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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171:예천체육53(附예천방문602)
예천의 자랑(2171) : 醴泉體育史資料集(53)(附 예천방문 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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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 [記事] : 예천읍 남본동은 사람들이 아들을 낳으면 새끼줄에 고추 대신 활을 건다는 마을이다. 기계로 찍어내는 양궁이나 커다란 나무에 시위를 거는 일본 활은 우리 활인 국궁에 견주어 시위의 탄력이 볼품이 없거니와 지니기도 불편하다. 초승달처럼 굽게 만든 활을 뒤로 젖혀 시위를 걸러 ‘얹은 활’이 되게 하는 데에 쌀 반 가마를 드는 힘이 들어간다는 국궁은 탄력의 극치를 이룬다. 그리고 그만큼 만드는 과정도 복잡하고 정성이 들어간다. 인간문화재 47호인 권영록 씨는 자정이 넘어 주위가 고요한 한밤중이 되어야 일을 시작한다. 연장이라고 해야 톱, 망치, 대빗, 대칼, 도가니, 밧줄이 전부이고, 오로지 몸과 마음을 집중하여 탄력을 안에 한껏 감춘 활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전라남도 담양에서 나는 장대, 지리산 산뽕나무, 태백산 굴참나무, 황소 한 마리에 하나밖에 없는 등힘줄, 태국이나 대만에서 들여오는 물소뿔, 황해에서 잡은 민어에서 빼낸 부래풀, 활 장식에 쓸 벚나무 껍질 따위가 이 전통 활을 만드는 데에 쓰이는 재료이다. 두 자 두 치 크기로 자른 왕대를 한두 달에 걸쳐 물에 담갔다가 불에 구워 진을 빼낸 뒤에 물소뿔을 붙이고, 실처럼 쪼갠 등힘줄을 부레풀로 바른다. 손잡이인 활 복판의 ‘줌통‘은 참나무로 붙이고, 활의 양끝에 산뽕나무를 이어 ’버들잎‘을 만든다. 여러 가지의 재료를 붙이는 데에 쪼갠 등힘줄 열네 가닥이 들어가는데, 한 번 붙인 등힘줄이 마르기까지는 2-3일이 걸린다. 그리고 활 한 장을 만드는 데에 황소 등힘줄이 두 개가 들어간다. 벚나무 껍질을 입혀 멋을 내고 버들잎에 빨강과 노랑과 파랑의 전을 둘러 색을 갖추면 무기라기보다 오히려 예술품에 가까운 활이 완성된다. 이렇게 해서 활 한 장이 완성되기까지에는 넉 달이 좋이 걸린다.(韓國의 發見(4) 148-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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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 마을(“우리 마을 最高야...” 23回, 醴泉邑 南本洞 ‘활 마을’) [記事] : 무학정(武學亭) 활터로 행수(行首) 어른이 오른다. 음력 새해 초순(初巡 : 처음 활을 쏘는 것)을 할 참이다. 잿빛 두루마기에 남색 전대(箭袋) 질끈 매고 청복갓(淸福笠)을 훌렁벗어 뒤로 젖힌 채 흰 수염을 날리며 사석(射席)에 버틴 궁체(弓體, 활 쏘는 姿勢)가 그렇게도 멋들어질 수가 없다. [아들 낳으면 활 걸어] : ‘줌통’에 힘을 주고 시위를 당기니 파도같던 활 모양이 ‘ㄷ'''' 자(字)로 휘어진다. 불덩이를 떨 듯 ’절피‘ 쥔 오른손을 살짝 놓는다. 시위 떠난 유엽전(柳葉箭)은 바람을 가르고 잔솔밭 너머 과녁에 천둥소리를 낸다. 경북 예천은 옛부터 활을 사랑하고 활 쏘기를 즐긴 궁술(弓術)의 고장, 군내 1읍 11면 중에서도 예천읍 남본동은 사내아이 걸음마 배울 때 활을 잡히고, 전자문 깨우칠 때 첫시위를 당겨준다는 ’활 마을‘이다. “고추를 낳으면 새끼줄에 빨간 고추 달아놓는 대신 우리 마을에선 활을 걸어주지요.” 무학정 사원(射員) 장봉현(張鳳鉉) 씨(48)는 군기(郡技)가 궁도이고, 예천여고, 예천중의 교기(校技)가 궁도이며, 읍민 25,000명 중 반이 활을 쏜다는 자랑이다. 궁도대회 금메달 5관왕 김진호 양도 바로 이 고장 출신, 이 마을에 궁도가 번성한 데는 대대로 명궁(名弓)을 만들며 후학을 키워온 조궁가(造宮家)가 있었기 때문이다. 12대 400여 년을 이어온 국궁의 종가 권영록(權寧錄) 옹(66, 인간문화재 47호)... 남본동 245번지 나직한 한옥 3칸이 옹의 집이자 작업장, 그의 가업은 이조 숙종 때 11대 조상인 계황(繼黃) 씨가 활의 본고장 개성에서 기술을 배워 지금의 예천읍 왕신동에서 조궁업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옹의 7대조 희직(熙直)은 순조의 어명으로 활 10만 장을 만들어 바쳐 교위용장(校尉勇將)의 벼슬을 하사받기도 했다.
[金珍浩 等 스타 輩出] : 16살 때 아버지 태선(泰善)으로부터 솜씨를 전수받아 50년을 활 제작에 살아온 권옹은 지금까지 10여만 장의 각궁(角弓)을 만들어 국궁의 후예들을 키웠다. 고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사직공원 뒤 황학정(黃鶴亭)에서 쏘던 활과 고 박정희 대통령이 아산 현충사에서 시사하던 활이 모두 권옹의 작품이었다. 해방 3년 전부터 물소뿔 수입이 금지되면서 권옹의 가업도 중단되었다. 1948년 이 소식을 들은 이 대통령은 권옹을 경무대로 불러 위로한 뒤 그 자리에서 물소뿔 수입을 명령할 만큼 우리 활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정심정기(正心正氣)가 궁장(弓匠)의 자세, 마음이 어지럽고 정신이 흔들려선 활이 바로 보이지 않는다. 주위가 조용히 잠든 한밤중이 권옹의 작업 시간, 새벽 1시면 자리에서 일어나 장남 오규(五奎, 44) 씨만을 옆에 두고 활을 다듬는다. 20살 때 종아리 맞아가며 톱질부터 시작, 그도 벌써 24년째 아버지의 신기(神技)를 익히고 있다. 톱, 망치, 밧줄, 대빗, 도가니, 죽도(竹刀)가 연장의 전부, 손끝의 촉감과 눈대중이 명궁을 만드는 요체이다. 담양(潭陽) 왕대, 지리산(智異山) 산뽕나무, 태백산 굴참나무, 황소등힘줄, 물소뿔(泰國, 臺灣産), 민어풀(민어 부레를 건조시켜 만든 풀), 화피(樺皮, 벚나무껍질)가 기본 부재(部材)
. [잘 만든 건 30萬 원] : 왕대를 두 자 두 치 크기로 잘라 불에 구워 진을 뺀 뒤 물소뿔을 톱으로 켜 대나무에 불이고, 머리카락같은 소등힘줄을 민어풀로 바른다. 황소 한 마리에 하나 뿐인 등힘줄은 망치로 두들겨 고기와 기름을 빼고, 손톱으로 짼 뒤 대빗으로 계속 빗으면 모시날처럼 곱고 가늘게 갈라진다. 활 한 장에 소등힘줄이 2개. 황소 두 마리의 힘이 들어가는 셈이다. ’줌통‘은 참나무를 깎아 물에 삶은 뒤 다시 불에 구워 ’왼구비‘로 붙이고 활의 양 끝에 산뽕나무를 이어 ’버들잎‘을 만든다. 등힘줄은 4번에 나누어 붙인다. 처음에 붙이는 걸 ’초힘‘, 두 번째가 ’재힘‘, 세 번째는 ’첨력‘이라 하고, 끝으로 활 안쪽 전부에 긴 힘줄을 붙여 ’매임‘이라고 한다. 활이 다 된 다음에는 모양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화피(樺皮)를 입혀 단장한다. 더 멋을 부리는 데는 ’버들잎‘ 장식인 ’고자단장‘으로 완자 무늬에 홍, 황, 녹전을 둘러 색을 갖춘다. 하나의 활이 완성되는데 4개월, 1년이면 200여 장을 내지만 마음에 쑥 드는 절품은 열 손가락 안이란다. 잘된 활을 값으로 따지면 30만 원 정도라고 한다. 화피 단장이 화려하지 않은 것은 15만 원, “아버님이 인간문화재로 지정되고 보니, 다작을 할 수도 없고 활 한 장 팔면 5만여 원 정도 남아 한 달 수입은 70만-80만 원쯤 됩니다.” 오규 씨는 쏟는 정성에 비하면 수입이 신통치 않아 이 고장에서도 할쏘기는 해도 활 만드는 일은 모두 손을 뗐다는 설명이다.
[志正體直을 가르쳐] : 78kg의 체구에 하루 담배 2갑, 2홉 소주 2병을 마시는 권옹은 지금껏 감기 한 번 앓은 일이 없단다. 동그랗게 오그라든 활을 뒤로 젖혀 ’얹은활‘을 만든 뒤 활의 곧고 굽음, 두터움, 강도를 조정하는 해궁(解弓)엔 쌀 반 가마 드는 힘이 든다. 권옹은 지금도 하루 20장의 해궁을 해내는 황소힘이다. 궁도의 ’도(道)‘는 예의가 첫째, 활을 쏠 때도 반드시 “활 배웁니다’고 인사를 하고, 이 때 주위 사우(射友)들은 ”많이 맞히시오“, 또는 ”연중(連中) 하시오“ 등의 초순례(初巡禮)를 갖추어야 한다. 궁도반을 지도하는 최태석(38, 예천중) 교사는 활을 쏘는 모든 학생들에게 권옹의 ‘뜻과 몸을 바르게(志正體直)“하라는 가르침이 배어 있다고 한다. 당구장, 전자오락실, 만화가게가 재미를 못보는 것도 이 마을 특징, 어른 아이 모두가 여가를 남산 무학정 활터에서 활을 잡고 심신을 단련하기 때문이다. 물맛이 차고 달아 이름 붙어진 예천읍, 궁술에서 활달한 기품을 키우고 궁도에서 예절을 배우는 주민들은 국궁의 후예답게 활터에서 산다.(高正雄 記者 中央日報 198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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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요(弓謠) [歌辭] : 예천 지방에서 불리어 지던 가사이다. [內容] : 활이로다 활이로다/ 이 활이 웬 활인고/ 유궁후에 활일른가/ 박문자에 활이른가/ 양유기에 활이른가/ 윤공지타 활이른가/ 태산 남짝 오호나무/ 연(燕) 나라 활소뿔에/ 초(楚) 나라 사슴 힘줄/ 하여의 부레풀에/ 네 가지 음처다가/ 좋게 만든 활이른가/ 아니로세 아니로세/ 이 활이 딴 활일새/ 지원 녹죽 좋은 대를/ 드난 칼로 비어 내고/ 회게산에 좋은 딱을/ 드난 낫으로 쩌다가서/ 어영굽게 대를 휘고/ 눈고르게 딱을 꼬아/ 노 맨들어 대를 매어/ 팽팽 세게 놓았으니/ 대도 좋해 대도 좋해/ 나도 너와 같고지고/ 내 뿌리가 굳었으니/ 내 마음도 굳어지고/(以下 省略, <醴泉文化> 6輯(1993)에 全文이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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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무구(醴泉邑 권무구 氏 鄕土奉仕賞 受賞) [記事] : 경북도가 선발 표창하는 2002년 향토봉사상에 전통 국궁의 맥을 이어온 공로로 권무구(60․예천읍 왕신리) 씨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권씨는 매년 200여 장의 국궁을 제작하며 예천 활의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등 전통 활의 전수 보급에 노력해 온 공로로 이 번에 수상을 하게 됐다. 향토봉사상은 1985년부터 애향심을 가지고 향토 발전을 위해 봉사하는 도민을 선발, 도 공적심사위원회 심사를 거쳐 시상하는 상이다.(醴泉新聞 2002-04-0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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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무석(弓匠 11대째 이어온 권무석 氏의ꡐ角弓禮讚ꡑ) [記事] :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말에 올라탄 5명의 인물이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 화살은 이들이 쫓고 있는 사슴과 호랑이의 심장을 단숨에 뚫을 기세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에 있는 무용총 수렵도(5세기 말~6세기 초). 이 벽화에는 동북아시아에서 위세를 떨쳤던 고구려인의 힘찬 기상이 엿보인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상암정. 화살이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 한 발, 두 발…. 궁사들의 몸은 어느 새 활, 과녁과 하나가 됐다. 사대 뒤편에서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3호 궁장(弓匠) 기능 보유자 권무석(66) 씨. 그는 물소 뿔을 재료로 사용하는, 전통 활 각궁(角弓)을 만든다. 그에게 궁장은 조선 숙종 때부터 11대째 이어져온 가업(家業)이다.
[우리 민족의ꡐ명품ꡑ각궁] : 상암정 한 쪽에 마련된 그의 작업장은 마무리 작업으로 분주했다. 해궁(解弓) 과정이다. C자형의ꡐ부린활ꡑ(시위를 벗긴 활)에 시위를 걸어 마지막 모양을 잡는 단계다. 장인의 솜씨에 따라 활의 강도와 성능이 달라진다. 우리 민족에게 활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생계를 이어주는 사냥 도구인 동시에 이 땅을 지켜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수광은ꡐ지봉유설(芝峰類說)ꡑ에서 조선의 활과 중국의 창, 일본의 조총을 각각 최고의 무기라고 했다.ꡒ조총의 사거리가 50m 안팎인 반면 활은 300~400m였습니다. 거리가 멀어지면 힘없이 떨어지는 총알과 달리 화살은 수 백 보를 날아간 뒤에도 가속도가 붙어 과녁을 꿰뚫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청 나라가 요구한 공물 품목에는 각궁이 들어있을 정도로 우리 활은 예로부터 명품이었습니다.ꡓ권 궁장의 말이다.
[1000번의 손길이 있어야] : 각궁은 길이 120~130cm의 단궁(短弓)이자 여러 재료를 사용하는 복합궁이다. 물소 뿔, 소 힘줄, 대나무, 뽕나무, 참나무, 화피(벚나무 껍질), 민어부레풀 등 7가지 재료가 사용된다. 각궁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상상을 초월하는, 땀과 시간과의 싸움이다. 1cm가 채 되지 않는 대나무에 겉쪽에는 물소 뿔, 안쪽에는 소 힘줄, 끝부분에는 뽕나무, 손잡이에는 참나무 등 각기 다른 재료를 붙인다. 본격적인 작업은 3개월이 걸리지만 재료의 준비와 가공에 한 해가 꼬박 걸린다. 접착제는 어교(魚膠)라는 민어부레풀을 사용하는데 각 재료를 붙일 때마다 수 십, 수 백 회의 손 작업을 거치게 된다. 권 궁장은,ꡒ활 하나에 1000번, 화살 하나에 100번의 손길이 필요하다ꡓ며,ꡒ빠른 것 좋아하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보면 각궁 제작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일 것ꡓ이라고 말했다. [우리 집 활은 내 대에서 끝났다] : 그가 처음부터 궁장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활로 유명한 경북 예천에서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활 만들기를 거들었지만 일이 달갑지 않았다고 했다. 궁장은 17년 터울의 큰형(권영호 씨․작고) 몫이었다.ꡒ정말 활은 내 것이 아니다 생각했죠. 하물며 내 인생도 내 것이 아니었는데…. 살다가 힘들어 세 번이나 죽으려고 했고, 활과는 담 쌓은 채 살아갔죠.ꡓ1970년대 후반 추석 때의 일이다. 큰형이 제사상을 물린 뒤,ꡒ우리 집 활은 내 대에서 끝났다ꡓ는 폭탄 선언을 했다. 두 조카의 꿈은 활과는 상관없는 다른 것이었다. 결국 서울로 형님을 모신 뒤 활 공부를 3년 간 다시 했다. 그의 나이 마흔이 다 된 때였다.ꡒ지금 자다 깨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지만 핏줄 속에 있는 뭔가가 사람을 활로 끌고 간 것 같습니다.ꡓ[요즘도 할머니 곁에 가십니까] : 부린활을 다루던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 기자에게,ꡒ꼭 활을 배우라ꡓ고 했다. 1980년대 초반 활 쏘는 법도 함께 배웠는데 가장 궁금한 것이 국궁이 정력에 좋다는 말이었다. 국궁하는 사람치고 배 나온 사람이 없고, 70대 이상의 정정한 명궁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ꡒ그 때 나이 든 분들을 찾아다니며,ꡐ요즘도 할머니 곁에 가시냐ꡑ고 물었죠. 그러면 10명 중 9명의 대답이ꡐ그렇다ꡑ였어요. 나중에 스포츠 과학을 연구해 보니 알겠어요. 국궁은 보기에는 정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굉장히 동적인 운동입니다.ꡓ옆에 있던 이환철(56․국궁 공인 9단) 씨가 거들었다. 이 씨는,ꡒ국궁은 시위를 당기면서 전신을 사용하고, 시위를 놓으면 진동으로 전신 마사지 효과가 있다ꡓ고 말했다. 가업에 대한 권 궁장의 생각은 어떨까.ꡒ아들이 하나 있어요. 음악인가 랩인가를 한다더니 군대에 갔죠. 사실 다 계산이 있어서 공부 열심히 안 해도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웃음)ꡓ 아들 얘기를 하면서 그는 자신이 만든 활의 시위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가 숙명처럼 맞았고, 또 자식에게 쏘는 운명적인 화살이다. 강요는 아니지만 간절한 바람이 담긴...
[국궁 기초훈련 2~3개월 필요 초보자용 장비는 40만 원 수준] : 초보자가 국궁을 배우려면 가까운 활터를 찾는 게 좋다. 서울에는 종로구 사직동 황학정 등 9개, 전국적으로는 300여 개의 활터가 있다. 동호인은 약 2만 명이다. 초보자의 경우 2~3개월의 기초 과정을 통해 기본 자세와 요령을 배워야 한다. 활터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략 입회금(10만 원)과 월 회비(2만~3만 원)를 내면 사범으로부터 활쏘기를 배울 수 있다. 장비는 각궁의 경우 활(65만 원)과 죽시 10대, 손에 끼는 각지를 합해 100만 원, 초보자용 카본궁은 전체 비용이 35만~40만 원 수준이다. 각궁은 초보자의 경우 다루기가 힘들고 파손 위험도 있기 때문에 기량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뒤 사용해야 한다. 활터와 장비에 관한 기본 정보는ꡐ대한궁도협회ꡑ 홈페이지(kungdo.sports.or.kr)를 참조하면 된다. 활과 화살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주는 박물관도 있다. 2001년 문을 연 경기 파주시 탄현면ꡐ영집궁시박물관ꡑ(www.arrow.or.kr)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弓矢匠) 기능 보유자인 영집 유영기 씨가 세운 곳이다. 유씨가 직접 만든 화살을 비롯해 전통 활, 세계 각국의 활과 화살이 전시돼 있다. 각궁 제작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031-944-6800(김갑식 記者 東亞日報 2005.4.7 (목) 17:17)
권무석( "300年 家業을 避할 순 없었어" "가난해도 이게 사람답게 사는 길이니까" : 활 만드는 男子… 安東權氏 충일공파 12代 弓匠 權武奭 氏) [記事] : 권계황(權繼黃)은 조선조 숙종(1674~1720) 때 사람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양에 살던 권계황은 일찌감치 경상도 예천으로 내려가 활을 만들기 시작했다. 소뿔을 다듬어 만드는 각궁(角弓)이다. 권계황은 그 활을 예천 관아에 납품하는 궁장(弓匠)이었다. 그가 죽자 아들이 활을 만들었다. 그 아들이 죽자 손자가 활을 만들었다. 그 손자가 죽자 또 그 아래가 활을 만들었고. 자, 그리하여 권계황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 안동 권씨 충일공파 12대 권무석(權武奭․65)이 지금 활을 만들게 됐다. 모든 게 광속(光速)으로 바뀌고 있는 이 시대에, 300년 동안 가업(家業)을 잇고 있는 무시무시한 고집쟁이 집안 이야기. [가난으로 가출․자살시도… 37세에 가업 이어] : 1980년 추석, 고향 예천을 찾았던 권무석 씨에게 17년 터울 큰 형(권영호․작고)이 말했다. "우리집 대(代)가 끊겼다." 남자는 으레 아버지를 따라 궁장(弓匠)의 길을 가는 게 권씨 집안 300년 전통이었다. 그런데 두 아들이 활 만들기를 포기하고 교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열두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활 만들기를 배웠지만, 형이 대를 이으면서 그는 활을 등지고 대신 버스 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권씨가 말했다. "정말 쩌릿하게 충격을 받았어요. 권씨 가문에서 활이 없어진다…." 며칠을 고민했다. 가난한 가업을 이을 것인가, 아니면 그저 평범하게 아내와 아이들이랑 알콩달콩 살 것인가. 누나도 반대했고, 아내도 반대했다. 그런데 그는 가업을 택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라고 그가 말했다. "집이 가난해서 학교도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만뒀어요. 두 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집은 가난하지, 어디 취직하려고 해도 학벌이 없지…. 무슨 인생이,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가출도 여러 번 했고, 자살 미수도 세 번 있었어요." 그때마다 어머니가 이렇게 아들을 달랬다. "제발 사람답게 살아라, 제발." "이미 사람인데 왜 사람 되라 하느냐"고 반항하는 아들을 남기고, 아들이 열여덟 살 되던 해 어머니마저 하늘로 갔다. 한탄하는 형님을 보고 있는데, "제발"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천둥소리를 내더라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두고 편히 돌아가셨을까… 바꿔서 생각하니까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노(老) 장인이 40대 기자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37세 버스 기사 권무석은 가업을 잇게 되었다. 형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기초부터 활을 다시 배웠다. 1986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궁장 기능보유자인 장진섭(작고) 씨로부터 또 배웠다. 장씨 또한 할아버지가 고종 황제의 활을 만든, 궁장 집안이다. 그런데 두 아들이 가난을 버리고 다른 직업을 택했으니, 장씨는 유일하게 남은 전수자 권씨에게 모든 것을 가르쳤다. "쏴봐야 만들 수 있다"며 궁술도 배웠다. 전통활쏘기 기능보유자 장석후(작고) 선생에게 전통 사법(射法)을 배웠다. 그래서 서울 인왕산에 있는 활터 황학정에서 활을 가르쳤고, 1988년과 1992년 경찰대학과 육군사관학교에 궁도 강좌를 개설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육사에 제출한 이력서 학력란에는 ''''독학(獨學)''''이라고 적었다. 내력을 알고서 인사 담당자가 "존경한다"고 했다. 권씨는 "내가 잘 살았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활 하나 값은 삼국시대나 지금이나 쌀 세 가마"] : 그가 만드는 활은 각궁(角弓), 소뿔로 만든다. 소뿔 중에도 탄력이 좋은 중국산 물소뿔이다. 길이 1m 20cm 정도 되는 대나무에 소뿔을 잘라 붙이고, 소 힘줄을 덧대고 뽕나무, 참나무, 벚나무 껍질 따위 재료들을 붙이고 나면 활이 C자처럼 안쪽으로 휘어진다. 둥그렇게 휜 그 활을 반대쪽으로 휘어 활줄을 걸면 활이 완성된다. 그 만드는 방식, 1000년째 변함이 없다. 각각 재료를 붙이고 말리는 데 꼬박 석 달, 재료 준비와 가공에는 일 년이 꼬박 걸리니, 일 년에 50개 만들면 많이 만드는 것도 변함이 없다. 실학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최고의 무기는 조선의 활과 중국의 창, 일본의 조총"이라고 했다. 각국 최고이지만, 조총이 멀어야 50m 나가는 반면 조선 각궁은 400m 앞 물체까지 꿰뚫는다. 월남전 때 박정희 대통령이 미군 M16 소총을 들여와 한국형 소총 개발에 나섰 듯, 청나라에서 언제나 공물로 각궁을 가져가 궁리를 했지만 나라가 망할 때까지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1000년째 변함 없는 것, 또 있다. 활 가격이다. "삼국시대 때부터 활 값은 하나당 쌀 세 가마예요. 조선시대에도 세 가마, 1950년대도 세 가마, 2008년에도 세 가마." 1000년 전 쌀 세 가마와 지금의 쌀 세 가마. 단위는 동일하되 가치는 하늘과 땅 차이다. "내 조카들이 그래서 활을 버렸어요. 우리 집사람이 반대한 이유도 그거고. 이제는 활 하나 팔면 친구랑 술 쎄게 한번 먹으면 남는 게 없어." 한때 전국에 60명 넘게 있던 궁장이 지금은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돈 안 되는 장인의 길이 험난하고 드물기에, 나라에서는 그들을 무형문화재로 만들어 명예와 경제를 후원한다. 권씨도 2000년 서울시로부터 무형문화재 23호로 선정됐다. 매달 지원금으로 100만 원이 나온다. 그런데, "이게 잘못됐다"고 했다. "문화라는 것이, 전수가 되어야 문화지요. 전수자로 지정되면 매달 12만 원이 나옵니다. 다 큰 성인이 다른 일 다 때려치우고 장인 공부를 하는데, 12만 원이면 생계가 안 되지요." 전수자로 들어왔던 사람들이 6개월만 지나면 들고 왔던 보따리까지 집어 던지고 가버린다고 한다.
["무형문화재 전수자에 월12만원… 다 도망가"] : 그런데도 그는 활을 만든다. "일단 굶어 죽지는 않았고, 또 이걸 하니까 외국에 전시도 하고 대접도 받고, 문화도 잇고 하잖소. 절대로 후회는 없어요. 한들 뭐해? 시간 되돌릴 수 있나?" 집안으로는 300년, 본인으로는 외도(外道) 15년을 제외하고 열두 살 때부터 지금까지 38년째다. 지독하다 못해 미쳤다. "''''그래, 미치자, 안 미치면 이거 못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미쳐갔다. "활 없이는 4341년 조선 역사를 쓰지 못합니다. 주몽부터 이성계까지 모두 궁사였고, 외침 때는 활로 적을 물리치고 평화시에는 활로 호연지기를 기르고 상무심을 단련했습니다. 농사문화보다 먼저 시작한, 조선의 뿌리문화예요." 물소뿔을 사려고 중국을 29번 들락거렸다. "한족 다음으로 많은 민족이 만주족인데, 자기가 만주족이라는 사람 딱 한 명 만났어요. 다 자기가 한족이라는 거예요. 왜? 그게 다 문화가 없고 전승이 사라졌기 때문이지." 그가 활에 미친 이유다. 활이 없어지면, 그에겐 조선이 사라진다.
["태권도처럼 세계에 국궁 가르치겠다" 미국으로] : 예순다섯 된 권씨가 2008년 3월 6일 미국 워싱턴DC로 떠났다. 또 어딘가에 미쳐있다. 보따리에는 국궁 20개와 화살들, 그리고 영어로 번역한 궁술 교본이 들어있다. "궁술을 미국에 보급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허허벌판으로 들어가는 심정이지만, 자신 있다"고 했다. 예절을 가르치는 태권도가 미국에 인기리에 보급됐 듯, 도(道)를 배우는 궁도(弓道)도 지식인의 교양체육으로 전파되리라는 자신감이다. 머리에 잔설이 내린 노 장인이 미친 곳, 국궁의 세계화였다. 이미 중국에는 옌볜(延邊)대학교에 활터를 만들었다. "미국에서 세 가마 이상 돈을 벌어 아들에게 궁장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했다. 어릴 적, 연장 하나 집어달라면 발로 차고 도망가던 작곡가 아들이 군대를 다녀와서는 활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안동 권씨 충일공파 13대 궁장이다. 권씨가 말했다. "지금 처져버리면 영원히 못 일어납니다. 죽을 때까지 도전해야죠."(박종인 記者 朝鮮日報 2008.03.08 13:39)
권무석([傳統을 잇는 사람들] <14> 無形文化財 弓匠 권무석 氏, 12代째 家業 이어가며 활에 ‘民族의 魂’ 불어넣다) [記事] : “미국에 가서 서양의 활들과 겨루어 보았는데 활 크기는 2m가 넘어도 겨우 100m 정도밖에 날아가지 못했습니다. 우리 각궁은 크기는 작지만 보통 사람이 쏘아도 250m는 너끈히 날려보냅니다. 우리 활은 우리 민족의 혼입니다.” ◇권무석 궁장이 물소 뿔을 재료로 우리의 전통 활인 각궁을 만들고 있다. 습도가 높으면 풀이 붙지 않아서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년에 4개월만 작업할 수 있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23호 궁장 권무석(67) 씨는 조선 숙종대 이래 경북 예천에서 12대째 활을 만들어온 집안의 장인이다. 권씨는 그 명맥이 끊어질 듯 희미하게 이어지고 있는 국궁 제작자이자 활쏘기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 활 지킴이다. 사실 ‘국궁’이란 표현은 양궁이 유입되면서 편의상 구분하기 위해 쓴 표현일 뿐 그냥 우리 활이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그는 ‘궁도’라는 표현도 일제의 영향을 받은 표현이라고 못마땅해 했다. 권씨는 12살 때부터 활 만들기를 배우기 시작해 21살 때 군에 가기 전까지 형 권영호의 공방에서 1년에 50개 정도를 제작했다. 군 입대 후에는 월남에도 다녀왔고, 제대 후에는 체신공무원과 버스운전기사를 거치며 활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 1970년대 후반 추석 때 그의 형이 “내 대에서 이제 활은 끝나는가 보다”라고 탄식하던 소리가 귓전에서 떠나지 않아 결국 자신이 형의 뒤를 잇게 되었다. 제작 시간도 오래 걸리고 재료 구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수지타산마저 맞지 않으니 활 만들기를 생업으로 삼는 자녀들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물소 뿔을 재료로 사용하는 전통 활 각궁(角弓)을 만든다. 물소 뿔은 물론 소 힘줄, 대나무, 뽕나무, 화피(벚나무 껍질), 민어부레풀 등 7가지 재료가 사용된다. 실제 작업 기간은 최소 2개월 정도 걸리지만 재료 준비와 가공 시간까지 합치면 1년 넘게 소요된다. 권 궁장은 “활 하나 만들려면 손이 1000번 이상 가야 한다”면서 “30년 넘게 이 일을 해왔지만 1년에 100개 이상 만들어본 적 없고 평균 50∼70개 정도 완성하는데 이 중 20% 정도는 파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활 제작에만 매달리지 않고 스스로 육군사관학교와 경찰대학을 찾아가 활쏘기 강좌를 유도해 냈다. 고종 때 경희궁에 만든 활터 황학정에서는 활쏘기 사범으로도 복무했다. “요새는 전국 어디를 가나 그냥 쏘아서 맞히는 것만 가르치는데 옛 어른들이 가르친 대로 호흡까지 따라 하면 위장병이나 관절염도 완화시킬 수 있는 웰빙스포츠가 바로 전통 활쏘기입니다. 지금도 활터에 가면 90살 넘은 분들도 나오는데 그분들 건강은 바로 전통 활쏘기 덕분입니다.” 그가 ‘웰빙스포츠’라는 표현을 쓰는 배경에는 해외에 ‘활쏘기 전도사’로 나아가 애를 쓴 경험이 자리잡고 있다. 국내에서도 외국 대사들에게 우리 활쏘기를 가르치다가 문예진흥기금을 받아 미국에 건너가 활쏘기 시연을 벌이면서 현지인들을 매혹시켰다. 연변에는 사비만 2000만원이나 들여 활과 화살을 지원했고 현지에 궁도협회까지 만들었다. 2009년에는 안타깝게도 활쏘기가 ‘스포츠’라 하여 문화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해 미국행이 좌절됐지만 그는 활쏘기를 우리의 ‘브랜드’로 세계에 각인시키는 날까지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다.
권 궁장은 활 만들기와 쏘기에 매진해온 세월에서 가장 큰 보람이 무엇이냐는 마지막 질문에 “민족혼을 찾았다는 것”라고 단언하면서 “춤이나 택견에서, 그리고 천 번 이상 외침을 받고도 휘어졌다 다시 일어난 역사에서 보듯, 세계에서 가장 뒤로 많이 휘어지는 우리 활처럼 우리 민족혼은 부드럽다”고 맺었다.(글 조용호 先任記者 世界日報 2010 02 16 002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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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구(窮乏한 삶 견디며 醴泉활 製作 專念 : 醴泉邑 旺新里 권영구 氏-博物館, 傳授館 없다는 건 부끄러운 일) [記事] : 잠실을 개조한 흙집, 한줄기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2평 남짓한 방에서 전통 예천활 제작에 일생을 바치고 있는 예천궁장 권영구(65) 씨. 궁핍한 삶을 살지만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예천활 제작에 대한 강한 자부심은 검게 그을린 얼굴과 양손 가득 훈장처럼 박힌 굳은살 만큼이나 크고 깊다. 그는 언제나 마음이 움직이고 정신이 맑아져야 활 제작에 들어간다. 과정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노라면 언제 하루가 지났는지 모를 정도다. 활 제작은 주로 건조한 겨울이나 이른 봄에 이루어진다. 하나의 활을 완성하는데 소요되는 기간은 약 120일. 주요 재료는 대․산뽕․아카시 나무와 소심줄, 물소뿔, 민어부레, 붕어풀, 화피 등이 사용된다. 제작 과정은 상목을 만지는 음소, 물소뿔을 붙이는 부각, 모형을 다듬는 뒤설기, 풀칠하는 뒤떼기, 소의 심을 붙이는 심놓이, 건조 과정인 점화, 강도를 조절하는 해궁(解弓), 돈고자를 붙이는 고자손질, 끝으로 화피 단장을 하고 현 만들기로 이어진다. 권영구 씨가 만드는 예천활은 복합단궁(複合短弓)으로 제작 과정 자체가 수작업으로만 이루어져 일년에 겨우 100개를 제작하는 데 그친다. 정교함에 미적 감각이 탁월해 전시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전통활의 70% 가량을 생산하는 활의 고장 예천. 그 명성은 400년 전 조선 숙종 때 절충장군을 지낸 권계황 선생으로부터 시작된다. 10대손인 권영구 씨는 가전 비법으로 전승되어온 활 제작 기술을 지키고 보급하는 한편 새로운 소재를 시험해 문서로 남기는 일을 하고 있다. 권영구 씨는,ꡒ할아버지에게 활 제작 기술을 배운 문하생들과 권씨 일족이 현재 전국에 산재해 전통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ꡓ며,ꡒ활을 잘 만드는 것은 손기술도 중요하지만 먼저 활시위를 당기는 사수처럼 언제나 평상심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ꡓ고 말하고,ꡒ욕심없는 청정한 마음 상태와 전통을 계승한다는 자긍심이 있어야 좋은 활을 만들 수 있다ꡓ고 덧붙였다. 본격적으로 활 제작을 시작한 요즘에는 2년 전 전통 활 제작술을 배우기 위해 찾아온 문하생들과 함께 활을 만들고 한 가지씩 기술을 가르치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다. 하지만 가끔은 비좁은 작업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문하생들을 대할 때면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ꡒ전국 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전통 활의 고장인 우리 지역에 변변한 박물관이나 전수관 하나 없다는 것은 대내외적으로 부끄러운 일ꡓ이라며, ꡒ전국 규모의 국궁대회를 유치해 활의 고장 예천을 알리고 예천 활의 우수성을 홍보하는 일에 전력을 쏟아야 한다ꡓ고 강조했다. 현재 권영구 씨는 예천활의 원류인 예천읍 왕신리 왕산골에서 활 제작에 몰두하고 있으며, 문하생으로는 권재홍(43), 임영기(45) 씨가 2년 전부터 주경야독을 하며 전통 활의 맥을 잇고 있다. <백승학 記者>(醴泉新聞 2004-12-31 14:39:31)
권영구(角弓 匠人 권영구 氏 持病으로 他界) [記事] : 평생 각궁을 만들며 활 장인의 삶을 산 예천읍 왕신리 권영구(68) 씨가 2007년 6월 24일 오후 1시30분쯤 안동병원에서 지병으로 타계했다. 발인은 27일, 유해는 권씨의 유언에 따라 화장했다. 고 권영구 씨는 예천 각궁의 맥을 이으며,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활 장인의 자부심을 잃지 않고 초지일관의 삶을 살아왔다. 임종을 지킨 제자로는 권재홍(45․공군부대 골프장), 임영기(47․농업) 씨가 있다. 권재홍 씨는 ꡒ고향산천과 각궁을 사랑하신 선생님의 뜻을 따라 열심히 각궁 제작에 힘쓰겠다ꡓ며 ꡒ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방안에서 생활하면서도 언제나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ꡓ고 눈시울을 붉혔다. 가족으로는 부인 송성례(60) 씨와 전북 삼례에서 딸기농사를 짓는 딸 권미희(41) 씨가 있다.(醴泉新聞 2007년 07월 05일 17: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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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덕(執念 人生, 國弓 만들기 50年 권영덕 氏) [記事] : ▶ 초기에 다듬은 대나무. ▶ 대나무 안쪽에 붙일 쇠힘줄. "조상 대대로 물려 온 가업을 잇다 보니 벌써 50년이란 세월이 흘렀어요." 지난 50년 간 전통 활(國弓)을 만들어 온 권영덕(權寧悳. 66. 예천읍 왕신리 출신, 경북 영주시 하망동) 씨. 마당 한쪽의 나무토막에 쪼구려 앉아 대나무 조각을 다듬기에 여념이 없다. 평상에는 수리, 제작 중인 활이 가지런히 널려 있고 솥에서는 민어 부레풀이 끓고 있다. 그는 12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11대조 안동 권씨 ''''계황(繼黃)'''' 할아버지 때부터 활을 만들어 온 것이다. ''''역대 궁장(弓匠) 계보''''가 그 증명이다. 이 계보에는 6대조 ''''희직(熙直)'''' 할아버지가 조선 영조(1724~1766 재위) 때 궁장 공로로 ''''교위 용장'''' 직위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교위 용장은 지금의 인간문화재에 해당된다. 국내 활 제작자는 8~9명. 이들 중에서도 그는 가장 오랜 경험을 가진 ''''고참''''이며, 이 가운데 3명은 그의 친인척이다. 20세 때부터 활을 만든 6촌 형 영우(66. 강원도 원주), 사촌동생 무석(63. 서울) 씨 등이 활동 중이다. 아버지 대(代)이후 활을 만들던 사촌형 영호. 장조카 오규 씨 등은 모두 작고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활을 만드는 아버지(태선) 모습을 보며 자랐다. 10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맏형 영록(寧錄) 씨가 뒤를 이었다. 평생 활을 만들어 인간문화재(제47호)였던 영록 씨는 1987년 72세로 작고했다. 한국전쟁으로 초등교만 졸업한 그는 16세 때부터 활 만들기에 뛰어 들었다. 대나무. 참나무, 물쏘뿔, 쇠힘줄 등 재료를 깎고 다듬고 자르고 붙이기를 하루에 수 천 번. 커다랗게 손에 박힌 굳은 살은 아직도 그대로다. "활은 균형이 생명인데다 재료, 기술, 정성 3박자가 잘 어우러져야 탄력성이 우수한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활 만드는 재주 밖에 없어 농사 등 다른 일은 거들떠보지 않고 천직으로 삼았지요." 그가 1년에 만드는 활은 고작 50여 장(활의 단위). 전국에서 활을 쏘는 무사(武士)들이 주문하는 물량이다. 1장을 만드는데 100여 일 걸린다. 이렇게 만든 활 1장에 50만 원이다. 인건비 정도 남는 금액이다. 그는 전국의 활쏘는 정자(亭子)를 돌아다니며 궁도 사범 노릇을 했다. 활쏘는 재주가 남못지 않기 때문이다. 22년 전 영주에 정착하기 전 10년 가량 고향 예천을 떠나 전국을 떠돈 것은 이 때문이다. 오랜 세월 장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부인 김동순(62) 씨의 도움이 컸다. 넓적한 쇠힘줄에서 기름기를 제거하고 넓게 편 뒤 두들겨서 가닥가닥 실처럼 뽑아내는 일은 김씨의 몫이다. 김씨는 결혼 생활 42년 간 7자매를 키우며 이 일을 해왔다. 그에게도 안타까움이 없지 않다. 전수자를 자식 중에 두지 못한 것이다. 이런 안타까움을 그나마 씻어 준 것이 처남 김동만(56) 씨. 10여년 간 그의 밑에서 기술을 배운 김씨는 경남 고성에서 활을 만들고 있다. 그의 활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남다르다. "옛 선비들이 활을 가까이 하여 수신(修身)의 한 방편으로 삼아 숭상해온 것은 바로 활에 선비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이런 장인 정신과 선비 정신이 없지 않습니까." 활 만드는 기술을 배우려면 적어도 5년은 걸린다고 한다. 플라스틱. 카본 등을 사용한 국궁이 만들어지는 것도 못내 아쉽다. 우수한 전통의 맥이 끊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다. 이 개량 활은 200m 정도 날아가는 국궁에 비해 탄력성과 활쏘는 묘미가 떨어진다. 그는 인간문화재가 되는 게 여생의 꿈이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달려 활 만들기가 쉽지 않아 그의 희망은 더욱 간절해지고 있다. 그는, "스스로 인간문화재로 지정해 달라고 보챌 수는 없지 않느냐"며 경북도. 중소기업청 주최의 공예품 경진대회에서 수 없이 탄 상장을 내보였다. [황선윤 기자] :
◆ 어떻게 만들어지나=전통 활은 탄력성과 균형이 생명. 그래서 탄력성이 크고 질긴 재료가 사용된다. 우선 대나무(길이 90㎝, 두께 6mm)를 구워서 반대로 구부려 평평하게 만든다. 이 대나무 양쪽 끝에 대나무와 같은 두께의 뽕나무(30㎝)를 끼워서 연결해 둥글게 만든다. 대나무 안쪽 중심에는 두께 1.5㎝, 길이 17㎝ 가량의 참나무를 붙인다. 대나무 바깥쪽에는 얇게 켠 물소뿔(길이 45㎝)을 양면에 각각 붙인다. 이어 대나무 안쪽에는 쇠힘줄에 민어부레풀을 배합해서 10번 정도 겹겹이 붙인다. 민어부레풀은 민어의 부레를 10시간 정도 끓여 만든다. 대나무, 쇠힘줄, 물소뿔, 민어부레풀은 시위가 벗겨져 뒤집어 지더라도 활이 부러지지 않게 하고 탄력성을 그대로 유지해 준다. 활의 상태가 갖춰지면 20여일 간 말린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숯불로 열을 쐬어 가면서 조절한다. 마지막으로 일정한 두께의 자작나무 껍질과 손잡이를 붙인다. 자작나무 껍질은 습기를 방지해 줄 뿐 아니라 궁력(弓力)이 떨어지지 않게 도와준다. 둥글게 완성된 활을 뒤집어 시위를 연결하면 ''''3''''자 모양의 활이 된다. 예전에는 시위 재료로 명주실을 썼다. 지금은 타이어 속에 사용하는 특수실을 쓰기도 한다. 활을 1장 만드는데는 100여 일이 걸리며 한꺼번에 수 십 개를 만든다. 화살은 만드는 사람이 따로 있다. 활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탄력성이 유지되도록 시위를 벗겨 놓아야 한다.(조문규 記者 中央日報 20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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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602
예천군 방문(家族.戀人과 벚꽃길 求景하세요! 醴泉은 只今 개나리.벚꽃.진달래 等 봄꽃 한창) [記事] :
예천군이 그동안 관내 명소주변과 주요도로변 등지에 가로경관 조성을 위해 식재해 온 벚꽃과 개나리꽃이 봄철 개화기를 맞아 화사한 꽃을 일제히 피워 관광객들과 지역주민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예천여고~용문 운암지까지 조성된 벚꽃길 12km와 호명면 황지리 앞 도로 2km의 벚꽃이 이번 주 중에 만개하여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를 끌 것으로 기대가 되며, 한천체육공원 산책로에는 벚꽃과 개나리가 만개해 휴식처로 각광받고 있다.
특히, 예천진호국제양궁장은 벚꽃과 개나리가 만개해 아름다운 소나무와 함께 양궁체험을 위해 진호국제양궁장을 찾은 체험객들과 지역주민들에게 볼거리와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으며, 특히 새롭게 조성된 스포츠 종합레저프라자는 군민들의 새로운 휴식처로 군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따뜻한 봄날 가족들과 또는 연인끼리 가까운 꽃길을 찾아 화전놀이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고 특히, 용문 벚꽃길은 야간 드라이브 코스로 최적지로 손꼽히고 있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0-04-21 오전 9: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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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산업곤충연구소(어린이날에는 醴泉昆蟲硏究所로 오세요. - 展示, 體驗, 호박벌 配付 等 特別 이벤트 實施...) [記事] :
예천곤충연구소에서는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2010년 5월 2일부터 5일까지 곤충연구소 일원에서 특별 이벤트를 개최한다.
이번 특별 이벤트는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신나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며 새롭게 조성된 예천곤충생태원을 대외적으로 알리고자 마련하게 되었다.
곤충연구소는 어린이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곤충생태체험관에서 곤충을 특별전시하고 물붙이 무료체험실을 운영하게 되며 ‘곤충박사님께 듣는 재미있는 곤충이야기’ 시간을 마련하여 곤충박사님과 함께 직접 이야기를 나눠 곤충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나무곤충 만들기, 초코릿 만들기, 전통탈 만들기, 물판박이 무료체험, 양초만들기 무료체험 등 체험부스를 운영하며, 체험용 호박벌 수벌 배부, 각종 게임과 레크레이션, 경품추첨 등의 행사를 펼치고 새롭게 조성된 수변곤충생태원, 벌집테마원을 개방해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할 방침이다.
특히 곤충연구소에서는 성공적인 행사 추진을 위해 행사장 준비와 대외 홍보, 전시물 교체 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있으며 특히, 관내ㆍ외 어린이집과 학교에 홍보물을 발송하고 각종 언론매체를 통한 홍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한편, 곤충연구소 관계자는 “예천곤충생태체험관을 방문한 어린이들이 아무런 불편 없이 즐겁게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면서 “전국의 어린이들이 특별이벤트에 많이 참여해 꿈과 희망을 키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손호동 記者 FM-TV 標準放送 2010-04-21 오후 10:4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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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 [記事] : 예천읍 남본동은 사람들이 아들을 낳으면 새끼줄에 고추 대신 활을 건다는 마을이다. 기계로 찍어내는 양궁이나 커다란 나무에 시위를 거는 일본 활은 우리 활인 국궁에 견주어 시위의 탄력이 볼품이 없거니와 지니기도 불편하다. 초승달처럼 굽게 만든 활을 뒤로 젖혀 시위를 걸러 ‘얹은 활’이 되게 하는 데에 쌀 반 가마를 드는 힘이 들어간다는 국궁은 탄력의 극치를 이룬다. 그리고 그만큼 만드는 과정도 복잡하고 정성이 들어간다. 인간문화재 47호인 권영록 씨는 자정이 넘어 주위가 고요한 한밤중이 되어야 일을 시작한다. 연장이라고 해야 톱, 망치, 대빗, 대칼, 도가니, 밧줄이 전부이고, 오로지 몸과 마음을 집중하여 탄력을 안에 한껏 감춘 활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전라남도 담양에서 나는 장대, 지리산 산뽕나무, 태백산 굴참나무, 황소 한 마리에 하나밖에 없는 등힘줄, 태국이나 대만에서 들여오는 물소뿔, 황해에서 잡은 민어에서 빼낸 부래풀, 활 장식에 쓸 벚나무 껍질 따위가 이 전통 활을 만드는 데에 쓰이는 재료이다. 두 자 두 치 크기로 자른 왕대를 한두 달에 걸쳐 물에 담갔다가 불에 구워 진을 빼낸 뒤에 물소뿔을 붙이고, 실처럼 쪼갠 등힘줄을 부레풀로 바른다. 손잡이인 활 복판의 ‘줌통‘은 참나무로 붙이고, 활의 양끝에 산뽕나무를 이어 ’버들잎‘을 만든다. 여러 가지의 재료를 붙이는 데에 쪼갠 등힘줄 열네 가닥이 들어가는데, 한 번 붙인 등힘줄이 마르기까지는 2-3일이 걸린다. 그리고 활 한 장을 만드는 데에 황소 등힘줄이 두 개가 들어간다. 벚나무 껍질을 입혀 멋을 내고 버들잎에 빨강과 노랑과 파랑의 전을 둘러 색을 갖추면 무기라기보다 오히려 예술품에 가까운 활이 완성된다. 이렇게 해서 활 한 장이 완성되기까지에는 넉 달이 좋이 걸린다.(韓國의 發見(4) 148-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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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 마을(“우리 마을 最高야...” 23回, 醴泉邑 南本洞 ‘활 마을’) [記事] : 무학정(武學亭) 활터로 행수(行首) 어른이 오른다. 음력 새해 초순(初巡 : 처음 활을 쏘는 것)을 할 참이다. 잿빛 두루마기에 남색 전대(箭袋) 질끈 매고 청복갓(淸福笠)을 훌렁벗어 뒤로 젖힌 채 흰 수염을 날리며 사석(射席)에 버틴 궁체(弓體, 활 쏘는 姿勢)가 그렇게도 멋들어질 수가 없다. [아들 낳으면 활 걸어] : ‘줌통’에 힘을 주고 시위를 당기니 파도같던 활 모양이 ‘ㄷ'''' 자(字)로 휘어진다. 불덩이를 떨 듯 ’절피‘ 쥔 오른손을 살짝 놓는다. 시위 떠난 유엽전(柳葉箭)은 바람을 가르고 잔솔밭 너머 과녁에 천둥소리를 낸다. 경북 예천은 옛부터 활을 사랑하고 활 쏘기를 즐긴 궁술(弓術)의 고장, 군내 1읍 11면 중에서도 예천읍 남본동은 사내아이 걸음마 배울 때 활을 잡히고, 전자문 깨우칠 때 첫시위를 당겨준다는 ’활 마을‘이다. “고추를 낳으면 새끼줄에 빨간 고추 달아놓는 대신 우리 마을에선 활을 걸어주지요.” 무학정 사원(射員) 장봉현(張鳳鉉) 씨(48)는 군기(郡技)가 궁도이고, 예천여고, 예천중의 교기(校技)가 궁도이며, 읍민 25,000명 중 반이 활을 쏜다는 자랑이다. 궁도대회 금메달 5관왕 김진호 양도 바로 이 고장 출신, 이 마을에 궁도가 번성한 데는 대대로 명궁(名弓)을 만들며 후학을 키워온 조궁가(造宮家)가 있었기 때문이다. 12대 400여 년을 이어온 국궁의 종가 권영록(權寧錄) 옹(66, 인간문화재 47호)... 남본동 245번지 나직한 한옥 3칸이 옹의 집이자 작업장, 그의 가업은 이조 숙종 때 11대 조상인 계황(繼黃) 씨가 활의 본고장 개성에서 기술을 배워 지금의 예천읍 왕신동에서 조궁업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옹의 7대조 희직(熙直)은 순조의 어명으로 활 10만 장을 만들어 바쳐 교위용장(校尉勇將)의 벼슬을 하사받기도 했다.
[金珍浩 等 스타 輩出] : 16살 때 아버지 태선(泰善)으로부터 솜씨를 전수받아 50년을 활 제작에 살아온 권옹은 지금까지 10여만 장의 각궁(角弓)을 만들어 국궁의 후예들을 키웠다. 고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사직공원 뒤 황학정(黃鶴亭)에서 쏘던 활과 고 박정희 대통령이 아산 현충사에서 시사하던 활이 모두 권옹의 작품이었다. 해방 3년 전부터 물소뿔 수입이 금지되면서 권옹의 가업도 중단되었다. 1948년 이 소식을 들은 이 대통령은 권옹을 경무대로 불러 위로한 뒤 그 자리에서 물소뿔 수입을 명령할 만큼 우리 활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정심정기(正心正氣)가 궁장(弓匠)의 자세, 마음이 어지럽고 정신이 흔들려선 활이 바로 보이지 않는다. 주위가 조용히 잠든 한밤중이 권옹의 작업 시간, 새벽 1시면 자리에서 일어나 장남 오규(五奎, 44) 씨만을 옆에 두고 활을 다듬는다. 20살 때 종아리 맞아가며 톱질부터 시작, 그도 벌써 24년째 아버지의 신기(神技)를 익히고 있다. 톱, 망치, 밧줄, 대빗, 도가니, 죽도(竹刀)가 연장의 전부, 손끝의 촉감과 눈대중이 명궁을 만드는 요체이다. 담양(潭陽) 왕대, 지리산(智異山) 산뽕나무, 태백산 굴참나무, 황소등힘줄, 물소뿔(泰國, 臺灣産), 민어풀(민어 부레를 건조시켜 만든 풀), 화피(樺皮, 벚나무껍질)가 기본 부재(部材)
. [잘 만든 건 30萬 원] : 왕대를 두 자 두 치 크기로 잘라 불에 구워 진을 뺀 뒤 물소뿔을 톱으로 켜 대나무에 불이고, 머리카락같은 소등힘줄을 민어풀로 바른다. 황소 한 마리에 하나 뿐인 등힘줄은 망치로 두들겨 고기와 기름을 빼고, 손톱으로 짼 뒤 대빗으로 계속 빗으면 모시날처럼 곱고 가늘게 갈라진다. 활 한 장에 소등힘줄이 2개. 황소 두 마리의 힘이 들어가는 셈이다. ’줌통‘은 참나무를 깎아 물에 삶은 뒤 다시 불에 구워 ’왼구비‘로 붙이고 활의 양 끝에 산뽕나무를 이어 ’버들잎‘을 만든다. 등힘줄은 4번에 나누어 붙인다. 처음에 붙이는 걸 ’초힘‘, 두 번째가 ’재힘‘, 세 번째는 ’첨력‘이라 하고, 끝으로 활 안쪽 전부에 긴 힘줄을 붙여 ’매임‘이라고 한다. 활이 다 된 다음에는 모양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화피(樺皮)를 입혀 단장한다. 더 멋을 부리는 데는 ’버들잎‘ 장식인 ’고자단장‘으로 완자 무늬에 홍, 황, 녹전을 둘러 색을 갖춘다. 하나의 활이 완성되는데 4개월, 1년이면 200여 장을 내지만 마음에 쑥 드는 절품은 열 손가락 안이란다. 잘된 활을 값으로 따지면 30만 원 정도라고 한다. 화피 단장이 화려하지 않은 것은 15만 원, “아버님이 인간문화재로 지정되고 보니, 다작을 할 수도 없고 활 한 장 팔면 5만여 원 정도 남아 한 달 수입은 70만-80만 원쯤 됩니다.” 오규 씨는 쏟는 정성에 비하면 수입이 신통치 않아 이 고장에서도 할쏘기는 해도 활 만드는 일은 모두 손을 뗐다는 설명이다.
[志正體直을 가르쳐] : 78kg의 체구에 하루 담배 2갑, 2홉 소주 2병을 마시는 권옹은 지금껏 감기 한 번 앓은 일이 없단다. 동그랗게 오그라든 활을 뒤로 젖혀 ’얹은활‘을 만든 뒤 활의 곧고 굽음, 두터움, 강도를 조정하는 해궁(解弓)엔 쌀 반 가마 드는 힘이 든다. 권옹은 지금도 하루 20장의 해궁을 해내는 황소힘이다. 궁도의 ’도(道)‘는 예의가 첫째, 활을 쏠 때도 반드시 “활 배웁니다’고 인사를 하고, 이 때 주위 사우(射友)들은 ”많이 맞히시오“, 또는 ”연중(連中) 하시오“ 등의 초순례(初巡禮)를 갖추어야 한다. 궁도반을 지도하는 최태석(38, 예천중) 교사는 활을 쏘는 모든 학생들에게 권옹의 ‘뜻과 몸을 바르게(志正體直)“하라는 가르침이 배어 있다고 한다. 당구장, 전자오락실, 만화가게가 재미를 못보는 것도 이 마을 특징, 어른 아이 모두가 여가를 남산 무학정 활터에서 활을 잡고 심신을 단련하기 때문이다. 물맛이 차고 달아 이름 붙어진 예천읍, 궁술에서 활달한 기품을 키우고 궁도에서 예절을 배우는 주민들은 국궁의 후예답게 활터에서 산다.(高正雄 記者 中央日報 198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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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요(弓謠) [歌辭] : 예천 지방에서 불리어 지던 가사이다. [內容] : 활이로다 활이로다/ 이 활이 웬 활인고/ 유궁후에 활일른가/ 박문자에 활이른가/ 양유기에 활이른가/ 윤공지타 활이른가/ 태산 남짝 오호나무/ 연(燕) 나라 활소뿔에/ 초(楚) 나라 사슴 힘줄/ 하여의 부레풀에/ 네 가지 음처다가/ 좋게 만든 활이른가/ 아니로세 아니로세/ 이 활이 딴 활일새/ 지원 녹죽 좋은 대를/ 드난 칼로 비어 내고/ 회게산에 좋은 딱을/ 드난 낫으로 쩌다가서/ 어영굽게 대를 휘고/ 눈고르게 딱을 꼬아/ 노 맨들어 대를 매어/ 팽팽 세게 놓았으니/ 대도 좋해 대도 좋해/ 나도 너와 같고지고/ 내 뿌리가 굳었으니/ 내 마음도 굳어지고/(以下 省略, <醴泉文化> 6輯(1993)에 全文이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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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무구(醴泉邑 권무구 氏 鄕土奉仕賞 受賞) [記事] : 경북도가 선발 표창하는 2002년 향토봉사상에 전통 국궁의 맥을 이어온 공로로 권무구(60․예천읍 왕신리) 씨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권씨는 매년 200여 장의 국궁을 제작하며 예천 활의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등 전통 활의 전수 보급에 노력해 온 공로로 이 번에 수상을 하게 됐다. 향토봉사상은 1985년부터 애향심을 가지고 향토 발전을 위해 봉사하는 도민을 선발, 도 공적심사위원회 심사를 거쳐 시상하는 상이다.(醴泉新聞 2002-04-0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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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무석(弓匠 11대째 이어온 권무석 氏의ꡐ角弓禮讚ꡑ) [記事] :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말에 올라탄 5명의 인물이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 화살은 이들이 쫓고 있는 사슴과 호랑이의 심장을 단숨에 뚫을 기세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에 있는 무용총 수렵도(5세기 말~6세기 초). 이 벽화에는 동북아시아에서 위세를 떨쳤던 고구려인의 힘찬 기상이 엿보인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상암정. 화살이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 한 발, 두 발…. 궁사들의 몸은 어느 새 활, 과녁과 하나가 됐다. 사대 뒤편에서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3호 궁장(弓匠) 기능 보유자 권무석(66) 씨. 그는 물소 뿔을 재료로 사용하는, 전통 활 각궁(角弓)을 만든다. 그에게 궁장은 조선 숙종 때부터 11대째 이어져온 가업(家業)이다.
[우리 민족의ꡐ명품ꡑ각궁] : 상암정 한 쪽에 마련된 그의 작업장은 마무리 작업으로 분주했다. 해궁(解弓) 과정이다. C자형의ꡐ부린활ꡑ(시위를 벗긴 활)에 시위를 걸어 마지막 모양을 잡는 단계다. 장인의 솜씨에 따라 활의 강도와 성능이 달라진다. 우리 민족에게 활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생계를 이어주는 사냥 도구인 동시에 이 땅을 지켜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수광은ꡐ지봉유설(芝峰類說)ꡑ에서 조선의 활과 중국의 창, 일본의 조총을 각각 최고의 무기라고 했다.ꡒ조총의 사거리가 50m 안팎인 반면 활은 300~400m였습니다. 거리가 멀어지면 힘없이 떨어지는 총알과 달리 화살은 수 백 보를 날아간 뒤에도 가속도가 붙어 과녁을 꿰뚫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청 나라가 요구한 공물 품목에는 각궁이 들어있을 정도로 우리 활은 예로부터 명품이었습니다.ꡓ권 궁장의 말이다.
[1000번의 손길이 있어야] : 각궁은 길이 120~130cm의 단궁(短弓)이자 여러 재료를 사용하는 복합궁이다. 물소 뿔, 소 힘줄, 대나무, 뽕나무, 참나무, 화피(벚나무 껍질), 민어부레풀 등 7가지 재료가 사용된다. 각궁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상상을 초월하는, 땀과 시간과의 싸움이다. 1cm가 채 되지 않는 대나무에 겉쪽에는 물소 뿔, 안쪽에는 소 힘줄, 끝부분에는 뽕나무, 손잡이에는 참나무 등 각기 다른 재료를 붙인다. 본격적인 작업은 3개월이 걸리지만 재료의 준비와 가공에 한 해가 꼬박 걸린다. 접착제는 어교(魚膠)라는 민어부레풀을 사용하는데 각 재료를 붙일 때마다 수 십, 수 백 회의 손 작업을 거치게 된다. 권 궁장은,ꡒ활 하나에 1000번, 화살 하나에 100번의 손길이 필요하다ꡓ며,ꡒ빠른 것 좋아하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보면 각궁 제작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일 것ꡓ이라고 말했다. [우리 집 활은 내 대에서 끝났다] : 그가 처음부터 궁장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활로 유명한 경북 예천에서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활 만들기를 거들었지만 일이 달갑지 않았다고 했다. 궁장은 17년 터울의 큰형(권영호 씨․작고) 몫이었다.ꡒ정말 활은 내 것이 아니다 생각했죠. 하물며 내 인생도 내 것이 아니었는데…. 살다가 힘들어 세 번이나 죽으려고 했고, 활과는 담 쌓은 채 살아갔죠.ꡓ1970년대 후반 추석 때의 일이다. 큰형이 제사상을 물린 뒤,ꡒ우리 집 활은 내 대에서 끝났다ꡓ는 폭탄 선언을 했다. 두 조카의 꿈은 활과는 상관없는 다른 것이었다. 결국 서울로 형님을 모신 뒤 활 공부를 3년 간 다시 했다. 그의 나이 마흔이 다 된 때였다.ꡒ지금 자다 깨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지만 핏줄 속에 있는 뭔가가 사람을 활로 끌고 간 것 같습니다.ꡓ[요즘도 할머니 곁에 가십니까] : 부린활을 다루던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 기자에게,ꡒ꼭 활을 배우라ꡓ고 했다. 1980년대 초반 활 쏘는 법도 함께 배웠는데 가장 궁금한 것이 국궁이 정력에 좋다는 말이었다. 국궁하는 사람치고 배 나온 사람이 없고, 70대 이상의 정정한 명궁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ꡒ그 때 나이 든 분들을 찾아다니며,ꡐ요즘도 할머니 곁에 가시냐ꡑ고 물었죠. 그러면 10명 중 9명의 대답이ꡐ그렇다ꡑ였어요. 나중에 스포츠 과학을 연구해 보니 알겠어요. 국궁은 보기에는 정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굉장히 동적인 운동입니다.ꡓ옆에 있던 이환철(56․국궁 공인 9단) 씨가 거들었다. 이 씨는,ꡒ국궁은 시위를 당기면서 전신을 사용하고, 시위를 놓으면 진동으로 전신 마사지 효과가 있다ꡓ고 말했다. 가업에 대한 권 궁장의 생각은 어떨까.ꡒ아들이 하나 있어요. 음악인가 랩인가를 한다더니 군대에 갔죠. 사실 다 계산이 있어서 공부 열심히 안 해도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웃음)ꡓ 아들 얘기를 하면서 그는 자신이 만든 활의 시위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가 숙명처럼 맞았고, 또 자식에게 쏘는 운명적인 화살이다. 강요는 아니지만 간절한 바람이 담긴...
[국궁 기초훈련 2~3개월 필요 초보자용 장비는 40만 원 수준] : 초보자가 국궁을 배우려면 가까운 활터를 찾는 게 좋다. 서울에는 종로구 사직동 황학정 등 9개, 전국적으로는 300여 개의 활터가 있다. 동호인은 약 2만 명이다. 초보자의 경우 2~3개월의 기초 과정을 통해 기본 자세와 요령을 배워야 한다. 활터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략 입회금(10만 원)과 월 회비(2만~3만 원)를 내면 사범으로부터 활쏘기를 배울 수 있다. 장비는 각궁의 경우 활(65만 원)과 죽시 10대, 손에 끼는 각지를 합해 100만 원, 초보자용 카본궁은 전체 비용이 35만~40만 원 수준이다. 각궁은 초보자의 경우 다루기가 힘들고 파손 위험도 있기 때문에 기량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뒤 사용해야 한다. 활터와 장비에 관한 기본 정보는ꡐ대한궁도협회ꡑ 홈페이지(kungdo.sports.or.kr)를 참조하면 된다. 활과 화살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주는 박물관도 있다. 2001년 문을 연 경기 파주시 탄현면ꡐ영집궁시박물관ꡑ(www.arrow.or.kr)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弓矢匠) 기능 보유자인 영집 유영기 씨가 세운 곳이다. 유씨가 직접 만든 화살을 비롯해 전통 활, 세계 각국의 활과 화살이 전시돼 있다. 각궁 제작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031-944-6800(김갑식 記者 東亞日報 2005.4.7 (목) 17:17)
권무석( "300年 家業을 避할 순 없었어" "가난해도 이게 사람답게 사는 길이니까" : 활 만드는 男子… 安東權氏 충일공파 12代 弓匠 權武奭 氏) [記事] : 권계황(權繼黃)은 조선조 숙종(1674~1720) 때 사람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양에 살던 권계황은 일찌감치 경상도 예천으로 내려가 활을 만들기 시작했다. 소뿔을 다듬어 만드는 각궁(角弓)이다. 권계황은 그 활을 예천 관아에 납품하는 궁장(弓匠)이었다. 그가 죽자 아들이 활을 만들었다. 그 아들이 죽자 손자가 활을 만들었다. 그 손자가 죽자 또 그 아래가 활을 만들었고. 자, 그리하여 권계황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 안동 권씨 충일공파 12대 권무석(權武奭․65)이 지금 활을 만들게 됐다. 모든 게 광속(光速)으로 바뀌고 있는 이 시대에, 300년 동안 가업(家業)을 잇고 있는 무시무시한 고집쟁이 집안 이야기. [가난으로 가출․자살시도… 37세에 가업 이어] : 1980년 추석, 고향 예천을 찾았던 권무석 씨에게 17년 터울 큰 형(권영호․작고)이 말했다. "우리집 대(代)가 끊겼다." 남자는 으레 아버지를 따라 궁장(弓匠)의 길을 가는 게 권씨 집안 300년 전통이었다. 그런데 두 아들이 활 만들기를 포기하고 교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열두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활 만들기를 배웠지만, 형이 대를 이으면서 그는 활을 등지고 대신 버스 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권씨가 말했다. "정말 쩌릿하게 충격을 받았어요. 권씨 가문에서 활이 없어진다…." 며칠을 고민했다. 가난한 가업을 이을 것인가, 아니면 그저 평범하게 아내와 아이들이랑 알콩달콩 살 것인가. 누나도 반대했고, 아내도 반대했다. 그런데 그는 가업을 택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라고 그가 말했다. "집이 가난해서 학교도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만뒀어요. 두 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집은 가난하지, 어디 취직하려고 해도 학벌이 없지…. 무슨 인생이,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가출도 여러 번 했고, 자살 미수도 세 번 있었어요." 그때마다 어머니가 이렇게 아들을 달랬다. "제발 사람답게 살아라, 제발." "이미 사람인데 왜 사람 되라 하느냐"고 반항하는 아들을 남기고, 아들이 열여덟 살 되던 해 어머니마저 하늘로 갔다. 한탄하는 형님을 보고 있는데, "제발"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천둥소리를 내더라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두고 편히 돌아가셨을까… 바꿔서 생각하니까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노(老) 장인이 40대 기자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37세 버스 기사 권무석은 가업을 잇게 되었다. 형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기초부터 활을 다시 배웠다. 1986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궁장 기능보유자인 장진섭(작고) 씨로부터 또 배웠다. 장씨 또한 할아버지가 고종 황제의 활을 만든, 궁장 집안이다. 그런데 두 아들이 가난을 버리고 다른 직업을 택했으니, 장씨는 유일하게 남은 전수자 권씨에게 모든 것을 가르쳤다. "쏴봐야 만들 수 있다"며 궁술도 배웠다. 전통활쏘기 기능보유자 장석후(작고) 선생에게 전통 사법(射法)을 배웠다. 그래서 서울 인왕산에 있는 활터 황학정에서 활을 가르쳤고, 1988년과 1992년 경찰대학과 육군사관학교에 궁도 강좌를 개설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육사에 제출한 이력서 학력란에는 ''''독학(獨學)''''이라고 적었다. 내력을 알고서 인사 담당자가 "존경한다"고 했다. 권씨는 "내가 잘 살았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활 하나 값은 삼국시대나 지금이나 쌀 세 가마"] : 그가 만드는 활은 각궁(角弓), 소뿔로 만든다. 소뿔 중에도 탄력이 좋은 중국산 물소뿔이다. 길이 1m 20cm 정도 되는 대나무에 소뿔을 잘라 붙이고, 소 힘줄을 덧대고 뽕나무, 참나무, 벚나무 껍질 따위 재료들을 붙이고 나면 활이 C자처럼 안쪽으로 휘어진다. 둥그렇게 휜 그 활을 반대쪽으로 휘어 활줄을 걸면 활이 완성된다. 그 만드는 방식, 1000년째 변함이 없다. 각각 재료를 붙이고 말리는 데 꼬박 석 달, 재료 준비와 가공에는 일 년이 꼬박 걸리니, 일 년에 50개 만들면 많이 만드는 것도 변함이 없다. 실학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최고의 무기는 조선의 활과 중국의 창, 일본의 조총"이라고 했다. 각국 최고이지만, 조총이 멀어야 50m 나가는 반면 조선 각궁은 400m 앞 물체까지 꿰뚫는다. 월남전 때 박정희 대통령이 미군 M16 소총을 들여와 한국형 소총 개발에 나섰 듯, 청나라에서 언제나 공물로 각궁을 가져가 궁리를 했지만 나라가 망할 때까지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1000년째 변함 없는 것, 또 있다. 활 가격이다. "삼국시대 때부터 활 값은 하나당 쌀 세 가마예요. 조선시대에도 세 가마, 1950년대도 세 가마, 2008년에도 세 가마." 1000년 전 쌀 세 가마와 지금의 쌀 세 가마. 단위는 동일하되 가치는 하늘과 땅 차이다. "내 조카들이 그래서 활을 버렸어요. 우리 집사람이 반대한 이유도 그거고. 이제는 활 하나 팔면 친구랑 술 쎄게 한번 먹으면 남는 게 없어." 한때 전국에 60명 넘게 있던 궁장이 지금은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돈 안 되는 장인의 길이 험난하고 드물기에, 나라에서는 그들을 무형문화재로 만들어 명예와 경제를 후원한다. 권씨도 2000년 서울시로부터 무형문화재 23호로 선정됐다. 매달 지원금으로 100만 원이 나온다. 그런데, "이게 잘못됐다"고 했다. "문화라는 것이, 전수가 되어야 문화지요. 전수자로 지정되면 매달 12만 원이 나옵니다. 다 큰 성인이 다른 일 다 때려치우고 장인 공부를 하는데, 12만 원이면 생계가 안 되지요." 전수자로 들어왔던 사람들이 6개월만 지나면 들고 왔던 보따리까지 집어 던지고 가버린다고 한다.
["무형문화재 전수자에 월12만원… 다 도망가"] : 그런데도 그는 활을 만든다. "일단 굶어 죽지는 않았고, 또 이걸 하니까 외국에 전시도 하고 대접도 받고, 문화도 잇고 하잖소. 절대로 후회는 없어요. 한들 뭐해? 시간 되돌릴 수 있나?" 집안으로는 300년, 본인으로는 외도(外道) 15년을 제외하고 열두 살 때부터 지금까지 38년째다. 지독하다 못해 미쳤다. "''''그래, 미치자, 안 미치면 이거 못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미쳐갔다. "활 없이는 4341년 조선 역사를 쓰지 못합니다. 주몽부터 이성계까지 모두 궁사였고, 외침 때는 활로 적을 물리치고 평화시에는 활로 호연지기를 기르고 상무심을 단련했습니다. 농사문화보다 먼저 시작한, 조선의 뿌리문화예요." 물소뿔을 사려고 중국을 29번 들락거렸다. "한족 다음으로 많은 민족이 만주족인데, 자기가 만주족이라는 사람 딱 한 명 만났어요. 다 자기가 한족이라는 거예요. 왜? 그게 다 문화가 없고 전승이 사라졌기 때문이지." 그가 활에 미친 이유다. 활이 없어지면, 그에겐 조선이 사라진다.
["태권도처럼 세계에 국궁 가르치겠다" 미국으로] : 예순다섯 된 권씨가 2008년 3월 6일 미국 워싱턴DC로 떠났다. 또 어딘가에 미쳐있다. 보따리에는 국궁 20개와 화살들, 그리고 영어로 번역한 궁술 교본이 들어있다. "궁술을 미국에 보급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허허벌판으로 들어가는 심정이지만, 자신 있다"고 했다. 예절을 가르치는 태권도가 미국에 인기리에 보급됐 듯, 도(道)를 배우는 궁도(弓道)도 지식인의 교양체육으로 전파되리라는 자신감이다. 머리에 잔설이 내린 노 장인이 미친 곳, 국궁의 세계화였다. 이미 중국에는 옌볜(延邊)대학교에 활터를 만들었다. "미국에서 세 가마 이상 돈을 벌어 아들에게 궁장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했다. 어릴 적, 연장 하나 집어달라면 발로 차고 도망가던 작곡가 아들이 군대를 다녀와서는 활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안동 권씨 충일공파 13대 궁장이다. 권씨가 말했다. "지금 처져버리면 영원히 못 일어납니다. 죽을 때까지 도전해야죠."(박종인 記者 朝鮮日報 2008.03.08 13:39)
권무석([傳統을 잇는 사람들] <14> 無形文化財 弓匠 권무석 氏, 12代째 家業 이어가며 활에 ‘民族의 魂’ 불어넣다) [記事] : “미국에 가서 서양의 활들과 겨루어 보았는데 활 크기는 2m가 넘어도 겨우 100m 정도밖에 날아가지 못했습니다. 우리 각궁은 크기는 작지만 보통 사람이 쏘아도 250m는 너끈히 날려보냅니다. 우리 활은 우리 민족의 혼입니다.” ◇권무석 궁장이 물소 뿔을 재료로 우리의 전통 활인 각궁을 만들고 있다. 습도가 높으면 풀이 붙지 않아서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년에 4개월만 작업할 수 있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23호 궁장 권무석(67) 씨는 조선 숙종대 이래 경북 예천에서 12대째 활을 만들어온 집안의 장인이다. 권씨는 그 명맥이 끊어질 듯 희미하게 이어지고 있는 국궁 제작자이자 활쏘기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 활 지킴이다. 사실 ‘국궁’이란 표현은 양궁이 유입되면서 편의상 구분하기 위해 쓴 표현일 뿐 그냥 우리 활이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그는 ‘궁도’라는 표현도 일제의 영향을 받은 표현이라고 못마땅해 했다. 권씨는 12살 때부터 활 만들기를 배우기 시작해 21살 때 군에 가기 전까지 형 권영호의 공방에서 1년에 50개 정도를 제작했다. 군 입대 후에는 월남에도 다녀왔고, 제대 후에는 체신공무원과 버스운전기사를 거치며 활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 1970년대 후반 추석 때 그의 형이 “내 대에서 이제 활은 끝나는가 보다”라고 탄식하던 소리가 귓전에서 떠나지 않아 결국 자신이 형의 뒤를 잇게 되었다. 제작 시간도 오래 걸리고 재료 구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수지타산마저 맞지 않으니 활 만들기를 생업으로 삼는 자녀들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물소 뿔을 재료로 사용하는 전통 활 각궁(角弓)을 만든다. 물소 뿔은 물론 소 힘줄, 대나무, 뽕나무, 화피(벚나무 껍질), 민어부레풀 등 7가지 재료가 사용된다. 실제 작업 기간은 최소 2개월 정도 걸리지만 재료 준비와 가공 시간까지 합치면 1년 넘게 소요된다. 권 궁장은 “활 하나 만들려면 손이 1000번 이상 가야 한다”면서 “30년 넘게 이 일을 해왔지만 1년에 100개 이상 만들어본 적 없고 평균 50∼70개 정도 완성하는데 이 중 20% 정도는 파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활 제작에만 매달리지 않고 스스로 육군사관학교와 경찰대학을 찾아가 활쏘기 강좌를 유도해 냈다. 고종 때 경희궁에 만든 활터 황학정에서는 활쏘기 사범으로도 복무했다. “요새는 전국 어디를 가나 그냥 쏘아서 맞히는 것만 가르치는데 옛 어른들이 가르친 대로 호흡까지 따라 하면 위장병이나 관절염도 완화시킬 수 있는 웰빙스포츠가 바로 전통 활쏘기입니다. 지금도 활터에 가면 90살 넘은 분들도 나오는데 그분들 건강은 바로 전통 활쏘기 덕분입니다.” 그가 ‘웰빙스포츠’라는 표현을 쓰는 배경에는 해외에 ‘활쏘기 전도사’로 나아가 애를 쓴 경험이 자리잡고 있다. 국내에서도 외국 대사들에게 우리 활쏘기를 가르치다가 문예진흥기금을 받아 미국에 건너가 활쏘기 시연을 벌이면서 현지인들을 매혹시켰다. 연변에는 사비만 2000만원이나 들여 활과 화살을 지원했고 현지에 궁도협회까지 만들었다. 2009년에는 안타깝게도 활쏘기가 ‘스포츠’라 하여 문화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해 미국행이 좌절됐지만 그는 활쏘기를 우리의 ‘브랜드’로 세계에 각인시키는 날까지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다.
권 궁장은 활 만들기와 쏘기에 매진해온 세월에서 가장 큰 보람이 무엇이냐는 마지막 질문에 “민족혼을 찾았다는 것”라고 단언하면서 “춤이나 택견에서, 그리고 천 번 이상 외침을 받고도 휘어졌다 다시 일어난 역사에서 보듯, 세계에서 가장 뒤로 많이 휘어지는 우리 활처럼 우리 민족혼은 부드럽다”고 맺었다.(글 조용호 先任記者 世界日報 2010 02 16 002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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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구(窮乏한 삶 견디며 醴泉활 製作 專念 : 醴泉邑 旺新里 권영구 氏-博物館, 傳授館 없다는 건 부끄러운 일) [記事] : 잠실을 개조한 흙집, 한줄기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2평 남짓한 방에서 전통 예천활 제작에 일생을 바치고 있는 예천궁장 권영구(65) 씨. 궁핍한 삶을 살지만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예천활 제작에 대한 강한 자부심은 검게 그을린 얼굴과 양손 가득 훈장처럼 박힌 굳은살 만큼이나 크고 깊다. 그는 언제나 마음이 움직이고 정신이 맑아져야 활 제작에 들어간다. 과정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노라면 언제 하루가 지났는지 모를 정도다. 활 제작은 주로 건조한 겨울이나 이른 봄에 이루어진다. 하나의 활을 완성하는데 소요되는 기간은 약 120일. 주요 재료는 대․산뽕․아카시 나무와 소심줄, 물소뿔, 민어부레, 붕어풀, 화피 등이 사용된다. 제작 과정은 상목을 만지는 음소, 물소뿔을 붙이는 부각, 모형을 다듬는 뒤설기, 풀칠하는 뒤떼기, 소의 심을 붙이는 심놓이, 건조 과정인 점화, 강도를 조절하는 해궁(解弓), 돈고자를 붙이는 고자손질, 끝으로 화피 단장을 하고 현 만들기로 이어진다. 권영구 씨가 만드는 예천활은 복합단궁(複合短弓)으로 제작 과정 자체가 수작업으로만 이루어져 일년에 겨우 100개를 제작하는 데 그친다. 정교함에 미적 감각이 탁월해 전시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전통활의 70% 가량을 생산하는 활의 고장 예천. 그 명성은 400년 전 조선 숙종 때 절충장군을 지낸 권계황 선생으로부터 시작된다. 10대손인 권영구 씨는 가전 비법으로 전승되어온 활 제작 기술을 지키고 보급하는 한편 새로운 소재를 시험해 문서로 남기는 일을 하고 있다. 권영구 씨는,ꡒ할아버지에게 활 제작 기술을 배운 문하생들과 권씨 일족이 현재 전국에 산재해 전통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ꡓ며,ꡒ활을 잘 만드는 것은 손기술도 중요하지만 먼저 활시위를 당기는 사수처럼 언제나 평상심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ꡓ고 말하고,ꡒ욕심없는 청정한 마음 상태와 전통을 계승한다는 자긍심이 있어야 좋은 활을 만들 수 있다ꡓ고 덧붙였다. 본격적으로 활 제작을 시작한 요즘에는 2년 전 전통 활 제작술을 배우기 위해 찾아온 문하생들과 함께 활을 만들고 한 가지씩 기술을 가르치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다. 하지만 가끔은 비좁은 작업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문하생들을 대할 때면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ꡒ전국 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전통 활의 고장인 우리 지역에 변변한 박물관이나 전수관 하나 없다는 것은 대내외적으로 부끄러운 일ꡓ이라며, ꡒ전국 규모의 국궁대회를 유치해 활의 고장 예천을 알리고 예천 활의 우수성을 홍보하는 일에 전력을 쏟아야 한다ꡓ고 강조했다. 현재 권영구 씨는 예천활의 원류인 예천읍 왕신리 왕산골에서 활 제작에 몰두하고 있으며, 문하생으로는 권재홍(43), 임영기(45) 씨가 2년 전부터 주경야독을 하며 전통 활의 맥을 잇고 있다. <백승학 記者>(醴泉新聞 2004-12-31 14:39:31)
권영구(角弓 匠人 권영구 氏 持病으로 他界) [記事] : 평생 각궁을 만들며 활 장인의 삶을 산 예천읍 왕신리 권영구(68) 씨가 2007년 6월 24일 오후 1시30분쯤 안동병원에서 지병으로 타계했다. 발인은 27일, 유해는 권씨의 유언에 따라 화장했다. 고 권영구 씨는 예천 각궁의 맥을 이으며,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활 장인의 자부심을 잃지 않고 초지일관의 삶을 살아왔다. 임종을 지킨 제자로는 권재홍(45․공군부대 골프장), 임영기(47․농업) 씨가 있다. 권재홍 씨는 ꡒ고향산천과 각궁을 사랑하신 선생님의 뜻을 따라 열심히 각궁 제작에 힘쓰겠다ꡓ며 ꡒ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방안에서 생활하면서도 언제나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ꡓ고 눈시울을 붉혔다. 가족으로는 부인 송성례(60) 씨와 전북 삼례에서 딸기농사를 짓는 딸 권미희(41) 씨가 있다.(醴泉新聞 2007년 07월 05일 17: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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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덕(執念 人生, 國弓 만들기 50年 권영덕 氏) [記事] : ▶ 초기에 다듬은 대나무. ▶ 대나무 안쪽에 붙일 쇠힘줄. "조상 대대로 물려 온 가업을 잇다 보니 벌써 50년이란 세월이 흘렀어요." 지난 50년 간 전통 활(國弓)을 만들어 온 권영덕(權寧悳. 66. 예천읍 왕신리 출신, 경북 영주시 하망동) 씨. 마당 한쪽의 나무토막에 쪼구려 앉아 대나무 조각을 다듬기에 여념이 없다. 평상에는 수리, 제작 중인 활이 가지런히 널려 있고 솥에서는 민어 부레풀이 끓고 있다. 그는 12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11대조 안동 권씨 ''''계황(繼黃)'''' 할아버지 때부터 활을 만들어 온 것이다. ''''역대 궁장(弓匠) 계보''''가 그 증명이다. 이 계보에는 6대조 ''''희직(熙直)'''' 할아버지가 조선 영조(1724~1766 재위) 때 궁장 공로로 ''''교위 용장'''' 직위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교위 용장은 지금의 인간문화재에 해당된다. 국내 활 제작자는 8~9명. 이들 중에서도 그는 가장 오랜 경험을 가진 ''''고참''''이며, 이 가운데 3명은 그의 친인척이다. 20세 때부터 활을 만든 6촌 형 영우(66. 강원도 원주), 사촌동생 무석(63. 서울) 씨 등이 활동 중이다. 아버지 대(代)이후 활을 만들던 사촌형 영호. 장조카 오규 씨 등은 모두 작고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활을 만드는 아버지(태선) 모습을 보며 자랐다. 10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맏형 영록(寧錄) 씨가 뒤를 이었다. 평생 활을 만들어 인간문화재(제47호)였던 영록 씨는 1987년 72세로 작고했다. 한국전쟁으로 초등교만 졸업한 그는 16세 때부터 활 만들기에 뛰어 들었다. 대나무. 참나무, 물쏘뿔, 쇠힘줄 등 재료를 깎고 다듬고 자르고 붙이기를 하루에 수 천 번. 커다랗게 손에 박힌 굳은 살은 아직도 그대로다. "활은 균형이 생명인데다 재료, 기술, 정성 3박자가 잘 어우러져야 탄력성이 우수한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활 만드는 재주 밖에 없어 농사 등 다른 일은 거들떠보지 않고 천직으로 삼았지요." 그가 1년에 만드는 활은 고작 50여 장(활의 단위). 전국에서 활을 쏘는 무사(武士)들이 주문하는 물량이다. 1장을 만드는데 100여 일 걸린다. 이렇게 만든 활 1장에 50만 원이다. 인건비 정도 남는 금액이다. 그는 전국의 활쏘는 정자(亭子)를 돌아다니며 궁도 사범 노릇을 했다. 활쏘는 재주가 남못지 않기 때문이다. 22년 전 영주에 정착하기 전 10년 가량 고향 예천을 떠나 전국을 떠돈 것은 이 때문이다. 오랜 세월 장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부인 김동순(62) 씨의 도움이 컸다. 넓적한 쇠힘줄에서 기름기를 제거하고 넓게 편 뒤 두들겨서 가닥가닥 실처럼 뽑아내는 일은 김씨의 몫이다. 김씨는 결혼 생활 42년 간 7자매를 키우며 이 일을 해왔다. 그에게도 안타까움이 없지 않다. 전수자를 자식 중에 두지 못한 것이다. 이런 안타까움을 그나마 씻어 준 것이 처남 김동만(56) 씨. 10여년 간 그의 밑에서 기술을 배운 김씨는 경남 고성에서 활을 만들고 있다. 그의 활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남다르다. "옛 선비들이 활을 가까이 하여 수신(修身)의 한 방편으로 삼아 숭상해온 것은 바로 활에 선비 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이런 장인 정신과 선비 정신이 없지 않습니까." 활 만드는 기술을 배우려면 적어도 5년은 걸린다고 한다. 플라스틱. 카본 등을 사용한 국궁이 만들어지는 것도 못내 아쉽다. 우수한 전통의 맥이 끊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다. 이 개량 활은 200m 정도 날아가는 국궁에 비해 탄력성과 활쏘는 묘미가 떨어진다. 그는 인간문화재가 되는 게 여생의 꿈이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달려 활 만들기가 쉽지 않아 그의 희망은 더욱 간절해지고 있다. 그는, "스스로 인간문화재로 지정해 달라고 보챌 수는 없지 않느냐"며 경북도. 중소기업청 주최의 공예품 경진대회에서 수 없이 탄 상장을 내보였다. [황선윤 기자] :
◆ 어떻게 만들어지나=전통 활은 탄력성과 균형이 생명. 그래서 탄력성이 크고 질긴 재료가 사용된다. 우선 대나무(길이 90㎝, 두께 6mm)를 구워서 반대로 구부려 평평하게 만든다. 이 대나무 양쪽 끝에 대나무와 같은 두께의 뽕나무(30㎝)를 끼워서 연결해 둥글게 만든다. 대나무 안쪽 중심에는 두께 1.5㎝, 길이 17㎝ 가량의 참나무를 붙인다. 대나무 바깥쪽에는 얇게 켠 물소뿔(길이 45㎝)을 양면에 각각 붙인다. 이어 대나무 안쪽에는 쇠힘줄에 민어부레풀을 배합해서 10번 정도 겹겹이 붙인다. 민어부레풀은 민어의 부레를 10시간 정도 끓여 만든다. 대나무, 쇠힘줄, 물소뿔, 민어부레풀은 시위가 벗겨져 뒤집어 지더라도 활이 부러지지 않게 하고 탄력성을 그대로 유지해 준다. 활의 상태가 갖춰지면 20여일 간 말린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숯불로 열을 쐬어 가면서 조절한다. 마지막으로 일정한 두께의 자작나무 껍질과 손잡이를 붙인다. 자작나무 껍질은 습기를 방지해 줄 뿐 아니라 궁력(弓力)이 떨어지지 않게 도와준다. 둥글게 완성된 활을 뒤집어 시위를 연결하면 ''''3''''자 모양의 활이 된다. 예전에는 시위 재료로 명주실을 썼다. 지금은 타이어 속에 사용하는 특수실을 쓰기도 한다. 활을 1장 만드는데는 100여 일이 걸리며 한꺼번에 수 십 개를 만든다. 화살은 만드는 사람이 따로 있다. 활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탄력성이 유지되도록 시위를 벗겨 놓아야 한다.(조문규 記者 中央日報 20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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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602
예천군 방문(家族.戀人과 벚꽃길 求景하세요! 醴泉은 只今 개나리.벚꽃.진달래 等 봄꽃 한창) [記事] :
예천군이 그동안 관내 명소주변과 주요도로변 등지에 가로경관 조성을 위해 식재해 온 벚꽃과 개나리꽃이 봄철 개화기를 맞아 화사한 꽃을 일제히 피워 관광객들과 지역주민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예천여고~용문 운암지까지 조성된 벚꽃길 12km와 호명면 황지리 앞 도로 2km의 벚꽃이 이번 주 중에 만개하여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를 끌 것으로 기대가 되며, 한천체육공원 산책로에는 벚꽃과 개나리가 만개해 휴식처로 각광받고 있다.
특히, 예천진호국제양궁장은 벚꽃과 개나리가 만개해 아름다운 소나무와 함께 양궁체험을 위해 진호국제양궁장을 찾은 체험객들과 지역주민들에게 볼거리와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으며, 특히 새롭게 조성된 스포츠 종합레저프라자는 군민들의 새로운 휴식처로 군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따뜻한 봄날 가족들과 또는 연인끼리 가까운 꽃길을 찾아 화전놀이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고 특히, 용문 벚꽃길은 야간 드라이브 코스로 최적지로 손꼽히고 있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0-04-21 오전 9: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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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산업곤충연구소(어린이날에는 醴泉昆蟲硏究所로 오세요. - 展示, 體驗, 호박벌 配付 等 特別 이벤트 實施...) [記事] :
예천곤충연구소에서는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2010년 5월 2일부터 5일까지 곤충연구소 일원에서 특별 이벤트를 개최한다.
이번 특별 이벤트는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신나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며 새롭게 조성된 예천곤충생태원을 대외적으로 알리고자 마련하게 되었다.
곤충연구소는 어린이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곤충생태체험관에서 곤충을 특별전시하고 물붙이 무료체험실을 운영하게 되며 ‘곤충박사님께 듣는 재미있는 곤충이야기’ 시간을 마련하여 곤충박사님과 함께 직접 이야기를 나눠 곤충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나무곤충 만들기, 초코릿 만들기, 전통탈 만들기, 물판박이 무료체험, 양초만들기 무료체험 등 체험부스를 운영하며, 체험용 호박벌 수벌 배부, 각종 게임과 레크레이션, 경품추첨 등의 행사를 펼치고 새롭게 조성된 수변곤충생태원, 벌집테마원을 개방해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할 방침이다.
특히 곤충연구소에서는 성공적인 행사 추진을 위해 행사장 준비와 대외 홍보, 전시물 교체 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있으며 특히, 관내ㆍ외 어린이집과 학교에 홍보물을 발송하고 각종 언론매체를 통한 홍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한편, 곤충연구소 관계자는 “예천곤충생태체험관을 방문한 어린이들이 아무런 불편 없이 즐겁게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면서 “전국의 어린이들이 특별이벤트에 많이 참여해 꿈과 희망을 키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손호동 記者 FM-TV 標準放送 2010-04-21 오후 10:4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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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