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곳은 군민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게재된 내용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제목자랑2419:반재원學者
예천의 자랑(2419) : 예천읍 고평리 출신 반재원 학자
---
반재원(潘在元) : 1854(철종 5)-1921, 예천읍 고평리 출신, 자는 사선(士善), 호는 소관(小觀), 본관은 거제, 당시 예천 일대에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반 재동(潘才童)"이라 불리울 만큼 좋은 재질을 천부적으로 타고나서 독서의 범위도 넓었다. 유교 경전은 물론 역사, 지리, 천문에까지 이르렀다. 또 서양 제국주의가 동양으로 진출하여 강제로 점령하던 국제 정세도 세계 지리책 등을 읽어서 그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가치관은 평생 진리를 지키고 믿음을 가지며 살아가는 <주자서(朱子書)>에 기준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자학적(朱子學的)인 사회 질서를 부정하는 동학 농민군의 봉기를 적극 배척하였다. 1894년(고종 31) 음력 8월 28일, 예천읍 서본2리 서정자(西亭子)들에서 있었던 동학농민전쟁 때 예천읍 수비대의 지도부에 소속되어 동학농민군을 저지하는데 앞장을 섰다. 그는 예천읍 수비대 조직인 보수 집강소(保守執綱所)의 양향도감(糧餉都監)의 직책에 있었으며, 또한 그 전쟁이 끝난 후에 상세한 기록(斥邪錄)을 남겨 주기도 하였다. 그의 문집은 원고 정리는 완성되어 있으나 아직 출판되지 못하고 있는데, 원고 정리 때 많은 글을 잃었다고 한다. 그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고 전해지지만 1921년 6월 29일에 작성된 측량지도(醴泉郡南邑面淸福亭 第二區 五枚之內五 見取圖)에 보면, 논이 7결(結) 82부(負) 7속(束), 밭이 6결 26부 3속, 그리고 또 논을 2두(斗) 1미(味) 소유하고 있었다. 예천의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그의 기록을 근간으로 하여 연세대의 신영우(申榮祐) 교수가 "갑오농민전쟁과 영남 보수 세력의 대응"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醴泉新聞)
반재원 : 1894년 농민전쟁연구 4/ e-Book/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 역사비평사 | 1995.11.01/ 책본문 : ...者稱以綠豆將軍亦聚厥黨割據全州等地.4) 潘在元, ≪甲午斥邪錄≫, 5∼6쪽. 한편 朴周大의 ≪羅巖隨錄≫에는 7월경 삼남지역의 전반적인 동학농민군의 大熾상황과 아울러 대접.소접의.../ 289페이지(daum 2010)
반재원(潘在元) : 본관(本貫) 거제(巨濟), 시대(時代) (1854-1921), 자(字) 사선(士善), 호(號) 소관(小觀)/ 이력(履歷) <예천 신문 고장의 인물>/ 반재원(1854-1921)은 예천읍 고평리 출신으로, 자는 사선(士善), 호는 소관(小觀), 본관은 거제이다. 반재원은 당시 예천 일대에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반 재동(潘才童)''''이라 불리울 만큼 좋은 재질을 천부적으로 타고나서 독서의 범위도 넓었다. 유교 경전은 물론 역사, 지리, 천문에까지 조예가 깊었다. 또 서양 제국주의가 동양으로 진출하여 강제로 점령하던 국제 정세도 세계 지리책 등을 읽어서 그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반재원의 가치관은 평생 진리를 지키고 믿음을 가지며 살아가는 주자서(朱子書)에 기준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반재원은 주자학적인 사회 질서를 부정하는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적극 배척하였다. 1894년(고종 31) 음력 8월 28일 예천읍 서본2리 서정자들(西亭子坪)에서 있었던 동학농민전쟁 때 예천읍 수비대의 지도부에 소속되어 동학농민군을 저지하는데 앞장을 섰다. 반재원은 예천읍 수비대 조직인 집강소(執綱所)의 양향도감(糧餉都監)의 직책에 있었으며, 또한 전쟁이 끝난 후에 상세한 기록을 남겨 두기도 하였다. 반재원의 문집은 원고 정리는 완성되어 있으나 아직 출판되지 못하고 있는데, 원고 정리 때 많은 글을 잃었다고 한다. 반재원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고 전해지지만, 1921년 6월 29일에 작성된 측량지도(醴泉郡南邑面淸福亭 第二區 五校之丙五 見取圖)에 보면, 논이 7결(結) 82부(負) 7속(束), 밭이 6결 46부 3속, 그리고 또 논을 2두(斗) 1미(味) 소유하고 있었다. 예천의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반재원의 기록을 근간으로 하여 연세대의 신영우 교수가, ''''갑오농민전쟁과 영남 보수세력의 대응''''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장병창 논설위원>/ http://www.shinjongwoo.co.kr/name/ba/bab/rjwp/rj26.htm(daum 2010)
반재원 : ::::::::::Historic Romains of the Donghak Peasants Revolution::::::::::/ 『갑오척사록(甲午斥邪錄)』 반재원(潘在元), 1책 『소모일기(召募日記)』 정의묵(鄭宜默), 1책 『소모사실(召募事實)』 상주(尙州) 소모영(召募營), 乾 坤 2책 『경상도소모영전곡입하실수성책((慶尙道召募營錢穀入下實數成冊.../ http://donghak.jeongeup.go.kr(daum 2010)
---
반재원(潘在元) : 1854(철종 5)-1921, 예천읍 고평리 출신, 자는 사선(士善), 호는 소관(小觀), 본관은 거제, 당시 예천 일대에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반 재동(潘才童)"이라 불리울 만큼 좋은 재질을 천부적으로 타고나서 독서의 범위도 넓었다. 유교 경전은 물론 역사, 지리, 천문에까지 이르렀다. 또 서양 제국주의가 동양으로 진출하여 강제로 점령하던 국제 정세도 세계 지리책 등을 읽어서 그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가치관은 평생 진리를 지키고 믿음을 가지며 살아가는 <주자서(朱子書)>에 기준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주자학적(朱子學的)인 사회 질서를 부정하는 동학 농민군의 봉기를 적극 배척하였다. 1894년(고종 31) 음력 8월 28일, 예천읍 서본2리 서정자(西亭子)들에서 있었던 동학농민전쟁 때 예천읍 수비대의 지도부에 소속되어 동학농민군을 저지하는데 앞장을 섰다. 그는 예천읍 수비대 조직인 보수 집강소(保守執綱所)의 양향도감(糧餉都監)의 직책에 있었으며, 또한 그 전쟁이 끝난 후에 상세한 기록(斥邪錄)을 남겨 주기도 하였다. 그의 문집은 원고 정리는 완성되어 있으나 아직 출판되지 못하고 있는데, 원고 정리 때 많은 글을 잃었다고 한다. 그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고 전해지지만 1921년 6월 29일에 작성된 측량지도(醴泉郡南邑面淸福亭 第二區 五枚之內五 見取圖)에 보면, 논이 7결(結) 82부(負) 7속(束), 밭이 6결 26부 3속, 그리고 또 논을 2두(斗) 1미(味) 소유하고 있었다. 예천의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그의 기록을 근간으로 하여 연세대의 신영우(申榮祐) 교수가 "갑오농민전쟁과 영남 보수 세력의 대응"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醴泉新聞)
반재원 : 1894년 농민전쟁연구 4/ e-Book/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 역사비평사 | 1995.11.01/ 책본문 : ...者稱以綠豆將軍亦聚厥黨割據全州等地.4) 潘在元, ≪甲午斥邪錄≫, 5∼6쪽. 한편 朴周大의 ≪羅巖隨錄≫에는 7월경 삼남지역의 전반적인 동학농민군의 大熾상황과 아울러 대접.소접의.../ 289페이지(daum 2010)
반재원(潘在元) : 본관(本貫) 거제(巨濟), 시대(時代) (1854-1921), 자(字) 사선(士善), 호(號) 소관(小觀)/ 이력(履歷) <예천 신문 고장의 인물>/ 반재원(1854-1921)은 예천읍 고평리 출신으로, 자는 사선(士善), 호는 소관(小觀), 본관은 거제이다. 반재원은 당시 예천 일대에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반 재동(潘才童)''''이라 불리울 만큼 좋은 재질을 천부적으로 타고나서 독서의 범위도 넓었다. 유교 경전은 물론 역사, 지리, 천문에까지 조예가 깊었다. 또 서양 제국주의가 동양으로 진출하여 강제로 점령하던 국제 정세도 세계 지리책 등을 읽어서 그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반재원의 가치관은 평생 진리를 지키고 믿음을 가지며 살아가는 주자서(朱子書)에 기준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반재원은 주자학적인 사회 질서를 부정하는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적극 배척하였다. 1894년(고종 31) 음력 8월 28일 예천읍 서본2리 서정자들(西亭子坪)에서 있었던 동학농민전쟁 때 예천읍 수비대의 지도부에 소속되어 동학농민군을 저지하는데 앞장을 섰다. 반재원은 예천읍 수비대 조직인 집강소(執綱所)의 양향도감(糧餉都監)의 직책에 있었으며, 또한 전쟁이 끝난 후에 상세한 기록을 남겨 두기도 하였다. 반재원의 문집은 원고 정리는 완성되어 있으나 아직 출판되지 못하고 있는데, 원고 정리 때 많은 글을 잃었다고 한다. 반재원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고 전해지지만, 1921년 6월 29일에 작성된 측량지도(醴泉郡南邑面淸福亭 第二區 五校之丙五 見取圖)에 보면, 논이 7결(結) 82부(負) 7속(束), 밭이 6결 46부 3속, 그리고 또 논을 2두(斗) 1미(味) 소유하고 있었다. 예천의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반재원의 기록을 근간으로 하여 연세대의 신영우 교수가, ''''갑오농민전쟁과 영남 보수세력의 대응''''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장병창 논설위원>/ http://www.shinjongwoo.co.kr/name/ba/bab/rjwp/rj26.htm(daum 2010)
반재원 : ::::::::::Historic Romains of the Donghak Peasants Revolution::::::::::/ 『갑오척사록(甲午斥邪錄)』 반재원(潘在元), 1책 『소모일기(召募日記)』 정의묵(鄭宜默), 1책 『소모사실(召募事實)』 상주(尙州) 소모영(召募營), 乾 坤 2책 『경상도소모영전곡입하실수성책((慶尙道召募營錢穀入下實數成冊.../ http://donghak.jeongeup.go.kr(daum 2010)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