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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293:김복일郡守2(祝박의식/예천방문665)
예천의 자랑(2293) : 용문면 죽림리 입향조 김복일 군수(2)(附 용문면 출신 박의식, 20일 박사학위 받아...축하합니다/예천방문 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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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일 [記事] : 한국문집총간(091_189a) 학사집(鶴沙集, 1776)에 실린 학사 김응조(金應祖)의 남악 김복일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成均館司成南嶽金公行狀/ ...。旋除豊基郡守。臥閤三月。闔境大治。遂引疾歸。以辛卯八月十七日。終于正寢。享年五十一。同年月日。葬于醴泉郡...”이다.(www.minchu.or.kr 2006)
김복일(金復一) [記事] : 생애이야기/ 성명 : 김복일(金復一) (1541년 ~ 1591년) / 본관 : 의성 (義城) / 자 : 계순 (季純) / 출생지 : 안동(安東) 천전(川前) / 출신지 : 안동(安東) / 분묘지 : 예천(醴泉) 용문산(龍門山) / 입사경로 : 1564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합격, 1570년(선조 3) 식년시(式年試) 급제 / 외관직 : 울산군수(蔚山郡守), 창원부사(昌原府使), 풍기군수(豊基郡守) / 평직한 마음과 강경한 성품 : 김복일은 어렸을 적에 재주가 노둔한 편이고 성품은 강경하다는 평을 들었다. 머리를 숙이고 남에게 배우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이러한 성격은 장성 후에도 그의 생애의 도처에서 발견되며 관직과 대인 관계에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강경한 성격을 그나마 완화시킨 것은 학문의 힘이었다. 그가 학문에 힘쓰기 시작하면서 강경한 성품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남에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도 생겼다./ 약관의 나이에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다 : 김복일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형인 김명일(金明一),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소수서원에서 글을 읽다가 부친의 명으로 퇴계 이황의 문하에 나란히 입문하였다. 이 때 김복일은 스승에게 인심도심과 같은 철학적 문제와 선기옥형과 같은 천문학적 문제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형제들은 수업할 때나 물러나 쉴 때도 학문을 토론하고 익히기를 그치지 않아 퇴계 선생이 매우 가상히 여겼다./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서다 : 김복일은 29세가 되던 해에 형인 김수일(金守一), 김명일(金明一)과 함께 상경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에 셋째형 김명일이 병이 들어 둘째형인 김수일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혼자 남은 김복일은 이러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문과에 응시하여 당당히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가 처음 받은 벼슬은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는 학유(學諭)라는 말단의 벼슬이었다. 당시 그의 벼슬살이는 그다지 마음 편안한 생활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집에 나오는 「서울에서 우연히 읊다」라는 제목의 시에는 당시 벼슬자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처지를 읊은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원칙과 소신의 벼슬살이 : 김복일은 원칙과 소신으로 벼슬살이에 임하였다. 이러한 성격은 부친인 청계 김진의 영향이었다. 따라서 그의 벼슬살이는 전반적으로 순탄한 편이 아니었다. 문과에 급제하고 받은 벼슬이 종9품직의 학유였는데, 후학들은 그를 못마땅해 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또 울산군수로 있을 때 관내에 폐단이 있어 엄정히 대처하였으나 끝내 감사와 뜻이 맞지 않아 도중에 벼슬을 그만두었으며, 창원도호부사로 있을 때 감사, 병사와 뜻이 맞지 않아 파직당한 적도 있었다. 반면에 울산부사가 되었을 때 아전과 토호의 비리를 척결하였고, 전라도 어사를 지낼 때는 종실 귀척인 전라감사까지 비리를 묵인하지 않고 파직시켰을 만큼 강직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그가 울산부사로 있을 때 한번은 경상도를 순시하는 순찰사가 울산으로 온다고 해서 울산부의 경계선까지 영접하러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순찰사가 오는 도중에 곳곳에서 접대를 받고 술에 취해 도착 시간이 넘었는데도 울산 땅에 이르지 못하였다. 김복일은 자신이 순찰사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동안에도 백성들이 힘들여 생산한 양식을 낭비하고 있음을 탄식하고, ꡒ나는 더 이상 백성들을 괴롭힐 수 없다.ꡓ라고 하면서 돌아와 버렸다. 그의 「행장」에는 모두 세 고을을 다스렸다고 되어 있다. 1587년(선조 20)에 울산군수가 되었고, 이어 창원부사가 되었으며, 1590년(선조 23)에는 풍기군수에 제수되었던 것이 그것이다. 다스림이 한결같았으므로 백성들이 비석을 세우고 ꡐ얼음 항아리와 가을 달ꡑ, ꡐ황하 가운데 솟은 돌기둥ꡑ이란 말로 칭송하였다.(www.koreastudy.or.kr 2007)
김복일(金復一) [記事] : 가족이야기/ 조 : 김예범(金禮範) / 생부 : 김진(金璡) / 모 : 여흥민씨(驪興閔氏) 민세경(閔世卿)의 딸 / 형제 : 김극일(金克一), 김수일(金守一), 김명일(金明一), 김성일(金誠一) / 청계 김진의 다섯 아들 : 김복일의 아버지는 안동 천전(川前)에 살았던 청계(淸溪) 김진(金璡)으로 그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운암(雲巖) 김명일(金明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이 그들이다. 그 가운데 학봉 김성일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나머지 형제들도 재주가 있어 김극일, 김성일, 김복일이 문과에 급제하였고, 김수일, 김명일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또한 이들은 함께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므로 형제 문인으로 유명하며, 당시 ꡐ천전오룡(川前五龍)ꡑ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지극한 효성 : 김복일이 부모를 섬기는 정성은 지극하였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어린 김복일은 미역국을 주어도 먹지 않았다. 주위에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미역이 게나 물고기 곁에서 자랐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게나 물고기 곁에서 자란 미역조차 먹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로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아버지 판서공이 세상을 떴을 때는 묘소 곁에 여막을 치고 시묘를 했으며, 3년 동안 한번도 집에 내려온 적이 없었다. 그는 이 때 병을 얻어 거의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가 살아났다. 그러나 이것은 평생의 병이 되어 그를 괴롭혔고 그가 비교적 단명으로 생애를 마친 것도 이때 얻은 병과 무관하지 않았다./ 부인과 자식들 : 김복일은 두 번 혼인을 했는데, 앞의 부인은 숙인 예천권씨로서 참의에 추증된 지(祉)의 딸이었고, 뒤의 부인은 숙인 안동권씨로서 현감을 지낸 심언(審言)의 딸이었다. 자식은 전 부인의 몸에서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지(?)는 선교랑에 제수되었으며, 차남 숙(潚)은 요절하였다. 장녀는 완흥군에 추봉된 감사 최현(崔睍)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정언 최정호(崔挺豪)에게 출가하였다.(www.koreastudy.or.kr 2007)
김복일(金復一) [記事] : 저작이야기/ 『남악선생일고(南嶽先生逸稿)』 : 김복일의 개인 문집이다. 이것은 흩어져 없어지고 겨우 남은 김복일의 유문을 모아서 엮은 것으로 의성김씨 집안 문집인 『연방세고(聯芳世稿)』 권5에 포함되어 있는 간략한 문집이다. 8수의 시(詩)와 2통의 서(書)가 있고, 그 외 제문과 묘갈, 잡저와 부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 가운데 1576년에 쓴 「서울에서 우연히 읊다」라는 제목의 시는 성균관 학록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지은 시로서 벼슬자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향하는 저자의 심정이 드러나 있다. 그 외 초간 권문해와 주고 받은 시는 그와 권초간과의 교유가 긴밀했음을 암시한다. 또한 잡저 가운데 「금곡서당(金谷書堂) 창립문」이 있는데, 이 글은 저자가 29세 되던 해에 지은 것으로 예천 고을의 학문을 일으키기 위해 금곡서당을 창립할 것을 제창한 글이다. 이 사실은 그가 이른 나이에 이미 지역 사림 간에 상당한 학문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금곡서당은 나중에 정산서원(鼎山書院)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정산서원은 이황과 조목을 배향한 서원으로 광해군 대에 창건되었다가 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었다./ 『소학초기(小學抄記)』 : 이 책은 현재 전하고 있지 않는데, 퇴계문인록인 『도산급문제현록』에 김복일이 『소학초기(小學抄記)』를 저술하여 집안 사람들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소학』 가운데 중요한 요결을 발췌 정리하여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여기서 저자의 돈독한 실천 철학적 학문 경향을 읽을 수 있다.(www.koreastudy.or.kr 2007)
김복일(金復一) [記事] : 1541~1591,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계순(季純), 출생지는 안동(安東) 천전(川前), 분묘지는 예천(醴泉) 용문산(龍門山)이다. 입사경로는 1564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합격, 1570년(선조 3) 식년시(式年試) 급제, 외관직은 울산군수(蔚山郡守), 창원부사(昌原府使), 풍기군수(豊基郡守)이다. [평직한 마음과 강경한 성품] : 김복일은 어렸을 적에 재주가 노둔한 편이고 성품은 강경하다는 평을 들었다. 머리를 숙이고 남에게 배우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이러한 성격은 장성 후에도 그의 생애의 도처에서 발견되며 관직과 대인 관계에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강경한 성격을 그나마 완화시킨 것은 학문의 힘이었다. 그가 학문에 힘쓰기 시작하면서 강경한 성품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남에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도 생겼다. [약관의 나이에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다] : 김복일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형인 김명일(金明一),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소수서원에서 글을 읽다가 부친의 명으로 퇴계 이황의 문하에 나란히 입문하였다. 이 때 김복일은 스승에게 인심도심과 같은 철학적 문제와 선기옥형과 같은 천문학적 문제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형제들은 수업할 때나 물러나 쉴 때도 학문을 토론하고 익히기를 그치지 않아 퇴계 선생이 매우 가상히 여겼다.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서다] : 김복일은 29세가 되던 해에 형인 김수일(金守一), 김명일(金明一)과 함께 상경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에 셋째 형 김명일이 병이 들어 둘째 형인 김수일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혼자 남은 김복일은 이러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문과에 응시하여 당당히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가 처음 받은 벼슬은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는 학유(學諭)라는 말단의 벼슬이었다. 당시 그의 벼슬살이는 그다지 마음 편안한 생활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집에 나오는 「서울에서 우연히 읊다」라는 제목의 시에는 당시 벼슬 자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처지를 읊은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원칙과 소신의 벼슬살이] : 김복일은 원칙과 소신으로 벼슬살이에 임하였다. 이러한 성격은 부친인 청계 김진의 영향이었다. 따라서 그의 벼슬살이는 전반적으로 순탄한 편이 아니었다. 문과에 급제하고 받은 벼슬이 종9품직의 학유였는데, 후학들은 그를 못마땅해 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또 울산군수로 있을 때 관내에 폐단이 있어 엄정히 대처하였으나 끝내 감사와 뜻이 맞지 않아 도중에 벼슬을 그만두었으며, 창원도호부사로 있을 때 감사, 병사와 뜻이 맞지 않아 파직당한 적도 있었다. 반면에 울산부사가 되었을 때 아전과 토호의 비리를 척결하였고, 전라도 어사를 지낼 때는 종실 귀척인 전라감사까지 비리를 묵인하지 않고 파직시켰을 만큼 강직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그가 울산부사로 있을 때 한번은 경상도를 순시하는 순찰사가 울산으로 온다고 해서 울산부의 경계선까지 영접하러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순찰사가 오는 도중에 곳곳에서 접대를 받고 술에 취해 도착 시간이 넘었는데도 울산 땅에 이르지 못하였다. 김복일은 자신이 순찰사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동안에도 백성들이 힘들여 생산한 양식을 낭비하고 있음을 탄식하고, ꡒ나는 더 이상 백성들을 괴롭힐 수 없다.ꡓ라고 하면서 돌아와 버렸다. 그의 「행장」에는 모두 세 고을을 다스렸다고 되어 있다. 1587년(선조 20)에 울산군수가 되었고, 이어 창원부사가 되었으며, 1590년(선조 23)에는 풍기군수에 제수되었던 것이 그것이다. 다스림이 한결같았으므로 백성들이 비석을 세우고 ꡐ얼음 항아리와 가을 달ꡑ, ꡐ황하 가운데 솟은 돌기둥ꡑ이란 말로 칭송하였다. 저서로『남악선생일고(南嶽先生逸稿)』|『소학초기(小學抄記)』가 있다.(http://www.koreastudy.or.kr 2007)
김복일 [記事] : 학사집(鶴沙集)/ 11권 6책 중 卷9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行狀 / 成均館司成南嶽金公行狀 33/ 金復一(1541˜1591)의 행장이다. 자는 季純이고 호는 南嶽이다. 의성인이다. 臨河縣 川前里에서 태어났다. 1570년(선조 3) 문과에 급제했다. 學諭․博士․典籍․공조좌랑․함경도사․호조정랑․창원부사․단양군수․성균관사성을 역임했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일찍이 예천 金谷里에 寓居했는데 父老들을 권유하여 德進洞에 서당을 세우고 선비들을 모아 강학했다. 후에 鼎山으로 옮겨 書院이 되었다. 여강서원을 세우고 퇴계 선생을 배향할 때 請額을 위해 本府에 정문을 올리기 위하여 士林들이 공에게 그 글을 지을 것을 권하였는데 그 글이 천수백 마디의 말이었다. 보는 자들이 모두 도를 알지 못하면 이렇게 盛德을 형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www.koreastudy.or.kr 2007)
김복일 [記事] :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 간행년 : 2001/ 저자 : 안동문화원/ 발행처 : 안동문화원/ 2) 인물(人物)/ .../ 김복일(金復一) 성일(誠一)의 아우로 자는 계순(季純)이요, 호는 남악(南岳)이다. 퇴도의 문인이다. 가정 갑자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융경(隆慶) 경오년 문관에 급제하였다. 성품과 행실이 경개(耿介)60) 하였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였으며, 청렴하고 신중함으로써 스스로를 지켰다. 세 고을의 원님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www.koreastudy.or.kr 2007)
김복일 [記事] : 안동의 명현당호2/ 간행년 : 2002/ 저자 : 안동민속박물관/ 발행처 : 민속박물관/ 靑溪宗宅/ ...있는 내앞을 본산으로 하여 임하 신덕의 운암파(雲巖派), 안동 서후 금계의 학봉파(鶴峯派), 예천 구계의 남악파(南嶽派, 김복일)...(www.koreastudy.or.kr 2007)
김복일 [記事] : 안동의 서원/ 간행년 : 1994/ 저자 : 안동문화원/ 발행처 : 안동문화원/ 11. 泗濱書院 : 소재지: 안동군 임하면 임하면 임하리/ 원래 安東府 臨河縣 景出山에 있던 靑溪 先生의 墳庵을 1675년(숙종 元)에 확장하여 선생의 遺像(현재 종택에 봉안)을 봉안하고 ''''泗濱影堂''''이라 하였다. 이를 1685년(숙종 11) 士林과 內外孫들이 합의하여 선생은 主享으로, 그리고 다섯 子弟인 藥峯 金克一 ? 龜峯 金守一 ? 雲巖 金明一 ? 鶴峯 金誠一 ? 南嶽 金復一 선생을 配享하고 廟號를 ''''景賢祠''''라 했다. 1709년(숙종 35)에 동구 밖 泗水 가로 이건하여 ''''泗濱書院''''이라 하였다가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882년(고종 19) 사림과 본손들에 의해 복설되었으나, 1989년 임하댐 공사로 인해 임하면 사의리에서 현위치인 임하리로 이건했다. 현재 향사하지 않는다. 경상북도 지방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사빈서원 봉안문은 『泗濱志』(金時雨氏 藏)에 수록되어 있다.../ ○ 金復一(1541, 중종 36~1591, 선조 24) : 義城人. 자는 李純, 호는 南嶽. 1565년(명종 19)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도사?울산군수?창원부사?단양군수?풍기군수 등 직을 지냈다. 목민관으로서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선조대왕은 은전으로『문헌비고』,『성리대전』등 귀중한 서책을 하사하기도 했다. 사빈서원 외에 예천의 鳳山書院에 제향되었다.(www.koreastudy.or.kr 2007)
김복일 [記事] : 안동시사 5/ 간행년 : 1999/ 저자 : 안동시/ 발행처 : 안동시청/【義城 金氏】/ 김복일(金復一):1541(중종 36, 신축)~1591(선조 24, 신묘). 본관 義城. 자는 季純. 호는 南嶽. 璡의 第5子. 1570년(선조 3) 문과 급제. 全羅道 御史?豊基郡守 역임. 제향:泗濱書院. 저서:『聯芳世稿』. ▣참고:「墓碣銘」(金應祖 撰) ??집필:김태안(www.koreastudy.or.kr 2009)
김복일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安東 / 壇廟 / 泗빈影堂 在臨河縣東三里立祠祀 贈判書 金璡配享司成 金克一 察訪 金守一生員金明一 文忠公金誠一 司成 金復一 栢麓里社 在奈城縣南立祠祀校理 李宗準 進士 李弘準 大司諫 鄭惟一 參奉 洪浚亨 觀察使 金聲久 正郞 權斗寅(www.history.go.kr 2009)
김복일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安東 / 人物 / 金克一 璡之子登第官至司成號藥峯配祀泗?影堂 金守一 克一之弟中司馬薦補察訪號龜峯配祀泗?影堂 金明一 守一之弟中司馬以儒雅見稱號雲巖配祀泗?影堂 金誠一 明一之弟師事李滉聞心學之要堅苦刻勵造詣精深登第官至觀察使嘗奉使 日本動以禮法倭人敬?壬辰之亂受本道招諭之 命忠義感動義旅爭集江右一帶賴以得完未幾卒於軍中士民涕泣相吊後 贈判書謚文忠配享虎溪書院有鶴峯集 梅?錄等書行于世 金復一 誠一之弟淸介有志行登第官至府使號南嶽配祀泗?影堂 南致利 受業於李滉之門專心爲己之學號賁趾早卒鄕人立祠祀之 權宇 號松巢弱冠登李滉之門專精問學薦授 王子師傳 宣祖聞其?洽拈出經書中疑義令 王子問難宇應口對無疑 上手書嘉之後 贈左承旨鄕人立祠祀之 權春蘭 登第官至司諫號晦谷淸苦有學行嘗著言仁錄配享周溪書院見名臣錄 金涌 守一之子/ <하권0541-2>/ 號雲川登第歷敭淸顯正直持論風彩動朝官至兵曺參議以原從功 贈吏曺參判後人祀于黙溪精舍(www.history.go.kr 2009)
김복일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昌原 / 名宦 / 高麗 安裕 鎭合浦撫軍恤民州郡以寧 羅裕 羅益禧 三鎭合浦以廉謹慈惠稱 安于器 鎭合浦以廉幹稱 金得培 鄭思道 裵克廉 俱鎭合浦 田祿生 再鎭合浦 朴? 三鎭合浦 本朝李澄石 曹備衡 河/ <하권0577-1>/ 敬復 皆鎭合浦 新增張義國 壬辰之亂與漆原縣監 李邦佐合勢夜襲據城之賊收復舊城大興學校 鄭起龍 壬辰之亂與天將?提督麻提督追賊露梁水陸合勢?戰大捷還入府境收拾散民與召募將李瀞設木柵開陳于明今谷一境賴安 朴弘美 以善治陞資 白善男 以淸白稱當丙子亂領兵到雙嶺戰亡陪吏黃是憲擔其印信同死 金復一 治化大行鮮龜之日吏民守門遮路 鄭文孚 光海戊午被斥出補治化大著 成以性 以淸白著名民稱召社 張鵬翼 恩威竝行吏民追思(www.history.go.kr 2009)
김복일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補遺篇 (慶尙道) / 蔚山府邑誌 / ?蹟 / 高麗 金宗直 通判 鄭? 知郡 本朝李殷 孫光衍 知州 朴善 朴復卿 金及 宣憲 郡守 李世琳 文 李 友蔣孝範 武 愼邦佐 李希伯 文 崔繼勳 申國樑 金漢卿 武 徐克一 文 郭 李求仁 裴德文 李濟臣 林希茂 金逸駿 鄭仁寬 / <하권0911-2>/ 李彦愉 曺千齡 孫英濟 崔慶長 閔忠男 金復一 李瑩 鄭仁貴 金友? 武 李彦? 金應瑞 兼府使萬曆己亥正月仕同年十月日遞 郭再佑 萬曆己亥十月日仕庚子三月日遞 朴毅長 嘉善萬曆庚子仕辛丑遞 李英 嘉善萬曆辛丑仕壬寅遞歸 金澤龍 文判官萬曆辛丑八月日仕十二月遞 孫起陽 文萬曆壬寅十一月仕同年十二月遞 金太虛 兼府使萬曆壬寅仕甲辰遞 閔汝任 判官萬曆癸卯仕同年六月遞 尹安國 萬曆癸卯仕甲辰遞 金應瑞 兼府使萬曆甲辰仕丙午遞 趙誠立 文判官萬曆乙巳正月仕同年二月遞 尹弘國 萬曆乙巳仕丙午遞 鄭起龍 兼府使萬曆丙午仕丁未遞 宋光廷 判官萬曆丙午仕丁未喪逝 李璲 兼府使萬曆丁未仕戊申遞 吳汝? 判官萬曆丁未仕庚戌遞 朴毅長 兼府使萬曆戊/ <하권0911-3>...(www.history.go.kr 2009)
김복일 : 제목 김복일(金復一)의 교지/ 저자 국왕/ 출처 한국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키워드 : 교첩, 敎牒, 告身, 金復一, 通善郞, 蔚山郡守, 成均館博士, 工曹佐郞, 戶曹佐郞, 刑曹正郞, 戶曹正郞, 承訓郞, 刑曹佐郞, 江原道都事, 奉訓郞, 成均館學錄, 咸鏡道都事, 宣務郞, 成均館學諭, 成均館學正, 通仕郞, 成均館典籍, 承仕郞/ 대상시기 : 조선후기/ 김복일 교첩1 : 1575-01-01/ 1575년(선조 8)에 吏曹에서 從仕郞으로 成均館學諭인 金復一을 成均館學諭兼東學訓導에 임명하는 告身이다./ 김복일 교첩2 : 1586-01-01/ 1586년(선조 19)에 吏曹에서 加資된 奉直郞(daum 2010)
김복일(金復一) :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선조(宣祖) 3년, 과거시험연도 : 1570 경오, 시험명 : 식년시(式年試), 등위 : 병과23(丙科23)/ [인적 사항] 성명(姓名) : 김복일(金復一), 자 : 계순(季純), 본관(本貫) : 의성(義城)/ [이력 및 기타 사항] 소과 : 1564(갑자) 진사시, 전력(前歷) : 진사(進士), 관직(官職) : 부사(府使)/ [가족사항] 형(兄) : 김성일(金誠一), 부(父) : 김진(金璡), 조부(祖父) : 김예범(金禮範), 증조부(曾祖父) : 김만근(金萬謹), 외조부(外祖父) : 민세경(閔世卿), 처부(妻父) : 권지,권심언(權祉,權審言)(daum 2010)
김복일 : 퇴계학통 전승도/ ...隆). 김 륵(金 王力 ).김 면(金 沔). 김명일(金明一). 김몽구(김몽구). 김몽득(金夢得). 김백기(金伯起). 김복일(金復一). 김부륜(金富倫). 김부신(김부신). 김부의(金富儀). 김부인(金富仁). 김부필(金富弼). 김사원(金士元). 김생명.../ http://blog.naver.com(daum 2010)
김복일(金復一) : [생원진사시] 명종(明宗) 19년 (156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48위/ [인적사항] 자 계순(季純), 생년 신축(辛丑) 1541년, 합격연령 24세, 본관 의성(義城), 거주지 안동(安東)/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관직 창원부사(昌原府使), 타과 선조(宣祖) 3년(157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가족사항] [부] 성명 : 김진(金璡), 타과 : 성균생원(成均生員)/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형] 김극일(金克一)/ [형] 김수일(金守一)/ [형] 김명일(金明一)/ [형] 김성일(金誠一)/ [출전]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daum 2010)
김복일(金復一) [專門資料] : 관련인물 :계순(季純)|남악(南嶽)|진(璡)|성일(誠一)|이황(李滉)관직 :병마절도사|학유(學諭)|전적(典籍)|낭관|전라도어사|울산군수|창원부사|경주교수(慶州敎授)|사예|사성|풍기군수관련서적 :관련지역 :조선.../ 2009.04.06(daum 2010)
김복일(金復一) : [문과] 선조(宣祖) 3년 (157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3위/ [인적사항] 자 계순(季純), 생년 신축(辛丑) 1541년, 합격연령 30세, 본관 의성(義城)/ [이력사항] 전력 진사(進士), 관직 부사(府使), 타과 명종(明宗) 19년(1564) 갑자(甲子) 진사시(進士試)/ [가족사항] [부] 성명 : 김진(金璡), [조부] 성명 : 김예범(金禮範), [증조부] 성명 : 김만근(金萬謹), [외조부] 성명 : 민세경(閔世卿), [처부] 성명 : 권심언(權審言), [처부2] 성명 : 권지(權祉), [형] 김성일(金誠一)/ [출전]《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daum 2010)
김복일 : 오룡지가의 명문/ 2010.01.08/ ...년), 운암(雲岩) 김명일(金明一, 1534∼1570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 1541∼1591년)이 바로 그들이다. 장남인 약봉은 내앞의 대종택에서 살았지만, 나머지 네 아들은 안동 인근으로.../ http://cafe.daum.net/usnamak/ 의성김남악사랑방[義城金南嶽舍廊房]입니다.(daum 2010)
김복일 : 학봉종택(鶴峯宗宅)은~/ 2009.11.20/ 신덕(新德)에 자리를 잡았으며, 사남이 바로 학봉공으로 이곳 검제에 터전을 마련하였고, 오남 남악공(南嶽公 : 金復一)은 문과에 급제하고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역임하고 예천현(醴泉懸)의 용문면(龍門面) 구계리(九溪里)에 터를.../ http://cafe.daum.net/s3018/ 대구삼영초등학교 18회졸업 동기회(daum 2010)
김복일 : 義城金氏 重要 世居地 變遷/ 2009.09.27/ ''''朝天錄''''은 인조 4년 正使 金尙憲을 따라 서장관으로 明나라에 가면서 지은 시들을 묶은 것이다. 金賓은 南獄 金復一의 증손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내외요직을 두루거친 명신이다. 외직으로는 경주부사, 광주, 나주목사, 한성좌우윤을.../ http://cafe.daum.net/kimsk45/ 무지의 파라다이스(daum 2010)
김복일 : 義城金氏 朝鮮朝 文科及第者 (1)/ 2009.10.06/ 肅夫 東岡 希參 思道室 宣祖 丁卯式年 丙科 大司憲 金誠一 戊戌 士純 鶴峰 璡 金溪 同 戊辰增廣 丙科 觀察使 金復一 辛丑 季純 南嶽 璡 醴泉 同 庚午式年 丙科 司成 金齊閔 丁亥 士孝 鰲峯 灝 井邑 同 癸酉式年 乙科 正郞 金堯立.../ http://cafe.daum.net/kimsk45/ 무지의 파라다이스(daum 2010)
김복일 : 의성김씨(義城金氏)/ 2010.03.04/ ...(金東三) 김득추(金得秋) 김말(金末) 김명기(金命基) 김명일(金明一) 김방걸(金邦杰) 김병종(金秉宗) 김복일(金復一) 김붕준(金朋濬) 김석(金錫){1} 김성구(金聲久) 김성일(金誠一){1} 김성탁(金聖鐸) 김세우(金世瑀){1} 김세흠.../ http://blog.daum.net/ilkobstar/ 별중별(daum 2010)
김복일 : 하계직원 연수 2 -내앞종택과 병호시비/ 2008.09.19/ 1528-1583), 운암 김명일(雲岩 金明一, 1534-1570),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 남악 김복일(南嶽 金復一, 1541-1591)이다. 어제 처음으로 답사한 학봉종택의 학봉이 바로 이 집의 넷째 아들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제미.../ http://blog.daum.net/whang77/ 황도사의 사주여행(daum 2010)
김복일 : 검제마을/ 2008.09.15/ ...신덕(新德)에 자리를 잡았으며, 사남이 바로 학봉공으로 이곳 검제에 터전을 마련하였고, 오남 남악공(南嶽公 : 金復一)은 문과에 급제하고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역임하고 예천군(醴泉郡)의 용문면(龍門面) 구계리(九溪里)에 터를.../ http://blog.daum.net/starfamily/ 쪼구랑별(daum 2010)
김복일 : ../ 2008.12.05/ 17세기 전반에 義城 金氏(南嶽 金復一의 子孫)가 이곳을 개척하여 산천에 온갖 열매가 아름답다하여 가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17세기 후반(1675)에 江陵人.../ http://blog.daum.net/yongmunkasil/ Yongmun kasil(daum 2010)
김복일 : 한국의 명문 종가/ e-Book/ 이순형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0.05.10/ 책본문 : ...진사시(進士試), 31세엔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다섯째인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도 24세엔 진사시(進士試), 30세엔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이들의 문장과 학행이 뛰어났다고.../ 419페이지(daum 2010)
김복일 : 자녀 성공의 키는 아버지가 쥐고 있다/ e-Book/ 이해명 지음 | 예담프렌드 | 2006.04.22/ 책본문 : ...구암龜峯 김수일金守一, 운암雲岩 김명일金明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94 자녀 성공의 Key는 아버지가 쥐고 있다. 아버지의 헌신으로 대학자가 된 학봉 김성일.../ 96페이지(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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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면 출신 박의식, 20일 박사학위 받아...축하합니다.
박의식(龍門面 出身 박의식 榮州副市長, 嶺南大 博士學位 받아) [記事] :
박의식 영주부시장(53세)은 2010년 8월 20일 영남대학교에서「사회복지 서비스 재정지출 성과구조분석」연구 논문으로 지역개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은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재정지출에 대한 사회복지 서비스 품질과 성과에 대한 분석과 함께 사회복지 서비스 재정지출의 문제점과 개선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항상 자기 개발을 바탕으로 대민 업무에 임해야 고객 만족을 유도할 수 있다고 강조하던 평소 철학을 실천에 옮긴 박 부시장은 특히 이 연구에서 분석된 영주시의 사회복지 서비스 재정지출 성과구조분석 결과는 영주시뿐만 아니라 여러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사회복지 서비스 품질 개선을 위한 방향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박의식 부시장은 행정안전부 재정정책과에서 지방재정 업무를 오랫동안 담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같은 논문을 발표했으며 “논문으로 인해 업무에 소홀함이 없었는지 뒤돌아보며 동료직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편 박의식 부시장은 예천 용문면 출신으로 영남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지방행정연수원 조사과, 내무부 총무과, 경찰대학 치안연구소, 행정자치부 재정정책과 등 중앙부처를 거쳐 경북도 정책기획관, 새경북기획단장, 청도군 부군수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지난 3월 발간한 지방재정의 의의와 운용, 지방재정의 세입, 세출, 관리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지방재정론”이 있다.
(황성한 記者 醴泉인터넷放送 2010-08-22 오후 7: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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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665
예천문화체육센터(第7回 慶北클럽最强戰 배드민턴大會 열려) [記事] :
2010 전국클럽리그 예선대회 겸 제7회 경북클럽최강전 배드민턴대회가 2010년 8월 22일 오전부터 예천문화체육센터를 비롯한 4개소에서 개최됐다.
이날 개회식에는 이현준 예천군수, 김영규 예천군의회장, 도기욱 도의원, 김시택 고령경찰서장을 비롯한 23개 시군 32개 클럽 선수 등 1천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김준동 경상북도 배드민턴연합회장은 대회사를 통해 “오늘 여러분들을 모시고 예천에서 성대하게 개최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하며 “이번 대회가 전국클럽리그 결선에 나갈 예선전도 겸하는 대회인 만큼 클럽의 명예와 더불어 성숙된 매너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아름다운 대회로 기억 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협조를 당부한다”고 말했다.
이현준 예천군수는 환영사에서 “1300년의 역사를 가진 충효의 고장이며 활의 고장인 우리 예천에서 대회가 열리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며 참가하신 여러분 모두를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하며 “우리 고장에 머무시는 동안 시간이 나시면 회룡포, 석송령, 삼강주막, 곤충연구소 등 명승지도 둘러보고 예천온천에서 피로를 풀면서 유익한 시간이 되길 바란다”며 환영했다.
이에 앞서 선수들은 8시 30분부터 문화체육센터, 경도대체육관, 예천학생실내체육관, 예천여고 체육관 등 4개 경기장에서 분산해 경기를 펼쳤다.
(醴泉인터넷放送 2010-08-22 오후 5: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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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방문(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인 박사모 慶北 北部 연합정모 醴泉에서 開催) [記事] :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인 박사모 경북 북부 연합 정기모임을 예천지회(지회장 최희노)가 주관하여 2010년 8월 21일 오후 7시 광일웨딩홀에서 개최됐다.
이날 정기모임에는 이현준 예천군수, 정광용 박사모 중앙회장, 손호영 경북축구협회장, 북부지역 임원진과 회원 150여명이 참석했다.
특히 이날 김천 박사모 회원들이 참석 북부지역 연합정기모임을 빛나게 했다. 이번 정기모임은 경북북부지역 회원들의 결속을 통해 화합과 단결의 의지를 더욱더 높이고자 개최됐다.
(醴泉인터넷放送 2010-08-21 오후 9: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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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일 [記事] : 한국문집총간(091_189a) 학사집(鶴沙集, 1776)에 실린 학사 김응조(金應祖)의 남악 김복일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成均館司成南嶽金公行狀/ ...。旋除豊基郡守。臥閤三月。闔境大治。遂引疾歸。以辛卯八月十七日。終于正寢。享年五十一。同年月日。葬于醴泉郡...”이다.(www.minchu.or.kr 2006)
김복일(金復一) [記事] : 생애이야기/ 성명 : 김복일(金復一) (1541년 ~ 1591년) / 본관 : 의성 (義城) / 자 : 계순 (季純) / 출생지 : 안동(安東) 천전(川前) / 출신지 : 안동(安東) / 분묘지 : 예천(醴泉) 용문산(龍門山) / 입사경로 : 1564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합격, 1570년(선조 3) 식년시(式年試) 급제 / 외관직 : 울산군수(蔚山郡守), 창원부사(昌原府使), 풍기군수(豊基郡守) / 평직한 마음과 강경한 성품 : 김복일은 어렸을 적에 재주가 노둔한 편이고 성품은 강경하다는 평을 들었다. 머리를 숙이고 남에게 배우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이러한 성격은 장성 후에도 그의 생애의 도처에서 발견되며 관직과 대인 관계에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강경한 성격을 그나마 완화시킨 것은 학문의 힘이었다. 그가 학문에 힘쓰기 시작하면서 강경한 성품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남에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도 생겼다./ 약관의 나이에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다 : 김복일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형인 김명일(金明一),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소수서원에서 글을 읽다가 부친의 명으로 퇴계 이황의 문하에 나란히 입문하였다. 이 때 김복일은 스승에게 인심도심과 같은 철학적 문제와 선기옥형과 같은 천문학적 문제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형제들은 수업할 때나 물러나 쉴 때도 학문을 토론하고 익히기를 그치지 않아 퇴계 선생이 매우 가상히 여겼다./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서다 : 김복일은 29세가 되던 해에 형인 김수일(金守一), 김명일(金明一)과 함께 상경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에 셋째형 김명일이 병이 들어 둘째형인 김수일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혼자 남은 김복일은 이러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문과에 응시하여 당당히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가 처음 받은 벼슬은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는 학유(學諭)라는 말단의 벼슬이었다. 당시 그의 벼슬살이는 그다지 마음 편안한 생활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집에 나오는 「서울에서 우연히 읊다」라는 제목의 시에는 당시 벼슬자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처지를 읊은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원칙과 소신의 벼슬살이 : 김복일은 원칙과 소신으로 벼슬살이에 임하였다. 이러한 성격은 부친인 청계 김진의 영향이었다. 따라서 그의 벼슬살이는 전반적으로 순탄한 편이 아니었다. 문과에 급제하고 받은 벼슬이 종9품직의 학유였는데, 후학들은 그를 못마땅해 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또 울산군수로 있을 때 관내에 폐단이 있어 엄정히 대처하였으나 끝내 감사와 뜻이 맞지 않아 도중에 벼슬을 그만두었으며, 창원도호부사로 있을 때 감사, 병사와 뜻이 맞지 않아 파직당한 적도 있었다. 반면에 울산부사가 되었을 때 아전과 토호의 비리를 척결하였고, 전라도 어사를 지낼 때는 종실 귀척인 전라감사까지 비리를 묵인하지 않고 파직시켰을 만큼 강직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그가 울산부사로 있을 때 한번은 경상도를 순시하는 순찰사가 울산으로 온다고 해서 울산부의 경계선까지 영접하러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순찰사가 오는 도중에 곳곳에서 접대를 받고 술에 취해 도착 시간이 넘었는데도 울산 땅에 이르지 못하였다. 김복일은 자신이 순찰사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동안에도 백성들이 힘들여 생산한 양식을 낭비하고 있음을 탄식하고, ꡒ나는 더 이상 백성들을 괴롭힐 수 없다.ꡓ라고 하면서 돌아와 버렸다. 그의 「행장」에는 모두 세 고을을 다스렸다고 되어 있다. 1587년(선조 20)에 울산군수가 되었고, 이어 창원부사가 되었으며, 1590년(선조 23)에는 풍기군수에 제수되었던 것이 그것이다. 다스림이 한결같았으므로 백성들이 비석을 세우고 ꡐ얼음 항아리와 가을 달ꡑ, ꡐ황하 가운데 솟은 돌기둥ꡑ이란 말로 칭송하였다.(www.koreastudy.or.kr 2007)
김복일(金復一) [記事] : 가족이야기/ 조 : 김예범(金禮範) / 생부 : 김진(金璡) / 모 : 여흥민씨(驪興閔氏) 민세경(閔世卿)의 딸 / 형제 : 김극일(金克一), 김수일(金守一), 김명일(金明一), 김성일(金誠一) / 청계 김진의 다섯 아들 : 김복일의 아버지는 안동 천전(川前)에 살았던 청계(淸溪) 김진(金璡)으로 그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운암(雲巖) 김명일(金明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이 그들이다. 그 가운데 학봉 김성일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나머지 형제들도 재주가 있어 김극일, 김성일, 김복일이 문과에 급제하였고, 김수일, 김명일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또한 이들은 함께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므로 형제 문인으로 유명하며, 당시 ꡐ천전오룡(川前五龍)ꡑ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지극한 효성 : 김복일이 부모를 섬기는 정성은 지극하였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어린 김복일은 미역국을 주어도 먹지 않았다. 주위에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미역이 게나 물고기 곁에서 자랐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게나 물고기 곁에서 자란 미역조차 먹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로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아버지 판서공이 세상을 떴을 때는 묘소 곁에 여막을 치고 시묘를 했으며, 3년 동안 한번도 집에 내려온 적이 없었다. 그는 이 때 병을 얻어 거의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가 살아났다. 그러나 이것은 평생의 병이 되어 그를 괴롭혔고 그가 비교적 단명으로 생애를 마친 것도 이때 얻은 병과 무관하지 않았다./ 부인과 자식들 : 김복일은 두 번 혼인을 했는데, 앞의 부인은 숙인 예천권씨로서 참의에 추증된 지(祉)의 딸이었고, 뒤의 부인은 숙인 안동권씨로서 현감을 지낸 심언(審言)의 딸이었다. 자식은 전 부인의 몸에서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지(?)는 선교랑에 제수되었으며, 차남 숙(潚)은 요절하였다. 장녀는 완흥군에 추봉된 감사 최현(崔睍)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정언 최정호(崔挺豪)에게 출가하였다.(www.koreastudy.or.kr 2007)
김복일(金復一) [記事] : 저작이야기/ 『남악선생일고(南嶽先生逸稿)』 : 김복일의 개인 문집이다. 이것은 흩어져 없어지고 겨우 남은 김복일의 유문을 모아서 엮은 것으로 의성김씨 집안 문집인 『연방세고(聯芳世稿)』 권5에 포함되어 있는 간략한 문집이다. 8수의 시(詩)와 2통의 서(書)가 있고, 그 외 제문과 묘갈, 잡저와 부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 가운데 1576년에 쓴 「서울에서 우연히 읊다」라는 제목의 시는 성균관 학록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지은 시로서 벼슬자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향하는 저자의 심정이 드러나 있다. 그 외 초간 권문해와 주고 받은 시는 그와 권초간과의 교유가 긴밀했음을 암시한다. 또한 잡저 가운데 「금곡서당(金谷書堂) 창립문」이 있는데, 이 글은 저자가 29세 되던 해에 지은 것으로 예천 고을의 학문을 일으키기 위해 금곡서당을 창립할 것을 제창한 글이다. 이 사실은 그가 이른 나이에 이미 지역 사림 간에 상당한 학문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금곡서당은 나중에 정산서원(鼎山書院)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정산서원은 이황과 조목을 배향한 서원으로 광해군 대에 창건되었다가 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었다./ 『소학초기(小學抄記)』 : 이 책은 현재 전하고 있지 않는데, 퇴계문인록인 『도산급문제현록』에 김복일이 『소학초기(小學抄記)』를 저술하여 집안 사람들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소학』 가운데 중요한 요결을 발췌 정리하여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여기서 저자의 돈독한 실천 철학적 학문 경향을 읽을 수 있다.(www.koreastudy.or.kr 2007)
김복일(金復一) [記事] : 1541~1591,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계순(季純), 출생지는 안동(安東) 천전(川前), 분묘지는 예천(醴泉) 용문산(龍門山)이다. 입사경로는 1564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합격, 1570년(선조 3) 식년시(式年試) 급제, 외관직은 울산군수(蔚山郡守), 창원부사(昌原府使), 풍기군수(豊基郡守)이다. [평직한 마음과 강경한 성품] : 김복일은 어렸을 적에 재주가 노둔한 편이고 성품은 강경하다는 평을 들었다. 머리를 숙이고 남에게 배우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이러한 성격은 장성 후에도 그의 생애의 도처에서 발견되며 관직과 대인 관계에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강경한 성격을 그나마 완화시킨 것은 학문의 힘이었다. 그가 학문에 힘쓰기 시작하면서 강경한 성품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남에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도 생겼다. [약관의 나이에 퇴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다] : 김복일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형인 김명일(金明一),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소수서원에서 글을 읽다가 부친의 명으로 퇴계 이황의 문하에 나란히 입문하였다. 이 때 김복일은 스승에게 인심도심과 같은 철학적 문제와 선기옥형과 같은 천문학적 문제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형제들은 수업할 때나 물러나 쉴 때도 학문을 토론하고 익히기를 그치지 않아 퇴계 선생이 매우 가상히 여겼다.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서다] : 김복일은 29세가 되던 해에 형인 김수일(金守一), 김명일(金明一)과 함께 상경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에 셋째 형 김명일이 병이 들어 둘째 형인 김수일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혼자 남은 김복일은 이러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문과에 응시하여 당당히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가 처음 받은 벼슬은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는 학유(學諭)라는 말단의 벼슬이었다. 당시 그의 벼슬살이는 그다지 마음 편안한 생활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집에 나오는 「서울에서 우연히 읊다」라는 제목의 시에는 당시 벼슬 자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처지를 읊은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원칙과 소신의 벼슬살이] : 김복일은 원칙과 소신으로 벼슬살이에 임하였다. 이러한 성격은 부친인 청계 김진의 영향이었다. 따라서 그의 벼슬살이는 전반적으로 순탄한 편이 아니었다. 문과에 급제하고 받은 벼슬이 종9품직의 학유였는데, 후학들은 그를 못마땅해 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또 울산군수로 있을 때 관내에 폐단이 있어 엄정히 대처하였으나 끝내 감사와 뜻이 맞지 않아 도중에 벼슬을 그만두었으며, 창원도호부사로 있을 때 감사, 병사와 뜻이 맞지 않아 파직당한 적도 있었다. 반면에 울산부사가 되었을 때 아전과 토호의 비리를 척결하였고, 전라도 어사를 지낼 때는 종실 귀척인 전라감사까지 비리를 묵인하지 않고 파직시켰을 만큼 강직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그가 울산부사로 있을 때 한번은 경상도를 순시하는 순찰사가 울산으로 온다고 해서 울산부의 경계선까지 영접하러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순찰사가 오는 도중에 곳곳에서 접대를 받고 술에 취해 도착 시간이 넘었는데도 울산 땅에 이르지 못하였다. 김복일은 자신이 순찰사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동안에도 백성들이 힘들여 생산한 양식을 낭비하고 있음을 탄식하고, ꡒ나는 더 이상 백성들을 괴롭힐 수 없다.ꡓ라고 하면서 돌아와 버렸다. 그의 「행장」에는 모두 세 고을을 다스렸다고 되어 있다. 1587년(선조 20)에 울산군수가 되었고, 이어 창원부사가 되었으며, 1590년(선조 23)에는 풍기군수에 제수되었던 것이 그것이다. 다스림이 한결같았으므로 백성들이 비석을 세우고 ꡐ얼음 항아리와 가을 달ꡑ, ꡐ황하 가운데 솟은 돌기둥ꡑ이란 말로 칭송하였다. 저서로『남악선생일고(南嶽先生逸稿)』|『소학초기(小學抄記)』가 있다.(http://www.koreastudy.or.kr 2007)
김복일 [記事] : 학사집(鶴沙集)/ 11권 6책 중 卷9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行狀 / 成均館司成南嶽金公行狀 33/ 金復一(1541˜1591)의 행장이다. 자는 季純이고 호는 南嶽이다. 의성인이다. 臨河縣 川前里에서 태어났다. 1570년(선조 3) 문과에 급제했다. 學諭․博士․典籍․공조좌랑․함경도사․호조정랑․창원부사․단양군수․성균관사성을 역임했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일찍이 예천 金谷里에 寓居했는데 父老들을 권유하여 德進洞에 서당을 세우고 선비들을 모아 강학했다. 후에 鼎山으로 옮겨 書院이 되었다. 여강서원을 세우고 퇴계 선생을 배향할 때 請額을 위해 本府에 정문을 올리기 위하여 士林들이 공에게 그 글을 지을 것을 권하였는데 그 글이 천수백 마디의 말이었다. 보는 자들이 모두 도를 알지 못하면 이렇게 盛德을 형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www.koreastudy.or.kr 2007)
김복일 [記事] :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 간행년 : 2001/ 저자 : 안동문화원/ 발행처 : 안동문화원/ 2) 인물(人物)/ .../ 김복일(金復一) 성일(誠一)의 아우로 자는 계순(季純)이요, 호는 남악(南岳)이다. 퇴도의 문인이다. 가정 갑자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융경(隆慶) 경오년 문관에 급제하였다. 성품과 행실이 경개(耿介)60) 하였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였으며, 청렴하고 신중함으로써 스스로를 지켰다. 세 고을의 원님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www.koreastudy.or.kr 2007)
김복일 [記事] : 안동의 명현당호2/ 간행년 : 2002/ 저자 : 안동민속박물관/ 발행처 : 민속박물관/ 靑溪宗宅/ ...있는 내앞을 본산으로 하여 임하 신덕의 운암파(雲巖派), 안동 서후 금계의 학봉파(鶴峯派), 예천 구계의 남악파(南嶽派, 김복일)...(www.koreastudy.or.kr 2007)
김복일 [記事] : 안동의 서원/ 간행년 : 1994/ 저자 : 안동문화원/ 발행처 : 안동문화원/ 11. 泗濱書院 : 소재지: 안동군 임하면 임하면 임하리/ 원래 安東府 臨河縣 景出山에 있던 靑溪 先生의 墳庵을 1675년(숙종 元)에 확장하여 선생의 遺像(현재 종택에 봉안)을 봉안하고 ''''泗濱影堂''''이라 하였다. 이를 1685년(숙종 11) 士林과 內外孫들이 합의하여 선생은 主享으로, 그리고 다섯 子弟인 藥峯 金克一 ? 龜峯 金守一 ? 雲巖 金明一 ? 鶴峯 金誠一 ? 南嶽 金復一 선생을 配享하고 廟號를 ''''景賢祠''''라 했다. 1709년(숙종 35)에 동구 밖 泗水 가로 이건하여 ''''泗濱書院''''이라 하였다가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882년(고종 19) 사림과 본손들에 의해 복설되었으나, 1989년 임하댐 공사로 인해 임하면 사의리에서 현위치인 임하리로 이건했다. 현재 향사하지 않는다. 경상북도 지방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사빈서원 봉안문은 『泗濱志』(金時雨氏 藏)에 수록되어 있다.../ ○ 金復一(1541, 중종 36~1591, 선조 24) : 義城人. 자는 李純, 호는 南嶽. 1565년(명종 19)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도사?울산군수?창원부사?단양군수?풍기군수 등 직을 지냈다. 목민관으로서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선조대왕은 은전으로『문헌비고』,『성리대전』등 귀중한 서책을 하사하기도 했다. 사빈서원 외에 예천의 鳳山書院에 제향되었다.(www.koreastudy.or.kr 2007)
김복일 [記事] : 안동시사 5/ 간행년 : 1999/ 저자 : 안동시/ 발행처 : 안동시청/【義城 金氏】/ 김복일(金復一):1541(중종 36, 신축)~1591(선조 24, 신묘). 본관 義城. 자는 季純. 호는 南嶽. 璡의 第5子. 1570년(선조 3) 문과 급제. 全羅道 御史?豊基郡守 역임. 제향:泗濱書院. 저서:『聯芳世稿』. ▣참고:「墓碣銘」(金應祖 撰) ??집필:김태안(www.koreastudy.or.kr 2009)
김복일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安東 / 壇廟 / 泗빈影堂 在臨河縣東三里立祠祀 贈判書 金璡配享司成 金克一 察訪 金守一生員金明一 文忠公金誠一 司成 金復一 栢麓里社 在奈城縣南立祠祀校理 李宗準 進士 李弘準 大司諫 鄭惟一 參奉 洪浚亨 觀察使 金聲久 正郞 權斗寅(www.history.go.kr 2009)
김복일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安東 / 人物 / 金克一 璡之子登第官至司成號藥峯配祀泗?影堂 金守一 克一之弟中司馬薦補察訪號龜峯配祀泗?影堂 金明一 守一之弟中司馬以儒雅見稱號雲巖配祀泗?影堂 金誠一 明一之弟師事李滉聞心學之要堅苦刻勵造詣精深登第官至觀察使嘗奉使 日本動以禮法倭人敬?壬辰之亂受本道招諭之 命忠義感動義旅爭集江右一帶賴以得完未幾卒於軍中士民涕泣相吊後 贈判書謚文忠配享虎溪書院有鶴峯集 梅?錄等書行于世 金復一 誠一之弟淸介有志行登第官至府使號南嶽配祀泗?影堂 南致利 受業於李滉之門專心爲己之學號賁趾早卒鄕人立祠祀之 權宇 號松巢弱冠登李滉之門專精問學薦授 王子師傳 宣祖聞其?洽拈出經書中疑義令 王子問難宇應口對無疑 上手書嘉之後 贈左承旨鄕人立祠祀之 權春蘭 登第官至司諫號晦谷淸苦有學行嘗著言仁錄配享周溪書院見名臣錄 金涌 守一之子/ <하권0541-2>/ 號雲川登第歷敭淸顯正直持論風彩動朝官至兵曺參議以原從功 贈吏曺參判後人祀于黙溪精舍(www.history.go.kr 2009)
김복일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昌原 / 名宦 / 高麗 安裕 鎭合浦撫軍恤民州郡以寧 羅裕 羅益禧 三鎭合浦以廉謹慈惠稱 安于器 鎭合浦以廉幹稱 金得培 鄭思道 裵克廉 俱鎭合浦 田祿生 再鎭合浦 朴? 三鎭合浦 本朝李澄石 曹備衡 河/ <하권0577-1>/ 敬復 皆鎭合浦 新增張義國 壬辰之亂與漆原縣監 李邦佐合勢夜襲據城之賊收復舊城大興學校 鄭起龍 壬辰之亂與天將?提督麻提督追賊露梁水陸合勢?戰大捷還入府境收拾散民與召募將李瀞設木柵開陳于明今谷一境賴安 朴弘美 以善治陞資 白善男 以淸白稱當丙子亂領兵到雙嶺戰亡陪吏黃是憲擔其印信同死 金復一 治化大行鮮龜之日吏民守門遮路 鄭文孚 光海戊午被斥出補治化大著 成以性 以淸白著名民稱召社 張鵬翼 恩威竝行吏民追思(www.history.go.kr 2009)
김복일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補遺篇 (慶尙道) / 蔚山府邑誌 / ?蹟 / 高麗 金宗直 通判 鄭? 知郡 本朝李殷 孫光衍 知州 朴善 朴復卿 金及 宣憲 郡守 李世琳 文 李 友蔣孝範 武 愼邦佐 李希伯 文 崔繼勳 申國樑 金漢卿 武 徐克一 文 郭 李求仁 裴德文 李濟臣 林希茂 金逸駿 鄭仁寬 / <하권0911-2>/ 李彦愉 曺千齡 孫英濟 崔慶長 閔忠男 金復一 李瑩 鄭仁貴 金友? 武 李彦? 金應瑞 兼府使萬曆己亥正月仕同年十月日遞 郭再佑 萬曆己亥十月日仕庚子三月日遞 朴毅長 嘉善萬曆庚子仕辛丑遞 李英 嘉善萬曆辛丑仕壬寅遞歸 金澤龍 文判官萬曆辛丑八月日仕十二月遞 孫起陽 文萬曆壬寅十一月仕同年十二月遞 金太虛 兼府使萬曆壬寅仕甲辰遞 閔汝任 判官萬曆癸卯仕同年六月遞 尹安國 萬曆癸卯仕甲辰遞 金應瑞 兼府使萬曆甲辰仕丙午遞 趙誠立 文判官萬曆乙巳正月仕同年二月遞 尹弘國 萬曆乙巳仕丙午遞 鄭起龍 兼府使萬曆丙午仕丁未遞 宋光廷 判官萬曆丙午仕丁未喪逝 李璲 兼府使萬曆丁未仕戊申遞 吳汝? 判官萬曆丁未仕庚戌遞 朴毅長 兼府使萬曆戊/ <하권0911-3>...(www.history.go.kr 2009)
김복일 : 제목 김복일(金復一)의 교지/ 저자 국왕/ 출처 한국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키워드 : 교첩, 敎牒, 告身, 金復一, 通善郞, 蔚山郡守, 成均館博士, 工曹佐郞, 戶曹佐郞, 刑曹正郞, 戶曹正郞, 承訓郞, 刑曹佐郞, 江原道都事, 奉訓郞, 成均館學錄, 咸鏡道都事, 宣務郞, 成均館學諭, 成均館學正, 通仕郞, 成均館典籍, 承仕郞/ 대상시기 : 조선후기/ 김복일 교첩1 : 1575-01-01/ 1575년(선조 8)에 吏曹에서 從仕郞으로 成均館學諭인 金復一을 成均館學諭兼東學訓導에 임명하는 告身이다./ 김복일 교첩2 : 1586-01-01/ 1586년(선조 19)에 吏曹에서 加資된 奉直郞(daum 2010)
김복일(金復一) :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선조(宣祖) 3년, 과거시험연도 : 1570 경오, 시험명 : 식년시(式年試), 등위 : 병과23(丙科23)/ [인적 사항] 성명(姓名) : 김복일(金復一), 자 : 계순(季純), 본관(本貫) : 의성(義城)/ [이력 및 기타 사항] 소과 : 1564(갑자) 진사시, 전력(前歷) : 진사(進士), 관직(官職) : 부사(府使)/ [가족사항] 형(兄) : 김성일(金誠一), 부(父) : 김진(金璡), 조부(祖父) : 김예범(金禮範), 증조부(曾祖父) : 김만근(金萬謹), 외조부(外祖父) : 민세경(閔世卿), 처부(妻父) : 권지,권심언(權祉,權審言)(daum 2010)
김복일 : 퇴계학통 전승도/ ...隆). 김 륵(金 王力 ).김 면(金 沔). 김명일(金明一). 김몽구(김몽구). 김몽득(金夢得). 김백기(金伯起). 김복일(金復一). 김부륜(金富倫). 김부신(김부신). 김부의(金富儀). 김부인(金富仁). 김부필(金富弼). 김사원(金士元). 김생명.../ http://blog.naver.com(daum 2010)
김복일(金復一) : [생원진사시] 명종(明宗) 19년 (156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48위/ [인적사항] 자 계순(季純), 생년 신축(辛丑) 1541년, 합격연령 24세, 본관 의성(義城), 거주지 안동(安東)/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관직 창원부사(昌原府使), 타과 선조(宣祖) 3년(157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가족사항] [부] 성명 : 김진(金璡), 타과 : 성균생원(成均生員)/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형] 김극일(金克一)/ [형] 김수일(金守一)/ [형] 김명일(金明一)/ [형] 김성일(金誠一)/ [출전]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daum 2010)
김복일(金復一) [專門資料] : 관련인물 :계순(季純)|남악(南嶽)|진(璡)|성일(誠一)|이황(李滉)관직 :병마절도사|학유(學諭)|전적(典籍)|낭관|전라도어사|울산군수|창원부사|경주교수(慶州敎授)|사예|사성|풍기군수관련서적 :관련지역 :조선.../ 2009.04.06(daum 2010)
김복일(金復一) : [문과] 선조(宣祖) 3년 (157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3위/ [인적사항] 자 계순(季純), 생년 신축(辛丑) 1541년, 합격연령 30세, 본관 의성(義城)/ [이력사항] 전력 진사(進士), 관직 부사(府使), 타과 명종(明宗) 19년(1564) 갑자(甲子) 진사시(進士試)/ [가족사항] [부] 성명 : 김진(金璡), [조부] 성명 : 김예범(金禮範), [증조부] 성명 : 김만근(金萬謹), [외조부] 성명 : 민세경(閔世卿), [처부] 성명 : 권심언(權審言), [처부2] 성명 : 권지(權祉), [형] 김성일(金誠一)/ [출전]《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daum 2010)
김복일 : 오룡지가의 명문/ 2010.01.08/ ...년), 운암(雲岩) 김명일(金明一, 1534∼1570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 1541∼1591년)이 바로 그들이다. 장남인 약봉은 내앞의 대종택에서 살았지만, 나머지 네 아들은 안동 인근으로.../ http://cafe.daum.net/usnamak/ 의성김남악사랑방[義城金南嶽舍廊房]입니다.(daum 2010)
김복일 : 학봉종택(鶴峯宗宅)은~/ 2009.11.20/ 신덕(新德)에 자리를 잡았으며, 사남이 바로 학봉공으로 이곳 검제에 터전을 마련하였고, 오남 남악공(南嶽公 : 金復一)은 문과에 급제하고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역임하고 예천현(醴泉懸)의 용문면(龍門面) 구계리(九溪里)에 터를.../ http://cafe.daum.net/s3018/ 대구삼영초등학교 18회졸업 동기회(daum 2010)
김복일 : 義城金氏 重要 世居地 變遷/ 2009.09.27/ ''''朝天錄''''은 인조 4년 正使 金尙憲을 따라 서장관으로 明나라에 가면서 지은 시들을 묶은 것이다. 金賓은 南獄 金復一의 증손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내외요직을 두루거친 명신이다. 외직으로는 경주부사, 광주, 나주목사, 한성좌우윤을.../ http://cafe.daum.net/kimsk45/ 무지의 파라다이스(daum 2010)
김복일 : 義城金氏 朝鮮朝 文科及第者 (1)/ 2009.10.06/ 肅夫 東岡 希參 思道室 宣祖 丁卯式年 丙科 大司憲 金誠一 戊戌 士純 鶴峰 璡 金溪 同 戊辰增廣 丙科 觀察使 金復一 辛丑 季純 南嶽 璡 醴泉 同 庚午式年 丙科 司成 金齊閔 丁亥 士孝 鰲峯 灝 井邑 同 癸酉式年 乙科 正郞 金堯立.../ http://cafe.daum.net/kimsk45/ 무지의 파라다이스(daum 2010)
김복일 : 의성김씨(義城金氏)/ 2010.03.04/ ...(金東三) 김득추(金得秋) 김말(金末) 김명기(金命基) 김명일(金明一) 김방걸(金邦杰) 김병종(金秉宗) 김복일(金復一) 김붕준(金朋濬) 김석(金錫){1} 김성구(金聲久) 김성일(金誠一){1} 김성탁(金聖鐸) 김세우(金世瑀){1} 김세흠.../ http://blog.daum.net/ilkobstar/ 별중별(daum 2010)
김복일 : 하계직원 연수 2 -내앞종택과 병호시비/ 2008.09.19/ 1528-1583), 운암 김명일(雲岩 金明一, 1534-1570),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 남악 김복일(南嶽 金復一, 1541-1591)이다. 어제 처음으로 답사한 학봉종택의 학봉이 바로 이 집의 넷째 아들이다. 여기에는 한 가지 제미.../ http://blog.daum.net/whang77/ 황도사의 사주여행(daum 2010)
김복일 : 검제마을/ 2008.09.15/ ...신덕(新德)에 자리를 잡았으며, 사남이 바로 학봉공으로 이곳 검제에 터전을 마련하였고, 오남 남악공(南嶽公 : 金復一)은 문과에 급제하고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역임하고 예천군(醴泉郡)의 용문면(龍門面) 구계리(九溪里)에 터를.../ http://blog.daum.net/starfamily/ 쪼구랑별(daum 2010)
김복일 : ../ 2008.12.05/ 17세기 전반에 義城 金氏(南嶽 金復一의 子孫)가 이곳을 개척하여 산천에 온갖 열매가 아름답다하여 가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17세기 후반(1675)에 江陵人.../ http://blog.daum.net/yongmunkasil/ Yongmun kasil(daum 2010)
김복일 : 한국의 명문 종가/ e-Book/ 이순형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0.05.10/ 책본문 : ...진사시(進士試), 31세엔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다섯째인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도 24세엔 진사시(進士試), 30세엔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이들의 문장과 학행이 뛰어났다고.../ 419페이지(daum 2010)
김복일 : 자녀 성공의 키는 아버지가 쥐고 있다/ e-Book/ 이해명 지음 | 예담프렌드 | 2006.04.22/ 책본문 : ...구암龜峯 김수일金守一, 운암雲岩 김명일金明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94 자녀 성공의 Key는 아버지가 쥐고 있다. 아버지의 헌신으로 대학자가 된 학봉 김성일.../ 96페이지(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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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면 출신 박의식, 20일 박사학위 받아...축하합니다.
박의식(龍門面 出身 박의식 榮州副市長, 嶺南大 博士學位 받아) [記事] :
박의식 영주부시장(53세)은 2010년 8월 20일 영남대학교에서「사회복지 서비스 재정지출 성과구조분석」연구 논문으로 지역개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은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재정지출에 대한 사회복지 서비스 품질과 성과에 대한 분석과 함께 사회복지 서비스 재정지출의 문제점과 개선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항상 자기 개발을 바탕으로 대민 업무에 임해야 고객 만족을 유도할 수 있다고 강조하던 평소 철학을 실천에 옮긴 박 부시장은 특히 이 연구에서 분석된 영주시의 사회복지 서비스 재정지출 성과구조분석 결과는 영주시뿐만 아니라 여러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사회복지 서비스 품질 개선을 위한 방향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박의식 부시장은 행정안전부 재정정책과에서 지방재정 업무를 오랫동안 담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같은 논문을 발표했으며 “논문으로 인해 업무에 소홀함이 없었는지 뒤돌아보며 동료직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편 박의식 부시장은 예천 용문면 출신으로 영남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지방행정연수원 조사과, 내무부 총무과, 경찰대학 치안연구소, 행정자치부 재정정책과 등 중앙부처를 거쳐 경북도 정책기획관, 새경북기획단장, 청도군 부군수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지난 3월 발간한 지방재정의 의의와 운용, 지방재정의 세입, 세출, 관리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지방재정론”이 있다.
(황성한 記者 醴泉인터넷放送 2010-08-22 오후 7: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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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665
예천문화체육센터(第7回 慶北클럽最强戰 배드민턴大會 열려) [記事] :
2010 전국클럽리그 예선대회 겸 제7회 경북클럽최강전 배드민턴대회가 2010년 8월 22일 오전부터 예천문화체육센터를 비롯한 4개소에서 개최됐다.
이날 개회식에는 이현준 예천군수, 김영규 예천군의회장, 도기욱 도의원, 김시택 고령경찰서장을 비롯한 23개 시군 32개 클럽 선수 등 1천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김준동 경상북도 배드민턴연합회장은 대회사를 통해 “오늘 여러분들을 모시고 예천에서 성대하게 개최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하며 “이번 대회가 전국클럽리그 결선에 나갈 예선전도 겸하는 대회인 만큼 클럽의 명예와 더불어 성숙된 매너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아름다운 대회로 기억 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협조를 당부한다”고 말했다.
이현준 예천군수는 환영사에서 “1300년의 역사를 가진 충효의 고장이며 활의 고장인 우리 예천에서 대회가 열리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며 참가하신 여러분 모두를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하며 “우리 고장에 머무시는 동안 시간이 나시면 회룡포, 석송령, 삼강주막, 곤충연구소 등 명승지도 둘러보고 예천온천에서 피로를 풀면서 유익한 시간이 되길 바란다”며 환영했다.
이에 앞서 선수들은 8시 30분부터 문화체육센터, 경도대체육관, 예천학생실내체육관, 예천여고 체육관 등 4개 경기장에서 분산해 경기를 펼쳤다.
(醴泉인터넷放送 2010-08-22 오후 5: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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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방문(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인 박사모 慶北 北部 연합정모 醴泉에서 開催) [記事] :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인 박사모 경북 북부 연합 정기모임을 예천지회(지회장 최희노)가 주관하여 2010년 8월 21일 오후 7시 광일웨딩홀에서 개최됐다.
이날 정기모임에는 이현준 예천군수, 정광용 박사모 중앙회장, 손호영 경북축구협회장, 북부지역 임원진과 회원 150여명이 참석했다.
특히 이날 김천 박사모 회원들이 참석 북부지역 연합정기모임을 빛나게 했다. 이번 정기모임은 경북북부지역 회원들의 결속을 통해 화합과 단결의 의지를 더욱더 높이고자 개최됐다.
(醴泉인터넷放送 2010-08-21 오후 9: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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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