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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292:김복일郡守1(祝이상근.권상호/예천방문664)
작성자장병창 @ 2010.08.22 18:11:29
  예천의 자랑(2292) : 용문면 죽림리 입향조 김복일 군수(1)(附 예천 출신 이상근, 19일 얼레빗 제작 충남도무형문화재 지정...축하합니다/지보면 출신 권상호, TV 출연... 축하합니다/예천방문 664)---  김복일(金復一) : 1541(중종 36)-1591(선조 24), 진사 권오상(進士權五常)의 손녀와 결혼하여 안동시 임하면(安東市臨河面)에서 용문면 죽림리 처가 근처 남악골(南嶽谷)로 이우(移寓)하였다. 자는 계순(季純), 호는 남악(南嶽), 본관은 의성, 성균생원 진(璡)의 5자, 극일(克一)ㆍ수일(守一)ㆍ명일(明一)ㆍ성일(誠一, 鶴峰)의 동생, 퇴계 이황(退溪李滉)의 제자이다. 편부 슬하(嚴侍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564년(명종 19) 식년 진사시에 3등 78위로 합격, 1570년(선조 3) 식년 문과에 병과 17위로 급제하여 1575년(선조 8)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를 시발로 청백한 벼슬살이를 하였다. 전적(典籍)을 지내고, 형조(刑曹), 호조(戶曹), 공조(工曹)의 낭관(郎官)을 지냈다. 전라도 어사(御史)로 나가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을 숙청, 단양 군수, 풍기 군수 등을 지냈다. 1584년(선조 17)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로 부임하여 감사(監司) 정곤수(號는 栢谷)가 모든 공사(公事)를 서로 의론하여 결정했고, 1587년(선조 20) 울산 군수(蔚山郡守)로 재임 중 백성을 아끼고 공사를 엄정(嚴正)히 하여 청백리(淸白吏)의 본을 보였으니 이임한 뒤에 군민(郡民)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지금까지 울산향교(蔚山鄕校) 뒷뜰에 서 있다. 이어 창원 부사(昌原府使), 경주 교수(慶州敎授),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동 사성(司成), 풍기 군수(豊基郡守),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지냈다. 형 극일(克一), 수일(守一), 성일(誠一), 명일(明一)과 함께 안동의 사빈영당(泗濱影堂, 泗濱書院)과 예천군 다인현(多仁縣)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고, 죽림리(竹林里)에는 남악정(南嶽亭)이 있다. 묘는 용문면 내지리용문산 간좌(龍門山艮坐)의 언덕에 있다. 그는 청렴 강직(淸廉剛直)한 평생을 살고 갔다. 6세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해조류(海藻類)도 예법에 어긴다고 먹지 않았고, 부친상(父親喪)에는 시묘했다. 당시의 뛰어난 효자였다. 어느 부자가 길가에 사치스러운 정자를 지어 놓고 자랑하더니, 그가 그 앞길로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철거했다고 한다. 또 그의 친우인 당대의 고관이 방문했다가 그의 이부자리가 비단이 아니고 무명인 것을 보고 스스로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전라도 어사(御史)가 되었을 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자랑하던 전주 부윤(府尹)도 그가 어사가 되어 호남으로 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스스로 사직을 하였다니, 그의 성격의 강직함을 알만 하다.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재임 중 왜구(倭寇)의 노략질이 있을 때 신속히 출동하여 도적을 물리치고 뒤늦게 달려온 병사(兵使)에게 보고하기를, "주장(主將)이 겁을 먹으면 이 나라의 안보를 어찌하랴"라고 하여 일신의 편안함보다 백성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다. 또 당시의 감사(監司)가 순시온다는 기별을 받고 울산의 경계까지 가서 마중했으나, 감사는 다른 곳에서 술마시고 오지 않았으므로 "감사가 공연히 바쁜 백성을 피곤하게 하는구나"라고 탄식하고, 또 권문세가(權門勢家)에게 바칠 예물을 요구하므로, "어진 백성의 가난한 재물을 긁어다가 살찐 세도가를 더욱 부자되게 할 것이 무엇이냐"라고 대들었고, 감영(監營)에서 비장(裨將)이 감사의 선조 제사에 쓸 것이라면서 울산의 토산품을 거두어 가는 것을 잡아 가두고 사유를 감사에게 보고하니, 감사가 겉으로는 좋은 척하고 속으로는 분히 여겨 ''''최상(最上)''''으로 보고한 고과장(考課狀)을 다시 찾아다가 ''''최하(最下)''''로 고쳐서 올렸다. 그의 화살같이 곧고 대쪽같은 마음이 이와 같으므로 모두가 지나치게 청렴 강직(淸廉剛直)한 성품을 염려하더니 세상과 조화되지 못하고 일생을 곤궁속에서 지냈으니 성대(盛代)를 못 만난 탓이라고나 할까? 일찌기 한강 정구(寒岡鄭逑)와 오리 이원익(梧里李元翼)이 그의 절행(節行)을 평가하여 이르기를, "지금 세상에 다시는 그런 사람이 없다."라고 칭찬했고, 선조(宣祖)는 <문헌비고(文獻備考)>, <대명일통지>, <송감>,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을 하사(下賜)하여 은혜를 베풀었다. 그의 옛집에는 지금도 ''''가학루(駕鶴樓)''''란 현판만 남아 그의 청렴 강직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학사 김응조가 그 행장을 지었는데, 거기에서 이르기를, "공은 천품이 효성스러웠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을 적에 해초마저 물리치고 먹지 않으면서, ''''그 해초가 생선과 섞이어 있었을까 두렵다''''라고 했으며, 아버님의 상중에는 3년을 시묘하면서 한 번이라도 집에 온 일이 없이 슬퍼하던 나머지 병이 되어 거의 숨이 끊어질 번하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그것이 평생의 고질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입지함이 비범하더니 열아홉 살에 형인 학봉 김성일(鶴峰金誠一)과 더불어 백운동(영주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다가 걸어서 퇴계 이황(退溪李滉) 선생께 나아가 제자되기를 정성되이 청하여 그 문하에서 지결을 이어받고 부지런히 학문을 연마했다. 평상 시에도 의관을 정제하고 책상 앞에서 책을 보았으니 <주서절요>ㆍ<대학연의>ㆍ<심경>ㆍ<근사록> 등을 손에서 놓는 일 없이 오랜 동안 거듭 공부해 이룬 바가 더욱 심오했다. 김성일이 공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문에서, "성현의 가르침에 침잠하고 마음에 새겨 두어 어기지 아니했으며 심성을 잘 다독거려 기질을 바로 잡았으니 지난날은 강직하고 사납다가 이제는 화평해졌다. 어려서는 둔하더니 마침내 민첩하고 총명해져서 항상 마음이 정직했으며 자기 자신을 잘 다스렸고, 굳굳하고 깔끔했다. 집에서는 예도로써 고향에서는 의리로써 세상을 살아가니 집에서나 밖에서는 어김없으니 그 힘써 공부함이 이와 같았다."라고 했다. 일찍이 예천 금곡(용문면)으로 우거해서 통문(通文)을 내어 부로(夫老)들과 함께 덕진동에 서당을 세우고 많은 선비들이 공부하는 곳이 되게 하다가 뒷날 예천읍 생천리 정산서원(鼎山書院)으로 옮겨져서 흥학(興學)하고 명교(明敎)하게 했으니 그 공 또한 거룩하다 할찌라.  안동에서 여강서원에 사당을 세우고 퇴계 이황 선생 위패를 모시고자 하여 사림이 청액(請額)하려고 안동부에 정문(呈文)할 적에 공을 추천하여 그 글을 짓게 하니 누천백언(累千百言)이라 그 글을 읽은 이들이 모두, "이 글은 도를 훤히 깨달아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처럼 휼륭히 글을 짓기가 불가능하다."라고 했다. 모습에 덕성이 넘치고 기와 절도를 애써 순수하게 단련하니 원근이 모두 감복하여 마음 속으로부터 존경했다. 어떤 행실 나쁜 사람이 길섶에 매우 사치스럽고 화려한 정자를 지었었는데, 공이 이 정자 가까이를 지나가게 된다는 소문을 듣고는 즉시 그것을 헐어 부수어 버렸다. 초계 권동보(草溪權東輔)의 이붓자리와 베개가 화려했었는데, 권동보가 일찍이 공과 더불어 함께 자게 되었을 때 공의 침구가 떨어지고 헤어졌던 것을 보았기로 마음 속으로 늘 부끄럽게 여겨 평생 감히 그 침구를 펴고 자지 못했다고 한다. 내직에 용납되지 못하여 외직으로 나가서는 그 백성들을 괴롭힘이 없었으며 날마다 의관을 정제하고 직무에 임하여 문교를 숭상하는 힘을 오로지 하면서 사림으로서 항상 지켜야 될 도리를 먼저하고 문치로 백성을 교화하는 일을 그 다음으로 해서 지극히 정성으로 가르쳐 인도하기에 꾸준하고 부지런히 하니 일 년이 채 못되어 모든 공무가 가닥을 잡았다. 선비는 부지런히 공부하고, 한량(閑良)은 부지런히 기예(技藝)를 연마하고, 백성은 농사해서 모든 백성이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선비는 바른 도리를 알고, 한량은 재예(才藝)가 이루어지며, 백성들에게는 곡식이 넉넉해지니,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했다. 백성을 어루만지되 어린아이 다루 듯 조심조심하고, 사랑했으되 죄를 짓거나 허물을 저지르면 조금의 가차가 없었으니, 백성들이 저절로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 정성을 다해서 따르고 신명(神明)처럼 공경하고 부모 받들 듯 했다. 바야흐로 울산 군수에서 창원 부사로 옮겨갈 때 울산의 노소없이 경황(驚遑)하여 수레를 부여잡고 수레바퀴 앞에 드러누워서 길을 막고 울산 고을을 다스려 주고 떠나지 말라고 떼를 쓰는 백성들을 창원 이졸(吏卒)이 몰아내느라고 애를 먹었다. 창원에서 파직되어 물러날 때 선비들은 상소를 품고 대궐 문 앞에서 감사(監司)를 공박하고, 백성들은 감사의 관아 앞으로 달려가 원망하다가 비록 가두이고 형벌을 받아도 끝내 후회하지 않았다. 두어 달 사이 풍기 군수로 재임했으나 백성들이 선정비를 끌어안고 울부짖었으니 참으로 고금간에 이러한 일은 들은 바도 없었다. 덕성스런 정치가 남보다 더 훌륭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을 이처럼 감동시킬 수 있었으리오. 그러나 자봉(自奉)이 가난한 선비이듯 높은 지조를 지키는 매우 가난한 생활의 괴로움을 겪는다고 원근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세상을 떠났어도 오히려 그 칭송이 두드러지니 특별히 그 나머지 일이야 어찌 가히 공에게서 더 많이 구할 것이 있을 것인가? 그 성품이 강직하고 대쪽같고 굳세어 시속에 빌붙어 굽신거리지 않았고, 옛 친구라도 요로에 들어갔으면 지나치게 힙쓸리지 않았다.  일찍이 서울에서 학봉 김성일(鶴峰金誠一) 선생과 한 집에서 거처할 때 당대의 명사들이 그 집안에 몰려들었으나, 공은 자리를 피하고 만나지 않았다. 왕명을 받들어 경기도 재상 경차관이 되었을 적에 강화백(江華伯)은 중신인데도 파직되게 했고, 전라도 어사가 되었을 적에 전주 고관이 임금의 친척인데도 파직되게 하니,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괴로워서 혀를 빼 물더라. 울산 군수일 적에 해상(海上)을 경계할 일이 생겼는데, 공이 군사를 이끌고 먼저 배에 올라탔는데, 병사(兵使)가 늦게야 이르자, 공이 그것이 부당하다고 꾸짖으니, 병사가 부끄럽게 여겼다. 일찍 관찰사의 행차를 군계(郡界)에서 기다리는데, 관찰사가 이르는 곳마다 촹추(荒醜)하고 때가 지나도 도착하지 않으니, 마침내 자리로 돌아가면서, ''''나는 백성들이 괴로움 당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관찰사가 임금의 인척의 뜻으로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횡포를 부리자, 공이, ''''춘추시대 노(魯) 나라 사람으로 청빈 자족한 원헌(原憲)처럼 가난한 사람의 재물을 뺏아 노 나라에 권부(權富)를 누린 계씨(季氏)와 같은 부자를 도우려 하느냐?''''고 하니, 관찰사가 부끄럽게 여겨 그만 두었다. 관찰사의 비장(裨將)이라고 자칭하는 자가 창원부에 와서 제수(祭需)를 우격다짐으로 거두어들이자, 공이 화가 나서 그를 옥에 가두고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관찰사에게 보고하니, 관찰사가 마음 속으로는 성이 났으나 보고한 대로 모두 변상해 주었지만, 전최 장계(殿最狀啓)에서 최고를 최하로 고쳐 보고했다. 정도를 위하여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함이 모두 이와 같았다. 세상에서 공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공의 뜻을 아는 이들도 또한 공이 지나치게 강직해서 중용되기 어려운 것을 걱정했는데, 마침내 관계(官界)를 무시하고 뜻이 맞지 않아서 말년까지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정계에 큰 포부를 펴는 일 또한 공을 기다려 주지 아니한 까닭에 공은 괴로워했으니, 이 어찌 운명이 아니랴? 완평군 이원익(完平君李元翼)과 한강 정구(寒崗鄭逑) 선생이 늘 공의 절행(節行) 높음을 칭찬하되, ''''이 시대에는 그와 비교될 인물이 없다.''''고 했으니, 어찌 듣기 좋으라고만 할말이겠는가? 1657년(효종 8) 3월 풍산 김응조(金應祖) 삼가 행장을 짓다." 묘는 용문면 용문산(龍門山)에 있다.(司馬榜目, 文科榜目, 襄陽誌 1661, 安東의 書院 1994, 연방세고, 族譜, 醴泉郡邑誌 1780 1786 1841, 醴泉郡誌 1939, 韓國史大事典, 내故庄傳統가꾸기 1981)  김복일(金復一) [記事] : 원문자료/ 봉정대부 수성균관사성 겸 춘추관편수관 남악선생 김공 행장 통훈대부성균관사성남악선생김공묘갈명/ 봉정대부 수성균관사성 겸 춘추관편수관 남악선생 김공 행장 : 공의 이름은 복일(復一), 자는 계순(季純), 자호는 남악(南嶽)이다. 신라 경순왕(敬順王) 부(傅)의 아들 석(錫)이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져 자손들이 거기에 살았으므로, 드디어 의성 김씨가 되었다. 김용비(金龍庇)는 고려 태자첨사(太子詹事)인데, 지금까지 현사(縣祠)에서 제향하고 있다. 첨사공이 김의(金宜)를 낳으니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이고, 복야공이 김서지(金瑞之)를 낳으니 조현대부(朝顯大夫) 내영고소윤(內盈庫少尹)이며, 소윤공이 김태권(金台權)을 낳으니 봉익대부(奉翊大夫) 문예부좌사윤(文睿府左司尹)이시다. 사윤공이 김거두(金居斗)를 낳으니 봉익대부(奉翊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이고, 전서공이 김천(金?)을 낳으니 선략장군(宣略將軍) 진례도도만호(進禮島都萬戶)이며, 만호공이 김영명(金永命)을 낳으니 통훈대부(通訓大夫) 신령현감(新寧縣監)이고, 현감공이 김한계(金漢啓)를 낳으니 통훈대부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인데, 공의 고조이며, 우리 조선의 문종(文宗)을 섬겼고, 노산조(魯山朝)에 경연(經筵)에 출입하여, 문행(文行)으로 이름을 드러내었으나, 세조가 선위(禪位)를 받은 뒤로는 병을 빙자하고 다시 벼슬을 하지 않았다. 증조부 김만근(金萬謹)은 성균진사로, 통훈대부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를 추증 받았고, 조부 김예범(金禮範)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추증 받았다. 아버지 김진(金璡)은 성균생원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추증 받았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貞夫人) 여홍민씨로, 민세경(閔世卿)의 딸이며, 문도공(文度公) 민제(閔濟)의 후손이다. 판서공이 아들 5명을 낳았는데 공은 다섯째가 된다. 3대가 추증의 은전을 입은 것은 공의 넷째 형 학봉(鶴峯) 선생 김성일(金誠一)이 귀하게 된 때문이다. 가정(嘉靖) 신축년(1541)에 공은 안동 임하현(臨河縣) 천전리(川前里) 본가에서 태어났는데, 겨우 6세에 모부인을 여의었다. 판서공이 불쌍히 여겨 가르치는데 독려를 하지 않았으나, 조금 자라면서 비로소 분발 독서하여 공부하는 실력이 남의 갑절이나 하였다. 몇 해 사이에 문장이 화려하여져 갑자년(1564)에는 사마시에, 경오년(1570)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명망이 자자했는데, 시기하는 자가 배척하여 성균관으로 갔다. 을해년(1575)에 학유(學諭)에 보임되어 조정에 나아가 시를 지어/ 혼정신성 귀성길 어이 이리 늦는가/ 경륜을 펼칠 계획 이미 어그러졌네/ 하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기묘년(1579)에 박사(博士) 전적(典籍)으로 승진되었고, 경진년(1580)에 형조좌랑으로 옮겼다. 4월에 판서공이 별세하여 상을 다 마치자 공조․호조좌랑을 제수 받고, 전적(典籍)으로 옮겨졌는데, 공이 수차 사양하다가 의리상 마음이 편치 않아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취임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계미년(1583)에 호조정랑에 제수되니 아전들이 두려워하여 직분을 다 했다. 가을에 경기도 재상 경차관(災傷敬差官)을 제배하고, 또 전라도 어사에 제수되었는데, 정직하다는 소문이 나서 탐관오리들 중에는 풍문만 듣고도 인끈을 풀어놓고 물러가는 자가 있었다 한다. 갑신년(1584)에 형조에서 강원도 도사로 나갔는데, 감사(監司) 정공(鄭公) 곤수(崑壽)가 깊이 공경하고 존중하며,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자문하여 결정하였다. 정해년(1587)에 울산군수(蔚山郡守)에 제수되었는데 온 도에서 가장 우수하여 어사가 조정에 치계(馳啓)하여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승진 임명하였다. 이 때 부근의 절도사진(節度使鎭)에 폐단이 만연하였는데, 공이 이르러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정도로 처리하니 모든 민폐가 통렬히 제거되었으나, 끝내 감사와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그만 두고 돌아왔다. 가을에 경주 교수(慶州敎授)에 제수되었는데,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ꡒ조정에서 비록 나에게 변장(邊將)의 관직을 내려 주어도 오히려 있는 힘을 다해야 할 터인데, 더구나 유생을 가르치는 자리임에랴.ꡓ하고, 여러 생도들을 이끌어 경학을 가르치고, 도의를 권장하니 많은 선비들이 격려되었다. 경인년(1590)에 단양군수(丹陽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제수 받고 사성(司成)으로 승진하였다가, 풍기군수(豊基郡守)에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석 달 동안 누워 있었는데도, 경내가 잘 다스려졌다. 뒤에 병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와, 신묘년(1591) 8월 17일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마치니, 향년이 51세였다. 동년 월 일에 예천군(醴泉郡) 북쪽 용문산(龍門山) 간좌(艮坐) 터에 장사지냈다. 아아, 공은 성품이 효성스러워서 어려서 어머니상을 당하였는데 미역국을 먹지 않고 물리치며 바다 물고기 속에 섞여 있었을까 두려워서라고 하였다. 판서공 상을 당하여서는 묘소에 여막을 치고 3년을 지키면서 한 번도 집으로 내려온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병을 얻어 위태로울 뻔하였다가 가까스로 되살아났으나, 마침내 평생의 병이 되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 다른 뜻을 품고, 19세기 학봉(學峯) 선생과 함께 백운동(白雲洞)에서 독서를 했는데, 도보로 퇴계 선생을 찾아가 집지를 하여 학문의 요지(要旨)와 비결(秘訣)을 얻은 다음 스스로 독실하게 공부하였다. 평소 생활에서도 반드시 의대(衣帶)를 갖추고 책상을 대하여 앉아 책을 보았으니, 이를테면 『주서절요(朱書節要)』, 『대학연의(大學衍義)』,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공력을 오래 쌓아 조예가 더욱 깊어졌다.
학봉선생이 제문(祭文)에서 이르기를/ 경전의 가르침에 깊이 젖어/ 가슴에 새기고 잃지 않았네/ 심성을 잘 다스리고/ 기질을 바로 잡으니/ 처음에는 강경하다가/ 마침내 화평해지고/ 지난날 노둔하던 자질/ 오늘날 명민해졌네/ 마음가짐은 정직하게 하고/ 몸가짐은 깨끗하게 하며/ 집에서는 예로 하고/ 향당에서는 의로 하였네/ 이러한 도리로 세상을 살아가며/ 안과 밖이 일치했네/ 하였으니, 그 학문에서 힘입은 바가 이와 같았다. 일찍이 예천의 금곡(琴谷)에 우거하면서 글을 지어 부로들을 권유하여 함께 덕진동(德進洞)에다 서당을 세워서 많은 선비들이 강학의 장소로 삼게 했는데, 뒤에 정산(鼎山)으로 옮겨 가 서원으로 만들어 학문을 진흥시키고 교육을 밝게 하였으니, 그 공 또한 위대한 것이다. 안동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을 세워 퇴계 선생을 제향하고 사람이 사액(賜額)을 청하고자 본 고을에 정문(呈文)을 올리는데, 공을 추대하여 글을 짓게 했다. 그 글이 장장 여러 천백 글자나 되었는데, 읽어 본 사람은 모두 도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성대한 덕을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청수하고 순결한 절조는 원근 사람들이 다 공경하고 기꺼이 복종하였는데,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 길가에다 아주 화려하고 사치스런 정자를 지었다가, 공이 정자 아래로 지나갈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곧 허물어 버렸다 한다. 권초계(權草溪) 동부(東輔)의 이부자리가 화려하고 아름다웠는데, 언젠가 공과 함께 잠을 자다가 공의 삼베 이불과 헤진 베개를 보고는 부끄러운 마음에 끝내 자기 침구를 펼 수 없었다고 한다.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지방 고을로 내려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떠돌면서도 그 백성들을 멸시하지 않고 날마다 관대(冠帶)를 갖추고 일에 임했으며, 다스림에는 오로지 문교를 숭상하며 윤리 도덕을 앞세우고 문예를 뒤로하여 지성껏 계도하고 부지런히 힘썼다. 심지어 서무의 처리까지도 치밀하고 조리가 있어 일 년이 못 가서 정치와 교화가 다방면으로 잘 전달되었다. 그 결과 선비들은 부지런히 학문을 닦고, 무사들은 부지런히 무재를 익히며, 백성들은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다. 온 경내의 백성들이 감히 게으름을 피우거나 방종하여 노닐지 못했고, 공부하는 선비들은 학문의 방법을 알게 되었으며, 무사들은 재능을 기르고, 백성들은 남은 곡식이 있게 되어 칭송의 소리가 드높았다. 서민들을 어린아이 사랑하듯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나 죄와 과실이 있는 자는 전혀 용서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진심으로 기꺼이 복종하며 신명(神明)처럼 존경하고 부모처럼 사랑했다. 공이 울산에서 체직되어 곧 창원부사로 옮겨 갈 때에는 온 고을의 노소들이 놀라서 경황없어 하며, 수레 채에 매달리기도 하고 길을 막고 눕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모시러 온 창원의 아전과 군졸들을 몰아내기까지 하였다. 창원에서 내침을 당할 때에는 선비들이 조정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장을 올려 방백을 공박했고, 서민들이 일제히 순영(巡營)에 들어가 그들을 원망하고 미워하였는데, 비록 구금되고 형장을 맞으면서도 끝내 후회하지 않았다. 기성(箕城)에 이르러서는 채 몇 달 동안 정사를 보았는데도 송덕비를 안고 통곡하는 백성까지 있었으니, 실로 고금에 듣지 못한 일이었다.
  그 덕으로 다스린 정치가 남을 훨씬 뛰어 넘고, 사람을 크게 감동시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겠는가. 자신의 생활을 마치 한미한 선비처럼 가난하고 고생스럽게 하다는 소문이 세상에 드높이 퍼져서 죽은 뒤에도 오히려 칭송하는 말을 들은 것은, 그저 여분의 일 일 뿐이다. 어찌 이것으로써 공에게 보탬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오직 그의 성품이 본디부터 강직하고 엄격하여 유속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동배들이 요로(要路)에 들어가 있어도 절대로 서로 너무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언젠가 학봉 선생과 함께 한 관사에서 거처하였는데, 당시의 명사들이 다 몰려들었지만 회피하고 만나보지 않았다. 경기도 재상 경차관(災傷敬差官)으로 나갔을 때는, 강화유수(江華留守)가 중신(重臣)인데도 쫓겨났고, 호남 어사로 나갔을 때에는 전주부윤(全州府尹)이 귀척(貴戚)인데도 배척당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울산부사로 있을 때는 바다에 경계할 일이 있어 공이 병선(兵船)을 이끌고 먼저 출발한 뒤에, 병사(兵使)가 뒤에 이르자, 공이 의리를 내세워 꾸짖으니 병사가 이에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언젠가 순찰사를 맞으러 관할 경계까지 나갔는데, 순찰사가 이르는 곳마다 술에 취하여 기한을 넘기고 도착하지 못하자, 공이 말하기를 ꡒ나는 차마 백성들을 더 괴롭힐 수 없다.ꡓ하고 지레 돌아와 버렸다. 감사가 또 귀척(貴戚)이라는 이유로 백성들에게 청탁을 받고 횡포를 부리는 것을 보고, 공이 ꡒ원헌(原憲)에게서 수탈하여 잘사는 계손씨(季孫氏)를 먹여 살린다.ꡓ고 보고하니, 감사가 부끄러워 횡포를 부리지 않았다고 한다. 감영의 비장이라고 자칭하는 자가 고을에 와서 제수(祭需)를 강제로 징수하자, 공이 노하여 그를 잡아 가두고 사유를 밝혀 감영에 보고했더니, 감사가 억지로 따르면서도 속으로는 노하여 심지어 전최(殿最) 장계를 되돌려 보내면서 ꡐ최(最)ꡑ를 ꡐ전(殿)ꡑ으로 고치기까지 하였으나, 곧고 바른 도리를 굽히지 않았으니, 흔들리지 않는 곧은 신조는 대개 이러하셨다. 세상에서 공을 모르는 이는 참으로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을 아는 사람들도 그의 지나친 강직성이 쓰이기 어려워서 필경은 세상에서 말살되거나 맞지 않을 것을 염려하였다. 말년에 마지막으로 임명하자는 의논도 있었으나, 이것 역시 공을 대우하려는 것이 아니었으며, 공도 이미 병으로 누워 있는 상태였다. 아! 슬프다. 이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랴. 완평군(完平君) 이상국(李相國) 원익(元翼), 한강 정선생(寒岡 鄭先生) 구(逑)가 일찍이 공의 높은 절조를 일컬어 지금 세상에서는 이러한 사람이 없다고 한 것이 어찌 비위를 맞추려는 말이겠는가. 공의 전 부인은 숙인(淑人) 예천권씨(醴泉權氏)인데 증참의(贈參議) 지(祉)의 딸이고, 후 부인은 숙인 안동권씨 현감 심언(審言)의 따님이다. 전부인 숙인이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김지(金?)는 선교랑(宣敎郞)이고, 차남 김숙(金潚)은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나 요절했다.  장녀는 완흥군(完興郡)으로 추봉(追封)된 감사 최현(崔睍)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정언(正言) 최정호(崔挺豪)에게 출가하였다. 선교랑이 2남을 낳았는데, 김시진(金是桭)은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이고, 다음은 김시각(金是?)이며, 딸은 좌통례(左通禮)를 지낸 김업과 박경현(朴景賢), 이질(李?), 박시화(朴時華)에게 출가하였다. 감사 최현의 아들 최산휘(崔山揮)는 청송부사(靑松府使)이며 완산군(完山君)으로 추봉되었다. 정언 최정호는 2남을 두었는데, 최충망(崔忠望), 최충량(崔忠亮)이고, 딸은 금양원(琴養元), 생원 남자(南磁), 김려(金礪)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내외 증손․현손 남녀 약간 있다. 후 부인 숙인은 자녀가 없었다. 아 슬프다. 공이 세상 떠난 지 지금 67년이 되었으나 아직까지 묘도에 비석을 세우지 못하여, 공의 증손 진사 김빈이 그 선인 참봉공이 지은 행록(行錄)을 가지고 와서 글 잘 짓는 군자를 찾아 비명을 지어, 후세에 전하려 하니, 이른바 훌륭한 자손이다. 그러나 졸렬한 글재주로서 병필자(秉筆者)에게 믿음을 줄만한 글을 짓기에는 부족하고 우선 잘못된 부탁에 말막음이나 하는 것이다. 정유년(1657) 3월 하순 후학 풍산(豊山) 김응조(金應祖) 삼가 기록한다. - 김응조(金應祖)(www.koreastudy.or.kr 2007)---  *예천 출신 이상근, 19일 얼레빗 제작 충남도무형문화재 지정...축하합니다.  이상근 : 얼레빗 製作 이상근 氏 忠南道無形文化財 指定) [記事] : 얼레빗 제작자인 충남 공주시 계룡면 구왕리 이상근(53) 씨가 2010년 8월 19일 오전 이준원 공주시장으로 부터 충남도 무형문화재 인정서를 전수받고 있다.(聯合뉴스 2010.08.19 11:52)// 30년 얼레빗 제작 외길 이상근 씨 무형문화재 지정 21분전 | 뉴시스 | 미디어다음// 얼레빗 이상근 씨, 19일 무형문화재 인정서 전수받아 4시간전 | 대전시티저널 | view// 관련기사 총 4건(daum 2010)   이상근 : 1955- , 예천의 대대로 얼레빗 장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얼레빗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아버지가 사주단자에 얼레빗을 넣는 모습을 보고서이다. 왜 사주단자에 빗을 넣을까 하는 의문으로 시작된 얼레빗 인생은 이제 그의 분신 마냥 따라다닌다. 그는, "빗을 자주 사용하면 치매를 예방해 준하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하루에 200회 정도 머리에 빗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라고 한다. 또 빗이 옛날 사람들에 더욱 소중했던 것은 혼인의 징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남자든 여자든 혼인을 하면 모두가 머리의 모양이 바뀌게 된다. 머리 모양의 변화는 빗에서 시작되고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빗을 사랑의 징표로 교환하게 된 것이다. 빗에 사용되는 나무는 유실수나 가시 돋친 나무가 대부분이다. 이는 유실수가 인체에 무독하기 때문이다. 또 가시 돋친 나무는 스스로 무독해 가시란 보호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예천에서 태어난 그는 소목장을 겸했던 아버지가 목재가 좋은 태백으로 이사하면서 오랜 세월 태백에서 생활했다. 가구점을 운영하며 좌경 등을 제작하던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목공의 기초를 배웠다. 그러나 목공의 일이 인생에서 얼마나 고달픈가를 알고 있던 아버지는 그가 목공일을 하는 것을 극구 반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게 된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그는 아버지 몰래 목공 관련 학원에서 조각 공부를 계속했다. 군대를 제대한 후 1년 간 태백에서 목공예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그는 판로의 불명확성으로 대구 비슬산 옥포 용연사 앞에서 절의 일을 봐주면서 목공예품을 직접 제작해 판매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런 그가 이 곳 충남 공주시 계룡면으로 인연의 끈을 옮긴 것은 용연사 생활 3년 후 지명 스님의 소개로 갑사에 터를 잡게 된다. 갑사에 터를 잡은 그는 인생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대가 끊어져가던 얼레빗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1985년과 1986년 얼레빗으로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특선과 장려상을 잇따라 받는 등 그의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서양의 빗은 단순히 머리를 빗는다는 기능만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빗은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문화는 머리에서 시작되었다. 머리를 빗으면서 댕기가 생겨났고, 장식을 위해 산호빗ㆍ금빗ㆍ은빗ㆍ칠보빗 등이 나오기 시작한다. 아름다움을 발산하려는 욕구의 분출이 머리로부터 시작, 모든 의관으로 번져나갔다. 그가 설명한 빗이 우리 문화에 미친 영향이다. 그는 현재 노수연 씨를 제자로 삼고 얼레빗의 전부를 가르치고 있다. 이 외에 장애인 제자들을 많이 두어 전국에서 활약하고 있을 정도이다.(인터넷 museum21.org 2001)  [東亞日報] : 한국 고유의 ''''얼레빗''''을 25년째 만들어와서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 기능을 보유 발전시키고 있는 장인이어서 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2003년도 기능전승자로 선정되었다. 그는 5대 조부부터 본인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 간 장인(匠人)으로 살아온 전통 장인 집안 출신으로 공조 장인의 계보를 6대째 잇고 있다. 그의 5대 조부는 조선시대 경공장(京工匠) 출신으로 장신구를 주로 만들었고 공조 참의까지 올랐다. 또 그의 증조부는 공조 참판, 조부는 공조 선공감, 부친은 예천의 목장을 지냈다. 그는 가업으로 전수되어온 기술을 어렸을 때부터 눈으로 보고 손으로 익혀 전통 얼레빗의 다채로운 제작 기법과 갖가지 문양에 대한 수준 높은 지식을 이어받아 왔다. 그는 특히 요즘 들어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전통 얼레빗 제작 공구인 이중톱과 목재틀 등을 보유한 것은 물론 나아가 이러한 전통 공구들을 직접 만들어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기능 전승자는 사라져가는 민족 고유의 전통 기능 분야에서 20년 이상 일해오면서 최고의 기술을 갖추고 장인 정신과 전통 기능을 후손에게 물려주려는 열의를 지닌 장인들이 선정된다. 이 번에 선정된 기능전승자에게 노동부장관 명의의 증서와 함께 2004년 1월부터 매달 60만 원의 지원금이 지급된다. 1995-2002년 모두 43개 분야에서 52명의 장인들이 기능 전승자로 선정되었다.(東亞日報 2003.8.11)  이상근 : 얼레빗 이상근 작가/ 2010.08.07/ 지난 일요일 대치동 세텍 열린 KASF2010(2010.7.28~8.1)에서 엘레빗 국가지정 민속 고유기능 전승자 이상근 작가를 만났습니다. (얼레빗은 전통빗으로 선조님들께서 쓰시던 애장품입니다.) 얼레빗의 느낌을 함께 나누어 보시지요./ http://blog.daum.net/romiooo/ 박진영의 행복한 인생살이/ 태그: 이상근, 얼레빛, KASF2010(daum 2010)  이상근 : 1986-1998 공예품 경진대회 23차례 수상/ 1999 얼레빗 제1회 忠南 觀光記念品 公募展 大賞/ 1999 얼레빗 제29회 忠南 工藝大展 大賞/ 1999 구정특별초대작가전 대구백화점/ 2000 내셔날지오그래픽 選定 收錄/ 2000 KBS 6시 내고향 방영/ 2000 얼레빗 제30회 忠南 工藝大展 勵賞/ 2001. 03. KBS 6시 내고향 방영/ 2001. 03. 個人展 大德롯데갤러리/ 2001. 05. 제31회 忠南 工藝大展 勵賞/ 2001. 11. 招待作家展 江南 新世界 百貨店/ 2002. 06. 個人展 大德롯데갤러리/ 2002. 08. 무주전국공예대회 勵賞/ 2002. 12. 충청남도지정 전통문화 계승자/ 2003. 09. 국가지정 민족 고유기능 전승자/ 경주이씨(평리공) 三十九世 7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보고 듣는 것이라고는 오직 톱질, 대패질 소리뿐이었다. 가계가 형편없이 어려워 부모님들의 한숨소리와 가난에 찌든 남루한 모습으로 내일의 어떠한 기대조차도 없이 매일매일을 그냥 그렇게 보내신 두 분의 모습이 다시금 떠오른다. 자식들 공부시키기가 큰 원이셨던 "부모님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련한 기억 속에서 힘겹게 톱질하시던 모습 ……. 그리고 얼마 후 신기하게도 여러 종류의 빗이며, 조그마한 빗접들이 만들어졌다. 너무나 신기한 나머지 몇몇 개의 빗을 몰래 훔쳐 동네 누나들에게 나누어주며 사탕을 얻어먹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지금의 우리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 그러다보면 몇몇의 방물장수들이 다녀가면 못쓰게 된 빗 몇 개만 남게 되었다. 물론 아버님의 손에는 몇 장의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으로 대신하는 허탈함이였으리라. 아버님 당신께서는 이러한 업(業)이 결코 자식에게는 전하여지지 않기를 누차 강조하시며 작업장에는 출입마저 금지되었다. 얼마간 세월이 흘러 공방이 조금 커졌다. 아버님 당신께서 일대 큰 변화를 하셨다. 일명 [호마이카 자개장]이라는 비교적 덩치가 큰 가구쪽으로 변신을 하셨다. 수입도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칠(漆)보다는 화학재료가 훨씬 값싸고 또 시대적 기호였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빗, 빗접 작업은 장포 재료만 바뀌었을 뿐 계속하셨다. 두 분께서는 오직 자식 공부에만 전념하셨고 그래서 나 역시 전문대학을 졸업하게 되었다. 비교적 공방의 규모가 안정적이어서 아버님 당신께서는 늘 그렇게 사셨다. 틈틈이 들려주시던 조상님들의 말씀 속에서 당신의 고조부(集善, 工曹參議)때부터 공조(工曹)에 관여하였고 증조부(成榮)대에 공조참판(工曹參判) 조부(圭仁)에 증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이르셨다. 부친(宗鉉)대에 조선조말, 개화기를 거쳐 급격히 쇠퇴하여 조그마한 지방의 목장(木匠)이 되었고, 아버님 당신대에 일제시대에 이르렀다. 다소곳에 화려했던 공조참의, 공조참판, 공조참의를 거쳐온 자손들이 오늘의 얼레빗 장수로 변하는 어쩌면 장인(匠人)들의 흐름이 이토록 적나라할 수 있을까? 아버님 당신께서는 이렇듯 쇠태해진 가업이 얼마나 안타까워 하셨을까? 아니면 수치로 생각하셨을까? 내가 이 업(業)을 이어받아 다시금 방물장수에 버금가는 지금의 내 모습을 보시면 어떠한 심정이실까? 수십 회에 걸쳐 공예전에 출품을 하면서 우리의 빗이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고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하여 노력을 했다. 아쉽지만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상당히 관심 밖의 그냥 빗으로서 보아주는 것이 사뭇 아쉽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지금의 내 아들이 한두 개의 빗을 몰래 훔쳐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는 모습이 나는 참 보기가 좋다. 그 애들이 나중에 또 나와 같은 생각으로 얼레빗을 만들며 또 이러한 글을 쓸지 모르겠다. 아니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관심 속에서 얼레빗을 만들게 될지도 모르겠다.(daum 2010)---  *지보면 출신 권상호, TV 출연... 축하합니다.  권상호(KBS 2TV 아침 뉴스타임에 ''''라이브 書藝'''' 放映- 8. 24(화) 8:15) | ◈----- 同門 게시판/ 도정 권상호 | 2010.08.21. 16:25/ http://cafe.daum.net/seouldaechong/OEsz/ 2010년 8월 24일(화) 아침 8시부터 방영되는 KBS 2TV 아침 뉴스타임에 8시 15에서 ~ 35분 사이에 소생이 지도하고 있는 단체 중의 하나인 풍덩예술학교 라이브 서예교실이 방송됩니다. 음악에 맞춰 춤추여 즐기는 서예... 즐겁게 감상하세요.(daum 2010)---  @예천방문 664  신라식물원(너무 재미있고 또 訪問하고 싶어요! 西大邱初等學校 體驗學習으로 植物園 訪問) [記事] :  (사)경북지적장애인협회 영주시지부 10여명과 서대구초등학교 3학년생, 학부모 등 30여명이 2010년 8월 20일 오전 10시부터 농촌체험 교육농장인 신라식물원을 찾아 식물심기체험을 비롯해 솜사탕 만들기, 동물 먹이주기, 옛날 민속체험, 숲 생태체험 등 다양한 체험학습을 실시했다.  2007년 농촌진흥청 지정 농촌체험 교육농장으로 선정된 신라식물원은 학부모와 어린이들에게 체험학습장과 견학지로 인기가 높아 인근 영주, 안동 등 지역은 물론 타 시도에서도 체험가족과 체험학생들로 줄을 잇고 있다.  특히, 신라식물원은 다양한 종류의 야생화와 춤추는 식물인 "무초"를 비롯한 각종 희귀식물과 연, 수련, 물양귀비, 물카라, 물아카시아 등 다양한 수생식물들을 한곳에서 보고 만질 수 있으며 공작비둘기, 토끼, 다람쥐, 쟈보 등 친숙한 동물들도 반갑게 반기며 종을 치면 닭과 비둘기들이 한곳에 모여 들어 또 다른 즐거움을 주고 있다.  한편, 체험학습 종류로는 솟대 만들기, 미니장승 만들기, 나무곤충 만들기, 압화, 화분 만들기, 식물심기 등 사계절 다양한 체험과 함께 현장에서 직접 보고, 만지고, 느끼는 즐거운 체험학습으로 운영되고 있다.  또한, 각종 체험을 통해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즐거움과 사고력, 정서발달 등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체험학습장이 되고 있으며, 신라식물원은 체험과 함께 전통찻집도 운영, 식사도 가능하며 주말이면 각종 동창회 및 모임 등의 만남의 장소로도 인기가 높다.  (金相國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0-08-20 오후 6:17:17)---  예천군 방문(醴泉郡 昆蟲페스티벌, 三江막걸리, 고기잡이 祝祭에 7萬餘名 몰려 成功 祝祭로) [記事] :   예천군 관내에서 2010년 7월 30일부터~8월 8일까지 열렸던 4대 축제(2010예천 삼강막걸리축제, 2010 예천곤충페스티벌, 한여울고기잡이 생생체험, 제4회 지보참우마을 한우축제)에 7만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집계되어 예천군의 4대 축제가 앞으로 군의 대표 축제로 자리매김할 것이란 전망이다.  이번 4대 축제에 가장 많은 인원이 방문한 것으로 집계된 ''''2010 예천삼강주막 막걸리 축제'''' 에는 축제 첫날인 7월 30일 8천여 명, 둘째날 1만여 명, 축제 마지막 날에는 1만2천여 명이 몰려들어 발디딜틈이 없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며 주최 측에서 준비한 막걸리가 동이 날 정도로 붐볐으며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삼강마을 운영위원들은 밤새도록 수익금을 세느라 잠을 설쳤다는 후문이다.  또한, 8월 1일 오전과 오후 등 2회로 나뉘어 실시된 ''''한여울고기잡이 생생체험'''' 축제에는 예천군민과 출향인, 외지 관광객 등 1만5천여 명이 참여하여 고기잡이 체험과 어린이들의 맨손고기잡이, 수상씨름, 얼음 위 오래서있기 등의 잘 짜여진 프로그램으로 참석자들은 35''''를 넘나드는 무더위도 잊은 채 축제를 즐겼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제4회 지보참우마을 한우축제(7월30일~8월1일)''''를 마련한 지보참우마을작목반은 "한우달구지타기, 한우 무료시식, 한우농장체험과 더불어 민속놀이, 어르신게이트볼대회, 노래자랑" 등 다양한 이벤트와 한우고기 5만원 이상 구입시 농산물상품권을 증정하는 등으로 1만여 명이 시골 조그만 마을 지보면을 방문토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이현준 군수가 2012년 제2회 예천곤충엑스포(2012년8월4일~26일까지, 23일간) 개최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이란 슬로건으로 개최된 "2010 예천곤충페스티벌(7월31일~8월8일)"에도 1만5천여 명이 상리면 고항리 소재 곤충연구소를 찾아 각종 곤충체험을 하면서 예천이 명실상부한 곤충의 고장임을 확인, 2012년 예천곤충엑스포 성공을 예감케 했다.  예천군의 이번 4대 축제가 성공한 것은 예천군 공무원들의 인터넷과 팜플렛을 활용한 적극적인 사전 홍보가 큰 역할을 담당했으며 축제를 관람한 대부분의 외지인들은 "청정지역과 친환경적인 자연환경을 활용한 민물고기잡이 및 한우축제, 막걸리와 전통이 잘 조화된 삼강막걸리 축제, 그리고 곤충을 활용한 곤충페스티벌을 연계한 아이디어가 4대 축제를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예천군 관계자는 "이번 4대 축제의 성공을 계기로 4대 축제가 예천군의 대표축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고 특히, 올해 축제를 거울삼아 잘한 점과 잘못된 점을 연구·보완하여 다음해 축제는 더욱 발전하고 성공하는 축제로 만들겠다"며 "2010 예천군 4대 축제에 참여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0-08-20 오후 4: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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