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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259:예천객사의 1580년대 기왓장 발견
예천의 자랑(2259) : 예천객사의 1580년대 기왓장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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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객사 [記事] : 2010년 7월 20일 오후 1시 동생의 친구되는 이가 옛 기왓장을 갖고 집으로 찾아왔다. 기왓장에 글씨가 있는데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기왓장에는 “萬曆拾?”이라는 글씨가 있는데, 마지막 글자는 알 수가 없다.
만력 10년은 1582년(선조 15)이다. 그리고 이 기왓장은 대창중고등학교 행정실 건물의 지붕 개수 때(2009.7.20-11월)에 쓰레기장에 버려진 기왓장이라고 했으니, 1582년 경 중수될 때의 예천객사의 기왓장이니, 소중하므로 잘 간직하라고 하였다.
대창중고등학교의 전신인 대창학원(大昌學院, 1922년 2월 15일 개교)은 예천향교의 건물로써는 교사(校舍)가 협소하여 1925년부터 흑응산 아래 향교의 오른 쪽 송정(松亭)이란 산상(山上, 예천읍 노상리 1번지, 현 위치)에 새로 기와집을 신축하기 시작하였는데, 예천읍 노하동(현 예천읍사무소 근처에 있던 객사(客舍, 1911-1924년까지는 예천공립보통학교(현 예천초등학교) 건물로 이용됨)를 이전 공사하여 1927년 3월 2일에 준공(1동 120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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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객사(醴泉客舍) [建物] : 예천읍 노상리 1번지에 있는 객사로, 1439년에 예천군수 이지명(李知命)이 건립한 이래 수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으나, 1922년 도로 개설로 인해 대창학원(現 大昌中高等學校) 구내로 이건하였다. 객사는 정면 11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가운데칸의 전면에는 1칸을 돌출시켜 현관(玄關)을 만들었다. 교사(校舍)로 활용하기 위해 이건한 까닭에 내부 구조는 이건 당시부터 원형은 많이 훼손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어지는데, 현재도 이 건물은 교장실, 행정실 등으로 사용하고 있어 내부는 모두 개조된 상태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예천 객사 [記事] : 한국문집총간(148_048c) 서포집(西浦集, 1702)에 실린 서포 김만중(金萬重)의 기사로, 그 내용은, “西浦先生集卷六/ 七言絶句/ 醴泉客舍/ 留客華軒秋日午。朱絲解作黃鶯語。無端門外角三聲。忽復悤悤騎馬去。”이다.(www.minchu.or.kr 2006)
예천 객사 [記事] : 한국문집총간(148_250d) 염헌집(恬軒集, 1760)에 실린 임상원(任相元)의 기사로, 그 내용은, “恬軒集卷之十/ 詩 西河任相元公輔著/ 醴泉郡齋夜雨/ 客館春多雨。?鳴夜色凄。野昏雲壓地。村冷水平堤。過嶺逢佳節。看山憶舊棲。新晴樓更勝。乘興試攀?。”이다.(www.minchu.or.kr 2006)
예천 객사 [記事] : 국학원전 해동잡록(海東雜錄, 1670)에 실린 죽소 권별(權鼈)의 기사로, 그 내용은, “海東雜錄[一] 本朝[一]/ 洪貴達/ 해동잡록 1 본조(本朝)/ 홍귀달(洪貴達)/ 본관은 의흥(義興)의 부계(缶溪)로서 자는 겸선(兼善)이요, 호는 함허정(涵虛亭)인데 또한 허백정(虛白亭)이라고도 한다. 세조조에 급제하여 벼슬은 좌참찬에 이르렀다. 연산조(燕山朝)에 죄를 입어 경원(慶源)으로 귀양을 갔다가, 귀양간 땅에서 죽었다. 문장은 아담하고고 꿋꿋하고 전실하고 예스러웠다. 오랫동안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 강원감사로 만기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예천(醴泉)을 지나던 차 객사(客舍)에서 지은 시에/ 앞 마을 저녁 연기 속에 까마귀 깃들었는데 / 前村煙瞑己臧鴉/ 객사는 침침하여 밤이 시끄럽지 않다 / 客舍沈沈夜不譁/ 길은 숲 달 밝은데 두견새는 울고 / 深樹月明啼杜宇/ 넓은 뜰엔 봄이 다하여 배꽃이 떨어지네 / 廣庭春盡落梨花/ 노쇠한 얼굴을 거울에 대하니 해마다 다르고 / 衰容對鏡年年換/ 병든 눈으로 글자를 보니 글자마다 빗나가네 / 病眼看書字字斜/ 꿈속에 그리던 산천을 내일은 밟으리니 / 夢裏溪山明日去/ 문 앞에 흐르는 물 있는 곳이 바로 내 집이로세 / 門前流水是吾家/ 하였다. ”이다.(www.minchu.or.kr 2006)
예천 객사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4 刊) 동사일록(東槎日錄)에 실린 김지남(金指南)의 기사로, 그 내용은, “[일록(日錄)]/ 임술년 5월/ 15일(임술)/ 맑음. 새벽에 망궐례(望闕禮)를 행했다. 아침밥을 먹고 일찍 떠나 예천에 도착하여 잤다. 이날 밤 달빛이 낮과 같이 밝았다. 삼사가 객사 동헌(客舍東軒)에 모여 마상재 오순백(吳順白)을 시켜 검무(劍舞)를 추게 했더니, 구경꾼들이 담을 친 듯이 많이 모였다. 이날 30리를 갔다./ [주D-001] 망궐례(望闕禮) : 외지에 가 있는 관리가 명절이나 임금 또는 왕비의 생일, 또는 그 밖의 날에 전패(殿牌)에 절하던 예식.”이다.(www.minchu.or.kr 2006)
예천 객사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1 刊) 해동잡록(海東雜錄 1) 본조(本朝)에 실린 용문면 죽림리 출신인 권별(權鼈)의 기사로, 그 내용은, “홍귀달(洪貴達)/ 본관은 의흥(義興)의 부계(缶溪)로서 자는 겸선(兼善)이요, 호는 함허정(涵虛亭)인데 또한 허백정(虛白亭)이라고도 한다. 세조조에 급제하여 벼슬은 좌참찬에 이르렀다. 연산조(燕山朝)에 죄를 입어 경원(慶源)으로 귀양을 갔다가, 귀양간 땅에서 죽었다. 문장은 아담하고고 꿋꿋하고 전실하고 예스러웠다. 오랫동안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 강원감사로 만기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예천(醴泉)을 지나던 차 객사(客舍)에서 지은 시에/ 앞 마을 저녁 연기 속에 까마귀 깃들었는데(前村煙瞑己臧鴉)/ 객사는 침침하여 밤이 시끄럽지 않다(客舍沈沈夜不譁)/ 길은 숲 달 밝은데 두견새는 울고(深樹月明啼杜宇)/ 넓은 뜰엔 봄이 다하여 배꽃이 떨어지네(廣庭春盡落梨花)/ 노쇠한 얼굴을 거울에 대하니 해마다 다르고(衰容對鏡年年換)/ 병든 눈으로 글자를 보니 글자마다 빗나가네(病眼看書字字斜)/ 꿈속에 그리던 산천을 내일은 밟으리니(夢裏溪山明日去)/ 문 앞에 흐르는 물 있는 곳이 바로 내 집이로세(門前流水是吾家)/ 하였다. 본집/(www.minchu.or.kr 2006)
예천 객사 [記事] : 한국문집총간총목차 148집 서포집(西浦集)에 실린 서포 김만중(金萬重)의 기사로, 그 내용은, “...詞四首 48 送安邊申使君寅伯晸/三首 48 寄湖南李按使伯吉師命/二首 48 醴泉客舍 ...”이다.(www.minchu.or.kr 2006)
예천 객사 : →객사
예천객사 동헌 중창기(醴泉客舍 東軒 重創記) [記事] : 별동 윤상(尹祥)의 기사로, 1749년, 1900년에 발행된 <별동선생집(別洞先生集)> 2권 기(記)에 수록되어 있다.(韓國歷史情報綜合시스템 2004)
예천 객사동헌중창기(醴泉 客舍東軒重創記) [古文獻] : 제작자 : 윤상(尹祥)/ 날짜 : 2005년 02월 07일/ 원문형태 : DOC/ 출처 : 민족문화추진회(國家知識情報統合檢索시스템 2005)
객사(客舍), 객관(客館), 예천객사(醴泉客舍) [建物] : 1) 예천읍 노상리 1번지 대창중고등학교(大昌中高等學校)의 행정실(行政室), 교장실(校長室), 송대실(松臺室)로 사용되고 있는 120평의 건물로, 원래 노하리 74번지 예천읍사무소 부근에 있던 조선 시대의 객관(客館)이다. 이 건물은 1907년 융명학교(隆明學校, 只今 醴泉初等學校의 前身) 교실로 쓰다가 1911년부터는 예천공립보통학교(醴泉公立普通學校)의 교실로 쓰였다. 1927년 노상리 1번지인 지금의 자리로 이건(移建)하여 대창학원(大昌學院)의 교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객관은 목조 와가 단층 팔작(木造瓦家單層八作) 지붕으로 규모가 우람하고 거대하다. [尹祥의 記] : 무릇 주군(州郡)에 관사(館舍)를 설치하는 것은, 사신(使臣)이 왕화(王化)를 선포하는 때를 기다려, 행례(行禮)할 곳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아주 작은 고을이라도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예천군은 동쪽과 서쪽에서 죽령(竹嶺)과 초령(草嶺) 두 재 사이에 끼어있다. 죽령으로부터 상주 낙동(洛東)으로 가는 자, 초령으로부터 화산(花山)에 가는 자는 반드시 이 고을을 경유하게 된다. 그래서 사신의 순시(巡視)와 길가는 나그네의 오고감이 거의 없는 날이 없다. 그런데, 객관이 좁고 누추하여서 고을과 더불어 서로 걸맞지 않았다. 1439년(세종 21)에 완산 이지명(完山李知命)이 이 고을의 수령으로 나왔다. 정사(政事)를 본 지 3년에 정사는 형통하고 사람들은 화합하게 되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에게 모의하고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여, 농부나 공장(工匠)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 놀고 있는 사람들을 일 시키었다. <집이 이루어지니> 뜰 층계가 높고 커서 심한 더위의 무더움을 제거할 수 있고, 마루의 간살이 넓고 시원하여서, <예(禮)를 행할 때에> 읍양(揖讓)할 위치를 마련하기에 넉넉하다. 서늘한 곳과 더운 방을 따로 만들었고, 외관(外觀)과 실질(實質)은 알맞게 되었으니, 이 군수(李郡守)의 정사(政事)하는 것이 급소(急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한도를 넘지 아니하였다. 공사를 일으켰으나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으니, 어짐을 베풂이요, 사신을 우대하고 왕명을 존중하니 공경함이 크다. 어짐과 공경함을 갖추었으니 수령의 직책은 다한 것이다. 예천은 나의 누대(累代)의 고향 땅이다. 이 군수의 정사(政事)하는 것은 내가 잘 아는 바이다. 그러므로 대강 일의 경과를 적을 뿐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그리고 윤상(尹祥)의 기문(記文) 중에 초령(草嶺)은 문경의 조령(鳥嶺)이고, 화산(花山)은 안동의 옛이름이다. 예천군수 이지명(醴泉郡守李知命)이 1441년(세종 22) 10월에 기공(起工)하여 섣달에 일을 마쳤다... 1442년(세종 24) 음력 5월 상순(上旬)에 통정대부 첨지중추원사 겸 성균관 사성 윤상(通政大夫僉知中樞院事兼成均館司成尹祥)이 썼다.
[客舍의 東軒 韻에 대한 尹祥의 次韻] : 시냇물 돌아 돌고 산이 둘러 쌌는데, 무르녹은 나무 그늘/ 예로부터 경승지로 그 이름 아름다웠네/ 높디 높은 묘우(廟宇, 官衙)는 험준한 고개 뒤에 했고/ 곱게 치장한 누대(樓臺) 평평한 수풀 속에 보일 듯 말 듯/ 천 길 산곽(山郭)에는 구름 안개 얄포롬하고/ 십리 상마(桑麻) 들에는 비 이슬이 짙구나/ 치하(致賀)하오 사군(使君)이여 그대 치적 으뜸임을/ 황화(皇華, 王命을 받은 使臣)가 붓 휘둘러 꽃다운 시(詩) 읊었구려/(別洞先生文集). 그 외 관찰사 권맹손(觀察使權孟孫), 관찰사 김정국(觀察使金正國), 강원 감사 홍귀달(江原監司洪貴達), 서거정(徐居正)의 시가 있고(군지 1780 1895 1939), 구질(舊秩) 및 객관 현판(客館懸板)이 있다(군지 1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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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객사 [記事] : 2010년 7월 20일 오후 1시 동생의 친구되는 이가 옛 기왓장을 갖고 집으로 찾아왔다. 기왓장에 글씨가 있는데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기왓장에는 “萬曆拾?”이라는 글씨가 있는데, 마지막 글자는 알 수가 없다.
만력 10년은 1582년(선조 15)이다. 그리고 이 기왓장은 대창중고등학교 행정실 건물의 지붕 개수 때(2009.7.20-11월)에 쓰레기장에 버려진 기왓장이라고 했으니, 1582년 경 중수될 때의 예천객사의 기왓장이니, 소중하므로 잘 간직하라고 하였다.
대창중고등학교의 전신인 대창학원(大昌學院, 1922년 2월 15일 개교)은 예천향교의 건물로써는 교사(校舍)가 협소하여 1925년부터 흑응산 아래 향교의 오른 쪽 송정(松亭)이란 산상(山上, 예천읍 노상리 1번지, 현 위치)에 새로 기와집을 신축하기 시작하였는데, 예천읍 노하동(현 예천읍사무소 근처에 있던 객사(客舍, 1911-1924년까지는 예천공립보통학교(현 예천초등학교) 건물로 이용됨)를 이전 공사하여 1927년 3월 2일에 준공(1동 120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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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객사(醴泉客舍) [建物] : 예천읍 노상리 1번지에 있는 객사로, 1439년에 예천군수 이지명(李知命)이 건립한 이래 수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으나, 1922년 도로 개설로 인해 대창학원(現 大昌中高等學校) 구내로 이건하였다. 객사는 정면 11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가운데칸의 전면에는 1칸을 돌출시켜 현관(玄關)을 만들었다. 교사(校舍)로 활용하기 위해 이건한 까닭에 내부 구조는 이건 당시부터 원형은 많이 훼손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어지는데, 현재도 이 건물은 교장실, 행정실 등으로 사용하고 있어 내부는 모두 개조된 상태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예천 객사 [記事] : 한국문집총간(148_048c) 서포집(西浦集, 1702)에 실린 서포 김만중(金萬重)의 기사로, 그 내용은, “西浦先生集卷六/ 七言絶句/ 醴泉客舍/ 留客華軒秋日午。朱絲解作黃鶯語。無端門外角三聲。忽復悤悤騎馬去。”이다.(www.minchu.or.kr 2006)
예천 객사 [記事] : 한국문집총간(148_250d) 염헌집(恬軒集, 1760)에 실린 임상원(任相元)의 기사로, 그 내용은, “恬軒集卷之十/ 詩 西河任相元公輔著/ 醴泉郡齋夜雨/ 客館春多雨。?鳴夜色凄。野昏雲壓地。村冷水平堤。過嶺逢佳節。看山憶舊棲。新晴樓更勝。乘興試攀?。”이다.(www.minchu.or.kr 2006)
예천 객사 [記事] : 국학원전 해동잡록(海東雜錄, 1670)에 실린 죽소 권별(權鼈)의 기사로, 그 내용은, “海東雜錄[一] 本朝[一]/ 洪貴達/ 해동잡록 1 본조(本朝)/ 홍귀달(洪貴達)/ 본관은 의흥(義興)의 부계(缶溪)로서 자는 겸선(兼善)이요, 호는 함허정(涵虛亭)인데 또한 허백정(虛白亭)이라고도 한다. 세조조에 급제하여 벼슬은 좌참찬에 이르렀다. 연산조(燕山朝)에 죄를 입어 경원(慶源)으로 귀양을 갔다가, 귀양간 땅에서 죽었다. 문장은 아담하고고 꿋꿋하고 전실하고 예스러웠다. 오랫동안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 강원감사로 만기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예천(醴泉)을 지나던 차 객사(客舍)에서 지은 시에/ 앞 마을 저녁 연기 속에 까마귀 깃들었는데 / 前村煙瞑己臧鴉/ 객사는 침침하여 밤이 시끄럽지 않다 / 客舍沈沈夜不譁/ 길은 숲 달 밝은데 두견새는 울고 / 深樹月明啼杜宇/ 넓은 뜰엔 봄이 다하여 배꽃이 떨어지네 / 廣庭春盡落梨花/ 노쇠한 얼굴을 거울에 대하니 해마다 다르고 / 衰容對鏡年年換/ 병든 눈으로 글자를 보니 글자마다 빗나가네 / 病眼看書字字斜/ 꿈속에 그리던 산천을 내일은 밟으리니 / 夢裏溪山明日去/ 문 앞에 흐르는 물 있는 곳이 바로 내 집이로세 / 門前流水是吾家/ 하였다. ”이다.(www.minchu.or.kr 2006)
예천 객사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4 刊) 동사일록(東槎日錄)에 실린 김지남(金指南)의 기사로, 그 내용은, “[일록(日錄)]/ 임술년 5월/ 15일(임술)/ 맑음. 새벽에 망궐례(望闕禮)를 행했다. 아침밥을 먹고 일찍 떠나 예천에 도착하여 잤다. 이날 밤 달빛이 낮과 같이 밝았다. 삼사가 객사 동헌(客舍東軒)에 모여 마상재 오순백(吳順白)을 시켜 검무(劍舞)를 추게 했더니, 구경꾼들이 담을 친 듯이 많이 모였다. 이날 30리를 갔다./ [주D-001] 망궐례(望闕禮) : 외지에 가 있는 관리가 명절이나 임금 또는 왕비의 생일, 또는 그 밖의 날에 전패(殿牌)에 절하던 예식.”이다.(www.minchu.or.kr 2006)
예천 객사 [記事] : 고전국역총서(1971 刊) 해동잡록(海東雜錄 1) 본조(本朝)에 실린 용문면 죽림리 출신인 권별(權鼈)의 기사로, 그 내용은, “홍귀달(洪貴達)/ 본관은 의흥(義興)의 부계(缶溪)로서 자는 겸선(兼善)이요, 호는 함허정(涵虛亭)인데 또한 허백정(虛白亭)이라고도 한다. 세조조에 급제하여 벼슬은 좌참찬에 이르렀다. 연산조(燕山朝)에 죄를 입어 경원(慶源)으로 귀양을 갔다가, 귀양간 땅에서 죽었다. 문장은 아담하고고 꿋꿋하고 전실하고 예스러웠다. 오랫동안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 강원감사로 만기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 예천(醴泉)을 지나던 차 객사(客舍)에서 지은 시에/ 앞 마을 저녁 연기 속에 까마귀 깃들었는데(前村煙瞑己臧鴉)/ 객사는 침침하여 밤이 시끄럽지 않다(客舍沈沈夜不譁)/ 길은 숲 달 밝은데 두견새는 울고(深樹月明啼杜宇)/ 넓은 뜰엔 봄이 다하여 배꽃이 떨어지네(廣庭春盡落梨花)/ 노쇠한 얼굴을 거울에 대하니 해마다 다르고(衰容對鏡年年換)/ 병든 눈으로 글자를 보니 글자마다 빗나가네(病眼看書字字斜)/ 꿈속에 그리던 산천을 내일은 밟으리니(夢裏溪山明日去)/ 문 앞에 흐르는 물 있는 곳이 바로 내 집이로세(門前流水是吾家)/ 하였다. 본집/(www.minchu.or.kr 2006)
예천 객사 [記事] : 한국문집총간총목차 148집 서포집(西浦集)에 실린 서포 김만중(金萬重)의 기사로, 그 내용은, “...詞四首 48 送安邊申使君寅伯晸/三首 48 寄湖南李按使伯吉師命/二首 48 醴泉客舍 ...”이다.(www.minchu.or.kr 2006)
예천 객사 : →객사
예천객사 동헌 중창기(醴泉客舍 東軒 重創記) [記事] : 별동 윤상(尹祥)의 기사로, 1749년, 1900년에 발행된 <별동선생집(別洞先生集)> 2권 기(記)에 수록되어 있다.(韓國歷史情報綜合시스템 2004)
예천 객사동헌중창기(醴泉 客舍東軒重創記) [古文獻] : 제작자 : 윤상(尹祥)/ 날짜 : 2005년 02월 07일/ 원문형태 : DOC/ 출처 : 민족문화추진회(國家知識情報統合檢索시스템 2005)
객사(客舍), 객관(客館), 예천객사(醴泉客舍) [建物] : 1) 예천읍 노상리 1번지 대창중고등학교(大昌中高等學校)의 행정실(行政室), 교장실(校長室), 송대실(松臺室)로 사용되고 있는 120평의 건물로, 원래 노하리 74번지 예천읍사무소 부근에 있던 조선 시대의 객관(客館)이다. 이 건물은 1907년 융명학교(隆明學校, 只今 醴泉初等學校의 前身) 교실로 쓰다가 1911년부터는 예천공립보통학교(醴泉公立普通學校)의 교실로 쓰였다. 1927년 노상리 1번지인 지금의 자리로 이건(移建)하여 대창학원(大昌學院)의 교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객관은 목조 와가 단층 팔작(木造瓦家單層八作) 지붕으로 규모가 우람하고 거대하다. [尹祥의 記] : 무릇 주군(州郡)에 관사(館舍)를 설치하는 것은, 사신(使臣)이 왕화(王化)를 선포하는 때를 기다려, 행례(行禮)할 곳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아주 작은 고을이라도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예천군은 동쪽과 서쪽에서 죽령(竹嶺)과 초령(草嶺) 두 재 사이에 끼어있다. 죽령으로부터 상주 낙동(洛東)으로 가는 자, 초령으로부터 화산(花山)에 가는 자는 반드시 이 고을을 경유하게 된다. 그래서 사신의 순시(巡視)와 길가는 나그네의 오고감이 거의 없는 날이 없다. 그런데, 객관이 좁고 누추하여서 고을과 더불어 서로 걸맞지 않았다. 1439년(세종 21)에 완산 이지명(完山李知命)이 이 고을의 수령으로 나왔다. 정사(政事)를 본 지 3년에 정사는 형통하고 사람들은 화합하게 되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에게 모의하고 감사(監司)에게 보고하여, 농부나 공장(工匠)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 놀고 있는 사람들을 일 시키었다. <집이 이루어지니> 뜰 층계가 높고 커서 심한 더위의 무더움을 제거할 수 있고, 마루의 간살이 넓고 시원하여서, <예(禮)를 행할 때에> 읍양(揖讓)할 위치를 마련하기에 넉넉하다. 서늘한 곳과 더운 방을 따로 만들었고, 외관(外觀)과 실질(實質)은 알맞게 되었으니, 이 군수(李郡守)의 정사(政事)하는 것이 급소(急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한도를 넘지 아니하였다. 공사를 일으켰으나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으니, 어짐을 베풂이요, 사신을 우대하고 왕명을 존중하니 공경함이 크다. 어짐과 공경함을 갖추었으니 수령의 직책은 다한 것이다. 예천은 나의 누대(累代)의 고향 땅이다. 이 군수의 정사(政事)하는 것은 내가 잘 아는 바이다. 그러므로 대강 일의 경과를 적을 뿐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그리고 윤상(尹祥)의 기문(記文) 중에 초령(草嶺)은 문경의 조령(鳥嶺)이고, 화산(花山)은 안동의 옛이름이다. 예천군수 이지명(醴泉郡守李知命)이 1441년(세종 22) 10월에 기공(起工)하여 섣달에 일을 마쳤다... 1442년(세종 24) 음력 5월 상순(上旬)에 통정대부 첨지중추원사 겸 성균관 사성 윤상(通政大夫僉知中樞院事兼成均館司成尹祥)이 썼다.
[客舍의 東軒 韻에 대한 尹祥의 次韻] : 시냇물 돌아 돌고 산이 둘러 쌌는데, 무르녹은 나무 그늘/ 예로부터 경승지로 그 이름 아름다웠네/ 높디 높은 묘우(廟宇, 官衙)는 험준한 고개 뒤에 했고/ 곱게 치장한 누대(樓臺) 평평한 수풀 속에 보일 듯 말 듯/ 천 길 산곽(山郭)에는 구름 안개 얄포롬하고/ 십리 상마(桑麻) 들에는 비 이슬이 짙구나/ 치하(致賀)하오 사군(使君)이여 그대 치적 으뜸임을/ 황화(皇華, 王命을 받은 使臣)가 붓 휘둘러 꽃다운 시(詩) 읊었구려/(別洞先生文集). 그 외 관찰사 권맹손(觀察使權孟孫), 관찰사 김정국(觀察使金正國), 강원 감사 홍귀달(江原監司洪貴達), 서거정(徐居正)의 시가 있고(군지 1780 1895 1939), 구질(舊秩) 및 객관 현판(客館懸板)이 있다(군지 1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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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