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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157:예천체육39
작성자장병창 @ 2010.04.08 06:38:44
  예천의 자랑(2157) : 醴泉體育史資料集(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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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미(金恩美) : 1981- , 초등학교 때부터 양궁을 시작하였다. 예천군청 양궁팀 여자선수단원이다. 1995년 8월 제16회 화랑기시도대항 양궁대회 단체 1위, 1996년 7월 제23회 중고연맹회장기 단체 2위, 동년 7월 제22회 문화관광부장관기 단체 3위ㆍ30m 3위, 1999년 7월 제25회 문화관광부장관기 단체 1위ㆍ개인종합 2위ㆍ60m 1위ㆍ70m 1위, 2000년 1월 예천군청 입단, 동년 10월 제81회 전국체전단체 2위ㆍ60m 1위, 2001년 2월 제4회 실업연맹회장기 실내대회 단체 3위, 동년 2월 제15회 실업연맹회장기 실내대회 단체 2위, 종합선수권대회 단체 1위이다.(인터넷 洋弓의 메카 醴泉 2001, 야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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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자(金仁子) : 1981- , 예천군청 양궁팀 여자선수단원이다. 1997년 7월 제15회 대통령기 단체 1위, 동년 10월 제78회 전국체전 60m 3위ㆍ70m 3위, 동년 10월 제29회 종합선구권대회 30m 1위ㆍ60m 3위, 1998년 7월 제25회 중고연맹회장기 70m 2위, 동년 10월 제30회 종합선수권대회 60m 3위, 1999년 4월 제33회 종별선수권대회 60m 2위, 2000년 9월 제17회 회장기 대학실업대회 개인종합 2위, 동년 10월 제81회 전국체전 단체 2위, 2001년 6월 제18회 대통령기 전국양궁대회 개인종합 2위이다.(인터넷 洋弓의 메카 醴泉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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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호(金珍浩) : 1961- , 본적은 호명면 오천리 285번지, 예천읍 동본1리에서 태어나, 남본리 96-1번지로 옮겨 살았다. 본관은 김해, 종국(鍾國)의 차녀, 손근식의 아내(88년), 예천여중, 80년 예천여고(23회), 84년 한국체대, 동 대학원 졸업, 83년 현대중공업(現代重工業)에 입사, 1975년 예천여중 2학년 때 양궁팀에 참가하였다. 제30회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 단체전 금메달, 개인종합 금메달, 제31회 폰타이라 세계양궁선수권대회 단체전 은메달, 제33회 서울세계양궁선수권대회 단체전 은메달, 개인 종합 동메달, 제23회 서울 세계양궁선수권대회 단체전 은메달, 개인종합 동메달, 제33회 서울세계양궁선수권대회 단체전 은메달, 개인종합 동메달, 제23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대회 동메달, 제36회 롱비치 세계양궁선수권대회 단체전 금메달, 개인종합 금메달, 제8회 방콕아시아경기대회 개인 금메달, 단체 은메달, 제9회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 개인 은메달, 단체 금메달,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 단체 금메달, 30미터 더블 금메달, 60미터 더블 금메달, 70미터 더블 은메달, 86년 양궁선수 은퇴, 91년 한국체육대 조교, 95년 동 경기지도과 부교수, 동 과장이다. 체육훈장 청룡장(體育勳章靑龍章), 체육훈장 백마장(白馬章), 대통령 표창(大統領表彰)을 받았다.(서울新聞 1978.5.29, 朝鮮日報 1979.7.19-22 1979.7.25-27 1979.7.29 1982.5.7-8, 每日新聞 1979.7.21-22 1979.7.26, 東亞日報 1979.7.22, 每日年鑑 1986, 醴泉新聞 1995.9.14, 韓國을 움직이는 人物들 1997, 朝鮮日報 DB 2003)

  김진호(혼자 韓國新 4 樹立, 女子 洋弓서, 新人 金珍浩 大氣焰) [記事] : 무명의 김진호(예천여고)가 제8회 아시안게임 파견 국가대표선발 3차궁도기록평가전에서 혼자 한국신기록 4개를 수립했다. 김진호는 평가전 마지막 날(1978.5.23, 泰陵에서) 여자부 30m 더블, 60m 싱글과 더블에서 3개의 한국신기록을 수립한 후 더블종합에서 국가대표인 팀메이트 황숙주(黃淑珠, 예천여고)를 제치고 2437점을 마크, 종전 한국 최고기록(2395점)을 42점 경신했다. 황숙주도 더블종합에서 2406점으로 역시 한국신기록을 세웠다. 이로써 이 번 평가전에서는 한국신기록 9개가 수립되었다.(서울新聞 1978.5.29)

  김진호(金珍浩 世界新, 베를린世界弓道大會 記錄競技史上 첫 凱歌) [記事] : 한국의 김진호(예천여고)는 1979년 7월 19일 서베를린 올림픽경기장에서 속행된 제30회 세계양궁도선수권대회 3일째 여자 60m 더블 라운드경기에서 지난 1975년 폴란드의 빌라드가 수립한 세계 기록(630점)을 13점이나 앞선 643점으로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금메달을 획득, 한국 기록 경기사상 첫 세계 제패의 개가를 올렸다.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 김진호는 이 날 심한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강행된 70m 더블 라운드에서 574점으로 미ㆍ영 선수에 이어 동메달에 머물렀으나, 60m더블 라운드에서 자기 페이스를 회복, 이 번 대회 첫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주장인 안재순(安在順, 馬山市廳)과 함깨 나란히 1.2위를 차지했다. 이로써 김진호는 개인종합 성적 1865점으로 2위인 호주의 캐롤 토이를 40점차로 따돌리고 선두를 지키고 있으며, 여자단체전에서도 한국은 김진호, 안재순, 황숙주(黃淑珠, 예천여고) 등의 활약에 힘입어 종합 5432점으로 2위의 호주를 19점차로 앞서가고 있다. 세계 대회 처녀 출전에서 세계 제패를 눈앞에둔 한국은 대회 마지막 날인 20일의 50m 및 30m 더블 라운드경기에서도 싱글라운드 성적을 바람으로 뛰어난 실력을 발휘, 종합우승을 성취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朝鮮日報 1979.7.21)

  김진호(베를린에 ‘弓道 韓國’ 떨친 ‘시골 女高生’, ‘女中 2年 때 先輩-언니 勸誘로 활과 因緣’ 幢突한 性格... 혼자 練習, ‘世界頂上’ 金珍浩 스토리) [記事] : 한국에 금메달을 안겨준 김진호 양(18, 예천여고 3년)은 한국 궁도계의 보배이자 간판 스타. 예천여중 2학년 때 예천여고 궁도 선수였던 언니 숙호(俶浩) 양(20)의 권유로 처음 활과 인연을 맺은 김양은 입문 4년째인 1978년 7월 국가대표로 발탁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김양은 이해 8월 궁도국가대표선수 및 상비군기록평가회 개인종합 더블에서 2546점(종전 2515점)으로, 또 60m더블과 70m 더블에서도 각각 636점(종전 630점) 622점(종전 601점)을 얻어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는 등 비록 비공인기록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4차례나 세계 기록을 갱신했다. 1978년 12월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도 북한 및 일본을 누르고 금메달을 따냈었다. 김양은 궁도 선수로서의 필수 여건을 모두 갖춘 천부적인 선수이다. 성격이 차분해 기록에 기복이 없고, 정신 집중력도 남달리 강하다. 게다가 승부욕과 투지가 강해 어릴 때부터 남에게 지는 법이 없다고... 당돌하기까지 해 큰 대회에 처음 출전해서도 당황하는 빛이 없이 제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장점이기도 하다. 70m 더블에서 미, 영 선수에 뒤져 동메달에 그쳤지만 심적 동요 없이 이어 벌어진 60m 더블에서 금메달을 따낸 것이 우연은 아니다. 김양은 신체적으로도 궁도에 적합해 그 또래의 보통 사람보다 수족(手足)이 길고 큰 편, 따라서 시위 놓는 동작이 유연하고 시위를 당기는 근력도 남보다 강해 활은 35파운드짜리 미국산 호이트를 사용하고 있다. 김양은 딴사람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훈련을 계속하는 성실파. 휴일은 물론 새벽 일찍 등교, 훈련장에서 개인 연습을 하며 하학 후에도 혼자 남아 시위를 당긴다고. 체력이 약한 것이 흠으로, 체중만 조금 불리면 나무랄 데 없는 선수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 164cm, 58kg의 약간 가냘픈 몸매에 덧니가 매력적이며 틈나는 대로 음악을 감상한다고...

  [醴泉의 자랑이다. 家族-學校 祝祭] : 김진호 양이 여자양궁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1979년 7월 20일 아침 예천읍 동본동 497번지의 10평 남짓한 김양의 집에서는 아버지 김종국(金鍾國, 44, 대한생명보험 직원) 씨와 어머니 등 가족 5명이, “우리 딸이 떠날 때 약속한 대로 기어이 우승을 따냈다“며 두둥실 춤을 추었으며, 세계 대회에서 금메달도 기쁜데 세계신기록까지 수립했으니, 이 기쁨을 어디다 비길 것이냐”고 벅찬 감격을 억누르지 못했다. 김양의 모교인 예천여고 학우들은 여름방학을 하루 앞두고 날아든 쾌보에 학교가 떠나가도록, ”예천의 자랑 김진호 만세“를 부르며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지르며 세계선수권자가 탄생한 것을 축하했다. 김양의 단짝인 3학년 3반 김미정 양(18)은, “너무 기뻐 말이 안나온다. 먼저 축하를 보내고, 모스크바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따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양을 지도한 예천여고 감독 정삼갑 교사는, “평소 김양의 성격이 침착해 언제나 연습 때의 성적과 대회 성적이 거의 같았으며, 이같은 침착성이 세계 기록을 경신한 원동력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천국궁협회장 최원한 씨(66)는, ”예천 뿐 아니라 전국민이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이라고 축하하며, 황숙주 선수(계명대)도 예천여고 출신으로 이 번 세계 대회는 경북 예천에서 두 명의 세계적 선수를 배출한 셈이며, 계속 노력하여 모스크바올림픽에서는 더 좋은 기록을 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解說, 韓國人 資質 誇示한 快擧, 國弓에 눌려 70년까지 빛 못 봐, 登錄選手 모두 728名 뿐, 投資하면 올림픽서 金메달도] : 한국의 양궁이 기록 경기로는 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낸 것은 기적에 가까운 쾌거이다. 현재 대한궁도협회에 등록된 선수라야 단 728명, 109개 팀(중 52, 고 37, 대 6, 일반 14)에 불과한 데도 김진호 등 우리 여자 선수들은 한국인의 자질을 만방에 과시한 것이다. 양궁은 전래의 국궁에 눌려 지난 1970년까지만 해도 빛을 못 보다가 1972년 신동욱(申東昱) 씨가 대한궁도협회장에 취임한 이후 국제궁도연맹에 정식 가입, 활동을 개척해 나갔다. 체육회는 지난 1977년 1월 여자양궁선수 4명을 선발, 78년 아시안게임에 대비한 강화 훈련을 실시했다. 아시안게임에서 김진호가 개인종합 1230점으로 개인 1위, 단체전에선 3607점으로 2위를 차지하고, 북한을 눌러 기염을 토했다. 이번 제30회 세계궁도선수권대회에는 당초 43개국이 출전키로 되었었으나 소련, 중공, 폴란드 등 공산 15개국이 정치적 이유로 불참, 28개국만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세계 정상급인 소련, 폴란드 등이 빠져 대회 권위는 조금 떨어졌지만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를 휩쓸어온 미국세를 누르고 김진호가 여자 60m 더블 라운드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운 점은 큰 의의를 지닌다. 즉 김진호, 황숙주, 안재순, 박영숙 등 여자선수 4명만이 참가했는데도 단체전에서 계속 수위를 지켜 대한체육회가 좀더 양궁에 집중 투자를 한다면 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기대할 수있을 것 같다. 안타깝게도 남자는 세계 수준과 너무나 차이가 있어 참가조차 못했다. 궁도 경기는 개인전과 단체전으로 크게 나뉜다. 여자부 개인전은 70m, 60m, 50m, 30m가 있는데 한 번씩 거행한 것은 싱글, 두 번하여 합계한 것은 더블이라 부른다. 싱글 라운드란 거리별로 12발(한 발 만점은 10점)씩 세 번을 쏘는데(만점 360점), 싱글종합이란 4개 거리별 점수를 모두 합친 종합점수(1440점)를 일컫는다. 따라서 더블라운드의 거리별 만점은 720점이며, 더블종합 만점은 2880점이 된다.(朝鮮日報 1979.7.21)

  김진호(韓國 女子弓道 世界 制覇, 베를린大會 團體ㆍ個人戰 휩쓸어, 金珍浩 5冠王으로) [記事] : 1) 한국여자궁도선수단은 1979년 7월 20일 서베를린올림픽경기장에서 폐막된 제60회 세계궁도선수권대회에서 단체 및 개인전을 모두 석권, 마침내 세계 정상에 오름으로써, ‘궁도 한국’을 과시했다. 한국은 60m 더블 라운드에서 643점으로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처음으로 금메달을 따냈던 김진호(金珍浩, 17, 예천여고)가 대회 마지막 날 50m 및 30m 더블 라운드에서 각각 604점과 686점의 기록으로 또다시 우승을 차지, 3위인 호주팀보다 93점이나 많은 4종목 합계 7341점으로 단체 종합우승을 성취함으로써 여자부문 금메달 6개 중 5개를 독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또 대회 초반부터 독주를 해온 김진호는 60m, 50m, 30m의 더블 라운드와 개인종합 등에서 금메달 4개, 70m 더블 라운드에서 동메달 1개 등을 따내 이 번 대회 5관왕의 신화를 창조했으며, 개인종합 성적 2507점을 기록 2위인 미국의 주리 애덤즈를 37점이나 앞섬으로써 오는 80년 모스크바올림픽의 새로운 유망주로서 기대를 모았다. 한편 황숙주(黃淑珠, 啓明大, 醴泉女高 卒)는 개인종합 성적 2088점으로 7위를 차지했으며, 60m 더블 라운드에서 김진호에 이어 628점으로 은매달을 타냈던 한국팀 주장 안재순(安在順, 馬山市廳)은 2079점으로 개인종합성적 9위에 머물렀다. 이 날 김진호를 바짝 추격하던 미국의 강호 리네트 존슨은 위경련으로 기권, 경기에 참가하지 않았다. [朴 大統領 祝賀 電文] :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7월 21일 제30회 세계궁도선수권대회에서 세계신기록을 수립하고 종합 1위의 영광을 차지한 우리 선수단(團長 安秀相)에 축하 전문을 보냈다.(東亞日報 1979.7.22)

  김진호(壯하다. 大韓의 딸들, 世界弓道選手權大會에서의 優勝을 祝賀) [記事] : 너무나 가슴 설레이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너무나 자랑스런 낭보가 아닐 수 없다. 1979년 7월 20일 서베를린 올림픽경기장에서 막을 내린 제30회 세계궁도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 여자궁도선수단(안재순, 박영숙, 김진호, 황숙주 등)이 단체전 및 개인전에서 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 강호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영광의 세계 정상을 차지한 것이다. 특히 이 번 대회 초반부터 독주해 온 김진호 선수(경북 예천여고 3년, 18세)는 60m, 50m, 30m의 더블 라운드와 개인종합에서 금메달 4개를 획득했으며, 70m의 더블 라운드에서도 다시 동메달을 따냄으로써, 공전(空前)의 5관왕 신화를 창조함과 동시에 우리나라 여자팀의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하니, 우리의 감격적 흥분은 더욱 고조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우리 나라 체육계에서는 여태까지 궁도 부문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어져 왔다. 현재 등록된 양궁 선수가 748명이요, 그 중 50여 명이 수준급 선수라지만, 76년 올림픽 파견 선수 선발에서 양궁 선수들이 제외된 바 있는 사실이나, 궁도 훈련에 필요한 각종 과학 기재의 불비 등에서 그 것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어린 딸들은 기특하게도 세계 제패의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대한체육회는 이들 선수 전원에게 종신 연금(終身年金)을 지급키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 아시안게임에서의 금메달로 동장(銅章)을 받고있는 김진호 선수에게는 금장(金章)을, 그 밖의 나머지 안재순, 황숙주, 박영숙 선수에게는 각각 은장(銀章)을 수여키로 하는 등 규정 외의 파격적인 대우를 하기로 하는 결정도 했다고 한다. 이 것은 이들 선수들에 대한 전국민의 기쁨과 찬사를 대행한 매우 적절한 조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생각할수록 기특하고 대견스런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우리 정부와 체육 당국은 이들의 이 번 세계 제패로써 확인된 양궁의 발전가능성을 앞으로 어떻게 좀더 적극적으로 신장케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할 줄 안다. 김진호, 황숙주 등 선수를 배출한 예천여고를 관할하는 경북도교위가 이 예천여고를 궁도시범학교로 지정한 것은 잘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경북도교위 이상의 레벨에서 체육 정책적인 지원책이 강구되었으면 한다. 활 생산량의 80%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활의 대가인 인간문화재(제47호 궁위장 권영록 옹)가 살고 있는 예천을 활과 궁술의 고장으로 지정 체육과 산업을 동시적으로 발전시키는 정책이 종합적으로 마련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세계 무대에서의 희망적인 경기 종목으로서 양궁 선수의 양성에 집중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다 할만한 훈련 장비도 없고 출전 역사도 극히 짧으면서 이 번 대회에서와 같은 기적적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천부적으로 양궁에 필요한 신체적 조건과 운동 신경을 그만큼 잘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추리에 큰 잘못이 없다면 이 분야에 대한 진흥책을 강화하고 선수들의 발굴-육성-관리에 노력한다면 세계 제1의 궁도 한국의 영예는 길이 유지 발전시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특히 장신 거구가 필요치 않고 그다지 과다한 밑천이 들지 않으면서 큰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이른 바 비용 효과의 원칙에서 보아도 궁도의 집중 진흥책은 바람직한 일이라 할 것이다. 대한의 어린 딸들의 오늘의 수훈이 내년의 모스크바올림픽대회에서 다시 꽃피게 되기를 희원하면서 이들의 괘거에 또 한 번 뜨거운 국민적인 박수와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朝鮮日報 1979.7.22)

  김진호(24日 凱旋 歡迎式, 市內 카퍼레이드도) [記事] : 대한체육회는 1979년 7월 24일 세계 궁도를 석권한 여자궁도팀과 메르데카 축구팀의 귀국 환영 행사를 갖는다. 체육회는 이 날 오후 6시 30분 김포에서 환영식을 갖고 선수 전원을 오픈카에 태워 서울 시내를 누비기로 했는데, 궁도선수단은 24일 오후 6시, 축구대표팀은 오후 5시 귀국한다.(東亞日報 1979.7.22)

  김진호(東亞日報社-金珍浩 選手 國際電話, 孫基禎 先生이 뛴 곳서 優勝하니 눈물이, 몸 管理 애썼지만 날씨 나빠 애 먹었어요) [記事] : 본사는 1979년 7월 21일 새벽 서베를린 베레브호텔에 국제전화로 세계여자양궁을 제패한 김진호 선수와 통화, 현지 소식을 들었다. 경기가 끝나 호텔에 들어온 지 한 시간 밖에 안되었다는 김진호 선수는, “너무 기쁩니다. 손기정 선생님이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한 그 경기장에서 다시 세계여자양궁을 제패하니 눈물이 쏟아집니다.”고 울먹였다. 다음은 김진호 선수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一問一答] : 지금 기분은? =너무 기뻐 말이 안나와요. 43년 전 손기정 선생님이 일본기를 달고 월계관을 받은 그 장소에서 제가 금메달을 받았다는 게 꿈만 같고 보람이 더 큰 것 같아요.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울려퍼질 땐 머리끝이 서는 것 같았어요. ㅇ 컨디션은? =선생님 지도에 의한 철저한 몸 관리로 좋았어요. 그러나 날씨가 나빠 애 먹었어요. 경기가 열린 마이펠트 그라운드는 3만여 평쯤 되는 잔디로 괜찮았지만 경기 중 매일 불규칙한 비바람이 불어 애 먹었어요. ㅇ 식사는? =아침은 호텔에서 가벼운 식사를 하고, 점심은 이 곳에 있는 한국식당에서 날라다 주셔서 식사에는 어려움이 없었어요. 또 이 곳 교민 30-40여 명이 매일 음료수와 과일 등을 날라다 줘 고마웠어요. ㅇ 방은 누구와 함께 써는지? =안재순 언니와 함께(914호) 있었어요. 숙주 언니와 영숙이는 918호에 있었어요. 학교 선배인 숙주 언니가 뒤를 밀어주어 영광을 차지한 것 같아요. ㅇ 호텔 9층에선 동독이 잘 보인다던데? =동서베를린을 가로막는 장벽이 100m 밖에 떨어지지 않아 동베를린이 잘 보여요. 서베를린보다 자동차나 사람들이 훨씬 적어요. 밤에는 내온사인이 많은데 위장하는 것 같아요. ㅇ 언제 돌아오지? =24일 오후 6시 CX450편으로 귀국하게 된데요.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좀 피곤해요. [발레리나 꿈꾼 金珍浩] : 세계여자양궁을 제패한 김진호는 인형처럼 춤을 추는 발레리나가 꿈이었다. 국민학교 때까지만 해도 밤새 학교에서 피아노를 치며 춤을 추는 예쁜 발레리나의 요정을 밟아갔다. 그러나 예천여중 2년 시절 화사한 꿈이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이 요구되는 양궁 선수로 바뀌었다. 예천여고 궁도선수였던 언니 숙호(俶浩, 20) 양의 권유로 활을 만지기 시작했다. 김진호는 교편을 잡았던 부모들의 폭넓은 이해와 뒷바라지로 양궁에 정신이 팔리기 시작했고 눈부신 전진을 보였다.

  [몸 弱해 코피 자주 흘리기도] : 처음에는 몸이 약해 자주 코피를 흘렸으나, 고등학교 때부터는 신체가 좋아졌다. 키 164cm, 체중 50kg으로 활은 35파운드짜리 미국산 호이트를 사용해 왔다. 가격은 50만 원짜리이다. 김진호는 서베를린으로 떠나기에 앞서, “꼭 우승을 하겠습니다. 여태까지 못한 효도 우승으로 하겠습니다.”라고 부모들에게 약속했다. 비록 집은 소박한 10평짜리 함석집이지만, 마당은 80평,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모두 김진호가 심어 알뜰하게 가꾼 것들이다. ㅇ 예천여고 양궁부가 창단되기는 1973년 11월 4일. 체육교사 겸 코치인 정삼갑(鄭三甲) 씨가 양궁부에 혼신의 정열을 쏟고 있다. 정 교사는 양궁에 대한 전문 지식이 전혀 없었으나, 예천 지방에는 국궁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것에 착안, 학생들에게 양궁을 보급해야 한다면서 양궁에 관한 서적을 탐독, 이론적으로 자신이 생겨 양궁부를 지도했다. ㅇ 김진호는 성격이 참착한 데다 배우겠다는 열의가 대단하며, 손가락이 보통 사람보다 2cm 정도 길어 시위 놓는 동작이 유연하며, 기록에 기복이 없어 궁도하기에는 가장 알맞다는 것. 예천여고에는 현재 국가대표인 김양 이외 황진경 양(18) 등 선수 8명이 모두 경북대표팀이다. 이 학교 양궁부들은 운동장 한 모퉁이 100여 평 남짓한 노천에 양궁장을 만들어 하루 5시간씩 매일 강화 훈련을 쌓고 있다.(東亞日報 1979.7.22)

  김진호(西伯林에 韓國 ‘붐’ 일어, 參加國들 “定期交歡競技‘ 提議, 佛ㆍ印度 等 韓國 활 사겠다 惹端) [記事] : [43年만에 伯林 感激] : 한국 궁도선수단의 쾌거를 알리는 낭보가 연일 전해지고 있는 마이필드경기장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비록 일장기를 가슴에 달았으나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던 장소여서 이 번 한국선수단은 43년만에 또다시 세계에 한국의 국위를 떨치게 돼 또 다른 감회에 젖어있다. 한국 시간으로 1979년 7월 21일 새벽 1시 반에 있을 시상식은 4개 거리별 더블ㆍ더블 개인종합ㆍ단체 더블종합 등 6개 종목에 메달이 주어졌으나 애국가 연주와 국기 게양은 단체와 개인종합에서만 거행되었다. [正式 招請도 받아] : 60m 더블에서 세계신기록을 수립한 김진호(金珍浩)를 비롯 한국 선수들이 놀라운 기록을 나타내자 참가국은 정기 교환경기를 제의하는 등 제30회 세계궁도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는 서베를린의 마이필드경기장에는 갑자기 한국 붐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미국선수단은 8월 마이애미에서 열리는 전미(全美)선수권대회에 한국을 정식 초청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國産 활에 觀心] : 또 외국 선수들은 한국 선수들이 사용하는 국산 활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서독, 프랑스, 홍콩, 인도팀들은 박영순(朴英順)이 사용하고 있는 화곡산업사에서 제조한 활을 보고 값이 싼 한국 활을 구입하겠다고 야단들이라고. 이 번 세계궁도대회는 국내 활 생산업체에 활력을 불러넣은 계기도 된 셈.(每日新聞 1979.7.22)

  김진호(弓術의 故鄕, 醴泉) [記事] : 세계여자궁도 5관왕 김진호(金珍浩) 양이 태어났고, 궁술을 익힌 예천은 예로부터 이름난 활의 고장이다. 예천군의 군기(郡技)가 궁도이며, 군내 학교의 교기(校技) 또한 궁도다. 예천여중 궁도부는 해마다 소년체전 궁도부문을 석권하고 있다. 조궁술(造弓術)의 명인으로 인간문화제 47호가 된 권영록(權寧錄, 64ㆍ예천읍 남본동 245)가 이 곳에서 활을 만들고 있고, 권씨의 동생과 아들들도 조궁 또는 궁도의 일가를 이뤄 각종 궁도대회에 초빙되어 시궁하거나 심판장을 보기도 한다. 권씨의 10대조인 계황(繼黃)이 경궁(勁弓)의 본고장인 개성에서 예천으로 옮김으로써 예천이 활고장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朝鮮日報 1979.7.22)

  김진호(世界 制覇 ‘韓國 弓道’ 凱旋, 金珍浩, 자랑스런 金메달 5個 달고, 어제 저녁 金浦에... 體育會까지 카퍼레이드) [記事] : 제30회 세계궁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 5개를 획득, 세계 정상을 정복한 궁도여자선수단 및 제23회 메르데카배쟁탈축구대회에서 3연패를 이룩한 축구선수단이 1979년 7월 24일 오후 6시 40분 김포공항착 개선했다. 금메달을 자랑스럽게 목에 건 김진호 선수가 대형태극기를 앞세우고 제일 먼저 비행기 트롑을 내려서고, 이어 신동욱(申東昱) 단장, 임원, 선수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뒤를 이었다. 공항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박종규(朴鍾圭) 대한체육회장은 환경사를 통해, “궁도 및 축구선수단이 세계를 제패하고 3연패를 달성함으로써 한국 국민의 기량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는 한편 한국인의 긍지를 드높였다”고 치하하고, 이 번의 성과를 밑거름으로 하여 한층 더 분발 모스크바올림픽에서도 기필 금메달을 쟁취할 것을 당부했다. 궁도의 김진호 선수(예천여고)는 답사에서, “선수단을 위해 뜨거운 환영과 성원을 보내주신 데 대해 국민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하고, “모스크바올림픽에서도 기어코 금메달을 획득, 국민 성원에 보답하겠다”고 다짐했다. 선수단은 환영식을 끝낸 뒤 김포공항→제2한강교→신촌→서소문→체육회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경찰 사이카의 선도를 받은 카퍼레이드는 1호차에 김진호 선수 등 궁도선수단이 3대의 오픈카에 나눠타고, 그 뒤에는 축구선수단이 7대의 오픈카에 분승했다.(朝鮮日報 1979.7.25)

  김진호(金珍浩ㆍ黃淑珠 選手 歡迎式) [記事] : 제60회 세계궁도선수권대회를 제패하고 개선한 경북 출신 김진호ㆍ황숙주 선수에 대한 경북도민환영대회가 1979년 7월 28일 오전 10시 김무연(金武然) 지사를 비롯한 학생, 시민 등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구시민회관 광장에서 베풀어졌다. 이 날 환영대회는 경과 보고에 이어 두 선수에게 기념메달과 꽃다발 증정, 예천여고 정삼갑(鄭三甲) 코치와 선수 부모들에게 꽃다발 증정이 있었다. 김 지사는 환영사를 통해, “한국 체육사에 신기원을 이룩했다”며 모스크바올림픽에서 꼭 세계 제패를 당부했다. 김진호 선수는, “영광을 되살려 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서도 선전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환영대회를 마친 두 선수는 부모 및 관계자들과 함께 대구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여 연도에 늘어선 많은 시민들의 열렬한 개선 축하 박수를 받았다.(朝鮮日報 1979.7.29)

  김진호(슬럼프 脫出, 女大生 名弓 金珍浩, 非共認 世界新 둘 ‘命中’, 60m 싱글ㆍ더블 自己 記錄 깨, 洋弓代表 選拔戰) [記事] : 궁도의 김진호(한체대)는 건재했다. 2년 전 모스크바올림픽의 출전 보이코트로 인한 좌절로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던 김은 오른쪽 어깨의 완쾌 소식과 함께 태릉선수촌에 세워진 세계신기록의 과녁에 2발의 화살을 명중시킨 것이다. 60m 싱글과 60m 더블... 1982년 5월 7일 태릉에서 속행된 제1회 아시아-오세아니아 양궁선수권대회(7월ㆍ일본) 파견선수 죄종선발전 최종일경기는 이같은 김의 세계신(비공인) 2개를 창조하며 폐막했다. 이로써 이 번 대회는 큰 수확을 올려 한국 궁도의 내일을 밝게 약속해 주었다. 이 날 김진호는 60m 싱글에서 종전 자신의 세계최고기록인 336점(80년 4월 모스크바올림픽 최종선발전ㆍ태릉)을 깨고 339점을 기록, 첫 기염을 토했다. 이 점수는 총 36발의 화살 중 15발은 골든포인트(10점)에 정확히 꽂혔고, 나머지 21발은 중심에서 반경 6cm의 옐로우포인트(9점)에 들어박힌 것이다. 김의 관록은 역시 같은 거리의 60m 더블에서 재입증되었다. 673점, 그 것은 김 자신이 3년 전 국가대표 상비군평가전에서 세운 세계 최고기록 659점을 무려 14점이나 앞지른 점수였다. 현재 국제궁도연맹(FITA)의 공인 기록은 세계선수권과 올림픽의 기록만 인정될 뿐 나머지 국내 경기나 국제 대회의 기록은 집행부에서 FITA에 통보할 경우 세계최고기록으로 인정, FITA 가맹국에 알리게 되어 있다. 최종일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여자부 70m 더블 2위 김진호 624점, 여자부 60m 더블 1위 김진호 673점 세계신(종전 659점), 여자부 60m 싱글 1위 김진호 339점 세계신(종전 336점), 여자부 30m더블 2위 김진호 693점, 여자개인종합 1위 김진호 2619점(朝鮮日報 1982.5.8)

  김진호(弓道 世界新 8個 追加, 亞ㆍ大洋洲大會 優勝 金珍浩 5冠王) [記事] : 한국궁도대표팀은 1982년 7월 22일 일본 홋까이도 오비히로에서 폐막된 제1회 아시아 대양주 궁도선수권대회에서 모두 11개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남녀단체전과 개인종합 등 총 12개의 금메달 중 11개를 석권했다. 한국 궁도의 호프 김진호(한체대)는 대회 최종일인 이 날 여자 30m 더블 라운드에서 696점, 여자 개인종합에서 2580점, 그리고 단체전 우승 등 전 날 70m 더블에 이어 모두 4개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5관왕을 차지했다.(大邱每日新聞 1982.7.24)

  김진호(期待도 못했던 큰 收穫, 弓道世界新의 金珍浩 집 祝祭 雰圍氣, 어릴 때부터 觀察力 大端) [記事] : 제1회 아시아ㆍ오세아니아 궁도선수권대회에서 4개의 세계신기록과 함께 5관왕으로 세계를 제패한 김진호 양(22)의 고향인 경북 예천군 예천읍 남본동 96의 1 김양 집에는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떠있다. 1982년 7월 22일 오후 4시부터 집에는 아버지 김종국(金鍾國, 50) 씨, 어머니 김심분(51) 씨, 언니 숙호(俶浩, 24) 양 등 가족과 이웃, 친척, 친지들이 몰려들어 김양의 쾌거에 환호하며 축배를 나누었다. 아버지 김씨는, “이 번 대회에서도 몇 개의 세계 기록을 경신하리라 예상은 했으나 이처럼 큰 수확을 거두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며 기뻐했다. 어머니 김씨는, “진호가 막내딸로 태어나 성격이 차분하면서도 명랑했고, 어릴 때부터 손님이 다녀가고 나면 눈ㆍ코 등 모습을 상세히 얘기하는 등 관찰력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이웃 친지들은, “진호양이 지난 77년 방콕아시안게임(5관왕)과 79년 세계궁도선수권대회(5관왕) 등에서 이미 실력이 입증돼 이 번에도 우승할 것으로 예상은 했으나, 4개의 세계신기록 수립은 정말 빛나는 전과”라고 칭찬했다. 한편 경북궁도협회 반형식(潘亨植) 회장 등 간부들은 김양이 졸업하면 모교인 예천여고 교사로 취직시켜 후배 양성에 전념 88년 세계올림픽에 대비토록 하겠다고 했다. 예천읍내엔 진호 양이 지난 79년 세계를 제패한 후 국내에서 유일한 진호양궁장이 생겼고, 10개 중고교에서도 궁도를 가르치고 있다.(權光男 記者 大邱每日新聞 1982.7.24)

  김진호(世界에 떨친 洋弓 女王, 다시 頂上에 오른 金珍浩, 射法 고쳐 再起 60m 빼고는 獨走, 醴泉産... 79년 베를린大會 5冠王) [記事] : 스포츠 각 종목 가운데 한국 선수가 세계 최고 기록을 기지고 있는 종목은 궁도의 김진호 뿐이다. ‘한국 양궁의 여왕’으로 불려지는 김진호(22, 한체대 3년)는 79년 베를린에서 열린 제30회 세계선수권대회 60m 더블 라운드(720점 만점)에서 643점을 기록, 세계최고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한 개의 세계 기록을 갖고있던 김은 이 번 오비히로대회에서 세계 기록을 무더기로 따내 이제는 ‘세계 양궁의 여왕’으로 등장했다. 국궁의 고향 경북 예천 출신으로, 키 164cm, 체중 54kg의 야멸찬 모습을 지닌 김진호는 예천여고 재학 시절인 1979년 7월 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5관왕을 차지, 신데렐라가 되었다. 인기의 뒤안길에 있던 한국 궁도를 양지로 끌어낸 김진호는 이후 비공인이지만 70ㆍ60ㆍ30m 더블 라운드와 개인종합 세계최고기록을 세웠다. 각광 속에 휩싸였던 김진호는 80년 후반부터 슬럼프에 빠졌다. 부상이 겹쳤고, 1982년 2월까지만 해도 궁도 선수의 생명인 오른쪽 어깨가 정상이 아니었다. 재기가 절망적이던 김진호는 1982년 봄부터 기적으로 부진의 늪에서 헤어났다. 정갑표(鄭甲杓) 대표팀 코치의 지시에 따라 사법(射法)을 고치고, 각종 치유 끝에 재기한 것이다. 특히 사법 교정은 일반적인 근육통처럼 어깨 근육이 늘어난 게 아니라 지나치게 수축된 그녀의 어깨를 원상으로 회복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82년 6월 초 대표선수선발전에서 김은 비공인 세계신기록 3개, 세계타이 1개를 수립해 훌륭히 재기했고, 이 번에 일본에 가서도 50m 경기를 제외하고는 독보적인 존재로 호조의 기록을 낸 것이다.(李鍾南 記者 韓國日報 1982.7.22)

  김진호(金珍浩 全美洋弓選手權大會 女子部 競技 5個 部分 席捲) [記事] : 한국 양궁의 1인자 김진호(23)가 슬럼프에서 깨어나 LA올림픽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한국체대 졸업반인 김진호는 1983년 8월 미국에서 열렸던 제99회 전미양궁선수권대회 여자부 경기 5개 부분을 석권, 다가오는 LA올림픽에서 금메달의 꿈을 부풀게 했다. 김은 또 이 번 대회에서 자신이 국제대회 사상 처음으로 더블 라운드 2600점대를 돌파, 더욱 자신을 갖게 했다. 김은 지난 79년 예천여고 시절 2632점으로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작성했지만 정작 국제시합에서는 2600점대를 넘지 못했다. 김은 이 번 대회에서 첫 싱글에서 1312점 등 2615점(2880점 만점)을 기록해서 김진호의 건재를 과시했다. 79년 서독대회 5관왕으로 활짝 꽃을 피운 그는 80년 모스크바올림픽 불참으로 좌절하는 듯 하더니 최근 다시 고개를 들고 세계 무대를 주름잡고 있어 팬들은 물론 국민 전체의 관심도를 높여 놓은 셈이다.(새農民 1983年 9月號)

  김진호(金珍浩) [記事] : 1961- , 예천읍 동본동 출신, 종국(鍾國)의 2남 2녀 중 막내, 한국체육대 졸업, 예천여고 진학 때 운동 시작(77년), 77년 제58회 전국체전 개인종합 1위, 제8회 아시안게임 단체 1위, 개인종합 1위, 79년 세계양궁선수권대회(서독) 5관왕, 81년 세계양궁선수권대회 개인종합 3위, 82년 아시아양궁선수권대회 개인종합 1위, 82년 세9회 아시안게임 단체 1위, 개인종합 2위, 83년 전미오픈양궁선수권대회 단체 및 개인종합 1위, 83년 세계양궁선수권대회(32회, LA) 5관왕, 84년 LA올림픽대회 동메달이다. 체육훈장 백마장, 청룡장 등 수여받았다.(每日年鑑 1985)

  김진호(精神 訓練․科學 活用의 凱歌/ 韓國洋弓 頂上 13年 秘訣) [記事] : ◎새벽부터 단전 호흡… 지도자 연구도 한 몫//ꡒ고구려 무사들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가.ꡓ한국 여성 궁사들이 올림픽 양궁을 압도하고 남성 궁사들이 정상을 넘보자 한국양궁의 성공 비결에 세계인의 궁금증어린 눈길이 쏠리고 있다. 김진호가 79년 제30회 세계선수권대회(베를린) 5관왕을 석권하며 세계 양궁계에 화려한 첫선을 보인 한국 양궁은 서향순­왕희경­김수녕 등 걸출한 천재들을 잇따라 배출하며 13년 간 세계 정상을 누려왔다. 특히 각종 세계기록의 절반 이상을 한국선수가 갖고 있고 88서울올림픽에 이어 바르셀로나에서도 남녀 모두 세계정상급 수준의 기량을 선보인 양궁은 더 이상 양궁이 아닌ꡐ한궁ꡑ이란 평까지 나오고 있다. 60년대 초 처음 양궁이 국내에 들어온 지 불과 30년만의 일이다. 양궁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을 많은 양궁인들은 우선 전래 활인 국궁의 오랜 전통에서 찾는다. 본격적인 양궁 1세대라 할 수 있는 김진호가 활의 고장인 경북 예천 출신이란 것도 이런 점에서 흥미롭다. 국궁이나 양궁 모두에 공통되는 정신 훈련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국궁에서 기법을 전수받았다는 설명은 설득력을 갖고 있다. 태릉훈련원의 새벽 기상과 함께 30여분간의 단전 호흡과 참선으로 마음 가라앉히기, 동전만한 금색 과녁을 농구공만하게 그려보는 명상 훈련, 그 한가운데를 화살이 꿰뚫고 들어가는 걸 끊임없이 상상하는 이미지 트레이닝, 그리고 이번 겨울 새로 시도한 표적지 뒤집어 붙이고 백지 위에 쏘기 등이 그러한 정신훈련의 예이다. 그 간 세계 양궁계를 양분해 왔던 미국․옛 소련 등 비동양권 선수들로서는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이런 정신 훈련은 사실 한국 양궁이란 빙산의 밑둥치였던 셈이다. 이런 바탕 위에 덧붙여진 것이 현대 스포츠과학의 성과를 최대한 활용한 과학적 훈련이다. 서울올림픽 때ꡐ생체리듬그래프ꡑ란 과학적 훈련 방법을 적용했던 양궁 대표팀은 이 번 대회를 대비해 이를 더욱 발전시켜ꡐSL 스코어링 시스팀ꡑ이란 생체 리듬 조절 프로그램을 활용했다. 불임클리닉분야의 권위자인 서병희(경희의료원) 씨와 이기식 대표팀 감독의 영문 앞 자를 따 이름을 붙인 이 프로그램은 선수들의 생체 리듬과 활을 쏘는 자세, 그리고 성적 사이의 관계를 지속적인 측정과 비디오 촬영을 통해 살펴본 것이다. 이처럼 정신 훈련과 과학적 훈련이 어우러져 최상의 기량을 발휘하기까지는 연구하는 젊은 지도자들의 노력이 컸다. 현 대표팀의 이기식(36) 감독이나 박경래(36) 전 감독, 이왕우(36), 김학룡(34) 코치 등은 외국 서적을 놓치지 않고 찾아내 독파하고 이를 훈련에 적용하는 등 국제 양궁계에서도 빼어난 이론가로 통하고 있다.〈바르셀로나=올림픽취재단>(한겨레新聞 1992-08-05)

  김진호(神弓 韓國) [記事] : 크로마뇽인의 동굴벽화엔 활로 들짐승을 사냥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인류에게 불의 발견만큼이나 활도 큰 몫을 차지했다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첨단과학이 세계를 지구촌으로 만드는 오늘날에도 활로 사냥하는 오지의 원주민들이 있고 보면 활쏘기는 인류와 줄곧 함께 있어온 셈이다. 활이 전쟁 무기로 위력을 떨친 사례는 너무나 많다. 1066년 헤이스팅스전투에서 영국군을 대패시킨 노르만족의 무기는 활이었다. 13세기 유럽을 공포에 떨게한 칭기즈칸의 기마궁병이나 백년전쟁 당시에도 활싸움은 승리의 수단이었다. 활이 전쟁 무기의 자리를 잃게된 계기는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 이후. 활이 총기류를 당할 재주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중국에선 1860년까지 활을 마지막 전쟁 무기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전문가들은 사법을 지중해형과 몽골형으로 나눈다. 오늘날 양궁으로 발전한 것이 지중해형이다. 양궁이 우리나라에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는 1962년께. 그 이후 양궁이 국제대회에서 효자종목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계기는 1978년 제8회 아시아경기대회였다. 이 대회에 첫 출전한 당시 예천여고생 김진호가 당긴 시위는 바로 금메달의 효시로 기록됐다. 효시는 적진으로 돌진하는 기마부대 선봉장의 공격 개시 신호 화살.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를 흉내낸 스키타이문화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김진호 이래 양궁은 한국의 메달밭이 돼오고 있다. 제10회 아시아대회에서는 무려 9개나 되는 금메달을 따내 종합 2위를 굳히는데 톡톡히 한 몫을 했다. 이 뿐 아니라 올림픽에서도 거르지 않고 금메달을 목에 걸어오고 있는 양궁은 이 번에도 화제를 뿌리고 있다. 김경욱이 두 차례, 오교문이 한 차례「퍼펙트 골드」를 명중시켰대서다. 신조어가 된 퍼펙트골드의 확률은 12,500분의 1. 한국은 신궁의 나라임이 분명하다.(京鄕新聞 199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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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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