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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279:김광엽御使1(祝윤옥희/예천방문655)
작성자장병창 @ 2010.08.09 06:12:18
  예천의 자랑(2279) : 하리면 부초리 사람 김광엽 어사(1)(附 예천군청 윤옥희, 8일 양궁 세계대회 금과 동메달... 축하합니다/예천방문 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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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엽(金光燁) : 1561(명종 16)-1610(광해군 2), 하리면 부초리 부푸실(翠谷) 사람, 자는 이회(而晦), 호는 죽일헌(竹日軒), 본관은 순천, 승주(承霔)의 6세손, 임꺽정 난을 평정한 도총관 순고(都摠官舜皐)의 손자, 구령진병마만호(仇寧鎭兵馬萬戶) 침의 아들, 어려서부터 용모가 아름답고, 총명이 뛰어나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6세에 이미 <효경(孝經)>을 읽고 8세에 <소학(小學)>, 10세에 <대학(大學)>을 읽었다. 그래서 향내(鄕內)에 그 소문이 자자했고, 이후로 서울의 할아버지 곁에서 글을 읽다가 16세부터 상주 백원에서 발분망식하고 독서에 열중하니 학업이 대성하여 문장이 뛰어나고 청절(淸節)했다. 19세에 <주역(周易)>을 읽고 학문이 성취하고 저술도 초인적이었다. 1582년 22세에 <귀허집(歸虛集)> 40여 권의 저술이 이루어졌다. 1589년(선조 22) 29세에 하리면 부초리(殷豊 翠谷)으로 이사를 왔다.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가족을 상리면 명봉리 묵셋(眞沙)에 피난시키고 안집사 김백암(安集使金栢岩)의 추천으로 풍기 현감(豊基縣監)이 되어 의병을 규합하여 왜군을 물리쳐 풍기 일대에서는 백성들이 병화(兵禍)를 무사히 면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1595년(선조 28) 가주서(假注書)로 입궐하여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이르고,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1596) 때부터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였고, 이어 홍문관(弘文館)에서는 저작 겸 춘추관 기사관(著作兼春秋館記事官)이 되고 <주역(周易)>을 별전(別殿)하여 시강(侍講)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 중에 도체찰사 이원익(都體察使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이 되고, 그 뒤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 수찬(修撰), 부교리(副敎理), 응교(應敎)로 승진하였고, 사간원(司諫院)에서는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하였고,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지평(持平), 사예(司藝) 등을 하였는데, 청환직(淸宦職, 臺省)에만 15년 간 지냈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춘추관(春秋館)에서는 문학과 필선(弼善)으로 유명하였다. 이처럼 여러 벼슬을 거쳐 조부모를 모시기 위해 흥해 군수(興海郡守, 1604)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군민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다시 홍문관 교리(弘文館敎理, 1608), 어사(御史)를 거쳐 1610년(광해군 2)에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5현(賢)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자고 상계(上啓)하여 이를 실행하여 문묘의 제도를 일신(一新)시켰고, 상소할 때마다 임금의 비답(批答)을 받아 당세에 명성을 떨쳤으니 오리 이원익(梧里李元翼), 이덕형(李德馨)은 특히 그를 믿어 정무(政務)에 격의(隔意)없이 의론했다. 1610년 가을에 옥당(玉堂)에서 병을 얻어 귀향, 하리면 부초리 취곡(翠谷)의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왕이 특별히 부의(賻儀)를 내리고 온 국민이 애석히 여겼다. 무덤은 하리면 부초리 부초곡 가서산 간좌(芙草谷加棲山艮坐)의 언덕에 있다. 그는 근검 겸양하였고 인화력이 강했다. 그를 위해 지은 죽일정(竹日亭)이 하리면 금곡리 후편에 빙암정(氷岩亭)이라 하여 있었으나, 너무 퇴락하여 1935년에 하리면 우곡리 438번지로 이건(移建)하였다. 1708년(숙종 34)에는 사림(士林)에서 그를 위해 하리면 우곡리 안골(內洞)에 우곡서원(愚谷書院)을 세웠다가 대원군 때 (1868) 훼철되었다. 그 후 세덕사(世德祠) 만을 재건하여 그를 모시고 있다.(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人物考, 愚谷書院奉安文, 族譜, 竹日齋行狀, 韓國人의 族譜, 嶠南誌 1937, 韓國人의 姓譜, 原色世界大百科事典 6卷 327쪽, 司馬榜目, 文科榜目, 醴泉郡誌 1939)

  [선조실록] : 1595년(선조 28) 8월 28일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에 제수되었고, 동년 9월 21일에 별전에 입시하였다가 왕의 술 3순배를 하사받았다. 그 후 승정원 주서(1596.1.3)를 거쳐, 홍문관 저작(著作, 1596.2.14)일 때는 각사 낭청(郎廳)의 일 처리에 관해서 왕과 의논하였는데, 즉 1596년(선조 29) 3월 26일에는 왕에게 아뢰기를, "수령이 결혼한 자녀를 솔거(率居)할 수 없는 것은 법전에 실려있는데, 난리(壬辰倭亂) 이후 이 법이 무너져 소원한 친족도 모두 솔거하여 관가에 폐단을 끼치므로 그 놀라움이 이를 데 없으며, 혹은 사민(士民)과 더불어 자녀를 혼취시키면서 산업을 경영하고 날로 탐오를 자행하므로 백성들이 그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어사와 감사에게 신칙하여 더욱 수소문하고 살펴서 적발되는 대로 엄히 다스려서 훗날에 폐단을 막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또한 사헌부에 말하라."하였다. 홍문관 저작으로서 경성의 민심 수습과 방위 대책을 건의(1596.4.13)하였고, 천재, 이순신과 원균 등에 관해 의논하였고(1596.6.26), 배신의 차출이 사체에 부당함을 상차하였고(1596.6.27), 서폐(書幣)의 명령을 취소할 것을 차자로 올렸고(1596.7.13), 왕의 수신, 종묘 및 문묘의 친향, 민심의 위무, 하의 상달 등에 관해 아뢰었고(1596.8.25), 뭇하정이 통해지게 할 것을 왕에게 아뢰었고(1596.8.27), 섭정의 명령을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고(1596.8.28), 섭정의 부당함을 아뢰었다(1596.윤8.13, 1596.윤8,14, 1596.윤8,25). 검토관으로서 중국의 원병을 빨리 오게하는 것에 대해 왕과 의논하였고(1598.2.12), 홍문관 부수찬으로서 황정욱에게 벌을 줄 것을 왕에게 건의하니, 왕이 이르기를, "황정욱은 원훈(元勳)이다. 방면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1598.2.15). 1598년(선조 30) 2월 22일에는 사간원 정언으로 삼았는데 그는 단정하고 근후한 인물로서 문장에도 능하였다. 그 후 지평(1598.2.25-1598.2.27)을 지냈다. 홍문관 수찬(1598.2.28)으로서 황정욱의 일을 차자로 올렸다(1598.4.2). 성균관 전적(1598.6.15)을 거쳐 홍문관 부수찬으로서 난국을 타개하는 원초적인 대책을 아뢰었고(1599.1.24), 지평으로서 상주(尙州)에 가 있으므로 체차되었다(1600.11.30). 그 후 전적(1601.11.19), 형조 정랑(1602.4.24), 사간원 헌납(1602.11.22), 직강(1602.12.20)을 지냈다. 헌납(1602.12.29)으로서 기자헌(奇自獻)을 벼슬에 나오도록 하고, 여유길(呂裕吉) 등은 벼슬을 바꾸도록 왕에게 아뢰어 윤허받았다(1603.1.1). 사헌부 지평(1603.2.2)으로서 최영경의 일에 대한 성혼의 죄를 아뢰어 윤허를 받았고(1603.2.7, 1603.2.9), 그 후 정언(1603.4.25), 성균관 전적(1603.5.20), 사헌부 지평(1604.1.3)을 거쳤다. 1604년(선조 36) 1월 21일에 왕이 김광엽을 승직시키라고 하여 수찬(1604.7.27)에 올라서 서피 사모 이엄(鼠皮紗帽耳掩) 1부를 하사받았다(1604.9.21). 그 후 홍문관 교리(1604.12.1), 성균관 전적(1605.6.2), 직강(1605.6.22), 이조 좌랑(1605.7.11), 흥해 군수(1605.10.2), 수찬(1607.10.29), 성균관 전적(1607.12.25, 1608.5.20)을 거쳤다. 홍문관 부교리로서 1608년(광해군 즉위년) 4월 14일에 유경종(柳慶宗), 윤길, 유석증(柳昔曾) 등이 벼슬에 나오도록 허락할 것을 왕에게 아뢰었고, 유영경 무리들의 죄에 대해 차자를 올렸고(1608.4.21), 어사(御史)의 행장을 꾸리라는 전교를 받았다(1608.5.15). 그 후 지평(1608.5.20), 부응교(1509.10.28), 집의(1609.12.7)를 거쳐 부응교(1610.윤3.6)로서 5현(金宏弼, 鄭汝昌, 趙光祖, 李彦迪, 李滉)의 문묘(文廟) 종사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1610.5.2). 1610년(광해군 2) 12월 9일 이조(吏曹)가 전 응교 김광엽이 11월 11일에 죽었다고 아뢰니, 별치부(別致賻)하라고 전교하였다. 1616년(광해군 8) 11월에 편찬된 <선조실록> 편수관 명단 중에 홍문관 응교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김광엽의 이름이 있다.(宣祖實錄, 光海君日記)

  김광엽 [記事] : 한국문집총간(050_145a) 백암집(柏巖集, 1772)에 실린 백암 김륵(金?)의 기사로, 그 내용은, “栢巖先生年譜/ 年譜/ 栢巖先生年譜/ ...五月。差列邑假守。假將。馳啓行在。安東豊基義城醴泉等邑。竝無守宰。先生權宜?置。量才授任。以禮安縣監申之悌兼安東府使。前都事安霽前檢閱金涌爲假將。前博士黃曙爲?基假將。訓鍊權知權希舜爲義城假將。前縣監李愈爲醴泉假守。使之收集土丁。保境討賊。又以前部將朴慶新爲淸道助戰將。正字金垓爲安東義兵將。正字金光燁爲殷豊縣將。進士李?爲豊基守城將。比安義興永川蔚山等邑。竝爲假差馳啓。 / 6월 ○啓褒列邑守令及義兵將守城討賊事。先生以列郡奔潰。寇賊逼境。而禮安縣監申之悌龍宮縣監禹伏龍眞寶縣監金希契盈德縣令韓璡淸河縣監鄭應聖興海郡守崔輔臣淸道郡守裴應?盡心守城。竭力?賊。?基守城將黃曙,李?殷豊縣將金光燁勸課兵農。堅守嶺?。榮川義將金蓋國副將李興門。多方措置。遮絶賊路。助戰將朴慶新遇賊勇進。斬獲甚多。其忠義竝爲可嘉。連啓以聞。”이다.(www.minchu.or.kr 2006)

  김광엽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豊基/ 壇廟 / 社稷壇 在郡西五里 文廟 在鄕校 城隍祠 移設郡東三里 ?壇 在郡北三里 新增郁陽書院 在郡北十里郁錦洞壬寅創建祀文純公 李滉郡人追祀門人黃俊良號錦溪 愚谷書院 在殷豊縣西五里甲申創建祀牧使 柳雲龍號謙菴 副提學 李埈號蒼石 大司憲 黃暹號息菴 應敎 金光燁號竹日(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豊基 / 人物 / 高麗安裕 興州人後名犯我 文宗諱用初名元宗初登第嘗從忠宣如元丞相傳/ <하권0408-3>/ 旨曰汝王何不近公主裕曰閨?之間非外臣所知今日以是爲問豈足於聽聞丞相以奏帝曰此人可謂知大體者庸可以遠人視耶不復問累官至中贊憂學校日衰建議置贍學錢又納其藏獲爲文章淸勁可觀且有鑑識晩年常掛晦菴先生眞以致景慕遂號晦軒忠肅六年從祀文廟謚文成移屬順興 安于器 裕之子官至檢校贊成事移屬順興 安牧 于器之子登第官至政堂文學移屬順興 安元崇 牧之子登第官至政堂文學移屬順興 安軸 忠肅十一年中元朝制科授遼陽路蓋州判官時忠肅被留于元謂同志曰主憂臣辱主辱臣死乃上書訟之王嘉之超授成均樂正一時表箋詞命多出其手出牧尙州時母在興寧往來盡孝官至僉議贊成事 興寧君謚文貞所著有關東瓦注集移屬順興 安輔 軸之弟忠穆元年中元朝制科授遼陽行中書省照磨輔曰旣受命不供職是不恭也況照磨唯收掌文書無他務吾當赴省旣上官省官重其才皆禮貌之輔曰吾今足以塞吾責母老不歸養非孝也於是棄官東歸以母老乞骸歸養/ <하권0408-4>/ 後爲東京留守不事生産及歿家無擔石之儲謚文敬移屬順興 安宗源 軸之子年十七登第忠穆朝選補史翰秩滿當遷同僚沈東老年高位下宗源讓之軸聞而喜曰讓德之先我讓於人人誰捨我我家有人殆益昌乎辛旽擅權士大夫爭趨附有執政者言吾等爲于於領相諫官可得宗源辭曰我本疏懶趨勢非吾所能也執政慙之景官判門下府事 興寧府院君謚文蘭移屬順興 本朝安天保 太宗時人官至領敦寧府事卽昭憲王后之外舅也移屬順興 安瑗 元崇之子官至留後謚景質移屬順興 安景恭 宗源之子 太祖開國功臣封興寧府院君謚良度移屬順興 安純 景恭之子登第官至判中樞兼判戶曹仍令致仕退居衿川別墅國有大事就而問之謚靖肅移屬順興 安崇善 純之子庚子科壯元官至議政府左參贊謚文肅移屬順興 舊增安琛 登第官至判書子處善 處誠?登第早歿移屬順興 新增泰中起 官至典書 泰有經 官至直提學 黃俊良 文科官至持平 / <하권0409-1>/ 文純公 李滉門人早歿李滉文以祭之撰其行狀祀郁陽書院有文集五卷行于世 黃應奎 文科官至同知敦寧府事號松澗 黃暹 應奎之子文科官至大司憲錄壬辰 扈聖功臣 贈吏曹判書號息菴祀愚谷書院有文集 黃是 暹之第文科官至承旨錄壬辰 扈聖功臣號雲溪 金光燁 順天人文科官至應敎號竹日祀愚谷書院有所撰歸虛集 韓山斗 司馬文章節行名於世壬辰倭亂與忘憂堂 郭再佑倡義火旺山城載倡義錄號秋月堂 黃有中 暹之子號釣臺文科選弘錄値昏朝時以兵郞拜正言不受見幾還鄕之日贈詩江上餞別友人日人生聚散本無期世路浮沈各有時今日與君江浦別去留心事白鷗知我今歸去理漁?携乎同行問若何欲渡漢江須早渡此江風浪暮來多未及癸亥 改玉而歿時人惜之 舊增本朝孝子權得平 壬午進士其父失明出入常扶持飮食必親奉兩親間四日俱亡三載居廬親奠朝夕大祥後又爲母服齊哀三年爲家廟不廢朝夕奠常出告反面弘治己未事 聞/ <하권0409-2>/ 旌閭移屬順興 新增安九敍 牙州監務誠孝出天父死未葬奉母守殯倭卒至人皆奔竄九敍攀?號哭曰舍父屍焉往賊至欲害其母九敍以身當之臂背受刃猶抱母?而哀號賊感而退母子俱得全事聞 命旌閭 李允貞 天性純孝事親竭誠父母之歿居廬六年一不下家年踰八十掃謁先塋雖迅風雷雨未嘗廢焉事 聞 命旌閭 烈女崔召史禮玉 同知 黃應奎之妾性本端慤應奎歿獨居別屋?角雙燕一死於猫春來秋去不失其期作巢之際穴其底以示不復卵育之意客燕來則力戰逐之主母呼則輒下掌上一鄕士庶咸以爲燕門節婦事 聞 命旌閭(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尙州 / 人物 / ...金弘微 弘敏之弟登第歷玉堂官至吏曹參議淹精文學詞華典雅 鄭經世 字景任俱中司馬登第官至吏曹判書諡文莊公天資超越學問高明尤精於易及禮學文章德業蔚爲時宗有愚伏集行于世享道南書院 趙靖 中進士登第官至奉常寺正早遊鄭逑 金誠一之門得爲己之學律己以禮持論以正守制廬墓壬辰亂倡義有功享?水書院弟翊登第官至掌令 李? 大司憲 垠之後中生員以學行登薦剡官至縣監壬辰亂與弟埈在義陣遇賊爭死竟得兩全用力於學杜門求志享玉成書院 李埈 ?之弟中生員登第官至副提學學問文章推重一代館閣章奏勤懇?切立朝遇事抗言直節稟然有蒼石集行于世享玉城書院 金光燁 生進俱中登文科官至典翰 全湜 中進士登第●●●曹參判學問德業爲世所仰光海政亂杜門求志仁廟朝經席館閣論思?切乙丑航海朝天遇?風...(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補遺篇 (慶尙道) / 興海郡邑誌 / 宦蹟 / 鄭之聃 李伯良 李純全 李興文 李處溫 全仲權 金福海 金漢生 李好謙 金崇海 崔淵 白受禧 李增碩 李壽明 許熙 李桂林 李承宗 權子善 韓曾 崔漬 韓士介 洪若? 白壽長 任? 韓禹昌 李終孫 柳世雄 琴致湛 金粹潭 魚得江 見名宦門 趙琳 金緣 宋希奎 尹貞臣 張應旋 洪應世 李股 柳緖宗 邊?程 張應星 尹彦直 沈克禮 朴檣 林晉 孔士儉 / <하권0956-1>/ 李彦華 朴恩恭 安應詢 盧麒 柳世茂 宋應秀 郭? 金逸駿 劉克恭 韓克? 申壽起 禹銓 丁淵 李世灝 宋繼祖 崔輔臣 李鵬 金秀淵 禹致績 朴知進 鄭以吉 金光燁 見名宦門 李卿雲 閔汝任 見名宦門 琴 丁好寬 羅? 崔明善 李景賢 洪? 見名宦門 李宜活 卞三近 有善政碑 李植立 金孝建 崔始量 洪鎬 見名宦門 趙絅 見名宦門有善政碑從享曲江書院院有生筆 崔繼勳 有去思碑 朴吉應 洪? 金頊 金善英 洪憲 李汝澤 金? 成震翕 趙碩耈 元相 捐俸興學...(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우곡일기 / 愚谷日記 / 愚谷日記己酉日課 / 十二月 / 十二日 / 陰, 極寒, 翰林本館褒貶坐歸. 申校理翰卿․元僉知裕男來見. 二昨金文吾, 自大同入來送簡, 翰林處, 送油衫, 吾醉不能答之. 金亨吉自本寺褒貶坐, 乘昏來見. 此日憲府署經, 大憲 金尙容, 執金光燁, 掌朴思齊, 堂李忠養, 呈城持平 洪?․申景洛.(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66권/ 선조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8월 28일(무진) 3번째 기사/ 이항복․유사원․김신국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항복(李恒福)을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藝文館大提學弘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에, 유사원(柳思瑗)을 호조 정랑에, 김신국(金藎國)을 병조 좌랑에, 김광엽(金光燁)을 예문관 검열 겸춘추관 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에 제수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0책 66권 15장 A면/ 【영인본】 22책 54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71권/ 선조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1월 3일(경오) 2번째 기사/ 김광엽․김택룡․이호민․이기․노경임․한준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광엽(金光燁)을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김택룡(金澤龍)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이호민(李好閔)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기(李?)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노경임(盧景任)을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한준겸(韓浚謙)을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43책 71권 2장 B면/ 【영인본】 22책 62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72권/ 선조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2월 14일(신해) 4번째 기사/ 기자헌․이기․노경임․최관․김광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기자헌(奇自獻)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이기(李?)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노경임(盧景任)․최관(崔瓘)을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 김광엽(金光燁)을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44책 72권 6장 A면/ 【영인본】 22책 647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78권/ 선조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8월 27일(임술) 7번째 기사/ 홍문관 부교리 이심, 저작 김광엽 등이 뭇하정이 통해지게 할 것을 아뢰다/ 홍문관 부교리 이심(李?), 저작 김광엽(金光燁) 등이 아뢰었다. ꡒ신들이 삼가 듣건대, 대신들이 미안스러운 분부를 받들고는 황송하고 민박(悶迫)한 심정을 견디지 못하여 석고대죄(席藁待罪)하며 호소하여 천청(天聽)을 돌리려고 하는데도, 진계(陳啓)하는 말을 일체 거절하시므로 지척(咫尺)인 풍신(楓宸)3502) 에 하정이 통해지지 못하고, 후설(喉舌)의 신하들까지도 간절히 비는 혈성(血誠)을 또한 진달(陳達)할 수 없으므로 대궐 뜰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서로 돌아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합니다. 지금이 어떠한 때인데 상하의 사이에 정의(情意)가 막히는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게 되었단 말입니까. 신들이 외람하게도 근시(近侍)의 직에 있으면서 답답한 심정을 견딜 수 없기에, 미천함을 헤아리지 않고 감히 이렇게 외람되이 진달합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위박(危迫)하게 여기는 성의를 굽어살피시어 속히 뭇하정이 통해지게 하소서.ꡓ/ 【태백산사고본】 48책 78권 25장 A면/ 【영인본】 23책 49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註 3502]풍신(楓宸) : 임금이 있는 곳. ☞(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85권/ 선조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2월 22일(계미) 2번째 기사/ 김광엽을 사간원 정언으로 제수하다/ 김광엽(金光燁)을【단정하고 근후한 인물로서 문장에도 능하였다. 】 사간원 정언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54책 85권 14장 B면/ 【영인본】 23책 16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85권/ 선조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2월 25일(병술) 7번째 기사/ 김찬 등 9인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찬(金瓚)을 예조 판서로, 이일(李鎰)을【일찍이 북병사(北兵使)로서 전공이 있었으나 임진년에는 왜적 에게 여러 번 패하였다. 】 지중추부사로, 홍진(洪進)을 대사헌으로, 윤경립(尹敬立)을【부지런하고 능력이 있다는 칭송이 있었다. 】 집의로, 이철(李鐵)을【여러 차례 대간이 되었으나 강직하다는 명성이 없었다. 】 장령으로, 이상의(李尙毅)를 부교리로, 송준(宋駿)․김광엽(金光燁)을 지평으로, 장만(張晩)을 사간원 정언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54책 85권 21장 B면/ 【영인본】 23책 16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85권/ 선조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2월 28일(기축) 2번째 기사/ 남이공․유몽인․김광엽에 관직을 제수하다/ 남이공(南以恭)을 사헌부 지평에, 유몽인(柳夢寅)을 시강원 문학에, 김광엽(金光燁)을 홍문관 수찬에 제수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4책 85권 24장 B면/ 【영인본】 23책 170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89권/ 선조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6월 15일(갑술) 6번째 기사/ 윤자신․강신․박홍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윤자신(尹自新)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강신(姜紳)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박홍로(朴弘老)를 전라도 관찰사로,【잉임(仍任)이다. 】 김홍미(金弘微)를 비문사(備問使)로, 김의원(金義元)을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김신국(金藎國)을 이조 좌랑으로, 최동립(崔東立)을 병조 좌랑으로, 남이공(南以恭)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김신국과 남이공은 모두 경박하고 그릇이 적은데, 일찍부터 청망(淸望)을 차지하였다. 이해 득실에 마음이 기울어 반복 무상하였으며, 선류(善類)를 못살게 굴고, 조정을 탁란(濁亂)케 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어 국맥(國脈)을 병들게 하고 사풍(士風)을 더욱 심하게 무너뜨렸다. 】 노경임(盧景任)을 성균관 전적으로, 김광엽(金光燁)을 성균관 전적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57책 89권 27장 A면/ 【영인본】 23책 24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131권/ 선조 33년(1600 경자 / 명 만력(萬曆) 28년) 11월 19일(기미) 1번째 기사/ 정엽․강찬․이수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사가 있었다. 정엽(鄭曄)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강찬(姜燦)을 병조 참의로, 이수광(李?光)을 병조 참지로, 최기(崔沂)를【근후(謹厚)하고 일을 잘 처리하는 재주가 있다. 】 종부시 정(宗簿寺正)으로, 김현성(金玄成)을【위인이 고담(古淡)하고 글씨 잘 쓰기로 이름이 났다. 】 내자시 정(內資寺正)으로, 소광진(蘇光震)을 승정원 주서(承政宗注書)로, 송석경(宋錫慶)을 병조 정랑으로, 최충원(崔忠元)을 좌랑으로, 홍식(洪湜)을【 홍여순(洪汝諄)의 족자(族子)다. 】 직강(直講)으로, 김광엽(金光燁)을【상주인(尙州人)으로 문재(文才)가 있다. 】 전적(典籍)으로, 구의강(具義剛)을 금산 군수(錦山郡守)로, 유숙(柳潚)을 장흥 판관(長興判官)으로, 김치(金緻)를 해미 현감(海美縣監)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79책 131권 16장 A면/ 【영인본】 24책 151면/ 【분류】 *인사(人事) /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136권/ 선조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4월 24일(신묘) 6번째 기사/ 기자헌․박동량․윤청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기자헌(奇自獻)을【위인이 근후(謹厚)하였다. 】 이조 참판으로, 박동량(朴東亮)을 예조 참판으로, 윤청(尹?)을 사헌부 집의로, 최상중(崔尙重)을 사헌부 장령으로, 최기(崔沂)를 홍문관 교리로, 박진원(朴震元)을 호조 정랑으로, 조희보(趙希輔)를【위인이 못나고 처사가 망령된 것이 많았다. 】 사헌부 지평으로, 강첨(姜籤)을 형조 정랑으로, 김광엽(金光燁)을 형조 정랑으로, 이지완(李志完)을 형조 정랑으로, 여우길(呂祐吉)을 성균관 직장으로, 박엽(朴燁)을 사간원 정언으로, 박동열(朴東說)을 이조 좌랑으로, 조성립(趙誠立)을 예조 좌랑으로, 조홍립(曺弘立)을 병조 좌랑으로, 이흡(李洽)을 성균관 전적으로, 유색(柳穡)을 사헌부 감찰로, 윤황(尹煌)을 성균관 전적으로, 고희(高曦)를 홍원 현감(洪原縣監)으로, 이사성(李士誠)을 장련 현감(長連縣監)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83책 136권 20장 A면/ 【영인본】 24책 237면/ 【분류】 *인사(人事)(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143권/ 선조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11월 22일(병진) 3번째 기사/ 김요립 등에 관직을 제수하다/ 김요립(金堯立)을 종부시 정(宗簿寺正)으로, 여유길(呂裕吉)을 사헌부 장령으로, 김광엽(金光燁)을 사간원 헌납으로, 최충원(崔忠元)을 호조 정랑으로, 민유경(閔有慶)을 형조 정랑으로, 유색(柳穡)을 사간원 정언으로, 김원록(金元祿)을 예조 좌랑으로, 김영남(金穎男)을 배천 군수(白川郡守)로, 안종록(安宗祿)을 구성 부사(龜城府使)로【 안종록은 사람됨이 흉험(凶險)하고 괴려(怪戾)하였다. 】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87책 143권 13장 A면/ 【영인본】 24책 31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144권/ 선조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12월 20일(계미) 7번째 기사/ 유근 등을 관직에 제수하다/ 유근(柳根)을 지중추 부사로, 김상용(金尙容)을 병조 참지로, 박승종(朴承宗)을 강원도 관찰사로, 김거병(金去病)을 충청도 병사로, 이진빈(李軫賓)을 헌납으로, 김광엽(金光燁)을 직강(直講)으로, 이순민(李舜民)을 예조 좌랑으로, 박효생(朴孝生)을 중화 부사(中和府使)로, 신응담(申應澹)을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87책 144권 13장 B면/ 【영인본】 24책 327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144권/ 선조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12월 29일(임진) 4번째 기사/ 이제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제민(李齊閔)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기자헌(奇自獻)을 대사헌으로, 이상의(李尙毅)를 부제학으로, 이정형(李廷馨)을 대사성으로, 박이장(朴而章)을 상의원 정(尙衣院正)으로, 송기(宋圻)를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이진빈(李軫賓)을 선공감 정(繕工監正)으로, 홍준(洪遵)을 사간으로, 조희보(趙希輔)를 사예로, 이수준(李壽俊)을 봉상시 첨정으로, 김광엽(金光燁)을 헌납으로, 김지남(金止男)을 예조 정랑으로 황낙(黃洛)을 직강(直講)으로, 노경복(盧景福)을 형조 정랑으로, 이여기(李汝機)를 형조 정랑으로, 김제남(金悌男)을 이조 좌랑으로, 윤경(尹絅)을 예조 좌랑으로, 최여한(崔汝瀚)을 형조 좌랑으로, 정인함(鄭仁涵)을 형조 좌랑으로, 이지완(李志完)을 정언으로, 박엽(朴燁)을 정언으로, 조존세(趙存世)를 전적으로, 김질간(金質幹)을 전적으로, 이형원(李馨遠)을 감찰로, 이덕연(李德演)을 감찰로, 권태일(權泰一)을 설서(說書)로, 박여량(朴汝樑)을 봉교로, 김유(金?)를 대교(待敎)로, 한술(韓述)을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권순(權恂)을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손기양(孫起揚)을 울산 판관(蔚山判官)으로, 원열(元悅)을 강계 판관(江界判官)으로, 이담(李淡)을 함흥 판관(咸興判官)으로, 이장(李?)을 회령 판관(會寧判官)으로, 최완(崔?)을 함평 현감(咸平縣監)으로, 김성업(金成業)을 장련 현감(長連縣監)으로, 안몽윤(安夢尹)을 남포 현감(藍浦縣監)으로, 소광진(蘇光震)을 봉교(奉敎)로, 정호선(丁好善)을 대교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87책 144권 20장 A면/ 【영인본】 24책 330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145권/ 선조 35년(1602 임인 / 명 만력(萬曆) 30년) 1월 1일(갑오) 4번째 기사/ 헌납 김광엽이 기자헌 등을 출사하고, 여유길 등은 체차하기를 아뢰다/ 헌납 김광엽(金光燁)이 아뢰기를, ꡒ대사헌 기자헌(奇自獻), 지평 윤의립(尹義立), 장령 여유길(呂裕吉), 사간 홍준(洪遵)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최영경(崔永慶)이 간신의 무함을 받아 억울하게 역옥(逆獄)에 걸려 결국 야위어 죽고 말았으니 그 원통함을 온 나라가 다같이 느끼는 바입니다. 다행히 성명(聖明)께서 그의 무고함을 통촉하시어 그 직책을 추증(追贈)하고 원통함을 풀어주심으로써 조정의 시비가 이미 안정되었으니 구구한 변론을 할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성혼(成渾)은 명망을 독차지하여 당로(當路)에 존중받고 있었으니 최영경의 효우(孝友)와 기절(氣節)이 고상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무왕(誣枉)에 대해 변론만 해주었어도 구원할 수 있었을 것이며 소장을 올려 원통함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경이 재차 국문을 받도록 내버려두어 권간(權奸)이 드디어 기뻐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지금 영남 유생의 논의가 여러 해 뒤에 격발되었으니, 그들의 마음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영경 을 성혼 이 지휘하여 죽였다고 한 말이 비록 지나친 면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성혼 이 어떻게 그 책임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사헌부가 황신(黃愼)을 처치할 때 오직 성혼 을 구해(救解)하려고만 하여 당시 구함(構陷)한 자의 죄까지 변명하고 비호하여 많은 사설(辭說)을 늘어놓았습니다. 대간은 시비를 가려내는 것을 직무로 삼고 있으니 일을 논하는 체통이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유길(呂裕吉)은 정고(呈告) 중에 있었으므로 그 사이에 어떠한 의견을 제시할 수는 없었지만 이미 통시(通示)한 서간에 답하였으니 그의 과실도 그때 동료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자헌과 윤의립이 구차히 서로 용납하려 들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으로 피할 만한 혐의가 없는 것입니다. 옥당이 양사를 처치할 적에 논사의 잘못으로 따지자면 헌부의 잘못이 간원보다 더 중하다 하여 한쪽은 출사하게 하고 한쪽은 체직시키도록 청하였으니 처치가 잘못되었습니다. 홍준은 이미 상차(上箚)할 때에 같이 참여하였으니 언관의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없는 형세입니다. 대사헌 기자헌과 지평 윤의립은 출사하게 하고 장령 여유길과 사간 홍준은 체차하소서.ꡓ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8책 145권 1장 A면/ 【영인본】 24책 332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사상-유학(儒學)(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146권/ 선조 35년(1602 임인 / 명 만력(萬曆) 30년) 2월 2일(을축) 5번째 기사/ 한응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한응인(韓應寅)을【일 처리에 태도를 분명히 아니하고 옛것을 좋아하며 임기 응변으로 처리하였다. 】 호조 판서로, 강첨(姜籤)을 사간으로, 윤의립(尹義立)을 장령으로, 김광엽(金光燁)을【엉성하고 졸렬하며 연약하여 강직한 기풍이 없었다. 】 사헌부 지평으로, 이형원(李馨遠)을【위인이 어리석었다. 】 병조 좌랑으로, 여유길(呂裕吉)을【위인이 어두우면서 괴팍하고 학식이 없었다. 】 성균관 사예로, 신지제(申之悌)를 성균관 전적으로, 김질간(金質幹)을【위인이 범상하여 청선(淸選)에 합당치 못하였다. 】 병조 좌랑으로, 김유(金?)를 승정원 주서로, 서사원(徐思遠)을【영남 사람이다. 산림에서 허정(虛靜)을 지키고 명예를 구하지 않았다. 】 연기 현감(燕岐縣監)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88책 146권 3장 B면/ 【영인본】 24책 338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149권/ 선조 35년(1602 임인 / 명 만력(萬曆) 30년) 4월 25일(병진) 3번째 기사/ 구사맹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구사맹(具思孟)을 지중추부사로, 심희수(沈喜壽)를 좌찬성으로, 기자헌(奇自獻)을 공조 판서로, 이광정(李光庭)을 행 대사헌으로, 윤돈(尹暾)을 행 대사간으로, 정혹(鄭?)을 사복시 정으로, 이집(李?)을 군자감 정으로, 이형(李瑩)을 예빈시 정으로, 이정험(李廷?)을 홍문관 교리로, 유희분(柳希奮)을 이조 정랑으로, 김광엽(金光燁)을 정언으로, 오윤겸(吳允謙)을 성균관 직강으로, 강홍립(姜弘立)을 수찬으로, 송석경(宋錫慶)을 수찬으로, 이사수(李士脩)를 형조 정랑으로, 김복선(金福善)을 호조 좌랑으로, 노사해(盧士海)를 공조 좌랑으로, 정신(鄭愼)을 교서관 교리로, 권순(權恂)을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심응유(沈應裕)를 안산 군수(安山郡守)로, 이수록(李綏祿)을 대동 찰방(大同察訪)으로 삼았다. 【 구사맹은 탐욕스럽다는 이름이 있었고, 이광정은 도량이 좁았으며, 이집은 가정에서 패려한 행실이 있었다. 】/ 【태백산사고본】 89책 149권 16장 A면/ 【영인본】 24책 378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150권/ 선조 35년(1602 임인 / 명 만력(萬曆) 30년) 5월 20일(신사) 2번째 기사/ 강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강첨(姜籤)을 사헌부 집의로, 권진(權縉)을【추잡하여 행실이 볼 것 없다. 홍여순(洪汝淳)에게 당부(黨附)하여 정승민(鄭承閔)의 상소를 직접 쓴 자인데 언관(言官)으로 끌어들이니 시사를 알만하다. 】 사헌부 장령으로, 이호의(李好義)를 사헌부 지평으로, 안응원(安應元)을 사간원 정언으로, 김대래를 성균관 직강으로, 이구징을 성균관 직강으로, 이심을 성규관 전적으로, 김광엽(金光燁)을 성균관 전적으로, 이여기(李汝機) 【성품이 오만하고 용렬하다. 】 이순민(李舜民)을【어리석고 용렬하다. 】 예조 정랑으로, 이시언(李時彦)을 여주 목사(驪州牧師)로, 이수준(李壽俊)을 공주 목사(公州牧師)로, 오윤겸(吳允謙)을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조성립(趙成立)을 강원 도사(江原都事)로, 안대진(安大進)을 해운 판관(海運判官)으로, 김현도(金玄度)를 양재 찰방(良才察訪)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89책 150권 7장 A면/ 【영인본】 24책 384면/ 【분류】 *인사(人事) /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158권/ 선조 36년(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1월 3일(경신) 4번째 기사/ 최유원․김광엽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최유원(崔有源)을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김광엽(金光燁)을 사헌부 지평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92책 158권 2장 B면/ 【영인본】 24책 43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164권/ 선조 36년(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7월 27일(신사) 1번째 기사/ 윤돈․허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윤돈(尹暾)을 행 도승지로, 허잠(許潛)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유희서(柳熙緖)가 유수였는데, 탐욕스럽고 사나우며 뇌물로 정사(政事)를 하여 인심을 많이 잃었으므로 허잠이 청백하다는 이유로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있는 것을 계청하여 의망한 것이다. 】 김시헌(金時獻)을【아비 김제갑(金悌甲)이 왜적에게 죽었는데, 시헌은 충청 감사로서 복수군(復讐軍)의 장수가 되어 원수를 갚을 의리는 생각하지 않고 기첩을 많이 거느리고 죄없는 사인(士人)을 장살(杖殺)하여 인심을 잃어 온 도민에게 비난을 받았다. 】 예조 참의로, 이순경(李順慶)을 문학으로, 송석경(宋錫慶)과 김광엽(金光燁)을 수찬(修撰)으로, 권흔(權昕)을 검열로, 이유홍(李惟弘)을 영천 군수(永川郡守)로, 박동열(朴東說)을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94책 164권 19장 B면/ 【영인본】 24책 508면/ 【분류】 *인사(人事) /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166권/ 선조 36년(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9월 21일(갑술) 1번째 기사/ 대신들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ꡒ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윤승훈, 우의정 유영경, 영중추부사 이원익, 아성 부원군 이산해, 오성 부원군 이항복,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 한응인(韓應寅),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 전성군(全城君) 이준(李準), 진흥군(晉興君) 강신(姜紳), 양릉군(陽陵君) 허욱(許頊), 무성군(茂城君) 윤형(尹泂), 지경연 홍진(洪進), 동지경연 심희수(沈喜壽)․이호민(李好閔)․홍여순(洪汝諄), 대사헌 신식(申湜), 행 도승지 윤돈(尹暾), 우승지 윤청(尹?), 좌승지 강연(姜?), 좌부승지 윤휘(尹暉), 우부승지 이경함(李慶涵), 동부승지 유몽인(柳夢寅), 부제학 신흠(申欽), 대사간 박승종(朴承宗), 우빈객 기자헌(奇自獻)에게 각각 돈피 사모 이엄(?皮紗帽耳掩) 1부(部)를, 직제학 홍경신(洪慶臣), 전한 홍식(洪湜), 응교 정협(鄭協), 부응교 구의강(具義剛), 교리 이심(李?), 부교리 조작(曺晫)․권진(權縉), 수찬 김광엽(金光燁)․조즙(趙?), 부수찬 송보(宋?)․강주(姜?), 주서 금개(琴愷), 가주서 박대겸(朴大謙)․서경우(徐景雨), 봉교 심광세(沈光世), 대교 김대덕(金大德), 검열 황경중(黃敬中)․정호관(丁好寬)․권흔(權昕), 집의 윤수민(尹壽民), 장령 윤의(尹?)․이구징(李久澄), 지평(持平) 유시행(柳時行)․원호지(元虎智), 사간 강첨(姜籤), 헌납 이선복(李善復), 정언 정입(鄭?)․금업(琴?), 보덕 권반(權盼), 필선 유간(柳澗), 문학 이순경(李順慶), 사서 최기남(崔起南)․조중립(趙中立), 설서 신광립(申光立)에게 각각 서피 사모 이엄(鼠皮紗帽耳掩) 1부를 내려 주라. 사례(謝禮)하지 말라.ꡓ/ 【태백산사고본】 96책 166권 21장 A면/ 【영인본】 24책 540면/ 【분류】 *왕실-사급(賜給)(www.history.go.kr 2009)

  김광엽 [記事] : 선조실록 169권/ 선조 36년(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12월 1일(임오) 2번째 기사/ 박홍로․강첨․홍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홍로(朴弘老)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강첨(姜籤)을 홍문관 전한으로, 홍식(洪湜)을 사간원 사간으로, 김광엽(金光燁)을 홍문관 교리로, 조성립(趙誠立)을 시강원 문학으로, 신광립(申光立)을 시강원 사서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96책 169권 1장 A면/ 【영인본】 24책 552면/ 【분류】 *인사(人事)(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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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청 윤옥희, 8일 양궁 세계대회 금과 동메달... 축하합니다.

  윤옥희(韓國洋弓代表팀, 男女個人戰 金銀銅 獨食) [記事] :

  한국 양궁대표팀이 국제양궁연맹(FITA) 월드컵에서 개인전 금·은·동메달을 독식하는 최고의 성과를 냈다.

 한국은 2010년 8월 8일(한국시간) 미국 유타주 오그던에서 벌어진 FITA 3차 월드컵 여자 개인전 결승에서 김문정(청원군청)이 기보배(광주광역시청)를 세트점수 7-1로 꺾고 금·은메달을 나눠 가졌다.

  3ㆍ4위 결정전에서는 윤옥희(예천군청)가 주현정(현대모비스)을 세트점수 6-0으로 따돌리고 동메달을 땄다.

  한국은 남자 개인전 결승에서도 김우진(충북체고)이 대표팀 동료 오진혁(농수산홈쇼핑)을 세트스코어 7-3으로 따돌리고 1, 2위에 나란히 올랐다.

  임동현(청주시청)은 3ㆍ4위 결정전에서 크리스핀 두에나스(캐나다)를 세트스코어 7-3으로 꺾고 개인전에서 마지막 남은 메달을 한국의 몫으로 돌렸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여자 대표팀은 단체전 결승에서도 209점을 쏘아 204점에 그친 인도를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은 이로써 남녀 개인전에 걸린 메달을 독식하고 여자부와 남자부 단체전에서도 금메달과 동메달을 따면서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재확인했다.

  (성환희 記者 韓國日報 2010-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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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655

  예천군 방문 : 서울 천주교 명동성당 로고스성가대가 2010년 8월 7일 회룡포를 찾아왔다.

  그곳에서 1박을 하고, 그 이튿날 8일 일요일 10시반에는 예천성당에서 미사참례를 하였다.

  봉헌시간과 영성체시간에 성가합창, 그리고 미사 끝에 축가합창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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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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