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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2545:한태섭義兵
예천의 자랑(2545) : 용궁면 송암리 출신 한태섭 의병 참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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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태섭(韓台燮) : 1854(철종 5)-1907(융희 1), 용궁면 송암리 출신, 자는 응필(應弼), 호는 묵랑(墨浪), 본관은 청주, 일명 용국(用國), 용휴(用休), 아들 양리(良履)와 함께 의병 운동에 참여하였다.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 후 의병을 일으켜 일본인들을 소탕하려고 운강 이강년 의진(雲崗李康秊義陣)의 참모장(參謀將)에 임명되어 의병의 교육 훈련에 참여하였다. 역신 안동관찰사 김석중(逆臣安東觀察使金奭中), 순검(巡檢) 이호윤 등을 생포하여 효수(梟首)하고 문경 마고성(聞慶麻姑城), 충북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7월에 해산되었다. 1907년에도 이강년 의진으로 문경, 여주, 갈평(葛坪) 등지에서 전과를 올렸다. 이강년과 유인석(柳麟錫)이 만주로 간 후 이승재(李承宰), 한양리(韓良履) 등과 의병을 모집하여 다시 의거하여 서울로 향하여 진격 중 적성(赤城)에서 밀정(密偵)의 밀고(密告)로 인하여 일본군 함창수비대(咸昌守備隊)의 공격을 받아 의진에서 아들에게 항일의 후계를 유언으로 남기고 순국하였다. 경상 충청 강원의 3도 14읍을 돌며 일본군과 싸웠으며 다대한 공을 세워 독립 유공자로 대통령 표창(1982), 애족장(愛族章, 1990)이 추서되었다(獨立運動史 1283쪽, 醴泉文化 2輯, 한효태, 大韓民國 獨立有功者功勳錄 第1卷 國家保勳處, 1986年 964-965쪽, 雲崗先生文集 1권 5쪽, 淸州韓氏襄節公派 5卷417쪽, 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保勳處 1卷 298쪽, 韓國獨立史 金承學 下卷 296쪽)
. [인터넷] : 1895년 10월 일인들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12월 30일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졌다. 그는 의병을 일으켜 일인들을 소탕하고 나라를 구하기로 결심하고, 1896년 1월 문경에서 의진을 구성한 이강년 의진에 입대하여 참모관(參謀官)에 임명되었다. 동지 수 백 명과 함께 달아나는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호윤(李浩允), 김인담(金仁覃) 등 3인을 체포하여 농암시장(籠巖市場)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이들의 매국행상을 규탄하고 효수하였다. 1월 15일 문경 마고성(麻姑城)에서 적군과 접전하였으며, 2월 이후 유인석(柳麟錫) 연합의진에 편입되어 7월 해산될 때까지 충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운동 때도, 역시 이강년 의진에 소속되어 문경, 여주, 갈평(葛坪) 등지에서 적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추서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ᄋ 그는 장진성과 더불어 이강년 의진의 의거 당시부터 참여했다. 그 집안은 일본군의 박해를 피해 여러 차례 이동하였다. 즉, 용궁 송암→동로소면 산달→용궁 송암→문경군 가은면→산양면 추암→유천면으로 옮겼다. 갈평 전투 때에는 이강년의 식구와 동로소면 산달1리에서 함께 살았다. 의병 활동 전에는 용궁 땅 20리를 남의 땅을 안 밟고 다닐 정도로 부자였다고 한다.
한태섭(韓台燮,韓應弼,韓用休)| 독립유공자 공훈록/ 아카식 2007.06.21. 09:32/ 한태섭 : 1854.12.20~1907.12.20, 경북 예천, 의병, 애족장(90)/ 한태섭의 본은 청주(淸州)이며, 경상북도 예천(醴泉) 출신으로 아들 한양이(韓良履)와 함께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1895년 10월에 일인들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明成皇后弑害) 사건이 일어나고, 12월 30일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졌다. 한태섭은 의병을 일으켜 일인들을 소탕하고 나라를 구하기로 결심하고 1896년 1월 문경(聞慶)에서 의진을 구성한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입대하여 참모관(參謀官)에 임명되었다. 동지 수백 명과 함께 달아나는 안동 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호윤(李浩允)·김인담(金仁覃) 등 3인을 생포하여 농암(籠巖)시장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이들의 매국 행상을 규탄하고 효수하였다. 1월 15일 문경 마고성(麻姑城)에서 적군과 접전하였으며, 2월 이후 유인석(柳麟錫) 연합의진에 편입되어 7월 해산될 때까지 충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운동때도, 역시 이강년 의진에 소속되어 문경, 여주(驪州), 갈평(葛坪) 등지에서 적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운강선생문집 1권 5면, ·청주한씨양절공파보 5권 417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298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96면(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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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태섭(韓台燮) : 1854(철종 5)-1907(융희 1), 용궁면 송암리 출신, 자는 응필(應弼), 호는 묵랑(墨浪), 본관은 청주, 일명 용국(用國), 용휴(用休), 아들 양리(良履)와 함께 의병 운동에 참여하였다.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 후 의병을 일으켜 일본인들을 소탕하려고 운강 이강년 의진(雲崗李康秊義陣)의 참모장(參謀將)에 임명되어 의병의 교육 훈련에 참여하였다. 역신 안동관찰사 김석중(逆臣安東觀察使金奭中), 순검(巡檢) 이호윤 등을 생포하여 효수(梟首)하고 문경 마고성(聞慶麻姑城), 충북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7월에 해산되었다. 1907년에도 이강년 의진으로 문경, 여주, 갈평(葛坪) 등지에서 전과를 올렸다. 이강년과 유인석(柳麟錫)이 만주로 간 후 이승재(李承宰), 한양리(韓良履) 등과 의병을 모집하여 다시 의거하여 서울로 향하여 진격 중 적성(赤城)에서 밀정(密偵)의 밀고(密告)로 인하여 일본군 함창수비대(咸昌守備隊)의 공격을 받아 의진에서 아들에게 항일의 후계를 유언으로 남기고 순국하였다. 경상 충청 강원의 3도 14읍을 돌며 일본군과 싸웠으며 다대한 공을 세워 독립 유공자로 대통령 표창(1982), 애족장(愛族章, 1990)이 추서되었다(獨立運動史 1283쪽, 醴泉文化 2輯, 한효태, 大韓民國 獨立有功者功勳錄 第1卷 國家保勳處, 1986年 964-965쪽, 雲崗先生文集 1권 5쪽, 淸州韓氏襄節公派 5卷417쪽, 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保勳處 1卷 298쪽, 韓國獨立史 金承學 下卷 296쪽)
. [인터넷] : 1895년 10월 일인들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12월 30일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졌다. 그는 의병을 일으켜 일인들을 소탕하고 나라를 구하기로 결심하고, 1896년 1월 문경에서 의진을 구성한 이강년 의진에 입대하여 참모관(參謀官)에 임명되었다. 동지 수 백 명과 함께 달아나는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호윤(李浩允), 김인담(金仁覃) 등 3인을 체포하여 농암시장(籠巖市場)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이들의 매국행상을 규탄하고 효수하였다. 1월 15일 문경 마고성(麻姑城)에서 적군과 접전하였으며, 2월 이후 유인석(柳麟錫) 연합의진에 편입되어 7월 해산될 때까지 충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운동 때도, 역시 이강년 의진에 소속되어 문경, 여주, 갈평(葛坪) 등지에서 적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추서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ᄋ 그는 장진성과 더불어 이강년 의진의 의거 당시부터 참여했다. 그 집안은 일본군의 박해를 피해 여러 차례 이동하였다. 즉, 용궁 송암→동로소면 산달→용궁 송암→문경군 가은면→산양면 추암→유천면으로 옮겼다. 갈평 전투 때에는 이강년의 식구와 동로소면 산달1리에서 함께 살았다. 의병 활동 전에는 용궁 땅 20리를 남의 땅을 안 밟고 다닐 정도로 부자였다고 한다.
한태섭(韓台燮,韓應弼,韓用休)| 독립유공자 공훈록/ 아카식 2007.06.21. 09:32/ 한태섭 : 1854.12.20~1907.12.20, 경북 예천, 의병, 애족장(90)/ 한태섭의 본은 청주(淸州)이며, 경상북도 예천(醴泉) 출신으로 아들 한양이(韓良履)와 함께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1895년 10월에 일인들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明成皇后弑害) 사건이 일어나고, 12월 30일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졌다. 한태섭은 의병을 일으켜 일인들을 소탕하고 나라를 구하기로 결심하고 1896년 1월 문경(聞慶)에서 의진을 구성한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입대하여 참모관(參謀官)에 임명되었다. 동지 수백 명과 함께 달아나는 안동 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호윤(李浩允)·김인담(金仁覃) 등 3인을 생포하여 농암(籠巖)시장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이들의 매국 행상을 규탄하고 효수하였다. 1월 15일 문경 마고성(麻姑城)에서 적군과 접전하였으며, 2월 이후 유인석(柳麟錫) 연합의진에 편입되어 7월 해산될 때까지 충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운동때도, 역시 이강년 의진에 소속되어 문경, 여주(驪州), 갈평(葛坪) 등지에서 적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註·운강선생문집 1권 5면, ·청주한씨양절공파보 5권 417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298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96면(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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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