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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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2622) : 김찬국(2)-김태섭-김태한-김필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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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국 : 원주 상지대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월간 조선5월호)/ 2002.05.11/ ...손을 뗀 후 尙志大는 「民이 주인인 대학」(朴正元 교수의 尙志大학보 기고문-2000년 6월7일자), 「전임 金燦國, 韓完相 총장과 교수 학생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국내에서도 가장 민주적인 대학이요, 경영이 어디보다 투명한 대학.../ http://cafe.daum.net/kookmoon/ 상지대학교국어국문학과(daum 2010)
김찬국 : 뉴욕서 판화전시회 여는 延大 공대교수 김홍규씨/ 2004.05.23/ 그림이 대체적으로 어두운 편이라고 소개했다. 고3이었던 74년에 당시 연세대 신학대 학장이었던 부친 김찬국(金燦國·전 상지대 총장)씨가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돼 10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아픈 기억 때문인 것 같다고 밝혔다.../ http://cafe.daum.net/chungsansu/ 소장미술품 보기(daum 2010)
김찬국 : 장준하 선생 관련 신문기사/ 2003.05.12/ ...) 당수, 신민당 高興門(고흥문)부총재, 金玉吉(김옥길)이대총장, 鄭一亨(정일형)의원, 金東吉(김동길)교수, 金燦國(김찬국)교수 등 1백여명이 빈소를 다녀갔고, 외유중인 김영삼총재등 20여명이 조화를 보내왔다. 故장준하씨 영결식.../ http://cafe.daum.net/baikkiwan/ 장산곶매 백기완(daum 2010)
김찬국 : 내 동창인 연대공대교수의 뉴욕 미술전시회/ 2004.05.06/ 그림이 대체적으로 어두운 편이라고 소개했다. 고3이었던 74년에 당시 연세대 신학대 학장이었던 부친 김찬국(金燦國·전 상지대 총장)씨가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돼 10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아픈 기억 때문인 것 같다고 밝혔다.../ http://blog.daum.net/baw4021/ 가야금사랑방(daum 2010)
김찬국 : 장준하 선생 관련 신문기사/ 2006.02.26/ ...) 당수, 신민당 高興門(고흥문) 부총재, 金玉吉(김옥길) 이대총장, 鄭一亨(정일형) 의원, 金東吉(김동길) 교수, 金燦國(김찬국) 교수 등 1백여 명이 빈소를 다녀갔고, 외유 중인 김영삼 총재 등 20여명이 조화를 보내왔다. .../ http://blog.daum.net/roh0815/ 돌베개(daum 2010)
김찬국 : 장준하 선생님의 실족사 - 대표적인 의문사이며 꼭 읽어보세요./ 2009.05.27/ 梁一東(양일동) 당수, 신민당 高興門(고흥문)부총재, 金玉吉(김옥길)이대총장, 鄭一亨(정일형)의원, 金東吉(김동길)교수, 金燦國(김찬국)교수 등 1백여명이 빈소를 다녀갔고, 외유중인 김영삼총재등 20여명이 조화를 보내왔다. (1975년 8월.../ 미디어다음 아고라 > 자유토론(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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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섭(金泰燮) : 1956- , 예천읍 출신, 중앙약국(中央藥局) 상섭의 동생, 예천초등, 예천중, 홍익대 서양화과, 독일 쾰른미술대 회화과, 동 대학원 졸업, 마이스터 자격 취득, 홍익대 미대 강사이다. 한국미술협회 회원, 오리진회화협회 회원, 독일 Norsrhein-Westfalen주 미술협회 회원이다. 1992년 9월 27일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양화부문에 유화(油畵) <잃어버린 시간>으로 특선(特選)하였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546번지 청하빌딩 1층 강남화랑(江南畵廊)에서 개인전(1993)을 여는 등 개인전 4회(獨逸, 서울), 단체전 및 국제전을 다수 열었다.(醴泉新聞 1992.11.19, 醴泉文學 7輯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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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한 : 재경예천군민회cafe/ 김태한(예천57회.예중21회) 삼성전자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 2년전, 2009년 12월 18일/ 김태한- 예천초등57회 예중21회 삼성전자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하심을 축하드립니다. 삼성전자 임원인사 명단 [조선일보] 2009년 12월 16일(수) 오전 10:36/ 다음은 삼성전자의 16일 임원인사 .../ cafe.daum.net/woruddPcjsrns(dau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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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영(金弼榮) : 1953- , 예천 출신, 예천초등 55회, 예천중 19회, 예천농고 41회 졸업, 파리대학교 중국어 전공, 한국학 석사, 한국문학 박사이다. 그는 지난 10여년 동안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 고려 사람들의 말과 문화 보전에 힘써 왔다. 외무부 산하기관 한국국제협력단의 한국학 전문가 자격으로 카작스탄 국립카작대학교에 한국학과를 개설하였고, 학과장 겸 한국어문학 교수(1994-1999)로 일하면서 중앙아시아 한국학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하였다. 중앙아시아한국학회 초대회장(2000-2001)을 지냈다. 파리 국립동방어문대학교 한국문학 교수, 강남대(江南大이) 교수이다. 2003년 제5회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가작에 입상하였다. 입상 작품은 ‘지고개의 전설’ 외 2편이다.(醴泉新聞 2003.8.14)
김필영(김필영 敎授 在外同胞文學賞 入賞) [記事] : 파리 국립동방어문대학교(Institut National des Langues et Civilisations Orientales) 한국문학 교수 김필영(50․예천초등 55회, 예천중 19회, 예천농고 41회) 씨가 외무부 산하 기관 재외동포재단(Oversea Koreans Foundation)이 개최한 제5회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가작에 입상하였다. 입상 작품은 `지고개 전설' 외 2편이다. 김 교수는 파리대학교에서 중국어를 전공한 뒤 한국학으로 석사,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국립동방어문대학교에서 한국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 교수는 지난 10여 년 동안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 고려 사람들의 말과 문화 보전에 힘써 왔다. 외무부 산하 기관 한국국제협력단의 한국학 전문가(1994/1997) 자격으로 카작스탄 국립카작대학교(Kazakh National University)에 한국학과를 개설하였으며 학과장 겸 한국어문학 교수(1994/1999)로 일하면서 중앙아시아 한국학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하였다. 중앙아시아한국학회(Central Asian Association for Korean Studies) 초대 회장(2000/2001)을 지냈다.(醴泉新聞 2003-08-15 10:26:15)
김필영(國立카작大學校 名譽博士 學位 받아) [記事] : 설립 70주년을 맞는 국립카작대학교는 2004년 5월 18일 본 대학 총장실에서 김필영 교수(프랑스 한인사회연구소 대표․파리 국립동방어문대학교 한국문학 교수․예천읍 출생)에게 중앙아시아 한국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김필영 교수는 1994년 국립카작대학교에 한국학과를 개설하였으며 첫 졸업생을 배출한 1999년까지 한국학과의 학과장 겸 한국어문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중앙아시아 한국학 발전에 기여해 왔다. 이 번에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중앙아시아에서 여러 차례 국제 한국학 학술토론회를 개최하였으며 한국학과 학생들을 위해 러시아어로 「한국어 구문 요소」와 「현대 한국어 문법」을 집필하기도 했다. 「현대 한국어 문법」은 음운론, 형태론, 통사론, 의미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레닌그라드대학교 홀로도비치 교수가 집필하여 1954년에 출판한 「한국어문법개론」 이후 러시아어로 출판된 최초의 체계적인 한국어 문법 저서이다.(醴泉新聞 2004-06-12 10:11:21)
김필영(高麗人 文學作品 體系的 整理 分析한 力作 '소비에트 中央아시아 高麗人 文學史' 펴내, 프랑스 파리 國立東方語文大學 김필영 敎授) [記事] : 프랑스 파리 국립동방어문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는 김필영(51․예천초등 55회, 예천중 19회, 예천농고 41회) 교수가 최근「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사」(강남대출판부 간)를 펴냈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이후 고려인들이 일궈낸 문학 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분석한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책의 분량이 무려 1,060쪽에 이른다. 김 교수는,ꡒ자료를 수집하는 데만 11~12년, 정리하고 평가하는 데 다시 2~3년이 걸렸다ꡓ며, ꡒ해당 시기에 발표된 작품은 모두 포함시켰으며, 소설과 희곡 등의 경우에는 내용을 요약할 수밖에 없었지만, 작품 총 목록을 책 말미에 첨부했기 때문에 좀 더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한 발판은 마련됐다ꡓ고 밝혔다. 그는 지난 1978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과 국립동방어문대학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다가 전공을 바꾼 뒤 파리대학에서 한국학 석사,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국립동방어문대학에서 `정지용의 시적 미학'이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김 교수는,ꡒ우리 중세 언어의 음운과 문법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한반도에서와 같은 신소설이나 신체시 등의 발전 과정을 거치지 않고 러시아 문학과 접촉한 점 등이 고려인 문학의 특성ꡓ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ꡒ70대 이상의 노인들을 빼고는 한글과 한국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하는 고려인 사회의 특성상 지금 고려인 문학은 사실상 고사한 상태라고 진단하고, 그렇더라도 김 아나톨리나 박 미하일, 리 스타니슬라브처럼 러시아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 고려인 작가들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울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ꡓ고 강조했다. 그는 외무부 산하 기관 한국국제협력단의 한국학 전문가(1994/1997) 자격으로 카자흐스탄 국립카자흐스탄대학교(Kazakh National University)에 한국학과를 개설하였으며, 학과장 겸 한국어문학 교수(1994/1999)로 일하면서 중앙아시아 한국학 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하였다. 중앙아시아한국학회(Central Asian Association for Korean Studies) 초대 회장(2000/2001)도 지냈다. 한편 김 교수는 2003년 외무부 산하 기관 재외동포재단이 개최한 제5회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에 `지고개 전설' 외 2편으로 가작에 입상하기도 했으며, 2005년 초 수도권의 한 대학에 카자흐스탄학과가 개설되면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이다.(醴泉新聞 2004-09-10 15:48:25)
김필영(<文化招待席> 韓國學者 金弼榮 : 遊牧民 將軍의 氣象과 그 속에 숨은 詩人 氣質) [記事] : 한국학자 김필영(金弼榮)은 웬만해선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본거지는 물론 집이 있는 파리이지만 포도주 농장을 운영하는 소뮈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한국학자니까 당연히 한국(그 것도 남한과 북한을 아울러서), 그 밖에도 가까운 친척들이 살고 있는 미국, 한인 이주 100주년을 맞는 멕시코 등등을 연중 수도 없이 돌아다닌다. 그의 스승 조동일(예천 출생) 박사의 말처럼 역마살이 끼어도 단단히 낀 모양이다. 씩씩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당당한 체구, 그리고 이따금 발휘하는 의도된 듯한 장난기와 약간의 과장은 조용히 책 속에 파묻혀 사는 학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렇듯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도 그는 2004년 9월 무려 1,060여 쪽에 이르는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사'(강남대출판부)를 냈다. 학문이란 정신성만이 아니라 끈기와 체력으로 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다. 2005년 봄에는 포도주 생산ㆍ경영자답게 양조학에 관한 저서도 출간할 계획이다. 그는 카자흐스탄의 아파트촌 건설에도 관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돈벌이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명한다. "한국학을 보급하고 한국 전문가를 키우려면 반드시 돈이 필요합니다. 벌 수 있다면 당연히 벌어야죠." 그는 학자일 뿐 아니라 각지에 한국학자를 키우는 후견인이자 양성자이기도 하다. 당연히 자금이 필요하다. 10여년 전에 시작한 소뮈르(파리에서 서남방 300km 앙제 부근) 농장은 면적이 약 10ha로 적포도주와 샴페인성 포도주, 단맛이 나는 후식용 포도주 등 3종을 생산하는데 사업이 "제법 된다"고 했다. 그 전에는 파리 15구에 중형 호텔을 직접 지어 경영한 적도 있을 만큼 그는 사업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실은 그냥 사업가가 아니라 `좀더 포괄적 의미에서 행동가'임을 그의 행적은 보여주고 있다. ◇대학도 포기하고 외국으로 경북 예천에서 여덟 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김필영(51)은 고교 시절에 영어판 `자본론'을 몇 차례나 읽었을 정도로 영어도 잘 했고 의식도 (지나치게?) 깨어 있었다. 진보 서적을 탐독하던 그에게 반체제적 사고 방식이 깃든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고, 그런 성향 때문에 대학입시에 합격해놓고도 결국은 진학을 포기했다. 앞에 나서는 운동권은 아니지만 적어도 기질로는 반정부적이었다. 당시의 반체제 세력들과 친해진 데에도 그런 배경이 있었다. 그는 형님이 있는 미국으로 갔다가 1978년 프랑스로 건너와 파리대학과 동방어문대학에서 중국어를 공부했다. 할아버지가 동학혁명군의 일원이었고, 1920년대부터 아버지와 형님들이 외국 체험을 했던 집안 내력으로 보아 그가 외국행을 택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파리에서 만난 이옥(李玉. 1928-2001) 교수의 충고가 한국학을 그의 평생의 업으로 만들었다. 파리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며 한국사 책을 내기도 했던 이옥 교수의 권유에 따라 김필영은 파리 제7대학에서 한국학 석ㆍ박사 과정을 마친 뒤 동방어문대학에서 '정지용의 시적 미학'이라는 논문으로 프랑스내 최초의 한국학 박사가 됐다. 이후 1992년 파리에서 국제비교한국학회를 설립했고, 2000년에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중앙아시아한국학회를 설립, 초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중앙아시아 한국학의 초석을 다졌다. 그는 1980년대 말부터 유럽의 한국학자들과 만나면서 중앙아시아 한국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91년부터 중앙아시아를 드나들기 시작해 93년 우즈베키스탄 국립 타슈켄트 동방학대학교에 한국학대학을 설립했고, 94년에는 국립 카작(카자흐스탄)대학에 한국학과를 신설했다. 카작대학교 한국학과의 학과장 겸 한국어문학 교수로 임명된 1994년 9월부터 한국학과 첫 졸업생이 배출되던 99년 6월까지 줄곧 카자흐스탄에 있었다. 이후 파리 동방어문대학 한국학과 교수(한국문학)로 발탁돼 파리로 돌아왔지만 2004년 9월에 그만두었다. 다시금 카작대학의 교수가 돼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손꼽아보면 모두 15년이란 세월을 중앙아시아에서 살았거나 오가며 보냈다. ◇크즐오르다 1937년 스탈린 정권의 소수민족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저멀리 원동(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살다 쫓겨온 고려인들이 처음 정착한 곳이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지역이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 이 중 카자흐스탄의 첫 수도였던 크즐오르다(이후 카자흐스탄의 수도는 알마티를 거쳐 97년말부터는 아스타나로 옮겨졌다)는 유달리 우리 민족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크즐오르다는 한 마디로 고려인들의 문화ㆍ교육 중심지였다. 고려인들이 힘을 모아 원동고려사범대학을 옮겨다 문을 열고, 고려극장을 지은 곳이 바로 크즐오르다였다. 한반도 이외의 지역에서 최초, 유일의 한글신문이었던 `레닌기치'가 1938년 5월 재창간된 것도 그 곳에서였다(이 신문은 당초 1923년 `선봉'이란 이름으로 창간됐고 그 후신격인 `레닌기치'가 1938년에 창간됐다가 1990년 폐간됐으며, 1991년에는 그 후신인 '고려일보'가 탄생해 현재까지 간행되고 있다). 원동고려사범대는 1938년 9월 러시아어 학교인 크즐오르다 사범대학으로 개편돼 조선어로 교육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가 소비에트 체체 붕괴 이후인 1991년 한국어과가 생겨났다. 그러나 알마티(알마아타)에서 1,200여 km나 떨어진 그 곳에 교수로 가려는 사람이 없어 자칫 폐과될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나선 것이 또다시 김필영. 경기대학교의 지원을 받아 99년부터 2001년까지 그 곳에서 교수로 일했다. 1999년 카자흐스탄대학 출판부에서 간행된 그의 `현대 한국어문법'(러시아어판)은 지금도 계속해서 구소련권 전체에서 한국어 문법교과서로 쓰이고 있다. 해마다 경기문화재단에서 구입, 배포해주는 데 대해 그는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고송무와의 만남 그토록 오랫동안 중앙아시아에서 뒹굴었다면 고송무(高松茂. 1947-1993)를 모를 리 없겠다 싶었다. 고송무는 그 분야의 개척자였다. 중앙아시아에 가면 현지어를 너무 잘해 택시운전사가 요금을 사양할 만큼 중앙아시아와 고려인을 사랑한 천재학자였지만 알마티에서 느닷없는 교통사고를 당해 믿을 수 없을만큼 허망하게 생을 마감한 아까운 인물이다. 충남 금산 출신인 그는 서울 중앙고를 졸업한 뒤 국내 대학엘 가지 않고 터키 참전 용사와의 인연으로 터키를 거쳐 헝가리에 갔다가(물론 미수교 시절에) 핀란드에 정착했다. 헬싱키대학에서 우랄어를 전공했으며 중앙아시아 한인들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인 연구 분야에서는 선배가 없는, 글자 그대로 선구자였다. "고송무 박사요?" 순간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김필영이 그를 만난 것은 1990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유럽한국학회에서였다. "중앙아시아에서 한국학, 같이 한 번 해봅시다. 몸이 가벼운 내가 갈 테니(고송무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김형은 돈을 대!" 그렇게 해서 1992년 알마티에서 구소련지역 최초의 한국학 학술토론회가 열렸다. 한국학자 80여 명이 참석한 대규모 학술회의였다. 1992년 파리에서 국제비교한국학회를 창설한 것도 그와 함께였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나 기획자 마인드 등 여러 모로 죽이 맞았던 두 사람은 이렇게 두고두고 같은 길을 가자고 했다. 그런 터에 고송무의 객사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떡합니까? 내가 가는 수밖에요. 파리의 가족에게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한국학과를 설치하고 1년 뒤에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결국 6년이나 있다가 돌아왔어요. 그리곤 또다시 크즐오르다까지 가있다 왔으니... 물론 이혼당할 뻔했지요." 스물다섯에 만나 서른에 결혼한 동갑내기 아내 조엘 여사와 두 아들은 어쩔 도리 없이 가장의 장기 부재를 받아들였다. "고 박사가 그렇게 가지 않았더라면 분명 나는 다른 일을 했을 겁니다. 지금도 매년 한 차례 금산에 있는 그의 묘를 찾습니다. 고 박사의 부친께서도, 의사이신데, 대단한 지식인이시죠. 사람 목숨, 참 터무니없어요." 말이 난 김에 그는 프랑스인 한국학자 몇 사람의 근황도 전했다. 한국민속학자인 알렉상드르 기모즈 박사(화가 방혜자 여사의 부군)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이고, 고 이옥 교수에게서 한국어를 배운 첫 프랑스인 제자로 한국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기도 했던 앙드레 파브르(72) 씨는 고향인 남프랑스 페르피냥에서 암과 투병 중이다. 또 서울 가톨릭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한국학을 하게 된 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 한국학연구부장 다니엘 부셰(76. 김준엽 고려대 전 총장의 동서) 씨는 몇 해 전 조동일 교수와 공저로 '한국문학사'를 출판하기도 했다. 부셰 씨는 가랑시에르에 18세기 고옥(古屋)을 사들여 별장으로 개조하면서 한국 나무들을 심어놨다고 했다. 모두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탓에 한국, 한국인과 애환을 함께했던 이들이다. ◇카자흐스탄을 주목하세요. 그는 카자흐스탄 대학에서 가르치는 한편, 2005년 초로 예정된 국내 모 대학의 카자흐스탄학과 개설을 위해 한국으로 갈 예정이다. "(학과 개설이) 거의 확정적입니다. 사실 늦은 감이 있어요. 카자흐스탄에 대해 막연히 중앙아시아 국가, 고려인이 비교적 많이 사는 나라 정도로만 알고들 있지만 그 성장 잠재력, 특히 우리와의 관계를 보면 반드시 주목해야 할 나라입니다." 카자흐스탄은 면적이 272㎢로 한반도의 12배에 이르고 원유 추정 매장량이 966억 배럴로 세계 7위, 아연. 스텐 매장량은 세계 1위일 정도로 자원 부국이며 최근에는 연평균 10%대의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고려인들에 대한 평가가 좋고, 고려인들이 장관급 요직을 여럿 차지하고 있다. 고려일보는 물론 한국말로만 공연하는 70년 전통의 고려극장도 버티고 있다. "경제 전문가는 아니지만, 거의 전분야에서 진출할 가치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안오면 안오는 기업만 손해에요." 그는 국내 대학 학과 개설 말고도 계속 바쁘다. 당장 2005년 1월 말에는 파리한인사회연구소장 자격으로 멕시코 국립대학과 함께 `멕시코의 한국 사회와 한국학' 세미나를 개최한다. 멕시코 한인 이주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열리는 이 번 행사는 이 지역에서는 드물게 열리는 한국학 관련 모임으로 한국과 중남미의 전문가들이 참석한다. 이어 2005년 6월에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중앙아시아 한국학회도 치러야 한다. 짬짬이 한국의 친구들을 찾아 술도 마셔야 하고. ◇한국학에 투자해야 한국이 강해집니다 "왜 한국학을 합니까?" "문화비교론을 공부하다보니 한국이 세계 문화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겠더군요. 그 위상을 높이려면 내 자신 전문가가 돼야겠고 다른 전문가들도 많이 배출해야 한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어요. 그런 것들이 지금 내가 하는 여러 가지 일의 바탕 생각이 된 거죠. 외국어도 잘 해야 해요. 한국학한다고 한국 것만 알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계 문화를 어느 정도 알려면 적어도 6개 국어(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러시아어 아랍어)는 해야 해요. 저는 9개국어를 합니다. 우리 국학자들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학문의 내용보다는 외국어 실력 부족 탓입니다. 제 은사이신 조동일 박사님께서 여러 언어를 하시는데, 아마도 국학 분야에서는 거의 유일한 경우가 아니신가 합니다." (조 박사에 대해 그는 "뒤만 따라다녀도 논문이 줄줄 흐른다"는 말로 존경을 표했다. 발상이 신선해서 결코 같은 이야기 두 번 하는 법이 없고 철저한 자기관리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며 거듭거듭 존경을 표시했다) "의학ㆍ공학ㆍ자연과학을 제외한, 한국과 한국인에 관한 모든 학문이 한국학입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이나 한국국제교류재단의 한국학 지원 수준은 훌륭한 편이라고 봅니다. 문학분야에서 대산문화재단의 후원도 요긴하게 활용되고 있구요. 무조건 키워야 합니다. 한국을 아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한국의 국력도 커지니까요." 이제, 중앙아시아 대초원을 달리는 유목민 대장같은 그의 당당함 속에 깃든 일말의 시심(詩心)을 들춰보는 것으로 인터뷰를 끝내자(실제로 그는 고향인 예천 지고개(酒峴)를 소재로 한 시 `지고개 전설' 등 세 편으로 2003년 재외동포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기도 하다). 아마도 러시아가 소비에트 체제 붕괴 이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던 시기에 썼음직한, 혹은 그런 시기를 떠올리면서 썼음직한 `겨울 바이칼 호수'가 그의 이렇듯 또다른 내면을 훔쳐보기에 적절하겠다.
애써/ 애비가 뚫어 놓은/ 얼음 구멍 속에는/ 물풀 사이로/ 물고기를 나열한/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바이칼 호수가/ 걸려 있다// 소년은/ 예전부터 내려 오는/ 부리야트 민족의/ 전설을 꿰어/ 물풀을 헤치고/ 언 손을 비비며/ 낚싯줄을/ 내린다// 뭍으로/ 끌려 나온/ 바이칼 호수는/ 영하 45도의 하중에/ 역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출렁이는 물고기로/ 얼어 버린다// 소년이 둘러 멘/ 자루 속에는/ 망해 버린/ 소련의 현실에/ 아랑곳 없이/ 장작 같은 오물들이/ 속절없이/ 퍼덕인다// 앞날이 걱정스러운/ 애비의 한숨에/ 소년이 남기고 가는/ 발자국 위로/ 우울하게/ 떨어지는/ 빛 바랜/ 소련의 비늘들/ (시에 나오는 `오물'은 바이칼 호수에서 잡히는 물고기다. 보드카를 마시면서 안주 삼아 먹으면 맛이 기가 막힌.--기자 주)(이종호 記者 聯合뉴스 2004.12.23 (목)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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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