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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158:예천체육40(祝박흥로.김성남等/예천방문598)
예천의 자랑(2158) : 醴泉體育史資料集(40)(附 하리면 우곡리 출신 박흥로, 29일 방송기자연합회장 선임...축하합니다/예천의 김성남, 윤옥희, 송창엽, 양궁 전국대회 각 3위...축하합니다/예천방문 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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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20世紀 今週의 小史 ; 金珍浩 洋弓史上 첫 世界 制覇 快擧) [記事] : 1979년 7월 19일 제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가 열린 베를린 마이펠트 그라운드. 세계대회에 첫 출전한 한국선수단에는 18세의 앳된 소녀 김진호(예천여고 3년)가 있었다. 간간이 비바람이 몰아친 이날 김진호는 여자 60m 더블라운드에서 643점을 쏴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웠다. 한국 기록경기사상 첫 세계 제패였다. 김진호는 이튿날 30m와 50m에서도 우승한 데 이어 개인종합과 단체종합도 석권해 여자부문에 걸린 6개의 금메달 중 5개를 휩쓸었다. 외신은 한국양궁의 세계 제패를 다투어 전했다. 국내 언론도,『손기정이 월계관을 쓴 곳에서 43년 만에 태극기가 펄럭였다』며,『국궁에 눌려 빛을 못본 양궁에 투자하면 올림픽 금메달도 가능하다』고 흥분했다. 김진호의 세계 제패 이후 한국 여자양궁은 84년 서향순, 88년 김수녕, 92년 조윤정, 96년 김경욱이 연이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며 20년째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다. 김진호는 현재 한국체대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이한수 記者 朝鮮日報 1999-07-24)
김진호(''''洋弓韓國'''' 幕올린 1世代) [記事] : 지금의 한국 여자양궁은 명실공히 세계 최강이다. 그러나 79년 7월 예천여고 3년생인 김진호(당시 18세)가 제30회 베를린세계선수권서 금메달을 따기까지 한국양궁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62년 국내에 양궁이 처음 도입된 지 꼭 17년만의 세계 정상. 세계스포츠사에 이런 이변은 없었다. 그 것도 단체, 개인 등 6개 부문 중 5개 부문을 석권하며 단숨에 세계 정상에 올라선 김진호의 쾌거는 그야말로 전국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종합우승 소식이 전해진 경북 예천 김진호의 집에는 주민들이 몰려와 마치 잔칫집 같았다. 특히 김진호가 첫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정상을 차지했다는 것은 더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것도 양궁의 역사가 짧은 한국에서 변변한 시설도 갖추지 못한 훈련 시설의 핸디캡을 딛고 이룬 쾌거여서 국민의 기쁨은 더 컸다. 아무도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김진호는 이미「큰 일을 저지를」싹이었다. 언니를 따라 예천여중 2년 때부터 활을 잡은 그는 예천여고 1년인 77년 광주체전에서 개인우승을 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혜성처럼 등장한 김진호는 이후 77년 말 대표선수로 발탁돼 승승장구한다. 78년 방콕아시안게임 여자개인전서 우승컵을 차지하며 한국양궁사상 첫 국제대회 우승을 이루고 이듬해 세계대회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활을 잡기 시작한 지 불과 5년만에「양궁여왕」의 자리에 등극한 것이다. 김진호의 세계 정복에는 다소의 행운도 있었다. 인종 차별, 정치 문제로 소련, 폴란드 등 동구의 양궁 강국들이 무더기로 출전을 보이코트, 당시 세계 정상권이던 루스타모바, 부투조바, 코사베리제(이상 구 소련)와 세계최고기록 보유자 빌레즈토(폴란드) 등이 불참한 것이다. 하지만 김진호는 기록으로 세계 정상의 실력을 확인시켰다. 60㎙더블라운드에서 빌레즈토의 당시 세계최고기록을 무려 13점 경신한 세계신기록을 세운 것. 김진호는 이후 82년 세계선수권에서 다시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김진호의 시대는 84년 LA올림픽을 계기로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광주여고 3년생이던 서향순에게 올림픽 금메달을 내준 채 3위로 밀려났다. 하지만 김진호가 세계 정상의 물꼬를 트지 않았다면 서향순의 등장은 더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서향순 이후 88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양궁천재」 김수녕,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우승자인 조윤정, 96애틀랜타올림픽 우승을 차지한 김경욱, 그리고 1999년 세계선수권 우승자인 이은경까지…. 한국은 20년 간 부동의 최강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의 양궁 최강에는 바로 김진호라는「신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재 한국체육대 강사로 변신한 김진호는 이제 양궁코치로도 활약하며「제2의 김진호」발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박원식 記者 韓國日報 1999-12-17)
김진호(萬物相) [記事] : 한국인들의 활솜씨는 어쩌면 그렇게도 좋을까. 시드니올림픽의 초반 부진을 일거에 쓸어버린 남․북한 낭자들의 양궁 솜씨는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제 시드니올림픽 홈부시베이 올림픽파크 양궁장에서 열린 여자 개인전 4강에 오른 선수는 한국 선수 3명, 북한 선수 1명. 모두 우리의 낭자들이었다. ▶한국 양궁의 역사는 아주 짧다. 국내에 양궁이 도입된 것은 1962년, 아직 50년도 채 안 된 미천한 역사다. 그러니ꡐ양궁 신동ꡑ김진호가 1979년 제30회 베를린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따기까지 양궁은 비인기의 그늘에서 17년을 묻혀있어야 했다. 혜성처럼 나타난 김진호로 인해 비로소 국민들은 양궁을 알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 양궁의 역사는 여고생들이 개척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진호가 세계선수권을 차지했을 때 그녀는 예천여고 3년생이었다. 1984년 LA올림픽에서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딴 서향순은 광주여고 3년생, 김수녕은 청주여고 2년생 때였다. 어제 시드니에 첫 금메달의 태극기를 올린 윤미진도 경기체고 2년생이다. 우리의 여고생들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것이다. ▶한 텔레비전 해설자는,ꡒ우리는 동이족으로 원래 활을 잘 쐈다ꡓ고 흥분했다. 동이(東夷)는 옛날 중국인들이 그들의 동쪽에 있던 종족들을 업신여겨 부른ꡐ동쪽의 오랑캐ꡑ라는 뜻이다. 중화(中華)를 자처하는 중국 지배자들은 방위에 따라 남만(南蠻) 북적(北狄) 서융(西戎)하며 미개한 종족들이라고 얕잡아 봤다. ▶그러나ꡐ이(夷)ꡑ를 풀어보면ꡐ큰 대(大), 활 궁(弓)ꡑ의 결합으로ꡐ큰 활ꡑ을 의미한다. 까닭에ꡐ동이ꡑ는ꡐ활을 잘 쏘는 민족ꡑ이 된다. 동이에 얼마나 괴롭힘을 당하고 놀랐으면 중국인들이 얕잡아보려고 하면서도 그 재주를 글자에 옮긴 셈이다. 고구려 벽화에 잘 나타나 있듯 우리는 말을 타고 호랑이를 활로 잡던 민족이다. 이왕 금(金) 본 김에 오늘 남자 궁사들도 쾌거를 이뤘으면 좋겠다.(朝鮮日報 2000-09-20)
김진호(洋弓스타 金珍浩 博士帽) [記事] : 한국 여자 양궁을 처음 세계 정상으로 올려놓았던 김진호(40․한체대 조교수) 씨가 최근 명지대 대학원에서ꡐ훈련 조건과 경기 조건간의 일치도에 따른 경기 수행 비교 연구ꡑ논문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땄다. 김 교수는 예천여고 3학년이던 79년 독일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80년대 중반까지 세계 무대를 석권한 명궁. 은퇴 후 95년부터 한체대 강단에 섰다.(朝鮮日報 2001-02-28)
김진호 [記事] : 양궁 선수로서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양궁을 세계 정상으로 올려놓았다. 75년 예천여중 2학년 때 양궁 입문, 77년 제58회 전국체전 여고부 개인전에서 대회 타이로 1위, 78년 8월 국가대표 상비군 평가대회에서 60. 70m 더블라운드에서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작성, 78년 방콕아시안게임 거리별 전 종목 우승으로 5관왕, 79년 예천여고 3학년생으로 독일 제30회 베를린세계선수권대회에서 5관왕을 차지했는데, 첫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단숨에 정상에 오른 쾌거는 올림픽 무대를 휩쓴 한국 여자양궁의 출발점이 되었다. 80년 7월 제1회 아시아오세아니아주 선수권대회 70m더블에서 공인세계신기록을 수립하여 5관왕, 83년 롬비치세계선수권대회 5관왕, 84년 LA올림픽에서 아쉬운 동메달, 86년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을 차지한 것으로 국가대표 선수생활에서 은퇴, 활을 놓은 뒤 86년 한체대 대학원 체육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따고, 97년 한체대 경기지도과 조교수로 강단에 섰다. 99년 전국제전 서울시선수단 임원이다. 2001년 2월 21일 명지대 대학원 체육학과 박사 학위식에서 ''''양궁 선수의 훈련 조건과 경기 조건간의 일치도에 따른 경기 수행 비교 연구''''(지도교수 신호주)로 이학 박사모를 썼다. 여자양궁박사 1호가 되었다. 한체대 코치로 양궁팀을 이끌고 있는 김 교수는 여성 양궁인 중 박사 지도자 1호이다. 코치ㆍ주부ㆍ교수 등 1인 3역의 틈을 쪼개 박사 과정을 마쳤다.(每日經濟 2001.2.27 김은희 記者, 인터넷 sportsmuseum 2001)
김진호(金珍浩) : "세계양궁선수권 대회에서 5관왕을 차지했던 양궁의 여왕" 김진호는 1961년 12월 1일 경북 예천군 예천읍에서 아버지 김종국과 어머니 김심분 사이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예천동부초등학교, 예천여자중학교, 예천여자고등학교를 거쳐 한국체육대학을 졸업했다. 예천여중에 재학할 당시 국궁의 명산지이며 많은 궁사를 배출한 이 지방에 활을 통해 옛 명성을 되찾기라도 하려는 듯 양궁바람이 불었다. 75년 우연히 목격한 활쏘는 모습이 멋져 보여 자신도 활을 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고, 언니의 권유로 양궁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입문 1년만인 중학교 3학년 때 전국체전 여중부 단체우승을 차지하며 천부적인 자질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예천여고 1학년 때인 1977년 58회 전국체전 양궁여자부 개인전에서 우승하였으며 2학년 때는 한국대표로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하여 여자 개인전에서 우승하여 국제대회 첫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1979년 제31회 서베를린 올림픽스타디움에서 개최된 세계양궁선수권대회와 1983년 제33회 로스엔젤레스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는 5관왕을 차지하여 양궁의 여왕으로 군림하면서 한국 양궁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불행하게도 올림픽대회와는 인연이 없어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는 한국의 대회 불참으로 금메달을 획득할 찬스를 놓쳤고, 1984년 로스엔젤레스올림픽에서는 동메달에 그쳤다. 그러나 그녀는 더욱 노력을 경주하여 1985년 서울에서 열린 제33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 대비한 대표선수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하고 50m싱글과 싱글종합에서 그녀가 1979년 세웠던 세계 기록을 6년만에 경신하는 호조를 보이며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서훈으로는 1979년도 체육훈장 청룡장이 있으며, 1983년 백상체육대상 기록경기부문 수상, 동년 최우수선수상, 1984년 대한민국체육상 등이 있다. <자료출처 : 스포츠나인> (www.kasra.or.kr 2004)
김진호(第15回 正心賞 故鄕을빛낸사람 部門 受賞者 金珍浩(43歲, 龍仁市, 醴泉邑 出生) [記事] : 현재 한국체육대 교수이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양궁을 세계 정상으로 올려놓았으며, 예천을 양궁의 메카로 자리잡게 한 장본인이다. 1975년 예천여중 2학년 때 양궁을 시작해 197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 양궁부문에서 거리별 전종목 우승했다. 1979년 베를린 세계선구권대회에서 5관왕, 1982년 제1회 아시아오세아니아주선수권대회 5관왕, 1983년 세계대회 5관왕, 84년 LA올림필 2관왕,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4관왕 등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에 예천의 위상을 높인, 살아있으면서 전설로 남은 인물이기도 하다.(醴泉新聞 2004.9.23)
김진호(金珍浩(醴泉女高), 泰陵選手村에서 열린 國家代表 및 常備軍洋弓記錄評價會에서 3個의 非公認 世界新記錄 수립) [記事] : 날짜 : 1978년 08월 29일/ 정보제공기관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제공기관 : 국사편찬위원회(www.knowledge.go.kr 2006)
김진호(洋弓 神話의 始作.. 神弓 ''''김진호'''') [記事] : 우리나라 여자 양궁 무적신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한국양궁의 역사는 짧다. 우리나라 양궁이 국제대회에 출전했던게 불과 30년 전이다. 첫 출전은 1978년 열렸던 방콕 아시안게임. 이 대회에 김진호, 오영숙 선수 출전하였다. 한국 여자양궁의 박성현, 주현정, 윤옥희 선수가 2008년 8월 11일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 한국은 여자양궁 단체전에서 88 서울올림픽 이래 6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매번 올림픽 때가 되면 언론과 방송은 마치 양궁 특히 여자양궁은 당연히 금메달을 따와야 하는 종목인 것처럼 이야기하곤 하지만, 막상 경기를 지켜보게 되면 행여 실수가 있지는 않을지 또는 이변이 일어나지는 않을지 가슴 졸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KBS 양궁 해설위원 이은경(92 바르셀로나 여자 단체 금메달), SBS 양궁 해설위원 김경욱(96 애틀랜타 올림픽 2관왕), MBC 양궁 해설위원 김수녕 (88 서울 올림픽 2관왕) 씨도 모두 한결같이 말하는 것처럼 사실 여자양궁의 올림픽 금메달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닌 선수들의 피땀나는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 전부터 계획된 한국 양궁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와 육성 끝에 이루어진 결실인 것이니까. 아마 여자양궁 역대 올림픽 메달리스트 목록은 올림픽 때마다 방송에서 하도 읊어댔으니 웬만한 분들도 다들 외우다시피 할 것이다. 84년 LA의 서향순, 88년 서울의 김수녕, 92년 바르셀로나의 조윤정, 96년 애틀란타의 김경욱, 2000년 시드니의 윤미진, 2004년 아테네의 박성현. 그야말로 한국의 전통적인 강세 종목이며 가문의 대를 이어가 듯 쭉 이어온 지난 20년간의 여자 올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들이다. 하지만 요즘 10대, 20대는 물론 30대 초반만해도 김진호 선수에 대해선 잘 모를 것이다. 지난 30년 세계 최강의 자리를 우뚝 지켜온 한국 여자양궁이지만, 바로 그 양궁 금빛신화의 시초는 김진호 선수였다. 올림픽에서 양궁이 첫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1900년 제2회 파리 올림픽. 하지만 당시 유럽 각국 마다 양궁 시합방식이 달랐기에 이에 대한 통합문제로 우여곡절을 거듭하다 1920년 제7회 앤트워프 대회를 마지막으로 양궁은 정식종목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52년만인 1972년 뭔헨올림픽 때 양궁은 현대적인 경기방식의 정식종목으로 부활하였다. 한편 우리나라 양궁의 역사는 좀 복잡하다. 우선 우리나라엔 전통적인 활쏘기 대회인 ꡐ 궁도 ꡑ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의 전통궁도와 서양의 양궁은 기술이나 경기방식에서 많은 차이를 갖고 있다. 이 문제 때문에 쭉 혼선을 빚어오다가 1969년 대한궁도협회에 양궁 이사직이 신설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여기까지 이르게 된 데에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9년 서울 중앙시장 부근 한 고물수집상에서 양궁을 발견한 석봉근 씨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석봉근 씨는 한국 양궁의 산파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1971년 양궁은 소년체전에서 여 고등부 종목으로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되고,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78년 한국의 첫 여궁사 신화가 탄생한다. 1961년 예천 출생으로 중학교 2학년 때인 75년에 첫 화살을 잡은 김진호 선수가 바로 그녀이다. 77년 전국체전에서 1위를 기록한 김진호 선수는 7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 출전 5관왕이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9년 제30회 베를린 국제 양궁 선수권대회에서 또다시 5관왕을 거머쥠으로써 한국의 여고생 신궁(神弓) 김진호 신화가 탄생한다. 79년 김진호의 양궁 신화는 한국 체육계를 온통 들썩이게 만들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에서 양정모 선수가 건국이래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3년 후의 일이니까. 하지만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서방국가들이 줄줄이 불참을 선언하고 우리나라 역시 불참했기 때문에, 올림픽 금빛신화 탄생시기는 아쉽게도 4년 뒤로 미루어야만 했다. 비록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양정모에 이은 여자양궁 김진호 올림픽 금메달 신화 탄생 시나리오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70년대 후반 그렇게 혜성같이 나타난 여고생 궁사 김진호는 80년대 초반까지 매번 국제대회를 싹쓸이하다시피 하며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당대 최고의 신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나 84년 LA 올림픽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금메달리스트이자 여고생 신궁 신화의 영예는 당시 17세였던 서향순에게 돌아가게 된다. 한편 김진호는 자신에게 쏠린 언론과 국민의 지나친 관심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을까. LA 올림픽에서 김진호는 동메달에 그치고 86 아시안게임 3관왕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84년 LA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서향순, 그리고 88 서울올림픽 2관왕 김수녕이 모두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관계로 여고생 신궁 혹은 여고생 신화란 별칭이 따라다니기도 했지만, 바로 그 여고생 신화 탄생의 원조는 79년 세계선수권대회 때 열여덟살 나이로 5관왕을 차지한 김진호 선수였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는 역시 윤미진 선수가 여고생 나이로 2관왕을 차지하여 바로 그 여고생 신궁 탄생 신화의 계보를 이어갔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엔 선수 이름으로 붙여진 양궁장이 세 개 있다. 광주에 있는 ꡐ 서향순 양궁장 ꡑ, 충북 청주에 있는 ꡐ 김수녕 양궁장 ꡑ 그리고 경북 예천의 ꡐ 김진호 양궁장 ꡑ이다. 여자 개인전은 84년 이래 2004년까지 6차례 그리고 단체전은 88년 이래 이번 베이징 올림픽까지 6차례 금메달 신화를 이어가고 있지만, 아쉽게도 올림픽 금메달 신화엔 이름을 올리지 못한 김진호 선수.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올림픽 효녀종목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여자양궁. 그 신화탄생의 원조는 79년 세계선수권 대회 5관왕 김진호 선수 였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바로 그 김진호가 신화탄생의 시초가 되어 지난 30년 세계 최강으로 자리매김해온 한국 여자양궁이기 때문이다.(인터넷뉴스 신문고 2008/08/12 [07:20])
김진호 선수의 전적(金珍浩選手의 戰績) [體育] :(省略 :<예천군지 1988> 참조할 것)
김진호(世界 制覇한 ''''少女神弓의 元祖'''' : "原動力은 韓國人 特有의 손感覺․集中力이죠") [記事] : 세계를 주름 잡는 한국양궁에서 소녀 신궁들은 언제나 혜성같이 등장했다. 소녀 신궁의 무서운 힘은 한국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까지 6회 연속 단체전 금메달이라는 위업으로 이어졌다. 소녀 신궁 계보의 시초가 바로 세계선수권 첫 우승자인 김진호다. 경북 예천여고 2년 때 78년 방콕아시아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그는 이듬해 베를린 세계선수권에서 5관왕에 올라 세계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는 고교 2년생 서향순이 등장해 소녀 신궁 계보를 이었다. 이후 김수녕이 87년 16세의 나이에 최연소 태극마크를 달아 눈길을 모았다. 그리고 김수녕은 88년 서울올림픽에서 개인과 단체전 2관왕을 차지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윤미진이 등장했다. 경기체고 2학년이었던 윤미진은 2000시드니올림픽에서 선배 김수녕을 꺾고 금사냥에 성공했다. 2005년 마드리드 세계선수권에선 고교 1년생 이특영이 단체전 금메달과 개인전 은메달의 영광을 안으며 세계를 놀라게 했고, 2009년 대표팀 선발전에서는 고교 2년생인 곽예지가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바늘구멍''''에 통과하며 태극마크를 달았다. ''''소녀 신궁의 원조'''' 김진호는 연이은 10대 신궁 출현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초등학교부터 활을 잡기 때문에 기량이 특출난 선수는 고등학생 때 두각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아무래도 한국 양궁이 그동안 숱한 국제대회를 통해 쌓아온 노하우와 특유의 손감각과 집중력 등도 신궁탄생과 세계제패의 원동력"이라고 덧붙였다.(김두용 記者 인터넷韓國日報 2009/06/03 22:2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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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철(文亨哲) : 1958- , 1977년 3월 삼익악기 양궁선수단 입단, 1982년 1월 서울우유양궁선수단 입단, 1984년부터 예천군청 양궁선수단 코치 부임, 1989년 2월 국가대표 코치 부임, 1990년 2월 체육포장 수상, 1990년부터 한국실업양궁연맹이사, 1991년부터 경북양궁협회 전무이사, 1997년부터 대한양궁협회 기록이사이다. 2000년 2월 대한양궁협회 지도상 수상, 동년 11월 경북지사 표창 수상(2회), 2001년 2월 대한체육회 지도상 수상이다.(인터넷 洋弓의 메카 醴泉 2001)
문형철(洋弓 國家代表 코칭스태프 交替) [記事] : 대한양궁협회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대비해 국가대표 코칭스태프를 전면 교체했다. 남자 감독에는 1994년부터 2004년까지 국가대표 코치를 맡았던 장영술 국군체육부대 감독이 선임됐고, 남자 코치는 전인수 울산 남구청 감독이 뽑혔다. 여자 감독은 2004년부터 1년간 국가대표 남자 감독을 역임했던 문형철 예천군청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고, 여자 코치는 구자청 현대모비스 감독이 맡았다. 협회는 "과거 지도자 경력 및 국내외 대회를 통해 검증받은 코칭스태프를 선임, 베이징올림픽에 대비해 의욕적인 훈련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라고 밝혔다.(이동경 記者 聯合뉴스 2007년 1월 19일 (금) 11:38)
문형철(新任 문형철 國家代表 女子洋弓選手團 監督) [記事] : 예천군청 양궁선수단 문형철(50) 감독이 2007년 1월 19일자로 국가대표 여자양궁선수단 감독으로 발탁됐다. 오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까지 국가대표 여자양궁선수단을 지도한다. 문형철 감독은 전북 부안 출신으로 부안농고를 졸업했으며, 지난 77년 삼익악기 선수로 입단, 84년 예천군청 양궁선수단 코치로 부임했다. 89년, 2001년도 국가대표 코치, 2004년 국가대표 남자양궁선수단 감독을 역임했으며, 대한양궁협회 기록이사, 경북양궁협회 전무이사를 맡고 있다. 또한 그동안 양궁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90년 체육포상, 대한양궁협회 지도자상, 경북지사 표창, 대한체육회 지도자상, 2006년 경북최고체육상 지도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가족으로는 부인 전미연(44) 씨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고있다.(醴泉新聞 2007년 01월 25일 12:03:30)
문형철(ꡒ選手들 흔들릴라…ꡓ 癌 治療 미룬 女洋弓 문형철 監督) [記事] : ꡒ무거운 짐 하나를 덜었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개인전이 남아 있으니 축배는 나중에 들겠다.ꡓ 베이징 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에서 한국의 6연속 우승을 이끈 문형철(50) 감독. 그는 2008년 8월 10일 끝난 중국과의 결승에서 승리를 거둔 뒤 주현정(26), 윤옥희(23), 박성현(25)과 차례로 포옹하며 환하게 웃었다. 얼마 만에 지어보는 미소였을까. 2007년 1월 올림픽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그는 ꡐ여자 양궁은 금메달 보증수표ꡑ라는 주위의 기대가 워낙 컸기에 꼭 해내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렸다. 만약 실패할 경우 돌아올 따가운 시선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런 그에게 2007년 12월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태릉선수촌에서 신체검사를 받은 뒤 ꡐ갑상샘암 3기ꡑ 판정을 받았다. 평소 담배도 거의 피우지 않고 건강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기에 ꡒ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ꡓ라며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다. 다행히 잘 치료하면 괜찮아질 것이란 소견을 듣고 2008년 1월 서울 강남의 한 종합병원에서 수술을 한 뒤 몇 차례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병원을 오가면서도 문 감독의 머릿속은 온통 올림픽을 향해 있었다. ꡒ한국 양궁의 금메달 행진을 계승해야 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남은 항암 치료는 올림픽이 끝난 뒤로 미뤘습니다.ꡓ 매일 호르몬 성분의 약과 건강식품을 복용하고 있는 문 감독은 주위에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올림픽 준비에만 매달려 왔다. 그는 동료 지도자, 대한양궁협회와의 협력 속에 베이징 양궁장과 흡사하게 조성한 경기장에서의 모의 테스트, 소음과 미디어 대비 훈련 등을 통해 실전 감각을 끌어올렸다. 팀워크가 생명인 단체전에서 선수들이 최상의 호흡을 맞추는 데도 공을 들였다. 올림픽을 앞두고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몰려들 때는 특정 선수에게만 집중돼 다른 선수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해 모든 선수가 번갈아 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단체전에서 세 선수의 발사 순서도 여러 차례 시뮬레이션을 거쳐 선수들의 성격과 기량에 맞춘 최적의 조합을 마련했다. 당초 경험이 많은 박성현을 1번에, 주현정을 3번에 배치하기도 했으나 4월 월드컵에서 중국에 지면서 둘을 맞바꿔 효과를 봤다. 슈팅 타임이 빠른 주현정은 1번으로 나서 다른 선수들이 여유 있게 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고 마지막 주자로 나선 박성현은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으로 승리를 설거지했다. 2008년 7월 ꡒ올림픽이 다가올수록 스트레스 강도가 심해진다. 잠도 잘 안 온다ꡓ며 말 못할 고충을 털어놓은 그는 오히려 어린 선수들 앞에서는 ꡒ우리는 세계 최강이다. 평소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즐기면서 준비하자ꡓ고 다독거렸다.
영광스러운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며 지도자 인생의 화려한 꽃을 피웠지만 가족에게는 미안할 때가 많다. 전북 부안군이 고향인 문 감독은 부안농림고를 거쳐 삼익악기, 서울우유 등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 이제는 ꡐ제2의 고향ꡑ이 된 경북 예천에서 1983년부터 지도자로 둥지를 틀었다. 예천군청팀을 이끌던 그는 군청 공무원이던 부인 전미연(46) 씨를 만나 1985년 영호남 커플로 결혼한 뒤 아직도 예천군청 관사에서 생활하며 소속팀 선수들과도 동고동락하고 있다. 선수 생활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1989년 처음 대표팀 코치가 된 뒤 지도자로서는 명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2녀 1남을 둔 문 감독의 생일은 국내외에서 양궁대회가 집중적으로 열리는 음력 9월이기에 집에서 미역국을 먹은 경우는 결혼 후 23년 동안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게 부인의 얘기. 대표팀 감독이 된 지난 20개월 동안 집에서 잠을 잔 시간은 한 달도 채 안된다고. 올림픽 단체전 금메달을 딴 뒤 집에 전화를 걸어 기쁨을 나눈 문 감독은 ꡒ가장으로서는 낙제점이지만 잘 이해해 줘 고맙다. 그 덕분에 이런 자리에 설 수 있었다ꡓ며 활짝 웃었다.(김종석 記者 東亞日報 2008-08-12)
문형철("金은 놓쳤지만 그래도 韓國 洋弓, 世界 最高!" : 문형철 洋弓 女子 國家代表 監督) [記事] : 문형철 양궁 여자 국가대표 감독. "비록 이번 올림픽에서 개인전 금메달을 놓쳤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한국 양궁이 세계 최고인 것은 분명합니다" 베이징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에서 한국의 6연속 우승을 이끈 문형철(50) 감독이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로 오랫만에 자신이 맡고 있는 예천군청을 찾아 개인전 금메달을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문 감독은 2007년 1월 ''''금메달을 따면 본전, 못 따면 역적''''이라는 양궁 여자 대표팀 감독을 맡고 동년 12월 올림픽을 앞두고 양궁 대표팀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일제히 받은 신체검사에서 갑상선 암 3기 판정을 받고 수술까지 받은 뒤, 매일 호르몬 성분의 약과 건강식품을 복용하면서도 주위에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를 믿고 대표팀의 지휘봉을 맡겨준 대한양궁협회와 오로지 올림픽 금메달을 따기 위한 일념 하나로 군부대 훈련, 번지점프 등을 말없이 수행해 준 양궁대표팀 윤옥희(23)나 박성현(25), 주현정(26) 선수에게 실망을 줄 수 없다는 생각에 자신의 치료는 올림픽 이후로 미뤘다. 결국 2008년 8월 10일 베이징올림픽 그린양궁장에서 열린 양궁 여자 단체전 중국과의 결승에서 승리를 거둔 뒤 주현정(26), 윤옥희(23), 박성현(25) 선수들을 포옹하며 그동안의 고통을 말끔히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전북 부안군이 고향인 문 감독은 부안농림고 1학년때 처음 활을 잡고 양궁 선수 생활을 시작한 뒤, 삼익악기, 서울우유 등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 1980년 수원 연무초등학교에서 처음으로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 이제는 ''''제2의 고향''''이 된 예천에서 1984년 1월부터 지금가지 25년째 예천군청 양궁팀을 맡으며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특히 첫 양궁 지도자 생활을 했던 수원 연무초등학교에서 전 국가대표 이은경 오교문 선수를 지도하고 예천군청 양궁팀을 맡아서도 김수녕 호진수는 물론 장용호와 윤옥희 선수까지 수많은 국가대표 선수를 배출하고 시드니 올림픽때부터 이번 베이징까지 김수녕과 장용호 윤옥희 선수 등 연속 3회 자신이 맡고있던 팀 소속 선수를 올림픽에 출전시켜 금메달을 따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예천군청팀 감독 생활을 하면서 군청 공무원이던 부인 전미연(46) 씨를 만나 1985년 영호남 커플로 결혼한 뒤 2녀 1남을 둔 문 감독은 "항상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며 "그래도 자식들이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해 고맙기만 하다"고 말했다.(張炳喆 記者 慶北日報 2008-08-29)
문형철(`올림픽 女子 洋弓 團體戰 6連覇 神話 이끌어'''' : 女子 洋弓 國家代表팀 문형철(醴泉郡廳) 監督, **癌 治療 미루고 끝까지 指揮棒 잡아, **醴泉은 第2의 故鄕 `郡民들 聲援에 感謝'''') [記事] : 문형철(51․예천군청) 여자 양궁 국가대표팀 감독. 그는 생명이 걸린 암 치료를 미루고 베이징올림픽에 출전, 여자 단체전 6연패 신화를 이끌어 국민들의 가슴에 뭉클한 감동을 안겼다. 문 감독은 2007년 12월 올림픽을 앞두고 양궁 대표팀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일제히 받은 신체검사에서 갑상선암 선고를 받았다. 문 감독은 치료의 최대 적이 스트레스와 과로란 걸 알면서도 지휘봉을 놓지 않았다. 2008년 1월 수술을 받고 4월엔 1차 항암치료도 받았다. 나머지 방사선 동위원소 치료는 올림픽 이후로 미뤘다. 문형철 감독은 이번 올림픽 양궁경기에서 중국 응원단의 방해가 아주 교묘했다고 떠올렸다. ꡒ화살을 쏘기 1~2초 전 갑자기 호루라기를 부는 것으로 보아 선수 출신 관람객이 관중석에 섞여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정확한 타이밍을 맞춰 방해를 할 수 없지요.ꡓ 문 감독은 단체전, 개인전 모두 금메달을 목표로 완벽하게 준비했지만 중국의 벽을 넘지 못하고 개인전에서 은메달, 동메달에 그친 게 조금 아쉽다고 말했다. 문형철 감독이 예천과 인연을 맺은 건 1984년. 이병탁(현 경북양궁협회장) 회장의 주선으로 예천군청 실업팀 코치로 부임했다. 그때 당시엔 2~3년 정도 경험을 쌓고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병탁 회장을 비롯한 예천체육인들이 보여준 끈끈한 정과 도움이 문 감독의 발목을 잡았다. 여기에다 1985년 예천군청에 근무하던 전미연(48) 씨를 만나 결혼, 단란한 가정을 꾸리면서 예천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선수들에게 실력 못잖게 인성을 강조한다. 인간 됨됨이를 갖춘 선수라야 생명력이 길고 은퇴 후 사회생활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ꡒ올림픽에 3회 연속으로 출전, 금메달을 딴 건 예천군청팀 선수들뿐입니다. 우리나라 양궁의 중심 아니, 세계 양궁의 중심에 예천이 우뚝 서 있는 셈이지요.ꡓ 문 감독은 ꡐ이번 베이징올림픽에서 거둔 좋은 성적을 발판으로 다른 지역 팀으로 옮기는 게 아니냐ꡑ는 소문에 대해 ꡒ절대 그런 일 없다ꡓ며 한 마디로 일축했다. ꡒ지금보다 몇 배 더 좋은 조건의 제의가 오더라도 제2의 고향인 예천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예천에 와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도움을 받았고…, 지금의 저를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으니까요.ꡓ 문 감독은 ꡒ예천체육인들을 비롯한 군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성원이 이번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힘이 되었다ꡓ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한편 문형철 감독은 조만간 올림픽 이후로 미뤄뒀던 2차 항암치료를 받을 예정이다.(권오근 編輯局長 醴泉新聞 2008년 09월 03일 03:38:42)
문형철(문형철 洋弓監督 第14回 코카콜라體育大賞 優秀指導者賞 受賞) [記事] : 예천군청 양궁단 문형철 감독이 제14회 코카콜라 체육대상 우수지도자상 대상자로 선정되어 2009년 2월 17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수상하게 되었다. 한국코카콜라가 스포츠조선과 함께 한국 스포츠 발전 및 아마추어 스포츠 육성을 위해 시상하는 코카콜라 체육대상 우수지도자상에 뽑힌 문형철 감독은 예천군청 양궁감독으로 많은 국가대표 선수를 배출한 우수 조련사로 정평이 나 있는 세계적인 양궁감독이다. 특히 지난 2008 베이징 올림픽시 국가대표 양궁감독을 맡아 여자양궁을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 동메달을 획득하는 수훈을 세운 우수지도자로 인정을 받아 금번 제14회 코카콜라 체육대상 우수지도자로 선정이 되었다. 이날 시상식에서는 최우수선수상, 우수선수상, 신인상 등 8개 부문에 걸쳐 총 11명이 수상한다.(황성한 記者 醴泉인터넷放送 2009-02-12 오전 10:47:48)
문형철(코카콜라 體育大賞 이모저모) [記事] : 우수지도자상을 받은 문형철 예천군청 감독이 베이징올림픽 때보다 훨씬 밝아진 안색으로 눈길을 끌었다. 갑상샘암 판정을 받고도 베이징올림픽 여자 양궁 단체전 금메달을 따낸 문 감독은 "올림픽 때는 상태가 나빴지만, 이제 치료는 끝났고 관리만 하면 되는 단계"라고 말했다. "치료를 할 때는 음식을 조절해야 했지만 이제는 아니니까 행사장 음식을 마음껏 즐기겠다"고 웃기도.(스포츠朝鮮 2009-02-17 18:17)
문형철(문형철, 大韓民國體育賞 指導賞 受賞者 選定) [記事] : ‘피겨여왕’ 김연아(19·고려대)가 제47회 대한민국체육상 경기분야 수상자로 선정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09년 10월 14일 김연아를 비롯한 7개 분야 수상자를 발표했다. 김연아는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여자 싱글 사상 최초로 200점(207.71)을 돌파, 세계여자 피겨 스케이트사에 한 획을 긋는 등 한국 피겨 스케이트 발전에 큰 업적을 세운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의환 교수(용인대 유도학과)는 277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해 스포츠발전에 연구상을 수상했다. 문형철 예천군청 양궁팀 감독은 지도상 수상자로 뽑혔다. 극복분야에서는 정금종 서울시 장애인체육회 사무처장, 특수체육상에는 사회복지법인 무궁화동산, 진흥상에는 강광 정읍시장, 공로상에는 김영만 전주비전대학 총장이 각각 선정됐다.(京鄕新聞 2009-10-15)
문형철과 김시한(醴泉郡廳 문형철 監督, 김시한 慶北洋弓協會 競技理事 世界洋弓大會 任員參與) [記事] : 경북양궁협회 문형철 전무이사(예천군청 양궁감독)와 김시한 경기이사는 2009년 9월 1일~9일(9일간)까지 울산 문수국제양궁경기장에서 개최되는 제45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 경기임원으로 참여하기 위해 2009년 8월 25일 울산 현지로 떠났다. 제45회 세계양궁경기대회에는 70여 개국에서 1천여 명의 임원 및 선수들이 참가하는 세계적인 양궁대회로 4차 양궁 월드컵대회에서 3관왕을 차지한 예천군청 소속 윤옥희 선수가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선전이 기대되고 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08-25 오전 8:4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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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석 [記事] : 2006년 10월 30일 예천진호국제양궁장에서 사전경기로 열린 제43회 경북학생체육대회 양궁에서 박흥석(예천중 2)이 남중부 50m더블라운드에서 658점으로 종전기록을 4점 경신했다.(張炳昌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2006-11-08 오후 6: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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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면 우곡리 출신 박흥로, 29일 방송기자연합회장 선임...축하합니다.
박흥로(박흥로 SBS 部長 放送記者聯合會長 選任) [記事] :
하리면 송월리 박영만(74·전 재경하리면민회장·하리면 우곡리 출생) 씨의 차남 SBS 보도국 부장 박흥로(48) 씨가 2010년 3월 29일 방송기자연합회 신임회장으로 선임됐다.
박흥로 신임회장은 수락연설에서 “외연 확대와 내실 강화를 통해 방송기자들의 선도단체로 연합회의 위상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SBS 보도국 8시뉴스 담당 부장으로 재직 중인 박 신임회장은 중앙일간지 출신 첫 방송기자연합회장으로 SBS 보도제작 2부장, 기획취재부장, 편집2부장 등을 지냈다.
임기는 2010년 4월 1일부터 2011년 3월말까지 1년간이며, 전임으로 활동하게 된다.
12개 방송사 기자협회 소속 2천여 명의 기자들이 활동 중인 방송기자연합회는 한국방송학회와 공동으로 ‘이달의 방송기자상’을 시상하고 있으며, 방송관련 세미나와 토론회를 주최하는 등 방송발전과 방송기자들의 권익 향상에 이바지하고 있다.
(醴泉新聞 20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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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김성남, 윤옥희, 송창엽, 양궁 전국대회 각 3위...축하합니다.
김성남, 윤옥희, 송창엽(김성남, 윤옥희 選手 30m 3位, 송창엽 選手 50m 3位) [記事] :
2010년 3월 30일 예천읍 청복리 예천진호국제양궁장에서 7일 동안 열린 제44회 전국남녀양궁종별선수권대회가 막을 내렸다.
이번 대회에서는 예천군청 김성남, 윤옥희 선수가 각각 30m에서 3위를 차지했으며, 예천중 송창엽 선수가 50m에서 3위를 차지했다.
이어 30일부터 1일까지 3일 동안 열린 제21회 전국남녀초등학교 양궁대회에서 예천초등 양희우 선수가 35m 1위, 30m 3위 25m 3위로 개인종합 2위를 차지해 양궁의 고장 예천의 희망을 밝혔다.
(醴泉新聞 20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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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598
한맥CC & 노블리아(2分期 首都圈 分讓市場 : 慶北 醴泉 한맥 CC `노블리아 골프빌리지`) [記事] :
한맥개발이 경북 예천에 2009년 개장한 ''''한맥CC'''' 내에 건설 중인 250채 규모의 고급 골프빌리지 ''''노블리아 골프빌리지''''를 분양하고 있다.
주택 크기는 70~531㎡형으로 구성됐다. 최대 6명까지 공동구매도 가능하다.
일시불이면 10%를 깎아주고, 잔금 40%를 대출처리하면 최소 실투자금이 3000만 원 선이다.
중앙고속도로 예천IC가 2㎞ 거리에 있고, 수도권에서 차로 2시간 정도 걸린다.
입주자는 주중·주말 구분 없이 그린피 3만원에 즐길 수 있다.
동반 2명은 50%를 할인해 준다. 또 골프장 내 부대시설 이용도 가능하다.
단지 앞에는 낙동강 상류 내성천에 강수욕장과 수상스포츠 시설이 들어서는 등 다양한 부대시설이 추가될 예정이다.
(韓國經濟 2010-04-08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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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20世紀 今週의 小史 ; 金珍浩 洋弓史上 첫 世界 制覇 快擧) [記事] : 1979년 7월 19일 제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가 열린 베를린 마이펠트 그라운드. 세계대회에 첫 출전한 한국선수단에는 18세의 앳된 소녀 김진호(예천여고 3년)가 있었다. 간간이 비바람이 몰아친 이날 김진호는 여자 60m 더블라운드에서 643점을 쏴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웠다. 한국 기록경기사상 첫 세계 제패였다. 김진호는 이튿날 30m와 50m에서도 우승한 데 이어 개인종합과 단체종합도 석권해 여자부문에 걸린 6개의 금메달 중 5개를 휩쓸었다. 외신은 한국양궁의 세계 제패를 다투어 전했다. 국내 언론도,『손기정이 월계관을 쓴 곳에서 43년 만에 태극기가 펄럭였다』며,『국궁에 눌려 빛을 못본 양궁에 투자하면 올림픽 금메달도 가능하다』고 흥분했다. 김진호의 세계 제패 이후 한국 여자양궁은 84년 서향순, 88년 김수녕, 92년 조윤정, 96년 김경욱이 연이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며 20년째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다. 김진호는 현재 한국체대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이한수 記者 朝鮮日報 1999-07-24)
김진호(''''洋弓韓國'''' 幕올린 1世代) [記事] : 지금의 한국 여자양궁은 명실공히 세계 최강이다. 그러나 79년 7월 예천여고 3년생인 김진호(당시 18세)가 제30회 베를린세계선수권서 금메달을 따기까지 한국양궁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62년 국내에 양궁이 처음 도입된 지 꼭 17년만의 세계 정상. 세계스포츠사에 이런 이변은 없었다. 그 것도 단체, 개인 등 6개 부문 중 5개 부문을 석권하며 단숨에 세계 정상에 올라선 김진호의 쾌거는 그야말로 전국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종합우승 소식이 전해진 경북 예천 김진호의 집에는 주민들이 몰려와 마치 잔칫집 같았다. 특히 김진호가 첫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정상을 차지했다는 것은 더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것도 양궁의 역사가 짧은 한국에서 변변한 시설도 갖추지 못한 훈련 시설의 핸디캡을 딛고 이룬 쾌거여서 국민의 기쁨은 더 컸다. 아무도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김진호는 이미「큰 일을 저지를」싹이었다. 언니를 따라 예천여중 2년 때부터 활을 잡은 그는 예천여고 1년인 77년 광주체전에서 개인우승을 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혜성처럼 등장한 김진호는 이후 77년 말 대표선수로 발탁돼 승승장구한다. 78년 방콕아시안게임 여자개인전서 우승컵을 차지하며 한국양궁사상 첫 국제대회 우승을 이루고 이듬해 세계대회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활을 잡기 시작한 지 불과 5년만에「양궁여왕」의 자리에 등극한 것이다. 김진호의 세계 정복에는 다소의 행운도 있었다. 인종 차별, 정치 문제로 소련, 폴란드 등 동구의 양궁 강국들이 무더기로 출전을 보이코트, 당시 세계 정상권이던 루스타모바, 부투조바, 코사베리제(이상 구 소련)와 세계최고기록 보유자 빌레즈토(폴란드) 등이 불참한 것이다. 하지만 김진호는 기록으로 세계 정상의 실력을 확인시켰다. 60㎙더블라운드에서 빌레즈토의 당시 세계최고기록을 무려 13점 경신한 세계신기록을 세운 것. 김진호는 이후 82년 세계선수권에서 다시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김진호의 시대는 84년 LA올림픽을 계기로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광주여고 3년생이던 서향순에게 올림픽 금메달을 내준 채 3위로 밀려났다. 하지만 김진호가 세계 정상의 물꼬를 트지 않았다면 서향순의 등장은 더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서향순 이후 88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양궁천재」 김수녕,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우승자인 조윤정, 96애틀랜타올림픽 우승을 차지한 김경욱, 그리고 1999년 세계선수권 우승자인 이은경까지…. 한국은 20년 간 부동의 최강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의 양궁 최강에는 바로 김진호라는「신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재 한국체육대 강사로 변신한 김진호는 이제 양궁코치로도 활약하며「제2의 김진호」발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박원식 記者 韓國日報 1999-12-17)
김진호(萬物相) [記事] : 한국인들의 활솜씨는 어쩌면 그렇게도 좋을까. 시드니올림픽의 초반 부진을 일거에 쓸어버린 남․북한 낭자들의 양궁 솜씨는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제 시드니올림픽 홈부시베이 올림픽파크 양궁장에서 열린 여자 개인전 4강에 오른 선수는 한국 선수 3명, 북한 선수 1명. 모두 우리의 낭자들이었다. ▶한국 양궁의 역사는 아주 짧다. 국내에 양궁이 도입된 것은 1962년, 아직 50년도 채 안 된 미천한 역사다. 그러니ꡐ양궁 신동ꡑ김진호가 1979년 제30회 베를린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따기까지 양궁은 비인기의 그늘에서 17년을 묻혀있어야 했다. 혜성처럼 나타난 김진호로 인해 비로소 국민들은 양궁을 알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 양궁의 역사는 여고생들이 개척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진호가 세계선수권을 차지했을 때 그녀는 예천여고 3년생이었다. 1984년 LA올림픽에서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딴 서향순은 광주여고 3년생, 김수녕은 청주여고 2년생 때였다. 어제 시드니에 첫 금메달의 태극기를 올린 윤미진도 경기체고 2년생이다. 우리의 여고생들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것이다. ▶한 텔레비전 해설자는,ꡒ우리는 동이족으로 원래 활을 잘 쐈다ꡓ고 흥분했다. 동이(東夷)는 옛날 중국인들이 그들의 동쪽에 있던 종족들을 업신여겨 부른ꡐ동쪽의 오랑캐ꡑ라는 뜻이다. 중화(中華)를 자처하는 중국 지배자들은 방위에 따라 남만(南蠻) 북적(北狄) 서융(西戎)하며 미개한 종족들이라고 얕잡아 봤다. ▶그러나ꡐ이(夷)ꡑ를 풀어보면ꡐ큰 대(大), 활 궁(弓)ꡑ의 결합으로ꡐ큰 활ꡑ을 의미한다. 까닭에ꡐ동이ꡑ는ꡐ활을 잘 쏘는 민족ꡑ이 된다. 동이에 얼마나 괴롭힘을 당하고 놀랐으면 중국인들이 얕잡아보려고 하면서도 그 재주를 글자에 옮긴 셈이다. 고구려 벽화에 잘 나타나 있듯 우리는 말을 타고 호랑이를 활로 잡던 민족이다. 이왕 금(金) 본 김에 오늘 남자 궁사들도 쾌거를 이뤘으면 좋겠다.(朝鮮日報 2000-09-20)
김진호(洋弓스타 金珍浩 博士帽) [記事] : 한국 여자 양궁을 처음 세계 정상으로 올려놓았던 김진호(40․한체대 조교수) 씨가 최근 명지대 대학원에서ꡐ훈련 조건과 경기 조건간의 일치도에 따른 경기 수행 비교 연구ꡑ논문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땄다. 김 교수는 예천여고 3학년이던 79년 독일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80년대 중반까지 세계 무대를 석권한 명궁. 은퇴 후 95년부터 한체대 강단에 섰다.(朝鮮日報 2001-02-28)
김진호 [記事] : 양궁 선수로서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양궁을 세계 정상으로 올려놓았다. 75년 예천여중 2학년 때 양궁 입문, 77년 제58회 전국체전 여고부 개인전에서 대회 타이로 1위, 78년 8월 국가대표 상비군 평가대회에서 60. 70m 더블라운드에서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작성, 78년 방콕아시안게임 거리별 전 종목 우승으로 5관왕, 79년 예천여고 3학년생으로 독일 제30회 베를린세계선수권대회에서 5관왕을 차지했는데, 첫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단숨에 정상에 오른 쾌거는 올림픽 무대를 휩쓴 한국 여자양궁의 출발점이 되었다. 80년 7월 제1회 아시아오세아니아주 선수권대회 70m더블에서 공인세계신기록을 수립하여 5관왕, 83년 롬비치세계선수권대회 5관왕, 84년 LA올림픽에서 아쉬운 동메달, 86년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을 차지한 것으로 국가대표 선수생활에서 은퇴, 활을 놓은 뒤 86년 한체대 대학원 체육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따고, 97년 한체대 경기지도과 조교수로 강단에 섰다. 99년 전국제전 서울시선수단 임원이다. 2001년 2월 21일 명지대 대학원 체육학과 박사 학위식에서 ''''양궁 선수의 훈련 조건과 경기 조건간의 일치도에 따른 경기 수행 비교 연구''''(지도교수 신호주)로 이학 박사모를 썼다. 여자양궁박사 1호가 되었다. 한체대 코치로 양궁팀을 이끌고 있는 김 교수는 여성 양궁인 중 박사 지도자 1호이다. 코치ㆍ주부ㆍ교수 등 1인 3역의 틈을 쪼개 박사 과정을 마쳤다.(每日經濟 2001.2.27 김은희 記者, 인터넷 sportsmuseum 2001)
김진호(金珍浩) : "세계양궁선수권 대회에서 5관왕을 차지했던 양궁의 여왕" 김진호는 1961년 12월 1일 경북 예천군 예천읍에서 아버지 김종국과 어머니 김심분 사이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예천동부초등학교, 예천여자중학교, 예천여자고등학교를 거쳐 한국체육대학을 졸업했다. 예천여중에 재학할 당시 국궁의 명산지이며 많은 궁사를 배출한 이 지방에 활을 통해 옛 명성을 되찾기라도 하려는 듯 양궁바람이 불었다. 75년 우연히 목격한 활쏘는 모습이 멋져 보여 자신도 활을 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고, 언니의 권유로 양궁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입문 1년만인 중학교 3학년 때 전국체전 여중부 단체우승을 차지하며 천부적인 자질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예천여고 1학년 때인 1977년 58회 전국체전 양궁여자부 개인전에서 우승하였으며 2학년 때는 한국대표로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하여 여자 개인전에서 우승하여 국제대회 첫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1979년 제31회 서베를린 올림픽스타디움에서 개최된 세계양궁선수권대회와 1983년 제33회 로스엔젤레스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는 5관왕을 차지하여 양궁의 여왕으로 군림하면서 한국 양궁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불행하게도 올림픽대회와는 인연이 없어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는 한국의 대회 불참으로 금메달을 획득할 찬스를 놓쳤고, 1984년 로스엔젤레스올림픽에서는 동메달에 그쳤다. 그러나 그녀는 더욱 노력을 경주하여 1985년 서울에서 열린 제33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 대비한 대표선수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하고 50m싱글과 싱글종합에서 그녀가 1979년 세웠던 세계 기록을 6년만에 경신하는 호조를 보이며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서훈으로는 1979년도 체육훈장 청룡장이 있으며, 1983년 백상체육대상 기록경기부문 수상, 동년 최우수선수상, 1984년 대한민국체육상 등이 있다. <자료출처 : 스포츠나인> (www.kasra.or.kr 2004)
김진호(第15回 正心賞 故鄕을빛낸사람 部門 受賞者 金珍浩(43歲, 龍仁市, 醴泉邑 出生) [記事] : 현재 한국체육대 교수이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양궁을 세계 정상으로 올려놓았으며, 예천을 양궁의 메카로 자리잡게 한 장본인이다. 1975년 예천여중 2학년 때 양궁을 시작해 197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 양궁부문에서 거리별 전종목 우승했다. 1979년 베를린 세계선구권대회에서 5관왕, 1982년 제1회 아시아오세아니아주선수권대회 5관왕, 1983년 세계대회 5관왕, 84년 LA올림필 2관왕,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4관왕 등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에 예천의 위상을 높인, 살아있으면서 전설로 남은 인물이기도 하다.(醴泉新聞 2004.9.23)
김진호(金珍浩(醴泉女高), 泰陵選手村에서 열린 國家代表 및 常備軍洋弓記錄評價會에서 3個의 非公認 世界新記錄 수립) [記事] : 날짜 : 1978년 08월 29일/ 정보제공기관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제공기관 : 국사편찬위원회(www.knowledge.go.kr 2006)
김진호(洋弓 神話의 始作.. 神弓 ''''김진호'''') [記事] : 우리나라 여자 양궁 무적신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한국양궁의 역사는 짧다. 우리나라 양궁이 국제대회에 출전했던게 불과 30년 전이다. 첫 출전은 1978년 열렸던 방콕 아시안게임. 이 대회에 김진호, 오영숙 선수 출전하였다. 한국 여자양궁의 박성현, 주현정, 윤옥희 선수가 2008년 8월 11일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 한국은 여자양궁 단체전에서 88 서울올림픽 이래 6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매번 올림픽 때가 되면 언론과 방송은 마치 양궁 특히 여자양궁은 당연히 금메달을 따와야 하는 종목인 것처럼 이야기하곤 하지만, 막상 경기를 지켜보게 되면 행여 실수가 있지는 않을지 또는 이변이 일어나지는 않을지 가슴 졸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KBS 양궁 해설위원 이은경(92 바르셀로나 여자 단체 금메달), SBS 양궁 해설위원 김경욱(96 애틀랜타 올림픽 2관왕), MBC 양궁 해설위원 김수녕 (88 서울 올림픽 2관왕) 씨도 모두 한결같이 말하는 것처럼 사실 여자양궁의 올림픽 금메달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닌 선수들의 피땀나는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 전부터 계획된 한국 양궁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와 육성 끝에 이루어진 결실인 것이니까. 아마 여자양궁 역대 올림픽 메달리스트 목록은 올림픽 때마다 방송에서 하도 읊어댔으니 웬만한 분들도 다들 외우다시피 할 것이다. 84년 LA의 서향순, 88년 서울의 김수녕, 92년 바르셀로나의 조윤정, 96년 애틀란타의 김경욱, 2000년 시드니의 윤미진, 2004년 아테네의 박성현. 그야말로 한국의 전통적인 강세 종목이며 가문의 대를 이어가 듯 쭉 이어온 지난 20년간의 여자 올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들이다. 하지만 요즘 10대, 20대는 물론 30대 초반만해도 김진호 선수에 대해선 잘 모를 것이다. 지난 30년 세계 최강의 자리를 우뚝 지켜온 한국 여자양궁이지만, 바로 그 양궁 금빛신화의 시초는 김진호 선수였다. 올림픽에서 양궁이 첫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1900년 제2회 파리 올림픽. 하지만 당시 유럽 각국 마다 양궁 시합방식이 달랐기에 이에 대한 통합문제로 우여곡절을 거듭하다 1920년 제7회 앤트워프 대회를 마지막으로 양궁은 정식종목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52년만인 1972년 뭔헨올림픽 때 양궁은 현대적인 경기방식의 정식종목으로 부활하였다. 한편 우리나라 양궁의 역사는 좀 복잡하다. 우선 우리나라엔 전통적인 활쏘기 대회인 ꡐ 궁도 ꡑ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의 전통궁도와 서양의 양궁은 기술이나 경기방식에서 많은 차이를 갖고 있다. 이 문제 때문에 쭉 혼선을 빚어오다가 1969년 대한궁도협회에 양궁 이사직이 신설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여기까지 이르게 된 데에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9년 서울 중앙시장 부근 한 고물수집상에서 양궁을 발견한 석봉근 씨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석봉근 씨는 한국 양궁의 산파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1971년 양궁은 소년체전에서 여 고등부 종목으로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되고,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78년 한국의 첫 여궁사 신화가 탄생한다. 1961년 예천 출생으로 중학교 2학년 때인 75년에 첫 화살을 잡은 김진호 선수가 바로 그녀이다. 77년 전국체전에서 1위를 기록한 김진호 선수는 7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 출전 5관왕이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9년 제30회 베를린 국제 양궁 선수권대회에서 또다시 5관왕을 거머쥠으로써 한국의 여고생 신궁(神弓) 김진호 신화가 탄생한다. 79년 김진호의 양궁 신화는 한국 체육계를 온통 들썩이게 만들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에서 양정모 선수가 건국이래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3년 후의 일이니까. 하지만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서방국가들이 줄줄이 불참을 선언하고 우리나라 역시 불참했기 때문에, 올림픽 금빛신화 탄생시기는 아쉽게도 4년 뒤로 미루어야만 했다. 비록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양정모에 이은 여자양궁 김진호 올림픽 금메달 신화 탄생 시나리오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70년대 후반 그렇게 혜성같이 나타난 여고생 궁사 김진호는 80년대 초반까지 매번 국제대회를 싹쓸이하다시피 하며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당대 최고의 신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나 84년 LA 올림픽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금메달리스트이자 여고생 신궁 신화의 영예는 당시 17세였던 서향순에게 돌아가게 된다. 한편 김진호는 자신에게 쏠린 언론과 국민의 지나친 관심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을까. LA 올림픽에서 김진호는 동메달에 그치고 86 아시안게임 3관왕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84년 LA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서향순, 그리고 88 서울올림픽 2관왕 김수녕이 모두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관계로 여고생 신궁 혹은 여고생 신화란 별칭이 따라다니기도 했지만, 바로 그 여고생 신화 탄생의 원조는 79년 세계선수권대회 때 열여덟살 나이로 5관왕을 차지한 김진호 선수였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는 역시 윤미진 선수가 여고생 나이로 2관왕을 차지하여 바로 그 여고생 신궁 탄생 신화의 계보를 이어갔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엔 선수 이름으로 붙여진 양궁장이 세 개 있다. 광주에 있는 ꡐ 서향순 양궁장 ꡑ, 충북 청주에 있는 ꡐ 김수녕 양궁장 ꡑ 그리고 경북 예천의 ꡐ 김진호 양궁장 ꡑ이다. 여자 개인전은 84년 이래 2004년까지 6차례 그리고 단체전은 88년 이래 이번 베이징 올림픽까지 6차례 금메달 신화를 이어가고 있지만, 아쉽게도 올림픽 금메달 신화엔 이름을 올리지 못한 김진호 선수.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올림픽 효녀종목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여자양궁. 그 신화탄생의 원조는 79년 세계선수권 대회 5관왕 김진호 선수 였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바로 그 김진호가 신화탄생의 시초가 되어 지난 30년 세계 최강으로 자리매김해온 한국 여자양궁이기 때문이다.(인터넷뉴스 신문고 2008/08/12 [07:20])
김진호 선수의 전적(金珍浩選手의 戰績) [體育] :(省略 :<예천군지 1988> 참조할 것)
김진호(世界 制覇한 ''''少女神弓의 元祖'''' : "原動力은 韓國人 特有의 손感覺․集中力이죠") [記事] : 세계를 주름 잡는 한국양궁에서 소녀 신궁들은 언제나 혜성같이 등장했다. 소녀 신궁의 무서운 힘은 한국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까지 6회 연속 단체전 금메달이라는 위업으로 이어졌다. 소녀 신궁 계보의 시초가 바로 세계선수권 첫 우승자인 김진호다. 경북 예천여고 2년 때 78년 방콕아시아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그는 이듬해 베를린 세계선수권에서 5관왕에 올라 세계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는 고교 2년생 서향순이 등장해 소녀 신궁 계보를 이었다. 이후 김수녕이 87년 16세의 나이에 최연소 태극마크를 달아 눈길을 모았다. 그리고 김수녕은 88년 서울올림픽에서 개인과 단체전 2관왕을 차지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윤미진이 등장했다. 경기체고 2학년이었던 윤미진은 2000시드니올림픽에서 선배 김수녕을 꺾고 금사냥에 성공했다. 2005년 마드리드 세계선수권에선 고교 1년생 이특영이 단체전 금메달과 개인전 은메달의 영광을 안으며 세계를 놀라게 했고, 2009년 대표팀 선발전에서는 고교 2년생인 곽예지가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바늘구멍''''에 통과하며 태극마크를 달았다. ''''소녀 신궁의 원조'''' 김진호는 연이은 10대 신궁 출현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초등학교부터 활을 잡기 때문에 기량이 특출난 선수는 고등학생 때 두각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아무래도 한국 양궁이 그동안 숱한 국제대회를 통해 쌓아온 노하우와 특유의 손감각과 집중력 등도 신궁탄생과 세계제패의 원동력"이라고 덧붙였다.(김두용 記者 인터넷韓國日報 2009/06/03 22:2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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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철(文亨哲) : 1958- , 1977년 3월 삼익악기 양궁선수단 입단, 1982년 1월 서울우유양궁선수단 입단, 1984년부터 예천군청 양궁선수단 코치 부임, 1989년 2월 국가대표 코치 부임, 1990년 2월 체육포장 수상, 1990년부터 한국실업양궁연맹이사, 1991년부터 경북양궁협회 전무이사, 1997년부터 대한양궁협회 기록이사이다. 2000년 2월 대한양궁협회 지도상 수상, 동년 11월 경북지사 표창 수상(2회), 2001년 2월 대한체육회 지도상 수상이다.(인터넷 洋弓의 메카 醴泉 2001)
문형철(洋弓 國家代表 코칭스태프 交替) [記事] : 대한양궁협회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대비해 국가대표 코칭스태프를 전면 교체했다. 남자 감독에는 1994년부터 2004년까지 국가대표 코치를 맡았던 장영술 국군체육부대 감독이 선임됐고, 남자 코치는 전인수 울산 남구청 감독이 뽑혔다. 여자 감독은 2004년부터 1년간 국가대표 남자 감독을 역임했던 문형철 예천군청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고, 여자 코치는 구자청 현대모비스 감독이 맡았다. 협회는 "과거 지도자 경력 및 국내외 대회를 통해 검증받은 코칭스태프를 선임, 베이징올림픽에 대비해 의욕적인 훈련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라고 밝혔다.(이동경 記者 聯合뉴스 2007년 1월 19일 (금) 11:38)
문형철(新任 문형철 國家代表 女子洋弓選手團 監督) [記事] : 예천군청 양궁선수단 문형철(50) 감독이 2007년 1월 19일자로 국가대표 여자양궁선수단 감독으로 발탁됐다. 오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까지 국가대표 여자양궁선수단을 지도한다. 문형철 감독은 전북 부안 출신으로 부안농고를 졸업했으며, 지난 77년 삼익악기 선수로 입단, 84년 예천군청 양궁선수단 코치로 부임했다. 89년, 2001년도 국가대표 코치, 2004년 국가대표 남자양궁선수단 감독을 역임했으며, 대한양궁협회 기록이사, 경북양궁협회 전무이사를 맡고 있다. 또한 그동안 양궁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90년 체육포상, 대한양궁협회 지도자상, 경북지사 표창, 대한체육회 지도자상, 2006년 경북최고체육상 지도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가족으로는 부인 전미연(44) 씨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고있다.(醴泉新聞 2007년 01월 25일 12:03:30)
문형철(ꡒ選手들 흔들릴라…ꡓ 癌 治療 미룬 女洋弓 문형철 監督) [記事] : ꡒ무거운 짐 하나를 덜었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개인전이 남아 있으니 축배는 나중에 들겠다.ꡓ 베이징 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에서 한국의 6연속 우승을 이끈 문형철(50) 감독. 그는 2008년 8월 10일 끝난 중국과의 결승에서 승리를 거둔 뒤 주현정(26), 윤옥희(23), 박성현(25)과 차례로 포옹하며 환하게 웃었다. 얼마 만에 지어보는 미소였을까. 2007년 1월 올림픽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그는 ꡐ여자 양궁은 금메달 보증수표ꡑ라는 주위의 기대가 워낙 컸기에 꼭 해내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렸다. 만약 실패할 경우 돌아올 따가운 시선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런 그에게 2007년 12월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태릉선수촌에서 신체검사를 받은 뒤 ꡐ갑상샘암 3기ꡑ 판정을 받았다. 평소 담배도 거의 피우지 않고 건강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기에 ꡒ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ꡓ라며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다. 다행히 잘 치료하면 괜찮아질 것이란 소견을 듣고 2008년 1월 서울 강남의 한 종합병원에서 수술을 한 뒤 몇 차례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병원을 오가면서도 문 감독의 머릿속은 온통 올림픽을 향해 있었다. ꡒ한국 양궁의 금메달 행진을 계승해야 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남은 항암 치료는 올림픽이 끝난 뒤로 미뤘습니다.ꡓ 매일 호르몬 성분의 약과 건강식품을 복용하고 있는 문 감독은 주위에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올림픽 준비에만 매달려 왔다. 그는 동료 지도자, 대한양궁협회와의 협력 속에 베이징 양궁장과 흡사하게 조성한 경기장에서의 모의 테스트, 소음과 미디어 대비 훈련 등을 통해 실전 감각을 끌어올렸다. 팀워크가 생명인 단체전에서 선수들이 최상의 호흡을 맞추는 데도 공을 들였다. 올림픽을 앞두고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몰려들 때는 특정 선수에게만 집중돼 다른 선수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해 모든 선수가 번갈아 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단체전에서 세 선수의 발사 순서도 여러 차례 시뮬레이션을 거쳐 선수들의 성격과 기량에 맞춘 최적의 조합을 마련했다. 당초 경험이 많은 박성현을 1번에, 주현정을 3번에 배치하기도 했으나 4월 월드컵에서 중국에 지면서 둘을 맞바꿔 효과를 봤다. 슈팅 타임이 빠른 주현정은 1번으로 나서 다른 선수들이 여유 있게 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고 마지막 주자로 나선 박성현은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으로 승리를 설거지했다. 2008년 7월 ꡒ올림픽이 다가올수록 스트레스 강도가 심해진다. 잠도 잘 안 온다ꡓ며 말 못할 고충을 털어놓은 그는 오히려 어린 선수들 앞에서는 ꡒ우리는 세계 최강이다. 평소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즐기면서 준비하자ꡓ고 다독거렸다.
영광스러운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며 지도자 인생의 화려한 꽃을 피웠지만 가족에게는 미안할 때가 많다. 전북 부안군이 고향인 문 감독은 부안농림고를 거쳐 삼익악기, 서울우유 등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 이제는 ꡐ제2의 고향ꡑ이 된 경북 예천에서 1983년부터 지도자로 둥지를 틀었다. 예천군청팀을 이끌던 그는 군청 공무원이던 부인 전미연(46) 씨를 만나 1985년 영호남 커플로 결혼한 뒤 아직도 예천군청 관사에서 생활하며 소속팀 선수들과도 동고동락하고 있다. 선수 생활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1989년 처음 대표팀 코치가 된 뒤 지도자로서는 명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2녀 1남을 둔 문 감독의 생일은 국내외에서 양궁대회가 집중적으로 열리는 음력 9월이기에 집에서 미역국을 먹은 경우는 결혼 후 23년 동안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게 부인의 얘기. 대표팀 감독이 된 지난 20개월 동안 집에서 잠을 잔 시간은 한 달도 채 안된다고. 올림픽 단체전 금메달을 딴 뒤 집에 전화를 걸어 기쁨을 나눈 문 감독은 ꡒ가장으로서는 낙제점이지만 잘 이해해 줘 고맙다. 그 덕분에 이런 자리에 설 수 있었다ꡓ며 활짝 웃었다.(김종석 記者 東亞日報 2008-08-12)
문형철("金은 놓쳤지만 그래도 韓國 洋弓, 世界 最高!" : 문형철 洋弓 女子 國家代表 監督) [記事] : 문형철 양궁 여자 국가대표 감독. "비록 이번 올림픽에서 개인전 금메달을 놓쳤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한국 양궁이 세계 최고인 것은 분명합니다" 베이징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에서 한국의 6연속 우승을 이끈 문형철(50) 감독이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로 오랫만에 자신이 맡고 있는 예천군청을 찾아 개인전 금메달을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문 감독은 2007년 1월 ''''금메달을 따면 본전, 못 따면 역적''''이라는 양궁 여자 대표팀 감독을 맡고 동년 12월 올림픽을 앞두고 양궁 대표팀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일제히 받은 신체검사에서 갑상선 암 3기 판정을 받고 수술까지 받은 뒤, 매일 호르몬 성분의 약과 건강식품을 복용하면서도 주위에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를 믿고 대표팀의 지휘봉을 맡겨준 대한양궁협회와 오로지 올림픽 금메달을 따기 위한 일념 하나로 군부대 훈련, 번지점프 등을 말없이 수행해 준 양궁대표팀 윤옥희(23)나 박성현(25), 주현정(26) 선수에게 실망을 줄 수 없다는 생각에 자신의 치료는 올림픽 이후로 미뤘다. 결국 2008년 8월 10일 베이징올림픽 그린양궁장에서 열린 양궁 여자 단체전 중국과의 결승에서 승리를 거둔 뒤 주현정(26), 윤옥희(23), 박성현(25) 선수들을 포옹하며 그동안의 고통을 말끔히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전북 부안군이 고향인 문 감독은 부안농림고 1학년때 처음 활을 잡고 양궁 선수 생활을 시작한 뒤, 삼익악기, 서울우유 등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 1980년 수원 연무초등학교에서 처음으로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 이제는 ''''제2의 고향''''이 된 예천에서 1984년 1월부터 지금가지 25년째 예천군청 양궁팀을 맡으며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특히 첫 양궁 지도자 생활을 했던 수원 연무초등학교에서 전 국가대표 이은경 오교문 선수를 지도하고 예천군청 양궁팀을 맡아서도 김수녕 호진수는 물론 장용호와 윤옥희 선수까지 수많은 국가대표 선수를 배출하고 시드니 올림픽때부터 이번 베이징까지 김수녕과 장용호 윤옥희 선수 등 연속 3회 자신이 맡고있던 팀 소속 선수를 올림픽에 출전시켜 금메달을 따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예천군청팀 감독 생활을 하면서 군청 공무원이던 부인 전미연(46) 씨를 만나 1985년 영호남 커플로 결혼한 뒤 2녀 1남을 둔 문 감독은 "항상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며 "그래도 자식들이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해 고맙기만 하다"고 말했다.(張炳喆 記者 慶北日報 2008-08-29)
문형철(`올림픽 女子 洋弓 團體戰 6連覇 神話 이끌어'''' : 女子 洋弓 國家代表팀 문형철(醴泉郡廳) 監督, **癌 治療 미루고 끝까지 指揮棒 잡아, **醴泉은 第2의 故鄕 `郡民들 聲援에 感謝'''') [記事] : 문형철(51․예천군청) 여자 양궁 국가대표팀 감독. 그는 생명이 걸린 암 치료를 미루고 베이징올림픽에 출전, 여자 단체전 6연패 신화를 이끌어 국민들의 가슴에 뭉클한 감동을 안겼다. 문 감독은 2007년 12월 올림픽을 앞두고 양궁 대표팀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일제히 받은 신체검사에서 갑상선암 선고를 받았다. 문 감독은 치료의 최대 적이 스트레스와 과로란 걸 알면서도 지휘봉을 놓지 않았다. 2008년 1월 수술을 받고 4월엔 1차 항암치료도 받았다. 나머지 방사선 동위원소 치료는 올림픽 이후로 미뤘다. 문형철 감독은 이번 올림픽 양궁경기에서 중국 응원단의 방해가 아주 교묘했다고 떠올렸다. ꡒ화살을 쏘기 1~2초 전 갑자기 호루라기를 부는 것으로 보아 선수 출신 관람객이 관중석에 섞여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정확한 타이밍을 맞춰 방해를 할 수 없지요.ꡓ 문 감독은 단체전, 개인전 모두 금메달을 목표로 완벽하게 준비했지만 중국의 벽을 넘지 못하고 개인전에서 은메달, 동메달에 그친 게 조금 아쉽다고 말했다. 문형철 감독이 예천과 인연을 맺은 건 1984년. 이병탁(현 경북양궁협회장) 회장의 주선으로 예천군청 실업팀 코치로 부임했다. 그때 당시엔 2~3년 정도 경험을 쌓고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병탁 회장을 비롯한 예천체육인들이 보여준 끈끈한 정과 도움이 문 감독의 발목을 잡았다. 여기에다 1985년 예천군청에 근무하던 전미연(48) 씨를 만나 결혼, 단란한 가정을 꾸리면서 예천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선수들에게 실력 못잖게 인성을 강조한다. 인간 됨됨이를 갖춘 선수라야 생명력이 길고 은퇴 후 사회생활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ꡒ올림픽에 3회 연속으로 출전, 금메달을 딴 건 예천군청팀 선수들뿐입니다. 우리나라 양궁의 중심 아니, 세계 양궁의 중심에 예천이 우뚝 서 있는 셈이지요.ꡓ 문 감독은 ꡐ이번 베이징올림픽에서 거둔 좋은 성적을 발판으로 다른 지역 팀으로 옮기는 게 아니냐ꡑ는 소문에 대해 ꡒ절대 그런 일 없다ꡓ며 한 마디로 일축했다. ꡒ지금보다 몇 배 더 좋은 조건의 제의가 오더라도 제2의 고향인 예천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예천에 와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도움을 받았고…, 지금의 저를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으니까요.ꡓ 문 감독은 ꡒ예천체육인들을 비롯한 군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성원이 이번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힘이 되었다ꡓ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한편 문형철 감독은 조만간 올림픽 이후로 미뤄뒀던 2차 항암치료를 받을 예정이다.(권오근 編輯局長 醴泉新聞 2008년 09월 03일 03:38:42)
문형철(문형철 洋弓監督 第14回 코카콜라體育大賞 優秀指導者賞 受賞) [記事] : 예천군청 양궁단 문형철 감독이 제14회 코카콜라 체육대상 우수지도자상 대상자로 선정되어 2009년 2월 17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수상하게 되었다. 한국코카콜라가 스포츠조선과 함께 한국 스포츠 발전 및 아마추어 스포츠 육성을 위해 시상하는 코카콜라 체육대상 우수지도자상에 뽑힌 문형철 감독은 예천군청 양궁감독으로 많은 국가대표 선수를 배출한 우수 조련사로 정평이 나 있는 세계적인 양궁감독이다. 특히 지난 2008 베이징 올림픽시 국가대표 양궁감독을 맡아 여자양궁을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 동메달을 획득하는 수훈을 세운 우수지도자로 인정을 받아 금번 제14회 코카콜라 체육대상 우수지도자로 선정이 되었다. 이날 시상식에서는 최우수선수상, 우수선수상, 신인상 등 8개 부문에 걸쳐 총 11명이 수상한다.(황성한 記者 醴泉인터넷放送 2009-02-12 오전 10:47:48)
문형철(코카콜라 體育大賞 이모저모) [記事] : 우수지도자상을 받은 문형철 예천군청 감독이 베이징올림픽 때보다 훨씬 밝아진 안색으로 눈길을 끌었다. 갑상샘암 판정을 받고도 베이징올림픽 여자 양궁 단체전 금메달을 따낸 문 감독은 "올림픽 때는 상태가 나빴지만, 이제 치료는 끝났고 관리만 하면 되는 단계"라고 말했다. "치료를 할 때는 음식을 조절해야 했지만 이제는 아니니까 행사장 음식을 마음껏 즐기겠다"고 웃기도.(스포츠朝鮮 2009-02-17 18:17)
문형철(문형철, 大韓民國體育賞 指導賞 受賞者 選定) [記事] : ‘피겨여왕’ 김연아(19·고려대)가 제47회 대한민국체육상 경기분야 수상자로 선정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09년 10월 14일 김연아를 비롯한 7개 분야 수상자를 발표했다. 김연아는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여자 싱글 사상 최초로 200점(207.71)을 돌파, 세계여자 피겨 스케이트사에 한 획을 긋는 등 한국 피겨 스케이트 발전에 큰 업적을 세운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의환 교수(용인대 유도학과)는 277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해 스포츠발전에 연구상을 수상했다. 문형철 예천군청 양궁팀 감독은 지도상 수상자로 뽑혔다. 극복분야에서는 정금종 서울시 장애인체육회 사무처장, 특수체육상에는 사회복지법인 무궁화동산, 진흥상에는 강광 정읍시장, 공로상에는 김영만 전주비전대학 총장이 각각 선정됐다.(京鄕新聞 2009-10-15)
문형철과 김시한(醴泉郡廳 문형철 監督, 김시한 慶北洋弓協會 競技理事 世界洋弓大會 任員參與) [記事] : 경북양궁협회 문형철 전무이사(예천군청 양궁감독)와 김시한 경기이사는 2009년 9월 1일~9일(9일간)까지 울산 문수국제양궁경기장에서 개최되는 제45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 경기임원으로 참여하기 위해 2009년 8월 25일 울산 현지로 떠났다. 제45회 세계양궁경기대회에는 70여 개국에서 1천여 명의 임원 및 선수들이 참가하는 세계적인 양궁대회로 4차 양궁 월드컵대회에서 3관왕을 차지한 예천군청 소속 윤옥희 선수가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선전이 기대되고 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08-25 오전 8:4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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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석 [記事] : 2006년 10월 30일 예천진호국제양궁장에서 사전경기로 열린 제43회 경북학생체육대회 양궁에서 박흥석(예천중 2)이 남중부 50m더블라운드에서 658점으로 종전기록을 4점 경신했다.(張炳昌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2006-11-08 오후 6: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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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면 우곡리 출신 박흥로, 29일 방송기자연합회장 선임...축하합니다.
박흥로(박흥로 SBS 部長 放送記者聯合會長 選任) [記事] :
하리면 송월리 박영만(74·전 재경하리면민회장·하리면 우곡리 출생) 씨의 차남 SBS 보도국 부장 박흥로(48) 씨가 2010년 3월 29일 방송기자연합회 신임회장으로 선임됐다.
박흥로 신임회장은 수락연설에서 “외연 확대와 내실 강화를 통해 방송기자들의 선도단체로 연합회의 위상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SBS 보도국 8시뉴스 담당 부장으로 재직 중인 박 신임회장은 중앙일간지 출신 첫 방송기자연합회장으로 SBS 보도제작 2부장, 기획취재부장, 편집2부장 등을 지냈다.
임기는 2010년 4월 1일부터 2011년 3월말까지 1년간이며, 전임으로 활동하게 된다.
12개 방송사 기자협회 소속 2천여 명의 기자들이 활동 중인 방송기자연합회는 한국방송학회와 공동으로 ‘이달의 방송기자상’을 시상하고 있으며, 방송관련 세미나와 토론회를 주최하는 등 방송발전과 방송기자들의 권익 향상에 이바지하고 있다.
(醴泉新聞 20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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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김성남, 윤옥희, 송창엽, 양궁 전국대회 각 3위...축하합니다.
김성남, 윤옥희, 송창엽(김성남, 윤옥희 選手 30m 3位, 송창엽 選手 50m 3位) [記事] :
2010년 3월 30일 예천읍 청복리 예천진호국제양궁장에서 7일 동안 열린 제44회 전국남녀양궁종별선수권대회가 막을 내렸다.
이번 대회에서는 예천군청 김성남, 윤옥희 선수가 각각 30m에서 3위를 차지했으며, 예천중 송창엽 선수가 50m에서 3위를 차지했다.
이어 30일부터 1일까지 3일 동안 열린 제21회 전국남녀초등학교 양궁대회에서 예천초등 양희우 선수가 35m 1위, 30m 3위 25m 3위로 개인종합 2위를 차지해 양궁의 고장 예천의 희망을 밝혔다.
(醴泉新聞 20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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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598
한맥CC & 노블리아(2分期 首都圈 分讓市場 : 慶北 醴泉 한맥 CC `노블리아 골프빌리지`) [記事] :
한맥개발이 경북 예천에 2009년 개장한 ''''한맥CC'''' 내에 건설 중인 250채 규모의 고급 골프빌리지 ''''노블리아 골프빌리지''''를 분양하고 있다.
주택 크기는 70~531㎡형으로 구성됐다. 최대 6명까지 공동구매도 가능하다.
일시불이면 10%를 깎아주고, 잔금 40%를 대출처리하면 최소 실투자금이 3000만 원 선이다.
중앙고속도로 예천IC가 2㎞ 거리에 있고, 수도권에서 차로 2시간 정도 걸린다.
입주자는 주중·주말 구분 없이 그린피 3만원에 즐길 수 있다.
동반 2명은 50%를 할인해 준다. 또 골프장 내 부대시설 이용도 가능하다.
단지 앞에는 낙동강 상류 내성천에 강수욕장과 수상스포츠 시설이 들어서는 등 다양한 부대시설이 추가될 예정이다.
(韓國經濟 2010-04-08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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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