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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258:권한공政丞1(祝도체1위들)
예천의 자랑(2258) : 유천면 성평리 사람 권한공 도첨의정승(1)(附 예천군, 도체 1위들(육상부·여일반부 배구·남고등부 탁구)...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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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공(權漢功) : ?-1349(충정왕 1), 유천면 성평리 덕달 뒷들(德達後坪) 사람, 호는 일재(一齋), 시호(諡號)는 문단(文坦), 본관은 안동, 첨의평리(僉議評理) 척의 아들,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이다. 충렬왕 때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직사관(直史館) 벼슬에 있었다. 1294년(충렬왕 20) 7월에 왕명으로 원(元) 나라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賀禮)하였다. 그 후 충렬왕과 세자(忠宣王)가 함께 원 나라에 체류했는데, 왕유소 등이 임금의 부자(父子)를 이간하였다. 이 때 그는 충선왕 편을 들었고, 1298년(충렬왕 24) 왕이 양위하여 태상왕(太上王)으로 되고, 충선왕(世子)이 즉위하여 정권이 충선왕에게로 돌아왔을 때, 그는 종신(從臣)으로 충선왕 행저(行邸)에 있으면서 인사권(銓選)을 주관했다. 그리하여 1307년(충렬왕 33)에는 동지밀직사사 김문연(同知密直司事金文衍) 등이 이에 불만을 품기도 하였다. 1308년 7월태상왕인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귀국한 후 왕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 가죽띠를 상으로 받았고, 항시로 궁내에 출입하였고, 무시로 불림을 받았다. 동년 10월에는 왕이 중문(中門)에 방(榜)을 붙여 이르기를, "권한공, 최유(崔濡, 龍宮人) 등 21명외에는 특별히 부르지 않으면 궁중에 들어오지 못한다."라고 할 정도였다. 1309년(충선왕 1) 4월에 밀직 부사(密直副使)로 임명되었다가 동년 9월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지밀직사(知密直事, 1310.4), 밀직사(密直事, 1310.7), 첨의 평리(僉議評理)로 뛰어 올랐다. 1313년(충선왕 5) 1월에 왕이 오랫동안 원(元) 나라에 체류하고 있었으므로 종신(從臣)들은 모두 귀국하고 싶어했으나, 권한공과 최성지(崔誠之)는 함께 인사권(銓注)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본국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이사온(李思溫)과 김심(金深)이 휘정원(徽政院)에 말하여 권한공 등을 옥에 가두었던 바 왕이 노하여 황태후(皇太后)에게 말해서 권한공 등을 석방(1313.5)시키고 이사온(李思溫)과 김심(金深)을 귀양보냈다. 왕은 기뻐하여 권한공을 본국으로 파견해서 그의 아버지 권척과 최성지(崔誠之)의 아버지 최비일(崔毗一), 그리고 여러 재상(宰相)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게 하였다. 1314년(忠肅王 1) 1월 삼사사(三司使)로 전임되었는바 그 때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권한공, 최성지, 박경량(朴景亮) 등은 부왕(父王)을 시종하여 험난의 한 때를 겪었다. 즉 김심과 이사온의 무리가 여러 해를 두고 쌓고 쌓은 음흉한 모략이 나라와 주상(主上)에 위해(危害)를 끼쳤으나 세 사람은 함께 진심 진력하여 시종여일(始終如一)하게 왕을 보좌하였다. 해당 부서는 이에 대한 상전(賞典)을 거행하라!"라고 하였다. 동년 6월에 왕명으로 성균관(成均館)에서 새로 구입한 서적을 고열(考閱)하였고, 또 경학(經學)을 시험보였다. 같은 달 원(元) 나라에 가서 원 황제(元皇帝)에게 문안을 드리고, 겸하여 처음으로 과거(科擧)를 거행한 것을 축하하였다. 1315년(충숙왕 2) 7월 원(元) 나라에 가서 황태후에게 존호(尊號) 올린 것을 축하하였다. 그리고 원의 연경 만권당(燕京萬卷堂)에서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독서하며 문명(文名)을 떨쳤다. 또 원 나라에서 3왕에게 추증(追贈)이 있었을 때 권한공이 정윤 홍약과 함께 문건(文件)을 취급하고 있었는데, 그의 공을 논정(論定)하고 녹권(錄券)을 주었다. 벼슬은 찬성사(贊成事)로 되었다.
1317년(충숙왕 4) 11월 권한공이 원 나라에서 돌아와, 원 황제가 충숙왕을 책봉(冊封)하여 개부 의국삼사 부마 고려국왕(開府儀國三司駙馬高麗國王)으로 삼았다고 보고하고는 얼마 후 원 나라로 돌아갔다. 1318년(충숙왕 5) 5월에 원 나라에 머물던 상왕(上王, 충선왕)이 모든 나라 일을 멀리서 명령으로 시행할 때 권한공 등 4,5명이 연경 행저(燕京行邸)에서 호종하면서 인사권을 행사하자, 충숙왕이 불평을 품었다. 1319년(충숙왕 6) 1월에 왕이 찬성사(贊成事) 권한공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축하하게 하였다. 동년 3월 상왕(上王, 忠宣王)이 원 나라 황제의 어향사(御香使)로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 지방으로 여행하여 보타산(寶陀山)까지 갔었는데, 그 때 권한공과 이제현(李齊賢)이 시종하였다. 이 때 상왕은 시종(侍從)한 사람들에게 명하여 산천의 좋은 경치를 기록하여 행록(行錄) 한 권을 만들게 하였다. 1321년(충숙왕 8) 1월에 충선왕이 원 황제의 명령으로 토번(吐蕃)으로 귀양가게 되자, 충숙왕이 찬성사 권한공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동년 2월에 찬성오잠과 대언 김천보(代言金千寶)를 시켜서 권한공을 정동행성 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에서 문초하였는데, 권한공은 변소 구멍으로 빠져서 도망치다가 체포되어 다시 옥에 갇히었다. 권한공의 가산은 몰수되었다. 그리고 동년 4월에 삼사사 김순(三司使金恂) 등에게 명령하여 권한공 등에게 장형(杖刑)을 가하고 먼 섬으로 귀양보내게 하였는데, 임해군 이진(臨海君李진, 李齊賢의 父)이 교외까지 전송나왔다. 그 때에 권한공이 말하기를, "천하가 넓으나 내 몸 하나 둘 곳이 없다."라고 하니, 이진이 대답하기를, "변소 구멍이 좋소"라고 하였으므로 권한공이 크게 부끄러워 하였다. 권한공 채홍철(蔡洪哲) 등은 섬으로 들어가지 않고, 모두 홍주(洪州) 지경에 모여 있었다. 동년 8월에 채홍철의 아들인 전 정윤 채하중(前正尹蔡河中)이 원 나라 사신 김가노(金家奴)와 동행하여 와서 이르기를, "원 황제의 명령으로 권한공, 채홍철을 은사(恩赦)하여 원 나라로 소환했다."라고 하고, 또, "원 황제가 심왕 (瀋王) 고를 국왕으로 삼았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날 저녁에 호군 이련(護軍 李漣)이 원 나라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왕(충숙왕)이 아무 탈도 없다."라고 하니, 재추(宰樞)들이 비로소 채하중이 속인 것을 알았다. 1322년(충숙왕 9) 8월에 그러나 권한공, 채홍철 등은 옛날 자기들에게 장형(杖刑)을 가하고 귀양보냈던 충숙왕을 원망하고 여흥군 민지(驪興君閔漬)와 영양군 이호(永陽君李瑚) 등을 끌어내서 심왕 고(忠宣王의 姪)를 왕으로 내세울 것을 원 나라 황제에게 청원하려고 백관들을 자운사(慈雲寺)에 모이게 한 후 글을 원(元)의 중서성(中書省)에 제출하게 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황제의 후한 혜택을 받고 백성들이 그 본업에 안치하여 살아왔는데, 간신이 왕의 곁에 있으면서 나라에 해독을 끼쳐서 무고한 백성들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 평소에 듣건대 심왕 고는 품성이 인자하여 그를 마치 목마른 사람이 샘물을 기다리듯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도 역시 충선왕의 적손(嫡孫)이다. 전자에 백원함, 박효수(朴孝修) 등이 왕을 따라서 귀국 서울에 가서 체류하면서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귀국(貴國)에 글을 제출하여 왕의 조속한 귀국을 청원케 한 일이 있다. 이 때 배신(陪臣)들이 몇 달 동안 회의를 했으나, 일이 되지 않으니 대언 경사만(代言慶斯萬), 호군 김인윤(護軍金仁윤) 등이 왕의 명령이라고 독촉하였으므로 부득이 서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경사만이 이것을 가만히 김지경(金之鏡) 등에게 넘겨주어서 귀성(貴省)에 제출했는데 이것을 도당(都堂)을 모독 농락한 것인즉 상세히 밝혀주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권한공 등이 백관들을 다시 자운사 (慈雲寺)에 소집하고 중서성(中書省)에 제출할 글에 서명하기를 독촉하였던 바 절반도 서명하지 못하여서 갑자기 하늘에서 우박이 크게 쏟아졌다.
이때 감찰 집의 윤의좌(執義尹宣佐)가 말하기를, "나는 우리 임금의 잘못을 모른다. 신하로서 임금을 고소한다는 것은 개돼지만도 못한 짓이다."라고 하면서 침을 뱉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에 대간 사한(臺諫史翰)들과 찬성사 민종유(贊成事閔宗儒), 언양군 김륜(彦陽君 金倫) 등이 모두 서명하지 않았다. 권한공과 채하중(蔡河中) 등은 심왕의 명령으로 경사만, 김인윤, 김지경을 순군(巡軍)에 가두었다. 동년 9월에 권한공 등이 또다시 백관을 소집하고 서명하였던바 별안간 뇌성이 진동하며 크기가 자두나 매실 만큼씩한 우박이 내렸는데, 그 네모난 형태는 질려(질黎)와 흡사하였다. 권한공 등은 민부 의랑 조식(民部議郞趙湜)을 시켜 그 글을 가지고 원 나라로 가서 중서성(中書省)에 제출케 하였으나 받지 않아 접수시키지 못하였고, 또 한림원(翰林院)에 제출하였으나 역시 받지 않았다.
1338년(충숙왕 복위 7) 7월에 원 나라의 실리미(失里迷)가 성에 들어와서 왕이 조서를 맞이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문책하니, 정승(政丞) 권한공 등이, "왕이 병환이 있다."라고 답변하였다. 권한공은 평소에 충선왕이 소중히 여기던 신하이어서 충선왕이 토번에 있을 때 권한공에게 지어보낸 시(詩)에 이르기를, "독기(毒氣)로 가득 찬 못 살 곳이란 옛부터 들은 바이나/ 연경(燕京)을 떠나 몇 만리를 걸어 왔던고/ 길손의 가진 고초 꿈결같이 겪고 나니/ 그대 생각 슬픈 회포 어찌다 참을손가/"라고 하였다. 1343년(忠惠王 復位 4) 12월에 왕이 원 나라로 잡혀가자 재상과 기로(耆老)들이 민천사(旻天寺)에 모여서 왕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청원할 의론을 했다. 그 때에 권한공이 말하기를, "옛날 은(殷) 나라의 태갑(太甲)이 덕행이 없었으므로 이윤(伊尹)이 제동(諸洞)에 3년 간 추방하여 두어서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 연후에 임금 자리에 다시 앉히었다. 또 어떤 나라가 요충의 위치에 있으면서 입조(入朝)하는 제후(諸侯)와 천자(天子)의 사신을 살해하였으므로 천자가 사람을 보내서 그 나라 임금을 죽였다. 또 어떤 나라의 신하가 타국으로 사신이 되어갔다가 돌아와 보니 천자의 사신이 와서 그 임금의 머리를 베어갔으므로, 그 신하가 시체있는 곳에 가서 제사를 차리고 통곡하였더니, 그 자 마져 죽이게 하였다. 이제 왕이 무도(無道)해서 천자가 죽이려 하는데, 어찌 구원할 도리가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충혜왕의 사면 운동에 반대하였다. 권한공은 벼슬이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렀고,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이 되었고, 원 나라 벼슬로 태자 좌찬선(太子左贊善)도 받았다. 충정왕 원년(元年)에 죽었는데, 맏아들 화원군 권중달(花原君權仲達)과 둘째 아들 영의정 권중화(領議政權仲和)와 맏사위 곡성부원군 염제신(曲城府院君廉悌臣), 대언 유총(代言柳總)이 있다. 그는 문장으로 한 때를 울렸고, 시률(詩律)을 많이 읊었는데,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실려 있다. 저서로는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1398년(태조 7) 2월 4일 왕이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고려의 충숙왕이 거사(居士)라고 일컬어 예천군 권한공(醴泉君權漢功)에게 글을 보내었다."라고 하였다.
[權漢功의 詩] : 1) 권한공이 안동 노산(盧山)에 있는 백련사(白蓮寺)에 시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여산사 침벽루(廬山寺枕碧樓)/ 10년 동안 글 읽던 곳을/ 포의(布衣)로 이제 두 번째로 놀러 왔네/ 긴 소나무는 옛 길에 그늘을 지우고/ 어지러운 돌들은 차가운 냇물에 씻기우며 있다/ 흰 날(白日)도 산촌에는 더디구나/ 푸른 봄이건만 동부(洞府)는 그윽하기만 하네/ 어느 때나 천병 만마(千兵萬馬)를 거느리고/ 한 번 웃으며 강 가의 누에 오를 것인가."이다. 2) 기정사공(寄鄭司空)/ 미인이 저 구름 끝에 격해 있는데/ 산 높고 물 깊으니 발섭(跋涉, 이리저리 돌아다님)이 어려우니/ 좇아가려 하나 그 간에 세월은 변할 것이고/ 먼 공중 바라보니 나는 새만 빨라라/ 누가 알랴, 머리 긁적거리며 말 없는 사이에 해는 저물고/ 가을 바람이 우수수 누른 잎 몰 아침을/ 3) 고소대 차운(姑蘇臺次韻)/ 월(越) 나라에 사람 있어 패업(覇業)을 경영할 때/ 오병(吳兵)이 강하지만 어디에 쓰랴/ 임금이 창(枕戈)을 베고 소원이 이룩되니/ 하늘이 도와서 이 날이 있었다고/ 공을 논하면 반드시 서자(西子)에게 상(賞)이 많겠고/ 오자서(伍子胥)가 강 위에서 속절없이 파도만 치누나/ 고소대(姑蘇臺)의 지난 일 슬퍼한들 어찌할꼬/ 4) 부벽루 차운(浮碧樓次韻)/ 영명사(永明寺) 장경사(長慶寺) 중의 손 이끌고/ 대동강 중류(大同江中流)에 쪽배 저으니/ 완연히 홍진(紅塵)이 이르지 않는 곳에 온 듯/ 다시 창랑(滄浪) 막바지를 더듬으려는데/ 옛적의 현인 달사(賢人達士) 남은 이 누구인고/ 나 취해서 졸리니 그대 또한 쉴지어다/ 월암(月岩)부터 이남은 천하에 드물다/ 조천석(朝天石) 늙어 인우(烟雨)가 시름하니/ 5) 정면재(鄭勉齋) 석상에서 붓을 들어 빨리 지으며/ 성동 풍경(城東風景) 6월 하늘에/ 경치가 그림처럼 눈 앞에 펼쳐 있다./ 술 한 잔 한 잔도 연분이었거니/ 학과 돈을 계교하지 말아라/ 손님은 옥같은 사람이요/ 술은 솟는 샘(泉)이라/ 좌중(座中) 어느 누가 주선(酒仙) 아니리/ 옛적의 호걸도 구름 연기처럼 사라졌다./ 알 수 없다. 오늘밤은 이 어찌된 세월이냐/ 6) 제 공북루(題拱北樓)/ 공북루를 새로 세우니/ 경신(庚申, 1320) 시월 초이네/ 시(詩)는 권 찬선(權贊善, 權漢功)으로부터요/ 공은 윤 상서(尹尙書)에게서 비롯하였네/ 옛 길에는 단풍나무가 우거지고/ 맑은 못에는 파란 하늘이 거꾸러졌네/ 머뭇거리며 높아 해는 저물어 오니/ 산빛이 정녕 내 시름을 자아내네/ 7) 감로사(甘露寺, 現江蘇省 鎭江縣 北固山 위에 있는 절, 三國 吳 때 創建) 다경루(多景樓)/ 북고산(北固山)에 올라 윤주(閏州)를 바라보니/ 한 병 술로 고금의 시름 씻기 어렵네/ 물결이 내달으니 강은 아직 성난 듯/ 나라가 망했으니 산은 지금도 부끄러워하누나/ 회해(淮海)의 풍연(風煙)은 옛 성터에 이었고/ 금초사(金焦寺)의 종소리는 높은 다락에 들려오네/ 지난 날의 흥망을 뉘더러 물어볼꼬/ 모래의 갈매기들만 배 가까이 오는구나/ 8) 성거산 원통사(聖居山元通寺)/ 우뚝 솟은 보전(寶殿) 봉(鳳)이 날려는 듯/ 가장 잊기 어려운데 서쪽 행랑일네/ 새벽 전에 벌써 동쪽 해가 보이고/ 갠 날에도 먼저 북령(北嶺)이 어두어지네/ 길이 험하니 또 어이 돌층계를 오를까/ 샘이 다니(甘) 솔 뿌리 마시기 더 좋구나/ 산신령이 내 떠남을 만류하는 듯/ 안개랑 놀을 일으켜 동문(洞門)을 꽉 막누나/ 9) 영국공제 분매(瀛國公第盆梅)/ 옥이 여위고 구슬이 파리하여 기상이 쓸쓸할수록/ 티끌을 벗어난 신선의 뼈가 더욱 가냘프구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봄바람의 얼굴이 아니라/ 명비(明妃)가 만리 눈 속으로 가는 듯/ 10) 여 원조빙자 진대제(與元朝馮子振待制)/ 옥나무(樹) 맑은 바람 구천(九天)에 가득한데/ 자황(紫皇)의 향안(香案) 앞에 한 사람 유선(儒仙)이네/ 태평 세상의 문물이 다시 일어난 뒤에/ 능연각(凌煙閣)에 그려지니 아직 소년이었다./
11) 재도하(在都下)/ 기러기 북으로 올 때에 편지 전하지 않으니/ 기러기 남으로 날으는 날은 나를 더욱 시름하게 한다/ 내 고향은 바로 삼천리를 격하여 있나니/ 수초(水草) 따라 해마다 일정한 거처가 없네/ 12) 비파행(琵琶行)/ 공주는 오손(烏孫)에게 만리 길을 떠났고/ 강주 사마(江州司馬)는 천 줄기 눈물을 흘리었다/ 뒷사람이 어떻게 그 비파 줄 속의 뜻을 알건가/ 맑은 밤은 깊어 가는데, 달은 행랑(行廊)에 구른다/ 13) 황경계축 주감 득사서 우대동강 헌창(皇慶癸丑酒감得四書于大同江軒窓)/ 겨울 가의 푸른 나무는 봄그늘이 엷은데/ 강 위의 푸른 산은 저문 빛이 많구나/ 그 사람은 완연히 물 가운데 있는 듯 원근이 아득하나니/ 해질 녘 어디에서 죽지가(竹枝歌)를 부르는가/ 14) 영명루(永明樓)/ 흰 갈매기 뜬 푸른 물결 위에는 부슬부슬 비 내리고/ 누른 송아지 노는 언덕 남쪽에는 점점이 산이로다/ 흥(興)이 나면 곧 와서 고삐 돌리기 잊었노니/ 다른 이의 늘 한가함이 어찌 나의 잠깐 틈을 탐만 하리/ 15) 송식무외상인 승주 여 상국(送式無外上人乘舟如上國)/ 넓은 바다 서쪽의 하늘 한 끝에/ 조각돛 높이 달고 어디로 가려는가/ 스승님과 서로 안 것이 부질없어라/ 봄바람에 송별시를 또 짓게 되었구나/ 16) 연등회(燃燈會) 밤의 ''''문기장자시(文機障子詩)''''에서 어시(御詩)에 대한 응제(應製)/ 남산이 은(銀) 술동이에 상서로운 술을 빚어내니/ 북두(北斗)가 자루를 돌려 옥 술잔에 따르네/ 여기저기 울리는 갈고(갈鼓) 소리에 봄 기운 호탕한데/ 수많은 나무에 걸린 봉등(鳳燈)은 낮게 뜬 달 모습이네/(역翁稗說 後集二, 高麗史 125卷 列傳 第28 權漢功傳, 高麗史節要 21卷 23卷 24卷 25卷 26卷, 新增東國輿地勝覽 1530, 東文選 7卷 10卷 16卷 21卷, 大東韻府群玉, 襄陽誌 1661, 醴泉郡邑誌 1770 1780 1786 1841 1895, 醴泉郡誌 1939, 韓國史 中世篇 637쪽, 韓國人의 族譜, 安東文化硏究 2輯 1986, 原色世界大百科事典 5卷 251쪽)
권한공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다. [高麗史節要 1343年 12月] 언양군(彦陽君) 김륜(金倫) 은 집에 있다가 왕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창졸 간에 달려갔으나 보지 못하였다. 곧 조정에 진정하자고 채하중에게 말하여, 재상과 국가의 원로들을 민천사(旻天寺)에 모으고 글을 올려 왕의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청할 것을 의논하니, 예천군(醴泉君) 권한공이 말하기를, "옛날 은 나라의 태갑(太甲)이 덕(德)을 밝히지 못하여, 이윤(伊尹)이 태갑을 3년 동안 동(桐 : 땅이름)에 추방하였다가, 뒤에 마음을 바로잡고 행실을 고치므로 왕의 자리에 복위시켰다. 또한 어떤 나라가 교통의 요충이 되는 땅에 끼어 있었는데, 조회하러 들어오는 제후와 천자의 사신을 죽이니, 천자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죽였고, 또 어떤 나라의 신하가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돌아와 보니 천자의 사신이 와서 그 왕의 머리를 베어 가므로, 그 신하가 시체 놓인 곳에 나아가 제사를 차리고 곡을 하였더니, 역시 영을 내려 그를 죽였었다. 이제 왕이 무도하여 천자가 주벌한 것인데, 어떻게 구원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이제현의 益齋集 역翁稗說 後集二] :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 일재(一齋) 권한공은, "남산이 은(銀) 술동이에 상서로운 술을 빚어내니/ 북두(北斗)가 자루를 돌려 옥(玉) 술잔에 따르네/ 여기저기 울리는 갈고(갈鼓) 소리에 봄 기운 호탕한데/ 수 많은 나무에 걸린 봉등(鳳燈)은 낮게 뜬 달 모습이네//"라고 하였고, 평리(評理) 백원항(白元恒)은, "밝은 달이 연회하는 곳을 환히 비추니/ 봄 밤에 금수강산이 열렸구나"하였으나, 스스로 권한공의 시를 따르려면 아직 멀었다고 하였다.
권한공 [記錄] : 拱北樓在州北三里縣監 李裕身記樓創於勝國李葉而牧?諸公之作載於方與記?今五百年之久滄桑?火?變不常而樓之屈伸興廢隨焉李公暹之重修又在七十已往敗瓦殘礎今無存者徘徊咨嗟之餘略捐財力仍舊址而重建若干楹取牧?諸公作刻諸壁上以存古跡云爾其後牧使 李秀得又重修 高麗 白文寶應製詩序歲在辛丑宮駕遷自福而尙行駐淸州壬寅秋九月十九日上率群臣拜賀正表于郊國御州之拱北樓覽一齊權漢功舊題五言句卽命知申事 元松壽代言李穡 成士達次韻製進於是左政承 洪陽坡 李杏村 黃檜山?諸大夫儒生皆 <상권0217-2> 和進文寶時適承命如京歆聞引頸自以不獲覩盛事爲恨及是承召竊嘗追和續尾亦以爲幸而州伯 金君成甲以柳思庵之言屬之曰命製詩成而將鏤板不可無序文寶辭以無文而幸其傳不朽遂操筆而拜稽首曰昔者君臣?歌固是昇平製作而去年奔亂以還豈謂有今日勝事於?吾王事天敬命之誠與名拱北而可表者不在斯樓歟其詩曰拱北名雖舊吾王敬命初?埃今已掃雲物正當書宸極瞻依遠川原向背虛斯民知所感責在一人予 權漢功詩拱北樓新?庚申十月初詩從權贊善功自尹尙書古道依紅樹淸池倒碧虛留連日將暮山色正愁予 辛藏詩井邑山川好居民尙大初坐賓前內翰牧伯舊中書松?千峯秀桑麻四野虛倚欄吟未已林鳥苦?予 元松壽詩絶景登樓處淸辰應製初喜承今日寵慙繼古人書路豁南來直山遙北?虛醴泉行樂好榮幸莫如予 李穡詩?輿淸曉動文物太平初樓逈膽天近詩成奉勅書山光生悅?秋氣集沖虛他日南巡紀含香亦有予 成士達時歲籌將盡際天氣稍寒初扈輦登華構濡?和舊書 <상권0217-3> 秋深蓮?謝風勁樹陰虛軒蓋榮光裏躊躇尙?予 洪彦博詩鳳輦東還日金風木落初江山留我住詩句借人書路直朝南遠樓高拱北虛老來常侍從壁上莫忘予 李巖詩古郡高樓逈誰知結構初秋深萬山樹景入數行書遠岫供西望靑雲補北虛登臨參侍從光寵自慙予 李齊賢詩省方南國日拜表北樓初浩蕩尊前興縱橫筆下書風高雁遵渚雲淨鶴沖虛老矣今多病?恩負倡予 黃石奇詩郡樓雖曰好駐駕也應初無限池中景何能壁上書登臨喜廣蕩俯仰實淸虛多謝醴泉相留詩使起予 柳淑詩北樓陪賞日東國中興初勝事將傳示新詩强自書旌?森滿路袞?逈臨虛此地雖云樂松山苦?予 金漢龍詩江山新霽後雲物九秋初束帶陪天仗分街拜國書登臨聊發興?惚若憑虛欲繼仲宣賦傍人莫笑予 禹吉生詩扈從登樓日凄凉雨霽初君王來送表冠賊聘降書景晏山如?秋深水似虛南州雖信美?望轉傷予 李崗詩扈從南巡日登樓縱自初山川渾似?景物亦堪書霜落長天靜烟消大野虛端知千載下應製必嗤予 廉興 <상권0217-4> 邦詩起樓知幾日金碧炯如初掩暎森仙伏林?古板書淸秋方省斂白日欲凌虛盛事眞堪頌?詩況屬予 田祿生詩一人登眺日萬物喜瞻初美景誰能賦荒詞不用書面南顔甚邇拱北意無虛寓目山河秀雲烟亦嬪予崔龍詩遊豫南巡後登臨四望初當軒瞻玉色掃壁?塵書遠岫晴相簇方池澹若虛物華雖可賞題詠豈□予 權鑄詩繞樓?日月始覺立名初增損誰能巧形容自愧書觀魚池?綠乘鶴路玄虛欲和一齋韻淸風忽惶予 朴仲美詩樓價增三倍吾王止輦初雲烟繞態度風景入圖書野廣眉峯列林疏眼界虛詞臣爭嘯詠樗散却嗟予 金君鼎詩南山浮瑞氣淸?駐樓初聖德其堪頌奇觀合特書秋風吹老樹雲影渡溪虛他日重回?江山亦識予 華之元詩一樓風景勝千乘儼臨初更?南巡?遙傳北上書美談騰里巷和氣滿空虛記取雲?望奚?爲獨後予 禹玄寶詩此樓幾登陟臨幸古無初已用詩爲記何須史亦書斷城當檻豁疏柳??虛近侍參非分?攀且許予 李?詩登樓閱景日向闕拜箋初勅下令臣賦詩成對御書嶺 <상권0218-1> 雲租往返溪月幾?虛顯廟此恢復地靈還慰予 韓昉詩樓拱西原北丹靑炳若初暫停新警?復見舊車書樹老千章古?高四望虛品題難繼列險韻莫過予 曹係芳詩玆樓常亦好況値輦回初閱景誰能讓?詩久未書斜陽明遠嶠流水割淸虛說向漁樵子閑曹?與子 許銓詩駐輦西原後登樓拜表初爲題今日事更閱去年書遠水連天靜疏林傍岸虛豈圖歌聖德緣幸及於予 田得良詩旌?南巡後簪裳再造初拜箋遵禮義頌德獻詩書滿目奇觀秀回頭往來虛不才?繼韻群彦莫嗔予 李邦直詩大駕巡臨日三韓復古初和詩因有勅操筆立爭書俯水堪爲鑑憑欄況若虛功臣十世後餘慶自于予 韓尙質詩奉使還鄕日朝鮮開國初君王迎聖旨父老賀簽書鍾鼓喧周道旌旗蔽太虛由來稱?錦榮幸孰知予望仙樓在客館東舊名聚景至正辛丑高麗恭愍王避紅賊自安東移駐此州數月及賊平放文科及監試榜後人書其榜揭于樓樓壞久天順辛巳牧使 李伯常重新韓明澮改扁曰望仙(여지도서 忠淸道 淸州 樓亭)
권한공 [記事] : 한국문집총간(003_537a) 목은고(牧隱藁, 1626)에 실린 목은 이색(李穡)의 기사로, 그 내용은, “牧隱詩稿卷之三/ 詩/ 崖頭驛。有醴泉權政丞詩。其一聯云。野闊民居樹。天低馬入雲。其形容遼野。無復遺恨。穡曰。此是遼野十字傳神。與工部地偏江動蜀。天闊樹浮秦。語意絶相類。宜其拜贊善東宮之命也。高麗人與於是選。古所未聞。穡。公之孫壻也。僥倖登科。直拜翰林供奉。此雖穡之家風。然於權氏之門。豈無光耀。九原可作。公必慶我以傑作無疑也。遂用其十字爲韻。吟成 十首。一以詠遼野。一以贊醴泉。/ 天地自爐?。山川誰陶冶。忽然闊無涯。日月出于野。風微雲影移。雨過川光活。小立觀吾心。未知誰讓闊。天下日多故。桃源猶避秦。誰知白帽客。已作遼東民。北瞻混同江。南對醫無閭。索莫犬羊窟。那知君子居。草色接遙天。川光浮輕霧。欲求君子居。回首瞻佳樹。?看朝出日。又望昏起煙。渺渺醴泉路。山連東海天。物性鵬將?。人材鶴與?。醴泉豪氣甚。餘子盡頭低。身初起海隅。名已滿天下。鴻鵠商嶺來。庭趨有洗馬。海闊隔齊魯。天遙拱遼?。臨川筆有光。梁上飛塵入。胸次芥夢澤。中華播淸芬。牧童十絶句。永示公來雲。”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한국문집총간(227_464a) 대산집(大山集, 1802)에 실린 대산 이상정(李象靖)의 기사로, 그 내용은, “東溪權公行狀/ ...諱幸。事麗祖有功。賜姓權氏。累世至諱漢功。位都僉議右議政。醴泉府院君。諡文坦。寔生諱仲達。仕中朝位開府。...”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고전국역총서(1968 刊)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실린 김종서(金宗瑞)의 기사로, 그 내용은, “신사2년(1341),/ ...를 완산군(完山君)으로 봉하였다. ○ 3월에 왕이 예천군(醴泉君) 권한공(權漢功)의 둘째 아내[二室...”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고전국역총서(1968 刊)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실린 김종서(金宗瑞)의 기사로, 그 내용은, “계미4년(1343),/ ... 원로들을 민천사(旻天寺)에 모으고 글을 올려 왕의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청할 것을 의논하니, 예천...”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고전국역총서(1968 刊)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실린 김종서(金宗瑞)의 기사로, 그 내용은, “기축원년(1349),/ ...원 나라에 보내어 습위시켜 준 것을 사례하게 하였다. ○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 권한공(權漢功)이 ...”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고전국역총서(1968 刊)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목은 이색(李穡)의 기사로, 그 내용은, "고려국 충성 수의 동덕 논도 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부원군 증시 충경공 염공신도비 (高麗國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曲城府院君贈諡忠敬公廉公神道碑)/ ...氏)는 원조(元朝)의 조열대부 태자좌찬선 추성동덕 협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예천부원군 영예문관사(朝..."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7 刊)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실린 안정복(安鼎福)의 기사로, 그 내용은, “계미년 충혜왕 후 4년(원 순제 지정 3, 1343)/ ...왕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청할 것을 의논하였다. 예천군(醴川君) 권한공(權漢功)이 말하기를, ꡒ이...”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7 刊)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실린 안정복(安鼎福)의 기사로, 그 내용은, “기축년 충정왕(忠定王)원년 (원 순제 지정 9, 1349)/ ... 외척인 여러 윤씨(尹氏)가 권세를 부렸다. 9월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 권한공(權漢功)이 죽었다...”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0 刊) 익재집(益齋集)에 실린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기사로, 그 내용은, “역옹패설 후집 2(?翁稗說 後集二)/... / 一熟千年海果來 한 시는 왕기공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선두를 다툴 만하다. 예천부원군(醴泉... ”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한국문집총간총목차 003집 목은고(牧隱稿 Ⅰ)에 실린 목은 이색(李穡)의 예천부원군 권한공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36 途中 537 遼陽省 537 途中 537 崖頭驛 有醴泉權政丞詩 其一聯云 野闊民居樹 天...”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안동시사 5/ 간행년 : 1999/ 저자 : 안동시/ 발행처 : 안동시청/ 【安東 權氏】/ 권한공(權漢功):?~1349(충정왕 1, 기축). 본관 安東. 호는 一齋. 守洪의 손자. 僉議平理 正+頁의 子. 충렬왕시 문과 급제. 三司使․찬성사 역임. 충선왕 양위후 원나라에 가서 萬卷堂에서 이제현과 독서하며 文名을 떨침. 瀋陽王 暠를 옹립하고 충숙왕을 폐위시키려다 실패함. 벼슬은 都僉議政丞에 이르렀고 醴泉府院君에 봉해짐. 일찍이 원나라의 명을 받아 太子左贊善이 됨. 시호:文坦. 저서:『一齋集』. ▣참고:『高麗史』 □집필:이원걸(www.koreastudy.or.kr 2007)
권한공 [記事] : 안동인물초색인/ 간행년 : 2000/ 저자 : 권오신 외/ 발행처 : 안동문화원/ 권한공(權漢功) : ? ~ 1349(충정왕 1, 기축), 고려 말기의 문신(文臣). 본관 안동(安東). 호는 일재(一齋). 시호는 문탄(文坦). 첨의평리(僉議評理) 책(?)의 자. 충렬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직사관(直史館)을 지내고, 1294년(충렬왕 20)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후에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거주하였으며, 충선왕을 따라 귀국 밀직부사(密直副使)?첨의평리(僉議評理)를 역임. 충숙왕(忠肅王) 초 삼사사(三司使)?찬성사(贊成事)를 지냈으며, 충선왕 양위 후 원나라에 가서 만권당(萬卷堂)에서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독서하며 문명(文名)을 떨쳤다. 후에 충숙왕에 의하여 구금, 장류(杖流)되었으나 원제(元帝)의 명으로 풀려나와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옹립하고, 충숙왕을 폐위시키려고 획책하였으나 원나라의 거부로 실패하였다.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고,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집에 『일재일고(一齋逸稿)』가 있다. 예천(醴泉) 유천(柳川)에서 살았다. ◎참고문헌 : 高麗史?醴泉郡誌?安東權氏譜(www.koreastudy.or.kr 2007)
권한공 [記事] : 안동시사 5/ 간행년 : 1999/ 저자 : 안동시/ 발행처 : 안동시청/【安東 權氏】/ 권한공(權漢功):?~1349(충정왕 1, 기축). 본관 安東. 호는 一齋. 守洪의 손자. 僉議平理 正+頁의 子. 충렬왕시 문과 급제. 三司使․찬성사 역임. 충선왕 양위후 원나라에 가서 萬卷堂에서 이제현과 독서하며 文名을 떨침. 瀋陽王 暠를 옹립하고 충숙왕을 폐위시키려다 실패함. 벼슬은 都僉議政丞에 이르렀고 醴泉府院君에 봉해짐. 일찍이 원나라의 명을 받아 太子左贊善이 됨. 시호:文坦. 저서:『一齋集』. ▣참고:『高麗史』 □집필:이원걸(www.koreastudy.or.kr 2007)
권한공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주석번호/제목 [註257] 其弟暠 …… 於朝故也 / 暠는 고려의 왕족으로 延安君에 봉해졌으며, 1313年(忠宣王 5) 고려왕과 심양왕의 두 왕위를 가지고 있던 忠宣王이 元나라에 머물며 고려왕위를 忠肅王에게 넘긴 뒤 暠는 심양왕의 세자가 되었고, 禿魯花로 元나라에 머물다가 1316年(忠肅王 3) 심양왕에 봉해졌다. 원나라 梁王의 사위가 된 뒤에 더욱 忠宣王의 애호를 받게 되자 고려의 왕위를 빼앗을 계획을 품게 되었고, 政丞 曺?․蔡河中 등이 좌우에서 떠받들고 왕위의 찬탈을 꾀하여 갖가지로 忠肅王을 무고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元帝로 하여금 國王의 玉璽를 빼앗게 하고, 權漢功 등으로 元나라 中書省에 상소하여 忠肅王을 폐할 것을 청하게 했다. 1339年(忠肅王 復位 8) 忠肅王이 죽자 曹? 등이 暠를 고려왕위에 앉히려고 亂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왕위는 忠惠王에게 돌아갔다 1344年(忠惠王 復位 5) 귀국하여 이듬해 죽었다. 瀋王 暠와 忠宣王 사이는 명백히 父子관계가 아니고 忠宣王에게 조카가 된다.(www.history.go.kr 2009)
권한공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忠淸道 / 淸州 / 樓亭 / 拱北樓 在州北三里縣監 李裕身記樓創於勝國李葉而牧?諸公之作載於方與記?今五百年之久滄桑?火?變不常而樓之屈伸興廢隨焉李公暹之重修又在七十已往敗瓦殘礎今無存者徘徊咨嗟之餘略捐財力仍舊址而重建若干楹取牧?諸公作刻諸壁上以存古跡云爾其後牧使 李秀得又重修 高麗 白文寶應製詩序歲在辛丑宮駕遷自福而尙行駐淸州壬寅秋九月十九日上率群臣拜賀正表于郊國御州之拱北樓覽一齊權漢功舊題五言句卽命知申事 元松壽代言李穡 成士達次韻製進於是左政承 洪陽坡 李杏村 黃檜山?諸大夫儒生皆...(www.history.go.kr 2009)
권한공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江原道 / 江陵 / 樓亭 / 雲錦樓 在客館東徐居正記趙云?詩成石?詩朴始亭記成俔詩俱載勝覽舊誌而此樓頹?已久只有遺址 倚雲樓 在客館南六間 勵節堂 在客館西北府人祀趙云?於此俗號生祀堂今? 寒松亭 在府東十五里東臨大海蒼松鬱然亭畔有?井?石白卽述郞仙徒所遊處樂府有寒松亭曲書於瑟底漂至江南人未解其詞高麗光宗朝國人張晉山奉使江南江南問之晉山作詩解之曰月白寒松夜波安鏡浦秋哀鳴來又去有信一沙? 安軸詩四仙曾會此客似孟嘗門珠履雲無迹蒼官火不存壽眞思翠密懷古立黃昏唯有煎茶井依/ <상권0591-3>/ 然在石根 李仁老詩千古仙遊遠蒼蒼獨有松但餘泉底月彷彿想形容 金克己詩孤亭枕海學蓬菜境?不許栖片埈滿徑白沙步步雪松聲淸?搖瑗現云是四仙縱賞地至今遺迹眞奇哉酒臺?頹沒碧單茶?冷落荒蒼苔雙片野棠空??向誰凋謝向誰開我今深歷放幽興終日爛傾三雅盃坐知機盡已忘物?鳥傍人飛下來 權漢功詩地古人烟遠寒潮吼海門千株松已倒兩眼井猶存鳥去汀沙靜鴉盤山月昏欲歸還復駐乍立白雲根 李穀詩意?尋勝景早出古城門仙去松亭在山藏石?存人情有今古物像自朝昏不是曾來此聞言謂不根 本朝李茂芳詩亭依松麓斷東望海無門境靜仙?在沙明鳥篆存碑心苔暈綠石面兩痕昏一?泉無渴源乎天地根 柳李聞詩古仙浪遊處爭慕客塡門鍊藥人何去奠??猶存壺中閑日月世上卽展昏回首尋遺迹惟松自?根 鏡浦臺 十一間在府東北十五里浦之周二十里水?如鏡不深不淺?沒人肩貴四面中央如一西岸有峯峯上有臺臺呼有鍊藥石臼浦之東口有板橋曰江門...(www.history.go.kr 2009)
권한공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補遺篇(京兆, 松都, 水原) / 松都舊誌序 / 松都誌卷之三 / 元通寺 在北聖庵南 權漢功詩 寶殿臨風鳳欲?最難忘處是西軒未晨已得東方白不雨先占北嶺昏路險更愁攀石?泉甘猶喜汲松根地靈似有留人意故起烟霞?洞門(www.history.go.kr 2009)
권한공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安東 / 寺? / 白蓮寺 在盧山有枕碧樓今無○權漢功詩十載讀書處布衣今再遊長松蔭古道亂/ <하권0537-2>/ 石凝寒流白日山村晩靑春洞府幽何時擁千騎一笑上江樓 臨河寺 在府西今無 法林寺 在府南今無 法龍寺 在府西俗稱大寺無僧寮有石佛三軀年久頹廢雍正丙午緇徒重修 淸凉山 在淸凉山○新增周世鵬詩好事行雲捲復舒登臨?遞?蒼虛天風忽送西山雨半濕征衫到佛居 淸凉山寺遍題名詩就烟霞句句生臨去更敎吹玉笛?峯皆帶惜離情 開目寺 在開目山 法興寺 在府東三里○朴孝修詩登臨?似空中在十二峯蠻相背對野雨濃他墨掃?湖淸細弄明粧態遠村紅樹夕陽留高嶠寒松和霧退輦下他年憶此樓一背南夢何嫌再今無 新增西嶽寺 在府西五里○林?詩名區何待遠?攀聊借公餘半日閑萬折朝宗西去水千重蟠踞北來山荒原石佛知誰創遺像關王寄北間盛事東征留片碣卽今天地帶愁顔 玄沙寺 在府東二十里臥龍山○李贊詩爲報玄沙諸釋子十年勤苦可鐫神他時伏節匡山路應道金門?一人○具鳳齡詩謫仙當日留詩句風雨空...(www.history.go.kr 2009)
권한공 [記事] : 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2월 4일(신사) 2번째 기사/ 임금이 봉화백 정도전에게 글을 보내며 송헌 거사로 자신의 호를 정하다/ 임금이 송헌 거사(松軒居士)로 호(號)를 하였다. 임금이 좌승지(左承旨) 이문화(李文和)에게 이르기를, ꡒ내가 들으니 전조(前朝)의 충숙왕(忠肅王)이 거사(居士)라고 일컬어 예천군(醴川君) 권한공(權漢功)에게 글을 보내었다. 나도 또한 봉화백(奉化伯)에게 거사(居士)라고 일컬어 글을 보내려고 하는데, 무엇으로 호(號)를 할까?ꡓ하니, 문화가 대답하였다. ꡒ상감의 잠룡(潛龍) 때의 헌호(軒號) 646) 가 어떠합니까?ꡓ 임금이, ꡒ좋다ꡓ하고, 드디어 송헌(松軒)으로 호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13권 4장 B면/ 【영인본】 1책 116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역사-전사(前史)/ [註 646]헌호(軒號) : 남의 당호(堂號)의 존칭. ☞(www.history.go.kr 2009)
권한공 [記事] :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11월 23일(정묘) 1번째 기사/ 영의정부사로 치사한 권중화의 졸기/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치사(致仕)한 권중화(權仲和)가 죽었다. 중화(仲和)는 안동(安東) 사람인데, 고려(高麗) 정승(政丞) 권한공(權漢功)의 아들이다. 지정(至正) 계사년 을과(乙科) 제2인에 올라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대언(代言)이 되었다가, 지신사(知申事)로 옮기고 전선(銓選)을 맡았는데, 근신(謹愼)하고 주밀(周密)하여 친구(親舊)에게 사(私)를 두지 않으니, 공민왕이 심히 중하게 여기었다. 정당 문학(政堂文學)으로 정사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는데, 문하(門下)에 명사(名士)가 많았다. 염정(恬靜)1365) 자수(自守)1366) 하여 권귀(權貴)에게 아부하지 않아서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태조(太祖)가 즉위한 뒤에 기년(耆年)․숙덕(宿德)으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제수하고 예천백(醴泉伯) 을 봉하여, 본관(本官)1367) 으로 그대로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고사(故事)에 정통하므로 무릇 상정(詳定)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가서 물었다. 나이 비록 늙었으나 정력(精力)이 쇠하지 않아서 의약(醫藥)․지리(地理)․복서(卜筮)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고, 더욱이 대전(大篆)1368) 과 팔분(八分)1369) 을 잘 썼다. 평소에 산업(産業)을 다스리지 않고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앉아서 이[蝨]를 잡으며 이야기하였다. 늙어서 다만 말라빠진 말[馬] 한 필이 있었다. 나이 87세에 죽으니 조회(朝會)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중관(中官)을 명하여 조제(弔祭)하였다. 유사(有司)에 명하여 예장(禮葬)하고, 문절(文節)이란 시호(諡號)를 주었다. 중궁(中宮)도 또한 내시(內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아들이 하나이니 권방위(權邦緯) 이다./ 【태백산사고본】 6책 16권 41장 A면/ 【영인본】 1책 464면/ 【분류】 *인물(人物)/ [註 1365]염정(恬靜) :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함. ☞ / [註 1366]자수(自守) : 행실이나 말을 스스로 조심하여 지킴. ☞ / [註 1367]본관(本官) : 판문하부사를 말함. ☞ / [註 1368]대전(大篆) : 한자(漢字) 서체(書體)의 하나.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 태사(太史) 주(?)가 만들었다고 하며, 그 특색은 번잡(繁雜)하고 수식(修飾)을 주로 한 점임. ☞ / [註 1369]팔분(八分) : 예서(隷書) 이분(二分)과 전서(篆書) 팔분(八分)을 섞어서 만든 한자(漢字)의 서체(書體). 한(漢)나라 채옹(蔡邕)이 처음 만들었다고 함. ☞(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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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도체 1위들(육상부·여일반부 배구·남고등부 탁구)...축하합니다.
경북도민체전 2010(道民體典 醴泉郡 選手團 綜合5位 達成 : 陸上과 女子 排球에서 뛰어난 成績 거두어) [記事] :
예천군은 체육웅군이었다! 불과 20일 동안 열악한 조건 아래 연습과 훈련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군부 종합 5위의 성적을 기록했다.
포항에서 열린 ''''제4회 경북도민체전이 2010년 7월 19일 폐막식을 갖고 내년에 울진에서 만날 것을 다짐하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예천군 선수단은 이번 대회에서 종합 5위 입상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최강의 기량을 선보인 육상선수단과 여자 일반부 배구선수단이었다.
육상은 종합우승을 차지했으며 여자 일반부 배구는 2연패를 달성했다. 다음은 종목별 경기결과이다
육상 :종합우승/
배구:2위(여자일반부 배구1위)/
탁구:2위(남자 고등부 1위)/
태권도:5위/ 배터민턴:8위/ 궁도:4위/ 씨름:4위/ 정구:5위/ 골프:9위/ 테니스:6위/
(醴泉인터넷放送 2010-07-19 오후 6: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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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공(權漢功) : ?-1349(충정왕 1), 유천면 성평리 덕달 뒷들(德達後坪) 사람, 호는 일재(一齋), 시호(諡號)는 문단(文坦), 본관은 안동, 첨의평리(僉議評理) 척의 아들,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이다. 충렬왕 때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직사관(直史館) 벼슬에 있었다. 1294년(충렬왕 20) 7월에 왕명으로 원(元) 나라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賀禮)하였다. 그 후 충렬왕과 세자(忠宣王)가 함께 원 나라에 체류했는데, 왕유소 등이 임금의 부자(父子)를 이간하였다. 이 때 그는 충선왕 편을 들었고, 1298년(충렬왕 24) 왕이 양위하여 태상왕(太上王)으로 되고, 충선왕(世子)이 즉위하여 정권이 충선왕에게로 돌아왔을 때, 그는 종신(從臣)으로 충선왕 행저(行邸)에 있으면서 인사권(銓選)을 주관했다. 그리하여 1307년(충렬왕 33)에는 동지밀직사사 김문연(同知密直司事金文衍) 등이 이에 불만을 품기도 하였다. 1308년 7월태상왕인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귀국한 후 왕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 가죽띠를 상으로 받았고, 항시로 궁내에 출입하였고, 무시로 불림을 받았다. 동년 10월에는 왕이 중문(中門)에 방(榜)을 붙여 이르기를, "권한공, 최유(崔濡, 龍宮人) 등 21명외에는 특별히 부르지 않으면 궁중에 들어오지 못한다."라고 할 정도였다. 1309년(충선왕 1) 4월에 밀직 부사(密直副使)로 임명되었다가 동년 9월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지밀직사(知密直事, 1310.4), 밀직사(密直事, 1310.7), 첨의 평리(僉議評理)로 뛰어 올랐다. 1313년(충선왕 5) 1월에 왕이 오랫동안 원(元) 나라에 체류하고 있었으므로 종신(從臣)들은 모두 귀국하고 싶어했으나, 권한공과 최성지(崔誠之)는 함께 인사권(銓注)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본국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이사온(李思溫)과 김심(金深)이 휘정원(徽政院)에 말하여 권한공 등을 옥에 가두었던 바 왕이 노하여 황태후(皇太后)에게 말해서 권한공 등을 석방(1313.5)시키고 이사온(李思溫)과 김심(金深)을 귀양보냈다. 왕은 기뻐하여 권한공을 본국으로 파견해서 그의 아버지 권척과 최성지(崔誠之)의 아버지 최비일(崔毗一), 그리고 여러 재상(宰相)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게 하였다. 1314년(忠肅王 1) 1월 삼사사(三司使)로 전임되었는바 그 때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권한공, 최성지, 박경량(朴景亮) 등은 부왕(父王)을 시종하여 험난의 한 때를 겪었다. 즉 김심과 이사온의 무리가 여러 해를 두고 쌓고 쌓은 음흉한 모략이 나라와 주상(主上)에 위해(危害)를 끼쳤으나 세 사람은 함께 진심 진력하여 시종여일(始終如一)하게 왕을 보좌하였다. 해당 부서는 이에 대한 상전(賞典)을 거행하라!"라고 하였다. 동년 6월에 왕명으로 성균관(成均館)에서 새로 구입한 서적을 고열(考閱)하였고, 또 경학(經學)을 시험보였다. 같은 달 원(元) 나라에 가서 원 황제(元皇帝)에게 문안을 드리고, 겸하여 처음으로 과거(科擧)를 거행한 것을 축하하였다. 1315년(충숙왕 2) 7월 원(元) 나라에 가서 황태후에게 존호(尊號) 올린 것을 축하하였다. 그리고 원의 연경 만권당(燕京萬卷堂)에서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독서하며 문명(文名)을 떨쳤다. 또 원 나라에서 3왕에게 추증(追贈)이 있었을 때 권한공이 정윤 홍약과 함께 문건(文件)을 취급하고 있었는데, 그의 공을 논정(論定)하고 녹권(錄券)을 주었다. 벼슬은 찬성사(贊成事)로 되었다.
1317년(충숙왕 4) 11월 권한공이 원 나라에서 돌아와, 원 황제가 충숙왕을 책봉(冊封)하여 개부 의국삼사 부마 고려국왕(開府儀國三司駙馬高麗國王)으로 삼았다고 보고하고는 얼마 후 원 나라로 돌아갔다. 1318년(충숙왕 5) 5월에 원 나라에 머물던 상왕(上王, 충선왕)이 모든 나라 일을 멀리서 명령으로 시행할 때 권한공 등 4,5명이 연경 행저(燕京行邸)에서 호종하면서 인사권을 행사하자, 충숙왕이 불평을 품었다. 1319년(충숙왕 6) 1월에 왕이 찬성사(贊成事) 권한공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축하하게 하였다. 동년 3월 상왕(上王, 忠宣王)이 원 나라 황제의 어향사(御香使)로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 지방으로 여행하여 보타산(寶陀山)까지 갔었는데, 그 때 권한공과 이제현(李齊賢)이 시종하였다. 이 때 상왕은 시종(侍從)한 사람들에게 명하여 산천의 좋은 경치를 기록하여 행록(行錄) 한 권을 만들게 하였다. 1321년(충숙왕 8) 1월에 충선왕이 원 황제의 명령으로 토번(吐蕃)으로 귀양가게 되자, 충숙왕이 찬성사 권한공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동년 2월에 찬성오잠과 대언 김천보(代言金千寶)를 시켜서 권한공을 정동행성 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에서 문초하였는데, 권한공은 변소 구멍으로 빠져서 도망치다가 체포되어 다시 옥에 갇히었다. 권한공의 가산은 몰수되었다. 그리고 동년 4월에 삼사사 김순(三司使金恂) 등에게 명령하여 권한공 등에게 장형(杖刑)을 가하고 먼 섬으로 귀양보내게 하였는데, 임해군 이진(臨海君李진, 李齊賢의 父)이 교외까지 전송나왔다. 그 때에 권한공이 말하기를, "천하가 넓으나 내 몸 하나 둘 곳이 없다."라고 하니, 이진이 대답하기를, "변소 구멍이 좋소"라고 하였으므로 권한공이 크게 부끄러워 하였다. 권한공 채홍철(蔡洪哲) 등은 섬으로 들어가지 않고, 모두 홍주(洪州) 지경에 모여 있었다. 동년 8월에 채홍철의 아들인 전 정윤 채하중(前正尹蔡河中)이 원 나라 사신 김가노(金家奴)와 동행하여 와서 이르기를, "원 황제의 명령으로 권한공, 채홍철을 은사(恩赦)하여 원 나라로 소환했다."라고 하고, 또, "원 황제가 심왕 (瀋王) 고를 국왕으로 삼았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날 저녁에 호군 이련(護軍 李漣)이 원 나라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왕(충숙왕)이 아무 탈도 없다."라고 하니, 재추(宰樞)들이 비로소 채하중이 속인 것을 알았다. 1322년(충숙왕 9) 8월에 그러나 권한공, 채홍철 등은 옛날 자기들에게 장형(杖刑)을 가하고 귀양보냈던 충숙왕을 원망하고 여흥군 민지(驪興君閔漬)와 영양군 이호(永陽君李瑚) 등을 끌어내서 심왕 고(忠宣王의 姪)를 왕으로 내세울 것을 원 나라 황제에게 청원하려고 백관들을 자운사(慈雲寺)에 모이게 한 후 글을 원(元)의 중서성(中書省)에 제출하게 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황제의 후한 혜택을 받고 백성들이 그 본업에 안치하여 살아왔는데, 간신이 왕의 곁에 있으면서 나라에 해독을 끼쳐서 무고한 백성들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 평소에 듣건대 심왕 고는 품성이 인자하여 그를 마치 목마른 사람이 샘물을 기다리듯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도 역시 충선왕의 적손(嫡孫)이다. 전자에 백원함, 박효수(朴孝修) 등이 왕을 따라서 귀국 서울에 가서 체류하면서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귀국(貴國)에 글을 제출하여 왕의 조속한 귀국을 청원케 한 일이 있다. 이 때 배신(陪臣)들이 몇 달 동안 회의를 했으나, 일이 되지 않으니 대언 경사만(代言慶斯萬), 호군 김인윤(護軍金仁윤) 등이 왕의 명령이라고 독촉하였으므로 부득이 서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경사만이 이것을 가만히 김지경(金之鏡) 등에게 넘겨주어서 귀성(貴省)에 제출했는데 이것을 도당(都堂)을 모독 농락한 것인즉 상세히 밝혀주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권한공 등이 백관들을 다시 자운사 (慈雲寺)에 소집하고 중서성(中書省)에 제출할 글에 서명하기를 독촉하였던 바 절반도 서명하지 못하여서 갑자기 하늘에서 우박이 크게 쏟아졌다.
이때 감찰 집의 윤의좌(執義尹宣佐)가 말하기를, "나는 우리 임금의 잘못을 모른다. 신하로서 임금을 고소한다는 것은 개돼지만도 못한 짓이다."라고 하면서 침을 뱉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에 대간 사한(臺諫史翰)들과 찬성사 민종유(贊成事閔宗儒), 언양군 김륜(彦陽君 金倫) 등이 모두 서명하지 않았다. 권한공과 채하중(蔡河中) 등은 심왕의 명령으로 경사만, 김인윤, 김지경을 순군(巡軍)에 가두었다. 동년 9월에 권한공 등이 또다시 백관을 소집하고 서명하였던바 별안간 뇌성이 진동하며 크기가 자두나 매실 만큼씩한 우박이 내렸는데, 그 네모난 형태는 질려(질黎)와 흡사하였다. 권한공 등은 민부 의랑 조식(民部議郞趙湜)을 시켜 그 글을 가지고 원 나라로 가서 중서성(中書省)에 제출케 하였으나 받지 않아 접수시키지 못하였고, 또 한림원(翰林院)에 제출하였으나 역시 받지 않았다.
1338년(충숙왕 복위 7) 7월에 원 나라의 실리미(失里迷)가 성에 들어와서 왕이 조서를 맞이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문책하니, 정승(政丞) 권한공 등이, "왕이 병환이 있다."라고 답변하였다. 권한공은 평소에 충선왕이 소중히 여기던 신하이어서 충선왕이 토번에 있을 때 권한공에게 지어보낸 시(詩)에 이르기를, "독기(毒氣)로 가득 찬 못 살 곳이란 옛부터 들은 바이나/ 연경(燕京)을 떠나 몇 만리를 걸어 왔던고/ 길손의 가진 고초 꿈결같이 겪고 나니/ 그대 생각 슬픈 회포 어찌다 참을손가/"라고 하였다. 1343년(忠惠王 復位 4) 12월에 왕이 원 나라로 잡혀가자 재상과 기로(耆老)들이 민천사(旻天寺)에 모여서 왕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청원할 의론을 했다. 그 때에 권한공이 말하기를, "옛날 은(殷) 나라의 태갑(太甲)이 덕행이 없었으므로 이윤(伊尹)이 제동(諸洞)에 3년 간 추방하여 두어서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 연후에 임금 자리에 다시 앉히었다. 또 어떤 나라가 요충의 위치에 있으면서 입조(入朝)하는 제후(諸侯)와 천자(天子)의 사신을 살해하였으므로 천자가 사람을 보내서 그 나라 임금을 죽였다. 또 어떤 나라의 신하가 타국으로 사신이 되어갔다가 돌아와 보니 천자의 사신이 와서 그 임금의 머리를 베어갔으므로, 그 신하가 시체있는 곳에 가서 제사를 차리고 통곡하였더니, 그 자 마져 죽이게 하였다. 이제 왕이 무도(無道)해서 천자가 죽이려 하는데, 어찌 구원할 도리가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충혜왕의 사면 운동에 반대하였다. 권한공은 벼슬이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렀고,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이 되었고, 원 나라 벼슬로 태자 좌찬선(太子左贊善)도 받았다. 충정왕 원년(元年)에 죽었는데, 맏아들 화원군 권중달(花原君權仲達)과 둘째 아들 영의정 권중화(領議政權仲和)와 맏사위 곡성부원군 염제신(曲城府院君廉悌臣), 대언 유총(代言柳總)이 있다. 그는 문장으로 한 때를 울렸고, 시률(詩律)을 많이 읊었는데,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실려 있다. 저서로는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1398년(태조 7) 2월 4일 왕이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고려의 충숙왕이 거사(居士)라고 일컬어 예천군 권한공(醴泉君權漢功)에게 글을 보내었다."라고 하였다.
[權漢功의 詩] : 1) 권한공이 안동 노산(盧山)에 있는 백련사(白蓮寺)에 시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여산사 침벽루(廬山寺枕碧樓)/ 10년 동안 글 읽던 곳을/ 포의(布衣)로 이제 두 번째로 놀러 왔네/ 긴 소나무는 옛 길에 그늘을 지우고/ 어지러운 돌들은 차가운 냇물에 씻기우며 있다/ 흰 날(白日)도 산촌에는 더디구나/ 푸른 봄이건만 동부(洞府)는 그윽하기만 하네/ 어느 때나 천병 만마(千兵萬馬)를 거느리고/ 한 번 웃으며 강 가의 누에 오를 것인가."이다. 2) 기정사공(寄鄭司空)/ 미인이 저 구름 끝에 격해 있는데/ 산 높고 물 깊으니 발섭(跋涉, 이리저리 돌아다님)이 어려우니/ 좇아가려 하나 그 간에 세월은 변할 것이고/ 먼 공중 바라보니 나는 새만 빨라라/ 누가 알랴, 머리 긁적거리며 말 없는 사이에 해는 저물고/ 가을 바람이 우수수 누른 잎 몰 아침을/ 3) 고소대 차운(姑蘇臺次韻)/ 월(越) 나라에 사람 있어 패업(覇業)을 경영할 때/ 오병(吳兵)이 강하지만 어디에 쓰랴/ 임금이 창(枕戈)을 베고 소원이 이룩되니/ 하늘이 도와서 이 날이 있었다고/ 공을 논하면 반드시 서자(西子)에게 상(賞)이 많겠고/ 오자서(伍子胥)가 강 위에서 속절없이 파도만 치누나/ 고소대(姑蘇臺)의 지난 일 슬퍼한들 어찌할꼬/ 4) 부벽루 차운(浮碧樓次韻)/ 영명사(永明寺) 장경사(長慶寺) 중의 손 이끌고/ 대동강 중류(大同江中流)에 쪽배 저으니/ 완연히 홍진(紅塵)이 이르지 않는 곳에 온 듯/ 다시 창랑(滄浪) 막바지를 더듬으려는데/ 옛적의 현인 달사(賢人達士) 남은 이 누구인고/ 나 취해서 졸리니 그대 또한 쉴지어다/ 월암(月岩)부터 이남은 천하에 드물다/ 조천석(朝天石) 늙어 인우(烟雨)가 시름하니/ 5) 정면재(鄭勉齋) 석상에서 붓을 들어 빨리 지으며/ 성동 풍경(城東風景) 6월 하늘에/ 경치가 그림처럼 눈 앞에 펼쳐 있다./ 술 한 잔 한 잔도 연분이었거니/ 학과 돈을 계교하지 말아라/ 손님은 옥같은 사람이요/ 술은 솟는 샘(泉)이라/ 좌중(座中) 어느 누가 주선(酒仙) 아니리/ 옛적의 호걸도 구름 연기처럼 사라졌다./ 알 수 없다. 오늘밤은 이 어찌된 세월이냐/ 6) 제 공북루(題拱北樓)/ 공북루를 새로 세우니/ 경신(庚申, 1320) 시월 초이네/ 시(詩)는 권 찬선(權贊善, 權漢功)으로부터요/ 공은 윤 상서(尹尙書)에게서 비롯하였네/ 옛 길에는 단풍나무가 우거지고/ 맑은 못에는 파란 하늘이 거꾸러졌네/ 머뭇거리며 높아 해는 저물어 오니/ 산빛이 정녕 내 시름을 자아내네/ 7) 감로사(甘露寺, 現江蘇省 鎭江縣 北固山 위에 있는 절, 三國 吳 때 創建) 다경루(多景樓)/ 북고산(北固山)에 올라 윤주(閏州)를 바라보니/ 한 병 술로 고금의 시름 씻기 어렵네/ 물결이 내달으니 강은 아직 성난 듯/ 나라가 망했으니 산은 지금도 부끄러워하누나/ 회해(淮海)의 풍연(風煙)은 옛 성터에 이었고/ 금초사(金焦寺)의 종소리는 높은 다락에 들려오네/ 지난 날의 흥망을 뉘더러 물어볼꼬/ 모래의 갈매기들만 배 가까이 오는구나/ 8) 성거산 원통사(聖居山元通寺)/ 우뚝 솟은 보전(寶殿) 봉(鳳)이 날려는 듯/ 가장 잊기 어려운데 서쪽 행랑일네/ 새벽 전에 벌써 동쪽 해가 보이고/ 갠 날에도 먼저 북령(北嶺)이 어두어지네/ 길이 험하니 또 어이 돌층계를 오를까/ 샘이 다니(甘) 솔 뿌리 마시기 더 좋구나/ 산신령이 내 떠남을 만류하는 듯/ 안개랑 놀을 일으켜 동문(洞門)을 꽉 막누나/ 9) 영국공제 분매(瀛國公第盆梅)/ 옥이 여위고 구슬이 파리하여 기상이 쓸쓸할수록/ 티끌을 벗어난 신선의 뼈가 더욱 가냘프구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봄바람의 얼굴이 아니라/ 명비(明妃)가 만리 눈 속으로 가는 듯/ 10) 여 원조빙자 진대제(與元朝馮子振待制)/ 옥나무(樹) 맑은 바람 구천(九天)에 가득한데/ 자황(紫皇)의 향안(香案) 앞에 한 사람 유선(儒仙)이네/ 태평 세상의 문물이 다시 일어난 뒤에/ 능연각(凌煙閣)에 그려지니 아직 소년이었다./
11) 재도하(在都下)/ 기러기 북으로 올 때에 편지 전하지 않으니/ 기러기 남으로 날으는 날은 나를 더욱 시름하게 한다/ 내 고향은 바로 삼천리를 격하여 있나니/ 수초(水草) 따라 해마다 일정한 거처가 없네/ 12) 비파행(琵琶行)/ 공주는 오손(烏孫)에게 만리 길을 떠났고/ 강주 사마(江州司馬)는 천 줄기 눈물을 흘리었다/ 뒷사람이 어떻게 그 비파 줄 속의 뜻을 알건가/ 맑은 밤은 깊어 가는데, 달은 행랑(行廊)에 구른다/ 13) 황경계축 주감 득사서 우대동강 헌창(皇慶癸丑酒감得四書于大同江軒窓)/ 겨울 가의 푸른 나무는 봄그늘이 엷은데/ 강 위의 푸른 산은 저문 빛이 많구나/ 그 사람은 완연히 물 가운데 있는 듯 원근이 아득하나니/ 해질 녘 어디에서 죽지가(竹枝歌)를 부르는가/ 14) 영명루(永明樓)/ 흰 갈매기 뜬 푸른 물결 위에는 부슬부슬 비 내리고/ 누른 송아지 노는 언덕 남쪽에는 점점이 산이로다/ 흥(興)이 나면 곧 와서 고삐 돌리기 잊었노니/ 다른 이의 늘 한가함이 어찌 나의 잠깐 틈을 탐만 하리/ 15) 송식무외상인 승주 여 상국(送式無外上人乘舟如上國)/ 넓은 바다 서쪽의 하늘 한 끝에/ 조각돛 높이 달고 어디로 가려는가/ 스승님과 서로 안 것이 부질없어라/ 봄바람에 송별시를 또 짓게 되었구나/ 16) 연등회(燃燈會) 밤의 ''''문기장자시(文機障子詩)''''에서 어시(御詩)에 대한 응제(應製)/ 남산이 은(銀) 술동이에 상서로운 술을 빚어내니/ 북두(北斗)가 자루를 돌려 옥 술잔에 따르네/ 여기저기 울리는 갈고(갈鼓) 소리에 봄 기운 호탕한데/ 수많은 나무에 걸린 봉등(鳳燈)은 낮게 뜬 달 모습이네/(역翁稗說 後集二, 高麗史 125卷 列傳 第28 權漢功傳, 高麗史節要 21卷 23卷 24卷 25卷 26卷, 新增東國輿地勝覽 1530, 東文選 7卷 10卷 16卷 21卷, 大東韻府群玉, 襄陽誌 1661, 醴泉郡邑誌 1770 1780 1786 1841 1895, 醴泉郡誌 1939, 韓國史 中世篇 637쪽, 韓國人의 族譜, 安東文化硏究 2輯 1986, 原色世界大百科事典 5卷 251쪽)
권한공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다. [高麗史節要 1343年 12月] 언양군(彦陽君) 김륜(金倫) 은 집에 있다가 왕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창졸 간에 달려갔으나 보지 못하였다. 곧 조정에 진정하자고 채하중에게 말하여, 재상과 국가의 원로들을 민천사(旻天寺)에 모으고 글을 올려 왕의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청할 것을 의논하니, 예천군(醴泉君) 권한공이 말하기를, "옛날 은 나라의 태갑(太甲)이 덕(德)을 밝히지 못하여, 이윤(伊尹)이 태갑을 3년 동안 동(桐 : 땅이름)에 추방하였다가, 뒤에 마음을 바로잡고 행실을 고치므로 왕의 자리에 복위시켰다. 또한 어떤 나라가 교통의 요충이 되는 땅에 끼어 있었는데, 조회하러 들어오는 제후와 천자의 사신을 죽이니, 천자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죽였고, 또 어떤 나라의 신하가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돌아와 보니 천자의 사신이 와서 그 왕의 머리를 베어 가므로, 그 신하가 시체 놓인 곳에 나아가 제사를 차리고 곡을 하였더니, 역시 영을 내려 그를 죽였었다. 이제 왕이 무도하여 천자가 주벌한 것인데, 어떻게 구원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이제현의 益齋集 역翁稗說 後集二] :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 일재(一齋) 권한공은, "남산이 은(銀) 술동이에 상서로운 술을 빚어내니/ 북두(北斗)가 자루를 돌려 옥(玉) 술잔에 따르네/ 여기저기 울리는 갈고(갈鼓) 소리에 봄 기운 호탕한데/ 수 많은 나무에 걸린 봉등(鳳燈)은 낮게 뜬 달 모습이네//"라고 하였고, 평리(評理) 백원항(白元恒)은, "밝은 달이 연회하는 곳을 환히 비추니/ 봄 밤에 금수강산이 열렸구나"하였으나, 스스로 권한공의 시를 따르려면 아직 멀었다고 하였다.
권한공 [記錄] : 拱北樓在州北三里縣監 李裕身記樓創於勝國李葉而牧?諸公之作載於方與記?今五百年之久滄桑?火?變不常而樓之屈伸興廢隨焉李公暹之重修又在七十已往敗瓦殘礎今無存者徘徊咨嗟之餘略捐財力仍舊址而重建若干楹取牧?諸公作刻諸壁上以存古跡云爾其後牧使 李秀得又重修 高麗 白文寶應製詩序歲在辛丑宮駕遷自福而尙行駐淸州壬寅秋九月十九日上率群臣拜賀正表于郊國御州之拱北樓覽一齊權漢功舊題五言句卽命知申事 元松壽代言李穡 成士達次韻製進於是左政承 洪陽坡 李杏村 黃檜山?諸大夫儒生皆 <상권0217-2> 和進文寶時適承命如京歆聞引頸自以不獲覩盛事爲恨及是承召竊嘗追和續尾亦以爲幸而州伯 金君成甲以柳思庵之言屬之曰命製詩成而將鏤板不可無序文寶辭以無文而幸其傳不朽遂操筆而拜稽首曰昔者君臣?歌固是昇平製作而去年奔亂以還豈謂有今日勝事於?吾王事天敬命之誠與名拱北而可表者不在斯樓歟其詩曰拱北名雖舊吾王敬命初?埃今已掃雲物正當書宸極瞻依遠川原向背虛斯民知所感責在一人予 權漢功詩拱北樓新?庚申十月初詩從權贊善功自尹尙書古道依紅樹淸池倒碧虛留連日將暮山色正愁予 辛藏詩井邑山川好居民尙大初坐賓前內翰牧伯舊中書松?千峯秀桑麻四野虛倚欄吟未已林鳥苦?予 元松壽詩絶景登樓處淸辰應製初喜承今日寵慙繼古人書路豁南來直山遙北?虛醴泉行樂好榮幸莫如予 李穡詩?輿淸曉動文物太平初樓逈膽天近詩成奉勅書山光生悅?秋氣集沖虛他日南巡紀含香亦有予 成士達時歲籌將盡際天氣稍寒初扈輦登華構濡?和舊書 <상권0217-3> 秋深蓮?謝風勁樹陰虛軒蓋榮光裏躊躇尙?予 洪彦博詩鳳輦東還日金風木落初江山留我住詩句借人書路直朝南遠樓高拱北虛老來常侍從壁上莫忘予 李巖詩古郡高樓逈誰知結構初秋深萬山樹景入數行書遠岫供西望靑雲補北虛登臨參侍從光寵自慙予 李齊賢詩省方南國日拜表北樓初浩蕩尊前興縱橫筆下書風高雁遵渚雲淨鶴沖虛老矣今多病?恩負倡予 黃石奇詩郡樓雖曰好駐駕也應初無限池中景何能壁上書登臨喜廣蕩俯仰實淸虛多謝醴泉相留詩使起予 柳淑詩北樓陪賞日東國中興初勝事將傳示新詩强自書旌?森滿路袞?逈臨虛此地雖云樂松山苦?予 金漢龍詩江山新霽後雲物九秋初束帶陪天仗分街拜國書登臨聊發興?惚若憑虛欲繼仲宣賦傍人莫笑予 禹吉生詩扈從登樓日凄凉雨霽初君王來送表冠賊聘降書景晏山如?秋深水似虛南州雖信美?望轉傷予 李崗詩扈從南巡日登樓縱自初山川渾似?景物亦堪書霜落長天靜烟消大野虛端知千載下應製必嗤予 廉興 <상권0217-4> 邦詩起樓知幾日金碧炯如初掩暎森仙伏林?古板書淸秋方省斂白日欲凌虛盛事眞堪頌?詩況屬予 田祿生詩一人登眺日萬物喜瞻初美景誰能賦荒詞不用書面南顔甚邇拱北意無虛寓目山河秀雲烟亦嬪予崔龍詩遊豫南巡後登臨四望初當軒瞻玉色掃壁?塵書遠岫晴相簇方池澹若虛物華雖可賞題詠豈□予 權鑄詩繞樓?日月始覺立名初增損誰能巧形容自愧書觀魚池?綠乘鶴路玄虛欲和一齋韻淸風忽惶予 朴仲美詩樓價增三倍吾王止輦初雲烟繞態度風景入圖書野廣眉峯列林疏眼界虛詞臣爭嘯詠樗散却嗟予 金君鼎詩南山浮瑞氣淸?駐樓初聖德其堪頌奇觀合特書秋風吹老樹雲影渡溪虛他日重回?江山亦識予 華之元詩一樓風景勝千乘儼臨初更?南巡?遙傳北上書美談騰里巷和氣滿空虛記取雲?望奚?爲獨後予 禹玄寶詩此樓幾登陟臨幸古無初已用詩爲記何須史亦書斷城當檻豁疏柳??虛近侍參非分?攀且許予 李?詩登樓閱景日向闕拜箋初勅下令臣賦詩成對御書嶺 <상권0218-1> 雲租往返溪月幾?虛顯廟此恢復地靈還慰予 韓昉詩樓拱西原北丹靑炳若初暫停新警?復見舊車書樹老千章古?高四望虛品題難繼列險韻莫過予 曹係芳詩玆樓常亦好況値輦回初閱景誰能讓?詩久未書斜陽明遠嶠流水割淸虛說向漁樵子閑曹?與子 許銓詩駐輦西原後登樓拜表初爲題今日事更閱去年書遠水連天靜疏林傍岸虛豈圖歌聖德緣幸及於予 田得良詩旌?南巡後簪裳再造初拜箋遵禮義頌德獻詩書滿目奇觀秀回頭往來虛不才?繼韻群彦莫嗔予 李邦直詩大駕巡臨日三韓復古初和詩因有勅操筆立爭書俯水堪爲鑑憑欄況若虛功臣十世後餘慶自于予 韓尙質詩奉使還鄕日朝鮮開國初君王迎聖旨父老賀簽書鍾鼓喧周道旌旗蔽太虛由來稱?錦榮幸孰知予望仙樓在客館東舊名聚景至正辛丑高麗恭愍王避紅賊自安東移駐此州數月及賊平放文科及監試榜後人書其榜揭于樓樓壞久天順辛巳牧使 李伯常重新韓明澮改扁曰望仙(여지도서 忠淸道 淸州 樓亭)
권한공 [記事] : 한국문집총간(003_537a) 목은고(牧隱藁, 1626)에 실린 목은 이색(李穡)의 기사로, 그 내용은, “牧隱詩稿卷之三/ 詩/ 崖頭驛。有醴泉權政丞詩。其一聯云。野闊民居樹。天低馬入雲。其形容遼野。無復遺恨。穡曰。此是遼野十字傳神。與工部地偏江動蜀。天闊樹浮秦。語意絶相類。宜其拜贊善東宮之命也。高麗人與於是選。古所未聞。穡。公之孫壻也。僥倖登科。直拜翰林供奉。此雖穡之家風。然於權氏之門。豈無光耀。九原可作。公必慶我以傑作無疑也。遂用其十字爲韻。吟成 十首。一以詠遼野。一以贊醴泉。/ 天地自爐?。山川誰陶冶。忽然闊無涯。日月出于野。風微雲影移。雨過川光活。小立觀吾心。未知誰讓闊。天下日多故。桃源猶避秦。誰知白帽客。已作遼東民。北瞻混同江。南對醫無閭。索莫犬羊窟。那知君子居。草色接遙天。川光浮輕霧。欲求君子居。回首瞻佳樹。?看朝出日。又望昏起煙。渺渺醴泉路。山連東海天。物性鵬將?。人材鶴與?。醴泉豪氣甚。餘子盡頭低。身初起海隅。名已滿天下。鴻鵠商嶺來。庭趨有洗馬。海闊隔齊魯。天遙拱遼?。臨川筆有光。梁上飛塵入。胸次芥夢澤。中華播淸芬。牧童十絶句。永示公來雲。”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한국문집총간(227_464a) 대산집(大山集, 1802)에 실린 대산 이상정(李象靖)의 기사로, 그 내용은, “東溪權公行狀/ ...諱幸。事麗祖有功。賜姓權氏。累世至諱漢功。位都僉議右議政。醴泉府院君。諡文坦。寔生諱仲達。仕中朝位開府。...”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고전국역총서(1968 刊)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실린 김종서(金宗瑞)의 기사로, 그 내용은, “신사2년(1341),/ ...를 완산군(完山君)으로 봉하였다. ○ 3월에 왕이 예천군(醴泉君) 권한공(權漢功)의 둘째 아내[二室...”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고전국역총서(1968 刊)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실린 김종서(金宗瑞)의 기사로, 그 내용은, “계미4년(1343),/ ... 원로들을 민천사(旻天寺)에 모으고 글을 올려 왕의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청할 것을 의논하니, 예천...”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고전국역총서(1968 刊)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실린 김종서(金宗瑞)의 기사로, 그 내용은, “기축원년(1349),/ ...원 나라에 보내어 습위시켜 준 것을 사례하게 하였다. ○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 권한공(權漢功)이 ...”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고전국역총서(1968 刊)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목은 이색(李穡)의 기사로, 그 내용은, "고려국 충성 수의 동덕 논도 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부원군 증시 충경공 염공신도비 (高麗國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曲城府院君贈諡忠敬公廉公神道碑)/ ...氏)는 원조(元朝)의 조열대부 태자좌찬선 추성동덕 협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예천부원군 영예문관사(朝..."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7 刊)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실린 안정복(安鼎福)의 기사로, 그 내용은, “계미년 충혜왕 후 4년(원 순제 지정 3, 1343)/ ...왕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청할 것을 의논하였다. 예천군(醴川君) 권한공(權漢功)이 말하기를, ꡒ이...”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7 刊)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실린 안정복(安鼎福)의 기사로, 그 내용은, “기축년 충정왕(忠定王)원년 (원 순제 지정 9, 1349)/ ... 외척인 여러 윤씨(尹氏)가 권세를 부렸다. 9월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 권한공(權漢功)이 죽었다...”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0 刊) 익재집(益齋集)에 실린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기사로, 그 내용은, “역옹패설 후집 2(?翁稗說 後集二)/... / 一熟千年海果來 한 시는 왕기공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선두를 다툴 만하다. 예천부원군(醴泉... ”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한국문집총간총목차 003집 목은고(牧隱稿 Ⅰ)에 실린 목은 이색(李穡)의 예천부원군 권한공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36 途中 537 遼陽省 537 途中 537 崖頭驛 有醴泉權政丞詩 其一聯云 野闊民居樹 天...”이다.(www.minchu.or.kr 2006)
권한공 [記事] : 안동시사 5/ 간행년 : 1999/ 저자 : 안동시/ 발행처 : 안동시청/ 【安東 權氏】/ 권한공(權漢功):?~1349(충정왕 1, 기축). 본관 安東. 호는 一齋. 守洪의 손자. 僉議平理 正+頁의 子. 충렬왕시 문과 급제. 三司使․찬성사 역임. 충선왕 양위후 원나라에 가서 萬卷堂에서 이제현과 독서하며 文名을 떨침. 瀋陽王 暠를 옹립하고 충숙왕을 폐위시키려다 실패함. 벼슬은 都僉議政丞에 이르렀고 醴泉府院君에 봉해짐. 일찍이 원나라의 명을 받아 太子左贊善이 됨. 시호:文坦. 저서:『一齋集』. ▣참고:『高麗史』 □집필:이원걸(www.koreastudy.or.kr 2007)
권한공 [記事] : 안동인물초색인/ 간행년 : 2000/ 저자 : 권오신 외/ 발행처 : 안동문화원/ 권한공(權漢功) : ? ~ 1349(충정왕 1, 기축), 고려 말기의 문신(文臣). 본관 안동(安東). 호는 일재(一齋). 시호는 문탄(文坦). 첨의평리(僉議評理) 책(?)의 자. 충렬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직사관(直史館)을 지내고, 1294년(충렬왕 20)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후에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거주하였으며, 충선왕을 따라 귀국 밀직부사(密直副使)?첨의평리(僉議評理)를 역임. 충숙왕(忠肅王) 초 삼사사(三司使)?찬성사(贊成事)를 지냈으며, 충선왕 양위 후 원나라에 가서 만권당(萬卷堂)에서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독서하며 문명(文名)을 떨쳤다. 후에 충숙왕에 의하여 구금, 장류(杖流)되었으나 원제(元帝)의 명으로 풀려나와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옹립하고, 충숙왕을 폐위시키려고 획책하였으나 원나라의 거부로 실패하였다.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고,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집에 『일재일고(一齋逸稿)』가 있다. 예천(醴泉) 유천(柳川)에서 살았다. ◎참고문헌 : 高麗史?醴泉郡誌?安東權氏譜(www.koreastudy.or.kr 2007)
권한공 [記事] : 안동시사 5/ 간행년 : 1999/ 저자 : 안동시/ 발행처 : 안동시청/【安東 權氏】/ 권한공(權漢功):?~1349(충정왕 1, 기축). 본관 安東. 호는 一齋. 守洪의 손자. 僉議平理 正+頁의 子. 충렬왕시 문과 급제. 三司使․찬성사 역임. 충선왕 양위후 원나라에 가서 萬卷堂에서 이제현과 독서하며 文名을 떨침. 瀋陽王 暠를 옹립하고 충숙왕을 폐위시키려다 실패함. 벼슬은 都僉議政丞에 이르렀고 醴泉府院君에 봉해짐. 일찍이 원나라의 명을 받아 太子左贊善이 됨. 시호:文坦. 저서:『一齋集』. ▣참고:『高麗史』 □집필:이원걸(www.koreastudy.or.kr 2007)
권한공 [記事] : 중국정사조선전 새창/ 주석번호/제목 [註257] 其弟暠 …… 於朝故也 / 暠는 고려의 왕족으로 延安君에 봉해졌으며, 1313年(忠宣王 5) 고려왕과 심양왕의 두 왕위를 가지고 있던 忠宣王이 元나라에 머물며 고려왕위를 忠肅王에게 넘긴 뒤 暠는 심양왕의 세자가 되었고, 禿魯花로 元나라에 머물다가 1316年(忠肅王 3) 심양왕에 봉해졌다. 원나라 梁王의 사위가 된 뒤에 더욱 忠宣王의 애호를 받게 되자 고려의 왕위를 빼앗을 계획을 품게 되었고, 政丞 曺?․蔡河中 등이 좌우에서 떠받들고 왕위의 찬탈을 꾀하여 갖가지로 忠肅王을 무고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元帝로 하여금 國王의 玉璽를 빼앗게 하고, 權漢功 등으로 元나라 中書省에 상소하여 忠肅王을 폐할 것을 청하게 했다. 1339年(忠肅王 復位 8) 忠肅王이 죽자 曹? 등이 暠를 고려왕위에 앉히려고 亂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왕위는 忠惠王에게 돌아갔다 1344年(忠惠王 復位 5) 귀국하여 이듬해 죽었다. 瀋王 暠와 忠宣王 사이는 명백히 父子관계가 아니고 忠宣王에게 조카가 된다.(www.history.go.kr 2009)
권한공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忠淸道 / 淸州 / 樓亭 / 拱北樓 在州北三里縣監 李裕身記樓創於勝國李葉而牧?諸公之作載於方與記?今五百年之久滄桑?火?變不常而樓之屈伸興廢隨焉李公暹之重修又在七十已往敗瓦殘礎今無存者徘徊咨嗟之餘略捐財力仍舊址而重建若干楹取牧?諸公作刻諸壁上以存古跡云爾其後牧使 李秀得又重修 高麗 白文寶應製詩序歲在辛丑宮駕遷自福而尙行駐淸州壬寅秋九月十九日上率群臣拜賀正表于郊國御州之拱北樓覽一齊權漢功舊題五言句卽命知申事 元松壽代言李穡 成士達次韻製進於是左政承 洪陽坡 李杏村 黃檜山?諸大夫儒生皆...(www.history.go.kr 2009)
권한공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江原道 / 江陵 / 樓亭 / 雲錦樓 在客館東徐居正記趙云?詩成石?詩朴始亭記成俔詩俱載勝覽舊誌而此樓頹?已久只有遺址 倚雲樓 在客館南六間 勵節堂 在客館西北府人祀趙云?於此俗號生祀堂今? 寒松亭 在府東十五里東臨大海蒼松鬱然亭畔有?井?石白卽述郞仙徒所遊處樂府有寒松亭曲書於瑟底漂至江南人未解其詞高麗光宗朝國人張晉山奉使江南江南問之晉山作詩解之曰月白寒松夜波安鏡浦秋哀鳴來又去有信一沙? 安軸詩四仙曾會此客似孟嘗門珠履雲無迹蒼官火不存壽眞思翠密懷古立黃昏唯有煎茶井依/ <상권0591-3>/ 然在石根 李仁老詩千古仙遊遠蒼蒼獨有松但餘泉底月彷彿想形容 金克己詩孤亭枕海學蓬菜境?不許栖片埈滿徑白沙步步雪松聲淸?搖瑗現云是四仙縱賞地至今遺迹眞奇哉酒臺?頹沒碧單茶?冷落荒蒼苔雙片野棠空??向誰凋謝向誰開我今深歷放幽興終日爛傾三雅盃坐知機盡已忘物?鳥傍人飛下來 權漢功詩地古人烟遠寒潮吼海門千株松已倒兩眼井猶存鳥去汀沙靜鴉盤山月昏欲歸還復駐乍立白雲根 李穀詩意?尋勝景早出古城門仙去松亭在山藏石?存人情有今古物像自朝昏不是曾來此聞言謂不根 本朝李茂芳詩亭依松麓斷東望海無門境靜仙?在沙明鳥篆存碑心苔暈綠石面兩痕昏一?泉無渴源乎天地根 柳李聞詩古仙浪遊處爭慕客塡門鍊藥人何去奠??猶存壺中閑日月世上卽展昏回首尋遺迹惟松自?根 鏡浦臺 十一間在府東北十五里浦之周二十里水?如鏡不深不淺?沒人肩貴四面中央如一西岸有峯峯上有臺臺呼有鍊藥石臼浦之東口有板橋曰江門...(www.history.go.kr 2009)
권한공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補遺篇(京兆, 松都, 水原) / 松都舊誌序 / 松都誌卷之三 / 元通寺 在北聖庵南 權漢功詩 寶殿臨風鳳欲?最難忘處是西軒未晨已得東方白不雨先占北嶺昏路險更愁攀石?泉甘猶喜汲松根地靈似有留人意故起烟霞?洞門(www.history.go.kr 2009)
권한공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安東 / 寺? / 白蓮寺 在盧山有枕碧樓今無○權漢功詩十載讀書處布衣今再遊長松蔭古道亂/ <하권0537-2>/ 石凝寒流白日山村晩靑春洞府幽何時擁千騎一笑上江樓 臨河寺 在府西今無 法林寺 在府南今無 法龍寺 在府西俗稱大寺無僧寮有石佛三軀年久頹廢雍正丙午緇徒重修 淸凉山 在淸凉山○新增周世鵬詩好事行雲捲復舒登臨?遞?蒼虛天風忽送西山雨半濕征衫到佛居 淸凉山寺遍題名詩就烟霞句句生臨去更敎吹玉笛?峯皆帶惜離情 開目寺 在開目山 法興寺 在府東三里○朴孝修詩登臨?似空中在十二峯蠻相背對野雨濃他墨掃?湖淸細弄明粧態遠村紅樹夕陽留高嶠寒松和霧退輦下他年憶此樓一背南夢何嫌再今無 新增西嶽寺 在府西五里○林?詩名區何待遠?攀聊借公餘半日閑萬折朝宗西去水千重蟠踞北來山荒原石佛知誰創遺像關王寄北間盛事東征留片碣卽今天地帶愁顔 玄沙寺 在府東二十里臥龍山○李贊詩爲報玄沙諸釋子十年勤苦可鐫神他時伏節匡山路應道金門?一人○具鳳齡詩謫仙當日留詩句風雨空...(www.history.go.kr 2009)
권한공 [記事] : 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2월 4일(신사) 2번째 기사/ 임금이 봉화백 정도전에게 글을 보내며 송헌 거사로 자신의 호를 정하다/ 임금이 송헌 거사(松軒居士)로 호(號)를 하였다. 임금이 좌승지(左承旨) 이문화(李文和)에게 이르기를, ꡒ내가 들으니 전조(前朝)의 충숙왕(忠肅王)이 거사(居士)라고 일컬어 예천군(醴川君) 권한공(權漢功)에게 글을 보내었다. 나도 또한 봉화백(奉化伯)에게 거사(居士)라고 일컬어 글을 보내려고 하는데, 무엇으로 호(號)를 할까?ꡓ하니, 문화가 대답하였다. ꡒ상감의 잠룡(潛龍) 때의 헌호(軒號) 646) 가 어떠합니까?ꡓ 임금이, ꡒ좋다ꡓ하고, 드디어 송헌(松軒)으로 호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13권 4장 B면/ 【영인본】 1책 116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역사-전사(前史)/ [註 646]헌호(軒號) : 남의 당호(堂號)의 존칭. ☞(www.history.go.kr 2009)
권한공 [記事] :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11월 23일(정묘) 1번째 기사/ 영의정부사로 치사한 권중화의 졸기/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치사(致仕)한 권중화(權仲和)가 죽었다. 중화(仲和)는 안동(安東) 사람인데, 고려(高麗) 정승(政丞) 권한공(權漢功)의 아들이다. 지정(至正) 계사년 을과(乙科) 제2인에 올라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대언(代言)이 되었다가, 지신사(知申事)로 옮기고 전선(銓選)을 맡았는데, 근신(謹愼)하고 주밀(周密)하여 친구(親舊)에게 사(私)를 두지 않으니, 공민왕이 심히 중하게 여기었다. 정당 문학(政堂文學)으로 정사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는데, 문하(門下)에 명사(名士)가 많았다. 염정(恬靜)1365) 자수(自守)1366) 하여 권귀(權貴)에게 아부하지 않아서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태조(太祖)가 즉위한 뒤에 기년(耆年)․숙덕(宿德)으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제수하고 예천백(醴泉伯) 을 봉하여, 본관(本官)1367) 으로 그대로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고사(故事)에 정통하므로 무릇 상정(詳定)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가서 물었다. 나이 비록 늙었으나 정력(精力)이 쇠하지 않아서 의약(醫藥)․지리(地理)․복서(卜筮)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고, 더욱이 대전(大篆)1368) 과 팔분(八分)1369) 을 잘 썼다. 평소에 산업(産業)을 다스리지 않고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앉아서 이[蝨]를 잡으며 이야기하였다. 늙어서 다만 말라빠진 말[馬] 한 필이 있었다. 나이 87세에 죽으니 조회(朝會)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중관(中官)을 명하여 조제(弔祭)하였다. 유사(有司)에 명하여 예장(禮葬)하고, 문절(文節)이란 시호(諡號)를 주었다. 중궁(中宮)도 또한 내시(內侍)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아들이 하나이니 권방위(權邦緯) 이다./ 【태백산사고본】 6책 16권 41장 A면/ 【영인본】 1책 464면/ 【분류】 *인물(人物)/ [註 1365]염정(恬靜) :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함. ☞ / [註 1366]자수(自守) : 행실이나 말을 스스로 조심하여 지킴. ☞ / [註 1367]본관(本官) : 판문하부사를 말함. ☞ / [註 1368]대전(大篆) : 한자(漢字) 서체(書體)의 하나.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 태사(太史) 주(?)가 만들었다고 하며, 그 특색은 번잡(繁雜)하고 수식(修飾)을 주로 한 점임. ☞ / [註 1369]팔분(八分) : 예서(隷書) 이분(二分)과 전서(篆書) 팔분(八分)을 섞어서 만든 한자(漢字)의 서체(書體). 한(漢)나라 채옹(蔡邕)이 처음 만들었다고 함. ☞(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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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도체 1위들(육상부·여일반부 배구·남고등부 탁구)...축하합니다.
경북도민체전 2010(道民體典 醴泉郡 選手團 綜合5位 達成 : 陸上과 女子 排球에서 뛰어난 成績 거두어) [記事] :
예천군은 체육웅군이었다! 불과 20일 동안 열악한 조건 아래 연습과 훈련을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군부 종합 5위의 성적을 기록했다.
포항에서 열린 ''''제4회 경북도민체전이 2010년 7월 19일 폐막식을 갖고 내년에 울진에서 만날 것을 다짐하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예천군 선수단은 이번 대회에서 종합 5위 입상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최강의 기량을 선보인 육상선수단과 여자 일반부 배구선수단이었다.
육상은 종합우승을 차지했으며 여자 일반부 배구는 2연패를 달성했다. 다음은 종목별 경기결과이다
육상 :종합우승/
배구:2위(여자일반부 배구1위)/
탁구:2위(남자 고등부 1위)/
태권도:5위/ 배터민턴:8위/ 궁도:4위/ 씨름:4위/ 정구:5위/ 골프:9위/ 테니스:6위/
(醴泉인터넷放送 2010-07-19 오후 6: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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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