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곳은 군민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게재된 내용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제목자랑2244:권중화領議政1(祝예천초.경북도립대/예천방문636)
예천의 자랑(2244) : 유천면 성평리 출신 권중화 영의정(1)(附 예천초등학교 양궁부, 개인(양희우) 금메달과 단체 은메달...축하합니다/경북도립대, 브래드사업 지원대학 선정...축하합니다/예천방문 636)
---
권중화(權仲和) : 1322(충숙왕 9)-1408(태종 8), 유천면 성평리 덕달 뒷들(德達後坪) 출신, 자는 용부(庸夫) 또는 용보(容甫), 호는 동고(東皐), 시호(諡號)는 문절(文節), 예천백(醴泉伯)에 봉(封)해졌다. 본관은 안동, 우정승 한공(右政丞漢功)의 2자, 중달(仲達)의 동생, 방위(邦緯)의 아버지이다. 1353년(공민앙 2) 문과(文科)에 을과 제2인(乙科第2人)으로 급제하여 대언(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로 전선(銓選)을 맡아보았다. 1360년(공민왕 9) 4월 왕명에 의해 중국 장사성(張士誠)이 보낸 사신에게 찾아가서 답례하였다. 1376년(우왕 2) 2월에는 밀직(密直)으로서 서연(書筵)에서 강의를 하였고, 우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고, 이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즉 1377년(우왕 3) 5월에 최영(崔瑩) 등이 고려 태조의 진전(眞殿)에 가서 동, 지(動,止)를 점쳐 지(止) 자를 얻었다. 우왕이 이르기를, "왜구가 서울(開城) 가까이 왔는데, 점만 좇을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정당문학 권중화를 철원(鐵原)에 보내어 피난처를 보았다. 1378년(우왕 4) 10월 왕이 정당문학 권중화 등을 협계(峽溪)에 보내어 피난처를 보게 하였다. 권중화가 돌아와 보고하기를, "북소(北蘇)의 옛 궁궐터 180간(間)을 발견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조정의 의론에 의해 중지되었다. 1379년(우왕 5) 11월 왕이 삼사좌사 권중화(三司左使權仲和) 등을 보내어 회암(檜岩)에 피난처를 보았다. 1380년(우왕 6) 12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권중화 등을 남경(南京)에 보내어, 금300 냥, 은 1,000냥, 말 450필, 베 4,500필을 바치고 시호(諡號)와 습위(襲位)를 청하게 하였다. 1381년(우왕 7) 3월 명(明) 나라 사신으로 파견되어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요동 도사(都司)는 세공(歲貢)이 정량에 차지 않는다고 되돌려 보냈다. 1390년(공양왕 2) 5월에 일어난 이초 옥사(彛初獄事)에 연루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히었고, 동년 8월에 장하(張夏)와 함께 먼 지방으로 귀양갔다가 동년 11월에 사면되고 편의한 대로 거주하게 되었다. 1391년(공양왕 3) 11월 왕이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삼았다. 이초사건(彛初事件)에 연루되어 죄를 얻은 자들이 이때에 와서 모두 복직되었다. 1392년(공양왕 4) 1월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임명되어, 동년 2월에 영복군(永福君) 격과 함께 남경(南京)으로 가서 은혜를 사례하였다. 동년 6월에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에 올랐다. 이 태조의 개국공신(開國功臣, 1392)으로, 또는 기년 숙덕(耆年宿德)으로써 예문춘추관 대제학(藝文春秋館大提學)에 오르고, 1392년(태조 1) 11월 27일 왕은 권중화를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로 임명하여 양광도(楊廣道), 경상도, 전라도로 파견, 국도 후보지(國都候補地)를 물색케 하였다. 1393년(태조 2) 1월 2일 권중화가 돌아와 전라도 진동현(珍同縣)과 양광도(楊廣道) 계룡산(鷄龍山) 아래를 국도 후보지로 천거하면서 특히 <계룡산도읍도(鷄龍山都邑圖)>를 바쳤다. 태조는 왕사(王師)인 무학 대사(無學大師)를 데리고 계룡산에 친행(親行)하여 국세(局勢)를 살핀 후 동년 3월부터 일꾼을 풀어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정전(正殿)의 터를 닦고 열초 공사(列礎工事)가 급속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동년 12월 경기좌우도관찰사 하륜(京畿左右道觀察使河崙, 1347-1416)의 반대로 신도읍지 조성을 위한 큰 일이 중단되었다. 1394년 2월 18일 좌시중 조준(左侍中趙浚), 영삼사사(領三司使) 권중화 등 11명이 서운관원(書雲館員)들을 인솔하여 하륜(河崙)이 신도읍지로 천거한 무악(毋岳, 現 延禧洞 新村洞 一帶)의 땅을 보기 위하여 현지로 출장을 갔다. 동년 2월 23일 출장에서 돌아와 무악(毋岳)의 남쪽 땅은 협소하여 도읍지로서는 불가하다고 보고하였다. 동년 9월 9일 권중화, 정도전(鄭道傳) 등 중신들을 신도읍지로 결정된 한양(漢陽)에 보내어 종묘(宗廟), 사직(社稷), 궁궐, 조시(朝市)와 도로의 묘지를 정하게 하였다.
1394년(태조 3) 2월에 <동국역대제현비록촬요(東國歷代諸賢秘錄撮要)>를 편찬하였다. 1396년(태조 5)에 사은사(謝恩使)로 명(明) 나라에 다녀왔다. 즉 명 나라가 조선에서 세공(歲貢)을 적게 바친다고 트집을 잡아 문책해 왔으므로 이에 당황한 조정은 그로 하여금 사은사로 보냈다. 이에 명 나라에 간 그는 우리가 바친 세공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고 정성을 다한 것이므로 더는 바칠 수 없다고 조리 정연하게 진술하여 명 나라 황제인 태조로 하여금 감복케 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진정한 사신''''이라는 칭찬을 받음과 함께 현재 대로가 마땅한 세공(歲貢)이라고 확약을 받아왔다. 1399년(정종 1)에는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편찬하였는데, 이는 기존의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을 가지고 다시 수집을 더하여 전서(全書)의 판각(板刻)을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국민 모두가 그 거주하는 곳에 따라 약을 구할 수 있고, 병 증세에 따라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우마(牛馬)의 병에 약을 잘못 써서 죽게 함을 염려하여 그 치료의 처방을 집성하였다. 1404년(태조 4)에 삼사좌복야 영서운관사(三司左僕射領書雲館事)로서 새 도읍의 종묘 사직(宗廟社稷)과 궁전 조시(宮殿朝市)의 도본(圖本)을 바치니, 임금이 서운관 풍수학인 이양건(書雲館風水學人李陽建) 등에게 명하여 지형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임금이 종묘사직을 세울 곳을 살펴보고, 공작국(工作局)을 설치하고, 수레를 몰아 용산(龍山)으로 행하여 종묘를 지을 재목을 둘러 보고, 또 친히 가서 기초를 닦는 것을 보았다. 동년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1406년(태종 6) 8월 왕이 서울 안에 수재, 화재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것은 자기의 부덕한 까닭으로 이러한 재앙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니, 차라리 왕위를 왕세자(讓寧大君)에게 선양(禪讓)하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하여 성석린(成石璘), 하륜(河崙), 권중화(權仲和)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나아가 말렸다. 1407년(태종 7)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러 예천백(醴泉伯)에 봉(封)해졌고, 새 서울 한양(漢陽)의 종묘 사직과 궁전 조시를 건설하는데 진력하다가 죽었다. 천성이 조용하면서도 쾌활하고, 극기를 잘 하여 스스로 근신을 잘 했고, 용의주도(用意周到)하여 권세와 부귀에 휩쓸리지 않았으니, 세상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고사(故事)에 밝아 정사(政事)에 고문격이었고, 의학, 지리, 복서(卜筮)에도 통달하고, 서도(書道)에도 능하여 팔푼체를 잘 썼다. 예서(隸書) 특히 전서(篆書)를 잘 썼다. 양주 천보산(楊州天寶山)에 있는 목은 이색(牧隱李穡)이 지은 회암사나옹화상비(檜岩寺懶翁和尙碑, 檜岩寺禪覺王師碑, 1377)의 글을 예서로 썼고, 개성의 광통보제사비의 전액(篆額)을 썼다.
[權近이 權仲和에게 올리는 詩] : 1394년(태조 3) 여름에 제(權近)가, 우리 일가영삼사사 상국(領三司事相國, 權仲和) 저택의 북쪽에 붙여 살고 있었습니다. 한 번 가서 뵙고 물러 나온 뒤 수 일 만에 병이 걸려, 달이 넘도록 낫지 않아서 자리에 누워 신음하였기에, 항상 다시 찾아봅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홀연히 어느 날, 장수(長鬚)를 보내어 귀한 선물을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제 잔치에 임금을 모셨는데, 임금께서 진어하시던 음식을 거두어 나에게 내리셨다. 은총이 지극한지라 내가 감히 사사로이 할 수 없으니, 친척과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 임금이 주신 영광을 빛나게 하여야겠다."라고 하였다. 제(權近)가 병을 참고 일어나서, 절하여 받고도 몸소 가서 사례하지 못하고 또 말하기를, "공(權仲和)은 넓은 재국(才局)과 정통한 지식과 맑은 덕행과 단아한 명망으로 성조(盛朝)의 개국(開國)하는 날을 만나서, 전장(典章), 생용(笙鏞), 보불을 만들어 일대(一大)의 정치를 일으키는 것은, 임금이 반드시 공(權仲和)에게 물은 뒤에 정하였고, 공은 조정의 전장(典章)을 익히 알고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여, 매사를 반드시 옛과 지금을 인증하여 섬세하고 정밀하게 하여 청문(淸問)에 답하였으므로, 번번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임을 입었습니다. 물러나오면 겸손하고 조심하여 말을 못하는 것 같이 하고, 일호(一毫)도 자긍(自矜)하는 빛이 없었고, 한거(閒居)할 적에는 도서를 즐기면서 집안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므로, 쓸쓸하기가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았습니다. 임금이 이 때문에 중히 여겼고, 물의(物議)가 이 때문에 높게 여겼으니, 지위가 삼사(三司)를 거느리고 존귀(尊貴)가 백호에 으뜸이 되어 은총의 후함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權近)는 공(權仲和)에게 자손의 항렬이 되며, 일찍이 연묵(연墨)의 말기(末技)로 공(公)을 전방(銓房), 문사(文司)에 20여 년을 섬겼는데, 은의로 대우한 것이 깊고 오래니 마땅히 조석으로 계속하여 뵙고 섬기기를 부모같이 하여야 하는 데도 용열(庸劣)하고 게을러서 예(禮)와 신의를 폐하고 문하(門下)에 찾아가 가르침을 듣는 것이 여러 달만에 겨우 한 번 정도이니, 공(權仲和)을 저버림이 많습니다. 마땅히 무례한 것을 꾸짖어 절교하더라도 아무 말 못할 처지인데, 이제 끊지 않고 거두어 주고 은총을 나누어주니, 이것은 공의 넓고 큰 도량과 인자한 덕이 또한 지극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느껴 스스로 말 수 없어서 애오라지 졸(拙)한 시 두 절구(絶句)를 지어 좌우에 바쳐, 위로는 공의 하사받은 영광을 치하(致賀)하고 아래로는 나의 감사히 생각하는 정을 사례합니다. [權近의 詩] : 성조(盛朝)께서 노성(老成)한 신하를 높이니/ 물망(物望)이 높아 진신(縉紳)을 거느렸네/ 잔치 모시고 돌아오매 인하여 남은 음식을 내리니/ 은택(恩澤)이 널리 마을 사람에게 미쳤네/ 비오는 날 병져 누웠으니 해는 왜 이리 긴가/ 홀연히 가동(家童)을 보니 기뻐서 미칠 듯 하네/ 내사(內賜)를 상공(相公)이 나누어주었다 하거니/ 진귀한 음식이 오히려 어로(御爐)의 향기 띠었네(高麗史, 高麗史節要 第27卷 30卷 31卷 34卷 35卷, 太祖實錄, 太宗實錄, 陽村集 7卷 詩, 朝鮮金石考, 佛敎通史, 郡誌, 風流野談全集 6卷 60쪽, 燃黎室記述 第1卷 第2卷, 醴泉郡邑誌 1841 1895, 醴泉郡誌 1939, 韓國藝術總覽 16쪽, 韓國人의 族譜, 韓國醫學文化大年表 54쪽, 原色世界大百科事典 5卷 242쪽, 鄕土서울 1輯)
[韓國書藝史] : 1353년(공민왕 2) 을과 제2인에 올라 공민왕을 섬겨 대언(代言)이 되었다가 지신사(知申事)로 옮기고, 전선(銓選)을 맡았는데, 근신하고 주밀(周密)하여 친구에게 사(私)를 두지 않으니, 공민왕이 심히 중하게 여기었다.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1377년(우왕 3)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는데, 제자 중 명사(名士)가 많았다. 염정 자수(염靜自守)하여 권귀(權貴)에게 아부하지 않아서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태조가 즉위한 뒤에 기년 숙덕(耆年宿德)으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제수되고,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져 본관(本官)으로 그대로 벼슬을 사퇴하였다. 고사(故事)에 정통하므로 무릇 상정(詳定)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가서 물었다. 나이 비록 늙었으나 정력이 쇠하지 않아서 의약, 지리, 복서(卜筮)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고, 더욱이 대전(大篆)과 팔분(八分)을 잘 썼다. 평소에 산업(産業)을 다스리지 않고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앉아서 이(몸에 있었던 곤충)를 잡으며 이야기하였다. 늙어서 다만 말라빠진 말(馬) 한 필이 있었다. 나이 87세에 죽으니, 조회(朝會)가 3일 동안 정지되고, 왕이 중관(中官)에게 명령하여 조제(弔祭)케 하였다.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예장(禮葬)케 하고, 문절(文節)이란 시호를 주었다. 중궁(中宮)도 또한 내시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檜泉面檜巖里)에 있는 ''''회암사선각국사비(檜巖寺禪覺國師碑)''''에 그의 글씨가 남아있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서는, "권중화의 글씨, 한산군 이색 입비(韓山君李穡立碑)"로 되어 있다. 비신은 높이 9척(尺) 2촌(寸), 폭 3척 2촌, 이수가 있고 구부 위에 서 있다. 고려 말기의 비석으로는 매우 우수한 석조물이다. 권중화가 쓴 글씨의 자경(字徑)은 7분(分)의 서체는 진이(珍異)하게도 예서(隸書)이며, 제액(題額)인 "선각왕사지비(禪覺王師之碑)''''의 6자는 자경 7분의 전서(篆書)이다.(太宗實錄 1408.11.23, 韓國書藝史 1966)
[太祖實錄] : 1392년(태조 1) 8월 26일 고려의 사은사(謝恩使)였던 정당문학(政堂文學) 권중화가 중국 서울(南京)로부터 돌아왔다. 동 8월 28일에 권중화가 갖고 온 예부(禮部)에서 기록한 상제(喪制)에 따라 죽은 명 나라 황태자에게 거애(擧哀)하였다. 1392년(태조 1) 11월 27일 왕이 정당문학 권중화를 보내어 양광도(楊廣道), 경상도, 전라도에서 왕자의 태를 묻을 땅을 잡게 하였다. 동년 12월 13일에는 권중화를 예문춘추관 대학사(藝文春秋館大學士)로 삼았다. 1393년(태조 2) 1월 2일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권중화가 돌아와서 상언(上言)하기를,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에서 길지(吉地)를 살펴 찾았습니다."하면서, 이에 산수형세도(山水形勢圖)를 바치고, 겸하여 양광도 계룡산의 도읍지도(都邑地圖)를 바쳤다. 동년 1월 7일에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 권중화를 보내어 태실을 완산부(完山府) 진동현에 안치하고, 그 현을 승격시켜 진주(珍州)로 삼았다. 동년 2월 10일 삼사좌복야 영서운관사(領書雲館事) 권중화가 새 도읍의 종묘(宗廟), 사직(社稷), 궁전, 조시(朝市)를 만들어 지세의 그림을 바치니, 서운관과 풍수학인 이양달(風水學人李陽達) 등에게 명하여 지면(地面)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고, 판내시부사 김사행(判內侍府事金師幸)에게 명하여 먹줄로써 땅을 측량하게 하였다. 1393년(태조 2) 7월 27일 왕이 조선 건국에 공이 있는 권중화(權仲和) 등에게 포상토록 교지를 내리기를, "삼사좌복야 권중화(三司左僕射權仲和) 등 8인은 신씨(辛氏)가 왕위를 도적질하여 세상이 극도로 어지러워 다스려지기를 생각하던 때부터 세상의 안위를 모두 나에게 뜻을 두었으니, 그들을 포상하는 은전(恩典)을 유사(有司)는 거행하라."라고 하였다. 영삼사사(領三司事, 1393.9.13)에 올랐고, 하륜(河崙)의 상언대로 계룡산의 신도(新都) 건설을 중지하고 천도할 곳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권중화 등에게 다시 물색케 하였다(1393.12.11). 1394년(태조 3) 2월 14일 영삼사사 권중화 등 10인에게 명하여 동국 역대(東國歷代) 여러 현인(賢人)들의 비록(秘錄)을 두루 상고하여 요점을 추려서 바치게 하였는데, 이틀 후에 <비록촬요(秘錄撮要)>를 바쳤다. 그리고 또 이틀 뒤인 2월 23일에는 왕이 영삼사사 권중화 등 11인을 보내어 서운관(書雲館)의 원리(員吏) 등을 거느리고, <지리비록촬요>를 가지고 천도할 땅을 무악(毋岳) 남쪽에서 살펴보게 하였다. 그리고 사자(使者)를 보내어(1394.2.20) 술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권중화 등이 무악으로부터 돌아와서(1394.2.23), "무악 남쪽은 땅이 좁아서 도읍을 옮길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하였으나, 하륜만이 찬성하였다. 또 3일 뒤(1394.6.27)에 권중화 등이, "서운관 관원들도 무악이 수도로 좋지 않다고 합니다."하니, 왕이 다른 곳을 물색하게 하였다. 1394년(태조 3) 7월 12일 음양산정도감을 두고 영삼사사 권중화 등으로 하여금 서운관원과 함께 지리와 도참에 관한 여러 책을 모아서 참고하여 교정하게 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9일에는 판문하부사 권중화 등을 한양(漢陽)에 보내서 종묘, 사직, 궁궐, 시장(市場), 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 권중화 등은 고려 충숙왕 때에 경영했던 궁궐 옛터가 너무 좁다 하고, 다시 그 남쪽에 해방(亥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 병향(壬座丙向)이 평탄하고 넓으며, 여러 산맥이 굽어 들어와서 지세가 좋으므로 여기를 궁궐터로 정하고, 또 그 동편 2리쯤 되는 곳에 감방(坎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 병향에 종묘(宗廟)의 터를 정하고서 도면(圖面)을 그려서 바치었다. 1395년(태조 4) 9월 28일 백관이 공복을 입고, 반송정(盤松亭)에 나아가 신주를 봉영하고, 판문하부사 권중화에게 명하여 이안제(移安祭)를 행하게 하였다. 동년 10월 14일에는 홍영통이 말에서 떨어져 죽은 것 때문에 왕이 판중추부사 권중화 등 대신들에게 대(竹)로 만든 요여(腰輿) 하나씩을 내려주었다. 1396년(태조 5) 5월 12일에는 새 종(鍾)이 완성되어서 왕이 감역제조관(監役提調官) 권중화에게 비단 2필을 내려주었다. 동년 6월 17일에는 판문하부사 권중화를 명 나라 서울에 보내어 혼사를 맺자고 한 일을 사례하고, 인하여 양마(良馬) 12필을 진헌(進獻)하게 하였다. 동년 11월 6일에 사은진표사(謝恩進表使) 권중화가 남경에서 돌아와 요동백호 하질(遼東百戶夏質)이 죽게된 경과를 추궁하는 명 나라 좌군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을 올렸고, 아울러 김적선(金積善) 일행이 등주(登州)에서 배가 부서져 익사했음을 아뢰었다. 그리고 동년 11월 23일에는 왕이 권중화 등이 돌아온 것에 사은(謝恩)하는 주문(奏文)을 남경에 보냈다. 1397년(태조 6) 2월 8일에 사은사 권중화 등이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의 잔치에 참여하였고, 동년 5월 27일에는 판문하부사 권중화를 위관(委官)으로 삼아 박자안(朴子安)을 국문케 하였다. 1398년 (태조 7) 2월 11일 영삼사사 권중화에게 광주(廣州)에서 종 만드는 것을 감독케 하였는데, 백금 50냥을 넣어 주조(鑄造)하여 성공하였다. 동년 4월 4일 왕이 광주에 거둥하여 새로 주조된 종을 보고, 제조(提調) 권중화에게 안마(鞍馬)를 내려주고, 군사 1,300명을 동원하여 서울 종각 아래로 옮겼다. 이 종 주조 때 세 번이나 실패했지만, 권중화가 맡고서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청취하고, 또 교묘한 생각을 써서 한 번에 주조하여 만드니, 왕이 기뻐하여 이 때 상이 내려졌다. 동년 5월 18일에는 북쪽 양정(凉亭)에서 열린 왕의 잔치에 영삼사사 권중화 등이 배석하였다. 1398년(태조 7) 9월 1일 권중화를 예천백(醴泉伯)으로 삼았다.
[定宗實錄] : 1399년(정종 1) 3월 13일 처음으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집현전에 모이게 하여 예천백 권중화 등을 제조관(提調官)으로 삼았다. 1400년(정종 2) 6월 1일 판문하부사로 삼아 치사(致仕)케 하였다.
[太宗實錄] : 1401년(태종 1) 1월 25일 공ㆍ후ㆍ백(公侯伯)의 호를 고치었으니, 참람되게 중국을 모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천백 권중화에게 고쳐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이 날 권중화는 양인(良人)의 딸과 혼인한 천인의 자식을 사수감(司水監)에 속하게 하도록 상소를 올렸다. 동년 7월 7일에는 왕이 권중화에게 명하여 북교(北郊)에서 비를 빌게 하였다. 동년 7월 27일 예천부원군 권중화가 또 상소하기를, "조선에서 노비의 소생은 어미를 따르고, 양민의 소생은 아비를 따르는 법이 오래 되었습니다. 흉폭한 천구(賤口)가 많이 양녀(良女)에게 장가들어 소생은 모두 사천(私賤)이 되니, 이 때문에 천구는 날로 늘고, 양민은 날로 줄어서 나라 역사(役事)에 이바지할 자가 크게 감소되오니, 원컨대, 이제부터는 천구가 양인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고, 양녀로서 이미 천구의 아내가 된 자는 또한 이혼하게 하고, 혹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게 되면, 그 죄를 종의 주인에게 미치게 하소서."라고 하여, 윤허받았다. 1405년(태종 5) 7월 7일 왕이 예천부원군 권중화에게 명령하여 북교(北郊)에서 비를 빌게 하였다. 1406년(태종 6) 3월 24일 임금이 말하기를, "예천백 권중화가 나에게 이르기를, ''''사철에 불씨를 바꾸는 것은 예전에 그 제도가 있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옛 제도를 따르지 아니하여, 이 때문에 화재가 일어납니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하고, 드디어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동년 8월 19일에는 검교영의정부사(檢校領議政府事) 권중화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궁정(宮庭)으로 나아가 세자에게 전위(傳位)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1408년(태종 8) 4월 2일에는 기로 영의정부사 치사(耆老領議政府事致仕) 권중화 등이 홍제원(洪濟院) 서교(西郊)에서 명 나라 서울에서 돌아오는 세자 이제를 영접하였다. 1408년(태종 8) 11월 23일에 영의정 권중화(權仲和)가 죽었다.
[世宗實錄] : 1433년(세종 15) 6월 10일에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완성되었는데, 이는 예전에 판문하(判門下) 권중화가 여러 책을 뽑아 모아서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을 짓고, 그 뒤에 또 약국 관원에게 명하여 다시 여러 책을 상고하고, 또 동인(東人)의 경험을 취하여 분류 편찬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목판으로 간행하니, 이로부터 약을 구하기 쉽고 병을 치료하기 쉬우므로 사람들이 모두 편하게 여겼다.
[두산세계대백과] : 1394년(태조 3) 8월 한양 천도가 결정되자, 동년 9월 1일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문하부판사 권중화, 삼사판사 정도전 등을 한양으로 보내 종묘, 사직, 궁궐과 조정, 시전(市廛), 도로 등의 기지를 정하게 하였다. 동년 9월 9일에는 권중화 등이 궁궐, 종묘 등의 도면을 작성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태조는 궁궐의 기지만 정한 채 그 해 10월 28일 왕실, 정부 일행과 함께 한양으로 들어와 한양부 객사(客舍)를 이궁(離宮)으로 삼아 정무를 집행하였다. 11월 3일 공작국(工作局)을 설치하여 영건 공작 등의 일을 서두르게 하고, 12월 4일에는 궁궐을 지을 곳에 나가서 개기제(開基祭)를 거행하고 승도(僧徒)들을 모집하여 공역(工役)을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궁궐 건축 공사를 급속히 진행하여 이듬해 9월, 10개월만에 궁궐 공사를 완성하였다. 12월에는 왕과 정부의 시무처(視務處)를 새로 지은 궁궐로 옮겨, 한양 천도 1년만에 왕실과 정부는 신도에서의 새로운 면모와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陽村集] : 유천면 성평리 덕달 뒷들(德達後坪) 출신, 자는 용부(容夫), 본관은 안동이다. 고려 때 찬성사(贊成事)로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졌다. 1404년(태종 4)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가 영의정(領議政)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이다(연려실기술 제2권 태종조고사본발 태종조의 상신). [權近의 <陽村先生文集> 第22卷 跋語類 <鄕藥濟生集成方>의 跋] : 제생원(濟生院)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은 백성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처음에 평양백(平壤伯)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과 상락백(上洛伯)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이 국사를 다스리던 여가에, 곤궁한 백성들이 병이 들어도 치료하지 못함을불쌍하게 여겨 널리 구제하고자, 동지중추(同知中樞) 김희선(金希善)과 협력하여 제생원(濟生院)을 설치하고 약제를 모아놓고 치료를 하였으며, 또 예천백(醴泉伯) 권중화(權仲和)와 더불어 그가 전에 저술한 <향약방(鄕藥方)>을 토대로 다시 더 수집하여 전서(全書)를 만들어서 중외에 반포하고 영원히 전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모두 지역에 따라 약을 구할 수 있고 병에 따라 치료할 수 있음을 알게 하였다. 또 우마(牛馬)의 병에 약을 잘못 써서 죽게 함을 염려하여 그 처방을 집성하였으니, 백성을 사랑하고 짐승을 아끼는 마음이 깊고 또 간절함이 이와 같았다. 1399년(정종 1)에 그 책이 완성되자, 김희선이 강원도 관찰사로서 각공(刻工)을 시켜 목판에 새겨 그 전함을 영원하게 하였다. 아! 조준과 김사형의 인후(仁厚)한 덕으로 그 일을 총괄하였으며, 권중화의 정박(精搏)한 학문으로 그 책을 편찬하였으며, 김희선이 또 능히 힘을 써서 그 일을 시종 성취하였으니, 네 분이 우리 나라 백성에게 혜택을 베푼 바가 마땅히 이 책과 함께 만세에 전하여 무궁함을 기할 것이다. 이 제생원의 일을 주간하는 이는, 서원군(西原君) 한상경(韓尙敬), 순흥군(順興君) 안경량(安敬良), 김원경(金元경), 허형(許衡), 이종(李悰), 방사량(房士良)으로서 모두 여기에 공로가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아울러 책머리에 밝힌다. 1399년(정종 1) 여름 5월 상순//
권중화 [記事] : 한국문집총간(005_543c) 삼봉집(三峯集, 1791)에 실린 이유(李?)의 기사로, 그 내용은, “삼봉집 제8권/ 부록(附錄)/ 제현의 서술[諸賢?述]/ ...삼봉 정군(鄭君) 종지는 총명한 자질로 도(道)를 좋아하고, 덕(德)을 숭상하여 사림(士林)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도를 의논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함에 있어서는 높은 안목으로 독특한 주장을 세워서 조금도 흔들리는 일이 없으며, 저술(著述)에 있어서는 시원하고 순수하여 성리학(性理學)에서 우러나왔다.
아! 옛 글에 ꡐ덕(德)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모범이 될 말을 남긴다.ꡑ 하더니, 지금 나는 이를 종지에게서 보았다./ 동고(東皐)권중화(權仲和)는 씀./ 【안】 권중화는 여조(麗朝)의 찬성(贊成)이니, 본조(本朝)에 와서 예천백(醴泉伯)이 되었다.“이다.(www.minchu.or.kr 2006)
권중화 [記事] : 한국문집총간(007_222) 양촌집(陽村集, 1869)에 실린 양촌 권근(權近)의 기사로, 그 내용은, “양촌선생문집 제22권/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발/ 제생원(濟生院)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은 백성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처음에 평양백(平壤伯) 좌정승(左政丞) 조공 준(趙公浚)과 상락백(上洛伯) 우정승(右政丞) 김공 사형(金公士衡)이 국사를 다스리던 여가에, 곤궁한 백성들이 병이 들어도 치료하지 못함을 불쌍하게 여겨 널리 구제하고자, 동지중추(同知中樞) 김공 희선(金公希善)과 협력하여 제생원을 설치하고 약제를 모아놓고 치료를 하였으며, 또 예천백(醴泉伯) 권상 중화(權相仲和)와 더불어 그가 전에 저술한《향약방(鄕藥方)》을 토대로 다시 더 수집하여 전서(全書)를 만들어서 중외에 반포하고 영원히 전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모두 지역에 따라 약을 구할 수 있고 병에 따라 치료할 수 있음을 알게 하였다. 또 우마(牛馬)의 병에 약을 잘못 써서 죽게 함을 염려하여 그 처방(處方)을 집성하였으니, 백성을 사랑하고 짐승을 아끼는 마음이 깊고 또 간절함이 이와 같았다. 건문(建文) 원년(정종 1, 1399)에 그 책이 완성되자, 김 중추(金中樞)가 강원도 관찰사로서 각공(刻工)을 시켜 목판에 새겨 그 전함을 영원하게 하였다. 아! 평양백과 상락백의 인후한 덕으로 그 일을 총괄하였으며, 예천백의 정박(精博)한 학문으로 그 책을 편찬하였으며, 김공이 또 능히 힘을 써서 그 일을 시종 성취하였으니, 네 분이 우리나라 백성에게 혜택을 베푼 바가 마땅히 이 책과 함께 만세에 전하여 무궁함을 기할 것이다. 이 제생원의 일을 주간(主幹)하는 이는, 서원군(西原君) 한공상경(韓公尙敬)순흥군(順興君) 안공 경량(安公敬良)김군 원경(金君元?)허군 형(許君衡)이군 종(李君悰)방군 사량(房君士良)으로서 모두 여기에 공로가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아울러 책머리에 밝힌다./ 기묘년(정종 1, 1399) 여름 5월 상순(上旬)”이다.(www.minchu.or.kr 2006)
권중화 [記事] : 한국문집총간(232_274b) 소산집(小山集)에 실린 이광정(李光靖)의 기사로, 그 내용은, “贈戶曹佐郞東窩權公行狀/ ...貫安東。高麗太師幸之後。十餘世至諱仲和。仕本朝官領議政醴泉伯諡文節。間三世司正諱鈞。始居永川。其曾孫諱克...”이다.(www.minchu.or.kr 2006)
권중화 [記事] : 고전국역총서(1968 刊)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양촌 권근(權近)의 기사로, 그 내용은, “동문선 제103권/ 발(跋)/ 향약제생 집성방 발(鄕藥濟生集成方跋)/ 위 제생원(濟生院)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은 이 백성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처음에 좌정승 평양백(平壤伯) 조(趙)공 준(浚)과 우정승 상락백(上洛伯) 김(金)공 사형(士衡)이 국사를 경륜하고 음양을 조화시키는 여가에, 곤궁한 백성들이 병을 능히 치료하지 못함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널리 구제하려고 동지중추 김(金)공 희로(希魯)와 더불어 서로 협력하여 제생원을 설치하고, 약제를 모아놓고서 치료를 하고, 또 예천백(醴泉伯) 권상 중화(權相仲和)와 더불어 그가 일찍이 저술한 《향약방(鄕藥方)》을 가지고 다시 수집을 더하여 전서(全書)의 판각을 완성하니, 장차 중외에 반포하고 영원히 전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모두 그 거주하는 곳에 따라 약을 구할 수 있고, 병중에 따라 치료할 수 있음을 알게 하고, 또 우마(牛馬)의 병에 약을 잘못 써서 죽게 함을 염려하여 그 치료의 처방을 집성하였으니, 그 백성에게 덕을 베풀고,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고 또 절실함이 이와 같더란 말인가. 건문(建文) 원년에, 그 서책이 이미 이루어졌더니, 김중추가 강원도의 관찰사가 되어 각공(刻工)에게 명하여 목판에 새겨, 그의 전달을 영원히 하도록 한 것이다. 아, 평양백 상랑백의 인후한 덕풍으로 그 일을 총괄하고, 예천백의 정밀 엄박(淹博)한 학문으로 그 서책을 편찬하였고, 김공이 또한 능히 힘을 써서 그 공을 시종 성취케 하였으니, 네 사람이 동방의 백성에게 혜택을 베푼 바는 마땅히 이 책과 함께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이 제생원의 일을 주간하는 자는 서원군(西原君) 한상민(韓尙敏)순흥군(順興君) 안경량(安敬良)김원경(金元?)허형(許衡)이종(李悰)방사량(房士良)으로서 모두 이에 노고가 있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아울러 권미(卷尾)에 밝히는 바이다. 창룡(蒼龍) 기묘년 여름 5월 상순 어느날.”이다.(www.minchu.or.kr 2006)
권중화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7 刊) 삼봉집(三峯集)에 실린 삼봉 정도전(鄭道傳)의 기사로, 그 내용은, “삼봉집 제8권/ 부록(附錄)/ 제현의 서술[諸賢?述] / 삼봉 정군(鄭君) 종지는 총명한 자질로 도(道)를 좋아하고, 덕(德)을 숭상하여 사림(士林)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도를 의논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함에 있어서는 높은 안목으로 독특한 주장을 세워서 조금도 흔들리는 일이 없으며, 저술(著述)에 있어서는 시원하고 순수하여 성리학(性理學)에서 우러나왔다./ 아! 옛 글에 ꡐ덕(德)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모범이 될 말을 남긴다.ꡑ 하더니, 지금 나는 이를 종지에게서 보았다./ 동고(東皐) 권중화(權仲和)는 씀./【안】 권중화는 여조(麗朝)의 찬성(贊成)이니, 본조(本朝)에 와서 예천백(醴泉伯)이 되었다.”이다.(www.minchu.or.kr 2006)
권중화 [記事] : 고전국역총서(1966 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실린 연려실 이긍익(李肯翊)의 기사로, 그 내용은, “태종조의 상신/ ...중화는, 자는 용부(容夫)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고려때 찬성사(贊成事)로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졌...”이다.(www.minchu.or.kr 2006)
---
*예천초등학교 양궁부, 개인(양희우) 금메달과 단체 은메달...축하합니다.
예천초등학교(醴泉初等 洋弓部 LH社長旗 全國初等洋弓大會 양희우(6) 金메달,團體 銀메달 入賞) [記事] :
예천초등학교(교장 정해준)는 2010년 7월 2일부터 4일까지 3일간 LH토지주택연구원에서 열린 ''''제2회 LH사장기 전국초등학교 양궁대회''''에서 양궁부 양희우(6년) 선수가 25m에서 1위(금메달)을 차지하였으며, 양희우, 송동준, 김동일, 최정희 선수가 단체종합부문에 참가하여 2위(은메달)를 차지했다.
예천초등학교 양궁부 선수들(양희우, 김동일, 송동준, 최정희, 윤기원, 윤상필, 조승욱, 신홍규)은 앞으로 열리는 전국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윤종구 감독과 양은영 코치의 지도를 받아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0-07-05 오후 2:43:15)
---
*경북도립대, 브래드사업 지원대학 선정...축하합니다.
경북도립대(慶北道立大學, 敎育科學技術部 ''''2010 專門大學 代表브랜드事業'''' 支援大學 選定) [記事] :
경북도립대학(총장 김용대)는 교과부에서 2010년 7월 2일 발표한 ''''2010년도 전문대학 대표브랜드사업'''' 지원대학으로 선정되어 7억2천여만 원을 지원받는다.
''''전문대학 대표 브랜드사업''''은 교육여건과 성과가 우수한 상위 100개 전문대학의 사업계획서를 평가하여 80개교를 선정,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브랜드화를 통해 명품 전문대학으로 육성하기 위해 올해 처음으로 추진된다.
대학은 전문대학 대표브랜드사업을 통해 토목과, 자동차전공, 지방행정전공 등 3개 학과를 대학 대표 브랜드로 집중 육성할 계획이다.
특히 "도청 신도시 밀착형 전문인력 양성"을 목표로 3-way(Man,Process,Job)교육시스템을 통해 ▲명품 취업시스템 정착 ▲취업 수요기관 직무 맞춤형 전문직업인 양성 및 공급 ▲도립대학으로서 역할강화 및 지역경제 활성화를 달성한다는 전략이다.
대학 관계자는 "올해 초 3년 연속 교육역량강화사업 대상학교로 선정되는데 이어 대표브랜드사업에도 선정되어 매우 고무적이다"며 "도청 신도시 조성과 연계한 명품 대학을 만들기 위한 초석이 다져진 만큼 대학의 위상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본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0-07-05 오후 4:54:19
---
@예천방문 636
예천군 방문(올 여름休暇! 淸淨地域 醴泉으로~~) [記事] :
예천은 1300여년의 오랜 전통과 문화가 어우러진 경북 북부의 소백산맥에 위치한 배산임수지역으로 물 맑고 산수 좋은 청정지역으로 이름난 고장이다.
예천군에서 여름철 피서지로 소개할 곳은 물과 숲이 우거진 명봉사 계곡,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어울림상을 수상한 선몽대, 계곡과 산림이 함께하는 학가산 휴양림, 금빛모래와 비경을 자랑하는 육지속의 회룡포, 살아있는 곤충을 체험할 수 있는 곤충체험관과 생태공원 등이 있다.
명봉사는 예천읍에서 하리면소재지를 거쳐 30여분 정도가면 명봉사 주차장을 만나게 된다. 계곡은 산사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가 골짜기에 아련히 울려 퍼져 일상생활에서 지친 심신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내리고 심산유곡에서 흘러내리는 옥수(玉水)와 폭염을 삼켜버릴 듯한 울창한 수림은 더위를 식히기에는 안성마춤인 곳이다.
명봉사는 서기 875년(신라 경문왕 1)에 두운 선사가 창건했으며 경내에는 조선조 “문종대왕태실비”와 고려 태조 24년(941)에 세운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와 이두문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이외에도 대웅전, 산신각, 부도, 5층석탑 등이 있다.
계곡은 모두 경내로 사찰유원지라 할 수 있는데 명봉사와 내원암에 이르는 양 옆으로 연륜을 헤아릴 수 없는 아름드리 고목이 천년의 풍상을 가지마다 간직한 채 하늘을 찌를 듯이 늘어서 있고 그 밑을 흐르는 개울물은 백운봉 정상에서 발원해 세월의 풍상을 잊은 채 시원하게 흘러 사찰을 찾는 신도들과 더위를 피해 몰려든 사람들의 피서처로 여름 휴가철이면 일찍 찾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아름다운 숲 선몽대는 예천읍에서 호명면소재지를 거쳐 20여분 가면은 내성천의 평사십리와 1천여 평의 소나무 숲을 자랑하는 강변유원지 “선몽대” 가 있다. 내성천 우암산 산자락에 자리잡은 선몽대와 강변 유원지, 아침연꽃농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선몽대라는 이름만큼이나 주변경치가 빼어나다.
선몽대 안내판을 뒤로 입구에 들어설 때쯤 길 좌우로 소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룬 진입로를 거쳐 강변에 다다르는데 아직 편의시설이 다소 적으나 세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아 번잡함을 덜 수 있는 곳이다.
식수대와 야영을 할 수 있는 야영장, 주차장도 있어 가족과 함께 선현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옛 추억을 되살려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곳 유원지의 백미인 “선몽대”는 조선시대 문인이던 우암 이열도가 명종 18년 1593년에 창건한 정자로 경치가 좋은 이곳에 선몽대를 세우고 여생을 마쳤다 한다.
이 선몽대에는 건립 당시 63세이던 퇴계 선생이 써 준 선몽대 대호 3자와 시를 비롯해 우암 이열도, 약포 정탁,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등 문인들의 친필시를 새긴 목판을 비롯해 여러 문인의 시가 목각되어 현판으로 걸려 있다.
선몽대는 5백~6백년 수령의 아름드리 노송, 역사적 가치, 마을 숲 보전 등의 숲의 미래에 대한 우수성을 인정받아 제8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선몽대가 장려상인 어울림상을 수상을 받았으며 내성천의 맑은 강물과 주변의 기암절벽을 통해 한여름 더위를 말끔이 잊게 하는 시원한 경관으로 일년 내내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금빛모래와 비경을 자랑하는 육지속의 회룡포는 예천읍에서 용궁면소재지를 거져 30여분 가면 육지속의 섬 회룡포를 만나게 된다. 회룡포는 소백산이 남으로 뻗어 내려오면서 잠시 쉬어가는 길목에 강이 산을 부둥켜안고 용트림을 하는 듯한 특이한 지형으로 한 삽만 뜨면 섬이 되어버릴 것 같은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곳이다.
맑은 물과 백사장,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가파른 산에서 바라다 보는 회룡포는 그 빼어난 절경으로 2000년 방영된 KBS드라마 가을동화와 2009년1박2일 방영되었으며 2005년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지 16호로 지정됐다.
회룡포를 찾는 이들의 대부분은 회룡포 여울마을, 회룡포마을 황토 민박, 회룡포 쉼터에서 민박을 하고 회룡대에서 천혜의 비경을 감상한 후 용궁시장에 들러 순대를 먹고 예천을 떠나게 된다.
곤충생태체험관과 수변생태공원은 예천읍에서 하리면소재지를 거쳐 풍기방면으로 40여분 가면은 곤충체험관과 생태공원을 만나게 된다. 지난 2007년 곤충바이오엑스포 행사를 위하여 조성된 곤충생태체험관은 장수풍뎅이, 나비 등 각종 곤충을 직접보고 만질 수 있는 체험학습장이다.
체험장안에는 3D로 된 곤충생태 영상 관람을 할수 있는 시설과 살아서 움직이는 곤충을 볼 수 있는 수변생태공원이 조성돼 있어 여름방학 때 어린이와 부모들이 곤충을 체험할 수 있으며 곤충체험을 하고 난 후 예천곤충생태체험관의 랜드마크인 출렁다리를 지나면 모시골 계곡을 만나게 된다.
모시골 계곡은 아직까지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약 30분정도 올라가면 충복골 칠칠바위 폭포에 도착할 수 있다. 곤충생태체험관 주변에는 민박을 할 수 있으며 또한 여름철 피서지로 잘 알려지지 않아 청정한 자연경관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학가산 자연휴양림은 예천읍에서 약 30분을 달려가면 학가산 북쪽계곡에 위치한 학가산자연휴양림은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자리잡은 통나무집들이 주위 나무들과 계곡, 바위와 너무도 잘 어울리며, 통나무 집 안으로 들어서면 편백나무의 테르펜향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무엇보다 학가산 휴양림은 다양한 평수의 숲속의 집으로 가족 단위 여행에 편리하도록 조성되어있으며 학가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나있고 2시간정도면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부대시설로 캠프파이어장, 야외무대, 어린이놀이터, 체력단련장, 물놀이장등을 갖추고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嶺南타임즈 2010-07-05 AM 9:56:39)
---
권중화(權仲和) : 1322(충숙왕 9)-1408(태종 8), 유천면 성평리 덕달 뒷들(德達後坪) 출신, 자는 용부(庸夫) 또는 용보(容甫), 호는 동고(東皐), 시호(諡號)는 문절(文節), 예천백(醴泉伯)에 봉(封)해졌다. 본관은 안동, 우정승 한공(右政丞漢功)의 2자, 중달(仲達)의 동생, 방위(邦緯)의 아버지이다. 1353년(공민앙 2) 문과(文科)에 을과 제2인(乙科第2人)으로 급제하여 대언(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로 전선(銓選)을 맡아보았다. 1360년(공민왕 9) 4월 왕명에 의해 중국 장사성(張士誠)이 보낸 사신에게 찾아가서 답례하였다. 1376년(우왕 2) 2월에는 밀직(密直)으로서 서연(書筵)에서 강의를 하였고, 우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고, 이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즉 1377년(우왕 3) 5월에 최영(崔瑩) 등이 고려 태조의 진전(眞殿)에 가서 동, 지(動,止)를 점쳐 지(止) 자를 얻었다. 우왕이 이르기를, "왜구가 서울(開城) 가까이 왔는데, 점만 좇을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정당문학 권중화를 철원(鐵原)에 보내어 피난처를 보았다. 1378년(우왕 4) 10월 왕이 정당문학 권중화 등을 협계(峽溪)에 보내어 피난처를 보게 하였다. 권중화가 돌아와 보고하기를, "북소(北蘇)의 옛 궁궐터 180간(間)을 발견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조정의 의론에 의해 중지되었다. 1379년(우왕 5) 11월 왕이 삼사좌사 권중화(三司左使權仲和) 등을 보내어 회암(檜岩)에 피난처를 보았다. 1380년(우왕 6) 12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권중화 등을 남경(南京)에 보내어, 금300 냥, 은 1,000냥, 말 450필, 베 4,500필을 바치고 시호(諡號)와 습위(襲位)를 청하게 하였다. 1381년(우왕 7) 3월 명(明) 나라 사신으로 파견되어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요동 도사(都司)는 세공(歲貢)이 정량에 차지 않는다고 되돌려 보냈다. 1390년(공양왕 2) 5월에 일어난 이초 옥사(彛初獄事)에 연루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히었고, 동년 8월에 장하(張夏)와 함께 먼 지방으로 귀양갔다가 동년 11월에 사면되고 편의한 대로 거주하게 되었다. 1391년(공양왕 3) 11월 왕이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삼았다. 이초사건(彛初事件)에 연루되어 죄를 얻은 자들이 이때에 와서 모두 복직되었다. 1392년(공양왕 4) 1월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임명되어, 동년 2월에 영복군(永福君) 격과 함께 남경(南京)으로 가서 은혜를 사례하였다. 동년 6월에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에 올랐다. 이 태조의 개국공신(開國功臣, 1392)으로, 또는 기년 숙덕(耆年宿德)으로써 예문춘추관 대제학(藝文春秋館大提學)에 오르고, 1392년(태조 1) 11월 27일 왕은 권중화를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로 임명하여 양광도(楊廣道), 경상도, 전라도로 파견, 국도 후보지(國都候補地)를 물색케 하였다. 1393년(태조 2) 1월 2일 권중화가 돌아와 전라도 진동현(珍同縣)과 양광도(楊廣道) 계룡산(鷄龍山) 아래를 국도 후보지로 천거하면서 특히 <계룡산도읍도(鷄龍山都邑圖)>를 바쳤다. 태조는 왕사(王師)인 무학 대사(無學大師)를 데리고 계룡산에 친행(親行)하여 국세(局勢)를 살핀 후 동년 3월부터 일꾼을 풀어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정전(正殿)의 터를 닦고 열초 공사(列礎工事)가 급속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동년 12월 경기좌우도관찰사 하륜(京畿左右道觀察使河崙, 1347-1416)의 반대로 신도읍지 조성을 위한 큰 일이 중단되었다. 1394년 2월 18일 좌시중 조준(左侍中趙浚), 영삼사사(領三司使) 권중화 등 11명이 서운관원(書雲館員)들을 인솔하여 하륜(河崙)이 신도읍지로 천거한 무악(毋岳, 現 延禧洞 新村洞 一帶)의 땅을 보기 위하여 현지로 출장을 갔다. 동년 2월 23일 출장에서 돌아와 무악(毋岳)의 남쪽 땅은 협소하여 도읍지로서는 불가하다고 보고하였다. 동년 9월 9일 권중화, 정도전(鄭道傳) 등 중신들을 신도읍지로 결정된 한양(漢陽)에 보내어 종묘(宗廟), 사직(社稷), 궁궐, 조시(朝市)와 도로의 묘지를 정하게 하였다.
1394년(태조 3) 2월에 <동국역대제현비록촬요(東國歷代諸賢秘錄撮要)>를 편찬하였다. 1396년(태조 5)에 사은사(謝恩使)로 명(明) 나라에 다녀왔다. 즉 명 나라가 조선에서 세공(歲貢)을 적게 바친다고 트집을 잡아 문책해 왔으므로 이에 당황한 조정은 그로 하여금 사은사로 보냈다. 이에 명 나라에 간 그는 우리가 바친 세공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고 정성을 다한 것이므로 더는 바칠 수 없다고 조리 정연하게 진술하여 명 나라 황제인 태조로 하여금 감복케 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진정한 사신''''이라는 칭찬을 받음과 함께 현재 대로가 마땅한 세공(歲貢)이라고 확약을 받아왔다. 1399년(정종 1)에는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편찬하였는데, 이는 기존의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을 가지고 다시 수집을 더하여 전서(全書)의 판각(板刻)을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국민 모두가 그 거주하는 곳에 따라 약을 구할 수 있고, 병 증세에 따라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우마(牛馬)의 병에 약을 잘못 써서 죽게 함을 염려하여 그 치료의 처방을 집성하였다. 1404년(태조 4)에 삼사좌복야 영서운관사(三司左僕射領書雲館事)로서 새 도읍의 종묘 사직(宗廟社稷)과 궁전 조시(宮殿朝市)의 도본(圖本)을 바치니, 임금이 서운관 풍수학인 이양건(書雲館風水學人李陽建) 등에게 명하여 지형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임금이 종묘사직을 세울 곳을 살펴보고, 공작국(工作局)을 설치하고, 수레를 몰아 용산(龍山)으로 행하여 종묘를 지을 재목을 둘러 보고, 또 친히 가서 기초를 닦는 것을 보았다. 동년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1406년(태종 6) 8월 왕이 서울 안에 수재, 화재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것은 자기의 부덕한 까닭으로 이러한 재앙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니, 차라리 왕위를 왕세자(讓寧大君)에게 선양(禪讓)하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하여 성석린(成石璘), 하륜(河崙), 권중화(權仲和)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나아가 말렸다. 1407년(태종 7)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러 예천백(醴泉伯)에 봉(封)해졌고, 새 서울 한양(漢陽)의 종묘 사직과 궁전 조시를 건설하는데 진력하다가 죽었다. 천성이 조용하면서도 쾌활하고, 극기를 잘 하여 스스로 근신을 잘 했고, 용의주도(用意周到)하여 권세와 부귀에 휩쓸리지 않았으니, 세상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고사(故事)에 밝아 정사(政事)에 고문격이었고, 의학, 지리, 복서(卜筮)에도 통달하고, 서도(書道)에도 능하여 팔푼체를 잘 썼다. 예서(隸書) 특히 전서(篆書)를 잘 썼다. 양주 천보산(楊州天寶山)에 있는 목은 이색(牧隱李穡)이 지은 회암사나옹화상비(檜岩寺懶翁和尙碑, 檜岩寺禪覺王師碑, 1377)의 글을 예서로 썼고, 개성의 광통보제사비의 전액(篆額)을 썼다.
[權近이 權仲和에게 올리는 詩] : 1394년(태조 3) 여름에 제(權近)가, 우리 일가영삼사사 상국(領三司事相國, 權仲和) 저택의 북쪽에 붙여 살고 있었습니다. 한 번 가서 뵙고 물러 나온 뒤 수 일 만에 병이 걸려, 달이 넘도록 낫지 않아서 자리에 누워 신음하였기에, 항상 다시 찾아봅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홀연히 어느 날, 장수(長鬚)를 보내어 귀한 선물을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제 잔치에 임금을 모셨는데, 임금께서 진어하시던 음식을 거두어 나에게 내리셨다. 은총이 지극한지라 내가 감히 사사로이 할 수 없으니, 친척과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 임금이 주신 영광을 빛나게 하여야겠다."라고 하였다. 제(權近)가 병을 참고 일어나서, 절하여 받고도 몸소 가서 사례하지 못하고 또 말하기를, "공(權仲和)은 넓은 재국(才局)과 정통한 지식과 맑은 덕행과 단아한 명망으로 성조(盛朝)의 개국(開國)하는 날을 만나서, 전장(典章), 생용(笙鏞), 보불을 만들어 일대(一大)의 정치를 일으키는 것은, 임금이 반드시 공(權仲和)에게 물은 뒤에 정하였고, 공은 조정의 전장(典章)을 익히 알고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여, 매사를 반드시 옛과 지금을 인증하여 섬세하고 정밀하게 하여 청문(淸問)에 답하였으므로, 번번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임을 입었습니다. 물러나오면 겸손하고 조심하여 말을 못하는 것 같이 하고, 일호(一毫)도 자긍(自矜)하는 빛이 없었고, 한거(閒居)할 적에는 도서를 즐기면서 집안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므로, 쓸쓸하기가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았습니다. 임금이 이 때문에 중히 여겼고, 물의(物議)가 이 때문에 높게 여겼으니, 지위가 삼사(三司)를 거느리고 존귀(尊貴)가 백호에 으뜸이 되어 은총의 후함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權近)는 공(權仲和)에게 자손의 항렬이 되며, 일찍이 연묵(연墨)의 말기(末技)로 공(公)을 전방(銓房), 문사(文司)에 20여 년을 섬겼는데, 은의로 대우한 것이 깊고 오래니 마땅히 조석으로 계속하여 뵙고 섬기기를 부모같이 하여야 하는 데도 용열(庸劣)하고 게을러서 예(禮)와 신의를 폐하고 문하(門下)에 찾아가 가르침을 듣는 것이 여러 달만에 겨우 한 번 정도이니, 공(權仲和)을 저버림이 많습니다. 마땅히 무례한 것을 꾸짖어 절교하더라도 아무 말 못할 처지인데, 이제 끊지 않고 거두어 주고 은총을 나누어주니, 이것은 공의 넓고 큰 도량과 인자한 덕이 또한 지극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느껴 스스로 말 수 없어서 애오라지 졸(拙)한 시 두 절구(絶句)를 지어 좌우에 바쳐, 위로는 공의 하사받은 영광을 치하(致賀)하고 아래로는 나의 감사히 생각하는 정을 사례합니다. [權近의 詩] : 성조(盛朝)께서 노성(老成)한 신하를 높이니/ 물망(物望)이 높아 진신(縉紳)을 거느렸네/ 잔치 모시고 돌아오매 인하여 남은 음식을 내리니/ 은택(恩澤)이 널리 마을 사람에게 미쳤네/ 비오는 날 병져 누웠으니 해는 왜 이리 긴가/ 홀연히 가동(家童)을 보니 기뻐서 미칠 듯 하네/ 내사(內賜)를 상공(相公)이 나누어주었다 하거니/ 진귀한 음식이 오히려 어로(御爐)의 향기 띠었네(高麗史, 高麗史節要 第27卷 30卷 31卷 34卷 35卷, 太祖實錄, 太宗實錄, 陽村集 7卷 詩, 朝鮮金石考, 佛敎通史, 郡誌, 風流野談全集 6卷 60쪽, 燃黎室記述 第1卷 第2卷, 醴泉郡邑誌 1841 1895, 醴泉郡誌 1939, 韓國藝術總覽 16쪽, 韓國人의 族譜, 韓國醫學文化大年表 54쪽, 原色世界大百科事典 5卷 242쪽, 鄕土서울 1輯)
[韓國書藝史] : 1353년(공민왕 2) 을과 제2인에 올라 공민왕을 섬겨 대언(代言)이 되었다가 지신사(知申事)로 옮기고, 전선(銓選)을 맡았는데, 근신하고 주밀(周密)하여 친구에게 사(私)를 두지 않으니, 공민왕이 심히 중하게 여기었다.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1377년(우왕 3)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는데, 제자 중 명사(名士)가 많았다. 염정 자수(염靜自守)하여 권귀(權貴)에게 아부하지 않아서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태조가 즉위한 뒤에 기년 숙덕(耆年宿德)으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제수되고,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져 본관(本官)으로 그대로 벼슬을 사퇴하였다. 고사(故事)에 정통하므로 무릇 상정(詳定)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가서 물었다. 나이 비록 늙었으나 정력이 쇠하지 않아서 의약, 지리, 복서(卜筮)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고, 더욱이 대전(大篆)과 팔분(八分)을 잘 썼다. 평소에 산업(産業)을 다스리지 않고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앉아서 이(몸에 있었던 곤충)를 잡으며 이야기하였다. 늙어서 다만 말라빠진 말(馬) 한 필이 있었다. 나이 87세에 죽으니, 조회(朝會)가 3일 동안 정지되고, 왕이 중관(中官)에게 명령하여 조제(弔祭)케 하였다.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예장(禮葬)케 하고, 문절(文節)이란 시호를 주었다. 중궁(中宮)도 또한 내시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檜泉面檜巖里)에 있는 ''''회암사선각국사비(檜巖寺禪覺國師碑)''''에 그의 글씨가 남아있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서는, "권중화의 글씨, 한산군 이색 입비(韓山君李穡立碑)"로 되어 있다. 비신은 높이 9척(尺) 2촌(寸), 폭 3척 2촌, 이수가 있고 구부 위에 서 있다. 고려 말기의 비석으로는 매우 우수한 석조물이다. 권중화가 쓴 글씨의 자경(字徑)은 7분(分)의 서체는 진이(珍異)하게도 예서(隸書)이며, 제액(題額)인 "선각왕사지비(禪覺王師之碑)''''의 6자는 자경 7분의 전서(篆書)이다.(太宗實錄 1408.11.23, 韓國書藝史 1966)
[太祖實錄] : 1392년(태조 1) 8월 26일 고려의 사은사(謝恩使)였던 정당문학(政堂文學) 권중화가 중국 서울(南京)로부터 돌아왔다. 동 8월 28일에 권중화가 갖고 온 예부(禮部)에서 기록한 상제(喪制)에 따라 죽은 명 나라 황태자에게 거애(擧哀)하였다. 1392년(태조 1) 11월 27일 왕이 정당문학 권중화를 보내어 양광도(楊廣道), 경상도, 전라도에서 왕자의 태를 묻을 땅을 잡게 하였다. 동년 12월 13일에는 권중화를 예문춘추관 대학사(藝文春秋館大學士)로 삼았다. 1393년(태조 2) 1월 2일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권중화가 돌아와서 상언(上言)하기를,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에서 길지(吉地)를 살펴 찾았습니다."하면서, 이에 산수형세도(山水形勢圖)를 바치고, 겸하여 양광도 계룡산의 도읍지도(都邑地圖)를 바쳤다. 동년 1월 7일에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 권중화를 보내어 태실을 완산부(完山府) 진동현에 안치하고, 그 현을 승격시켜 진주(珍州)로 삼았다. 동년 2월 10일 삼사좌복야 영서운관사(領書雲館事) 권중화가 새 도읍의 종묘(宗廟), 사직(社稷), 궁전, 조시(朝市)를 만들어 지세의 그림을 바치니, 서운관과 풍수학인 이양달(風水學人李陽達) 등에게 명하여 지면(地面)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고, 판내시부사 김사행(判內侍府事金師幸)에게 명하여 먹줄로써 땅을 측량하게 하였다. 1393년(태조 2) 7월 27일 왕이 조선 건국에 공이 있는 권중화(權仲和) 등에게 포상토록 교지를 내리기를, "삼사좌복야 권중화(三司左僕射權仲和) 등 8인은 신씨(辛氏)가 왕위를 도적질하여 세상이 극도로 어지러워 다스려지기를 생각하던 때부터 세상의 안위를 모두 나에게 뜻을 두었으니, 그들을 포상하는 은전(恩典)을 유사(有司)는 거행하라."라고 하였다. 영삼사사(領三司事, 1393.9.13)에 올랐고, 하륜(河崙)의 상언대로 계룡산의 신도(新都) 건설을 중지하고 천도할 곳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권중화 등에게 다시 물색케 하였다(1393.12.11). 1394년(태조 3) 2월 14일 영삼사사 권중화 등 10인에게 명하여 동국 역대(東國歷代) 여러 현인(賢人)들의 비록(秘錄)을 두루 상고하여 요점을 추려서 바치게 하였는데, 이틀 후에 <비록촬요(秘錄撮要)>를 바쳤다. 그리고 또 이틀 뒤인 2월 23일에는 왕이 영삼사사 권중화 등 11인을 보내어 서운관(書雲館)의 원리(員吏) 등을 거느리고, <지리비록촬요>를 가지고 천도할 땅을 무악(毋岳) 남쪽에서 살펴보게 하였다. 그리고 사자(使者)를 보내어(1394.2.20) 술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권중화 등이 무악으로부터 돌아와서(1394.2.23), "무악 남쪽은 땅이 좁아서 도읍을 옮길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하였으나, 하륜만이 찬성하였다. 또 3일 뒤(1394.6.27)에 권중화 등이, "서운관 관원들도 무악이 수도로 좋지 않다고 합니다."하니, 왕이 다른 곳을 물색하게 하였다. 1394년(태조 3) 7월 12일 음양산정도감을 두고 영삼사사 권중화 등으로 하여금 서운관원과 함께 지리와 도참에 관한 여러 책을 모아서 참고하여 교정하게 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9일에는 판문하부사 권중화 등을 한양(漢陽)에 보내서 종묘, 사직, 궁궐, 시장(市場), 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 권중화 등은 고려 충숙왕 때에 경영했던 궁궐 옛터가 너무 좁다 하고, 다시 그 남쪽에 해방(亥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 병향(壬座丙向)이 평탄하고 넓으며, 여러 산맥이 굽어 들어와서 지세가 좋으므로 여기를 궁궐터로 정하고, 또 그 동편 2리쯤 되는 곳에 감방(坎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 병향에 종묘(宗廟)의 터를 정하고서 도면(圖面)을 그려서 바치었다. 1395년(태조 4) 9월 28일 백관이 공복을 입고, 반송정(盤松亭)에 나아가 신주를 봉영하고, 판문하부사 권중화에게 명하여 이안제(移安祭)를 행하게 하였다. 동년 10월 14일에는 홍영통이 말에서 떨어져 죽은 것 때문에 왕이 판중추부사 권중화 등 대신들에게 대(竹)로 만든 요여(腰輿) 하나씩을 내려주었다. 1396년(태조 5) 5월 12일에는 새 종(鍾)이 완성되어서 왕이 감역제조관(監役提調官) 권중화에게 비단 2필을 내려주었다. 동년 6월 17일에는 판문하부사 권중화를 명 나라 서울에 보내어 혼사를 맺자고 한 일을 사례하고, 인하여 양마(良馬) 12필을 진헌(進獻)하게 하였다. 동년 11월 6일에 사은진표사(謝恩進表使) 권중화가 남경에서 돌아와 요동백호 하질(遼東百戶夏質)이 죽게된 경과를 추궁하는 명 나라 좌군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을 올렸고, 아울러 김적선(金積善) 일행이 등주(登州)에서 배가 부서져 익사했음을 아뢰었다. 그리고 동년 11월 23일에는 왕이 권중화 등이 돌아온 것에 사은(謝恩)하는 주문(奏文)을 남경에 보냈다. 1397년(태조 6) 2월 8일에 사은사 권중화 등이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의 잔치에 참여하였고, 동년 5월 27일에는 판문하부사 권중화를 위관(委官)으로 삼아 박자안(朴子安)을 국문케 하였다. 1398년 (태조 7) 2월 11일 영삼사사 권중화에게 광주(廣州)에서 종 만드는 것을 감독케 하였는데, 백금 50냥을 넣어 주조(鑄造)하여 성공하였다. 동년 4월 4일 왕이 광주에 거둥하여 새로 주조된 종을 보고, 제조(提調) 권중화에게 안마(鞍馬)를 내려주고, 군사 1,300명을 동원하여 서울 종각 아래로 옮겼다. 이 종 주조 때 세 번이나 실패했지만, 권중화가 맡고서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청취하고, 또 교묘한 생각을 써서 한 번에 주조하여 만드니, 왕이 기뻐하여 이 때 상이 내려졌다. 동년 5월 18일에는 북쪽 양정(凉亭)에서 열린 왕의 잔치에 영삼사사 권중화 등이 배석하였다. 1398년(태조 7) 9월 1일 권중화를 예천백(醴泉伯)으로 삼았다.
[定宗實錄] : 1399년(정종 1) 3월 13일 처음으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집현전에 모이게 하여 예천백 권중화 등을 제조관(提調官)으로 삼았다. 1400년(정종 2) 6월 1일 판문하부사로 삼아 치사(致仕)케 하였다.
[太宗實錄] : 1401년(태종 1) 1월 25일 공ㆍ후ㆍ백(公侯伯)의 호를 고치었으니, 참람되게 중국을 모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천백 권중화에게 고쳐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이 날 권중화는 양인(良人)의 딸과 혼인한 천인의 자식을 사수감(司水監)에 속하게 하도록 상소를 올렸다. 동년 7월 7일에는 왕이 권중화에게 명하여 북교(北郊)에서 비를 빌게 하였다. 동년 7월 27일 예천부원군 권중화가 또 상소하기를, "조선에서 노비의 소생은 어미를 따르고, 양민의 소생은 아비를 따르는 법이 오래 되었습니다. 흉폭한 천구(賤口)가 많이 양녀(良女)에게 장가들어 소생은 모두 사천(私賤)이 되니, 이 때문에 천구는 날로 늘고, 양민은 날로 줄어서 나라 역사(役事)에 이바지할 자가 크게 감소되오니, 원컨대, 이제부터는 천구가 양인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고, 양녀로서 이미 천구의 아내가 된 자는 또한 이혼하게 하고, 혹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게 되면, 그 죄를 종의 주인에게 미치게 하소서."라고 하여, 윤허받았다. 1405년(태종 5) 7월 7일 왕이 예천부원군 권중화에게 명령하여 북교(北郊)에서 비를 빌게 하였다. 1406년(태종 6) 3월 24일 임금이 말하기를, "예천백 권중화가 나에게 이르기를, ''''사철에 불씨를 바꾸는 것은 예전에 그 제도가 있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옛 제도를 따르지 아니하여, 이 때문에 화재가 일어납니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하고, 드디어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동년 8월 19일에는 검교영의정부사(檢校領議政府事) 권중화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궁정(宮庭)으로 나아가 세자에게 전위(傳位)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1408년(태종 8) 4월 2일에는 기로 영의정부사 치사(耆老領議政府事致仕) 권중화 등이 홍제원(洪濟院) 서교(西郊)에서 명 나라 서울에서 돌아오는 세자 이제를 영접하였다. 1408년(태종 8) 11월 23일에 영의정 권중화(權仲和)가 죽었다.
[世宗實錄] : 1433년(세종 15) 6월 10일에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완성되었는데, 이는 예전에 판문하(判門下) 권중화가 여러 책을 뽑아 모아서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을 짓고, 그 뒤에 또 약국 관원에게 명하여 다시 여러 책을 상고하고, 또 동인(東人)의 경험을 취하여 분류 편찬한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목판으로 간행하니, 이로부터 약을 구하기 쉽고 병을 치료하기 쉬우므로 사람들이 모두 편하게 여겼다.
[두산세계대백과] : 1394년(태조 3) 8월 한양 천도가 결정되자, 동년 9월 1일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문하부판사 권중화, 삼사판사 정도전 등을 한양으로 보내 종묘, 사직, 궁궐과 조정, 시전(市廛), 도로 등의 기지를 정하게 하였다. 동년 9월 9일에는 권중화 등이 궁궐, 종묘 등의 도면을 작성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태조는 궁궐의 기지만 정한 채 그 해 10월 28일 왕실, 정부 일행과 함께 한양으로 들어와 한양부 객사(客舍)를 이궁(離宮)으로 삼아 정무를 집행하였다. 11월 3일 공작국(工作局)을 설치하여 영건 공작 등의 일을 서두르게 하고, 12월 4일에는 궁궐을 지을 곳에 나가서 개기제(開基祭)를 거행하고 승도(僧徒)들을 모집하여 공역(工役)을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궁궐 건축 공사를 급속히 진행하여 이듬해 9월, 10개월만에 궁궐 공사를 완성하였다. 12월에는 왕과 정부의 시무처(視務處)를 새로 지은 궁궐로 옮겨, 한양 천도 1년만에 왕실과 정부는 신도에서의 새로운 면모와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陽村集] : 유천면 성평리 덕달 뒷들(德達後坪) 출신, 자는 용부(容夫), 본관은 안동이다. 고려 때 찬성사(贊成事)로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졌다. 1404년(태종 4)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가 영의정(領議政)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이다(연려실기술 제2권 태종조고사본발 태종조의 상신). [權近의 <陽村先生文集> 第22卷 跋語類 <鄕藥濟生集成方>의 跋] : 제생원(濟生院)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은 백성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처음에 평양백(平壤伯)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과 상락백(上洛伯)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이 국사를 다스리던 여가에, 곤궁한 백성들이 병이 들어도 치료하지 못함을불쌍하게 여겨 널리 구제하고자, 동지중추(同知中樞) 김희선(金希善)과 협력하여 제생원(濟生院)을 설치하고 약제를 모아놓고 치료를 하였으며, 또 예천백(醴泉伯) 권중화(權仲和)와 더불어 그가 전에 저술한 <향약방(鄕藥方)>을 토대로 다시 더 수집하여 전서(全書)를 만들어서 중외에 반포하고 영원히 전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모두 지역에 따라 약을 구할 수 있고 병에 따라 치료할 수 있음을 알게 하였다. 또 우마(牛馬)의 병에 약을 잘못 써서 죽게 함을 염려하여 그 처방을 집성하였으니, 백성을 사랑하고 짐승을 아끼는 마음이 깊고 또 간절함이 이와 같았다. 1399년(정종 1)에 그 책이 완성되자, 김희선이 강원도 관찰사로서 각공(刻工)을 시켜 목판에 새겨 그 전함을 영원하게 하였다. 아! 조준과 김사형의 인후(仁厚)한 덕으로 그 일을 총괄하였으며, 권중화의 정박(精搏)한 학문으로 그 책을 편찬하였으며, 김희선이 또 능히 힘을 써서 그 일을 시종 성취하였으니, 네 분이 우리 나라 백성에게 혜택을 베푼 바가 마땅히 이 책과 함께 만세에 전하여 무궁함을 기할 것이다. 이 제생원의 일을 주간하는 이는, 서원군(西原君) 한상경(韓尙敬), 순흥군(順興君) 안경량(安敬良), 김원경(金元경), 허형(許衡), 이종(李悰), 방사량(房士良)으로서 모두 여기에 공로가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아울러 책머리에 밝힌다. 1399년(정종 1) 여름 5월 상순//
권중화 [記事] : 한국문집총간(005_543c) 삼봉집(三峯集, 1791)에 실린 이유(李?)의 기사로, 그 내용은, “삼봉집 제8권/ 부록(附錄)/ 제현의 서술[諸賢?述]/ ...삼봉 정군(鄭君) 종지는 총명한 자질로 도(道)를 좋아하고, 덕(德)을 숭상하여 사림(士林)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도를 의논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함에 있어서는 높은 안목으로 독특한 주장을 세워서 조금도 흔들리는 일이 없으며, 저술(著述)에 있어서는 시원하고 순수하여 성리학(性理學)에서 우러나왔다.
아! 옛 글에 ꡐ덕(德)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모범이 될 말을 남긴다.ꡑ 하더니, 지금 나는 이를 종지에게서 보았다./ 동고(東皐)권중화(權仲和)는 씀./ 【안】 권중화는 여조(麗朝)의 찬성(贊成)이니, 본조(本朝)에 와서 예천백(醴泉伯)이 되었다.“이다.(www.minchu.or.kr 2006)
권중화 [記事] : 한국문집총간(007_222) 양촌집(陽村集, 1869)에 실린 양촌 권근(權近)의 기사로, 그 내용은, “양촌선생문집 제22권/ 발어류(跋語類)/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발/ 제생원(濟生院)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은 백성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처음에 평양백(平壤伯) 좌정승(左政丞) 조공 준(趙公浚)과 상락백(上洛伯) 우정승(右政丞) 김공 사형(金公士衡)이 국사를 다스리던 여가에, 곤궁한 백성들이 병이 들어도 치료하지 못함을 불쌍하게 여겨 널리 구제하고자, 동지중추(同知中樞) 김공 희선(金公希善)과 협력하여 제생원을 설치하고 약제를 모아놓고 치료를 하였으며, 또 예천백(醴泉伯) 권상 중화(權相仲和)와 더불어 그가 전에 저술한《향약방(鄕藥方)》을 토대로 다시 더 수집하여 전서(全書)를 만들어서 중외에 반포하고 영원히 전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모두 지역에 따라 약을 구할 수 있고 병에 따라 치료할 수 있음을 알게 하였다. 또 우마(牛馬)의 병에 약을 잘못 써서 죽게 함을 염려하여 그 처방(處方)을 집성하였으니, 백성을 사랑하고 짐승을 아끼는 마음이 깊고 또 간절함이 이와 같았다. 건문(建文) 원년(정종 1, 1399)에 그 책이 완성되자, 김 중추(金中樞)가 강원도 관찰사로서 각공(刻工)을 시켜 목판에 새겨 그 전함을 영원하게 하였다. 아! 평양백과 상락백의 인후한 덕으로 그 일을 총괄하였으며, 예천백의 정박(精博)한 학문으로 그 책을 편찬하였으며, 김공이 또 능히 힘을 써서 그 일을 시종 성취하였으니, 네 분이 우리나라 백성에게 혜택을 베푼 바가 마땅히 이 책과 함께 만세에 전하여 무궁함을 기할 것이다. 이 제생원의 일을 주간(主幹)하는 이는, 서원군(西原君) 한공상경(韓公尙敬)순흥군(順興君) 안공 경량(安公敬良)김군 원경(金君元?)허군 형(許君衡)이군 종(李君悰)방군 사량(房君士良)으로서 모두 여기에 공로가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아울러 책머리에 밝힌다./ 기묘년(정종 1, 1399) 여름 5월 상순(上旬)”이다.(www.minchu.or.kr 2006)
권중화 [記事] : 한국문집총간(232_274b) 소산집(小山集)에 실린 이광정(李光靖)의 기사로, 그 내용은, “贈戶曹佐郞東窩權公行狀/ ...貫安東。高麗太師幸之後。十餘世至諱仲和。仕本朝官領議政醴泉伯諡文節。間三世司正諱鈞。始居永川。其曾孫諱克...”이다.(www.minchu.or.kr 2006)
권중화 [記事] : 고전국역총서(1968 刊)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양촌 권근(權近)의 기사로, 그 내용은, “동문선 제103권/ 발(跋)/ 향약제생 집성방 발(鄕藥濟生集成方跋)/ 위 제생원(濟生院)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은 이 백성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처음에 좌정승 평양백(平壤伯) 조(趙)공 준(浚)과 우정승 상락백(上洛伯) 김(金)공 사형(士衡)이 국사를 경륜하고 음양을 조화시키는 여가에, 곤궁한 백성들이 병을 능히 치료하지 못함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널리 구제하려고 동지중추 김(金)공 희로(希魯)와 더불어 서로 협력하여 제생원을 설치하고, 약제를 모아놓고서 치료를 하고, 또 예천백(醴泉伯) 권상 중화(權相仲和)와 더불어 그가 일찍이 저술한 《향약방(鄕藥方)》을 가지고 다시 수집을 더하여 전서(全書)의 판각을 완성하니, 장차 중외에 반포하고 영원히 전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모두 그 거주하는 곳에 따라 약을 구할 수 있고, 병중에 따라 치료할 수 있음을 알게 하고, 또 우마(牛馬)의 병에 약을 잘못 써서 죽게 함을 염려하여 그 치료의 처방을 집성하였으니, 그 백성에게 덕을 베풀고,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고 또 절실함이 이와 같더란 말인가. 건문(建文) 원년에, 그 서책이 이미 이루어졌더니, 김중추가 강원도의 관찰사가 되어 각공(刻工)에게 명하여 목판에 새겨, 그의 전달을 영원히 하도록 한 것이다. 아, 평양백 상랑백의 인후한 덕풍으로 그 일을 총괄하고, 예천백의 정밀 엄박(淹博)한 학문으로 그 서책을 편찬하였고, 김공이 또한 능히 힘을 써서 그 공을 시종 성취케 하였으니, 네 사람이 동방의 백성에게 혜택을 베푼 바는 마땅히 이 책과 함께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이 제생원의 일을 주간하는 자는 서원군(西原君) 한상민(韓尙敏)순흥군(順興君) 안경량(安敬良)김원경(金元?)허형(許衡)이종(李悰)방사량(房士良)으로서 모두 이에 노고가 있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아울러 권미(卷尾)에 밝히는 바이다. 창룡(蒼龍) 기묘년 여름 5월 상순 어느날.”이다.(www.minchu.or.kr 2006)
권중화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7 刊) 삼봉집(三峯集)에 실린 삼봉 정도전(鄭道傳)의 기사로, 그 내용은, “삼봉집 제8권/ 부록(附錄)/ 제현의 서술[諸賢?述] / 삼봉 정군(鄭君) 종지는 총명한 자질로 도(道)를 좋아하고, 덕(德)을 숭상하여 사림(士林)들이 모두 추앙하였다. 도를 의논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함에 있어서는 높은 안목으로 독특한 주장을 세워서 조금도 흔들리는 일이 없으며, 저술(著述)에 있어서는 시원하고 순수하여 성리학(性理學)에서 우러나왔다./ 아! 옛 글에 ꡐ덕(德)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모범이 될 말을 남긴다.ꡑ 하더니, 지금 나는 이를 종지에게서 보았다./ 동고(東皐) 권중화(權仲和)는 씀./【안】 권중화는 여조(麗朝)의 찬성(贊成)이니, 본조(本朝)에 와서 예천백(醴泉伯)이 되었다.”이다.(www.minchu.or.kr 2006)
권중화 [記事] : 고전국역총서(1966 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실린 연려실 이긍익(李肯翊)의 기사로, 그 내용은, “태종조의 상신/ ...중화는, 자는 용부(容夫)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고려때 찬성사(贊成事)로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졌...”이다.(www.minchu.or.kr 2006)
---
*예천초등학교 양궁부, 개인(양희우) 금메달과 단체 은메달...축하합니다.
예천초등학교(醴泉初等 洋弓部 LH社長旗 全國初等洋弓大會 양희우(6) 金메달,團體 銀메달 入賞) [記事] :
예천초등학교(교장 정해준)는 2010년 7월 2일부터 4일까지 3일간 LH토지주택연구원에서 열린 ''''제2회 LH사장기 전국초등학교 양궁대회''''에서 양궁부 양희우(6년) 선수가 25m에서 1위(금메달)을 차지하였으며, 양희우, 송동준, 김동일, 최정희 선수가 단체종합부문에 참가하여 2위(은메달)를 차지했다.
예천초등학교 양궁부 선수들(양희우, 김동일, 송동준, 최정희, 윤기원, 윤상필, 조승욱, 신홍규)은 앞으로 열리는 전국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윤종구 감독과 양은영 코치의 지도를 받아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0-07-05 오후 2:43:15)
---
*경북도립대, 브래드사업 지원대학 선정...축하합니다.
경북도립대(慶北道立大學, 敎育科學技術部 ''''2010 專門大學 代表브랜드事業'''' 支援大學 選定) [記事] :
경북도립대학(총장 김용대)는 교과부에서 2010년 7월 2일 발표한 ''''2010년도 전문대학 대표브랜드사업'''' 지원대학으로 선정되어 7억2천여만 원을 지원받는다.
''''전문대학 대표 브랜드사업''''은 교육여건과 성과가 우수한 상위 100개 전문대학의 사업계획서를 평가하여 80개교를 선정,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브랜드화를 통해 명품 전문대학으로 육성하기 위해 올해 처음으로 추진된다.
대학은 전문대학 대표브랜드사업을 통해 토목과, 자동차전공, 지방행정전공 등 3개 학과를 대학 대표 브랜드로 집중 육성할 계획이다.
특히 "도청 신도시 밀착형 전문인력 양성"을 목표로 3-way(Man,Process,Job)교육시스템을 통해 ▲명품 취업시스템 정착 ▲취업 수요기관 직무 맞춤형 전문직업인 양성 및 공급 ▲도립대학으로서 역할강화 및 지역경제 활성화를 달성한다는 전략이다.
대학 관계자는 "올해 초 3년 연속 교육역량강화사업 대상학교로 선정되는데 이어 대표브랜드사업에도 선정되어 매우 고무적이다"며 "도청 신도시 조성과 연계한 명품 대학을 만들기 위한 초석이 다져진 만큼 대학의 위상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본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0-07-05 오후 4:54:19
---
@예천방문 636
예천군 방문(올 여름休暇! 淸淨地域 醴泉으로~~) [記事] :
예천은 1300여년의 오랜 전통과 문화가 어우러진 경북 북부의 소백산맥에 위치한 배산임수지역으로 물 맑고 산수 좋은 청정지역으로 이름난 고장이다.
예천군에서 여름철 피서지로 소개할 곳은 물과 숲이 우거진 명봉사 계곡,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어울림상을 수상한 선몽대, 계곡과 산림이 함께하는 학가산 휴양림, 금빛모래와 비경을 자랑하는 육지속의 회룡포, 살아있는 곤충을 체험할 수 있는 곤충체험관과 생태공원 등이 있다.
명봉사는 예천읍에서 하리면소재지를 거쳐 30여분 정도가면 명봉사 주차장을 만나게 된다. 계곡은 산사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가 골짜기에 아련히 울려 퍼져 일상생활에서 지친 심신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내리고 심산유곡에서 흘러내리는 옥수(玉水)와 폭염을 삼켜버릴 듯한 울창한 수림은 더위를 식히기에는 안성마춤인 곳이다.
명봉사는 서기 875년(신라 경문왕 1)에 두운 선사가 창건했으며 경내에는 조선조 “문종대왕태실비”와 고려 태조 24년(941)에 세운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와 이두문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이외에도 대웅전, 산신각, 부도, 5층석탑 등이 있다.
계곡은 모두 경내로 사찰유원지라 할 수 있는데 명봉사와 내원암에 이르는 양 옆으로 연륜을 헤아릴 수 없는 아름드리 고목이 천년의 풍상을 가지마다 간직한 채 하늘을 찌를 듯이 늘어서 있고 그 밑을 흐르는 개울물은 백운봉 정상에서 발원해 세월의 풍상을 잊은 채 시원하게 흘러 사찰을 찾는 신도들과 더위를 피해 몰려든 사람들의 피서처로 여름 휴가철이면 일찍 찾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아름다운 숲 선몽대는 예천읍에서 호명면소재지를 거쳐 20여분 가면은 내성천의 평사십리와 1천여 평의 소나무 숲을 자랑하는 강변유원지 “선몽대” 가 있다. 내성천 우암산 산자락에 자리잡은 선몽대와 강변 유원지, 아침연꽃농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선몽대라는 이름만큼이나 주변경치가 빼어나다.
선몽대 안내판을 뒤로 입구에 들어설 때쯤 길 좌우로 소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룬 진입로를 거쳐 강변에 다다르는데 아직 편의시설이 다소 적으나 세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아 번잡함을 덜 수 있는 곳이다.
식수대와 야영을 할 수 있는 야영장, 주차장도 있어 가족과 함께 선현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옛 추억을 되살려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곳 유원지의 백미인 “선몽대”는 조선시대 문인이던 우암 이열도가 명종 18년 1593년에 창건한 정자로 경치가 좋은 이곳에 선몽대를 세우고 여생을 마쳤다 한다.
이 선몽대에는 건립 당시 63세이던 퇴계 선생이 써 준 선몽대 대호 3자와 시를 비롯해 우암 이열도, 약포 정탁,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등 문인들의 친필시를 새긴 목판을 비롯해 여러 문인의 시가 목각되어 현판으로 걸려 있다.
선몽대는 5백~6백년 수령의 아름드리 노송, 역사적 가치, 마을 숲 보전 등의 숲의 미래에 대한 우수성을 인정받아 제8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선몽대가 장려상인 어울림상을 수상을 받았으며 내성천의 맑은 강물과 주변의 기암절벽을 통해 한여름 더위를 말끔이 잊게 하는 시원한 경관으로 일년 내내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금빛모래와 비경을 자랑하는 육지속의 회룡포는 예천읍에서 용궁면소재지를 거져 30여분 가면 육지속의 섬 회룡포를 만나게 된다. 회룡포는 소백산이 남으로 뻗어 내려오면서 잠시 쉬어가는 길목에 강이 산을 부둥켜안고 용트림을 하는 듯한 특이한 지형으로 한 삽만 뜨면 섬이 되어버릴 것 같은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곳이다.
맑은 물과 백사장,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가파른 산에서 바라다 보는 회룡포는 그 빼어난 절경으로 2000년 방영된 KBS드라마 가을동화와 2009년1박2일 방영되었으며 2005년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지 16호로 지정됐다.
회룡포를 찾는 이들의 대부분은 회룡포 여울마을, 회룡포마을 황토 민박, 회룡포 쉼터에서 민박을 하고 회룡대에서 천혜의 비경을 감상한 후 용궁시장에 들러 순대를 먹고 예천을 떠나게 된다.
곤충생태체험관과 수변생태공원은 예천읍에서 하리면소재지를 거쳐 풍기방면으로 40여분 가면은 곤충체험관과 생태공원을 만나게 된다. 지난 2007년 곤충바이오엑스포 행사를 위하여 조성된 곤충생태체험관은 장수풍뎅이, 나비 등 각종 곤충을 직접보고 만질 수 있는 체험학습장이다.
체험장안에는 3D로 된 곤충생태 영상 관람을 할수 있는 시설과 살아서 움직이는 곤충을 볼 수 있는 수변생태공원이 조성돼 있어 여름방학 때 어린이와 부모들이 곤충을 체험할 수 있으며 곤충체험을 하고 난 후 예천곤충생태체험관의 랜드마크인 출렁다리를 지나면 모시골 계곡을 만나게 된다.
모시골 계곡은 아직까지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약 30분정도 올라가면 충복골 칠칠바위 폭포에 도착할 수 있다. 곤충생태체험관 주변에는 민박을 할 수 있으며 또한 여름철 피서지로 잘 알려지지 않아 청정한 자연경관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학가산 자연휴양림은 예천읍에서 약 30분을 달려가면 학가산 북쪽계곡에 위치한 학가산자연휴양림은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자리잡은 통나무집들이 주위 나무들과 계곡, 바위와 너무도 잘 어울리며, 통나무 집 안으로 들어서면 편백나무의 테르펜향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무엇보다 학가산 휴양림은 다양한 평수의 숲속의 집으로 가족 단위 여행에 편리하도록 조성되어있으며 학가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나있고 2시간정도면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부대시설로 캠프파이어장, 야외무대, 어린이놀이터, 체력단련장, 물놀이장등을 갖추고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嶺南타임즈 2010-07-05 AM 9:56:39)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