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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251:권진右議政2(祝이분순)
작성자장병창 @ 2010.07.13 06:41:40
  예천의 자랑(2251) : 지보면 대죽리 사람 권진 우의정(2)(附 예천의 이분순, 12일 올해 경북 새마을여인상에 선정...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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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진 [記事] : 세종실록 15권/ 세종 4년(1422 임인 / 명 영락(永樂) 20년) 2월 16일(계묘) 2번째 기사/ 권진․목진공․우박․최운․성달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권진(權軫)으로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를 삼고, 목진공(睦進恭)으로 호조 참판을 삼고, 우박(禹博)․최운(崔?)으로 중군 총제(中軍摠制)를 삼고, 성달생으로 좌군 총제(左軍摠制)를 삼고, 황상(黃象)으로 우군 총제(右軍摠制)를 삼고, 이각(李恪)․원윤(元胤)․오식(吳湜)으로 중군 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를 삼고, 신상(申商)으로 한성부 윤(漢城府尹)을 삼고, 성엄(成?)으로 사헌부 대사헌을 삼고, 송저(宋儲)로 사헌부 지평(持平)을 삼고, 유종선(柳種善)․유사눌(柳思訥)․이숙묘(李叔畝)로 충청도․강원도․함길도의 도관찰사(都觀察使)를 삼고, 이춘생(李春生)․윤하(尹夏)로 함길도․평안도의 병마 도절제사를 삼고, 이중지(李中至)로 경상우도 병마 도절제사를 삼고, 변이(邊?)로 충청도 수군 도안무처치사를 삼고, 홍섭(洪涉)과 조비형(曺備衡)으로 경상좌․우도 수군 도안무 처치사를 삼고, 하자종(河自宗)으로 판청주목사(判淸州牧事)를 삼고, 이추(李推)로 판진주목사(判晉州牧事)를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5책 15권 9장 B면/ 【영인본】 2책 474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1422 임인 / 명 영락(永樂) 20년) 11월 3일(병진) 1번째 기사/ 북경으로 가는 하정사에게 의관, 약물 등을 주어 보내다/ 하정사(賀正使)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 권진(權軫)과 부사(副使)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이교(李皎)가 북경(北京)에 가는데, 의관(衣冠)과 갓[笠]․신[靴]․약물(藥物)을 주어 보냈다./ 【태백산사고본】 6책 18권 11장 A면/ 【영인본】 2책 510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사-임면(任免) /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19권/ 세종 5년(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1월 25일(정미) 2번째 기사/ 송거신․정진․조비형․권진․박자청․변이원․민생․정효문 등을 제수하다/ 송거신(宋居信)으로 판좌군부사(判左軍府事)를 삼고, 정진(鄭津)으로 공조 판서를 삼고, 조비형(曺備衡)으로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를 삼고, 권진(權軫)으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삼고, 박자청(朴子靑)으로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를 삼고, 변이(邊?)와 원민생(元閔生)으로 중군 총제(中軍摠制)를 삼고, 정효문(鄭孝文)으로 우군 총제(右軍摠制)를 삼고, 윤하(尹夏)와 이숙묘(李叔畝)로 중군 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를 삼고, 이중지(李中至)로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를 삼고, 한혜(韓惠)로 좌대언(左代言)을 삼고, 곽존중(郭存中)으로 우대언(右代言)을 삼고, 조종생(趙從生)으로 좌부대언(左副代言)을 삼고, 김맹성(金孟誠)으로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삼고, 심도원(沈道源)으로 형조 참의를 삼고, 이사후(李師厚)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삼고, 정분(鄭?)으로 좌헌납(左獻納)을 삼고, 윤임(尹臨)으로 판공주목사(判公州牧事)를 삼고, 최윤덕(崔閏德)으로 평안도 병마 도절제사를 삼고, 안순(安純)으로 함길도 도관찰사(都觀察使)를 삼고, 박초(朴礎)로 경상우도 수군 처치사(水軍處置使)를 삼고, 이각(李恪)으로 경상우도 병마 도절제사를 삼고, 우박(禹博)으로 충청도 수군 처치사를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6책 19권 9장 A면/ 【영인본】 2책 523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19권/ 세종 5년(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2월 11일(임술) 4번째 기사/ 권진이 북경에서 돌아오다/ 권진(權軫)이 북경에서 돌아왔다./ 【태백산사고본】 6책 19권 14장 B면/ 【영인본】 2책 525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20권/ 세종 5년(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4월 21일(신미) 2번째 기사/ 권진이 북교에서 기우제를 행하다/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권진(權軫)을 보내어 북교(北郊)에서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책 20권 9장 A면/ 【영인본】 2책 537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21권/ 세종 5년(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7월 30일(무신) 1번째 기사/ 평안도 도절제사가 중국 사신의 용봉참 유숙사실을 보고하다/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崔閏德)이 급히 보고하기를, ꡒ〈중국〉사신 소감(少監) 해수(海壽)와 예부 낭중(禮部郞中) 진경(陳敬)이 두목 20명을 거느리고 궤[子] 40여 개를 가지고 나와서 이 달 7월 27일 용봉참(龍鳳站)에 이르러 유숙합니다.ꡓ라고 하니, 즉시 판한성 권진(權軫)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아 선온(宣?)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책 21권 7장 A면/ 【영인본】 2책 551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21권/ 세종 5년(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8월 7일(을묘) 4번째 기사/ 권진․이숙묘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권진(權軫)과 총제(摠制) 이숙묘(李叔畝)로 관반사(館伴使)를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7책 21권 9장 B면/ 【영인본】 2책 552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21권/ 세종 5년(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9월 29일(정미) 3번째 기사/ 원민생․성억․정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마천목(馬天牧)으로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를, 원민생(元閔生)으로 우군 총제(右軍摠制)를, 성억(成抑)으로 좌군 총제(左軍摠制)를, 변이(邊?)로 중군 총제(中軍摠制)를, 오승(吳陞)으로 공조 판서를, 권진(權軫)으로 형조 판서를, 허주(許周)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정진(鄭津)으로 개성 유후(開城留後)를, 윤회(尹淮)로 예문관 제학을, 곽존중(郭存中)으로 승정원 지신사(承政院知申事)를, 정흠지(鄭欽之)로 동부 대언(同副代言)을, 차유(車有)로 사간원 우헌납(右獻納)을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7책 21권 20장 A면/ 【영인본】 2책 557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24권/ 세종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6월 24일(정묘) 2번째 기사/ 유관․권진에게 벽제에 나가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게 하다/ 우의정 유관(柳觀)․형조 판서 권진(權軫)에게 명하여 벽제(碧蹄)에 나가 사신을 맞이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책 24권 34장 A면/ 【영인본】 2책 607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25권/ 세종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7월 20일(계사) 3번째 기사/ 유후사 선위사 권진이 출발하다/ 유후사 선위사(留後司宣慰使) 권진(權軫)이 출발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책 25권 11장 B면/ 【영인본】 2책 615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25권/ 세종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9월 23일(을미) 3번째 기사/ 원접사 형조 판서 권진과 공조 판서 이맹균이 떠나다/ 원접사(遠接使) 형조 판서 권진(權軫)과 공조 판서 이맹균(李孟畇)이 떠났다./ 【태백산사고본】 8책 25권 29장 A면/ 【영인본】 2책 624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26권/ 세종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10월 3일(갑진) 2번째 기사/ 서울에 들어올 날을 사신이 정하였다는 것을 권진․이맹균이 아뢰다/ 원접사(遠接使) 권진(權軫)․이맹균(李孟畇)이 역마(驛馬)로 달려와 아뢰기를, ꡒ9월 29일에 사신이 탕참(湯站) 에 이르러 손수 쪽지를 써서 통사(通事) 에게 주어 먼저 보냈는데, 이르기를, ꡐ칙(勅)을 맞아들일 때에는 소복(素服)과 오사모(烏紗帽)에 흑각대(黑角帶)를 띠고, 조(詔)를 맞아들일 때에는 청의(靑衣)․오사모에 흑각대를 띠고, 조복(朝服)이 있으면 조복을 입고, 조(詔)․칙(勅)을 맞을 때에 모두 의장(儀仗)과 금고(金鼓)를 사용하되, 금고는 울리지 않는다.ꡑ 하였습니다. 이날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왔는데, 모두 백립(白笠)을 쓰고, 백의(白衣)에 삼베띠[麻布帶]를 띠었으며, 또 빨리 〈서울에〉 가려고 하므로, 신 등이 이르기를, ꡐ전하(殿下)가 길한 날을 받아 오는 10월 21일에 칙(勅)을 맞이하고, 26일에 조(詔)를 맞이하고자 한다.ꡑ 하니, 사신이 대답하기를, ꡐ옳지 아니하다. 이제 우리 황제가 전하를 친아들처럼 여기고 우리들로 하여금 〈여기까지〉 와서 유시(諭示)하게 하는 것이며, 또 이제 만국(萬國)이 진위조하(陳慰朝賀)하는데, 왕국(王國)에서 맨 뒤에 이르게 되면 의리상(義理上) 어찌 되겠는가.ꡑ 하고 바로 황력(黃曆)을 내어놓고 서울에 들어갈 길일(吉日)을 선택하면서 이르기를, ꡐ칙사(勅使)는 10월 11일, 조사(詔使)는 15일로 하겠다.ꡑ 하고, 또 ꡐ연탁(宴卓)에 홍건(紅巾)을 사용하지 말라.ꡑ 하였습니다.ꡓ라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9책 26권 1장 A면/ 【영인본】 2책 625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26권/ 세종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10월 5일(병오) 3번째 기사/ 태조 고황제의 유조로 백의와 각대로 사신을 수행함을 권진․이맹균이 아뢰다/ 원접사(遠接使) 권진(權軫)․이맹균(李孟畇) 등이 서장으로 아뢰기를, ꡒ사신이 모두 마포대(麻布帶)를 띠고, 또 영조례(迎詔禮) 때에도 오각대(烏角帶)를 사용한다고 써서 보였습니다. 신 등은 의심하건대,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유조(遺詔)로 3일 만에 복을 벗는다는 제도의 최질(衰?)을 가리킨 것인 듯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3일 만에〉 길복을 입는다는 말은 감히 입밖에 낼 수가 없어서, 백의(白衣)와 각대(角帶)로 사신을 수행하고 있나이다.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9책 26권 2장 A면/ 【영인본】 2책 626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26권/ 세종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11월 3일(갑술) 1번째 기사/ 권진을 형조 판서로, 조상치를 좌정언으로 임명하다/ 권진(權軫)을 형조 판서, 조상치(曺尙治)를 좌정언(左正言)에 임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9책 26권 21장 B면/ 【영인본】 2책 63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28권/ 세종 7년(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6월 23일(신유) 5번째 기사/ 형조 판서 권진이 사직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다/ 형조 판서 권진(權軫)이 글을 올려 사직(辭職)하여 말하기를, ꡒ음양이 때를 그르치는 것은 형벌이 중도를 얻지 못한 소치인가 합니다. 신은 나이 69세이온데, 지나간 계묘년에 비로소 형조에 벼슬하여, 늙고 둔함이 날로 더하여 앞일을 잊어버리고 뒷일을 실수하므로, 형률을 판결하는 직무에 합당하지 아니하오니 신의 관직을 파면하옵시기를 비나이다.ꡓ하니, 임금이 보고 전교하기를, ꡒ경이 만일 관직을 사면한다면 내가 다시 어떤 사람에게 그 직무를 맡겨야 하겠는가. 이제 사표를 도로 내어 주노라.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9책 28권 27장 B면/ 【영인본】 2책 67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1425 을사 / 명 홍희(洪熙) 1년) 윤7월 3일(경자) 2번째 기사/ 원접사 형조 판서 권진․도총제 이발에게 명나라 사신을 마중하게 하다/ 평안도 감사가 급보(急報)하기를, ꡒ사신 4인이 7월 28일에 요동 을 출발하여 나온다고 합니다.ꡓ하니, 원접사(遠接使)로 형조 판서 권진(權軫)과 도총제 이발(李潑)을 시켜 선온(宣?)을 가지고 마중가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0책 29권 11장 A면/ 【영인본】 2책 684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1426 병오 / 명 선덕(宣德) 1년) 2월 10일(갑술) 2번째 기사/ 권진․황희․허조․신상․신장․최사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권진으로 찬성을 삼고, 황희를 이조 판서, 허조를 참찬, 신상을 예조 판서, 신장(申檣)을 좌군 동지총제, 최사강(崔士康)을 호조 참판에 임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0책 31권 14장 A면/ 【영인본】 3책 7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1426 병오 / 명 선덕(宣德) 1년) 2월 19일(계미) 3번째 기사/ 평양 선위사 찬성 권진이 길을 떠나다/ 평양 선위사(平讓宣慰使) 찬성 권진(權軫)이 길을 떠났다./ 【태백산사고본】 10책 31권 17장 B면/ 【영인본】 3책 9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1426 병오 / 명 선덕(宣德) 1년) 4월 4일(정묘) 1번째 기사/ 백언이 수원부로 어버이를 뵈러 가니, 권진 등에게 전송하게 하다/ 백언(白彦)이 수원부(水原府)로 어버이를 뵈오러 가니, 윤봉(尹鳳)이 한강(漢江)에서 전송하였다. 임금이 접반사 찬성 권진(權軫)․참찬 최윤덕(崔潤德)․좌대언 조종생(趙從生) 등에게 명하여 가서 전송하게 하니, 백언이 말하기를, ꡒ대궐에 들어가서 하직하는 예(禮)를 행했어야 옳을 것을, 다만 전하께서 수고하실까 염려스럽고, 또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멀지 않은 까닭으로 궐례(闕禮)하고 가니, 이 뜻을 전하께 전달해 주셨으면 하오.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32권 1장 A면/ 【영인본】 3책 17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33권/ 세종 8년(1426 병오 / 명 선덕(宣德) 1년) 9월 29일(기미) 1번째 기사/ 정사를 보다. 해청을 진헌하는 일에 대해 찬성 권진과 의논하다/ 정사를 보았다. 찬성 권진(權軫)이 계하기를, ꡒ해청(海靑)을 잡는다는 것은 반드시 기대하기 어렵고, 비록 잡는다 하더라도 또한 죽기가 쉬운데, 이제 만약 이를 바친다면 계속하여 바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뒷날에 가서 요구하는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오니, 이제 마땅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을 만들어 황제께 주달하시어 뒷날의 폐해를 막으소서. 일찍이 듣자오니, 중국에서 해청을 잡으려고 제로(諸路)를 분주히 헤메고 다녔다 하오니, 그 폐해가 장차 우리나라에 이를 것이 두렵삽고, 또 매를 구하는 것은 오직 백성들만이 그 폐해를 받을 뿐 아니라, 이는 바로 황제의 부덕(不德)을 영합해 조장하는 것이 될 것이니, 어찌 바르고 착한 것을 진달하고, 간사하고 악한 일을 막는 의의라 하겠습니까.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ꡒ어허, 이 무슨 말인가. 사대(事大)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성심껏 하여야 할 것이며, 황제께서 우리나라에서 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속일 수는 없다. 민간의 폐해를 나도 역시 알고 있다. 그러나 대의(大義)로 말할 것 같으면, 민간의 폐해가 있는 것은 그 일이 경한 것이나, 사대(事大)를 성실히 하지 않는 것은 그 일이 중한 것이다. 하기 어려운 일을 권면하고, 착한 말을 진달하는 것은 나의 직책이 아닌 것이니, 외국의 번왕(藩王)은 본래 황제를 간(諫)하는 의리는 없는 것이다.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33권 19장 B면/ 【영인본】 3책 44면/ 【분류】 *외교-명(明) / *과학-생물(生物)(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34권/ 세종 8년(1426 병오 / 명 선덕(宣德) 1년) 10월 8일(무진) 2번째 기사/ 찬성사 권진이 와서 문안드리고 술과 과일을 올리다/ 찬성사(贊成事) 권진(權軫)이 와서 문안을 드리고 인하여 술과 과일을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11책 34권 2장 B면/ 【영인본】 3책 45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34권/ 세종 8년(1426 병오 / 명 선덕(宣德) 1년) 12월 7일(병인) 3번째 기사/ 권진․오승․이춘생․박안신․김섭․황현․송인산․황보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권진(權軫)으로 의정부 찬성(議政府贊成) 겸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오승(吳陞)으로 예문관 대제학을, 이춘생(李春生)으로 중군 총제(中軍摠制)를, 박안신(朴安臣)으로 좌사간(左司諫)을, 김섭(金涉)으로 우사간(右司諫)을, 황현(黃鉉)으로 대사성(大司成)을, 송인산(宋仁山)으로 지사간(知司諫)을, 황보규(皇甫規)로 우헌납(右獻納)을, 최호생(崔虎生)으로 사헌 지평(司憲持平)을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1책 34권 15장 B면/ 【영인본】 3책 52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36권/ 세종 9년(1427 정미 / 명 선덕(宣德) 2년) 5월 6일(계사) 3번째 기사/ 백언이 성묘하러 수원으로 가니, 권진 등을 보내 한강루에서 위로하다/ 백언(白彦)이 부친의 뫼에 성묘하러 수원으로 가매, 창성(昌盛)이 한강 까지 배웅하고, 찬성 권진(權軫)․호조 판서 안순(安純)․좌대언 김맹성(金孟誠)을 명하여 한강루(漢江樓)에서 위로하여 보내었다./ 【태백산사고본】 12책 36권 12장 A면/ 【영인본】 3책 72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36권/ 세종 9년(1427 정미 / 명 선덕(宣德) 2년) 5월 13일(경자) 1번째 기사/ 백언이 수원에서 오니 권진 등을 보내 한강루에서 맞이하여 위로 잔치를 하다/ 백언(白彦)이 수원(水原)에서 오는데, 찬성 권진(權軫)․공조 참판 이천(李?)․좌대언 김맹성(金孟誠)을 명하여 한강루(漢江樓)에서 맞이하여 잔치로 위로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36권 15장 B면/ 【영인본】 3책 73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36권/ 세종 9년(1427 정미 / 명 선덕(宣德) 2년) 5월 27일(갑인) 1번째 기사/ 창성과 백언이 금강산에서 돌아오매, 권진 등을 보내 잔치를 베풀다/ 창성(昌盛)과 백언(白彦)이 금강산에서 돌아오매, 윤봉(尹鳳)이 흥인문(興仁門) 밖에서 마중하고, 임금도 찬성 권진(權軫)․병조 판서 황상(黃象)․좌대언(左代言) 김맹성(金孟誠) 등을 보내어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36권 18장 B면/ 【영인본】 3책 75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1427 정미 / 명 선덕(宣德) 2년) 9월 8일(계사) 2번째 기사/ 권진․허조․성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권진(權軫)을 찬성(贊成), 허조(許稠)를 숭정 대부(崇政大夫) 이조 판서, 성엄(成?)을 판한성부사, 곽존중(郭存中)을 이조 참판, 최사강(崔士康)을 병조 참판, 이징석(李澄石)과 우박(禹博)을 좌․우군 총제, 김오문(金五文)과 김효손(金孝孫)을 우군 동지총제, 심도원(沈道源)을 경창부 윤(慶昌府尹), 박안신(朴安臣)을 예조 참의, 이승직(李繩直)을 공조 참의, 송인산(宋仁山)을 겸 지형조사(兼知刑曹事)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2책 37권 21장 B면/ 【영인본】 3책 9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39권/ 세종 10년(1428 무신 / 명 선덕(善德) 3년) 1월 15일(무술) 2번째 기사/ 권진 등이 사통의 금령을 어긴 양녕 대군을 국문하자고 건의하다/ 의정부 찬성 권진(權軫)과 형조 판서 노한(盧?)이 계하기를, ꡒ양녕 대군 이제(李?)가 사통(私通)의 금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감히 잡인(雜人)들과 교통(交通)하고, 또 세자(世子) 때부터 윤이(閏伊) 와 간통하였다고 속여 말하여 성상의 총명(聰明)을 속였습니다. 신 등이 이제 듣건대, 상서(上書)에 원망하고 패만(悖慢)스러운 말이 있다고 하니,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진실로 이와 같이 하여서는 아니될 일입니다. 원컨대 유사(攸司)에 내려 이를 다스리소서.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ꡒ이보다 앞서 양녕의 실수가 많았으나 일찍이 유사에 내려 추핵(推?)하지는 않았는데, 이제 말한 바는 옳지 못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 그 상서(上書)에는 원망하는 언사가 없었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ꡓ하였다. 권진 등이 또 계하기를, ꡒ이보다 앞서 양녕 의 실수가 진실로 많았지마는, 그러나 그 불의(不義)의 행실은 그 자신(自身)에 그쳤을 뿐이오니 오늘날 성상의 총명(聰明)을 속이고 패만(悖慢)하고 원망한 뜻과는 달랐습니다. 원컨대 유사에 내려 국문(鞫問)하소서.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ꡒ양녕이 본디 문사(文辭)에는 부족(不足)한데다가 다만 윤이(閏伊)를 사랑하여, 그가 갇혔단 말을 듣고는 드디어 사형(死刑)에 처하지나 아니할까 의심하여, 그 뜻을 다 써서 구원하고자 하여 그런 것뿐이지 처음부터 원망하는 뜻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형제의 사이에는 마땅히 작은 일로써 급작스럽게 논단(論斷)할 수는 없으니 다시 이를 말하지 말라. 반드시 말을 하고자 한다면 훗날에 친히 나를 보고 말하라.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39권 3장 B면/ 【영인본】 3책 108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사법-재판(裁判)(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41권/ 세종 10년(1428 무신 / 명 선덕(善德) 3년) 7월 5일(을묘) 2번째 기사/ 권진․마천목․조선․정효전․조종생․최사강․조치․윤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권진(權軫)으로 찬성사(贊成事)를, 마천목(馬天牧)으로 장흥군(長興君)을, 조선(趙璿)으로 한원군(漢原君)을, 정효전(鄭孝全)으로 일성군(日城君)을, 조종생(趙從生)으로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최사강(崔士康)으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조치(曹致)․윤하(尹夏)․조모(趙慕)로 중군 총제(中軍摠制)를, 조뇌(趙賚)․이명덕(李明德)․이각(李恪)으로 좌군 총제를, 이중지(李中至)로 우군 총제(右軍摠制)를, 김익생(金益生)․신장(申檣)으로 중군 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를, 심도원(沈道源)으로 좌군 동지총제를, 유사눌(柳思訥)로 한성부 윤(漢城府尹)을, 조계생(趙啓生)으로 대사헌(大司憲)을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3책 41권 2장 B면/ 【영인본】 3책 137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41권/ 세종 10년(1428 무신 / 명 선덕(善德) 3년) 8월 3일(임오) 2번째 기사/ 이상이 평강에서 돌아오니 찬성 권진 등을 보내어 보제원에서 맞이하다/ 이상(李相)이 평강(平康)으로부터 돌아오니, 찬성(贊成) 권진(權軫)․판서(判書) 김자지(金自知)․좌부대언(左副代言) 정연(鄭淵)을 보내서 보제원(普濟院)에서 맞이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3책 41권 6장 B면/ 【영인본】 3책 139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41권/ 세종 10년(1428 무신 / 명 선덕(善德) 3년) 8월 4일(계미) 1번째 기사/ 창성․이상이 노도 등지에 나가 노니 권진 등이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려 하다/ 창성(昌盛)․이상(李相) 두 사신이 노도(露渡) 등지에 나가서 노니, 찬성(贊成) 권진(權軫)․판서(判書) 신상(申商)․관반(館伴) 성달생(成達生) ․우부대언(右副代言) 이사후(李師厚)가 잔치를 베풀고 대접하려 했으나, 두 사신이 잔치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돌아왔다./ 【태백산사고본】 13책 41권 6장 B면/ 【영인본】 3책 139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41권/ 세종 10년(1428 무신 / 명 선덕(善德) 3년) 9월 17일(병인) 5번째 기사/ 찬성 권진 등에게 명하여 창성을 영접하게 하다/ 찬성(贊成) 권진(權軫)․판서 안순(安純)․우대언(右代言) 허성(許誠) 등을 명하여 창성(昌盛)을 홍제원정(洪濟院亭)에서 영접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3책 41권 18장 A면/ 【영인본】 3책 145면/ 【분류】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44권/ 세종 11년(1429 기유 / 명 선덕(宣德) 4년) 6월 24일(기해) 4번째 기사/ 맹사성․민여익․권진에게 궤장을 내리니 이들이 전을 올려 사례하다/ 우의정 맹사성(孟思誠)․여천 부원군(驪川府院君) 민여익(閔汝翼)․ 찬성 권진(權軫)에게 궤장(?杖)을 내렸다. 맹사성에게 교지를 내리기를, ꡒ기영(耆英)의 구덕(舊德)은 국가에서도 의지하여 든든하게 여기는 바이며 임금의 예절로써 공경하는 바이다. 지난 옛날을 상고해 본다면 모두 이 도리를 따랐던 것이다. 경(卿)은 겸공(謙恭)하고 온아한 미덕이 있어 조종(祖宗)을 두루 섬기며, 직임(職任)은 재상(宰相)의 지위에 처하여 모든 관원을 모범하여 거느리며 나의 정치를 도왔었다. 나이와 덕이 모두 높으니 예수(禮數)를 마땅히 더해야 되겠으므로 이에 궤장(?杖)을 내리어 달존(達尊)을 나타낸다. 경(卿)은 힘이 부지(扶持)하고 화기(和氣)를 수양하여 더욱 나를 도와 치적(治績)을 올릴 것에 마음을 쓰라.ꡓ하였다. 민여익에게 교지를 내리기를, ꡒ대신(大臣)이 이미 달존(達尊)의 아름다움이 있으니 임금이 마땅히 공경하는 예의(禮儀)를 더해야 될 것이다. 이것이 곧 좋은 규정이며 진실로 사사로운 은혜가 아닌 것이다. 경(卿)의 학문은 시례(詩禮)에 조예가 깊었고, 식견은 기미(幾微)까지도 환하게 알았다. 몸소 사조(四朝)를 섬기어 훈명(勳名)이 이미 나타났다. 나이 70세가 넘어서 연치와 덕이 모두 높으니 이에 전상(典常)을 따라서 궤장(?杖)을 내린다. 아아, 어진 이를 높이고 늙은이를 공경하여 대개 시초(蓍草)와 거북에 견주려 하니, 성정(性情)을 수양하고 정신을 화평하게 하여 장수(長壽)를 보전하기를 바라노라.ꡓ하였다. 권진에게 교지를 내리기를, ꡒ신하로서 나이가 많고 덕이 있으면 이는 곧 달존(達尊)이요, 임금이 노성(老成)에게 직임을 맡기매 마땅히 우례(優禮)를 더해야 될 것이다. 옛날의 전례(典禮)를 상고하니 일정한 규정이 뚜렷이 있다. 경(卿)은 단정한 자질과 굉달(宏達)한 기국(器局)으로 스스로 청렴 검소함을 믿고 본디부터 충성 근실을 실행하여, 70세가 이미 넘었는데도 덕을 지킴은 더욱 견고하도다. 이에 궤장(?杖)을 내려 예경(禮經)을 밝게 보이니 경(卿)은 마땅히 기체(氣體)를 수양하여 몸을 보전하여, 고굉(股肱)의 신하가 되어 나 라를 보좌하라.ꡓ하였다. 맹사성이 전(箋)을 올려 은혜를 사례(謝禮)했으니, 전(箋)에는, ꡒ임금의 마음이 오래 된 신하를 생각하여, 특별히 늙은이를 우대(優待)하는 은혜를 더하는데, 천한 자질이 쇠경(衰境)에 다달아, 영광스럽게도 특별한 은총(恩寵)을 입었습니다. 빛은 여리(閭里)에 나고 기쁨은 가문에 넘칩니다. 신(臣)은 학술(學術)이 본디 소략(疏略)하고 이미 늙었으므로, 일찍이 경서(經書)의 심오한 이치를 연구하지 못했사온데, 어찌 의리의 정미(精微)함을 알겠습니까. 매양 윤음(綸音)을 받드매 조그만 도움도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또 헌의(獻議)를 당하매 대개 약석(藥石)의 말이 아닙니다. 평생의 하는 짓을 돌아보매 한 가지 선(善)도 취할 만한 것이 없는데, 어찌 궤장을 내리심을 생각이나 하였겠사오며, 또 정녕된 교시(敎示)까지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분수(分數)를 헤아리매 한계에 넘치니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대개 하늘과 땅이 덕을 합하고 비와 이슬이 보람을 같이하여 잘 다스리진 정치는 생성(生成)에 널리 입혔으며, 특별한 은택은 고고(枯槁)한 데 적셔 주셨습니다. 오피(烏皮)는 등[背]에 편하매, 마음에 들게 편안하고, 비쩍 마른 무릎[鶴]이 지팡이[鳩形]에 의지되매 넘어지지 않도록 받쳐 주고 있습니다. 인자한 화기[和氣]가 두루 입히매 감격하고 황송했습니다. 신(臣)은 삼가 어리석은 성심을 다하여 경사스런 국조(國祚)를 연장하시기를 바라서, 앉아서는 강릉(崗陵)의 높고 큰 것을 읊고, 다니면서는 일월(日月) 항상 떠오른 것을 노래했습니다. 나라의 운수가 반석(盤石)처럼 편안하매 역년(歷年)의 영구함을 기대하고, 임금의 몸을 하늘이 보전하며 만수(萬壽)를 한없이 축원합니다.ꡓ하였다. 민여익이 올린 전(箋)에는, ꡒ신(臣)은 본디 인원(人員)을 채움에 불과한 사람으로서 다행히 풍운(風雲)의 기회를 만났으며, 관직은 빈자리를 채우게 되매 외람히 난봉(鸞鳳)1378) 의 항렬에 추창(趨?)하였는데, 어찌 여러 임금의 조정에 70세의 수(壽)를 넘길 줄을 기약했겠습니까. 하물며 동량(棟梁)의 재질이 아닌데 어찌 궤장(?杖)을 내리는 은영(恩榮)을 바라겠습니까. 파리한 몸을 책려(策勵)하매 근골(筋骨)이 다시 견고함에 감사하고, 늙고 병든 몸을 의지하니 신체(身體)가 다시 편안해져 기뻐합니다. 비록 분수에 넘치는 권애(眷愛)이지마는 실로 생명을 보위(保衛)하는 은사(恩賜)입니다. 조심함이 배나 깊으매 다만 우대(優待)함을 입었습니다. 이것이 대개 신(臣)의 최퇴(?頹)함을 살피시고 신의 비박(鄙朴)함을 불쌍히 여겨 없어야 할 데 있게 된 후한 예(禮)를 미루어, 임용(任用)에 견디지 못한 쇠잔한 몸에 베푸시니, 자나 깨나 마음에 새겨서 조그만치의 도움을 다하고, 엎어지고 자빠지나 반드시 이에 있어 천지(天地)의 장수(長壽)를 축원합니다.ꡓ하였다. 권진의 올린 전(箋)에는, ꡒ어지신 임금께서 은혜를 미루어 특별히 별다른 내림을 주시니 어리석은 신하는 총애(寵愛)를 입으매 더욱 감회(感懷)가 간절합니다. 기쁨은 친인(親姻)에 넘치고, 빛은 이한(里?)에 나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공광(孔光)이 재상(宰相)이 되매 한나라 황제가 영수장(靈壽杖)을 내리어 현인(賢人)을 우대하였으며, 모개(毛价) 가 공훈(功勳)이 있으매 위나라 무제(武帝) 는 소빙궤(素憑?)를 주어서 덕을 표창했으니, 모두 명망과 공적이 아울러 나타나서, 옛날에도 드물게 만나는 사람입니다. 신(臣)과 같은 사람은 성질이 본디 소우(疏迂) 용렬하고 재주도 천박한데, 외람되이 의지하여 맡기는 은혜를 입었으나 일찍이 은혜를 갚기 위하여 힘을 쓴 공로(功勞)도 없었습니다. 몇 도(道)에 풍속을 관찰하매 겨우 노마(駑馬)의 열 번째 수레에 멍에한 것과 같으며, 여러 관청에 일을 다스리매 또한 오서(?鼠)의 다섯 번째 궁한 것과 같았습니다. 하물며 재상(宰相)의 직책을 도우매 더욱 임무를 감내하지 못할까 두려움만 더할 뿐이온데, 어찌 세상에 드문 은총(恩寵)이 외람되어 재주 없는 몸에 이를 것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옥한(玉翰)과 보장(寶章)이 문득 선극(璇極)의 위에서 내렸는데, 오피(烏皮)와 구각(鳩刻)이 형옥(衡屋) 속에 잘못 미치었습니다. 이것이 대개 덕은 생민(生民)에 흡족하고 마음은 화육(化育)에 돈독하여, 저포(樗蒲)처럼 소용없는 자질을 버리지 않고 특별히 우로(雨露)의 깊은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보호하기를 어린아이같이 하고, 인자하심은 부모보다도 더하였습니다. 신(臣)은 삼가 마땅히 부지(扶持)하고 의지하여 견마(犬馬)의 여생을 편안히 하고, 처음이 있고 종말이 있어 건곤(乾坤)의 큰 조화(造化)에 보답하려 합니다.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4책 44권 27장 B면/ 【영인본】 3책 186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역사-고사(故事)/ [註 1378]난봉(鸞鳳) : 영준한 선비를 말함. ☞(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47권/ 세종 12년(1430 경술 / 명 선덕(宣德) 5년) 1월 8일(기유) 2번째 기사/ 권진․허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권진(權軫)을 이조 판서로, 허조(許稠)를 의정부 찬성으로, 이수(李隨)를 병조 판서로, 최윤덕(崔閏德)을 판중군부사(判中軍府事)로, 조뇌(趙賚)를 병조 참판으로, 유맹문(柳孟聞)을 첨총제(僉摠制)로, 박서생(朴瑞生)을 집현전 부제학으로, 변계손(卞季孫)을 우사간(右司諫)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4책 47권 3장 A면/ 【영인본】 3책 213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50권/ 세종 12년(1430 경술 / 명 선덕(宣德) 5년) 11월 4일(신축) 4번째 기사/ 황희 맹사성 등과 군자고 신축 등의 문제에 대해 의논하다/ 좌의정 황희․우의정 맹사성․이조 판서 권진(權軫)․예조 판서 신상(申商)․총제 정초(鄭招) 등을 불러 의논하기를, ꡒ1. 이 앞서 해마다 농한기를 이용하여 군자고(軍資庫) 70간을 지으라 했는데, 지금 판부사(判府事) 최윤덕(崔閏德) 등이 하삼도(下三道)에 가서 성을 쌓고 있다. 만일 또 백성으로 하여금 재목을 벌채하여 운반하게 하면, 백성이 반드시 고통을 당할 것이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ꡓ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ꡒ아무리 성을 쌓는 공사가 있을지라도 군자고를 짓는 일은 중지할 수 없사오니, 재목이 산출되는 인근 지방에서 성을 쌓는 사람들을 시켜서 재목을 벌채하게 하옵소서.ꡓ하였다. 또 의논하기를, ꡒ1. 금년의 농사가 잘 되지 못하여, 여러 해 동안 대출한 환상(還上)을 만일 모두 받아들인다면, 또 토지와 집을 팔아서 갚고 유리(流離)하여 정착지를 잃게 될 것이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ꡓ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ꡒ고식적으로 보아주고 징수하지 않는다면 해마다 밀리고 또 밀려서 뒤에는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ꡓ하니, 명하기를, ꡒ재목을 베는 일과 여러 해 전부터 밀려 내려오는 환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우선 정지하라.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50권 14장 A면/ 【영인본】 3책 269면/ 【분류】 *건설-건축(建築) / *군사-관방(關防) / *구휼(救恤) / *재정-창고(倉庫) / *농업-농작(農作)(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50권/ 세종 12년(1430 경술 / 명 선덕(宣德) 5년) 12월 11일(정축) 2번째 기사/ 권진․안순 등과 창성이 요구한 화포를 줄 것인가에 대해 의논하다/ 판서 권진(權軫)․안순(安純)․신상(申商)․김자지(金自知)․참판 이맹균(李孟畇)․참판 이중지(李中至) 등에게 명하여 의논하기를, ꡒ창성(昌盛)이 ꡐ동팔참(東八站)을 가는 도중에 호랑이나 늑대가 나올까 무서우니, 화포(火砲)와 발화(發火)를 쏘는 사람을 데리고 가자. ꡑ고 하는데, 화포는 군중(軍中)에서 쓰는 것이므로 이를 중국 에 주어서 보내는 것이 타당하지 못하니, 이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ꡓ하였다. 진(軫) 등이 아뢰기를, ꡒ본국의 사신이 중국 에 들어갈 때에도 이를 주어서 보냈으니, 그의 요청을 들어 주어도 관계가 없습니다.ꡓ하니, 명하여 발화(發火) 50자루[柄]를 주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50권 29장 B면/ 【영인본】 3책 277면/ 【분류】 *외교-명(明) / *군사-군기(軍器)(www.history.go.kr 2009)

  권진 [記事] : 세종실록 50권/ 세종 12년(1430 경술 / 명 선덕(宣德) 5년) 윤12월 8일(갑진) 1번째 기사/ 권진이 최윤덕의 성 축조를 내년 가을로 미룰 것을 건의하다/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이조 판서 권진(權軫)이 아뢰기를, ꡒ도순문사(都巡問使) 최윤덕(崔閏德)이 부사(副使)와 수행하는 관원을 데리고 간 곳마다 지방의 접대가 너무 번폐하오니, 오래 지방에 머물러 있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합니다. ꡐ가을에 할 일을 봄철에 실시하면 백성이 전염병으로 많이 죽는다.ꡑ 하였습니다. 만일 성을 쌓을 터가 결정되었다면 그 역사(役事)를 감독하는 것은 윤덕 이 아니라도 될 수 있습니다. 옛적 임인년에 도성(都城)을 수축할 때에, 군인이 병으로 죽은 사람이 적었으나, 그들이 돌아갈 때에 이르러 죽은 자가 길바닥에 서로 깔렸었습니다. 이를 옛 책에서 상고하면, 가을에 할 일을 봄철에 강행했기 때문입니다. 내년 봄에 성을 쌓는다는 것은 옳지 못할까 합니다.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ꡒ경의 말이 옳다. 나는 과거에, ꡐ가을에 할 일을 봄철에 강행하면 백성이 전염병으로 많이 죽는다. ꡑ고 한 뜻을 미처 몰라서, 봄철에 백성을 사역시킨 것은 사실 잘못이었다. 현재는 이미 봄철에는 백성을 사역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삼도(三道)의 성을 봄철에는 반드시 쌓지 않을 것이다.ꡓ하였다. 진(軫)이 나간 뒤에, 임금이 대언(代言) 등에게 명하여, 봄에는 성을 쌓지 못한다는 취지를 윤덕(閏德)에게 이르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50권 38장 B면/ 【영인본】 3책 281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군사-관방(關防)(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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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의 이분순, 12일 올해 경북 새마을여인상에 선정... 축하합니다.

  이분순 [記事] : 예천의 이분순 씨가 2010년 7월 12일 경북도의 새마을여인상 다문화가족상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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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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