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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114:박사희訓導
예천의 자랑(2114) : 예천 출신 박사희 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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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희(朴士喜) : 예천 출신, 퇴계학파(退溪學派)이다.(www.koreastudy.or,kr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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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희(朴士熹) [記事] : 생애이야기/ 성명 : 박사희(朴士熹) (1508년 ~ 1588년) / 본관 : 함양 (咸陽) / 자 : 덕명 (德明) / 출생지 : 예천(醴泉) 반용리(蟠龍里) / 분묘지 : 예천군 다인현(多仁縣) / 입사경로 : 1548년(명종 3)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사임 / 증직및기타 : 의흥훈도(義興訓導), 선무랑(宣務郞), 신령훈도(新寧訓導) 등 사임/ 학문에 열중하다 : 8세에 아버지로부터 『소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4~15세에 이미 경사(經史)를 통달하였다. 효성이 극진하였으며, 양양의 다인현에 있는 반룡산 아래에 우거하며 반계라 자호하고, 성리학에 침잠, 실천 궁행에 힘썼다./ 이황이 호를 지어주다 : 1538년 31세 때 이황이 도산(陶山)에서 도학을 강론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집도 그곳에 가까운 가야촌(佳野村)으로 이사하였다. 이황이 그를 높게 평가하여 ?우유염어(優遊厭?), 침잠묵지(沈潛?識)?라는 글과 함께 ?묵재(?齋)?라는 호를 주었다./ 관직생활 : 1539년(중종 34) 충청도 향시에 합격하고, 1551년(명종 6)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정시에 낙방하였다. 154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의흥훈도(義興訓導)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종사랑?승사랑, 다시 1559년 무공랑, 그 이듬해 선무랑?신녕훈도(新寧訓導)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고 오직 학문 연구에 전심하였다. 1562년 요성산 나쪽에 조그마한 정자를 얽어 격양정이라 이름했는데 퇴계가 그 편액에 글씨를 썼다.(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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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희(朴士熹) [記事] : 원문자료/ 박사희 가장(朴士喜家狀) : 공의 이름은 사희(士熹)이고, 자는 덕명(德明)이다. 그의 선조는 함양(咸陽) 사람으로 고려시대에 선(善)이란 이가 있어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이르렀는데, 바로 그의 조상이다. 대대로 벼슬을 하며 성대하게 뒤를 따랐다. 10대조 신유는 고려 명종(明宗)을 보좌하여 호남의 도적 이연년(李延年)을 정벌하고, 은청광록대부상주국(銀靑光綠大夫上柱國)의 벼슬을 받았다. 이 일은 역사책 및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翁稗說)』에 실려 있다. 증조부 근(勤)은 조선에 들어와 벼슬하여 의흥휘부사직(義興衛副司直)을 지냈고, 조부 효상(孝商)은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를 지냈다. 부친 형(馨)은 조산대부 장수훈도(朝散大夫長水訓導)를 지냈다. 모친은 동래정씨(東萊鄭氏)로 판서(判書) 귀령(龜齡)의 손녀이고 돈용교위 양명의 딸이다. 정덕(正德) 무진년(1508)에 예천(醴泉) 다인현리(多仁縣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천품이 순박하고 도타웠으며, 덕성(德性)이 깊고 넓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8세에 아버지 훈도공(訓導公)에게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물 뿌리고 먼지 쓸고 응대(應對)하는 예절과 예악사어(禮樂射御)의 문장에 대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함이 없었다. 밤낮으로 연구하니 훈도공(訓導公)이 항상 칭찬하시기를, ?너는 어린데도 학문을 좋아하니, 반드시 이른 시기에 성취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14세에 학업에 힘쓰고 글씨에도 노력하니, 말은 넉넉하고 글씨는 굳건하여 이웃에서 모두 칭찬하였다. 가정(嘉靖) 임오년(1522)에 공은 15세였는데, 경학(經學) 이외에도 글씨와 역사를 널리 공부하였다. 일찍이 『송사(宋史)』 읽기를 좋아하여 염락(濂洛)의 여러 학자들의 당시 일과 출처(出處), 이치에 맞는 논의들에 대해 연구하고 두루 검토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편 끝마다 공이 직접 기록한 것이 있었다. 공은 효성이 지극히 독실했으니,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부모의 안색을 살펴 봉양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부모의 의중을 먼저 살펴 그 뜻을 받들었다. 훈도공(訓導公)이 그 정성된 뜻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별장 하나를 짓고는 그에게 주며 말했다. ?내가 이것을 주는 까닭은 장차 자손의 효성을 격려하기 위함일 뿐이다.? 커서는 독서하고 행실을 닦는 데 옛 사람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다. 『논어(論語)』에 침잠하여 성인의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잊지 않았으며, 성리(性理)를 마음에 두어 삼가고 지켰다. 경(經)과 역사(歷史) 외에 산수(山水)를 매우 좋아하였다. 사는 곳에는 반룡산(蟠龍山)이 있고, 산 아래에는 낙동강 물이 흐른다. 물은 맑고 빠르게 흐르며 산은 아름답고 그윽하니, 또한 교남(嶠南:영남)의 뛰어난 승경처이다. 그 사이에 집을 지어 자연의 정취를 마음에 얻고 반계(蟠溪)라 자호(自號)하였다. 주천(酒泉) 사람들은 지금도 반계 선생이라 칭하고 있다. 이때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陶山)에서 도(道)를 강론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선비들이 마음을 기울여 사모하였다. 공은 백 리 밖에서 책 상자를 짊어지고 암헌(巖軒)에 와서 배알하고, 드디어 가야촌(佳野村)에 살 곳을 정하였다. 마을은 예안(禮安) 송라(松蘿)의 서쪽, 요성(堯聖)의 남쪽에 있으니 또 하나의 승경지이고, 도산(陶山)과 20리 떨어져 있다. 공은 공손히 옷을 걷어올리고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나아가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고, 물러나서는 제현(諸賢)들에게 강론하였다. 성현의 마음 씀의 오묘함과 학자들의 도에 나아가는 방법을 묵묵히 이해하고 깊이 음미하여 긴요한 점을 흡수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자신의 행동은 삼가고 지키는 것으로 하였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순수함과 성실함으로 하였다. 퇴계 선생이 일찍이 우유염요(優游厭妖)?침잠묵식(?潛?識) 여덟 글자로 칭찬하고 허여하여, 공의 서재에 명명하기를 ?묵(?)?이라 하였다. 1539년(중종 34) 가을에 충청도 향시에 합격하고, 1551년(명종 6) 가을에 경상도의 두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끝내 과거시험을 이롭게 여기지 않았다. 1548년(명종 3) 여름에 학행(學行)으로 추천받아 장사랑의흥훈도(將仕郞義興訓導)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품계를 올려 종사랑(從仕郞), 또 올려 승사랑(承仕郞), 또 선무랑신녕훈도(宣務郞新寧訓導)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평소 숲과 골짜기에 뜻을 두었더니 만년에 요성산(堯聖山) 남쪽에 작은 정자를 짓고 ?격양(擊壤)?이라 이름하였다. 스승께서 손수 편액을 써서 주고 또 시를 지어, ?그대의 경책(警策)이 시구에 보존되어 있음을 아니, 매화와 대나무가 나를 대하는 것에 즐거워하네.[知君警策存詩句, 說著梅筠待我來]?라 하고 그 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요성산(堯聖山) 아래에 가야촌(佳野村)이 있으니, 바로 덕명(德明) 박 군이 사는 곳이다. 그 정자에 이름짓기를 격양(擊壤)이라 했는데, 요임금 시대에 노인이 땅을 두드리며 노래 한 것에서 뜻을 취하였다. 한가로이 노닐고 흡족해 하며 기쁘게 지내고 본성을 기르는 것은 태평시대의 노인이고 성인시대의 백성이다. 내가 일찍이 이 정자에 왕래하였는데, 난간 앞에는 매화와 대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매화와 대나무가 나를 대하는 것에 즐거워하네.[說著梅筠待我來]?라고 한 것이다.? 스승의 문하에서 성실하게 노력한 것은 경책이성(警責怡性) 4개의 글자에서 볼 수 있다. 1588년(선조 21) 정월에 침소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 81세이다. 현의 서쪽 화리(禾里) 계곡의 서북쪽 방향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부인은 의인(宜人) 초계변씨(草溪卞氏)로, 별시위(別侍衛) 변효창(卞孝昌)의 딸이고 대사간(大司諫) 변계손(卞季孫)의 증손녀이다. 공보다 뒤에 돌아가셨고 합장했다. 공의 덕과 도량은 일찍 이루어졌으니, 귀의할 곳을 얻으면 도의(道義)로 깎고 시례(詩禮)로 쪼았다. 그 말을 경솔히 하지 않았으니, 병마개를 막듯이 입을 다무는 경계를 힘써 준수하였다. 그 행동은 독실하여 단련하는 교화를 도야하였다. 위로 향하는 공부에 전심하였고 화려함을 일삼지 않았다. 과거에는 본래 뜻을 두지 않았으나 부친의 뜻을 좇아 과거 공부에 두루 통하게 되었다. 월천(月川) 조 선생은 젊어서 학문을 하고 만년에 숲 속에 살 곳을 정했으니, 동문록에 표제를 단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어서이다.
공이 지은 『격양고(擊壤稿)』는 수백 편에 미쳤으나, 흩어지고 병란에 불타 백에 하나도 남지 않았다. 다만 행적 및 약간의 시문을 수습하여 상자에 저장하니, 태산(泰山)의 지푸라기 같을 뿐이라 진실로 후손의 무궁한 한이 된다. 공은 1남 4녀를 두었다. 아들 박몽담(朴夢聃)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선비 황사언(黃士彦)의 딸과 결혼했다. 첫째 딸은 참판(參判) 김식(金寔)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통덕랑(通德郞) 김운(金雲)에게 시집갔으며, 셋째 딸은 진사(進士) 김팽조(金彭祖)에게 시집갔고, 막내딸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문명주(文命周)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둘이 있어, 첫째 박수남(朴守男)은 부정(副正)을 지냈고, 둘째는 박광남(朴光男)이다. 손녀는 셋이 있다. 첫째는 찰방(察訪) 이협(李莢)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선비 박유일(朴惟一)에게 시집갔으며, 막내는 진사(進士) 홍종경(洪宗慶)에게 시집갔다. 부정 박수남은 아들 둘을 두었으니, 첫째는 박침(朴琛)으로 도사(都事)를 지냈고, 둘째는 박성(朴珹)이다. 박광남은 박림(朴琳)과 박정(朴珽)을 낳았다. 박침은 아들 셋을 낳았는데, 첫째는 불초 박희도(朴希道)로 생원(生員)이고, 둘째는 박희괴(朴希?)로 양자로 나갔으며, 셋째는 박희일(朴希逸)이다. 박성은 아들 둘을 낳았으니, 박희점(朴希點)과 박희룡(朴希龍)이다. 박림은 아들 셋을 낳았으니, 박희천(朴希天)과 박희맹(朴希孟), 박희인(朴希仁)이다. 박정은 아들 다섯을 낳았으니, 박희성(朴希聖)과 박희안(朴希顔), 생원(生員)인 박희증(朴希曾), 박희민(朴希閔)과 박희현(朴希賢)이다. 내외 현손(玄孫)이 40여 명인데 다 기록하지 않는다. 현손(玄孫) 생원(生員) 박희도가 삼가 쓰다. - 박희도(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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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희(朴士熹) [記事] :
1508~1588,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덕명(德明), 출생지는 예천(醴泉) 반용리(蟠龍里, 현 의성군 다인면), 분묘지는 의성(義城) 다인현(多仁縣),
입사경로는 1548년(명종 3)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사임, 증직 및 기타는 의흥훈도(義興訓導), 선무랑(宣務郞), 신령훈도(新寧訓導) 등 사임이다.
[학문에 열중하다] : 8세에 아버지로부터 『소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4~15세에 이미 경사(經史)를 통달하였다.
효성이 극진하였으며, 양양(예천)의 다인현에 있는 반룡산 아래에 우거하며 반계라 자호하고, 성리학에 침잠, 실천 궁행에 힘썼다.
[이황이 호를 지어주다] : 1538년 31세 때 이황이 도산(陶山)에서 도학을 강론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집도 그곳에 가까운 가야촌(佳野村)으로 이사하였다.
이황이 그를 높게 평가하여 ?우유염어(優遊厭?), 침잠묵지(沈潛?識)?라는 글과 함께 ?묵재(?齋)?라는 호를 주었다.
[관직생활] : 1539년(중종 34) 충청도 향시에 합격하고, 1551년(명종 6)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정시에 낙방하였다.
154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의흥훈도(義興訓導)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종사랑?승사랑, 다시 1559년 무공랑, 그 이듬해 선무랑?신녕훈도(新寧訓導)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고 오직 학문 연구에 전심하였다.
1562년 요성산 남쪽에 조그마한 정자를 얽어 격양정이라 이름했는데 퇴계가 그 편액에 글씨를 썼다.
(http://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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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희 [記事] :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 간행년 : 2001/ 저자 : 안동문화원/ 발행처 : 안동문화원/ 128) 인물(人物)/ 박사희(朴士熹) : 함양인. 자질과 성품이 순후하고 꼼꼼히 아는 것이 많았다. 천거로 훈도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이황의 문하에서 노닐었다. 이황이 그가 묵묵하기 때문에 그 재(齋)를 명명하여 묵(?)이라 하고 성리서(性理書)를 주었다. 마곡서원(馬谷書院)에 배향되었다.(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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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