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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527:양홍대典敎(祝조동윤)
예천의 자랑(2527) : 용궁면 월오리 출신 양홍대 전교(附 예천군청 조동윤 과장, <수락대선유록> 번역 발간...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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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홍대(追悼辭 : ''''하늘로 가신 백헌 楊先生'''' ) [記事] : 병술 오월 스무나흘(2006.6.19) 선생께서는 홀연히 땅으로, 하늘로 가셨습니다. 이제 구십 생애를 매듭하시고 구천으로 가신 공을 굳이 오호통재(嗚呼痛哉)라 하지 않겠습니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 자연의 섭리이거늘 무슨 욕심을 더 부리겠습니까? 다만 예천고을의 큰 어른이요 이 시대 마지막 선비의 가심을 서러워할 뿐입니다. 백헌 옹(翁)이시여! 당신께서는 너무나 큰일을 많이 하셨기에 이제 고단한 육신을 쉬셔야 합니다. 공은 나라가 없던 기미년에 중화 양씨의 외동아들로 예천 용궁 땅에 오셨습니다. 어려서부터 도학자 사암 안재극 선생의 문하로 남에게 보이는 공부가 아닌 몸을 닦는 학문에 전념하셨습니다. 일제 혹정과 광복 후의 혼란기에 하나 흔들림 없이 선비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군자는,ꡒ도를 도모하지 밥은 도모하지 않는다.ꡓ(謀道不謀食)는 공자의 말씀을 따르셨지요. 호구(糊口)에 급급하던 집안을 온 고을의 명문으로 일으켜 세운 것은 순전히 공의 힘이었습니다. 아들 딸 9남매를 비롯하여 당신의 자손이 백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누가 감히 흉내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수가 많아서 복록(福祿)이라 하지 않습니다. 위로 원식 남식 창영(源植 南植 昶榮) 세 아들이 훈장을 받은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 많은 자손들이 국내 국외에서, 석 박사로, 교장 교수로, 기업의 중역 간부로 어느 하나 남의 부러움을 받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모두 평생 군자의 길을 걸으신 공의 가풍(家風)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풀이 따라 눕는 것이지요. 어디 자손뿐입니까. 대소 일가는 물론이요 마을이며 향내 누구인들 선생의 감화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없지요.ꡒ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를 간다.ꡓ라는 말은 바로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공맹지도(孔孟之道) 를 업으로 하여, 용궁향교 전교로 사문진작(斯文振作)에 힘쓰셨고, 노봉서원 원장을 비롯하여 대소 유림행사를 원만히 수행하였습니다. 바쁜 속에서 여유로우셨고, 소탈하시면서 산수를 즐기셨지요. 달을 벗삼고 자연을 노래한 한시 4백여 수와 편지 비문 서문 등의 주옥같은 문장 백여 편이 선생이 이승을 다녀가신 자취로 남아있습니다. 회혼을 하시고도 십 수 년을 강건히 계시다가 가시기 전 4년여 병고와 힘겹게 싸우신 것이 한스럽고, 평소의 선풍도골(仙風道骨)은 어디 두고 그토록 애잔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먼 길 가신 것이 못내 가슴 아립니다. 선생이 유명을 달리하시고 잠시 서울 아산병원에 계실 때 천을 넘는 조문객이 당신의 덕을 기렸으며, 고향 선영하에 장례를 치르던 날 원근의 유림, 친지 수백이 마지막 도학자의 황천길을 전송하였습니다. 당신의 정인이요 사돈이신 김명회 박사께서 한마디 작별을 위해 노구(老軀)에 왕복 천리 길을 다녀가셨습니다. 당신의 이승에서의 생애는 너무나 값지고 보람된 삶이었습니다. 공께서는 정말 하늘과 땅에 부끄러움 없이 사바(娑婆)세계를 다녀가셨습니다. 이제 한줌 흙이 되실 선생이시여! 하늘나라에 계실 백헌옹의 혼이시여! 부디 편히 잠드소서. 안용진 세무사(성균관 전학*용궁면 출생)(醴泉新聞 2006년 06월 29일 11:56:12)
양홍대 : 용궁향교 전교 양홍대, 19일 별세...명복을 빕니다 (장병창님 글)| 고 ◐ 용 궁 면 민 회 ◑/ 예천사랑/ 조회 51 | 2006.07.06 14:13/ http://cafe.daum.net/yckun/EQTn/85/ 2006-06-29 오후 4:18:16 80/ 예천의 자랑(1107) : 용궁향교 전교 양홍대, 19일 별세...명복을 빕니다(/ 장병창 ()/ 용궁면 월오리 양홍대(楊鴻大, 89歲, 號 백헌, 本貫은 中和, 源植 南植 昶榮의 父, 思菴 安在極의 弟子, 龍宮鄕校 典校, 魯峰書院 院長), 2006년 6월 19일(음력 5월 24일) 별세하였다. 한시 4백여 수와 편지, 비문, 서문 등의 문장 백여 편이 남아있다. 명복을 빕니다.// 양홍대(한 집안 셋 國民勳章 받아 : 양원식, 남식, 창영 氏 兄弟) [記事] : 용궁향교 전교를 역임한 용궁면 월오리 양홍대(85) 옹의 장남, 차남, 삼남이 모두 국민훈장을 받아 화제이다. 삼남 창영(호서대 교수,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사무총장) 씨가 세계에 한국의 얼을 심고 해외에 거주하는 상공인들의 권익 증진과 한국 경제 발전 및 국위 선양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10월 10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이에 앞서 장남 원식(시조시인·부산 해동고등학교장 역임) 씨가 1999년 8월 교육 발전과 평생 2세 교육에 헌신한 공로로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으며, 차남 남식(성전사 사장, 전 대림산업 전무이사) 씨는 1994년 2월 대림산업 건설본부장 재직시 한국 댐 건설에 참여하여 재난 예방과 수자원 보전 및 국가 기간 산업인 전력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산업포장을 수상하였다. 이들 형제들은, “용궁향교 중수 사업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평생 한문으로 문자 생활을 해오신 아버님과 자애로운 어머님(정수웅·88)의 가르침이 바탕이 돼 형제 3명이 국민훈장을 받는 영예를 안게 됐다”고 말했다.(醴泉新聞 2002-11-01 10:36:47)// 출처 : 예천군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http://cafe.daum.net/yckun/ 예천군민회(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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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청 조동윤 과장, <수락대선유록> 번역 발간...축하합니다.
수락대선유록(350年 만에 햇빛을 본 水落臺仙遊錄 : 한글로 飜譯 發刊-조동윤 刻苦의 努力으로 世上 밖으로 나오다) [記事] : 조동윤 예천군청 산림축산과장이 수락대선회록을 번역 출간했다. 수락대는 예천군 감천면 덕율리와 포2리 경계지점의 석간천 계곡에 있는 승경지로 현 예천충효관 옆에 위치해 있다. 조 과장은 수락대선회록 원본을 2009년 10월 극적으로 입수하여 어려운 작업을 마치고 번역을 완료하고 2011년 3월 초판을 발행했다. 수락대는 지금으로부터 408년 전 조선 선조 임인년(1602년) 봄 서애 유성룡 선생이 제자들과 북쪽으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단산 땅을 유람하면서 귀향길에 감천현 수락대를 둘러보고 그 경지에 감탄한 후 “찬 물방울이 흩어져 떨어지는 것이 맑은 날에 눈이 흩날리는 것 같다”는 비유로 수락대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이 기록을 바탕으로 수많은 서애의 문하생 선비들이 수락대를 찾아 경치를 감상하고 시회를 열고 풍류를 즐겼다. 1661년 9월 서애 선생의 제자인 학사 김응조 선생이 감천현 물계서원과 봉산서당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말년을 보낼 때 목재 홍여하 선생을 앞세워 스물다섯분이 수락대 선유회 시사를 결성하면서 원본이 만들어 졌다. 수락대는 1879년 권대신 등 감천지역 유지들이 수락대 건립을 논의한 후 1915년 건립에 착공 1916년 완공했다. 1967년 수락대 보수에 이어 1976년 7월 폭풍우 유실된 것을 예천군에서 2001년 현 수락대를 신축하고 이 일대가 충효테마공원으로 조성되고 있다. 조동윤 과장은 “선회록을 번역 발간하면서 끝내 아쉬운 점 하나는 선유록 계회도를 찾지 못한 것이었다”고 하며 “선유록 계회도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음을 애석하게 생각 한다”고 말했다. 특히 조 과장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꼼꼼하게 바로잡아주시고 함께해 주신 김규탁 선배님께 감사드린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 책은 총 167쪽으로 선유회 계원 25명의 인물을 자세히 소개하고 수락대기, 창건기, 고유기, 선회록 원본 등을 수록해 놓았다. 한옥 구경과 옛글 읽기가 취미인 조동윤 과장은 감천면 출생으로 예천농고를 졸업하고 현재 예천군청에 근무하고 있다. 불혹에 야학으로 경북전문대와 상주대 행정학과를 졸업했으며 “예천기행”, “일적”, “산에는 꽃이 피네” “예천향토사연구편” 등을 저술했다.(이태현 記者 醴泉뉴스 2011년 04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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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홍대(追悼辭 : ''''하늘로 가신 백헌 楊先生'''' ) [記事] : 병술 오월 스무나흘(2006.6.19) 선생께서는 홀연히 땅으로, 하늘로 가셨습니다. 이제 구십 생애를 매듭하시고 구천으로 가신 공을 굳이 오호통재(嗚呼痛哉)라 하지 않겠습니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 자연의 섭리이거늘 무슨 욕심을 더 부리겠습니까? 다만 예천고을의 큰 어른이요 이 시대 마지막 선비의 가심을 서러워할 뿐입니다. 백헌 옹(翁)이시여! 당신께서는 너무나 큰일을 많이 하셨기에 이제 고단한 육신을 쉬셔야 합니다. 공은 나라가 없던 기미년에 중화 양씨의 외동아들로 예천 용궁 땅에 오셨습니다. 어려서부터 도학자 사암 안재극 선생의 문하로 남에게 보이는 공부가 아닌 몸을 닦는 학문에 전념하셨습니다. 일제 혹정과 광복 후의 혼란기에 하나 흔들림 없이 선비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군자는,ꡒ도를 도모하지 밥은 도모하지 않는다.ꡓ(謀道不謀食)는 공자의 말씀을 따르셨지요. 호구(糊口)에 급급하던 집안을 온 고을의 명문으로 일으켜 세운 것은 순전히 공의 힘이었습니다. 아들 딸 9남매를 비롯하여 당신의 자손이 백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누가 감히 흉내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수가 많아서 복록(福祿)이라 하지 않습니다. 위로 원식 남식 창영(源植 南植 昶榮) 세 아들이 훈장을 받은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 많은 자손들이 국내 국외에서, 석 박사로, 교장 교수로, 기업의 중역 간부로 어느 하나 남의 부러움을 받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모두 평생 군자의 길을 걸으신 공의 가풍(家風)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풀이 따라 눕는 것이지요. 어디 자손뿐입니까. 대소 일가는 물론이요 마을이며 향내 누구인들 선생의 감화를 받지 않은 사람은 없지요.ꡒ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를 간다.ꡓ라는 말은 바로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공맹지도(孔孟之道) 를 업으로 하여, 용궁향교 전교로 사문진작(斯文振作)에 힘쓰셨고, 노봉서원 원장을 비롯하여 대소 유림행사를 원만히 수행하였습니다. 바쁜 속에서 여유로우셨고, 소탈하시면서 산수를 즐기셨지요. 달을 벗삼고 자연을 노래한 한시 4백여 수와 편지 비문 서문 등의 주옥같은 문장 백여 편이 선생이 이승을 다녀가신 자취로 남아있습니다. 회혼을 하시고도 십 수 년을 강건히 계시다가 가시기 전 4년여 병고와 힘겹게 싸우신 것이 한스럽고, 평소의 선풍도골(仙風道骨)은 어디 두고 그토록 애잔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먼 길 가신 것이 못내 가슴 아립니다. 선생이 유명을 달리하시고 잠시 서울 아산병원에 계실 때 천을 넘는 조문객이 당신의 덕을 기렸으며, 고향 선영하에 장례를 치르던 날 원근의 유림, 친지 수백이 마지막 도학자의 황천길을 전송하였습니다. 당신의 정인이요 사돈이신 김명회 박사께서 한마디 작별을 위해 노구(老軀)에 왕복 천리 길을 다녀가셨습니다. 당신의 이승에서의 생애는 너무나 값지고 보람된 삶이었습니다. 공께서는 정말 하늘과 땅에 부끄러움 없이 사바(娑婆)세계를 다녀가셨습니다. 이제 한줌 흙이 되실 선생이시여! 하늘나라에 계실 백헌옹의 혼이시여! 부디 편히 잠드소서. 안용진 세무사(성균관 전학*용궁면 출생)(醴泉新聞 2006년 06월 29일 11:56:12)
양홍대 : 용궁향교 전교 양홍대, 19일 별세...명복을 빕니다 (장병창님 글)| 고 ◐ 용 궁 면 민 회 ◑/ 예천사랑/ 조회 51 | 2006.07.06 14:13/ http://cafe.daum.net/yckun/EQTn/85/ 2006-06-29 오후 4:18:16 80/ 예천의 자랑(1107) : 용궁향교 전교 양홍대, 19일 별세...명복을 빕니다(/ 장병창 ()/ 용궁면 월오리 양홍대(楊鴻大, 89歲, 號 백헌, 本貫은 中和, 源植 南植 昶榮의 父, 思菴 安在極의 弟子, 龍宮鄕校 典校, 魯峰書院 院長), 2006년 6월 19일(음력 5월 24일) 별세하였다. 한시 4백여 수와 편지, 비문, 서문 등의 문장 백여 편이 남아있다. 명복을 빕니다.// 양홍대(한 집안 셋 國民勳章 받아 : 양원식, 남식, 창영 氏 兄弟) [記事] : 용궁향교 전교를 역임한 용궁면 월오리 양홍대(85) 옹의 장남, 차남, 삼남이 모두 국민훈장을 받아 화제이다. 삼남 창영(호서대 교수,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사무총장) 씨가 세계에 한국의 얼을 심고 해외에 거주하는 상공인들의 권익 증진과 한국 경제 발전 및 국위 선양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10월 10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이에 앞서 장남 원식(시조시인·부산 해동고등학교장 역임) 씨가 1999년 8월 교육 발전과 평생 2세 교육에 헌신한 공로로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으며, 차남 남식(성전사 사장, 전 대림산업 전무이사) 씨는 1994년 2월 대림산업 건설본부장 재직시 한국 댐 건설에 참여하여 재난 예방과 수자원 보전 및 국가 기간 산업인 전력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산업포장을 수상하였다. 이들 형제들은, “용궁향교 중수 사업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평생 한문으로 문자 생활을 해오신 아버님과 자애로운 어머님(정수웅·88)의 가르침이 바탕이 돼 형제 3명이 국민훈장을 받는 영예를 안게 됐다”고 말했다.(醴泉新聞 2002-11-01 10:36:47)// 출처 : 예천군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http://cafe.daum.net/yckun/ 예천군민회(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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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청 조동윤 과장, <수락대선유록> 번역 발간...축하합니다.
수락대선유록(350年 만에 햇빛을 본 水落臺仙遊錄 : 한글로 飜譯 發刊-조동윤 刻苦의 努力으로 世上 밖으로 나오다) [記事] : 조동윤 예천군청 산림축산과장이 수락대선회록을 번역 출간했다. 수락대는 예천군 감천면 덕율리와 포2리 경계지점의 석간천 계곡에 있는 승경지로 현 예천충효관 옆에 위치해 있다. 조 과장은 수락대선회록 원본을 2009년 10월 극적으로 입수하여 어려운 작업을 마치고 번역을 완료하고 2011년 3월 초판을 발행했다. 수락대는 지금으로부터 408년 전 조선 선조 임인년(1602년) 봄 서애 유성룡 선생이 제자들과 북쪽으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단산 땅을 유람하면서 귀향길에 감천현 수락대를 둘러보고 그 경지에 감탄한 후 “찬 물방울이 흩어져 떨어지는 것이 맑은 날에 눈이 흩날리는 것 같다”는 비유로 수락대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이 기록을 바탕으로 수많은 서애의 문하생 선비들이 수락대를 찾아 경치를 감상하고 시회를 열고 풍류를 즐겼다. 1661년 9월 서애 선생의 제자인 학사 김응조 선생이 감천현 물계서원과 봉산서당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말년을 보낼 때 목재 홍여하 선생을 앞세워 스물다섯분이 수락대 선유회 시사를 결성하면서 원본이 만들어 졌다. 수락대는 1879년 권대신 등 감천지역 유지들이 수락대 건립을 논의한 후 1915년 건립에 착공 1916년 완공했다. 1967년 수락대 보수에 이어 1976년 7월 폭풍우 유실된 것을 예천군에서 2001년 현 수락대를 신축하고 이 일대가 충효테마공원으로 조성되고 있다. 조동윤 과장은 “선회록을 번역 발간하면서 끝내 아쉬운 점 하나는 선유록 계회도를 찾지 못한 것이었다”고 하며 “선유록 계회도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음을 애석하게 생각 한다”고 말했다. 특히 조 과장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꼼꼼하게 바로잡아주시고 함께해 주신 김규탁 선배님께 감사드린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 책은 총 167쪽으로 선유회 계원 25명의 인물을 자세히 소개하고 수락대기, 창건기, 고유기, 선회록 원본 등을 수록해 놓았다. 한옥 구경과 옛글 읽기가 취미인 조동윤 과장은 감천면 출생으로 예천농고를 졸업하고 현재 예천군청에 근무하고 있다. 불혹에 야학으로 경북전문대와 상주대 행정학과를 졸업했으며 “예천기행”, “일적”, “산에는 꽃이 피네” “예천향토사연구편” 등을 저술했다.(이태현 記者 醴泉뉴스 2011년 04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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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