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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504:최경의孝子
작성자장병창 @ 2011.03.22 06:14:43
  예천의 자랑(2504) : 유천면 초적리에 효자각이 있는 최경의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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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의(崔敬義) : 1828-1900, 자는 형일(亨一), 호는 도촌(桃村), 본관은 경주, 성균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서울을 떠나 상주를 거쳐 도리촌으로 입향하였다. 효자각이 유천면 초적리에 있다.(醴泉郡誌 1939 2005)

  최경의(崔敬義) : 본관(本貫) 경주(慶州), 월성(月城), 자(字) 형일(亨一), 호(號) 도촌(桃村)/ 이력(履歷) 최경의(崔敬義) 본(本) 경주(慶州) 자(字) 형일(亨一) 호(號) 도촌(桃村)/ 문경(聞慶) 금석문(金石文)/ 향토사료 제18집(2006년도 12월 발행. 문경문화원)/ 성균진사 최경의의 묘표(成均進士崔敬義의 墓表) : 산북면 우곡1리(읍실)/ 成均進士慶州崔公諱敬義字亨一桃村其號也新羅有孤雲先生諱致遠倡明文學世稱天儒選入唐朝擢魁科官侍御史文名動天下諡文昌侯從祀文廟是上祖也有諱承老相高麗成宗斥佛崇儒封淸河侯諡文貞諱齊顔太師門下侍中諡恭順諱玄培侍中大提學諱濕贊成事高祖諱有慶都巡察使曾祖諱子雲判奉常寺事祖諱淸號觀稼亭文科寶文閣學士檢校政丞考諱淵止文科郡守枇淑人密陽孫氏府使順季女以成廟己巳生公于楊州郡東堯谷里幼有異質不待勸督自能力學勵行文詞驟進行誼夙著事親而極志體之養奉先而盡誠敬之道孝順洽於家庭信義周於鄕閭及夫發靭鵬程題名雁塔則蘊抱有素立揚在邇而不幸遭錦城之禍時事甚不祥避隱于商山之山北桃李村結茅巖間種桃園雲林泉石莫非我有而桃花春水宛帶武陵仙源超然有出塵之致故自號以桃村凡世之窮通得喪是非榮辱一付筌蹄而簞食瓢飮亦足以養吾眞而樂其樂也每鷄鳴輒誦四勿箴留心於古人克復之科日整襟端坐讀聖賢書不倦朝夕遙向堯谷先朧行望拜禮其篤孝追慕之誠觀者多感焉而至動靜語默謀猷踐履靡不各循其規度也成廟癸巳十月十五日考終于寢享年八十五翌月葬于尙州郡北員谷山負亥之原配宜人南平文氏尙彬女有淑德誠於奉上敬君子無違志通經史有女士風先公一年生後公三年卒附公墓下同原生一男昌門參奉孫男殷進士亮縣監殷男善起亮男基鎔女柳文錫金成器餘不錄嗟呼公之歿己過四百年于玆矣遺風餘響無復可憑於萬一況瞻斧堂乞無顯刻之儀至使生平之潛德懿行幾乎湮沒無傳故後孫相基與胄孫秉浩爲是之懼將營堅碣之役以其家傳遺蹟謬請於余婢爲刪潤於其中余辭謝託任之非其人而終不得辭謹按蹟而略加隱恬繼之以銘曰海雲流澤珪璋挺質志堅行篤克繩世閥簿試靑衫益勵素節其行其止孰使孰尼寤焉敬誦三復四勿芥視鍾駟琅吟花石跡晦神粳優哉所樂載銘貞珉其永不肋/ 沃川 全胤錫 撰/ 眞城 李洛鐵 書/

  <譯文>/ 성균진사 경주최공 휘는 경의(敬義)요 자는 형일(亨一)이요 도촌(桃村)은 그의 호이다. 신라의 고운선생의 휘는 치원(致遠)이며 문학을 크게 밝혀 세상 사람들이 하늘이 낸 선비라 칭송하니라. 일찍 당나라에 들어가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시어사요 문명(文名)이 천하에 진동하였다. 시호는 문창후며 문묘에 제사케 하였으니 이분이 상조(上祖)이다. 휘 승로(承老)는 고려 성종때 재상으로 척불숭유(斥佛崇儒)의 정책을 썼고 나중에 청하후(淸河侯)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휘 제안(齊顔)은 태사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이며 시호는 공순이다. 휘 현배(玄培)는 시중대제학(侍中大提學)이요 휘 습(濕)은 찬성사요 고조의 휘는 유경(有慶)이니 도순찰사요 증조의 휘는 자운(子雲)이니 판봉상시사요 조의 휘는 청(淸)이요 호는 관가정이니 문과로 보문각학사며 검교정승이요 아버지의 휘는 연지(淵止)니 문과로 군수요 어머니는 숙인 밀양손씨(淑人密陽孫氏)니 부사 순계(順季)의 딸로 성묘 기사년에 공을 양주군 동쪽 요곡마을 본택에서 낳으니 어릴적부터 특이한 재질이 있어 독려를 아니하여도 스스로 힘써 배우고 익히니 문사(文詞)가 크게 떨치고 행실이 뛰어나 어버이를 섬기되 뜻과 육체의 기림을 알고 힘을 다하였고 조상을 받들되 성(誠)과 경(敬)을 다하니 효순으로 가정을 화합하게 하고 신의가 향리에 두터우며 벼슬길에 나아감에 이름이 안타깝게 올라 탁월한 재질이 있어 입신양명이 목전에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금성대군의 화를 만나 당시 사정이 매우 불길함을 알고 상산(尙州)북쪽 산북도리촌에 숨어 바위사이에 띠집을 짓고 과목을 심어 도원(桃園)을 만드니 운림천석(雲林泉石)이 내것이 아닌 것이 없고 도화춘수(桃花春水)가 완연히 무릉선원(武陵仙源)이라 초연히 진세를 벗어난 운치더라 그런고로 스스로 도촌(桃村)이라 호를 하였고 세상 이치를 깊이 통달하여 득실과 시비영욕을 부제(釜蹄)에 부쳐 도시락 밥과 표주박 음식으로 천진(天眞)을 기르고 누항(陋巷)의 락(樂)을 즐거이 여겼을 뿐 아니라 매일 아침 닭이 울때면 문득 사물잠(四勿箴)을 외어 옛 성현의 마음을 생각하고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과정(課程)에 있어서는 옷깃을 여미고 단정히 앉아 성현의 글을 읽되 조석으로 게으르지 아니하였으며 멀리 요곡선영(先塋)을 향하여 망배례(望拜禮)를 행하니 그 돈독한 효도로서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이 보는이로 하여금 감동케 하였고 거동에 있어서는 말이 없고 실천을 꾀하되 규범과 법도에 어긋남이 없더라. 성종 계사 시월 십오일에 세상을 뜨니 향년이 팔십오세라 다음달에 상주군 북쪽 원곡산 해(亥)좌의 언덕에장례를 치루었고 배는 의인 남평문씨(宜人南平文氏)니 상빈(尙彬)의 딸로서 공보다 일년 먼저나서 공보다 삼년후에 세상을 뜨니 묘는 공의 묘아래 같은 언덕에 있다. 일남(一男)을 낳으니 창문(昌門)은 참봉(參奉)이요 손자에 은(殷)은 진사요 량(亮)은 현감이다. 은의 아들에 선기(善起)요 량의 아들에 기용(基鎔)이요 여서(女壻)에는 유문석(柳文錫) 김성기(金成器)라 그 밖에는 다 기록하지 못하노라 아! 슬프도다 공이 떠나신지 이미 사백년이 지났음에 끼친 풍류와 남긴 영향을 만분지일이라도 빙거(憑據)할 수 없고 항차 묘소에는 현각지의(顯刻之儀)를 못하였으니 생전에 잠덕(潛德)과 의행(懿行)이 거의 없어져 전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니 후손 상기(相基)가 주손 병호(秉浩)와 더불어 이를 두려워하여 장차 수갈(竪碣)의 일을 경영하고자 전해오는 유적으로서 그릇 나에게 청하여 비문을 지어달라 하니 그러한 사람이 못된다고 사양하였으나 막무가내라 삼가 자취를 참고하여 대강 바로 잡았노라 이어서 명(銘)을 하노니 해운선생의 유택이요 옥같이 곧은 바탕이라 뜻이 굳고 행실이 두터우니 세벌(世閥)을 잘 이었도다 벼슬을 오래 안하니 더욱 결백한 지조만 힘쓰셨네 그 행하고 그침을 누가 하게 하고 그치게 하랴 잠에 깨어 공손히 외움은 삼복사물(三復四勿)이요 영달을 초개같이 보고 꽃과 돌을 낭낭한 목소리로 읊으니 자취를 감추고 심신이 피로함에 즐거움을 찾아 쉼이라 명문(銘文)을 곧은 돌에 실었으니 돌결없이 영원하리라/ 임인사월 옥천 전윤석 지음/ 진성 이락철 씀(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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