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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172:예천체육54
작성자장병창 @ 2010.04.23 06:33:45
  예천의 자랑(2172) : 醴泉體育史資料集(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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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록(權寧錄) : 1916-1986, 예천읍 왕신리 139번지에서 태어나 예천읍 남본1리 245번지로 옮겨 살았다. 본관은 안동, 태선(泰善)의 아들, 대창학원(大昌學院) 졸업, 궁시장(弓矢匠)으로 16세 때 아버지로부터 배워서 활을 만들기 시작하여 20여만장의 활을 만들기까지 평생을 활과 함께 생활하였다. 자신이 만든 활로 전국관광민예품경진대회(全國觀光民藝品競進大會)에서 특선을 한 후 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弓矢匠)으로 지정(1971.9.13)되었고, 한국전통보존협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활의 원료인 민어풀, 물소뿔은 타이페이, 베트남, 태국 등 외국에서 구입하여 오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애로가 많고, 산뽕나무와 참나무도 주로 지리산과 태백산 등지에서 구입하여 오나, 이도 산림령 등으로 순조로운 운반을 하지 못하여 원료 공급이 되지 않아 활을 만드는데 애로가 많았다. 그의 집안은 400년 동안 11대째 계속되는 활의 명문가(名門家)였다. 조선 숙종 때 그의 10대조인 계황(繼黃)이 개성에서 예천으로 이사와 활을 만들기 시작한 후 대대로 내려왔다. 그 중 그의 6대조인 희직(熙直)은 순조 임금의 명령으로 당시 남해안 깊숙이 들어와 노략질이 잦았던 왜구를 무찌를 활 10만 장을 만들어 바침으로서 교위용장(校尉勇將)이란 벼슬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의 장남 오규(五奎, 1941-?)와 차남 오영(五榮, 1944- ), 3남 오덕(五德, 1944- )도 활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시위 소리만 들어도 내가 만든 활은 언제 무슨 재료로 만들었는지 훤히 알아요. 시위를 떠난 화살이 창공을 가르며 날아 과녁에 꽂힐 때의 쾌감은 활을 만드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지요"라고 말한 그는 연평균 150개의 활을 만들었다. 그는 수렵 도구에서 병기(兵器)로, 병기에서 스포츠 기구로 변한 활과 더불어 평생을 살고 활에 가문(家門)의 명예를 걸었다.(每日年鑑 1985 1986, 醴泉新聞)

  권영록(權寧錄) [弓矢匠] : 1916-?, 본적은 예천읍 왕신리 169번지, 주소는 예천읍 남본리 245번지이다. 무형문화재 제47호(1971.9.13 指定)로서, 슬하에 3형제(長男 五奎, 2男 五榮, 3男 五德)에게 전수하였다. 학력은 한학이다. 부속품으로 톱(길이 55cm) 1개, 활밀이(길이 75cm) 1개, 줄(길이 45cm) 1개, 나무찝개(길이 40cm) 1개, 짜귀(길이 27cm) 1개, 두루자(길이 29cm) 1개, 사련(길이 28cm) 1개, 심빗(길이 18cm) 1개, 도가니(직경 13cm, 높이 12cm) 1개, 디짐지(직경 23cm) 1개, 대칼(길이 26cm) 1개, 대빗(길이 25cm) 1개, 심노이빗(길이 21cm) 1개, 도지계(길이 35cm) 1개이다. 활 만드는 기술자인 그는 본관이 안동, 시조 태사공 권행(權幸)의 34세손이다. 그의 조궁술(造宮術)은 조선 영조 때 그의 7대조인 권희직(權熙直, 활 製作의 功으로 當時 校尉, 勇將의 벼슬까지 지냈다)으로부터 대대가업으로 전승되어 왔다. 특히 11대조인 권계황(權繼黃)이 활의 본고장인 개성에서 조궁술을 익혀 예천읍 왕신동으로 옮겨 대대로 살다가 권영록이 남본동 245번지로 이거 궁방(弓房)을 설치히고 활을 제작하였다. 그가 조궁에 종사케 된 것은 16세 때부터 연마하여 활의 인현력(引眩力)을 마음대로 조절해서 여러 가지 활을 만들어 관혁(貫革)에 맞히면 반동으로 되튀기게 할 수도 있고, 한(漢) 나라 유총(劉聰)의 활처럼 철판을 뚫을 수도 있다고 한다. 또한 전국에 산재해 있는 자신의 활을 쏘는 소리만 듣고도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전국 활 생산량의 70%를 권영록이 제작하고 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물소뿔을 구할 수 없어 6년 간 활 제작을 중단하다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배려로 조궁업을 계속하였다. 신장 173cm, 체중 72kg, 건강한 편이었다. 아들 권오규(權五奎, 1938-?)에게까지 전수시켜 후계자로 양성하고 있다. 예천군내 활 제작자는 권영록, 권영호(權寧鎬), 권우갑(權又甲), 권선출(權宣出), 이치우(李致雨) 등 5명이고, 타지의 활 제작자는 권태은(광주), 권영덕(구래), 권인수(울산), 권태기(울산), 김봉원(진해), 기타(안동, 영주)이다. 예천읍에 궁도협회가 조직(會長 崔元漢, 會員 50名)되고, 남산공원에 무학정(武學亭, 弓道場)이 설치되어 무사도를 닦는다. 그리하여 도대회, 전국대회에서 석권하였다. 김장용(4단), 권영학(3단), 권오규(2단)를 사범으로 위촉하여 계속 궁술을 익히고 있다. 궁도을 군기로 삼고 예산을 지원(국궁 50%, 양궁 50%)을 군청헤서 하고 있다. 양궁은 국궁에 힘입어 1970년대에 예천여중고(교장 장기오)에서 양궁부를 창단하여 선수를 많이 양성했다. 그리하여 소년체전, 아시안게임, 세계궁도대회에서 석권하였다. 국궁의 제작 기간은 활 1개에 4개월이 소요되고, 국궁의 값은 6만-30만 원, 전통궁의 값은 5만-30만 원(포항, 광주), 화살은 10개에 1만 원(개당 1천 원)이고, 권영록의 생계 보조금은 문공부에서 국고로 매월 8만 원(연간 96만 원)을 지급한다. 본래 활은 어느 민족이나 다 공유(共有)하던 무기요 수렵 도구이다. 아득한 옛날의 돌화살촉의 발견은 인류가 신석기시대 이래 활을 얼마나 중요한 이기(利器)로 사용했던가를 입증한다. 적어도 우리 나라에 총이 수입된 이조 말기까지 2,000여년 동안 활은 먼 거리의 표적을 겨누는 대표적 무기였음에 틀림이 없다. 조고선 혹은 삼국시대에 관한 기록을 보면, 한민족이 활을 잘 쏜다는 칭찬이 자자할 뿐더러 그 활의 우수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 보내는 선물 가운데도 활이 중요 품목의 하나로 되어 있었다. 세계의 허다한 활 가운데 우리 나라의 활은 활장(弓幹)이 짧은 편이어서 단궁(短弓)이라 한다. 단궁은 중동의 ‘터키’에서부터 몽고, 중국, 한국에 분포하는 즉 기마민족계(騎馬民族系)의 것이고, 일본이나 서양의 것은 해양계(海洋系)의 한 길이 넘는 활이다. 활장이 긴 것은 연궁(軟弓)이어서 화살의 미치는 거리가 짧기 마련이고, 멀리 미치는 것은 강궁(剛弓)일 수 밖에 없다. 현재 국궁의 관혁 거리는 145m지만 옛날엔 190m였다 한다.(1970년대)

  권영록(權寧錄) [記事] : 조궁술을 가업으로 이어온 지 400년, 무형문화재 47호, 권영록 옹은 조상들의 얼을 재현시키기 위해 50여년 간을 활과 더불어 살아왔다. 옛부터 활의 고장으로 이름난 경북 예천, 소백산의 정기 속에 맑은 시냇물은 옥류와 같은 활의 고장으로 더한층 돋보이게 한다. 권옹이 활만들기를 시작한 것은 16세 때부터인데, 조궁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부친 권태선(權泰善) 씨의 옆에서 일손을 거들면서 전수자의 기초를 닥았다. 그로부터 48년의 긴 세월을 오직 활과 함께 살아왔다. 그 동안 20여만 장의 활을 만들어 국내 뿐 아니라, 일본, 홍콩 등에 수출도 많이 했다. 권옹의 가업은 400년 전 조선 숙종 때 11대 조상인 권계황(權繼黃)이 활의 본고장인 개성에서 기술을 익혀 지금의 예천읍 왕신동에서 조궁업을 시작했다. 계황-광필(光弼)-성은(聖殷)-희직(熙直)-무겸(舞兼)-만영(萬榮)-병위(丙褘)-동락(童洛)-태선-영록 옹으로 이어졌다. 조궁 가업은 7대조 때 명궁으로서 그 이름을 떠치기 시작했다. 희직은 10만 장의 활을 만들었다. 이 활은 외적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 때의 공으로 희직은 교위 용장(校尉勇將, 現 軍人敎官)의 벼슬까지 하사받았다. 이로 인해 권씨 가문은 활의 명궁으로써 전국 방방곡곡에 소문이 퍼졌다. 고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시직공원 뒤, 황학정에서 쏘던 활과 고 박정희 대통령이 아산 현충사에서 시사하던 활이 모두 권옹의 작품이었다. 해방 3년 전부터 물소뿔 수입이 금지되면서 권옹의 가업도 중단되었다. 1948년 이 소식을 들은 이 대통령은 권옹을 경무대로 불러 위로한 뒤, 그 자리에서 물소뿔 수입을 명령할만큼 우리 활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국궁의 종가 권영록 옹은 예천읍 남본동 245번지, 나직한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에 목조 3칸 짜리가 그의 집이자 작업장으로, 현재까지 활 만드는 가업은 한 번도 끊기지 않고 계속 내려왔다. 경북 예천은 옛부터 활을 사랑하고, 활쏘기를 즐긴 궁술의 고장, 군내 1읍 11면 중에서 예천읍 남본동은 사내아이 걸음마 배울 때 활을 잡히고, 천자문 깨우칠 때 첫 시위를 당겨준다는 활 마을이다. 고추를 낳으면 새끼줄에 빨간 고추를 달아놓는 대신 이 마을에서는 활을 걸어주기도 한다. 이 마을에 궁도가 번성한 데는 대대로 명궁을 만들어 후학을 키워온 조궁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군기(郡技)가 궁도이고, 예천여고, 예천중의 교기가 궁도이며, 읍민 2만5천 명 중 반이 활을 쏜다는 자랑이다. 세계궁도대회에서도 이름 날린 김진호, 황숙주 등이 금메달, 동메달을 획득하여 국위를 선양하기도 했다. 마음이 어지럽고 정신이 흔들려서는 활이 바로 보이지 않는다. 뜻과 몸을 바르게 하는 본체가 궁도이기 때문이다. 권옹은 장남 오규(五奎, 42) 씨와 3남 오덕(五德, 35) 씨, 동생 영호(寧浩, 57) 씨, 영덕(寧悳, 42) 씨, 영강(寧康, 36) 씨를 비롯 친척동생 영익(寧翊, 36) 씨 등 6명에게 기술을 전수해줬다. 우리 나라에서 만든 활은 한 해 2만 장 가량되나 권옹 집에서 70%를 생산하고 있어 명실공히 조궁계의 종가를 이루고 있다. 권옹은 78kg의 체구에 봄 가을 전국 230개 사장(활 쏘는 장소)에서 고문으로 초청 받아 시범으로 쏘기도 하고, 심판으로 활약하면서 자신이 만든 활이 창공을 날아 표적에 명중하는 쾌감을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물맛이 차고 달아 이름 붙여진 예천읍 궁술에서 활달한 기품을 키우고 궁도에서 예절을 배우는 주민들은 국궁의 후예답게 활터에서 산다. 권옹은 전통을 잇는 보람에 더욱 좋은 활을 만들기에 더욱 정성을 쏟고, 우리의 문화재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으며 활을 아는 사람이 찾아줄 때가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조상의 얼이 담긴 국궁을 사랑하는 예천군민의 자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醴泉女子中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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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학(權寧鶴) : 1943- , 예천읍 왕신리 출신, 본관은 안동, 태진(泰震, 又甲)의 아들, 68년 동국대 농학과 졸업, 무형문화재 경북6호 예천궁장, 한국무형문화재 기능보존협회 부이사장이다. 64년 총무처고시(總務處考試) 4급 공채(公採)에 합격, 56년 조궁술(造弓術)을 아버지(무형문화재 6호)로부터 전수(傳授), 68년 경북 관광민속품 경진대회 특선, 68년 대한궁도협회의 공인 6단(公認六段)으로 명궁(名弓)의 칭호를 받았고, 70년 예천중(醴泉中) 양궁팀 창설 육성, 71년 사재(私財)로 예천여중고(醴泉女中高)에 양궁부(洋弓部)을 만들었고, 78년 경북민예전(慶北民藝展) 은상, 전국민예전 입선, 79년 제2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장원(壯元, 문화공보부장관상)을 하였다. 81년 국풍(國風)81 작품 전시, 미국 LA박물관 전시, 81-90년 전승공예대전(傳承工藝大展) 대의원, 83년 스위스 국립박물관 전시, 87-89년 한국궁우회(韓國弓友會) 상임부회장, 대한궁도협회 중앙대의원, 89년 인간문화재 작품전, 문화행사 초청 전시, 한국궁시기능보존협회장(韓國弓矢技能保存協會長), 경북궁도협회 상임고문, 대한궁도협회 공인심판, 예천궁도회장, 예천문화원 자문위원(醴泉文化院諮問委員), 전국민속제전 궁도부문 자문위원, 이충무공탄신기념제전(李忠武公 誕辰記念祭展) 경북 수석위원이다. 상으로는 대한민국 명궁(大韓民國明弓, 68), 경북도지사 표창(68-89, 20회), 대한궁도협회장상(68-89, 11회), 대한체육회장상(71- 89, 13회), 대한민국 명무(名武, 79), KBS사장상(81), 각종 궁도대회 100회 이상 입상(48회 우승), 예천문화상 (醴泉文化賞, 92), MBC향토문화상(문화부문, 95)이다. 무형문화재 경북 6호 궁장(弓匠)으로서 그가 만든 활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품이 되었고, 주소는 예천읍 남본리69번지이다.(醴泉新聞 1995.9.7, 韓國을 움직이는 人物들 1997, 朝鮮日報 DB 2003)

  권영학(嶺南 文化․文化人-國內 最高 弓匠 醴泉 권영학 氏, 3代째 家業 ''''타고난 弓匠'''') [記事] : 국궁(國弓), 활(弓)을 얘기하자면 예천을 빼놓을 수 없다. 활 쏘는 민족의 기(氣)와 전통을 고집스럽게 지켜오는 고장이기 때문이다. 그 구심에는 국내 최고의 궁장(弓匠)이자 명무(名武)인 권영학(權寧鶴․ 62․경상북도무형문화재 제6호 예천궁장) 씨와 그가 만들어내는 활이 있다. [신궁 명장] : 활과 함께한 40년 외길 인생. 그 길을 걷게 된 것은 운명처럼 이끌렸고 수양의 도(道)를 깨우치게 했던 우리 활에 대한 끝없는 애정이었다. 권씨의 고향은 예천읍 왕신리 ''''왕산골''''. 소년 시절 그는 활 제작의 달인이라는 소리를 듣던 아버지로부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약조를 강요받았다. 당시만 해도 빛을 보지 못하던 장인의 길 대신 관직으로 입신할 것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호통이 거듭될수록 오히려 활에 대한 호기심은 커져만 갔다. 거역할 수 없는 ''''핏줄''''이었다. 아버지가 활 만드는 일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던 터라 대신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활이라도 원없이 쏘아 볼 요량으로 궁도부에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대물림은 궁사의 자질로 나타났다. 한눈에 명궁의 재목임을 알아 본 지도교사가 부친을 설득해 손수 만든 활을 건네게 했고, 권씨는 그 활로 신기의 활솜씨를 보였다. 38세 되던 해 전주대사습놀이 국궁대회에서 장원에 올라 가장 젊은 나이에 ''''명무(名武)'''' 라는 칭호를 얻은 것을 비롯해 전국대회 100여 회 입상에 우승만 48회를 했다. 그런 와중에도 궁장의 길은 여전히 가로막혀 있었다. 아버지의 채근으로 상경해 대학 재학 중 총무처 4급 공채에 합격, 뜻하지 않은 외도를 했으나 1964년 6․3학생운동에 참가한 대가로 학교와 직장을 모두 잃었다. 전화위복이었다. 어쩔 수 없었던 낙향이 비로소 궁장의 길을 터준 것이다. 아버지가 바라는 길을 거스른 데 백배 사죄한 다음에야 활 제작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기법을 기본으로 했지만 감히 변형을 시도했다. 활폭을 줄이고 탄력성과 미려함을 더하는 작업이었다. 아버지의 호통이 따랐으나 활을 직접 쏘면서 개선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신기일까? 1967년 선보인 첫 작품 13장은 내로라 하는 궁사들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그 순간부터 이미 권씨는 최고의 궁장이었다. 권씨의 활 제작 솜씨는 예술의 경지에 비했다. 궁사들은 소장하려 애썼고 국내는 물론 외국 유명 박물관의 한 자리를 차지하며 우리 활의 위상을 높였다. 1980년 경북무형문화재 지정은 오히려 때늦은 것이었다. [예천 활] : 우리 활은 목궁, 철궁 등 약 10종류가 있었는데, 지금은 소뿔로 만드는 각궁만 남았다. 권씨의 예천활도 각궁이며, 길이로는 단궁(短弓), 구조상으로는 목편과 죽편, 각편 등을 모두 사용해 만드는 복합궁이다. 주재료는 대나무, 산뽕나무, 물소뿔, 소힘줄, 민어부레 등 모두 천연 소재다. 습하지 않은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만들며 활 한 장 만드는데 300번 이상 손이 가야하는 정성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1920년쯤 안동 권씨 집성촌인 예천 ''''왕상골'''' 에 활 만드는 기술을 가진 외지 사람이 들어와 권씨의 조부대에 제작술을 전했고, 다수의 마을사람들도 따라 배웠다. 예천 활이 전국 수요의 80% 이상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타지의 활 제작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산, 경주, 광주 등지에도 궁장이 있지만 이 역시 ''''왕상골'''' 출신이다. [궁장의 소임] : "인정받는 궁장의 지위에 올랐지만 오히려 짐스럽습니다." 권씨는, "고급 스포츠레저와 양궁에 의한 국궁의 급속한 퇴조 현상이 자신의 힘으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자괴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을 작정이다. 무엇보다도 궁장의 맥을 확산시키는데 주력할 계획이다. 권씨는 정부의 궁장 후보들에 대한 육성 지원과 국민들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했다. 그렇지 못하면 저변 확대는 고사하고 우리 활의 명맥도 단절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런 우려 때문에 요즘은 우리 활의 모든 것을 집대성한 책을 출간하는데 몰두한다. 꼬박 10년이 걸린 작업이다. 또 맏아들에게는 국궁 제작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쓰게 했다. 궁장으로서의 소임이라는 것이다.(정경구 記者 每日新聞 2004년 09월 02일)

  권영학(名弓 權寧鶴 氏 : "활쏘기는 道의 世界로 가는 길" 全國大會 48番 優勝 ''''最多 記錄'''' 활 쏠 땐 ''''自身''''조차 잊어버려야) [記事] : "활은 마음으로 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맞추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지요. 활쏘기의 궁극적 지향점은 바로 도(道)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명궁 권영학 씨는 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마자 ''''활은 기술로 맞추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수양을 통해 어떤 경지를 터득하는 것''''이라는 것부터 강조한다. 맞추기라면 권씨만큼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도 없다. 전국대회 150번 이상 입상에 우승만도 무려 48번을 차지한 전국 최다 기록보유자(1997년까지의 공식 기록). 이런 그가 ''''맞추기''''를 하지말고 마음으로 활을 쏘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은 그냥 일반론적 이야기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 국궁계가 언제부턴가 맞추기 위주로 흘러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우려와 지적이다. 경북도 궁도대표선수 겸 코치를 25년 간이나 연속해 온 이력이 있는 권씨는 활쏘기를 통해 얻어지는 경지에 대해, "마음이 지극히 편안해지고, 텅 비어지고, 고요해지고, 또 모든 세상사를 잊는 것은 물론 나 자신도 잊어버리는 상태가 저절로 온다. 이런 다음에는 꼭 신이 들린 것처럼 화살은 쏘는대로 그대로 과녁에 명중하게 된다"고 말했다. 백발백중의 경지는 결코 활쏘기 기술로 되는 것이 아니라 수양을 통해 어떤 경지에 도달했을 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 어떠한 걸림도 없이 활을 쏘는 무애(無碍)의 경지를 맛볼 수 있는 사람은 한 세대에 한 명도 나오기 어렵다고 궁도인들은 말한다. 권씨는 이러한 경지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 자신만이 안다. 앉아서 쏘아도 명중, 서서 쏘아도 명중, 걸어가면서 쏘아도 명중, 이 맛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알랴"라는 말로 표현했다. 고향이 예천인 권씨는 국궁 뿐 아니라 양궁계에서도 국보급 존재다. 예천여중․고 양궁부를 창설하고 육성한 인물. 오늘날 올림픽에서 한국양궁이 세계 정상에 우뚝 선, 그 뒤에는 바로 권영학이란 인물이 있었다. 권씨는 ''''그 때 선친께서 당시로서는 엄청난 돈을 선뜻 궁도부 창설 자금으로 지원해 주신 것''''을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다. 선친인 권태진 씨는 우리 전통 국궁을 만든 분으로 무형문화재 6호였으며 지금은 권씨가 전수를 해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다. "궁도 9계훈이 바로 국궁 정신의 핵심입니다. 이 정신은 비록 국궁계 뿐 아니라 우리 전통 사상의 모든 핵심을 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궁도 9계훈의 실천을 통해 국궁인은 바로 이 시대 한국 정신의 맥을 잇고, 그 것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수양과 사회, 국가, 나아가 세계에 이바지하는 것이지요"라며 많은 운동 중에서도 우리의 전통 사상을 그대로 담으면서 그 정신적 맥을 오늘에 살리고 있는 것이 바로 국궁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궁도 9계훈은 정심정기(正心正己), 불원승자(不怨勝者), 자중절조(自重節操) 등 궁도인의 9개 실천 요강으로 각종 대회 때는 반드시 단체로 낭독하고 있다. 권씨는 장전(長田)이라는 호를 쓰고 있다. 활(弓)과 더불어 길게(長) 마음밭(田)을 가꾼다는 의미의 이 호는 자신이 스스로 지어 사용하는 것. 국궁과 더불어 살고있는 모습이 이 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권씨는 우리의 전통활을 세계에 알리는 일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외무부 주선으로 1981년 미국 LA박물관에 작품을 전시한 것을 비롯해 83년 스위스 국립박물관 작품 전시, 85년 독일(서독) 국립박물관 작품 전시, 95년 중국정부 초청 작품 전시 및 제작 시연, 97년 일본 세계공예품 전시 및 제작 시연을 했다. 그는 요즘 국궁에 대한 각종 자료 정리에 바쁘다.(김동윤 記者 嶺南日報2004.12.9)

  권영학(權寧鶴 : 醴泉弓匠) [文化財] : 무형문화재 제6호로, 소재지는 예천읍 남본리 69-3번지(권영학), 예천(醴泉)은 예로부터 국궁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명맥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궁을 제작하고 심신을 수련하는 이들이 많다. 국궁은 각궁이라 하여 우리 군의 특산물으로 예천궁장 기능 보유자인 권영학(道 지정무형문화재 제6호) 씨가 수작업으로 완성하며, 전국 수요 60%를 예천 출신의 명장들이 제작ㆍ공급하고 있다. 활의 주요 재료로는 대나무, 산뽕나무, 굴참나무, 소심줄, 물소뿔, 민어풀 및 장식에 필요한 화피 등을 사용하며, 특별히 도지래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외에 몇 가지의 공정을 거쳐 각궁을 생산한다. 생산 기간은 보통 100일에서 120일 정도 소요되며, 제작 시기도 따뜻하고 서늘한 봄ㆍ가을에 주로 생산한다. 국궁으로 심신을 단련하고 후진 양성을 위한 활쏘기 장소로 예천읍 남산(남본리 소재)에 무학정(武學亭)이 있으며, 1960년까지만 하여도 예천읍 대심리에 있던 것을 활쏘기에 불편하고 건물이 낙후되어 남산으로 이전하였으며,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인 이곳에서는 선비의 정신 수양으로 활쏘기를 많이 하였다. 남산(南山)은 산책 코스와 체육시설이 있으며 읍(邑)의 전경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팔각정과 화재를 예방해 준다는 돌자라, 호국선열의 혼이 깃들여 있는 충혼탑이 있는 곳으로 군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1996년 국제 규모의 양궁경기장이 예천읍 청복리에 들어서 매년 전국 규모의 양궁대회가 4~5차례 개최되고 있으며, 실내양궁경기장인 문화체육센타가 1,164평의 규모로 2000년도에 준공되었다. 예천이 활의 고장으로 크게 알려진 것은 지난 79년 예천여고(醴泉女高)의 김진호 선수가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5관왕으로 제패하면서부터이다. 이 때부터 활(國弓ㆍ洋弓)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 어느 지역보다 높고 적극적이다.(醴泉郡廳 홈페이지)

  권영학(慶尙北道 無形文化財 保存會 創立總會 開催) [記事] :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보존회는 2009년 6월 19일 김천시문화회관에서 지역의 전통문화를 계승보존하고, 무형문화재를 연구 발전 육성하기 위하여 전수자 양성과 국내외 전시 및 시연, 회원 상호간 친목도모를 통해서 고유문화 발전시키는 목적으로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보존회“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27명의 기능 보유자가 한자리에 모여서 정관 및 제 관련규정을 제정 및 임원 선임 및 각 분과별 위원회를 구성하고, 7월초 안동에서 임원 회의를 가질 예정이다. [임원명단] : 회장 권영학(예천 궁장 보유자), 부회장 김일웅(김천 징장 보유자), 부회장 김연박(안동소주 이수자), 부회장 정순임(판소리 보유자), 이사 황규욱(문경 호산촌 교육조교), 이사 김삼식(문경 한지장), 이사 조석탑(제전농요 후보), 이사 이무남(청송 옹기 보유자), 이사 이면규(영풍 장도 후보), 이사 양규석(예천 통명농요 후보), 이사 이자성(청송 한지 보유자), 감사 송강호(김천 과하주 보유자 후보), 조석탑(저전 동농요 후보).(최도철 取材部長 金泉新聞 2009-06-23 오후 4:47:00)

  권영학(마음으로 만든 활, 마음으로 쏜다-權寧鶴 弓匠) [記事] : 대를 이어 활을 만들어온 한국을 대표하는 궁장(弓匠) 기능보유자인 권영학(權寧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6호) 씨는 명무(名武)이자 명궁(名弓)의 칭호를 갖고 있다. 이 세 가지 기능 보유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신문 TV에 소개된 사례만 해도 줄잡아 200번은 될 것이다. 권씨에 뒤이어 활 만드는 장인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는 권무석(서울시 무형문화재 23호) 씨, 경기도 부천에서 살고 있는 김박영(金博英,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씨도 궁장이다. 이들은 모두 경상북도 예천 출신이다. 궁장은 한국의 고유 궁인 각궁을 전통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사람이다. 각궁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47호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활을 제작하는 사람은 모두 십여 명에 불과하다. [한국 양궁의 뿌리 예천 양궁] : 청소년(16세) 시절부터 지금까지 50여년 한길을 걸어온 권영학 씨의 인생엔 활에 담긴 수많은 사연이 녹아있다. 활을 만드는 궁장이었던 부친(권태진) 밑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어깨 너머로 배워 온 활 만들기가 결국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찬밥 신세였던 소위 "쟁이"의 길이었다. 옛날 한 동네 대학생이 한 명도 있기 힘든 1964년 대학(동국대 농과대) 재학 중 4급 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하여 출세 길도 열릴 수 있는 그였다. 숱한 고민 끝에 가업(家業)을 잇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김진호(현 한국체대 교수) 선수를 배출하기도 한 예천여자중고등학교 양궁부도 권씨의 작품이다.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김진호 선수가 5관왕을 차지해 세계 양궁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이후로 전국에 양궁 붐이 일어났다. 예천양궁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전통각궁을 제작하고 전통궁도의 토양이 그 기반이 됐다. 양궁을 창설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다. ꡒ예천 궁도는 한국 양궁의 시발점ꡓ이라며 세계에 우뚝 선 한국 양궁의 오늘을 있게 한 자부심이 그의 형형한 눈빛에 어려 있었다.

  [각궁은 선비의 심신수련용] : 활은 궁간(弓幹)의 길이에 따라 장궁(長弓)과 단궁(短弓)으로 나누어진다. 장궁은 활의 길이가 2m이상으로 주로 삼림지대나 해안 지대의 민족들이 사용해왔다. 단궁은 2m 이하로 초원지대의 민족들이 주로 사용하던 활이다. 구조에 따라 환목궁(丸木弓)과 복합궁(複合弓)으로 분류된다. 또 사용된 재료에 따라 나무로 만들면 목궁, 대나무로 만들면 죽궁, 소뿔로 만들면 각궁, 놋쇠로 만들면 철궁 등으로 구분한다. 대나무 한 가지 재료로 제작한 것도 있고, 대나무, 뿔 등 여러 가지 재료를 복합하여 제작한 것도 있다. 대나무․뽕나무․참나무․소 심줄 ․물소 뿔․민어부레․화피 등 여러 재료가 동원된다. 우리나라의 활은 크기로는 단궁이며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한 복합궁으로,「복합단궁」이라 한다. 쇠뿔(牛角) 쇠심줄 같은 것을 재료로 하여 만드는 것이 현존하는 각궁(角弓)이라 불리는 우리나라 전통 심신수련용 활이다. 원래는 각궁 외에도 예식에 쓴 예궁 등 우리 활은 10개 종류가 있었다. 가장 일반적인 정량궁(正兩弓)은 활짱의 길이가 5.5척, 군왕(君王)이 위용으로 지니는 예궁(禮弓)은 6척에 달한다. 전투용에는 대소의 차이가 있으나, 기마용(騎馬用)의 동개(활과 화살을 넣어 등에 지는 제구)는 단궁(短弓)에 사용되는 것이다. 활은 옛날 중국의 창(槍), 일본의 칼(刀)과 더불어 수렵(狩獵)의 도구로서 뿐만 아니라 전쟁의 수단으로도 사용되어 왔다. 예천 활은 복합단궁(復合短弓)으로 재료의 처리와 제작과정이 손으로 이루어지는 수공예품(手工藝品)이기 때문에 보기에도 아름다움이 뛰어나다. 활 제작은 크게 활을 만드는데 필요한 각종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 재료들을 모아 활로 만드는 과정, 만든 활이 제 모양을 갖추고 그것을 쓰는 사람의 몸에 맞도록 해궁(解弓 = 활 풀이)과정, 그리고 마무리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활 제작 작업은, 5월에서 9월까지 재료 처리 기간 이외에 하나의 활이 완성되는 기간은 약 다섯 달(150일) 소요된다고 한다. 활은 모두 자연조건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천연재료로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없이 사람의 손길이 미쳐야 하는 고난도 작업으로 기후와 기온에 맞추어 이루어지는 단계별 작업이다. 각궁은 활짱(활의 몸)의 손잡이 부분(줌통)과 양쪽 끝(정탈목 고잣잎)에는 참나무와 뽕나무를 각각 대지만, 강력한 탄력을 유지하는 오금 부위에는 죽심(竹心)을 넣고 그 안팎에다 쇠뿔과 쇠심줄을 부레풀로 접착시킴으로써 탄성(彈性)의 강도를 높였다. 이때 수우각(水牛角 , 무소뿔)을 깎아 댄 것을 흑각궁(黑角弓)이라 하고, 또 한우각(韓牛角)은 백각궁(白角弓)이 되는데, 백각으로는 큰 활을 만들지 못하는 결점이 있어 흑각궁을 높이 쳤다. 이러한 각궁은 목궁(木弓)이나 죽궁(竹弓)에는 비할 수 없이 화살을 멀리 날리는 강한 힘을 분출한다.

  [1920년대 왕산골 안동권씨의 가업] : 활이 임진왜란(1592) 때 일본 조총과 조선중기이후 화약 총포발명 이전까지 전쟁의 주 무기로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오늘날 전승되는 각궁은 병자호란 등 양난(兩亂)을 전후한 16세기에 정형되어 계승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예천에서 각궁을 만든 것이 언제부터이고 왜 이곳에만 활 제작이 이어져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쟁이 심했던 지역이어서 전쟁무기인 활에 친화적인 문화 때문인지, 선비의 고장이어서 궁술이 발달됐는지 잘은 모른다. 삼국시대 예천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축을 벌여온 지역이다. 북쪽 2~3십리에 어림성터 흔적이 80년대까지 만해도 남아있었다. 예천은 우리나라 활(弓)의 대표적 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현재의 각궁 제작기술이 예천에 전래된 시기는 조선조 숙종 때 한성(서울)에 살던 권계황(權繼黃)이 활을 만들어 예천 관아에 납품하는 궁장(弓匠)이었다는 일부 보도가 있었으나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인 고증은 없다. 1920년대 초 당시 읍내에 서 조금 떨어진 왕산골(旺山谷, 현 왕신동)에서 모여 살고 있던 안동권씨들이 활을 만들어 쏘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궁장들을 탄생시킨 배경이었다. 지금도 예천출신의 명장들이 전통의 맥을 이어 전국 각궁 수요의 상당수를 공급하는 각궁의 산실이다. 이곳 사람들은 아들을 낳으면 새끼줄에 붉은 고추도 달지만 활과 화살을 건다. 예천궁장은 전통공예기술로서 미적 감각이 뛰어나고 기술이 정교하여 시도(市道)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활 제작은 긴 시간에 걸쳐 한 공정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세심한 손길과 몸의 힘이 필요한 작업이다. 만드는 사람의 열정과 외골수 장인정신이 있어야 가능한 고통과 인내의 과정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말해주듯, 굳은살이 배여 있는 투박한 권영학씨의 손은 수많은 활의 산실이 된 장한 손이다. 복잡한 손작업으로 제작되어 다른 활보다 화살을 멀리 보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여기서 나온다. 영화 〈왕의 남자〉속 줄타기는 광대의 예술혼과 애환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소재다. 그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장치가 바로 ꡐ활ꡑ이다. 활 제작의 최고 기술자를 배출한 예천의 명성은 80년 대 이후 활을 잘 쏘는 고장으로 명성이 더 추가됐다. 이 곳 출신인 김진호 선수가 세계를 주름잡는 ꡐ궁왕(弓王)ꡑ으로 등극하면서부터이다. 안동에서 예천읍으로 가는 왼쪽 편에 진호국제양궁장은 이를 기념해 만든 것이다. 인구 5만이 안 되는 농촌지역에 궁도팀이 있는 학교가 7개에 이른다. 1980년 궁도시범학교로 출발한 예천동부초등학교 궁도팀 출신으로 베이징올림픽에서 단체전 금메달과 개인전 동메달을 획득한 윤옥희 한희정 황숙주 등의 국가대표 선수를 배출했다.

  [국내 궁도 선수사상 최다기록 보유자] : 전통 활을 서양에서 들어온 양궁(洋弓)의 상대적 개념으로 국궁(國弓)이라 부르나 궁도로 부르는 게 정확하다. 원래 조선시대에는 궁술(弓術)이다. 일제강점기에 살라져 가는 우리 궁술을 보존하기위해 1922년 7월 조선궁술연구회가 발족했다. 1926년 5월 조선궁도회로 개칭하며 궁도로 불리게 되었다. 궁술을 일본식으로 검도 유도와 같이 궁도라 부르게 된 것이다. 궁장으로서 뿐 아니라 명궁으로서 권영학 씨의 면모는 무학정(武學亭, 예천읍 남본리, 남산공원)에서 볼 수 있었다. 권씨는 68년부터 93년까지 궁도 선수와 궁도 코치 감독으로 활약했다. 전국 체전 및 전국규모대회 등 마흔 네 번이나 우승하고 백 쉰 번 이상 입상하는 국내 궁도사상 최다기록 보유자이다. 예천여중고 양궁부 등 97년까지 전국 72개 지구 궁도팀 창설을 지도했다. 궁도정신과 선비정신의 바탕은 禮儀嚴守, 習射無言, 不怨勝者, 寞灣他弓 등 궁도 9개훈과 집궁 8원칙. 활을 만드는 권씨이지만 궁도정신을 신념처럼 숭상한다. 즉 단순한 장인이 아니라 궁술의 정신 즉 ꡐ도(道)ꡑ를 말하고 있다. 문무를 겸비한 궁도정신은 우리정신문화의 본류라고 장담한다. 권영학씨는 활시위를 힘차게 당기며 예를 차리는 절차와 몸가짐을 엄하게 지키며(禮儀嚴守), 활을 쏠 때는 말하지 말 것이며(習射無言), 나를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말 것이고(不怨勝者), 남의 활을 당기지 말 것이다(寞灣他弓) 등 9개 훈을 바탕이다. 그는 "호흡을 단단히 가다듬고 마음을 정제한 후 하체에 단단히 힘의 중심을 잡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오른손으로는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당기듯 시위를 힘차게 잡아당긴다. 그리고 숨을 내쉬며 오른손을 풀어 호랑이를 숲 속으로 힘차게 돌려보내게 한다."는 예부터 전해진 활 쏘는 방법을 후학들에게 일러주었다. 바람을 뚫고 유연하게 날아가는 화살은 지나가는 바람과 산, 자신의 신체가 모두 하나가 되어야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수치화된 노력이 아니라 부단한 연습에서 몸에 배인 기술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 활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장롱 속에 고이 모셔둔 유물로 여긴다. 비록 스포츠화 되어버린 모습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어져오는 활을 통해 지켜져 온 민족정신과 전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도 궁장을 잇겠다는 전수희망자는 나오지 않는다. 활의 가치를 모르는 당국의 무관심도 한 몫하고 있다. 권영학씨는 체계적인 정책지원도 전무하고, 전수관 마저 형식적인 무용지물로 만든 예천군 당국의 탁상행정으로 인한 혈세낭비를 호되게 꾸짖는다. 전임군수가 계획해 놓은 남산 무학정도 소규모로 축소해 왜소하게 만든 것은 전임자이자 경쟁자의 업적 깍아 내리기라는 것이다.

  [고대 한민족 파워 비밀은 활] : 활은 옛날에는 병기(兵器)였다.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활(弓)을 잘 쏜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안다. 평화시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 상무(尙武)정신을 다듬었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전시에는 활로써 외적을 물리친 것이다. 고구려의 고주몽, 온달장군 그리고 이성계 등 숱한 명궁들이 이름을 날렸다. 우리 선조의 활쏘기 솜씨를 유전자로 받은 탓인지 한국 양궁은 세계양궁경기를 휩쓸고 있다. 활은 삼국시대에 보편화되었으나 훨씬 이전인 기원 전 고조선을 전후하여 국방과 수렵생산의 주무기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를 침략한 외적들은 우리 선조 장수들의 활 솜씨에 전의를 상실할 정도였다. 당나라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고구리) 원정에 나선 태종 이세민은 고구려 서부 요새인 요동벌 안시성 성벽아래에서 한쪽 눈을 잃고 결국 후퇴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뜻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2천여 년 전 중국대륙을 호령하던 진나라와 한나라가 우리 고대민족과 관계있는 흉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조공을 바친 것은 흉노의 강력한 기마병과 궁수(弓手)들 때문이었다. 고구려의 한 갈래인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의 칭기즈칸과 기마병들도 마찬가지이다. 고대 한민족의 웅비와 신궁(神弓)들의 관계를 말해준다. 옛날 한족(漢族)들이 동북아시아 민족을 ꡐ동이(東夷)ꡑ라고 했는데 이(夷)는 궁(弓)과 대(大)를 합한 글자이다. 우리 민족이 ꡐ활을 잘 만들고 잘 쏘는 동쪽의 민족ꡑ이라 해서 부른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만큼 활 제작에 있어서 탁월한 기술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진수가 쓴 정사 ꡐ삼국지ꡑ에는 구려(고구려) 압록강 위 소수맥에는 좋은 활이 나와서, 이른바 맥궁(貊弓)이라 한다. 박달나무로 만든 고구려의 맥궁(貊弓), 동예(東濊)의 단궁(檀弓), 신라의 포궁(砲弓)이 사용되었다는 것이 중국 사서에 나온다. 고대 우리민족의 한 갈래인 읍루(지금 연해주)의 활은 길이가 4척으로, 힘은 쇠뇌와 같고, 화살은 호나무를 사용하며, 길이가 1척8촌이고, 푸른 돌로 촉을 만든다. 궁술이 뛰어나 사람을 쏘면 모두 눈에 맞는다. 화살에 독을 발라서,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 조선시대 학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활은 최고의 무기"라고 했다. 조총이 멀어야 50m 나가는 반면 조선 각궁은 400m 앞 물체까지 꿰뚫는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각종 공장의 기록과 기술자 명단에서 그들을 ꡐ○○匠ꡑ이라 호칭하지 않고, 유독 ꡐ궁인(弓人)ꡑ․ꡐ시인(矢人)ꡑ이라 한 것을 보면 각별히 차등을 두어 예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국난을 만난 선조는 양인(良人)들에게 궁궐 내 정자에서 활쏘기 대회를 한 적이 있다. 이런 우리의 활쏘기 문화는 우리문화를 말살해 죽이려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빠르게 쇠퇴했고 오늘날 양궁이라는 변형된 모습에 기대어 이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권영학 씨의 활을 만드는 손놀림을 보며 수천 년 전 알타이산맥 아래 동아시아를 활보하던 고대 한민족의 멋과 정신이 담긴 혼을 보는 듯 했다. 한국의 정체성이 세계화의 대세 속에 자취를 잃어 가는 현대 속에, 한 장인의 손길에서 전통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퍽 다행스런 일이다. 문제는 임오생(壬午)인 그의 나이도 칠순이 코앞에 다가왔다. 손에 힘이 빠져 계속 활을 만드는 게 힘들고 숨 가쁘다. 궁장은 전수기간이 길고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서 전수희망자가 적다고 권씨는 안타까워하고 있다.

  궁장이 되기까지도 힘들지만 활을 만들어서는 소득 창출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국궁을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개량궁을 사용하고 각궁을 사용하는 궁도인이 매우 적다. 이제부터라도 당국의 적극적인 관심으로 궁장을 잇는 전수자를 길러야 한다. 한국의 국궁은 궁장을 기르는데 그치지 않고 궁도를 역사문화산업으로 키울 수 있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세계에 내놓을만한 찬란한 고대 한국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예술이다. 전국 산하에 지천으로 널린 골프장을 보며 정부에서 세계관광객을 불러 모을 수 있는 궁도장 하나쯤은 제대로 만들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국내 도시인들도 경관 좋은 산 중턱에 궁도장을 마련해놓으면 분명히 매력적이다. 일본에서는 도시가 농촌지역의 갖가지 경관 문화를 보기 위해 몰려오는 ꡐ그린투어리즘ꡑ이 뜨고 있다. 활쏘기와 활 만들기는 단순한 무예나 레포츠가 아닌, 우리 민족과 함께 해온 의미 있는 전통무예이자 전통공예이다. 전국의 뜻있는 사람들이나 다른 지방에서도 관심을 가져야한다. 지난 17일까지 5일간 ꡐ전국사두대회ꡑ 겸 승단대회가 대한궁도협회 주최로 영주시 충무정에서 열렸다. 사정(射亭, 활 쏘는 정자)은 충무정 팔공정 관덕정 영락정 등 전국에 300여개가 있다. 국궁의 사회문화사를 탐구한 책, <활을 쏘다>는 김형국(金炯國)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가 고대 중국의 병서와 조선 시대 역사 문헌까지 훑으면서 활의 역사를 문화사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있다. 이 모두가 활에 눈뜨고 나서 생긴 의미 있는 일이다. 앞서 얘기한 <왕의 남자> 곳곳에서 활은 중심이미지이다. 연산군의 침소에는 활과 화살이 있고 중신들이 꾸민 사냥놀이에서 광대 육갑은 화살을 맞고 죽는다. 그러나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줄을 타며 왕을 풍자하는 사설을 읊는 장생을 향해 연산이 활을 쏘는 장면이다. 화살이 줄을 스치자 장생은 중심을 잃고 ꡐ반허공ꡑ의 판타지 세계에서 지상으로 떨어진다. 우리고유의 궁도가 세계 진출은커녕 국내에서도 생존의 갈림길에 있다. 궁도(국궁)가 행여나 역사의 후미진 곳으로 떨어지는 날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정책지원과 국민들의 사랑이 필요하다.(글: 金正模 編輯委員 大邱日報 2009-07-13 16: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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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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