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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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509:현득리判官
예천의 자랑(2509) : 지보면 출신 현득리 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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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득리(玄得利) : ?-1467(세조 13), 지보면 지촌(枝村) 출신, 본관은 연주, 옥량(玉亮)의 증손, 규(珪)의 아들, 1465년(세조 10) 문과(文科) 춘당대시(春塘臺試) 정과 23(丁科 23)위로 급제하여 1462년(세조 8) 11월 9일 부사직으로서 원종공신 3등에 추록되었고, 1465년(세조 11) 3월 17일 전주 판관을 이임하였다. 이시애의 난(1467)에 창의하여 전사(戰死)했다.(내고장전통가꾸기 1981, 世祖實錄)
현득리(玄得利) : 본관(本貫) 현주(玄州)/ 이력(履歷) 현득리(玄得利)/ 구분 충신/ 시대 조선/ 내용 : 이시애의 난에 순절한 현득리는 고려조 때 조위총의 난에 공훈을 세웠으며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현담윤의 후손이다 세종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가 된 현규의 셋째 아들이다. 현득리는 세조 8년에 원종공신으로 추록되었으며, 부사직을 거쳐 전주판관을 역임한 분이다. 현득리가 마침 전주판관으로 재직할 때 관북의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시애의 아우 이시함은 조정에서 함경도민을 쓸어 죽이려고 하상도군을 동원하여 북상 중이라고 민심을 현혹시켰다. 이시애는 함경도 병마절도사 강호문, 길주목사 설득신, 관찰사 신명을 죽이었다. 함경도 군관 이속이 모두 이시애의 편이었기에 자못 기세가 등등하였다. 조정에서는 구성군 준으로 도총사를 임명하고 부사로 호조판서 조석문을 임명하였다. 그 다음으로 강순 어유소, 남이를 대장으로 삼은 다음 육도 병정 삼만을 징발하여 함흥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문무 장략이 있는 28인을 선발하여 먼저 영흥에 파견하였다. 이때 현득리는 전라도 병정 700명을 인솔하여 함경도에 출전하였다. 판관공이 출전하는 날에 왼손 넷째 손가락을 잘라 부인 전씨에게 주며 "내 죽음을 각오하고 역적을 치러 가오. 적이 강성하나니 살아 돌아올 기약이 없으니 내 손가락을 주고 가는 바이오. 이 손가락이 혈색이 좋으면 내 살아 있는 것이고 혈색이 죽으면 내가 죽은 것이니 그 때는 이 손가락으로 장사를 지내시오."하며 출정하였다. 부인은 남편이 장도에 오르는데 마음을 어지럽게 할까 두려워서 눈물을 감추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가락을 비단에 싸서 소중히 간직하였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비단 주머니를 끌러 보았다. 다행히도 판관공이 출전한지 오래 되었는데도 선홍빛 손가락이 여전하였다. 판관공의 안부와는 관계없이 시간이 지나면 잘린 손가락이 변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기이하게도 여전하였다. 신기하고 기이한 일이었다. 보통사람의 손가락 같으면 하루만 지나도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출전한 후 달포가 되도록 손가락이 선홍빛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부인은 세수를 하여 몸을 정결하게 한 후 단정하게 꿇어앉아 비단 주머니를 끌러보니 어제까지도 살아있던 손가락이 까맣게 죽어 있었다. 부인은 판관공이 전사하신 것으로 짐작하고 대성통곡하였다. 그 후 하루가 지난 후 말울음소리가 나는지라 나가보니 판관공이 출정할 때 타고 간 말이 입에 화살을 물고 달려와 있었다. 부인은 이제는 판관공이 전사함이 틀림없음으로 의리를 챙기고 손가락을 염습하여 장사를 지냈다. 말도 며칠 후 죽음에 판관공의 의리상 계하에 묻어주고 충마상을 세웠다. 판관 공은 함경도내 출전한 후 내소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적진 깊숙이 진격하였다. 당시 함경도민은 모두 이시애 편이기에 고립 무원한 상태에서 좌충우돌하다가 화살이 떨어지고 칼이 부러졌다. 맨손이 된 판관 공에게 적은 항복할 것을 권고하다가 듣지 않으매 격살하고 말았다. 당시 적도들은 판관공의 의연한 죽음을 보고 "충의장군 현득리를 이곳에 매장하다 사람들은 이곳에 우마를 놓아 밟는 일이 없도록 하라(忠義將軍 玄得利 埋北庭 人不放牛馬踐踏)"고 표목을 세웠다. 이 사실을 구암 이정선생이 후일 함경도 외직에 나가 고적기를 편찬하였는데 이 책에 현득리 판관의 장열한 죽음이 기록되어 후세에 전한다. 현득리 판관은 부인이 천안전씨로 처가의 인연으로 천안에 이사와 현재 현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daum 2011)
현득리(玄得利) :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세조(世祖) 11년, 과거시험연도 : 1465 을유, 시험명 : 춘당대시(春塘臺試), 등위 : 정과23(丁科23)/ [인적 사항] 성명(姓名) : 현득리(玄得利), 본관(本貫) : 팔거(八?)/ [가족사항] 부(父) : 현규(玄珪), 조부(祖父) : 현용무(玄用武)(daum 2011)
현득리 : 실록 중에 천안인 현득리(玄得利)/ ...金處)·고 목사(牧使) 김유양(金有讓) ·전 군사(郡事) 양국화(楊國華), 부사직(副司直) 김효순(金孝 順)·현득리(玄得利), 취라치(吹羅赤) 이지(李止)·사약(司약) 박양수(朴良守)·전 사정(司正) 이희산(李喜山)·돈용 교위(敦勇 校尉).../ cheonan.go.kr(daum 2011)
현득리 : 천안시 > 천안소개 > 천안의자랑 > 역사의 향기/ 천안의 역사인물 현득리 작성자 : 임명순 작성일 : 2005-06-13 오전 9:46:10/ 조회 : 2476 : 현득리(玄得利) 이시애의 난에 순절한 현득리는 고려조 때 조위총의 난에 공훈을 세웠으며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현담윤의.../ www.cheonansi.net(daum 2011)
현득리 : 星州 玄氏(성주현씨) (78)./ 작년, 2010년 3월 13일/ 星州를 本貫으로 삼았다. ▣ 人物 始祖 玄珪의 아들 玄得元(현득원)은 牧使(목사)를 지냈으며 그의 同生 玄得利(현득리)는 判官(판관)에 이르렀다. 玄侃(현간)은 中樞府事(중추부사)를 歷任하였으며, 玄載興(현재흥)은.../ blog.daum.net/ 아까돔보(daum 2011)
현득리 : 한국 성씨 = 현(玄)/ 3년전, 2008년 12월 8일/ ...본관으로 삼았다. ▣ 인물 시조 현규(玄珪)의 아들 현득원(玄得元)은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그의 동생 현득리(玄得利)는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현간(玄侃)은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으며, 현재흥(玄載興)은 사복사정.../ blog.daum.net/ 국제거지(daum 2011)
현득리 : 정거(停擧)와 휴대전화 3년전, 2008년 11월 13일/ 정거는 6년 동안 과거에 응시할 수 없도록 하는 벌이다. 이런 예도 있다. 유양춘(柳陽春)은 외삼촌 현득리(玄得利)와 문과 회시(會試)에 응시하는데, 현득리는 유양춘의 답안지를 베껴 합격하고 자신은 낙방한다. 유양춘이.../ blog.naver.com/lastmanone/ … 비오는 날의 수채화、(daum 2011)
현득리 : 현득리(玄 得 利)-세조실록/ 2년전, 2009년 3월 5일/ ...(金處)·고 목사(牧使) 김유양(金有讓) ·전 군사(郡事) 양국화(楊國華), 부사직(副司直) 김효순(金孝 順)·현득리(玄得利), 취라치(吹羅赤) 이지(李止)·사약(司약) 박양수(朴良守)·전 사정(司正) 이희산(李喜山)·돈용 교위(敦勇 校尉.../ cafe.daum.net/YJHYUN/ 연주현씨 대종회(延州玄氏 大宗會)(daum 2011)
현득리 : 우리의 뿌리/ 2년전, 2009년 6월 26일/ ...본관으로 삼았다. ▣ 인물 시조 현규(玄珪)의 아들 현득원(玄得元)은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그의 동생 현득리(玄得利)는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현간(玄侃)은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으며, 현재흥(玄載興)은 사복사정.../ cafe.daum.net/ 성주현씨 31대손(임피 현)(daum 2011)
현득리 : 정거(停擧)와 휴대전화/ 6년전, 2005년 12월 10일/ 정거는 6년 동안 과거에 응시할 수 없도록 하는 벌이다. 이런 예도 있다. 유양춘(柳陽春)은 외삼촌 현득리(玄得利)와 문과 회시(會試)에 응시하는데, 현득리는 유양춘의 답안지를 베껴 합격하고 자신은 낙방한다. 유양춘이.../ cafe.daum.net/ 현리묘법신공학회(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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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득리(玄得利) : ?-1467(세조 13), 지보면 지촌(枝村) 출신, 본관은 연주, 옥량(玉亮)의 증손, 규(珪)의 아들, 1465년(세조 10) 문과(文科) 춘당대시(春塘臺試) 정과 23(丁科 23)위로 급제하여 1462년(세조 8) 11월 9일 부사직으로서 원종공신 3등에 추록되었고, 1465년(세조 11) 3월 17일 전주 판관을 이임하였다. 이시애의 난(1467)에 창의하여 전사(戰死)했다.(내고장전통가꾸기 1981, 世祖實錄)
현득리(玄得利) : 본관(本貫) 현주(玄州)/ 이력(履歷) 현득리(玄得利)/ 구분 충신/ 시대 조선/ 내용 : 이시애의 난에 순절한 현득리는 고려조 때 조위총의 난에 공훈을 세웠으며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현담윤의 후손이다 세종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가 된 현규의 셋째 아들이다. 현득리는 세조 8년에 원종공신으로 추록되었으며, 부사직을 거쳐 전주판관을 역임한 분이다. 현득리가 마침 전주판관으로 재직할 때 관북의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시애의 아우 이시함은 조정에서 함경도민을 쓸어 죽이려고 하상도군을 동원하여 북상 중이라고 민심을 현혹시켰다. 이시애는 함경도 병마절도사 강호문, 길주목사 설득신, 관찰사 신명을 죽이었다. 함경도 군관 이속이 모두 이시애의 편이었기에 자못 기세가 등등하였다. 조정에서는 구성군 준으로 도총사를 임명하고 부사로 호조판서 조석문을 임명하였다. 그 다음으로 강순 어유소, 남이를 대장으로 삼은 다음 육도 병정 삼만을 징발하여 함흥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문무 장략이 있는 28인을 선발하여 먼저 영흥에 파견하였다. 이때 현득리는 전라도 병정 700명을 인솔하여 함경도에 출전하였다. 판관공이 출전하는 날에 왼손 넷째 손가락을 잘라 부인 전씨에게 주며 "내 죽음을 각오하고 역적을 치러 가오. 적이 강성하나니 살아 돌아올 기약이 없으니 내 손가락을 주고 가는 바이오. 이 손가락이 혈색이 좋으면 내 살아 있는 것이고 혈색이 죽으면 내가 죽은 것이니 그 때는 이 손가락으로 장사를 지내시오."하며 출정하였다. 부인은 남편이 장도에 오르는데 마음을 어지럽게 할까 두려워서 눈물을 감추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가락을 비단에 싸서 소중히 간직하였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비단 주머니를 끌러 보았다. 다행히도 판관공이 출전한지 오래 되었는데도 선홍빛 손가락이 여전하였다. 판관공의 안부와는 관계없이 시간이 지나면 잘린 손가락이 변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기이하게도 여전하였다. 신기하고 기이한 일이었다. 보통사람의 손가락 같으면 하루만 지나도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출전한 후 달포가 되도록 손가락이 선홍빛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부인은 세수를 하여 몸을 정결하게 한 후 단정하게 꿇어앉아 비단 주머니를 끌러보니 어제까지도 살아있던 손가락이 까맣게 죽어 있었다. 부인은 판관공이 전사하신 것으로 짐작하고 대성통곡하였다. 그 후 하루가 지난 후 말울음소리가 나는지라 나가보니 판관공이 출정할 때 타고 간 말이 입에 화살을 물고 달려와 있었다. 부인은 이제는 판관공이 전사함이 틀림없음으로 의리를 챙기고 손가락을 염습하여 장사를 지냈다. 말도 며칠 후 죽음에 판관공의 의리상 계하에 묻어주고 충마상을 세웠다. 판관 공은 함경도내 출전한 후 내소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적진 깊숙이 진격하였다. 당시 함경도민은 모두 이시애 편이기에 고립 무원한 상태에서 좌충우돌하다가 화살이 떨어지고 칼이 부러졌다. 맨손이 된 판관 공에게 적은 항복할 것을 권고하다가 듣지 않으매 격살하고 말았다. 당시 적도들은 판관공의 의연한 죽음을 보고 "충의장군 현득리를 이곳에 매장하다 사람들은 이곳에 우마를 놓아 밟는 일이 없도록 하라(忠義將軍 玄得利 埋北庭 人不放牛馬踐踏)"고 표목을 세웠다. 이 사실을 구암 이정선생이 후일 함경도 외직에 나가 고적기를 편찬하였는데 이 책에 현득리 판관의 장열한 죽음이 기록되어 후세에 전한다. 현득리 판관은 부인이 천안전씨로 처가의 인연으로 천안에 이사와 현재 현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daum 2011)
현득리(玄得利) :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세조(世祖) 11년, 과거시험연도 : 1465 을유, 시험명 : 춘당대시(春塘臺試), 등위 : 정과23(丁科23)/ [인적 사항] 성명(姓名) : 현득리(玄得利), 본관(本貫) : 팔거(八?)/ [가족사항] 부(父) : 현규(玄珪), 조부(祖父) : 현용무(玄用武)(daum 2011)
현득리 : 실록 중에 천안인 현득리(玄得利)/ ...金處)·고 목사(牧使) 김유양(金有讓) ·전 군사(郡事) 양국화(楊國華), 부사직(副司直) 김효순(金孝 順)·현득리(玄得利), 취라치(吹羅赤) 이지(李止)·사약(司약) 박양수(朴良守)·전 사정(司正) 이희산(李喜山)·돈용 교위(敦勇 校尉).../ cheonan.go.kr(daum 2011)
현득리 : 천안시 > 천안소개 > 천안의자랑 > 역사의 향기/ 천안의 역사인물 현득리 작성자 : 임명순 작성일 : 2005-06-13 오전 9:46:10/ 조회 : 2476 : 현득리(玄得利) 이시애의 난에 순절한 현득리는 고려조 때 조위총의 난에 공훈을 세웠으며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낸 현담윤의.../ www.cheonansi.net(daum 2011)
현득리 : 星州 玄氏(성주현씨) (78)./ 작년, 2010년 3월 13일/ 星州를 本貫으로 삼았다. ▣ 人物 始祖 玄珪의 아들 玄得元(현득원)은 牧使(목사)를 지냈으며 그의 同生 玄得利(현득리)는 判官(판관)에 이르렀다. 玄侃(현간)은 中樞府事(중추부사)를 歷任하였으며, 玄載興(현재흥)은.../ blog.daum.net/ 아까돔보(daum 2011)
현득리 : 한국 성씨 = 현(玄)/ 3년전, 2008년 12월 8일/ ...본관으로 삼았다. ▣ 인물 시조 현규(玄珪)의 아들 현득원(玄得元)은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그의 동생 현득리(玄得利)는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현간(玄侃)은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으며, 현재흥(玄載興)은 사복사정.../ blog.daum.net/ 국제거지(daum 2011)
현득리 : 정거(停擧)와 휴대전화 3년전, 2008년 11월 13일/ 정거는 6년 동안 과거에 응시할 수 없도록 하는 벌이다. 이런 예도 있다. 유양춘(柳陽春)은 외삼촌 현득리(玄得利)와 문과 회시(會試)에 응시하는데, 현득리는 유양춘의 답안지를 베껴 합격하고 자신은 낙방한다. 유양춘이.../ blog.naver.com/lastmanone/ … 비오는 날의 수채화、(daum 2011)
현득리 : 현득리(玄 得 利)-세조실록/ 2년전, 2009년 3월 5일/ ...(金處)·고 목사(牧使) 김유양(金有讓) ·전 군사(郡事) 양국화(楊國華), 부사직(副司直) 김효순(金孝 順)·현득리(玄得利), 취라치(吹羅赤) 이지(李止)·사약(司약) 박양수(朴良守)·전 사정(司正) 이희산(李喜山)·돈용 교위(敦勇 校尉.../ cafe.daum.net/YJHYUN/ 연주현씨 대종회(延州玄氏 大宗會)(daum 2011)
현득리 : 우리의 뿌리/ 2년전, 2009년 6월 26일/ ...본관으로 삼았다. ▣ 인물 시조 현규(玄珪)의 아들 현득원(玄得元)은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그의 동생 현득리(玄得利)는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현간(玄侃)은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하였으며, 현재흥(玄載興)은 사복사정.../ cafe.daum.net/ 성주현씨 31대손(임피 현)(daum 2011)
현득리 : 정거(停擧)와 휴대전화/ 6년전, 2005년 12월 10일/ 정거는 6년 동안 과거에 응시할 수 없도록 하는 벌이다. 이런 예도 있다. 유양춘(柳陽春)은 외삼촌 현득리(玄得利)와 문과 회시(會試)에 응시하는데, 현득리는 유양춘의 답안지를 베껴 합격하고 자신은 낙방한다. 유양춘이.../ cafe.daum.net/ 현리묘법신공학회(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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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