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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170:예천체육52(祝유동복/예천방문601)
예천의 자랑(2170) : 醴泉體育史資料集(52)(附 예천 유동복, 18일 경북 궁도대회 3위...축하합니다/예천방문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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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궁공예(國弓工藝, 慶北 醴泉) [記事] : 단술 예(醴) 자, 샘 천(泉) 자를 쓰니 퍽 여성적이고 색향같은 기분이 드는 고장이다. 한 때 색향(色鄕)이라는 말도 들었다 하나 지금은 그렇지 않고 물맛이 단술같이 좋은 동네라 하면 맞을만큼 이 지방의 샘물이 좋다. 화살 공예가 김종국(金鍾國) 씨는, “활 만드는 데 쓰는 민어 부레풀은 좋은 물에 끓여서 녹여야 되는데, 예천 지방의 물이 가장 적당하므로 이 지방에 활이 성한 것 아닌지 모르겠어요”했다. 그 말도 그럴 듯 하나 과학적인 실험을 안해 봐서 모르겠고, 예천에 국궁 공예가가 7명이나 있는 것은 물보다는 오히려 애국심 내지는 애향심 때문일 것 같다. ‘우리의 이 기막힌 공예품을 꼭 계승하자‘하는 애정과 고집을 가진 사람이 이 고장에는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예천 사람들의 애향심은 이미 소문나 있다. 운동 경기 같은 걸 해도 악착같이 이겨놓고 보는 예천인들이다. 중국 사람이 자장면 팔러 왔다가 한 달도 못돼서 눈물 흘리며 돌아간다는 곳이다. 소문만 듣다가 실제 가보니 그 소문이 옳았다. 여러 사람들을 만났는데, 향토에 대한 열의가 한결같이 대단했다. 내 것을 지키고 내 것을 빛내려는 의지는 지금의 우리 국민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것인데, 예천에 와서 그 모범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하기 그지 없었다. 예천은 고려 중엽 패관문학(설화문학에서 패관문학으로 발전하고, 거기서 고대소설, 현대소설로 이어진다)의 효시였던 서하(西河) 임춘(林椿) 선생의 향리이고,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 등 명장을 천거했던 약포(藥圃) 정탁(鄭琢) 선생의 고향이다. 약포 선생은 정사에 공정 강직해서 당파를 초월했으며, 이순신, 김덕령 장군 등이 당파에 희생이 되어 목숨을 잃을 지경에 간곡히 상소해서 사면케 했고, 명량대첩을 이룰 기틀을 마련했다. 선생의 저서 <용사일기>는 임란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된다. 보문면(現 醴泉邑) 고평동에 선생의 유물전시관이 있고,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필자가 찾아가던 며칠 전에 도둑이 들어서 <용사일기> 등 선생의 유품을 훔쳐가 버렸었다. 선생의 영정 앞에 향을 피우고 참배를 했으나 못난 후대를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 한이 없었다. 아무리 돈에 눈이 뒤집히고 짐승의 심사를 가졌기로서니, 나라를 건지려고 불철주야 애쓰신 선생의 그 고귀한 유품을 도둑질할 생각을 품다니... ’돈교(錢敎)‘의 광신자들이 늘어가는 이 사회가 장차 어찌되려는지? 유교적 인생 교육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수신과 예절 교육이 아니면 이 시대의 중병을 치료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예천의 근대 문화를 개척한 인물로는 현 대창중고등학교를 설립한 벽천(碧泉) 김석희(金碩熙) 선생을 꼽는다. 선생은 갑신정변 무렵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학문을 깨쳤으며, 사업에도 능력을 발휘해 재산을 모았다. 3.1운동 직후 선생은 가산을 모두 던져 대창학원을 설립했다. 지금 예천을 빛내고 있는 인물들이 이 학교 출신이다. 지금까지 60년 간 예천이 정신적 지주의 구실을 해오는 대창은 벽천 선생의 아들인 김교용(金敎容) 선생이 교장으로 선친의 유업을 계승하고 있다. 민족 정기를 키우는 문화 사업에 전재산을 던지는 인걸이 있는가 하면, 위대한 조상의 유물을 훔쳐서 돈벌이 하려는 사람도 있다. 필자는 사흘 동안 예천에 머룰면서 우리 민족의 예지를 찾고 이어나가는 소중한 인물들을 여러 분 만나보았다. 조상의 슬기를 찾아 밝혀내서 후대들의 귀감으로 삼으려는 일에 열심인 정양수 선생, 고대 문화의 비밀을 찾아내는 일에 몰두하는 김상문 선생, 이 두 분의 품위 있는 언어 범백과 어진 성품에는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가난과 소외 속에서도 국궁을 만들면서 우수하고 예술적인 우리 민족 공예의 맥락을 이어온 권영록(權寧錄) 선생과 그 아들 오규(五奎) 씨, 국궁의 해외 보급에 힘쓴 명궁(5단) 권영학(權寧鶴) 씨, 이 분들을 만나 활 만드는 방법과 수법 등을 물어보았고, 우리의 활 국궁이 얼마나 우수하고 예술적인가를 알게 되었다. 활 공예가가 5명 더 있으나 다 만나보지 못해 유감이었다. 화살 공예가 김종국(金鍾國) 씨를 만나 화살의 종류와 이 것이 얼마나 정밀한 솜씨로 만들어지는가를 알게 되었고, 화살의 예술적 가치를 알게 되었다. 예천동부국민학교 교사인 강원희(姜元熙) 씨는 이 지방 민속 발굴에 공헌이 많은 인물, 통명농요와 청단놀음은 이미 인정을 받아서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발표를 했다. 그는 다시 ’홍소리‘라는 ’결혼행진곡‘을 발굴했고, 예천군에만 있는 ’그네노래‘를 찾아냈다. 애향심은 주체성에서 나온다. 따라서 예천을 자주 정신의 중심이라 하고 싶다.(徐東燻 新風土記 229 韓國日報 198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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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궁의 마을 예천(國弓의 마을 醴泉) [記事] : 아침 햇살을 등 뒤에 받으며 남산 무학정 활터로 행수(行首) 어른이 오른다. 간 밤에 해궁(解弓)을 마친 새 활의 시사(試射)를 할 참이다. 잿비 두루마기를 남색 전대(箭袋)로 질끈 동이고, 탕건과 갓을 단아하게 갖추어 쓴 채 흰 수염을 날리며 사석(射席)에 버티어 선 궁체(弓體)가 멋지다. 안팎이 뒤바뀌도록 얹힌 활체의 유연한 곡선에 예스런 멋이 배어 있고, 한 것 당겨진 시위를 떠난 화살은 창공을 가르며 잔솔 밭 너머에 새워진 과녁을 뚫는다. 이제 해궁이 제대로 되었음을 확인한 셈이다. 갓 몸푼 산모가 새 생명을 어르 듯 행수 어른은 정이 담뿍 담긴 손길로 새 활의 몸체를 쓸어 내린다. 이 이가 바로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된 국궁의 종가 권영록(權寧錄, 68)이다. [醴泉 땅에 名弓 난다] : 경상북도 예천 땅은 한 때 천석꾼 만석꾼이 많아서 ‘반 서울’이라 불렀고, ‘제2의 개성’으로 통했다. 예천을 이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는 이곳 사람들의 ‘안 지려는’ 기질이 한몫을 해왔다. 설사 예천 땅 안에서는 이름을 못냈더라도 서울에 가서는 기어코 이름 석 자를 드날린 인물도 여럿 있다. 골목마다 하나 꼴은 있는 슈퍼마켓이나 연쇄점, 간간이 눈에 띄는 수입 상품점, 한 집 건러 늘어선 음식점, 다방, 여관 따위의 접객업소는 대부분이 예천으로 물건 사러오는 객지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예천이 얼마나 물산이 풍부한 고장인가를 알 수 있다. 예천이 활의 고장으로 유명한 것도 이같이 물산이 풍부하여 일찍이 살림이 안정되니 자연 인심이 좋은데다가 풍류에 쉽게 접할 수 있는 ‘멋을 아는’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자고로 예천 땅에서는 있고없고 간에 일단 사내가 활을 쏜다 하면 수신제가(修身齊家)한 연후에라야 했으니 그렇지 않으면 일개 건달로 취급해 버렸다. 옛날에 궁시 제조창이 있던, 전통적으로 활과 친근한 고장인 탓으로 대대로 명궁장(名弓匠)과 명궁수(名弓手)를 배출해 왔는데, 비록 양궁 부분이긴 하지만 제30회 세계궁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쓴 예천여고의 김진호 선수도 그 하나이다. 태조 이성계가 소시 적에 퉁두란과 얼려 웬 처녀가 이고가던 물동이를 쏘아맞쳐 구멍을 내곤 다시 화살을 날려 그 구멍을 틀어막았다던 ‘살에 살 맞는다’는 솜씨도 90m 밖의 사과를 궤뚫는 김진호의 경지에는 아마 못 미치리라. 한국 제일의 명궁수 김진호는 예천의 자랑거리로 오랫동안 남겨질 것이다. 예천읍 남본동에는 또 남다른 자랑거리가 있다. 이 동네에서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새끼로 고은 금줄에 빨간 고추 대신 활을 걸어놓는 것이다. 그 사내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활을 쥐어주고, 천자문을 깨칠 때 첫 시위를 당겨준다. 이렇듯 예천에 궁도가 번성한 것은 대대로 명궁을 만들며 후세에 전하는 조궁가(造宮家)가 있었기 때문이다.
[활에 魂을 불어넣는 家門] : 남본동 245번지에 살고 있는 당대 제일의 궁장 권영록의 가업은 11대 조상인 권계황(權繼黃)이 활의 본고장 개성에서 기술을 익혀 지금의 예천읍 왕신리에서 조궁업을 시작한 후로 12대 400여 년을 물려 내려온다. 그는 16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활일을 전수받아 50여 년 동안 10만여 장의 활을 만들어 옴으로써 이 나라 국궁의 명맥을 잇고 있다. 나직하고 어두컴컴한 세 칸짜리 한옥에 틀어박혀 장남 권오규(權五奎, 46)만을 옆에 두고 어느 대 조상이 그의 자리에 앉더라도 그렇게 했을 방법과 순서와 솜씨로써 활을 만드는데 여념이 없다. “모르긴 해도 아마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을 것이야. 조상님네들이 활일을 해오신 것이 내 대에 와서 틀려지거나 거짓된 데 있다면 우선 조상께 욕이 될 텐데... 내가 손을 댄 활이 잘못 만들어져서 활 구실을 못하게 되는 일이 있으면 면목이 없어. 대물림으로 배운 활일을 내가 소홀히 하거가 잘못하면 바로 사람 구실 못하는 것이야.‘ 정심정념(正心正念)만이 13대째 내려가는 가문 고유의 비법이요 궁장으로서의 비결임을 밝히는 권영록은 혼을 불어넣는 마음으로 활을 하나하나 만들어간다. 곁을 지키는 장남 권오규도 벌써 26년째 아버지의 솜씨를 익히고 있다. 20살 때부터 문하생으로 입문하여 이제는 명실공히 전수자로서 인정을 얻고난 터다. ”어려서 처음 아버지 일을 거들자니 손 서투른 것이 당연한 데도 용서란 게 없었어요. 그 때마다 무릎이며 종아리며 머리통에 불담좋게 피워 물고 계시던 아버지의 장죽이 날아와도 꾹 참고 10년을 버티다 보니, 이제 활만큼은 내 고집대로 만들고 있지요.“ 예로부터 화살이 천 보를 날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활이라 했다. 이 엄천난 탄력을 활에 감출 수 있는 것은 바로 뿔과 대나무와 소힘줄의 삼합(三合)에 달려있다. 여기에 민어 부레풀이라든가 명주실, 각종 연장같은 최상의 재료와 도구들을 찾아내고 다루던 조상들의 슬기와 솜씨가 있었기에 우리의 활은 중국의 창과 일본의 칼과 함께 ’하늘 아래의 삼보(三寶)‘에 들 수 있었다.
[磨杵成針 格인 활 일] : 활이 완성되기까지에는 넉 달에서 다섯 달이 실하게 걸린다. 그래서 활일을 하는데 꼭 지켜야 할 금기가 있다. ‘바람이 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동안에 술, 노름, 오입 따위로 자리를 뜨면 결코 활이 완성되지 않는다. 모든 과정이 일일이 손수 지키고 앉아 궁둥이에 못이 박히도록 해내야 한다. 활 만드는 과정이나 재료 따위를 건사하거나 다뤄가는 것을 보면 마저성침(磨杵成針), 즉 절굿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드는 작업임을 알 수 있다. 우선 활을 만드는 데 쓰이는 연장은 톱, 망치, 밧줄, 대빗, 도가니, 대칼이 전부이다. 그러나 명궁의 대를 잇는 데는 손끝의 촉감과 오랜 경험에서 쌓여진 눈대중과 세심한 주의력, 거기에다 조상께서 물려준 황소힘이 있어야 한다. 활을 만드는 기본 재료는 담양 왕대, 지리산 산뽕나무, 태백산 굴참나무, 황소등힘줄, 물소뿔, 민어 부레풀, 화피(樺皮, 벚나무 껍질)이다. 이런 지료는 대개 여름, 겨울에 장만하고, 봄, 가을에 활일을 한다. 왕대를 두 자 두 치 크기로 잘라 불에 구워 진을 뺀 뒤에 물소뿔을 켜내어 대나무에 붙이고 명주실같이 뽑아낸 소등힘줄을 민어 부테풀로 바른다. 황소 한 마리에 하나 뿐인 등힘줄은 망치로 두들겨 부풀려서 고기와 기름을 빼고 손톱으로 한 가닥씩 짼 뒤 대빗으로 계속해서 빗으면 모시날처럼 곱고 가늘게 갈라진다. 활 한 장에 이 소등힘줄 두 개가 들어간다. 황소가 쌀 두 가마를 짊어지는 것이 등힘줄 때문이니까 활 한 장에 황소 두 마리의 힘이 들어가는 셈이다. 손잡이인 활 복판의 ‘줌통’은 참나무를 깎아 물에 삶은 뒤 다시 불에 구워 ‘완구비’로 붙이고 활의 양 끝에 산뽕나무를 이어 ‘버들잎’을 만든다. 등힘줄은 ‘초힘’, ‘재힘'''', ''''첨력‘이라 하여 세 번 붙인 뒤, 끝으로 활 안쪽 전부에 긴 힘줄을 붙이는데, 이를 ’매임‘이라 한다. 활이 다 된 다음에는 화피(樺皮)를 입혀 단장하고 버들잎에 ’고자단장‘으로 완자무늬에 홍, 황, 녹색의 전을 둘러 색을 갖추면 차라리 예술품이라 할만한 활이 된다. 활일을 마치기까지 궁장의 손길이 무려 370여 회가 가야 한다. 이렇 듯 온갖 정성으로 활이 만들어지면 산모가 해산을 하듯이 활의 몸을 풀어주는 해궁을 하게 된다. 여태껏 둥글게 오그라져 있던 활이 해궁을 통해 안팎이 뒤바뀌게 되고 나서 양 끝에 시위를 얹어 걸으면 그야말로 활의 모양을 갖주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쌀 반 가마를 드는 힘이 들어가는데 이보다 더 어려운 궁장의 혼과 정신을 집중하여 해궁을 잘함으로써 활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판가름이 난다는 데에 있다. 이 과정을 과연 기계로 대량으로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국궁은 만들기도 배우기도 어렵다. [활은 하늘이, 祖上이 내려주시는 것] : 국궁에 드는 재료를 장만하기란 여간 일이 아니다. 우선 물소뿔을 대만이나 태국에서 수입을 해야 하는데, 1m가 조금 넘는 뿔 한 개에 3만 원쯤 든다. 뿔의 밖으로 휜 부분인 양각에서 뿔 두 쪽을 켜내어 활 한 장 만드는데 쓰고, 나머지 부분은 도장 만드는 사람에게 처분한다. 황소등힘줄 한 등을 뭉치면 고기로 쳐서 반 근이나 한 근쯤 되는데, 활 4-500장 몫을 마련하려면 소 1천 마리를 잡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나마 여러 궁장들이 서로 경쟁해서 사니까 1년쯤 전에 선금을 맡겨놓고 정작 살 때는 아쉰 소리해 가며 웃돈을 얹어야 제때에 살 수 있는데, 한 등에 15,000원쯤 치인다. 한 10년 전만 해도 고기를 붙여줘야 가까스로 소힘줄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민어 부레풀 또한 구하기 힘들다. 더구나 요새는 민어를 통째로 일본으로 수출하기 때문에 부레만 따로 구하기가 더욱 어렵다. 한 마리에 15,000원씩이나 하는 크기의 민어를 15마리쯤 잡으면 풀 한 근이 나오는데, 이 값으로 7천 원에서 1만 원이 먹히고 이 것으로 활 석 장을 붙일 수 있다. 결국 재료값이 그렁저렁 10만 원 가량 드는 셈이다. 보통 활 한 장이 20-30만 원 선에서 기래되고, 절품이라야 50만 원쯤, 하품은 15만 원에도 팔아야 한다. 대충 보아 너댓달 동안에 드는 품이나 이자를 생각지 않으면 활 한 장 팔아 5-15만 원을 챙길 수 있으니 장사로 치면 참 박한 장사이다. “활은 하늘이, 조상이 내려주시는 것이야. 내 아무리 정성이 지극해도 활 만드는 동안 일기가 고르지 못하면 활을 만들 수가 없어. 그런 걸 거역해 가면서 마구 만들어 팔 수 없지 않은가.” 1971년에 중요무형문화재 47호로 지정되고 나서 생계 보조비로 20만 원, 강사비로 8만 원을 다달이 받고있는 권영록은 ‘바빠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자’는 은근과 끈기로 오늘도 활 재료를 찾아 산야를 누빈다(韓國人 1983年 11月號 글 안영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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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궁의 명가 송강 권영록(國弓의 名家 松岡 權寧錄) [記事] : 예천문학 편집부의 예천읍 왕신리 169번지 출신인 송강 권영록에 대한 기사로, 예천문학회에서 1999년에 발행한 <예천문학(醴泉文學)> 20권 가을호 210-218쪽(9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는, 1) 초상화, 2) 국궁의 유래, 3) 가문의 내력과 조궁술의 이력, 4) 집중 탐구(14대, 400여 년 오직 한구석 밝혀온 안동 권씨 가문의 활 만들기, 김철윤), 5) 무형문화재 47호로 지정된 궁시장, 6) ‘한구석 밝히기 실천운동’ 전진대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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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시(弓矢) [韓國學資料] : 궁시는 예로부터 전투용으로 사용되던 활과 화살을 가리키는 것으로, 궁시를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을 궁시장(弓矢匠)이라고 한다. 이 화살은 인천광역시 지정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기능보유자이셨던 고 박상준 선생님의 작품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서 간돌칼(磨製石鏃)이 발견되고 삼국시대 이전의 소국이던 부여(扶餘), 옥저(沃沮), 예(濊),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등에서 활의 사용이 활발하였음을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 등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활을 잘 쏘는 민족으로 알려질 만큼 활이 널리 사용되어 다양한 형식의 활과 화살이 존재하였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대체로 조선시대 활과 화살이다. 조선시대 활은 대체로 일곱 가지인데 전투용, 수렵용, 의식용, 연습용 등 그 용도에 따라 구분된다. 전투용 활로는 목궁과 철궁, 철태궁, 고, 각궁이 있고 수렵용으로는 목궁, 철태궁, 각궁이 사용되었다. 의식용으로는 예궁, 각궁(角弓)이 사용되었고 정량궁이 연습 용도였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각궁으로 현재에도 사용되는 가장 보편적인 국궁이다. 각궁의 재료는 물소뿔을 주재료로 하여 소힘줄, 대나무, 뽕나무조각 아교 등을 이용해 제작한다. 궁시의 연원이 오래된 만큼 그 변천과 종류도 시대에 따라 다양하다. 현재로는 국궁(國弓)으로 불리는 각궁(角弓)과 거기에 따른 화살이 보편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각궁은 화살과 더불어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 소사․광주․여주, 전라북도 전주, 전라남도 여수, 경상북도 예천, 경상남도 울산․충무 등 기타 여러 지역에서 제작되고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궁장(弓匠)으로는 김장환, 권영록, 장진섭, 시장(矢匠)으로는 박상준의 기능이 격을 잘 유지했다. 궁(弓)의 재료로는 통대나무를 쪼개어 햇볕에 말리거나 밀실에서 참숯불로 건조시킨 죽편(竹片)과 길이 38cm 너비 3cm의 뽕나무 조각을 물에 삶아서 알맞게 휘게 한 것과 파간(파幹)을 만드는 데 쓰일 참나무쪽과 수우각(水牛角)을 길이 52cm 너비 6cm, 두께 8cm내외로 자른 흑각편(黑角片)과 소의 심줄을 나무망치로 두들겨 살점과 기름이 빠져 실날같이 된 것을 대빗으로 곱게 빗은 힘줄(근) 과 부레풀 및 화피(樺皮)가 있어야 한다. 도구로는 흑각(黑角)을 휘는 데 쓰는 뒤집과 활을 얹을 때 쓰는 조지개와 밧줄과 밧줄로 묶고 죌 때 쓰는 조막손이와 활을 바로 잡는 데 쓰일 궁창(弓窓)과 이밖에 톱, 대패, 나무망치, 줄, 칼, 송곳, 나무집게, 나무빗, 쇠빗, 풀솔, 도가니, 못탕 등을 갖추어야 한다. 이의 재료와 도구로 활의 몸체를 만드는 데는 약 80일이...(daum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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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시장(弓矢匠) [人間文化財] : 예천읍 왕신리(旺新里) 왕상골 출신으로 남본리(南本里)에 거주하고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47호(1971.9.13 指定)인 권영록(權寧錄)과 경상북도 지방무형문화재 제6호(1981.12.30 指定)인 권우갑(權又甲)이 남본리에서 살았다. 예천읍은 활의 명산지이다. 전에는 궁경(弓京)이라 할 만치 조궁(造弓)이 성했으나, 지금은 명맥만 이어오는 형편이다. 조궁의 기능 보유자 권영록, 권우갑과 후보자 권오규(權五奎)는 사망했고, 현재 남본2리의 권영학(權寧鶴)이 지방무형문화재 제6호 보유자로 맥을 이어가고 있다. 기능 보유자 권영록(1916-1986)은 남본리 245번지에서 살았고, 그의 조궁술(造弓術)은 이조 영조 때 조궁(造弓)의 공으로 교위용장(校尉勇將)에 올랐던 그의 7대조 희직(熙直)으로부터 가업(家業)으로 전승되어 왔고, 16세 때인 1930년 경부터 50여 년 간 평생을 익혀왔고, 아들 오규(五奎)에게 전수(傳授)하였다. 남본2리 69번지의 궁장(弓匠) 권우갑(?-1989)은 조부 오련(五蓮)으로부터 이어온 조궁술을 1935년부터 익혀 아들 영학(1943- )에게 가업으로 전수하였다. 권영학의 조궁술은 4대 120여 년 간 가업으로 이어온 전형적인 기법을 지니고 있는데, 아버지 권우갑(技能保有者)으로부터 15세 때인 1955년부터 전수하고, 현재 전국 조궁계(造弓界)의 중추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활은 궁간(弓幹)의 길이에 따라 장궁(長弓)과 단궁(短弓)으로, 구조에 따라 환목궁(丸木弓)과 복합궁(復合弓)으로 구분되는데, 예천의 활은 구조와 궁간으로 보아 복합 단궁(複合短弓)이라 할 수 있고, 일본이나 서양의 활에 비해 그 모양새나 실용면에서 훨씬 앞서고 있는데, 궁도(弓道)의 용구로서 뿐 아니라, 순수 수공예품(手工藝品)으로서 탁월한 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나의 활이 완성되기까지는 제작 기간이 약 10개월이 소요되고, 여러 가지 재료의 처리와 겹겹이 붙이고 말리는 작업의 전 과정이 궁장(弓匠) 한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다. 활의 주요 재료로는 대나무, 뽕나무, 굴참나무, 소심줄, 물소뿔, 민어풀 및 장식에 필요한 화피 등이 사용되고, 제작 도구로는 톱, 가구, 다리미, 두루자, 밧줄, 집개, 궁틀, 줄, 칼, 송곳, 심판, 대빗, 대패, 나무망치 등이고, 특별한 도구로는 도지개를 사용하고 있다. 제작 과정은 재료의 처리를 거쳐 부각(付角)→뒤설기(다듬기)→뒤졸음→심노이→점마→해궁(解弓)→고자손질→화피 단장(丹粧)의 순으로 복잡한 공정(工程)을 거쳐 하나의 활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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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장(弓匠) [工藝技術] : 서울 도봉구 창1동 664-24번지에 있는 궁장으로, 서울시 무형문화재 23호(2000.4.20 指定)이다. 궁(弓)은 활을 말하는 것으로써, 선사시대부터 전투용으로 사용되던 활을 전통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기술과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궁장이라고 한다. 선사시대에 사용되었던 돌로 된 화살촉이 우리 나라 전역에 걸쳐 발견되고 있으며, 기록에 의하면 삼국 이전의 부족국가였던 부여, 옥저, 마한, 진한, 변한 등에서 활을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활을 만드는 데는 약 80일이 걸리며 재료로는 느티나무, 뽕나무, 버드나무와 소뿔을 쓰는데 시기와 재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궁장은 전통적인 공예 기술로서 기능보유자로 권무석 씨가 전통 활의 명산지인 경북 예천에서 대를 이어 활을 제작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國家文化遺産綜合情報서비스 2004)
궁장(弓匠) [醴泉郡 文化財臺帳] : 지방무형문화재 제6호(1980.12.30 指定), 보유자 권우갑(權又甲, 學力은 漢學, 性別은 男, 本籍은 醴泉邑 旺新里 171, 住所는 醴泉邑 南本里, 生年月日은 1919.3.23), 후계자 권영학(權寧鶴, 1943.2.26生, 大卒, 1958年 以後)ㆍ박찬석(朴贊錫, 1953.7.15生, 中卒, 1971年 以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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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장(箭筒匠) [匠人] : 화살을 담는 긴 통을 제작하는 장인(匠人)으로, 예천 이씨 노인이 유명하다. 전통은 전일, 시통(矢筒), 동개라고도 한다. 기원은 신석기 시대로 추정되며, 수렵용과 전쟁용 두 가지가 있다. 전통을 재료별로 구분하면, 대나무로 만든 죽전통(竹箭筒)이 가장 많고, 종이를 재료로 한 지전통(紙箭筒), 거북껍질로 만드는 대모전통(玳瑁箭筒), 벚나무나 자작나무 껍질로 만드는 화피전통(花皮箭筒), 참종이를 겹겹이 발라서 만드는 지칠전통(紙漆箭筒), 오동나무 각전통(角箭筒), 투갑상어껍질로 만드는 어피전통(魚皮箭筒), 그리고 나전칠전통(螺鈿漆箭筒) 등이 있다. 전통 제작에는 창칼, 평도(平刀), 삼각도, 채칼 등이 필요하며, 재료에 따라 제작법이 다르다. 한국의 전통 생산지는 예천, 전주, 광주, 나주, 담양, 경주 등이고, 예천 이씨 노인의 지전통, 마산 박씨 노인의 조각전통 등이 유명하였다. 근래에는 광주의 조을석(趙乙錫), 순천의 윤재열(尹在烈)이 전통을 제작하였고, 현재는 포항의 김동학(金東鶴)이 전통장의 맥을 잇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3호이다(야후! 백과사전)
. [위키 辭典] : 화살을 담는 통을 만드는 사람으로, 전통은 활, 화살과 함께 시작되는데, 화살이 구석기 말부터 쓰였으므로, 이 역시 그 기원이 오래된 것으로 얘기된다. 전에는 마산, 진주, 광주, 예천 등에서 많이 있었으나 화살을 쓰지 않기 때문에 쇠퇴 일로에 서 있다. 현재 무형문화재 29호로 지정되어 보존하는 중이다.(위키辭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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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矢) [特産品] : 예천읍 서본리(西本里)에서 제작하고 있는 화살로, 우리 나라 전역에 걸쳐 마제(磨製) 석촉이 발견되어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화살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화살을 옛 솜씨 그대로 재현(再現)하는 이가 예천읍 서본2리의 김종국(金鍾國, 1936- )이다. 그는 20세 때부터 화살을 만들어 왔다. 그는 화살이 활의 한 부분품이 아니라 활보다 먼저 있었던 것으로 창(槍)이 발달하여 된 무기였다고 말한다. 활은 그 뒤에 화살을 목표물에 보낼 수 있게 하려고 만들었다는 것이다. 옛날의 화살로는 육량전, 동개살, 애기살, 고시, 장군전, 목전, 철전, 예전, 세전, 유엽전(柳葉錢)과 같은 것이 있어 열 가지가 넘었지만 지금은 유엽전 하나만 남아 국궁(國弓)에 쓰이고 있다. 그리고 무게가 대개 여섯 돈 반(半)에서 일곱 돈까지 나가는 유엽전도 원래 끝이 날카로운 쇠촉이었으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위험하게 여겨 대칼촉으로 바꾸어 놓은 뒤로 옛 모습을 잃고 말았다. 오늘날 사용하는 이 유엽전의 길이가 85cm 정도이고, 화살의 몸체는 대나무이며, 오니(화살의 上部)는 싸리나무로 만들어지고, 깃은 꿩깃으로 하며, 사정(射程) 거리는 150m 정도이다. 대나무는 강원도 해안 지대에서 자생하는 신이대(신누대)를 쓰고 있고, 3절로 된 것이 가장 알맞다고 한다. 싸리나무는 과거에는 광대싸리로 하였으나, 지금은 보통 참싸리를 사용하고, 오니를 둘러싸고 견고히 하고 습기를 방지하는 구실을 하는 것으로 도피(桃皮, 복숭아나무 껍질)를 사용한다. 꿩깃은 화살의 깃에 사용하며, 좌궁(左弓) 깃과 우궁(右弓) 깃에 쓰인다. 촉은 화살의 맨끝에 박는 것으로 오늘날은 탄피(彈皮)를 사용하고 있다. 소심줄(소등힘줄)은 윗 부분의 오니 부분과 하단(下端)의 촉 부분을 감싸는데 쓰이고, 오니 부분에 도피(桃皮)를 씌울 때와 하단 탄피(下端彈皮)를 씌우기 위하여 엷은 죽관(竹管)을 입힐 때와 꿩깃을 달 때에 사용하는 부레풀 등이 화살의 재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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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의 예술(화살의 藝術, 慶北 醴泉) [記事] : 활, 화살, 궁수(弓手), 이 3자의 호흡이 일치해야 명궁이 탄생한다. 따라서 명궁은 자기 호흡에 맞는 활이 아니면 쥐지않고 자기 기량에 맞지않는 화살은 먹이지 않는다. 화살은 무게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궁수의 기량과 취향에 따라 정해진 무게의 화살을 계속 사용한다. 아무 화살이나 덮어놓고 쏘지 않는다. 활을 주문할 때는 자기가 사용하는 화살의 무게만 말해준다. 제작자는 그 것만 보고도 그 사람의 기량과 취향을 알아서 적절한 활을 만들어 준다. 화살이 얼마나 정밀한 공예품인지 필자도 이 번에 처음 알았다. 하나 만드는데 손질이 150번 가야하고 화살을 보다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무늬를 놓는 것은 바로 미술이고 염색 공예다. 예천의 유일한 화살 공예가인 김종국(金鍾國) 씨 집에서 여러 가지 화살을 구경했다. ‘어디서 이성호가는 나이 애를 끊나니’하는 그 ‘호가’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필자는 정확히 배우지 못했다. ‘휘파람 소리’ ‘적의 노래소리’ 이런 정도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호가’는 효시(嚆矢)가 날아가는 소리다. 그 효시를 이 번에 구경할 수 있었다. 화살촉이 날카롭지 않고 밤톨같이 동그란데, 구멍이 세 개 뚫려 있었다. 구멍에 대고 훅 불어보니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났다. 이 것은 살상용이 아니고, 선전포고용 내지는 적군을 위협하기 위한 것이다. 매섭고 소름끼치는 소리를 휘이익 내면서 날아와 떨어지면 가뜩이나 두려움에 떨고있는 병사들의 간담이 서늘해진다. 이순신 장군 같은 명장도 ‘나의 애를 끊나니’했던 것으로 보아, 그 ‘효시’의 위력은 신경전용으로 대단했던 모양이다. 중국의 창법(槍法), 일본의 조총(鳥銃)과 함께 조선의 편전(片箭)은 가공할 무기였다. 편전은 수리검(短刀) 모양으로 머리가 무겁고 꼬리깃이 없었다. 길이도 퍽 짧은데, 철궁에 먹여서 쏘면 2km를 날아갔다고 한다. 오늘날의 곡사포다. 멀리 있는 적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한다. 적들은 방패로 앞을 막고, 눈을 방패 위에 내놓아 앞을 살펴야 하는데, 이 철궁 편전은 거의 눈을 맞혔다고 한다. ‘눈이 빠져도 그만하기 만행이다.’하는 말은 이 편전에서 비롯된 말인 듯. 투호시(投壺矢)는 아녀자들이 병에 던져 넣는 화살촉이었고, 머리에 빨간 주사(朱砂)를 발랐다. 주사는 점장이들이 부적을 쓸 때 쓰는 물감이고, 한약방에서는 경풍 치료제로 쓴다. 속신(俗信)에는 잡귀 쫓는 약이라 해서 화살 끝에 묻혀 방에 놓아두었던 모양이다. 투호는 반드시 아녀자들만 한 것이 아니었다. 안동 도서산서원에 갔더니 퇴계선생유물전시관에 투호와 화살이 있었다. 정신 통일과 심심 파적을 위해서 퇴계 선생도 이 놀이를 했다고 한다. 이 투호의 맥이 지금은 끊어졌다. 국민학교 운동회나 다른 운동 경기에서 왜 투호 경기를 안 하는지 모르겠다. 농구나 축구는 열나게 하면서 제 나라의 전통적인 경기는 잊어버리고 있다. 명절 날 한복을 다소곳이 입은 여인들이 마당에서 투시(投矢)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운동회 날이나 시합 때 한복 입은 여학생들이 운동장에나와 이 경기를 하면 얼마나 보기 좋을까? 양궁에는 별에 별 종목이 다 있는데, 국궁은 왜 한 종목 밖에 없는가? 88년올림픽 때 국궁이 들어가서 안될 이유가 있는가? 이 기회에 우리의 국궁을 세계에 과시하면 안될 일이 있는가? 투시를 전국체전 종목에 넣으면 안될 이유라도 있는가? 이제 정신을 차릴 때도 됐다. 문화적 굴종도 이만치 했으면 신물나게 했다. 화살공예가 김씨는 요새 화살에 문양 넣는 기술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옛사람들이 넣은 문양은 실로 절묘하고, 불가사의하다. 낙죽은 인두로 지져서 그리면 되지만 점반죽법(点斑竹法)은 문양을 염색한 것인데, 그 기법을 아는 사람이 우리 나라에 한 사람도 없다. 조선조 말부터 맥이 끊어졌다. 고려청자, 이조백자처럼 기술의 새로운 탐구가 시작될 수 밖에 없이 됐다. 김씨가 가지고 있는 화살의 문양은 당시 부대 표시라 한다. 이 무늬는 대나무껍질 위에 놓아졌는데, 절대로 지워지는 일이 없다. 김씨도 연구 끝에 몇 번 시도해 봤는데, 염이 먹기는 하나 흐려지고 퍼져서 또렷한 문양을 얻을 수 없었다 한다. 이 맥을 어쩌다 놓쳤는가? 답답한 노릇이다. 화살의 생명은 앞뒤가 튼튼하고 허리 힘이 좋고, 무개 균형이 정확하고, 직선이어야 하고, 줄 먹이는 뒷홈이 한 치 착오없이 정 중앙이어야 하고, 습기에도 휘여지지 않아야 한다. 정말 비행체다.(徐東燻 新風土記 230 韓國日報 198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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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통(화살筒) [特産品] : 화살을 담는 긴 통인데, 예천 이씨 노인의 지전통(紙箭筒)이 유명하였다. 활, 화살과 함께 전쟁과 사냥에서 반드시 필요한 무기였으며, 전통(箭筒), 전실(箭室), 전일, 시통(矢筒), 또는 동개라고도 하였다. 화살통은 우리 나라에서 그 역사가 오래되어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발달해 오기 시작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벽화에서 그 모습이 보이고, 신라나 백제의 고분에서도 화살통을 꾸몄던 꾸미개가 출토되어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군인이나 관청에서 조직적으로 활쏘기가 시행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군용품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총포와 화약의 발전으로 차츰 활이 무기로서의 기능을 잃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말에 이르러서는 국궁이 취미 생활로 변화되었고, 화살통 역시 전쟁용에서 운동용으로 변해지고 그 종류도 다양하며 사치하게 되었다. 화살통은 수렵용과 전쟁용 두 가지가 있고, 가볍고 질긴 재료로 만든다. 화살통을 만드는 재료로 나누어 보면, 대나무로 만든 죽전통(竹箭筒)이 가장 많고, 종이를 재료로 한 지전통(紙箭筒), 거북 껍질로 만드는 대모전통(玳瑁箭筒), 벚나무나 자작나무 껍질로 만드는 화피전통(花皮箭筒), 참종이를 겹겹이 발라서 만드는 지칠전통(紙漆箭筒), 오동나무로 만드는 각전통(角箭筒), 투갑상어 껍질로 만드는 어피전통(魚皮箭筒), 그리고 나전칠전통(螺鈿漆箭筒) 등이 있다. 예천, 전주, 광주, 나주, 담양, 경주 등에서 화살통을 잘 만들었고, 마산 박씨 노인의 조각 전통과 더불어 예천 이씨 노인의 지전통 등이 유명하였다. 근래에는 광주의 조을석(趙乙錫), 순천의 윤재열(尹在烈)이 화살통을 제작하였고, 현재는 포항의 김동학(金東鶴)이 중요무형문화재 제93호 전통장(箭筒匠)의 맥을 잇고 있다.(인터넷 MasterCrafts 2001)
화살통(화살筒) [韓國學資料] : 조선 후기에 만들어 진 화살을 담는 긴 통으로, 일명 전실시통(箭室矢筒) 또는 전통이라 부른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 화살을 넣어 다니는 통개(筒介)를 만드는 기술 및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통개장(筒介匠)이라고도 한다(중요무형문화재 제93호). 조선시대 전통은 전쟁용과 연습용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은 대부분 송학(松鶴)․포도․호랑이․사군자 등이 정교하게 새겨져 의장이 베풀어진 연습용으로, 각 지방 사정(射亭)을 중심으로 그 유품을 찾아볼 수가 있다. 예전에 전통을 생산하였던 곳으로 전해지는 지방으로는 전주․여주․담양․경주․예천․통영․여수 등인데, 지금은 담양․광주․포항 등지에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 화살통은 두꺼운 종이를 타원형으로 말아서 기름칠하여 형태를 만들었다. 뚜껑 부분에는 검은색으로 아자문(亞字文)으로 장식하였고 몸통부분에는 명문이 쓰여 있다. <참고문헌> :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전통장-(문화재관리국, 1988).(daum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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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 [文化財] : 1999학년도 안동대 오은석(9510418)의 학사 학위 논문으로, ''''예천이 활의 고장이 된 배경과 국궁의 계승"이 있다.(인터넷 Alta Vista 2001)
활(弓) [特産物] : 예천읍 왕신리(旺新里) 왕산골을 비롯한 예천군에서 생산되는 활로, 전국 활 생산량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예천은 지금도 이름난 국궁(國弓)의 명장(名匠)들이 조상의 얼이 담긴 활을 만드는 일에 정성을 쏟고 있는 곳으로, 수 천 년 전통의 한국 궁술을 잇는 활의 고장이다. 예로부터 활을 사랑하고 활쏘기를 즐긴 궁술의 고장인 예천에서는, 사내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활을 잡히고, 천자문을 깨우칠 때면 첫 시위를 당겨 준다. 또한 아들을 낳으면 새끼줄에 빨간 고추를 달아 대문에 거는 대신 활을 걸어 놓는 마을도 있다. 1979년 서(西)베를린에서 열렸던 제30회 세계 궁도대회에서 궁도의 샛별처럼 나타난 김진호(金珍浩) 소녀와 전국 궁도대회를 석권한 황숙주(黃淑珠) 소녀의 머리에 씌워진 월계관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이렇듯 예천에 궁도가 번성한 데는, 대대로 명궁(名弓)을 만들어 후학(後學)을 키워 온 유명한 조궁가(造弓家)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궁장으로 무형문화재 제47호인 권영록(權寧錄, 1916-1986)은, 4백 년 전부터 전승된 가업(家業)을 이어 받아 조상의 얼을 재현시키기 위하여 50여 년 간을 오직 활과 더불어 살았다. 국궁 애호가들로 알려진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사직공원 뒤 황학정에서 즐겨 쏘던 활과 박정희 대통령이 아산 현충사에서 시사(試射)하던 활이 모두 권영록이 만든 것이었으며, 외국 귀빈이었던 조지 부시 미국 부통령과 후꾸다 일본 수상에게 선물로 줄 만큼 권영록이 만든 활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름난 민예품(民藝品)이다. 왕신리 왕산골(旺山洞) 출신으로서, 이곳에서 전수받은 조궁술(造弓術)을 가지고 전국 각지에서 조상의 슬기를 펼치고 있는 궁장들은 다음과 같다. 권영록(남본리, 인간문화재 47호, 전수자 : 권오규, 권오덕), 권영호(대구, 권영록의 4촌), 권우갑(남본리, 지방무형문화재 6호, 전수자 : 권영학), 박찬석(강원 원주), 권태흥(전남 광주), 권태기(충남 대전, 권태흥과 형제), 김봉원(경남 진해), 권오수(경남 마산), 권종익(경기 수원), 권영식(경기 수원), 이치우(경기 수원, 권영식의 사위, 전수자 : 권광평(처남)), 권영덕(전북 정읍), 김박연(경기 부천)이다. 내무부는 1982년 8월 17일 아세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나라 고유의 특산물을 올림픽 상품으로 개발하기 위해 1982년 제1차로 120개 특산물(特産物)에 대한 개발을 집중 지원키로 했는데, 예천 지방 지정 특산물은 활이다.(松臺 第2輯 89-91쪽, 大邱每日新聞 198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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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유동복, 18일 경북 궁도대회 3위...축하합니다.
유동복(醴泉 유동복, 慶北 男女弓道大會 3位) [記事] :
2010 경상북도 남녀궁도대회가 2010년 4월 18일 상주시 남산공원 내 상무정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이번 대회에는 도내 17개 시·군 300여명의 궁도 동호인과 임원들이 참가했으며 김관용 도지사와 성윤환 국회의원, 각급 기관단체장 등이 행사장을 찾아 대회를 더욱 빛냈다.
경상북도 궁도대회는 잊혀져가는 전통문화의 계승과 심신단련은 물론 동호인의 저변확대 및 활성화를 위해 매년 2회에 걸쳐 도내 각 시·군에서 번갈아 가며 열리고 있으며 이번 대회는 단체전과 개인전 장년부, 여자부, 노년부로 나눠 진행됐다.
경기결과 개인전 노년부에서 예천의 류동복 선수가 3위를 차지하였다.
(곽인규 記者 慶北每日新聞 2010-04-20 오후 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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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601
석송령 : 석송령(石松靈) 기네스북 등재 추진 | 예천신문 | 2010.04.20 07:05/ http://cafe.daum.net/ycnews365/ 천연기념물 제294호 석송령(石松靈) 기네스북 등재 추진/
한국기록원은 감천면 천향리 천연기념물 제294호인 석송령(石松靈)을 ‘세계 최초 재산을 보유한 식물’로 기네스북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석송령(石松靈)은 수령 6백여 년의 반송으로, 높이 10m, 둘레 4.2m의 웅장하고 수려한 외관뿐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토지를 보유하고 매년 재산세를 내는 소나무로 유명하다.
예천군은 석송령(石松靈)의 기네스북 등재를 위해 토지보유와 납세에 관한 객관적인 증빙자료는 물론 영상, 사진, 문화재 지정관련 서류 등 기네스북 등재에 필요한 관련 자료를 한국기록원에 제출한 상태다.
2010년 2월 17일 예천군과 기네스북 등재를 위한 협약을 맺은 한국기록원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석송령(石松靈)에 관한 증빙자료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한편, 번역절차와 기네스월드레코드사(社)의 심의과정을 통해 기네스북 등재가 가능토록 추진할 방침이다.
한국기록원 민병권 사무총장은 “식물이 재산을 가지고 세금을 냈다는 기록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로, 이번 기네스북 등재를 통해 한국의 향토문화적인 정서와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석송령(石松靈)은 1927년 자식이 없던 이수목(李秀睦)이라는 마을주민이 석평마을의 영험한 나무라는 뜻의 ‘석송령’이란 이름을 짓고 이 나무에 자신 소유의 토지 3천9백37㎡를 상속 등기하여 토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마을주민들로 구성된 석송령보존회에서는 1985년 전두환 대통령 하사금(5백만원)과 석송령이 보유한 토지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매년 마을주민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석송령의 재산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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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궁공예(國弓工藝, 慶北 醴泉) [記事] : 단술 예(醴) 자, 샘 천(泉) 자를 쓰니 퍽 여성적이고 색향같은 기분이 드는 고장이다. 한 때 색향(色鄕)이라는 말도 들었다 하나 지금은 그렇지 않고 물맛이 단술같이 좋은 동네라 하면 맞을만큼 이 지방의 샘물이 좋다. 화살 공예가 김종국(金鍾國) 씨는, “활 만드는 데 쓰는 민어 부레풀은 좋은 물에 끓여서 녹여야 되는데, 예천 지방의 물이 가장 적당하므로 이 지방에 활이 성한 것 아닌지 모르겠어요”했다. 그 말도 그럴 듯 하나 과학적인 실험을 안해 봐서 모르겠고, 예천에 국궁 공예가가 7명이나 있는 것은 물보다는 오히려 애국심 내지는 애향심 때문일 것 같다. ‘우리의 이 기막힌 공예품을 꼭 계승하자‘하는 애정과 고집을 가진 사람이 이 고장에는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예천 사람들의 애향심은 이미 소문나 있다. 운동 경기 같은 걸 해도 악착같이 이겨놓고 보는 예천인들이다. 중국 사람이 자장면 팔러 왔다가 한 달도 못돼서 눈물 흘리며 돌아간다는 곳이다. 소문만 듣다가 실제 가보니 그 소문이 옳았다. 여러 사람들을 만났는데, 향토에 대한 열의가 한결같이 대단했다. 내 것을 지키고 내 것을 빛내려는 의지는 지금의 우리 국민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것인데, 예천에 와서 그 모범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하기 그지 없었다. 예천은 고려 중엽 패관문학(설화문학에서 패관문학으로 발전하고, 거기서 고대소설, 현대소설로 이어진다)의 효시였던 서하(西河) 임춘(林椿) 선생의 향리이고,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 등 명장을 천거했던 약포(藥圃) 정탁(鄭琢) 선생의 고향이다. 약포 선생은 정사에 공정 강직해서 당파를 초월했으며, 이순신, 김덕령 장군 등이 당파에 희생이 되어 목숨을 잃을 지경에 간곡히 상소해서 사면케 했고, 명량대첩을 이룰 기틀을 마련했다. 선생의 저서 <용사일기>는 임란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된다. 보문면(現 醴泉邑) 고평동에 선생의 유물전시관이 있고,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필자가 찾아가던 며칠 전에 도둑이 들어서 <용사일기> 등 선생의 유품을 훔쳐가 버렸었다. 선생의 영정 앞에 향을 피우고 참배를 했으나 못난 후대를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 한이 없었다. 아무리 돈에 눈이 뒤집히고 짐승의 심사를 가졌기로서니, 나라를 건지려고 불철주야 애쓰신 선생의 그 고귀한 유품을 도둑질할 생각을 품다니... ’돈교(錢敎)‘의 광신자들이 늘어가는 이 사회가 장차 어찌되려는지? 유교적 인생 교육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수신과 예절 교육이 아니면 이 시대의 중병을 치료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예천의 근대 문화를 개척한 인물로는 현 대창중고등학교를 설립한 벽천(碧泉) 김석희(金碩熙) 선생을 꼽는다. 선생은 갑신정변 무렵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학문을 깨쳤으며, 사업에도 능력을 발휘해 재산을 모았다. 3.1운동 직후 선생은 가산을 모두 던져 대창학원을 설립했다. 지금 예천을 빛내고 있는 인물들이 이 학교 출신이다. 지금까지 60년 간 예천이 정신적 지주의 구실을 해오는 대창은 벽천 선생의 아들인 김교용(金敎容) 선생이 교장으로 선친의 유업을 계승하고 있다. 민족 정기를 키우는 문화 사업에 전재산을 던지는 인걸이 있는가 하면, 위대한 조상의 유물을 훔쳐서 돈벌이 하려는 사람도 있다. 필자는 사흘 동안 예천에 머룰면서 우리 민족의 예지를 찾고 이어나가는 소중한 인물들을 여러 분 만나보았다. 조상의 슬기를 찾아 밝혀내서 후대들의 귀감으로 삼으려는 일에 열심인 정양수 선생, 고대 문화의 비밀을 찾아내는 일에 몰두하는 김상문 선생, 이 두 분의 품위 있는 언어 범백과 어진 성품에는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가난과 소외 속에서도 국궁을 만들면서 우수하고 예술적인 우리 민족 공예의 맥락을 이어온 권영록(權寧錄) 선생과 그 아들 오규(五奎) 씨, 국궁의 해외 보급에 힘쓴 명궁(5단) 권영학(權寧鶴) 씨, 이 분들을 만나 활 만드는 방법과 수법 등을 물어보았고, 우리의 활 국궁이 얼마나 우수하고 예술적인가를 알게 되었다. 활 공예가가 5명 더 있으나 다 만나보지 못해 유감이었다. 화살 공예가 김종국(金鍾國) 씨를 만나 화살의 종류와 이 것이 얼마나 정밀한 솜씨로 만들어지는가를 알게 되었고, 화살의 예술적 가치를 알게 되었다. 예천동부국민학교 교사인 강원희(姜元熙) 씨는 이 지방 민속 발굴에 공헌이 많은 인물, 통명농요와 청단놀음은 이미 인정을 받아서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발표를 했다. 그는 다시 ’홍소리‘라는 ’결혼행진곡‘을 발굴했고, 예천군에만 있는 ’그네노래‘를 찾아냈다. 애향심은 주체성에서 나온다. 따라서 예천을 자주 정신의 중심이라 하고 싶다.(徐東燻 新風土記 229 韓國日報 198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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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궁의 마을 예천(國弓의 마을 醴泉) [記事] : 아침 햇살을 등 뒤에 받으며 남산 무학정 활터로 행수(行首) 어른이 오른다. 간 밤에 해궁(解弓)을 마친 새 활의 시사(試射)를 할 참이다. 잿비 두루마기를 남색 전대(箭袋)로 질끈 동이고, 탕건과 갓을 단아하게 갖추어 쓴 채 흰 수염을 날리며 사석(射席)에 버티어 선 궁체(弓體)가 멋지다. 안팎이 뒤바뀌도록 얹힌 활체의 유연한 곡선에 예스런 멋이 배어 있고, 한 것 당겨진 시위를 떠난 화살은 창공을 가르며 잔솔 밭 너머에 새워진 과녁을 뚫는다. 이제 해궁이 제대로 되었음을 확인한 셈이다. 갓 몸푼 산모가 새 생명을 어르 듯 행수 어른은 정이 담뿍 담긴 손길로 새 활의 몸체를 쓸어 내린다. 이 이가 바로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된 국궁의 종가 권영록(權寧錄, 68)이다. [醴泉 땅에 名弓 난다] : 경상북도 예천 땅은 한 때 천석꾼 만석꾼이 많아서 ‘반 서울’이라 불렀고, ‘제2의 개성’으로 통했다. 예천을 이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는 이곳 사람들의 ‘안 지려는’ 기질이 한몫을 해왔다. 설사 예천 땅 안에서는 이름을 못냈더라도 서울에 가서는 기어코 이름 석 자를 드날린 인물도 여럿 있다. 골목마다 하나 꼴은 있는 슈퍼마켓이나 연쇄점, 간간이 눈에 띄는 수입 상품점, 한 집 건러 늘어선 음식점, 다방, 여관 따위의 접객업소는 대부분이 예천으로 물건 사러오는 객지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예천이 얼마나 물산이 풍부한 고장인가를 알 수 있다. 예천이 활의 고장으로 유명한 것도 이같이 물산이 풍부하여 일찍이 살림이 안정되니 자연 인심이 좋은데다가 풍류에 쉽게 접할 수 있는 ‘멋을 아는’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자고로 예천 땅에서는 있고없고 간에 일단 사내가 활을 쏜다 하면 수신제가(修身齊家)한 연후에라야 했으니 그렇지 않으면 일개 건달로 취급해 버렸다. 옛날에 궁시 제조창이 있던, 전통적으로 활과 친근한 고장인 탓으로 대대로 명궁장(名弓匠)과 명궁수(名弓手)를 배출해 왔는데, 비록 양궁 부분이긴 하지만 제30회 세계궁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휩쓴 예천여고의 김진호 선수도 그 하나이다. 태조 이성계가 소시 적에 퉁두란과 얼려 웬 처녀가 이고가던 물동이를 쏘아맞쳐 구멍을 내곤 다시 화살을 날려 그 구멍을 틀어막았다던 ‘살에 살 맞는다’는 솜씨도 90m 밖의 사과를 궤뚫는 김진호의 경지에는 아마 못 미치리라. 한국 제일의 명궁수 김진호는 예천의 자랑거리로 오랫동안 남겨질 것이다. 예천읍 남본동에는 또 남다른 자랑거리가 있다. 이 동네에서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새끼로 고은 금줄에 빨간 고추 대신 활을 걸어놓는 것이다. 그 사내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활을 쥐어주고, 천자문을 깨칠 때 첫 시위를 당겨준다. 이렇듯 예천에 궁도가 번성한 것은 대대로 명궁을 만들며 후세에 전하는 조궁가(造宮家)가 있었기 때문이다.
[활에 魂을 불어넣는 家門] : 남본동 245번지에 살고 있는 당대 제일의 궁장 권영록의 가업은 11대 조상인 권계황(權繼黃)이 활의 본고장 개성에서 기술을 익혀 지금의 예천읍 왕신리에서 조궁업을 시작한 후로 12대 400여 년을 물려 내려온다. 그는 16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활일을 전수받아 50여 년 동안 10만여 장의 활을 만들어 옴으로써 이 나라 국궁의 명맥을 잇고 있다. 나직하고 어두컴컴한 세 칸짜리 한옥에 틀어박혀 장남 권오규(權五奎, 46)만을 옆에 두고 어느 대 조상이 그의 자리에 앉더라도 그렇게 했을 방법과 순서와 솜씨로써 활을 만드는데 여념이 없다. “모르긴 해도 아마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을 것이야. 조상님네들이 활일을 해오신 것이 내 대에 와서 틀려지거나 거짓된 데 있다면 우선 조상께 욕이 될 텐데... 내가 손을 댄 활이 잘못 만들어져서 활 구실을 못하게 되는 일이 있으면 면목이 없어. 대물림으로 배운 활일을 내가 소홀히 하거가 잘못하면 바로 사람 구실 못하는 것이야.‘ 정심정념(正心正念)만이 13대째 내려가는 가문 고유의 비법이요 궁장으로서의 비결임을 밝히는 권영록은 혼을 불어넣는 마음으로 활을 하나하나 만들어간다. 곁을 지키는 장남 권오규도 벌써 26년째 아버지의 솜씨를 익히고 있다. 20살 때부터 문하생으로 입문하여 이제는 명실공히 전수자로서 인정을 얻고난 터다. ”어려서 처음 아버지 일을 거들자니 손 서투른 것이 당연한 데도 용서란 게 없었어요. 그 때마다 무릎이며 종아리며 머리통에 불담좋게 피워 물고 계시던 아버지의 장죽이 날아와도 꾹 참고 10년을 버티다 보니, 이제 활만큼은 내 고집대로 만들고 있지요.“ 예로부터 화살이 천 보를 날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활이라 했다. 이 엄천난 탄력을 활에 감출 수 있는 것은 바로 뿔과 대나무와 소힘줄의 삼합(三合)에 달려있다. 여기에 민어 부레풀이라든가 명주실, 각종 연장같은 최상의 재료와 도구들을 찾아내고 다루던 조상들의 슬기와 솜씨가 있었기에 우리의 활은 중국의 창과 일본의 칼과 함께 ’하늘 아래의 삼보(三寶)‘에 들 수 있었다.
[磨杵成針 格인 활 일] : 활이 완성되기까지에는 넉 달에서 다섯 달이 실하게 걸린다. 그래서 활일을 하는데 꼭 지켜야 할 금기가 있다. ‘바람이 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동안에 술, 노름, 오입 따위로 자리를 뜨면 결코 활이 완성되지 않는다. 모든 과정이 일일이 손수 지키고 앉아 궁둥이에 못이 박히도록 해내야 한다. 활 만드는 과정이나 재료 따위를 건사하거나 다뤄가는 것을 보면 마저성침(磨杵成針), 즉 절굿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드는 작업임을 알 수 있다. 우선 활을 만드는 데 쓰이는 연장은 톱, 망치, 밧줄, 대빗, 도가니, 대칼이 전부이다. 그러나 명궁의 대를 잇는 데는 손끝의 촉감과 오랜 경험에서 쌓여진 눈대중과 세심한 주의력, 거기에다 조상께서 물려준 황소힘이 있어야 한다. 활을 만드는 기본 재료는 담양 왕대, 지리산 산뽕나무, 태백산 굴참나무, 황소등힘줄, 물소뿔, 민어 부레풀, 화피(樺皮, 벚나무 껍질)이다. 이런 지료는 대개 여름, 겨울에 장만하고, 봄, 가을에 활일을 한다. 왕대를 두 자 두 치 크기로 잘라 불에 구워 진을 뺀 뒤에 물소뿔을 켜내어 대나무에 붙이고 명주실같이 뽑아낸 소등힘줄을 민어 부테풀로 바른다. 황소 한 마리에 하나 뿐인 등힘줄은 망치로 두들겨 부풀려서 고기와 기름을 빼고 손톱으로 한 가닥씩 짼 뒤 대빗으로 계속해서 빗으면 모시날처럼 곱고 가늘게 갈라진다. 활 한 장에 이 소등힘줄 두 개가 들어간다. 황소가 쌀 두 가마를 짊어지는 것이 등힘줄 때문이니까 활 한 장에 황소 두 마리의 힘이 들어가는 셈이다. 손잡이인 활 복판의 ‘줌통’은 참나무를 깎아 물에 삶은 뒤 다시 불에 구워 ‘완구비’로 붙이고 활의 양 끝에 산뽕나무를 이어 ‘버들잎’을 만든다. 등힘줄은 ‘초힘’, ‘재힘'''', ''''첨력‘이라 하여 세 번 붙인 뒤, 끝으로 활 안쪽 전부에 긴 힘줄을 붙이는데, 이를 ’매임‘이라 한다. 활이 다 된 다음에는 화피(樺皮)를 입혀 단장하고 버들잎에 ’고자단장‘으로 완자무늬에 홍, 황, 녹색의 전을 둘러 색을 갖추면 차라리 예술품이라 할만한 활이 된다. 활일을 마치기까지 궁장의 손길이 무려 370여 회가 가야 한다. 이렇 듯 온갖 정성으로 활이 만들어지면 산모가 해산을 하듯이 활의 몸을 풀어주는 해궁을 하게 된다. 여태껏 둥글게 오그라져 있던 활이 해궁을 통해 안팎이 뒤바뀌게 되고 나서 양 끝에 시위를 얹어 걸으면 그야말로 활의 모양을 갖주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쌀 반 가마를 드는 힘이 들어가는데 이보다 더 어려운 궁장의 혼과 정신을 집중하여 해궁을 잘함으로써 활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판가름이 난다는 데에 있다. 이 과정을 과연 기계로 대량으로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국궁은 만들기도 배우기도 어렵다. [활은 하늘이, 祖上이 내려주시는 것] : 국궁에 드는 재료를 장만하기란 여간 일이 아니다. 우선 물소뿔을 대만이나 태국에서 수입을 해야 하는데, 1m가 조금 넘는 뿔 한 개에 3만 원쯤 든다. 뿔의 밖으로 휜 부분인 양각에서 뿔 두 쪽을 켜내어 활 한 장 만드는데 쓰고, 나머지 부분은 도장 만드는 사람에게 처분한다. 황소등힘줄 한 등을 뭉치면 고기로 쳐서 반 근이나 한 근쯤 되는데, 활 4-500장 몫을 마련하려면 소 1천 마리를 잡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나마 여러 궁장들이 서로 경쟁해서 사니까 1년쯤 전에 선금을 맡겨놓고 정작 살 때는 아쉰 소리해 가며 웃돈을 얹어야 제때에 살 수 있는데, 한 등에 15,000원쯤 치인다. 한 10년 전만 해도 고기를 붙여줘야 가까스로 소힘줄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민어 부레풀 또한 구하기 힘들다. 더구나 요새는 민어를 통째로 일본으로 수출하기 때문에 부레만 따로 구하기가 더욱 어렵다. 한 마리에 15,000원씩이나 하는 크기의 민어를 15마리쯤 잡으면 풀 한 근이 나오는데, 이 값으로 7천 원에서 1만 원이 먹히고 이 것으로 활 석 장을 붙일 수 있다. 결국 재료값이 그렁저렁 10만 원 가량 드는 셈이다. 보통 활 한 장이 20-30만 원 선에서 기래되고, 절품이라야 50만 원쯤, 하품은 15만 원에도 팔아야 한다. 대충 보아 너댓달 동안에 드는 품이나 이자를 생각지 않으면 활 한 장 팔아 5-15만 원을 챙길 수 있으니 장사로 치면 참 박한 장사이다. “활은 하늘이, 조상이 내려주시는 것이야. 내 아무리 정성이 지극해도 활 만드는 동안 일기가 고르지 못하면 활을 만들 수가 없어. 그런 걸 거역해 가면서 마구 만들어 팔 수 없지 않은가.” 1971년에 중요무형문화재 47호로 지정되고 나서 생계 보조비로 20만 원, 강사비로 8만 원을 다달이 받고있는 권영록은 ‘바빠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자’는 은근과 끈기로 오늘도 활 재료를 찾아 산야를 누빈다(韓國人 1983年 11月號 글 안영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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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궁의 명가 송강 권영록(國弓의 名家 松岡 權寧錄) [記事] : 예천문학 편집부의 예천읍 왕신리 169번지 출신인 송강 권영록에 대한 기사로, 예천문학회에서 1999년에 발행한 <예천문학(醴泉文學)> 20권 가을호 210-218쪽(9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는, 1) 초상화, 2) 국궁의 유래, 3) 가문의 내력과 조궁술의 이력, 4) 집중 탐구(14대, 400여 년 오직 한구석 밝혀온 안동 권씨 가문의 활 만들기, 김철윤), 5) 무형문화재 47호로 지정된 궁시장, 6) ‘한구석 밝히기 실천운동’ 전진대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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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시(弓矢) [韓國學資料] : 궁시는 예로부터 전투용으로 사용되던 활과 화살을 가리키는 것으로, 궁시를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을 궁시장(弓矢匠)이라고 한다. 이 화살은 인천광역시 지정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기능보유자이셨던 고 박상준 선생님의 작품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서 간돌칼(磨製石鏃)이 발견되고 삼국시대 이전의 소국이던 부여(扶餘), 옥저(沃沮), 예(濊),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등에서 활의 사용이 활발하였음을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 등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활을 잘 쏘는 민족으로 알려질 만큼 활이 널리 사용되어 다양한 형식의 활과 화살이 존재하였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대체로 조선시대 활과 화살이다. 조선시대 활은 대체로 일곱 가지인데 전투용, 수렵용, 의식용, 연습용 등 그 용도에 따라 구분된다. 전투용 활로는 목궁과 철궁, 철태궁, 고, 각궁이 있고 수렵용으로는 목궁, 철태궁, 각궁이 사용되었다. 의식용으로는 예궁, 각궁(角弓)이 사용되었고 정량궁이 연습 용도였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각궁으로 현재에도 사용되는 가장 보편적인 국궁이다. 각궁의 재료는 물소뿔을 주재료로 하여 소힘줄, 대나무, 뽕나무조각 아교 등을 이용해 제작한다. 궁시의 연원이 오래된 만큼 그 변천과 종류도 시대에 따라 다양하다. 현재로는 국궁(國弓)으로 불리는 각궁(角弓)과 거기에 따른 화살이 보편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각궁은 화살과 더불어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 소사․광주․여주, 전라북도 전주, 전라남도 여수, 경상북도 예천, 경상남도 울산․충무 등 기타 여러 지역에서 제작되고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궁장(弓匠)으로는 김장환, 권영록, 장진섭, 시장(矢匠)으로는 박상준의 기능이 격을 잘 유지했다. 궁(弓)의 재료로는 통대나무를 쪼개어 햇볕에 말리거나 밀실에서 참숯불로 건조시킨 죽편(竹片)과 길이 38cm 너비 3cm의 뽕나무 조각을 물에 삶아서 알맞게 휘게 한 것과 파간(파幹)을 만드는 데 쓰일 참나무쪽과 수우각(水牛角)을 길이 52cm 너비 6cm, 두께 8cm내외로 자른 흑각편(黑角片)과 소의 심줄을 나무망치로 두들겨 살점과 기름이 빠져 실날같이 된 것을 대빗으로 곱게 빗은 힘줄(근) 과 부레풀 및 화피(樺皮)가 있어야 한다. 도구로는 흑각(黑角)을 휘는 데 쓰는 뒤집과 활을 얹을 때 쓰는 조지개와 밧줄과 밧줄로 묶고 죌 때 쓰는 조막손이와 활을 바로 잡는 데 쓰일 궁창(弓窓)과 이밖에 톱, 대패, 나무망치, 줄, 칼, 송곳, 나무집게, 나무빗, 쇠빗, 풀솔, 도가니, 못탕 등을 갖추어야 한다. 이의 재료와 도구로 활의 몸체를 만드는 데는 약 80일이...(daum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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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시장(弓矢匠) [人間文化財] : 예천읍 왕신리(旺新里) 왕상골 출신으로 남본리(南本里)에 거주하고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47호(1971.9.13 指定)인 권영록(權寧錄)과 경상북도 지방무형문화재 제6호(1981.12.30 指定)인 권우갑(權又甲)이 남본리에서 살았다. 예천읍은 활의 명산지이다. 전에는 궁경(弓京)이라 할 만치 조궁(造弓)이 성했으나, 지금은 명맥만 이어오는 형편이다. 조궁의 기능 보유자 권영록, 권우갑과 후보자 권오규(權五奎)는 사망했고, 현재 남본2리의 권영학(權寧鶴)이 지방무형문화재 제6호 보유자로 맥을 이어가고 있다. 기능 보유자 권영록(1916-1986)은 남본리 245번지에서 살았고, 그의 조궁술(造弓術)은 이조 영조 때 조궁(造弓)의 공으로 교위용장(校尉勇將)에 올랐던 그의 7대조 희직(熙直)으로부터 가업(家業)으로 전승되어 왔고, 16세 때인 1930년 경부터 50여 년 간 평생을 익혀왔고, 아들 오규(五奎)에게 전수(傳授)하였다. 남본2리 69번지의 궁장(弓匠) 권우갑(?-1989)은 조부 오련(五蓮)으로부터 이어온 조궁술을 1935년부터 익혀 아들 영학(1943- )에게 가업으로 전수하였다. 권영학의 조궁술은 4대 120여 년 간 가업으로 이어온 전형적인 기법을 지니고 있는데, 아버지 권우갑(技能保有者)으로부터 15세 때인 1955년부터 전수하고, 현재 전국 조궁계(造弓界)의 중추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활은 궁간(弓幹)의 길이에 따라 장궁(長弓)과 단궁(短弓)으로, 구조에 따라 환목궁(丸木弓)과 복합궁(復合弓)으로 구분되는데, 예천의 활은 구조와 궁간으로 보아 복합 단궁(複合短弓)이라 할 수 있고, 일본이나 서양의 활에 비해 그 모양새나 실용면에서 훨씬 앞서고 있는데, 궁도(弓道)의 용구로서 뿐 아니라, 순수 수공예품(手工藝品)으로서 탁월한 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나의 활이 완성되기까지는 제작 기간이 약 10개월이 소요되고, 여러 가지 재료의 처리와 겹겹이 붙이고 말리는 작업의 전 과정이 궁장(弓匠) 한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다. 활의 주요 재료로는 대나무, 뽕나무, 굴참나무, 소심줄, 물소뿔, 민어풀 및 장식에 필요한 화피 등이 사용되고, 제작 도구로는 톱, 가구, 다리미, 두루자, 밧줄, 집개, 궁틀, 줄, 칼, 송곳, 심판, 대빗, 대패, 나무망치 등이고, 특별한 도구로는 도지개를 사용하고 있다. 제작 과정은 재료의 처리를 거쳐 부각(付角)→뒤설기(다듬기)→뒤졸음→심노이→점마→해궁(解弓)→고자손질→화피 단장(丹粧)의 순으로 복잡한 공정(工程)을 거쳐 하나의 활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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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장(弓匠) [工藝技術] : 서울 도봉구 창1동 664-24번지에 있는 궁장으로, 서울시 무형문화재 23호(2000.4.20 指定)이다. 궁(弓)은 활을 말하는 것으로써, 선사시대부터 전투용으로 사용되던 활을 전통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기술과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궁장이라고 한다. 선사시대에 사용되었던 돌로 된 화살촉이 우리 나라 전역에 걸쳐 발견되고 있으며, 기록에 의하면 삼국 이전의 부족국가였던 부여, 옥저, 마한, 진한, 변한 등에서 활을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활을 만드는 데는 약 80일이 걸리며 재료로는 느티나무, 뽕나무, 버드나무와 소뿔을 쓰는데 시기와 재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궁장은 전통적인 공예 기술로서 기능보유자로 권무석 씨가 전통 활의 명산지인 경북 예천에서 대를 이어 활을 제작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國家文化遺産綜合情報서비스 2004)
궁장(弓匠) [醴泉郡 文化財臺帳] : 지방무형문화재 제6호(1980.12.30 指定), 보유자 권우갑(權又甲, 學力은 漢學, 性別은 男, 本籍은 醴泉邑 旺新里 171, 住所는 醴泉邑 南本里, 生年月日은 1919.3.23), 후계자 권영학(權寧鶴, 1943.2.26生, 大卒, 1958年 以後)ㆍ박찬석(朴贊錫, 1953.7.15生, 中卒, 1971年 以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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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장(箭筒匠) [匠人] : 화살을 담는 긴 통을 제작하는 장인(匠人)으로, 예천 이씨 노인이 유명하다. 전통은 전일, 시통(矢筒), 동개라고도 한다. 기원은 신석기 시대로 추정되며, 수렵용과 전쟁용 두 가지가 있다. 전통을 재료별로 구분하면, 대나무로 만든 죽전통(竹箭筒)이 가장 많고, 종이를 재료로 한 지전통(紙箭筒), 거북껍질로 만드는 대모전통(玳瑁箭筒), 벚나무나 자작나무 껍질로 만드는 화피전통(花皮箭筒), 참종이를 겹겹이 발라서 만드는 지칠전통(紙漆箭筒), 오동나무 각전통(角箭筒), 투갑상어껍질로 만드는 어피전통(魚皮箭筒), 그리고 나전칠전통(螺鈿漆箭筒) 등이 있다. 전통 제작에는 창칼, 평도(平刀), 삼각도, 채칼 등이 필요하며, 재료에 따라 제작법이 다르다. 한국의 전통 생산지는 예천, 전주, 광주, 나주, 담양, 경주 등이고, 예천 이씨 노인의 지전통, 마산 박씨 노인의 조각전통 등이 유명하였다. 근래에는 광주의 조을석(趙乙錫), 순천의 윤재열(尹在烈)이 전통을 제작하였고, 현재는 포항의 김동학(金東鶴)이 전통장의 맥을 잇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3호이다(야후! 백과사전)
. [위키 辭典] : 화살을 담는 통을 만드는 사람으로, 전통은 활, 화살과 함께 시작되는데, 화살이 구석기 말부터 쓰였으므로, 이 역시 그 기원이 오래된 것으로 얘기된다. 전에는 마산, 진주, 광주, 예천 등에서 많이 있었으나 화살을 쓰지 않기 때문에 쇠퇴 일로에 서 있다. 현재 무형문화재 29호로 지정되어 보존하는 중이다.(위키辭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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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矢) [特産品] : 예천읍 서본리(西本里)에서 제작하고 있는 화살로, 우리 나라 전역에 걸쳐 마제(磨製) 석촉이 발견되어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화살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화살을 옛 솜씨 그대로 재현(再現)하는 이가 예천읍 서본2리의 김종국(金鍾國, 1936- )이다. 그는 20세 때부터 화살을 만들어 왔다. 그는 화살이 활의 한 부분품이 아니라 활보다 먼저 있었던 것으로 창(槍)이 발달하여 된 무기였다고 말한다. 활은 그 뒤에 화살을 목표물에 보낼 수 있게 하려고 만들었다는 것이다. 옛날의 화살로는 육량전, 동개살, 애기살, 고시, 장군전, 목전, 철전, 예전, 세전, 유엽전(柳葉錢)과 같은 것이 있어 열 가지가 넘었지만 지금은 유엽전 하나만 남아 국궁(國弓)에 쓰이고 있다. 그리고 무게가 대개 여섯 돈 반(半)에서 일곱 돈까지 나가는 유엽전도 원래 끝이 날카로운 쇠촉이었으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위험하게 여겨 대칼촉으로 바꾸어 놓은 뒤로 옛 모습을 잃고 말았다. 오늘날 사용하는 이 유엽전의 길이가 85cm 정도이고, 화살의 몸체는 대나무이며, 오니(화살의 上部)는 싸리나무로 만들어지고, 깃은 꿩깃으로 하며, 사정(射程) 거리는 150m 정도이다. 대나무는 강원도 해안 지대에서 자생하는 신이대(신누대)를 쓰고 있고, 3절로 된 것이 가장 알맞다고 한다. 싸리나무는 과거에는 광대싸리로 하였으나, 지금은 보통 참싸리를 사용하고, 오니를 둘러싸고 견고히 하고 습기를 방지하는 구실을 하는 것으로 도피(桃皮, 복숭아나무 껍질)를 사용한다. 꿩깃은 화살의 깃에 사용하며, 좌궁(左弓) 깃과 우궁(右弓) 깃에 쓰인다. 촉은 화살의 맨끝에 박는 것으로 오늘날은 탄피(彈皮)를 사용하고 있다. 소심줄(소등힘줄)은 윗 부분의 오니 부분과 하단(下端)의 촉 부분을 감싸는데 쓰이고, 오니 부분에 도피(桃皮)를 씌울 때와 하단 탄피(下端彈皮)를 씌우기 위하여 엷은 죽관(竹管)을 입힐 때와 꿩깃을 달 때에 사용하는 부레풀 등이 화살의 재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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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의 예술(화살의 藝術, 慶北 醴泉) [記事] : 활, 화살, 궁수(弓手), 이 3자의 호흡이 일치해야 명궁이 탄생한다. 따라서 명궁은 자기 호흡에 맞는 활이 아니면 쥐지않고 자기 기량에 맞지않는 화살은 먹이지 않는다. 화살은 무게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궁수의 기량과 취향에 따라 정해진 무게의 화살을 계속 사용한다. 아무 화살이나 덮어놓고 쏘지 않는다. 활을 주문할 때는 자기가 사용하는 화살의 무게만 말해준다. 제작자는 그 것만 보고도 그 사람의 기량과 취향을 알아서 적절한 활을 만들어 준다. 화살이 얼마나 정밀한 공예품인지 필자도 이 번에 처음 알았다. 하나 만드는데 손질이 150번 가야하고 화살을 보다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무늬를 놓는 것은 바로 미술이고 염색 공예다. 예천의 유일한 화살 공예가인 김종국(金鍾國) 씨 집에서 여러 가지 화살을 구경했다. ‘어디서 이성호가는 나이 애를 끊나니’하는 그 ‘호가’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필자는 정확히 배우지 못했다. ‘휘파람 소리’ ‘적의 노래소리’ 이런 정도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호가’는 효시(嚆矢)가 날아가는 소리다. 그 효시를 이 번에 구경할 수 있었다. 화살촉이 날카롭지 않고 밤톨같이 동그란데, 구멍이 세 개 뚫려 있었다. 구멍에 대고 훅 불어보니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났다. 이 것은 살상용이 아니고, 선전포고용 내지는 적군을 위협하기 위한 것이다. 매섭고 소름끼치는 소리를 휘이익 내면서 날아와 떨어지면 가뜩이나 두려움에 떨고있는 병사들의 간담이 서늘해진다. 이순신 장군 같은 명장도 ‘나의 애를 끊나니’했던 것으로 보아, 그 ‘효시’의 위력은 신경전용으로 대단했던 모양이다. 중국의 창법(槍法), 일본의 조총(鳥銃)과 함께 조선의 편전(片箭)은 가공할 무기였다. 편전은 수리검(短刀) 모양으로 머리가 무겁고 꼬리깃이 없었다. 길이도 퍽 짧은데, 철궁에 먹여서 쏘면 2km를 날아갔다고 한다. 오늘날의 곡사포다. 멀리 있는 적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한다. 적들은 방패로 앞을 막고, 눈을 방패 위에 내놓아 앞을 살펴야 하는데, 이 철궁 편전은 거의 눈을 맞혔다고 한다. ‘눈이 빠져도 그만하기 만행이다.’하는 말은 이 편전에서 비롯된 말인 듯. 투호시(投壺矢)는 아녀자들이 병에 던져 넣는 화살촉이었고, 머리에 빨간 주사(朱砂)를 발랐다. 주사는 점장이들이 부적을 쓸 때 쓰는 물감이고, 한약방에서는 경풍 치료제로 쓴다. 속신(俗信)에는 잡귀 쫓는 약이라 해서 화살 끝에 묻혀 방에 놓아두었던 모양이다. 투호는 반드시 아녀자들만 한 것이 아니었다. 안동 도서산서원에 갔더니 퇴계선생유물전시관에 투호와 화살이 있었다. 정신 통일과 심심 파적을 위해서 퇴계 선생도 이 놀이를 했다고 한다. 이 투호의 맥이 지금은 끊어졌다. 국민학교 운동회나 다른 운동 경기에서 왜 투호 경기를 안 하는지 모르겠다. 농구나 축구는 열나게 하면서 제 나라의 전통적인 경기는 잊어버리고 있다. 명절 날 한복을 다소곳이 입은 여인들이 마당에서 투시(投矢)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운동회 날이나 시합 때 한복 입은 여학생들이 운동장에나와 이 경기를 하면 얼마나 보기 좋을까? 양궁에는 별에 별 종목이 다 있는데, 국궁은 왜 한 종목 밖에 없는가? 88년올림픽 때 국궁이 들어가서 안될 이유가 있는가? 이 기회에 우리의 국궁을 세계에 과시하면 안될 일이 있는가? 투시를 전국체전 종목에 넣으면 안될 이유라도 있는가? 이제 정신을 차릴 때도 됐다. 문화적 굴종도 이만치 했으면 신물나게 했다. 화살공예가 김씨는 요새 화살에 문양 넣는 기술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옛사람들이 넣은 문양은 실로 절묘하고, 불가사의하다. 낙죽은 인두로 지져서 그리면 되지만 점반죽법(点斑竹法)은 문양을 염색한 것인데, 그 기법을 아는 사람이 우리 나라에 한 사람도 없다. 조선조 말부터 맥이 끊어졌다. 고려청자, 이조백자처럼 기술의 새로운 탐구가 시작될 수 밖에 없이 됐다. 김씨가 가지고 있는 화살의 문양은 당시 부대 표시라 한다. 이 무늬는 대나무껍질 위에 놓아졌는데, 절대로 지워지는 일이 없다. 김씨도 연구 끝에 몇 번 시도해 봤는데, 염이 먹기는 하나 흐려지고 퍼져서 또렷한 문양을 얻을 수 없었다 한다. 이 맥을 어쩌다 놓쳤는가? 답답한 노릇이다. 화살의 생명은 앞뒤가 튼튼하고 허리 힘이 좋고, 무개 균형이 정확하고, 직선이어야 하고, 줄 먹이는 뒷홈이 한 치 착오없이 정 중앙이어야 하고, 습기에도 휘여지지 않아야 한다. 정말 비행체다.(徐東燻 新風土記 230 韓國日報 198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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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통(화살筒) [特産品] : 화살을 담는 긴 통인데, 예천 이씨 노인의 지전통(紙箭筒)이 유명하였다. 활, 화살과 함께 전쟁과 사냥에서 반드시 필요한 무기였으며, 전통(箭筒), 전실(箭室), 전일, 시통(矢筒), 또는 동개라고도 하였다. 화살통은 우리 나라에서 그 역사가 오래되어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발달해 오기 시작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벽화에서 그 모습이 보이고, 신라나 백제의 고분에서도 화살통을 꾸몄던 꾸미개가 출토되어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군인이나 관청에서 조직적으로 활쏘기가 시행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군용품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총포와 화약의 발전으로 차츰 활이 무기로서의 기능을 잃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말에 이르러서는 국궁이 취미 생활로 변화되었고, 화살통 역시 전쟁용에서 운동용으로 변해지고 그 종류도 다양하며 사치하게 되었다. 화살통은 수렵용과 전쟁용 두 가지가 있고, 가볍고 질긴 재료로 만든다. 화살통을 만드는 재료로 나누어 보면, 대나무로 만든 죽전통(竹箭筒)이 가장 많고, 종이를 재료로 한 지전통(紙箭筒), 거북 껍질로 만드는 대모전통(玳瑁箭筒), 벚나무나 자작나무 껍질로 만드는 화피전통(花皮箭筒), 참종이를 겹겹이 발라서 만드는 지칠전통(紙漆箭筒), 오동나무로 만드는 각전통(角箭筒), 투갑상어 껍질로 만드는 어피전통(魚皮箭筒), 그리고 나전칠전통(螺鈿漆箭筒) 등이 있다. 예천, 전주, 광주, 나주, 담양, 경주 등에서 화살통을 잘 만들었고, 마산 박씨 노인의 조각 전통과 더불어 예천 이씨 노인의 지전통 등이 유명하였다. 근래에는 광주의 조을석(趙乙錫), 순천의 윤재열(尹在烈)이 화살통을 제작하였고, 현재는 포항의 김동학(金東鶴)이 중요무형문화재 제93호 전통장(箭筒匠)의 맥을 잇고 있다.(인터넷 MasterCrafts 2001)
화살통(화살筒) [韓國學資料] : 조선 후기에 만들어 진 화살을 담는 긴 통으로, 일명 전실시통(箭室矢筒) 또는 전통이라 부른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 화살을 넣어 다니는 통개(筒介)를 만드는 기술 및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통개장(筒介匠)이라고도 한다(중요무형문화재 제93호). 조선시대 전통은 전쟁용과 연습용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은 대부분 송학(松鶴)․포도․호랑이․사군자 등이 정교하게 새겨져 의장이 베풀어진 연습용으로, 각 지방 사정(射亭)을 중심으로 그 유품을 찾아볼 수가 있다. 예전에 전통을 생산하였던 곳으로 전해지는 지방으로는 전주․여주․담양․경주․예천․통영․여수 등인데, 지금은 담양․광주․포항 등지에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 화살통은 두꺼운 종이를 타원형으로 말아서 기름칠하여 형태를 만들었다. 뚜껑 부분에는 검은색으로 아자문(亞字文)으로 장식하였고 몸통부분에는 명문이 쓰여 있다. <참고문헌> :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전통장-(문화재관리국, 1988).(daum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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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 [文化財] : 1999학년도 안동대 오은석(9510418)의 학사 학위 논문으로, ''''예천이 활의 고장이 된 배경과 국궁의 계승"이 있다.(인터넷 Alta Vista 2001)
활(弓) [特産物] : 예천읍 왕신리(旺新里) 왕산골을 비롯한 예천군에서 생산되는 활로, 전국 활 생산량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예천은 지금도 이름난 국궁(國弓)의 명장(名匠)들이 조상의 얼이 담긴 활을 만드는 일에 정성을 쏟고 있는 곳으로, 수 천 년 전통의 한국 궁술을 잇는 활의 고장이다. 예로부터 활을 사랑하고 활쏘기를 즐긴 궁술의 고장인 예천에서는, 사내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활을 잡히고, 천자문을 깨우칠 때면 첫 시위를 당겨 준다. 또한 아들을 낳으면 새끼줄에 빨간 고추를 달아 대문에 거는 대신 활을 걸어 놓는 마을도 있다. 1979년 서(西)베를린에서 열렸던 제30회 세계 궁도대회에서 궁도의 샛별처럼 나타난 김진호(金珍浩) 소녀와 전국 궁도대회를 석권한 황숙주(黃淑珠) 소녀의 머리에 씌워진 월계관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이렇듯 예천에 궁도가 번성한 데는, 대대로 명궁(名弓)을 만들어 후학(後學)을 키워 온 유명한 조궁가(造弓家)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궁장으로 무형문화재 제47호인 권영록(權寧錄, 1916-1986)은, 4백 년 전부터 전승된 가업(家業)을 이어 받아 조상의 얼을 재현시키기 위하여 50여 년 간을 오직 활과 더불어 살았다. 국궁 애호가들로 알려진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사직공원 뒤 황학정에서 즐겨 쏘던 활과 박정희 대통령이 아산 현충사에서 시사(試射)하던 활이 모두 권영록이 만든 것이었으며, 외국 귀빈이었던 조지 부시 미국 부통령과 후꾸다 일본 수상에게 선물로 줄 만큼 권영록이 만든 활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름난 민예품(民藝品)이다. 왕신리 왕산골(旺山洞) 출신으로서, 이곳에서 전수받은 조궁술(造弓術)을 가지고 전국 각지에서 조상의 슬기를 펼치고 있는 궁장들은 다음과 같다. 권영록(남본리, 인간문화재 47호, 전수자 : 권오규, 권오덕), 권영호(대구, 권영록의 4촌), 권우갑(남본리, 지방무형문화재 6호, 전수자 : 권영학), 박찬석(강원 원주), 권태흥(전남 광주), 권태기(충남 대전, 권태흥과 형제), 김봉원(경남 진해), 권오수(경남 마산), 권종익(경기 수원), 권영식(경기 수원), 이치우(경기 수원, 권영식의 사위, 전수자 : 권광평(처남)), 권영덕(전북 정읍), 김박연(경기 부천)이다. 내무부는 1982년 8월 17일 아세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나라 고유의 특산물을 올림픽 상품으로 개발하기 위해 1982년 제1차로 120개 특산물(特産物)에 대한 개발을 집중 지원키로 했는데, 예천 지방 지정 특산물은 활이다.(松臺 第2輯 89-91쪽, 大邱每日新聞 198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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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유동복, 18일 경북 궁도대회 3위...축하합니다.
유동복(醴泉 유동복, 慶北 男女弓道大會 3位) [記事] :
2010 경상북도 남녀궁도대회가 2010년 4월 18일 상주시 남산공원 내 상무정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이번 대회에는 도내 17개 시·군 300여명의 궁도 동호인과 임원들이 참가했으며 김관용 도지사와 성윤환 국회의원, 각급 기관단체장 등이 행사장을 찾아 대회를 더욱 빛냈다.
경상북도 궁도대회는 잊혀져가는 전통문화의 계승과 심신단련은 물론 동호인의 저변확대 및 활성화를 위해 매년 2회에 걸쳐 도내 각 시·군에서 번갈아 가며 열리고 있으며 이번 대회는 단체전과 개인전 장년부, 여자부, 노년부로 나눠 진행됐다.
경기결과 개인전 노년부에서 예천의 류동복 선수가 3위를 차지하였다.
(곽인규 記者 慶北每日新聞 2010-04-20 오후 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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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601
석송령 : 석송령(石松靈) 기네스북 등재 추진 | 예천신문 | 2010.04.20 07:05/ http://cafe.daum.net/ycnews365/ 천연기념물 제294호 석송령(石松靈) 기네스북 등재 추진/
한국기록원은 감천면 천향리 천연기념물 제294호인 석송령(石松靈)을 ‘세계 최초 재산을 보유한 식물’로 기네스북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석송령(石松靈)은 수령 6백여 년의 반송으로, 높이 10m, 둘레 4.2m의 웅장하고 수려한 외관뿐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토지를 보유하고 매년 재산세를 내는 소나무로 유명하다.
예천군은 석송령(石松靈)의 기네스북 등재를 위해 토지보유와 납세에 관한 객관적인 증빙자료는 물론 영상, 사진, 문화재 지정관련 서류 등 기네스북 등재에 필요한 관련 자료를 한국기록원에 제출한 상태다.
2010년 2월 17일 예천군과 기네스북 등재를 위한 협약을 맺은 한국기록원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석송령(石松靈)에 관한 증빙자료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한편, 번역절차와 기네스월드레코드사(社)의 심의과정을 통해 기네스북 등재가 가능토록 추진할 방침이다.
한국기록원 민병권 사무총장은 “식물이 재산을 가지고 세금을 냈다는 기록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로, 이번 기네스북 등재를 통해 한국의 향토문화적인 정서와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석송령(石松靈)은 1927년 자식이 없던 이수목(李秀睦)이라는 마을주민이 석평마을의 영험한 나무라는 뜻의 ‘석송령’이란 이름을 짓고 이 나무에 자신 소유의 토지 3천9백37㎡를 상속 등기하여 토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마을주민들로 구성된 석송령보존회에서는 1985년 전두환 대통령 하사금(5백만원)과 석송령이 보유한 토지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매년 마을주민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석송령의 재산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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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