 술이 취하여 어전(御前)에 나아가서 손을 모아잡고 아뢰기를,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묻기를 좋아하시고 가까운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소서.?하니, 임금이 아무 말이 없었다. 윤필상이 아뢰기를, ?관상(觀象)21706) 과 추보(推步)21707) 는 나라의 큰 일인데, 조종조(祖宗朝)에 김담(金淡) 이 역법(曆法)에 정밀하였고, 김담 의 뒤에는 천상(天象)을 아는 자가 다시없으니, 청컨대 나이가 젊고 총민(聰敏)한 문신(文臣)을 골라서 천문 산법(天文算法)을 학습하게 하소서. 또 옛적에 관상감(觀象監)에 누(樓) 두 간을 세워서 측후(測候)하는 곳으로 삼아 겨울에는 호구(狐?)21708) 를 하사하여 천상을 고험(考驗)하게 하였는데, 지금은 그 누각을 오래 폐하여 수리하지 아니하였으니, 청컨대 조종조의 예(例)에 의하여 중수(重修)하게 하소서. 신이 듣건대 중국 문신(文臣) 소규(邵奎) 가 어버이가 늙음으로 인하여 요동(遼東) 에 돌아가서 봉양(奉養)하는데, 전번에 채수(蔡壽) 와 이창신(李昌臣) 이 소규 를 찾아보자 접대가 심히 공손하였고, 질정(質正)한 바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제 봉교(奉敎) 권오복(權五福)이 한어 질정(漢語質正)으로 요동에 가게 되니, 청컨대 권오복으로 하여금 소규에게 질정하여 《직해소학(直解小學)》을 번역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좋다.?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하기를, ? 손순효는 기인(畸人)이다. 소절(小節)에는 세밀하지 아니하고 대한(大韓)에는 여유가 있었다. 후생(後生)을 대할 적에 입에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있는 말을 그치지 아니하였고, 매양 임금에게 ?충서(忠恕)? 두 글자로 권하였다. 일찍이 임금 앞에서 ?충서?의 효과를 크게 과장해 말하기를, ? 흉노(匈奴) 를 가히 목을 묶고 그 등을 매질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비록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겼으나 특별히 우대해 받아들였다. 영남(嶺南)에 외임(外任)으로 가 있을 때에 효자?열녀의 정문(旌門)을 지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두 번 절하니, 세상 사람들이 많이 비난하였으나 아는 이는 그 천진(天眞)함을 일컬었다. 집이 남산(南山) 에 있는데 항상 말술[斗酒]로 스스로를 즐겼고, 칠휴 거사(七休居士) 라고 일컬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6책 235권 5장 B면/ 【영인본】 11책 550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교육-기술교육(技術敎育) / *건설-건축(建築) / *어문학-어학(語學)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註 21706]관상(觀象) : 천문을 관측함. ☞ / [註 21707]추보(推步) : 천체의 운행을 관측함. ☞ / [註 21708]호구(狐?) : 여우 가죽으로 만든 갖옷. ☞(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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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복 [記事] : 성종실록 238권/ 성종 21년(1490 경술 / 명 홍치(弘治) 3년) 3월 9일(신유) 2번째 기사/ 밀양 부사 허혼의 일에 대해 서팽소?홍응?이종호 등과 논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지평(地平) 서팽소(徐彭召)가 아뢰기를 ?밀양 부사(密陽府使) 허혼(許混)의 일은 내버려두록 명하였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수령(守令)의 불법(不法)이 이보다 더할 수 없을 듯하니, 청컨대 끝까지 다스리소서.?하였다. 임금이 좌우에 고문(顧問)하니, 영사(領事) 홍응(洪應)이 대답하기를, ?신이 듣건대, 정석견(鄭錫堅)의 계본(啓本)이 이미 도착하였다고 하는데, 신은 현재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좌부승지(左副承旨) 이종호(李宗顥)에게 이르기를, ?상세히 말해보도록 하라.?하니, 이종호가 말하기를, ?이 일은 한림(翰林) 권오복(權五福)이 김일손(金馹孫)에게서 듣고, 김일손은 박용치(朴用致)에게서 들은 것입니다. 경차관(敬差官) 정석견(鄭錫堅)이 그 말이 나온 근본을 찾아서 선군(船軍) 김윤산(金閏山) 등에게 힐문하기를, ?만약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마땅히 형신(刑訊)을 더하겠다.?하니, 김윤산 등이 그 장(杖)을 맞을 것을 두려워하여 말을 꾸며서 무복(誣服)하기를, ?어떤 배 2척이 밤에 굴포(堀浦)의 다리를 지나가기에 어디서부터 왔는지 물으니 밀양(密陽) 관아라 하였고, 싣고 있는 물건을 물으니 기와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석견(鄭錫堅)이 다시 국문하니, 김윤산이 또 말하기를, ?이는 실로 우리들이 보지 못한 바로서 위엄이 두려워 무복(誣服)하였을 따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밀양(密陽)의 관리를 추국(推鞫)하니, 말하기를, ?본관(本官)은 감사(監司)에게서 명령을 받기를, 장차 겉보리[皮麥]를 실은 배 두 척이 양산(梁山) 등지에 가서 수산 둔전(守山屯田)의 올벼 종자와 바꾸려고 할 것이라 하였는데, 절기(節期)가 늦어서 바꾸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어 한 되[升]씩 한 말[斗]씩 민간에 흩어서 바꾸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정석견 이 형문(刑問)을 세 차례나 가하여 신문하여도 불복(不服)하였다고 합니다.?하였다. 홍응(洪應)이 말하기를, ?인정(人情)으로 말하면, 허혼(許混)이 만약 관청의 물건을 도둑질하고자 하였다면 육로(陸路)를 경유하여 포물(布物)을 몰래 실어나르는 것이 훨씬 편한데, 어찌 반드시 배에 기와를 실었겠습니까? 또 1척의 배에는 격군(格軍)22026) 이 적어도 7, 8명을 밑돌지 않아서 보는 자가 반드시 많아 그 일이 필시 발각될 터인데,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이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허혼(許混)이 둔전(屯田)을 위해서 한 것이다. 밀양(密陽) 사람들이 허혼 을 미워하여 헛된 말을 꾸민 것인데, 국가에서 또 그대로 따라 허혼 을 죄준다면 옳지 않음이 없겠는가? 그래서 내버려둔 것이다.?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7책 238권 4장 B면/ 【영인본】 11책 578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법(司法) / *농업-전제(田制) / *농업-권농(勸農) / *재정-국용(國用)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註 22026]격군(格軍) : 수부(水夫)의 하나로서 사공(沙工)의 일을 돕는 사람. 선격(船格). ☞(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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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복 [記事] : 성종실록 257권/ 성종 22년(1491 신해 / 명 홍치(弘治) 4년) 9월 12일(을유) 1번째 기사/ 문신을 모아 ?치국여팽소선(治國如烹小鮮)의 논(論)?을 제술하게 하다/ 명하여 문신(文臣)을 인정전(仁政殿)에 모아서 ?치국여팽소선(治國如烹小鮮)23849) 의 논(論)?을 제술(製述)하게 하니,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 김감(金勘)이 수석을 차지하였고,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송식(宋軾)은 그 다음이었으며,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 권오복(權五福)이 또 다음이었다. 명하여 김감에게는 말 1필(匹)을, 송식에게는 호피(虎皮) 1장(張)을, 권오복에게는 활 1장(張)을 내려 주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0책 257권 10장 A면/ 【영인본】 12책 94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어문학-문학(文學)/ [註 23849]치국여팽소선(治國如烹小鮮) :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잔 생선을 지질 때와 같다고 함이니, 잔 생선을 요리할 때 잘못하면 부스러지는 데서 정치(政治)의 까다로움에 비긴 말. 《노자(老子)》에 ?큰 나라를 다스림은 작은 생선을 지지는 것과 같이 한다.?고 하였음. ☞(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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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복 [記事] : 성종실록 263권/ 성종 23년(1492 임자 / 명 홍치(弘治) 5년) 3월 19일(기축) 3번째 기사/ 문형을 담당하는 대제학에 적합한 인물을 의논케 하고 홍귀달에게 제수하다/ 윤필상(尹弼商)이 의논하기를, ?노공필(盧公弼)과 이봉(李封)의 재능은 신(臣)이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성(臺省)24253) 과 재상(宰相) 중에 그 사람들을 버려두고 누구이겠습니까? 홍귀달(洪貴達)?유순(柳洵)은 직질(職秩)은 비록 낮지만 그 재능(才能)이 감당할 만합니다.?하고,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노공필의 문학(文學)은 여론으로 모두 추대합니다. 그러나 신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청컨대 우선 할 수 있음을 시험하게 하소서.?하고, 이조(吏曹)에서는 아뢰기를, ?노공필이 대제학에는 직위(職位)와 차서(次序)가 다 알맞으며 재능도 취할 만합니다. 그러나 홍귀달(洪貴達)?유순(柳洵)도 사람들이 모두 문형(文衡)을 맡길 만하다고 하니, 두 사람 가운데 선택하여 제수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하니, 전교(傳敎)하기를, ?문신(文臣)들과 널리 의논하여 아뢰라.?하였다. 임원준(任元濬)이 의논하기를, ?옛날에 사람을 뽑는데 있어서는 한 사람에게 다 갖추어지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문예(文藝) 한 가지 일로 말하더라도 학문(學問)은 해박(該博)하면서도 제술(製述)에 능하지 못한 자도 있고, 학문에는 정심(精深)하지 못하면서도 문사(文詞)에 능한 자도 있으므로, 그 재주가 각각 다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구비(俱備)하기는 사실 어렵습니다. 문형(文衡)을 담당하는 자가 굳이 사부(詞賦)에 능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국가(國家)의 문한(文翰)도 어찌 하나하나 직접 지어야 하겠습니까? 만약 고금(古今)에 통달(通達)하고 사체(事體)에 밝고 식감(識鑑)과 권도(權度)가 있는 자를 얻어서 그 책임을 맡긴다면 여러 저술(著述)을 선별해서 증감(增減)하고 윤색(潤色)하여 사명(詞命)24254) 이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직위와 품계의 높고 낮음을 가지고 임명한다면 아마도 일에 막히게 될 것입니다.

  세종조(世宗朝)에 신장(申檣)?안지(安止)는 종2품(從二品)이었고, 세조조(世祖朝)에 이계전(李季甸)?최항(崔恒)은 정1품(正一品)으로 담당하였었는데, 이는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점을 취한 것이지 어찌 자급(資級)의 높고 낮음에 구애한 것이겠습니까? 지금 이조(吏曹)에서는 《대전(大典)》에 문형을 담당하는 자가 대제학(大提學)?지관사(知館事)의 직임(職任)을 띠도록 기록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정2품으로 의망(擬望)하여 차정(差定)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제도에 관직을 제수(除授)함에 있어 행직(行職)24255) 과 수직(守職)24256) 의 관례가 있으니, 문형을 담당하는 자는 실직(實職)이므로, 비록 종2품이라고 하더라도 대제학?지관사는 수직(守職)으로 제수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더구나 사명(詞命)은 나라의 큰 일이므로 만약 그 임무를 담당할 만한 자가 있으면 비록 백의(白衣)의 서생(書生)이라도 등용할 수 있는 것인데, 종2품 중에서 할 만한 자에게 자급을 올려서 임명하는 것이 일에 무슨 장애가 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서는 박학(博學) 다문(多聞)하고 대체(大體)를 아는 자는 허종(許悰)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고, 그 다음은 홍귀달(洪貴達)?유순(柳洵)?성현(成俔)?권건(權健)?신종호(申從濩)가 모두 대수(大手)24257) 이므로, 문병(文柄)을 맡길 만합니다.?하고, 유자광(柳子光)?성건(成健)?이칙(李則)?김승경(金升卿)?채수(蔡壽)?성현(成俔)?이육(李陸)?김극유(金克?)?신말주(申末舟)?안호(安瑚)?김심(金諶)은 의논하기를, ?현재 문묵(文墨)으로 이름난 자가 어찌 그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문형(文衡)의 책임은 몸에 큰 문제가 있지 아니하면 일찍이 경솔하게 개차(改差)한 적이 없었습니다. 조종조(祖宗朝)에 권근(權近)?윤회(尹淮)?변계량(卞季良)?최항(崔恒)이 모두 문형을 담당했었는데, 상(喪)을 만났어도 체직(遞職)시키지 아니하였습니다. 당시에 어찌 대신할 만한 자가 없었겠습니까만, 대체로 그 책임이 지극히 중하므로 경솔하게 자리가 비는 대로 따라서 바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이 있으니, 우선, 그 임무를 대신하게 했다가 어세겸(魚世謙)이 복(服)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하고, 박안성(朴安性)?김자정(金自貞)?권건(權健)?신종호(申從濩)는 의논하기를, ?문형을 맡는 것은 중임(重任)이므로, 만약 적당한 사람이 없으면 차라리 우선 비워두는 것이지 경솔하게 제수할 수는 없습니다. 어세겸은 지금 비록 상중(喪中)이기는 합니다만, 그 몸에 유고(有故)한 것은 아닌데, 만약 사대(事大)?교린(交隣)?사명(辭命) 등의 중대한 일이 있으면 사람을 보내어 물어서 하더라도 진실로 사체(事體)에는 해로움이 없을 것이니, 아직까지는 자리 메꿈의 차정(差定)은 하지 마시고 복(服)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게 하소서.?하고, 박숭질(朴崇質)?임사홍(任士洪)은 의논하기를, ?문형(文衡)을 담당하는 직임(職任)은 전조(前朝)에 문헌(文獻)이 번성할 때부터 아조(我朝)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대하게 여겼으므로, 물망(物望)이 집중되는 사람이 아니면 불가(不可)합니다. 그리고 비록 가능한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위가 낮으면 덕망(德望)이 중하지 않고 나이 젊으면 사람이 가볍게 여기니, 덕망이 두텁고 노련한 이로서 사문(斯文)을 진압(鎭壓)할 수 있는 이만 못합니다. 굳이 관직(官職)의 차례로 그 직임(職任)을 의망(儀擬)하여 의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삼공(三公) 중에도 경술(經術)이 있고 박학(博學)한 이가 있는데, 영성 부원군(寧城府院君) 최항(崔恒) 의 예에 의거하여 그 직임을 맡게 해도 될 것입니다.

  만일 알맞은 사람이 없으면 옛날에도 그 직임을 중하게 여겨 그 자리를 비워 두었으니, 아직 어세겸(魚世謙) 이 상(喪)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만일 반드시 그 자리를 채워야 한다면, 홍귀달(洪貴達)?유순(柳洵)?권건(權健)?신종호(申從濩)?성현(成俔)이 모두 그 직임을 감당할 만한 자입니다.?하고, 윤민(尹?)은 의논하기를, ?문형을 맡는 직임은 그 재예(才藝)만 취할 뿐이 아니고 반드시 위망(位望)과 덕행(德行)이 모두 훌륭한 자라야 그 직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의정(右議政) 노사신(盧思愼) 은 덕망이 높고 지위도 높으며, 여러 글을 널리 통달하였고 문장(文章)도 법도가 있어서 당시에 문형을 담당할 자로서는 그 이상 갈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근년(近年)에 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 이 모두 삼공(三公)으로서 대제학(大提學)을 겸한 것은 분명한 고례(古例)가 있습니다.?하고, 이숙함(李叔咸)은 의논하기를, ?옛부터 인재(人才)는 이대(異代)에서 빌려오지는 아니하였습니다. 현재 노공필?이봉?홍귀달?신종호?유순?성현은 모두 문형을 담당할 만합니다. 그러나 종장(宗匠)24258) 이 될 만한 대수(大手)로서 일찍부터 중망(重望)이 있어 많은 사람에게 추앙을 받던 이만은 못합니다. 세조조(世祖朝)에 최항(崔恒)이 삼공으로서 문형을 오래도록 담당하였었는데, 지금 우의정인 노사신은 종장이 될 만한 대수로서 최항 만 못하지 않으니,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에 의하더라도 불가(不可)할 것이 없습니다.?하고, 김여석(金礪石)?이예견(李禮堅)?이거(李?)?유경(劉璟)?민휘(閔暉)는 의논하기를, ?문형은 중임(重任)이므로 가볍게 제수할 수가 없습니다. 어세겸이 비록 복중(服中)에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고(事故)는 없으니, 만일 사명(辭命) 같은 중대한 일이 있으면 관원(官員)을 보내어 물어 올 수도 있는 것이니, 아직 빈자리를 메꾸지 말고 있다가 복(服)을 마친 다음에 다시 제수한들 무슨 잘못되는 바가 있겠습니까? 만약 문형을 담당할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 없는 형편이라면 홍귀달 이 좋을 것입니다.?하고, 김응기(金應箕)?권오복(權五福)?이의손(李懿孫)?이관(李寬)?이손(李蓀)?홍석보(洪碩輔)?김경광(金景光)?황사효(黃事孝)?허황(許?)?최진(崔璡)?김율(金?)?성세명(成世明)?정석견(鄭錫堅)?기찬(奇?)?신경(申經)?이극규(李克圭)?최관(崔灌)?이복선(李復善)?유양춘(柳楊春)?홍형(洪泂)?유효산(柳孝山)?조말손(曹末孫)?김윤신(金閏身)?이의무(李宜茂)?유호인(兪好仁)?송질(宋?)?민사건(閔師騫)?변상(邊祥)?이수언(李粹彦)?홍식(洪湜)?권경유(權景裕)?남궁찬(南宮璨)?서팽소(徐彭召)?이계복(李繼福)?이적(李績)?민이(閔?)?민상안(閔祥安)?홍한(洪瀚)?이수무(李秀茂)?이수공(李守恭)?김원(金瑗)? 민수복(閔壽福)?조구(趙球)?이오(李鰲)?정수(鄭洙)?김일손(金馹孫)은 의논하기를, ?홍귀달은 문형(文衡)을 담당할 만합니다.?하고, 김봉(金?)?최인(崔潾)?이세영(李世英)?이효독(李孝篤)?안윤덕(安潤德)은 의논하기를, ?어세겸(魚世謙)이 문형을 담당한 데 대해서 여론이 매우 만족하게 여기는데, 어찌 가볍게 체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3년상(三年喪)의 제도는 기한이 있는 것이니, 만약 화국(華國)해야 할 큰 일이 있으면 사신(詞臣)을 시켜 집에 가서 묻게 해도 될 것입니다.?하고,

  정탁(鄭鐸)?조형(趙珩)?이계맹(李繼孟)은 의논하기를, ?문형을 담당하게 하는 것은 신중하게 선발해야 하므로, 가볍게 고칠 수가 없습니다. 아직 그 자리를 비워 두었다가 어세겸이 3년상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소서. 만약 부득이(不得已)하여 고친다면 우의정(右議政) 노사신(盧思愼)이 여러 사람의 기대에 부응(副應)합니다.?하고, 이세전(李世銓)?양희지(楊熙止)?최숙경(崔淑卿)?최부(崔溥)? 김물(金勿)은 의논하기를, ?선왕조(先王朝) 때에 최항(崔恒)이 의정(議政)으로 대제학(大提學)을 겸하였었습니다. 지금 우의정 노사신이 합당합니다.?하고, 허집(許輯)?이자건(李自健)?이달선(李達善)?권유(權瑠)?남세주(南世周)?강혼(姜渾)?김감(金勘)?이과(李顆)는 의논하기를, ?신종호(申從濩)가 문형을 맡을 만합니다.?하였는데, 전교하기를, ?홍귀달에게 직위를 승진시켜 문형을 담당하는 직임을 제수시키도록 하라.?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대제학(大提學)은 문형(文衡)을 담당하는 자이다. 노공필(盧公弼)은 문사(文詞)에 부족(不足)하였으나 직위가 상당하다고 하여 제수하니, 사람들이 모두 마음에 만족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이때에 와서 체임(遞任)시키고 홍귀달(洪貴達)을 제수하였는데, 홍귀달은 젊어서부터 저술(著述)에 마음을 두어 시문(詩文)이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잘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럽고 청렴하지 못하였으니, 재주는 넉넉하나 덕(德)이 모자라는 자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1책 263권 19장 B면/ 【영인본】 12책 162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물(人物)/ [註 24253]대성(臺省) :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을 아울러 일컫던 말. ☞ / [註 24254]사명(詞命) : 임금의 말과 명령. ☞ / [註 24255]행직(行職) : 품계(品階)는 높은데, 임직(任職)이 낮은 벼슬. ☞ / [註 24256]수직(守職) : 품계(品階)는 낮으나, 임직(任職)이 높은 벼슬. ☞ / [註 24257]대수(大手) : 대문장(大文章). ☞ / [註 24258]종장(宗匠) : 도덕(道德)과 학예(學藝)가 출중한 사람. ☞(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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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573

  서악사(慶北 醴泉, 鳳德山 西岳寺 : 하얀 눈길에 正直한 발자국을 남겨보자.) [記事] :


  폭설이 내리는 한 겨울에도 나무는 걱정이 없다. 이미 스스로를 다 벗고 버렸기 때문이다.

  겨울비가 3일 동안 내리더니 오늘 새벽에는 미국 폭설이 한국으로 넘어 왔는지 전국이 폭설로 세상이 온통 눈 속에 묻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발이 휘날렸다.

  폭설 속에 예천 봉덕산(鳳德山) 서악사로 가는 길은 눈으로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 절경을 이루고 겨울 설화와 빙화를 비롯한 산속의 나무들은 함박눈을 뒤집어 쓴 채 양옆으로 도열해 이 눈 속을 헤치고 찾아온 나를 반기듯 아름다운 정경으로 환영했다.

  사실 이번 여행은 예정에 없든 일로 안동에서 일을 보고 예천인터넷뉴스 정차모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직지사 말사인 봉덕산 서악사가 멀지 않고 바로 근처에 있다고 해서 많은 눈이 오지만 걸어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 해서 숙제도 할 겸 들린 것이다.

  초입부터 온 길이 하얀 눈으로 깨끗하게 내려 있어 밟기에도 미안할 정도로 마치 융단을 밟고 지나가는 듯 발이 눈에 빠지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그것도 아무도 오르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처음으로 길에 발자국 도장을 찍는 기분은...

  어느 정도 올라가자 봉덕산 서악사가 눈 속에 희미하게 보이고 공적비가 하얀 눈 모자를 쓰고 있었고 조금 올라가니 일주문과 룸비니 유치원이 아주 보기 좋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는 날에는 유치원도 어쩔 수 없이 하루 쉬는 듯 조용했다.

  서악사(西岳寺) 범종각 사대천왕상은 눈이 와서 그런지 무게 있는 위엄이 느껴지기보다는 먼 길 온 나에게 고생했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보내고 서악사 경내는 아무도 밟지 않는 하얀 눈이 가득 덮여 있어 흰 눈을 쓰고 있는 사찰은 물론 주변 산세의 곡선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소복이 쌓인 눈에 발 흔적을 남기며 응향전(凝香殿) 앞 사찰경내를 둘러보니 범종각에 매달린 목어가 눈에 들어왔다.

  거친 눈발에도 추운 줄 모르고 난간을 지키며 차가운 바람을 몸으로 맞으며 사찰을 지키는 형상이 밤낮 눈을 감지 않는 항상 깨어있는 물고기와 같다.

  예천읍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봉덕산(鳳德山) 중턱에 산을 깎아 터를 다지고 전각을 세운 서악사(西岳寺)는 가람의 규모가 크지도 작지도 않으면서 아주 단아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예천에서 아주 좋은 교육기관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룸비니’ 부속유치원까지 운영하고 있다.

  서악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으나 추측으로 신라시대 신문왕대에 의상 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서악사는 다른 지역도 비슷하지만 이 지역의 동서남북 사악(四岳)에 있던 절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이 같은 추측은 서악사 요사를 중수할 때에 발견된 상량문을 보고 추측하는 것으로 상당히 오래된 고찰로 지금도 산 너머에 있는 옛 터에서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1770년(영조 46)에 조성된 석가모니후불탱 1점이 증명하고 있다.

  석가모니후불탱은 수미단 위에 삼존불을 배치하듯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의 보살은 문수보살로 추정되며 오른손에 금색의 그릇을 들고 있다.

  왼쪽 보살은 보현보살로 경책이 올려 진 붉은 연꽃을 들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웅전의 꽃 창살이 아주 인상적 이였는데 마치 8폭 병풍을 보는 듯 각양의 무늬를 하나하나 손으로 정교하게 포도, 송학, 연꽃, 등으로 조각해 놓은 모습에 전통의 향기와 장인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또, 대웅전 바깥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와 안쪽의 용꼬리는 금방이라도 하늘을 향해 비상하려는 듯 생생한 역동감이 살아있어 대웅전을 지키는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우리 민족은 용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지 용은 사찰에서 신비스럽고도 친숙한 사이가 되었음에도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고귀함과 그 능력의 권위에 반감을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평범한 이무기나 구렁이, 뱀이라도 여의주를 가지면 용이 되어 승천하듯이 사람들도 더 나은 삶, 밝은 미래를 용이 가진 여의주에 비유하여 하늘로 승천하는 용의 꿈을 품고 살아가기에 상상의 동물임에도 사람들에게 잊혀 지지 않고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게 아닌가 싶다.

  용의 기운이 나에게 닿았는지 그만 내려갈까 하는 생각을 접고 산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으로 발길을 옮겼다.

  문제는 아무 준비도 없이 양복에 구두를 신고 눈길을 올라온 터라 망설여졌던 것인데 아마 이 계단을 올라가면 암자가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

  흰 눈이 수북이 쌓인 나무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사찰 아래의 설경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무엇보다 눈이 매우 깨끗했고 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무들은 하나 둘 꺾이거나 휘어져 무거운 눈 짐을 내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혼자서 아무도 오르지 않은 이 길을 힘들게 오르면서 갈증은 흰 눈으로 해결하고 겨울 숲의 아픔과 침묵, 눈 속 찬바람을 온 몸으로 맞다보니 어느새 눈이 빚어내는 자연의 절경과 겨울 산의 아름다움에 나도 모르게 동화되었다.

  긴 시간 올라가도 내가 생각한 암자는 없고 나뭇가지 사이로 산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암자가 아니라 산 정상을 올라갈 형편이 됐다. 봉덕산 정상 9부 능선부터는 일체의 잡목도 없이 크기가 비슷한 소나무들이 각기의 모양을 뽐내듯 운치 있게 눈을 맞으며 예천 읍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겨울에 그것도 폭설이 내리는 가운데 아무도 오르지 않는 이 산을 구두 신고 양복 입고 정상까지 오른 내가 어쩌면 참 바보스럽기도 했지만 이런 날도 나중에는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셀프타임으로 기념사진도 한 장 찍어 보았다.

  설날 하얀 눈길에 녹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나의 정직한 발자국을 남기면서 세속의 묵은 때도 씻고 내 마음의 여행길을 떠나보자.

  (金泉인터넷뉴스 2010-02-12 오전 11: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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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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