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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294:김빈都承旨1(附예천방문666)
작성자장병창 @ 2010.08.24 09:41:02
  예천의 자랑(2294) : 용문면 죽림리 출신 김빈 도승지(1)(附 예천방문 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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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빈(金빈) : 1621(광해군 13)-1694(숙종 20), 용문면 죽림리에서 상금곡리로 옮겨 살았다. 자는 빈여(賓如), 호는 갈천(葛川) 또는 만취헌(晩翠軒), 본관은 의성, 남악(南嶽) 복일(復一)의 증손자, 유학(幼學) 시통(是桶)의 양자, 유학 시진(是振, 菊窓)의 아들, 언의 동생, 정ㆍ노(魯)의 형이다. 부모 슬하(具慶下)에서 1651년(효종 2) 식년 진사시에 3등 83위로 합격, 1657년(효종 8) 명경과에 합격, 동년 식년 문과에 병과 15위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예조 좌랑(禮曹佐郞), 문경 현감(聞慶縣監), 병조 참판(兵曹參判),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 한성 부윤(漢城府尹) 등 내외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당론에 치우침이 없었고, 여러 번 사직할 것을 청했으나 그의 인품을 아낀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문경 현감(聞慶縣監) 재임 중 1671년(현종 12)의 큰 가뭄에도 굶주린 백성이 없게 잘 다스려서 고을 사람들이 거사비를 세워 칭송했다. 그리고 자(慈), 상(詳), 청(淸), 간(簡)의 4자를 정사하는 요체로 삼았다. 겸손, 근신(謹愼)하고 학행(學行)이 있어 벼슬에 있을 때 그를 칭송함이 끊어지지 않았다. 남의 뜬 의론에 움직이지 않고, 세도에 구차히 영합하지 않고, 성심껏 소신껏 순리대로 해 나가니, 왕이 매우 중히 여겼다. 조정에서는 아무리 당론이 양립되어 있다 할지라도, "반대편이 반드시 소인이 아닐 것이고, 이 쪽이 반드시 다 군자는 아닐 것이니, 내가 보는 바로 정확히 살필 뿐이다."라고 했으니, 더욱 그랬던 것이다. 내직에 있을 때는 무엇이나 남의 앞에 먼저 나서지 않고, 항상 겸손한 태도로 지냈고, 외직(外職)으로 다닐 때는 모두 선량한 목민관(牧民官)이라 하였다. 문경 현감으로 있을 때 주야로 백성의 고충이 무엇인지 덜어 주려고 애를 써서 1671년(현종 12)의 대기근(大饑饉)에도 굶주린 백성이 없었다. 임지를 떠나올 때 온 백성들이 길에 나와 슬퍼했고, 거사비(去事碑)를 세우고 그를 칭송했다. 관청의 문을 항상 열어 놓고 누구든지 어려운 일을 호소할 수 있게 하였고, 불쌍한 자들을 보살피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襄陽誌 1661, 醴泉郡邑誌 1786 1841 1895, 醴泉郡誌 1939, 葛川集 年譜, 내故庄傳統가꾸기 1981, 司馬榜目, 嶠南誌 1937 聞慶郡篇)

  [숙종실록] : 1674년(숙종 즉위년) 10월 27일 장령에 임명되어서 곽세건(郭世楗)을 죄주고 이수언(李秀彦) 등의 파직 명령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고(1674.10.27), 곽세건의 귀양보낼 일의 논계를 정지하였다(1674.11.2). 사간(1674.12.26)으로서 전조(銓曹)를 배척하는 상소를 하였고(1675.1.2), 송시열(宋時烈)을 멀리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고(1675.1.12), 이상진(李尙眞)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상진이 낙향하였다(1675.1.17). 집의(1675.2.6, 1675.3.11)로서 정(楨)연을 법대로 처단하자고 주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고(1675.3.16), 왕에게 아뢰기를, "고(故) 감사 최현(崔晛)은 높고 낮음을 따지지 말고 포(布)를 거두어 들이기를 청하였으니, 비록 조그마한 폐단이 있더라도 실행함이 좋을 듯합니다."하였다(1675.4.10). 1675년(숙종 1) 4월 28일에 대사헌 이익상(李翊相)이 대사간 남천한(南天漢, 龍宮縣人)을 논박하여 갈아치우려 하였고, 또한 대사헌을 잘못 의망(擬望)한 일로써 허목(許穆)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였으며, 부모에게 불효한 일로써 예천군수 이성시(李聖時)를 벼슬아치 명단에서 삭제하려 하였으나 장령 강석구(姜碩耈)가 그 의견을 따르지 않으므로 각각 스스로 인피(引避)하였다. 이에 집의 김빈 등이 이 일을 처치하여 강석구를 내보내고 이익상을 갈아치우게 하였다. 이익상이 이로 인하여 허목의 당파들에게 탄핵을 받아 파면된 뒤에 내쫓겨서 강릉 부사로 전보되었다. 동년 4월 30일에는 춘천 부사로서 잉임(仍任)되어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는데, 허목의 유임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고(1675.5.2), 좌부승지(1675.윤5.16)로서 남인이 허목의 청남(淸南)과 허적의 탁남(濁南)으로 갈릴 때 청남에 속하였고(1675.6.4), 승지(1676.8.19, 1690.2.18, 1690.8.10)에 임명되었다. 1691년(숙종 17) 3월 19일에는 영의정 권대운(權大運, 濁南)의 청에 의해 동의금(同義禁)에서 체임되었으나, 도승지(1692.7.14)에 임명되었다. 그 후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文科榜目, 顯宗實錄, 肅宗實錄, 醴泉郡誌 1939)

 . [醴泉의 金石文] : 승문원에 들어가 1658년(효종 9)에 승문원 부정자에 보임되었다. 1661년(헌종 1) 이후로 승문원 정자, 저작, 박사를 거쳐 봉상시 직장으로 옮겼고, 예조의 낭관으로 전직하였다가 전적으로 승진하였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문경 현감을 지냈다. 남인을 등용하는 시기를 당하여 비로소 대간으로 입신하여 정언, 지평이 되었다가 장령으로 승진하였다. 1675년(숙종 1) 이후로는 사예를 거쳐 사간, 집의, 사복시 정, 사성이 되었고, 동부승지가 되었고, 좌ㆍ우부승지를 두루 거쳤다. 외직으로 영해 원으로 나갔다가 일이 생겨 파직되었는데, 금방 승정원에 복직되었고, 또 밀양의 원을 지내고 경주로 옮겨 곧 윤(尹)으로 승진하였고, 예조 참의로 들어와 병조ㆍ형조로 옮겼다가, 좌승지에서 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니 이 때가 경신대출척(1650) 때였다. 얼마 뒤에 광주 부사로 부임하였다가 몇 달만에 그만 두었고, 다시 또 나주 목사를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8년 동안을 한가롭게 지내다가 남원 부사가 되었고,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 참의를 배명하였고, 전조(銓曹)를 세 번이나 거쳐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한성 우윤, 동의금이 되었고, 기사에 들었다가 연달아 호조와 병조의 참판을 거쳐 여러 차례 도승지 겸 직제학이 되었으며, 좌윤으로 옮겼다가 사직하고 돌아왔다. 얼마 안 되어 공조 참판이 되어 부임하였고, 예조 참판으로 옮겼다가 끝내 체임하고 돌아오니 이때가 1694년(숙종 20)이었고, 그 해 10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예천군의 북쪽 지도곡(知道谷) 오향(午向)인데,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찬(撰)하였다.(醴泉의 金石文 2003)

  김빈 [記事] : 안동인물초색인/ 간행년 : 2000/ 저자 : 권오신 외/ 발행처 : 안동문화원/ 김빈 : 1621(광해군 13, 신유) ~ 1694(숙종 20, 갑술),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빈여(賓如). 호는 갈천(葛川). 복일(復一)의 증손자. 시진(是桭)의 자로 숙부 시통(是桶)에게 출계. 김응조(金應祖)의 문인. 1657년(효종 8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ㆍ예조좌랑(禮曹佐郞)ㆍ문경현감(聞慶縣監) 등을 역임했다. 이어 병조좌랑(兵曹佐郞)ㆍ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ㆍ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ㆍ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ㆍ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등을 역임했다. 1676년 밀양부사(密陽府使)?경주부윤(慶州府尹)을 제수받고, 1680년 승정원좌ㆍ우부승지(承政院左右副承旨)를 역임한 후 귀향하여, 8년 간을 향리에 있었다. 뒤에 다시 관직에 나가 남원부사(南原府使)?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내며, 1691년에는 기로연(耆老宴)에 참여했다. 이어 도승지(都承旨)?한성부윤(漢城府尹)?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하다가 당쟁이 극심하여 체직(遞職) 귀향했다. 항상 공손하고 청렴했으며 검소하면서도 어려운 일가를 도움에는 아낌이 없었고, 늘 주자서(朱子書)를 즐겨 읽었다. 만년에 낙향하여 예천(醴泉) 갈평(葛坪)에 정사(精舍)를 지어 거쳐하면서 스스로 갈천산인(葛川山人)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 醴泉郡誌?安東鄕土誌(宋志香)(www.koreastudy.or.kr 2007)

  김빈 [記事] : 안동시사 5/ 간행년 : 1999/ 저자 : 안동시/ 발행처 : 안동시청/【義城 金氏】/ 김빈(金빈):1621(광해군 13, 신유)~1694(숙종 20, 갑술). 본관 義城. 자는 賓如. 호는 葛川. 復一의 손자. 是桭의 子. 숙부 是桶에게 출계. 金應祖 문인. 1657년(효종 8) 진사시 합격. 문과 급제. 司諫院正言ㆍ漢城府尹ㆍ禮曹參判 등을 역임. 외직으로 고을을 다스려 治績이 있음. ▣참고:「行狀」(金興洛 撰)??집필:권진호(www.koreastudy.or.kr 2007)

  김빈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醴泉 / 人物 / 高麗 林民庇 毅宗朝擢第官至同中書門下平章事爲相挺然有古風好善周急確實無華故武夫悍卒亦知景仰年七十三致仕謚文靖 林宗庇 工於四六 林椿 宗庇從子毅宗時人以文章鳴世屢擧不第鄭仲夫之亂闔門遭禍椿脫身僅免卒窮夭而死號西河先生有集行於世 高麗史云西河人未知何據 林支 漢元宗時以本郡吏從征東都叛將崔宗 崔積 崔思等有功欲賞以職支漢辭請以尙州管內多仁縣移屬本郡元宗許之 林惟正 登第官至祭酒工於集句有百家衣集 本朝權孟孫 登第官至藝文館大提學謚/ <하권0396-4>/ 齊平 尹祥 以縣吏登第學問精深誨人不倦長成均凡十有六年官至藝文館提學年七十八退老于鄕學者集雲八十三卒近代師儒之最 流寓本朝趙庸 洪武壬申謫居詳眞寶縣 孝子本朝林? 仕至監察爲父居廬三年末嘗見齒事聞旌閭 金? 其父早死以?得行喪及壯?歿廬墓年爲父仍居三年事聞拜架閤庫錄事 潘濡 爲父居廬三年事間旌閭 權節山 爲母居廬三年事聞旌閭 尹奕 郡吏也養父母家雖貧未嘗闕酒肉及歿哀毁踰禮事聞旌閭 盧珣 進士也少失父鞠於其祖珍珍年六十居母廬罹疾幾死珣奉藥先嘗禱於北辰求以身代嘗糞味苦疾果愈 烈女權氏 安東權啓生女年二十其夫宋孝從死親自負土葬於家北率五?先兒朝夕不離墓側終三年一曰有虎攬子而去權氏左手扶子右手拒虎呼曰皇天有知乞賜照臨虎乃棄去 新增 人物權五紀 文科以承文副正字選拜藝文館?閱止執義號拙齋 權五福 五紀之弟/ <하권0397-1>/ 文科官至校理早受業於??齋 金宗直門下戊午之禍興金馹孫等同被極刑號睡軒有文集行于世鄕人立祠享之 太斗南 文科官至執義以文章鳴于世 張孟羽 延福君末孫之子文科官至校理 權文海 文科官至左承旨有所撰大東韻玉二十卷號草澗 鄭琢 文科 宣廟朝官至左議政謚貞簡號藥圃鄕人立祠享之 當?丙子 命進?像 御製其銘銘曰筵中偶聞取覽厥像遺像偉然 穆廟名相百年之後入于 楓宸特題其銘以聳嶺人 曹友仁 萬曆乙巳文科昏朝坐詩案??三載酷被?掠癸亥 改玉官至承旨 朴廷薛 孝宗朝登第官至參判 金賓 孝宗朝登第官至參判 李東標 肅廟癸亥擢魁科歷銓卽舍人止參議號懶隱有學行風節 當?辛酉筵臣以力主淸議樹立卓爾建白 特贈吏曹判書 流寓本朝張末孫 天順己卯文科以 世祖朝敵愾功臣封延福君謚安襄 李光胤 益齋 齊賢之後文科官至校理號?西 權檣 忠定 ?之弟正德己卯登/ <하권0397-2>/ 賢良科以南床選入翰苑官至正郞以己卯賢 當?丙寅 贈副提學號霽村 朴從鱗 嘉靖丙辰文科選翰苑歷三司止銓郞 丁允祐 貳相 應斗之子文科官至監司 新增孝子李介立 隆慶丁卯進士以孝行擢授縣監 肅宗朝褒贈參判號省吾 魯瑞麟 郡吏也父病斷指垂口得甦 肅宗朝事 聞旌閭 新增烈女洪氏 習讀 文經濟之妻事在三綱行錄事 聞旌閭 呂氏 文應周之妻卽洪氏之歸事在三綱行錄事 聞旌閭 文氏 命周之女未?遭壬辰亂賊先刃其父?水女呼哭從溺事 聞旌閭 申氏 李宓之妻宓隨父大憲瀣朝京歿于燕訃至忽有白鳩來止于肩貌甚??馴擾異常每申氏號哭鳩輒承淚飮之常不離於側人以爲幽感申氏號哭平生無異袒括白衣疏食以終其身事 聞旌閭 李氏 權尙?之妻年二十八夫歿哀毁過禮冬月不著絮袍年過七?而食素終身 肅宗朝事 聞旌閭 朴氏 權國柱之妻六十偏寡淚盡繼血遂至喪明素食以終八耆事 聞/ <하권0397-3>/ 旌閭(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국역비변사등록 새창/ 기사제목 開城府留守議薦 ./ 왕 재위년도 숙종 19년/ 월일 숙종 19년(1693) 9월 7일 / 개성부유수 의천 / 겸호조판서 유명천 : 이수징(李壽徵)․이현기(李玄紀)․엄즙(嚴緝). / 판중추부사 심재 : 이현기․홍만조(洪萬朝)․강현(姜?). / 행의정부좌참찬 오시복 : 이시만(李蓍晩)․김빈(金賓)․엄즙. / 지중추부사 유하익 : 이수징․이시만․이서우(李瑞雨). / 공조판서 정유악 : 이수징․정중휘(鄭重徽)․엄즙. / 의정부우참찬 윤이제 : 이수징․이서우․정중휘. / 예조판서 유명현 : 정중휘․이수징․이현기. / 한성부판윤 이의징 : 정중휘․이수징․엄즙. / 병조판서 목창명 : 이수징․이시만․홍만조. / 형조판서 권유 / 이조판서 이현일 : 이수징․김빈․홍만조. / 이조참판 이담명 / 비망 : ○ 이수징․이시만․정중휘.(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현종실록 22권/ 현종 15년(1674 갑인 / 청 강희(康熙) 13년) 1월 26일(신묘) 1번째 기사/ 김빈․안후․조이병․유담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빈(金賓)․안후(安?)를 정언으로, 조이병(趙爾炳)을 지평으로, 유담후(柳譚厚)를 사서로, 이하진(李夏鎭)을 필선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4장 A면/ 【영인본】 37책 5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현종실록 22권/ 현종 15년(1674 갑인 / 청 강희(康熙) 13년) 6월 21일(갑인) 1번째 기사/ 강백년․김빈․오두헌․이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강백년을 대사헌으로, 김빈을 지평으로, 오두헌을 정언으로, 이헌을 사인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21장 B면/ 【영인본】 37책 68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현종개수실록 27권/ 현종 15년(1674 갑인 / 청 강희(康熙) 13년) 1월 26일(신묘) 1번째 기사/ 김빈․안후를 정언으로 삼다/ 김빈(金賓)․안후(安?)를 정언으로, 조이병(趙爾炳)을 지평으로, 이합(李?)을 형조 참의로, 이하진(李夏鎭)을 필선으로, 유담후(柳譚厚)를 사서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56장 B면/ 【영인본】 38책 173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현종개수실록 28권/ 현종 15년(1674 갑인 / 청 강희(康熙) 13년) 6월 21일(갑인) 1번째 기사/ 강백년이 대사헌으로, 김빈을 지평으로 삼다/ 강백년(姜栢年)을 대사헌으로, 김빈(金賓)을 지평으로, 오두헌(吳斗憲)을 정언으로, 이동로(李東老)를 필선으로, 이훤(李?)을 사인으로 각각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20장 B면/ 【영인본】 38책 18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현종개수실록 28권/ 현종 15년(1674 갑인 / 청 강희(康熙) 13년) 7월 2일(갑자) 1번째 기사/ 지평 김빈, 집의 이명익이 법률을 잘못 적용한 관계로 인피하여 체직되다/ 지평 김빈(金賓), 집의 이명익(李溟翼)이 법률 적용을 잘못하여 비난의 물의가 일었던 관계로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21장 B면/ 【영인본】 38책 186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현종개수실록 28권/ 현종 15년(1674 갑인 / 청 강희(康熙) 13년) 7월 22일(갑신) 5번째 기사/ 집의 송창 등이 인피하여 체직되다/ 집의 송창(宋昌), 장령 정창도(丁昌燾), 지평 김빈(金賓)이 병조 참의 박세견(朴世堅)을 추고하여 법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법 적용이 잘못되었다 하여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38장 B면/ 【영인본】 38책 194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현종개수실록 28권/ 현종 15년(1674 갑인 / 청 강희(康熙) 13년) 7월 26일(무자) 4번째 기사/ 허적을 영의정으로, 김수항을 좌의정으로 삼다/ 허적(許積)을 영의정으로, 김수항(金壽恒)을 좌의정으로, 정지화(鄭知和)를 우의정으로, 이하진(李夏鎭)을 집의로, 이옥(李沃)을 지평으로, 김빈(金賓)을 장령으로, 이혜(李?)를 대사간으로, 송창(宋昌)을 사간으로, 이세익(李世翊)을 형조 참의로, 이익상(李翊相)을 공조 참의로, 이훤(李?)을 보덕으로 각각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41장 B면/ 【영인본】 38책 196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숙종실록 4권/ 숙동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6월 4일(신유) 1번째 기사/ 남인이 허목․윤휴를 수반으로 한 청남과 허적․권대운을 수반으로 한 탁남으로 갈리다/ 부응교(副應敎) 오정창(吳挺昌)이 상소(上疏)하기를, ꡒ대신(大臣)의 직임은 그 지위가 대단히 높고 그 세력이 아주 무거워서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오직 대간(臺諫)만이 이를 말합니다. 이러하므로 〈대간은〉 반드시 고고(孤高) 결개(潔介)하고 항직(抗直)한 사람을 언론(言論)하는 자리에 두고 절연(截然)히 서로 보지 않게 함은 그 뜻의 소재(所在)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삼사(三司)가 서로 호창(呼唱)하면서 재상[宰揆]의 문(門)에 함께 출입하고 연소(年少)한 사람들의 논의(論議)가 간혹 정승의 자리에 관계된다면, 이는 곧 나라의 체통(體統)과 조정의 기강(紀綱)을 엄숙하게 하는 것이 못됩니다. 옛 말에 이르기를 ꡐ군자(君子)는 서로 화(和)하면서도 〈소견(所見)은〉 같이 하지 않고 소인(小人)은 〈소견은〉 같이 하면서도 서로 화(和)하지 아니한다.ꡑ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 주(周)나라 의〉 주공(周公) 과 소공(召公)은 서로 기뻐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서로 손상(損傷)하지 아니했으며, 〈 한(漢)나라 〉 엄연년(嚴延年) 이 곽광(?光) 을 논박(論駁)하였지마는 곽광(?光) 은 성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진(晉)나라 〉 왕도(王導) 는 사람들이 다 잘한다고 일컬었습니다마는, 왕술(王述) 은 ꡐ사람이 요(堯)․순(舜)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매사를 다 잘한다 하리요?ꡑ 하였습니다. 만일 오늘날 서로 말만 많고 잘못을 교정(矯正)하지 아니한다면 이는 국가의 복(福) 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마땅히 여러 신료(臣僚)들을 정량(貞亮)해서 아부하지 않는 가운데서 살피시와, 예(禮)를 숭상하고 책임을 다해 힘쓰는 이 두 가지 일을 병행(?行)하면서 과오를 짓지 않으시면, 조정은 스스로 바르게 되고 여러 사람의 마음도 다 복종할 것입니다.ꡓ하였다. 처음에 서인(西人)들이 이미 패하여 물러섰을 적에, 허적(許積) 이 맨 먼저 권대운(權大運) 을 정부(政府)에 끌어들여 허목(許穆) ․ 윤휴(尹?) 등과 합류하여 하나가 되었는데, 두 복(福) 819) 이 실지로는 종주(宗主)가 되었다. 대개 변국(變局)하려는 계모(計謀)에 어려 남인(南人)들이 힘을 모아 양성(釀成)하였지마는, 그러나 허목과 윤휴(尹?)와 오씨(吳氏) 820) 와 복(福) 821) 의 힘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그 때에 환관들은 궁 안에서 〈변국의 일을〉 주도하였는데, 복(福) 은 환관들과 결합하고, 여러 오씨(吳氏) 들과 허목 과 윤휴 등은 복(福) 과 연결을 지었는데, 여러 오씨(吳氏) 들은 주로 중간에서 전하여 주는 역할을 하였고, 허목과 윤휴 등은 주로 논의를 지시하고 사주하는 일을 하였는데, 윤휴 등이 세력을 떨치어 조정의 정사를 전천(專擅)하려는 데 급급하였기 때문에 허적(許積) 등은 그 세력이 너무 커져서 자기의 권세를 뺏을 것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청남(淸南)․탁남(濁南)의 명목(名目)이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허목과 윤휴가 괴수(魁首)가 되고 오정창(吳挺昌)이 모주(謀主)가 되고, 오정위(吳挺緯)․오시수(吳始壽)․이무(李?)․조사기(趙嗣基)․이수경(李壽慶)이 골자(骨子)가 되었으며, 장응일(張應一)․정지호(鄭之虎)․남천한(南天漢)․이서우(李瑞雨)․이태서(李台瑞)․남천택(南天澤)의 무리들이 매와 사냥개[鷹犬]의 구실을 하였다. 이때 이동규(李同揆)라는 자가 있었으니, 고(故) 상신(相臣) 이성구(李聖求)의 아들이었다. 이성구가 〈 이동규 에게〉 유언(遺言)하기를 ꡐ숨어 살라.ꡑ고 하였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 이동규 는〉 아버지의 유명(遺命)을 버리고 윤휴(尹?)와 더불어 죽음을 함께 하는 당(黨)이 되니, 윤휴가 현재(賢才)라고 추천하여 등용하였다. 또 상인(喪人) 이희채(李熙采)라는 자가 있었는데, 심복이 되어 비밀한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복선군(福善君) 이남(李?)이 우두머리가 되고 허목․윤휴(尹?)․이하가 이남(李?)을 봉대(奉戴)하기를 마치 군부(君父)와 같이 하였다. 남(?)은 또 환관[譯?]들과도 한 마음이 되었었다. 한편으로는 허적(許積)․권대운(權大運)이 우두머리가 되고 민희(閔熙)․김휘(金徽)․민점(閔點)․목내선(睦來善)․심재(沈梓)․권대재(權大載)․이관징(移觀徵)․민종도(閔宗道)․이당규(李堂揆)․이우정(李宇鼎)․최문식(崔文湜) 등이 우익(羽翼)이 되었으며, 오시복(吳始復)․유명천(柳命天)․유명현(柳命賢)․권유(權愈)․목창명(睦昌明)․박신규(朴信圭)․김환(金奐)․민암(閔?)․유하익(兪夏益)․윤계(尹?)․권환(權?)․이항(李沆)․김해일(金海一)․안여석(安如石)․이덕주(李德周)․우창적(禹昌績)․김빈(金賓) 등이 조아(爪牙)가 되니, 달라붙는 자가 매우 많았다. 유명천(柳命天)의 형제(兄弟)는 나이 젊으면서도 영수(領袖)가 되었다. 유명천은 성질이 음흉하였으며 허적(許積)의 세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 무리들 가운데서 추중(推重)되어 오정창(吳挺昌)과 더불어 서로 겨루었다. 윤휴(尹?) 등은 스스로 청남(淸南)으로 일컬었고, 허적(許積)과 권대운(權大運) 등의 무리들은 선조(先朝)에 높은 벼슬을 한 자가 많았다 하여 이를 탁남(濁南)이라 일렀다. 그러나 사람들은 양쪽을 모두 매우 혼탁(混濁)하게 여겨서 이는 마치 암수의 까마귀와 가마솥 밑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허목(許穆)은 늙었으면서도 교묘하고 치밀(緻密)하여 혹은 좌(左)로 혹은 우(右)로 하였으며, 허적(許積)은 더욱 세상을 살아가는 데 노숙(老熟)하여 신축(伸縮)하는 데 기술이 있었으므로 안으로는 권대운 등을 부호(扶護)하면서도 겉으로는 중립(中立)인 양 하였다. 홍우원(洪宇遠)은 처음에는 윤휴․허목과 당(黨)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권대운의 당(黨)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하진(李夏鎭)․이옥(李沃)․조위명(趙威明)․이담명(李聃命) 등은 두 쪽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면서도 허목(許穆)과 윤휴(尹?)를 아첨하여 섬기기를 더욱 심하게 하였다. 강석구(姜碩耈)의 무리와 같이 양쪽에서 서로가 수로 치지도 아니하는 자도 또한 많았다. 또는 복(服)을 입는 가운데에 있던 자가 3인이 있었으니, 이원정(李元楨)은 비록 밖에 있었지마는 시의(時議)를 멀리서 주장하여 윤휴와 허목의 성원(聲援)이 되었고, 강석빈(姜碩賓)도 또한 윤휴 등의 논의에 붙었다. 김덕원(金德遠)은 권대운 등의 도회(都會)가 되었으면서도 모두 몸으로 직접 담당하지 못하여 울울(鬱鬱)하여 견디지를 못하였다. 오시복(吳始復)은 김덕원과 한 덩어리이었다. 그래서 오정창(吳挺昌)이 가적(家賊)처럼 보았다. 오시수(吳始壽)는 속임수가 많았다. 그래서 때로는 가만히 정성을 표시하여 스스로 허적(許積) 등에게 잘 보이려 하였다. 윤휴는 당은 비록 수가 적었지마는, 궁 안의 성원이 있었기 때문에 능히 그들과 서로 겨루었다.

  오정창(吳挺昌)이 또 그의 부옹(婦翁)822) 정익(鄭?) 등 소북(小北)의 무리들을 끌어들여서 그들과 더불어 일을 같이하려 하였다. 그러나 소북(小北) 사람들은 속임수가 심하고 이리저리 돌아보며 변천하는 양상을 관망하기를 잘하였다. 오정창은 본래 억세고 사나워서 그 생질의 세력을 끼고 화(禍)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또 공(功)이 있음을 자부(自負)하여 마음속의 바라는 것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빨리 온 세상을 씹어 삼키려고 하였지마는, 얼마 안되어 이정(李楨)과 이연(李?)이 패(敗)함에 따라 처음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우정(李宇鼎) 등이 정(楨) 등의 일을 발론(發論)한 것을 성내었고 여럿이 이를 꾸짖었으니, 그것은 힘을 다하여 국세(局勢)를 뺏으려는 것이었는데, 이미 국세(局勢)를 얻고나니, 다른 사람이 가로채었다. 이에 〈국세를〉 전적으로 차지할 수 없게 되매 매우 분노하여 불평(不平)이 많았다. 당초 선조(先朝)에 허적(許積)이 사론(士論)의 배척을 받았을 적에 여러 남인(南人)들이 한 사람도 그를 구하여 주는 자가 없었는데, 오정창(吳挺昌)이 홀로 몸을 바쳐서 허적(許積)을 구하여 주었으므로 허적이 이를 매우 은덕(恩德)으로 여기었고, 오정창도 자기의 공(功)으로 여기었었다. 이에 이르러 허적이 형세에 압박을 받아 이미 정(楨)과 연(?)을 구해 주지 못하였고, 또 오정창과 더불어 이동(異同)을 보여 오정창이 더욱 분하게 여겼던 것이니, 이른바 ꡐ정량(貞亮)하여 아부하지 않는다.ꡑ고 한 것은 윤휴(尹?)와 허목(許穆)을 가리킨 것이고, 곽광(?光)의 폐립(廢立)의 일823) 로써 허적 등을 가리켜 배척한 것이다. 또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이 모두 허적(許積)과 권대운(權大運)의 문(門)에 노안(奴顔)824) 을 하여 품명(稟命)하여 사주를 받았기 때문에 오정창(吳挺昌)이 이들을 아울러 언급(言及)한 것이다.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이 비록 둘로 나뉘어졌지마는, 서인(西人)을 공격하는 데 이르러서는 두 편이 또한 같은 소리로 합세(合勢)하여 마치 벌떼가 모이듯 하였다. 이태서(李台瑞)는 대북(大北)파 사람의 아들이었고 형모가 여우와 쥐 같아서 사람축에 끼지도 못하였지마는, 오랫동안 오(吳)와 복(福)의 문객(門客)이 되었었고, 허목(許穆)도 문장(文章)으로 인정하여 주었기 때문에 한때 삿된 소[邪疏]는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그의 무리들은 ꡐ일이 이루어진 뒤에는 마땅히 종백(宗伯)825) 과 문형(文衡)826) 으로 있게 하겠다.ꡑ고 꾀었다. 이태서 는 경박(輕薄)하게 날뛰어서 항상 사람을 대하여 말하기를 ꡐ나는 예조 판서(禮曹判書)나 대제학(大提學)이 될 만하다.ꡑ 하였으니, 그 혼란[淆亂]함이 이러하였다. 당시 소북(小北)파의 사람으로서 팔을 걷어붙이고 앞장서서 남인(南人)에게 붙은 자는 이수경(李壽慶)이었고, 남익훈(南益熏)도 또한 날마다 윤휴(尹?)와 허목(許穆)의 문에 나아갔었다. 서인(西人)으로서 남인(南人)에게 붙은 자는 김수홍(金壽弘)․이지익(李之翼)․정유악(鄭維岳)․곽제화(郭齊華)였고, 서인으로 떴다 잠겼다 하면서 용납되기를 구한 자는 조사석(趙師錫)․이단석(李端錫)․이하(李夏) 등이었다.

  허적(許積) 등이 매양 비국(備局)에 모여서는 반드시 말하기를 ꡐ계해년827) 뒤의 일이 이와 같다.ꡑ 하며 선조(先朝)를 자의(恣意)로 헐뜯어서 당론(黨論)에만 조급하여 공사(公事)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문서(文書)가 퇴적(堆積)하였지마는 결재하여 처리할 줄을 알지 못하였고, 낮과 밤으로 여럿이 모여서는 사람을 물리치고 은밀한 말을 하기에 급급하여 마치 미친 것 같았다. 또 모두 때를 타서 탐욕(貪慾)을 부렸으므로, 문을 열어놓고 뇌물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염치(廉恥)가 없어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하는 것이 날로 더욱 심하였다. 이에 중외(中外)에서 그들의 사독(邪毒)을 싫어하였으며, 당시 하늘의 재변(災變)이 겹쳐 나타나서 한 여름인데도 얼음이 얼고 눈이 왔으며 여러 달을 메마르고 가물었는데, 이는 다 여러 소인(小人)들이 권세를 잡고 흔들어서 조정(朝廷)이 흐리고 어지러운 데 대한 보응(報應)으로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17장 B면/ 【영인본】 38책 287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물(人物)/ [註 819]두 복(福) :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 ☞ / [註 820] 오씨(吳氏) : 오정창의 형제들을 가리킴. ☞ / [註 821] 복(福) : 복창군 형제들을 가리킴. ☞ / [註 822]부옹(婦翁) : 장인. ☞ / [註 823] 곽광(?光) 의 폐립(廢立)의 일 : 곽광(?光)은 전한(前漢)의 명신(名臣). 곽광이 무제(武帝)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서 소제(昭帝)를 도왔으며, 다음 창읍왕(昌邑王)이 음란하므로 그를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세웠음. ☞ / [註 824]노안(奴顔) : 종같이 굽실거리는 비굴한 얼굴. ☞ / [註 825]종백(宗伯) : 예조 판서(禮曹判書). ☞ / [註 826]문형(文衡) : 대제학. ☞ / [註 827]계해년 : 1623 인조 원년. ☞(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숙종실록 9권/ 숙종 6년(1680 경신 / 청 강희(康熙) 19년) 1월 11일(신축) 2번째 기사/ 이정영․이하진․목임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하였다. 이정영(李正英)을 판윤(判尹)으로, 이하진(李夏鎭)을 대사헌(大司憲)으로, 목임유(睦林儒)를 부응교(副應敎)로, 박순(朴純)․김빈(金賓)․목천성(睦天成)을 승지(承旨)로, 신후명(申厚命)을 사간(司諫)으로, 박진규(朴鎭圭)를 집의(執義)로, 이원록(李元祿)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조지석(趙祉錫)을 장령(掌令)으로, 이언강(李彦綱)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8책 9권 3장 A면/ 【영인본】 38책 432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숙종실록 22권/ 숙종 16년(1690 경오 / 청 강희(康熙) 29년) 10월 13일(경오) 1번째 기사/ 민종도․김빈․김원섭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민종도(閔宗道)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김빈(金賓)을 승지(承旨)로, 김원섭(金元燮)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24책 22권 39장 B면/ 【영인본】 39책 231면/【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승정원일기/ 현종 3년 4월 11일 (갑인) 원본173책/탈초본9책 (8/19) 1662년 康熙(淸/聖祖) 1년/ 吏批의 관원 현황。金宇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有政。吏批, 行判書尹絳進, 參判金左明受由在外, 參議兪棨進, 行都承旨柳?進。以金宇亨爲執義, 金天錫爲兼參軍, 朴珪爲祥雲察訪, 李栽爲獻陵參奉, 李世翊爲兵曹正郞, 鄭榮漢爲公山縣監, 洪命夏爲左參贊, 金賓․鄭載嵩爲承文著作, 申厚載․李煦爲承文正字, 朴相馨․曺憲卿爲承文副正字, 李翊相爲承文博士, 朴仁禎爲校書博士, 李延年爲承旨, 李相成爲渭原郡守, 李?爲司諫。(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승정원일기/ 현종 6년 1월 5일 (임진) 원본187책/탈초본10책 (5/13) 1665년 康熙(淸/聖祖) 4년/ 李廷? 등을 軍職에 붙여 出仕하게 하고 姜碩耈를 도로 本院에 出仕하게 할 것을 청하는 承文院의 계/ ○ 承文院官員, 以都提調意啓曰, 前博士李廷?․金寡[金賓], 前正字朴相聲․姜必周, 權知副正字尹?․趙利錫․姜碩賓․吳始復․金德遠, 俱在罷散中, 依例隷習官啓下, 付軍職冠帶常仕, 何如? 傳曰, 允。又啓曰, 前權知副正字姜碩耈, 前日移拜司錄矣, 今在作散, 無屬處, 依前還仕本院, 何如? 傳曰, 允。(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승정원일기/ 현종 8년 3월 19일 (계사) 원본200책/탈초본10책 (9/21) 1667년 康熙(淸/聖祖) 6년/ 金重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以金重鎰爲承旨, 具文濟爲戶曹正郞, 鄭東卨爲刑曹正郞, 李敏采爲奉敎。金賓爲承文博士, 趙昌期爲副正字, 李有相爲兼校書校理, 洪柱三爲司諫。慶?爲司藝, 李奎鎭爲持平, 呂?爲持平, 金鈗爲典籍。趙復陽爲兼同知春秋, 陳尙漸爲兼分差中學敎授。(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승정원일기/ 현종 8년 10월 5일 (병자) 원본204책/탈초본11책 (6/13) 1667년 康熙(淸/聖祖) 6년/ 李時術 등에게 벼슬을 제수함/ ○ 吏批, 以李時術爲大司諫, 鄭太和爲內醫都提調, 金應祖爲右尹, 李奎齡爲修撰, 李夏鎭爲兵曹佐郞, 鄭民獻爲成均博士, 金賓爲成均典籍, 趙昌期爲承文院副正字, 韓井一爲禮曹正郞, 卞榥爲正言, 姜栢年爲左尹。(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승정원일기/ 현종 8년 12월 20일 (경인) 원본205책/탈초본11책 (7/13) 1667년 康熙(淸/聖祖) 6년/ 李斗光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吏批。以李斗光爲司憲府監察, 趙逢源爲臨陂縣令, 金銘爲熊川縣監, 李以挺爲海南縣監, 吳挺緯爲兵曹參判, 金賓爲禮曹佐郞, 柳壽昌爲平陵察訪, 趙爾後爲司饔主簿, 趙時瑗爲刑曹正郞, 鄭載嵩爲持平, 趙爾翰爲軍資奉事, 尹以道爲宗簿主簿, 金震龜爲尙衣別提, 趙鳴鳳爲尙衣直長, 李沃爲監察, 李象鼎爲戶曹佐郞, 沈攸爲司諫院司諫, 曺漢英爲漢城右尹, 許挺爲禮曹正郞, 李夢錫爲瓦署別提, 吳挺緯爲知義禁, 吳挺緯爲社稷提調, 李殷相爲校書館提調, 姜允亨爲奉常寺正, 李克泰爲直講, 李世章爲尙瑞直長, 柳挺輝爲固城縣令, 權頊爲西部主簿, 李?爲監察, 李後老爲刑曹正郞, 鄭台周爲司圃別提, 林時亮爲禮賓別提, 呂端齊爲尙瑞副直長, 成玧爲軍器僉正, 鄭時凝爲內資主簿, 閔熙爲工曹參判, 全汝翰爲造紙別提, 韓斗愈爲靖陵參奉, 南斗徵爲連原察訪, 韓翊周爲典籍, 申弼華爲氷庫別檢, 洪濟亨爲義禁府都事, 李時術爲吏曹參議, 洪受?爲繕工副奉事, 李東溟爲安東府使, 趙汝耘爲造紙別提, 李百憲爲司評, 申汝?爲景陽察訪, 鄭時亨爲戶曹正郞, 李行正爲司饔直長, 孟萬始爲慶基殿參奉, 裴友亮爲司圃別提, 李熙采爲童蒙敎官, 柳?爲內侍敎官, 李?爲童蒙敎官, 尹敏聖爲監察, 趙昌漢爲童蒙敎官, 權?爲繕工假監役, 李重龜爲司宰參奉, 金南甲爲平市奉事, 閔義亮爲禮賓別提, 尹坰爲繕工監役, 李翊相爲司書, 朴昌文爲工曹正郞, 宋文炳爲康陵參奉, 洪南立爲司?寺正, 閔又騫爲司畜別提, 趙爾炳爲工曹佐郞, 宋奎洛爲繕工假監役, 柳軸爲孝陵參奉, 金?爲義盈庫主簿, 徐必成爲南陽縣監, 李惟源爲奉常僉正, 朴惟儁爲掌樂主簿, 閔光?爲淮陽府使, 李厚先爲端川郡守, 鄭晳爲副修撰, 金汝亮爲文川郡守, 洪處亮爲禮曹參判, 王國賓爲內贍奉事, 尹鏶爲戶曹參判, 李集成爲長興庫直長, 洪?爲學錄, 孫愈爲校書副正字, 愼景尹爲全羅都事, 權?爲鍾城府使, 李以時爲三和縣令, 李休徵爲正言, 閔蓍重爲吏曹佐郞, 鄭興冑爲監察, 尹搢爲京畿都事, 李?爲司饔直長, 柳萊爲利仁察訪, 權斗樞爲洪陽縣監, 洪宇翼爲吉州牧使, 崔孝述爲南海縣令, 楊震行爲慈仁縣監, 趙見素爲義興縣監, 尹彬爲金化縣監, 李元龜爲慶山縣令, 李行陟爲庇仁縣監, 權迪爲禮曹正郞, 趙威鳳爲正言, 朴宗岳爲漢城參軍, 洪萬衡爲副校理, 閔周冕爲判決事, 尹世雄爲昌原縣監, 朴世堂爲校理, 林?爲持平, 李鳴夏爲文義縣令, 韓侃爲嘉山郡守, 蔡正後爲靈山縣監, 柳時成爲朔州府使。(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승정원일기/ 현종 9년 4월 3일 (신미) 원본207책/탈초본11책 (8/14) 1668년 康熙(淸/聖祖) 7년/ 金賓이 黃腸木을 斫伐한 뒤 들어옴/ ○ 禮曹佐郞金賓, 黃腸木斫伐後入來。(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승정원일기/ 현종 9년 6월 13일 (경진) 원본208책/탈초본11책 (15/19) 1668년 康熙(淸/聖祖) 7년/ 吏批의 관원 현황/ ○ 有政。吏批, 以趙爾炳爲庇仁縣監, 李押爲掌樂正, 元萬里爲兵曹正郞, 李夏鎭爲兵曹佐郞, 金賓爲聞慶縣監, 李翊爲兵曹參議, 鄭?爲承旨, 金宇亨爲承旨。(www.history.go.kr 2009)

  김빈 [記事] : 승정원일기/ 현종 15년 3월 15일 (기묘) 원본238책/탈초본12책 (9/12) 1674년 康熙(淸/聖祖) 13년/ 進香은 饌品의 過侈보다 誠敬이 중요하다고 아뢰는 李翊相 등의 계/ ○ 大司諫李翊相, 司諫朴世堂, 獻納尹趾善, 正言金賓․李沆啓曰, 臣等昨以進香事論啓, 伏承聖批, 以非爾等妄自定制於今日之事, 殊未妥當爲敎, 臣等不勝瞿然之至。臣等之意以爲, 享祀之禮, 貴在誠敬, 若夫饌品之過侈, 未免爲瀆褻之歸, 而政府之率百僚進香, 事體最重, 羞膳品數, 本有定式, 其意有在, 則其他進香, 所當倣此行之, 而上年進香時, 或有過?者, 一享之需, 至費累百餘金, 其在聽聞, 誠爲未安, 故臣等竊附於典祀無?之義, 敢有所云云矣。不賜允兪, 反下嚴旨, 無非臣等誠意淺薄, 不足有槪於聖心之致, 且臣等今聞進香之過?, 乃忠勳府諸宮家, 私自辦備者之所爲, 而宗親府以下, 五禮儀所載諸司之公辦者, 則皆□□□□□□□□□□□□□□□□□。(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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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666

  예천학가산자연휴양림(非婚女性 ''''1泊2日'''' 캠프) [記事] :

  남명선 대구여성광장 대표는 2010년 9월 4~5일 예천 학가산 자연휴양림에서 열리는 비혼(非婚) 여성캠프 ''''그녀들의 유쾌발랄 1박2일''''을 주재한다.

  이번 여성캠프에서는 인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인 이영주 강사가 ''''사랑과 연애론- 어느 새 당신도 사랑과 연애의 달인'''', ''''멋진인생에스테틱'''' 대표이사이자 대구여성광장운영위원인 박선주 강사가 ''''성공하는 인생을 위한 패러다임''''을 주제로 강의한다.

  참가자를 모집 중이며 인원은 선착순 25명. 참가비는 어른 4만5천원, 대학생 4만원.

  (嶺南日報 2010-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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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 방문(挑戰·探求하며 科學者 꿈 키워) [記事] :

  여주교육청 부설 영재교육원(원장 김성수)은 2010년 8월 21일부터 22일까지 ''''도전하고 탐구하자!''''라는 주제로 ''''2010 경기도여주교육청 부설 영재교육원 중등반 하계 과학캠프''''를 경상북도 예천군 곤충연구소, 천문우주과학센터, 회룡포에서 실시했다.

  이번 과학캠프는 곤충 집중탐구, 태양관측, 달관측, 성운 및 성단 관측, 천체 망원경 사용법 탐구 및 우주환경체험, 항공탐사체험, 회룡포탐방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과학적 지식을 습득하고 미래 과학자로서의 자질을 함양시키는 계기가 됐다.

  1박2일의 짧은 시간이지만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성하여 영재교육원생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 특히 천문 과학 영역의 탐구부분에서는 일상적인 태양관측, 별자리관측 이외에도 조별 천체망원경 조작 실습 및 관측 활동을 통해 더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또 학생들은 우주조종사가 되기 위해 훈련하는 중력가속도체험, 우주환경체험, 무중력체험 등을 통해 우주를 체험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며, 직접 헬기를 타고 비행해 보는 항공체험은 영재교육원생들에게 우주를 향한 꿈과 희망을 주기에 충분한 활동이었다.

  과학캠프 일정 마지막에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명소 중에 하나인 회룡포를 방문함으로써 국토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계기가 됐다. 교육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이번 여름캠프는 초등반과 중등반이 따로 운영되며, 오는 27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영재교육원 초등반 학생 40명을 대상으로 영재교육원 하계 과학캠프가 이루어질 예정이다.

  (김광섭 記者 仁川日報 2010-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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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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